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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 가장 좋은 관계 돌입”이붕/이홍구·이붕 총리 회담 스케치

    ◎국가원수급 환영… 양국우호 반영/“방한땐 공부하는 자세로 가겠다”강택민 중국을 공식방문중인 이홍구 국무총리는 10일 북경 천안문광장 인민대회당 동편광장에서 열린 공식환영행사에 참석한 뒤 곧바로 이붕총리와 단독 및 확대회담을 갖고 북한핵문제,양국간 경협확대방안 등을 논의했다.이 총리는 이어 하오에는 중난하이(중남해)로 강택민국가주석을 예방,두나라의 우호를 다지는 한편 김영삼 대통령의 안부를 전했다. ○…이 총리는 이날 하오 중국지도자들의 집무실이 있는 중난하이(중남해)로 강택민 국가주석을 예방,김영삼 대통령의 안부를 전하고 강주석의 한국방문의사를 전달받는등 우호협력관계를 거듭 확인했다. 이날 상오 모스크바 방문을 끝내고 북경으로 돌아온 강주석은 이총리의 방문을 거듭 환영한뒤 50여분간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환담을 했다고 배석했던 강형석 총리공보비서관이 전했다. 이 총리는 『중국을 처음 방문하는데도 오래전부터 와 본곳 같다』면서 『두나라가 수교 이후 급속히 가까워진 것도 많은 부분 역사와 전통을 같이 할수 있었기 때문인 것같다』고 인사했다. 강 주석은 9일 중국방문 첫날 62회 생일을 맞은 이 총리에게 인사를 건넨뒤 『어제 이붕 총리가 보낸 생일축하 케이크에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축하했다. 또 강 주석은 『한국의 경제발전,특히 반도체등 집적회로분야의 발전은 놀랍다고 들었고 올해 한국을 다녀온 이붕 총리도 한국의 발전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얘기했다』면서 『이제 한국에 가게되면 많이 배우고 공부하겠다는 자세로 가겠다』고 말했다. ○…이홍구 총리와 이붕 총리는 인민대회당 동대청에서 약 20분간 단독회담을 한뒤 이어 1시간남짓 실무관계자들을 배석시킨 확대회담을 가졌다. 단독회담에서는 한반도의 정전체제 유지등 한반도문제가 주로 거론됐으며 확대회담에서는 경제협력 및 환경·과학기술분야 협력증대문제가 집중 논의됐다. 이총리는 회담에서 자동차·항공기·원자력 등 5개 산업분야의 구체적 사업추진과 환경 및 과학기술등 3분야에서의 협력사업추진을 제의했고 이붕 총리는 한·중간 무역불균형 해소를 한국측에 요청했다고 한 배석자가 전했다. ○…10일 상오 9시부터 20분동안 인민대회당 동편광장에서 열린 공식환영행사는 중국측이 국가원수급에 준하는 예우로 진행,양국간 우호관계의 농도를 반영했다. 이붕 총리의 안내로 행사장에 입장한 이 총리내외는 화동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다.이어 두나라 총리가 단상에 오르자 군악대는 애국가와 중국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연주했고 이어 19발의 예포가 울려 이 총리를 환영했다. 이 총리는 이붕 총리와 나란히 인민해방군의장대를 사열한 뒤 공식수행원들과 함께 곧바로 회담장으로 떠났다.
  • 미,“대이란 교역 전면중단”/원유 포함… 투자도 금지

    ◎클린턴/“핵개발·테러 지원 응징”/이란,군사대결 불가피 경고 【뉴욕 로이터 AP 연합】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지난 30일 이란이 테러를 조장,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란 원유수출물량의 20%을 넘고 있는 원유구매를 비롯해 미국회사의 대이란 교역및 투자를 전면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클린턴대통령은 또 러시아에 대해 이란에 원자로를 판매하기로 한 계획을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클린턴대통령은 이날 뉴욕에서 열린 세계유태인회의 만찬연설을 통해 『오늘 본인은 대이란 교역및 투자를 전면중단하고 양국간 다른 경제활동도 거의 모두 중지시키기로 결정했음을 알린다』고 말했다. 클린턴대통령은 『이란이 계속해서 핵무기를 추구하는데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며 이란은 중동과 그밖의 분쟁지역에서 불안을 조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러시아와 중국과의 거래로 더 한층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란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것이야말로 이란이 파괴력 있는 무기를 구입하고 테러행위를 지원하는 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한다』며 이번주중 이와 관련한 대통령령에 서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회사들은 이란산원유를 구매하는 최대고객사들로 1년에 42억5천만달러상당의 원유를 이란으로부터 사들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테헤란 AFP 로이터 연합】 이란과 미국과의 군사대결은 불가피하며 이란 군대는 전쟁에 대비하고 있어야만 할 것이라고 이란 혁명수비대의 모센 레자이 사령관이 1일 경고했다. 레자이 사령관은 빌 클린턴 미대통령이 대이란에 대한 교역 및 투자의 전면 금지를 발표한 데 대해 혁명수비대 지휘관들에게 『모든 증거로 미루어 미국은 이란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일간 좀후리 이슬라미지는 보도했다. 레자이 사령관은 『미국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므로 모든 군병력과 바시지스(의용군)는 전투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 이진무/만주 일대서 16년간 항일무장투쟁(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울신문사·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독립군 정예요원… 일 기관 습격·친일파 처단/「흑하사변」이후 국내잠입 활동… 35세때 순국 「5월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성상 이진무(1900∼1934년5월18일)선생은 짧은 생애를 조국에 아낌없이 바친 애국자였다. 19세때 만주땅에서 항일투쟁에 처음 나선 이후 일제에 붙잡혀 35세로 순국하기까지 16년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른 투사였던 것이다. 평북 정주 출신의 선생은 체구가 비록 작고 애꾸눈이었지만 불의를 보면 열화와 같이 격노하는 성격이었다.만주일대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할 때 「일목장군」이라 불렸다.또한 중국의 소설 수호지에 나오는 1백8명 두령 가운데 한사람인 흑선풍 이규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으로 「만주의 흑선풍」이란 별명도 있었다. 선생이 독립의식을 확고하게 갖추게 된 것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이었다.3·1운동이후 일제가 심한 감시와 탄압정책을 펼치는 것을 보고 독립의식에 눈을 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선생은 우선 만주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총영에 가입,독립군으로 무장활동을 시작했다.광복군총영은 임정이 만주지역의 교민통치와 군사훈련을 위해 설치한 독립군의 정예부대였다. 선생은 광복군총영이 1920년8월 미국 상·하의원으로 구성된 동양시찰단이 서울을 방문하는데 맞춰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침략원흉을 처단키로 하는 계획을 세운데 따라 처음 무장활동에 참가했다.광복군총영은 이 계획에서 서울과 평양·해주·신의주등 5곳을 항일운동의 진원지로 삼아 일제기관을 폭파하기로 했었다. 신의주로 잠입한 선생은 신의주역과 호텔에 폭탄을 던지는등 맹활약을 펼쳤다.선생은 이어 동지들과 함께 선천군에서 일경과 일제의 주구 몇사람을 제거한 뒤 신의주감옥을 습격하려다 일제에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만주로 되돌아왔다. 선생을 포함한 독립군들은 그러나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일제를 대거 무찌르는 대승을 거둔 이후 1922∼1923년까지 2∼3년동안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독립군들은 「복수」에 돌입한 일제 관동군의 대대적 공세를 피해 노령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레닌의 정책으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고 거의 소멸할 뻔한 처지에까지 몰린 것이다.레닌의 「코민테른」은 당초 독립군을 받아들였다가 일제의 눈치를 보고 방침을 전환,무장해제를 이유로 독립군을 공격했다. 후세에 자유시참변(흑하사변)으로 명명된 이 사건으로 독립군은 수많은 동지를 잃는 아픔을 맛봤다.어쩔 수 없이 만주로 되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새롭게 진열을 정비,1922년 대한통의부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같은 사정으로 자연스레 통의부에 가입한 선생은 4개 중대로 편성된 통의부 의용군에 소속됐다. 선생은 통의부가 국내진입작전을 지시한데 따라 통의부 2중대소속으로 1924년 동지 수명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군자금모금활동에 나섰다. 선생은 곧 1925년 통의부가 대한군정서·길림주민회·대한광정단·대한독립단·노동친목단·학우회등 다른 독립단체와 통합,정부성격의 정의부로 확대됨에 따라 정위부 5중대로 소속을 옮기고 국내진입작전을 수차례 펼쳤다. 선생은이어 철산군으로 들어와 일경주재소를 습격,일경 4명을 사살하는등 1927년까지 국내에서 일경과 독립군 밀고자 처단등의 활동을 끊임없이 벌였다. 선생은 이후 정위부와 참의부·신민부등 독립운동단체가 서로 모여 민족유일당인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자 예하인 조선혁명군에 가담,잠시 활동을 같이 하다 동료들과 1929년 재만조선인 혁명군을 결성,독자적 독립활동을 벌였다. 선생은 그러던중 1932년 안동에서 일제에 붙잡혀 신의주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마침내 순국했다. 나라를 되믿기 위해 몸을 바친 선생의 염원은 미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가자지구 긴장 고조/PLO,과격파 겨냥 총기규제령

