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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토유랑 3년… “자유 만세”/탈북벌목공 김호 서울 오기까지

    ◎한때 북요원에 잡혀 압송직전에 탈출/올4월 본지서 「빠삐용 행로」 집중보도 탈출 벌목공 김호가 마침내 자유의 품에 안겼다. 지난 91년 8월24일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재쏘 림업대표부 제1련합기업소」의 튀르마 벌목장을 탈출한 뒤 올해초 러시아 정부로부터 공식 망명허가를 받기까지 김씨는 북한 정보요원들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 극동과 시베리아,모스크바,중앙아시아,중국 만주 등지를 떠돌며 필사의 탈출극을 벌여왔다.이 과정에서 김씨는 두차례나 북한 정보요원들에게 붙잡혔으며 북한으로 압송되기 직전,자해를 하고 혈투를 벌이며 극적으로 탈출한 바 있다. 김씨는 이러한 눈물겨운 탈출행로가 러시아 사회에 알려지면서 지난해 모스크바로부터 임시거주 허가를 받았다.김씨는 그즉시 모스크바의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으나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또 올해 4월 서울신문이 김씨등 탈출벌목공들의 어려운 생활을 집중 보도,벌목공들의 송환문제가 정부의 중요 정책현안이 되었을 때도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식으로망명요청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씨는 최근까지도 본사 기자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서울에 가고 싶은 간절한 희망을 피력해왔다.『서울에 오면 눈이 뒤집힐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씨에게는 중앙아시아 도피생활중 카자흐공화국에서 만나 결혼한 고려인(한국계 러시아인) 마야씨와 아들,딸이 있다.이들도 곧 서울에 데려올 예정이다. 김씨는 북한 공군장교 출신이며 아버지가 교사,형이 연구인,누나가 의사인 비교적 성분이 좋은 집안에서 생활했다. 김씨가 그토록 희망하던 서울에서 와서 어떠한 생활을 펼쳐 나갈지 매우 주목된다.많은 사람들이 주시할 것 같다.
  • 책임지는 사회/문정희(굄돌)

    마감에 쫓기는 원고를 눈앞에 두고 한밤중에 워드프로세서가 고장이 났다.진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고쳐보았지만 화면은 좀체 되살아나지 않았다.정말 난감한 일이었다.날이 새기가 무섭게 그 회사의 애프터서비스에 연락을 했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밤새 대기를 한듯한 여직원이 잠이 조금 덜 깬 듯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결국 나는 민첩하고 숙련된 기사 덕분에 상오중에 기계를 말끔히 고쳐서 다시 원고를 쓸 수 있게 되었다.기분좋게 원고를 쓰며 우리나라도 참 좋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결코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꼈다. 지난 여름이었다.마음먹고 산 예쁜 유리컵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을 마시다 보면 유리조각이 부스러져 물위에 떠있곤 했다.취급 부주의인가 해서 아주 조심을 했는데 결국 그것은 아니었다.지나는 길에 그 백화점에 얘기했더니 혹시 뜨거운 물에 씻지 않았느냐고 하며 새것으로 교환해 주는 것이 아닌가.나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화가친구는 오래묵은 가죽점퍼를 다시 그 회사에 맡겼더니 몇년이 지난 것인데도 당연히 새 디자인으로 무상 수리를 해주었다고 자랑했다.뿐만 아니라 한번은 팔이 조금 뒤틀리게 봉재된 셔츠를 이미 몇번인가 세탁을 한후이므로 그냥 입을까 하다가 들고 갔더니 그 자리에서 새것으로 바꾸어 주었다고 하며 멋진 새셔츠를 보여주기도 했다. 소비자 문제라든가 애프터서비스 문제는 물론 앞으로도 더 많이 개선되고 발달해야 하겠으나 나는 이렇듯 당연한 일련의 작은 일들을 바라보며 뜨거운 기대와 희망에 젖어본다.우리도 끝까지 철저히 책임을 지는 사회로의 발돋움이 하나하나 이루어져가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들기 때문이다. 최근 잇단 대형사고 이후 사회 곳곳에서 개탄과 불신의 한숨소리가 드높지만 이렇듯 작은 희망의 샘을 또한 여기저기에서 솔솔 솟아나고 있는 것이다.이 작은 샘물들이 모여 언젠가는 푸르고 큰 강을 이루지 않겠는가.
  • 한국바둑 신예기사들 부진/한·중·일 대결

    ◎일본에 지고 중국에 힘겨운 승리 한국의 바둑신예들이 일본에 참패하고 중국에 힘겨운 승리를 거둬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차세대 「반상의 제왕」을 점치게 될 좋은 기회로 팬들의 관심을 모은 한·일 및 한·중간의 신예대결에서 「신4인방」을 앞세운 한국은 종합성적에서 일본과 11승16패,중국과는 7승5패를 기록했다. 지난 17,19일 이틀간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벌어진 3차례의 「한·일신예바둑대항전」에서 한국의 이성재초단(17)만이 3승을 올렸을 뿐 기대를 모은 최명훈3단(19)과 이상훈2단(19)은 2승1패,윤성현5단(19)은 1승2패로 부진했다. 그 반면 일본은 유학생 조선진8단(24)이 3승1패(불참자로 인해 대국수 증가),야마다6단 3승,미무라7단 2승1패로 기대이상의 좋은 성적을 거뒀다.게다가 일본은 신예최강 유키7단과 유학기사로 최근 일본 천원전 도전권을 따낸 관계로 유시훈6단(24)이 불참한 가운데 거둔 성적이어서 한국의 부진은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여류기사들도 윤영선초단(17)만이 3전 전승을 거뒀으나 이영신초단(17),이지현초단(15),김민희초단(15),강승희초단(14)등이 졸전을 펼친 끝에 4승8패로 완패했다. 한편 「신4인방」과 「4소룡」의 대결로 관심을 모은 지난 28,30일 「제1회 한·중신예바둑대항전」에서 한국은 중국과 1회전을 팽팽한 접전끝에 3승3패 동률로 끝낸 뒤 2회전에서 4승2패를 기록,종합 7승5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윤성현5단과 이상훈2단은 힘겹게 2승을 기록,우승의 주역이 된 반면 최명훈3단,양건2단,김영삼초단(20)은 1승1패,대일본전에서 3승을 따낸 이성재2단은 2패를 당해 기복을 보였다. 그러나 「중국의 이창호」 상호6단(18)은 김영삼초단과 최명훈3단을 모두 불계승으로 가볍게 제압,세계바둑계의 「요주의인물」임을 다시한번 입증했다. 바둑전문가들은 『신예들의 이번 부진은 그동안 기량이 크게 향상된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그릇된 자신감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하고 『신예들은 이번 대회를 거울삼아 최강한국의 명성을 이어나가도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며 분발을 촉구했다.
  • 일,국가안보회의 추진/미 NSC본떠… 정보분석 강화포석

    【도쿄=강석진특파원】 일본 정부는 걸프전 등 국제적인 중대 사건과 한반도의 군사충돌 가능성 등에 대처하기 위해 총리산하에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같은 기구를 설치하는 등 총리실의 안전 보장·위기관리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방침을 굳혔다고 일본의 산케이신문이 21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신설 방안을 검토하는 것과 함께 비공식적인 정부 최고 레벨의 정보교환회의인 내각합동정보회의도 상설기관으로 만들어 정보분석 기능을 강화하기로 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외무성 정보조사국장,방위청 방위국장,경찰청 경비국장 등을 위원으로 월 2회 총리관저에서 열고 있는 내각합동정보회의(의장 이시하라 관방부장관)도 상설기구화해 총리의 요구에 의해 내외정세 등을 보고할 수 있는 조직으로 만들기로 했다.
  • 「자본주의 갑부」 등장(최두삼 귀국리포트:7)

