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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월의 독립운동가 장건상 선생

    국가보훈처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의열단,국민대표회의,민족혁명당 등으로 다양한 독립운동을 벌인 소해(宵海) 장건상(張建相·사진·1882∼1974) 선생을 광복회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선생은 서울에서 선교사로부터영어를 배우고 1905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갔다가 자퇴한 뒤 연해주,시베리아,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2년 미국 발프레이조 대학을 졸업한 뒤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1920년 이후엔 의열단,고려공산당,국민대표회의 활동에전념하다 1923년 창일당을 조직하고 급진적 잡지 ‘혁명'을 3년간 간행했다. 1945년 귀국 이후 여운형 선생이 주도한 조선인민당 부위원장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여하는 등 통일운동에 헌신했으며1974년 서울 정릉에서 91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청암 송건호 선생 전집 출간

    지난해 12월21일 타계한 언론인 청암 송건호(宋建鎬) 선생의 1주기를 앞두고 그의 정신과 사상을 담은 ‘송건호 전집’(전20권·한길사)이 출간됐다. 전집에는 고인이 평생 온몸으로 이루고자 했던 민주언론과,지식인·통일문제에 대한 치열한 정신과 사상이 모두 수록됐다. 고인은 지난 70∼80년대 대학생과 지식인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롯해 ‘한국민족주의의 탐구’‘한국현대사론’‘해방 40년의 재인식’‘분단과 민족’‘한국지식인론’‘민족지성의 탐구’‘단절시대의 가교’‘서재필과 이승만’‘한국현대인 물사론’‘의열단’‘김구’‘드골평전’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전집 출간은 청암언론문화재단(이사장 강만길)이 한국언론재단과 한길사의후원을 받아 진행해 왔다. 청암언론문화재단은 새달 6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출간기념회와 제1회 송건호언론상 시상식을 가질 예정이다. 심재억기자
  • 이육사 詩 3편 다시 세상밖으로

    그동안 잊혀진 민족시인 이육사(1904∼44)의 시 3편이 50여년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찾은 시편은,서울신문(대한매일 전신)이 지난 48년부터 6·25 직전까지 발행한 자매지 ‘주간 서울’33호(1949년 4월4일자)의 문화면에 ‘작고 시인들의 미발표 유고집’에 게재된 것.‘山(산)’‘畵題(화제)’‘잃어진故鄕(고향)’등 이 3편의 시는 46년에 나온 이육사 시집은 물론 이후 간행된 ‘육사 시전집’에도 빠져 있다. 이 시편들이 전해지지 않은 까닭은 서울신문사 건물이 6·25와 4·19를 거치는 혼란의 와중에 화재를 당하면서 ‘주간 서울’등 소장자료가 소실돼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단에서는 전집에 실린 육사의 시가 고작 29편일 뿐만 아니라,그가 일제의 탄압과 회유를 뿌리치고 끝까지 고난의 길을 택한 드문 ‘문학지사’라는 점에서 시3편의 발굴은 의미가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육사는 1925년 항일 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나선 이래 마흔살의 나이로 중국의 베이징(北京)감옥에서 숨질 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과 조국 해방의 꿈을 접지 않았다.이런 의지는 발굴된 시편들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 ‘잃어진 고향’에서 육사는 ‘망국’과 ‘망향’의 정서를 절절하게 표현했다. ‘제비야/너도 고향이 있느냐’로 시작되는 시는 ‘고향을 찾아가는 제비’를 통해 고향과 고국을 잃어버린 독립투사이자 저항문인의 심사를 노래한다. 시 중반부에 ‘불행히 사막에 떨어져 타죽어도/아 서러워 하지야 않을 것’이라고 회한을 토로하는가 하면,‘무리를 지어 날아가도 홀로 높고 빨라/언제나 외로운 넋’이라며 자신의 처지와 위치를 빗댄 정서를 드러낸다. 권영민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는 “육사가 지고한 자기 정신의 경지를 얘기하는 시로,특히 ‘그 곳에 푸른 하늘이 열리면/어쩌면 너의 새로운 고장 혹은 고향이 될 법도 하다’는 종결 부분은 분명히 ‘청포도’와 맥을 같이한다.”고 말했다. 다른 시 ‘산’에도 그의 힘겨운 역정이 잘 드러나 있다.‘바다가 수건을 날려서 부르고/난 단숨에 뛰여 달려서 왔다’고 시작되는 시는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발아래 깃들여 오기에’라며 스스로 삶에서 위안을 구한다.이어지는 ‘나라와 나라를 흘러 다니는/뱃사람들이 부르는 망향가’라는 대목은 육사다운 ‘절창’이라는 것이 권교수의 설명이다. 육사의 시 가운데 특이한 형식을 보인 ‘화제(畵題)’는 암울한 도시 현실을 그린다.시에서 육사는 도시를 ‘조기(弔旗)를 게양한 것처럼 서럽’다고하는가 하면 ‘버려진 아이들의 차가운 꿈’등의 표현으로 당시의 도시 풍경을 묘사한다. 권교수는 “아마도 원고 상태로 발견된 것을 ‘주간 서울’이 입수해 게재한 것이 아닌가 싶다.”라면서 “특히 ‘잃어진 고향’은 짜임새와 긴장감이 매우 뛰어나,시력(詩歷)이 짧고 남긴 시편이 적은 육사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심재억기자 jeshim@ ■잃어진 故鄕-이육사 제비야 너도 故鄕이 있느냐 그래도 江南을 간다니 저노픈 재우에① 힌 구름 한쪼각 제깃에 무드면② 두날개가 촉촉이 젓겠구나 가다가 푸른숲우를 지나거든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 不幸이 沙漠에 떠러져 타죽어도 아이서려야③ 않겠지 그야한떼④ 나라도⑤ 홀로 높고 빨라 어느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 엇저면 네새고장도⑥ 될범하이 ※시는 원문을 전재한 것이며 옛 표현의 뜻은 다음과 같다. ①고개 위에 ②묻으면 ③아,서러워하지 ④그야 한 무리로 ⑤날아도 ⑥너의 새로운 고장도.
  • 노백린장군 76주기 추모식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노백린(盧伯麟) 장군의 76주기 추모식이 22일 오전 11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임정 묘역에서 열린다. 노 장군은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왔으나 1900년 귀국한 뒤 신민회를 조직,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이어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참모총장,국무총리를 역임하다 26년 현지에서 순국했다. 한편 임시정부 의열단원으로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르던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金相玉)열사의 79주기 추모식도 같은 시각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열사의동상 앞에서 열린다. 김경운기자 kkwoon@
  • 1월의 독립운동가 곽재기 선생

    국가보훈처는 2일 항일의열투쟁가 곽재기(郭在驥·1893-1952)선생을 광복회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서울 경신학교의 애국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활동했고 졸업후 청주 청남학교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에 힘썼다. 선생은 3·1운동 후 ‘필설'(筆舌)의 방법으로는 독립할수 없다고 보고 중국 지린(吉林)으로 건너가 의열단을 조직하고 항일 암살·파괴활동을 벌였다.1920년 5월 폭탄 13개와 권총 2자루,실탄 100발 등을 국내로 반입시킨 뒤 서울로 잠입한 선생은 인사동에서 동지들과 암살·파괴계획을 모의하다 일경에 체포됐다.1921년 최고형인 징역 8년을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인 1930년 다시 망명,만주와 상하이,노령 등지에서독립운동을 하다 1945년 11월 귀국했다. 이후 정치활동을접고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에종사하다가 1952년 별세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강동형기자 yunbin@
  • 광복절 기념 다양한 특집 다큐

    지상파 방송 3사가 광복절을 맞아 각양각색의 특집다큐프로그램을 선보인다. MBC는 해외동포에게 눈을 돌렸다.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재외동포 600만-꿈을 찾아서’를 오는 12일과 19일 오후11시35분 2차례에 걸쳐 4부작으로 방송한다.세계 곳곳에서나름대로 성공을 이룬 이민자들을 통해 한국인의 가능성을내다봤다. 제1부 ‘한상을 꿈꾸며’에서는 세계 경제의 중심지 뉴욕에서 아프리카에 이르는 한국 상인들의 활약상을 살펴본다.제2부 ‘자원을 찾아 세계로’에서는 세계의 오지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히고 있는 재외동포들을 소개한다.제3부‘세계 속의 한류열풍’은 세계 각국으로 뻗어가는 우리문화의 열풍에 숨어있는 재외동포들의 노력을 알아본다.제4부 ‘새로운 삶을 찾아서’에서는 인간다운 교육과 여유로운 삶을 찾아서 떠나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MBC는 지난 5월 방송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반민특위-승자와 패자’편도 14일 낮 1시45분 재방송한다. KBS는 북측의 연구자료를 이용,새로운 독립전쟁사를 소개한다. KBS1은오는 15일부터 17일까지 오후 10시에 특별기획 3부작 ‘발굴 다큐멘터리독립전쟁’을 방영한다.그동안 남쪽의 시각으로만 풀어냈던 독립전쟁사에 북측의 연구자료를통합해 색다르게 접근할 예정이다. 제1부 ‘총을 들다’에서는 3·1운동이후 1920년대의 독립전쟁을 그린다.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그리고 러시아에서 활약한 김경천 장군의 항일군 실체를 살펴본다.제2부‘전쟁 다시 시작된다’에서는 분단의 현실로 인해 외면받았던 1930년대의 독립전쟁을 방영한다.양세봉이 이끈 조선혁명군,김일성이 이끈 동북항일연군,김원봉의 의열단 등을 조명한다.3부 ‘그것은 승리한 전쟁이었다’에서는 최후의 전쟁을 준비했던 1940년대를 다룬다.일본과 결전을준비했던 임시정부의 광복군,좌파조선의용군 등의 무장투쟁에 대해 알아본다. SBS는 일본인의 현재를 통해 한국의 미래를 짚었다.오는14일 밤 12시35분 특집다큐멘터리 ‘하나부사의 명함’을방영한다.하나부사는 38년동안 아시아 경제연구소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일본인이다.그가 모은 한국관련 서적이 1만5,000권,한국인 명함이 3,000여장.일본의 한국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넓고 깊은 지를 보여준다. 이송하기자 songha@
  • “독립운동가 윤세주 사상 통일과정서 교훈 삼아야”

