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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러 학술회의 주제발표 요지-러 극동역사문서보관소장

    세메넨코 도로포프 러 극동역사문서보관소장?한인의 극동 독립투쟁 신한촌에는 일본인들의 수색을 피해 조국독립투쟁을 벌인 한국 애국자들이 살았다.러시아에서의 한인 첫 의병은 육류유통업자인 최재형이었다.러시아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러시아어를 완벽히 구사했다. 이범윤이 있었다.국경전권위원이었는데 민병대 지도자였다.1906년 내부무 요원이었던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반일운동은 우수리스크 전역을 덮었다.한인촌들에서는 빨치산부대의 전투교육을 위한 군사교육이 시작됐다.1908년까지 러시아 지역에서 한국으로 약 1,000명의 전투요원들이 들어갔다. 한국내에서 일본의 점령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봉기를 목적으로 했다.모든지역에서 한국인들은 무기를 기부했다.반일투쟁이 러시아에서 거세지자 일본정부는 러시아에 유사행동을 금해달라고 요청했다.일본은 정규군을 빨치산에 대항해 투입했다.일부 빨치산부대가 러시아로 돌아왔다.연해주로 온 한국인들은 연해주가 반일본 투쟁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향후 독립활동의 도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리 블라디보스토크 유민특파원 rm0609@
  • 한·러 학술회의 주제발표 요지-尹炳奭 인하대 명예교수

    구한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사설로 유명한 언론인이자 애국지사인 장지연(張志淵)선생 기념사업회(회장 朴權相)창립 10주년을기념하기위한 한-러 학술회의가 22일 열렸다.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립극동대학 한국학대학 강당에서 열린 학술회의에는 이 대학 교수와 학생, 국내사학자,러시아 한국학 관계자 등 300여명이 참석,성황을 이뤘다. 다음은 ‘연해주에서의 한국 민족운동’이란 대주제로 한·러 학자들이 발표한 주제발표문 요지. ?러시아 연해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 러시아 연해주는 1905년 을사조약이래 1907년 군대해산과 광무황제의 강제퇴위,1910년 국치에 이르는 동안 의병과 애국계몽운동자,민족운동자들의 총집결지였다. 연해주 의병은 한때 3,000∼4,000명에 달했을 만큼 규모도 컸다.연해주 민족운동자들은 성명회를 조직해 한일합병의 원천무효도 선언했다.‘성명회 선언서’는 합병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민족적 혈전을 선언했다.이 선언서에는8,000여명의 민족운동자들이 서명했다.1911∼1914년간의 권업회활동,특히독립군양성과 대한광복군정부 건립노력도 두드러졌다. 3·1운동이 나자 연해주지역의 한인들은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시켰고 윤해와 고창일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했다.3월 17일 니콜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선언축하식과 시위운동도 전개했다.연해주 한인의 민족운동내지 조국독립운동 등은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일면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병무비리 기무사·헌병간부 22명 수사

    국방부 검찰부는 11일 기무사와 헌병 간부 22명이 병무비리에 연루된 혐의를 포착,수사중이라고 밝혔다. 검찰부에 따르면 영관급 장교 6명을 포함한 기무요원 15명과 헌병 7명 등 22명은 각각 300만∼500만원의 뇌물을 받고 군의관 등을 통해 병역면제나 의병제대를 알선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군검찰은 지난 7월 9명으로 구성된 기무·헌병 병무비리 수사전담팀을 구성했으며 혐의내용이 확인될 경우 범죄의 경중을 가려 사법처리하거나 중징계할 계획이다. 군검찰은 또 수사 대상자 가운데 3명이 최근 전역함에 따라 이들의 혐의내용을 검찰에 넘겨 수사토록 요청할 방침이다. 한편 국방부는 병무비리에 대한 철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수사결과에 대한의혹이 잇따라 제기됨에 따라 감사관을 팀장으로 10명의 조사반을 구성해 군검찰과 기무,헌병 등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우득정기자 dj
  • [21세기 내고장 역점사업](37)제천시

    충북 제천시가 청풍호 개발을 통해 중부권 최대의 내륙관광지로 도약을 노리고 있다. 제천시는 한반도의 내해(內海)로 일컬어지는 충주호 내에서도 가장 수려한 경관과 넓은 유역을 자랑하는 청풍호에 다양한 관광시설을 유치하고 있다.동양 최고 높이의 고사(高射)분수와 50m짜리 번지점프대가 들어서며 현재까지 도내에서 유일한 특급호텔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시는 21세기형 관광모델인 청풍호반 관광명소화사업을 위해 모두 8개 분야에 민자(民資)를 포함해 3,500여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청풍문화재단지 충주댐 건설로 수몰지역에 산재한 민속문화재를 이전 복원해놓은 곳으로 지난 85년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일대 1만7,000여평에 조성됐다.