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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서 큰아들 생존 확인 89세 周福漣할머니

    “어무이,내가 도망치면 우리 일곱식구 다 죽어요” 2일 죽은 줄만 알았던 큰아들 박상욱씨(69)가 북에서 남쪽 가족을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주복연(周福漣·89·서울 도봉구 창동)씨는 “상욱이는 의용군으로 끌려가면서 ‘도망치라’는 어미 말에 가족의안전을 먼저 생각했던 믿음직한 아들이었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상욱씨는 지난 50년 7월 사상확인서에 도장을 찍으러 고향 강원도춘천시 봉이동 동사무소에 갔다가 마을 젊은이 7명과 함께 그 길로의용군에 징집됐다. “삶은 보리밥 두어 숟갈밖에 못뜨고 떠난 모습이 가슴에 맺혀 50년동안 아들 생일에 미역국과 흰 쌀밥으로 제사를 지내 왔어” 남편도 의용군으로 징집될 뻔 했으나 주씨가 인민군들을 붙잡고 “우리 일곱식구 다 죽이고 데려가라”며 매달려 빠질 수 있었다.그러나 큰아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아들과 함께 간 마을 젊은이들은 한 명도 고향 마을에 돌아오지못했어.그러니 죽었다고 생각했지…” 눈물을 참던 주씨는 지난 70년 작고한 남편의 사진을 꺼내들고는 “영감,우리상욱이가 온대요”라며 연신 눈가를 훔쳤다.2일 형님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적십자사를 찾아 만세를 부른 셋째아들 상범(商範·58)씨도 어머니 주씨의 손을 꽉 움켜쥔 채 “큰형님,살아 계셔서너무 고맙습니다.형님 맞을 채비를 하기 위해 5형제가 다 모이기로했습니다”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꿈을 꿀 적마다 상욱이가 누런 인민군복을 입고 집에 들어와서는어미에게 ‘반갑다’는 말은커녕 한 마디도 하지 않아 울기도 많이울었다”는 주씨는 “아들에게 내 손으로 따뜻한 밥 한끼 지어 먹이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문화스냅 2000/ ‘뉴스 게릴라’ 세상을 바꾼다

    총(銃)을 들지 않은 게릴라들이 인터넷 전장에서 뉴스라는 총탄을 세상에 쏘아대고 있다. 지난달 말 온국민을 분노에 떨게 했던 일본 총리의 독도소유권 발언삭제파동을 가장 먼저 보도한 것은 오프­라인 매체가 아니었다.다름아닌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 ‘모든 시민은 기자’라는 창간이념 아래 지난 2월22일 727명의 게릴라들과 함께 출발한 오마이뉴스는 이제 5,300여 기자회원을 거느린‘무서운 뉴스 진원’으로 부쩍 커버렸다.창간때 6개월안에 4,000여기자를 확보한다고 장담했던 것을 이미 지난 7월 지켰다.중앙일간지기자 수가 300∼400명이란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없다. 독도 소유권 발언을 포함해 386의원 광주 술판,모방송사 기자의 파출소 행패,총선시민연대 게시판에 욕설을 올린 국회의원 보좌관 등 굵직한 특종을 발굴한 것은 물론,군산윤락가 화재 참사현장을 맨먼저취재하는등 우리 사회의 숨겨진 단면을 독특한 시각에서 조명하는기사들로 네티즌의 주목을 받았다.정규 군사훈련을 받지 않고 자신의생활 근거지에서 효율적인 비정규전을 벌이는 게릴라 개념을 뉴스와여론형성에 접목시키는 일이 가능함을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중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오마이뉴스의 기자회원에는 성별 나이 학력 글솜씨 등 장벽이 없다.심지어 공무원과 경찰관,군인,전투경찰이있고 대학교수,주부,자영업자,대기업 경영자 등 다양한 계층이 망라돼 있다. 제27회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한 기자회원은 상세한 내용의 취재기획서를 보내와 오마이뉴스 편집진을 당황케 했다.“자비를 들여서라도 시드니에 갈테니 프레스카드 등을 마련해달라”는 것이었다.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그는 아무 연고도 없는 시드니에 홀몸으로 가서 프레스카드도 없어 취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소중한 현지 취재기사를 보내왔다. 한 목사는 기성 언론사의 부도덕한 단면을 고발하겠다며 어려운 시간을 쪼개 자료를 모으고 언론인을 인터뷰하는 열성을 보이고 있다. 기자회원들은 ‘내가 궁금한 것은 남들도 궁금해한다’는 전제아래‘목마른 이가 우물파는’ 심정으로 현장을 찾아다닌다. 오마이뉴스의 좌우명,‘뉴스는 시간의 쓰레기가 아니다’이 시대의매체 수용자나 시청자들은 ‘날것’의 정보를 갈구한다.제도언론을믿지 못하는 것도 누군가의 가공에 의해 ‘더렵혀질’ 공산이 크다고믿는 탓이다. 오마이뉴스의 기사는 ‘생나무’와 ‘잉걸’,그리고 편집된 뉴스로분류된다.생나무는 기자회원이 작성한 기사로 아직 객관적인 사실확인이 안된 상태의 기사를 의미하며 잉걸은 사실여부와 기사가치가 확인돼 ‘막 불이 붙은’ 기사를 의미한다.네티즌의 관심은 당연히 생나무에 쏠린다.거기에서 특종이 터진다. 성낙선 오마이뉴스 편집팀장은 “기존언론이 해내지 못한 일,혹은 해낼 생각이 아예 없는 뉴스를 생산하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정리한다.출입처에 의지하고 취재원과의 ‘관계’때문에,또 광고라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들에 대한 고려때문에 왜곡되거나 수정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방송시간이 프라임타임대로 ‘승진’한 KBS-1TV의 게릴라성 프로 ‘VJ특공대’가 18%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있는 것도 전문제작 인력에 의존하지 않는 시도에 점수를 매긴 덕분이다.‘뉴스공장’에서 나오는 뉴스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역시 닮아있다. 오마이뉴스는 온라인 매체의 진화를 ‘증명’한다. 오연호 대표이사 겸 대표기자(오마이뉴스에서는 후자에 무게중심을두었다)는 “이런 급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폭발적인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기존 언론권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시민의식이 뿌리내린 데 힘입은 바 크다”고 말했다. 3년전 PC통신 공간상에 처음 등장해 인터넷 매체의 맹아로 인정받는‘보테저널’은 홈사이트를 독자적으로 갖추지 않고 4대 PC통신사 게시판을 ‘임차’해 사용했기에 그리 생명이 길지 않았다. 다음에 딴지일보 스키조선 패러디한겨레21 수세미일보 보일아동 등의이른바 패러디 사이트가 등장했고 뒤이어 대자보 더럽지 망치일보 등의 대항언론이 나왔다.그러나 이들 모두 부정기적이란 이유로 ‘한때의 유행’에 머무른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오마이뉴스. 언론과운동을 결합,뉴스의 경계를 무너뜨린 신선한 시도라는 지적이다.독도망언만 하더라도 발언 삭제소동을 문제삼은 KBS노동조합의 특보 편집과정에서 보도됐다. 오마이뉴스의 하루 접속건수는 최다 10만건.업계에선 인터넷 뉴스기자가 2,000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이름이 알려진 사이트만 10개를 넘는다. 인터넷 검색업체 ‘다음’에 뉴스를 제공하고 ‘머니투데이’‘아이뉴스24’ 등 인터넷 매체와 지역언론 등에 뉴스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뉴스연대’ 구상을 실천하고 있다. ‘자궁’을 벗어나는 방안도 꾸준히 모색되고 있다.시의성이 엷은 주제들을 엮어 프린트 버전을 낼 계획이고 잡지 창간도 구상 중인 것. 오마이뉴스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10평 남짓한 서울 종로구 당주동의 오마이뉴스 편집실에서 일하는 10명의 기자와 엄청난 숫자의 ‘언론 의용군’이 손잡고 세상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임병선기자 bsnim@. *오마이뉴스 이봉기 '스포츠 전문기자'. 이봉기씨(26·만화가 지망생·서울 강남구 삼성동)를 소개하며 성낙선 오마이뉴스 편집팀장은 “하루 1건씩 기사를 올리는 열성회원”이라고 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열정적인기사 생산에 나서게 할까.그는 “많은사람들처럼 기존 언론에 만족하지 못해 직접 모든 일을 확인하고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 욕망”이라고 정리했다. 그가 관심있는 분야는 스포츠.일간지는 물론 잡지,인터넷 방송 등을꼼꼼히 모니터하며 소재를 가다듬는다. “평소 매체 등에서 스포츠 현상이나 사건을 감정적으로,충동적으로다루는 일을 많이 봤다”며 그런 움직임에 쐐기를 박고 싶었다고 했다. 시드니 올림픽 미국과의 야구 준결승전에서 한국이 진 것은 오심탓이아니라 실력에 의해서 진 것이란 내용의 글로 네티즌들로부터 ‘차분하고 생각할 것이 많다’는 반응을 들었다. 그는 미국전에 구대성 투수가 등판하지 않으려고 버텼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시드니에 달려가고 싶었으나 여건상 그렇게 못했다며 아쉬워했다.언론 매체들이 그런 의혹을 말끔히 규명해주기를 기대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고 했다. 오마이뉴스에는 ‘의견쓰기’란이 있다.신문사 독자투고란과 같은 기능을 하지만 동시성 면에선 따라올 수가 없다.오마이뉴스 편집실에는가끔 사과상자가 배달된다.돈 대신 진짜 사과가 들어있다. 이름모를 시민들이 뉴스게릴라라는 이름 하나로 기사를 쓰고 의견을공유하고 변혁을 꿈꾸는 것.그것이 바로 뉴스연대이다. 성 팀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기자회원으로 전남 영광여중의 뉴스게릴라 40여명을 꼽았다.이들은 오마이뉴스에 가입한 인연으로 동아리를만들었는데 글을 쓰면서 가정과 학교에서 엄청나게 변화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 南혈육 찾는 北가족 명단공개 이모저모

