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이란 봉쇄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 임기 3년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 미국방부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 친척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 선사
    2026-04-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690
  • [글로벌 인사이트] 시리아 피흘린 5년… 25만명 사망·1130만명 유랑 생활

    [글로벌 인사이트] 시리아 피흘린 5년… 25만명 사망·1130만명 유랑 생활

    2011년 3월 15일 시리아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며 시작된 시리아 내전이 발생 5년을 맞았다. 초반 반독재 투쟁의 성격을 띠었던 거리 시위에 이슬람 종파 간 갈등, 극단주의 테러리스트 및 강대국의 개입 등이 얽히면서 내전으로 비화됐다. 내전을 피해 유럽으로 이주한 난민들은 유럽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다. 국제사회의 중재에도 시리아 평화회담은 진척을 보이지 않아 내전의 끝은 아득히 멀어 보인다. 최근 시리아 분할론이 부상하고 있지만 중동 국가들은 이에 찬성하지 않고 있다. 중동의 반정부 시위 물결인 ‘아랍의 봄’ 영향으로 시리아에서는 남부 도시인 데라에서 청년 15명이 “국민은 정권을 무너뜨리길 원한다”라는 구호를 벽에 낙서했다. 시리아 당국이 이들을 체포해 고문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2011년 3월 15일 수도 다마스쿠스, 데라 등 주요 도시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정권을 비판하는 구호를 외쳤다. 3월 18일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에 발포해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반정부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외신들에 따르면 시리아 시민들이 분노한 배경에는 독재 정권의 인권 탄압과 부패, 종파와 민족에 따른 차별, 그리고 개혁 실패로 인한 경제 위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2000년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로부터 대통령직을 세습한 알아사드는 영국 유학을 다녀온 의사 출신으로 아버지보다 온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치 활동을 부분적으로 자유화하고 시장경제로의 개혁과 경제 개방을 추진했다. 하지만 기득권층의 반발로 정치 개혁은 무산됐으며,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실업률이 높아지는 등 그의 경제 개혁은 소득 불평등만 확대시켰다. 시리아 국민의 74%를 차지하지만 시아파 주도의 정권에서 배제됐던 수니파의 오랜 불만은 경제 악화로 더욱 고조됐다. 민주적 개혁, 정치범 석방, 부패 척결 등을 정권에 요구하던 시위대는 4월에 접어들며 알아사드 정권 축출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알아사드 정권도 시위 진압을 위해 기갑부대를 동원하면서 5월 말 민간인 사상자는 1000여명에 이르렀다고 BBC가 전했다. 시위대에 대한 정권의 무력 행사가 거세지면서 정부군에 대항해 무기를 든 시민군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정권 지지 기반인 군대에서도 이탈자가 발생했다. 7~8월에 이르러 반정부 무장단체인 자유시리아군과 국내외 반정부 인사들이 주도한 시리아국가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반정부 세력이 조직화되면서 내전이 본격화됐다. 2012년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수니파 국가와 미국 등 서방 국가가 시리아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면서 반정부군은 정부군과 무력으로 맞설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하게 됐다. 알아사드 정권이 반정부 세력과 민간인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시리아에 대한 국제적 제재를 실시하지 못하자 이들 국가가 개별적으로 반정부 세력 지원에 나선 것이다. 걸프 연안 국가들은 반정부 세력의 무기 구입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터키는 자유시리아군을 지지하며 군사작전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미국도 2012년 7월 자유시리아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민간단체로 승인했다. 반면 시아파 맹주인 이란과 시리아의 우방인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군에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2013년에는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가 시리아 내전에 참전해 시리아 정부군과 함께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이에 시리아 내전은 수니파와 시아파 간 종파 갈등이자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2013년 시리아 영토의 60%가 반정부 세력의 손에 떨어지자 정부군은 이란, 헤즈볼라, 그리고 시아파 민병대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이때 반정부군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의 테러와 과도정부 역할을 했던 시리아국가위원회의 내부 갈등으로 정부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2014년에는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변수가 시리아 내전에 등장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라크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IS는 2014년 6월 칼리프 국가를 선언하고 8월 시리아의 락까를 점령해 사실상의 수도로 삼았다. IS가 전 세계를 상대로 잔혹한 테러를 저지르고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넓히자 미국은 2014년 8월 알아사드 정권 대신 IS 격퇴로 전략을 수정하고 IS 근거지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다. 러시아도 2015년 9월부터 대IS 공습에 나섰으나, 알아사드 정권을 돕기 위해 IS가 아닌 반정부 세력을 공격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미국 등 서방이 IS 격퇴에 힘을 쏟는 사이 알아사드 정권은 올해 초부터 반정부 세력에 대한 공세 수위를 높여 반정부 세력의 핵심 근거지인 알레포까지 압박해 들어갔다. 시리아 내전 5년 동안 사망자 수는 25만명을 넘어섰다고 BBC가 전했다. 유엔 난민기구에 따르면 내전 발발 전 2300만명에 이르던 시리아 인구 중 절반가량이 거주지를 잃고 난민으로 전락했다. 이 중 650만명은 국내에서 유랑 생활을 하고 있으며, 480만명은 유럽 등 국외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구의 70%가 식수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으며, 3분의1가량이 생존에 필요한 식품조차 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시리아를 떠난 480만명의 난민 가운데 지난해 100만명가량이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유럽 또한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다. 시리아 난민의 급증으로 반이민 정서가 유럽 각지에 팽배해지면서 극우 세력이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고 있으며, 각국이 난민 유입 저지를 위해 국경을 봉쇄하면서 유럽 통합의 근간이었던 각국 간 자유로운 이동 보장이 흔들리고 있다. 유엔이 주도하는 시리아 평화회담이 14일(현지시간) 열렸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평화회담 개최를 위해 지난달 미국과 러시아는 시리아 내 임시 휴전에 합의했으나,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은 상대방이 공격 행위를 해 합의를 깼다고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동정치를 전공한 서정민 한국외대 교수는 “휴전 합의로 시리아 내전의 강도는 낮아질 것으로 보이나, 내전 상황은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 교수는 “IS와 알카에다의 시리아 지부 격인 알누스라 전선이 평화회담에서 배제돼 회담의 실효성이 낮고, 회담 당사자 간 이해관계와 목표가 매우 달라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현재 서방 등 미국과 수니파 온건 반정부 세력은 알아사드 정권의 교체를 목표로 하고 있으나, 러시아와 이란·시리아 정부는 정권 교체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고착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시아파 정부, 수니파 반군, 쿠르드족이 시리아를 삼분하는 플랜B 계획이 미국 정부와 서방 전문가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시리아 평화회담을 주도하는 스테판 데 미스투라 유엔 시리아 특사는 13일 “평화회담에서 정치적 해결안을 성공적으로 도출하는 것 외에 실제 가능한 플랜 B는 없다”고 못박았다. 서 교수는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가 임의로 설정한 국경을 따라 다양한 종파와 민족을 불안정하게 아우르고 있는 중동 국가들이 시리아의 3분할론을 받아들일 리 없다”면서 “시리아가 내전으로 분할된다면 이웃 중동 국가들도 국내 여러 종파와 민족의 독립 또는 자치 요구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정부 독자 대북제재] 北주민 “중·러마저… 이번엔 다를 것” 불안감

    [정부 독자 대북제재] 北주민 “중·러마저… 이번엔 다를 것” 불안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에 대한 두려움이 북한 내부에서 확산되면서 불안감을 표시하는 주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8일 대북전문 매체 데일리NK는 평안남도 소식통을 인용해 “유엔 대조선(대북) 제재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는 소식이 손전화(휴대전화)를 통해 삽시간에 퍼졌다”고 전했다. 북한에서는 휴대전화 가입자만 300만명에 이르는 등 주민들의 주요 통신 수단이 되고 있다. 이 소식통은 “주민들은 예전 유엔 제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면서 몹시 불안해하고 있다”며 “조(북)·중 친선관문인 신의주에서 광물 수출이 막혔다는 소식과 나진과 회령을 비롯한 모든 국경세관이 봉쇄될 것이란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했다”고 내부 소식을 전했다. 그는 특히 “이웃으로 믿어 왔던 중국과 러시아까지 이번 제재에 동참했다는 점과 세부적인 제재 항목까지 전해지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소식통도 “주민과 군인들 속에서 ‘‘고난의 행군’ 때는 중국의 도움으로 견뎌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우려도 나온다”고 주장했다. 자유아시아방송(RFA)도 중국 단둥 세관 등을 통해 북한으로 넘어가던 물자 트럭이 크게 줄면서 북한 내부는 ‘물자 부족 현상’을 겪게 됐고, 장마당 상인들은 이에 따라 식량과 생필품 등을 사재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북한 신의주 장마당에서 지난해 말 1㎏당 3800원에 거래되던 쌀이 이달 들어선 5000원까지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사설] 北 핵포기 않고는 대화 없다고 밝힌 박 대통령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 채택을 목전에 두고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 정권에 생존 차원의 핵 개발 포기를 촉구했다. 박 대통령은 어제 97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핵 개발에만 집중하는 것이 북한 정권을 유지시킬 수 없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며 국제사회의 고강도 제재와 압박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응해 오늘 채택될 예정인 유엔 안보리 결의에 대해 “가장 강력하고 실효적”이라고 평가하면서 북핵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단호한 메시지를 아울러 전했다. 유엔 안보리 제재로 압박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변화가 있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박 대통령은 국제 공조를 강조하면서 주변국의 적극적인 동참을 언급했다. 중국과 러시아 등에 우회적으로 협조 요청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원칙적 수준이지만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처음으로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핵 문제에 대한 북한의 선택을 강조하면서 “대화의 문을 닫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태도 변화가 있을 경우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 제재는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지만, 북한이 선(先) 비핵화 의지를 밝힐 경우 6자회담 재개 등의 다양한 대화 채널을 가동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존 켈리 미국 국무부 장관도 밝혔듯이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목적에는 북한을 비핵화를 위한 대화의 장으로 이끄는 것도 포함돼 있다. 국제사회의 북핵 개발을 저지하려는 의지를 희석시키는 모호한 평화협정 논의를 차단하고 북한의 확실한 태도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위안부 문제도 중요한 화두였다. 지난해 말 전격적으로 타결된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이행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성실한 합의 이행을 통해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합의의 취지와 정신을 온전히 실천으로 옮겨서 미래 세대에 대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이른바 ‘불가역적’ 합의의 성립은 일본의 향후 실천에 좌우된다는 점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아베 정권이 위안부 합의 이후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해 우리 국민들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는 작금의 사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녹아 있다. 유례없이 강력한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이 오늘 채택될 예정이다. 북한의 주요 자금원을 차단하기 위해 육상과 해상은 물론 하늘까지 봉쇄하는 수준이다. 안보리 제재와 별도로 한국과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의 자체 제재도 조만간 발효된다. 북한의 후원국 격인 중국마저 강력한 대북 제재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북한 김정은 정권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 북한이 핵·경제 병진이란 망상에 집착하는 한 한반도 평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핵을 껴안고 패망의 길로 갈 것인가, 핵을 포기하고 공존공영의 길로 갈 것인가 선택은 북한에 달렸다.
  • “외화·물자 동시 차단 무차별적 조치” 항공유 막으면 고려항공 운항 어려워