    ◎지하드 등 “내전 불사”경고 【가자지구 AP 연합】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은 회교과격단체에 대한 강경조처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총기휴대를 규제,다음달 11일까지 모든 총기를 경찰에 인계하거나 등록토록 하는 조치를 12일 전격 발표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프레이 아부 메데인 법무장관은 앞으로 회교과격단체의 의용군 구성이 금지되며 보안군만이 자동화기와 중화기를 옮길 수 있고 권총휴대도 경찰의 보안검사를 받아야만 인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부 메데인은 『한달의 유예기간이 지난후에는 추가적인 의용군 구성이나 총기휴대가 결코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가자지구의 치안장관인 가지 제발리는 성명을 통해 회교과격단체들이 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더욱 단호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급진회교단체인 하마스와 지하드는 이같은 무장해제조치에 대해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가자지역은 아라파트의 어리석은 정책 때문에 내전에 돌입할 위기를 맞고 있다』고 주장,자치정부와의 대결국면이 심화될 전망이다.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의 보안군은 회교과격단체인 하마스와 지하드그룹이 지난 9일 이스라엘인 7명과 미국인 1명을 숨지게 한 자살폭탄테러를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한 이후 1백50명 이상을 검거하고 이들에 대한 무장해제와 함께 이미 체포,구금돼 있는 7명의 지도자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회교과격단체의 테러희생자는 지난해 10월 이후 66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미국의 압력을 받고 있는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은 지난 9일 테러이후 하마스와 지하드그룹 소속의원에 대한 일제검거를 지시했다.
  • 항일투사들의 유택(두만강 7백리:7)

    ◎나철·김교헌·서일 선생 묘 새 단장/강양안 마을마다 혁명열사비 우뚝 솟아/한·중수교후 관심 높아져… 모국이장 한창 연길시 사수에서 북쪽 골짜기로 20리가량 올라가노라면 금불동이라는 마을이 있다.이 마을이 등지고 있는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면 자그마한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안에 유달리 깨끗이 가꾼 묘소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묘지속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누구도 그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서 왔으며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길이 없다.다만 숨을 거둘 당시 19살이라는 것과 조선족 항일독립군 젊은 전사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마을에서 연세가 높은 이상헌(79)노인은 그 무명의 젊은 전사가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정황을 소상히 기억했다. 『꼭 쉰 일곱해전 일입네다.뒷산에서 드문이 총소리가 들려오더니만 일본놈들과 자위단들이 어린애 같이 앳된 새파란 청년을 끌고 마을로 들어왔디요.그 놈들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내다 보는 앞에서 청년을 신문합데다.이름을 물으니까 「항일독립군」이라고만 기래요.그 날 왜놈 장교의 군도에 목이 잘려 죽고 말았디요.하도 기막히고 딱해서 유체를 마을 사람들이 묻어주었댔습네다』 ○무명열사 묘지는 쓸쓸 두만강 양안 마을마다 양지 바른 언덕위에는 혁명열사비가 세워졌지만 산 언덕 공동묘지에 임자 없이 쓸쓸히 있는 독립투사들의 묘지는 풍우의 시달림에 자취를 잃었거나 훼손되어 가고 있다.용정시 삼합진 안미대골로 얼마간 들어 가다가 화선 누비골에 있는 묘지앞에는 돌비석 하나가 쓸쓸히 서 있었다고 한다.비석에는 김병덕 지묘라고 씌어있었다.부근 마을 사람들은 독립군 대장의 묘라고 했다.똑같은 항일투사의 묘지이다.하지만 계급투쟁 세월에 그 누군들 감히 돌볼 수가 있었으랴.몇해전 김병덕의 묘지는 파엎어졌고 대리석 비석도 도난을 당했다.오소리가 묘지에 굴을 뚫고 보금자리를 꾸민 것을 발견한 부근의 사람이 묘를 헤치고 오소리를 잡아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 항일열사들의 시신은 일찍 북한으로 이장되었다.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때 친선을 다졌던 터이라 이장이 쉬워 1950년대말에서 60년대 사이에 시신이라도 두만강을 건넜다.이에 비해 한국에 가까운 연고를 둔 항일열사들은 상대적으로 대접이 소홀했다.특히 문화대혁명 당시 항일유적이나 열사들의 묘소가 큰 수모를 겪었다.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오늘날은 사정이 달라져 항일열사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 그 넋이라도 살아서 가장 슬퍼하다가 다시 기뻐했을 열사가 있다면 나철,김교헌,서일 선생일 것이다.한국 대종교의 3종사로,또 항일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이들의 묘소는 화룡시 삼도구 청호촌에 있다.지금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가 항일역사유적지로 지정한데다 한국의 대종교가 묘역을 정화했기 때문에 제법 볼품이 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청산리전투를 총지휘 이 묘역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패거리와 추종자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 수난을 겪었다.비석을 모두 내동댕이 쳐서 청호촌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 댓돌로 쓸 정도였다.문화혁명이 가시고 뜻있는 사람들이 묘비석을 찾아내 세웠지만 김교헌선생의 묘비는 끝내 못찾았다.그래서 몇해전에 묘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대종교는 독립군조직 서로군정서를 만드는데 주역을 담당했고 서안선생은 그 총재로 1920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였다. 지금은 일본인들까지 유골을 찾으려 두만강변의 연변땅을 방문하고 있다.물론 침략자로 두만강을 건넜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얼마전에 한 일본 여인이 용정시 백금향으로 와서 자기의 오빠 묘를 찾았다.묘지 자리를 상세히 그린 지도까지 들고 온 일본 여인을 마을 노인들이 안내했다.묘가 있었다는 장소는 본래 일본 삼림경찰의 묘역이었다.1940년 홍기하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본경찰은 둘 뿐이었다는데 목숨을 살려 평정대 마을까지 이르렀다가 그중 하나가 병으로 죽어 그곳에 묘를 썼던 것이다.그런데 봉분이 사라져서 어방으로 묘자리가 짐작은 가도 딱 짚을 수는 없었다. 독립군 김덕형의사는 웅진,나진 등 두만강 연안의 조선을 다니며 군자금을 모았던 사람이다.1921년 경술년 토벌 때 어느날 저녁 군자금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 북흥에 있는 집으로 들어 왔다가 일본군 토벌대의 포위에 걸려희생되었다.그가 죽은 후 식구들은 군자금을 독립군에 전달할 수 없었다.많은 액수의 군자금은 그 집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다.김덕형의 아들 두 형제는 시름없이 공부를 하였다.광복이 나고 1947년 토지개혁을 하게 되자 생활이 유족했던 그 일가는 청산을 당해 러시아제 금장표 재봉틀마저 빼앗겼다.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던 재봉틀은 얼마전에 고장이 나서 고철로 팔아버렸다.그집 큰 아들은 북한에 들어가 죽고 작은 아들 김성록은 지금 한국에 산다.6·26전쟁 때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혀 북한에 온 김성록은 중국의용군으로 참전했던 북흥의 조선족 친구가 만난 일도 있다.그는 한국군 대좌(대령)군함(계급장)을 달고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정부 보훈처에서는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안화춘 선생의 도움으로 중국내 애국선열들의 묘소를 이장하고 있다.안화춘 선생은 갖은 노고를 아끼지 않고 이 땅을 메주 밟듯 하고 다닌다.이번 두만강 답사길에서 연변 도처에서 희생된 선열들의 자취를 잡을 수 있었다.조창렬노인이 들려준 경신년 대토벌 당시 상황도 그 한토막이다. ○선열들 발자취 곳곳에 부암동에서 독립군 한창준과 이씨가 체포되어 불에 타 죽었댔습니다.시체를 감장하려니 누가 누구인지 가릴 수가 없었디요.일제 놈들은 의병대장 최덕균과 남상윤(남풍수로 불림)선생도 모진 고문을 했다고 기래요.눈에다가 고춧물을 부어 넣고 신문을 했으니끼리 죽을 수 밖에….』 선열들의 비장한 최후는 눈물 없이는 들을수 없었고 일제와 주구들의 만행은 의분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가 흔히 북간도라고 부르는 독립운동의 무대 연변은 이렇듯 많은 항일투쟁의 사연을 안고 있다.나는 옛 용정 대성중학교(현재 용정시 제2중학교)앞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에 새겨진 시 한구절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무수한 선열들처럼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시련이 아닐 수 없다.
  • 즐겨 부른 노래(연변 조선족 1백년:11)