    약산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의열단 창단멤버로 활동한 석정 윤세주(尹世胄·1901∼1942)선생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 진영의 대표적인 진보성향의 지식인이자 실천가였다는 평가가 나왔다.그의 항일투쟁활동 뿐 아니라 ‘지식인 윤세주’의 면모를 본격 조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의미가 크다. 5일 경남 밀양시청 대강당에서 열린 밀양문화원 주최 윤세주선생 탄신100주년기념 한중학술회의에서 강만길 상지대총장은 ‘윤세주와 조선민족혁명당’이란 발표문을 통해 윤세주의 사상·세계관,조선민족혁명당에서 그의 역할,해방후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그의 구상 등을 소개했다.강총장은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소상히 알려져 있지만그들의 생각이나 세계관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하다”고지적하고 “윤세주는 진보적인 세계관과 해방 후 독립국가건설에 대한 뚜렷한 구상을 가진 이론가인 동시에 의열투쟁 등 실천가로도 활동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강총장은“1930년대 당시 윤세주는 세계 도처의 식민국가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세계사의 발전을 한 단계 높이는 원동력이라고 보았으나,역사를 움직여나가는 기본조건은 경제적 조건이란 시각 아래 사상적으로는 유물사관을 갖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한편 해방 후 독립국가 건설과 관련,윤세주는 1936년에 발표한 글에서 “경제균등에 의한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주장하면서 “노동자계급이나 자본가 계급 그 어느 쪽의 독재도 원치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이는 해방 후 좌·우익정당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일본인이나 친일파 소유의 독점적기업에 대한 몰수와 국유화,그리고 토지 몰수(국유화),균등분배 등을 주장한 것과 동일한 생각이며,근본적으로는 비자본주의적 국가건설을 구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강총장은 “좌우합작·통일전선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의 대표적 이론가인 윤세주의 사상은 향후 남북통일 과정에서 교훈으로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는 ‘조선의용대의 독립운동과 윤세주’라는 논문에서 “조선의용대 결성 초창기 윤세주의 가장 큰 임무는 일본군 포로 가운데 조선인을 포섭해대원으로 확보하는 일이었다”며 “조선의용대 청년대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들을 정신적으로 감화시키고 단련시켰다”고 주장했다.중국국민당의 한 문서에서는 그를 ‘조선민족혁명당의 영혼’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한편 이날 중국측에서는 난주 장액사범학원 석건국 교수,계림 광서사범대 최본춘 교수 등이 주제발표자로 참가했다. 또 조선의용대원 출신으로 흔히 ‘항일독립군 최후의 분대장’으로 불리는 김학철(金學鐵·84·중국 연길시 거주)옹이 토론자로 참가,조선의용대 시절 윤세주의 활동상에 대해 증언했다. 1942년 5월 태항산전투에 참전했다가 일본군과의 교전끝에 순국한 윤세주는 동지 진광화(陳光華)와 함께 하북성 한단시 열사능원(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중국 국립묘지에 묻힌 한국인은 이들 뿐이다.지난 82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했다. 밀양 정운현기자 jwh59@
  • [김삼웅 칼럼] ‘치매의 역사’ 바로잡지 못하면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한가지뿐이다.그것은 인류가 그 사실을 잊는 것이다.”-유대인 학살의 현장인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기념비에 새겨진 글이다.맹자는 ‘전사불망(前史不忘) 후사지사(後事之師)’라했다.지난 일을 잊지 않으므로 후일의 교사로 삼는다는 뜻이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과거에 눈을감은 자는 현재에도 맹목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일제시대 우리 독립군사관학교는 ‘오수불망’(吾讐不忘)이란 교재로 독립군을 양성했다.‘우리의 원수를 잊지 말자’는가르침이었다.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빨리 쉽게 잊는다.그래서 가치관이 전도되고 진실과 허위가 뒤죽박죽이다.E H카는 “역사가 정확을 기한다는 것은 미덕이기 전에 하나의 신성한 의무”라고 역설했다.‘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니 ‘현실’은 자꾸 뒤틀린다. 뒤틀리는 현상을 살펴보자.그동안 어렵사리 유지돼온 남북 화해협력의 분위기가 사대주의에 기생해온 냉전세력과미국 부시 정부에 의해 크게 도전받고 있다.정치개혁은 기득세력의 저항으로 표류하고 언론개혁은 수구언론의 공세로 비틀거린다. 군사독재 시대의 희생자인 의문사 진상규명도 사건 관련자들의 기피로 제자리걸음이다.82건이 의문사로 선정됐지만 단 한건도 진상을 밝히지 못한 상태다.1,000억원이 넘는 안기부 자금 횡령사건도 꼬리를 감추고 각종 ‘괴문서’ 사건도 유야무야되고 있다. 역사에 대한 무책임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역사 드라마의 인기에서 나타나듯이 사극에는 관심이 많으면서도 역사의식은 박약한 것이 우리 국민이다.역사의식만투철하다면 지금과 같은 ‘악화’(惡貨)가 설치지는 못할것이다.역사의식의 빈약과 치매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그레셤 법칙’이 나타나게 됐다. 잘못은 1948년 건국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면서 임정이 탄핵한 인물을 건국 대통령으로 선출한 ‘정치치매증’에서 비롯한다.이렇게 시작된 정치치매 현상은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고,친일파의 온상에서 수구세력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장준하 선생이 생전에 말한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될자격이없는 사람이 셋 있는데,오카모토 미노루와 다카기마사오와 박정희”라는 바로 그 동일인이 집권하고 이후그의 아류들이 현대사의 ‘주류세력’(main stream)이 됐다. 이 주류에는 정치군인,부패 정치인,족벌언론과 어용 지식인,타락한 기업인이 중심을 이루고 이들은 분단과 냉전구조와 지역갈등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거대한 수구계급 사회를 형성했다.요즘 언론개혁에 어깃장을 놓는 식자들을 살펴보면 수구언론과 연계되거나 군사정권에서 핵심역할을했던 자들 또는 그 2세들이다.독재시대에 ‘용비어천가’를 불렀던 자들이 마치 자유언론의 파수꾼이 된 것처럼 설친다.청산하지 못한 치매역사의 부끄러운 업보다.일제시대일경이 독립운동가 중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걸고 눈이뒤집혀서 잡고자 했던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선생은 해방후 국립경찰 간부로 변신한 고등계 형사 출신의 노덕술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그리고 월북했고 최근까지 그의이름을 부르는 것도 거부됐다.약산의 여동생이 밀양에서북에 있는 오빠의 두 아들을 찾고자 이산상봉 신청을 했다고 들었다. 너무 먼 얘기인가.군사정권에서 민주인사들을 고문하던자가 어느 도시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 되고,수구언론 거부운동이 들불처럼 일고 있는 지역의 국회의원은족벌언론의 대변자인 양 정론지를 매도한다. 나서서는 안될 사람들이 킹 메이커가 되겠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부시 정부가 북한에 강경책을 써주기를,밸도 없고자존심도 없는 사대주의 언론·지식인들이 날뛴다.청산하지 못한 치매정치의 낯뜨거운 현상이다. 연암 박지원은 ‘양반전’에서 “선비는 천작(天爵)이다”고 썼다.‘천작’이란 하늘에서 받은 벼슬이란 뜻으로,남에게 존경받을 만한 덕행과 시비곡직을 가리는 지식인을말한다. 지금의 지식인과 언론인을 옛 선비에 비할 바 아니지만최소한의 ‘선비정신’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걸핏하면 남북 화해협력을 헐뜯고 외신과 외국기관의 보고서를 왜곡하고 우리 국익보다는 타국의 이익에 충실하려는 쓸개 빠진지식인·언론인들은 역사와 하늘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역사의 필주(筆誅)가, ‘천작’을 내는 하늘의 ‘천벌’(天罰)이 두렵지 않은가. 김삼웅
  • [대한광장] 우리사회 주류와 시대정신

