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의식주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세금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3선 도전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코코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우크라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22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2) 변산에서 만난 정감록과 미륵신앙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2) 변산에서 만난 정감록과 미륵신앙

    ●부안행 버스 속에서 남사고는 먼젓번 내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내 책 ‘남격암’을 살펴보게나. 부안엔 호암(壺岩)이 있고 그 아래 변산 동쪽은 몸을 숨기기에 정말 적합하구나라고 했지.” 나는 이 기회에 변산의 길지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서울서 부안까지는 고속버스 편을 이용했다.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3시간쯤 지나 삼례를 지난다. 이 때부터 드넓은 호남평야가 눈앞에 가득하다. 지도를 꺼내 살펴보니 부안은 김제 만경평야의 서남쪽 끝에 있다. 그곳은 곡창지대이면서도 서해바다에 연해 있다. 며칠 전 우연히 부안 출신의 한학자 한 분을 만났는데, 그는 예부터 ‘생거(生居) 부안’이란 말이 있다고 자랑했다. 농수산물이 풍족할 뿐만 아니라 변산(邊山)이란 명산이 있어 부안은 무척 살기 좋은 고장이란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부안은 다소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변산에서 군산까지 이어질 새만금방조제 공사로 인해 생태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될 수도 있다는 염려가 적지 않다. 잠시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송기숙의 대하소설 ‘녹두장군’이 시작되는 백산이란 지역도 지금은 부안군에 속한다. 갑자기 1984년 동학농민군들의 함성이 귀에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농민군들은 모두 흰옷에 죽창을 들고 있어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고 했다던가? 이런 역사적 격랑의 한복판에 변산이란 길지(吉地)가 있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지난밤 나는 이중환의 ‘택리지’를 꺼내놓고 혹시 변산에 관한 설명을 찾아 볼 수 있을까 해서 좀 뒤적여 보았다.“노령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부안에 이르러 서해 가운데로 파고들어간다. 서·남·북 3면은 모두 바다다. 이곳은 많은 봉우리와 허다한 골짜기로 돼 있는데 변산이라 부른다.” 맞는 말이다. 변산은 3면이 바다에 닿아 있고 봉우리와 골짜기가 유난히 많다. ●변산은 백두대간의 서자 그러나 이중환의 설명과 다른 점도 있다. 자세히 검토해 보면 변산의 멧부리는 노령에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다. 백두대간의 계보를 자세히 적은 ‘산경표(山經表)’에도 변산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고지도를 보더라도 변산은 홀로 떨어진 외로운 산이다. 말하자면 백두대간의 서자인 셈이다. 정감록의 길지는 대부분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에 확실하게 능선이 닿은 적자(嫡子)들이다. 그렇다면 서자 격인 변산은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어 길지로 거론된 것일까? 누구도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아 답을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난 변산의 지리와 역사를 좀더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버스는 서서히 부안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난 지 4시간 만이다. 읍내 길거리엔 바다 냄새가 물씬하다. 남도의 봄 향기도 객을 반기는 듯하다. ●내변산 우동 정감록서 말한 길지 지인의 소개로 나는 읍내에서 지관 김철수(71·가명)씨를 만났다. 김 지관의 말을 들으니 변산은 길지에 필요한 외형적인 조건을 제법 잘 갖춘 편이란다. 변산의 산세는 용맥이 강이나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갑자기 멈춰선 경우에 해당해, 이른바 산진처(山盡處)의 명당이란다. 김 지관은 서남해안 일대에는 그런 명당이 몇 군데 더 있다며 가야산과 팔령산과 태안반도를 예로 든다. 그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변산의 지세를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지관의 대답은 이러했다.“변산의 청룡, 즉 동쪽 산세는 사창재, 노승봉(상여봉), 바드재를 건너 옥녀봉으로 이어지다가 잠시 남서쪽으로 흐르는 듯하다가 내소사의 주산인 세봉을 건너서 월명암의 주산인 쌍선봉으로 반원을 그리며 내뻗어요. 그게 학치, 청림리 삼예봉에서 끝나지요. 변산의 백호, 즉 서쪽 산세는 개암사의 주산인 우금산에서 우슬재를 거쳐 의상봉으로 이어진다고 봐야지요. 이 두 흐름을 갈라놓은 것이 그 옛날 백천이었는데, 지금은 부안호가 돼 없어졌어요. 백천의 물길은 본래 우슬재에서 시작됐거든요. 백천도 그렇지만 변산의 청룡과 백호가 그려낸 형상은 결국 산 태극, 물 태극이오. 계룡산과 같다, 이런 말씀이지요.” -그럼 ‘정감록’에 나오는 변산 동쪽의 길지는 구체적으로 어딘가요? “아, 그것은 말이지요. 일단 내변산으로 통하는 입구인 우슬재나 바드재를 좀 잘 봐야 해요. 그저 그 길목만 잘 지키면 인근의 청림리와 중계리는 참 좋은 피난처가 돼요. 거 뭐더라, 정감록에 나오는 호암을 찾으려면 상서면 통정리에서 우슬재를 넘어가면 돼요. 우슬재를 살짝 넘어가면 쇠뿔바위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이게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의 오른쪽에 있어요. 쇠뿔바위 동남쪽을 잘 살펴보면 산비탈에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우거하던 집이 지금도 있지. 몇 해 전에 복원됐지요. 그 산 아래 마을이 우동이야. 보안면 영전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곰소로 가다 보면 마주치는 동리인데 원래 이름은 우반동이란 말이오. 이 마을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옥녀봉이 있고 멀리 그 산 끝자락에 굴바위가 보인단 말이지요. 바위 입구가 틀림없는 호리병 모양이에요. 호암이라 이거지요! 우동은 앞이 시원하게 터진 듯하면서도 천마산이 막아주고 있어 삼태기형 명당이 분명하고.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난 우동이 바로 그 ‘정감록’에서 말하는 길지다, 그렇게 봐요. 안 그렇겠어요?” -김 지관님, 그런데요. 역사상으로 볼 때 길지가 있다는 내변산이 외변산보다 훨씬 더 큰 수난을 겪었습니다. 구한말이나 6·25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변산의 우동을 길지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그거야 잘 모르겠소! 누가 그걸 알겠어요? 그래도 옛 말이 조금도 틀린 게 없어요. 우리가 사는 이 변산은 아주 옛날서부터 미륵님이 나타나신 땅이고, 관세음보살님의 성지요. 원효, 진표, 진묵 등 큰 스님들도 많이 오셔서 도를 닦으신 것만 봐도 이게 보통 땅이 아닌 것은 틀림없어요! 근세엔 증산교를 세운 강일순이도, 원불교의 소태산도 다 여기 변산서 도를 닦았단 말이죠. 그 분들이 다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분들인데 왜 다른 명당 다 놔두고 부안을 왔겠어요? 정감록에도 길지라고 나와 있단 말이에요. 미륵님이 현신하신 곳이니까 이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봐요.” 김 지관의 설명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변산은 과연 미륵신앙의 발상이요, 불교의 성지였다. 왜,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 점이 중요하게 생각돼 난 서둘러 발길을 현장으로 옮겼다. ●변산의 옛 사찰들 부안읍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하는 박재환(45·가명) 선생이 길잡이를 맡아주었다. 나는 박 선생과 함께 내변산 입구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대형 지도에서 변산의 유적지를 다시 점검했다. 변산은 제법 큰 산 덩어리여서 변산면(邊山面)·하서면(下西面)·상서면(上西面)·진서면(鎭西面)에 걸쳐 있다. 그런데 최고봉이라는 의상봉 마천대(508m)도 실은 야트막한 편이라 웅장한 느낌은 별로 없다. 이곳 사람들은 서해안을 따라 겹겹이 포개어진 산봉우리를 외변산이라 하고, 내륙으로 뻗은 골짜기와 봉우리는 내변산이라 부른다. 외변산에는 격포리(格浦里) 해안의 채석강(彩石江)과 적벽강(赤壁江)이 특히 유명하다. 이 두 곳의 명칭은 강이지만 실제는 해안의 바위벽이다. 채석강이니 하는 이름은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과 대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노닐던 중국 지명을 본뜬 것이다. 그만큼 경관이 수려하다는 뜻이다. 변산의 해안풍경이 그처럼 절경이라 해도 정작 변산을 전국적인 길지로 만든 것은 산속에 위치한 옛 사찰들이었다. 박 선생이 승용차로 변산을 구석구석 구경시켜 준 바람에 모든 게 뚜렷해졌다. 외변산에 해당하는 상서면 감교리의 개암사(開岩寺)는 백제 무왕 35년(634)에 묘련왕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대웅전(보물 292호)이 참으로 볼 만하다. 개암사에 딸려 있던 원효방이란 암자는 신라 때 명승 원효가 수행한 곳이라 전한다. 그런가 하면 변산면 석포리에 위치한 내소사(來蘇寺) 역시 신라 때의 고찰인데 대웅보전(보물 291호)·고려 동종(보물 277호)·법화경절본사본(法華經折本寫本 보물 278호) 등 문화재가 많다. 내소사 경내의 전나무 숲은 울창하기가 전국 최고라 하고 이 절간의 저녁 종소리는 변산8경의 하나로 친다. 내변산은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깊은 계곡이 여럿이고 나무 또한 울창해 풍광이 곱다. 그 중 산내면 중계리(中溪里)에는 신라 때 창건됐다는 월명암(月明庵)이 있다. 변산의 제2봉인 쌍선봉(498m) 중턱에 자리잡은 월명암에서 바라보는 아침 바다의 물안개는 변산8경의 하나다. 암자 뒤편의 낙조대(448m)에서 서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역시 변산8경으로 손꼽는다. ●불사의방과 영산사, 한국 미륵신앙의 성지 변산에는 위에서 말한 사찰들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중요해 뵈는 암자 하나가 있었다. 의상봉 꼭대기 있었다고 믿어지는 불사의방(不思議房)인데 이곳이야말로 미륵하생신앙의 진원지였다. 장차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와 수많은 사람들을 불교적 이상세계로 인도할 거라는 하생신앙이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이 변산이라니 신기한 느낌이 든다. 따지고 보면,‘정감록’에 약속된 새 세상도 미륵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렇게 보면 미륵하생신앙은 정감록 신앙의 뿌리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불사의방에서 미륵신앙을 체험한 승려는 신라의 진표(眞表)였다. 그는 경덕왕 19년(760)부터 3년 동안 3업(身·口·意業, 몸뚱이·언어·의지의 작용)을 닦았다. 아울러 망신참법(亡身懺法·몸을 희생시키는 참회법)에도 힘써 5륜(두 무릎, 두 손, 머리의 5體)을 바위에 마구 부딪쳐 무릎과 손이 깨져 피가 비오듯 했다고 한다. 진표의 극진한 기도에 감동한 지장보상(地藏菩薩)은 진표에게 모습을 드러내 정계(淨戒)를 주었다. 그러나 진표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부근의 영산사(靈山寺)로 수행 장소를 옮겨 더욱 정진했다. 미륵보살을 친견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마침내 미륵보살이 진표 앞에 나타나 그의 신심을 칭찬하고 점찰경(占察經) 2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수행으로 얻은 果와 점치는 대쪽) 189개를 주었다. 진표는 미륵보살의 수기(授記)를 받은 셈이다. 경덕왕 21년(762), 진표는 신도들을 이끌고 금산사(전북 김제)에 16척이나 되는 거대한 미륵보살을 조성하기 시작했다.2년 뒤 마침내 미륵상은 완성되었다.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된다. 진표에 관한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변산에서 미륵신앙이 출범했다는 점이다. 그 뒤 우리 역사상 미륵신앙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 특히 난세에 고통을 당하는 민중들에게 많은 위로를 줘왔다. ●월명암, 또 하나의 종교적 성지 알고 보니 변산의 월명암(月明庵) 역시 종교적인 성지로 의미가 크다. 월명암은 관음보살을 모신 곳이라는데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영지라 한다. 월명암에 오르기 위해 나는 남여치에서 차를 내려 쌍선봉 쪽을 바라보며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이 암자는 신라 신문왕 12년(692)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했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건했다. 한말엔 의병들이 월명암을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과 싸웠는데 전투에 진 바람에 1908년엔 다시 잿더미가 됐다. 그 후에도 월명암은 몇 차례 심한 몸살을 겪었다. 지금 월명암 옛터에는 대웅전을 건립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월명암을 개창한 부설거사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의 행적은 ‘부설전’이란 고소설에 상세하다. 경주에서 출생한 부설은 법우(法友)인 영조·영희와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나 변산(능가산)에 들어가 묘적암을 세우고 오직 수도에만 몰두했다. 뒷날 그들 3인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길을 떠나는데, 부설원(정읍군 칠보면)에 이르렀을 때 부설은 삼생연분(三生緣分)이 있는 묘화를 만난다. 두 사람은 반드시 부부가 돼야 할 운명이었다. 환속한 부설거사는 아들 등운(登雲)과 월명(月明)이란 딸을 두었는데 말년이 되자 변산에 등운암(登雲庵)과 월명암(月明庵)이란 두 암자를 지어 아들딸에게 각기 하나씩 맡겼다. 겉으로 보면, 부설과 묘화 부부는 속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일평생 남몰래 수도에 정진해 도력이 출중했다. 부설거사보다 한 수 낮았다는 묘화만 해도 환한 대낮에 조화를 부려 비나 눈을 내리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때로 묘화는 빗방울이나 눈송이를 단 하나도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고 전한다. 월명암을 중건한 진묵대사도 많은 이적을 남겼다. 진묵은 조선 중기 호남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이었는데, 어느 날 탁발을 나갔다가 매운탕 한 솥을 얻어 마셨다. 그 다음 진묵은 물가에 가서 토해냈는데 탕 속에 들어 있던 죽은 물고기들이 전부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근대에는 백학명(1867∼1929)과 같은 고승이 월명암에 주석했다. 학명은 불교개혁의 일환으로 선농(禪農)일치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참선과 농사를 같은 것으로 파악해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불교를 개창한 소태산 박중빈도 세상을 구제할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월명암을 찾았다.1919년 소태산은 학명과 더불어 동안거를 했다. 이때 학명의 거처는 법당이었고 소태산은 그 옆방을 사용했다. 원불교의 2대 교조인 정산종사도 한때 학명의 상좌 노릇을 했다. 뿐만 아니라 증산교를 창설한 강일순(姜一淳) 역시 월명암을 찾았었다. 강증산과 소태산은 모두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부심했다고 한다. ‘부설전’을 보면 월명암에서 모두 4성인,8현자,12법사가 나온다고 했다. 월명암 스님들은 부설거사 가족 4명을 성인으로 간주한다. 옛날 이 암자에 주석했던 성암·행암·학명 스님은 3현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5현과 12법사가 더 나올 예정이라는 뜻인데 과연 그 말대로 될지 어떨지 나는 모른다. 장차 지켜볼 일이다. 요컨대 변산은 불보살과 깊은 인연이 있어 정감록이 손꼽는 길지가 되었다. 변산의 경우에서 보듯 때로 민중의 깊은 불심은 풍수조건을 능가하기도 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쪽지 통신]

