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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사박물관이 없다니… ”/「문화의 달」을 보내며…

    매년 맞는 문화의 달이고 문화의 날이지만 1990년도는 그 의미가 각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해는 역사상 처음으로 문화부가 신설된 해이기 때문이다. 「문화부는 문화와 예술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라는 다소간 막연한 직무를 제1조로 한 직제가 확정되면서부터 본격화했다. 그러나 문화부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업무가 실상 그리 막연하지도 않다. 생활문화라는 비교적 생소한 분야까지도 맡고 있다. 생활문화라면 그저 의식주 정도로 생각하고 기껏해야 통과의례 정도가 추가될 것으로 보았던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업무보장은 의외로 방대하게 느껴질 것이다. ○적은 예산 속의 큰 열의 생활문화의 영역만을 예로 들어보았으나 다른 분야들 역시 그 나름대로 상당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업무분야 상호간의 조정과 우선순위의 결정은 물론 전반적인 국가발전계획과의 연관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작업 역시 불가피한 즉,문화부가 연초에 발표한 문화발전 10개년계획은 이런 뜻에서 그 존재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직제가확정되고 장기계획과 우선순위가 결정되면 이제 구체적인 업무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국가예산이 뒷받침되는 사업과 그렇지 못한 비예산 사업이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실적을 대충 살펴본다면 신설 문화부는 문화공보부 시절부터의 계속업무나 통상업무도 수행했겠지만 문화부의 존재를 알리는 일에도 상당한 열의를 표해온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겠다. 후자중 대부분은 적은 예산을 써서 또는 예산을 들이지 않은 이른바 아이디어 위주의 이벤트로서 그 성격이 읽혀진다. 직접 간접으로 확인된 바에 따르자면 이와 같은 이벤트들은 일종의 자의반 타의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자의반이라 함은 신설 문화부의 역할을 일반에게 인상지우고자 하는 것이요,타의반이라 함은 적은 예산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밖에 또 무엇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 배경이야 어쨌든 그것은 일종의 붐을 일으키자는 것이요,이로 인한 기대효과는 일반 국민은 물론 예산당국이 문화의 힘을 귀하게 인식하여 다음해부터는 문화부 사업이 본격화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까? 금년 10월에 문화부가 주최하거나 후원하는 행사들중 괄목할 만한 것들이 적지 않고 민간 주도의 행사들도 이에 크게 호응한 듯싶다. 심지어는 북한마저 최초의 남북 음악교류로써 이에 호흡을 같이해주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기업 문화실은 긍정적 이러한 일련의 열기로 이해 국민들의 문화의식이 과연 얼마나 높아졌을까는 측정할 만한 척도가 마땅치 않다. 그러나 주요 기업들이 문화실을 설치하는 등의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보아 일단 긍정적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문제는 이와 같은 열기를 불러일으키려고 했을 때의 기대효과 등 간과할 수 없는 예산당국의 반응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이러한 기대효과는 빗나갔다. 문화부는 당초 91년 예산을 전년 예산의 1백94% 수준인 1천7백억원 규모로 편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경제기획원과의 협의과정에서 대폭 삭감되어 총 세출예산 중 일반회계 세출예산은 1천42억원,전년 대비 19.1% 증가 규모로 조정되었다. 또한 문화예술진흥기금도 91년 소요액 3백억원중 50억원만 재정운용특별회계에 계상되어 3천억원을 목표로 한 기금조성계획 및 사업 추진에 큰 차질이 예상된다. 또한 10개년계획의 틀 안에서 2차 연도를 맞아 문화부가 역점사업으로 기획했던 일들중 인류자연사 박물관부문 예산도 다른 것들과 함께 삭제되었다는 소식이다. 자연사박물관의 의의에 대해서는 지난 9일 개관한 대전국립중앙과학관 주최 심포지엄에 초청되어 내한한 영국 런던의 국립자연사박물관장 닐 차머스 박사의 반응이 역설적으로 웅변해준다. 즉,상당한 경제력을 지닌 한국에 아직 자연사박물관 하나 없다는 것은 다만 놀라은 일이라는 것이다. 자연사박물관이란 동식물ㆍ곤충ㆍ고생물ㆍ광물ㆍ화석 등 자연에 관한 모든 표본과 모형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런던 국립자연사박물관은 1753년부터 종합박물관에 속해 있다가 1882년에 분리되어 6개 분야에 7백47만점의 표본을 축적ㆍ전시할 뿐 아니라 2백50여명의 인력이 고전분류학ㆍ생활사ㆍ분자생물학ㆍ동물행동학 등을 연구하고 있다지 않는가? 이와 같은 기초과학 연구가 다윈과같은 위대한 과학자를 배출한 원동력이라는 설명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런던의 경우 연간 소요예산이 약 1백40억원이라는 데,우리의 경우 용산의 미군기지가 철수하면 그 곳에다 자연사박물관을 세운다는 기왕의 정부 발표의 실현을 다만 손을 엮고 기다릴 도리밖에 없다. ○문화입국 의지 살려야 만일 비예산 사업으로 문화적 의의를 살려보겠다는 포부가 문화부는 예산이 없어도 일만 잘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었다면 문화부는 자승자박이요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 아닌가 반성도 해보아야 하겠지만 이야기는 사뭇 달라질 수도 있다. 범죄에 대한 전쟁선포를 한 이 마당에 문화사업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한다면 이는 실로 제6공화국의 명예를 건 문화입국의 의지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흙탕물을 맑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맑은 샘을 파는 적극적인 자세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화투자야말로 그와 같은 샘을 파는 작업이다. 문화사업에 대한 정부의 과감한 국고투입을 기대한다.