    남측 가족을 찾는 북측 이산가족 명단 100명의 명단을 공개한 2일대한적십자사에는 하루종일 문의전화가 빗발쳤다.북쪽의 김책공대 교수 백영철씨(77)의 동생 백영제씨(72)를 포함,수백통의 전화가 걸려와 33가족의 생사가 전화로 확인됐으며 직접 찾아와 확인한 사람도 7명에 이르는 등 이날 오후 4시 현재 40명의 생사가 확인됐다.적십자사는 내일이면 생사 확인작업이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남쪽 형제들의 생사 확인 요청을 한 박상옥씨(67)는 동생들뿐만 아니라 어머니까지 살아 있는 것으로 밝혀져 경사가 겹쳤다. 상옥씨의 둘째동생 상범(常範·57·서울 도봉구 창동)씨는 이날 북에 의용군으로 끌려간 형의 생존을 확인하고는 “형님을 빨리 뵙고싶다”며 만세를 불렀다. 상범씨는 또 “늙으신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고 형이 동생들만 생사 확인 요청을 한 것 같다”며 “형이 어머니가 살아계신 줄 알면깜짝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 ■형 백영철씨가 북의 김책공대 교수로 재직 중인 것을 확인한 동생영제씨는 “북한 인명사전을 보고 형의 이름을 확인했으나 형이 월북,드러내놓고 찾지 못했다”며 “형이 북에서 잘살고 계셔 너무 기쁘고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6·25때 행방불명된 형 김덕주(金德柱·73)씨가 북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병원 검진을 받으러 서울에 왔다 휴대전화로 알게 돼 직접적십자사를 찾은 김덕칠(金德七·61·경남 남해군 남해읍)씨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며 감격을 가누지 못했다. 전영우 윤창수기자 ywchun@
  • “의용군 끌려간 형이 살아있다니…”

    “6·25때 의용군으로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던 형님이 살아 있다니믿을 수가 없습니다” 2일 대한적십자사가 명단을 공개한 북측의 이산가족 가운데 형 김영회(金英會·69·평남 평원군 덕제리)씨의 이름을 확인한 김진회(金津會·65·.충북 충주시 교현 2동)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충주시 엄정면 논강리에서 태어난 김씨 형제는 4남2녀였으나 6·25당시 의용군으로 끌려간 맏아들인 형이 팔공산 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이라는 같은 의용군 출신 이웃의 소식을 듣고는 50년간 아예 형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어머니 이귀석(李貴石)씨는 “큰아들 영회가 어떻게 죽었다고 할 수 있느냐”며 그리움과 한 어린 눈물을 흘리다 지난 4월 90세로 사망해 안타깝다고 진회씨는 회고했다.또 형 영회씨가 찾는 가족중 누나 옥회씨와 3남 평회씨는 62년(당시 28세)과 97년(당시 57세)감전사고와 지병으로 각각 사망했다.영회씨는 16살 때 두 살 위의 서광자씨와 결혼,딸 하나를 두었으나 딸이 1·4 후퇴 당시 홍역을 앓다숨졌고 서광자씨도 10여년 후 재가한 뒤 역시 세상을뜬 것으로 알려졌다. 진회씨는 형의 소식을 듣고 낡은 앨범을 뒤져 보았으나 형의 사진은단 1장도 없어 부모님의 영정을 꺼내 놓고 형이 살아 있음을 알렸다동생 진회씨는 자원재생공사 충주사업소장으로 일하다 지난 2월 정년퇴직,현재 부인 장순식씨(61)와 함께 살고 있다. 청주 김동진기자 kdj@
  • 재일학도의용군 참전 50돌 행사

    재일학도의용군 6·25전쟁 참전 50주년 기념식이 29일 오전 11시 인천 수봉공원 참전기념탑 앞에서 김유배(金有培) 국가보훈처장,최기선(崔箕善) 인천광역시장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회장 김교인) 주최로 열린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은 기념식이 끝난 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재일학도의용군 묘역을 참배할 예정이다.다음달 2일에는 회원과 유족이 안장돼 있는 충남 천안시 망향동산 묘역에서 합동위령제를 갖기로 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거주 청년과 학생 642명은 재일학도의용대를 조직,유엔군에 자진 입대해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활약했다. 노주석기자 joo@
  • 이산가족들 ‘생사확인’ 반응