    ●한국현대시인협회(www.kmpoet.org) 전국 고교 문예작품 공모전을 연다.1인당 5편의 시를 써서 새달 25일(월)까지 접수하면 된다. 작품 길이나 내용은 자유다. 출품작은 A4용지로 작성해 응모자의 학교 이름, 학년 반, 주소, 전화 번호를 기재해 대봉투에 넣어 보내면 된다. 접수처는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114의 5 리치몬드과자점 302호.323-2227. ●온라인 교육기업 이투스(www.etoos.com) 30일(수) 실시되는 고3전국연합학력평가를 분석하고 2006학년도 수능을 대비하기 위한 ‘3·30 학력평가 분석 및 2006 입시대비전략’ 설명회를 연다. 새달 3일(일) 오후 2∼6시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진행된다.1부에서는 한석현 강사가 이번 학력평가를 분석하고, 학력평가 결과에 따라 수험생들이 1년간 학습 목표를 세울 수 있도록 돕는다.2부에는 영역별로 입시 준비 전략 설명회가 열린다. 언어영역 정지웅, 수리영역 박금우, 외국어영역 김한상 강사가 강연에 나선다.587-9799(내선 113).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www.acdpu.go.kr) 전쟁없는 세상, 증오심 사라진 한반도라는 주제로 제4회 청소년 통일만화 공모전을 개최한다. 평화·통일·희망·미래의 비전·나눔을 주제로 다뤄야 하며 공모 부문은 카툰과 4컷 만화, 이야기 만화이다. 카툰과 4컷 만화는 B4, 이야기 만화는 3쪽 이내로 A4용지에 작성해야 한다. 흑백과 컬러 모두 응모할 수 있으며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과 디지털 CG작업도 가능하다. 새달 18일(월)까지 서울 중구 장충동 2가 209 민주평통사무처 앞으로 작품을 보내야 한다.2250-2355. ●교육인적자원부 국사편찬위원회(www.history.go.kr) 제3회 전국 중·고교생 우리역사 바로 알기 경시대회를 연다. 생활 속에서 잊혀져 가는 전통문화, 보존 계승해야 할 우리 민족의 문화 유산,19세기 중반 이전 시대와 근대 이후의 사회 문화 비교, 전근대의 윤리와 관습, 의식주 생활, 여성의 지위에 대한 반성과 발전적 계승, 일제침략기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 자료, 우리 가족과 마을의 역사 자료 등과 관련된 논문 또는 조사보고서를 제출하면 된다. 작품과 참가신청서는 5월23일(월)∼31일(화) 경기 과천시 중앙동 2의6 국사편찬위원회 편사기획실 경시대회 담당자 앞으로 접수하면 된다.500-8328. ●서울시 과학전시관(www.ssp.re.kr) 제38회 과학의 달을 맞아 새달 14일(목)·15일(금) 과학특별강연회를 연다. 오후 3시부터 과학전시관 시청각실에서 김성렬 한국해양연구원이 ‘과학자들은 어떻게 지구를 연구할까요?’라는 주제로 강연한다.30일(수)·31일(목)일 팩스 881-3040,3005번으로 참가신청을 하면 된다. 강좌마다 선착순 250명을 모집한다.881-3021∼5. ●경기도교육청(www.ken.go.kr) 자체개발한 포털 사이트 ‘경기도 사이버 가정학습(http://danopy.kerinet.re.kr)’을 30일 개통, 사이버 보충수업을 실시한다. 사이트 주소는 공모 결과, 수학능력을 함께 향상시키자는 의미에서 ‘다높이(danopy)’로 정했다. 다높이는 초등학교의 경우 4∼6학년 수학과목을 1회 25∼30분씩 60회 분량으로 애니메이션과 음성이 함께 서비스된다. 또 중학교는 국어와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 5개 과목을 과목당 30∼60회 분량으로 만들었다. 다높이에는 초등교 52명, 중학교 15명 등 67명의 사이버 담임교사와 60명의 상담교사가 배치돼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지도·감독을 맡는다
  • [발언대] 쓰나미피해 장기적 구호 필요/김보경 한국 월드비전 홍보팀장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은 동남아시아 지역 지진해일 발생 후 90일이 되는 3월26일부터 2단계 긴급구호사업에 돌입한다. 월드비전은 90일 이전에는 긴급대응,90일 이후에는 지역사회재건, 경제회복, 사회기반시설 재건의 4단계로 구호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긴급구호에 있어 90일은 의식주 지원 위주의 초기 활동을 마치고 생존자들의 자립기반을 마련해 주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전환점이다. 세계 각국의 구호활동 덕분에 이재민들은 생리적 필요는 해결할 수 있지만, 언제까지나 이재민 대피소에서 나눠주는 식량이나 구호물품으로 살 수만은 없다. 생계수단을 잃은 그들에게 일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원, 붕괴된 지도층을 새로 형성하는 작업, 집·학교·병원을 세우는 일을 포함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한국 월드비전은 3월11일까지 13억 3000여만원의 후원금으로 식량과 구호 물품을 배분하고 식수 및 위생시설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특히 스리랑카 오지 마을에 의료봉사단을 파견,524명을 치료하고 위로했다. 마을 주민 딜라니(여)는 “내 평생 이 마을에 외국사람이 온 것은 처음”이라며 “지진해일로 인해 생긴 몸의 상처는 물론 마음의 상처까지 치료해줬다.”고 감사해 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 월드비전은 이재민들의 경제력 회복을 위해 어선과 그물을 지원하는 한편, 세계 각국의 월드비전과 힘을 합해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은 아동들의 심리치료를 위해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인도 등에 수십개의 ‘아동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월드비전 국제본부는 지진해일 피해지역의 재건 및 복구사업을 위해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오는 2009년까지 모두 3억 5000만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은 “무너진 집을 다시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90일 이후 구호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의 (02)783-5161,www.worldvision.or.kr 김보경 한국 월드비전 홍보팀장
  • 가구당 月평균 280만원 벌어 230만원 썼다

    가구당 月평균 280만원 벌어 230만원 썼다

    지난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구당 월 평균 약 280만원(연 3367만원)을 벌었다. 이 중 약 230여만원(연 2764만원)이 생활비, 세금 등으로 지출됐다. 소득은 1년 전보다 월 16만원쯤, 지출은 14만원쯤 각각 늘었다. 하지만 이는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의 증가폭이다. 불황이 지속되면서 벌이가 신통찮았고, 이로 인해 씀씀이도 위축됐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저소득층 수입이 제자리걸음을 한 탓에 부유층과 빈곤층의 격차가 커졌다. 참여정부가 줄곧 ‘분배’를 강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진 것이다.‘양극화 심화’는 경제성장이 정체됐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특히 전국 가구의 28.8%가 적자상태에 놓여 있다. ●도시가구 소득 5.9% 늘어 통계청이 24일 발표한 ‘2004년 가계수지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가구(시·군·읍·면 거주, 농가·어가 제외)당 월 평균 소득은 280만 6000원으로 전년보다 6.0%가 늘었다. 이 중 도시근로자(시 거주) 가구만 떼어놓고 보면 5.9% 증가한 311만 3000원이었다. 도시근로자 가구의 소득 증가율은 1999년(3.2%) 이후 가장 낮은 것이다. 분기별로도 지난해 4분기 근로소득 증가율은 3.2%로 1분기 6.8%,2분기 5.2%,3분기 5.7%보다 크게 둔화돼 99년 2분기 1.6% 이후 가장 낮았다. 전신애 통계청 사회통계과 과장은 “가구 안에 실업자가 생기고 근로형태가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일용직 등으로 전환되면 근로소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설명했다. ●상위20% 소득 하위20%의 7.35배 지난해 전국 상위 20% 가구의 평균소득은 571만 2500원에 달했지만 하위 20%는 77만 7300원에 불과했다. 둘 사이의 배율은 7.35로 전년보다 0.12포인트 높아졌다. 상위 20%는 평균소득이 1년 전(537만 2000원)보다 34만원 이상이 늘었지만 하위 20%는 1년전(74만 2000원)에 비해 3만 5000원 정도 증가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도시근로자 가구의 소득 5분위 배율 역시 5.41로 1년 전보다 0.19포인트 올라갔다.99년 5.49 이후 가장 높은 것이다. 소득분배 불평도 지수인 지니계수(높을수록 불평등도가 심함)도 전국 가구는 0.344로 전년보다 0.003포인트 높아졌고 도시근로자 가구는 0.310으로 0.004포인트 증가했다. ●지출 증가도 미미… 세금·연금은 대폭 늘어 소득이 별로 안늘어난 탓에 지출 증가폭도 줄어들었다. 전국 가구의 지난해 월 평균 가계지출(소비지출+비소비지출)은 230만 3000원으로 전년보다 6.8% 늘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의식주, 교육 등 실제 생활의 질을 높이는 데 쓰는 소비지출은 5.5% 증가에 그쳐 지난해(6.0%)보다 둔화됐다. 반면 세금, 보험료, 금융이자 등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경직성 지출인 비소비지출은 증가율이 11.3%에서 13.5%로 확대됐다. 세금 13.7%, 공적연금 8.1%, 사회보험 8.6%, 기타소비지출(이자·교육비송금·생활비보조 등) 22.9% 등이었다. 도시근로자 가구의 소비지출은 243만 4000원으로 전년보다 6.7% 증가했다. 그러나 소비지출 증가율은 외식 10.5%, 교육 5.7%, 보건의료 2.8%, 교양오락 4.9% 등 전년에 비해 대체로 낮아졌다. 특히 교육비 지출은 지난해 4분기에 1.8%가 줄어 98년 4분기 이후 처음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 계층별로 소득 하위 20%와 40%에 해당하는 1분위와 2분위의 소비지출 증가율은 각각 1.7%와 2.4%에 그쳐 전체 도시가구 증가폭에 크게 못미쳤다. 하지만 소득 상위 20%에 해당하는 5분위 계층의 소비지출 증가율은 10.1%에 달해 고소득층의 소비는 큰 폭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전국 가구의 28.8%, 도시 근로자가구의 23.7%가 가처분소득보다 소비지출이 많아 적자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의회]구로구의회 첫 임시회 결산