  • 북한 GNP,한국의 10%수준/통일원이 밝힌 「오늘의 북한경제」

    ◎국민 총생산의 21%가 군사비/「평축」과소비 여파,경제난 심화 북한의 경제난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25일 통일원이 발표한 89년도 「북한경제종합평가」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국민총생산(GNP)규모는 2백10억9천만달러로 남한 GNP의 10분의 1에 불과하고 1인당 국민소득도 9백87달러로 우리(4천9백68달러)의 5분의1 수준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2.4%로 88년의 3.0%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지난 86년의 2.1% 성장률 이후 가장 저조한 것이다. 북한경제침체의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지난해 8월 평양에서 개최했던 제13차 청년학생축전에 있다고 북한문제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평양축전」은 정치적 선전목적에서 개최한 것으로 낭비적인 재정지출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평양축전」개최를 위해 「5월1일」 경기장ㆍ광복거리ㆍ청춘거리 등 건설공사에 50억달러를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북한경제는 「평양축전」관련 건설부문이 전체성장을 주도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당초 북한은 김일성주석의 신년사에서 89년을 「경공업의 해」로 규정했으나 기간산업부문의 주요 건설실적은 북한주민의 의식주 문제와 관련이 있는 일부 건설사업을 완공하는데 그쳤다. 뿐만 아니라 전력ㆍ수송 등 자본수요가 큰 사회간접자본시설,간척사업,탄광 및 광산개발 등에 대해서는 평양축전 준비에 따른 투자재원 부족으로 위축되는 경향을 보였다. 북한은 수출 19억5천만달러ㆍ수입 28억4천만달러로 지난 한햇동안 9억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는데 수출입 실적 모두 88년보다 저조했다. 수출실적의 부진은 생산활동이 위축된 것을 반영하며 수입실적의 감소는 80년대 중반이후 지속적인 무역적자로 대외지불능력을 상실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인다. 또한 최근 소련이 대북 원유공급 감소와 「우대가격」폐지를 통고한 것을 비롯,동구권 국가도 교역조건이 불리한 대북 수출을 기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경제를 압박하고 있는 요인으로는 또 과다한 군사비 부담이 지적되고 있다. 북측은 18억달러의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으나 실제의 병력수ㆍ장비 등을 고려해 분석한 지난해 실질군사비는 44억9천만달러로 분석됐다. 이는 국민총생산의 21.3%를 차지하는 것으로 우리(4.4%)보다 비중면에서 약 4.5배 정도 높은 것이다. 곡물생산량은 쌀 2백15만t,옥수수 2백68만t 등 모두 5백48만t으로 나타났는데 한햇동안 필요한 식량이 6백여만t인점을 감안하면 약 80만t 정도의 식량이 부족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수산업 생산량은 양식장의 확장작업 등에도 불구,88년보다 약간 증가했을 뿐 어선건조실적이 부진하고 가공 및 운반시설도 거의 개선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동차 생산은 88년의 1만8천대 보다 증가한 3만3천대를 기록했는데 공장생산시설확장 작업을 완료한 결과로 풀이되고 있다. 자동차는 소련과의 합영회사인 승리자동차회사가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TV생산은 24만대,화차는 3천8백량으로 88년 수준이다. 그러나 로봇ㆍ집적회로 등 전자ㆍ자동화공업 부문은 북한지도층의 관심에도 불구,별다른 실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자동차 총 보유대수는 26만대에 불과하고 현재평양∼개성간,평양∼희천간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있다. 북한경제침체와 경제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경직된 계획경제체제를 고집함으로써 빚어진 비능률성과 폐쇄적 정책노선 및 국제경제협력부진에 있다는 것이 북한문제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또 생산의 부진과 성장의 둔화에도 불구,지난해 세입과 군사비는 88년과 비슷하게 책정함으로써 북한주민의 실질적인 생활여건은 악화된 것으로 관측된다. 따라서 북한은 서방 선진국은 물론 동구사회주의 국가의 개방정책을 도입하지 않고 경제적ㆍ정치적 고립을 고집하는 한 경제난 극복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획기적인 경제개혁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북한이 우위를 갖고 있는 것은 저렴한 노동력』이라고 지적하고 『따라서 북한은 제3국의 플랜트도입등을 통한 노동력 활용을 꾀하면 그들의 경제를 어느정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남북한의 주요 경제지표 비교 구 분 한 국 북 한 단위 인 구42,380 21,375 천명 인구증가율 0.97 1.64 % 경제활동인구 17,975 9,271 천명 경제활동참가율 59.5 64.9 % GNP(국민총생산) 2,101 211 억달러 1인당국민소득 4,968 987 달러 군사비/GNP 4.4 21.4 % 외채총액 264 67.8 억달러 순외채30 주)한국의 경제지표는 잠정치 자료:한국은 경제기획원,북한은 국토통일원
  • 소비도 사회적 규범이다/권태준 서울대 환경대학원교수(세평)

    인류역사상 보통사람들의 소비행태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한 삼사십년밖에 되지 않는다. 「대중소비 시대」니 「풍요로운 사회」니 하는 말들이 오늘날의 이른바 선진국들의 대명사처럼 쓰이기 시작한 것이 지난 삼사십년 사이였다. 이런 나라들 가운데 2차대전의 전승국들은 한 십년 정도 앞섰고 독일 일본같은 패전국은 십여년 정도 뒤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대중적 소비의 경험은 이제 겨우 한 세대 남짓하거나 미처 반세기도 안됨을 뜻한다. ○대중적 소비경험 적어 그전 수백년 아니 수천년 동안의 인류역사에서는 보통사람들은 노동과 생산의 미덕만을 배워 왔고,소비의 재미는 특별한 계급,즉 귀족 계급의 독점이었다. 그래서 이런 계급을 일은 하지 아니하고 쓰기만 하는 『유한계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시대에 백성들의 소비생활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으니 그 이상은 백성들의 소관사가 아니었다. 멋이니 맛이니,절제니 풍류니 하는것은 유한 계층의 「멋쟁이」들의 관심사였다. 보통사람들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소비의 절제는 절제의 미가 아니고 앞날에 예상되는 굶주림에 대비하도록 하는 생존의 연장책으로서였다. 이래서 우리를 포함한 인류의 소비문화는 문자 그대로 양극화되어 있었다. 한편에는 「먹고 살아가는」 소비생활이 있었을 뿐이었고 다른 한편에는 「쓰고 치장하는」 과시 소비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 우리가 찬란한 문화유적이라고 아끼는 것들이 대부분 그런 유한계급의 한가로운 소비유산이다. 이제 신분계급제가 없어진 마당에선 소비의 수단인 돈의 양만이 소비행태를 좌우하는 잣대가 되었다. 이런 처지에 우리 모두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소비생활에 관해서 배우는 바가 없다. 소비는 될수있는 대로 안하는 것이 미덕이고,생존을 위해서 또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에 그칠 일이라고만 배운다. 이렇게밖에 배우지 못한 터에 조금이라도 남는 돈이 생기면­즉 돈의 억제력이 조금이라고 약해지면­어찌 할 바를모른다. 