    광물거래 제한 조치 북한 경제 직격탄… 중·장기적 체제 이완 가속화 전망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6일 유엔본부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북한 수출입 화물선에 대한 검색을 의무화하고 항공유 공급과 광물 거래 등을 금지하는 내용의 대북 제재 결의안 초안을 회람했다. 특히 화물선에 대한 검색 의무화와 광물거래를 제한하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결의안이 이대로 시행된다면 북한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번 제재는 북한으로의 외화와 물자 유입을 동시에 막는 무차별적인 조치”라며 “북한 수출입 화물에 대한 검색 의무화는 사실상 북한의 바닷길을 봉쇄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북한은 항공유를 거의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항공유 공급 금지는 실제로 바닷길에 이어 하늘길을 막는 효과도 된다.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항공유를 공급받지 못하면 북한 유일의 항공사인 고려항공의 운항이 어려워진다”며 “공군 훈련도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당장은 수입해 저장해 둔 원유를 가공해 항공유로 충당할 수 있겠으나 그것을 다 소진하고 나면 민·군항기 운행 중단이라는 큰 난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광물 거래 제한 조치도 북한 경제에 치명타를 날릴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지난해 지하자원 수출액이 13억 200만 달러로 전체 대중 수출액의 50%를 넘고 있다. 북한자원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북한 지하자원의 대중국 수출이 중단되면 북한의 경제성장률이 4.3%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장기적으로는 경제 붕괴로 주민들이 시장을 통한 의식주 해결에 나서면서 계획경제가 무너지고 ‘시장화’가 봇물처럼 일어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것은 당국의 사회 장악력 저하, 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충성도 저하 등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체제 이완을 가속화시킬 것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재 북한 전역에는 380여개의 장마당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이번 대북 제재안이 시행되더라도 중국과 러시아가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북한이 우회적으로 제재를 피해 나갈 수단을 찾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英 이어 덴마크·체코도 “EU 탈퇴”… ‘하나의 유럽’ 깨지나

    英 이어 덴마크·체코도 “EU 탈퇴”… ‘하나의 유럽’ 깨지나

    “난민 막자” 유럽 각국 국경 봉쇄 잇따라 통합근간 ‘EU 내 자유통행’ 사실상 붕괴 ‘브렉시트’ 성사 땐 도미노 탈퇴 우려 “유럽연합(EU)이란 초국가는 현대사에 있어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다. 눈물을 흘리며 결국 파국을 맞을 것이다.”(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정치·경제 공동체의 표본으로 꼽히던 EU가 분열의 길목에 들어서면서 대처 전 총리의 ‘예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서로 다른 언어와 역사를 지닌 유럽을 정치인들이 나서 무리하게 통합하면 결국 와해될 것이란 경고였다. 예언은 이제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영국의 EU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가운데 덴마크와 핀란드, 체코, 폴란드 등이 줄줄이 탈퇴 목소리를 내고 있다. 1993년 출범한 EU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는 중동에서 불어닥친 난민 위기와 테러리즘이 꼽힌다. 자유로운 역내 통행을 보장한 솅겐조약은 난민 범람을 막으려는 각국의 국경 봉쇄로 타격을 입었다. 아울러 사상 최고의 실업률 등 경기 침체에 시달리는 EU 경제는 저유가·신흥국경제위기와 맞물려 휘청거리고 있다. ●높은 EU 분담금·獨과의 경쟁심리도 부담 현재 EU 탈퇴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은 ‘EU 안의 섬’을 자처하는 영국이다. 오는 6월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브렉시트가 성사되면, ‘덴시트’(덴마크의 EU 탈퇴)·‘첵시트’(체코의 EU 탈퇴) 등이 들불처럼 번질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기관인 유고브에 따르면 영국민의 브렉시트 지지·반대 응답은 37~38%로 오차 범위 내에서 비등하다. 일간 가디언은 “브렉시트는 경제 문제가 아닌 정치 문제”라고 규정했다. 자체 화폐인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고 런던이 금융 수도의 지위를 위협받는데도 불구하고 유럽 대륙과는 정체성이 다르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렸다는 지적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EU 분담금과 EU의 맹주를 자처하는 독일과의 경쟁심리 등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지역색·민족주의 강할수록 탈퇴 가능성 높아 EU 탈퇴 논의에 유독 북구·동구권 국가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지역색이나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탓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다음 주자로 덴마크를 꼽았다. 지난해 12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EU 사법체계 도입을 부결할 만큼 유독 반(反)EU 정서가 강하다. 덴마크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유로존 가입을 거부해 왔다. 이웃 스웨덴에선 반난민 정서를 빌미로 반EU 정서가 확산 중이고, 핀란드에서는 지난해 의회에 유로존 탈퇴 청원이 제기됐다. 덴마크를 뒤따를 국가로는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득세한 체코가 점쳐진다. 보후슬라프 소보트카 총리가 나서 공개적으로 첵시트를 거론할 정도다. 역시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헝가리와 폴란드의 EU 탈퇴 움직임도 감지된다. 이들 국가에선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보수정당이 집권하면서 지난해부터 줄곧 EU의 난민 할당 정책에 반발해 왔다. EU의 한 축인 프랑스는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득세 여부에 따라 대열 합류가 점쳐진다. 마리 르펜 FN 대표는 줄곧 EU 탈퇴를 주장해 왔고, 파리 연쇄테러가 불을 붙였다. ●포르투갈 등 유로존 국가 동참땐 EU해체 가속 일각에선 EU의 붕괴 시나리오가 수면 아래에만 머물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은 경제가 독일에 종속돼 있어 목소리만 높일 뿐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경제 체질이 천차만별로 달랐음에도 유로존 19개국에 합류한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은 ‘숨은 폭탄’이 될 우려가 있다. 여태껏 부채에 허덕여 왔으나 이를 타개하고자 유로존 탈퇴 움직임을 드러내면 EU 해체가 가속화할 수도 있다. 여기에 브렉시트 현실화 이후 영국에 종속된 스코틀랜드나 스페인의 카탈루냐 등지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이 다시 타오른다면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글로벌 인사이트] 거꾸로 간 이집트, 붕괴 직전 시리아… 신기루 같은 ‘아랍의 봄’

    [글로벌 인사이트] 거꾸로 간 이집트, 붕괴 직전 시리아… 신기루 같은 ‘아랍의 봄’