    ◎1천억원대의 「10억원호」까지/경제개방 여파… 자가용차도 1백만대 돌파 북경의 어느 술집 뒷마당에서는 귀공자티가 나는 한 중국인과 뚱뚱한 사장타입의 일본인이 각기 차례로 술병을 내던져 깨부수는 괴이한 시합을 벌이고 있었다.수십명의 손님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내 던지는 술병은 대부분 한병에 몇백달러씩 하는 프랑스산 헤네시,나폴레옹 코냑들로 아직 뚜껑도 열지않은 신품들이었다. 이처럼 값비싼 술을 깨버리는 모습을 모두가 안타깝게 지켜보는 가운데 두사람이 각기 75병씩 1백50번째 술병을 내던지고 난후 일본인 뚱보가 『내가 졌다.이제 그만하자』고 손을 들었다. 이 시합은 이곳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일본인 한패가 돈이 많은듯 거드름을 피우자 이 꼴을 보다 못한 옆자리의 중국인이 『당신이 그렇게 돈이 많다면 나하고 술병깨기 시합을 벌여보자』고 제의해 성사됐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액면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하지만 요즘 부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일부 북경사람들중에는 전설같은 이 얘기를 예로 드는경우가 있다. 중국에 부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최고지도자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추진해오면서 80년대 중반쯤부터 『중국인들을 모두 동시에 부자로 만들수는 없다.우선 능력 있는 사람부터 부자가 되라(선부기래)』는 지시를 내린후부터 부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들 부자를 만원호라 불렀다.1년에 1만원(원·한화약 1백만원)씩이나 수입을 올리는 세대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그후 만원호는 소득개념이 아닌 재산보유로 바뀌면서 곧 십만원호가 생겨났고 지금은 백만원호(백만원호·약 1억원)라해야 부자 취급을 받는다. 중국에서 제일가는 갑부가 누구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중국부자들은 예부터 티를 잘 내지 않으려는 전통을 갖고 있는데다 사회주의를 겪으면서 돈가진 사람들이 천시되고 인민의 적으로까지 규탄받던 때가 바로 엊그제 일이기 때문일 듯하다.그렇지만 경제개발이 가장 앞서가고 있는 광동성 일대 심천 광주 주해등지에서는 최근 1∼2년전부터 억원호는 물론 10억원호(1천억원)까지 생겨났다는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잘 알려져있는 갑부로는 「붉은 자본가」라는 별명을 가진 영의인국가부주석을 들수 있다.그는 북경에 52층 경성빌딩을 비롯,국내외에 수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국제투자신탁공사의 소유주다.그는 과거 같으면 숙청 제 1호가 됐을 터이지만 93년 3월에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는 국가부주석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런가하면 천진부근의 대구장이란 마을을 중국내 최고 부자마을로 가꿔낸 우작민은 지금 20년형을 받아 차가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그는 이 마을에서 공동으로 경영하는 여러 업체의 총수로 연급만도 1백만원이 넘었으나 살인사건을 방조한데다 이 사건을 수사하러온 경찰관마저 감금해버릴 정도로 만행을 부려 체포되고 말았다.하지만 인구 4천명의 이 농촌마을에는 벤츠 볼보등 고급 승용차들만도 3백여대나 굴러 다니고 있어서 『이 정도면 아시아농촌들중에서는 최고부자마을이 아니겠느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부자마을로 가꿔놓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중국에는 이런 부자들 말고도 보통 사람들 중에도 그들 월급과 비교해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을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들이 많다.한번은 한 한국인 기업가가 중국인 한사람을 고용했는데 며칠후 이 사람이 술 한잔 사겠다해서 따라가 봤더니 술값이 이 사람 월급 6개월분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한국인들중에는 아직도 중국인은 모두 가난하다고 생각했다가 크게 당하는 일이 종종 있다.그 예로 한 한국인 졸부는 101대머리 치료약을 개발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조장광옹을 찾아가 『내가 도와 줄 일이 없겠느냐?』고 거드름을 피웠다가 『당신이 나를 도와주겠다고요? 아니 내가 당신을 도와줄테니 소원을 말해 보시오』라는 면박을 당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중국에는 자동차 구입가격이 유난히도 비싸다.한국의 쏘나타급을 사자면 4만∼5만달러가 들고 외국기업과 합작으로 중국에서 제조해낸 차량들도 2만∼3만달러나 한다.이렇게 차량값이 비싼데도 지난 92년말 현재로 자가용이 이미 1백만대를 넘었다고 한다.
  • 김정일,88일만에 공석 등장/어제 김일성사망 추모대회 참석

    ◎북방송,김정일 「위대한 영도자」 호칭… 승계 임박 지난 7월20일 김일성 장례식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북한 김정일이 16일 하오 김일성 사망 1백일 중앙추모회에 참석,88일만에 얼굴을 드러냈다. 내외통신에 따르면 김정일은 이날 하오 4시 평양시내 금수산 의사당(주석궁)에서 열린 중앙추모회에 당·정간부들을 대동하고 참석했다고 평양방송이 보도했다. 이 방송은 김정일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겸 군최고사령관」이라고 호칭한뒤 이어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영도자」라고 지칭,그의 주석 및 당총서기 승계가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한편 정부의 한 당국자는 이날 『여러가지 징후로 미뤄보아 북한은 이번주부터 김일성에 대한 추도분위기에서 벗어나 김정일에 대한 권력승계 공식화 절차를 밟아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해 빠르면 17∼18일께 김정일이 당총비서에 선출될 가능성이 있음을 점쳤다. 이에 앞서 이날 상오 만수대 언덕 김일성동상앞 광장에서 열린 추모헌화식에는 오진우인민무력부장,강성산 정무원총리,이종옥·박성철·김영주·김병식부주석 등 고위 당·정·군 간부 대부분과 평양 주재 외교관들이 참석했으나 김정일과 계모인 김성애는 나타나지 않아 김정일의 신상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 일으켰었다.
  • 북,유엔서 김정일 「최고영도자」 호칭/권력승계 공식 재확인

    【뉴욕=나윤도특파원】 북한은 5일 하오(한국시간 6일 새벽)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김정일을 북한의 「최고 영도자」(supreme leader)라고 호칭함으로써 김정일의 권력승계 사실을 유엔에서 공식 재확인했다. 최수헌 북한외교부 부부장은 이날 기조연설에서 『친애하는 김정일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영도자이며 혁명군대의 최고사령관이고 우리 당과 국가와 군대의 전반사업을 정력적으로 영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는 그러나 김정일을 공식직함이 아닌 「최고영도자」라고만 호칭했을 뿐 김의 국가주석직및 당총비서 취임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 갈루치 미 귀환/미·북회담 휴회… 북핵대책 협의

    【워싱턴=이경형특파원】 미국과 북한 양측은 29일(한국시간 29일밤)제네바의 3단계 2차고위회담을 일단 휴회하고 양측이 각기 본국정부와 협의를 가진뒤 다음달 4일쯤 제네바에서 회담을 속개키로 했다. 워싱턴의 한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이날 『이번 2차 미북고위회담은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안다』고 말하고 『미측 대표단의 수석인 로버트 갈루치국무부차관보만 일단 워싱턴으로 돌아와 그동안의 회담결과를 백악관에 보고하고 내주의 속개회담에 대한 최종지침을 받아 협상에 임하게될 것』이라고 말했다.갈루치차관보는 빠르면 이날중 워싱턴으로 귀환,크리스토퍼 국무장관에게 회담결과를 보고하고 23일중 자신이 팀장으로 있는 클린턴행정부내 북핵관련부처 차관급회의인 한반도정책조정팀회의를 소집한뒤 이를 토대로 백악관에 내주 협상대책을 건의,필요한 지침을 받게될 것으로 보인다. 【제네바=박정현특파원】 한편 미국과 북한은 이날 상오 제네바의 미대표부에서 양측 수석대표 회담을 갖고 북한핵문제 해결방안을 집중논의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끝냈다.
  • 연변조선족 50여명 천안문서 침묵시위/임금체불 항의인듯