    지금 벌어지는 이른바 주류논쟁은 역사학자인 내게 좋은 관찰대상이자 비평대상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현 우리 사회 주류의 뿌리는 조선후기 200여년 이상을 일당집권한 노론이란 정파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일제는 강점 직후 조선 멸망에 공을 세운 총76명의 조선인들에게 합방공로작(合邦功勞爵)을 주는데 놀랍게도 이들 대부분은 집권 노론이었다.게다가 임시은사금·은사공채 등의 명목으로 거액을 주었다.유림(儒林)출신 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의 “그때에 왜정(倭政) 당국이 관직에있던 자 등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라는 비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들 노론에서는 아무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은 반면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 계열에서는 많은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나섰다.소론의 대표적 집안인 우당(友堂)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가문은 6형제 모두가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나섰으며,그 외에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김창숙·김대락(金大洛)등의 소론·남인 출신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이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고국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죽거나 고문을 당해 병신이 된 반면 노론은 일제 치하에서도 친일 지주로서 온갖 영화와 천수를 다 누렸다. 일제의 패망은 이들 친일파들에게는 믿고 싶지 않은 청천벽력이었다.비주류로의 낙마는 물론이고 자칫하면 프랑스에서그런 것처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던것이다.그러나 이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바로 냉전체제였다.이들은 재빨리 일부 중립적 인사들을 끌어들여,유엔한국위원단조차 보수적 지주정당으로 분류한 한민당을 결성했다.이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친일 전력을 감추기 위해 임시정부 봉대(奉戴)를 내세웠지만,곧 임정의 친일파 제거 방침에 위협을 느껴 국내 기반이 부족한 이승만과 결탁해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친일파와 반공세력의 이런 결탁은 결국 민족정기의 총화인반민특위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다.일본 관동군 촉탁으로서애국지사 수십여명을 교살 또는 투옥시킨 이종형이 반민특위에체포되자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며,나는 공산당하고싸운 사람인데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한 것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1949년 8월7일,이승만의 명령을 받은 시경국장김태선은 반민특위본부를 습격해 해산시킨다. 이날은 동시에해방된 나라의 주류가 되어야 할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다시비주류로 내몰리고,일제 시대의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이 다시 이 사회의 주류로 당당하게 복귀한 날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후 최근까지 반공·냉전세력과 결탁해 이 사회 주류의 위치를 이었다. 고려말 신흥사대부가 권문세족을 비주류로 내몰면서 주류의위치를 차지한 것은 역사의 진보이고 시대정신의 구현이었다.그러나 우리 사회의 주류인 친일·냉전세력은 시대정신의구현자가 아니라 시대정신과 맞서 싸우는 역사의 극복대상일뿐이다. 이런 점에서 주류논쟁을 불붙인 이회창 총재의 선친이 일제말기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일제하에서 검사보 노릇을 했다는 것은,그것이 엘리트 내지 귀족이라 불리는 이총재의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일지는 몰라도 그다지 자랑할 만한 과거는 아닐 것이다.당시는 의열단원 김익상같이 일제 형사에게끌려간 후 살해되었거나,일제의 사상범 예방구금령 아래에서수많은 애국인사들이 영장도 없이 끌려가 무기한 갇혀 있던상황이었다.게다가 5·16직후 반공을 극대화해 위기를 타개하려던 쿠데타 정권의 기도대로 ‘민족일보’사장 사법 살인사건에 담당 판사의 한 구실을 했다면,이총재는 옛 민족일보기자이자 ‘민족일보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인 김자동씨가주장(대한매일 2월20일자)한 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이 사건의 재조명 작업에 앞장서야”할 것이다. 이총재에게 이런요구를 하는 김자동씨가 임정요인 김가진선생의 손자이며,역시 독립운동가인 정정화여사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아직 껏독립운동가 자손이 이런 요구를 해야 하는 이 현실은 분명뒤틀린 주류의 역사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월북 의열단장 김원봉 여동생 이산가족 상봉신청

    일제때 중국에서 광복운동을 하다 해방후 월북한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의 여동생 학봉(學鳳·69·경남 밀양시 삼문동 140의 10)씨가 북한 거주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낸 것으로 8일 뒤늦게 확인됐다. 고향인 밀양에서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50여년을숨죽여 살아오던 학봉씨는 지난해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고 올케 최동선씨와 조카 중건(56)·철건(47)형제를 만나기위해 삼문동사무소에 신청서를 냈다. 김원봉은 1898년 밀양에서 태어나 일찌기 중국으로 건너가의열단 단장과 조선의용대장,광복군부사령 등을 지낸 항일무장투쟁의 거물.해방후 월북,노동상을 거쳐 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까지 올랐으나 다음해 숙청됐다. 지난 32년 아버지 김주익(金周益)·어머니 이경념(李京念)씨의 11남매(9남2녀)중 막내로 태어난 학봉씨는 큰 오빠의얼굴도 모른 채 자랐다.그녀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46년 2월 이국땅을 떠돌던 오빠가 광복을 맞아 고향을 찾았을때 처음 얼굴을 보았다.다음해 설날 다시 와 제사를 모시고 가면서학용품을 사주고 간것이 남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학봉씨는 “오빠가 ‘씩씩하게 자라서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며 “서울로 가면서 영어사전과지우개 달린 연필을 사줬다”고 회고했다. 학봉씨는 큰 오빠의 월북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숱한 고초를 겪다 결혼,3남2녀를 두었으나 32살때인 64년 남편과도사별,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세아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딸 둘만 데리고 어렵게 살아왔다. 이후 독립운동을 했던 교육계 인사의 보증으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학봉씨는 “오빠가 무장투쟁을 이끈 독립투사였지만 월북했다는 이유로 고향에 남은 가족들은 서럽고 한 많은 생을 살았다”며 “생전에 조카들이라도 만난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밀양 이정규기자 jeong@
  • ‘아나키즘’ 관련서 두권 눈길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렇게 공식처럼 영어 단어를 외워온 사람들이많다.그러나 그리 간단치는 않다.아나키즘의 목표는 개인이 절대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이상사회 건설이다.현대사회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할 대안적 사상으로서의 아나키즘을,생태공동체운동이나 대안학교등 사회운동과 접목하려는 다양한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책세상이 펴낸 관련서 두권은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로버트 폴 볼프는 ‘아나키즘-국가권력을 넘어서’에서 인간의 자율성과,개인의 의지에 반하는 행위를 강요하는 정치적 권위는 양립할수 없다고 주장한다.유일한 이상적 정치체제로 만장일치적 직접민주주의를 꼽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제도다.다수결이나 대의제 민주주의 등 어떠한 현실 정치제도도 이상과는 거리가 있는 조정과 타협의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나키즘이라는 주장이다. 조세현교수(부경대 사학과)는 책세상문고 제29권인 ‘동아시아 아나키즘,그 반역의 역사’에서 동아시아 3국의 역사에서 태동되고 움직인 아나키즘 운동을집중소개한다.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로 대표되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군국·애국주의를 부정하고 보편적 인류애를 주장하며 천황 테러를 시도했고,스푸(師復)등 중국 아나키스트들은 군주제 타도를 사회혁명의 첫 목표로 삼았다.신채호와 의열단 등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려는 민족해방운동의한 수단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동양은 서양에 비해 개인보다 사회문제에 좀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고 저자는 평한다. 김주혁기자 jhkm@
  • [대한광장] 자두나무 아래에서는…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란 말이 있다.자두나무 아래서는 관을 고쳐 매지 말라는 뜻으로서 행여 오해살 행위 자체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자루채 자두를 가득 따간 사람들과,자신이 먹은 자두가 훔친 것인 줄 몰랐다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다.그들 중 일부는아직도 그 자두를 가지고 있다니 가관이다.더욱 가관인 것은 바로 그자루가 드러남으로써 범인임이 밝혀진 인물이 ‘야당탄압’이니 ‘정계개편 음모’니 하는 말로 자루 속에 든 자두의 본질을 희석하려는 점이다. IMF시절 어느 술좌석에서 한 대통령이 나라를 망쳤다고 지탄받을 때필자는 “재임 중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는 그분의 말을 빌려변호했다가 “그 말을 사실로 믿느냐”는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필자의 순진함을 핀잔한 그분들이 교육이라고는 의무교육밖에 받지 못한 분들이기에 필자는 식자(識者)의 입장에서 이 나라에 가득 찬 불신을 우려했다.그러나 기업인으로부터 돈을 받는 행위를 뛰어넘어 국가예산,그것도 국가안전에 관련된 옛 안기부 예산을 선거자금으로사용했다는 보도는,배우지 못한 그 분들이 이 나라 정치의 본질을 체감하는 데에는 필자보다 백배는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만들었다. 옛날 박정희정권이 구악을 일소하겠다고 나섰다가 곧 ‘구악이 신악을 뺨친다’는 비아냥으로 되돌아왔던 것보다 더한 역사의 전철이,이른바 문민정부 시절에 저질러졌다는 점은 분노를 넘어 이 역사에 절망을 느끼게 한다.그리고 이런 행위를 온갖 궤변으로 호도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이들이 대한민국을 다스리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온 외계인들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게 한다. 지금 필자를 비롯한 일반 민초들이 알고 싶은 것은 국민세금이 특정정당의 선거자금으로 지원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실패한 전직대통령을 옹호할 때 나를 순진하다고 핀잔주었던 사람들처럼 이런 말을 하는 필자를 “정치를 너무 모른다”고 핀잔주면서 ‘정계개편 음모’니 뭐니 할지 모르지만 이 나라의 한 상식인으로서 필자가 알고싶은 것은 외계인들이 벌이는 고도의 정치게임이 아니라 진실일 뿐이며,그 진실에 따라 법의 정의를 세우는 일뿐이다. 이 나라는 자루채 자두를 훔친 외계인들이 온갖 궤변으로 도둑질을변명해도 좋을만큼 만만한 과정을 거쳐 건국된 나라가 아니다.경남밀양 출신의 최수봉(崔壽鳳:1894∼1921)이란 독립운동가가 있다.의열단원인 그는 26세 때인 1920년 12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가체포되어 사형 당한 분이다. 투탄으로 아무도 다치지 않았음에도 그를 사형시킬 정도로 악독한 일제를 향해,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내던진 이런 선열들의 무수한 목숨의 대가로 세운 나라가 이 나라이다. 더구나 그 궤변의 옛 여당 사무총장은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다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바다에 떠올라 온 국민을 궐기케만든 김주열열사의 고장 출신 국회의원이다.김주열열사의,부정선거규탄의 부릅뜬 눈을 기억한다면 감히 건국 이래 초유의 선거부정을‘야당탄압’‘정계개편 음모’운운하는 외계인의 수사(修辭)로 빠져나가려 하지는 못할 것이다. 검찰에게는 이 사건 수사를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시금석으로 삼아야 할 책임이 있다.조선시대 검찰 격인 사헌부 관리들은 조회가 끝난 후 다른 관료들이 다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다른 관료들과 뒤섞여나가는 자체가 수사의 엄정함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간 정치검찰이란 질타를 받은 검찰은 국기문란 그 자체인 이 사건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배려도 없이 철저히 수사함으로써 국민 신뢰를회복하기를 바란다. 하긴 벌써부터 누구누구는 수사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런 기대가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덕일 역사평론가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9.끝)일본 도쿄