    [의회]구로구의회 첫 임시회 결산

    구로구의회(의장 정달호)가 올해 민생정치의 첫 발을 순조롭게 내디뎠다. 지난 3일 끝난 146회 임시회에서 저소득 주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한 지원책과 지하철·비행기의 소음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 또 주차장의 대폭 확대와 함께 재난·안전관리기구의 재편성도 꾀했다. 향상된 구의 경제 수준에 맞춰 주민들의 삶의 질도 대폭 끌어올리려는 것의 일환이다. ●저소득 주민에 의식주 지원과 온정 듬뿍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구로구 저소득주민의 생활안정 지원에 관한 조례. 불경기의 여파로 생존의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구내 저소득 주민들을 위해 구의회가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민 셈이다. 우선 대상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수급권자 및 차상위계층, 국가유공자·애국지사와 유족, 참전유공자, 고엽제후유증환자와 가족 환자, 장애인, 사회복지시설 보호자. 실업이나 사업 실패, 질병 등으로 갑자기 생계 유지가 어려워진 주민들도 포함된다. 의회는 구청에서 이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금전이나 물품을 지원할 수 있게 했다. 지원 내용도 다양하다. 급식, 교육, 교통, 월동대책 등 기본적인 의식주는 물론 명절 위문금품, 생신위문금, 사랑 음료 등까지 두루 갖췄다. 지원 수준은 예산의 범위 안에서 집행하게 된다. 지원대상자도 해당 분야에 따라 교육청 교육장, 보훈지청장 등의 추천을 통해 구청장이 결정하게 된다. 적재적소에 지원하기 위한 조치다. ●구로1동 지하철·항공기 소음대책 제시 구로구의회는 일반 주민들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은 지하철 소음방지 시설 설치와 비행기 소음방지 대책 청원. 지하철 1호선은 구로역을 중심으로 경인선과 경수선으로 갈라진다. 경인선과 경수선 사이에는 구로 1동 현대아파트와 주공아파트, 우성아파트 등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돼 있다. 이 지역 경인선과 경수선은 2m 정도 높이의 방음벽이 설치돼 있다. 그러나 지하철의 소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5층 이상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밤낮 가릴 것 없이 지하철의 굉음에 시달려야 했다. 또 다른 문제는 이 지역을 지나는 비행기 소음. 김포공항에 착륙하는 국내선 비행기의 상당수가 구로 1동을 지난다. 착륙하기 위해 저공비행을 하다 보니 소음이 만만치 않았다. 소음 문제에 대한 구로 1동 주민들의 민원이 계속 제기된 것은 당연한 일. 구로구의회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아 이 구간 지하철 노선의 지상 부분을 방음벽으로 감싸고, 비행기 노선도 가능한 한 변경해야 한다는 대안을 마련했다. 구로구의회는 임시회 직후 지하철공사와 공항공단, 환경부 등에 이러한 대안을 제시했다. 실현 여부를 떠나 구 의회가 주민들의 목소리를 앞장서서 대변한다는 좋은 전례를 남긴 셈이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토요일 아침에] ‘예수살이’로 살기 위하여/박기호 천주교 서울서교동 성당 주임신부