    【홍콩 연합】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주자치주의 조선주 50명 이상이 지난 26일 하오 2시쯤 북경중심부 천안문옆 신화문앞에서 연좌 침묵시위를 벌이다 공안당국에 의해 모두 연행됐다고 홍콩의 성도일보가 29일 북경소식통들을 인용,보도했다. 일부인사는 이들이 연변자치주의 체불노동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시위목적이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 중국 「4중전회」 25일 개막/29일까지

    ◎정치·경제개혁 집중 토의 【홍콩 연합】 중국공산당의 올해 하반기 및 내년의 중요정책들을 결정할 제14기중앙위원회 제4차전체회의(14기4중전회)가 다음주인 25일부터 29일까지 북경에서 소집돼 정치 및 경제개혁 방안들을 토의하고 결정할 것이라고 홍콩의 경제지 신보가 21일 북경발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4중전회에 대비해 국무원(중앙정부) 각부와 각위원회 지도자들이 19일부터 22일까지 북경교외 서산에서 비밀회의인 「서산회의」를 개최중이며 이 회의는 ▲국무원의 경제통제능력 약화문제를 비롯 ▲인플레와 통화팽창 ▲국영기업개혁 ▲빈부격차문제 등에 걸친 구체적 경제개혁 방안들을 4중전회로 넘길 것이라고 말했다. 4중전회에서 거론될 정치개혁방안으로는 ▲명목상의 의회에 그쳐온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 대한 개혁을 비롯 ▲정부와 기업의 분리(정기분개) ▲정부기구간소화 등이 포함될 것이라고 이 신문은 말했다.
  • 북,특별사찰 거부 재확인/외교부 성명

    ◎“대미대화 통해서만 해결 가능” 【도쿄 로이터 연합】 서방국들로부터 핵무기비밀개발의혹을 받고 있는 북한은 16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듭 밝혔다. 이날 도쿄에서 수신된 북한관영 중앙통신은 외교부대변인 성명을 인용,『특별사찰은 우리 주권을 멋대로 침해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의 목을 죄려는 정책의 일환이기 때문에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전했다. 성명은 이어 『진상은 DPRK의 주권을 침해하고 압박하는 방식으론 우리의 「핵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북·미간 대화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외교부대변인은 또 『IAEA이사회는 DPRK와 미국이 합의성명을 채택하고 합의이행을 위해 전문가회담까지 열고 있는 시점에서 북·미간 협상을 훼방하는 행동을 중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북한은 지난달 핵무기전용이 가능한 플루토늄을 다량생산하는 흑연감속로를 경수로로 전환키로 미국과 합의했으나 미국과 IAEA는 새로운 원자로 제공의 전제조건으로 북한이 과거에 플루토늄을 무기제조용으로 전용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선 특별사찰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 북 경수로 지원비 10년간 갹출/미,한·일과 협력 추진

    ◎대체 에너지원 화전건설 【도쿄 연합】 북한의 경수로 전환 문제와 관련,미국이 한국,일본,러시아 등 관계국에 타진하고 있는 구체적인 지원책의 개요가 밝혀졌다고 일본의 교도통신이 15일 보도했다. 이 통신에 따르면 일본 관계소식통은 미국이 제시하고 있는 지원책은 북한이 5만㎾와 20만㎾짜리 흑연감속로의 건설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출력 1백만㎾급의 대형 경수로 원자력발전기 2기를 건설하고 이에 따른 건설비로 총 40억달러를 10년간 갹출하며 ▲자금 협력은 한·미·일 등의 다국간 협력으로 실시하되 연내에 구체적인 대책을 협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또 미국은 경수로 가동시까지의 대체에너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에 석유발전소를 건설하고 연료를 러시아산 석유로 충당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미국은 이를 위해 이미 러시아측과 구체적인 조정작업에 들어 갔다고 말했다. ◎베를린회의 북측대표 발표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사이에 진행된 제3단계 고위급회담의 합의성명에 따라 전문가급협상이 1994년9월10일부터 14일까지 베를린에서 진행되었다. 쌍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흑연감속로계획을 경수로기술로 교체하는 문제,폐연료의 안전한 보관및 처분,대용에네르기(대체에너지)보장을 포함하여 복잡한 실무적 문제들을 토의하였다. 쌍방은 포괄적이며 허심탄회한 토의를 진행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미합중국은 이 문제들을 앞으로 더 토의하기로 합의하였다. 쌍방은 이번 협상결과를 자기 정부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 핵·관계개선 대미직거래 “창구트기”/북의 정전위체제 무력화 속셈

