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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명성황후’ 합류 이재은

    “가수활동은 재미있어서 해보고 싶었고,양동근과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지만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에요.” TV드라마 ‘토지’에서 어린 서희 역을 연기해 당찬 아역탤런트로 부각된 뒤 영화 ‘노랑머리’에서 파격적인 변신으로 성인연기자로 자리매김한 이재은(21)이 사극으로 돌아온다.27일부터 KBS2 ‘명성황후’에서 대전 나인으로 출발, 고종의 총애를 받아 귀인에까지 오르는 장상궁을 연기한다. “98년 ‘용의 눈물’이후 오랫만에 사극을 하려니 대사가생소하게 느껴지고 잘 외워지지도 않아 많이 떨려요.” ‘명성황후’의 떨어진 시청률을 만회하기 위한 구원투수로 투입된 이재은은 첫 녹화를 앞두고 NG를 많이 낼 것 같다며 불안해 했다.밝고 활달한 성품의 장상궁은 정반대 이미지인 ‘철의 여인’ 명성황후와 묘한 대립관계를 형성한다.장상궁은 나중에 의친왕 이강의 어머니가 된다.드라마가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제작진은 그로부터 ‘귀여운 활력소’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이재은은 6살때 ‘적도전선’이라는 특집극으로 데뷔한 뒤7살때 ‘토지’를 시작으로 ‘하늘아 하늘아’‘조광조’‘한명회’등 10여편의 사극에 출연했다.‘토지’에서는 “맨날 땡깡부리는 것이 다였다”고 말하지만,어린 서희의 귀엽고 야무진 자태는 여전하다. “이미연씨가 연기하는 명성황후는 인자하고 지적이지만 훨씬 차갑고 현대적이라 이전과는 다른 명성황후인 것같아요. 아직 장상궁이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지만명성황후와 대립관계를 잘 형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어요.” 그는 탤런트겸 가수 양동근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양동근은 MBC 시트콤 ‘뉴논스톱’에서 이재은과 연인관계로 출연했으며 가수활동도 비슷하게 시작했다.양동근은 얼마전 한 스포츠신문에서 “이재은이 내 첫사랑”이라고 해서 화제를 모았다.그러나 이재은은 양동근과는 서로 같이 아역탤런트였기에 자라는 과정을 지켜 본,연기할 때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일 뿐이라고 말했다.“동근이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친구에요.아마 동근이도 저랑 친하다고 하지 않았을 걸요.” 현재 민병천 감독의 SF영화‘내추럴시티’를 유지태와 함께 찍고 있는 이재은은 “가수 활동을 또 할지는 사장님과 얘기해 봐야 겠지만,음반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지 몰랐어요.2집은 좀 기다려봐야 할 것같은데요”라고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
  • 한가위 연휴 가족나들이 명소 5곳

    ‘예전의 그 고향이 아니야’한가위 같은 명절을 지내고 돌아온 이들의 입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푸념.사람살이가 날로 강퍅해져 고향 인심도 예전같지 않고 무엇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변해버린 고향집과 그주변 풍광이 사람들의 가슴에 찬바람을 일게 한다.길이 뚫리고 산이잘리고 우리네 인정도 뚝뚝 잘라지는 것 같기만 한 것이다. 한가위 연휴,고향가는 길을 서두르거나 귀성길을 바삐 채비해 고향의 모습을 제대로 간직한 전통마을을 둘러보면 어떨까.평소 발품이나시간을 많이 들여야 찾을 수 있던 곳을 가볍게 찾아보자.아이들에겐좋은 교육이 될 것이고 가족들에겐 잃어버리고 헐거워졌던 정을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다.이쯤이면 ‘한가위만 같아라’는 우리네 덕담도 허튼 말은 안될 터. ●송천 떡마을 명절날 떡시루 옆에 괜스레 앉아 코묻은 손으로 밀가루 번을 떼었다 붙였다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강원도 양양읍에서서울로 오는 길은 세갈래.강릉으로 내려가 영동고속도로를 타거나 한계령을 넘는 길도 있지만 오색 못미쳐왼쪽 56번국도로 접어들어 구룡령을 넘는 방법도 있다.이 길에 접어들어 10여분 달리다보면 큰 길가에 좌판을 벌인 떡가게들이 눈에 들어온다.길손들은 시장기나 속여볼 요량으로 한봉지 사들었다가 이내 마을로 들어서고 만다. 도시에서 맛보던 인절미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맛에 매료되기 때문.