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대통령 정권창출위한 기초행위/「5·18」수사 사태의 성격
◎계엄확대는 강력한 정국주도의 표현/국보위를 5공 탄생의 산실로 삼아
위헌·위법 여부가 문제되고 있는 행위는 외형적으로 최규하 전대통령의 재가를 받거나 대통령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다.
즉,최전대통령은 중앙정보부 기능의 효율성을 위해 전두환 전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고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을 재가했으며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을 국가보안목표에 투입하고 정치 목적의 옥외집회·시위와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또 소요조종자와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법에 따라 신중하게 조사토록 당부했으며 합수부는 주요 정치인과 학생 대표들을 체포했다.
이와함께 대통령을 보좌하고 내각과 군의 긴밀한 협조를 위해 국보위를 설치하는 것을 재가하고 전전보안사령관을 상임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따라서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최전대통령의 국군통수권 행사이거나 국가 긴급권과 법령에 근거한 집행행위들로서 외형적으로는 최전대통령의 국가행위에 해당된다.
그러나 비상계엄의 확대,정치활동의 금지,국보위의 설치등은 전전사령관이대통령의 지시없이 추진한 조치들로서 정권 창출의 기초행위로서의 실질도 갖고 있다.
먼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정보를 장악하고 각료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게 되어 집권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계엄 확대는 군의 정치개입을 초래하게 되고 비상기구의 설치나 국회의 해산,정치활동의 규제는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야 하는데도 전전사령관이 참모들에게 입안하게 한뒤 지휘관회의에서 결의하는 형식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정국장악 의사 없이는 추진할 수 없는데도 전격 추진,집권한 사실에 비춰 전전사령관은 계엄 확대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다.
특히 정치활동 금지는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았고 정치권을 배제하고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의사가 강력히 시사된 것이다.
더욱이 가택연금은 법적 근거도 없고 불법구속·가혹행위 시비가 야기되고 재산헌납·공직사퇴도 정국운영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인사들을 제거한 것으로 경쟁자 없이 권좌에 오르게 된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
전국 비상계엄에서는 계엄사령관이 행정을 관장하게돼 있음에도 국보위상임위가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내각을 통제하는 계엄사령관의 권한을 행사했다.
또 전전사령관은 상임위원장에 취임하자 헌법개정안을 작성,개헌작업에 반영하는 등 국보위를 5공화국 탄생의 산실로 삼았다.
결국 국보위는 자문기구로서보다는 비상기구와 같이 행정부를 통제하는 권력기구로 운영돼 전전위원장이 실질적 주도자임을 과시하는데 이용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최전대통령의 국사행위의 외관을 갖고 있어도 실지로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사망으로 초래된 권력 공백기에 12·12 사건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전사령관이 정권을 창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국 비상계엄이라는 특수상황과 국군 보안사령관,중앙정보부장 서리,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지위를 최대한 활용한 정치적 성격의 행위다.
다만 광주민주화시위의 발단이 된 전남대와 도청앞에서의 학생과 공수부대의 충돌은 학생들이 계엄군의 기습적 대학점령 등에 분격하고 계엄확대를 통한 군의 전면 등장과 김대중씨 등 정치지도자와 학생지도부의 체포에 반발,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가 폭동진압식의 강경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태가 악화된 원인은 부대원들이 시위대의 투석으로 부상하자,남녀노소나 시위가담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가격하거나 체포하는 강력한 공격적 진압으로 부상자가 발생하고 연행자들을 반라로 만들어 기합을 주기까지 하여 극도의 분노감과 적개심을 야기시켰다.
또 보도통제로 악성 유언비어가 발생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고립감과 격렬한 저항감을 야기,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의를 하게 됐다.
이에 공수부대에 차량돌진을 감행했고 공수부대가 발포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시민들도 무장저항을 하게 되는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5·18사건 수사 일지
▲94·5·13=정동년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등 이 사건 피해자 3백22명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
▲7·13=서울지검,피고소인중 현역군인 14명 국방부에 조사의뢰.
▲10·19=한완상씨등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22명,전·노 전 대통령등 10명 고소.
▲10·28=장기욱·이부영의원 등 민주당 「민주개혁 정치모임」소속 의원 29명,전·노 전대통령등 신군부 인사 23명 고발(이에 따라 피고소·고발인은 모두 58명으로 늘어남).
▲10·31=5·18관련 고소고발 사건 조사 착수.
▲11·23=정동년씨 소환조사.
▲11·30=장기욱의원 조사.
▲12·1=5·18 당시 민주청년협의회 상임의장 이신범씨 조사.국방부 검찰부,5·18 관련 현역군인 90여명 수사착수.
▲12·2=KNCC 인권위원장 김상근목사 조사.
▲12·5=5·18 당시 31사단장겸 전남지역 계엄분소장 정웅씨 소환조사.
▲12·1∼16=당시 전교사 사령관 소준렬·윤흥정씨 소환.
▲12·17=피고발인중 차달숙씨등 3명 무혐의 처분.
▲12·19=신현확전총리 조사.
▲94·12·21∼95·1·20=당시 공수부대등 진압부대의 대대장급 군간부 소환조사.
▲95·1·25=이희성씨 소환.
▲2·1=국방부 검찰부,김동진합참의장 등 현역군인 12명 조사착수.
▲2·9=당시 합참의장 유병현씨 소환조사.
▲2·15=당시 내무장관 김종환씨 소환조사.
▲2·17=남덕우 전국무총리,신병현 전부총리등 국보위위원 17명 서면조사.
▲2·21=당시 국방장관 주영복씨 소환조사.
▲3·21∼4·7=당시 20사단장 박준병의원에 대한 소환조사를 시작으로당시 보안사 대공처장겸 합수부 수사국장 이학봉전의원,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의원,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의원,특전사령관 정호용의원 소환조사.
▲4·11=당시 3공수여단소속 상사 첫 소환.
▲4·14=민주당 김옥두·한화갑의원,전두환 전대통령 등 10명을 내란혐의로 고소.
▲4·14=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씨 재소환.
▲4·22=당시 보안사언론팀장 이상재의원 소환.
▲4·26=당시 국방장관 주영복씨 재소환.
▲4·29=전·노 전 대통령에 대한 서면조사서 발송.
▲5·11=「헬기 총기난사」주장 미 피터슨 목사 조사.
▲5·19=노전대통령 답변서제출.
▲6·2=전전대통령 답변서제출.
▲6·7=최전대통령,검찰 방문조사 불응 통보.
▲7·18=최종 수사결과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