    ◎한미공조 틈새 벌리기 집요한 기도/「전문가회담」 앞서 중 철수 결국 관철 이번에 중국이 군사정전위 철수를 결정한 것은 정전협정체제의 폐기를 집요하게 획책해온 북한측의 정전위 무효화 전술에 중국이 공조한 산물로 볼 수 있다. 정전위의 중국인민군 지원단 철수 결정이 북한측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더욱이 북한이 이미 정전위 대표단을 철수한데 이어 정치협상기구 성격을 띤 인민군대표부를 판문점에 설치한 상태에서 이번 발표가 나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정전협정체제의 변화를 기도하고 있는 이면에는 우리측을 배제한 채 미국과의 직거래를 통해 관계개선과 경제지원 등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장기적 전략이 깔려 있다는 것이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즉 정전협정을 북한과 미국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는 논리를 펴면서 그 과정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 등을 추구한다든가 상주연락사무소급 이상의 관계개선을 촉진하려는 속셈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북한은 올들어 그들의 이같은 장단기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1차적으로 군사정전위를 기능상실 상태로 몰고가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주력해 왔다.지난 92년 한국군 황원탁소장이 미국측을 대신해 유엔측 수석대표로 임명된 직후부터 군정위 본회의 참석을 거부해온 연장선상에서 중립국감독위 철수통보에 이어 지난 4월28일부터 군정위 비서장을 아예 철수시키겠다고 공언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북측이 지난 5월24일 유엔사측에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설치를 일방적으로 통보해온 것도 정전협정의 폐기를 노린 계산된 행동이었다.지난달부터 북한측이 판문점 북측지역에 있는 판문각 확장공사에 들어간 것 역시 판문점대표부 활동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군정위의 효력정지를 기정사실화 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이처럼 북측이 군정위 기능정지를 꾀하고 있는 데는 정전협정을 무효화하되 정전협상의 당사자로서 미국과의 대화채널은 유지·확대하려는 계산이 깔려있다.때문에 이러한 북측의 처사들을 미국과의 핵 및 관계개선을 일괄타결하기 위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북한특유의 「벼랑끝 대화전술」의 일환으로 보는 관측도 있다.미­북 전문가협상을 앞두고 중국측의 정전위 철수발표를 이끌어냈다는 점이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그렇다고 해서 북측도 정전협정을 무효화한 뒤 당장 미국과의 평화협정이 이뤄질 것으로 믿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는 게 정부당국의 분석이다.말하자면 이 과정에서 한­미 공조를 약화시키고 미국과의 대화창구를 넓히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최근 북한은 미국과의 막후접촉에서 단골메뉴인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지 않고 있다.이로 미뤄 볼 때 북측은 의도적 긴장조성을 통한 대내 결속 도모 차원에서 정전협정과 평화협정의 중간단계의 과도기 체제를 일단 중간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대표 소환」 중국의 정전위정책/정전협정 존중·평화협정 지지 함께/한국 자극않고 북지원 「양다리 외교」 중국이 1일 군사정전위에서 대표단을 소환키로 결정함으로써 한반도의 정전협정체제가 뿌리째 흔들리게 됐다.중국 외교부 수뇌부는 북한 특사로 지난달 30일부터 북경을 방문중인 외교부 부부장 송호경과의 일련의 회담 끝에 북한측 주장인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라는 북한측 주장에 동조하는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정전위대표단 철수조치에도 불구하고 중국측은 한반도에서 당사국간 협상을 통해 새로운 평화보장 체제가 탄생하기까지는 기존 정전협정체제가 유효하다는 상치되는 입장을 동시에 밝혀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혼선은 중국측이 나름대로 이 문제로 한국과 미국을 자극하지 않고 대외명분상으로도 수세에 몰리지 않기 위해 정전협정유효라는 원칙론을 덧붙인데서 빚어진 것이란 분석이다.중국이 명분상의 입장 선언은 전기침외교부 부장이,실질적 입장은 당가선외교부 부부장의 입을 통해 밝히는 더블플레이를 했다는 것이다. 북한측으로 보아서도 중국의 입장은 분명치 못한 구석이 있는 셈이다.왜냐하면 당부부장은 국제관계의 변화와 한반도형세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새로운 평화체제수립이 필요하다는데 두나라(중국과 북한)의인식이 같다고 송호경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그러나 바로 같은날 전외교부부장은 송에게 기존의 정전협정을 대체할 새로운 평화보장 제도 마련을 위해선 한반도안정과 평화정착이 전제조건이며 여전히 정전협정은 유효하고 이해당사자들은 이를 준수해야 한다며 북한 주장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중국측은 정전위에서의 대표단 소환 필요성을 정전위의 파트너를 이루고 있는 북한대표단이 이미 철수,정전위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돼 있어 북한측의 요구를 고려한 끝에 이같이 결정할수 밖에 없었다는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측의 정전협정의 유효성 천명에도 불구,우리측으로선 중국 외교부 당국자가 정전협정을 대신할 새로운 체제에 대한 고려논의가 언급됐다는 점에서 큰 부담을 안게 됐다. 한편 북경의 외교관측통들은 중국과 북한과의 이러한 논의는 지난6월 최광북한총참모장의 방중등을 통해 계속돼 왔으며 북한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이날 결정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또 관측통들은 중국도 정전위에서 한발 물러나는 것이 북한이 미국과 한국을 상대하는데 더 많은 여지를 갖게 하고 중국 자신들도 대미 외교의 협상력을 발휘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국은 주중 한국대사관등에 중국의 이번 조치가 철수가 아니라 다시 대표단을 재파견할 수 있는 소환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그러나 북경의 외교가에서는 이러한 중국측의 결정이 정전위의 단계적인 무력화와 나아가서는 주한미군철수의 당위성으로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성하면서 한국정부의 대응조치에 주목하고 있다.
  • 「범세계 우편전산망구축」새 전기/만국우편연합 서울총회 성격과 과제

    ◎체신서비스 획기적 개선책 중점논의/「도착국 배달요율」 조정 최대쟁점 부각 우리나라가 1900년에 국제기구로는 처음 가입한 만국우편연합(UPU)은 5년마다 총회를 열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총회가 개최되기는 지난 69년 도쿄(16차)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다. UPU는 1874년 설립된 국제기구로 국가간 우편물 중계의 보장과 요금표준화,세계 단일우편영역 형성,국가간 우편분쟁조정 등이 목적이며 현재 1백89개국이 가입돼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89년 제20차 워싱턴총회에서 실질적 정책결정기관인 집행이사국으로 선출됐고 총회유치를 만장일치로 승인받았다. 특히 이번 서울총회는 급변하는 우편환경에 대응,우편물의 전달과정을 컴퓨터로 확인할 수 있는 범세계우편전산망 구축을 통해 우편서비스의 획기적인 개선책을 논의하는 등 UPU사상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서울총회에서 우선 해결돼야 하는 문제는 「도착국료」의 개선이다.도착국료란 국제통상우편물을 주고받을 때 발송국이 배달국에 지불하는 우편배달 보상금을 말한다. 이 문제는 그동안 우편물 발송량이 많은 선진국과 배달량이 많은 개발도상국 사이에 큰 논쟁거리였다.즉 선진국에서는 배달요율 인하를,개도국은 인상을 요구해 서울총회에서 원만한 조정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서울총회에서는 이밖에 오는 12월 임기가 만료되는 보토드바로스사무총장(69·브라질)의 후임을 선출하게 된다.현재 사무총장 후보로는 레비집행이사회의장(미국)과 아스칸도니 UPU사무차장(스페인)이 등록,각국 대표단을 상대로 득표활동을 벌이고 있다. ◎48개국 장관급이상 참석… 유엔총회 “방불”/9개국어 동시통역… 관광수입 96억 전망/막오른 「서울총회」 이모저모 ○…22일 개막된 UPU서울총회는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유엔산하 국제전문기구 회의인데다 참가자도 1백70여개국 2천여명에 달해 유엔총회를 방불케했다. ○…이번 총회의 공식어는 불어.이를 위해 한국외국어대 부설통역번역센터요원 23명이 동원되고있으며 총회기간중 이들에게 지불되는 경비만도 모두 9천여만원에 이른다.한편 UPU사무국에서도 40여명의 통역요원을 데려와 회의 진행상황을 불어,영어,독일어,스페인어,일본어,중국어,포르투갈어,아랍어,러시아어 등 9개국어로 동시 통역해줌으로써 언어소통을 지원하고 있다. ○…이번 총회에는 차관급 이상 각료만도 96명이 참석.이 가운데 아르메니아와 베베이도스는 부수상급,일본·체코·인도 등 46개국은 우정장관,호주·러시아 등 21개국은 차관급이 참석했으며 미국·영국·스웨덴 등 27개국은 체신공사 사장급들을 대거 파견,국제대회로서의 비중을 알려주고 있다. ○…UPU서울총회 사무국(국장 이교용)은 각국 대표단의 경호를 위해 행사장 주변과 공항,숙소 등에 정사복 경찰 5백여명을 배치했으며 총회장에는 30여명의 무장경찰이 3교대로 근무하는 등 경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또 서울시와 한국전력 등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아 각종 안전사고에 대비중이다. ○…이번 총회개최로 우리나라가 벌어들일 관광수입등은 모두 96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총회사무국의 한 관계자는 『총회예산이 70억원인데 기념우표 판매액만 74억원이 넘어 체신부로서는 4억원이흑자』라며 『또 대표단이 거의 매일 리셉션을 열기 때문에 호텔 등의 수입도 엄청날 것』이라고 기대. ○윤장관 만찬 주재 ○…윤동윤체신부장관은 이날 하오7시30분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UPU대표단을 위한 개회만찬을 주재. 윤장관은 만찬사에서 『시작이 반이듯 서울대회가 성공적 시작임을 확신한다』며 『서울총회가 세계 우편발전과 21세기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인사. 만찬에 이어 펼쳐진 공연에서는 화관무와 부채춤·장고춤·농악 등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개,참석자의 흥을 한껏 돋우기도. 만찬에는 보토드바로스 UPU사무총장을 비롯,권령수총회의장,장경우국회체신과학위원장,민주당 김충현의원,아스칸도니 UPU사무차장등 1천5백여명의 각국 대표단이 참석했다.
  • 아테네/관광타운 플라카(아랍서 지중해까지:13)