    이번 주말은 30여명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3박4일간의 ‘예수살이 배동교육’이라는 의식화 훈련을 갖는다. 필자는 예수살이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데, 소비사회에서 어떻게 예수의 제자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의식생활 운동이다. 예수의 복음보다는 신상품과 영상의 이미지들이 더 즐겁고 행복한 ‘기쁜 소식(복음?)’ 행세를 하고 있으니 사제의 복음 강론이 무력하고 믿음생활의 경책이 되지 못하는 시대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만은 없고 해서 산상설교의 ‘참된 행복’에 기초한 복음적 인생관과 세계관 무장으로 소비시대의 거짓 복음에 맞짱을 뜨고자 시작한 것이 ‘예수살이’ 운동이다. 오늘날 기술 문명과 소비문화 현상에 대하여 예수님은 과연 무어라 말씀하실까를 듣지 못한다면 복음이란 고전의 한 목록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교회에서 만나는 신세대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 고난의 역사를 겪지 않고 성장하였기 때문인지 찌들지 않은 솔직함이 사랑스럽다. 그러나 순수한 시각 때문에 상품 시장의 최대 고객층이기도 하다. 해서 부모님들은 현금 지급기 노릇에 고달프다. 이로 인해서 온 가족을 ‘알바’ 전사로 나서게 하고, 나아가 대량생산이 가져오는 자원낭비와 생태 환경 파괴의 실질적 조력자 노릇도 하게 된다. 복음서에는 병자를 치유하고 악령을 추방하는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악령이란 보이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인 힘을 행사하여 의식을 지배하는 어떤 존재를 말한다. 오늘날 상품 마케팅은 소비자의 의식을 지배하는 악령이다. 편리한 것을 혼자 사용하게 만들고 프로그램과 제품의 업그레이드를 끝없이 강요한다. 소비자가 구매 필요성을 판단할 여지도 주지 않고 광고와 동시에 거실과 호주머니에 들어앉는다. 마술이다. 가장 가증스러운 악령의 마술은 이른바 ‘명품놀이’이다. 명품은 연령과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대뇌를 마비시키는 바이러스다. 최근 어느 매체 비평 제작진들이 ‘구치’ 가방을 받았느니 돌려줬느니 해서 세간의 구설수다. 영악한 접대 술책에 걸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악령의 덫에 걸린 것이다. 도대체 명품이 무엇인가? 창세기에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을 ‘보시니 좋았다.’란 표현이 거듭되어 표현된다. 하느님 보기에 좋은 것, 신이 창조한 세계를 명품이라 한다. 생명가진 모든 것은 거룩한 명품인 것이다. 하늘 땅 숲 강 바다 모든 것이 그렇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땅에 금을 그어 등급을 매기고 명품과 짝퉁을 규정하고 소유권을 만든다. 의식주의 모든 질료는 신의 창조물이고 노동자의 손으로 가공한 것이다. 그래서 고급 아파트도 변두리 판잣집도, 백화점 모피 코트도 평화시장 통치마도, 특급호텔 요리도 포장마차 물국수도…. 노동이 들어간 모든 것은 명품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엄청난 자본의 CF와 비싼 값을 매겨 놓았다 해서 명품이라 숭배하는가? 창조와 노동에 대한 모독이다. 세상 사물의 이치를 의(意)라 하고, 이치를 아는 것을 지(知)라 하며, 사물의 참됨과 허상을 구별하는 것을 식(識)이라 한다. 지식인이란 사물의 이치를 알고, 참과 거짓을 식별하는 눈을 가진 자일진대 어찌 그들조차 호사스러운 명품놀이에 홀렸을까? 안타깝다. 우리 젊은이들은 사실을 깨우쳐 주면 흔쾌히 받아들인다. 예수살이를 모색하는 그들과 이번 주말을 함께 생활하게 되었으니 그 행복함이 감사하다. 박기호 천주교 서울서교동 성당 주임신부
  • 소록도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소록도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한센인(한센병 환자와 병력자) 700여명이 모여 사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1리 소록도. 일본 변호사 65명과 한국 변호사 37명이 일제강점기 때 강제 수용돼 노역에 시달린 이곳 할아버지, 할머니 117명을 대리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청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01년 특별법을 제정, 강제 수용됐던 일본 한센인에게 1인당 800만∼1400만엔씩 보상했지만, 소록도 주민은 내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한·일 변호사들은 지난 8월 일본 정부의 결정에 불복, 보상청구소송을 냈다. 소록도 한센인들에게 재판과정을 보고하러 가는 변호사들을 동행, 취재했다. ■ 日정부상대 소송 소록도 르포 #1. 할머니와 손녀의 상봉 지난 11일 오후 2시. 전남 고흥군 소록도 중앙리 강당을 가득 메운 할아버지, 할머니 50여명이 한국과 일본의 변호사들을 반갑게 맞았다. 한센병을 앓았던 노인들은 불편한 몸으로 휠체어를 타거나 비스듬하게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일본에서 온 여변호사들이 손가락이 뭉개진 할머니 손을 다정히 잡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서툰 한국어로 안부를 묻는다.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꼭 감은 할아버지를 포옹하기도 했다. 미소를 머금은 할아버지, 할머니는 오랜만에 손녀딸이라도 만난 듯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이날 일본 변호사 5명과 한국 변호사 15명이 보고대회에 참석했다.10차례가 넘게 이곳을 방문한 사람도 있었다. 대한변호사협회 박영립 인권이사가 “첫 재판(10월25일) 때 장기진(84), 강석우(80) 할아버지가 증언했는데 17일 2차 재판 때 김일임(71·가명) 할머니가 증인으로 나선다.”고 말하자 노인들은 투박한 손으로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2. 피와 눈물로 얼룩진 ‘소록도’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6시간을 달리면 전남 고흥군 녹동항에 도착한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을 닮았다는 소록도(小鹿島)는 선착장에서 돌을 던져도 닿을 듯 가까이 보인다. 선착장과 소록도 사이 거리는 겨우 600m. 섬은 가운데 자리잡은 중앙공원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관광객이 북적이는 해수욕장, 왼쪽은 출입이 제한된 한센인 거주지역으로 나뉜다. 김명호(55) 자치회장은 “일제강점기 때 6000여명이 거주하던 섬에는 이제 ‘한센인’ 702명만이 남았다. 평균 연령은 78세이고 한해 노환으로 사망하는 분만 50∼60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1936년에 착공돼 3년4개월만에 완공된 중앙공원은 한센인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졌다. 한센인 6만여명이 강제 동원돼 산림을 베어내고,6000여평의 대지를 조성했다. 암석은 완도 등에서 채취, 운반해 왔다. 나무는 일본과 타이완에서 들여왔다. 장기진 할아버지는 “몇 척의 배를 연결해 뭍에서 섬까지 다리를 만들었어. 우리는 목도라는 장대에 길이 2∼3m, 폭 1∼1.5m짜리 돌 수십개를 매달아 옮겼지. 언덕 위를 오르다 쓰러지면 돌 위에 앉은 일본인이 몽둥이로 마구 때렸어.”라고 회상했다. 중앙공원 한쪽에 자리잡은 붉은 벽돌집도 ‘고통의 역사’를 안고 있다. 시체해부실, 감금실, 단종대(斷種臺·남성불임수술대)…. 김 자치회장은 “일제 때 한센인은 다섯 차례 ‘죽음’을 맞이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가족과 생이별하며 호적에서 파내져 한번, 자녀를 낳지 못하도록 단종수술 받으며 또 한번, 목숨이 끊어져 한번, 그 시체를 해부해 또다시 한번, 불에 태워 화장하며 마지막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감금실은 일제 때 노역을 하지 않거나, 소록도를 탈출하다 잡힌 한센인들이 7∼60일씩 갇혔던 곳이다. 실컷 매를 맞은 뒤 감금되면 음식도 없이 추위를 견뎌야 했다. 결혼을 하려면 단종수술을 해야 하는 규정은 2002년 10월24일 국립소록도병원 운영규칙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유지됐다. #3. 오늘도 고통은 계속된다 한·일 변호사들은 진술서를 작성하기 위해 노인들이 살고 있는 집을 방문, 강제 격리된 상황과 인권침해 실태를 조사했다. 권모(77) 할아버지는 1943년,16살 때 3살 많은 누나와 소록도로 들어왔다고 했다. 경북 안동에 살던 남매는 “소록도에 가면 6개월만에 나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일본 순사의 말을 믿고 따라나섰다. 그러나 소록도는 치료는커녕 좁은 방에 10명씩 몰아넣어 강제노역을 시키는 ‘지옥’이었다. 가마니를 짜고, 벽돌을 굽고, 토끼가죽을 만들었다. 당시 한센인들은 한 해 벽돌 140만장, 가마니 30만장, 토끼가죽 1500장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배고픔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 동상과 고된 노동으로 멀쩡하던 손과 발은 상처투성이로 변해갔지. 그리고 손목, 발목이 절단되더라고….”권 할아버지의 한숨이 이어진다. 1945년 광복 후 강제노역은 사라졌다. 그러나 강제격리 정책은 66년 말까지 계속됐다.92년에야 소록도에 노령수당이 지급됐고, 이듬해 의료보험 대상자로 선정됐다. 장애인 등록은 94년 9월에 가능해졌다.4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소록도 노인들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적용받지 못하고 있다. 병원에서 의식주를 해결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이들의 생활비는 노령수당 3만∼5만원이 전부다. 한센인 할아버지, 할머니의 애달픈 사연을 변호사들은 한글과 일본어로 옮겼다. 이 진술서는 일본에서 진행 중인 보상청구 소송에 주요 자료로 일본재판소에 제출될 것이다. 12일 오후 변호사들은 노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뭍으로 향했다.“고마우이.” 뭉툭한 손으로 등을 쓰다듬던 할머니를 향해 한 여변호사가 돌아섰다. 그는 차별, 편견과 싸우느라 가냘퍼진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우리는 하나인 걸요.” 소록도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소송 앞장 日변호사 구니무네 “인권을 침해당한 한국인도 일본인과 동등하게 보상받아야 합니다.” 일본인 구니무네 나오코(國宗直子·49) 변호사는 2002년 3월부터 소록도 한센인 소송에 앞장서고 있다. 소록도변호단의 일본측 사무국장을 맡으며 14차례 방문했다.12일 한센인 117명에게 받은 진술서를 마무리하던 그를 만났다. 구마모토 출신의 구니무네 변호사가 소록도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다키오 에이지(73) 때문이다. 일본 근대사를 전공한 다키오씨는 구니무네 변호사가 1998년 일본 한센인들을 대리해 국가배상 소송을 진행, 승소하자 소록도 얘기를 들려줬다. 1907년 ‘나병예방법’을 제정한 일본은 1996년, 법이 폐지될 때까지 90년 가까이 한센인을 요양소에 강제 격리시켰다. 구니무네 변호사를 비롯한 일본 변호사 200여명은 ‘한센병 예방법 위헌 국가배상 변호단’을 구성, 소송을 냈고 2001년 5월 승소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항소를 포기, 한센병 환자 보상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구니무네 변호사는 “일제강점기 때 한국과 타이완에서도 한센인 강제격리정책이 펼쳐졌다는 얘길 접하고 바로 소록도로 달려왔다.”고 말했다. 국적과 관계없이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선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많은 고통을 받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를 반갑게 맞을 때 눈물나도록 고마웠다.”고 털어놨다. 일본 한센인들이 보상금 일부를 기금으로 조성, 소송비용을 내고 있다고 전했다. 언어 장벽 탓에 소록도 노인들의 진술서를 받는 게 쉽지 않던 구니무네 변호사는 한국 변호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우리 일을 대신해줘서 고맙다.”며 발벗고 나섰다. 한·일 변호사 102명은 지난 8월 도쿄 지법에 보상청구소송을 냈고, 지난 10월25일에 이어 17일 열리는 2차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구니무네 변호사는 “일본 한센인들은 요양소에서 의식주 해결은 물론 매월 8만 5000엔(약 85만원)씩 받아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한국 한센인들의 생활 여건은 너무나 열악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한센인이 정당한 대우를 받으려면 일본 정부에 앞서 한국인들의 편견과 오해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타이완 한센인 격리지역인 낙생원의 일본 정부 상대 소송도 돕고 있다. 소록도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한센병에 대한 몇가지 오해 한센인에 대한 두려움과 차별은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가톨릭의대 채규태 교수는 지적한다. 그는 한센병은 하늘이 내리는 형벌(天刑)도, 전염성이 강해 격리가 필요한 난치병도 아니라고 말한다. 한센병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풀어본다. ●한센병은 전염성이 강하다 한센병은 전염병예방법상 가장 낮은 단계인 3군 전염병이다. 결핵의 전염력이 한센병의 2000배를 웃돌 정도다. 특히 일반인은 95% 이상 한센병에 대한 자연 항체를 갖고 있다. 또 리팜피신이란 치료제를 단 1차례 4알(600㎎)만 복용해도 나균의 99.9%는 전염력을 상실한다. 신체는 물론 성접촉,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치료하려면 격리조치가 필요하다 1980년대 치료제 리팜피신이 발견되면서 한센병은 통원치료를 받는 병으로 바뀌었다. 전염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손가락·발가락 등 일부 신체기관의 변형으로 수술이 불가피하면 입원하지만, 장기간 격리는 필요치 않다. ●한센병은 난치병이다 한센병은 약물 복용으로 1∼2년이면 완치된다. 예전엔 치료시기를 놓쳐 변형된 손·발로 살아가는 한센인이 많았지만, 최근 발병한 환자들은 피부 반점 정도만 남는다. 치료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몸속 나균은 전염력을 잃는다. ●한센병은 유전된다 1973년 대한나협회가 조사한 결과, 전국 88개 정착촌에 살고 있는 2세 4157명 가운데 한센병에 감염된 2세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가족 가운데 한센인이 있다 해도 감염은 240만명에 한 명 꼴로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고 의학계는 분석하고 있다. ●새로운 한센병 환자가 많다 2004년 1월 현재 한센인은 1만 6801명이다. 대부분 치료가 끝난 사람들이다. 새로운 환자는 해마다 20여명에 불과하다. 소록도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길섶에서] 우리말과 정치/김경홍 논설위원

    최근 K모 국회의원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정치를 잘 하겠다는, 그동안의 활동을 소개하는 그렇고 그런 내용이지만 한 대목이 마음에 와 닿는다. 따분한 얘기 집어치우고 이런 얘기를 하자. 그는 “우리말은 기가 막히게 뛰어난 언어다.”라면서 옷, 밥, 집 등 의식주를 표현하는 단어를 열거했다. 신체구조와 관련해서는 몸, 뼈, 살, 피, 눈, 코, 입, 이, 귀, 턱, 목, 배, 팔, 손, 발, 털 등등. 생활기반이었던 논, 밭, 벼, 쌀, 콩, 조도 등장한다. 밥과 함께 국, 죽, 술, 떡을 먹고 ‘똥’을 싼다는 얘기도 썼다. 자연과 관련해서는 뫼, 내, 샘, 물, 땅, 풀, 해, 별, 달이 있다. 이들 우리말의 공통점은 단어가 한 글자라는 점이다. 같은 뜻의 영어만 봐도 음절이 대부분 우리보다 길고 복잡하다. K의원은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우리말의 단어도 길어지고, 정치도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이렇듯 우리말은 입안에 굴리고만 있어도 풍요롭다. 그의 편지에서처럼 ‘일’할 수 있고,‘돈’ 잘 벌고,‘술’도 한잔 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쉽고도 좋은 정치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경홍 논설위원 honk@seoul.co.kr
  • 아토피 꾸준한 치료가 ‘명약’

    아토피 꾸준한 치료가 ‘명약’

    겨울 들어 아토피피부염이 극성인 가운데 최근 부산에서는 아토피피부염을 앓던 어린이가 환부에 식초와 죽염을 바르는 이른바 ‘식초요법’으로 치료받다가 패혈증으로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이번 사례에서 보듯 아토피 환자들이 민간요법이나 근거없는 치료법에 매달려 증상을 악화시키고 치료 시기를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면역력 약한 아동층에 집중 발생 아토피피부염은 피부가 가려워 긁고, 긁으면 피부가 손상돼 가려움증이 더욱 심해지는 질환이다. 주로 얼굴 머리 목 팔 다리 등에 발생하며, 피부건조증과 가려움증, 발진, 진물, 부스럼, 피부 껍질이 일어나는 증상을 동반한다. 최근에는 발병 빈도가 늘어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전 국민의 15%가 아토피피부염을 앓고 있으며,0∼4세 유아는 100명당 18명이 환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는 0∼9세 아동층이 전체 환자의 63.6%를 차지해 면역력이 약한 아동들에게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공해와 의식주의 변화가 인체의 면역체계를 교란시켜 아토피피부염 등 각종 알레르기질환을 유발하는 것. 일부에서는 비누 등 세제를 이용해 너무 자주 씻어 피부가 세균이나 미생물에 공격받는 일이 줄면서 면역체계가 약화된 것이 원인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아토피는 전염병 아닌 유전질환 문제는 아토피피부염이 유전 질환이며 환경요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 이런 아토피피부염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완치보다 증상을 누그러뜨리는 데 목표를 두고 지속적으로 치료, 관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스테로이드 연고는 증상을 빨리 진정시키는 효과는 있지만 감염과 여드름, 실핏줄이 드러나거나 피부변색, 성장장애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어 전문의의 처방에 따라야 한다. 최근에 개발된 비스테로이드성 연고제인 프로토픽이나 엘리델에는 면역조절 성분인 타크로리무스와 피메크로리무스 성분이 들어있어 증상의 발현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피부 건조하면 가려움증 더 심해 아토피 환자는 피부가 건조하고 예민한 만큼 일상적으로 지켜야 할 수칙도 많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사항은 피부건조를 막는 것. 잦은 샤워나 비누, 때수건의 사용을 억제하며, 목욕 후에는 피부에 물기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보습제를 발라준다. 공기청정기를 사용하거나 실내에 화초를 많이 두는 것도 피부건조를 막는 방법이다. 적정 온·습도 유지도 중요하다. 온도가 높으면 가려움증이 심해지므로 항상 서늘한 상태를 유지하되 알레르기의 원인인 집먼지 진드기는 섭씨 25∼28도, 습도 75∼80%에서 왕성하게 번식하므로 온·습도를 이보다 낮게 유지하는 것이 좋다. ■ 도움말 대한피부과개원의협의회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CEO 칼럼] 창신고효(創新高效) 사회/유상옥 코리아나 회장

