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의친왕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부동산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중국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SNS 확산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급락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9
  • 마지막 황손 이석, 조선 황실 비화 공개…“아버지 의친왕 기골 장대…62세 때 날 낳아”

    마지막 황손 이석, 조선 황실 비화 공개…“아버지 의친왕 기골 장대…62세 때 날 낳아”

    조선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이 자살 시도를 했던 과거를 고백했다. 이석은 4일 오전 방송된 KBS2 ‘여유만만’에 출연해 비운의 역사 속 왕자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전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방송에서 이석은 “내가 세종대왕의 28대손이다. 나의 고고조 할아버지가 정조대왕이다. 흥선대원군은 증조부”라며 “기골이 장대했던 아버지 의친왕은 왕실의 대를 잇기 위해 아들 13명과 딸 20명을 두었다”고 밝혔다. 이어 “나는 11번째 아들이다. 아버님이 날 62세에 낳았다”며 “어머니는 옛 관습대로 19세였다”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석은 “황손으로 태어난 걸 처음에는 많이 비관했다”며 “생계를 위해 노래를 불렀지만 교통사고도 났다. 결국 자살을 하려고 유언장까지 썼다”고 설명했다. 과거 생활고로 인해 그룹 비둘기집의 멤버로도 활동한 바 있는 이석은 최근 한 광고에서 세종대왕 역을 맡았던 것에 대해 “연예계 30~40년 있으면서 광고 모델을 하지 않았다. 왕실에서 ‘진짜 광대가 되려고 하느냐’며 반대했었다”며 “그런데 이번 광고는 세종대왕 역을 맡았기 때문에 찍을 수 있었다. 촬영 내내 가슴이 뭉클했다”고 고백했다. 또한 “광화문에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데, 세종대왕 어진이 6.25때 다 타서 조각가가 내 모습과 관악산 효령대군 동상을 합쳐서 만들었다”고 전해 눈길을 끌었다. 한편 마지막 황손으로 알려진 이석은 1970년대 가수로 활동하며 유명세를 탔지만, 이후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수영장ㆍ빌딩 청소 등을 하는 등 생활고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 황손 이석 소식에 네티즌들은 “마지막 황손 이석, 아버지가 의친왕이었구나” “마지막 황손 이석, 의친왕 어땠을까” “마지막 황손 이석, 아버지 의친왕 어땠을지 궁금” 등의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마지막 황손 이석, 조선 황실 비화 공개 “세종대왕 동상 만들 때 내 모습 필요”

    마지막 황손 이석, 조선 황실 비화 공개 “세종대왕 동상 만들 때 내 모습 필요”

    마지막 황손 이석이 조선 황실의 비화를 공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4일 오전 방송된 KBS 2TV ‘여유만만’에는 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73)이 출연해 아버지 의친왕과 어머니 홍정순 여사에 관한 이야기,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의 비밀 등에 대해 털어놨다. 앞서 어머니가 후궁 출신임을 밝힌 마지막 황손 이석은 “아버지 의친왕은 62세에 날 낳으셨다. 당시 어머니는 옛 관습대로 19세였다”고 설명했다. 이석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했던 의친왕으로 왕실의 대를 잇기 위해 슬하에 많은 자녀를 두었다. 이에 대해 MC 조우종은 “웬만한 할리우드를 능가하는 일”이라고 놀라워했고 윤지영 아나운서는 “옛날 왕가에서는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또, 이석은 “광화문에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데, 세종대왕 어진이 6.25때 다 타버려 조각가가 아침 마당에 나온 내 모습과 관악산 효령대군 동상을 합쳐서 세종대왕 동상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는 비화를 소개하기도. 이어 “세종대왕의 28대손으로 직계는 정조 대왕이다. 흥선대원군이 증조할아버지다. 아버지 의친왕은 기골이 장대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황손 이석 소식에 네티즌들은 “마지막 황손 이석, 의친왕 아들?” “마지막 황손 이석,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네” “마지막 황손 이석, 대단하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한편, 이석은 의친왕의 아들이자 조선왕조 마지막 황손으로 1960년 그룹 비둘기집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석 “세종대왕의 28대손, 흥선대원군이 증조부”

    이석 “세종대왕의 28대손, 흥선대원군이 증조부”

    지난 4일 방송된 KBS 2TV ‘여유만만’에 출연한 이석은 비운의 역사 속 마지막 황손으로서 자신의 삶을 털어놨다. 이날 이석은 “내가 세종대왕의 28대손이다. 나의 고고조 할아버지가 정조대왕이고 흥선대원군은 증조부다”고 소개했다. 이어 “기골이 장대했던 아버지 의친왕은 왕실의 대를 잇기 위해 아들 13명과 딸 20명을 두었다. 나는 11번째 아들이다. 아버님이 날 62세에 낳았다. 어머니는 옛 관습대로 19세였다”고 밝혀 놀라움을 자아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26살 때부터 무려 9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석은 “동생 4명을 데리고 죽으려고 했다. 약을 사서 술에 타 마시기도 했다. 도봉산 바위에 올라가서 떨어졌는데 눈을 떠보니 나뭇가지에 걸려있더라. 죽을 때가 아니었던 거 같다”고 고백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석, 방송에서 부모님 언급 화제 ‘무슨 얘기?’

    이석, 방송에서 부모님 언급 화제 ‘무슨 얘기?’

    이석(73) 총재가 아버지 의친왕과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4일 방송된 KBS2 ‘여유만만’에는 조선 마지막 황손 이석 총재가 출연, 자신과 관련한 여러 가지 비화들을 언급했다. 사진=KBS2’여유만만’방송캡쳐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석 “의친왕 62세에 날 낳으셨다, 어머니는 당시 19세” 황실로맨스