    남북이 연내에 모든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작업을 마치고 서신교환을실시하기로 합의한 14일 이산가족들은 설렘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6·25전쟁 때 의용군으로 입대하는 바람에 헤어진 오빠 리기명씨(70)가 북쪽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기남(寄男·59·서울 송파구 송파동)씨는 “편지 왕래가 곧 자유로워진다니,지난번 상봉 때 후보 100명에서 탈락해 못 만난 오빠의 얼굴을 볼 날도 그만큼 빨라진것 같다”며 기대에 찼다. 북녘에 큰 외삼촌 리길영씨(71)를 둔 박찬운(39·서울 서초구 반포동)씨는 “얼굴도 모르지만 외삼촌과 연락이 닿으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남동생에게 남긴 많은 말들을 전해 드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석정(李錫正·64·서울 강동구 천호동)씨도 “어머니가 남동생을그리며 남긴 ‘내가 울어 네가 온다면’이라는 제목의 유고시집을 꼭전해주고 싶다”고 설레는 표정이었다. 이산가족 상봉 때 서울에서 오빠 리래성(68)씨를 만난 아나운서 이지연(李知娟·여·52)씨는 “편지로 연락을 할 수 있게 되면 비로소오빠가살아있다는 실감이 날 것 같다”면서 “당장 다가오는 성탄절때 보낼 선물을 생각해 봐야겠다”고 말했다. 홍원상 이동미 윤창수기자 wshong@
  • MBC’이산,두여자 이야기’상봉의 날 희비 엇갈린 두 할머니

    50년만에 헤어진 가족을 만나는 심정은 어떨까.간절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막상 가족을 만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TV에서 다른 이산가족의 상봉장면을 지켜보는 이산가족의 심정은 또 어떨까. MBC는 18일 ‘이산,두 여자 이야기’(밤10시5분)에서 각각 아들과남편을 잃고,생이별의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두 할머니의 최근 행적을 따라간다.지난달 16일 발표된 북측 이산가족방문 후보명단을 보면서 시작된 가슴 떨리는 기다림,그리고 만남,마지막으로 기약없는헤어짐까지를 빼곡히 담았다. 이덕만 할머니(87)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큰아들을 잃었다. 큰 아들이 태어난 그 집에서 50년간 떠나지 않고 기다려온 이덕만 할머니는 위암 말기의 환자다.병원에서 혈액주사를 맞으면서 숨지기 전에 큰아들 얼굴 보기만을 기다려왔다. 유순이 할머니(71)는 한국전쟁 당시 결혼 6개월만에 남편이 의용군으로 떠났다.당시 임신 3개월이었다.이산가족방문 후보명단에서 남편이 찾는 가족 중에 자신의 이름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기뻤다.시댁인청주에내려가 남편에게 보여줄 가족사진을 찍는 등 하염없이 만날날만을 기다렸다.지난 8일 최종명단이 발표되던 날 이덕만 할머니는아들 안순환의 이름을 확인했지만 유순이 할머니는 남편 김중현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좁은 집에 할머니의 일상을 찍으러온 제작진으로 북적대는 가운데 TV화면을 아들과 함께 보던 유순이 할머니는 ‘오래 사시면 만나 보실수 있을 거예요’라고 제작진이 건넨 위로의 말에 끝내 눈물을 흘렸다.취재진이 모두 철수한 뒤 할머니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갔지만허한 마음은 여전하다. 이덕만 할머니는 꿈에도 그리던 아들 안순환씨를 지난 15일 코엑스에서 만나 품에 앉았다.상봉 마지막 날인 18일은 아들의 생일날.50년만에 생일상을 차려줄 마음에 들떠 있다. 전경하기자 lark3@
  • 남북이산상봉/ 朴鍾九씨의 北큰형 ‘상봉일기’

    15일 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집단 상봉을 마치고 숙소인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로 돌아온 이산 가족들은 좀처럼 흥분을가라앉히지 못하고 가족, 친지들과 이야기 꽃을 피웠다.그 순간만은그간 겪은 이산의 아픔도 봄눈 녹듯 사라지는듯 했다.1950년 8월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큰 형 박종석(朴鍾錫·68)씨를 꼭 50년만에 만난종구(鍾九·54·충북 청주시 사직동)씨가 상봉의 기쁨과 그간의 아픈사연, 이별의 두려움 등을 적은 일기를 소개한다. 상봉장에 앉아서 4살 때 헤어진 형을 기다리면서도 형의 얼굴을 모르는 게 너무나 답답했다.초조해 하는 나에게 둘째 형님과 누님은 자신들이 형을 알아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반가운 북쪽의 손님들이 하나 둘 상봉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반백의 노인이 우리 테이블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아!종석 형님이구나.핏줄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구나.큰형의 얼굴은아버님의 얼굴이기도 했고,둘째 형의 얼굴이기도 했고 바로 내 얼굴이기도 했다.형과 얼싸안는 순간 어릴적 코트 속에 묻어 있던 형의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둘째 형이 “형과 함께 끌려갔던 사람들이 ‘종석이는 사리원에서총에 맞아 죽었다’고 해 우리 가족들은 형이 죽은 줄만 알고 사망신고까지 냈어요”라며 흐느꼈다. 큰형은 둘째형에게 “죽은 줄 알았던 우리가 살아서 만나니 오래 살겠구나”며 웃으셨다. 누님은 형의 품에 안겨 “오빠는 나쁜 사람이야,이제서야 가족이 보고 싶어서 내려오다니 너무 야속해”라며 투정을 부렸다. 형은 흐느끼며 “네 말이 맞다.미안하다”며 누님의 등을 두드렸다. 북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해 딸 셋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있다는 형의 말이 그저 반가웠다. 밤이 깊어 간다.조금전 헤어진 형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몇시간만지나면 형을 다시 만나는데 시간이 너무 더디다. 3일 뒤면 형과 또기약없는 이별을 해야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선다.짧지만함께 하는 모든 순간을 소중히 간직해야겠다. 16일 아침 종석씨와의 개별 상봉을 위해 워커힐호텔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 종구씨 형제들의 손에는 선물꾸러미가 가득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83년 이산가족찾기’ 아나운서 李知娟씨

    지난 83년 온 국민에게 큰 감동을 준 한국방송공사(KBS)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진행했던 이지연(李知娟·여·52))씨도 15일 북에서온 오빠 리래성씨(68)를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씨는 언니들과 함께 오빠를 만났으며 어머니가 ‘새언니에게 주라’며 유품으로 남긴 금가락지 5돈을 오빠에게 선물로 줬다.이씨는 “17년전 이산가족 생방송을 하면서 참았던 눈물을 오빠를 만나 흘렸다”고 감동의 순간을 말했다. 이씨는 6.25당시 북한의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오빠가 가족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달 17일 서울 중구 남산 대한적십자사를 찾아 상봉 신청서에 ‘리점봉’이란 자신의 본명을 적었다. 이씨는 6·25전쟁이 끝난뒤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오빠의 편지가 와 그 주소로 연락을 했으나 ‘그런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은 이후 오빠와 소식이 끊겼다.오빠의 월북 때문에 이씨의 가족들은 60,70년대 경찰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이씨는 50년 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오빠를 기다리다 불과 3개월 전인 지난 5월 고향인 군산지법에 실종자 처리신고를 했다.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할 때 남한에서 헤어져 있는 다른 분들의 사연이 너무급해 이산가족이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었다는 이씨는 “죽은 줄로알았던 오빠를 만나뵈니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다할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특별취재단
  • 남북이산상봉/ 북측방문단이 가져온 선물