너나 할 것 없이 문자 그대로 견물생심이고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의 억제력 이외에 다른 어떤 정신적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런 소비행태를 통틀어 「충동적 구매」 행태라고들 한다. 그런가 하면 또 사회에는 구석구석,하루종일 우리 감각을 자극하는 충동이 만연해 있다. 텔레비전ㆍ신문ㆍ잡지들의 자극적인 광고들,그리고도 모자란듯 그 많은 간판들,하루 한순간도 소비의 충동을 피하기 어렵게 되어 있지 않은가. 「과소비」를 탓하는 논설과 그 바로 밑에 화려하게 그려놓은 「최신 패션」광고는 독자와 시청자들을 한층 더 혼란시키고 있을 뿐이다. 「적정소비」에 대한 사회적 규범이 없는 곳에 「과소비」에 대한 경고적 수사가 설득력이 있기 어렵다. 계층간의 「위화감」조성,근로의식의 약화,재생산을 위한 저축의 필요 등의 수사는 모두 소비의 문제에 정면으로 답하고 있지 않다. 고작 소비의 양,또는 시기의 유보를 권하고 있을 뿐이다. 정녕 인간다운 생활에는 보람찬 노동 뿐만 아니고 소비의 재미도 한몫을 해야 할 것이라면 소비의양과 시기보다 그 질이 먼저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야말로 우리를 포함한 모든 자본주의 경제의 「인간화」과정에 있어 으뜸되는 과제이다. ○소비문화 부재가 문제 나라경제의 내일의 「선진화」를 위해 오늘의 소비를 좀 참으라는 논리도 선진적 소비의 질에 대한 기대로서 설득력이 뒷받침된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소비문화의 사회학습은 이른바 지도층의 물량적 소비 절제만으로 이끌어질 일이 아니고 그들 생활의 모든 면에서의 문화적 성숙과 도량에 따른다. 이런 문화적 성숙과 도량 없이 누가 과연 남아 도는 돈쓰기 충동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며 누군들 「이웃사촌 땅사는데 배 아프지 않을」사람 있겠는가.
  • 기는 정책 나는 투기꾼/황산성 변호사(서울시론)

    ◎서민의 내집 마련길 막아놓고… 사람은 적어도 의식주문제가 생존권에 걸맞게 충족되어야 된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되는 최소한의 요건이며 이 요건이 충족되는 사회가 의로운 사회일 것이다. 쌀은 비록 공급상 잘못된 구조로 값이 오르기는 하나 생산량이 남아 돌아 굶을 염려는 없다고 한다. 걸치는 옷도 값나름이고 싼값으로 제법 모양내며 살아갈 수 있는 정도로 선택의 여지가 많다. 다만 우리는 4계절이 너무 뚜렷하여 계절마다 체온조절이 어려워 거할 집이 필요하다. 천막이나 판자촌으로 여름철 나기도 힘들다. 강우량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모두가 자나깨나 내집마련이 소원이다. 이 소원을 약점으로 최대한 이용하여 약을 올리고 값을 치솟게 할 수 있으므로 집이 엄청난 이득을 챙기는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업자에 두손드는 당국 건설부는 작년 11월 아파트 분양가 연동제를 실시해도 1991년 이후에나 다시 조정하겠다고 한 당초의 약속을 깨고 6개월만에 아파트 분양가를 일부 조정,현실화 하기로 결정했다 한다. 주택업자 대표들이 물가상승에 따라 분양가를 현실화 하지 않으면 신도시 아파트 분양을 포기하겠다는 집단행동의 움직임에 두손을 든 것이다. 33평형의 분양가격이 평당 18만원이 상승되어 총 5백94만원을 더 부담하게 되어 내집마련의 꿈에 부풀었던 2백만 주택청약저축 가입자들의 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부가 무주택자를 위한 주택의 공급확대와 주택투기 억제를 위하여 2백만호를 짓기로 결정하였다면 차라리 정부가 재원을 확보하여 소형아파트 건설을 늘려야 할 것이고 만약에 민간 주택공급업자들에게 소형아파트 건설을 주문하려면 이에 따른 세재상의 혜택과 의무화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많은 주택을 공급하기로 한 정책을 펴면서 왜 미리 건자재 수급에 관한 대책을 세워 공급물량을 확보해 두지 못하였을까. ○실패뿐인 「아파트 정책」 1987년과 1988년 2차에 걸쳐 분양된 목동 신시가지 장기 임대아파트가 80% 내지 90%가 불법전매 또는 전대되었다고 하여 정부가 아파트를 환수하고 불법전매ㆍ전재자들에게 벌금을 물게 하는 강하고도 충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어떻게 5년기간이 장기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 있으며 당초 완전 분양이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에서 임대분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데 그 분양이 문자와 법 그대로 효용을 발휘하리라고 누가 믿었겠는가. 원계약자의 경제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35평형 등 무리하게 건설하였고 5년후 분양 전환시 분양가 산정에 관한 언급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탈법과 편법에 능란한 수완을 발휘했던 것이다. 모처럼 저소득 무주택자들에게 내집마련의 기회를 주기 위한 장기 임대 공급정책이 실패로 돌아갔다. 기는 정책에 나는 국민이 있는 셈이다. 세든 사람이 약정기간이 경과하면 집주인이 직접 사용하든 제3자에게 다시 세를 주든지 상관없고 재개발ㆍ재건축이 목적이든간에 비워주는 것이 도리요 법적의무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태는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려고 하지 않는다. 전세값 폭등으로 그 돈으로는 갈 곳이 없다. 그들을 내쫓은 후 주택업자와 집주인은 엄청난 개발이익을 수탈한다고 여긴다. 계층간의 갈등이 더욱 골이 깊어지며 자살소동,몸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한사람이 여러채의 주택을 소유하는 일이나 부동산이 투기나 재산증식이 수단이 되지 않도록 분별력과 자제력을 가져야 한다. 땅을 소유한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보화덩어리가 되는 땅을 국가가 강제수용한다면 참을 수 없는 권리침해로 보아 토지에 대한 보상기준을 정부의 기준지가로 하도록 한 토지 수용법 46조2항을 위헌 제청하였다. 헌법재판소는 공익사업의 시행을 예상지가 상승부분에 해당하는 개발이익을 보상액에서 배제하기 위한 것으로 개발이익은 피수용자의 노력이나 자본에 의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므로 피수용자에게 당연히 귀속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준지가 보상이 정당보상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볼 수 없다. ○의로운 사회풍토 조성을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한다. 16만5천여명의 국가유공자와 1백여만명의 그 가족들은 거의 다 가난에 찌들고 집도 없이 고생하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모세가 애급으로 부터 이스라엘 민족 해방운동을 전개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3∼4대까지 이르게 하리라』는 훈계를 몇차례 내리시며 그 민족의 정기를 바로 잡도록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축재한 친일파는 지금까지 부유하게 살고 독립투사의 자손은 가산은 없어지고 배우지 못하여 결국 가난에 찌든 삶을 살고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닌가. 의를 세우고 의롭게 살아 가며 의로운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 북한축구팀 초청등 대북접촉 2건 승인

    정부는 9일 신동호 스포츠조선사장이 창간기념사업으로 북한축구팀을 초청하기 위해 신청한 북한주민접촉을 승인했다. 정부는 또 조대웅 월간 우먼센스 편집주간등이 북한주부들의 의식주 및 자녀교육 실태조사를 위해 신청한 북한주민접촉을 승인했다.