    ◎구성진 민요가락에 고달픈 삶 절절이/1914년께 찬송가 보급… 항일가사 붙여 불러/해방이후 대중가요 첫선… 지금은 노래방서 모국가요 판쳐 중국인들은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말을 해왔다.「조선사람 사는 마을엔 논밭이 있고,벼농사 하는 곳엔 조선사람이 있다」고….조선사람은 황무지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밭을 논으로 바꿔 벼농사를 지으니 중국인이 보기에는 영농엔 도가 튼 조선인이라고 감탄하여 마지 않았을 것이다.19세기초,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에 살던 우리 민족은 봄만 되면 강을 건너 중국땅에서 황무지를 일궈 가꾸었다.그리고 가을이 되면 알곡을 잔뜩 지고 다시 강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이 무렵 중국땅에서 피땀 흘려가며 개간하던 우리 농민들 사이에선 이런 민요가 불려졌다. 「월편이 나붓기는 갈잎대 가지는/애타는 내가슴을 불러야 보건만/이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이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신세타령 농요 많아 이름하여 「월강곡」이다.아마도 현행법으로는 월강이 불법인 줄은 알면서도 그곳에 가서 농사를 지어오는 농민들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것 같다.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주민들은 국경 의식이 적었던 모양이다.그도 그럴것이 예로부터 강 북쪽이 어디 외국영토였던가.한때는 우리의 삶터였기도 했고,선조들이 묻힌 땅이었다.현실이 어찌 그들의 의식을 제재할 수 있었겠는가. 이 무렵 중국땅으로 건너가 개간하던 빈농들이 부른 민요는 거의 삶의 몸부림이었다.노동을 할 때 일의 능률을 위한 민요도 있고 신세타령도 있다. 농사꾼이 있는 곳엔 대장장이가 없을 수 없다.대장장이는 농사꾼을 따라다니며 농기구를 고치거나 만들어주며 목숨을 유지한다.그러나 이것도 만만치는 않다.천하디 천한 직업으로 대장장이에게 시집올 처녀가 없다. 「대장일 십년에/망치깨만 남겼네/후렴 어깨넘어 실포장도/네 날 살려주렴아/후렴 누덕저고리 진자지고름/나를 살려주렴아/후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난한 농민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월강하여 그곳에 정착을 했다.그리하여 조선족 마을을 형성했다.뒤따라 자리 잡은 것이 천주교와 기독교였다. ○우리말 찬송가 나와 중국조선족이 민요 다음으로 맞이한 노래가 신식학교 창가과에서 부른 찬송가였다.1914년이래 기독교,천주교 계통에서 간도일대에 많은 학교를 세웠다.용정에 「명신여자학교」와 「은진중학교」 「해성학교」등이 생겼다.그러나 조선인 신식학교로는 1906년에 이상설선생이 세운 서전의숙이 처음이다.1892년 한글로 번역된 찬송가가 나오기 전까지는 한자발음으로 불렀다.예를들면 「예수 사랑하심」을 「주 예수 아이워」와 같은 경우다. 이렇게 창가는 찬송가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보급되면서 찬송가 곡조에 새 가사를 바꾸어 넣어 부르는 일이 많았다.그리고 나서 찬송가와 비슷한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특히 지적할 것은 중국조선족이 세운 사립학교 창가과에서의 반일사상을 담은 새창가 개발이었다.예컨대 당시 집안현의 광성학교에서 사용한 창가교재에는 「모험맹진가」 「운동가」등이 있었고 통화현의 배달학교 창가교재에는 「학도가」 「세계이주가」 「부모의 은덕」등이 있었다.전체적으로봐서 두 주류의 의도가 있었으니 하나는 반일사상을 고취시키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지식을 고취시키자는 것이었다. 용정은 나라 잃은 민족의 항일구국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중국조선족의 교육의 중심지였다.그러다보니 일본도 이곳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용정에 일본영사관을 세우고 겉으로는 중국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실제로는 독립운동을 탄압했다.1930년대로 접어들자 독립군의 조직과 활동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이 무렵 이정호가 만든 조선의용군행진곡이 불려졌다. ○작곡 정율성씨 유명 중국조선족 사회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중에 정율성(1918∼1976)이 있다.그는 40년 동안에 3백60여곡을 남겼으며 장르도 다양하여 가요·행진곡·아동요·합창곡 등으로 분류된다.1936년 중국의 남경에서 개최된 「5월문예사」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처녀작 「5월의 노래」로 데뷔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연변에도 「우리의 향토」「여성행진곡」「아침은 빛나라」등 해방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중가요가 나왔다.이어서 「토지 얻은 기쁨」「농민의 노래」「새아리랑」등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이 소작생활을 청산하는 기쁨을 노래하는 가요들이 나왔다.그리고는 한국동란으로 인해 북한에 동조하여 한국으로 진격하자는 내용의 가요들도 나왔다.그러나 1966년부터의 10년간은 문화혁명시기로 대수난기를 맞는다.대비판의 소용돌이 속에서 음악부분이 당하는 과녁은 민족전통예술분야였다.중국조선족의 예술활동이 비판을 받으면서 고난의 10년이 흘렀다.그리고 다시 원상을 회복했다. 연변을 처음 찾은 것은 1990년 7월이었는데 이 무렵은 이미 한국의 관광객이 붐비던 시기였다.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대중가요 테이프를 틀어가며 감상하고 있었다.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내게 「사랑의 종말」을 부르라고 강요받아서 모두 합창한 경험이 있다.지금은 노래방이 성시를 이루어 그 시절은 벌써 옛날이 되었다.
  • “미주 국가의용군 창설”/정상회담서 합의문 채택될듯

    【마이애미 로이터 연합】 미주대륙 34개국들은 자연재난이나 기타 비상사태 발생시 구호작업을 지원할 국가 의용군을 창설할 계획인 것으로 9일 입수된 미주 정상회담 코뮈니케 초안에서 밝혀졌다. 이같은 국가의용군 창설 제안은 현재 세계 각지에서 활동중인 유엔 평화유지군을 모델로 한 것으로 11일 미주 지역 34개국 정상회담에서 공식 채택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초안은 이어 『미주 국가들은 국가 의용군 창설 구상을 앞장서 추진,미주지역 각국에서 발생할 이같은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아울러 이 국가의용군을 궁극적으로 유엔의 관할하에 둘 가능성도 있음을 시사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학규장군/서울신문사·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