예전에 굴피집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초가와 기와를 올렸지만 그래도 굴뚝의 까치구멍 등 옛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100년 가까이된 떡판에 직접 찹쌀을 빻은 가루를 쳐내 인절미를 만든다. 떡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업소만 전체 30여가구 중 13가구가 넘는다.관광객들은 직접 떡메를 들고 떡을 쳐보기도 한다.소문난 떡집 (033)673-4316,민속떡집 673-8977여행자클럽 (02-2277-5155)에선 10일과 11일 1박2일 일정으로 정선아우라지와 송천마을을 돌아보는 여행상품(어른 9만,000원,어린이 7만5,000원)을 판매하고,옛돌(02-2266-1233)은 10일 하루 일정(4만원)을 마련한다. ●봉화 닭실마을 우리나라 오지의 몇 손가락안에 꼭 들어가는 경북봉화군.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은 명절때면 할머니들의 즐거운 비명이 그득하다.전국 각지에서 옛날 비법대로 만든 한과를 주문하는 전화가 폭주하기 때문이다.부녀회관 (054)673-9541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금계포란형의 명당터로 알려진 닭실마을은 콧대높은 안동 권씨의 집성촌으로도 이름짜하다.150여가구 400여 주민 가운데 대다수가 권씨집안이다.300∼400년 된 종가집이 그대로 남아있고 반달 모양의 월문,종가집 옆에 세워진 청암정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중앙고속도로에서 영월로 진입한 뒤 88번 국도를 타고 단양쪽을 버리고 직진하면 곧 봉화에 이른다.청량리역에서 매일 오후11시 출발하는통일호가 춘양역(054-673-7788)까지 직접 연결된다. 우리여행사(02-335-7137)에선 10∼11일 닭실마을과 울진 월송정해변,백암온천을 돌아보는 여행상품을 9만5,000원에 판매한다. ●영덕 종가집마을 ‘소안동’으로 불릴 정도로 떵떵거리던 종가집들이 모여있는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고려때 칠보산 줄기에 학처럼 날개를 펼친 형국의 길지로 꼽혀 이태껏 인재의 출현이 심상치않았다.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과 삼은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나옹화상 등이 이 마을 출신이었다.명나라 신종황제의 친필현판을 걸어놓은 재령이씨 집안의 충효당과 사당 사암재,야성 정씨의 고택으로 평산 신씨집안이 사들인 만괴루,효자로 소문난 이시형의 우계종택,병조참의를지낸 김익중의 용암종택 등 각 씨족의 종가집만 해도 8채가 넘는다. 봉화에서 해안 드라이브코스로 이름높은 918번 지방도로를 타고 영해에 이른다.영해면사무소 (054)732-3003●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아산시와 천안시 경계인 광덕산 밑에 자리한 외암리는 500년전에 이 마을에 정착한 예안 이씨 일가의 종가댁을비롯,86채의 고풍스런 옛집들이 포진해있다.이끼낀 돌담 너머로 엿보이는 감,살구,밤,은행나무 등이 살갑고 마을 입구의 장승은 물론 디딜,연자,물레방아 등과 많은 민속유물이 전시돼 있다.국가지정 민속자료 195호인 외암참판댁이 특히 유명하다. 천안을 거쳐 아산시에 이른 뒤 남쪽으로 난 39번 국도를 따라 34㎞를 남하한 뒤 송악외곽도로로 진입하면 된다.아산시청 문화관광과 (041)540-2542●서울 성락원 조선말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었던 것을의친왕 이강공이 별궁으로 사용하다 그 아들 이건공이 살았던 곳이다.면적 4,358평의 성락원은 자연 지형을 살려 건물을 배치,도심 속에서 청류를 즐길수 있다. 자연스레 구성된 수풀과 Y자형의 개울 그리고 인공적인 석가산이 절묘한 균형미를 이루고 있고 인공미가 가해진 자연연못,용벽지는 공간미의 극치를 보여준다.건물들 뒤의 후원과 같은 공간인 심원은 지붕을 뚫고 서 있는 노송이 눈길을 끈다.지붕에 나무 그늘이 지는 것을피해왔던 오랜 관습에 파격인 셈. 주변에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던 선잠단지(先蠶壇址),만해 한용운이 만년을 지냈던 심우장(尋牛莊),우리나라 최초의사립박물관으로 다양한 국보급 문화재를 거느린 간송미술관,1세기전별장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이재준家,소설가 상허 이태준家가 있다.성북구청 관광정보센터 (02-920-3787)임병선기자 bsnim@
  • 정동제일교회는 항일운동의 산실