이곳에는 보물 2점을 비롯해 유형문화재 9점,기념물 1점,비지정문화재 42점,생활유물 2,000여점 등이 전시돼 있다.최근 제천유물전시관이 개관돼 각종 향토유물과 의병 관련 유물이 전시돼 있다. 시는 청풍문화재단지에 오는 2001년까지 41억원이 추가로 투입,전체 8만5,000평으로 확대 개발한다.수경공원과 야외전시장,음악분수,향토음식점과 특산품 판매장을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선다. ■수경고사분수 분수 노즐을 수중에 설치해 물줄기가 물속에서 부터 뿜어나오는 수경(水莖) 고사분수는 지난해 말 공사가 시작돼 현재 85%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내년말 완공 예정이다.높이 140m로 동양에서는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고사분수 외에 문양분수와 안개분수 및 조형물 설치 등에 40억원이 들어간다. ■번지점프장 내년까지 19억여원이 투입돼 국내 최대 규모의 타워에 50m짜리 일반용과 30m짜리 청소년용 겸용시설로 설치된다.하루 200여명이 이용할 수 있다. 번지 점프장이 완공되면 유람선이 수경고사분수와 옥순봉을 돌아오는 패키지 관광코스가 개설될 예정이다. ■옥순대교 충주호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옥순봉이 있는 지역으로 제천시 수산면 상천리와 괴곡리를 잇는 길이 450m,폭 10.5m의 교량이다.내년말까지 모두 220억원을 들여 가장 아름다운 다리를 만든다는 목표로 건설하고 있다. ■만남의 광장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5개면 61개 마을 3,301가구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광장으로 3만여평에 조성돼 있다.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조각공원이 마련돼 있고 고사분수와 번지점프장,문화재단지를 한눈에 볼수 있다. ■교리관광지 조성사업 체류형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대규모 숙박시설과 놀이시설로 추진되고 있다.지난 89년 추진된 이래 사업이 지지부진하다 최근 들어 가속도가 붙었다.국민연금관리공단이 사업자로 민자를 포함해 1,200여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276실 규모의 특급 호텔사업이 현재 50% 정도 진행되고 있고 상가와 놀이동산,야외결혼식장,오토야영장,피크닉장 등 시설이 갖춰진다. ■금월봉 사업 제천시 금성면 월굴리 일대 2만7,000여평에 호텔 2동과 콘도6동,상가와 문화시설이 추진되고 있다.지난해 5월 관광지로 지정받아 오는 2002년말 완공될 예정이다. ■능강 ES리조트 수산면 능강리 일대 4만2,000여평에 빌라형 콘도 8동과 별장형 콘도 64동이 개장된다. 이밖에 청풍면 계산리 일대 4만2,000평에 콘도와 모텔,청소년수련원,유스호스텔 등이 들어서는 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으나사업자는 아직 선정되지 않았다. 제천 김동진기자 kdj@ * 청풍명월 유래 흔히 충청도를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이라고 부른다.신선한 바람과 밝은 달이 어우러지는 이상향같은 곳이라는 말이다. 제천시는 청풍명월의 유래가 이곳 청풍면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월악산과 소백산을 비롯한 호쾌한 산세와 이곳에서 흘러드는 풍부한 명경지수에 교교한 달빛이 드리워진 모습에서 청풍명월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천시는 지난해 쓰라린 경험을 감내해야 했다.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특산품을 브랜드화하는 과정에서 충남도가 ‘청풍명월’을 선점했다.청풍명월은 충청도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충남에서 사용해도 무방하다며 대전·충남 농협지역본부가 관할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에 청풍명월이라는이름을 사용한 것. 졸지에 청풍명월이라는 상표를 사용할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한때 광역자치단체간 분쟁으로 비화된 청풍명월 싸움은 일단 충남이 소유권을 갖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그러나 그전까지 같은 이름으로 쌀을 판매해오던 충북 청원군 옥산농협이 이의신청을 함으로써 최종 판단은 대법원에서 내려지게 됐다. *권희필 제천시장 인터뷰 “청풍호반은 이제 국제적인 휴양도시로 발돋움할 것입니다.현재 추진되고있는 사업만으로도 충분한 개발효과가 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권희필(權熙弼) 제천시장은 청풍호 관광개발에 매우 자신감을 보였다. 충주댐 조성 이후 한동안 휘몰아쳤던 충주호권 관광개발붐이 다분히 거품이었던 반면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공공자금과 민간자본이 함께 투입돼 사업자로서도 위험부담을 덜게 되고 그만큼 착실하게 추진되고 있다고 권시장은 밝혔다. 오는 2003년 청풍호 관광개발사업이 대충 마무리되면 이곳은 대규모 숙박·놀이·관광시설 등이 어우러진 종합관광지가 돼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권시장은 마치 청풍호가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설명했다. “일반인들은 값이 비교적 싼 국민연금 호텔과 조금 고급스런 별장형 콘도를 골라 잠을 자고 청소년들은 유스호스텔이나 청소년 수련시설에서 묵으며번지 점프와 수상레저를 즐기거나 산악등산을 즐깁니다.