    도쿄시내를 동서로 가르는 지하철 유라쿠초센(有樂町線)의 중간지점에는 사쿠라다몬(櫻田門)이라는 역이 있다.이 역의 3번 출구는 경시청 입구로,4번 출구는 사쿠라다몬으로 나온다.황궁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사쿠라다몬에서 바라보면 왼쪽으로는 고색창연한 법무성 건물이,오른쪽으로는 멀리 일본 의회의사당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바로 정면,불과 80m 정도의 거리에는 일본 치안의 총본산인경시청 건물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기자가 이곳에 도착한 시각이 마침 점심시간이었다.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인근 관공서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사쿠라다몬을 지나 황거(皇居·황궁)앞 광장에서 조깅을 하고 있었다.일본사람들이길조(吉鳥)로 여기는 까마귀는 떼를 지어 날아다녔고,그 아래로 일본의 상징 일황이 거주하는 황거가 적막에 갇혀 있었다. 일제하 항일 독립투사들의 의열투쟁은 조선 땅이나 중국·러시아 등망명지는 물론 적지의 중심부인 일본 본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1932년 1월8일.일황 히로히토(裕仁)는 도쿄시내 서북부에 위치한 요요기(代代木)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을 마치고 황궁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일황이 탄 마차가 황궁 입구의 사쿠라다몬에 다다를 무렵 난데없이 폭탄 하나가 날아들었다.폭탄은 일황이 탄 마차 뒷편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다.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마리가거꾸러졌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황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폭탄을 만든 김홍일(金弘壹·전 광복회장,작고)은 회고록에서 “군중과 일황의 거리가 100m 정도가 될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지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가볍게 만들다보니 상대적으로 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거사의 주인공인 이봉창(李奉昌·1900∼1932)의사는 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9월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10일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백범 김구 선생이 이끈 한인애국단 소속인 이의사는 의거에 앞서 “물품(폭탄)을 1월8일 방매하겠다(터뜨리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백범에게 보내 거사일을 미리 알렸다.당일 이의사는 일황이 관병식을 마치고 경시청을 지나 사쿠라다몬을 통과하여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본인으로 가장해 기다리다가 거사를 성공시킨 것이다. 의거후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식민지 백성인 조선인이 도쿄 중심부,그것도 일본 치안의 총지휘부인 경시청 앞에서 일황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충격적인 일이었다.일본은 이 사건을 ‘사쿠라다몬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최서면(崔書勉)국제한국연구원장은 “엄격히 말해서는 ‘경시청앞 사건’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나 ‘사쿠라다몬사건’역시일황과 관련된 표현이므로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이의사의 의거현장인 경시청 정문 오른쪽에는 ‘경시청 창립 100주년 기념식수’라는 자그마한 기념표석이 서 있으나 이의사의 의거를 알리는기념물은 어디에도 없었다.일본 경찰로서야 ‘수치스런 기억’이겠지만 이는 또 하나의 역사은폐가 아닐까. 경시청 앞에서 사거리를 지나 황거를 에워싼 해자(垓子,궁성 주위에방어용으로 파놓은 연못)를 건너 사쿠라다몬으로 들어서면 황거의 분위기가 완연히 느껴진다.도쿄 시내 한가운데 위치하면서도 마치 외떤 섬과 같은 분위기가 든다.문 안으로 들어서면 거목과 잘 포장된 길이 황거로 안내한다.포도((鋪道)가 끝나는 지점에 작은 자갈이 깔린길이 나타나는데 넘실거리는 해자의 물결과 함께 황거가 모습을 드러낸다. 도쿄 시내 치요다(千代田)구에 위치한 이 궁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손자인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시대에 만든 것으로 해자가 이중으로 조성돼 있다.황거의 면적은 총30만평 규모로,제122대왕인 메이지(明治)가 황거를 교토(京都)에서 옮겨온 뒤 도쿄성으로불린다.자갈밭 중간지점 쯤에는 이중으로 된 돌다리가 나타나는데 흔히 이를 니주바시(二重橋)라고 부른다.바로 황거를 연결하는 다리로,길이는 약 29m,폭은 약 7m정도다. 지방에서 도쿄 관광을 온듯한 일본인들이 니주바시를 배경으로 무리를 지어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기념사진 촬영용으로 만든 계단식 간이의자가 있었고 전담 사진사도 두 명이나 됐다.이곳에서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다나카 아키코(田中明希子·22·국제관광사진주식회사 소속)씨는 “관광객이 니주바시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즐겨찍는다”고 말했다.사진값은 2장 1세트로 2,100엔(송료 별도)이라고했다. 니주바시 입구에는 3명이 경비를 서는데 근처까지 관광객의 접근이가능했다.회청색이 감도는 황거 건물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사진 몇장을 찍고는 다시 기념사진 찍는 곳으로 내려와,잠시짬을 내 쉬고 있는 다나카씨를 찾아갔다. 기자는 일제강점기때 이곳에서 발생한 ‘조선인 폭탄투척’사건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봉창의사의 사쿠라다몬사건은 물론 김지섭(金祉燮·1884∼1928)의사의 니주바시폭탄투척 사건도 전연 몰랐다.학교에서 그런 내용을 배우지 않았다고 했다.더러 한국인 관광객이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곤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고 했다. 1924년 1월5일 오후7시쯤 한 조선인이 니주바시에 던진 폭탄사건으로 일본은 소용돌이에 빠졌다.신(神)으로 받드는 일황의 궁성에 조선인이 폭탄을 들고 뛰어들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내무차관견책에 이어 경시총감·경무부장·국성 경비책임 경찰서장 등 치안책임자가 줄줄이 파면되었다. 의열단 소속 김의사는 1924년초 도쿄에서 일본총리를 비롯해 조선총독 등이 참석하는 제국의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폭살할목적으로 23년말 상하이 포동(浦東)부두에서 일본으로 향했다.그러나 제국의회가 갑자기 연기됐다는 소식을 접한 김의사는 계획을 변경,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황 궁성을 폭파키로 결정하였다.그러나 접근이 불가능하자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궁성 입구인 니주바시에폭탄을 던진 것이다. 아깝게도 김의사가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다.타고온 배가 습기 많은화물선이어서 도쿄로 오는 동안 폭탄이 모두 젖어버린 탓이었다.김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돼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중 고문 후유증으로1928년 2월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순국했다. 76년전 김의사가 목숨을 내놓고 폭탄을 던진 니주바시 아래로 백조들이 무리를 지어 쌀쌀한 초겨울 날씨를 한가로이 즐기고 있었다. 도쿄 글 정운현기자 jwh59@. *연재를 마치며. 구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을 되살려 민족정론지로 거듭 태어난 ‘대한매일’이 금년 7월초부터 매주 수요일(일부화요일)자에 장기기획물로 연재한 ‘해외항일전적지를 찾아서’는 일제강점기하 선열들의 항일투쟁 현장을 관련자료와 현지 전문가들의도움을 받아,현장답사를 통해 생생히 복원한 점에서 평가할만 하다. 금년초 대한매일은 김삼웅 주필과 편집국 특집기획팀 소속 취재기자와 사진기자,외부전문가 등으로 특별취재반을 편성해 해외에 산재한항일유적지 실태를 파악한 뒤 구체적인 지역선정과 일정확정에 들어갔다.논의 끝에 최종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 4개국을 답사대상지로 선정했다. 무장투쟁 본거지인 중국의 동북3성을 첫 답사지로 결정했다.중국은지역이 광범위한데다 항일운동 주무대였다는 점에서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벌인 동북3성과,임시정부·광복군의 활동무대인 관내지역을 2차로 나눠 답사했다.이어 미국 러시아 일본의 항일유적지 현장답사와취재 순으로 이어졌다. 이번 기획연재는 ‘청산리전투’등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전과로 기록된 독립투쟁의 현장을 기자가 직접 답사하여 딱딱한 논문 형태가아닌,재미있고 현장감있는 신문기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그러면서도 관련자료와 현지 역사학자·주민 증언을 토대로 해 학술적 가치도 결코 적지 않다고 인정받았다. 특히 답사과정에서 보존가치가 크나 방치된 유적을 현장사진과 함께실감있게 보도함으로써 관계당국이 적극적으로 발굴·보존하는 방안을 마련토록 자극을 주었다.또 독자들에게는 선열의 위업을 현창하고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자부한다. 아울러 취재반은답사과정에서 북한 김일성주석이 소년시절 다닌,중국 길림시 소재 육문(毓文)중학을 남한 최초로 취재하였으며 박정희 전대통령의 만주군관학교 졸업 당시 사진을 발굴하는 등 과외의 성과도 거두었다.취재반은 이번 답사를 통해 취재·보도한 내용을 보완,내년초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간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 정치 뉴스라인