    이석 “의친왕 62세에 날 낳으셨다, 어머니는 당시 19세” 황실로맨스

    ‘마지막 황손 이석’ ‘이석’ ‘의친왕’ 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73) 총재가 아버지 의친왕과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4일 방송된 KBS2 ‘여유만만’에는 조선 마지막 황손 이석 총재가 출연, 자신과 관련한 여러 가지 비화들을 언급했다. 특히 이날 방송에서 이석은 아버지 의친왕과 어머니 홍정순 여사의 나이 차이를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이석의 아버지는 의친왕으로 왕실의 대를 잇기 위해 슬하에 많은 자녀를 뒀다. 어머니 홍정순 여사는 그의 후궁이었다. 마지막 황손 이석은 “아버지 의친왕은 날 62세에 낳으셨다. 어머니는 옛 관습대로 19세였다”고 말해 스튜디오를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MC 조우종은 “웬만한 할리우드를 능가하는 일이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윤지영 아나운서는 “옛날 왕가에서는 가능했던 일이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황손 이석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마지막 황손 이석, 아버지가 의친왕이셨구나”, “마지막 황손 이석, 의친왕 62세때..대단하다”, “마지막 황손 이석, 의친왕 62세 어머니 19세 대박이다”, “마지막 황손 이석, 정말 옛날시대라서 가능했던 듯”, “마지막 화손 이석, 마지막 황손으로 사는 기분은 어떨까?”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KBS2’여유만만’방송캡쳐(‘마지막 황손 이석’ ‘이석’ ‘의친왕’) 연예팀 mingk@seoul.co.kr
  • 카드 광고 모델 된 조선 마지막 황손

    카드 광고 모델 된 조선 마지막 황손

    KB국민카드가 새로 출시하는 ‘훈민정음’ 카드의 광고모델로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72) 황실문화재단 총재가 발탁됐다. 이씨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이다. 가요 ‘비둘기집’을 부른 가수로도 유명하다. 그가 세종대왕으로 출연한 훈민정음 카드 광고는 2일부터 방송·인쇄·온라인 매체 등을 통해 볼 수 있다. 최근 전북 부안과 경북 문경에 자리한 문경새재에서 이틀 동안 촬영한 이씨는 1일 “조선 왕조의 황손이 살아 있는 역사의 뿌리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씨는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많은 광고 모델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면서 “생계가 어려웠는데도 그렇게 했던 것은 조선의 황손으로서 의미 없는 일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광고는 남다른 뜻을 갖고 있어 출연 요청에 응했다고 이씨는 덧붙였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의친왕 아들 이석 “4번 이혼 5번 결혼…마지막 아내와 18살 차이”

    의친왕 아들 이석 “4번 이혼 5번 결혼…마지막 아내와 18살 차이”

    고종의 손자, 의친왕의 아들로 마지막 황손인 이석이 가정사를 공개해 화제다. 이석은 25일 방송된 KBS 2TV ‘여유만만’에서 4번의 이혼과 5번의 결혼을 했던 사연을 고백했다. 이석은 “여러번 결혼생활에서 실패를 겪었다. 지금 함께 사는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바람꾼은 아니다. 왕자의 체통때문에 ‘안 되겠지’라고 생각하다가 보면 아기가 생기더라”면서 “그렇다보니 살던 사람이 세명 정도 된다. 지금은 다 잊어버리고 5년 전 만난 마지막 아내와 살고 있다”고 말했다. MC들이 “호칭은 어떻게 부르나. 나이 차이는 얼마나 나느냐”고 묻자 이석은 “아내는 내 명함에 있는대로 ‘총재님’이라고 부르고 난 ‘여보’라고 부른다. 나이 차이는 살짝 창피한 일인데 18살 차이다”라고 답했다. 이에 MC들은 “아버지 의친왕을 많이 닮으셨다”고 농담했다. 의친왕과 이석의 어머니인 홍정순 여사의 나이 차이는 43세로 알려졌다. 이석은 “아버지가 62세 때 절 낳으셨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의궤처럼 ‘조선왕실 갑옷·투구’도 돌아올까

    의궤처럼 ‘조선왕실 갑옷·투구’도 돌아올까

    일본으로 불법 반출된 뒤 국내에 반입된 국보급 불상의 처리 논란에 이어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왕실 투구와 갑옷 반환 요구까지 공론화되면서 한국과 일본 간에 문화재 환수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고종의 손녀인 이해경씨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왕실의 투구와 갑옷을 돌려달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하기로 하면서 반환 여부가 주목된다. 일본 정부는 3일 현재까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반환을 요구하는 이씨의 편지가 아베 신조 총리와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 제니야 마사미 도쿄국립박물관장 등에게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의 입장은 알 수 없지만 조선왕실의궤 반환 사례처럼 왕실 투구와 갑옷이 반환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은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약에 따라 정부가 공식적으로 반환을 요구할 수는 없다. 청구권이 이미 소멸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를 통한 공식 채널보다 의원 외교를 통해 일본 측을 설득하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 조선왕실의궤도 국회의원들이 결의안을 채택하고, 일본 측 의원들을 설득한 끝에 반환을 성사시켰다. 미국 뉴욕에서 반환 운동을 벌이고 있는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은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도쿄국립박물관이 지난해 4월 투구와 갑옷이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물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며 “의친왕의 따님인 이 여사가 조선 왕실의 물품에 대한 법적 상속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한·일 양국은 논란이 되고 있는 금동관음보살좌상 등의 처리 문제를 놓고 실무 차원에서 의견 교환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최근 법원이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일본으로 유출된 경로가 명확해질 때까지 반환을 불허하는 결정을 내림에 따라 국내법과 국제법, 한·일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불상 처리 문제를 결정할 방침이다. 도쿄 이종락 특파원 jrlee@seoul.co.kr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꽃미남 황손 어찌 그리 슬픈 얼굴이오? 빼앗긴 나라 강제뿐인 삶 서글퍼 그런다오!

    꽃미남 황손 어찌 그리 슬픈 얼굴이오? 빼앗긴 나라 강제뿐인 삶 서글퍼 그런다오!