    ‘봄은 없었다.’ 2011년 1월 14일 튀니지의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의 하야 성명은 중동·아프리카에 거대한 시민혁명을 촉발시켰다. 재스민혁명으로도 불리는 ‘아랍의 봄’이다. 과일 행상을 하던 20대 청년이 경찰 단속에 항의하며 몸에 불을 붙인 게 도화선이 됐다. 이후 주변국들로 불똥이 튀었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 등이 잇따라 사임하거나 성난 군중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20~40여년간 철권통치를 이어온 독재자들은 불과 1년 사이에 축출됐다. 5년이 지난 지금 ‘아랍의 봄’은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독재자를 몰아낸 민주화 바람 뒤에는 부족·종파 간 갈등이 불거졌고, “빵과 자유를 달라”던 외침 이후에는 더욱 가혹한 경기 침체가 닥쳤다. 주민의 삶은 더 팍팍해졌고, 모든 게 아랍의 봄 탓이라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21일(현지시간) 시리아 중부도시 홈스에서는 연쇄 차량 폭탄테러로 최소 57명이 사망했다고 현지 국영 TV 등이 전했다.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의 시아파 사원에서도 폭발로 최소 83명이 숨졌다. 북부 외곽 알레포에서는 러시아의 공습으로 이슬람국가(IS) 대원 50명 이상이 숨지는 등 대규모 유혈사태가 잇따랐다. 사망자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시리아에서 5년째 계속되는 선연한 피냄새가 아랍의 봄 현주소를 대변한 셈이다. 민주화라는 ‘이상’이 힘의 공백이란 ‘현실’에 밀리면서 혼란은 극대화됐다. 쿠데타와 내전, 극단주의 무장단체 IS의 발호는 혼란을 부추겼다. 이집트에선 또다시 군부가 등장했고, 리비아는 국토가 동서로 갈라져 좀처럼 분열의 끝을 알 수 없다.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튀니지나 모로코에서도 정치·경제적 불안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봄은 왔으나 한겨울 냉기가 넘치는 아랍의 봄을 놓고 “이런 혼란을 겪으려고 우리가 혁명을 했나”란 자조 섞인 목소리까지 들릴 정도다. ●이집트 다시 독재 정권… 시리아 24만명 희생 민주화 성공 사례로 꼽혔던 이집트는 거꾸로 갔다. 지난 12일, 30년간 철권통치를 이어온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퇴임 5주년을 맞았으나 혼란의 종점은 보이지 않는다. 2011년 11월 이슬람 극단주의를 표방한 무슬림형제단이 선거를 통해 합법적 정부를 수립했으나 2013년 압둘팟타흐 시시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로 독재 정부로 회귀했다. 시시는 스스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대통령이 됐다. 올해에도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을 봉쇄하고 대대적인 반정부 인사 탄압을 이어 갔다.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에 따르면 이집트에선 지금까지 최소 4만명이 반정부 시위로 체포됐다. 독재에 맞섰던 리비아, 예멘, 시리아에선 내전으로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리비아와 예멘은 독재자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권 이양 과정에서 내전에 휘말렸다. 리비아는 42년간 독재를 펼친 카다피가 시민군에 사살된 뒤 불과 한 달 만인 2011년 11월 과도정부를 구성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일 정부를 출범시키지 못하고 있다. 종파·부족 간 분열 탓이다. 수도 트리폴리에 거점을 둔 세력과 토브루크에 거점을 둔 세력이 서로 정통 정부라며 경쟁하는 사이 북부 해안 지역을 IS와 알샤바브 등 극단주의 단체들이 점령했다. 예멘은 2012년 2월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 대통령이 선출돼 평화적 정권 이양에 성공했다. 하지만 경제난이 발목을 잡았다. 2014년 9월 연료비 인상에 반대하는 시아파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공격했고, 이듬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연합군이 참전하는 종파 간 내전을 불러왔다. 시리아는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퇴진을 거부했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5년째 반군과 내전을 이어오면서 벌써 24만명 가까운 국민이 희생됐다. 수니파 반군을 지원하는 미국, 영국 등 서방국과 시아파인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는 러시아, 이란이 전선을 형성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시리아 북부 락까를 근거로 한 IS가 세력을 넓히고, 자치정부를 구성한 쿠르드족 문제까지 겹치면서 혼란은 커졌다. 여기에 수니파 국가인 터키와 사우디가 개입을 선언하면서 ‘완전한’ 휴전이 가능할지 의구심을 키우고 있다. 내전을 피해 시리아를 탈출한 500만명 가까운 난민 상당수가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유럽까지 시리아 내전의 후폭풍에 휘말린 상태다. 바레인에선 시민 봉기가 끊이지 않는다. 국민 다수를 차지한 시아파는 수니파 왕정 타도를 부르짖고 있다. 발원지인 튀니지는 2014년 민주 정부를 수립했으나 경기 침체와 정치 불안정으로 위태로운 줄타기를 이어 가고 있다. 실업률은 15%에 육박했다. 2011년 7월 입헌군주정을 출범시킨 모로코도 경제난 탓에 정국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종파 간 갈등·쿠르드족 문제 불씨로 남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칼럼에서 “이 지역에선 힘의 공백뿐 아니라 ‘가치의 공백’도 큰 문제”라며 “과거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발흥한 ‘아랍민족주의’가 아랍 국민 대다수를 한데 모을 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랍국은 서구 제국주의가 인위적으로 국경을 긋고 식민통치한 뒤 불과 반세기 전에야 독립한 나라가 대부분이다. 국민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이 부족한 데다 냉전시대를 거치며각기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독재자들이 철권통치를 공고히 했다. 서방국이 나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이유다. 일각에선 유럽 민주화에 200년, 아시아가 50년 가까운 기간이 소요된 만큼 벌써부터 아랍의 봄의 성패를 논하는 건 무리라는 분석도 있다. 이런 가운데 아랍권에선 포스트 아랍의 봄을 둘러싸고 급변하는 정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시아파 국가에 영향력을 확대 중인 이란과 쿠르드족 문제다.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의 득세는 아랍의 봄으로 상처 입은 주변 시아파 무슬림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던질 전망이다. 쿠르드족도 문제가 될 공산이 크다. 중동 국가는 쿠르드족 자치권을 놓고 큰 갈등을 빚고 있다. 이라크 전쟁과 시리아 내전의 가장 큰 수혜자는 서방 국가의 도움을 얻어 이 지역에서 자치정부를 수립한 쿠르드족이다. 이들은 향후 아랍권 안보에 큰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예컨대 터키에만 1500만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쿠르드노동자당(PKK)을 통해 정치적 역량을 확대하고 있다. 시리아 북부에 근거한 쿠르드 무장조직인 인민수비대(YPG)와 연계되면서 터키는 남과 북이 쿠르드 세력으로 둘러싸인 상황이 됐다. 쿠르드족을 탄압해 온 터키 정부로선 쿠르드족 단체들과 사실상 전쟁을 수행 중이다. 미국의 역할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아랍권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수니파 반군을 지원해 온 미국은 알카에다와 IS라는 괴물을 키운 장본인이다. 하지만 최근 시리아 휴전협정을 주도하면서 복잡한 이 지역 정세에서 서서히 발을 빼려 한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미국이 등을 돌리면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부는 러시아와 이란을 등에 업고 가혹한 탄압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 반군 상당수는 같은 수니파 계열인 IS로 합류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서정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현재 미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골치 아픈 상황”이라며 “오바마 행정부는 내부적으로 이제 중동에 다시 군사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는 만큼 휴전 성립이야말로 미국이 도출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北 폐쇄형 경제구조 ‘이란식 제재’ 통할까

    北 무역규모 100억弗… 中 과 90% 거래 “中 제재 협조 없이 실효성 낮아” 분석도 한·미·일 3국이 북한에 대한 압박을 본격화하면서 새 대북 제재 방식으로 거론되는 ‘이란식 제재’ 모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 제재와 별도로 독자적으로 이란의 원유 수출을 봉쇄해 핵개발을 포기하게 했다. 세 나라는 북한에도 독자 제재를 가해 돈줄을 끊어 ‘핵 도박’을 끝내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제재 이전 원유 수출로 연간 1000억 달러 이상을 벌었던 이란과 달리, 북한은 무역규모가 100억 달러도 되지 않는 폐쇄형 경제구조여서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란 핵 문제는 2002년 이란의 반정부단체가 “이란 중부 나탄즈에 비밀 우라늄 농축 시설이 있다”는 폭로로 불거졌다. 유엔은 2006년 12월 1차 제재 결의안 채택을 시작으로 2010년 6월 4차 제재 결의안 채택까지 지속적으로 제재 수위를 높여 갔다. 북한 역시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때부터 올해 1월 4차 핵실험까지 점점 수위가 더 높아진 제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유엔 제재는 핵이나 미사일 등 군사 관련 부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경제제재 효과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실질적 효과를 내려면 정상적인 무역도 제재해야 하지만 이 경우 국제법적 근거가 약해 유엔 차원에서 결의되기 어렵다. 급기야 미국은 보다 강력한 경제제재 효과를 내기 위해 자국법을 동원해 제3국의 무역에 제재를 가했다. 이른바 ‘세컨더리 보이콧’(이란과 정상 거래하는 제3국 기업과 은행까지 제재하는 것)을 통해서다. 실제로 미국은 2010년 ‘포괄적 이란 제재법’을 만들어 이란 석유산업에 투자하는 제3국 기업을 제재하기 시작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2010년 6.6%에 달하던 이란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12년 -6.6%로 급전직하했다. 결국 2013년 온건 성향의 하산 로하니가 대통령에 선출돼 핵개발 포기 협상에 나섰다. 지난 10일 미국 상원에서 통과된 대북제재 법안에도 이런 세컨더리 보이콧이 포함돼 있다. 북한의 주요 수출품인 광물자원을 거래하는 제3국 기업을 겨냥하고 있다. 미국이 그간 자국 기업의 북한 투자를 금지해 왔지만, 세컨더리 보이콧을 통해 제3국의 대북 무역에까지 제재를 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북한 제재의 경우 중국이라는 변수가 워낙 커 실효성을 장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중국에 있어 북한은 지정학적으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나라다. 또 북한 전체 무역의 90% 이상이 중국과의 거래인 만큼 북한의 중국 의존은 생존에 절대적이다. 한·미·일 3국이 새 대북제재의 효과를 높이려고 중국의 참여를 압박하다 되레 역효과를 낼 수도 있어 지금처럼 중국이 대북 제재를 거부하는 한 의미 있는 진전은 어려워 보인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한반도 전문가 조너선 폴락 선임연구원은 “중국이 이란의 사례처럼 북한에 대가를 치르게 하는 데 협력할 준비를 갖추거나 실제로 미국 등에 협력할 때까지 북한은 자신의 전략을 바꿀 하등의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美, 北 광물 거래까지 제재… 핵·미사일 자금 원천봉쇄 추진

    北과 거래 제3국 개인·단체 포함…이란 수준의 ‘BDA식' 제재 ‘찬성 96명, 반대 0명.’ 미국 상원이 10일(현지시간)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북한의 돈줄을 전방위로 차단하는 초강경 대북제재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법안의 핵심은 ‘세컨더리 보이콧’과 ‘방코델타아시아(BDA)’식 제재다. 미 의회는 이달 중으로 법안을 버락 오바마 행정부로 보내 이행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미국에서 북한만을 대상으로 삼은 사상 최강의 법안이 만들어지게 됐다. 상원은 이날 전체회의를 열어 에드 로이스(공화) 하원 외교위원장이 대표 발의한 대북제재법안(H.R.757)에 코리 가드너(공화) 상원 동아태소위 위원장과 로버트 메넨데스(민주) 상원의원의 법안 내용을 합친 대북제재이행법안(H.R.757 수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지난달 12일 통과된 하원 대북제재법안에 이어 상원도 이날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오는 23일 이후 하원 재심의를 거쳐 동일 법안이 통과되면 미 의회 최초로 북한만을 겨냥한 법안이 나오는 것이다. 미 의회는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북한만을 타깃으로 하는 대북제재법안을 추진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상원이 통과시킨 수정안은 대북 금융·경제제재를 강화해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 북한 지도층 사치품 구입 등에 쓸 수 있는 달러 등 경화 획득이 어렵도록 자금줄을 전방위로 차단하고, 관련자들에 대해 의무적으로 제재를 부과하는 것이 핵심이다. 북한의 핵, 미사일 등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거래를 통해 유입된 자금조차 군수산업 자금으로 전용될 가능성을 없애겠다는 취지다. 특히 제재 범위를 북한과 직접 불법 거래를 하거나 북한의 거래를 용이하게 하는 자 또는 도움을 준 제3국의 ‘개인’과 ‘단체’ 등으로 확대했다. 대(對)이란 제재 때의 강제적인 ‘세컨더리 보이콧’ 수준의 조치이자 BDA식 제재를 가할 수 있게 된다. 상원 법안에서 눈에 띄는 것은 흑연을 비롯한 북한 광물이 핵개발 자금으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광물 거래에 대해서도 제재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북한의 주요 수출품이자 외화 수입원인 광물 거래를 제재함으로써 핵과 미사일 개발에 이용되는 돈줄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이를 제안한 가드너 위원장은 “한국 정부가 통일의 상징으로 운영해 온 남북 합작사업인 개성공단의 가동 중단을 결정할 정도로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김정은 정권은 무모한 도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글로벌 시대] 중국의 일대일로는 순풍에 돛을 달았는가/원동욱 동아대 국제학부 교수