    그리운 가족을 찾아 50년 만에 남한에 온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들은어떤 선물을 준비했을까. 만남 그 자체가 가장 큰 선물이지만 서울방문단 일행 대부분은 15일같은 크기와 모양의 여행용 가방을 들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가방속에는 남쪽의 가족들에게 줄 가족 사진과 술,인삼,녹용,옷감 등이 담겨 있었다.같은 날 북으로 떠난 평양방문단 일행이 들고 간 선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북측 방문단 가운데 북한 최고의 시인 오영재씨(64)는 5형제들에게‘그리움이 가득 담긴 시’라는 선물을 준비했다. 오씨는 이날 공항에서 “선물이 뭐냐”는 질문에 “시”라고 짧게 대답한 뒤 “이제 통일이 가까이 오는 것 같아 통일과 가족을 그리는시를 써서 동생들에게 주겠다”고 말했다.전남 강진 국립농업학교 3학년 재학중이던 지난 50년 혼자 의용군으로 월북한 오씨는 지난 97년 모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빗대어 동요 ‘따오기’를 구슬피 불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와 동생 3형제를 만나러 온 무용가 김옥배씨(62·여)는 “어머니께 드릴 옷감과 동생들에게 줄 귀한 약재를 가득 가져왔다”고말했다.김씨는 “동생 유광이가 훌륭한 의사가 됐다는 말을 북에서들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과학자라고 소개한 김덕호씨(73)는 동생 4형제들을 위해 “인삼,녹용,약재 등 보약을 가져왔다”며 “이렇게 1시간이면 충분히올 곳을 50년 동안 오가질 못했으니…”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규렬씨(68)는 “누이(김공순·78)가 더 늙기 전에 북에 있는 가족들 사진을 보여주려고 많이 가져왔다”고 말했다.17살때 헤어진 어머니와 상봉한 리동섭씨(65)는 고급술인 백두산 들쭉술과 인삼 넣은 보약을 정성스레 챙겨 왔다. 김경운기자 kkwoon@
  • 한민족 하나로 남북이산상봉/ 남측 부인 찾은 북녘 남편

    “여보…,당신 맞나…,얼굴이나 한번 봅시다” 15일 남북 상봉이 이뤄진 서울 코엑스 3층 컨벤션홀에서는 분단 반세기를 뛰어 넘는 ‘망부가’(望婦歌)가 가슴을 울렸다. 고희(古稀)를 넘어 황혼길에 남녘 아내를 찾아온 3명의 북녘 남편들.리복연씨(73·본명 이승철)와 김희영씨(72)는 반세기 동안 가슴 한쪽에 묻어두었던 남녘의 아내를 만나 서로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흘렸다.처음 만남은 다소 어색했지만 혈육보다 가까운 ‘부부의 연’을 갈라 놓지는 못했다. 아내 이춘자씨(71·경북 안동시 동부동)를 만난 리복연씨는 “그동안 혼자 고생이 많았지”라며 아내의 두 손을 부여잡았다.홀로 두 아들을 키워 온 이춘자씨도 손수건으로 눈물만 훔치다 “건강은 어떠하냐”며 말문을 열었다. 경북 안동군 풍산면이 고향인 리씨 부부가 헤어진 것은 지난 50년여름.남편의 징용을 막기 위해 지난 43년 17·18세의 꽃다운 나이로결혼한 이들은 서울 명동에서 신문지국을 운영하며 이지걸(53)·호걸씨(50) 등 아들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전쟁 중 신문배달용 자전거를 사오겠다며 집을 나간 남편은끝내 돌아오지 않았다.인민 의용군에 끌려간 것이다.결국 부인 이씨는 홀로 시장에서 좌판을 하는 등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며 두 아들을 키워냈다. 정춘자씨(73·경기도 이천시 율면)와 북의 남편 김희영씨(72)는 처음엔 제대로 포옹조차 나누지 못했다. 한때 혈육보다 가까운 아내였지만 서로에겐 남과 북에 또다른 남편과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남편 김씨는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죽은 줄만 알았다”며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아내 김씨의 등을 두르리며 다른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정씨는 6 ·25전쟁때 남편과 헤어진 후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아들과 함께 8년을 살다 결국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아들을 친정에 맡기고 재혼했다. 한편 하경씨(74)는 남쪽의 아내 김옥진씨(78)가 상봉장에 나오지 않아 만남이 좌절됐다.하씨는 상봉장에 나온 남쪽의 아들 하정기·문기씨에게 아내의 안부를 물으며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특별취재반
  • 한민족 하나로 남북이산상봉/ 평양서 여동생 만난 呂寅烈씨

    “여동생을 만나면 제일 먼저 눈물로 사죄할 겁니다” 황해도 은율에 두고온 막내여동생 여정숙씨(60)를 만나기 위해 15일방북 버스에 오르는 여인열(呂寅烈·81)씨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1·4 후퇴때 “같이 가겠다”며 매달리는 여동생을 떼어놓고 내려와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아왔다는 여씨.그는 “내 옆구리를 붙잡고 ‘데려가달라’며 눈물을 쏟던 9살짜리 막내에게 총알 탄피로 만든 연필칼을 쥐어주며 억지로 떼어놓고 왔다”면서 “가족을 대표해 여동생에게 사죄하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당시 여씨 가족은 인민군들이 마을의 남자들을 의용군으로 차출하면서 가족들을 다 죽인다는 소문에 허겁지겁 인근 ‘초도’란 섬으로피했다.하지만 급하게 떠나느라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와 막내여동생은 그대로 남겨두었다.당시에는 ‘1주일이면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애써 위로했지만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면서 “2남2녀중 유일하게 북에 떼어놓은여동생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만 있어도좋겠다”고 생각했다는 여씨는 “내가 최종 방북자 100명 안에 들자 온 집안이 기적이라며 부둥켜안고 울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말했다. ‘심봉사가 딸을 만나러 가는 심정’이라는 여씨는 “아직 부친(여석준·100·전북 군산시나운동)이 생존해 계시는데 아버님도 같이 동생을 상봉할 수 있게 된다면 더이상 소원이 없겠다”며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는 집안의 막내로 ‘이쁜이’라고 불리며 집안의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여동생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집안의 보물이니 꼭 데려와야 한다”며 눈물을 쏟아냈다고 여씨는 전했다. 특별취재반
  • [해외항일전적지를찾아서](6)남만주 독립투사 양세봉 활동지 신빈