    워낙 충격이 커서일까. 구한말, 그러니까 흥선대원군, 고종, 명성황후 등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이다. 제 특권 지키기에만 열중하다 결국 나라를 들어먹었다는 혹평이 있는가 하면 알고 보면 그래도 뭔가 노력을 하려 들었으나 이미 성패가 결정된 일에 휘말리면서 희생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런 역사학적 논란과는 별개로 대중적 정서는 아무래도 후자 쪽인 듯싶다. 그래서 대중의 정서에 부합하는 대중매체 쪽에서는 명성황후를 이상화하는 데 이어 고종을 개명군주로 조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떨까. 황족으로 태어났으나 태어났을 때는 이미 나라가 일본으로 넘어간 뒤다. 내선일체에 따라 일본 육사에 진학했지만 한국말을 거침없이 썼고 일본 왕실과의 결혼을 강요당하지만 끝끝내 거부해 그나마 친일파의 딸과 결혼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당시 황족치고 일본인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이 사람이 유일했다. 그 뒤 중국으로 발령 나지만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려다 발각된 적이 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에 연루됐다는 소문이 나돌자 일본으로 다시 발령받는다. 일본 근무를 거부하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일본으로 가는데 그곳이 히로시마다. 첫 출근 날, 원폭 투하로 사망했다.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 이강의 아들 이우(1912~1945) 얘기다. 비운의 왕자인 셈인데 사진으로 본 이우는 둥글둥글하기보다는 늘씬하니 꽃미남에 가깝다. 복장도 꽤 멋스럽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과 한미사진미술관은 내년 1월 13일까지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1880~1989’전을 연다. 고종 황제와 그의 후손들에 대한 각종 자료 사진을 국내 기관뿐 아니라 스미스소니언박물관, 보스턴미술관 등 국외 기관에서까지 대여해 와 꾸민 전시다. 원본 사진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대의 풍경을 보는 데 꼭 참고할 만한 전시다. 고종은 근대 문명에 비교적 많은 호기심을 드러낸 황제답게 사진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 시찰단인 보빙사 일행의 자문 역이었던 미국인 퍼시벌 로웰(1855~1916)이 1884년 처음 고종을 촬영한 뒤 고종 본인은 물론 왕족들도 많은 사진을 찍게 됐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사진은 주로 이런 것들이다. 그런데 묘하게 명성황후 사진만은 찾기 어렵다. 그간 명성황후 사진을 발견했다는 소동은 몇 차례 벌어졌지만 모두 가짜로 판명났다. 이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살해 대상에 올랐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 차례 살해 대상으로 오른 뒤부터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얼굴을 노출하는 사진을 찍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여기에다 ‘시아버지에게 맞선 며느리’라는 세간의 관심 때문에 명성황후 사진 찾기가 과열된 측면도 있다. 흥미로운 사진만 있는 건 아니다. 미국의 앨리스 루스벨트가 집에다 순종의 사진을 걸어둔 장면을 찍은 1966년 사진도 있다. 앨리스 루스벨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이다. 1905년 일본, 필리핀 등을 거쳐 한국을 방문한 미국 아시아순회사절단의 일원이었다. 앨리스는 극진한 관심의 대상이 됐다. 미국의 공주님이라는 세속적 관심도 있었지만 미국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고종이 앨리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준 것이 순종의 사진이다. 그런데 당시 아시아순회사절단장은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차지한다는 밀약,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일본에서 성사시킨 직후였다. 이처럼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사진이 모두 200여점에 이른다. 4000원. (02)2188-6072.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조선왕조 자취 서린 ‘99칸 고택’을 가다

    조선왕조 자취 서린 ‘99칸 고택’을 가다

    농촌과 어촌이 공존하는 고장 충남 보령. 특히 대천 해수욕장의 머드 축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보령의 삼곡 마을에 쇠퇴해 가던 조선 왕조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 있는 고택이 있어 눈길을 끈다. 아리랑TV의 데일리 매거진쇼 ‘아리랑 투데이’는 16일 오전 7시와 낮 12시에 전형적인 시골마을 한복판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한옥 이광명 고택을 소개한다. 이광명 고택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의 딸과 혼담이 오가자 왕가에서 거금을 내려보내 집을 짓게함으로써 왕가의 품격을 세우려 했던 곳이다. 이 고택은 모양 자체가 정사각형에 가까워 빈틈이 없는 ‘입 구’(口)자로 돼 있다. 왕실과 혼담이 오간 집답게 99칸의 대저택이다. 외양부터 대단히 화려하다. 사각의 건물은 빙 둘러 복도가 나 있고 그 옆으로 여러 개의 방들이 나란히 들어앉아 있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전주 한옥마을처럼 전통가옥 단지에 있지 않고 논과 대나무 숲 사이에 있어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전통가옥의 멋과 집 주위에 펼쳐져 있는 논과 노란 은행나무 등에서 무르익는 가을을 느낄 수 있다. 이광명 고택은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하는 한옥체험 숙박시설로 지정돼 숙박체험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고택 주변에는 시비와 함께 산책을 할 수 있는 ‘시와 숲길’ 공원이 있어 깊어 가는 가을을 사색하기에 제격이다. 서해를 끼고 있는 보령은 머드 축제가 열리는 대천해수욕장 외에 소박한 항구들이 있다. 항구에 인접해 있는 시장에서는 보령의 유명한 향토 음식 간재미회를 맛볼 수 있다. 제작진이 직접 그 현장을 찾아가 본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증조부 고종의 갑옷·투구 6월 日에 반환소송… 반드시 찾아오겠다”

    “증조부 고종의 갑옷·투구 6월 日에 반환소송… 반드시 찾아오겠다”