    우리 근대사에서 교회는 기독교전파 이외에도 서구 근대문명 도입과 일제하애국계몽·항일운동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특히 정동제일교회는 구한말 외교 중심가였던 정동(貞洞) 일대를 중심으로 당시 양대 선구세력이었던 기독교세력과 민족세력을 규합,근대 한국 지도자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지난달 30일 정동제일교회(담임 조영준 목사)는 제1회 아펜젤러 학술강좌를열고 정동제일교회 관계자들이 3·1의거와 상해 임시정부수립 등 독립운동에적극 가담한 사실에 대한 학술평가모임을 개최했다. 조영준 담임목사는 주제설교를 통해 이 교회의 최초 한인 담임목사를 역임한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1858∼1927)목사의 충군·애국사상을 소개하면서 “탁사 선생은 한국 최초의 비교종교학자로 토착신학을 통해 한국 감리교의 기초를 닦은 주인공으로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이 땅에 기독교 문화의꽃을 피운 분”이라고 평가했다. 배재학당 교사시절 선교사들과 교분을 쌓은 인연으로 1902년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가 된 탁사는 이 교회 부담임목사로재직중아펜젤러가 순직하자 이 교회의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탁사는 특히 국권상실기에 교회내 엡윗청년회를 중심으로 ‘을사조약’반대운동을전개하였으며 협성회,독립협회,황성기독청년회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또 애국강연과 언론활동으로 동포들의 애국혼을 일깨우기도 했으며 1922년 은퇴 후에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비교종교론과 동양사상을 주로 강의하였다.이밖에 신소설 ‘성산명경(聖山明鏡)’,천주교와 기독교를 최초로 비교분석한 논문 ‘예수·천주 양교변론(兩敎辨論)’ 등을 저술하였다. 탁사에 이어 제5대 담임목사를 지낸 현순(玄楯·1880∼1968)목사,6대 담임목사를 지낸 손정도(孫貞道·1872∼1931)목사 등이 모두 정동제일교회가 배출한 대표적 민족지사.현목사는 3·1의거 당시 목사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 후 상하이에 밀파되어 임시정부 수립에 깊이 관여하였다.임정 수립후 외무·내무차장을 역임한 현목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위원장 서리에 추대돼 외교활동을 펴기도 했다. 해석(海石) 손정도 목사는 3·1의거 참가후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애국지사.2부 발표에서 발제자로 나선 이현희(李炫熙) 성신여대 교수는 ‘손정도 목사와 상해임시정부’라는 논문을 통해 “손목사는평소 혈전으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주땅에 대한민국 독립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분”이라고 말했다.이교수는 1918년 손목사가 신병을 이유로 정동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사임한 것은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현목사,의친왕 이강공(李堈公)과 함께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다고 밝혔다.최근 발굴된 ‘현순 자사(玄楯 自史)’에 따르면 당시 손목사는 입정(立丁),현목사는 석정(石丁),최창식(崔昌植)은 운정(雲丁)이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는 이강공을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수립하면서 각자 역할분담을위해 사용했다는 것.즉 立丁(손정도)은 ‘丁’(고종의 밀명)을 立(세운다)한다는 뜻으로 그 바탕은 石丁(현순)이,심부름은 雲丁(최창식)의 몫이었다는것이 이교수의 해독법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수난 4代’ 독립운동가 가문(金三雄 칼럼)

