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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옐친­루츠코이,대선일 신경전/“안개속” 러정국 향후일정

    ◎“6월실시”­“2월동시총선”맞서/자치공과 합의안될땐 또 혼란 2명의 대통령과 2개의 내각이 존재하면서 그중 하나도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써 4일째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의 국정은 지금 「포고령」「결의안」이라는 이름의 종이쪽지들 위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서로 상반된 2종류의 포고령이 2개의 정부에서 끊임없이 발표되고 있다.시민들은 이 나라에서 지금 실제로 움직이는 조직은 「마피아」뿐이라고 자조한다. 옐친대통령은 표면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하고서도 사태를 마무리할 포인트를 좀체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23일 대통령과 의회는 향후 정치일정과 관련,각자의 계획을 밝혔다.옐친대통령은 대통령선거를 2년 앞당겨 내년 6월12일에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면 의회가 임명한 루츠코이대통령대행은 내년 2월 23일 대선,총선 동시선거를 제의했다. 현재 힘의 우위에 있는 옐친측이 더 이상 양보하지 않을 경우 향후 정치일정은 그의 구상대로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고 할수있다. 12월 총선에서 구성될 새의회는 상원격인 각 지방정부 대표들로 구성되는 연방협의회와 하원격인 연방의회의 양원제이다.상원은 전국 89개 지방정부에서 2명씩 대표를 선출,2백명 내외로 구성되며 하원정원은 4백명,임기는 상하원 공히 4년이다. 하원 4백명중 2백70명은 직접선거로,나머지 1백30명은 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하원은 통상적인 입법활동을 하게되고 상원은 러시아의 영토변경과 해외파병등 국가안위와 관련된 사안,그리고 연방내 각정부간 분쟁조정역을 맡는다. 새의회는 총선 뒤 30일안에 구성되며 가장 큰 임무는 새헌법 채택에 있다.아울러 내년 2월1일까지 대선법을 확정짓고 대선실시를 공고한다. 옐친이 구상하는 새헌법안에 따르면 새대통령의 임기는 현재와 동일한 5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23일 옐친대통령은 지난 91년 선출될 당시 한 단임약속을 철회,재출마의사를 비쳤다.반면 루츠코이는 이날 새선거에 출마 않겠다고 밝혔는데 이는 옐친의 선거일정 자체를 인정치 않겠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번복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봐야한다. 옐친대통령은 12월에 치를 총선절차에최소한의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방공화국대표회의를 우선 소집,여기서 총선공고 및 선거법을 채택한다는 구상이다.그러나 이 과정에 선거구 확정등을 놓고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간 엄청난 마찰이 야기될 것이란 우려가 높다.권한확대를 요구하는 일부공화국은 연방의회구성 대의원수를 인구비례 대신 각 지방정부별 동수로 하자는등의 의견도 내놓고 있다.대통령도 미국식으로 각 지방정부별로 선거인단을 뽑아 선출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들 지방정부와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모스크바를 제외한 지방도시에서 선거가 제대로 치러질지에 비관적인 견해가 높다.현재 옐친과 의회에 대한 지지분포는 지방별로 차이가 있지만 지방의회(소비예트)는 대부분 반옐친 입장들이다. 현재 러시아는 연방정부뿐 아니라 89개 지방정부도 행정부,의회(소비예트)로 이원화돼있고 두 조직간 권한다툼이 중앙과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다.따라서 모스크바에서 의회가 해산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다. 일부에서는 이런 점을 들어 옐친이 일단 밀어붙이되 의회와의 막판타협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김덕룡 정무장관 남미순방뒤 귀국

    김덕룡 정무1장관이 파라과이대통령취임식 경축특사로 참석하고 브라질·페루에 들러 교민들을 위로한뒤 20일 하오 귀국했다. 김장관은 귀로에 일본을 방문,새정부 지도자들과 만나 한일 우호증진방안을 협의하고 23일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실명제실시등 국내사정이 긴박해 조기귀국,금명 김영삼대통령을 면담할 것으로 알려졌다.
  • 일 잔재 없애 민족자존심 찾기/옛 조선총독관저 철거의미와 약사

    ◎옛총독부청사 헐기와 같은 맥락/미나미총독 건립… 아베까지 사용 김영삼대통령이 일제의 조선총독부였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철거토록 한데 이어 총독관저였던 청와대 구본관도 헐도록 지시한 것은 민족자존심을 되찾는다는 결단으로 평가되고있다.즉 민족정기를 살리고 민족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이며 이제 우리도 그만한 국가역량을 가졌다는 자신감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는 결코 한을 풀자는 감정적차원이 아닌 미래를 향한 정신적 기둥을 새로이 정립하자는 의미이다. 행여 의식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식민지잔재를 차제에 털어버리고 국제화시대에 발맞춰 이를테면 일본식관행·식민지시대의 잔영을 하루빨리 청산하자는 것이 결단의 배경으로 보인다. 물론 청와대 구본관은 지난 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초대대통령(48·8∼60·4)부터 윤보선(60·8∼62·3),박정희(63·12∼79·10),최규하(80·3∼80·8),전두환(80·8∼88·2),노태우전대통령(88·2∼90·10)까지 역대 대통령이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했던 오래된 건물이다. 그러나 구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기로 한만큼 그 건물의 부속건물이자 총독이 살았던 건물도 철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데 따른 결정이다. 특히 청와대 구본관 건물은 비가 샐정도로 상당히 낡은데다 현재 식당과 의무실을 제외하고는 빈건물로 철거비용도 많이 들지않아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청와대 구본관 건물은 일제때인 37년 10월 미나미 지로(남차낭)총독이 짓기 시작하여 39년 7월 완공되어 미나미총독을 비롯하여 고이소 구니아카(소기국소),아베 노부유키(아부신행)총독이 해방되기 전까지 살았다. 해방 직후 아베총독이 건물내부를 불태웠으나 미군정청의 하지중장이 수리해 사용했다. 48년 정부수립후 이건물은 경무대로 불리면서 이대통령이 기거했고 4·19이후 청와대로 불리며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겸 관저로 사용됐다. 노대통령 때인 90년 10월에 새관저가 완공되고 91년 7월에 새본관이 완공됨으로써 구본관건물은 사실상 그역할을 마감했다. 풍수지리학자 중에는 일제가 우리민족의 기를 누르기 위해 머리격인 북한산 인수봉에는 철주를 박았고,입 부분인 근정전과 광화문사이에는 총독부청사를,목 부분에 총독관저를,심장격인 현서울시청자리에 경성부건물을 지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제 「일」자형의 조선총독부건물과 총독관저가 헐리고 나면 서울에는 「본」자형의 현서울시청건물및 동경역사를 본떠 만든 서울역사,조선은행으로 사용했던 현한국은행이 일제의 잔재로 남게된다.
  • 파라과이대통령 취임/금덕룡정무특사 파견