    “법정 소송을 통해 일본에 있는 증조할아버지(고종)의 투구와 갑옷을 반드시 찾아올 겁니다.” 대한제국의 상징적 적통을 이은 황사손(皇嗣孫·황실의 대를 잇는 후손) 이원(49)씨는 29일 조선왕실의궤 반환 소식이 전해지자 “다음 환수 목표는 왕실의 보물이 돼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총재이기도 한 그는 유행을 좇는 케이블TV 프로듀서(피디) 출신으로 2005년 황사손이 된 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6년째 전통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옛 문화 살리기에 노력해 왔다는 이씨는 “조선왕실의궤가 일본에서 돌아오면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고종의 유품을 돌려받기 위한 소송을 이르면 오는 6월 제기하겠다.”며 의지를 나타냈다. 영국 왕실의 결혼으로 세계가 떠들썩했던 이날 창덕궁이 내려다보이는 종약원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2005년 황사손이 된 뒤 6년간 어떤 일을 하고 지냈나. -제사를 계속 지냈다. 조선왕릉 40기의 제사와 황실의 5대 제향(조경단대제·종묘대제·사직대제·건원릉기신친향례·환구대제)에서 초헌관(제사 지낼 때 첫 잔을 올리는 사람)을 맡았다. 1년에 120여회 정도 된다. 600년 넘게 한 왕조의 후손이 애초 양식을 유지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그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말살된 대한제국 때까지의 문화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문화를 이미지로 복원해 내고 싶다. →그동안 성과가 있었나. -대표적인 것이 2008년 환구대제를 복원한 일이다. 일본이 침략 후 지금의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환구단(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을 없애고 군 장교들이 머무는 철도호텔을 지었다. 일본이 박아 놓은 말뚝을 빼는 것처럼 우선 이 문화를 복원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고증을 거쳐 2008년 제례를 되살렸다. 그러나 원래 터에 건물이 들어선 탓에 환구단 시설을 복원할 수는 없었고, 서울광장에 환구단을 세우려고 했는데 서울시가 긍정적으로 검토하다가도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오해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그렇다. 특히 몇 해 전 언론에 ‘황실문화원’을 설립하겠다고 얘기했는데 반발이 컸다. 문화원 이상의 정치적 세력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 종약원 회원이 500만명이다 보니 마음먹고 뭉치면 (정치 세력을)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울 수 있어 안 한다. 순수한 의미로 문화를 찾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황실의 무능함 탓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이유로 후손들에게 냉소적인 국민도 많다. -대한제국은 대비를 못 해서 망한 나라가 맞다. 그럼 무엇 때문에 망했는지 정확히 역사를 밝혀서 후대가 그 사실을 토대로 50년, 100년을 만들어 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제국 역사는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왜 지금 대한제국의 문화·역사를 복원하고 기억해야 하나. -현재 상황이 나라를 빼앗겼던 100년 전과 닮아서다. 우리는 항상 주변 국가가 부강할 때 침략당했다. 이제 문화로 당할 수 있다. 성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봐라. (대한제국의 역사가) 아픔의 역사이기 때문에 더 기억한다. 왜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는지 다시 펼쳐놓고 알아봐야 한다. →정부도 문화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부족한 점을 느끼나. -그렇다. 예컨대 문화재청은 ‘살아 있는 궁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궁이 되려면 그 안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외국인과 학생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면 얼마나 생생하겠나. “내 할아버지가 나라를 제대로 못 지켜서 아들인 영친왕이 일본에 끌려 가셨다. 그분이 사셨을 때 왕자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얘기를 직접 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내용 등을 담은 ‘낙선재 활용 방안’을 5년 전부터 문화재청과 청와대에 계속 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문화재 위원들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황사손이 들어와서 궁을 활용하느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재산인데…” 하는 논리를 폈다. →피디 경험을 살려도 흥미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자료 속 역사를 드라마로도 직접 제작하고 다큐멘터리로도 만들 것이다. 아주 고급스러운 왕실 문화와 의복, 관습, 혼례, 제례 등 진짜 역사를 담아 만들기 위해 준비해 왔다. 이것을 해외로 수출하면 ‘대장금’처럼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것이다. 대한제국을 들여다보면 이야깃거리가 엄청나게 많다. 지난해 (고종의 고명딸의 삶을 다룬) 소설 ‘덕혜옹주’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왜 대한민국 국민은 여기에 감정이입을 할까. 우리도 자랑스러워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일본에 있던 조선왕실의궤가 국내로 돌아오게 됐는데, 문화재 반환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난해 10월쯤 혜문 스님이 찾아와 놀라운 얘기를 했다. 증조부인 고종의 투구와 갑옷 등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누군가 황실에서 훔쳐 갔거나 도굴당한 물품이 (문화재 수집가인)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넘어갔고 이를 물려받은 오구라의 아들이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얘기였다. 사무라이 문화가 남아 있는 일본이 제후국을 침략해 전리품으로 빼앗는 대표적인 것이 (그 나라 왕의) 투구와 갑옷이다. 그런 의미로 도쿄박물관에 보관된 것이다. 치욕적인 일이다. 나에겐 할아버지 얘기였기에 너무 화가 났다(침묵). 한 개인이나 스님 한분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문화재청이 나서면 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혜문 스님은 문화재청 관계자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다고 하더라. 그러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스님께 물었더니 문화재 반환 운동을 하라면서 “나라가 안 움직이는데 직계손이니까 소송을 해 보라.”고 권했다. 할아버지의 투구와 갑옷을 찾아와서 환구단에 놓고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다. →소송도 할 계획인가. -물론이다. (다음 달로 예상되는) 조선왕실의궤 환수 이후 도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려고 준비 중이다. 애초 3월 중순에 일본에 가 도쿄박물관장을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다. 어려움을 겪는 국민에게 가서 “내 할아버지의 투구와 갑옷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계손이 소송을 한다면 문제화·이슈화될 것 같다. 그 이후 혜문 스님이 본인이 쌓아온 노하우를 토대로 분위기를 일으킨다면 찾아올 수 있을 듯싶다. 일본이 바로 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못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 국민이 어떻게 느낄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조선왕실의궤가 반환된다. -왕실의궤가 돌아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궤 안의 그림을 밖으로 꺼내는 것이다. 자료에서 어떤 가치를 끄집어내 지금 시대에 재현해 내느냐 하는 점을 고민해야 한다. 의궤에는 모든 왕실의 행사가 기록돼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안에 들어 있는 행사는 매우 화려하고 세밀한 문화적 볼거리요, 예술이다. 궁에서 이런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복원해야 한다. 문화재를 가지고 와서 다시 책장이나 박물관에만 넣어 둬서는 안 된다. 글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30일 오전 7시와 오후 7시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의 ‘TV 쏙 서울신문’ 방영 ■ 이원씨는 누구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9남 이충길씨의 맏아들이다. 부모가 말하지 않은 탓에 어린 시절 출생에 대해 모르고 자랐다. 이름도 왕실 이름인 ‘원’ 대신 ‘상협’을 썼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 아버지가 이씨를 데리고 창덕궁 낙선재를 찾아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에게 인사를 시켰고 이 자리에서 집안사에 대해 처음 들었다. 미국 뉴욕기술대(NYIT)에서 방송학을 전공한 뒤 유명 케이블방송사인 HBO에서 프로듀서(피디)로 일하다가 6년 만에 귀국했다. 광고회사인 금강기획에서 5년간 일했고, 케이블 채널인 뷰티TV 설립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케이블 채널인 현대방송 피디와 현대홈쇼핑 본부장 등을 지내며 직장인으로 나름의 꿈을 키워 갔다. 황실의 상징적 적통을 이을 수 있다고 직감한 것은 2002년부터다. 당시 한 출판 기념회에서 삼촌인 이구 황태손을 만났는데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적 감각을 지닌 이씨에게 호감을 보였다고 한다. 이씨는 2005년 7월 후사가 없었던 황태손이 숨을 거두면서 자신을 양자로 들여 법통을 잇도록 부탁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삶은 이때부터 180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예술·과학 결합… 관객 상상력 자극”

    “예술·과학 결합… 관객 상상력 자극”