짬을 내 문화재단지를 찾아 선조들의 습속을 간접 체험하며 옥순대교쪽으로 환상적인 드라이브를 합니다” 권시장은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제천이지만 중앙고속도로와 국도,지방도가충분히 구비돼 있어 접근이 양호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중앙고속도로 제천∼원주간 2차선이 개통된 데 이어 4차선 확·포장 사업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으며 충주∼제천∼영월간 국도 확포장 사업도 오는 2003년까지는 끝날 예정이다. 충북선 전철화사업과 지방도 확·포장 사업 등으로 청풍호 관광효과가 배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권시장은 “충주호 뱃길 130리 가운데 풍광이 가장 뛰어난 청풍호반이 한반도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허파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확신에 찬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제천 * 청풍명월 유래 흔히 충청도를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이라고 부른다.신선한 바람과 밝은 달이 어우러지는 이상향같은 곳이라는 말이다. 제천시는 청풍명월의 유래가 이곳 청풍면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월악산과 소백산을 비롯한 호쾌한 산세와 이곳에서 흘러드는 풍부한 명경지수에 교교한 달빛이 드리워진 모습에서 청풍명월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천시는 지난해 쓰라린 경험을 감내해야 했다.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특산품을 브랜드화하는 과정에서 충남도가 ‘청풍명월’을 선점했다.청풍명월은 충청도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충남에서 사용해도 무방하다며 대전·충남 농협지역본부가 관할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에 청풍명월이라는이름을 사용한 것. 졸지에 청풍명월이라는 상표를 사용할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한때 광역자치단체간 분쟁으로 비화된 청풍명월 싸움은 일단 충남이 소유권을 갖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그러나 그전까지 같은 이름으로 쌀을 판매해오던 충북 청원군 옥산농협이 이의신청을 함으로써 최종 판단은 대법원에서 내려지게 됐다. *권희필 제천시장 인터뷰 “청풍호반은 이제 국제적인 휴양도시로 발돋움할 것입니다.현재 추진되고있는 사업만으로도 충분한 개발효과가 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권희필(權熙弼) 제천시장은 청풍호 관광개발에 매우 자신감을 보였다. 충주댐 조성 이후 한동안 휘몰아쳤던 충주호권 관광개발붐이 다분히 거품이었던 반면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공공자금과 민간자본이 함께 투입돼 사업자로서도 위험부담을 덜게 되고 그만큼 착실하게 추진되고 있다고 권시장은 밝혔다. 오는 2003년 청풍호 관광개발사업이 대충 마무리되면 이곳은 대규모 숙박·놀이·관광시설 등이 어우러진 종합관광지가 돼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권시장은 마치 청풍호가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설명했다. “일반인들은 값이 비교적 싼 국민연금 호텔과 조금 고급스런 별장형 콘도를 골라 잠을 자고 청소년들은 유스호스텔이나 청소년 수련시설에서 묵으며번지 점프와 수상레저를 즐기거나 산악등산을 즐깁니다.짬을 내 문화재단지를 찾아 선조들의 습속을 간접 체험하며 옥순대교쪽으로 환상적인 드라이브를 합니다” 권시장은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제천이지만 중앙고속도로와 국도,지방도가충분히 구비돼 있어 접근이 양호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중앙고속도로 제천∼원주간 2차선이 개통된 데 이어 4차선 확·포장 사업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으며 충주∼제천∼영월간 국도 확포장 사업도 오는 2003년까지는 끝날 예정이다. 충북선 전철화사업과 지방도 확·포장 사업 등으로 청풍호 관광효과가 배가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권시장은 “충주호 뱃길 130리 가운데 풍광이 가장 뛰어난 청풍호반이 한반도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허파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확신에 찬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제천 김동진기자
  • 진주名所에 ‘친일파 이름’ 눈살