    정부는 오는 15일 거행될 후안 카를로스 와스모시 파라과이대통령취임식에 김덕용정무제1장관을 경축특사로 파견,김영삼대통령의 축의를 전할 예정이다. 김장관은 귀로에 일본을 방문,7개 연합 여당 간부들과 향후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등 신내각의 대외정책에 관해 협의하고 자민당 주요 관계자들과도 만날 예정이다.
  • 아르메니아­아제르 영토분쟁 5년(포연속의 코카서스에 가다:하·끝)

    ◎전화속의 쿠데타… 아제르정정 불안/좌익정권 들어섰어도 경제난 가중/시민들 공산통치시절 질서 그리움도 아제르바이잔군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군간의 최초의 휴전은 아그람시가 함락된 이튿날인 지난 7월24일 자정을 기해 이루어졌다.3일간으로 예정됐던 이 휴전은 27일을 기해 1주일 더 연장됐다.카라바흐측은 3일 『아제르바이잔군이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한 휴전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10여일째 불안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다. 카라바흐측은 이번 공세를 통해 일단 아제르바이잔측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협상상대로 간주하게 하는 성과를 얻어냈다.앞으로 전개될 평화협상에서 중요한 고지를 선점한 것이다.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휴전을 성사시킨 것만해도 크게 안도하는 양상이다.지금 국내사정으로 보아 아르메니아군이 밀면 밀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아제르바이잔측이 매달리는 것은 국제적인 중재뿐이다. 수도 바쿠시를 비롯한 아제르바이잔의 주요 도시들에서는 자정부터 이튿날 상오 5시까지 통금이 실시되고 있다.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됐고 총동원령이 내려져 17세부터 35세 사이 남자들은 전원 출국이 금지돼 있다.그런데 쿠데타로 집권한 현아제르바이잔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전쟁대책이 아니라 쿠데타 뒤처리같은 인상이다.쫓겨난 엘치베이대통령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일이 오는 29일로 확정됐다.굳이 대통령직을 내놓지 않겠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대통령직을 뺏겠다는 것이다. 전선이 무너지고 피란민이 60만명에 달하는 나라에서의 국민투표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새 정권 출범과 함께 총리·국회의장을 비롯,국방장관 등 주요부처 장관 대부분이 경질되고 3일에도 쿠데타에 반대한 타이르 케리밀 최고재판소장이 해임됐다. 지난 6월4일 당시 카라바흐지구 사령관이었던 수레트 구세이노프(35)대령은 예하병력 2백여명을 이끌고 전선 반대방향인 바쿠시를 향해 진격해 들어왔다.오래 전부터 반란기미를 보인 그를 무장해제하기 위해 전날밤 정부군이 카라바흐 북서쪽 간자시에 위치한 그의 본거지를 기습,60여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이 싸움에서 이긴 그는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바쿠시쪽으로 4백여㎞를 진격해 들어와 엘치베이 대통령의 사임과 의회해산 등을 요구했다. 반란에 성공했지만 통치기반이 전무한 구세이노프는 지난 82년까지 13년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낸 가이다르 알리예프(70)에게 손을 내밀어 권력을 나눠 가졌다.그는 구소련공산당 정치국원까지 올랐다가 고르바초프대통령때 「부패 정치인」으로 청산됐던 인물이다.알리예프는 6월15일 임시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의장과 대통령대행으로 선출돼 본인으로선 「화려한」 재기를 이루었다.구세이노프는 총리직과 함께 국방·내무·안보 등 주요부서를 장악했다. 엘치베이대통령은 6월18일 밤 새벽 단신으로 바쿠시를 빠져나와 나키체반자치주의 고향마을로 피신해 버렸다.나키체반 자치주는 카라바흐와는 반대로 아르메니아 영토내에 떨어져 있는 아제르바이잔인 자치주이다.최근들어 아르메니아와의 국경쪽은 수시로 아르메니아군의 공격을 받아 풍전등화와 같은 곳이다. 이렇게 해서 92년 3월 민주독립국가 실현을 내걸고 엄청난 지지속에 출범했던 엘치베이 대통령정부 대신 좌익연합정부가 들어서게 됐다.의회는 해산되고 공산주의자와 구의회대의원 각 25명씩으로 국민의회(밀리 마질리스)가 새로 구성됐다.구세이노프는 취임일성으로 『아르메니아군에게 빼앗긴 실지회복과 국가계획경제를 통해 국민생활을 향상시키겠다』고 약속했다.알리예프는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외교의 제1목표로 내세웠다. 알리예프의 복귀와 군부 쿠데타의 성공은 이 지역 민주주의의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결과적으로 엘치베이정부는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도 패배를 계속했고 경제도 전혀 개선시키지 못했다.현재 7백만 인구중 1백만명,전체 노동인구의 25%에 해당하는 숫자가 실업자이다. 많은 시민들은 전쟁의 공포 못지않게 물건을 찾아다니기에 바쁘다.바쿠시내에서 만난 한 시민은 『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인가.질서도 먹을 것도 없는 민주주의보다는 차라리 강한 지도자가 질서를 찾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공산주의 시절에는 질서와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그게 아직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은 타민족과의 분쟁,거듭되는 정치적 불안,그리고 경제난으로 인한 국민불만 등 소연방해체 뒤 독립한 여러 공화국들이 앓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이다.그러나 보다 심각한 것은 아제르바이잔인들 스스로 이 문제들을 풀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 “「종전아닌 휴전」 잊지 말아야”/「정전협정」증인 유재흥 전 국방

    ◎북 핵대응 소홀해선 안돼 6·25의 산증인으로서 휴전협정체결 주역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유재흥옹(72·성우회회장·전 국방부장관)은 휴전 40주년을 맞아 『살아생전에 남북한이 통일을 이룩할 것으로 확신한다』면서도 『40년이 지나도록 통일의 그 날을 앞당기지 못한 책임의 일부를 느낀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해방후 반세기 가까이 남북한 대치상태가 끝나지 않은 것은 물론 북한의 핵개발문제로 남북한의 관계가 더욱 골이 깊어가는 것같아 전쟁당시 피흘린 영령들앞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52년1월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군사휴전회담 유엔측대표로 참석했던 유옹은 협정체결 40주년을 하루 앞둔 26일 이같이 자책했다. 유옹은 53년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당시에는 육군소장으로 회담장인 판문점에 있지는 않았으나 52년부터 열린 휴전회담에 막바지까지 계속 참석,휴전협정을 체결하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실무회담에 함께 참석했던 인사로는 미국극동사령관 다나조이제독을 수석대표로 공군의 다나장군,육군의 해리슨소장,해군의 리비소장등 유엔측대표 5명과 북한측은 수석대표 남일과 중공군등 5명. 『북한의 남침이후 유엔군의 지원으로 압록강·두만강까지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공방전 속에서 중공군을 물리쳐 전쟁을 끝내려면 만주의 군보급기지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됐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3차대전의 유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높아 결국 휴전이 바람직하다는 쪽으로 절충안이 모아졌다』고 유옹은 휴전의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이승만대통령과 학생들은 휴전에 들어갈 경우 남북통일의 절호의 기회를 놓칠 뿐만 아니라 재남침의 우려가 크다며 휴전을 극구 반대했으나 유엔군측의 대세에 밀렸다. 그는 또 53년6월28일 이대통령이 2만6천여명의 반공포로를 독자적으로 석방,유엔군측과 마찰을 빚고 7월13일부터는 중공군의 막바지 공세가 치열해 협정체결이 더욱 늦어졌다고 말했다. 유옹은 『협정체결 이후 남한은 국가재건에 총력을 기울인 반면 북한은 현재까지도 군사력강화에 힘을 쏟고있어 아직도 종전아닌휴전상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최근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북한의 핵개발문제에 대해 『상대당사자인 우리가 너무 등한시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유옹은 『전후세대들이 당시의 참상과 휴전상태에 머물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겨 평화통일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열쇠는 젊은이들이 갖고있다』고 말했다. 또 『일부 학자와 학생등이 당시의 전쟁발발상황을 교묘히 해석,남침이냐 북침이냐의 논란을 불러일으킬때면 전쟁에 직접 나서 보고 겪은 사람으로서 놀라움과 함께 분노까지 치솟는다』면서 『6·25는 확실한 남침』이라고 못박았다. 유옹은 『북한의 체제는 김일성사후 3∼5년뒤쯤 자연붕괴할 것』이라면서 『통일에 대비해 마음가짐을 더욱 새로이 다져야할 때』라고 말했다.
  • 반군,대통령사임 요구(지구촌단신)