    “우주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지구 곡선을 촬영함으로써 추상적인 예술과 차가워 보이는 과학을 결합해 미래에 더 많은 새로운 것들을 창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고종황제의 증손녀이자 미국 하버드대 예술장학생으로 ‘우주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이진(본명 이지인·34)씨는 1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목소리에 생기가 넘친다. 3일 서울 전시를 앞두고 있어 설렌다고 했다. ●작년 MIT공대팀과 세계 최초 우주예술 시도 그는 9일까지 서울 청담동 앤디스 갤러리에서 ‘더 퍼스트 아트 쇼 인 니어 스페이스(THE FIRST ART SHOW IN NEAR-SPACE)’를 연다. 지난해 세계 최초로 성공한 우주 예술과학을 촬영한 사진전이다. 전시차 한국을 찾은 그는 “이번 전시가 대중과 관객의 상상력에 자극을 불어넣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가 우주예술을 착안하게 된 것은 우연히 미국 CNN 보도를 접하고서였다. 매사추세츠공대(MIT) 괴짜 학생들이 가죽풍선에 카메라를 장착하고 대기권까지 띄워 올려 우주 속에서 지구 촬영에 성공했다는 보도였다. 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것에 매료되어 있던 그는 즉각 이 팀을 수소문해 예술과 과학이 결합하는 ‘드래곤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마침내 지난해 11월 MIT 공대생 올리버 예(Oliver Yeh·21)와 함께 매사추세츠주 웨스트 스탁 브리지 지역에서 풍선에 헬륨가스를 넣고, 자신이 만든 도자기 작품을 아이스박스에 담아 우주로 실어보냈다. 풍선에 장착된 카메라는 대기권에서 바라본 우주와 지구가 맞닿은 경이롭고 아름다운 곡선의 광경을 쉴새없이 촬영했다. 대기권 9만 9000피트에서 세계 최초의 예술 전시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서울 전시에서는 ‘드래곤 프로젝트’ 추진과정과 대기권 촬영 영상 등이 이씨의 육성 설명과 함께 소개된다. 그런데 왜 하필 우주로 날려보낸 작품이 도자기였을까. 그는 경희대 도예과를 나왔다. 대학 졸업 뒤 한국 무형문화재 협회장인 장송모 선생에게서 정통 도예기법을 배웠다. 2008년에는 전통 도자에 그라피티(graffiti·벽이나 화면에 낙서처럼 긁어서 그리거나 페인트를 분무기로 내뿜어서 그리는 그림)를 접목한 ‘흙, 에너지, 그라피티, 그리고 소통’전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의친왕 손녀… 언니 이홍씨는 연예계 활동 그러나 단순히 도예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한국 도자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싶은 남다른 마음이 있다. 그 자신 조선 황족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종의 손자, 즉 의친왕의 아들인 이석 황실보존국민연합회장의 둘째딸이다. 한일병탄 100년이 되는 해인 올해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을 지켰던 황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유난히 뜨겁다. 소설 ‘덕혜옹주’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순종의 동생인 영친왕 비의 일기가 공개되기도 했다. 이씨는 “한국의 친척들에게서 전해 들어 (조선황족에 대한 관심과 열기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와는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지만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알려야 한다는 데는 생각이 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언니(이홍)는 광고와 뮤직비디오, 영화에 출연하는 등 연예계에서 활동 중이다. 이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하버드대 세라믹스 프로그램에서 1년간 장학금과 작업공간, 가마 등을 제공받으며 작품활동과 함께 학생 24명을 가르치고 있다. 모두 도자를 처음 배우는 하버드대생들이다. “미국에서는 물레를 돌리는 방향이 한국과 반대라 재미있는 점이 많다.”는 이씨는 “한국 방식과 미국 방식을 모두 가르치고 있다.”며 웃었다. 3차원(3D) 입체를 뛰어넘은 신공간 개념의 예술로 평가되는 그의 우주 프로젝트 작품은 오는 12월 미국 케임브리지 출판에서 사진집으로 발간될 예정이다. 5월 하버드대에서 도자기전을 여는 데 이어 뉴욕에서 사진전도 연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부고] 한국바둑 숨은 공로자 이학진옹

    한국바둑의 숨은 공로자 이학진(李鶴鎭) 옹이 1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9세. 구한 말 마지막 왕족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공의 사위인 이학진 옹은 일본 게이오 대학 유학 시절 고(故) 조남철 국수를 통해 바둑과 인연을 맺은 뒤 한국기원의 전신인 조선기원의 막후 산파역을 맡는 등 한국바둑 태동기부터 바둑계를 뒷바라지했다. 고인은 특히 한국기원의 모태가 된 한성기원이 서울 남산과 적선동 등을 전전하며 자리를 잡지 못할 때 지금의 인사동에 있던 사동궁(寺洞宮)을 무료로 제공했다. 한성기원은 사동궁 기원 입성에 맞춰 조선기원으로 고쳤고 해방 뒤 대한기원, 1954년 한국기원으로 개칭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족으로는 외동딸 이숙경씨가 있다. 발인은 17일 오전 9시30분. 한림대 성심병원. (031)382-5004.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역사 바로세우기에 모든 것 바칠래요”

    “역사 바로세우기에 모든 것 바칠래요”

    “살아 있는 동안 ‘역사 바로 세우기’에 모든 것을 바칠 겁니다.” 아버지 의친왕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의친왕 이강’(박종윤 지음, 하이비전 펴냄)의 출간에 즈음해 23일 서울 운현궁에서 기자들과 만난 황실문화재단 이석(68) 총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버지 의친왕은 다정하셨던 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인 이 총재는 “우리 전통문화의 중요성이 점점 잊혀 가는 때에 이런 작품이 나와 아직 조선의 역사가 살아 있음을 이야기해 반갑다.”면서 입을 열었다. 작품은 일제의 계략으로 왕위를 잇지 못했지만 황족 중 유일하게 일제와 맞섰던 의친왕의 독립운동을 소재로 했다. 소설가 박종윤이 8년 동안의 자료수집을 거쳐 썼다. 그 과정에서 이 총재도 작가를 만나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증언했다고 한다. 작품 속 의친왕은 강인한 모습이지만 이 총재는 다정한 아버지로서의 의친왕을 기억하고 있다. “아침에 문안을 드리면 제 볼을 만지며 다정히 말을 건네곤 하셨죠.” 해방의 순간까지 의친왕은 탄식으로 살았지만, 해방이 되고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친일파를 등에 업은 이승만 정부는 황실 재산을 국고에 환속시키고 황족을 핍박했다. 헌법이 바뀌고 정부가 새로 생길 때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정권의 강압으로 미국으로 떠나야만 했다. 현재 남은 10명의 황족 중 한국에 있는 건 이 총재뿐이다. ●“명성황후·대원군 갈등 심하지 않았다” 미국 영주권을 버리고 한국에 온 지 20년. 그는 역사 바로 세우기, 역사의식 형성에 모든 힘을 쏟으며 강의를 나가고 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갈등은 심하지 않았다. 당파싸움이 조선을 망하게 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무능한 임금이 아니었다. 근대사와 관련해 왜곡된 역사의식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었다는 것 등이다. 그는 현재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일침을 가한다. “이 나라는 지금 황금만능주의에 경도돼 있다.”는 이 총재는 “돈을 너무 밝히면서 정신이 피폐해져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도 모르게 됐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최근 국회를 겨냥해 “국민들이 뽑은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는 건 상놈의 짓”이라고 강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와 더불어 왕실문화 재건을 위해서도 힘쓴다는 계획이다. 왕실품위유지를 위한 대책마련을 정부에 요구하고, 왕실문화와 정신이 이어지도록 역사강의도 꾸준히 진행한다. 글 사진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고종·백범의 묵향이 한눈에