    [글로벌 시대] 중국의 일대일로는 순풍에 돛을 달았는가/원동욱 동아대 국제학부 교수

    2016년 새해 벽두 1, 2월을 피하던 관례를 깨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중동 지역의 맹주인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3개국을 순방했다. 이들 방문국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찬란한 고대문명의 발상지이자 고대 실크로드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시 주석은 이들 중동 국가를 향해 돈 보따리를 풀어내며 물류, 에너지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협력을 이끌어 냄으로써 고대 문명의 길, 실크로드의 복원을 꾀했다. 시진핑 시기 ‘중국의 꿈’(中國夢)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 구상이자 유라시아를 향한 중국의 그랜드 디자인이라 할 수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실크로드 경제벨트, 21세기 해상 실크로드)가 올해에도 중국 외교의 핵심 키워드임을 확신케 하는 대목이다. ‘일대일로’가 통과하는 유라시아 지역, 특히 중동 지역은 세계적인 천연자원의 보고로서 오랜 기간 강대국 간 경쟁과 각축이 이루어져 온 전략적 요충지다.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는 중동 지역, 특히 이란 핵 문제를 둘러싼 서방 세계의 관여와 제재라는 지정학적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어 중국의 일대일로가 과연 순풍에 돛을 달았는지 의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해 주요 강대국들은 정부 차원의 공개적 언급을 피하고 있지만, 각국의 싱크탱크를 통해 중국의 의도에 대한 경계심을 넘어 반대의 목소리를 내보내고 있다. 미국의 언론은 “중국이 두 개의 실크로드를 이용해 워싱턴을 공격하고 있다”며 일종의 ‘서진전략’을 통해 해상과 육상을 통한 미국의 압박과 봉쇄를 무력화하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일본도 중국의 일대일로가 서쪽, 서남쪽, 남쪽 방면으로 영향력 확장을 꾀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투자를 미끼로 위안화의 국제화를 통해 달러의 심연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특히 주목할 국가는 중국의 오랜 라이벌 관계인 인도로, 남아시아의 주도권 확보 차원에서 확실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일대일로에 대한 맞대응 차원에서 ‘마우삼 계획’을 수립한 바 있다.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되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 국가나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 역시 중국의 자원 정책에 대해 각기 이러한 복잡한 기대와 경계 심리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추진에서 기초 인프라 건설은 핵심적 위상을 차지하며, 여기에는 주변국의 지정학적 우려 외에도 사업 자체가 갖는 잠재적 리스크가 적지 않다. 호주의 화교학자 쉐얼(雪珥)은 최근 한 기고문에서 일대일로를 가리켜 ‘고부패지대’, ‘고 리스크로’(high risk road)라고 비관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일대일로가 통과하는 국가들은 대체로 권위주의 통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거나 관료 부패가 매우 심각한 곳이라는 점에서 사업의 안정성을 해치기 쉽다는 의미다. 더욱이 ‘실크로드 경제벨트’에 해당하는 지역은 오랫동안 국제 테러리즘의 주요 온상지이고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에서 전개되는 반테러리즘 전쟁이 진행 중인 지역이라는 점도 성공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다. 더욱이 남중국해와 관련한 일부 동남아 국가들과의 영토분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21세기 해상 실크로드’ 건설을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과 맞물려 중국의 해양 진출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이래저래 중국에 어려운 시련이 될 것이다.
  • [제재 풀린 이란-국제사회 전망은]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촉발… 37년간 ‘족쇄’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16일(현지시간) 이란의 핵합의 이행을 확인하면서 서방과 유엔의 대이란 제재의 족쇄가 풀렸다. 이란에 대한 서방의 37년간의 제재가 본격화된 계기는 1979년 이슬람 혁명이었다. 당시 혁명으로 축출된 팔레비 왕조의 모하마드 레자 샤(왕)가 미국으로 망명하자 이에 반발한 이란 대학생들은 그 해 11월 4일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했다. 이에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같은 달 행정명령 12170호를 발령, 이란의 미국 내 자산 120억 달러를 동결했다. 이는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의 서막이었다. 미국은 이란·이라크 8년 전쟁 중이던 1984년 1월 이란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고 이란제재법(ISA)을 만들어 이란에 대한 무기 수출을 금하고 외국 은행이 이란에 대출해주지 못하게 했다. 1995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일련의 행정명령으로 이란과의 모든 무역거래를 사실상 중단했고, 다음해 미국 의회는 이란 원유와 가스개발 사업에 외국의 투자를 봉쇄하는 이란·리비아 제재법(ILSA)을 제정했다. 특히 2005년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부터 서방의 제재가 강화됐다. 미국은 2006년 ILSA를 이란제재법(ISA)으로 개편하면서 제재 범위를 확대했다. 이란 국영은행과 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를 금지하고, 2007년에는 이란군 정예인 혁명수비대를 테러지원단체로 지정해 관련 인물과 기관의 금융거래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자산을 동결하는 강수를 뒀다. 이런 기조는 2010년 ISA를 강화한 ‘포괄적 이란 제재법’(CISADA) 발효 등으로 이어진다. 유엔 차원의 제재가 시작된 것도 이 시기다. 유엔 안보리는 2006년 12월 우라늄 농축활동 중단을 촉구하면서 이란원자력청 등 10개 기관의 자산을 동결한 1차 제재 결의안을 채택한 이후 2015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이란 핵개발과 관련한 제재를 결의했다. 유럽연합(EU)도 2010년 유엔과는 별도로 이란의 금융과 수송 규제, 에너지 분야 신규투자 금지 등을 골자로 한 제재안을 채택했다.미국과 EU 등 서방의 대이란 제재는 2011년 11월 IAEA가 이란의 핵무기 개발 작업 의심 보고서를 공개한 뒤 또 한 차례 강화돼 이란 경제에 결정타를 안긴다. 미국은 2012년 1월 이란 중앙은행과 거래하는 모든 경제 주체에 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국방수권법’(NDAA) 등 일련의 고강도 제재로 이란 석유에 대해 사실상 국제적인 금수 조치를 내렸다. EU 역시 이란 중앙은행 자산 동결과 이란산 석유 금수 등으로 제재 수위를 높였다. 미국에 EU, 유엔이 가세안 ‘3중 제재’로 이란은 원유 수출이 반 토막이 나면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물가상승률은 치솟는 등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은 2013년 8월 대선에서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민생을 살리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하산 로하니의 승리로 이어졌다. 중도 성향의 로하니 행정부는 2013년 10월 제네바에서 주요 6개국(P5+1)과의 첫 협상에 나섰고, 양측은 2년 뒤인 지난해 7월 14일 역사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사설] 북한도, 국제사회도 이란 비핵화 교훈 삼으라

    이란의 핵 활동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어제(한국시간)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이란에 대한 경제·금융 제재를 풀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이란의 핵무기 위협이 줄어들어 세계가 더 안전해졌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앞서 쿠바가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경제봉쇄 해제 수순을 밟고 있어 북한만 유엔 제재를 받는 고립 국가로 남게 됐다. 최근 4차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이 핵 대신 경제 살리기를 택한 이란의 길을 좇아야 함은 불문가지다. 국제사회도 촘촘한 경제 제재로 성과를 거둔 ‘이란식 모델’을 북핵 해결에 창조적으로 원용하는 방안을 찾을 때다. 이번 대이란 제재 해제는 지난해 7월 미국 등 주요 6개국(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독일)과의 합의에 따른 이행 수순이다. 이란이 우라늄 농축시설인 원심분리기 감축, 저농축 우라늄 해외 반출, 아라크 중수로를 또 다른 핵원료인 플루토늄이 나오지 않는 경수로로 설계 변경 등의 약속을 먼저 이행하면서다. 이렇게 해서 이란은 이번에 1000억 달러(약 122조원)에 이르는 해외 동결자산을 되찾게 된다. 더군다나 최근 유가 하락으로 시장 상황은 좋지 않지만, 최대 수입원인 원유·가스 수출길이 열려 이란 경제는 가뭄 끝 단비를 만난 형국이다. 국제적 고립 속에 핵 개발에 헛돈을 쓰느라 민생이 도탄에 빠진 북한이 이란의 결단을 본받아야 할 이유다. 물론 이란이 핵무장 의사를 완전히 접었느냐를 놓고 미 공화당이나 이스라엘 등은 아직 의구심을 감추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국제사회가 단합해 제재와 대화를 병행해 나간다면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보여 줬다는 점에서 ‘이란식 핵 해법’은 북핵 협상의 좋은 본보기이긴 하다. 그러나 핵무기화가 진행되지 않은 이란과의 협상은 ‘핵 비확산’ 차원이라 상대적으로 쉬웠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북한은 이미 4차례의 핵실험을 거쳐 핵보유국임을 주장하는 상황이라 협상 목표 자체가 ‘비핵화’라는 점에서 훨씬 지난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까닭에 이번 주중 본격화될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안 마련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확고한 공조가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이란과 북한은 같은 강도로 경제 제재를 해도 효과는 천양지차임을 염두에 둬야 한다. 원유 수출 등 대외 의존도가 높은 이란은 국제 제재로 인한 압박감이 상대적으로 클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중·러시아 이외에는 이렇다 할 교역국이 없을 정도로 폐쇄경제를 고수해 온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는 약발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이번에 풀리는 이란에 대한 ‘2차 제재’, 즉 미국이 이란과 거래하는 비(非)미국 기업 및 개인에 대한 제재가 상당히 주효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북한과 거래하는 제3국의 모든 기업이나 금융기관을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이 통하려면 전제가 있다. 북한과 무역·금융 거래가 많은 중국이 꼭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어제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에게 축하 서한을 보내면서 북한 비핵화를 위한 국제 공조를 다짐했다. 정부는 대북 제재 국면에서 최대 과제는 대중 설득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 한반도 흔든 메르스·국정교과서… 지구촌 할퀸 IS·난민정책