    [CEO 칼럼] 창신고효(創新高效) 사회/유상옥 코리아나 회장

    창신고효(創新高效)란 새로운 것을 창조해 효율을 높인다는 말이다. 즉 새로운 것을 추구해 삶의 질이 높아지는 사회로 바뀌는 것이다. 기업활동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그리고 문화 속에서 항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높이고자 끊임없이 창신고효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가 되면서 대도시에서 단독주택은 줄고 아파트가 크게 늘었다. 도시뿐 아니라 지방의 농촌에서도 아파트 생활을 선호하게 되었다. 따라서 주방, 거실, 화장실이 달라지고 상하수도, 냉난방, 조명과 가구가 모두 현대화되었으니 가히 주거혁명이라 할 만하다. 아침밥을 거르고 출근하는 사람이 늘고 건강식·기능식을 선호하며 비만을 걱정해 야채나 생선의 수요가 늘고 있다. 쌀밥 먹기가 줄어 들고 패스트푸드나 간이식의 수요가 증가한다. 따라서 쌀 소비량은 감소하는데도 쌀 수입개방의 압력이 거세지고 있어 우리의 주식인 쌀밥 먹기 촉진대회가 열려야 하는 아이러니에 봉착되었다. 먹을 것이 변변찮아 굶주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먹을거리뿐만 아니라 입성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집집마다 헌옷 처리로 고심한다. 버리기가 아까워 걸어둔 철 지난 옷이 쌓인다. 옷이 헤져서 못 입는 것이 아니고 유행이 지나서 입지 않는다. 정장과 캐주얼, 청바지와 점퍼도 철 따라 바뀐다. 한국전쟁 후 내복과 양말을 기워서 입고 신던 가난을 벗어나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다. 기술 발달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서부터 사람들은 보다 편리하고 좀 더 건강해지고 더욱 세련되고자 하는 창신고효의 모습을 보여준다.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에는 취미가 대부분 독서와 영화 감상 정도가 전부였다. 이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취미와 문화생활을 하게 되었다. 각종 스포츠, 여행, 등산, 낚시, 컴퓨터 게임 등 오락과 취미를 생활의 여가로써 즐기게 되었다. 삶의 효율을 높여가는 변화 속에서 관혼상제와 가족관계와 같은 전통문화, 즉 한국적인 것들이 서구적인 것에 밀리거나 변질돼 고유의 미풍양속이 사라져가는 아쉬움이 많다. 남녀가 혼인한다는 것은 인륜지대사로 옛날에는 육례를 갖추어 혼례가 치러지고 부부해로가 사회통념이었다. 하지만 요즘 결혼은 사랑의 결실로써 가정을 꾸리지만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음은 사회적 불안정을 나타낸다. 지나친 혼수비용 역시 많은 폐단을 유발하기도 하며 최근의 소자화(少子化) 경향은 국가인구정책이나 국력신장,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심히 우려가 된다. 생활이 궁핍하던 시절에는 다산을 방지하는 국가정책이 필요했지만 이젠 풍부한 의식주 속에서 인구는 국력이란 관점과 가족의 번창이란 관점에서 출산을 장려하고 노령화 사회에 대비해야 한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생활의 향상으로 고령자가 늘어나는 것은 장수국가, 복지국가로 가는 길이지만 반면에 장례문제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다. 이노베이션은 생활을 변화시킨다. 과학의 발달로 새로운 상품, 편리한 상품이 양산되고 서비스의 질이 높아지고 있다. 반면에 기업경영은 치열한 경쟁의 연속이다. 어제의 첨단기술이 내일은 낙후기술로 전락되고 오늘의 신상품이 순식간에 구제품화된다. 기업이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상품, 새로운 기술, 새로운 제도를 연구하고 강력한 경쟁력과 경영효율을 올리지 아니하면 경영부실이 커지고 신용도가 떨어지는 불운을 맞게 된다. 작은 것도 챙기고 크고 넓게, 그리고 멀리 보는 역량을 길러서 사회적 효율을 향상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상옥 코리아나 회장
  • “콤플렉스없는 세대가 한·일교류 주도”

    “한국에서 일본 문화를 개방한 것이 한류붐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문화를 개방한 한국에 고마움을 느낍니다.”(가와이 하야오 장관) “한류는 역설적으로 일본 문화 개방과 동시에 진행됐습니다. 국민적 설득은 어려웠지만 일본 대중문화 전면 개방이 장기적으로 한국 문화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이창동 감독) 이창동(50) 전 문화관광부장관과 가와이 하야오(76) 일본 문화청장관이 17일 오후 ‘제1회 메가박스 일본영화제’ 부대행사의 하나로 마련된 특별대담에 나란히 마주앉았다.2002년부터 장관직을 맡고 있는 가와이 장관은 임상심리학자 출신. 이 감독의 장관 재임 시절부터 친분을 쌓아왔다는 가와이 장관은 “처음 만날 때 이 전 장관이 넥타이도 매지 않고 불쑥 나타나 놀랐다.”며 농담 섞인 인사말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오사카 출신의 가와이 장관은 “내 조상은 한국인인 것 같다.”면서 “5∼6세기 한국에서 문화를 가르쳐 주면서 자연스럽게 융화된 것처럼, 지금도 다시 새로운 교류시대를 열어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감독 역시 “과거 역사에 대한 콤플렉스 없는 젊은 세대가 문화 교류를 주도하기 때문에 진정한 교류가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문화의 획일화에 대항하기 위해 문화 교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의견을 모았다. 가와이 장관이 “일국의 힘만으로 미국에 대항할 수 없다.”고 하자 이 감독도 “미국 문화에 의한 표준화가 세계화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물 흐르듯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화답했다. 대담을 시작하기 전 이 감독과 함께 일본 영화를 관람했다는 가와이 장관은 이번 일본영화제가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의 삶과 사회상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했다. 이 감독 역시 “정치적 관계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감정이 풍부했던 일본의 60년대에 대한 향수를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찾는 것이 한류붐의 한 원인이라는 데 동감한다.”고 말했다. 가와이 장관은 현재 일본에서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를 배우자는 열풍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중장년층 여성이 새로운 것에 대한 의욕과 행동이 왕성해진 시기에, 때마침 한국 문화가 들어오면서 한류붐이 한국을 배우자는 행동으로 옮겨졌다는 것.“‘겨울연가’를 보면서 단순히 좋다는 것을 넘어서 한국에 가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가와이 장관의 말에 이 감독이 “그렇다면 일본 여성들이 더 행동해 줬으면 좋겠다.”고 대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마지막으로 한·일 문화 교류의 전망을 묻자 가와이 장관은 의식주를 포함해 보다 폭넓고 다양한 교류가 이뤄지길 희망했고, 이 감독은 문화 교류를 통해 양국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인적 교류가 문화교류를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가와이 장관이 인적 교류의 묘안을 되묻자 이 감독은 “한국 사람들이 비자 없이도 일본에 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와이 장관은 “한류 때문에 한국을 오가면서 이제야 일본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됐다.”면서 “아마도 문화의 힘이 양국의 정치·사회적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난공불락 ‘임원경제지’ 내년 완역본 첫 출간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공부를 하면서 수십번, 아니 수백번 입속으로 되뇌었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그래선지 그후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서유구’하면 ‘임원경제지’가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저자와 책 제목만 달달 외웠진 임원경제지의 실체에 대해선 대부분 ‘까막눈’이나 마찬가지다. 흔히 조선 후기의 농서로 알려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농업뿐만 아니라 의복·식품·요리·건축 등 의식주 및 각종 기구·재테크·독서법·건강·의학·취미·지리 등을 망라한 백과사전격의 박물학서다. 이같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풍석(楓石) 서유구(徐有矩ㆍ1764∼1845)의 관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인을 연상케 할 정도다. 책의 분량도 엄청나 조선시대의 개인문집으로는 가장 방대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154권)에 버금가는 113권 52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분량뿐만 아니라 내용도 엄청나 웬만한 한문실력을 갖춘 사람도 손을 대기 어려워 학계에선 난공불락으로 통한다. 뛰어난 한문실력뿐만 인문학은 물론 과학, 의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적 소양에 이르기까지 종합적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 시도조차 번번이 좌절됐었다. 한데 뜻 있는 한 입시학원 원장의 후원과 19명의 소장학자들이 의기투합해 ‘임원경제지의 번역출간’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조만간 결실을 맺을 전망이다. 서울 대치동에서 ‘최신영어학원’을 운영중인 송오현(40) 원장이 3억원을 쾌척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림대 대동고전연구소 및 도올서원, 선경고등교육재단, 유도회 출신의 소장학자들이 지난 해부터 번역작업을 해왔다. 총 30∼40권 분량으로 나올 이번 전집의 출판은 국학전문출판사인 지식산업사(대표 김경희)가 맡기로 했다. 현재 원문의 60% 정도 역주가 이루어진 상태로, 완역본은 내년 상반기 첫 출간을 시작으로 2006년 마무리될 예정이다. 송 원장은 “평소 한문고전에 대해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가 작으나마 사회에 보답하고자 역사적인 임원경제지 번역출간 사업을 지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열린세상] 웰빙시대의 웰빙육아/신의진 연세대 소아정신과 교수

    최근 웰빙이란 개념이 우리 문화 전반에서 유행하고 있다. 음식, 생활양식, 운동, 화장품 등으로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다. 앞만 보고 달리던 가파른 성장 이면의 치열한 경쟁에 시달렸던 몸과 마음을 위해 웰빙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어른들의 웰빙 바람이 이제는 어린이들의 생활에도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젊은 부모들은 자녀를 기를 때 의식주의 세세한 부분까지 웰빙 개념을 적용하고자 한다. 덕분에 모유수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유기농 농산물, 친환경 건축자재를 선호하게 되는 등 좋은 변화가 나타난다. 많은 어머니들이 직접 유기농 야채로 만든 음식을 아이들에게 먹이고 패스트푸드 음식을 멀리하도록 어릴 때부터 가르친다. 심지어 아이들의 놀이 문화도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하거나 주말농장에서 채소를 가꾸고 갯벌에서 조개를 채집하는 자연친화적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명품 옷을 입히고 값비싼 외국어 학원에서 경쟁적인 교육을 시키며 극성을 부리던 몇 년 전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출산율이 저하되면서 각 가정마다 아이들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더 귀중해지고 있다. 소중한 내 아이를 위해 자연친화적인 웰빙 개념을 이용한 육아가 성행하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시간과 정성, 비용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요구되는 웰빙육아를 선택하는 부모들의 행동은 자녀를 소중히 하고 교육열이 높은 우리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부모들의 이러한 높은 기대에 비해 현실적으로 보육시설은 턱없이 질적, 양적으로 부족하다. 출산율의 저하가 아이들을 기를 여건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열망이 아직 제도적으로 반영되기에는 요원한 것 같다. 심지어 부모들이 초·중·고등학교 급식의 질적 향상을 위해 식당을 학교 직영화 하는 것, 급식 재료를 국산 농산물로 하는 것을 원하고 있지만 이 역시 예산문제를 이유로 언제 이루어질지 의문이다. 비용과 정성이 더 들더라도 아이들에게 건강한 웰빙식품을 먹이고자 하는 부모들의 마음과 우리 사회제도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전 세계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리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높은 관심이 과열된 사교육으로만 갈 것이 아니라 진정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위한 웰빙 문화를 만드는데 기여하도록 더 적극적인 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내 자녀를 위해 웰빙 개념을 선택한 부모라면 진정한 웰빙은 더불어 사는 공생의 삶이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 자녀만을 위한 웰빙은 진정한 웰빙 생활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을 잘 보존하고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잘 더불어 사는 건강함을 가져야만 진정한 웰빙이 가능하다. 최근 불고 있는 웰빙 바람이 성장위주의 지나친 경쟁의 부작용을 경험한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러한 유행이 “내 자식만”을 외치는 부모들의 이기심도 잠재울 가능성 또한 크다. 모두가 획일적으로 성공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게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웰빙 문화가 말해줄 것이다. 그동안 정부에서 온갖 제도적 방법을 동원해도 막지 못했던 과도한 사교육 열풍도 부모가 웰빙 문화를 몸소 체험해봄으로써 한풀 꺾이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한 때의 유행처럼 웰빙문화가 반짝하고 지나가지 않고 우리 사회에 오래 머무르면서 진정한 내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고급문화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단순히 외형적 웰빙식 소비문화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주, 몸과 마음 모든 부분에 깊숙이 들어와 환경과 인간의 공생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사회운동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우리 어른들의 사고가 진정한 웰빙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나간다면 자녀양육의 방향도 제자리를 찾아 차분히 나아갈 것으로 믿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좋은 문화적 변화가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되기를 고대한다. 신의진 연세대 소아정신과 교수
  • [에듀짱] 강남교육청이 운영하는 구룡초 통일체험관