    【바쿠 로이터 AP AFP 연합】 아제르바이잔 반군 지도자인 수레트 구세이노프는 23일 피신중인 아불파즈 엘치베이대통령에게 사임을 요구하고 그와 일체 회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 아제르바이잔 반군/수도 바쿠 입성개시

    【바쿠 AP 연합】 아제르바이잔 반군 지도자 수라트 구세이노프가 국정전반에 대한 통제를 선언한 가운데 반군은 22일 수도 바쿠에 입성하기 시작했으며 아불파즈 엘치베이대통령은 바쿠로 귀환해 수라트와 회담하라는 최고회의(의회)의 요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대통령 대변인이 22일 밝혔다. 대변인은 반군이 탱크와 중무기들을 바쿠 외곽에 남겨둔 채 민간 자동차등을 이용해 바쿠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변인은 이와함께 엘치베이 대통령이 22일중으로 반군 지도자 구세이노프와 회담을 갖기위해 바쿠로 귀환할지 여부를 최종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아제르대통령 수도탈출/반군공격 피해

    ◎최고회의의장,전권장악 발표 반군들의 사임압력에 몰려온 아제르바이잔의 아불파즈 엘치베이 대통령(55)이 17일 수도를 탈출했으며 공산당 출신인 게이다르 알리예프 최고회의 의장이 전권을 장악했다고 이타르타스통신과 인테르팍스통신이 보도했다. 엘치베이 대통령은 이날 그의 사임을 요구하는 반군이 수도 바쿠를 향해 진격하고 있는 가운데 반군과의 무력대결을 피해 바쿠를 탈출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은 전했다. 엘치베이 대통령은 이날 상오 국방·내무·보안장관들이 반군의 수도 진공을 저지하지 않을 것임을 밝힘으로써 신변위협이 증대되자 바쿠를 빠져나가 전용기편으로 아제르바이잔내 그의 고향인 니히체반공화국으로 도피했다고 통신은 전했다.니히체반공화국은 아제르바이잔내 자치공화국으로서 아르메니아와 터키·이란에 둘러싸여 있다. 엘치베이대통령은 그러나 사임이나 권력이양 의사를 천명하지는 않았다. 엘치베이 대통령이 도피한 뒤 알리예프 의장은 TV성명을 통해 자신이 국가원수로 국정 전권을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1년전 대통령에 취임한 엘치베이는 그동안 나고르노­카라바흐 민족분규의 해결방안을 놓고 그의 정적들과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빚어왔었다.아제르바이잔내의 아르메니아인 다수 거주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지난 5년간 계속되며 1천5백여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 “방송국서 부친 납북”/유공지정거부 취소소

    전남 장흥읍 건산리에 사는 김영웅씨(51)는 12일 6·25전쟁 당시 아버지 도현씨(당시 38세)가 이승만대통령의 사수명령에 따라 방송국 송신소를 지키다 피랍된 만큼 국가유공자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며 보훈처장을 상대로 「국가유공자 지정거부취소」 청구소송을 서울고법에 제기했다.김씨는 소장에서 「6·25 전쟁당시 한국방송공사(KBS)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 송신과장 겸 연희송신소장으로 재직하던 아버지가 이대통령의 국가 주요기관 사수명령에 따라 송신소를 지키다 납북된 사실이 방송계 등 각계에 의해 확인된 만큼 국가유공자로 대우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대통령의 위법한 명령으로 인해 국가 유공자들의 후손들이 43년간 입은 피해액 9조99억원을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며 『침략전쟁을 일으킨 북한·중국·러시아등 2차 배상청구인들도 인류평화기금 등으로 13조원씩 모두 39조원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 중학생때의 꿈 대통령되기까지(김영삼 결단·돌파 40년:하)