    ◎광복군 대일후방공작 지휘/조선혁명 이끌고 일군과 2백회 전투/중국거주 동포 3만명 무사귀국도 도와 백파 김학규장군(1900년11월24일∼1967년9월20일)은 평남 평원군 서해면 선산리에서 출생,소년기에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독립사상을 몸에 익히게 됐다. 당시 만주에는 이시영·이회영·이상룡등 많은 애국지사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어 항일의식이 넓게 퍼져 있었다.이들은 만주에서 경학사·신흥강습소·부민단 등 교포교육기관을 세우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있었다. 선생은 신흥강습소의 후신으로 설치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조직돼 있던 조선의용대 소대장으로 근무를 시작,항일무장활동에 투신했다.선생은 그러나 1920년 일제가 만주일대 독립운동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펼친 경신대학살을 피해 봉천으로 탈출,교포가 운영하는 동명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배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심어주는 데 힘을 쏟았다.선생은 1929년 학교를 그만두고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예하부대인 조선혁명군에서 총사령 양세봉장군의 참모장으로 일했다. 조선혁명군은 1931년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에 대항해 반일투쟁의 기치를 든 당취오등 중국 의용군과 서로 연계,공동전선을 펼쳐 큰 전공을 쌓았다. 한·중 양국연합군은 1932년4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일제와 2백여차례의 전투를 치렀다.그러나 11월들어 당취오가 일본의 공세에 밀려 군벌 장학량에게로 피신하고 다른 의용군지도자들도 잇따라 잠적함에 따라 조선혁명군도 약세로 돌아서게 됐다. 조선혁명군은 이같이 곤궁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 남경에서 장개석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김구선생과 의열단장 김원봉등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선생을 대표로 파견했다. 선생은 이에 따라 1934년5월 부인과 함께 농부로 변장하고 남경에 도착,김규식·유동열·김원봉등 독립운동단체의 지도급인사들을 만나 인적·물적 지원문제를 논의했다.이들은 비밀리에 회의를 가진 결과 효율적인 독립운동 수행을 위해서는 이념·노선등에서 제각각인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이 선결과제라는 데 합의,우선 각 단체를 통합키로 결정했다. 선생은 이같은 남경 현지의 분위기를 조선혁명군본부에 전달,1935년 조선혁명당 대표로 임명돼 남경통일대회에 참가했다.남경통일대회에는 선생의 조선혁명당·의열단·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등 5개 단체가 참여했다.그러나 1937년7월 일제가 북경 교외 노구교에서 중국에 대해 전면전쟁을 일으키고 이 전쟁에서 중국군이 일제에 밀리면서 중국정부마저 중경으로 위치를 옮기게 되자 선생등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한구·장사등지로 이동하게 됐다.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1940년에 이르러 마침내 통합신당인 한국독립당을 건설,대한민국임시정부 예하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했다.선생은 광복군에서 총사령 겸 참모장인 이범석장군의 참모장대리로 임명돼 적후방공작을 담당하게 됐다. 광복군은 총사령부 예하에 5개지대를 편성,1지대장에 이준식,2지대장에 선생,3지대장에 공진원등을 임명했다.선생은 1941년 다시 3지대장으로 임명돼 1945년 해방까지 대일선전·초모공작·정보수집등의 일을 수행했다. 선생의 지휘 아래 있던 지하공작원들은 중국군과 미첩보기구 OSS에서 교육을 받았다. 선생은 업무수행과정에서 미 14항공대 소속 버치대위와 밀접한 친분관계를 형성,해방직전인 1945년5월에는 14항공대사령관 센 노트장군을 만나 한·미연합작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동의를 얻어내기도 했다.선생은 또 한국내 미군의 상륙작전을 돕기 위해 한국인을 후방침투요원으로 양성,국내진입작전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독립군 20명을 결사대로 선발,미 OSS에서 1개월동안 훈련을 실시하던중 일제의 무조건항복으로 아깝게 참전기회를 잃었다. 선생은 광복이후 중국땅에 살고 있던 3만여명의 동포가 한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운뒤 1948년 느즈막히 귀국,1967년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김 대통령­이붕총리 회담 110분

    ◎한·중수뇌 “이웃사촌 우의” 거듭 강조/이붕총리,최근 북한정세 심도있는 브리핑/탁구커플 안재형·자오즈민 만찬초청 눈길 중국총리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이붕 중국국무원총리는 방한 첫날인 31일 김영삼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청와대 공식만찬에 참석하는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한·중회담◁ ○…김영삼대통령과 이붕총리의 청와대 회담은 단독·확대회담순으로 처음 예정보다 30분이 늘어난 1시간50분동안 진행. ○날씨 얘기로 시작 김대통령과 이총리는 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여름 한국의 가뭄과 중국의 홍수등 날씨를 화제로 잠시 환담. 이총리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양국이 지난 2년간 대단히 빠르게 발전했다』고 평가.이에 대해 김대통령은 『바다라기 보다는 큰 강』이라면서 『지금 이렇게 날씨가 좋지만 지난 여름 우리는 가뭄으로,중국 남부는 홍수로 고생해 가까운 사이인데도 기후차가 심하다』고 설명. 이총리는 『태풍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없다』면서 『그러나 금년 농사는 대단히 좋고 특히 동북지역은 대풍』이라고 소개.김대통령은 『우리도 가뭄은 있었지만 평년작은 넘는다』고 화답. 회담에서는 『이총리가 북한정세에 관해 깊고 의미있는 브리핑을 했으나 자세한 것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정종욱외교안보수석이 소개. 이총리는 『북미간의 핵 합의서를 보았다』고 전제,『그대로 실시되도록 계속 노력하도록 하고 이것이 아시아와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을 확신했다』고 평가.그는 특히 『이 합의서가 실행되도록 한중양국이 긴밀히 협조해 나가자』고 말하고 『남북이 직접 대화로 협상해 나가고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것을 중국은 절대 지지한다』고 중국의 정책을 설명. 확대회담에 들어가서 이총리는 『한국의 투자는 산동성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으나 다른 여러군데도 한국기업에 유리한 곳이 많다』고 밝히고 『다른 곳에도 투자를 분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이총리는 특히 원자력건설시장에 한국의 기업이 참여하게 해달라는 김대통령의 요청에 대해 『중국은 지금 석탄과 수력발전에 의존하고 있으나 앞으로는 원자력개발에 힘을 쓸것이므로 한국도 참여해서 한몫을 해달라』고 답변. 이총리는 항공기개발사업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항공기는 미국과 유럽에서만 생산했는데 한국과 중국이 협력해 중형항공기를 생산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피력.WTO 사무총장 출마건에 대해서도 『아시아인은 아시아인을 지지해야 한다』고 김철수상공부장관에 대한 지지를 약속. 두사람은 회담을 모두 마치고 1층 인왕실로 옮겨 한승주 외무부장관과 전기침 중국외교부장의 한중항공협정·원자력협력협정·민간항공기개발양해각서 서명식에 임석. ▷공식만찬◁ ○…김영삼대통령이 31일 저녁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이총리를 위해 베푼 만찬에는 3부요인을 비롯한 우리측 인사 72명과 중국측 수행원 30명등 1백여명이 참석해 성황. ○1백여명 참석 성황 김대통령은 만찬에 앞서 세종실에서 이총리와 함께 만찬참석자들을 일일이 접견하고 국빈실로 옮겨 간단한 칵테일을 들며 양국의 날씨를 화제로 가볍게 환담. 김대통령은 만찬사에서 『중국속담에 「먼 친척은 가까운 이웃만 못하다」(원친불여근린)는 말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이웃 사촌」이라는 말이 있다』고 소개하고 『우리 두나라간의 관계야말로 이웃사촌과 같은것』이라고 강조. 이날 만찬에는 양국 경제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경제분야에 대한 양국의 공통관심을 반영했으며 한·중 탁구커플인 안재형·자오즈민(초지민)부부가 특별초청 인사로 참석해 눈길. ○수행인사들 소개 ▷이총리공항도착◁ ○…중국 최고위급 인사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이총리 내외는 31일 낮12시10분 중국 국제항공 특별기편으로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4박5일동안의 공식방문 일정을 시작. 이총리 내외는 화창한 가을 날씨속에 19발의 환영예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신두병 외무부의전장의 기내 안내를 받고 트랩을 내려와 한승주 외무부장관과 반갑게 인사한뒤 한장관에게 전외교부장,진금화 국가계획위원회 주임등 각료급 수행인사들을 소개. 이어 이총리는 한장관 안내를 받으며 중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과 애국가 연주속에 사열대로 이동,양국 국기앞에서 경례한뒤 황병태 주중대사와 유병우 외무부아주국장등 우리측 환영인사및 장정연 주한중국대사 내외 등과 일일이 악수.
  • 중국 전총참모장 양득지 사망

    【북경=이석우특파원】 중국 혁명세대이며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지낸 양득지가 25일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중국관영 신화통신이 26일 보도했다.양은 한국전쟁에도 참전,당시 중국인민의용군의 총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지난 28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뒤 34·35년의 장정에 참가,이를 기반으로 중국군내의 여러 요직을 두루 지냈다.
  • 사회에 사랑의 온기 불어넣자/이충길 보훈처장(기고)