    한반도 흔든 메르스·국정교과서… 지구촌 할퀸 IS·난민정책

    << 국내 뉴스 ① 메르스 초동 대응 실패… 186명 감염·38명 사망 지난 5월 중동을 다녀온 68세 남성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확진 판정을 받았다. 초동 대응 실패 탓에 메르스는 전국으로 퍼졌고 186명이 감염돼 38명이 숨졌다. 의료 인프라는 첨단이었으나 공공의료는 빈약했다. 보건당국은 병원명 공개를 미루는 등 파장을 줄이는 데 급급했다. 메르스 공포로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고 사회 전반이 깊은 상처를 입었다. 정부는 첫 환자 발생 후 218일 만인 지난 23일 메르스 상황 종료를 선언했다. ② 한국사 교과서 6년 만에 국정화… 이념의 골 깊어져 한국사 교과서가 6년 만에 국정 체제로 회귀하면서 한국 사회가 이념으로 양분됐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11월 3일 국정화 방안을 확정 고시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헌법 가치에 충실한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밝혔지만 교사와 교수의 시국선언이 이어지는 등 반대 목소리가 거셌다. 집필진 비공개도 논란을 낳았다. 말 많고 탈 많았던 국정 한국사 교과서는 2017년 3월부터 학교 현장에 적용된다. ③ 간통죄 위헌 결정… 62년 만에 역사 속으로 2월 26일 헌법재판소가 간통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간통죄가 국민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 및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로써 1953년 제정 형법에 마련된 지 62년 만에 범죄로서의 간통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간통 문제는 당사자 간의 민사소송이나 위자료, 배상액 등으로 해결되고 있다. 간통죄 위헌 판결에 따라 불륜 급증 등의 우려가 컸지만 아직까지 큰 혼란은 빚어지지 않고 있다. ④ 정권 실세 8명 이름 적힌 ‘성완종 리스트’ 정국 뒤흔들어 해외 자원 개발 비리로 검찰 수사를 받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4월 9일 북한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자신이 돈을 줬다는 정권 실세 8명의 이름과 금액이 적힌 ‘성완종 리스트’를 남기며 정국을 뒤흔들었다. 리스트에 거론된 이완구 당시 총리는 취임 63일 만에 물러났고, 이후 관련 수사가 3개월간 진행됐다. 이 전 총리와 홍준표 경남지사는 불구속 기소됐고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친박(친박근혜) 핵심 인사 6명은 무혐의 처리됐다. ⑤ ‘巨山’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양김 시대 저물어 1993~1998년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11월 22일 88세로 영면했다. 격동의 현대 정치사를 수놓았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양김(兩金) 시대도 역사 속으로 저물었다. 첫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그는 금융실명제·공직자 재산공개제도 도입,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와 측근 비리,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등 공과가 엇갈렸다. 9선의 의원 기간 대부분을 유신독재에 항거했던 그는 ‘영원한 의회주의자’로 기록됐다. ⑥ ‘혈세 도둑’ 오명 공무원연금 개혁안 통과 ‘더 내고 덜 받고 늦게 챙기는’ 공무원연금 개혁안이 지난 5월 국회를 통과해 내년 1월 시행된다. 이로써 향후 70년 동안 333조원의 재정 절감 효과가 기대된다. 공무원연금은 만성적인 적자 구조다. 보전엔 올해만 혈세 3조원을 퍼부었다. 개혁안은 앞으로 연금보험료를 늘리고 지급액은 줄인다는 내용이다. 현재 7%인 기여율(매월 내는 보험료율)은 5년간 9%로 올리고, 지급률은 1.9%에서 20년간 차차 1.7%로 낮춘다. ⑦ 새정치민주연합 ‘공동 창업’ 안철수 의원 탈당 새정치민주연합 ‘공동 창업주’인 안철수 의원이 지난 13일 새로운 정치 세력화를 선언하며 탈당해 총선(4월 13일)을 4개월 앞두고 야권 재편을 촉발시켰다. 지난해 3월 김한길 대표가 이끌던 민주당과 통합해 새정치연합에 들어온 뒤 1년 9개월여 만이다. 안 의원은 무소속 천정배 의원 등 기존 신당 추진 세력과 별개로 독자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고 당내 비주류인 문병호, 유성엽, 황주홍, 김동철, 임내현 의원 등이 “안철수 신당에 참여하겠다”며 탈당했다. ⑧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 장남·차남 경영권 분쟁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지난 7월 말 동생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면서 재계 5위 롯데그룹이 경영권 분쟁에 휩싸였다. 이 과정에서 롯데그룹의 복잡한 지배구조가 드러나고 일본 기업이 아니냐는 논란 등이 불거졌다. 신 전 부회장과 롯데그룹 사이에 경영권 분쟁과 관련 소송이 벌어졌고 소송전은 새해까지 이어지게 됐다. ⑨ 한국·중국 FTA 발표… 무역 장벽 사라져 한국과 중국 간 자유무역협정(FTA)이 지난 20일 공식 발효됨에 따라 인구 13억명의 수출 시장이 활짝 열렸다. 20년 내 상품 품목 수 기준으로 우리 측 92.2%, 중국 측 90.7%의 관세가 철폐된다. 법률, 엔터테인먼트 등 유망 서비스시장 진출과 비관세 장벽 철폐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발효 10년 내 실질 국내총생산(GDP) 0.96% 추가 성장, 소비자 후생 146억 달러, 일자리 53만 8000개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⑩ 조성진 한국인 첫 쇼팽 피아노 콩쿠르 우승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지난 10월 20일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하면서 ‘조성진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콩쿠르 연주 실황 음반 발매 첫날에는 음반을 먼저 사기 위해 판매점 앞에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첫 고국 무대인 내년 2월 쇼팽 콩쿠르 우승자 갈라콘서트도 예매 시작 1시간여 만에 티켓이 매진됐다. 조성진의 인기는 클래식 음악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각종 음반 판매 사이트에서 클래식 음반과 DVD의 판매가 급증했다. 국제 뉴스 >> ① 프랑스 파리 연쇄 테러… 들불처럼 번진 IS 공포 지난 11월 13일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서 이슬람국가(IS) 추종자들이 일으킨 동시다발 테러로 130명이 목숨을 잃어 전 세계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프랑스는 즉각 시리아 내 IS에 대한 공습에 나섰고, 시리아 문제를 두고 대립하던 미·러는 IS 격퇴에 힘을 합치기로 했다. 러시아 여객기 폭발 사고, 미국 샌버너디노 총기 사건 등이 IS를 추종하는 자생적 테러범에 의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서방의 대테러 전략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② 중동·아프리카 난민 100만명 유럽행… 엇갈린 수용·봉쇄 정책 전쟁, 가난 등을 피해 유럽행에 나선 중동과 아프리카 난민이 올 한 해 100만명에 이르면서 유럽은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난민 위기에 직면했다. 지난 9월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가 익사한 채 터키 해안에서 발견되면서 난민 정책은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무제한 난민 수용을 선언해 ‘난민의 엄마’로 칭송받았지만 난민의 주요 기착지인 동유럽 국가들은 국경 봉쇄로 맞섰다. ③ 세계 1위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650억 유로 손실 지난 9월 미국 환경보호청은 세계 1위 자동차기업인 독일의 폭스바겐이 검사 시에만 배기가스 저감 장치를 작동하게 하는 방식으로 디젤 차량의 배기가스 배출량을 조작했다며 해당 차량에 대한 리콜 명령을 내렸다. 이후 폭스바겐이 자사의 다른 브랜드 차량에도 조작 프로그램을 설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첨단 기술력과 정직을 자랑하던 독일의 국가 신뢰도까지 타격을 입었다. 총 1100만대 리콜 등 사태 수습에 최대 650억 유로(약 83조원)가 들 것으로 추정된다. ④ 미국·쿠바 국교 단절 54년 만에 관계 정상화 미국과 쿠바가 지난 7월 20일 양국 수도에 대사관을 재개하며 54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했다. 1959년 쿠바에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2년 뒤 양국은 국교를 단절했다. 지난해 12월 양국 정상이 국교 정상화 추진을 선언한 뒤 미국은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쿠바를 제외했으며 쿠바에 대한 각종 경제 제재를 해제하거나 완화했다. 양국의 관계 개선에 힘입어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도 쿠바에 역사적인 발걸음을 했다. ⑤ 이란 핵 협상 13년 만에 타결… 경제 정상화 시동 이란과 주요 6개국(독일, 러시아, 미국, 영국, 중국, 프랑스) 및 유럽연합(EU)이 지난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13년을 끌어 온 이란 핵 협상을 타결했다. 양측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군사시설을 포함한 모든 핵 개발 의심 시설에 접근하는 데 합의했다. 서방국가들은 올해 말까지 핵 개발 의심 시설을 사찰한 뒤 핵무기 개발과 관련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 대이란 경제 제재를 해제한다. 이란은 석유 수출 재개를 모색하는 등 경제 정상화에 고삐를 죄고 있다. ⑥ 日 집단자위권 행사 안보법안 통과… 평화헌법 무력화 나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끄는 연립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지난 9월 19일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안보 관련 법안을 강행 통과시켰다. 전후 70년 동안의 ‘평화헌법’이 무너졌고, 일본은 ‘전쟁할 수 없는 나라’에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지지율 회복에 힘입어 우경화 행보를 가속하는 아베 총리는 내년 참의원 선거 승리를 통해 평화헌법 조항인 9조를 무력화하는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 다음 목표다. ⑦ 유엔파리기후협약 타결… 지구온도 1.5도 이하로 낮추기로 12월 12일까지 2주 동안 프랑스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1)에서 196개국 대표들이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온실가스 배출 감소를 약속한 ‘파리 협정’을 맺었다. 1997년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새 협정이다. 참가국은 산업혁명 이전보다 지구의 평균온도 상승 폭을 2도 아래로 억제하고, 1.5도 이하로 낮추기 위해 선진국과 신흥국이 모두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세우고 5년마다 점검하기로 했다. ⑧ 美 연준 9년 반 만에 기준금리 0.25%P 인상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지난 16일 기준금리를 9년여 만에 0.25% 포인트 인상하면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어 온 ‘제로 금리’ 시대도 막을 내렸다. 현행 0~0.25%였던 기준 금리는 0.25~0.5%로 높아졌다.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9개국이 금리 인상에 나선 반면 유럽중앙은행(ECB)은 예금금리를 추가 인하해 유럽과 미국의 서로 엇갈린 통화정책을 일컫는 ‘그레이트 다이버전스’가 현실화됐다. ⑨ 그리스 부도 위기… 추가 구제 금융 받고 긴축안 수용 난민 문제와 더불어 그리스의 재정 위기도 유럽의 분열을 부추겼다. 그리스는 2010년 시작된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 등으로부터 빌린 채무에 대한 불이행으로 국가 부도 등 최악의 고비를 넘겼다.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위기가 다시 불거지면서 EU의 근간도 흔들렸다. 하지만 지난 1월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추가 구제금융 개시를 위해 결국 채권단의 강도 높은 긴축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⑩ 위안화 SDR 편입 3대 기축통화로… 중국 ‘금융 굴기’ 국제통화기금(IMF)이 11월 30일 중국 위안화를 특별인출권(SDR) 구성 통화로 채택했다. 편입 비율이 10.92%로 결정돼 위안화는 달러, 유로화에 이어 3대 국제 기축통화가 됐다. 이로써 세계 최대 무역국으로 등극한 중국이 세계 경제에 끼치는 영향력과 힘이 증명됐다. 또한 세계 경제 양대 축인 미국과 중국 간 ‘화폐 전쟁’이 본격화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와 기업은 위안화 표시 채권을 대거 발행하며 ‘금융 굴기’(?起)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 [특파원 칼럼] 오바마와 트럼프, 그들의 ‘버킷리스트’/김미경 워싱턴 특파원