    고종·백범의 묵향이 한눈에

    경기가 불황에 빠지면 고서화가 뜬다고 한다. 연초 갤러리 학고재가 기획한 ‘한국 근대서화의 재발견’은 만원사례였다. 몇년 전부터 남몰래 조선시대 고서화 기획전을 준비했던 우림화랑 임명석 대표는 살짝 김이 샜다. 그래서 임 대표가 두 손을 놓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는데, 느닷없이 대규모 서화전을 연다고 연락해 왔다. 서울 관훈동 우림화랑은 19일부터 6월3일까지 ‘묵향천고(墨香千古)-신록의 향연’전을 연다. 1층부터 4층까지 전관에 전시한다. 이번 전시에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추사 김정희, 백범 김구의 서예작품 55점, 오원 장승업의 ‘화조도’, 소치 허련의 ‘산수도’, 단원 김홍도의 ‘강상한취도 등 75점이 전시된다. 모두 130여점에 이르는 물량이다. 이중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 등 일부 작품은 개인 소장자에게 빌린 것으로 판매하지 않고, 도록에도 올리지 않았다. 전시 작품 중 40% 정도가 개인소장품으로 오랜만에 외출한 것들이다. 임 대표는 “조선 말기인 1902년 이전 출생자들을 중심으로 작품을 선정했다.”면서 “KBS ‘진품명품’의 감정위원으로도 활약하는 문우서림의 김영복씨가 작품을 선정하고, 김규선 선문대 교수가 한글 해설을 붙였다.”고 말했다. 임 대표는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도 많다.”면서 “현대미술의 뿌리가 고서화에 있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 5~6월에 수천년간 유지되는 묵향을 여유작작하게 즐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임 대표는 2층 전시실 정면에 고종의 ‘청학정’ 편액과 명성황후가 조카의 결혼을 축하하면서 써보낸 ‘오언축시’, 대원군과 의친왕 강의 글씨 등 왕가의 글씨를 한 데 모아놓기도 했다. 추사의 글씨는 6족자나 나와 있다. 행서체로 써내려간 ‘오직 도서(圖書)와 고기(古器)를 사랑하고 보리(菩提)에 들게 할 뿐이다.’ 내용의 족자는 유난히 힘이 넘쳐 보인다. 출품작 중 그림으로는 임자년(1560)과 계축년(1561년)생인 10개 문중의 선비 11명이 1610년 계모임을 연 기념으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임계계회도(壬癸契會圖)’, 표암 강세황의 산수도도 4작품이나 나왔다. 오른쪽 어깨 관통상의 후유증으로 일견 어눌해 보이기까지 한 백범 김구의 글씨 ‘서산대사시’도 좋은 구경거리다. 지하 1층에는 청전 이상범의 안개낀 듯한 풍경 ‘강촌어주도’, 소정 변관식 ‘무창춘색도’ 등 수묵화가 각각 여러 폭 걸려 있다. (02)733-3788.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한국 근대서화 한눈에… 흥선대원군 묵란첩 등 전시

    한국 근대서화 한눈에… 흥선대원군 묵란첩 등 전시

    왕가의 ‘파락호’에서 대원군으로 신분을 뒤바꾼 이하응(1820~1898)이 친 난초는 당대 최고로 손꼽혔다. 수요를 댈 수가 없어 김흥원과 윤영기에게 대신 작품을 제작케 하고 낙관을 찍어 줬다는 얘기도 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 문인화의 대표격인 추사 김정희(1786~1856) 문하에서 난을 배워 추사계열로 분류되지만, 선생과 제자의 난은 기질이 완연히 다르다. 제주까지 유배를 떠났던 추사의 난은 까슬까슬하고 꺾이지 않는 선비의 절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반면 외척의 멸시와 핍박에서 살아남기 위해 파락호를 자청하며 왕가의 명맥을 잇기 위해 애쓴 흥선대원군의 난은 끊어질 듯 유려하게 이어지며 거친 바람에 훗날리는 품새가 그의 인생역전을 보여 주는 듯하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오는 24일까지 열리는 ‘한국 근대서화의 재발견’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10폭 화첩인 ‘묵란첩’(墨蘭帖)과 특이한 화분에 심은 화초를 그린 ‘병란도’(甁蘭圖)를 감상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전시다. 이번 전시 작품은 학고재 우찬규 대표가 지난 10년간 일본에서 수집한 한국 근대서화 500여점 중 120여점을 추려낸 것으로 국내에서는 모두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에서 직접 그렸거나, 일본에 선물용으로 보낸 작품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전시를 기획한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전시된 작품들은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한국의 근대 서화를 모은 것으로, 내용적으로 근대성은 없지만 파격적인 화면 구성과 개성미가 두드러진 게 하나의 특징”이라면서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일컫는 사군자 용어가 정립된 시기”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를테면 황철(1864~1930)의 ‘묵죽도’는 화면의 농담을 활용한 구성이 신선하고, 전서체 ‘길금정석’은 현대적 회화미조차 느껴진다. 지운영(1852~1935)이 일본 여행 중 그린 ‘산수도’(山水圖)는 붓을 수직으로 반복해 찍어 인상파의 점묘법을 연상시킨다. 항일운동의 군자금을 댔다는 김진우(1882~1950)의 ‘묵죽도’(墨竹圖)는 간결한 맛이 있다. 이밖에 의친왕 이강, 김윤식, 김옥균, 박영효, 오세창, 조석진, 안중식, 허백련, 김은호, 이한복, 이완용 등 역사 속 인물들의 그림과 글씨를 볼 수 있다. 우 대표는 “일제 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도 예술의 꽃은 피어났다.”면서 “요즘 같이 어려운 시기에 걸어 놓고 보면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우 대표는 “이번 전시는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고, 조건이 맞으면 작품 전체를 미술관에 기증하고 싶다.”고 밝혔다.(02)720-1524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김일성이 총리각하라 해 나도 주석각하 호칭”