    ‘歷史名城 前淸故里’(역사명성 전청고리)라고 쓴 현판을 단 높다란 채색관문이 차창위로 휙 스쳐 지나갔다.현판은 이곳이 청태조 누루하치의 고향이어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장이라는 뜻이었다.마침내남만주의 오지인 신빈현(新賓縣:항일전쟁 시기 지명은 興京縣)에 들어선 것이다.심양(審陽)에서부터 4시간 반동안 숨가쁘게 달려온 차가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신빈은 요녕성의 동쪽 끝에 위치한 만주족 자치현으로 길림성의 통화현과 닿아 있다. 양세봉(梁世鳳·1896∼1932)장군은 유해가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모셔져 있는 탓으로 남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항일투쟁의 명장이다. 남한에서는 김좌진이,북간도에서는 홍범도가 항일영웅으로 인구에 회자되듯이 심양과 남만주 일대의 동포들에게는 양세봉의 이름이 전설속에 칭송되고 있다.조선혁명군은 공산주의 깃발아래 싸운 부대가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양세봉이 소년시절의 김일성을 도와주었고 김일성이 막 항일투쟁을 시작한 무렵 교류한 적이 있다.그러나 양세봉은처음부터 반공성향이 강했고,조선혁명군도 1920년대말 국민부 산하의무장조직으로 창건되어 1937년 해체될 때까지 민족주의 이념을 굳게지킨 독립군이었다. 양세봉은 서봉(瑞鳳)이라는 이름도 썼다.평북 철산 출신으로 스무살이 넘어 만주땅으로 건너가 중국인 점산호(占産戶.지주)의 소작농이됐다.기미년 4월 만세시위가 남만주 일대까지 퍼져 왔다.그는 시위에앞장섰고 그때부터 독립투쟁에 투신하게 됐다. 천마산대에 입대해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무명 소졸로 투쟁하다가,참의부 중대장을 거쳐 1926년에는 남만주의 새로운 독립운동 단체 정의부에 들어갔고,1929년말 국민부 산하조직으로 조선혁명군이 창건되자 부사령(副司令)을 맡았다. 1932년 봄,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은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어 위기를맞았다.양세봉은 총사령으로 추대되고 즉각 왕청문(旺淸門)에서 무장봉기를 단행,지휘부를 왕청문에 두고 500명의 대원을 이끌고 무순(撫順)까지 진공해 일본군을 격퇴했다. 당시에는 흥경현의 일부,지금은 신빈현의 일부로 행정상 현(縣)보다작은 진(鎭)에 해당된다.양세봉은 흥경현의 쌍협하(雙峽河)에서 또다시 적을 격퇴하고 이름을 드날렸다.그는 영릉가(永陵街)에서 중국 의용군과 합세해 대대적으로 진공해온 일본군을 패퇴시켰다.그리고 흥경성에서 일본군과 만주군의 연합 공격을 받아 혈전을 치르고 사수했다.그 뒤에도 2차 영릉가전투,청원(淸原)전투,영릉가의 석인구(石仁溝)전투에서 승리했다.중국인 의용군과 연합한 전투도 있지만 조선혁명군의 단독전투가 더 많았다.양세봉은 한편으로 끊임없이 소규모 인원을 보내 국내 진공을 펼쳤다.기록을 보면 1932년 16차례에 걸쳐 100여 명이,이듬해는 10차에 걸쳐 14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가 일본군진지와 파출소,우체국 등을 기습했다. 일제는 남만주의 영웅 양세봉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짰다.1934년9월,일제의 지령을 받은 밀정 박창해(朴昌海)는 중국인 지주 왕가(王哥)를 통해 마적 두목 아동양(亞東洋)을 매수했다.아동양은 양세봉에게 중국인 항일부대와의 연합을 협의하자고 속여 환인현(桓仁縣) 소황구(小荒溝) 골짜기로 유인해 저격했다.온 몸에 집중사격을 받은 양세봉은 동포들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동포들은일제의 손길을 피하려고 가까운 고려성(高麗城)에 평장했으나 통화현(通化縣)의 일본 경찰은 이를 탐지해 시신을 꺼내 목을 잘라 성루에걸었다. 취재팀은 시내로 들어가 조선족 원로들을 찾다가 운좋게도 최선주(崔善柱)선생(66)과 조만선(趙萬善)·김순화(金順化)·김순자(金順子)선생 등 원로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다.현(縣) 인민위원회 부서기 등 고위 공직에서 은퇴한 이들은 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를 결성,조선족 사회의 발전과 모국과의 문화교류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1995년 조선혁명군의 주둔지 왕청문에 양세봉 장군 기념비를 세운 주인공들이다.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운 대낮이었으나 원로들은 취재팀을 안내하기 위해 앞장섰다.우리는 흥경성전투 현장부터 돌아보았다.네 분원로가 손을 들어 이곳 저곳을 가리켜 보였다. “일만(日滿)연합군은 서쪽에서 쳐들어오고 동쪽에서는 중국의용군이춘윤부대가 맞섰지요.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은 남쪽에서 협공했지요.대도회(大刀會)는 뒤에서 냅다 함성을 질렀구요.병력이야 이춘윤부대가 많았지만 적을 무너뜨린 건 양세봉부대였지요.참 대단했다 그래요.혼쭐나서 달아나는 왜놈들을 양장군은 무순까지 쫓아가며족쳤대요” 길목이나 구릉이 있어 실감은 났지만 이제는 모두가 시가지로 변해당시의 진지나 망루 따위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필자가 김순화 선생에게 물었다. “대도회는 뭡니까?” “2,000명쯤 되는 비무장 예비대였지요.배에다 부적을 뻘겋게 붙이고 죽창을 꼬나들고 함성을 올리며 돌진했지요.흥경성 2차전투에서많이들 죽었어요.이삼년 전까지만 해도 생존자 몇분이 있었는데 이젠안 계세요” 흥경성 2차전투는 양세봉이 조선혁명군의 주력을 이끌고 청원현에가 있을 때 적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혈전을 벌이던 중 일본군 비행기가 기총사격을 가했고 이춘윤부대는 속수무책으로 퇴각했다.대도회는 거의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취재팀은 그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왕청문진으로 향했다. 남만주 항일전쟁의 영웅 양세봉은 조선혁명군의 지휘부가 있었던 화흥(化興)중학교 안에 장려한 화강암 흉상으로 우뚝 서 있었다.6미터쯤 되는 높은 기단에 흉상은 1m65㎝,전면에는 ‘抗日名將 梁瑞鳳 將軍(항일명장양서봉 장군)’이라고 쓰여 있었다. 조선혁명군의 사령부이자 간부 양성소로 썼던 화흥중학교는 옛 자취는 사라지고 1960년대에 지었다는 교사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조선족 학생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양세봉의 죽음과 관련해 잊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일본경찰은 그의무덤에서 시신을 파내 김도선(金道善)이라는 조선족 농부에게 작두로 목을 자르라고 윽박질렀다.김도선은 ‘양세봉은 우리 조선민족의사령이다.내가 조선사람으로서 어찌 우리민족 사령의 목을 자른단 말인가’라며 거부하자 일경은 그 자리에서 그를 총으로 쏴 죽였다.양세봉 암살계략을 짠 조선인 밀정 박창해와 그의 시신의 목을 자르기를 거부하고 총살당한 농부 김도선.충성과 배반의 양극이다. 양세봉의 아내와 아들은 1946년 김일성의 각별한 배려속에 평양으로귀국했다. 북한당국은 그의 유해를 1961년에 모셔가 일단 평양 교외에 안장했다가 1986년 애국열사릉에 이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양세봉이 두 차례 대승을 거둔 영릉가를 돌아보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취재팀은 분단모순 때문에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 않은 항일전쟁의영웅을 취재했다는 보람에 가슴이 뿌듯해진 채로 심양을 향해 차를달렸다. 신빈(중국 요녕성) 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남북이산상봉/ 北 최고 인민화가 鄭昶謨씨