    [특파원 칼럼] 오바마와 트럼프, 그들의 ‘버킷리스트’/김미경 워싱턴 특파원

    송년회가 잦은 요즘이다. 미국 워싱턴DC 안팎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 빠지지 않는 화젯거리가 있다. 바로 미국 대선 공화당 유력 후보이자 ‘막말의 달인’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얘기다. 대다수는 트럼프의 언행에 부정적이다. 보수적 성향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전 국무부 고위 관료는 기자에게 “만에 하나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을 큰 보자기로 덮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밖에 알리지 말아야 한다”며 “특히 트럼프의 외교정책은 빵점이다. 한국과 북한, 중국 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며 작금의 대선판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정치인은 본인의 부고 기사 말고는 어떤 기사가 나와도 좋다고 했던가.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있는 트럼프는 지난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지지율이 고공행진하더니 최근 41%를 얻어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러다가는 각종 미인대회를 소유한 부동산재벌 출신이 백악관을 처음으로 차지하는 이변을 겪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워싱턴포스트와 CNN 등 미 언론에 트럼프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면 그에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임기가 1년 남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다. ‘레임덕’에 빠질 만도 한데 여전히 굵직굵직한 뉴스들을 터뜨리고 있다. 이민개혁 행정명령,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 이란 핵협상 등을 마무리한 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타결, 파리 기후변화협정 타결 등 그의 레거시(유산)가 쌓이고 있다. 물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벌어진 캘리포니아주 샌버너디노 총기 난사 사건 이후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를 격퇴하겠다며 연일 기자회견을 열어 대테러 정책 강화를 역설하지만 공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초강대국 미국을 움직이는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나 8년 만에 권력 교체기가 다가오면서 남은 1년도 분주하게 보낼 오바마 대통령과, 앞으로 1년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의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가 궁금해졌다. 새해를 앞두고 버킷리스트는 종종 ‘새해 결심’으로 바뀌기도 하니 그동안 언론 등을 통해 드러난 이들의 ‘할 일’ 목록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먼저 오바마 대통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총기 사건을 막기 위한 총기 규제 강화, 난민 수용 확대,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최저임금 인상, 남녀 동일임금 추진, 90년 만에 미 대통령으로서 쿠바 방문 등이 리스트에 있을 것이다. 또 IS 격퇴, 아프가니스탄 철군 등이 있지만 모두가 넘어야 할 산이 많은 힘든 과제들이다. 다음은 트럼프. 공화당 후보로 낙점돼 민주당 유력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누르고 대통령이 된다면 “라티노와 무슬림의 불법 이민과 무단 입국을 막을 것이며 시리아 난민도 차단할 것”이다. 그는 또 “안보 무임승차 국가인 한국과 일본, 독일로부터 돈을 더 뜯어낼 것이며 중국을 봉쇄하고 뺏긴 일자리를 되찾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트럼프도 너무 바빠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버킷리스트에 있었으면 하는 ‘북한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 두 사람 모두 북한 김정은 정권과 상대를 안 할 것처럼 나온 지 오래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오바마 대통령과, 외교에 무지한 트럼프가 북한 문제를 버킷리스트에 넣어 관여정책을 추진해 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chaplin7@seoul.co.kr
  • [이산가족 상봉 마지막날] 북한 내 이산가족 ‘동요계층’으로 분류… 결혼 기피 대상

    남한 출신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살까. 북측 가족들은 좋은 대우에 차별 없는 사회란 점을 강조하지만 실제는 다르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이산 상봉에서 일부 가족은 오랜만에 만난 남측 가족에게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있다. 1972년 ‘오대양호 사건’ 납북 어부인 정건목씨의 아내 박미옥씨는 지난 24일 남에서 온 시어머니 이복순 할머니에게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북측의 민복순씨도 남측 가족들에게 “김정은 장군님은 우리를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 힘을 합쳐 통일의 문을 열어 나가는 데 힘을 합칩시다”라며 틈만 나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위대성을 찬양했다. 북한 내 누구보다 정체성을 의심받는 계층이 남한 출신들이란 점에서 체제 선전은 곧 충성심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남한 출신 북한 주민들은 당국의 감시와 견제, 차별 속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기본군중은 크게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분류된다. 그중 남측 출신들은 당원이나 군(軍) 장교가 되는 데 많은 제약이 따르는 ‘동요계층’에 해당되며 경우에 따라 최하위 신분인 ‘적대계층’으로 낙인찍혀 기본적인 사회 진출도 원천적으로 봉쇄당한다. 이렇다 보니 북한 주민 대부분이 기피하는 농촌과 탄광, 광산 등 험지의 최하위직에 몰리게 되고 당국의 의심의 눈초리 때문에 더욱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해 몸을 혹사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또 한번 근무지가 정해지면 이직은 꿈도 못 꾸는 등 종신직에 가깝게 일을 한다고 전해진다. 이런 사회적 신분은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에서도 나타난다. 대개 비슷한 사회주의적 신분을 가진 집안끼리의 결혼을 선호하는 북한 특성상 부모가 남한 출신인 경우 결혼에서도 기피 대상이다. 2009년 탈북한 김모씨는 “북한에서 결혼을 할 때 상대방 부모가 남쪽 출신인 경우 출세의 걸림돌로 보고 대개 결혼을 기피하게 된다”고 말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아인슈타인이 틀렸다!...’양자 얽힘’ 실험으로 증명 (네이처)

    아인슈타인이 틀렸다!...’양자 얽힘’ 실험으로 증명 (네이처)

    거의 1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고전 물리학 법칙을 깨뜨리는 것으로 보이는 '양자 얽힘'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계속해왔다. 원자를 구성하는 한 쌍의 소립자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처럼 보이는 양자적 현상에 관한 것이었다. 짝을 이룬 두 입자들은 아무리 서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변동하면 그에 따라 '즉각' 다른 한쪽이 반응을 보인다는 불가사이한 특성을 가지는데, 양자이론에서는 이 두 입자가 서로 '얽혀 있다'고 하며, 이를 일컬어 '양자 얽힘'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우주에서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같은 현상을 '유령 같은 원격작용'이라면서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그 같은 양자 현상에는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숨겨진 변수'가 있으며, 그것을 알게 되면 유령 같은 원격작용의 의문이 풀릴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지난 1세기간 양자론자들과 아인슈타인이 치열하게 대결한 논점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바람과는 반대로 이 같은 양자 현상이 사실임이 기념비적인 놀라운 실험 결과로 확고하게 입증되었다고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이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1964년, 영국 물리학자 존 벨은 유령 같은 원격작용을 해명할 수 있는 '숨겨진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 한 실험을 고안해냈다. 이 실험으로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숨은 변수는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 이를 벨의 부등식이라 한다. 하지만 이 벨의 부등식에 많은 허점이 있음이 밝혀지면서 양자 얽힘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 '네이처' 지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실험을 이끈 연구자들은 양자 얽힘 실험에서 중요한 두 개의 허점을 보완했다고 밝혔다. 독일 연구진은 작은 다이아몬드에 갇힌 '얽힌' 전자들을 델프트 대학 캠프스 양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다 두고 실험을 했다. 두 전자들이 서로 소통할 수 없게끔 두 장소 사이의 통신수단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소립자는 양자적인 속성의 하나로 스핀이라는 회전 운동량을 갖고 있다. 한 쌍의 소립자는 각각 다운 스핀과 업 스핀으로 되어 있는데, 관측되기 전까지는 한 입자가 어떤 스핀을 갖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다. 이를 양자론에서는 두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고 본다. 일단 측정으로 한 입자의 상태가 확정되면 다른 입자는 '동시'에 그 반대되는 상태로 확정된다. 두 입자의 거리가 수백 광년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양자론자들은 측정이 없다면 실제도 없다고 말한다. 이 같은 양자론자의 주장에 아인슈타인은 "내가 달을 보지 않는다면 달이 거기 없다는 것인가?" 하고 푸념하기도 했다. 논문 대표저자인 로널드 핸슨 교수는 "두 개의 전자가 얽혔을 때 보여주는 현상은 참으로 흥미롭다"고 말하면서 "두 전자가 어느 것이든 업 스핀이 될 수도 있고 다운 스핀이 될 수도 있지만, 한 전자가 업 스핀일 경우, 다른 전자는 반드시 다운 스핀이 된다"고 밝혔다. "우리가 측정할 때 그들은 완벽한 상관관계임을 보여준다. 한쪽이 업 스핀이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다운 스핀이 된다. 그 같은 반응은 동시에 나타난다. 걸리는 시간이 제로라는 뜻이다. 두 입자가 은하의 반대쪽에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번 실험에서는 쌍을 이룬 전자들을 이용했는데, 이들 전자 쌍들은 모두 측정하는 데 있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어떤 허점도 완벽히 봉쇄되었다. 또한 두 탐지기 사이의 1.3km란 거리는 한 전자를 측정하여 상태를 확정하는 사이에 빛이라도 주파할 수 없는 먼 거리로, 국지적인 허점을 제거한 것이다. 이 반직관적인 양자 얽힘 현상은 기왕의 철학에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이 같은 현상이 알려주는 바는 우주가 국지적이 아니라, 비국지적이라는 사실이다. 공간이란 사물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처럼 보여주는 관념일 뿐, 실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빅뱅에서 출발한 우주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이 빛과 물질을 가장 극미한 상태에까지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번 실험에 대해 버밍엄 대학의 카이 봉스 교수는 "양자 역학이 고전 역학과 얼마나 다른지, 또 양자역학으로 인류가 앞으로 전례없는 발전을 이룰 가능성을 보여준 실험이다"고 평가했다. 이번 실험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양자 얽힘을 이용한 통신의 암호화에 한발 다가간 것으로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구본영 칼럼] 유엔 무대 위 통일 드라마와 북한 개방