    무궁화 피고 태극깃발 물결치는 8월,우리는 해방 53년과 건국반세기를 맞는다.여전히 분단상태에서 북쪽은 기아,남쪽은 실업의 고통이 따르지만 아무려면 일제식민지 시대의 참혹했던 생활에야 비하랴. 8월이면 우리는 감사해야 할 수많은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생각한다.해방을 못보고 눈을 감은 선열들과 해방후에도 독재정권에서 신산한 삶을 사신 지사들을 잠시라도 생각하면서 이 8월을 맞았으면 싶다. 흔히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다.그만큼 일제의 탄압이 심했고 역대 정권이 지사들과 유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데서 생긴 말이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3대가 망한’집안을 알고 있다.실제는 4대째 수난과 시련을 겪고 있다.이것은 단순히 한 가문의 수난사이기보다 왜곡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단면이라 하겠다. 동농(東農) 金嘉鎭은 상해임시정부 고문과 북로군정서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다.망명에 앞서 항일단체 대동단을 조직,총재로 있으면서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의 상해 탈출을 기도하여 만주 안동현까지 갔으나 붙잡히고 동농은 74세의 고령으로 상해에 망명했다.그 가문의 고난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큰아들 의한(毅漢)은 부친과 함께 망명하여 대동단원과 광복군 창건에 참여하다가 해방후 납북되고,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하여 임정 밀사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밀명을 띠고 여섯 차례나 국내에 잠입하면서 밀령을 수행했다.최근 나온 ‘長江日記’는 여성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손자 자동씨는 4·19이후 진보매체인 ‘민족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고 이후에는 민간통일운동에 헌신해왔다. ○저항하다 탄압받는 민족양심 金씨의 사촌형 석동씨도 광복군으로 활동했다.자동씨의 큰 딸 진현씨는 유신시절 학생운동으로 대학에서 제적되고 졸업후에는 의료보험연합회 노조위원장을 지냈으며,둘째딸 선현씨는 노태우정권시절 웨스트팩은행 노조위원장으로 외국계은행 노동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탄압과 시련이 따랐던 것은 당연하다. 동농에서 선현씨까지 4대째 이어지고 있는 이 가문의 고난은 한 가족사의 아픔이기보다 민족사의 비극이다.바로 일제와 독재에 저항하고 탄압받는 민족적 양심의 정형이다.동농의 가문뿐만 아니라 상당수 독립운동가 집안이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의 정부에서도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솔직히 국민이 정권교체를 선택한 것은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그늘진 곳에는 햇볕을 비추고 굽고 휜 것은 펴고 단절된 것은 이으라는 시대적 소명이었다. ‘정직한 역사를 되찾으라’는 소망이었다. 최근 보훈처는 동농의 서훈을 또 다시 거부했다.이유는 간단하다.일제로부터 ‘남작’을 받았다는 것이다.물론 ‘남작수여’는 악질 친일파의 대명사다.그렇지만 동농의 경우는 다르다.일제는 종3품이상 고관 72명에게 작위를 주면서 “조선귀족들은 한일합방에 찬성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각종 기록은 “동농은 작위를 거절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합병후 작위를 주었으나 불락(不樂)하였다”(조선독립소요사론)고 썼다.또 설혹 작위수여의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이공속죄(以功贖罪)’즉“공을 세우면 죄를 용서받는”것이 대원칙이다. ○무원칙한 보훈처 정부는 제2건국을 표방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포했다.그렇다면 임정 법통을 이어받은 정부가 임정 고문을 지낸 동농을 친일부역자로 몰아 구정권과 똑같이 서훈을 거부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변에서는 보훈처가 동농의 후손들이 복지부 서훈심사의 불공정성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해온 전력때문에 서훈이 거부된 것으로 인식한다.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이다.동농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훈장을 준 국가가 그 장본인을 제쳐놓은 것은 모순이다. ‘만절(晩節)을 보면 소지(小志)를 안다’고 했다.동농의 경우가 그렇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기록을 뛰어넘어 4대째 시련을 겪고있는 동농가문에 더 이상의 절망을 주어서는 안된다.합당한 서훈과 함께 상하이 송경령 능원에 방치된 동농의 유해를 환국시켜 뒤늦게나마 애국지사를 대접해야 하겠다.