  • 「반민족적 폭력사」로 얼룩진 35년(흔들리는 조총련:하)

    ◎“인도주의”앞세워 교포 9만여명 북송/대한 침투 전진기지 삼아 문세광사건등 테러 자행/「세습 반대세력」늘어 노선전개에 타격 조총련의 35년 행적은 「반민족적 폭력사」바로 그것이다. 당초 정치적 색채가 없이 재일 한인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결성됐던 조총련의 전신 조련도 집행부가 공산계열의 장악하에 놓이게 되면서부터 일본 공산당의 외인부대로 전락했다. 조련은 그후 북한에 김일성을 중심으로한 소위 인민공화국이 들어서게 되자 남로당계에서 북노당계로 기울어 더욱 전투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때의 좌익활동은 일본 공산당의 혁명노선에 의거,질서와 경제를 교란시킴으로써 일본 공산화 여건을 앞장서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자행하는 폭력과 파괴활동으로 인한 일본내의 사회적 비난과 여론의 화살은 재일 한인사회전체와 산하 단체가 뒤집어 쓰게 되었다. 한편 북한은 한덕수에게 지령을 내려 대남침투를 위한 주일특무부대인 조총련을 결성하도록 조종했다. 이에 따라 조총련은 ▲북한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조종을 받는다 ▲대남적화정책에 추종하는 일본주둔 특무부대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 ▲재일 한국인의 포섭과 좌익을 대표하는 단체로서의 역할을 맡는다 ▲한일,한미간의 외교적ㆍ경제적ㆍ문화적 교류를 저지한다는 기본노선에 맞춰 모든 활동을 전개했다. 조총련의 제1차 사업은 재일 한인의 북송사업이었다. 북한당국이 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안 조총련은 1958년 8월15일 해방 13주년 기념대회에서 북송을 제의했다. 이와 함께 조총련은 「중앙귀국 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직을 총동원했으며 일본내의 언론기관에 호소,북한의 모습과 귀국의 필요성을 선전했다. 이와 때를 맞춰 북한의 김일성은 그해 9월8일 건국10주년 기념대회에서 귀환동포를 적극적으로 환영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당시 북한은 전후복구사업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특히 일본에서 기술을 익힌 노동자의 귀환을 기대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인도주의를 내세워 조국에 귀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선전공세를 폈다. 북한의 당시 속셈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발전상을 일본에 선전하고 국제사회에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으려던 것이었다. 재일 한인들에 대해서는 북한은 세금을 내지않는 지상낙원이라고 꾀었다. 북한에 귀환하는 사람에게는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것은 물론 직장을 제공하고 아동들은 즉시 취학시키며 정착금으로 성인은 1인당 2만원,14세 이하의 아동에게는 1만원씩을 지급한다고 했다. 당시 북한이 선전과 일본인 협력자 매수 등에 들인 비용은 2조원에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북한의 계략에 속아 북한에 송환된 북송자 숫자는 59년부터 82년사이 9만3천3백44명에 이른다. 북송사업은 한때 성공한듯 보였다. 59년 2천9백42명을 시발로,60년 4만9천36명,61년 2만2천8백1명으로 피크에 올랐었으나 이후 숫자가 격감했다. 68년부터 70년 사이에는 일시 중단된 적도 있었으며 그 이후는 몇백명ㆍ몇십명 단위였다. 니가타(신석)항에서 눈물을 뿌리고 떠난 북송자들은 그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에 남은 가족들에게 『헌것이라도 좋으니 의복이나 재봉틀,또는 라면을…』이라며 궁핍한 생활상을 편지속에 전해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북한이 이들 북송자들을 인질로 잡고 조총련계 사업가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거둬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총련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테러사건은 문세광 사건이었다. 1974년 8월15일 재일 한인 문세광(23)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국립극장에서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대통령은 위기를 모면했으나 부인 육영수여사가 피격,절명했다.일본경찰 조사에 따르면 문은 오사카(대판) 스미요시(주길)구에서 상고를 중퇴하고 한때 한청 이쿠노(생야)구 지부맹원으로 활약하던 자였다. 문은 민단자주수호위원회 사무국에서 일하던중 조총련 이쿠노 서지부 정치부장 김호룡에게 포섭되어 특별훈련을 받고 국내로 잠입,범행을 저질렀다.민단에서는 문의 거주지인 이쿠노 북지부에 「박대통령 저격사건 긴급대책분실」을 마련하고 「살인귀 김일성 집단타도」 「비인도적 조총련분쇄」등 입간판을 이쿠노구안에 수백개 설치했다. 그러나 이 입간판은 설치한지 3시간도 안돼 60여개가 조총련계 청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를 전후해 민단계와 조총련 청년들사이에는 난투극이 빈발했다. 한국정부가 민단에 대해 장기적인 지원정책을 실시하고 조총련계 인사들에게까지 모국방문ㆍ추석성묘등 획기적인 포섭정책을 편 것은 바로 이때부터 였다. 조총련이 북한의 대남침투를 위한 전진기지가 되어 그동안 저질러 온 각종 악랄한 공작은 일일이 그 예를 들기 힘들 정도다. 지난해 3월 문익환목사 일행의 방북사건도 전민련­범민족대회­한통련으로 이어지는 조총련과 지하수맥이 닿는 선에서 주선되었다는 사실을 도쿄의 공안관계자들은 인정하고 있다. 지난 55년 결성된 조총련은 하부조직의 정비를 서둘러 지금은 49개 지방본부,4백19개 지부,2천7백여개의 분회,2백46개의 단을 둔 방대한 조직이 됐다. 산하단체로는 「재일본조선인 청년동맹」을 비롯한 15개의 단체와 「조선보사」등 18개의 주관 사업체를 갖고 있다. 조총련은 형식상 북한의 소위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의 산하단체로 철저하게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같은 조총련 조직을 뛰쳐나와 「김일성 독재체제타도 및 김정일 세습반대」를 부르짖고 있는 하수도씨등 반김일성세력은 조총련이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북한의 노선전개에 하나의 걸림돌이 될 것으로 도쿄 각계에서는 주시하고 있다.