    ◎정치역정/정치사 고비마다 대세 이끌어/창랑 만나 정치투신… 25세 의원당선/민주화 일념 야당 40년에 숱한 고난 정치거산 김영삼 ­. 한국정치사와 함께 성장해온 그는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결단의 정치인」 「소신과 용기의 소유자」 「대세와 순리를 중시하는 지도자」등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화려한 경력만큼이나 많다. 그는 만25세의 어린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돼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난과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38세에 원내총무에 올라 5회연속 피선되었으며,우리 정치사에 전무후무한 국회의원 9선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야당총재 4번,여당총재 한번의 신기록도 갖고있다. 그러나 그를 정치지도자로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화려한 경력때문이 아니라 그가 한국정치의 큰변화를 주도해온 결단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현대정치사의 대세를 주도했다고 할수있다. 1950년 그는 처음으로 정치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49년 정부수립 기념웅변대회에서 외무부장관상을 타게되었고 이때 외무부장관인창랑 장택상씨와 인연을 맺게되었다.50년5월 국회의원선거에 장씨가 출마하자 그의 선거운동을 도왔고 51년부터 53년까지 장씨가 국회부의장·국무총리시절 비서관으로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25세가 된 김영삼은 제3대 국회의원에 출마,최연소나이로 고향인 거제에서 당선됐다. 이때 그는 자유당소속의원이었다.그는 경무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승만대통령에게 3선개헌의 부당성을 제기했으나 오히려 이대통령으로부터 무안을 당했다.이에 자유당의원이면서도 3선개헌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7개월만에 자유당을 탈당했고 이후 소장파의원들과 사사오입개헌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김영삼은 90년1월 3당합당 때까지 37년간 오로지 야당외길을 걸었다. 4·19와 5·16은 김영삼을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게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4·19후 재선의원인 김영삼은 당시 신민당소장파의원을 중심으로 정치정화운동서클인 「청조회」를 구성하는등 청년정치지도자로서의 활약이 돋보였다.5·16이후 신민당이 해체되고 대부분의 정치인이 정치정화법에 묶여있는 상태에서도 그는 「군정종식」과 야당전열재정비를 위해 힘썼으며 63년3월 군정연장반대시위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는 수난도 겪었다. 김영삼은 63년12월 제6대국회의원선거에서 전국 최고득표로 당선되었다.이후 그는 제1야당에서 5차례의 원내총무에 피선되면서 군사정권과의 투쟁을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했다.3공화국정권에 대항하여 야당을 진두지휘하던 원내총무시절 그는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와 결단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70년 그는 「40대 기수론」을 제창하여 일약 야권의 지도자로 발돋움하게된다.그의 나이 42세였다.김영삼은 70년 신민당대통령후보지명전에서 1차투표에서는 이겼으나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씨에게 패했다.그는 패배후 깨끗이 승복하고 김씨의 당선을 위해 힘을 아끼지않았다. 72년 유신헌법선포당시 김영삼의 행동은 그가 국민적지도자임을 나타내준다. 당시 그는 미국을 방문중이었다.그를 초청했던 라이샤워 코헨 교수와 미국무부관리들은 그의 투옥을 우려해 귀국을 만류했으나 그는 『국민과 동지들이 겪고있는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며 곧바로 귀국하는 용기를 보였다.귀국후 그는 곧바로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유신헌법 개정운동에 착수,기나긴 반유신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74년 유진산총재가 별세하고 그는 40대나이에 만장일치로 신민당총재에 당선됐다.정계투신 20년만의 야당당수취임이었다.총재 김영삼은 이후 개헌투쟁을 진두지휘했고 이때 그가 인용한 「닭의 목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암울한 시대에 민주화의 희망을 안겨준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김영삼은 77년 2번째 야당총재에 취임,반유신투쟁의 선봉에 섰다.총재취임후 경찰의 신민당사난입,총재직무정지가처분,의원직제명등 온갖 박해가 계속됐다.그러나 그는 『잠시살기위해 영원히 죽는길을 택하지 않을것이며 잠시 죽는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길을 택할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반유신투쟁을 강화해 나갔다.김총재의 의원직제명에 항의해 신민당의원들은 전원 사퇴서를 제출했고 부산과 마산에서는 소요사태까지 발생,마침내 10·26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80년 서울의봄을 거쳐 신군부의 등장으로 그는 81년5월까지 두번째의 가택연금을 당했다.김영삼은 이때 1년간의 연금기간을 「자신과 싸운 분노의 1년」이었다고 술회한다. 83년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그가 결행한 23일간의 단식은 그동안 숨죽여온 민주화투쟁에 불씨를 당겼다. 84년 민추협결성→85년 신민당창당→2·12총선돌풍→직선제개헌운동→87년6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김영삼은 6·29선언으로 맞은 87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했다.야권분열로 인한 패배라고 그는 솔직히 시인했다.이후 총선에서는 헌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정치·사회전분야는 혼란이 계속됐다.김대통령당선자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단행했다.헌정사상초유인 여당과 야당의 통합을 추진한 것이다.그에게는 가장 힘든 결단이었다.일각의 비난도 거셌지만 그는 극복했다. 3당합당이후 김영삼대표의 행보는 순탄치만은 않았다.내각제파동을 겪었고 이질적인 계파간의 갈등은 끊임없이 그를 뒤흔들었다.그는 합당후 2년간을 야당생활 40년보다 힘들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정면돌파식 승부로 기어이 민자당대통령후보 경선에 승리했고 이제 대통령선거에도 당당히 승리했다.제1공화국에서 제6공화국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41년간 정치행로의 총결산이었다. 그는 『역사에 단순히 기록되는 대통령이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는 대통령이 되고싶다』고 말해왔다. 국민들은 지금 그의 경륜과 탁견·소신과 의지에 큰 희망을 걸고있다.
  • 백범 암살전 이 대통령 만나/안두희씨 회견

    ◎“범행 고무하는 말 들었다” 백범 김구선생암살범 안두희씨(75)는 24일 하오6시 서울 종로구 동숭동 우당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범행직전인 지난49년6월20일 당시 경무대 대통령집무실에서 이승만대통령을 직접 만났으며 이 자리에서 이대통령으로부터 백범암살을 고무하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안씨는 구체적인 암살일시와 방법에 대해선 자신이 속해있던 포병의 장은산사령관으로부터 명령받았으며 채병덕육군참모총장을 통해 신성모국방장관이 배석한 자리에서 이대통령을 만나 윗사람들 이야기를 잘 들으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경찰은 현장에 안씨를 데리고 나타난 권중희민족정기구현회회장(56)을 안씨에 대한 납치등의 혐의로 인천중부서로 연행,조사중이다.
  • 정부,기후·생물다양성협약 서명/당초 보류방침 변경

    ◎50국이상 비준뒤 90일지나야 발효/리우환경회의 폐막 【리우데자네이루 연합】 리우 지구정상회의에 참석중인 정원식국무총리는 13일 하오(한국시간 14일 새벽)당초 정부방침을 변경,기후변화 협약과 생물다양성 협약에 전격 서명했다. 정총리는 이날 리우센트로에서 노창희외무차관 등 한국 대표단과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방침을 결정한뒤 기후변화 협약은 1백52번째,생물다양성 협약은 1백54번째로 각각 서명했다. 정부는 당초 이 두가지 협약의 서명 문제와 관련,국무회의 통과 등 국내 절차가 필요하고 일부 협약 서명에 비판적인 의견도 있어 이번 정상회의 에서는 서명을 보류하기로 결정했으나 예상외로 서명국가가 크게 늘어나 정총리가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총리의 협약서명은 또 지금까지 서명 거부입장을 밝혀온 미국이 기후변화 협약에 서명했으며 「오는 2천년까지 지구 온난화 현상의 원인 물질인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지난 90년 수준으로 안정화 시킨다」는 감축일정 조항이 완전히 삭제된것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보인다. 기후변화 협약과 생물다양성 협약은 국내 비준 절차를 거쳐 비준서,가입서,승인서,수락서 등 4가지 가운데 하나를 기탁한 국가가 50개국이 되고 그때부터 90일이 지난후 발효된다. 이들 협약은 또 서명후 가입을 하지 않는다 해도 법적인 제재조치는 없지만 가입국들로부터 갖가지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대표단의 한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이들 협약의 최종안을 받은것이 이달초로 당초에는 이번 정상회의에서 서명을 보류키로 했었다』며 『그러나 환경관련 정상회의인 리우 정상회의에서 예상외로 많은 국가들이 서명함에 따라 전격 서명하게 된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정총리는 이날 상오 숙소인 리우 아틀란티카 호텔 접견실에서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파라과이대통령과 만나 양국간의 협력 증진방안을 논의 했으며 정상회의 기조연설후 브라이언 멀루니 캐나다총리,이온 일리에스쿠 루마니아대통령과 잇따라 면담했다. 정총리는 14일 상오(한국시간 14일 밤)지구정상회의 문건서명및 폐회식에 참석함으로써 리우데자네이루에서의 공식일정을 모두 마치게 되며 15일 상오 아르헨티나를 공식 방문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날 예정이다. ◎5개협정 조인 【리우데자네이루 외신 종합】 인류의 보다 나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리우데자네이루의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가 14일(현지시간)1백여국 정상들이 「리우선언」과 「의제 21」등 5개 협정에 대한 조인식을 마침으로써 폐막됐다. 12일간에 걸쳐 열린 이번 회의는 환경보전과 개발,자금출연등을 둘러싸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간의 이해가 팽팽한 대립을 빚어 당초 기대했던 것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실무회의와 정상회담을 통해 환경보전을 위한 기본원칙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는 27개항의 「리우선언」과 이의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담은 「의제 21」,「기후변화협약」,「생물다양성협약」,「삼림원칙」등 5개 협약에 대한 조인이 이뤄졌으며 생물다양성협약과 기후변화협약은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다.이중 「의제 21」은 앞으로 각국의 환경보전 정책수립에 초석이 될것으로 보인다.
  • 백범암살/엇갈리는 증언… 진상규명 본격화해야