    ◎그리스혼 번뜩이는 십자가목걸이/토속음식·술 겸해 파는 「타베르나」 곳곳에… 초저녁부터 “불야성” 활주로를 향해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 기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 도시 혹은 한 나라의 첫인상이 실제의 리얼리티와 얼마나 부합되는지를 필자는 모른다.3박4일 혹은 길어야 4박5일 정도씩 각 나라에 배당된 이번 여행일정으로는 어차피 수박 겉핥기식의 관광유람 밖에는 소득이 없을 것같고 이런때 채택되는 그럴싸한 유적지라든가 뜻깊은 건물 내지 역사적 유물들을 찾는 일에도 필자는 실상 애초부터 흥미를 잃은채 포기하고 있었다.루브르를 하루만에 다 보고 소감을 말하라는 소리와도 그것은 같다.40년을 살고 있어도 서울이라는 괴상한 도시의 그 중심이 어딘지 필자는 아직 그 끄트머리조차 파악을 못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공중에서는 우선 그 나라의 땅과 산과 마을들의 대체적인 형태와 윤곽이 드러나고 빛깔이 나타난다.자주색에 가까운 지질과 짙고 어두운 녹색의 산야를 완만하고 구불구불한 오렌지 빛깔의 길들이 갈퀴질하듯이 마구 엇갈리고 있던 스페인의 첫 인상은,번드레하게 치장한 마드리드라는 도시와 후지고 매운 지방색이 두드러지던 그라나다를 직접 밟고 접촉했을 때의 그 느낌과도 무관하지 않았다.이스탄불 상공에서는 강과 붉은 벽돌지붕들과 그 틈바구니에서 올라오는 왁자지껄한 소음까지 들렸다.물론 이런 식의 과장은 린드버그가 애 기로 뉴욕에서 파리까지 사상 첫 무착륙비행을 하면서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라고 외쳤을 때의 그런 갈증과 그리움 없이는 어불성설의 것이기는 하다. ○포세이돈 환영이 아테네 상공에서 해신 포세이돈이 거대한 몸을 뒤채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필자 눈에 들어온 에게해의 물빛은 그만큼이나 푸르고 맑았다.기창 하나 가득 부드러운 옥색이 들이닥치면서 없어지지를 않아 처음엔 하늘의 일부인가 했다.여기저기 솜털처럼 희끗희끗한 작은 파도의 흔적이 보였을때야 물이라고 알아봤을 정도다.좀 커보이는 솜털은 아마 요트의 돛이었으리라.아직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방대한 푸른 공간…에게해의 인상은 한마디로 그랬다.영화 「지중해」를 만든 가브리엘 살바토레는 이 잔잔한 바다에서 「망각」을 보았다.아비규환의 전쟁,쓸모없는 욕심,그리고 가차없이 생명을 무너뜨리는 시간이란 것의 망각.아구다가와 수상소설인 「에게해에 바친다」를 쓴 판화가 이케다 마쓰오(지전만수부)는 거기서 서양여자의 자궁을 보았다.거창한 문명을 만들어놓고도 모태 주위에서 한 치를 벗어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인간의 파리와도 같은 집착과 욕망.「그랑 블루」의 뤽 베송은 이색필름 「아틀란티스」에서 그 살아있는 물의 리듬을 보았고 「구세주 알렉산더」를 만든 그리스의 현역 테오도로스 앙겔로폴로스는 아마 도시국가의 번영과 민주주의와 헬레니즘을 제창한 고대 그리스인의 자존심을 거기서 보고 각성을 촉구하는 그런 파격적인 필름을 만들었을 것이다. ○영어안내표기 없어 신화란 무엇인가.자연과 인간을 고리짓는 강인한 생명력의 그 의인화이며 그런 갈망의 변용이 아니겠는가.고대 그리스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외디푸스니 엘렉트라니 하는 인간의 잠재의식과 매몰된 무의식의 깊은곳까지도 샅샅이 천착해 들어갔다.포세이돈이 살아있다는 소리도 따지자면 그런 자연으로서의 바다의 순도거나 그 오염 여부를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실제로 에게해가 다른 대양에 비해 어느 정도나 덜 오염이 되어있는 것인지 구체적인 자료나 수치를 필자는 아는 바가 없다.그렇긴 해도 여태껏 보아온 바다들 중에서는 가장 맑고 순연하다는 확신이 드는 것은 비단 눈으로만 측정된 그 감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초행이라 기왕에 보아왔던 영화나 소설이나 여타의 선입견으로는 우리 보다 훨씬 가난하리라 여겼는데 실제의 아테네는 그렇지도 않아보였다.다소 실망했다면 아마 그 탓이었을지도 모른다.선입견 속의 그리스는 바다를 낀 벼랑들 틈에 다붙은 정갈하고 흰 방형의 돌집들과 검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전란과 가난과 외세의 침입이라는 질곡을 끈질기게 견뎌내는 낙천적인 사람들의 굴곡짙은 그 얼굴의 음영이었다.카잔차키스의 소설 「희랍인 조르바」도 그렇고,여성이면서도 저항정치활동을 해온 끝에 집권한 사회당의 문화청장관까지 지내다 얼마전에 작고한 배우 머리나 멜리쿠리가 남편 율스 닷신과 함께 만든 콜걸 얘기의 필름 「일요일은 참으세요」를 봐도 그 이미지는 여축이 없다.이런 이미지에는 「피가 마르는 듯한 햇빛」이라는 식의 일종 말할 수 없이 청량하고 건조한 느낌이 스며있는데,더구나 제대로 된 고대 희랍비극의 영상작품 같은 것에는 그 뉘앙스가 절정에 달한다.「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세계의 중심적인 고뇌를 가장 가까이서 노려보며 고개를 돌리지 않는」그런 느낌의 이미지가 지금의 아테네에서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정도는 아니지만,호텔로 가는 콘스탄티누 거리 양쪽에 에워싸고 밀집한 현대식 호화아파트들의 모습이 우선 그런 기대를 반감시키고 있었다.그나마 낙조가 비쳐드는 건물 틈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서 스쳐가는 아크로폴리스의 남아있는 신전들이 그 기묘한 실망을 달래주고라도 있었을 것이다. 『거짓말처럼 언덕위에 저런 것이 정말 다 서있네』라고 일행중의 하나가 내지른 탄성처럼,사양길에 접어든 해운업 보다도 순전히 그런 볼거리의 관광자원에힘입어 그리스는 이 정도의 여유나마 지니게된 것처럼 보인다.거리는 깨끗해서 후진데가 거의 눈에 띄지않았고,시민들은 코를 치켜든채 다소 거만한 표정들이었다.음식점이나 길이거나 영어표기가 거의 되어있지 않고 지도를 내보이며 길을 물어도 우선 모른다고 고개를 내젓기가 일쑤며 더구나 게발새발 지껄이는 엉터리 영어같은 것은 처음부터 먹혀들지도 않는다. 전시대의 건물들이 비교적 그대로 남아있는 플라카 지구의 골목들은 아닌게 아니라 그 자존심 높은 그리스인들이 외래객을 위해 따로 특별히 선심이라도 베푼 듯한,그런 신경과 배려가 유감없이 내배있는 곳이었다.우선 상점들과 거기 진열된 물건들이 정교하고 예뻤다.그리스 정교의 표지인 독특한 십자가 목걸이를 주로 파는 액세서리 가게엘 들어섰더니 득의만면하게 그것들을 「작품」이라고 소개했다.어째서 작품이냐니까 손으로 직접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넓적한 은판에다 뒤뷔페 풍의 희화(호화)들을 낙서처럼 간단히 새겨넣은 것들인데,노심초사하는 그런 공정을 한쪽 코너에서 그대로보여주기까지 하고있어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도리도 없다.자존심과 상술이 교묘하게 결합된 예다.기념품들도 왁자하게 진열되어 있지않고,손가락만한 크기의 납작한 블론즈 제품인 옛 기마상 같은 것도 하나하나의 모양새가 조금씩 다르게 정성이 가 있다.여기에서 만은 가게들도 친절하고 물건 값이 비싸지도 않아 야박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야등 줄줄이 내걸어 토속음식과 술을 겸해 파는 타베르나 라는 카페 비슷한 독특한 음식점들의 모양새와 정취역시 그랬다.걷다보면 같은 길이 또 나올 정도로 사통팔달로 뚫려서 연결이 되고있는 계단과 골목 여기저기에서 심심치 않게 나타나곤 하는 그런 곳들은 빨간 고추같은 야등들을 줄줄이 내걸고 길에다 좌석을 내놓고 있다.채양빛깔이며 장식이며 디자인의 색조가 외래객의 굶주린 정서를 직통으로 파고들기에 모자람이 없다.일행들이 모두 무드파들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왜 이런 식의 길가 가게를 발전시키지 못했을까 하고 탄식이 나올 정도다.초저녁부터 등불들이 켜지고 그황금빛으로 환한 좁은 길을 메운 쌍쌍들이 흐느적대듯 느리게 흘러간다.야하지도 소란하지도 않은 불야성…이라는 소리가 저절로 떠오른다.역시 군데군데서 마주치는 소극장 윈도의 공연 포스터들을 들여다 본즉 하나같이 심각하고 진지한 장면들을 내걸고 있다.희극의 그것이라도 아테네 사람들의 표정에는 모종의 엄숙함이 노상 곁들여져 있는 것도 같다.뭐라고 토론하는 소리같은 것이 들려와 올려다 본 골목모퉁이 한 술집의 이름이 그 좋은 증좌가 된다.왈 「소크라테스의 감옥」.
  • 「자주·평화·민주」 통일의 비전(사설)