  • 김일성 주체사상 찬양/예비군 대대장 구속

    【수원=김동준기자】 경기도경은 8일 사석에서 문익환목사의 방북사실과 북한의 실상을 찬양한 럭키금성(안양시 호계동 533)직장예비군 대대장겸 비상기획실장 김근의씨(47ㆍ서울 성동구 중곡2동 118의2)를 국가보안법위반(이적단체 고무찬양)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87년 육군중령으로 예편한 뒤 같은해 7월1일부터 럭키금성 예비군대대장겸 비상기획실장으로 근무해오던 중 지난해 1월9일 하오1시쯤 회사 비상기획실 사무실에서 예비군중대장 조모씨(44) 등 직원 4명에게 『문목사의 방북은 애국적인 행동이다』 『북한은 평등사회를 이룩하여 의식주ㆍ교육문제가 해결된 나라이며 주체사상이 있기 때문에 빈부격차없이 잘살 수 있다』는 등 주체사상을 찬양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경찰조사에서 『평소 신문과 방송,대학가 유인물 등을 보고 알게된 것을 직장동료와 잡담하다 말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 「남북한 부문」

    ◎북한,정치범 10만5천명 격리 수용/기본권 박탈… 동창회등 「비정치」 모임도 금지/한국은 보안사범 증가… 전반적으론 개선 추세 미 국무부는 세계 각국별 인권상황에 관한 연례보고서를 21일 의회에 제출했다. 다음은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 가운데 한국과 북한에 관련된 내용의 요약이다. ▷북한◁ 북한 정권은 주민들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그들은 주민 개개인에게 보안 등급을 매겨서 이에 따라 직업교육 의료시설 상점 등에 대한 접근과 노동당 입당 허용여부를 결정한다. 89년에도 여전히 북한은 주민들의 가장 기초적인 인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종교조직은 당에 의해 통제되고 있고 신뢰받는 간부에게만 외국 접촉이 허용됐다. 북한정부가 테러리즘의 사용을 포기했다는 증거는 없다. 탈출자들에 의하면 북한 정권은 일부 정치범들을 즉결 처형했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살해됐다. 인권단체인 아시아워치와 미네소타 법률가 국제인권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내 많은 수감자들이 고문ㆍ질병ㆍ기아ㆍ유기 등으로 인해 죽었다. 89년에 한국으로 넘어온 북한 사람들 추산에 따르면 최소한 10만5천명의 정치범과 그 가족들이 집단수용소에 억류돼 있다. 이들은 결혼이 금지돼 있으며 식량을 자급해야 한다. 북한이 오지의 수용소에 억류중인 정치범과 그 가족의 숫자를 한국정부는 약 15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북한에는 12개의 집단 수용소가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 가운데 4개소는 김정일 반대세력에 대해 숙청 작업을 벌였던 82년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 6천∼1만5천명의 새로운 정치범이 이곳에 수용됐다. 북한의 정치범은 재판없이 구금되며 면회나 통신은 한때 허용했었으나 다시 금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여행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개인여행은 가까운 친지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국한된다. 정치적으로 믿을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강제이주 조치를 취하며 평양거주나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해외여행은 관리,믿을수 있는 예술인,체육인,학자등에 국한되고 이민은 허용되지 않는다. 89년에 북한은 일본에서 열린 단기 세미나에 학생들을 파견했다. 이것 이외에북한이 학생들에게 공산권 밖 국가에서의 연수를 허가한 예는 없다. 지난해 동구 유학생 6명이 망명한후 북한은 해외유학생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지난 59∼82년 사이 북송된 재일교포 9만3천명에 포함된 일본인아내 6천6백37명 가운데 일본으로 귀환한 사람은 1명도 없으며 대부분이 소식불명이다. 대부분의 북송교포들은 북한에서 「주체성 없는 계급」으로 분류돼 곤궁한 의식주 속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는 1년에 단 며칠만 열리며 지도부에 의해 제안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것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북한에 자유선거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체장애자들의 평양거주는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한국은 권위주의 시대를 떠나 민주화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전진중이며 민주제도와 관행을 강화하는 절차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강력한 공안기관의 활동은 88년에 뚜렷이 둔화됐었으나 89년 들어 다시 증대됐다. 공안합수부가 활동한 4월부터 6월 사이에 보안법 위반혐의로수백명이 체포됐다. 합수부가 해체된 후에도 체포는 계속됐다. 88년 2월 노태우정부 출범후 89년 8월말까지 공안관계 사범으로 2천94명이 체포됐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1천3백15명이 89년도에 체포된 것이다. 일부 보안법이나 노동법 위반 구속자에 대해서는 변호사 면회가 금지됐다. 믿을만한 고문 주장도 일부 있었다. 국회는 사회안전법을 폐지했으나 논란의 대상인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법 개정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모든것을 고려해 보면 한국은 과거에 비해 훨씬 관대하고 개방된 사회가 되었다. 인권관계자들은 89년말의 소위 정치범 숫자를 약 8백명으로 추산했다. 이 숫자는 정부시설을 화염병으로 공격한 폭력행위 관련자들도 포함하고 있다.