    ◎일제청산·단정반대로 이박사와 갈등/극우·친일파 조직적음모 여부가 초점/안 1년복역후 출감… “암시”발언 의무투성이 백범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진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암살지령을 내린 배후는…? 사건발생 43년이 지나도록 줄곧 단독범행을 주장해온 암살범 안두희씨(75)의 최근 증언으로 이 사건이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안씨는 최근 두차례에 걸쳐 『김창용육군특무대장·장택상초대 수도경찰청장,노덕술수도경찰청수사과장,최운하수도경찰청정보과장 등이 나와 반공이념·인생철학이 같았으며 이들 모두 백범을 미워했다.누구로부터 암살지시를 받지는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알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증언해 갖가지 추측만 무성하게 낳고 있다.백범암살사건의 전말과 관계자들의 증언,앞으로의 사건전개 전망등을 짚어본다. ○안두희발언 계기 사건전말·관계자주장 재조명 백범은 1919년 중국의 상해로 건너가 이봉창·윤봉길의사등의 의거를 지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몸바쳐 임시정부의 주석에까지 올랐다.그는 8·15해방을 맞아 45년11월 26년만에 광복 조국에 돌아왔다. ◎반탁운동에 앞장 백범은 서대문 경교장에 숙소를 정한 뒤 28년 이시영 이동령 등과 함께 중국에서 창당한 한국독립당을 이끌며 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47년 11월 국제연합(유엔)은 남북총선거에 의한 독립정부수립을 결의하고 48년초 총선거감시위원단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그러나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은 남북분단을 고착화 시킨다』면서 5·10선거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등과 4자협상등을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백범은 8월15일 이박사를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경교장에 머물며 일제잔재의 청산과 통일정부수립 등의 노선을 견지,갈수록 이박사등과 거리가 멀어졌다. 이같은 상황아래서 49년 6월26일 정오 경교장 2층 집무실에 있던 백범은 육군포병사령부 소속 안두희소위가 쏜 4발의 총탄에 맞아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안두희는 범행직후 『단독범행』이라고 밝힌뒤 헌병사령부 김병삼대위 등 헌병들에게 연행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재판장 원용덕소장)에서 「살인및 군인의 정치관여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태원 형무소에 수감됐다.한달뒤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곧이어 징역15년으로 감형됐으며 백범 1주기를 하루 앞둔 50년 6월25일 6·25의 발발과 함께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석방됐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7월10일 육군소위로 복직됐으며 51년 국회질의에서 이같은 사실이 문제가 되자 소령으로 예편,강원도에서 식품군납업체를 경영하게 됐다. 그의 「단독범행」주장에 대해 49년8월 한독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이대통령에게 ▲백범이 안을 응대한 시간이 겨우 3분에 불과하고 안과 같은 청년과 정치언쟁을 벌였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범인의 심리로 일시적 흥분에 의한 것이면 1발로 족할 것이며 저격후 8발의 탄환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던지고 체포당한 것은 안의 개인적 행동으로 간주할 수 없다▲경교장 경비경찰관의 손에 체포되는 즉시 난데없이 헌병대가범인을 데려간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등의 진상규명 요청서를 보내 의문을 제기했다.백범의 장례는 그해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엄수됐다. ◎새로운 내용은 없어 백범암살에 대한 안두희씨의 최근 증언이후 안씨의 배후문제에 대한 또다른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으나 그동안의 증언들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며 안씨 역시 최근 두차례의 증언에서 일부 대목을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안두희씨(범인)=당시 백범을 암살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지는 않았으나 김창용육군특무대장 초대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씨와 친일경찰관으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던 노덕술,정보과장 최운하씨 등으로부터 백범을 암살해야 된다는 강력한 암시를 받고 공감해 범행했다. ▲김신씨(70·백범아들·전교통부장관)=김창용육군특무대장 등이 지시했다는 안씨의 증언은 빙산의 일각이다.이승만정권하에 있던 친일세력과 해방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세력을 중심으로 당시 군부와 경찰·정계 고위층을 망라한 정권차원의 배후세력이 선친살해에 관련되었다는 일부 증거를 갖고 있다.그러나 정확한 명령계통을 밝히지 못해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진상규명 작업은 계속돼야 한다. ▲최대교씨(91·변호사·당시 서울지검장)=사건직후 최초지휘때 김병삼헌병대위가 한때 경교장출입을 막기도 했다.권승렬법무부장관과 함께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이범석국무총리 집에 갔으나 꿩사냥을 갔다고 해 신성모국방장관 집으로 가 아프다는 신장관을 겨우 만나 『경무대에 빨리 백범피살 사실을 알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됐다』고 말했다.또 검사장인 나도 모르게 범인 안씨에게 비밀당원증을 발급해준 김학규 한독당 조직부장 등 민간인 7명의 살인교사죄 구속영장을 김익진 당시 검찰총장이 직접 청구,한격만서울지법원장에 의해 발부됐다.이를 김총장에게 항의하자 『저 영감(이대통령 지칭)이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러니 양해해 달라』고 해 백범암살 수사가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얼마뒤 사표를 냈다. ◎“동족에 죽을일 없다” ▲선우진씨(71·당시 백범비서실장)=백범피격 하루전 대광고교 교감 박동엽씨가 찾아와 『옛 제자인 김정진소령을 만났더니 역시 제자인 오병순소위가 암살조에 가담,괴로운 나머지 털어 놓았다』고 밝혀 『몸조심 하십시오』라고 백범선생께 말했다.백범은 『동족에게 맞아 죽을 일은 하지 않았다』면서 이같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박씨로부터 들었다. ◎인천에서 사격 훈련 ▲정관일씨(71·안씨와 육사특8기 동기생으로 포병사령부에 함께 근무)=안씨는 당시 장은산포병사령관의 지시로 인천앞바다 비밀사격훈련장에서 주5회 극비사격훈련을 받았다. ▲홍영기씨(74·국회의윈·당시 육군법무감실검찰과장)=안씨를 기소한뒤 채병덕육참총장이 부르더니 『안두희에게 몇년을 구형할 생각인가』고 물어 『살인범이니 마땅히 사형』이라고 대답했더니 『사형은 너무 심하니 징역10년만 구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후 은폐위한 사기 ▲한필동씨(72·사건당시 김창용특무대장과 같은 부대에 근무·미국거주)=김창용의 지시로 백범을 암살했다는 안두희씨의 증언은 진짜 배후인물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다.내가 알기로는 신성모국방장관·채병덕육참총장,김태선내무장관 등의 비호아래 장은산포병사령관이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전봉덕헌병사 부사령관이 작전을 지휘하는등 백범암살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김교식씨(56·현대역사자료연구소장)=안씨의 증언은 앞뒤가 맞지않으며 직접 명령을 내렸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뒤 수사과정에서 처음 만난 김창용을 끌어들였을 뿐이다.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씨 등도 암살사건에는 개입하지 않았고 김태선씨 또한 김지웅을 지원하며 경찰쪽에서 별도의 암살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포병장교인 안씨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암살계획의 시나리오는 포병사령부쪽에서 실행을 맡고 헌병사령부쪽에서 현장을 감시하며 육군정보국제3과에서 수사종결처리를 맡는 것으로 짜여진 것으로 보는게 옳다. ○서거43년… 「백범암살 재조명」을 보며/박성수 정문연교수 ◎민족정기 바로잡는 계기로/「통일민족주의」의 큰뜻 되새겨야 할때 최근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가 범행 40여년만에 드디어 일부 배후 인물을 밝혔다 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고 있다.그러나 그의 증언 내용이 겨우 빙산의 일각을 드러냈을 뿐 바다속의 엄청난 얼음덩어리는 여전히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잠겨 있다. 안두희의 증언 자체가 이처럼 불성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행이 얼마나 중대한 과오였는가에 대해서도 거의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는게 세론이다.아직도 안두희는 자신을 애국지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그의 증언 태도는 오만하기까지 했다. 백범 김구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큰 인물이다.그의 이름 두자를 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를 쓸 수 없음은 물론 광복이후 47연사도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백범이 살아 있었어야 한다』는 말은 어느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대답일 것이다.백범은 생전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받게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었다.「아름다운 나라」란 더러운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선생 자신이 아름드리 거목이듯이 이 나라도 아름드리 나무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군정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의 불가능에 도전한 사실을 안두희와 같은 극우반공주의자들은 단순한 용공주의자로 몰아 세울수 있었을지 모른다.그러나 평생을 통일운동에 몸바친 선생의 혈적을 모르는데서 온 무지의 소치였다.흔히 임정을 상해시대 14년(1919∼32년),이동시대 8년(1932∼40년),중경시대 5년(1940∼45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27년을 단순한 독립운동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된다.그것은 동시에 통일운동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중경시대에 이르러 모든 민족주의 진영은 임정산하에 통일되었으나 공산주의자들 만은 연안으로 도주하여 중공산하에 들어갔으며 1950년 6·25 남침의 주력부대가 되는 김무정의 소위 조선의용군이 되었다.김구선생은 귀국후 임정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통일운동을 광복된 조국에서 실현하려고 했다.그것이 군정반대로 나타난 것뿐이다.그에게 있어 남북통일은다름아닌 한국독립운동의 연속이요 완성이었던 것이다. 좌우익투쟁의 피비린내나는 해방정국에서 그것은 부당하게도 김구로선으로 명명되어 그 실질이 왜곡되고 말았으나 그것은 김구자신의 역사신앙이었던 것이다. 만일 김구선생이 그때 없었어도 될 안두희라는 인간,아니 짐승에게 쓰러지지 않고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모두들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다른것은 몰라도 최소한 남북의 분단상태를 악용한 이른바 사이비 통일민주주의만은 이땅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 것이고 진실된 통일민주주의가 자라나서 통일의 날을 앞당겼을 것이다. 오늘처럼 김구선생의 독립정신,통일정신이 절실한 때가 또 있었을까.또 오늘처럼 우리나라가 아름드리 나라로 커야 한다고 바라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다시한번 경교장의 비극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앞날을 생각할 때라 할 것이다.
  • 운경 이재형선생 영전에…