    ■항일 광복군의 직계 후손인 한나라당 김원웅(金元雄·대전 대덕·재선)의원 후원회가 6일 저녁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렸다. 후원회에는 ‘다시 모인 광복군’이란 표어에 걸맞게 김구 선생의손자 김진씨,김좌진 장군의 손녀 김을동씨,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춘생씨,윤봉길 의사의 조카 윤용씨,이봉창 의사의 조카 이세현씨,박은식 임시정부 주석의 손자 박유철씨,신철휴 의열단장의 아들 신홍우씨,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차이석·백정기·이강연 선생의 아들 또는 손자 등 150여명의 생존 독립유공자 및 유족이 참석했다.윤경빈광복회장,박유철 독립기념관장,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민족단체 대표와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등 시민단체 관계자도 자리를 함께 했다. ■민주당 홍보위원회(위원장 金榮煥 의원)는 7일부터 23일까지 여의도 당사 1층 홍보전시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는 사진전을 연다. ‘하의도에서 노벨평화상까지’라는 주제의 사진전에는 소년시절부터 정치 입문,민주화 투쟁,15대 대통령 당선,노벨평화상 수상에 이르는 김 대통령의 정치역정이 담긴 사진 100여점이 전시된다.
  • ‘일본판 쉰들러’ 후세 변호사 재조명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고,전후에는 재일조선인들의 차별대우 철폐에 앞장선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 변호사를 재조명하는 국제학술회의가 13일 국회 의원회관 소강당에서열렸다.학술대회에서는 한일 양국 학자 등 7명이 후세 변호사의 한국인 독립운동 후원 등에 관한 주제논문을 발표했다.후세 변호사의 직손인 오오이시(大石 進) 일본평론사 사장도 행사에 참석했다. 일본 미야기현 태생으로 메이지법률학교 졸업후 검사 대리를 거쳐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후세 변호사는 일생을 피압박민족·피차별자등 소수 약자를 위해 바쳤다.그는 일본군국주의에 맞서 사법개혁·평화운동 등 민주주의운동을 벌이다 변호사 자격박탈 3회,두 차례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1919년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이 주도한 ‘2·8독립선언’을 비롯해 ‘박열(朴烈)의사사건’,‘의열단사건’ 등에 관련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였으며,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문제를 일본정부에 항의,고발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그는 일제의한국인 토지몰수에 맞서 실태조사,고발에 앞장섰으며,‘형평사(衡平社)운동’등 신분차별 폐지운동을 지원하기도했다. 그의 한국·한국인 사랑은 일제 패망후에도 계속됐다.1946년 그는피압박민족의 신헌법을 구상,‘조선건국헌법초안사고(私稿)’를 발표하였으며,한국전쟁중인 1953년 3월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 주최 행사에서 남북통일의 열망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그는 재일조선인들의 차별철폐운동에 일생을 투쟁하였다. 한편 후세선생기념사업회는 이번 학술대회를 시작으로 후세 변호사의 어록비 건립,한일합작 영화제작,그리고 정부의 훈장추서를 추진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4)항일운동 총본거지 上海·嘉興

    필자가 상해를 찾기는 이번이 네번째이다.홍교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를 향해 달리는 동안 눈길을 끈 것은 30∼40층짜리 신축빌딩들이었다.거의 수직으로 치솟고 있는 중국경제를 상징하는듯 했다.이도시에 숱하게 많은 우리의 항일유적들이 또 몇개 사라졌겠구나 생각하며 곧장 옛 프랑스 조계(租界)인 회해중로(淮海中路)를 향해 달렸다.우리의 항일운동 유적들이 그 거리와 근방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상해는 국제교통의 요충지이며 각 국의 조계가 설정돼 국제정세 파악이 쉬워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우리 항일투사들은 최우선의 활동근거지로 삼았다.취재팀은 마당로(馬當路) 보경리(寶慶里)의 임정청사부터 찾아갔다.전체면적 16평.공간은 비좁지만 당시 집무실이 복원되어 있다.주중(駐中) 한국대사관 인터넷 홈페이지 ‘중국내 독립운동사적 안내’를 보면 98년 한해동안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은무려 8만여명이라고 한다.대부분 이곳이 첫 임정청사라고 생각하고독립운동의 성지(聖地)처럼 여기는 듯하다.그러나 이곳은 임정이 여덟번째로 자리잡아,1926년부터 1932년까지 머문 장소이다. 임정청사에서 5분쯤 걸어 옛 흥륭다원(興隆茶園)을 찾아갔다.윤봉길 의사가 김구 주석과 의거를 밀의한 장소였다.건물은 그대로인 듯하고 ‘상청(常靑)식품’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헐리지 않고 70년이지나도록 남아 있는 게 고마워 취재팀은 그 집에서 생수를 사 마셨다. 차를 타고 윤봉길 의사의 열혈이 서린 홍구공원(현재의 노신공원)을 항해 달렸다.임정은 1919년 4월 13일 조직된 이후 모든 항일세력을결집하지 못했다.김구 주석은 임정의 침체를 극복하고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암살과 폭파 전문의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이 조직의 첫 성공이 이봉창 의사의 동경 사쿠라다몬(瓔田門) 의거였다.일왕의 마차에 폭탄이 미치지 못해 근위병들만 죽고 말았지만 적에게준 충격은 컸다. 다음 의거의 주인공이 윤봉길 의사였다.고향의 아내에게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유언을 남기고 상해로 망명한 윤의사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일제가 전승기념행사겸 일왕의 생일축하 행사를 벌인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구 주석의 명을 받고 의거를 결심하였다.1932년 4월 29일 11시40분,행사장의 전원 묵도시간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져 상해 점령 일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 등 침략의 원흉들을 폭살했다. 1개 군단이 한달동안 저항하고도 상해를 일본군에 빼앗겨 치욕감에빠져있던 중국인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중국군 총사령관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대병도 불가능한 거사를 한국 용사가 단행하였다”고 극찬했다.중국인들은 때로 일제의 눈치를 보며 비협조적이었고 만보산사건 이후 한인들에게 악감정을 가졌으나 이 때부터 한인 애국지사들을 동지의 정으로 포용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임정은 침체국면을벗어나 강력한 투쟁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교통체증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한 뒤에 노신공원에 도착했다.윤 의사의 의거현장에는 중국 근대사상가인 노신의 동상이 드넓은 잔디광장을 바라보며 앉아있다.기록을 보면 동상자리가 단상,그리고 그 앞잔디밭이 시작되는 곳이 윤 의사가 물병폭탄을 던진 곳이다.의거현장에서 가까운 언덕에는 윤 의사의 충혼을 기려 1994년에 세운 ‘매정(梅亭)’이 의젓하게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그곳에서 묵념하고 있는 한국관광객들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경남 창원에서 온 교사들이었다.진영고교 성정수 교사(40)는 “자랑스런 항일전쟁의 역사가 잊혀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며화단에 핀 상사화(想思花)를 바라보았다.윤의사의 단심(丹心)을 상징하는 걸까.석양을 받아 상사화는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윤의사의거 이후 악에 바친 일제는 광란하듯 임정인사들을 쫓기 시작했다. 김구 선생은 60만원의 현상금이 붙은채 아슬아슬하게 피신했고,임정은 이후 여러 곳을 이동해야 했다. 취재팀은 상해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김구 선생의 피신처였던 가흥으로 향했다.중국이 독일 폭스바겐사(社)와 합작생산한 산타나 승용차는 항주로 가는 고속도로를 질풍처럼 내달렸다.장강(長江)으로 통하는 운하의 수로가 띠를 두르듯 뻗어있고 이따금 물소들이보이는 비옥한 평야가 스쳐 지나갔다.가흥이 호수를 낀 조용한 농촌일 것이라고 짐작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6차선이 넘는 큰길이 뻗어가고 깨끗한 신축건물이 임립하고 있었다. 김 주석은 전 강소성장(江蘇省長) 저보성의 목숨을 건 비호 아래 그의 양아들 진동생(陳桐生)이 반 양식으로 지은 호반별장에 은신했다. 낮에는 뒷문으로 나가 여자 뱃사공 주애보(周愛寶)가 젓는 거룻배를타고 남호(南湖)로 나가 거미줄같은 운하망을 타고 오르내리며 피해다녔고 밤이면 별장에 빨래가 널린 안전신호를 보고 들어가 잠을 잤다.배를 타고 남경까지 간 적도 있었다.김 주석이 은신했던 매만가(梅灣街) 76호 별장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남호를 동남쪽에 등지고 앉았는데 호수 쪽으로 큰 들창이 나있고 뒷문이 만들어져 있다. 차를 돌려 남호 선착장 유원지로 가보았다.1935년 10월,15명의 임정 지도자들이 유람선을 타고 비밀의정원 회의를 열었던 남호는 그리깨끗하지는 않았지만 풍광은 아름다웠다.바람에 밀려오는 물비린내를 맡으며 캔맥주를 사 마시는데 ‘중국혁명의 요람’이라 쓴 안내판이 보였다.1921년 모택동이상해에서 공산당 창당대회를 열려다가 정보가 새 나가자 이곳 남호에서 유람선을 빌어 대회를 마쳤다는 기록이다. 상해로 돌아온 취재팀은 황포탄(黃浦灘) 의거현장을 찾아갔다.황포탄은 수천리를 흘러온 양자강이 황해로 빠져나가는 하류로 바다나 다름이 없다.1922년 3월,의열단원들은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저격하였다.필리핀에서 오는 기선에서 내리는 순간을 노렸다.명사수인 오성륜(吳成崙)이 권총을 발사했으나 그 자가 갑자기몸을 숙이는 바람에 뒤따라 내리던 영국인 여자가 맞았다.이어 김익상(金益相)이 또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고 이종암(李鐘岩)도 폭탄을던졌지만 다나카는 마차를 타고 피신했다.이종암은 현장탈출에 성공했으나 김익상과 오성륜은 체포당했다.김익상은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의 주인공.의거에 성공하고 수십 개의 포위망을 뚫어 중국으로 탈출해온지 반 년만에 다시 나섰으나 이번엔 탈출하지 못하고 붙잡혀 20년을 복역했다. 의열단원들이 수천 명의 일본군과 인파들 속을 달리며 용맹을 떨친의거현장은 지금의외탄(外灘)공원의 북단이다.상해에서 황포탄 풍광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중국이 자랑하는 포동(浦洞)개발지구가 건너다보인다.거기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육삼정(六三亭) 의거현장으로 갔다.무정부주의 계열의 비밀결사 남화(南華) 한인청년연맹의 백정기·이강훈·원심창·이규창 등은 여기서 아리요시(有吉) 주중 일본공사를 폭살하려다가 사전 누설되어 모두 옥에 갇혔다.당시 유명했던 육삼정은 헐리고 그 자리에 방향(芳香)·영안(永安)·부옹(富翁)등주점들이 들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상해 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3)의열단 자취 남은 南京·廣州