  • “땜질 주택정책”… 값만 부추긴다

    ◎수급 불균형으로 아파트값 다시 “들먹”/일손부족으로 거래동향 제대로 파악못해/주택청등 신설,중장기 종합대책 재검토를 최근 주택전세값이 크게 오른데 이어 아파트값이 다시 들먹이자 주택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고 주택행정체제도 확대 개편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학계,주택 및 부동산 전문가들은 지난해 4월 신도시 계획발표 이후 고개를 숙였던 아파트값이 다시 심상치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대해 큰 우려를 나타내면서 차제에 주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종합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아파트값이 서울 일부지역에서 고개를 들고 전세값이 폭등한 것은 지난해 개정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의 부작용 및 증권시장부양자금 유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데도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일관성이 없고 땜질식 주택정책 시행과 함께 부동산 시장의 움직임조차 제때제때 파악하지 못해 뒤늦게 허겁지겁 대책이란 것을 내놓는 허술한 행정체제에 더 큰 원인이 있다. 현재 정부는 92년까지 2백만가구를 짖는다는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3년후 주택보급률을 72.9%까지 끌어올린다는 의욕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물론 이 엄청난 물량공급 계획은 앞으로의 주택수요를 조사하여 세운 것이지만 88년부터 폭등세를 보이기 시작한 아파트값을 진정시키는데 이렇다할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데서 이미 정책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건설목표 가구수에 맞춰 지역적으로 건설가구수를 안분하는데 그쳤을 뿐 주택수요와 부동산 거래동향 등을 감안,지역에 맞는 현실적인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파트값이 올라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급조해서 나온 것이 바로 분당ㆍ일산 신도시 건설계획이었다. 이들 신도시 건설계획은 초기에 아파트값을 일시 안정시키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효험도 1년이 채 못되어 점차 무력해지고 있다. 신도시계획 발표와 함께 서울지역에도 아파트를 많이 짓도록 해야 했음에도 아파트 분양가 현실화를 질질끌다 뒤늦게 함으로써 정책효과를 반감시켰다. 오진모 대한부동산학회장은 『요즈음 주택전세값이 크게 오르고 있는 것은주택 임대차보호법 개정이 계기가 됐을 뿐이며 근본적인 원인은 서울지역의 아파트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있다』고 분석했다. 또 아파트값도 전세값에 치받혀 오른면도 없지 않으나 서울지역의 아파트 공급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에 언제든지 오를 잠재요인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주택전문가들은 주택건설을 활성화하기 위해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기능을 특화하되 가능한 한 빠른 시일안에 민간 아파트의 공급촉진에 제약요인이 되는 것을 없애주고,공공부문에서는 소득에 맞게 임대료를 낼수 있는 저소득층 임대아파트를 많이 지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정부의 주택정책이 갖고있는 또다른 문제는 공급을 늘리고 촉진한다고 하면서도 여러가지 걸림돌이 많아 소기의 목적달성이 어렵게 돼 있다는 점이다. 첫째가 분양가격 문제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땅값 연동방식을 도입,8년만에 분양가격을 어느정도 현실화 했으나 주택건설업체들은 땅값산정을 감정평가사의 감정가격으로 계속 규제하자 땅값이 비싼 서울이나 수도권지역의 아파트 건설을 계속꺼리고 있다. 또 가뜩이나 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양도소득세 면세기간 연장 등으로 매물 출회를 막아 공급부족을 심화시키고 있다. 주택행정체제에도 큰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박돈서 아주대 교수는 의식주 문제중 의식문제는 해결되고 주 문제에 대한 욕구가 갈수록 커지고 이것이 사회문제화하고 있는데도 건설부의 1개국에서 주택문제를 다루고 있는데서부터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주택국에는 4개과가 있으나 근로자 주택건설 추진등 그때그때 주어지는 일만 처리하는데도 쩔쩔매고 있다. 주택정책을 세우는데 크게 고려해야할 부동산 시장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지역의 아파트값이 이미 한달 전부터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음에도 주택국에서는 한참 뒤에야 들먹이고 있음을 알아채고 그때서야 부랴부랴 신도시 아파트 분양을 앞당긴다는등 대책마련에 나서는 부산을 떨고 있다. 또 최근에 마련한 근로자주택건설 계획만 해도 사전에 건립목표 가구수를 세운 뒤에야 근로자 주택보유 실태 등을 조사하는등 순서가 뒤바뀐 일을 예사로 하고있는 것이다. 국토개발연구원의 이건영 연구위원은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주택정책을 세우려면 주택보유 실태,수요 및 거래동향 등에 대한 자료부터 충실하고 정확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현재 경제기획원이 5년마다 시행하고 있는 주택센서스 외에 필요할 때마다 대도시 지역에 대한 조사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주택공급을 촉진하려면 세제,금융등의 대책까지 종합적으로 강구되어야 하는만큼 주택행정체제에 이같은 기능을 수행하거나 관계부처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기구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주택행정 기능의 강화와 관련,박돈서 교수는 한시적으로 주택자문위원회를 설치하고 주택청을 신설해야 한다고 내세웠다. 박교수는 주택청 신설이 어려우면 건설부 주택관련 기구와 기능을 강화,세입자 대책등 주택에 대한 모든 일을 관장해야 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 벼랑에선 공산주의/변혁물결 집중탐구:4ㆍ끝

    ◎“역사발전에 비약이란 없다” 교훈 일깨워/노동윤리 타락이 공산사회 붕괴 부채질/자본축적 안된 체제의 「성장한계」 드러내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소련을 중심으로한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은 중세의 종교개혁과도 같은 혁명적 변혁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소련공산당서기장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개혁과 개방) 정책을 기점으로 해서 시작되었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주의권의 혁명적 변혁의 소용돌이는 그렇게 단순하게 출발된 것이 아니다. ○비정상혁명의 소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소련은 1917년 10월혁명의 성공을 통해서 인류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국가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사회주의혁명은 자본주의적 과잉생산이나 공황,실업과 같은 자본주의체제의 모순 때문에 발생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이 아니었고 오히려 러시아제국의 봉건적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반봉건적 상태와 서구 선진자본주의 열강들의 경제적 지배와 정치적 간섭이 증대되어지는 반식민지적 상태속에서 이루어진 탈봉건ㆍ탈식민지적 혁명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당시 재정러시아의 반봉건적이고 반식민지적 사회구조속에서 만연되어 있던 부정ㆍ부패ㆍ비리ㆍ빈부격차ㆍ착취ㆍ억압 등과 같은 사회변혁의 절대적 조건들이 성숙되어 있었을때 사회주의적 이념과 이상을 가진 볼셰비키당원들이 사회주의적 제도혁명으로 전환시켜 버린 비정상적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환언하면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해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사회주의적 사회를 혁명적으로 