    강영훈(87) 전 국무총리가 27일 자신의 80평생을 정리한 회고록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동아일보사)를 펴냈다. 평안북도 창성군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외교관이 되고 한 나라의 총리가 되기까지 개인의 성장과정과 1988∼1990년 총리를 지내며 남북고위급회담을 주도했던 뒷이야기 등을 담담한 어조로 되짚었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2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의 일화 한토막.“우리 국민감정을 고려해 나는 김 주석에 대한 호칭을 주석 또는 주석님 정도로 하고 각하란 호칭을 안 쓰기로 작심했다. 하지만 대화 도중에 김 주석이 뜻밖에도 내게 ‘강영훈 총리 각하’라고 하는 바람에 나도 ‘주석 각하’라는 호칭을 썼다. 상대가 그렇게 호탕하게 나오는데 나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옹졸한 처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외교안보연구원장, 주영 대사, 주 교황청 대사 등 화려한 경력을 거치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도 담았다. 1987년 3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 교황청 대사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강 전 총리 부부와 사진촬영을 하고 손을 꼭 잡아주던 당시를 그는 “그 손길에서 전해지는 성하의 따뜻하고 무한한 사랑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또 주영 대사 시절 만났던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의친왕의 아들 이우 공의 비 박찬주 여사가 주는 느낌과 흡사해 부드러운 가운데서도 위엄있는 그런 모습이었다.”고 적고 있다. 영변 농업학교 3학년 시절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조선어독본’ 공부를 할 수 없게 된 것을 계기로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부모 몰래 일본으로 유학을 감행했던 이야기,1990년 2차 남북고위급회담 마지막날 45년만에 누이동생과 조카를 만났던 감격스러운 순간에 대한 회고 등도 눈길을 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Zoom in 서울] 서울 ‘유네스코 역사도시’ 꿈꾼다

    [Zoom in 서울] 서울 ‘유네스코 역사도시’ 꿈꾼다

    ‘문화’를 키워드로 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 중인 서울시가 유적 복원, 예술인 창작공간 확충, 문화 밀집지역 조성 등을 골자로 한 ‘창의문화도시 서울’ 종합계획을 15일 발표했다. 종로 경교장과 이화장 등 근·현대 유적 6곳을 복원해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문화예술작품을 지원하는 500억원 규모의 예술펀드를 조성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역사교육·문화공간으로 활용 서울시는 백범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환국 후 머물던 경교장과 이승만 대통령이 살던 이화장을 비롯해 박정희·윤보선·최규하 전 대통령, 장면 전 총리의 가옥 등 유적 6곳을 원형 복원한다. 당시 시대상을 조망할 수 있는 유품을 전시해 역사교육,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또 한국화가 이상범, 작곡가 홍난파, 서양화가 고희동의 가옥 등 유적 13곳도 기념관이나 공연장 등 문화공간으로 재조성한다. 조선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별궁 정원인 성락원과 가구박물관-옛돌박물관-한옥마을-삼청각을 잇는 ‘체험관광벨트’, 한성백제 박물관-풍납토성-몽촌토성 등을 연계한 고대 역사유적 탐방로 등은 문화벨트로 묶는다. 서울성곽과 북한산성 복원이 진행된다.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역사도시로 등록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500억 규모 예술펀드 조성 우선 내년에 200억원(시 50억원·정부 80억원·민간 70억원) 규모의 ‘예술펀드’를 조성하고,2010년까지 이를 500억원 규모로 늘려 문화예술 지원을 확대한다. 문화예술인과 기업 등 투자자를 연결하는 ‘서울 아트 시드(Seoul Art Seed)’, 서울신용보증재단이 문화콘텐츠 제작자에 대해 대출과 보증을 지원하는 ‘완성보증보험제’ 등도 도입한다. 서울을 상징하는 문화특화지역도 만든다. 광화문, 인사동·명동, 충무로·세운상가, 대학로·흥인지문 등은 각각 역사, 전통, 영상, 패션·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특화거리로 육성한다. 정동길(공연장)과 삼청동·평창동·청담동·삼각지(화랑가), 서초동(악기), 문래동(창작), 답십리(고미술), 신사동(영화) 등 9곳은 지역별 특성에 맞게 정비할 계획이다. 아울러 도시 곳곳의 유휴시설이나 빈 공간을 예술인들에게 제공한다. 금천구 독산동 공장, 은평구 녹번동 은평소방서 등 6곳을 2010년까지 예술창작공간인 ‘아트팩토리(Art Factory)’로 만들고, 종로구 무악동 만남의 장소와 강서노인복지관 주차장 등 5곳에는 순수예술 장르별 ‘창작 스튜디오’를 건립하기로 했다. 창동과 성북동, 능동, 한남동, 고척동 등에는 문화갈증을 해소시키는 문화예술 공연장을 조성할 계획이다. ●1조 8500억여원 예산 투입 이 같은 종합계획을 통해 세계 44위인 도시브랜드 가치를 20위권으로 끌어올리고 9위인 문화산업 비중은 5위권,31위인 관광경쟁력은 20위권으로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총 예산은 1조 8532억여원으로 잠정집계됐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이색거리 탐방] (7) 성북구 성북동길