    ‘진주 8경’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시 옥봉동 뒤벼리 인근 암벽 위에 새겨진 친일파 3명의 이름 각자(刻字)처리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지역 향토사학자 추경화(秋慶和·48·진주시 신안동)씨는 최근 “진주시 뒤벼리 일대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이재각(李載覺)·이재현(李載現)·성기운(成岐運) 등은 모두 친일파들의 이름”이라며 “이같은 일제잔재가 해방 54년이 되도록 존치돼 왔다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고 말했다. 암벽은 행인들의 눈에 쉽게 띄는 도로변에 위치해있으나 그동안 이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암벽에 새겨진 글씨는 한자체로,크기는 가로 세로 80㎝ 정도. 이들 중 이재각·이재현은 친형제로 모두 왕족출신이다.이재각은 대한제국관리출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후 특명일본국대사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한일병합’ 후 이완용과 같은 급의 후작(侯爵)작위를 받았다.이재현은 경상남도 관찰사와 비서원경을 역임한 자로 ‘을사조약’ 후 의병토벌에 앞장섰던 인물.성기운은 1904년 이후 경남·충북·경기도 관찰사를역임하고 ‘을사조약’ 후에는 농공상부 대신·중추원 부의장·장례원경 등을 역임했으며1910년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다. 암벽 처리문제를 놓고 추씨는 “그들의 이름을 지우고 그곳에 안내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시 관계자들은 “바위를 깨고 이름을 지울 경우 안전사고 등의 문제가 예상된다”면서 신중한 자세다.한 독립운동가는 “단지 이름만을 새긴 것이라면 사료로서는 별 가치가 없다”며 지워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한국광복군’ 창군 59돌…기념 학술회의

    조국독립에 헌신한 ‘혁명군’이자 민족국가 건설에 앞장선 ‘건국군’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 올해로 창군(創軍) 59주년을 맞았다. 한국광복군동지회(회장 김우전)는 이를 기념해 21일 상오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장에서 ‘한국광복군의 창군과 역할’이란 주제로 학술회의를 갖는다.이 자리에서는 광복군의 역할과 의의를 짚어보면서 광복군에 대한 자리매김을 새로 한다. 발제에 나선 신용하교수(서울대 사회학과)는 ‘광복군의 창군과 그 역사적의의’를 통해 “광복군은 중국 영토안에서 중국측의 지원없이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의 순수 헌금 4만원으로 창군됐다”며 “이는 창군 활동의 자주성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밝힌다. 특히 당시 중국 군사위원회의 ‘한국광복군 9개항 행동준승’을 받아들여야하는 현실 속에서‘한국광복군 공약’과‘한국광복군서약문’을 발표한 것은 광복군이 독립·건국의 혁명군 성격을 가진 임시정부 국군이었음을 명확히보여준다고 분석한다. 신교수는 또 “광복군 창군때 총사령관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暑) 사령관인이청천(李靑天)장군과 참모장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暑)의 연성 대장이었던이범석(李範奭, 후에 제2지대장 역임)장군을 임명한 것은 독립군이면서 민족사적 정통성을 가진 국군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시준교수(단국대 역사학과)는‘광복군의 활동과 역할’에서“광복군은 귀국할 때까지 5년8개월동안 중국 미국 영국 등 연합군과 함께 대일전쟁에 참가하는 등 조국독립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며 인도 버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영국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한 것을 그 예로 든다. 또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 광복군이 국내에 정진대(挺進隊)를 파견하고 중국대륙에서 군대조직의 확장 활동을 전개한 것은 자주 독립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중요한 사례라고 강조한다. ‘광복군이 국군 창설에 미친 영향’이란 발제에서 김행복씨(국방군사연구소 연구위원)는 “오늘의 우리 국군은 1907년 군대 해산에 항거했던 의병과한일합방 이후 구국항쟁을 벌였던 독립군의 정신을 이어받은 광복군에서 비롯됐다”고 밝힌다.아울러 그는 광복군을 비롯해 독립운동에 나섰던 군사단체는 사상과 전력에 관계없이 모두 국군에 흡수됐으며 특히 광복군은 임시정부와 함께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독립정신’으로 국군의 중추역할을했다고 말한다. 그는“광복군이 국군에 미친 영향중 하나는 바로 반공정신”이라며 “공산주의자들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나 단체는 이에 현혹됐으나 일찍이 이들의 실체를 파악한 광복군 출신들은 휘말리지 않아 현재의 국군의 모태가 됐다”고 지적한다. 정기홍기자 hong@
  • [대한시론] 日국왕 訪韓前 풀어야 할 일