    김영삼대통령은 15일 제49주년 광복절경축사를 통해 우리정부의 종합적인 통일정책비전을 제시하는 한편 문민대통령으로서의 확고한 통일의지를 내외에 천명했다.김대통령이 제시한 통일정책은 「한민족공동체건설을 위한 3단계통일방안」으로 그동안의 정책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그러나 세계사적 흐름의 변화와 남북관계의 새로운 국면전개를 맞아 미래지향적인 입장에서 통일및 대북정책을 종합적으로 또 일관성 있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큰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대통령이 밝힌 통일의 기본철학은 자유민주주의이다.『자유없는 민주가 있을 수 없고 민주없이는 자유와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데서 그것은 분명히 드러난다.오늘날 자유민주주의는 세계사의 큰 흐름일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이다.더구나 동구공산권 붕괴이후 사회주의 패배와 자유민주주의 승리가 선언된지 오래며 상반된 이념의 실험적 경쟁은 끝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그렇다면 우리의 남북관계와 통일의 방향이 어디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는 명확하다.그러나 김일성 사망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아직은 개혁과 개방을 거부하고 있다. 미국과 북한의 3단계고위급회담에서 북한핵문제에 약간의 진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원칙에 관한 것일뿐 실행에는 여전히 많은 난제가 남아있다.또 북한의 과거 행태로 미루어 이 합의가 언제 또 어떤 방향으로 굴절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튼 이제 어떤 형태로든 남북관계의 변화는 불가피하며 그 변화는 우리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져야 한다.김대통령도 이 점 명확히 밝히고 있다.북의 눈치를 살피던 과거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대북정책에서 벗어나 대남적화전략의 포기,인권문제의 개선 등 북한의 정책변화까지 당당하게 촉구하고 있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민족발전공동계획」의 구상과 제의이다.우리민족도 이제는 공허하고 낭비적인 이념의 대결을 끝내고 민족의 복리증진을 위해 남북이 함께 노력하자는 김대통령의 획기적인 대북제의인 것이다.이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북한의 핵투명성이 보장돼야 하며 그렇게될 경우 경수로지원이 그첫공동사업이 될 것이다.경수로지원사업은 남북관계개선과 함께 남북경제공동체의 형성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우리정부의 통일및 대북정책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이지만 통일은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닥쳐 올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예측불가능한 사태에도 대비,모든 가능성을 점검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관계개선을 위한 노력못지 않게 통일에 실질적으로 대비하기 위한 내부적 역량과 준비를 갖추는 일이 더 중요하다.우리에 앞서 통일을 실현한 독일이나 예멘의 경험은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치밀하고 체계적인 준비없이 갑자기 맞이하거나 시도한 통일이 어떤 엄청난 후유증을 낳을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민족적 재난을 가져 오게도 되는가 하는 교훈을 잘 보여주고 있다. 『통일은 영광과 환희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고통과 희생도 함께 나눌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김대통령의 역설은 우리 모두에 대한 의미심장한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우리는 통일이 아무런 자기희생없이 그냥 굴러들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대통령의 이번 제의는 한마디로 전례없이 구체적이고 솔직하며 자신에 차 있는 것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 미­북 3단계회담 타결 이모저모(북핵 타결)