    ◎“차분히 통일 준비” 당부 귓전에 쟁쟁 평소 존경하던 운경 이재형선생이 타계하셨다는 부음을 듣고 나는 망연자실하였다.운경선생은 명문의 후예로서 일제시에는 망국민의 살 길은 산업을 일으켜 경제력을 제고하는데 있다는 남다른 포부와 항일자주의 뜻을 품고 금융계에 종사하였다. 광복후에는 반공립국과 민주지상·국가지상을 내세워 대한민족청년단을 조직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다하였으며 향리에서 절대지지를 받고 자유당의 최년소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6·25동란시에는 가족을 버리고 남하하여 난민수습과 구국전선에서 싸우던중 이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역시 최년소 상공장관으로 발탁되어 국난극복에 큰 공헌을 하시었다. 운경선생은 한때 나와 같이 당시 난마와 같은 정국에서 신민당을 이끌어 가는데 탁월한 경륜을 발휘하시었으며 5공시절에는 여당인 민정당을 대표했으며 국회의장의 대임을 맡기도 하시었다. 그의 여야 정치생활을 놓고 정치변신을 시비하는 일부 구설이 있음직도 하지만 운경선생께서는 나라의 위급한 국란을 당하여서는 여야를 넘어서서 오로지 민주국가의 내일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몸소 지키겠다는 초당적인 사신위국의 일념으로 헌신하신 국가관과 시국관이 분명한 정치인이었다. 운경선생의 생애는 오로지 강직성과 직관력,그리고 혜안으로 우리나라 정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분이다. 운경선생과 같은 분의 피나는 공헌으로 공산주의가 지상에서 사라지고 남북통일의 최대난제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때,김부자 세습왕조가 와해되고 생지옥 속의 북한동포를 해방시키는 날을 기약하면서 나에게 허황된 통일바람에 들뜨지 말고 내실을 도모하고 국민화합과 축적있는 대비를 하라는 평소의 당부가 아직도 귓전에 머물고 있다. 운경선생은 민족진영의 총결합체인 「통일준비국민협의회」의 고문직도 흔쾌히 수락하시었다. 평화통일을 못보고 가신 임이나 남은 우리가 다함께 원통해 마지 않는다. 모든 정치인의 사표가 되시는 운경선생 영전에 삼가 머리숙여 명복을 빈다.
  • 「후보문제」 특정계파 옹호를 배제/노 대통령 기자간담에 담긴 뜻