    [구본영 칼럼] 유엔 무대 위 통일 드라마와 북한 개방

    창설 70주년이란 연대기적 무게감 탓일까. 올 유엔총회 무대는 꽉 차 보였다. 193개 회원국 중 160여개국 정상과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참석했다니…. 어제 박근혜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에 이어 7번째로 연단에 올랐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까지 참석했다면 분단 70년사에 남을 명장면이 연출되었을 법하다. 하지만 부질없는 상상이었다. 전날 리수용 외무상 등 북한 대표단은 회의장에서 박 대통령을 애써 외면했다. 불현듯 1989년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장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의 빛바랜 사진 속에서 옛소련의 고르바초프(고르비) 대통령은 환히 웃는 반면 붕괴 직전의 동독 공산당 호네커 서기장은 잔뜩 굳어 있었다. 당시 고르비는 베를린에서 동독 지도부에 강한 어조로 개혁·개방을 권고했다. “인생은 너무 늦게 오는 자를 벌한다”는 예언적 경고와 함께. 비공개석상에선 사회주의 동독을 “뚜껑이 꽉 닫힌 채 과열된 보일러”에 비유했다고도 한다. 물론 호네커는 고르비의 권고를 뿌리쳤다. 화가 난 그는 종주국 최고지도자인 고르비를 배웅하러 공항에도 나가지 않았다. 옛소련도 처음엔 동독을 서방 세계와 격리해 자국 안보의 방패로 삼으려 했다. 고르비는 서독이 주도하는 독일 통일을 막아내려고 평화조약 체결을 제안했다. 이를 영구분단 기도로 본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국제 여론을 등에 업는 통독 외교를 본격화했다. 전승 4개국(미·소·영·프)과 동서독을 포함한 ‘2+4 회담’을 통해 동독을 국제무대로 견인해 내면서다. 국제정치학에 ‘고슴도치 이론’이란 게 있다. 고슴도치가 몸을 웅크린 채 가시로 맹수의 공격을 막듯 세계 최빈국인 북한도 문을 닫아걸고 핵무기란 가시로 세습체제를 지키려 하고 있다. 이제 동독이 못 가졌던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이 등장한다면? 합의에 의한 평화통일은 물 건너가게 된다고 봐야 한다. 까닭에 분단 고착화를 막으려면 김정은이 스스로 결단해 개혁·개방을 하든지, 아니면 주변국들이 그렇게 유도해 나가야 한다. 우리의 통일 외교도 북한을 국제사회로 나오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할 이유다. 작가 이병주가 그랬던가.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주체사상이니, 백두혈통이니 하는 어설픈 신화는 대명천지 글로벌 무대에서는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북한보다 먼저 탄, 자유화·민주화·시장경제라는 세계 문명사의 큰 흐름에 우리가 회의를 품을 까닭은 없다. 서독 지도자들도 동독을 이런 흐름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에서 통독을 일궈 냈다. 통독 전 서독도 양독 간 경제 협력이 동독 주민의 삶의 질 향상보다는 동독 정권의 안정과 분단 고착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서독은 일정 수준 이상의 경협은 지양하면서 경제지원을 지렛대로 동독 주민의 여행 자유화와 인권 개선을 요구해 관철해 나갔다. 다만 처음엔 봉쇄하려 했던 동독의 국제무대 진출 기회를 과감히 열어 주었다. 박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의 길로 나온다면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다. 적실한 주문이다. 다만 북의 개방을 기다리지 말고 예의 고슴도치 전술을 버리도록 국제적 조류를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 6자회담 재개도 필요하다. 설령 회의는 춤추고 결론은 없다 할지라도 북한이 다자 회담의 틀 안에서 글로벌 기준을 따르게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너무 믿어서도 안 되겠지만,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임은 자명하다. 통독 과정에서 구소련처럼 말이다. 며칠 전 시 주석은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용인하지 않겠다는 데 동의했다. 물론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라는 시 주석의 조언을 끝내 외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이 1400㎞ 북·중 국경 너머로 보이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변화상까지 눈치채지 못하게 할 순 없을 게다. 어떤 경로로든 북한 주민들이 세계사의 진실과 대면하도록 해야 한다. 그때야말로 한반도 통일의 물꼬가 트이는 결정적 순간을 맞을 듯싶다. kby7@seoul.co.kr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무량사 극락전과 제우스 신전의 ‘공포’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무량사 극락전과 제우스 신전의 ‘공포’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한국의 목조 건물은 1308년 창건된 수덕사 대웅전을 중심으로 14세기 이전 것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수덕사 대웅전은 창건 연대가 확실하며 아름답고 당당해 항상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08년 창건 700주년 기념전시회가 수덕사 근역성보관(槿域聖寶觀)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필자는 기념 강연을 했다. 건축에 처음으로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해 대웅전 건축과 그 안의 불상대좌, 불탁(향로와 광명대 등을 놓는 탁자) 등 종합적 강연을 대웅전에 대한 찬가로 바쳤다. 한국 목조건축의 공포와 서양의 석조 공포를 비교한다. 그리스 신전도 처음에는 목조건축이었다. 사찰과 궁궐 건축은 지붕을 바치는 공포부(栱包部)가 있다. 공포라는 것은 목조건축의 넓고 두터운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고자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종과 횡이 만나는 구조를 일컫는다. 공포의 부재 중에서 안팎으로 뻗어 나간 것을 순우리말로 ‘살미’라 부른다. 살미는 아래로부터 끝이 길게 뻗쳐 내려간 것은 쇠서형, 즉 소의 혓바닥 모양이라 하고, 길게 올라간 것을 앙서형(仰舌形)이라 불러 혓바닥으로 인식했다. 새 날개처럼 탄력 있고 뾰족하게 뻗은 것은 익공형(翼工形), 구름처럼 둥글둥글하게 생긴 것을 운공형(雲工形)이라 부른다. 소의 혓바닥, 새 날개, 구름 등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살미는 조선시대, 특히 전국이 초토화된 임진왜란 이후 화려하게 꽃피운다. 목조건축의 꽃이라 할 공포의 구조와 상징은 오랫동안 오해와 오류 속에 잠들어 있었다. 일본 학자들은 쓸데없이 공력을 들였다고 하며 번잡해서 혐오스럽다고까지 폄하했다. 한국 목조건축의 넓고 두터운 기와지붕은 공포부와 함께 비중이 가장 큰 만큼 급속히 좁아지는 축부(기둥들이 만든 부분)와의 비례가 극적이어서 중국과 일본 건축보다 조형미가 뛰어나다. 중국은 축부에 벽돌을 많이 쓰고 일본은 단순해 한국 건축 같은 장중한 미감을 내지 못한다. 그런 지붕부를 받치기 위해서는 공포부가 넓고 높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기능에 한국의 장인들은 엄청난 형이상학 의미를 부여했다. 사상(思想)이 공포의 형태를 결정한 것이다. 2001년 겨울 어느 날 필자는 전남 영광 불갑사로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전에 보았던 그 현란한 대웅전의 내부 장엄에 이끌렸던 것이다. 그런데 대웅전에 들어가서 위를 본 순간 무엇인지 몰랐던 내부 공포가 처음으로 시선을 꽉 붙잡았다. 공포라는 조형언어를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해독했을 때의 희열과 놀라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생애에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정각(正覺)이었다. 그 경이에 힘입어서 여러 사찰을 답사하며 공포를 집중적으로 분석해 2002년에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초청 강연으로 발표했다. 몇몇 교수들은 전화를 걸어와 한국 건축이 그렇게 위대한지 몰랐다고 했다. 마침내 기존 논문을 한 편도 읽지 않고 2004년에 논문으로 발표했으며, 10년 후 한국 공포를 종합적이며 체계적으로 연구해 다시 발표했다. 그러는 동안 괘불의 조형언어를 해독하며 환희에 춤을 추었고, 계속 범종을 해독해 가는 등 모든 장르에 지속적으로 눈뜨는 감격을 누리고 있으며, 마침내 그동안 무엇인지 몰랐던 세계의 조형예술도 해독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의 첫 단추가 공포의 깨달음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점차 정립해 온 ‘영기화생론’에 입각한 주제로 수많은 강연을 국내는 물론 대만, 일본, 미국, 그리스, 독일, 프랑스 등의 학회에서 중요한 주제를 처음으로 밝혀 발표하거나 대학에서 강연했다. 조선시대 중기에 창건된 부여 무량사는 당당하고 위압적인 중층(重層) 건축이다 ①. 무량사의 안살미에서는 제3영기싹 영기문 사이에서 용이 화생하며 손으로 보주를 꽉 쥐고 있다 ② ④. 만일 용의 입에서 보주가 나오는 것을 표현하면 보주가 작아지고 강력히 발산하는 영기 표현도 어렵게 되므로 보주를 크게 만들어 쥐게 했다. 오랜 후에 용의 입에서 무량하게 보주가 발산하는 것을 이런 방법으로도 표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위의 봉황은 연꽃 모양을 물고 있다. 그러나 연꽃 모양 자체가 무량보주가 돼 보주를 무한히 발산한다는 것을 안 것 역시 요즈음이다. 즉 연이은 제3영기싹 영기문에서 화생한 용과 봉황이 각각 무량한 보주를 발산해 대우주에 가득 차게 한 것이다. 밖살미에는 같은 영기문에서 봉황만이 화생해 역시 무량한 보주를 발산하고 있다. 이렇게 영조(靈鳥)나 영수(靈獸)가 연꽃 줄기를 입에 문 것이 보주를 발산하는 것임을 안 것은 고구려 벽화와 고려청자에서였다. 건축 안과 밖 살미를 ‘안살미’와 ‘밖살미’라고 부른 것은 필자다. 밖살미에서 밖은 공간이 넓으므로 소우주인 건축으로부터 영기를 한없이 마음껏 뻗어 나가도록 한 것이다③. 형태는 다양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일사불란하게 전개 원리를 지키며 살미를 만든 나라는 한국뿐이다. 필자가 한국 건축에 매료하는 까닭이다. 기둥 위에 활짝 핀 살미 부분을 포함한 공포는 가히 우주목, 혹은 생명수(生命樹)라 할 만하고 이 우주목에서 만물이 탄생한다. 아시리아의 우주목들은 건축의 기둥이 우주목임을 만천하에 천명한 조형이다. 그런 조형은 역사적으로 단순한 것부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해 온 것이나, 실제 건축에서 기둥을 우주목이라고 하고 나아가 보주목(寶柱木)이라 부른 것도 필자다. 가장 오랜 아시리아의 BC 3000년 우주목은 이후 전개되는 다양한 우주목의 기원이 된다 ⑥. 아시리아의 BC 9세기 우주목은 아예 기둥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반드시 양쪽에 영조와 영수가 있는데 우주목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탄생하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아시리아의 우주목은 기둥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그 맥은 우리나라 목조건축 기둥으로 이어져 무량사에서처럼 기둥, 즉 우주목에서 용과 봉황이 화생하고 있다. 무량사의 기둥과 공포를 합해 다른 예를 참고하며 우주목으로 필자가 그려 만들었다 ⑤. 서양에서는 살미에 해당하는 그리스의 건축 부재는 주두(柱頭·Capital)라고 한다. 그런데 그저 주두라고 하면 독립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기둥의 일부가 돼 버리고, 지붕을 받치는 개념이 희박하므로 필자는 지붕부를 받치는 기능을 하는 서양의 주두를 공포라고 부르기로 한다. 서양 건축학자들 가운데는 이 주두, 즉 공포의 상징을 밝힌 사람이 아직 없다. 필자는 지난해 그리스 신전의 공포를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걸쳐 그 본질을 새로이 밝히며 기둥과 공포를 합쳐 우주목이라 해석하고 신전 건축은 ‘우주목의 숲’을 건축화한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반응이 컸다. 그 후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처음으로 답사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있는 신전으로, 올림포스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BC 6세기 아테네 시대에 건설이 시작됐지만, 고대 세계 최대의 성전 완성은 2세기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테네의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은 올림포스 산의 제우스에게 바친 신전이지만 지금은 폐허에 일부 기둥들만 남아 있다 ⑦. 4세기경 고트족의 침입으로 파괴되기 전에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웅장했다고 한다. 원래 84개의 기둥이 있었으나 지금은 15개만 남아 있다. 너무 높아 줌렌즈로 사진을 찍었더니 뜻밖에 공포의 형태가 다양했다. 이곳 공포와 비슷한 대리석 공포를 파르테논 신전을 걸어서 올라가다가 폐허에 겨우 하나 남은 것을 보았다. 매우 비슷하므로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하고, 무량사 극락전의 공포와 맥을 같이하는 로마시대 공포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아마도 제우스신전에는 이런 형태의 공포도 있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공포는 제우스신의 영기화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포에는 앞에서 보면 양쪽에 두 영조가 있으므로 무량사 극락전의 공포와 맥을 같이하여 만물이 탄생하는 것을 상징한다. 