    “춘희야,남희야.이게 얼마 만이냐.정녕 50년 만이냐” 북한 최고의 인민화가로 활동중인 정창모(鄭昶謨·68·만수대창작사인민예술가)씨는 15일 여동생 춘희(61)·남희(53)씨를 만나는 순간두 동생의 이름을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오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감싸 안고다시는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비벼댔다.50년전 다정했던 오누이로돌아간 것처럼. 정씨는 여동생 춘희씨가 “어머니는 오빠를 잃은 고통에 하루도 마음 편히 사신 날이 없었다”며 부모님의 손때가 묻어있는 문갑과 화분을 건네자 얼굴을 감싸쥐며 오열했다. 정씨는 “50년 세월이….50년 세월이….원망스럽다”면서 반세기의생이별을 한탄하면서 “어머님은 언제 돌아가셨더란 말이냐.아들이이렇게 왔는데”라며 눈물을 감출 줄 몰랐다. 정씨는 6·25전쟁 당시 전주북중(현 전주고) 5학년때 의용군에 입대,월북했으며 평양미술대학 졸업후 공훈예술가를 거쳐 89년 인민예술가 반열에 올랐다.정씨는 현재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과 국가작품심의위원 등을 맡고있다.정씨의 76년 작품 ‘비봉폭포의 가을’은김일성 주석의 집무실인 금수산의사당에 걸려있다. 정씨의 작품은 북한작가로는 처음으로 16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전시된다. 황수정기자 sjh@
  • 남북이산상봉/ 남측 최고령 조원호할머니

    “아이구,종필아…”“어디갔다 이제왔어…” “어머니.그래도 어머니가 이 자식을 보려고 여지껏 살아 계셨구나…” 북측 서울 방문단을 맞은 남측 가족 가운데 최 고령자인 조원호(100·충남 아산군 탕정면)할머니는 10여년전부터 심한 치매를 앓고 있다.그러나 모정(母情)은 치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조 할머니는 50여년 동안 가슴에 품었던 둘째 아들을 종필씨(69)를 알아보고 이름을불렀다. 막내딸 종혜씨(56)가 “엄마,이 분이 누구야.종필이 오빠야”라고말하자 조할머니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아이구 종필아…”하고 말문을 열었다.그리고 반세기만에 잡은 아들의 손을 놓으려하지 않았다. 조할머니는 상봉 직전까지도 아들을 만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테이블에 놓인 음식만 오물거려 주변을 안타깝게 했었다. 그러나 워낙 고령인데다 치매를 앓고 있는 탓인지 “어디 살아.서울 사니”,“나이가 몇이야”라고 물어 가족들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종필씨는 어머니 앞에 무릎을 끓고 통곡했다.이어 “내가 저기서(북에서) 아들 딸 다섯이나 뒀어요.이미 다 장성했어요”라며 오열했다. 동생 종덕씨(63)는 “한국전쟁 당시 대전 공립중학교 2학년에 다니다의용군으로 전쟁터에 나간 뒤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던 형이 살아있어 너무 너무 고맙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종필씨는 가족들에게 “김일성대학에서 민족고전을 전공한 뒤 ‘이조실록’편찬작업에 참여하는 등 사회과학원에 연구원으로 일해 왔다”고 그간의 소식을 전했다. 강동형기자 yunbin@
  • 남북이산상봉/ 北 계관시인 오영재씨

    “영재야,정말 영재로구나”“형님,이제야 형님을 뵙습니다” 북한 최고 시인인 동생 오영재씨(64)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형 승재씨(67·전 한남대 대학원장)는 동생이 출입구를 통해 들어서자 반세기 동안 그리던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 부둥켜안았다.동생 형재(62·서울시립대교수)·근재(59·홍익대교수)씨도오씨에게 달려가 헤어졌던 4형제가 뜨거운 포옹을 했다. 오씨 형제들은 “살아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하늘이 도왔다”며거듭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상봉의 기쁨을 나눴다.서로가 준비해온 어릴적 사진을 보며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영재씨는 지난 97년 돌아가신 어머니 소식을 접하자 눈물을 훔쳤다. 그는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합친다고 해가 되는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시적으로 표현한 뒤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쓴 시 ‘사모곡’을 16일 공개하겠다고 말해 서정시인으로서 면모를 보였다. 형재씨는 “어머니는 생전에 ‘영재와 함께 있지 않는 한 사진을 절대 찍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북한에서 계관시인칭호를 받은 영재씨는 지난 50년 7월쯤 중학교 3학년 재학 중 의용군으로 차출돼 가족들과 헤어졌다. 특별취재단
  • 남북이산상봉/ 서울만남 이모저모