    [에듀짱] 강남교육청이 운영하는 구룡초 통일체험관

    “너희들은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5학년 다예(12)가 친구들을 둘러봤다.표정들이 사뭇 진지하다.“이산가족이 만나기 위해서는 필요하지.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도 국민들이 원하지 않을까?” 소현(12)이는 자신있는 표정이다.다예도 지지 않는다.“더 못살게 될 수도 있어.(통일되면)우리가 (북한을)도와줘야 하잖아.” “그렇지만 북한은 노동력이 강하잖아.” 해영(12)이는 평소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해영이의 응원을 받은 소현이도 “맞아.스포츠도 강해져.”라며 의기양양했다.세은(12)이는 아까부터 친구들의 토론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듯 말이 없다. “넌?” 셋의 눈은 오늘따라 조용하기만 한 세은이에게로 쏠렸다.“난 반대야.통일이 되려면 (그 전에) 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잖아.” 세은이의 설명에 셋은 의외라는 표정이다.“서로의 장점을 살리면 더 잘 살 수 있을텐데.” 아이들은 토론한 내용을 종이에 함께 적어내려갔다. 지난 7일 오전 서울 개포4동 통일체험관 전시실.한 조를 이룬 5학년 3반 다예와 해영,소현,세은이는 선생님이 내준 문제를 해결하느라 아까부터 머리를 맞대고 토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같은 시간 전시실 옆 영상실에서는 같은 학교 5학년 2반 아이들이 ‘남북문화의 이해’라는 비디오에 푹 빠져 있었다.남북의 문화 차이를 5∼7개의 에피소드 형식의 드라마로 꾸민 비디오에 지루해하던 아이들도 호기심을 드러냈다.이들은 각 에피소드마다 퀴즈 형식으로 꾸며진 드라마에 앞다퉈 답을 외치며 즐거워했다. 이날 체험관을 찾은 손님은 서울교대부설초등학교 5학년 2반과 3반 학생 60여명.통일교육 재량수업의 일환으로 이뤄지고 있는 현장 수업시간이다.통일체험관은 강남교육청이 구룡초등학교 안 80여평의 공간에 단층으로 조성한 초등학생 통일교육을 위한 체험관이다.지난해 9월 문을 연 이래 지금까지 강남교육청 관내 50개 초등학교가 모두 한 차례씩 찾을 정도로 인기다.방학과 주말을 빼고 거의 매일 학생들의 방문이 이어진다. 학생과 교사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통일교육에 대한 다양한 학습자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전시실에는 북한의 사회생활과 풍습,특산물,교육,의식주,언어생활,정치,금강산 등 북한의 생활·문화 등 사진이 곁들인 게시판이 벽면을 따라 자리잡았다.북한의 의약품과 화장품,학용품,옷,주방용품,잡화류,공산품 등 50여점도 따로 전시돼 있다.40여명이 동시에 시청할 수 있는 영상실은 통일 관련 비디오 19편을 갖추고 있어 인솔 교사들이 평소 보여주기 어려운 학습자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인솔 교사들이 활용할만한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도 제공한다.즉석에서 활용할 수 있는 학습지만도 남북의 언어·문화 차이를 맞혀보는 퍼즐놀이를 비롯,남북통일 4행시 짓기,북한말 바로알기,통일기원 편지쓰기,통일 캐릭터 만들기,통일 O×퀴즈,북한 수수께끼 풀기,통일 놀이 등 10여가지에 이른다.때문에 교사들은 미리 학습자료를 준비하지 않아도 현장에서 학생들 수준과 흥미에 맞는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강남교육청은 두 달에 한 차례씩 관내 초등학교의 신청을 받아 일정을 결정한다.입장료는 없다. 인솔교사인 이계수(42·여)씨는 “요즘 학생들은 ‘통일을 왜 하나.’하는 식으로 무관심한 경우가 많아 통일교육에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면서 “체험관은 학교에서 활용하기 힘든 다양한 자료들을 갖추고 있어 아이들 교육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차이나 리포트 2004] (36)인재를 잡아라

    [차이나 리포트 2004] (36)인재를 잡아라

    ‘축소인봉(築巢引鳳·둥지를 만들어 봉황을 끌어들인다.)’ 중국의 해외 유학인력 유치 정책을 요약하는 키워드다.‘봉황’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중국 유학생을,‘둥지’는 이들이 능력과 열정을 한껏 발산할 수 있는 최고의 기업환경을 가리키는 말이다.중국이 최근 몇년간 축소인봉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그동안 귀국에 걸림돌이 됐던 모든 제도가 이제는 유학생을 돌아오게 하는 순풍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 6월24일 오후 베이징 중관춘 지역에 자리잡은 국제부화원 2층 베이징사지과기유한공사.정보보안분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이 회사는 지난 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에 진출,춘절을 제외한 올 상반기 넉달 동안 300만위안의 매출을 거뒀다.최근에는 하얼빈과 미국에 사무실을 추가로 열었다.26명의 직원을 둔 이 회사의 대표는 29살의 헨리 리우.대표적인 해외귀국파(해귀파海歸派)다.해귀파는 해외에서 공부를 마친 뒤 중국에 돌아온 전문인력을 가리키는 말이다.10년 전 가족을 따라 미국에 건너간 그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뒤 MBA를 거쳐 2001년 12월 고국에 돌아와 창업했다.그를 돌아오게 한 것은 중국 정부의 창업 지원책이었다.10년만에 찾은 고국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그는 “전략적으로 창업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창업을 결정했다.”면서 “미국 국적을 마케팅에 최대한 활용하겠지만 중국 국적을 다시 가질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이곳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베이징 상디 지구 유학인원발전원.국제부화원이 해외 유학생 창업인들을 위한 인큐베이터라면,이곳은 이들이 ‘엄마 품’을 떠나 홀로서기를 하는 곳이다.현재 이곳에는 40여개의 해귀파 기업이 입주해 있다.이곳에서 인터넷 전화 프로그램 및 셋톱박스 개발업체인 ‘차이나비즈원’을 경영하는 수이즈민(46)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기업에서 10여년 동안 정보기술(IT) 관련 기술을 개발하다가 2000년 귀국했다.창업우대정책이 마음에 들어서였다.3년간의 부화원 과정을 2년만에 마치고 지난해 3월 이곳에 입주한 뒤 직원 40명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그는 “현재 미국과 일본에서 주문이 밀려오고 있는데다 발전 가능성도 높다.”면서 “첨단기술 기업들이 근방에 밀집돼 있어 이곳을 당분간 떠나지 않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해귀파 창업자들은 대학 인력과도 직접 연계해 활동하기도 한다.위성항법장치 관련 교육 프로그램 개발업체인 베이징동방위성과기유한공사는 허베이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사장을 포함해 직원 3명의 작은 회사지만 기술력을 인정받아 대학원생 제자 겸 직원을 두고 있다.이 회사 사장인 장쥔린(48)은 ‘학생 직원’에게 첨단기술을 전수하는 것은 물론 대학원 성적까지 매긴다.대학원생 리우즈지앙(25)은 “사장님이 일도 가르쳐주고 논문지도까지 해준다.”면서 “국내에서는 배우기 어려운 것들을 해귀파 선배에게 자세히 배울 수 있는 점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이들 기업은 모두 베이징 중관춘에서도 가장 큰 규모인 하이뎬위안구(區)에 속해 있다.올 상반기 이 지역에서 등록한 창업기업 수는 모두 1만 100개.5분마다 하나씩 기업이 생기는 셈이다.하이뎬위안 위쥔 부주임은 “이 가운데 해귀파 기업이 3000여개에 이른다.”면서 “이 지역에서만 지난해 7억 9500만달러어치의 외자를 유치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해귀파 유치정책은 전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국가인사부 정책국 왕커리앙(41) 부국장은 “중국의 인력강국 전략의 핵심은 개혁과 개방,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투자이민법과 기술이민법을 포함,첨단기술과 금융,법률,국제무역,관리,기초연구 등 6개 분야에서 최고급 기술인력을 끌어오기 위한 ‘인재귀국계획’을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의 일화 하나.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관련,미국 방문길에 올랐던 1999년 주 전 총리가 시간을 쪼개 MIT를 찾았다.그는 중국 유학생들에게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진다.조국으로 돌아오라.”며 호소했다.현재까지 귀국한 해귀파는 18만여명.중국은 향후 20만명을 더 유치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외국에서 공부하고 창업했던 그들이 돌아오면 한 개인이 아닌,자본·첨단기술·인적 네트워크가 함께 들어온다는 판단이다.“인재 유치는 중국의 생존과 직결돼 있다.” 최근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가 인재공작회의에서 강조한 결론이다. 베이징 김재천특파원 홍성범 한중과학기술협력센터장 sbhong@stepi.re.kr ■ ‘해귀파’ 창업 원스톱서비스 |베이징 김재천특파원|중국 정부의 ‘해귀파’ 지원책은 모두 6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그린 패스’(Green Path·녹색통로)’는 해외 유학생들의 중국 정착을 돕기 위한 첫 유인책이다.베이징 거주민임을 증명하는 베이징 호구를 주고,자녀 입학 문제,차량과 주택 등 의식주를 해결하는 단계다.100㎡ 미만 규모의 집에 대해서는 집 값이 40만위안을 넘지 않으면 할부로 구입하도록 지원한다.자동차 세금은 전액 면제다. 창업자에게는 기업 세금을 면제해준다.특히 하이테크 기업으로 분류되면 3년 동안 기업세금을 전액 면제해주고 있다.이는 해외에서 학사 학위 이상을 받은 유학생 전원에게 적용된다.유학한 지역과 전공은 상관없다.기업 등록에는 단 3일이 걸린다.일반적인 기업들이 5∼6일 걸리는 것과는 대조적이다.기업을 설립하려는 유학생들은 전문기구가 법률,시설,등록 등 창업에 드는 번거로운 행정 사항을 원스톱으로 해결해준다.국적이 외국인으로 돼있다 하더라도 10만위안이면 누구나 등록할 수 있다. 둘째는 유학인원창업서비스총부에서 주관하는 서비스 체계다.미국 실리콘밸리와 메릴랜드대,캐나다 토론토,일본의 도쿄,영국의 런던 등 해외 5개 네트워크에서 유학생들의 귀국을 돕는다.인큐베이터 체계는 유학생들의 창업을 말 그대로 부화하는 단계다.중관춘 하이뎬위안 창업원과 왕징 창업원 등에서 총괄적으로 지원하고 생명과학원,소프트웨어원 등에서는 전문 분야별 지원을 맡는다. 대학 공유 체계는 중국 내 대학과 기업의 자원을 공유하는 산학협력 방안이다.대학 근처에 창업 관련 기관을 밀집시켜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유도한다.프로그램 보급 체계는 매년 1월과 5월 투자상담회를 열어 창업을 희망하는 유학생과 투자자를 1대 1로 연결시켜주는 정책이다.베이징의 경우 베이징 지적재산권거래소에서 투·융자를 전담한다. 자금지원 체계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기업들에 무상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이다.다양한 조건과 평가에 따라 최고 10만위안까지 아무런 조건 없이 지원한다.과학기술부의 중소기업 창업기금,인사부의 우수기업 창업기금 등 부처별 기금 외에 8·53기금,9·73기금 등 정부 프로젝트에 의한 기금은 별도로 신청할 수 있다.프로젝트별 기금 대상자로 확정되면 정부 지원액의 50%를 기업이 속한 부화원에서 추가 지원한다. patrick@seoul.co.kr ■ 해외 전문인력 영입에 총력 해귀파와 함께 중국의 인재 유인책의 또하나의 축은 해외 기술인력 유치전략이다.지난해 10월 중국 인사부와 상무부,국가공상총국 등은 ‘중외합자 인력중개기구관리 잠정 규정’을 발표했다.이는 일정 조건만 맞으면 외국인 인력 중개업체가 중국과 합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한 것으로,외국의 헤드헌트 기업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결정이었다. 광둥성은 지난해 말부터 외국인의 자녀교육과 사회보장을 위해 내국인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이른바 ‘그린카드’를 발급하고 있다.베이징시(市)는 지난해부터 주요 외자기업 임원들에게 승용차 및 주택구입비를 보조하고 있다.헤이룽장성의 하이린시(市)도 관내에서 1년 이상 사업한 외국인 석·박사에게 연간 3만위안의 장려금을 준다. 중국 기업들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높은 실업률로 첨단 전자·기계전기 분야에서 수십만명씩 쏟아져 나오는 일본의 고급 인력에 침을 흘리고 있다.언어가 통하는 타이완·홍콩계 첨단 인력들도 주 선호 대상이다.타이완에 3∼5년 뒤지고 있는 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LCD) 및 유기발광다이오드(OLE D) 관련 기술인력을 모셔오는 것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중국의 대표적 정보통신 기업인 화웨이(華爲)는 앞으로 인도 소프트웨어 전문인력 1500명을 유치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전문인력을 수입하지 않고는 고속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국내 하이테크 인력의 해외 이직 규모는 2001년 3000명에서 2002년 4200명,지난해 5100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이 가운데 반도체와 LCD,플랜트,통신기기,자동차 설계 등의 전문 기술인력 비중이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한다.하이닉스의 경우 지난해와 올 들어 반도체 설계 부문 핵심 기술인력 20여명이 중국과 타이완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대부분 외환위기 당시 실직했던 인력과 최근의 경제상황에 따른 실직자들이 중국 기업들의 스카우트 목표가 되고 있다. 홍성범 한중과학기술협력센터장 sbhong@stepi.re.kr
  • [후진타오 시대] (하)한·중 관계의 미래