공포를 채색 분석해 보면 밑 부분에는 처음에 서양건축에서 말하는 이른바 ‘아칸서스’의 잎이 네 개 나오며 끝을 밖으로 탄력 있게 구부렸다 ⑧. 그 사이사이에서 긴 아칸서스가 길게 힘차게 뻗쳐 오르며 역시 끝을 탄력 있게 구부렸다. 옆에서 보면 제1영기싹 모양이다. 그런데 양쪽에 영조를 두었으며 중앙에도 같은 모양의 몸인데 얼굴은 없다. 그러나 중앙의 아칸서스 뒤에 새의 몸이 보이고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새의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에 꽃받침 같은 것이 있고 그곳에서 소용돌이치며 싹 같은 것이 올라가고 그 끝에서 제우스의 얼굴이 화생한다. 그런데 밑의 새 얼굴 부분으로부터 날개를 활짝 펼치는 갈래 사이에서 직선과 곡선의 화살 모양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번개를 상징한다. 제우스는 번개의 신이다. 가장 강력한 영기를 발산하는 것이 번개인데 제우스는 번개를 지물(持物)로 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공포의 네 군데에는 독수리를 배치했고, 보주꽃 대신 제우스 얼굴을 두었다. 이런 공포는 제우스신전에 헌정됐으리라고 이탈리아 건축가 자코모 비뇰라(1507~157)는 말하고 있다. 비뇰라가 펴낸 ‘5개의 오더’는 알프스 이북의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쳤는데 이 글의 흑백 도면은 그 책에서 선정했다. 1세기 로마시대의 유명한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서양건축의 바이블이라 할 ‘건축에 대한 10장’이라는 저서에서 주두의 식물을 아칸서스라 불렀다. 그 이후 지금까지 모두 보잘것없는 관목인 아칸서스로 알고 있으니 그리스 신전의 중요한 상징을 밝힐 수 없었다. 비트루비우스의 언급이 서양 미술사학의 발전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그리스 신전의 주두뿐만 아니라 이후 건축의 모든 주두의 식물을 아칸서스라 불렀으며, 조각, 회화, 금속공예, 도자공예의 식물들도 모두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서양의 조형예술에는 아칸서스가 무수히 많아서 아칸서스가 틀린 용어이고 그런 식물 모양의 본질을 파악해 아칸서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 서양 미술사학은 순간적으로 활로를 찾게 된다. 필자는 한국의 공포를 해석해 냈기 때문에 서양의 신전이나 성당의 주두가 아칸서스가 될 리 없다는 것을 증명할 확신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아칸서스를 다음 회에서 해독할 것이다.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핵협상 세일즈 ‘돌직구’ 던진 이·이 청년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휴가를 떠나기 직전까지 이란 핵협상 타결안을 둘러싼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인터넷 매체를 통해 이란과 이스라엘 젊은이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파격을 선보였다. 핵협상 합의안에 대해 60일 동안의 검토에 들어간 미 의회에 핵협상의 타당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10일(현지시간) 백악관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6일 백악관에서 인터넷매체 믹(Mic) 편집장 제이크 호로위츠와 만나 10여분간 인터뷰를 했다. 이날 공개된 인터뷰 동영상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호로위츠가 “정치인들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이란 핵협상에 대해 질문할 것이 많다”고 말하자 “이번 핵협상이야말로 가장 타당하고, 중동 지역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며 기존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태블릿PC를 통해 이란과 이스라엘에 있는 젊은이들을 대면하고 그들의 ‘돌직구’ 질문에 대해 답변했다. 이란에 사는 가잘 하카미(22)는 “당신은 항상 평화를 얘기하는데 정작 우리 이란인들은 미국의 혹독한 제재로 너무 큰 대가를 치렀다. 이란 국민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고 협상을 타결할 다른 방법도 있는 것 아니냐”고 묻자 오바마 대통령은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내가 취임했을 때 이란 최고 지도자에게 ‘미국은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반응이 없었다”며 “우리는 대신 이란의 포르도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을 적발했고, 이란이 협상에 나오도록 하려면 더 가혹한 제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란이 이번 핵 합의를 준수하면 제재는 풀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에 사는 이란계 미국인 닐라 팩(24)이 “이번 이란 핵합의가 중동 동맹국과의 관계 훼손을 대가로 치르면서 추진되는 것 아니냐”고 묻자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가까운 동맹, 특히 이스라엘이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이란이 핵합의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고, 헤즈볼라와 같은 테러 조직을 지원하지 않으며, 이웃국가들을 불안정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웃국가들도 핵합의를 환영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또 이스라엘에 사는 샘 그로스버그(30)가 “이스라엘 국민 입장에서 볼 때 당신은 우리 총리(베냐민 네타냐후)에 반대하는 것이 명백하다. 당신이 이스라엘 안보에 관해 여러 약속을 했는데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미 우리 문밖에 와 있다. 이런데도 우리가 당신을 믿어야 하냐”고 묻자 오바마 대통령은 “내가 이스라엘 총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샘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이란 핵개발을 봉쇄하기 위한 협상 여부를 놓고 미국과 이스라엘 간 이견이 있다”며 “그러나 다른 이슈들, 특히 이스라엘 안보와 관련해 이스라엘과 모든 점에서 보조를 맞춰 왔고 네타냐후 정부도 그 점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CNN과 공영라디오 NPR도 이날 오바마 대통령과의 사전 인터뷰를 내보냈다. 오바마 대통령이 휴가 기간에도 미리 진행한 인터뷰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연일 내보내는 것은 다음달 의회의 합의안 표결을 앞두고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의회가 부결안을 통과시킬 경우 오바마 대통령은 거부권으로 맞설 예정이다. 한편 백악관은 이날 오바마 대통령이 2009년 취임 직후 ‘핵무기 없는 세상’을 주창하며 만든 핵안보정상회의 제4차 회의가 내년 3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워싱턴에서 열린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종료에 앞서 마지막으로 열리는 이번 회의에서 이란 핵협상 후속 조치뿐 아니라 북핵 문제도 거론될지 주목된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열린세상] 인성교육진흥법이 실패할 세 가지 이유/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열린세상] 인성교육진흥법이 실패할 세 가지 이유/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이해는 간다. 필요성도 인정된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다. 지난 7월 21일 시행에 들어간 인성교육진흥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선 두 가지가 놀랍다. 법령을 만들어 시행하기만 하면 올바른 인성이 저절로 함양될 것이라 믿는 발상의 순진함이 놀랍고, 인성의 발현을 제약하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무관심 역시 그렇다.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의 위임을 받아 평화 정착 방안 마련에 골몰했다. 그는 인간 본성에 비춰 볼 때 항구적인 평화가 가능하겠는지를 궁금해했다. 인류 역사에서 참혹한 전쟁과 파괴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신분석 이론의 창시자이자 당대 최고의 심리학자였던 프로이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대답은 ‘전쟁과 파괴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심층심리를 연구해 온 프로이트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고,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는 매우 비장한 인성관을 견지한 이유는 인간 내면의 파괴적 본성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적 인간은 인성의 힘으로 충동을 다스려야 하는 숙명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 연구들은 인성의 발달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높은 경지의 인성 발달에 도달한 인간은 극히 드물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성인군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인성의 힘이란 그리 강하지도 않고 쉽게 함양되지도 않는다. 인성이 몇몇 제한적 프로그램으로 함양되리라고 믿는 교육 당국의 처사는 기만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신통한 프로그램이 어디 있는가. 인성은 물길질 몇 번에 쑥쑥 자라나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다. 오히려 거친 황야에서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굳건히 버텨 내는 야생초와 같은 것이다. 인성교육진흥법이 실패할 것이라 예상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인성의 본질에 대한 교육 당국의 무지에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인성의 발현을 제약하고, 충동의 분출을 촉발하는 조건들에 취약한 경향이 있다. 실패와 좌절은 인성을 뒷전으로 물러나게 하는 강력한 조건들이다. 실패하고 좌절한 개인들에게 본능과 충동은 무서운 복원력을 발휘한다. 보다 심각한 것은 개인의 실패와 좌절이 사회 병리와 맞닿아 있을 때다. 빈곤, 불평등, 빈부 격차, 학벌지상주의, 파벌주의 등은 사회의 건전성을 해치는 구조적 문제들로서 구성원들을 좌절과 실패의 길로 내몬다. 성공의 희망을 찾기 어렵고, 좌절과 실패가 확대 재생산되는 사회구조하에서 인성을 논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우리 사회 현실에서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인성의 발현을 차단해 버리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인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성 발현의 기회가 봉쇄돼 있다는 점을 교육 당국이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인성교육진흥법이 실패할 것으로 예상하는 두 번째 이유다. 인성교육진흥법의 실패를 예감하는 세 번째 이유는 교육 당국의 욕심이 지나치다 못해 산만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이 법에서 강조하는 인성 덕목은 여덟 가지인데 예(禮), 효(孝),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 등이 그것이다. 하나씩 뜯어 보면 모두 소중한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왜 효는 있되 충(忠)은 없으며, 책임은 있되 자율은 없는가. 또한 봉사와 희생은 중요한 인성 덕목이 아니란 말인가. 이렇게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중구난방이 되기 십상이다. 물론 법 제정 전에 정책 연구도 했을 것이며 전문가 공청회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세계 평화를 위한 최소한의 인성 덕목으로 프로이트가 제시했던 것은 ‘사랑’과 ‘공감’ 두 가지였다. 암울했던 식민 시절인 1937년 서울의 한 강연장에서 헬렌 켈러는 ‘이 세상을 향상시키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며, 사랑이 없는 국가와 사회는 퇴보할 뿐’이라고 역설했다. 확신이 없으면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인성 덕목에 대한 산만한 나열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핵심적 인성 덕목에 대한 교육 당국의 확신 부재를 보여 주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래도 성공하길 소망할 수밖에. 사랑과 공감의 마음으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