    북에서 온 아들은 “오마니”를 외치며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았고,남쪽의 어머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열했다.기약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만남은 뜨거운 포옹과 눈물이 되어 분출했다. ◇ 상봉 ■안순환씨(65)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상봉 장소인 서울 삼성동코엑스에 나온 어머니 이덕만씨(87·경기도 하남시 초일동)와 동생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아냈다.50년 동안 소식도 없던 아들을 만난 어머니 이씨도 아들의 뺨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씨는 “며느리에게 갖다 주라”며 미리 준비한 금목걸이를 아들의목에 걸어 준 뒤 연신 아들의 등을 두드렸다.안씨는 “북쪽에 가족이있느냐”는 동생들의 질문에 북한에 있는 가족사진을 꺼내 아내와 자식들을 소개했고, 어머니 이씨는 “며느리가 예뻐 합격”이라며 대견스러워했다. ■북한에서 축산 및 채소 생산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둬 ‘노력영웅’칭호를 받은 백기택씨(68)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딸 신금옥씨(50)를보고 숨이 멎는 듯했다. 옆에 서 있는 낯선 얼굴이 궁금했던 백씨는 여동생 문옥씨(67)로부터 “오빠,오빠가 의용군에 입대한 뒤 태어난 오빠 딸이야.오빠 딸”이라는 말을 듣고 한동안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듯 움직이지 못했다. 유복자라는 이유로 외가에 입적돼 호적상으로는 백씨의 조카로 돼있는 딸 금옥씨가 “아버지,저 금옥이에요.아버지 딸”이라며 아버지품으로 달려들자 주변은 울음바다가 됐다. ■만주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 전북 임실로 건너 온 뒤 전쟁 때 전주북중 입학증까지 받았지만 행방불명됐던 정춘모씨(63)는 계모 최순래씨(78)를 붙잡고 눈물을 쏟았다. 최씨는 “교복 입은 사진만 달랑 남겨 놓고 사라져 꿈같이 살아 왔다”며 울먹였고,여동생 정영자씨(54)는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북한에서 돌아올 때 하얀 비둘기가 집 안으로 날아든 뒤꼭 한 달 만에 오빠를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19일 북쪽의 형 문병칠씨(68)의 생존 소식을 전해 들은 뒤사흘 만에 치매를 앓던 어머니 황봉순씨(90)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동생 병호씨(64·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인정리)는“어머니는 형님이살아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치매 환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기력을 회복했는데 사흘 뒤 ‘병칠이가 보고 싶다’고 손을 내저은뒤 갑자기 숨을 거두셨다”며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여동생 정자씨(59)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오빠의 손을 꼭 잡고는“오빠가 죽은 줄 알고 절에 위패까지 모셔 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면서 ”어머니가 한 달만 더 사셨어도 오빠를 만날 수 있었을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국회의원을 지낸 주영관씨(72)는 지난 50년 동국대 정치경제학부에 다니다 의용군에 입대한 동생 영훈씨(69)를 만나자 “어머니는 7년 전 지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너를 찾으셨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영관씨는 “헤어진 이듬해 나도 바로 국군 연락장교로 입대해 너를만날 수 있을까 찾아 헤맸단다.서로 적군으로 총부리를 맞대더라도혹시 전쟁터에서라도 만나기를 고대했었는데 이제야 이렇게 만나게됐구나”라며 동생의 얼굴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인민군이 서울에진입한 바로 그날 중학생으로 의용군에 징집됐던임재혁씨(66)는 휠체어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치매로 듣지도 못하고말도 할 수 없는 아버지 임휘경씨(90·서울 양천구 목동)를 보고 목이 메었다. 재혁씨는 형 창혁씨(71)에게 “어머님,어머님은…”하고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지만 “15년전 돌아가셨어.늘 네 얘기만 하시곤 했는데…”는 말을 듣곤 할 말을 잃었다.. ■박노창씨(69)는 조카들로부터 큰형 원길씨(89·서울 은평구 신사동)가 상봉을 이틀 앞두고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맥이 풀렸다. 노창씨는 지난달만 해도 6남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고 통보된큰형의 운구가 이날 오전 8시30분 장지인 경기 파주시 금촌면으로 향했다는 말에 “믿을 수 없다”며 망연자실했다. ■죽은 줄만 알았던 큰아들 조진용씨(69)를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 정선화씨(95)는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면서 쓰러져 들것에실려 아들을 만났다.정씨는 고령에다 아들을 만난다는 설렘 때문에아침은 물론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못해 기력이 쇠약해진 것으로알려졌다.■상봉 가족수를 제한해 코엑스에 가지 못하고 8남매 중 맏이인 오빠 김용환씨(68)를 만나러 무작정 쉐라톤워커힐 호텔로 찾아온 용순(50)·용란(43)씨 자매는 오빠 용환씨가 코엑스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기 전 ‘기적’같이 자기 이름이 적힌 피켓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자 “오빠,오빠”를 연호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김정태씨(72)를 만나러 온 매부 신현묵(75)씨와 형수 박정우(70),계수 연종술(63)씨도 워커힐호텔 로비에서 ‘환영 김정태’라고 적은종이를 들고 이름을 연호하다 버스에 오르는 이산가족들의 줄이 끝날무렵 김씨를 잠깐 만날 수 있었다. ■남측 이산가족들은 오후 3시쯤 버스 편으로 컨벤션센터 동문에 도착,3시30분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행사장에 들어와 정해진 탁자에앉았으며,4시10분쯤 숙소인 워커힐호텔을 출발한 북측 가족들은 태진아의 ‘어머니’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4시40분쯤 홀에 들어와눈물의 상봉을 했다. 북측 가족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번호표를 들고 홀 입구의 상황판에서 자기 번호와 같은 번호가 적힌 탁자를 확인한 뒤 탁자를 찾아가남측 가족들을 만났다. ◇ 김포공항 ■북측 가족 151명을 태우고 공항에 도착한 북한 고려항공 승무원들은 공개된 자리에서 남측 승무원들과 악수를 나누었다.고려항공 승무원들은 오전 11시30분쯤 북측 가족들이 국제선 2청사 17번 게이트를통해 빠져나간 뒤 게이트 앞에서 10분 간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대한항공 김홍정 사무장(52)과 유은아씨(27) 등 스튜어디스 5명은게이트 앞으로 나온 박승남 기장(46) 등 10여명의 고려항공 승무원들에게 꽃다발과 기념시계를 선물했다. ◇ 워커힐호텔 ■밤 10시쯤 숙소인 워커힐호텔에 돌아온 북측 방문단들은 대부분 상봉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상기된 얼굴로 “내일 다시 만나도 울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오전 10시57분 김포공항에 도착한 북측 이산가족들은 숙소인 워커힐호텔로 이동,방 배정을 받은 뒤 여장을 풀고 호텔 식당에서 서울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점심은 갈비찜,은행죽,인삼야채무침,민어삼색전 등이 곁들여진 한정식으로,호텔 관계자는 “상봉단이 대부분 노령층이어서 먹기 좋고 소화가 잘되는 음식으로 준비했다”고 밝혔다.대부분의 북측 이산가족들은 “김치가 제일 맛있다”면서 “같은 조선 사람들인데 달리 맛을느끼겠느냐”며 남북 동포들이 한 입맛임을 강조했다. 북측 가족들의 가슴에는 김일성배지와 함께 인공기와 적십자 표시가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배지가 달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북측 가족들은 신원을 증명하는 명찰도 휴대하고 있었다. ◇ 올림픽파크텔 ■밤 10시30분쯤 올림픽파크텔에 도착한 남쪽 가족들도 북한 방문단과의 상봉의 순간을 다시 되새기며 16∼17일의 개별 상봉시간은 어떻게 보람있게 보낼까 의논했다. 이날 아침 남측 가족들 중에는 잠을 설친데다 50년 만에 가족들을만난다는 기대 때문에 올림피아홀에 마련된 아침 식사를 제대로 들지못하고 남기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 남쪽 가족들은 기자들이 객실로 몰려와 취재 경쟁을 벌이자 가족간 대화 등에 방해가 된다며 기자들의 객실 출입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호텔측은 송파경찰서의 지원으로 이산가족들이 머무는 각 층마다 의경 2명씩을 투입해 객실 접근을 막았다. ◇ 한국종합전시장■북측 방문단과 남측 이산가족은 이날 저녁 대한적십자사가 강남구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COEX) 그랜드볼룸에서 주최한 환영만찬에 나란히 참석,재회의 기쁨을 함께 했다. 만찬은 상봉 시간이 지연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1시간여 늦은 오후 7시40분께 시작됐으며 남북 상봉자 600여명과 한적 관계자 100여명 등이 참석했다. 한적 봉두완(奉斗玩) 부총재는 환영사에서 “만나면 이렇게 좋은 것을 왜 50여년동안이나 미뤄왔는가”라면서 “반세기 동안 간직했던회포를 이 자리에서 맘껏 푸시길 바란다”고 축원했다. 특별취재단
  • 남쪽 7남매의 북 큰형맞이