    광복군 제3지대가 있던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침대열차를 타고 밤새 달려 강소성 성도 남경에 내렸다.중경·무한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찜통’이라 부른다더니 아침부터 사우나실처럼 후꾼후꾼했다.양자강이 가까워 고온다습하기 때문이었다.남경은 수운의 이점이 있어 예로부터 강남의 중심 구실을 했고 삼국시대에 손권이 오나라를 세운이래 10개의 왕조가 왕도로 삼은 곳이다.근대에 와서도 태평천국의봉기군이 청나라 정규군과 서구열강에 대항해 싸울 때 거점으로 삼았으며 신해혁명 이후 손문도 중화민국의 임시수도로 삼았다.중일전쟁때도 임시수도였으며 일본군에 의해 양민 30만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 시절,우리 선열들의 항일운동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취재팀이 먼저 찾은 곳은 남경대학.그곳에 항일전쟁사의 걸출한 인물 여운형(呂運亨)과 김원봉(金元鳳)이 다닌 금릉(金陵)대학 캠퍼스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조국에서 3·1운동이 실패하자 무력항쟁 밖에 없다고 생각한 김원봉은 금릉대학을 중퇴하고 서간도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다.그러나 그곳의 교육은 중국 명문대학을 다닌 그를충족시키지 못했다.그는 길림으로 가서 저 유명한 암살 폭파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만들고 수많은 테러공작을 감행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21세였다. 30대 장년이 되자 김원봉은 의열단의 테러공작을 지양하고 군대조직을 계획했다.뒷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였다.그는 스스로 광동성 광주(廣州)로 가서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만들었다.이 학교출신으로 유명한 이는 뒷날 태항산에서 전사한 윤세주와 진광화,그리고 민족시인 이육사이다.김원봉의그런 활동은 거의 남경에서 이루어졌다.황포군관학교 동기생으로 중국의 첩보기관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의 대표였던 등걸(騰傑)이 그를 도왔다. 남경대학은 우리 대학들과 달리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이 넓고 녹지가 많아 여유로워 보였다.플라타너스·팽나무가 지천이었다.시 인민정부가 발행한 백서를 보면 가로수가 40만 그루라던가.금릉대학 캠퍼스는 예스러운 품격을 지닌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푹신한 네모꼴의 잔디밭을 두고 3동의 건물이 둘러앉아 있었다.그 앞쪽에 뚝 떨어져서 대례당(大禮堂)이란 간판이 붙은 회당 건물이 있었다.민족혁명당을 창당한 곳이 이 대학의 강당이라 했으니 이것이 틀림없을 듯싶은데 전면이 일부 개축되어 있다. 남경대학을 나온 취재팀은 얼음이 섞인 생수병을 들이키며 의열단원들이 묵었던 명양가(鳴羊街)와 화로강(花露崗)을 찾아나섰다.한상도교수의 논문 ‘재중한인군관학교연구’를 보면 조선혁명간부학교는 1932년 10월20일 남경교외 탕산(湯山)의 선사묘(善祠廟)라는 사원에서 개교했고,교관들은 남경성내 명양가 호가화원(胡家花園)에서 묵었다.골목을 더듬어 찾아가보니 명양가와 화로강은 이어진 골목이었다.김원봉에게 호의적이었던 부호 호대해(胡大海)는 자신의 장원 호가화원에 김원봉을 식객으로 묵게 했고,김원봉은 자신의 의열단 동지들을위해 근처 화로강에 머물게 하면서 혁명간부학교 교관들의 숙소도 마련했을 것이다. 어림짐작으로도 어마어마하게 컸을 듯한 호가화원은 퇴락된 채 빈민들이 살고 있었다.그 옛날 주인이 손님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음직한연못가의 팽나무 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문득 ‘지절시인’ 이육사가 떠올랐다.그는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생 명단 26명 가운데 육사(陸史)라는 가명으로 실려있다.그가 이 연못에서 올곧은 의지로 시를 썼을 것 같은 생각에 이곳저곳 두리번거렸다.연못가에서는 얼굴에 여유로움이 가득한 노인이 낚시질을 하고,해오라기 한 마리가 긴 부리로우렁이를 찍어올리고 있었다. 남경에는 백범 김구가 만든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도 와 있었다.‘김구구락부’로 더 알려진 테러공격 비밀결사였는데 목장영 고안리(木匠營 高安里)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호가화원의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 노인이 목장영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일러주기에 찾아갔으나 새 아파트단지 입구에 붙은 ‘목장영’이라는 간판을 본 것만으로만족해야 했다. 취재팀은 저녁 비행기로 광동성 광주로 날아갔다.우리 항일투쟁사에 큰 몫을 한 도시이기 때문이었다.광주 백운(白雲)공항에서택시를타고 달리는 동안 필자는 중국의 도시라기보다는 유럽에 온 느낌이었다.네온사인이 현란하고 거리를 질주하는 깨끗한 중형차들이 질서있게 차선을 지키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세련되어 보였다.건물의 외형까지도 첨단화된 미를 뽐내고 있었다.하기야 북경,상해에 이어 중국 3대도시이며 1인 평균 생산액이 전국 1위인데다 백년전부터 중국내륙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지였고 홍콩과 가깝다보니 그럴 것이었다. 광주는 중국의 역사에서 혁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손문이 혁명을일으켜 ‘호법(護法)정부’를 세웠고 공산주의자들은 광주봉기를 일으켰다.광주봉기를 배경으로 쓰여진 앙드레 말로의 소설이 ‘정복자’이다.우리의 항일투사들도 이곳에 와서 크고 작은 자취를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황포군관학교(본래의 이름은 육군군관학교)이다.수많은 우리 항일투사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황포군관학교는 1924년 1월 손문이 국민당과 공산당을 합작한 결과탄생했다.국민당측의 장개석이 교장을,공산당 측의 주은래가 정치주임을 맡았는데 그로 인해 학생들도 양분되었고 그곳에 재학중이던 한인청년들도 뒷날 임시정부와 광복군,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으로갈라서는 결과가 되었다.그들의 입학은 1924년의 3기생들로 부터 시작되는데 유명한 이는 박효삼(朴孝三)·왕자량(王子良)·김원봉 등이다.그밖에 남경과 무한에 있던 분교를 졸업한 이도 많다. 황포군관학교에는 우리 교관요원들도 있었다.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가 러시아 유학을 하고 돌아온 양림(楊林.본명 金勳),1922년 의열단원으로 상해 황포탄 의거를 일으켰던 오성륜(吳聲輪),뒷날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간부로 활동한 최용건(崔庸健),의열단원이었다가 조선의용대 간부로 활동한 박효삼,이빈(李彬),양달부(梁達夫),김원봉,채원개(蔡元凱)등이다.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金山. 본명은 張志樂)도 교관이었다고 하나 연구가들의 실증은 없다. 취재팀은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군관학교를 찾아갔다.광주시를 관통해 흐르는 주강(珠江)의 제방을 따라 보리수가 싱그럽게 가지를 뻗치고 있었다.대절한 자동차를 페리에 싣고 20분쯤 걸려 도시의 동남쪽에 있는 장주도(長州島)로 건너갔다.섬 거의 전체가 해군부대 주둔지였는데 황포군관학교는 옛날의 모습 그대로 보존,복원되어 있었다.우리나라의 중고생들이 극기훈련,야영훈련을 가듯 남녀 학생들이 입영훈련을 받고 있다.김원봉이 생도시절 중국인 생도 등걸과 우정을 쌓으며 토론을 한 곳은 어디일까.필자는 그런 상상을 하며 강의실,생도 숙사,강당,연병장 등을 돌아보았다.발길을 돌려 중산대학을 찾아갔다. 아나키스트였던 김성숙(金星淑)과 김산이 졸업한 중산대학은 필자가 돌아본 십여개의 전통있는 중국의 대학들 가운데 건축미가 가장 돋보였다.새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옛날 것들인데 깨끗하게 보존되어고상하면서도 웅장한 품격을 뽐내고 있었다. □광주(중국 광동성)■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1)西安-延安