    |베이징 오일만특파원|평소 “인민의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진정한 통치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해온 후진타오(胡錦濤) 당총서기는 북한 주민들을 기아 선상으로 이끈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 대해 그리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념에서 보다 자유로운 ‘후진타오 시대’의 대북 관계는 폭넓은 실용주의 노선이 향후 북·중 관계를 알리는 ‘나침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혈맹의 분위기가 지속돼 온 군사 분야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란 분석이다. 중국 전문가들은 “무조건적인 후원이나 지원보다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 속에서 국익이 주요한 잣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중유와 옥수수 등 에너지·식량의 무상원조액도 서서히 줄어들면서 양국은 혈맹관계에서 ‘정상관계’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중국으로선 ‘북한 지렛대’를 활용,미국의 대중 압박을 돌파하려는 전략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또 경제성장과 2008년 올림픽을 준비하는 중국으로선 ‘한반도 현상 유지’라는 큰 틀에서 북한과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할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북한이 개혁·개방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피력한다면 비군사적 분야에서의 협력이 강화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반면 한·중 관계는 쾌청한 날씨 속에 ‘그림자’가 드러워진 형국이다.경제협력 분야에서는 수년 내 양국 교역액 ‘1000억달러 시대’가 도래할 정도로 더욱 강화될 것이란 전망에 이의를 제기할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상호보완의 관계 속에서 인적·물적 교류는 더욱 활발해지고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간 협력의 틀도 더욱 공고해질 것이란 분석이 많다.그러나 중국 경제 자체의 진폭이 한국 경제의 사활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요소는 언제든지 상존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양국 관계 발전에 놓인 최대의 장애물은 ‘고구려사 왜곡’ 문제이다.고구려사 왜곡의 원천인 ‘동북공정(東北工程)’ 사업이 사실상 후진타오 등 4세대 지도부의 후원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사회주의 이념의 퇴색 속에 지역·계층간 분열 요소가 더욱 확산되면서 중화민족주의는 오히려 강화될 개연성이 짙다.동북공정 자체가 강력한 민족주의적 성향에서 발현됐고 중화주의가 향후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을 경우 한반도와의 갈등 요소가 지속적인 ‘상수’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동북공정 등의 변경 역사연구는 사회주의 이념 후퇴에 따른 민족주의 강화 차원에서 이미 10여년 전부터 시작됐다.”면서 “13억 인구의 단결을 꾀하는 중국 정부로서는 중화주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이라고 진단했다. 총체적으로 한반도 특유의 ‘폭발 잠재성’을 감안할 때 후진타오 시대 역시 사안에 따라 양국이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는 불안정한 구도가 될 것이란 관측이 가능하다. oilman@seoul.co.kr
  • 儒林(179)-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79)-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사마천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윤희는 만만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무위의 도는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노자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놈 말 잘하네.옜다,이거나 가져라.그나마 태워버릴 작정이었지만….’” 사마천의 기록을 보면 노자는 이미 자신이 써 두었던 ‘도덕경’을 윤희에게 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윤희의 부탁을 받자 함곡관의 관사에 머물면서 며칠 만에 ‘도덕경’을 완성하여 윤희에게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런 의미에서 윤희는 노자가 남긴 단 하나의 제자인 셈이었으며,윤희가 없었더라면 인류가 낳은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과 또 하나의 롱셀러인 ‘도덕경’이 존재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동양뿐 아니라 서양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어 라틴어로 ‘라오시우스’,즉 ‘늙은 자식’으로 불렸던 노자.그가 어쨌든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채 신선이 되지 않고 5000여 자로 짧은 도덕경을 남긴 것은 인류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일 것이다.이 극적인 장면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노자가 윤희에게 준 그것이 바로 도덕의 깊은 뜻을 5000여 자로 새긴 상하 두 편의 ‘도덕경’이다.” 도덕경. 사마천의 기록처럼 5000여 자로 새긴 상하 두 편의 짧은 책.상편은 주로 도에 대해서 다루고,하권은 주로 덕에 대해서 다루고 있어 둘을 합쳐 도덕경으로 불리고 있는 노자의 경서.이 5000여 자의 짧은 경서를 통해 무위자연을 꿈꾸는 평화주의의 동양사상은 싹트게 되었다. 노자의 사상은 공자의 표현처럼 용과 같아 정확하게 지적할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무위(無爲)의 사상이다. 여기서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를테면 죽음이나 극단적인 게으름을 연상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런 것을 하겠다는 인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됨을 뜻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무위는 ‘자연’이란 말과 같은 개념이다. 이 우주의 광대무변함,생명들의 신비로운 생성과 죽음,요컨대 일체의 존재들은 의식 없는 작용이며,작용 없는 작용이며,작용하는 주체가 없는 작용인 것이다.그렇다고 그 생성력이 허술한가 하면 정반대로 의식이 없는 작용이므로 최고의 ‘진선미’를 갖춘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따라서 노자의 무위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즉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못하는 일 없이 다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는 높은 자도, 낮은 자도,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없는 균분주의(均分主義)인 것이다.노자는 도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도(天道)는 활을 당기는 것과 같다.높은 자는 누르고,낮은 자는 들며,남는 것은 덜며,모자란 것은 이를 보충한다.천도는 남는 것을 덜고,모자란 것을 보충하지만 인도(人道)는 그렇지 않아서 오히려 모자란 데서 덜어내 남는 자를 보태주고 있다.” 노자의 이런 균등사상은 플라톤이 말하였던 이상국가와 아주 가깝다.플라톤은 그의 저서‘법’에서 자신이 꿈꾸던 이상주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그들은 고립상태에 있으므로 서로 우정이 두텁고 의식주가 모자라지 않았으므로 심한 빈곤에 빠지지 않으며,궁핍 때문에 서로 쟁탈하는 일이 없다.금이니 은이니 하는 것이 없으므로 부라는 것도 없으며,빈부가 없는 사회이기에 횡포나 부정,질투 따위가 발생할 여지 또한 없다.그러기에 그들은 순박하고 선량하다.그들은 무엇에나 숙련해지는 일이 없어서 요즘과 같은 기술이나 예술도 필요치 않았다.따라서 그들은 입법자(立法者:정치가)를 가질 필요가 없었고,모든 것을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습관대로 살았다.”
  • [儒林 속 한자이야기] (36)

    儒林 173에는 布衣(베 포/옷 의)가 나온다.布衣는 ‘베로 지은 옷’,‘벼슬 없는 선비’를 이른다.포의는 庶民(서민)의 옷으로,서민들은 노인이 되기 전 비단 옷을 입을 수 없다는 데서 온 말이라고 한다. 布는 본래 ‘父’(부/보)와 ‘巾’(수건 건)를 합하여 ‘베’를 뜻하는 글자이며,경우에 따라 ‘널리 알리다.’‘베풀다.’의 뜻으로도 쓰인다.‘布告’(포고:고시하여 널리 일반에게 알림),‘布施’(보시:남에게 물건을 베품),‘布衣寒士’(포의한사: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가난한 선비)에 쓰인다. 衣는 웃옷,즉 ‘저고리’를 본뜬 글자이다.허신은 ‘설문해자’에서 ‘옷을 衣라고 함은 사람이 옷에 의지하기 때문이며,웃옷은 衣(의)라 하고,아래옷은 裳(치마 상)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衣자가 들어간 말에는 ‘衣服’(의복),‘衣食住’(의식주),‘衣裳之治’(의상지치:법을 정할 필요없이 인덕으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교화함) 등이 있다. 史記(사기) ‘項羽本紀(항우본기)’에는 이런 故事(고사)가 전한다.秦(진)나라의 도읍 咸陽(함양)에 입성한 項羽(항우)는 3세 황제 誅殺(주살)과 阿房宮(아방궁) 全燒(전소),始皇帝(시황제)의 무덤 해체,막대한 金銀寶貨(금은보화) 掠取(약취),부녀자 유린 등 반인륜적 행위를 일삼았다.側近(측근)인 范增(범증)을 비롯한 신하들이 부당성을 極諫(극간)하였으나 항우는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주랴.’라고 하면서 默殺(묵살)하였다. 항우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향 彭城(팽성)으로 遷都(천도)하여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의 功德(공덕)을 알리는 데에는 성공한다.그러나 關中(관중)지역을 차지한 劉邦(유방)에게 대패하여 천하를 잃고 말았다.여기서 유래한 錦衣夜行(비단 금/옷 의/밤 야/다닐 행)은 ‘아무 보람 없는 행동을 자랑스레 함’을 뜻하게 되었다. 역사 속에서 布衣를 자처한 사람 가운데 중국 춘추시대의 介之推(개지추)가 있다.그는 권력투쟁의 와중에 19년간 망명생활을 한 公子(공자) 重耳(중이:文公)를 줄곧 수행하였다.그러나 그들의 망명생활에 終止符(종지부)를 찍는 朗報(낭보)가 왔다.主君(주군) 중이가 진나라의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이 소식과 함께 주군을 따르던 무리들은 꿈에 부풀어 황금빛 미래를 그릴 뿐,과거의 쓰라린 기억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배에 오르는 순간 그들은 누더기와 쪽박을 모두 강물 속으로 던졌다.깜짝 놀란 개지추는 그들을 挽留(만류)하며,“우리의 同苦同樂(동고동락)이 이날을 위해서였단 말이오? 어려웠던 과거를 쉽게 잊는 사람은 행복을 논할 자격이 없소.”라고 개탄했다.개지추는 그 길로 벼슬의 미련을 접고 고향 길을 찾았다. 개지추의 예견대로 論功行賞(논공행상)에 눈먼 측근들은 나라와 백성의 安危(안위)보다 일신의 영달에 혈안이었다.민심은 離反(이반)되고 국가 財政(재정)은 枯渴(고갈)되어 갔다.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깨달은 진문공은 이 難局(난국)을 타개할 인물은 개지추 뿐이라는 判斷(판단)에서 개지추를 찾았지만 그는 끝까지 綿山(면산)에서 布衣之士(포의지사)로 생을 마감했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송기원의 뒷골목 맛세상] 피맛골