요구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사회주의적 혁명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는 오늘날 소련사회주의권의 변혁배경을 본질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그러한 비정상적인 사회주의혁명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후진국이었던 러시아가 오늘날 세계 양대강국중의 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제도와 체제의 도입 때문에 얻어진 결실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 사회주의혁명의 결과오늘날의 소련은 혁명전 국민들 대다수의 문맹상태를 완전히 탈피한 문명국가가 되었고 모든 국민들에게 의료비와 교육비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으며 실직자들까지도 의식주문제를 해결해 주는 복지국가가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만 가지고는 오늘날의 소련이 사회주의적 물적토대를 완성해 놓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소련사회주의가 선진 자본주의보다도 우월하다고 볼 수 없는 중요한 부분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의 기술수준이나 생산력 발전수준ㆍ생활수준ㆍ사회보장수준ㆍ사회환경 보전수준 등이 소련을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70년대 후반부터는 소련 국내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어서 체제적 우월성을 입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80년대 초에 와서는 소련경제는 성장이 둔화ㆍ정체되었으며 경제발전에 대한 제동현상까지 나타나서 경제가 침체상태에 빠져 버려 있는 실정이었다. 생산효율이 떨어지고 제품의 질이 하락하고 과학기술의 진보가 지연되고 있었으며 고도의 기술과 첨단기술의 개발이정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능력에 따라서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서 소비한다는 사회주의 경제원칙을 적용할 만큼의 사회적 생산력 발전수준이나 의식수준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주의 경제원칙을 적용하게 된 결과,생산에 투입된 노동에 있어서도 능력만큼 노동을 하지 않고 소비만은 필요한 만큼을 요구하게 되는 타락한 비사회주의적 노동윤리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동윤리가 만연된 상황하에서는 노동생산성은 저하되기 마련이며 필연적으로 경제성장은 둔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착취하는 자본가 계급이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솔선해서 일하며 노동의욕이 고조되고 노동생산성이 제고되어 자본주의 사회보다도 월등하게 높은 경제성장과 발전이 가능하게 된다는 사회주의의 우월성에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노동윤리의 타락현상(비사회주의적 노동윤리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노동의욕 자극방책을 도입해 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이러한 방책들 때문에 자본주의적 속물근성에 물들게 되어 사회주의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사회의식의 타락만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알코올중독ㆍ마약중독ㆍ범죄증가ㆍ저속한 취미와 향락풍조ㆍ노동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기생충적 태도 등이 만연되었고 관리들의 뇌물수수ㆍ부정ㆍ부패 등이 보편화되는 위기적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 80년대 초까지의 소련 사회와 경제였던 것이다. ○동구의 공통적 현상 이러한 소련 사회주의권의 위기적 상황을 혁명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인 것이다. 따라서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의 목적은 기술의 진보와 경제의 효율성 증대를 촉진할 수 있도록 사회주의 경제구조를 전환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적 요소를 활성화해서 사회주의 사회의 도덕적ㆍ심리적 의식을 혁신하겠다는데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소련을 위시한 동구 사회주의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정책은 생산력 발전수준이 저급한 단계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된 나라에서는 공통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2차대전후 자체 혁명도 거치지 않고 소련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사회주의국가가 된 나라들에 있어서는 물적 토대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건설의 주체세력까지도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체제 유지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오늘날 가장 극단적인 체제변혁까지도 요구하고 나오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대부분이 자체혁명을 거치지 않은 나라들이라는 것에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소련을 위시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혁명적 변혁과정속에서 한국 경제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해야 될 것인가. 동구 사회주의권의 혁명적 변혁과정에서 우리가 역사발전의 비약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재확인한 것처럼 한국경제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있어서도 결코 비약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재인식해야 될 것이다. 혁명적인 방법에 의해서이건 강압에 의해서이건 간에 물질적 생산력 발전에 근거하지 않고 이루어진 사회체제는 자본주의체제든 사회주의체제든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자본주의적 성립 발전과정도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의 성립 발전과정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의 내재적인 사회적 생산력이 발전함으로 해서 필연적으로 탄생된 정상적인 자본주의 성립 발전과정이 아닌 것이다. 전통적 사회의 폐쇄성이 깨어지면서 자본주의화의 물결이 강압적으로 밀어닥친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기점으로 해서 우리나라는 외세에 의한 자본주의적 피지배관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191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자본주의화를 위한 기초적 조건인 본원적 축적과정을 일본에게 찬탈당했다. ○의존관계 극복단계 그 결과 근대적 자본주의 성립의 선행조건이 결여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대가 끝난 1945년이후의 한국경제는 다시 미국에 의해서 자본주의체제로의 강제적 전환이 이루어졌는데 자본주의적 발전의 선행조건인 자본축적이 결여된 상태에서 자본주의체제로의 강제적 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자본유입을 초래하게되었고 그것은 결국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와 미국경제에 대한 의존관계를 불가피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조건들은 1960년대와 70년대,80년대의 기적적인 경제성장과정을 거치면서 무역수지의 흑자발생,외채감소,국제경쟁력을 갖춘 거대기업들의 등장 등을 통해서 상당한 정도로 극복되어지고 있는 과정에 놓여있지만 아직도 미국의 한국시장개방압력을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노동조합의 건전한 육성조차도 제대로 되어있지 못한 실정이어서 오늘의 한국경제는 종속으로부터의 탈출이냐,아니면 종속의 심화냐라는 갈림길에서 서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상과 같이 한국경제는 일제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이 된 이후에도 미국경제의 경제적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자본주의의 자본축적과정의 변화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경제를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양적인 지표만을 가지고 현상적으로만 이해해 왔던 것이다. 