    중동전쟁 당시 미국에 유학중이던 이스라엘 학생들이 자진귀국하여 전쟁에 참전한 사실을 놓고 유태인들의 애국정신이 널리 회자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보다 앞서 6·25때 일본에 거주하던 청년학도들이 혈육의 만류를 뿌리치고 또 일신의 안일을 포기한채 조국을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던 빛나는 역사가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이들의 애국충정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고사하고 「재일학도의용군」이 있었는지 조차도 잘 모르는것 같다.이들은 국내에 연고도 없었고 참전하지 않더라도 아무런 비난을 받을 위치에 있지 않았음에도 스스로의 용기와 정열로 자신을 던졌던 분들이다. 6·25가 발발하자 모두 6백41명이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유엔군의 일원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였고 이원·원산작전,풍산·혜산진 전투,백마고지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이중 1백44명은 조국의 이름으로 산화하였다. 또다시 우리 한반도에 6·25와 같은 비극이 발생한다면 수많은 유학생중에 조국을 걱정하며 달려올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는지 오늘의 세태와 풍조에 비추어 의심스럽기 그지 없다. 지금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의 격변기를 맞고 있다.북한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민족공동체발전에 입각한 통일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국제정세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면서 사회안정과 굳건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외교·경제력을 포함한 우리의 총체적 역량을 극대하 하지 않으면 안된다.이러한 때에 국민 모두의 단합과 조국의 장래를 향한 일치된 노력은 너무나 절실한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내부에는 이같은 시대적 요청에 비해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비록 극소수 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일부 젊은 세대들은 호국용사들이 피땀으로 지킨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국가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자기 비하를 일삼는가 하면 사치와 방종,그리고 폭력으로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이같은 윤리도덕의 실추와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인해 우리 사회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자조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음은 여간 걱정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외국인들은 한국사람들이 자신들이 이룩한지난 반세기의 업적을 너무 과소평가하는가 하면 자기비하 의식 내지 비판적 성향이 지나치지 않은가 묻고 있다.이는 자기 조국에 대한 애착심이 부족한 오늘 우리의 세태와 국민성을 꼬집는 충고의 말로 겸허이 받아들여야 할줄 안다. 우리가 경험한대로 경제적 도약은 가능한 일인지 모르지만 문화발전은 결코 짧은 기간내 이루어지지 않는것 같다.오히려 급속한 성장이 정신문화의 피폐와 공동체 기반의 약화를 초래함으로써 우리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사회에 온기를 불어 넣는 일이다.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는 『왜 우리사회는 이렇게 차오,훈훈한 기운이 없소,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소』라고 간절히 호소한바 있다.날로 각박해져 가는 오늘의 세태를 생각할 때 너무나 절실한 문제가 아닌가 한다. 우리의 선열들이 몸소 실천해온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나를 버리는 멸사봉공의 희생정신까지는 어렵다 하더라도 조금씩 양보하고 절제하며 나누어 가지는 자세는 민주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자격이요 소양이다.이제 우리는 물질적 생활이 향상된 만큼 그에 걸맞는 정신문화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 아침 남에게 뿌려준 향수가 내게 향기로 되돌아 오는 그 진리를 새롭게 느껴보자.
  • 이달의 독립운동가 조성환선생/서울신문사 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

    ◎임정 무장단체 「광복진선」 결성/중국시찰 가쓰라 일본총리 암살기도/만주서 교포에 문맹퇴치운동도 펼쳐 청사 조성환선생(1875년7월9일∼1948년10월7일)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항일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25세때인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해 군복을 입은 선생은 일부 선배군인들이 주요보직을 차지하기 위해 일제와 야합을 일삼는데 분개,숙군을 외치다 군을 떠나게 됐다. 선생은 『썩은 군대는 나라를 망친다』면서 부패군인의 제거를 주장,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복역 3년만에 특사로 풀려나온뒤 신민회에 가담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다. 1907년 결성된 비밀결사 신민회에는 선생과 같은 무관출신,양기탁등 언론인,이회영등 교육자,민족자본가,안창호등 해외국권회복 운동가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동휘·노백린등 다른 무관학교 출신자 14명과 함께 신민회에 가입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터전을 확보하기 위해 자주 북간도를 돌아보았으며 1910년 국권침탈을 맞아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믿기시작했다.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는 나철이 창시한 종교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내에서 만주 동삼성으로 자리를 옮겨 포교중이었다. 선생은 1912년 중국 동북지방을 시찰하는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를 암살하려다 사전에 붙잡혀 거제도에서 1년동안 유배생활을 지내기도 했다. 유배를 마친뒤 곧바로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동료 독립운동가들과 청소년교육에 몰두하던중 1918년 만주길림에서 「대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 가운데 1명으로 참여했다. 다음해인 1919년 국내에서 발발한 3·1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독립운동가 사이에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이에 적극적으로 힘을 쏟았다. 선생은 4월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군무부 총장 이동휘와 함께 군무부차장에 임명됐으며 4개월후 동만주에서 활동중인 중광단에 참가,무장독립운동을 벌였다. 선생은 이와 별도로 대종교도들을 규합,정의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선생은 이어 1920년 청산리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제관동군이 추격에 나서자 이를 피해 노령 이만으로 이동,이곳에서 이청천·홍범도·안무등과 함께 고려의용군을 결성하고 의용군을 모집해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선생은 일제의 꾐에 넘어간 소련이 독립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기습해오자 동료들과 다시 만주로 돌아오게 된다. 북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단체들은 1923년 재통합에 나서 군정서·의군부·혈성단·독립단·광복단·국민회·신민단·대진단·의민단등 9개 단체로 각 단체의 통합을 위한 군사연합회 준비회의를 열었으며 선생은 이 과정에서 연락책을 맡았다. 선생은 이 모임이 진척을 보이지않자 김좌진을 중심으로 창설된 신민회에 참여,중앙집행위원회 외교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군정서를 모체로 하는 신민부는 백두산에서 흑룡강,장춘에서 구참까지를 활동무대로 정하고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한족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펼치면서 민족반역자의 징계,일본기관 습격등을 주임무로 삼았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정의부·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 조직운동등을 통해 흩어져있는 독립운동단체를 통일시키기 위해 수년동안 힘을 쏟았으나 정당의 이합집산이 심해 뚜렷한 진전을 얻지 못했다. 선생은 1938년에 이르러 비로소 뜻이 맞는 이동녕·차이석·엄항섭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외곽무장단체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선생은 같은해 이청천등과 함께 독립군 군사학편찬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임명돼 군사관련 교재를 번역하기도 했으며 1년뒤 1939년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선생은 1939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3개년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광복군을 양성키로 한데 따라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서안에 파견돼 광복군설립의 기초를 닦았으며 1940년9월17일 마침내 광복군이 창설되자 최고원수부의 판공처장으로 임명됐다. 선생은 42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중국측의 광복군 무력화 움직임을 무산시켰으며 43년에는 국무위원에 올라 대일전쟁을 지도했다. 선생은 45년 들어 임시의정원 제4과 군무·교통위원으로 일하다 8·15해방을 맞아 같은해 12월 동료 임정요인들과 함께 환국했다. 선생은 환국 이후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성균관 부총재등을 지내다 48년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63빌딩 능가할 70층호텔 지어라”(「85년북한」극비보고서:중)