    “누님이 지은 모시적삼 입고 고향서 같이 살면 얼마나 좋을꼬…” 50년만에 서울에서 만날 큰 형 권중국(權重國·70)씨를 맞을 준비를 한 13일 중호(重浩·56·서울 광진구 노유동)씨의 32평짜리 집은 7남매가 모여 선물 보따리를 꾸리느라 마치 잔칫집처럼 북적거렸다.서울에 사는 조카와 일가 친척 등 20여명이 하루 종일 집안을 가득 메웠다. 고향 경북 영주에 사는 순희(順姬·76·여),계희(桂姬·74·여),차희(且姬·66·여),중후(重厚·62),춘례(春禮·59·여)씨도 새벽 3시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중호씨 집 근처에 사는 막내 중수(重守·50·광진구 중곡동)씨까지 7남매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50년만에 만날 형 얘기로 꽃을 피웠다. 지난 49년 결혼해 신접 살림을 차리고 있던 중국씨는 이듬해 6·25가 나자 고향에서 인민군으로 징집돼 가족과 헤어지게 됐다.10년동안 수절하던 형수는 형제들의 권유로 개가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떴다. 7남매는 형님이 어떻게 변했을까,시누이는 어떤 여자일까 등 정담을 나누면서 선물 가방에 가족사진첩,목걸이,시계,오리털잠바,내의,양말 등을 정성스레 담았다.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남동생 중후씨가 “형님 환갑이 지난 10년전부터 형님 제사를 지내왔다”면서 “3년전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조금만 더 사셨으면 꿈에도 못 잊던 큰아들을 만날 수 있으셨을 텐데…”라고 말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둘째 계희씨는 “50년만에 만나는 동생에게 내 손으로 지은 옷을 입히고 싶었다”며 손수 만든 하얀 모시적삼을 어루만졌다.계희씨는 “이 옷을 입고 부모님 산소에 술이라도 한 잔 따라야 할 텐데…”라면서 “형제가 50년 동안 갈라져 산 것도 억울한데 왜 고향에도 못 가느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중국씨가 고향에서 손수 베껴 만든 소학(小學)책까지 꼼꼼히 챙기던 7남매는 “조카 부부와 손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인데 50년 동안쌓인 이산의 한을 어떻게 선물보따리 하나로 풀 수 있겠느냐”면서도 “뭐 하나라도 더 보낼 것이 없는지 챙겨봐야 하겠다”면서 근처 시장으로 향했다. 한편 평양으로 가족을 만나러 갈 실향민과 서울로 오는 가족을 맞을 남쪽 가족 모두는 선물 보따리를 준비하면서 짧은 여름밤을 하얗게새웠다. 전영우기자 ywchun@. *방북탈락 이산가족-실향민들 추가상봉 소식에 '환호'. “우리도 갈 수 있다니 정말이냐” “정말 고향 방문이 가능하냐”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방북 언론사 사장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이산가족상봉이 9,10월에도 계속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는 소식이 알려진 13일 밤 ‘8.15 방북단’에서 탈락한 이산가족들은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일 안에 북의 가족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8.15 상봉 명단’에 포함됐으나 109세의 노모를 만나는 장이윤(張二允·72)씨에게 순위를 양보했던 우원형(65·서울 강남구 논현동)씨는 “장옹에게 양보할 때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로부터 ‘다음번 이산가족상봉에는 1명이 가더라도 최우선적으로 포함시키겠다’는 말을들었는데 이처럼 빨리 갈 수 있게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기뻐했다. 6·25때 고향 충남 청양에서 의용군으로 징집돼 소식이 끊긴 셋째형 이상두씨(68)의 생존사실을 이번 명단 교환 때 확인한 상기(相起·60·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씨는 “탈락 소식을 들었을 때 누이와 남동생과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서로 위로했지만 섭섭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다”면서 “다음번에형을 꼭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기다려야겠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황해도 평산군이 고향인 정순용(鄭順溶·61·여·강원도 춘천시 동면)씨는 “최종 명단에서 탈락해 절망했는데 한가닥 희망을 가지게돼 기쁘기 그지 없다”면서 “북한에서 우리 네자매를 특히 귀여워해 주신 고모와 삼촌에게 남쪽에서 태어난 손아래 여동생 3명을 꼭 소개시키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예 처음부터 명단에 들지 못했던 실향민들도 추가적인 이산가족상봉 소식을 반겼다. 부인 장정희(張貞姬·71·서울 양천구 신월동)씨는 이번에 최종명단에 들어 북으로 두 명의 여동생을 만나러 가지만 자신은 명단에서 탈락한 평양 출신 김학구(金學九·82)씨는 “북에 살아 있는 일흔다섯살이 됐을 누이동생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갖게 돼 정말 기쁘다”면서 “심장이 안 좋지만 꼭 건강을 회복해 고향땅을 밟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고희를 맞은 이종권씨(70·인천시 남동구 구월동)는 “친지끼리 모여 고향 황해도 해주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면서 “고향에서 한번 더 고희연을 갖고 싶다”고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전영우기자
  • 이산동생 상봉 이틀앞두고 운명

    북측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 박원길씨(89·서울 은평구 신사동)가 50년 전에 헤어진 동생과의 상봉을 불과 이틀 앞둔 13일 지병으로 눈을 감아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북측의 서울방문단에 포함된 막내 동생 노창씨(69)를 비롯,5남매의맏이인 원길씨는 지난 6월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오다이날 오전 5시30분쯤 한많은 세상을 등졌다. 원길씨는 지난 50년 노창씨가 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기자전쟁통에 세상을 떠났다고 체념하고 나머지 동생들을 부양해왔다.그러나 동생들도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았다. 지난 7월 죽은 줄 알았던 막내 동생이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원길씨는 동생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몸을 추슬러 왔다.하지만 동생의 서울방문이 확정됐다는 통보를 받기 전인 지난 7일 갑자기 의식을 잃고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는 등 상태가 위독해졌고 결국 그토록 그리던 동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카 박성규씨(54)는 “작은 아버지의 생존 소식을 들으신 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시면서 ‘조금만 더살아 반드시 동생 얼굴을 꼭 봐야겠다’고 하셨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가족들은 노창씨가 형의 빈소를 찾을 수 있도록 발인을 늦출 계획이다. 한편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는 “서울에 오는 박노창씨의 친형은 사망했으나 조카도 상봉자 명단에 등록된 만큼 박씨의 서울 방문은 그대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
  • 반세기만에 띄우는 편지/ 서울 오는 北형님께

    ‘북에 계신 현석 형님께’ “이 글을 올리는 저는 형님께서 가족과 헤어진 뒤 태어난 막내 동생 현광이입니다.…형님의 서울 방문을 가장 기뻐하셨을 어머니께서는 꼭 1년 전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김현광(金顯光·47·서울 광진구 중곡동)씨는 15일 얼굴도 모르는큰형 현석(顯碩·65·평안남도 평양시)씨를 만난다.현광씨는 상봉일이 다가오자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큰형이 당황할 것 같아 13일 사진을 동봉한 편지를 썼다. 현광씨는 “환갑이 넘으신 형님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만 자꾸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나서 기쁘기보다는 서글픈 마음이 든다”고말했다. 서울 한성중학교 2학년이던 1950년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간 큰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는 지난해 8월14일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숨을 거두기 직전 “현석이가 돌아오면 며느리에게 주라”며 자신이 평생 껴 왔던 반지를 큰형 대신 장남 노릇을 해 온 둘째형 현기(顯機·61)씨에게 줬다. 현광씨는 지난 97년 8월16일 아버지 김남식(金南植·85)씨를 모시고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올라 천지를 바라보며 큰형이 살아 있기를 빌었다.아버지는 이 때 북에 있는 큰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천지물을 생수통에 담아왔다. 천지물을 지금껏 보관하고 있는 김남식씨는 서울에 오는 큰아들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던 시계와 카메라를 줄 계획이다. 현광씨는 “한해만 더 살아 계셨어도 큰형님을 보실 수 있었을 텐데…”라고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김경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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