    ◎당·여론 검증거친 「자연스런 해결」 표명/내년초엔 어떤 형태든 정치일정 “가닥” 노태우대통령이 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송년간담회에서 민자당 차기대권후보 결정시기에 유연성을 보인 것은 미리부터 특정 계파입장을 옹호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이해된다. 민자당내 민정·공화계가 내년 총선후 대권후보결정을,민주계는 총선전 결정을 주장하며 첨예대립을 나타내고 있는 상황에서 노대통령은 좀더 시간을 두고 양측 입장의 장단점을 검토해보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이는 당총재 국가통치권자로서 대권후보결정문제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전제아래 합리적 수순을 밟아 해답을 찾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노대통령이 이날 밝힌 문제해결의 수순은 민자당내 논의→대통령에게 건의→여야및 여론을 참작한 결정등이다.노대통령은 이같은 결정이 연초에는 날수 있다고 밝혀 늦어도 내년 1∼2월까지는 차이대통령후보문제 가시화시기를 비롯한 정치일정의 가닥이 잡힐 것임을 시사했다. 여기서주목할 부문은 노대통령이 당건의의 「합리성」과 「여론을 참작한 자연스러운 결정」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14대 총선 전과 후 어느때 민자당후보를 결정하느냐의 장단점에 대한 당과 여론의 검증절차를 거쳐 최대한 합리적 방안을 도출해 보겠다는 뜻으로 관측된다. 노대통령의 뜻이 그렇다면 최근 민자당내 민주계에서 벌어지고 있던 서명작업과 국정쇄신 요구는 정당성이 없어진다고 볼 수 있다.민주계는 노대통령이 총선전 대권후보 확정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나아가 김영삼대표를 대권후보로 만들 의사가 없다고 속단,일부 극단 행동을 시작했었다. 또 노대통령이 당내 논의를 거친 건의를 받겠다고 밝힌 것은 일각에서 거론되는 노대통령과 김대표간 대권담판 가능성의 소지를 없애고 있다.중구난방식 주장이나 권력다툼식의 「담판」 보다는 합리적 절차에 따라 당내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 건의를 수용할 수 있다는 생각인 듯 싶다. 구체적으로는 김영삼대표와 김종필·박태준최고위원등 3최고위원이 미리 모여 후계문제에 대한 의견을 집약한뒤 노대통령에게 건의하는 방식을 상정해볼 수 있다.보다 공개적으로 한다면 당무회의 논의를 거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차원에서 대권문제에 대한 결론이 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당내 논의를 통해 어느 편의 주장이 타당한지를 둘러싼 대세가 형성되면 노대통령이 결단을 내리는 방식이 될 확률이 높다.어느 경우든 노대통령은 당과 여론의 다수가 원하는 입장을 택하겠다는 것이므로 불만세력이 극한 반대를 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 한ㆍ케냐 협력강화 논의/어제 정상회담

    노태우대통령은 17일 하오 청와대에서 케냐의 다니엘 아랍 모이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ㆍ케냐간 실질협력방안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회담에서 지난 64년 수교이래 양국관계의 발전에 만족을 표시했으며 케냐가 유엔과 비동맹권에서 우리의 입장을 계속 지지해 줄 것을 당부하고 남남협력을 적극 추진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모이대통령은 한국의 통일정책을 지지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과 긴밀히 협조해나가겠다고 말하고 한국이 케냐의 관광개발에 적극 참여하고 기술센터 설립에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노 대통령은 대외개발협력기금으로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 오늘 한­케냐 정상회담

    노태우대통령은 17일 하오 청와대에서 동부아프리카 케냐의 다니엘 티 아랍 모이 대통령과 한ㆍ케냐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경제협력 등 공동관심사에 대해 논의한다. 이날 상오 방한하는 모이대통령은 오는 20일까지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 외에 국내산업시설을 시찰한다.
  • 윤보선 전대통령 영전에/이상돈 제헌ㆍ5ㆍ6대 의원

    ◎해위,그 민주의 발자취를 기리며… 해위선생.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뜻밖의 부음을 듣고 만감이 교차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해위선생은 저와 동향이고 또 8ㆍ15 해방이후 같은 정당에서 모셨던 인연을 돌이켜 보면 새삼 그리운 마음과 함께 슬픔 또한 가눌길 없습니다. 비록 해위선생께서 93세라는 천수를 누리셨다지만 좀더 사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해위선생께서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개인으로서는 안일한 생활을 하실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는 민족과 겨레의 해방을 위하여 해외 임시정부에 몸을 담는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하셨습니다. 8ㆍ15 해방후에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공산당과 싸우는 유일한 민족정당인 한국민주당의 발기인이 되셔서 당의 중책도 맡으셨지요. 또 이승만박사가 귀국하자 이박사를 모시고 해방후의 혼란한 정국에 물심양면으로 헌신하셨습니다. 정부수립후에는 이대통령의 명에 따라 상공부장관과 서울특별시장의 중책도 탁월한 능력으로 수행하셨습니다. 제3대 국회에서 서울종로구에서 당선되어 의정생활을 하는 동안 이대통령이 독재를 강화하자 지난달 이대통령과의 관계를 과감히 끊고 유일야당인 민주당에서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적으로는 이박사와 친했지만 공적 입장에서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꿋꿋한 의지를 보이셨지요. 마침내 선생의 염원대로 자유당 독재정권이 붕괴되고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불과 9개월이 못된 시점에서 박정희육군소장의 군사쿠데타로 매우 곤란한 처지에 서게 되셨습니다. 내각제하의 대통령이 비록 상징적인 존재였지만 일부 군인들의 헌법을 파괴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가 마땅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생께서는 국내의 혼란과 국군끼리의 충돌,공산집단의 무모한 행동을 우려하셔서 우유부단한 행동을 취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만 저 자신도 그 당시는 해위선생께서 단호히 군사혁명을 반대하고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해위선생께서는 마침내 일부 정치군인들의 행동에 회의를 느끼고 결코 타의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신념에 따라 대통령직을 버리고 하야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민정당을 창당하는등 오로지 군정종식의 일념으로 싸우셨습니다. 5공화국 탄생이후에 해위선생은 박정희군사정권에 대한 냉혹했던 태도와 달리 중도적 입장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했습니다. 국내정치가 또다시 정쟁에 휘말리기 보다는 안정을 희구했고 선생 또한 노령이었던 때문으로 이해됩니다. 같이 반독재투쟁 대열에 동참했던 후배로서 지금 고인이 되신 선생의 족적을 되돌아보니 일제시대와 해방후의 우리 정치와 민족사에 남기신 공적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국회에서,또는 거리에서 반독재를 소리높여 외치시던 선생의 모습을 회고하니 비록 천수를 누리셨다고는 하나 추모의 염은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해위선생,명복을 삼가 빕니다.
  • 5ㆍ16­유신등 헌정 굴곡 한몸에/윤보선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