    ◎김정일,루마니아 석유 공급않자 불만/이철봉 사회안전부장 과음문책 해임/중공군 6·25참전 기념식 열어 유대 과시하라 김정일은 당중앙위 정치국 전체회의와 중앙인민위 합동회의 결과에 대해 공개된 정보외에 상세한 사항을 본 대사에게 알려주었음.당지도부 인사이동상황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음.정치국원이며 군수산업분야 담당 당중앙위 비서인 연형묵을 정무원으로 보냈다고 함.이는 행정부내 당의 원칙강화를 위해서라고 함.정치국 후보위원 이진모가 대신 군수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로 임명됐다 함.정치국 후보위원겸 당중앙위 비서인 안승학이 정무원 부총리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에 임명 됨.정치국 후보위원 계응태가 경공업 담당 당중앙위 비서로 임명 됨.이 결정사항은 차기 당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채택되나 업무 인수인계및 새업무는 이미 시작됐다고 함. 북한경제에서 비철금속 산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추어 채광·비철산업 개발을 전담할 특수부서를 중공업분야를 관장하는 당중앙위 제1경제부로부터 독립시키기로 했다고 함.김하철이 이 새부서의 책임자로 임명 됐음.정하철은 50년대 소련에서 광산학을 전공했으며 현재는 당중앙위 총무부장,당중앙위 총서기국 비서장 임.그의 후임에는 최영림 부총리가 임명 됨.최영림은 이전에도 총서기국 비서장을 역임했음.최영림이 정무원 부총리라는 힘든 직책에서 벗어나 공공연히 기쁜 내색을 한데 대해 김정일은 그의 당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비판.김정일은 조선노동당에서도 소련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당중앙위에서 총무부를 조직부 다음으로 중요부서로 간주한다고 함.당중앙위 총무부장이 당총서기와 국가주석의 비서실장직을 수행한다는 점을 감안할때 최영림이 정무원 재직시 익힌 업무가 새직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함. ○지도부 인사 설명 김일성은 고령인 탓에 지방순시를 자주 못하고 대신 보좌관들을 지방에 파견해 현지사정을 보고서로 올리도록 하는데 현재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도 보좌관들은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함.김정일은 얼마전 노동신문 주필 김기남을 당중앙위 선전부장으로 임명했다고 함.대신 이성복을 노동신문 주필에 임명.이성복은 노련하고 균형감각을 가진 노동자출신으로 한국전쟁시 인민군으로 낙동강까지 내려갔다고 함. 제대한뒤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신문 남한부장을 지냈으며 최근 15년간 당중앙위서 연구원·부서책임자로 근무했다고 함.75년부터 중앙위 선전부 부부장을 지냈음. 김정일은 이철봉 사회안전부장을 해임하고 정치국원이며 인민무력부 부부장인 백학림을 신임 사회안전부장에 임명한 배경에 대해 설명.김정일의 말에 따르면 이철봉의 경질이유는 과다한 음주때문.지난9월 중국인민경찰 대표단 일행을 위해 옥류관 식당에서 베푼 만찬에서 이철봉이 혼자 보드카 2병반을 마시고는 몸을 움직일수 없을 정도로 취했다 함.1967년 제4차 당중앙위 전체회의의 결정에 따라 잠수함근무를 제외한 모든 군에서 음주는 금지돼 있음. 국내사정에 관해 김정일은 일기불순과 태풍피해까지 겹쳐 금년도 작황은 흉작이라고 말함.그러나 국가전체로 볼때 수확량이 지난해 수준은 된다고 함.86년도 1월1일을 기해 농민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가 실시된다는데 엄청난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함. 김정일은 또 현재 북한지도부는 자동차도로 건설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도로혁명을 완수하자」는 슬로건을 채택했다고 함.관련부서에서는 운전자들에게 지시사항을 많이 내렸으며 수송량 증대로 인한 도로정비의 필요성을 주지시키느라고 애쓰고 있다고 함.구역마다 교통법규강습회를 조직하고 트럭운전자 1만5천명을 평양시내 체육궁전에 모아놓고 특수교육도 시킨다 함.김정일은 그러나 기대한만큼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소련의 경험을 배우기 위해 소련 내무성의 「가이」(경찰)의 교류 필요성을 역설했음. ○도로건설에 박차 김정일비서는 또 외국관광객들을 위해 대규모 호텔건설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음.이미 평양에 45층짜리 호텔을 지었고 4,5개의 호텔을 더 지을 계획이라고 함.호텔건설은 88년도까지 완성할 계획이라 함.특히 대동강의 섬에 프랑스와 합작으로 70층짜리 호텔(유경호텔)을 지을 예정이라고 소개했음.김정일은 이에 덧붙여 『얼마전 남한에서 60층짜리 보험회사 건물을 지어 이를아시아 최고층 건물이라고 지랑하는데 이를 능가할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음.아울러 평양에 15만명을 수용할 대형 스타디움 1개와 5만∼6만명을 수용하는 스타디움 4개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함.내주중 원산시 갈마반도의 군용비행장이 있는 자리에 국제호텔 기공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함.원산을 휴양도시로 만들라는 김일성주석의 지시에 따라 일제때 건설된 이 비행장을 철거키로 했다고 함. 모스크바에서 열린 청년학생축전이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김정일은 말했음.그는 소련콤소몰(청소년동맹)이 행사준비를 비롯,행사전반에 걸쳐 많은 조언을 해준데 대해 매우 고마워했음.차기 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하겠다는 뜻을 소련측이 지지해준데 대해서도 사의를 표했음.조만간 있을 미소 정상회담과 관련,김정일은 레이건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의견을 밝혔음.레이건은 제국주의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고 제국주의의 요체는 변치않기 때문이라는 것임. 김정일비서는 또한 10월말 중공의용군의 한국전쟁 참전35주년 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음.적들에게 북한과 중국의 유대가 긴밀함을 과시하기 위해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 함.소련대표단을 대규모로 초청해 해방40주년 기념식도 개최할 계획이라고 함.중국대표단은 10명으로 구성될 에정이며 초청받은 사람 모두가 초청을 수락했다고 함.당·정부 인사들로 구성될 이 대표단의 단장은 정치국원이며 중공당중앙위 서기인 이붕부총리가 맡을 것이라 함.이붕은 소련에 더 잘알려진 인물임. 소련에서 공부했고 지난3월 고르바초프와 면담했던 인물.여성 1명도 대표단에 들어있는데 중공당 중앙위 국제관계부 부부장이라고 함.이 여성도 소련서 공부해 러시아어를 잘 구사하고 주로 동구관계 업무를 다룬 인물이라 함. 지난 가을 김일성과 호요방의 신의주회담때 배석했다고 함.행사중에는 리셉션·매스게임·문화공연등이 들어있고 미국의 한반도정책 비난,주한미군철수등을 요구하는 연설이 있을 것이라고 했음.김정일은 중국대표들이 미국 비난연설을 할지 흥미거리라고 했음. ○소련 대표단 초청 차우셰스쿠 루마니아대통령의 북한방문과 관련,김정일은 두나라 정상이 사회주의 건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고 했음.차우셰스쿠는 공산당·노동당 국제회의 개최와 구코민테른과는 다른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설을 제의했음.이 문제는 추후 추가검토와 논의를 갖기로 합의했음.아시아문제를 논의하면서 두 정상은 미국에 대응하는데 일본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는데 동의했다고 함.차우셰스쿠는 한반도 통일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적극 지지했으며 특히 고려민주연방창설 제의와 남북한·미국 3자회담개최를 지지했다고 함.차우셰스쿠는 또 88올림픽에 관한 조선노동당의 입장에 대체적으로 동의했음.루마니아측 요청으로 차우셰스쿠방문 결과를 양국공동 커뮤니케로 발표키로 결정했다고 함. 두 정상간 이견은 특별히 없었으나 경제문제에서 때로 첨예한 견해차가 드러났다고 함. 루마니아는 북한측에게 자국산 기계수입을 대폭 늘리고 이를 북한산 시멘트·비철금속·기타 원자재로 갚아줄 것을 요구.반면 북한은 예를들어 트럭의 경우 자체 생산분이 충분해루마니아산 자동차를 수입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더구나 루마니아에서 수입한 6∼7t짜리 트럭은 북한에서 1년만 쓰면 고장난다고 함.루마니아제는 아스팔트 도로용인데 북한은 이를 광산·군용등으로 사용할 목적임.북한에서 꼭 필요한 자동차는 루마니아도 전략물품이라는 이유로 수출을 거부했다고 함.전략물품의 경우는 루마니아 자체에서도 부족하다는 주장.북한이 루마니아산 석유를 수입하고 싶다고 하자 루마니아측은 자기들도 매년 소련에서 6백만t의 석유를 수입한다며 거절했다고 함.김정일은 루마니아가 자기들 석유는 앞날에 대비,비축하고 있다며 불만스레 말했음.
  • 북 아일랜드/신교도 휴전선언 유보/2개단체 성명

    ◎IRA의 평화의지 확인안돼 【벨파스트 로이터 연합】 북아일랜드 신교계 무장단체는 8일 영국과 아일랜드가 북아일랜드에 대한 비밀협상을 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IRA의 휴전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카톨릭계 IRA에 맞서 싸워온 대표적인 2개 신교무장단체 얼스터의용군(UVF)과 얼스터자유전사(UFF)의 결합조직인 연합왕정사령단(CLMC)은 이날 성명을 통해 『우리는 IRA 휴전의 영속성에 대한 진실성을 확인해 봐야 한다』면서 『영국과 아일랜드가오는 10월 북아일랜드 장래에 관한 계획을 밝히기 전까지는 휴전에 대해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신교계단체들은 IRA의 휴전선언이 영국정부로부터 양보를 받아내기 위한 술책으로 활용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UFF와 UVF는 휴전선언이 발표된 이후 세차례 카톨릭계주민들을 공격,남자 1명을 살해하고 또 다른 한명에 대해 총격을 가한 것을 비롯,벨파스트에 있는 신 페인당 사무실에 차량폭탄 공격을 감행한 바 있다.
  • “또 테러”… 북 아일랜드 평화 “먹구름”