    [송기원의 뒷골목 맛세상] 피맛골

    피맛골이라는 지명을 스쳐듣고 우연히 그곳을 찾아든 이들은 대부분이 우선,‘에게,이게 뭐야.’ 하고 눈살부터 찌푸릴 터이다.당연한 반응이다.서울의 어디를 가나 흔하게 대할 수 있는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풍경이 애써 나들이한 발걸음을 선뜻 골목 안으로 한 걸음 더 옮기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광화문 교보문고 뒤편에 남아 있는 피맛골은 고작 두 사람이 지나쳐도 쉽게 어깨를 부딪치게 마련인 비좁은 골목길에다가 길이도 20여m를 넘지 않는다.그렇다고 무슨 뛰어난 음식점이 즐비하게 들어찬 것도 아니다.고작해야 열차집이라는 두어 평 남짓한 빈대떡집과 대림식당이라는 생선구이집,그리고 반대편 초입에 서린낙지라는 간판의 낙지집이 한 눈에 들어올 뿐이다. ●의식주 해결할 물산의 집합소 이 교보문고 뒤편의 피맛골 말고도 종로 2가에서 인사동으로 접어드는 어름에 또 다른 피맛골이 남아 있다.서피맛골이라는 이름으로 제법 그럴듯한 장명등 간판까지 내걸고 떠들썩한 주점가로 변하여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지만,정작 인사동 일대의 관광지구 작업에 편입되어 피맛골 자체를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변질시킨 듯한 싸구려 지분 냄새를 숨길 수가 없다. 피맛골이란 이름의 이 특이한 뒷골목은 원래 종로 1가 교보문고 뒤편에서 시작하여 종로 2가를 거쳐 3가에 이르기까지 연결되어 있었지만,큰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도중에 여기저기 골목이 끊기는 바람에 결국 두 곳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나로서는 이 두 곳 중에서도 피맛골 하면 역시 교보문고 뒤편의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골목이 그 이름에 걸맞은 것 같아서 못내 그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조선시대에는 지금 종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 부근을 운종가라고 하였는데,이 운종가는 소위 ‘상것’들이 사는 곳이었다.운종가의 이 ‘상것’들은 사농공상이라는 봉건 가치의 가장 아랫자리를 차지한 상인들로,종이나 백정 혹은 갖바치 같은 다른 상것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천한 신분이었다. 당시의 가장 윗자리 신분에 있던 사대부의 입장에서 보자면,이 운종가의 상것들은 여느 상것들과도 달리 참으로 처치곤란한 일종의 필요악이었다.애오라지 학문과 수신에만 힘써 마침내 입신출세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필생을 바쳐야 하는 사대부로서 비록 굶어 죽을망정 어찌 당장에 급하다 하여 먹고 입고 자는 따위 천한 값어치에 눈길을 줄 수가 있으랴. 바로 그런 윗자리 신분의 필요에 따라 그들 대신에 먹고 자고 입는 데 필요한 모든 물산들을 주무르는 이들이 모여 이룬 거리가 다름 아닌 운종가였다.종각 네거리 일대에 이른바 육의전이 늘어섰으니,포목 무명,명주,종이,모시,생선 등이 운종가의 주된 물품이었으며,나아가 구리개나 동대문의 배우개 저자거리에는 옥패물,유기며 사기그릇,호랑이 가죽이며 수달가죽,엽초,과일 등 조선 팔도의 모든 물산들이 빠짐없이 다 모여들었다. ●윗자리 행차 피한데서 유래 운종가가 번화하면 할수록 높은 가마 위에 앉아 물렀거라,비키거라,호령과 함께 이곳을 지나치는 윗자리들은 저마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외로 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쯧쯧,선현께서 이르시되 상업이 흥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느니….’ 운종가의 상것들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윗자리들이 또한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비록 신분상 아랫자리에 위치한 천한 상것이라지만,누구보다 영리하고 사리에 밝아 윗자리들의 허허실실이며 허장성세를 뚜르르 꿰뚫는 데다가 이재와 처세술 또한 뛰어나 정도 이상의 부를 이루어 먹고 입고 자는 일에 신분에 걸맞지 않은 호화를 누리는 그들로서는 윗자리의 때 아닌 눈살이며 외고개짓이 마음 편할 수는 없었다. ‘쳇,그놈의 잘난 벼슬 좀 잡았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란….’ 이런 아랫자리와 윗자리 사이의 눈살이며 외고갯짓이 한데 어울려 운종가 뒷골목에 언제부터인가 희한한 명칭의 골목길이 생겼으니,바로 피맛골이었다. 운종가에 한번 윗자리의 행차가 떴다 하면,아랫자리들은 재빨리 뒷골목으로 숨어들어 윗자리의 행차를 피하다 보니 뒷골목 이름 자체가 피맛골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렇듯 윗자리를 피해 숨어든 아랫자리들을 노려 다시 싸리나 간짓대에다가 술을 빚는 용수를 내건 선술집이 생기고,그 옆에는 다시 1m 남짓한 백지 괘등을 내건 장국밥,설렁탕,곰탕집들이 생겨나니,피맛골은 윗자리들은 결코 넘볼 수 없는 아랫자리들만의 공간이 된 것이다.아랫자리들이 만든 이 소중한 놀이공간은 피맛골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봉건시대 500여년을 면면히 맥을 이어왔다. 만일 그대가 아직도 이 시대의 아랫자리라고 여기거나 혹은 사는 일 자체를 힘들어한다면 한번쯤은 피맛골로 발걸음을 옮길 것을 권하고 싶다.함께 올 동료가 없다면 스스럼없이 혼자 와도 좋다.그리하여 이제 막 땅거미가 스멀거리기 시작하는 피맛골에 접어들어 열차집(02-734-2849)의 허름한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서라.벌써 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 자리라도 가서 낯선 사람에게 합석할 것을 부탁하라.백이면 백 기꺼이 응해줄 터이다. ●빈대떡에 소주 몇잔… 세상 시름 훌훌 마침내 자리를 잡으면 3장에 7000원인 빈대떡 한 접시에다 소주 한 병을 시켜라. 빈대떡이 아니라면 굴전이나 파전을 시켜도 좋다.그리하여 술과 안주가 탁자에 놓이면 소주 한 잔을 따라서 목 안에 깊이 털어넣어라. 그리고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그대는 이미 혼자가 아니다.얼핏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그대에 비해 크게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는 얼굴,한 잔의 소주 혹은 한 사발의 막걸리에 이미 불콰하게 술기운이 오른 얼굴,바로 그대 자신의 얼굴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에서 그대를 이 시대의 아랫자리에 위치하게 한 윗자리들의 허허실실과 허장성세에 대해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있을 터이다. 그대가 술과 함께 밥도 먹을 작정이라면 열차집만이 아니라 옆에 있는 대림식당(02-730-1665)으로 가도 좋다.삼치와 굴비,고등어 따위 생선구이 백반들이 저마다 5000원에다가 된장찌개 또한 맛이 뛰어나다.이 대림식당을 끼고 좀더 골목으로 접어들면 몇 걸음 안 가서 부산복집과 처마를 나란히 한 청진식당(02-732-8038)을 만나게 된다.불고기와 오징어볶음이 4000원에 비하면 넘칠 정도로 풍부한 양에다가 반찬은 물론 공기밥 한 그릇이라도 더 주기 위해 꾹꾹 눌러담는 주인아주머니의 큰 손이 먹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는 것 자체까지도 공연스레 즐거워지게 한다. 만일 그대가 혼자가 아니라 서너 명의 벗들과 함께라면 좀더 골목을 에돌아 5000원짜리 한정식으로 이름난 남도식당(02-734-0719)을 찾거나 교보문고 뒷길에 있는 안성또순이집(02-733-5830)에 가서 20년 동안 생태찌개 한 가지만을 지켜오는 특별하고 맛깔스러운 고집을 만나기 바란다.비록 한 냄비에 4만원이지만 네 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아 크게 비싸지는 않은 편이다. 일찍이 시인 신경림은 노래했다.‘못난 놈은 서로 얼굴만 봐도 반갑다.’피맛골 안의 여기저기에서 만나는 결코 낯설지 않은 얼굴,바로 자신을 닮은 얼굴들이 어찌 반갑지 않으랴.잘난 놈만 먹고 노는 게 아니라 못난 놈도 즐겁게 먹고 놀 수 있는 놀이공간이 피맛골이다.
  • 착취 당하는 ‘이라크드림’

    이라크에서 일하는 제3세계 노동자들 대부분이 헐값에 생명을 담보로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로부터 재건사업 계약을 따낸 대형업체가 이를 규모가 작은 업체에 하청을 주고,하청업체는 또다시 규모가 더 작은 업체에 재하청을 주는 과정에서 대부분 제3세계 출신인 현장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의식주마저 제대로 제공받지 못한 채 일한다고 2일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인도 남서부 케랄라주에 사는 다르마팔란 아자야쿠마르(29)가 이라크 북부도시 모술 근처에 도착한 것은 지난해 7월.고향에서 목수로 일하던 그에게 인력송출업체가 한 달에 200달러를 벌 수 있다며 해외 근무를 제안하자 월 5배의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1800달러의 중개료까지 고리대금업자에게 빌려 지급했다. 하지만 2년계약으로 쿠웨이트의 한 출장요리업체에서 일하게 된다던 당초 말과 달리 그가 도착한 곳은 이라크 북부 모술 근처의 미 공군101사단 캠프였다. 아자야쿠마르와 그의 인도인 동료들은 한 달에 200달러를 받았지만 노동시간은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2∼16시간이었다.임금은 동료 미국인의 10분의 1 수준.마실 물은 생수가 아닌 수돗물에 소독약을 넣어 먹어야했고 그 때문에 처음 수주일간 구토에 시달렸다.음식도 부족해 미군들이 남긴 것을 먹어야 했고 잠은 땡볕으로 끓는 텐트에서 잤다. 아자야쿠마르가 인력송출업체를 통해서 계약한 업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출장요리업체였고 그 곳은 다시 다른 업체의 하청업체였다.그렇게 4단계를 거슬러 올라 최종적으로 하청 관계의 맨 위에 있는 원청업체는 미국계 대형군납업체인 핼리버튼 계열사 KBR이었다. 인도 정부는 최근 미 국무부에 이 문제와 관련한 진상조사를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원청업체 소관”이라는 말뿐.KBR측도 인도 정부 대표들과 만난 뒤 “조치를 취해야 할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뺌했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