    ◎북 「특별사찰」 반발… 합의진통 10시간/당초문안 두군데 우선순위 등 조정/평양승인 지연… 한때비관론 나돌아 미국과 북한은 12일 제네바주재 북한대표부에서 3단계고위급회담을 열어 합의문 채택을 논의했으나 일부문안에 대한 북한측의 반발로 당초 합의된 회담시한을 넘겨 13일 상오에야 합의문을 채택하는 등 막판 진통을 겪었다.특히 이날 하오 늦게까지 한때 회담개최와 합의문 채택여부조차 불투명하는 등 합의문 채택에 산고를 겪기도 했다. ○…회담은 12일 하오 2∼4시 사이에 열릴 것으로 예상됐으나 하오 7시가 넘도록 회담 일정이 잡히지 않아 회담자체가 무산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대두되기 시작. 회담장인 북한대표부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분위기인데다 기자회견을 대비한 마이크시설조차 준비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이같은 관측은 증폭.북한대표부 앞길에서 회담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1백여명의 취재진은 북한대표부의 정문으로 승용차가 드나들 때마다 몰려들어 『회담이 열릴 것같으냐』『합의문은 있느냐』고 묻는등 촉각을 집중. 북한대표부의 직원들은 회담이나 기자회견이 언제쯤 있을 것같으냐는 물음에 『봐야 알 것같다』고 연막.하오6시45분쯤에야 앞치마를 두른 대사관 여직원들이 회담장에 붉은 포도주를 나르기 시작했으며 작업복을 입은 남자직원들은 회담이 밤늦게까지 계속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듯 대표부 뜰에 조명시설을 갖추는등 분주한 모습. 회담이 이같이 지연된 것은 이때까지 합의문 문안에 대해 북한대표단측이 평양으로부터 지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 외교소식통이 소개. ○…로버트 갈루치국무부차관보는 하오 7시쯤 『회담을 갖자』는 북한측 통보를 받고 7시20분쯤 미국대표부를 출발,하오7시40분쯤 게리 세레모어 국무부 군축국 비확산부과장등 핵심측근 5명을 대동한채 2대의 승용차에 나눠타고 북한대표부에 도착해 합의문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기대. 그러나 그는 강석주 외교부부부장 등과 만찬을 겸한 회의를 마치고 하오 9시55분쯤 기자회견도 없이 굳은 표정으로 북한대표부를 나가 버려 분위기는 비관론이 팽배.5분여뒤에 북한대표부의 한직원이 굳게 닫힌 이유도 밝히지 않고 『대표단 회담이 1시간뒤 열릴 것』이라고만 말해 회담장 주변에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웅성거리는 등 혼란스런 분위기. 북한대표부는 하오 11시45분쯤 정문을 열어 취재진의 입장을 허용했으며 대표부 안에는 건물 방마다 불을 밝힌데다 뜰에 가설된 환한 조명시설로 대표부는 불야성을 이룬 느낌.대표부직원들은 밝은 표정으로 회담과 기자회견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으며 특히 회담대표단의 홍일점이자 여성 통역의전관인 정혜련은 노란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고 합의문이 든 것으로 보이는 서류철을 들고 미국대표단 영접을 대기. 갈루치차관보 등 미국대표단 15명 전원은 13일 0시15분(한국시간 7시15분)쯤 북한대표부에 도착해 0시55분까지 대표단전체 회의를 진행하면서 합의문을 확정.갈루치차관보는 3∼4분에 걸쳐 간단히 합의내용을 설명하고 기자회견없이 곧바로 떠났으며 강부부장은 20분동안 회담결과를 설명. 한편 일본기자들은 이번 회담에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특별사찰보다는 한반도 비핵화선언에 대한 이행에 있다』고 언급. ○…이날 회담개최가 지연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특별사찰문제에 대한 평양의 강한 반발 때문이며 이에따라 당초의 합의문에 비해 2군데가 조정됐다고 한 외교소식통이 전언.조정사항은 합의문 4항 「핵안전협정의 전면적 이행」이 「핵안전협정의 이행」으로 강도가 낮춰졌으며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위협을 않는다」는 3항이 당초에는 4항으로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 ◎북­미 합의성명 전문 다음은 미국과 북한간 3단계회담이 끝난 뒤 북한측이 13일 새벽(현지시간)한글로 발표한 양측간 합의문 전문이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표단과 미합중국대표단은 1994년 8월5일부터 12일까지의 사이에 제네바에서 제 3단계회담을 재개하였다. 쌍방은 1993년 6월11일부 조미공동성명의 원칙들을 재확인하고 다음의 사항들이 핵문제의 종국적 해결의 일환으로 된다는데 대하여 합의하였다. ①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흑연감속로들과 련관시설들을 경수로 발전소들로 교체할 용의를 표명하였으며 미합중국은 가능한 빠른 시일안으로 2백만㎾발전능력의 경수로발전소들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제공하며 그동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흑연감속로들을 대신할 대용 에네르기를 제공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기로 하였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경수로와 대용에네르기 제공조치에 대한 미합중국의 담보를 받는 차제로 5만개,20만㎾ 발전능력의 흑연감속로들의 건설을 동결하고 재처리를 하지 않으며 방사화학실험소를 봉인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밑에 두기로 하였다. ②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은 정치 경제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위한 조치로서 각기 상대방의 수도들에 외교대표부들을 설치하고 무역 및 투자장벽을 완화하기로 하였다. ③조선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및 안전을 이룩하도록 하기 위하여 미합중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핵무기로 위협하지 않는다는 담보를 제공할 용의를 표명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조선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북남공동선언을 리행할 일관한용의를 표명하였다. ④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무기전파방지조약의 성원국으로 남아 있으며 조약에 따르는 담보협정의 리행을 허용할 용의를 표명하였다. 이번 회담과정에 제기된 문제들 가운데는 아직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 있다. 쌍방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흑연감속원자로 계획을 경수로기술로 교체하는 사업과 폐연료의 안전한 보관과 처분,대용에네르기의 보장,련락사무소개설을 추진시키기 위한 전문가급 협상들이 필요하다고 합의하였다. 이에따라 전문가급협상들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혹은 합의되는 다른 장소에서 진행되게 된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은 회담을 휴회하고 1994년 9월23일 제네바에서 재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때까지 미합중국은 핵무기의 종국적 해결의 일환으로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경수로제공담보를 주기위한 조치들을 추진시키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외교부 강석주 제1부부장과 미국무성 로버트 L 갈루치 차관보 사이에 1994년 6월20일과 22일 교환된 메시지들에서 합의된 핵활동의 동결과 담보의 연속성을 유지하게 된다.
  • 국내외학자연구로 본 남북단정수립 과정

    ◎“평양 45년말 실질적 공산정권 수립”/「5도인민위」 조직 등 남측보다 3년 더 빨라/“「서울단정」 출발로 분단고착 ” 주장 허구 입증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과 국토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난지 만 3년째 되는 날인 1948년 8월15일 출범했다.비록 해방된 민족의 염원인 「통일 조국」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대한민국의 수립은 민주사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심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일각에는 「대한민국이 38선 이남에 세워진 단독정부」라는 이유로 그 의의를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남아 있는데다 급진세력은 『남한에서 단정이 출범함으로써 분단이 고착됐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의 출범에 떠넘기는 이같은 주장이 어느정도 타당성을 갖는지 학계의 연구성과를 통해 알아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남한지역을 통치하던 미 군정과 정치주도 세력이 통일정부를 이룩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단정을 강행했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신용하·김학준·진덕규교수등 국내 학자와 미국의 스칼라피노(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이정식씨(펜실베이니아대 교수)등 국내외 학자 대부분이 한반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 학자의 입장은 ▲광복이후의 정국이 남쪽과 북쪽간에 크게 달랐고 ▲남쪽에서는 새로 탄생할 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좌·우의 정파가 극한대립하고 있었던 반면 ▲이북에서는 소련주둔군의 지원아래 공산세력이 「실질적인」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특히 북한지역에서의 공산통치는 현실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남한지역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면서 나름대로의 일정표에 따라 민의를 수렴한 정치단체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으로 남북을 통괄할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가신청한 정당·단체가 4백25개에 이른 예에서 보듯 당시의 남한 정국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이에는 46년 9월의 「9월총파업」,10월의 「대구폭동」등 광복이후 잇따라 발생한 좌익의 준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반해 이북에서는 45년 8월16일 「함경남도 인민위원회」결성을 시작으로 연내에 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등 5개 도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완료했다.또 46년 2월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는등 급속히 통치조직을 확립해 나갔다.이 과정에서 소련식 소비에트정권 수립에 반대하는 기독교·지주·지식계층등의 반대파를 일사불란하게 숙청했음은 물론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저서로 유명한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마저도 자신의 책에서 『북한에서는 45년 말에 이미 실질적인 정권이 들어섰다』고 인정하는 정도이다.그는 「단정 수립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학파의 대표격 학자이다. 따라서 당시 남북 제 정당·사회단체의 논의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유엔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유엔총회는 「남북한 전지역에서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지만 당초 한반도문제의 유엔상정 자체를 거부했던 소련은 유엔감시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결국 남한의 단독선거를 가져왔다. 대한민국은 48년 5월10일의 총선거,7월17일의 헌법 공포를 거쳐 8월15일 출범했다. 이에 북한은 기다렸다는듯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치르고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45년 미·소 양군의 진주로 시작된 영토분단은 48년 체제분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앞서 ▲47년 2월의 「조선인민군 창설」 ▲48년 4월의 「헌법 채택」등 발빠르게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를 다져왔다.막상 정부수립 일자만 한달여 늦었을 뿐 단독정부를 준비하고 이룩한 과정은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빨랐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단정의 분단책임론」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대목이다.
  • 이승만과 김일성 비교론/김학준교수,남북한단정 두주역을 말한다