    *광복군-조선 의용군 마지막 활동지 西安-延安. 서안은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1천여년 동안 중국 역사에서 서주(西周) 서한(西漢) 당(唐)등 12개 나라의 왕도로 영광을 누렸던 도시다.따라서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적이 많다.우리의 항일유적지도 상당히 많다.조선청년전지공작대 주둔지,한청반 훈련장,광복군 전선사령부,그리고 미국 OSS(전략첩보국)과 합작해 국내진공을 준비했던 광복군의 흔적도 있다. 취재팀이 아시아나항공 직항편을 이용해 바로 서울에서 서안으로 날아간 것은 서안 교외에 있는 광복군 OSS훈련장을 먼저 찾아보기 위해서 였다.공항에서 차를 대절해 서안시 남쪽 25㎞ 지점에 위치한 광복군 제2지대 기지와 OSS 훈련장이 있던 두곡진(杜曲鎭)으로 향하는 길은 끝이 없어 보이는 짙푸른 옥수수밭이 이어진다.산이라곤 거의없는 황토고원지대인 이 지역의 주 생산물이다.안내인은 몇년전 한국에서 상영된 중국영화 ‘붉은 수수밭’도 이 지역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그동안 기자는 실크로드 답사를 위해 몇차례 서안을 지나간 적이 있다.그때마다 서안의 변화모습에 놀랐는데 이번에는 정말 몰라볼만큼달라져 있었다.새로 뚫린 서안시내 우회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창옆으로 무궁화꽃이 활짝 피어있다.이따금 거대한 왕릉이 보였다.서안 외곽의 작은 시가지를 스쳐가고,참외·수박을 파는 저자거리를 지나고다시 평원이 나타난다.그렇게 한 시간여를 달리자 멀리 제법 높아 보이는 산이 나타났다.광복군 대원들이 OSS훈련을 받은 종남산(宗南山)이었다. 1945년 3월 15일 한국 광복군과 미군은 한미 군사합작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공동작전을 전개한다는 것.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필요한 전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해 연합군작전에 필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한다는 것 등이었다.그리하여 서안 근교에 주둔한,‘청산리 전투’의 영웅 이범석이 이끄는 제2지대가,안휘성 부양(阜陽)에서는 조선혁명군 참모장 출신 김학규가 이끄는 제3지대가 낙하산 강하 폭파,암호 무전통신 등 특수전훈련을 받았다.그리고 8월 11일을 국내진공일로잡고 작전계획을 세웠다.그러나 8월 9일,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은 연합국측에 무조건 항복을 통고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 잠입작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취재진은 당시 제2지대 본부 겸 훈련소가 있던 곳을 찾았다.그곳은지금은 두곡 양참(糧站)이라 불리는 곳으로 서안시 양식국의 창고로변해 있었다.당시의 자취는 없고 창고건물에 둘러싸인 1,000여평의마당이 옛 모습을 암시할 뿐이었다.사무실로 들어가서 책임자인 진강정(陳康正) 참장(43세)을 만났다. “한국손님들이 더러 찾아옵니다.지난해에는 원로 몇 분을 모시고온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구보도 했지요” 문화혁명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노예묘’라는 상당히 큰 규모의도교사원이 있었는데 문화혁명때 완전히 없어지고 양참이 들어섰다고 한다.그는 측백나무 소나무 등 나무들이 우거져 거주지로 삼았던 것같다며 멀리 건너다보이는 종남산 아래에도 절이 있었다고 말한다.광복군 OSS 훈련대원들은 이곳에 본부를 두고 종남산 아래 종남사라는불교 사찰에서 훈련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두곡 양참을 둘러본 취재팀은 그곳에서 2㎞ 떨어진 인근의 흥교사(興敎寺)를 찾아갔다.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떠났던 고승 현장법사(玄裝法師)의 사리를 모신곳인데 신라유학승 원측(圓側)탑이 현장법사의 탑 옆에 천년의 세월은 안은 채 서있다. 그곳에서 차를 돌려 시내로 들어가는데 진 참장이 두곡에 있던 옛날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들려준 가슴아픈 얘기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예전에 한 한국인이 아이를 데리고 와 훈련받다가 그곳을 떠날 때 남겨두고 갔는데 아이는 그후에도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는 것이다.광복군 아버지가 남겨둔 그 어린 아이는 그 후 어찌 됐을까.지금 살았으면 아마 50살도 넘었을 텐데….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 취재진은 서안 시내로 들어갔다.전지공작대와 광복군 전선사령부가 있었던 자리를 찾기 위해서 였다. 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 중경에서 나월한·김동수·김인 등 청년투사들이 조직한 아나키스트성격이 강한 단체였다.그들은 일본군 점령지 교란작전을 위해 전선에서 가까운 서안으로 이동,중국군 전시간부훈련단 안에 한국청년특별반(약칭 한청반)을 만들었다.수료생들은소위로 임관되고 뒷날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에서 큰 역할을 했다. 서안 성내 이부가(二府街)29호,전지공작대가 주둔했던 자리는 중급인민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같은 골목의 4호,옛 광복군 전선사령부가 있던 장소는 유명한 당대(唐代)의 유물인 종루(鐘樓)로 향하는 길을 넓히면서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전지공작대원들이 장교교육을 받은 ‘한청반’ 자리는 지금의 서북대학 안에 있었다.백양나무 그늘이 시원한 현장을 찾으니 연병장은 잔디가 깔려 있고 일부는 도서관 건물이 들어서 있고 당시의 사열대는 국기게양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서안시내의 유적을 찾아본 뒤 취재팀은 한밤중에 침대열차를 타고중국 공산당 혁명성지인 연안으로 떠났다.연안은 서안 정북 방향,깊숙한 분지에 있다.중국 공산당의 장정(長征)과 관련깊은 곳이다.1934년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홍군 30만명은 국민당의 공격을 피해 화남(華南)의 비옥한 근거지를 버리고 행군을 거듭,최후의 근거지인 연안에 도착했다.남은 병력은 3만.그러나 모택동은 이를 기반으로 국민당 군대에 저항하고 항일전을 전개하면서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1930년대 후반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은 발전적으로 해체,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우리동포들이 많이 이주한 화북에 진출해서 투쟁한 대원들을 화북지대라 불렀다.그들은 김원봉이 이끄는 대본부가 광복군으로 통합되자 화북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 공산군인 팔로군의 지원을 받으며 인근의 태항산에서 싸우다가 연안으로 들어가서 해방을 맞았다.독립동맹의 대표는 유명한 국학자인김두봉,조선의용군 사령관은 김무정이었다. 침대열차는 에어컨이 잘 들어왔고 시설도 좋은 편이었다.이따금 터널을 달리는 듯 소리가 커져 잠을 깨곤 했는데 둔중한 느낌을 주며용을 쓰듯 달리는 것으로 보아 끊임없이 경사진 고원을 오르는 듯 했다.차창으로 새벽빛이 스며들어 창문을 여니 보이는 것이라곤 황토뿐이었다.벼랑에 뚫린 구멍이 있어 눈여겨 보니 그게 유명한 토굴집인 요동(寮洞)이었다.연안역 앞에서 만두로 아침을 때운우리는 조선의용대와 독립동맹이 있던 라가평(羅家坪)마을을 찾아갔다. 라가평 마을은 연하(延河) 위에 놓인 다리 건너에 있었다.마을어구비탈에 기념표시판이 있어 다가가 보니 조선혁명군정학교 자리 표지석이었다.먼지가 일어나는 비탈길을 올라 노인을 찾아 물었다.83세의 고영유(高零有)노인은 벼랑에서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켰다.모두 8개의 요동이 보였다.그곳에는 8개의 요동을 포함 모두 20여개의 요동이 있었는데 군정학교와 독립동맹,조선의용군사령부가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요동은 아무 보존조치를 취하지 않아 무너질듯 위태해 보였다. 다시 연하를 건너 동북쪽으로 달려가면 교얼구로 갔다.길가 버스정거장 장려한 천주교회당이 보였다.그것이 유명한 노신기념관으로 옛날에 노신예술학원으로 사용한 건물이었다.최근 다시 예술학원이 개교해 교사로 사용되고 있는데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가 김산(金山)을 처음 만난 도서관은 여학생들의 기숙사가 돼 있었다. 취재팀은 밤 기차를 탈 때까지 시간이 넉넉해 연안 서북쪽에 위치한 중국공산당의 여러 근거지중 모택동이 교시한 ‘문예강화(文藝講話)’ 현장이 그대로 보존돼있는 양가령(楊家嶺)을 돌아봤다.이밖에 연안시내 중심가에는 항일군정대학의 옛터가 보존돼있는데 이곳은 김산이 일본의 첩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숙청될 때까지 ‘일본경제사’를 강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안(중국) 박찬기자 parkchan@
  • 단재 신채호선생의 항일 일대기