  • 고종 오남 의친왕/미서 봉변당했었다/1903년

    ◎백인우월주의자에 뭇매 맞아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이 1903년6월10일 미국유학 중 백인 우월주의자로부터 뭇매를 맞는 봉변을 당했던 사실이 미국무부의 외교기록 자료(1903년 7월28일자)에 의해 확인됐다. 당시 26살이던 의친왕은 미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인근의 한 공원에 놀러갔다가 조셉 스타우트란 백인청년으로부터 무차별로 주먹질 발길질을 당한 후 실신해 입원하기까지 했으며 당시 조정은 외교경로를 통해 이 문제를 미측에 항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스타우트는 느닷없이 『중국놈을 죽여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두차례 의친왕에게 폭행을 가했으며 이에 항의하던 시종도 역시 몰매를 맞았으나 범인 스타우트는 공원관리인 등의 추적으로 이내 붙잡힌 것으로 돼있다. 사고가 나자 델라웨어로 급파된 주미 공사관 관계자는 보고서에서 『스타우트가 공격에 앞서 약 2주 전 왕자 전하를 다치게 하겠다고 위협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힘들었다』고 밝히고 『어쨌든 왕자 전하에 대한 이번 공격이 전혀 우발적인 것이 아니며 스타우트와 동행했던 백인청년들도 이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지적,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의친왕을 노리고 있었음을 강조했다.
  • 「황실은 살아 있다」 발간/안천 서울교대교수(저자와의 대화)

    ◎“대한제국 황실/“일제때 독립투쟁 본거지”/“의왕이 손병희에 민중궐기 촉구/3·1운동은 고종독살에 대한 민중의 분노로 발발” 「대한제국의 황실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았다.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 황실은 독립투쟁의 본거지였다」 서울교대 안천교수(정치학·47)가 잊혀진 역사,대한제국 황실의 독립투쟁사를 발굴해 「황실은 살아있다」(전2권·인간사랑간)란 책을 출간했다.이 책은 나온지 10여일만에 초판 6천부가 매진돼 재판에 들어가는등 상당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 이유를 안교수는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조선왕조(대한제국)에 대한 향수와 그 후예에 대한 궁금증이 아직도 국민 정서속에 짙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몇해전 발표한 글에서「우리나라는 입헌군주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는데 그 글을 보고 고종황제의 손자인 가수 이석씨가 찾아왔다』면서 『그분에게서 황실의 독립투쟁 얘기를 듣고 그 발자취를 추적하게 됐다』고 밝혔다.「노래하는 황손」으로 알려진 이석씨는 고종의 둘째아들인 의왕(흔히 일본식 명칭인「의친왕」으로 알려졌음)의 아들로「비둘기집」등 여러 히트곡을 갖고 있다. 안교수는 이후 이석씨와 함께 4년여동안 전국을 돌며 황실과 연계된 유적지와,관련인물들을 찾았다.안교수가 주요 증언자로서 책머리에 소개한 인물은 48명에 불과하지만 이 기간동안 실제 만나본 인물은 수백명에 달한다는게 그의 얘기이다. 안교수가 발굴한 새로운「황실의 역사」는 엄청나다.그가 수집한 증언에 따르면 대한제국 황실의 인물들은 일제에 국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최대한 애썼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이를 되찾기 위해 적극 나섰다는 것. 안교수는 대표적인 예로 3·1운동이 일어난 과정에 대해 새 해석을 내렸다.그는『지금 학계에서는 3·1운동을 독립운동,또는 민중해방운동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고종이 일제에게 독살된 것에 대한 백성의 분노 표현이자 대한제국을 회복하려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고종이 독살된 직후 의왕이 이 사실을 손병희에게 알려 백성의 궐기를 촉구한 것이 3·1운동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고종이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유동렬장군을 만주로 보내 군대양성을 지시했다 ▲일제 말년 의왕의 둘째 아들인 이우공이 강원도 금화지역에 비밀군사기지를 마련했다는등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황실의 독립운동 비사를 증언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그는 정치학자로서 황실의 역사를 추적한 이유를 『우리사회에 입헌군주제가 알맞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대학 강단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면서「구미의 정치제도가 우리 몸에 맞는 옷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그 대안으로서 입헌군주제를 추구하게 됐다는 것.