    [이색거리 탐방] (7) 성북구 성북동길

    서울 성북구 성북동 뒷길에는 근현대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험난한 역사를 묵묵히 걸어온 선인의 발자취를 찾아 훌쩍 떠나보자.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시민문화 유산 최순우 옛집 성북동길에서 만나는 첫 문화유산은 최순우 옛집이다.1916년 개성에서 태어난 혜곡 최순우(1916∼1984) 선생은 고려청자 전문가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다. 그는 1920년대 이 한옥을 지어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냈다. 미닫이창, 이름 모를 나무, 추녀 끝의 소방울, 백자 항아리…. 그의 대표적인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도 이곳에서 집필했다. 특히 2002년 이 집은 헐릴 위기에 놓였으나 시민들이 되살렸다. 문화유산위원회가 민간모금운동을 펼쳐 집을 사들였고 1년여 보수공사 끝에 복원했다. 이후 ‘시민 문화유산 1호’라는 별칭을 얻었다. ●누에 풍년기원 선잠단지 최순우 옛집 건너편에는 선잠단지가 있다. 옷감짜는 일이 중요하던 시절 누에농사의 풍년을 빌던 곳이다. 매년 늦은 봄(음력 3월) 뱀날(巳日)에 왕비가 친히 참여하는 친잠례(親蠶禮)가 열렸다. 현재는 그 터만 남아 50여그루의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지금도 동네 어른들이 매년 4월에 제사를 지낸다. ●조선시대 별장 성락원 선잠단지를 지나 성락원길로 올라가면 조선시대 별장 성락원(사적 378호)이 나온다. 의친왕 이강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물줄기가 폭포와 연못을 돌아 아름드리 나무가 빼곡한 정원으로 유유히 흐른다. 추사 김정희가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는 글씨를 남겼다. 개인소유라 방문할 수가 없다. 담 너머로 경치를 훔쳐보고 돌아섰다. ●환골탈태 길상사 성락원의 아쉬움을 길상사에서 위로받았다. 길상사는 1980년 말까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최고급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 자리에 세워져 있다. 주인 고 김영한 여사가 법정 스님의 ‘무소유(無所有)’에 감명받아 7000여 평 대지와 건물 40여 동(약 1000억원)을 시주하면서 1997년 길상사로 환골탈태한다. 그래서인지 사찰이 조선시대 별장처럼 아늑하고 평화롭다. 숲 속을 걷듯 계곡물이 맑고 새소리가 정겹다. 일반인이 불교 경전과 수행법을 쉽게 체험하도록 ‘길상선원’을 개원했다. 덕분에 외국인 관광객의 필수 관광코스로 자리잡았다. ●최초의 사립박물관 간송미술관 성북초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이 보인다. 고 전형필(1906∼1962) 선생이 33세 때인 1938년에 세웠다. 종로 부호의 아들이던 전 선생은 휘문고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는 나라를 지키는 길은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이라 생각, 가산을 쏟아부어 평생 민족문화재를 수집했다. 매년 5월과 10월에 전시회를 열 때만 출입이 허용된다. ●전통 찻집 수연산방 성북2동 동사무소 옆에 자리한 전통 찻집 수연산방은 상허 이태준 선생의 고택을 손녀가 개조한 곳이다. 전통 차를 마시며 한옥에 정취에 빠져들면 시간이 멈춘 듯하다. 라일락 나무 아래 놓인 둥그런 의자와 테이블이 운치를 더한다. 가장 인기 있는 자리는 사랑방 바깥쪽 자리. 담장 너머로 북악산 자락이 보이는 까닭이다. ●20세기 한옥 이재준가 이태준가 맞은편 덕수교회 안에는 이재준가가 있다.1900년대 지어진 건평 29.8평의 아담한 집이다. 사랑채 비슷한 별채의 안채와 이에 딸린 행랑채로 이뤄져 있다. 집터 주위의 수목은 마당 소나무와 어우러져 예스러운 멋을 풍긴다. 마포에서 젓갈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상이라는 사람의 별장으로 소설가 이재준씨가 살았기에 이렇게 부른다. 교회가 관리하고 있어 주로 문이 닫혀 있다. ●만해 한용운 집 심우장 만해 한용운(1979∼1944) 선생의 집 ‘심우장’은 폭 1m 골목에 숨어있다. 만해가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거처가 없을 때 주위 도움으로 지은 집이다. 그는 조선총독부가 싫어서 집을 남향이 아니라 북향으로 지었다. 마당에는 만해가 직접 심은 향나무가 있다.1944년 조국의 광복을 앞두고 그는 이 집에서 눈을 감았다. 방에는 만해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쓸쓸히 놓여 있다. ■ 북악스카이웨이와 서울 성곽 길 북악스카이웨이 산책로(3.2㎞)는 성북구민회관에서 성가정입구를 거쳐 북악골프장, 팔각정, 종로구 경계까지 이어진다. 처음에는 등산하듯 산을 올라 힘겹지만, 곧이어 북한산과 남산, 한강, 서울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아가며 펼쳐진다. 숲 속길이 대부분이지만, 도로와 맞닿은 산책로도 있다. 매연이 싫다면 손수건을 준비하자. 아쉽게도 북악골프연습장 부근에서 산책길이 끊긴다. 성북구가 구름다리 설치공사를 시작했다. 서울 주위를 둘러싼 조선시대 성곽(4㎞)이 또 다른 산책로다. 바닥에서 쏘아올리는 야간 경관조명이 은은히 밤하늘을 비추면 평화롭기 그지없다. 돌계단이지만, 길 따라 쉼터가 많아 초보자도 걷기에 힘들지 않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노부부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10대까지 다양한 사람도 구경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서울타워가 보이고, 성균관대와 창경궁이 손에 닿을 듯 가깝다.
  • ‘얼짱 왕자’ 흥영군 이우 납시오

    ‘얼짱 왕자’ 흥영군 이우 납시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에서부터 4대손인 흥영군 이우(1912∼1945)에 이르는 일가가 한 자리에 모인다. 서울역사박물관이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의 사람들’이란 초상화 특별전으로 이들의 만남을 주선했다. 전시회는 오는 27일부터 4월15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이 자리에는 대원군의 초상화 6점과 고종의 어진(御眞·임금의 초상) 3점, 대원군의 아들이자 고종의 형인 흥친왕 이재면(1845∼1912)과 이재면의 아들인 영선군 이준용(1870∼1917)의 초상화 등 모두 12점이 선을 보인다. 이재면, 이준용, 이우의 초상화가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운현궁(雲峴宮)은 현재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남아 있는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 안채인 노락당에서 태어난 고종이 즉위한 뒤 확장·신축하고 궁으로 부르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은 대원군이 되어야 하겠지만, 젊은 누리꾼들의 관심은 온통 흥영군 이우로 쏠린다.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의친왕의 아들. 수려한 외모의 이우는 지난해부터 ‘얼짱 왕자’로 불리며 인터넷 세상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대한제국의 황실이 여전히 존속한다는 설정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TV드라마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서울대박물관의 ‘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특별전이 뜻밖에 많은 가족 단위 관람객들을 불러 모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33세에 세상을 떠난 이우의 초상은 1965년 이당 김은호가 사진을 참고해 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무백관이 임금에게 하례할 때 입는 금관조복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번에 출품되는 초상화는 대부분 어진화사(御眞畵師)인 이한철과 유숙 등 당대의 대표적인 화가들이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초상화법에서 근대 화풍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