한국경제를 양적인 지표로만 보면 1인당국민총생산액이 4천달러를 넘어섰고 무역고가 1천억달러를 넘어섰으며 무역수지흑자가 발생하면서부터 외채잔고가 감소하여 외채문제가 해결되고 있기 때문에 전후에 가장 성공한 제3세계 자본주의국가가 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이것은 곧 생산력발전이라는 물적토대 없이도 사회주의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동구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축적 없이 자본주의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사회의 발전과정에는 절대로 비약이 있을 수 없다. 발전의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발전을 추구하게 되면 항상 폭력과 억압,그리고 강제가 따르기 마련이며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의 변혁과정에서 보았듯이 유혈적인 투쟁이 발발하게 되어 더 이상의 경제발전은 불가능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제파탄의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경제의 제문제를 발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경제의 자주적 재생산구조를 갖추기 위한 일대변혁이 일어나야 될 것이며지금까지 지배적 자본주의 국가들(미국과 일본)의 발전단계에 따라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그리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거절할 수 없었던 전반적인 경제구조를 개편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구조개편이 결코 사회주의적 경제구조로의 강제적 개편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동구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한국경제의 물적 토대가 아직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조차도 제대로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저급한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경제는 어떻게 무역수지흑자와 개선된 국제적 신용도를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자체기술을 개발하고 국제경쟁력을 제고하여 정상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을 도모할 것이냐가 가장 중요한 과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해야만 될 것이다. 역사발전 과정에는 영원한 종속관계도 영원한 지배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역사발전의 주체적 역량들이 주어진 조건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변화시켜 나가느냐에 따라서 종속이 될 수도 있고 지배가 될 수도 있는것이다. 한국경제의 장래도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변화시켜 나가느냐에 따라서 종속경제의 심화도 될 수 있고 자주자립 경제의 구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약력 박영호 ■고려대학교ㆍ대학원 경제학과 졸 ■서독 프랑크푸르트대학교 경제학박사 ■저서=▲한국경제론 ■논문=▲한국의 식민지 자본주의화 과정에 관한 연구등
  • 「소환대사」에 집중적 사상교육/일지,최근의 평양 움직임 분석

    ◎대소관계 소원속 중국변화에 불안감/개혁바람 막으려 내부통제 “전력투구” 지난 연말 동구변혁의 와중에서 평양에 소환됐던 세계 30여개국 주재 북한대사들이 해가 바뀌고서도 임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평양에 머물면서 사상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일본 아사히(조일)신문이 17일 보도했다. 도쿄(동경)의 외교소식통을 인용,보도한 바에 따르면 북한은 당초 동구정세분석을 위해 외국주재 대사들을 소환했으나 사실은 사상교육의 강화를 통해 외부로부터의 정보유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었다고 아사히신문은 분석했다. 동구체류 유학생을 일제히 소환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이처럼 사상통제의 강화를 통해 사태극복을 기도하고 있으며,지난 1일 김일성주석이 발표한 신년사를 통해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새삼스레 강조하고 있는 북한의 현 단계에서는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날 아사히신문은 동구를 뒤덮은 개혁의 물결이 올해 아시아에도 파급될 것인가,특히 친족을 중심으로한 장기 독재체제와 경제부진으로 인한 국민의 불만이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을 쓰러뜨린 이래 북한의 행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고 지적,상세한 해설기사를 통해 이같이 보도했다. 북한에서의 사상통제는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김일성의 1950년대 논문을 게재하는 것 등으로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지난 15일부터 예정되었던 북한주민의 국내여행 자유화가 돌연 취소된 것도 동구사태에 따른 국내 통제를 계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번 동구제국에서의 민주화 요구의 방아쇠가 되었던 경제정세에 대해 김일성은 신년사에서 올해로 4년째를 맞는 제3차 7개년계획(87∼93년)의 중요과제의 하나인 「의식주문제의 해결」을 거듭 강조했다. 이것은 생활의 기본적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이 보도는 지적했다. 한편 북한을 둘러싸고 있는 대외환경은 더욱 냉혹해지고 있다. 특히 소련과의 관계가 최근 급속히 냉각화 되었다. 평양방송은 지난 1일 김일성주석이 올해 연하장을 교환한 각국 지도자의 면모를 소개했는데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서기장의 이름은 최근 10년 이래의 관례를 깨고 중국 지도자 15명의 뒤로 후퇴했다. 홍콩의 시사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최근호에서 작년 11월말 루마니아와 동독을 방문했던 북한의 김영남부수상겸 외상이 소련에는 들르지 않고 다만 기착지 모스크바공항에서 로가초프외무차관과 짧은 시간 대화했다는 에피소드를 전했다. 이와는 반대로 중국과는 친밀도를 더해 가고 있다. 김일성이 지난 11월의 중국방문에서 종래의 사회주의노선 견지에 중국측과 의견의 일치를 본 것에 이어 올 봄에는 중국 공산당 강택민총서기가 취임 후 첫 외국나들이로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다. 그러나 서방측과의 경제교류 재개를 위해 계엄령을 해제한 중국이 또다시 개방노선을 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이 점 북한으로 볼 때는 중국정국이 불안요인으로 남는다. 국내외 상황이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 북한은 나름대로의 사태해결에 시동을 걸고 있다. 김일성이 신년사에서 명확히 한 군사분계선의 철거요구와 한국과의 협상회의 제안이 그 제1탄이다. 그러나 현 상태로서의 북한은 결국 막다른 상태에 달하지 않을까 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북한 공산주의 전문가인 미국 하와이대학 서대숙교수는 최근 한국 일간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동구의 변화는 여러가지 조건이 다른 북한에는 곧바로 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면서도 오는 10월쯤 개최될 것으로 보이는 제7회 조선노동당대회에서 김일성이 아들인 김정일서기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김정일의 주도아래 민주화ㆍ자유화를 꾀한다는,세대교체에 의한 개혁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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