또 영국·일본·스페인·태국의 예로 보더라도「왕이 사회의 구심점으로서 기능하는 제도가 우리 현실에 훨씬 바람직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안교수는 황실을 복원해 입헌군주제를 되찾자는 주장이 비현실적이 아니라는 이유로『첫째 황실은 독립투쟁에 앞장선 만큼 도덕적으로 자격이 충분하며,둘째 남아있는 고종의 후손들이 그 역활을 감당할 만한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교통수단:중(서울 6백년 만상:19)

    ◎차 1903년 왕실용 첫 도입/택시 1912년 운행 시작… 급속 확산/6·25직후 「시발」 등장… 국산차시대 개막 『오줌 찔끔 진고개,방구 뿡뿡 자동차』­1920년대 초기 서울의 개구쟁이들이 부르며 놀던 동요의 한 구절이다. 당시 자동차는 종로나 육조(중앙청)거리등 큰길만 달렸다.그 속도가 어찌 느린지 골목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이 자동차 뒤에서 뿜는 「가솔린」냄새를 맡고자 달음박질해 따라갈 정도였다.한시간에 한대 구경하면 그날은 「운수좋은 날」이었다. 운전사들은 양복을 입고 모자는 「헌팅 캡」을 꼭 뒤로 돌려썼다.운전사는 선망받는 엘리트 직업이요,신식직업이었다.특히 왕족의 차를 몰 경우엔 가문의 영광으로 삼기까지 했다.관용차운전사는 금테가 요란한 고등관제복을 입고 으스댔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3년으로 어림된다.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도입시기와 배경등이 명확치 않지만 왕실전용으로 이용하기위해 영국과 프랑스에서 1대씩 들여온 것이 효시라는 설이 유력하다.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망국의 한과 울분에 잠긴 의친왕,순종비의 부친 윤택영등에게도 차례로 승용차를 제공했다.고종과 순종이 전용차 타기를 거부했다는 기록에서 엿볼수 있듯 우리의 자동차문화는 제국주의자들의 유화정책에서 비롯됐다. 이처럼 귀족과 작위를 받은 일부 고관들의 전용물이던 자동차는 1914년부터 돈많은 갑부들도 탔다.광산부자 박기효·최창학과 친일재벌 한상용,대지주 배석환·김종성등이 그들이다. 일본인 곤도(근등삼천삼)와 한국인 이봉래가 1912년 포드차 2대를 도입,1시간에 5원씩 받고 영업을 개시한 것이 택시업의 시작이다.당시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2∼3명밖에 없어 운전사를 확보하기 위해 「운전사 양성소」를 개설했고 미국과 자동차수입특약도 맺었다. 1926년부터 택시업이 수지를 맞추면서 서울 곳곳에 수십개의 택시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했다.한강 인도교가 준공된 이듬해인 1918년의 서울의 자동차의 수는 2백12대였다.1926년에 1천5백87대,1931년에는 4천3백31대로 크게 늘어났다.지난 2월말 기준 자동차 등록대수는 1백77만5천1백41대.6명당 1대꼴로 생활화됐다. 그 당시 요금은 시내에서는 어디를 가든 80전이었다.한참뒤에 1원으로 올랐다.택시는 전화로 불러서 탔다.시내 요리집에서 나온 건달들이 음벽정 또는 천향원별장등 「2차」로 가면서 주로 이용했다.기생들은 택시운전사를 좋아해 은근히 「데이트」를 즐기는 일이 잦았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 우리의 손에 의해 그 유명한 시발자동차가 서울에 첫 등장했다.국산차의 효시이기도 한 시발자동차는 첫 출고때 8만여환 하던 것이 60년대에는 대당 3백만환을 웃돌 정도로 값이 치솟았다. 62년5월 개조차가 아닌 산뜻한 모양의 세단형 자동차가 일본에서 수입된데 이어 그해 8월에는 부평에 자동차공장이 준공되면서 조립생산차인 「새나라」가 장안을 누볐다.그 다음해인 63년11월 신진자동차는 소형세단 「신성호」3백대를 만드는 한편 일본 도요타와 손을 잡고 코로나를 생산했다.이어 크라운·코티나·포드20M·피아트등이 속속 선보여 마침내 마이카시대의 막을 올렸다. 대중교통수단인 버스가 서울에 굴러다닌 것은 전차의 등장으로부터 3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경성부가 1928년 처음으로 「부영버스」운행을 시작한 것이다. 부영버스의 운행노선은 관청이 있는 곳이거나 일본인 거주지역에 집중됐다.전차노선과 겹치는 경우가 많아 전차와 버스간의 손님 유치경쟁은 치열했다.이무렵 여차장이라는 신종직업이 생겨났다.그녀들은 맵시있는 유니폼으로 요즘 TV탤런트에 못지않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65년부터는 대형급행및 좌석버스 운행이 개시됐으며 2년 뒤인 67년엔 서울시가 직접 운영하는 시영버스 50대가 첫선을 보이기도 했다. 「승객이냐,짐짝이냐」「입석된 좌석,완행된 급행」등 당시 유행어처럼 버스는 당초 제도상의 취지와는 달리 파행적으로 운행돼 급행버스 제도는 폐지되고 말았다.