    ◎신페인 당사앞서 폭탄차량 폭발/신교계에 휴전동참 촉구/영총리 【런던·더블린·벨파스트 AP AFP 로이터 연합】 IRA(아일랜드공화군)정치조직인 신 페인당측이 북아일랜드에서 영구적인 평화를 원한다고 천명한 것과 관련,존 메이저 영국총리가 휴전선언에 대한 보다 분명한 입장표명을 요구한 가운데 4일 신 페인당사 앞에서 폭탄이 장치된 차량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해 북아일랜드사태에 불안이 계속될 조짐을 보였다. IRA의 휴전선언 4일째인 이날 밤 9시45분께(현지시간) 신 페인당의 당사가 위치한 벨파스트의 한 거리에서 폭탄이 장착된 대형차량이 폭발,인근건물의 유리창이 부숴졌으나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경찰이 밝혔다. 이와 관련해 신교계의 북아일랜드의회 의용군(UVF)측은 한 지방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이번 폭발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고 경찰당국이 전했다. 한편 존 메이저 영국총리는 IRA가 지난 주 선포한 휴전상태에 대해 보다 분명한 입장표명을 요구하면서 북아일랜드 신교계 과격파에 대해서도 휴전동참을 촉구했다.
  • 이달의 독입운동가 양세봉장군/압록강 순시한 사이토총독 저격

    ◎조선혁명군 이끌고 만주서 항일투쟁/일군과 2백차례 혈전… 밀정에 살해돼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조국광복군과 동만백만동포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1932년 조선혁명군사령관 벽해 양세봉장군(1896년6월5일∼1934년8월12일)이 만주 흥경현에서 일제 관동군과 대회전을 갖기에 앞서 동료 독립운동가들에게 행한 연설의 일부다. 양장군은 이 전투를 포함,일제와 밀정들에게 붙잡혀 순국한 34년까지 2백여차례이상 혈전을 치른 신화적인 무장항일투사였다. 선생은 30년대 만주지역에서 활약한 최후의 독립군 명장으로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선생이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6세때인 22년부터.이전에도 3·1만세 시위운동을 펼치는등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이즈음부터 무장독립운동가로 본격 활약하게 된다.선생은 의주·삭주 경계의 천마산을 근거지로 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무장단체 천마산대(대장 최시흥)에 가입,창성군 대유동 경찰서와 금광사무소·영림창을 습격하고군수물자를 빼앗는등 기염을 토했다. 5백여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천마산대는 유격전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일제에 위협을 가하던 단체였다. 선생은 천마산대가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로 활동불가능 상태에 빠지자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해 구성한 대한통의부등에서 의용군으로 활약했다. 대한통의부 의용군이 발전해 참의부가 결성되자 제3소대장에 임명된 선생은 24년5월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평북 초산군·강계군에서 일경과 교전해 수명을 사살했으며 압록강을 순시하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재등실)일행에 총격을 퍼부어 일제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선생은 일제의 배후조종을 받은 마적단의 습격으로 통의부 신팔균총사령이 전사한뒤 통의부·대한군정서·의성단등이 정의부로 확대통합되자 정의부 의용군 중대장에 임명돼 일경·친일분자의 처단에 앞장섰다. 정의부는 김동삼선생을 의장으로 지역군사·재정·행정·교육·사법등 모든 부문을 국가체제에 맞춰 틀을 짰다. 선생은 이어 만주지역에서 벌어진 좌우합작운동의 영향으로 정의부를주축으로 여러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해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결성,이 동맹이 다시 조선혁명당으로 발전하자 소속 부대인 조선혁명군 부사령의 중책을 맡게 된다. 조선혁명군은 30년대 적기관을 습격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한편 대중조직및 거점확보를 위해 특수공작원을 국내로 특파하는등 독립운동사에 맹활약을 펼친 것으로 기록돼있다. 선생은 31년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중 공동대응을 위해 중국인 실력자 왕동헌의 요령 농민자위군과 협의해 연합부대를 편성했다. 이런 가운데 32년 조선혁명당은 비밀간부회의를 열었으나 정보를 입수한 일경의 급습으로 간부 83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혁명당의 총사령에 취임하는 동시에 혁명투사 양성을 위해 조선혁명당이 설립한 속성사관학교 명예교장에 추대된다. 선생은 또 중국 의용군 총사령 이춘윤과 요령 민중자위군 결성 협정을 체결,일제와 2백여차례에 걸쳐 혈전을 치렀다.32년3월 신빈현 남쪽에서 벌어진 일제 관동군과의 접전에서선생의 부대는 일군의 주둔지를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달 하순 일제가 폭격기까지 동원해 반격전을 펼치자 선생은 한중연합군 1만여명을 투입,치열한 전투 끝에 일제를 물리치는 억센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중연합군은 그러나 관동군이 두달후 세력을 재결집,대대적인 공세를 가해옴에 따라 10월까지 5개월동안 여러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일제 공군력에 밀려 주공격력을 잃게 된다. 선생은 이에 따라 다음해인 34년1월 조선혁명군 재건을 위해 총사령에 취임,같은해 5월 황해도 사리원경찰서를 습격하는등 유격전에 나선다. 조선혁명군은 이어 장개석의 국민군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흥경현 진주령에서 일본군 병력수송기차를 습격,수십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대포등을 노획하기도 했다.또 1개 대대병력으로 기습해온 일군을 물리치고 오히려 추격전을 펼쳐 일군 80여명을 사살한다. 선생은 그러나 34년 평소 혁명군을 지원해온 중국인을 만나기 위해 환인현 소광구 골짜기로 나갔다가 일제 밀정등의 총격을 받고 장렬하게 순국한다.이 중국인은일제 밀정의 꾐에 빠져 변절하고 선생을 인적드문 골짜기로 유인한 것이었다. 일제는 후에 선생의 묘를 파헤치고 시신에세 목을 떼어 가져가는 만행을 저지르는등 잔악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조선혁명군은 선생의 순국이후 급격히 세력이 위축돼 소규모 유격전으로 독립군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그쳤다. 선생은 동지는 물론 주민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은 명장이었으며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김좌진·홍범도등과 함께 3명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고침◁ 7월의 독립운동가 이준열사는 1859년1월12일 출생,1907년7월14일 순국했기에 바로 잡습니다.
  • 김일성이 스탈린에 보낸 친서(50.9.29)

    ◎“미의 인천상륙으로 인민군 고전”/무기·식량 공급 못받아 소련지원 필요 존경하는 이·브·쓰딸린 동지에게 조선해방의 은인이시며 전세계 근노인민의 수령이신 당신께서는 자기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야 싸우는 우리조선인민을 항상고무격려하여주시며 우리의게 배려를 베푸러주시며 각방면으로 원조를 주시는데 대하야 조선로동당을 대표하야 우리는 충심으로부터의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미국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우리인민의 해방전쟁의 금일정황에 대하야 당신에게 간단히 말슴드리려고 합니다.미침략군이 인천에 상육하기 전에는 우리의 형편이 좋지않었다고 볼수없었슴니다.적들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야 남조선의 최남부의 협소한 지역에 몰리어드러가게되어 최후결전에서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많었고 미군의 위신은 여지없이 추락되였던것임니다. 이에 미국군은 자기의 위신을 만회하며 조선을 자기의 군사기지화하려는 본래목적을 기어히 달성하기위한 대책으로 태평양방면의 미국 육해공군의 거위 전부를 동원하야 구월십육일에 대병력을인천에 상육시켜 서울시에 침입하야 시가전을 진행하고 있읍니다.전황은 참으로 엄중하게 되었읍니다.우리인민군부대들은 상육침입한 미국군진공에 대항하야 용감히 싸우고 있읍니다. 그러나 전선에는 참으로 우리의게 불리한 조건이 있다는것을 말슴드립니다.적들은 약천대의 각종항공기를 매일주야를 구분하지않고 출동하야 전선과 후방할것없이 마음대로 폭격을 불절히 감행하고있읍니다.그러나 우리편으로부터는 대항할 항공기가 없는 조건하에서 적들은 참으로 공군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고있는것입니다.각전선에서는 백여대편성의 항공부대의 엄호하에서 적의 기계화부대들은 활동하며 또한 특히 우리부대들을 저공비행으로서 다수살상합니다.후방에서 적의 항공기들은 교통·운수·통신기대들과 기타 시설들을 마음대로 파괴하며 적군들의 기동력이 최대한도로 발휘되는 반면에 우리인민군부대들의 기동력은 약화마비되고 있읍니다 는것은 각전선에서 우리가 체험한바입니다. 적들은 우리군부대들의 교통·운수·연락망을 차단하고 진격하야 인천방면으로서 상육한 부대들과 남부전선에서 진공하던 부대들이 연결함으로서 서울을 점령할수있는 현실적가능성을 가지게되고 남반부에 있는 우리인민군부대들은 북반부로부터 차단되고 남부전선에 있는 부대들도 여러토막으로 차단되였읍니다.그리하야 우리 군부대들은 무기·탄약과 식양등공급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몃개부대들은 상호분산되어 있으며 그중일부는 적의게 포위되어있는 형편에 처하였읍니다. 서울시가 완전점령된다면 적은 삼팔도선을 넘어 북조선을 침공할겄입니다.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금일과 같은 불리한 조건을 계속하야가지고 있게되면 적의 침입은 결국성공할겄이라고 우리는 봄니다. 우리의 운수공급문제를 해결하고 기동력을 보장하자면 무었보다도 이에 해당한 공군력을 가저야 하겠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준비된 비행사들이없읍니다. 친애하는 이요시프 비싸리요노비치 시여! 우리는 여하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면서 조선을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와 군사기지로 내놓지않을겄입니다.우리의 독립·민주와인민의 행복을 위해서는 최후의 피한방울까지도 아끼지않고 싸울겄을 우리는 굳게 결심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하야 새 사단들을 많이 조직훈연하며 남반부에 있는 십여만의 인민군부대들을 작전상유리한 일정한 지역에로 수습집결하며 또한 전인민을 총무장하여서까지 장기전을 계속할 모든 대책들을 강구실시합니다. 그러나 적들이 금일 우리가 처하고 있는 엄중하고 위급한 형편을 이용하야 우리의게 시간여유를 주지않고 게속 진공하야 삼팔도이북을 침공하게 되는 때에는 우리 자체의 힘으로서는 이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읍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즉 적군이 삼팔도선이북을 침공할 때에는 쏘련군대의 직접적출동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만일 그것이 여하한 이유로써 불가능하게되는 때에는 우리의 투쟁을 원조하기 위하야 중국과 기타 민주주의국가들의 국제의용군을 조직하야 출동하도록 원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우리의 의견을 당신에게 감히 제의하오니 이에 대한 당신의 지시가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김일성 박헌영 일구오○·구·이구일
  • 정부,한국전관련 구소외교문서 공개/“6·25남침 김일성 주동”확인