    구한말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이자 언론학자,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꽃뫼연’이 오는 12∼17일 서울 종로연강홀에서 공연된다. 1905년 26세의 나이에 성균관박사가 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던 단재는 일찍이 관직의 길을 버리고,‘황성신문’기자,‘대한매일신보’주필로 나서 당당한 시론으로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했으며,신민회·임시정부·의열단 등 민족과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않고 뛰어들었다. 연극은 1928년 5월 단재가 대만에서 외국위체 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연루자로 체포된 뒤 1930년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기까지의 과정과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회상장면을 교차해서 보여준다.작가 이해제는 “스스로에게 지지않으려했던 위인으로서의 면모를부각시키고자 했다”고 말했다. 손현석이 연출하고 신국,강승원,양형호 등이 출연한다.(02)708-5001이순녀기자 coral@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6) 孫貞道목사 활동지 吉林

    중국 길림성의 성도(省都) 장춘(長春)에서 ‘장길(長吉)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45분쯤 달리면 길림(吉林)에 도착한다.길림은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도시 가운데 하나로 만주국 시절일본인들은 길림을 일본의 고도 경도(京都)에 빗대 ‘소경도(小京都)’라고 불렀다.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길림 도심을 ‘S자’로 휘감아 도는 송화강(松花江)은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는다.이는 근처에풍만(豊滿)발전소가 있기 때문이다.겨울철 송화강에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찬공기와 어우러져 강 주변의 나무에 은백색의 얼음꽃을 피우는데 이는 길림의 대표적인 겨울 풍물로 꼽힌다. 길림은 일제강점기 우리 항일투사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곳이기도 하다.특히 정의부 계통의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고참의부나 신민부의 거두들도 이곳에서 활약했다.독립운동가들이 길림에 운집하게 된 데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당시 길림은 북만주 일대에서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곳이었다.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국땅을 떠나 만주행에 오른 동포들은 대개 길림선을 통해 만주오지로 들어갔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길림에 주저앉았다. 또 하나는 길림이 심양,장춘,연길 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면서도 남만주철도와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외부의 영향이 덜미치는,소위 ‘소왕국’과 같은 곳이었다.길림이 한 때‘비적(匪賊)의 소굴’로 불린 것은 이 때문이다.게다가 이 지역의 중국 군벌들은일제에 항거하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에게 호의를 갖고 있어서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천혜의 요지’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1924년 11월 만주 길림성 유하현(柳河縣)에서 조직된 정의부의 간부 가운데 상당수는 이곳 길림에서 활동하였다.집행위원회 위원장 현익철(일명 현묵관)을 비롯해 지방부 위원장 김리대,군사부 위원장 이웅,그리고 별동대 대장 이동훈,경무과장 김구(金球)등이 모두 길림에서활동하였다. 길림은 또 1919년 11월 창립된 의열단(단장 金元鳳)의 창립지이자고려혁명당 역시 1926년 4월 이곳 길림에서 창립됐다.의열단의 창립지인 길림성 파호문(把虎門)밖 중국인 농부 반(潘)씨집은 이미 헐린상태며,고려혁명당 창립지인 길림성성(城) 영남반점은 현재 길림시북경로 179번지 길림시건축설계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김이삼(金利三) 기자가 피살된 동아여관은 현재 정춘집단공사 길림시 분공사(分公司,길림시 회덕가 90호 소재)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길림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해석 손정도(孫貞道·1872∼1931) 목사를 들 수 있다.평남 강서출신인손 목사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0년 선교사로 만주에파견된 이후 1931년 길림에서 병사할 때까지 일생을 오점없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자다.1912년 선교활동을 벌이던 하얼빈에서 일제가조작한 ‘가쓰라(桂太郞)공작 암살모의사건’에 연루돼 전남 강진에서 ‘거주제한 1년’의 유배형을 산 손 목사는 1919년 3·1의거에 참여하였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그 해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자 이동녕 초대 의장에 이어 의장에 선출되었으며,21년에는 임시정부 임시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임시정부가 여러 파벌로 나뉘어 세력다툼이 치열해지자 이듬해 임정을 박차고 나와 북만주 길림으로 향하였다. 길림시내 우마항(牛馬巷) 서광(曙光)골목에 예배당을 건립한 손 목사는교회를 거점으로 선교사업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당시 손목사는 길림지역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그의 예배당·자택은독립운동가들의 비밀 아지트나 마찬가지였다.취재팀이 손 목사의 집터와 예배당을 찾았을 때 이들은 모두 헐린 뒤였으며, 일대는 아파트단지 공사가 한창이었다.(예배당은 인근에 새로 건립돼 있음)현재의주소로는 길림시 선영구(船營區) 청도가(靑島街) 춘광호동(春光胡洞)일대로 동네이름마저 서광호동에서 춘광호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 주민에 따르면,“2년전 서광호동 골목이 헐리면서 동네이름도바뀌었다”고 했다. 손 목사의 길림 시절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북한의 김일성(본명 김성주) 주석이다.당시 손 목사는 ‘소년김성주’의 후견인이자 그를 항일운동의 길로 안내한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1926년평양의 창덕학교(소학교)를 졸업한 김성주 소년은 민족주의 단체인 정의부가 화전(樺甸)에서 설립한 화성의숙(華成義塾)에 입학했다.당시 숙장(塾長)은 천도교도이자 항일운동가인 최동오(崔東旿)선생이었는데 최 선생은 86년 월북한 최덕신(崔德新) 전외무장관의 부친이다.(금년 8·15 이산가족 상봉때 북측 단장을맡은 류미영씨는 최 전장관의 부인이다.)그러나 그해 6월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의 충격으로 학업을 중단한 그는 이듬해 길림으로 건너와 육문(毓文)중학에 입학했는데 그는 당시 부친의 친구인 손 목사의지도와 후원을 받으며 생활하였다. 특히 공산주의 성향의 독서회를 이끌던 그가 중국 군벌에 체포되자손 목사는 감옥으로 사식과 침구를 제공하는 한편 군벌에게 뇌물을주면서까지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그 덕에 그는 감옥에 들어간지 7개월만인 30년 5월초에 출감했다.김 주석은 생전에 남긴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첫머리의 ‘손정도 목사’편에서 “손 목사의 도움으로 제 때에 감옥에서 석방되지 않았더라면 10년쯤 감옥생활을 더 했을 것”이라며 “손 목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회고했다. 길림시내 송화강변에 위치한 육문중학에는 그가 다닌 옛 육문중학의 구지(舊址)가 신관 뒷편에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길림시는 92년 이곳을 ‘중점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관리하고 있다.350평 규모의 ‘구지’에는 당시의 교사(校舍)·온실 등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마당 한가운데는 92년에 건립한 김 주석의 동상이 서 있다.동상 뒷편에 위치한 교사에는 당시 김 주석이 공부하던 교실이 ‘김일성동지독서기념실’로 꾸며져 있다.‘구지’ 관리자인 왕쑹린(王松林·52)주임은 “김일성 동지는 1927∼30년 이곳에서 공부를 했으며 당시 키가 작았던 탓인지 자리가 제일 앞줄이었다”고 말했다.왕 주임은 취재팀에게 “중국에 파견나온 북한 공직자들이 더러 방문하는 예는 있지만 남한 국적자가 방문하기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한편 손 목사의 후손들은 해방후 김 주석과는 ‘서로 다른 길’을걸었다.장남 원일씨(元一·작고)는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3녀인실씨(仁實·작고)는 YWCA 회장,통일원 고문,한국적십자사 부총재 등을 지냈다.길림시절 김 주석과 형제처럼 지낸 차남 원태씨(元泰·86)는 의대 교수출신으로 현재 미국 네브래스카주오마하에 거주하고 있는데,그는 지난 91년 방북해 김 주석과 60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바 있다. 길림(중국)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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