  • 서울성락원·전주향교 사적 지정

    문화부는 24일 서울 성북구의 성락원과 전북 전주의 전주향교를 사적 제378호와 379호로 각각 지정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성락원은 조선 철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웅의 별장이었으나 뒤에 의친왕 이강(1877∼1955)이 35년동안 살아 별궁으로도 사용됐다.성락원은 서울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민가조원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의 전주향교는 조선 태종 10년(1410년)에 창건되고 선조 36년(1603년)에 자리를 옮겨 중건됐다.
  • 3대 독립운동가문 첫 공인

    ◎4대 임주수씨,광복절에 선친 건국훈장 수상 확정/을사조약후 무장항일운동 주도/1대/부친도와 독립의군부결성 기여/2대/전북지역 군자금모금·운반담당/3대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증손자가 국가로 부터 서훈을 받게 돼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이 탄생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무장독립운동을 벌이다 실패하자 자결한 돈헌(돈헌)임병찬선생의 손자 임수명선생(지난 77년 80세로 사망)이 오는 15일 광복절 47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게 됨으로써 3대에 걸친 이 집안의 조국독립 의지가 함께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1대 임병찬선생은 62년 독립장을,2대 임응철선생(지난 31년 60세로 사망)은 90년 애족장을 각각 받았었다. 정부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 조국광복을 위해 대를 이어 몸바친 3대가 모두 「공식」인정을 받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임병찬선생은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인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선생과 함께 향리인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의 한일합방후에는 고종으로부터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으로 임명받아 전국의 시·도 대표 3백29명으로 독립의군을 조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하다 1914년 5월 체포돼 전남 여수군 거문도에 감금당한 뒤 끝내 나라 잃은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2년후 목숨을 끊었다. 구한말 홍문관 학사와 승정원 비서승등을 역임한 2대 임응철선생은 부친을 도와 독립의군부 결성및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협등과 함께 조선독립대동단을 결성했고 그해 11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을 상해임시정부로 탈출시키려다 발각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번에 건국포장을 받게 된 3대 임수명선생도 이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할아버지 임병찬선생이 거문도에 감금돼 있는 동안 뒷바라지를 한 데 이어 아버지 임응철선생을 따라 조선독립대동단에 들어가서는 전북지단 이사를 맡아 김흥순등 수십명을 가입시켰으며 이들로 부터 걷은 군자금을 서울 본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 그러나 1·2대가 쉽게 공적을 인정받은데 비해 임수명선생의 「독립유공」은 그동안 공인받지 못했다. 그의 활동이 워낙 비밀스러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4대째인 임주수씨(68·경기도 수원시 고등동 롯데아파트 1동208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내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전북향토문화연구회와 그 지역 역사학자들의 도움으로 자료를 입수해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됐다. 그 자신 독립운동에 빠진 아버지가 집안를 돌보지 않는 바람에 막일을 하며 어렵게 성장한 임주수씨는 현재도 월세 20만원짜리 20평형 아파트에서 부인 이지순씨(64)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광복을 위해 헌신해온 독립운동가 집안이란 사실과,선대가 남긴 훈장을 자랑으로 여기며 깨끗이 살아왔다』면서 『다만 광복절을 단지 공휴일로만 생각하고 왜색문화에 무분별하게 물드는 듯한 젊은 세대들을 보면 선조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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