    ◎끝까지 항일깃발… 사상적 뿌리 민주주의에/이승만/기독교신자서 마지막 스탈린주의자로 종말/김일성 대한민국 건국 46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삼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들 가운데 한 분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국회의장과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박사를 생각하게 된다.동시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는데 앞장서 북한 공산정권의 초대 내각수상으로 북한 권력구조의 정상에 오른 뒤 무려 46년동안 1인장기집권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죽은 김일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똑같은 이북 사람으로 이승만은 황해도에서,김일성은 평안남도에서 각각 태어났다.두 사람은 37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났는데 그러나 차이는 연령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많은 부분들에 걸쳐 있다. 이승만은 조선왕조의 황혼기에 태어나 고전적인 한문교육을 받다가 서울에서 배재학당을 다니며 미국 교육을 받았다.이렇게 볼때 그는 미국 교육 또는 서양 교육을 일찍받은 당대의 선진적 소수 지식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은 서양 민주주의와 기독교에 관한 것이었다.그는 상당히 자극됐으며 그리하여 독립협회 운동과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해 싸우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석방된 뒤 그는 기독교 청년운동에 종사하다가 도미하여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 학사를,하버드대에서 정치학및 역사학 분야의 석사를,그리고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및 국제법 분야에서의 박사를 각각 받았다.그의 학문적 배경만을 놓고 볼때 당시의 조선사람으로는 단연 정상급의 학자였다고 할 것이다. 이승만은 곧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에서 벌어진 심각한 노선투쟁은,특히 무장투쟁노선을 옹호하는 세력은 외교선전노선을 앞세우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국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수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만들고 이 기구를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운동에 매달리게 했다. 그의 독립운동 방식이 무장투쟁 방식의 시각에서 보면 의미가 줄어들 것이다.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단 한차례도 일제와 타협한 일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항일독립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은 조선왕조가 무너진 뒤 망국민의 신분으로 태어났다.이승만이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듯 김일성 역시 기독교 집안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그러나 이승만이 평생 기독교 신앙을 지켰음에 반해 김일성은 곧 기독교를 버리고 반기독교적 입장에 섰다는 점이 대조된다. 이승만의 교육적 배경과 활동의 무대가 미국이었음에 비해 김일성의 그것들은 만주였다.이승만이 영어를 모국어나 다름없이 썼음에 비해 김일성이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썼다는 대조도 흥미롭다. 김일성의 교육은 그러나 중학교 퇴학으로 끝났다.그는 곧 중국공산당 당원이 됐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고 그 종착역은 소련극동군의 정보특무 대위였다.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이승만은 만70세의 노인으로 미국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왔다.한편 김일성은 만33세의 청년으로 소련으로부터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승만의 사상적 뿌리는 미국식 민주주의였다.그래서 그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국가 이데올로기,곧 공산주의를 증오하고 소련의 영토적 팽창주의를 경계하면서 소련이 북한을 발판으로 남한까지 공산화시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각심을 가졌다. 여기서 그는 일찍부터 단정론을 들고 나왔다.되지도 않을 남북통일에 연연하다가는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 위험성이 크므로.게다가 북한에서는 「소련 점령군의 앞잡이」김일성을 중심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창출되고 있으므로 남한에서도 서둘러 정부를 수립해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김일성은 소련점령군의 북한 소비에트화 전략을 떠받들고 북한에 공산주의 단독정권을 세워나갔다.그는 이 단독적 공산정권이 서고나면 그것을 발판삼아 남한까지 공산화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48년8월15일에는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세워졌고,같은해 9월9일에는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두 국가는 각각 상대방의 존재를 부인했다.부인할 뿐만아니라 상대방을자신에게 흡수통합시키기위해 무력의 사용도 주저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면적인 선제공격을 가해 온 쪽은 김일성이었다.그는 소련및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50년6월25일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동족상잔을 촉발시킨 것이다. 이승만은 다행히 미국의,그리고 국제연합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진격해 북진통일을 기대할 수 있었다.이 시점에서 김일성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 공산정권의 궤멸을 막을 수 있었다.여기서 전전 원상의 회복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휴전이 성립됐고 이 휴전체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이승만은 권위주의 체제의 길을 걸었다.부산 정치파동과 3선개헌을 거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낳았던 그의 통치는 결국 60년의 3·15부정선거로 귀결됐으며 4·19학생의거에 따른 4월혁명을 만나게 됐다. 대한민국의 조지워싱턴이 될 수 있었던 그는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고,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5년 뒤 그는 유명을 달리한 채 귀국했다. 김일성은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스탈린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고자 했다.그것은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그리고 피치자에 대한 억압과 세뇌였다. 이승만이 하야한 뒤 대한민국에서는 정권이 여러차례 바뀌었다.헌정사에는 굴곡이 적지 않았으며 어두웠던 시절들이 때때로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쌓아올린 건국의 울타리 안에서 대한민국은 결국 민주주의와 번영의 길에 들어섰다.다행스러운 일이다. 김일성의 북한은 한때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을 앞선 때가 있었다.그러나 1인 장기집권의 억압체제가 반세기 가깝게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활력을 잃게 됐으며 자연히 경제적 침체라는 늪속에 깊숙하게 빠져버렸다. 그리하여 북한 공산체제의 붕괴론마저 나오는 시점에서 김일성은 마침내 죽었다.이승만의 별세 이후 29년만의 일이다. 48년 이후 남쪽에서는 공화정이 여섯차례나 바뀌었고 최고권력자도 일곱사람이나 나왔다.그래서 대한민국은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교체를 통한 국민적 활력이 살아도 나고 지탱도 되어 선진국을 바라볼 수 있는 민주적 신흥공업국가로 커졌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최고집권자가 전혀 바뀌지 않은채 지내오다보니 세포가 죽어버려 결과적으로 빈곤의 땅이 됐다.이것은 김일성이 역사적으로 너무 오래 살았음을 의미한다.역사와 민족을 위해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권력에서 떠났어야 했다. 이제 미래가 대한민국의 편임이 확실해졌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라는 시대적 흐름을 탄 대한민국으로서 자신감을 갖되 신중하게 남북의 평화통일을 향해 착실하게 전진할 때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두를 필요는 없다.김정일체제의 성격과 방향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우선은 기본적인 교류와 협력의 부문에 돌파구가 열리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년의 8·15는 해방 50주년이면서 분단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역사적 시점이다.남과 북을 통틀어 우리 겨레의 형편이 훨씬 더 개선되기를 바란다.
  • 굴절을 거부했던 사회주의자/타계한 김철 전통일사회당 위원장

    ◎71년 대선 출마… 민추협부의장 맡기도 11일 별세한 김철전통일사회당위원장은 「반공」이 국시였던 3공화국 당시 남한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명맥을 이어온 「불굴의 사회주의자」였다. 김전위원장은 1925년 함북 경성에서 출생한뒤 청년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49년 도쿄대 문학부 역사철학과를 수료했다.이 때부터 당시 일본 사회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하게 됐으며 55년에는 재일한국거류민단 중앙본부 사무총장을 맡아 일본내 한국인들의 생존권과 민권 확보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김씨는 국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본격화하기 위해 귀국한뒤 71년 통일사회당을 창당,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해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73년에는 당시 브란트서독수상이 이끄는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에서 간사를 맡는등 잠시 「전성기」를 구가하는듯 보였다.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등으로 활동을 계속해나갔으나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사회주의 정당은 뿌리를 내리기 어려웠으며 긴급조치위반과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했다. 김전위원장은 당시 고비가 올 때마다 『정치적 현실여건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민주사회주의운동이 일보라도 전진할 수 있는 여건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노력할 뿐이지,고난 때문에 이탈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되뇌곤 했다. 80년대에 들어와서는 통일운동의 선봉대격인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부의장을 맡기도 했으며 사회민주당을 통해 사회주의 활동도 계속해나갔다. 그러나 90년으로 접어들면서 소련붕괴등 세계조류의 변화로 진로를 쉽게 찾지 못한채 3남 누리씨가 살고있는 독일에 머무르다 지병인 고혈압이 악화되자 지난 2월 귀국,조국에서 영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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