    ◎스탈린·모택동에 사전보고… 지원약속 받아/중공군 참전도 김이 요구 6·25사변은 북한의 김일성이 50년 4월과 5월 소련과 중국을 차례로 방문,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일으킨 남침이며 중공군의 참전 또한 김일성의 요청으로 이뤄졌음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특히 중공군의 참전 배경은 김일성이 유엔군의 서울 수복 다음날인 50년 9월29일 스탈린에게 친서를 보내 간청한 결과,이뤄진 것으로 러시아의 외교문서들에서 확인됐다. 외무부는 20일 하오 김영삼대통령이 지난달 러시아방문때 옐친러시아대통령으로부터 전달받은 러시아 외무부의 대외정책문서 가운데 6·25 관련문서들을 정리,발표했다. 외무부 장기호대변인은 『이번 문서는 대외정책 기본문서 1백건,부속문서 1백16건등 모두 2백16건』이라고 밝히고 『앞으로 수정및 보완작업을 거친뒤 러시아와 협의를 거쳐 연말쯤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6·25발발 한달전인 50년 5월2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평양주재 소련대사에게 『소련의 지원으로 6월까지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게 됐다』면서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되고 북한의 전투준비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갈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6월10일쯤 집결지로 병력이동을 시작하겠다고 소련측에 통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문서는 또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의 참모장이 소련 군사고문단 대표인 바실리예프중장과 함께 공격계획을 수립,전쟁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들 문서를 통해 김일성의 간청으로 소련의 스탈린에 중국의 모택동에게 권고서한을 보내 중공군이 참여하게 된 과정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당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친서를 보내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곧 38선을 넘어올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고 『소련군의 참전 또는 중공군등의 의용군을 보내줄 것』을 간청한 것으로 드러났다.그러자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권고서한을 보내 『중공군의 파병이 시급한 상황이며 김일성도 그것을 원하고 있다』고 파병을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중국 내부의 토의 과정에서 주은래는 처음 파병을 반대했으며 팽덕회등의 설득에 따라 찬성하게 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문서에 따르면 또 김일성이 처음 전쟁계획을 세운 것은 6·25발발 1년전인 49년3월 모스크바를 방문,스탈린에게 무력침공및 무력에 의한 통일에 대해 의견을 물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이때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북한군의 군사력이 한국군보다 훨씬 우세해질 때까지 기다릴 것』을 요청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김일성은 이와 함께 전쟁 시작에 앞서 38선에서 남북한 사이의 교전을 유발하고 북한측이 제의한 평화통일안을 한국의 이승만정부가 거부하는 것을 빌미로 전면침공을 감행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확인됐다.
  • “북침설은 허구”… 공식 입증/공개된 러시아외교문서 의미

    ◎「김일성·모·스탈린의 합작극」 드러나/「정쟁발발책임」관련 논쟁에 종지부 정부가 20일 공개한 6·25 관련 러시아외교문서는 북한이 궤변으로 주장해온 남침설이 재론의 여지가 없는 허구임을 공식입증한 귀중한 사료들로 평가되고 있다.죽은 김일성이 6·25의 전범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과 함께 6·25에 대한 일부학계의 해묵은 논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 문서는 6·25가 발발하기 전인 49년1월부터 전쟁이 끝난 53년9월까지 4년8개월동안의 생생한 기록이다.크게 나눠 49년1월부터 53년7월까지 1백건에 이르는 6·25의 문헌자료와 49년1월부터 53년9월까지 1백16건 이르는 보충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6·25의 발발배경과 중공군의 참전과정,종전협상등 세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북한과 소련·중국이 주고받은 교신내용을 비롯,김일성과 스탈린·모택동 세사람이 벌인 전쟁모의및 준비과정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어떻게 자행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첫 발단은 지난 49년3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에 의한 통일에 관해 소련지도부의 의견을 물으면서 시작된다.처음에는 스탈린이 반대하는 자세를 취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보여주고 있다.북한은 49년4월부터 50년3월까지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증강작업에 착수했고,문서들은 그 내용을 적시하고 있다. 스탈린이 50년1월 김일성에게 유리하게 조성된 국제환경을 들어 북한의 전쟁개시에 동의하면서 중국과의 협의를 권한 내부보고서와 이에 따라 50년5월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중국을 방문,모택동과 협의한 내용을 당시 주중소련대사인 로신이 스탈린에게 보고한 전문등도 새로운 자료들로 분류되고 있다. 특히 중공군의 참전과정부분은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그동안 간헐적으로 공개된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를 받아내는 과정과 중공군의 6·25 참전과정을 낱낱이 확인해주고 있다.맥아더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서울을 수복한 직후인 50년9월29일 전황의 불리를 느낀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친서를 보낸다.친서에는유엔군이 38선을 넘어올 때는 소련군이 참전해야 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더라도 중국등 사회주의국가들의 의용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사실이 김일성의 친서로 확인되고 있다. 이에따라 스탈린은 그해 10월1일 중공군의 파병을 권고하는 서한을 모택동에게 보내고,같은달 중국지도부가 참전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과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중공군의 참전에 대해 주은래는 반대했으나 팽덕회등의 설득으로 정치국은 파병을 결정했다.같은달 24일 마침내 모택동은 『중국정부는 중공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줄 미국의 한반도장악을 용납할 수 없다』는 식으로 참전의 구실을 찾았으며 같은달 26일 6·25의 첫 전투에 참가하게 되는 과정등이 문서를 통해 하나하나 확인됐다. 이 부분은 그동안 미확인상태에서 가설로 남아 있던 사실들을 확인해준 대목이다.때문에 전문가들과 국방전사연구소는 이 부분이 가장 가치있는 문서라고 평가했다.전문가들은 6·25사변은 김일성이 치밀한 준비를 하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에 대한 사전동의를 얻어 개시한 남침전쟁이란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으며 이들 문서의 전달로 한국과 미국의 공동책임론을 주장해온 수정주의학파는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국방전사연구소측은 6·25연구,특히 전쟁계획의 전개과정에 관해 새롭고 중요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고 평가했다.특히 6·25가 김일성과 스탈린·모택동 세사람의 공동모의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공식확인하게 된 것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이들 문서의 공개는 새 정부의 신외교가 거둔 성과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김영삼대통령이 지난달 러시아방문 때 옐친 러시아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아왔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이 문서는 우리와 러시아 사이에는 「과거청산」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 아울러 우리 내부일각에 있는 소모적인 논쟁에 종지부가 찍힐 것으로 기대되기도 한다.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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