    ◎군사혁명에 “올 것 왔다” 이듬해 퇴진/대권경쟁 2번 실패… 반 박정희 투쟁 93세의 일기로 타계한 해위 윤보선. 그는 고집의 거목정치인이었다. 그의 일대기는 40년 헌정사의 점철된 굴곡을 그대로 투영해 주고 있다. 이 나라 최후의 구 정치인 1세대의 보루를 지켜온 그는 해방후 손꼽히는 과묵한 선비형 정치가로 입신하다가 조병옥박사를 잃어버린 민주당구파가 그를 보스로 추대하면서부터 무섭도록 고집센 지도자가 되었다. 4ㆍ19혁명후 민주당정권시절 실권은 없지만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지위에 오른 그는 5ㆍ16군사혁명을 만나 고독한 몸부림으로 대처하다가 박정희씨와 두차례나 대권경쟁을 벌여 패했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반독재의 강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961년 5월16일 상오 9시30분 윤대통령은 혁명군지도자 박정희장군과 첫 대좌를 하게되자 그 유명한 『올것이 왔구나』하는 탄식을 지었다. 훗날 해위는 이 대목과 관련,군사쿠데타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온다고 걱정하던 일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났구나』하는 탄식조의 말이었다고 해명했다. 그의 생애중 가장 긴 날은 5ㆍ16 새벽부터 17일 밤까지 40여시간이었다. 윤대통령은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의 쿠데타군 진압작전의 승인요청에 『적이 집결하고 있는 휴전선을 눈앞에 두고 아군끼리 피를 흘릴 수는 없다』며 거절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그는 1897년 8월26일 충남 아산군 음봉면 신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으며 그의 조부는 육군부장으로서 삼남도포사를 지내는등 무골의 집안이었다. 그는 조부를 따라 서울로 와 소학교를 마친 후 17살때 일본으로 건너가 현 경응대학 전신 중학부에 들어갔다. 20살때 몽양 여운형을 따라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의 실황을 알리는 진단보를 주보로 발간하기도 했다. 22살때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로 유학을 가 3년동안 공부를 하면서 영국과 영국국민성을 배웠다. 그는 언제나 단추 3개가 달린 전통적인 영국식 신사복을 착용하기를 즐겨했는데 이같은 격식도 이때 몸에 익힌 것이라고 한다. 에든버러대를 졸업한 후에도 수년간을 유럽대륙등을 여행하며 세계정세를 살펴본 뒤 35살되던 해인 1932년 여름 16년만에 고국에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침묵의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1945년 8ㆍ15해방이 되자 아놀드소장이 군정장관으로 있는 미군정청 농상국고문으로 일했다. 48년 제헌국회의 5ㆍ10선거에 고향인 아산에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고 이승만박사가 국회의 초대의장으로 당선되자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정부수립이 되고 이승만대통령이 조각을 하면서 서울시장에 그를 임명했는데 이는 그에 대한 이대통령의 각별한 신뢰감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19세때 치렀던 민씨와의 혼인은 처음부터 결합이 되지 않았고 민씨에게 딸들이 있었으나 모두 출가시켰기 때문에 서울시장이 된 그로서는 매우 외로웠다. 그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지금의 공덕귀여사(당시 한국여자신학교 교수)와 연분을 맺었다. 서울시장을 6개월여 맡은 그는 다시 임영신장관 후임으로 상공장관으로 전임된다. 6ㆍ25동란중 국민방위군사건이 터지자 당시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그는 이대통령에게 그가 본 처참한 정경을 보고했으나 이대통령은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역정을 내자 이때부터 이박사와는 인연을 끊고 야당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는 부산 정치파동을 계기로 야당인 민국당(한민당 후신)에 몸을 담고 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입후보하였다. 그는 종로갑구에서 박순천ㆍ주휘한ㆍ장후영ㆍ유석현씨 등 쟁쟁한 인물과 한판 승부를 겨뤄 윤씨이외의 12명 입후보자들의 득표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표를 얻어 압승했다. 56년 5월 정ㆍ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자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씨가 급서하자 민주당은 당을 개편,조병옥박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고 이때 윤보선씨는 당내 구파이면서도 신파의 지지를 얻어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59년 가을 다음해에 있을 정ㆍ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은 후보자지명을 위한 전당대회를 개최,대통령후보에 조병옥박사,부통령후보와 대표최고위원에 장면박사를 선출했고 해위는 신파의 곽상훈ㆍ박순천씨와 함께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그는 구파보스인 조병옥박사가 대통령선거 한달을 앞두고타계하자 조박사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으면서 지금까지의 「과묵한 영국신사」에서 「행동하는 투사」로 변신하게 된다. 4ㆍ19학생의거와 이승만정권의 몰락으로 4대 민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은 압승을 했고 신ㆍ구파간의 불꽃튀는 협상끝에 그는 60년 8월12일 민ㆍ참의원 양원합동회의에서 제2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국무총리지명을 하면서 신파의 장면씨 대신에 자신과 같은 구파이 김도연씨를 지명했으나 신파의 벌떼같은 반발로 과반수에서 3표미달로 인준안이 부결되자 하는 수 없이 2차에 장면씨를 지명했다. 그는 5ㆍ16군사혁명 사흘뒤 대통령직 사임을 결심,하야성명까지 발표했으나 이를 번의,이듬해 물러났다. 그는 63년 10월 5대 대통령선거에 민정당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후보와 맞서 15만여표로 고배를 마셨으나 스스로를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면서 박정권과의 극한대결에 앞장섰다. 박정권이 65년 타결한 한일협정을 매국이라고 단정,흡사 「아파치족의 추장」처럼 싸웠고 같은해 한일협정 준비파동이 절정에 달할 무렵 의원직 사퇴에 미온적인 민중당 온건파와 손을 끊고 탈당,의원직을 사퇴했다. 67년 4월 6대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다시 박정희후보와 숙명의 대결을 벌였으나 1백10여만표차로 패배했다. 그후 그는 정치2선으로 물러났으며 박정권의 유신체제아래서 재야의 거두로서 박정권의 비정을 공격했다. 10ㆍ26으로 박정권이 붕괴되고 5공화국이 출범하자 그는 전직대통령의 위치에서 전두환대통령에게 이따금 조언을 하는등 박정권때와는 다른 우호적 태도를 보였고 노태우대통령의 6공정부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취해왔다. 해위,그는 60년대 한국정치사에서 대여 극한투쟁의 화신이었다. 굳은 신념에 불퇴전의 강경노선을 견지한 그는 박정권과의 투쟁 당시 이렇게 말했다. 『정책대결이 정당정치의 원형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네와 같은 군사독재와 부정부패와 정보정치아래서는 무기력한 대안제시와 무원칙한 타협을 앞세워서야 야당의 사명이 말살되고 만다』 그는 훗날 또 이렇게 말했다. 『싸우는 게 최선이 아니고 싸우는 게 유일한방법일 때 싸워야 한다,정권을 무너뜨리는 게 민주투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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