    지난 9월 2일 김종필 총리는 한·일 총리회담에서 아키히토 일본국왕의 방한을 요청하면서,“2002년 월드컵 이전에 방한이 이뤄지면 한·일관계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내년이나 2001년의 방한을 거듭 요청했다.일본국왕의 방한을 요청한 한국정부의 자세가 국민의 미묘한 대일 정서까지 고려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먼 시각에서 볼 때 일말의 전진적인 점을 엿볼 수있다. 그러나 김 총리가 지난번 방일에 이어 이번에도 공식석상에서 일본어 실력을 과시한 것이라든가 국민의 대일 정서에 앞질러 ‘일본국왕’의 방한을 요청하는 정부의 자세는 아무래도 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개인적으로는일본이 과거 저지른 문제의 해결 없이 방한하는 것은 반대한다. 한국정부의 거듭된 일본국왕 방한요청에 대한 오부치 총리의 답변은 ‘환경 조성에 양쪽이 노력해 나가자’는 것이었다.‘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뜻’을밝힌 것이지만,뒤집어보면 한국이 분위기를 잘 조성해 더 간절히 요청하면방한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도 볼 수 있다.대답의 이면에는 일본국왕의방한이 그동안 잠재우고 있던 한국인의 대일 정서를 자극해 예측할 수 없는결과를 돌출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점도 숨겨져 있다고 본다. 오부치 총리의 대답은 한국민의 내면에 흐르는 형언하기 어려운 대일 정서를 한국정부보다 더욱 면밀하게 간파한 것이지만,환경 조성은 오히려 일본측이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무엇이 일본정부로 하여금 ‘일왕방한’ 요청에 ‘환경 조성’을 이유로 머뭇거리는 태도를 취하게 하는가.또 그 소리냐고 역정을 낼지 모르지만,한마디로 그것은 일본이 청산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과거사의 문제이다.한·일관계에서 아킬레스건처럼 중요한 대목마다 소리없이 나타나 양국 관계의 진전을 괴롭히고 있는 망령같은 존재가과거사이다.일본은 잊어버리기를 원하지만,한국인은 해방된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 아직 그 과거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일본국왕’의 방한이 바로 그런 과거사의 고리를 끊는 ‘환경 조성’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면 한국민은 한국정부만큼 그의 방한을 환영할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언제 이뤄질는지 알 수 없는 방한에 앞서,한·일간의 ‘불행했던’ 과거사의 앙금을 걷어내려는 일본국왕의 노력과 결단이 기대된다. 불행했던 과거사 청산문제를 다시 건드리는 것은,그같은 잘못을 더이상 반복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지를 촉구하는 것에 다름아니다.한·일간 과거사청산문제는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고 현재의 문제이며,한·일간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북한과 일본,중국과 일본의 문제이기도 한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다. 세계는 지금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지역간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동북아시아지역만 분단과 냉전체제,일본 군국주의의 미청산으로 지난 역사의 질곡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한·일간 과거 청산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관계,나아가 세계사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일본국왕은 그의 증조부 이래로 왜곡된 한·일관계의 한가운데 자리했던 만큼 방한에 앞서 과거 군국주의 침략행위에 대한 명백하고 솔직한 사죄가 있어야 한다.이것은 한국에 대한 표명일뿐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를 향한 것이며,일본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더 높이는 계기도 된다. 일본이 청산해야 할 과거사는 이제 일본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동학혁명 이래 부당한 군대 파견으로 동학군과 의병·독립운동자 수십만을 사살하였고,불법적으로 행한 한국 강점에 수많은 문화재의 강탈과 수탈통치,일제말기 1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의 강제연행과 사할린 동포,강제연행자들이 저축해놓은 저축금의 미반환 문제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지금도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377차까지 행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보여주듯이,일본정부가 관여를 부정하고 있는 약 10만∼20만의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과와 배상문제는 유엔 소위에서까지 결의된 것이지만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한국인들은 제사 때마다 일제에 의해 무참히돌아간 조상의 죽음에 동참하며 일본에 대한 다짐을 새롭게 한다. 한국인의 이런 고통의 한가운데 아직도 ‘일본국왕’이 자리하고 있다.과거사에 대한 앙금을 걷어내려는 가시적인 조치가 취해진다면,일본국왕은 한국의 국립묘지에서 일본 국민들을 대표하여 항일 독립운동가들에게 향불을 피우는 것도 거리끼지 않을 것이다.일본국왕의 방한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그때 한국민도 마음으로부터 일본국왕을 환영할 것이다. [李萬烈 숙명여대교수·한국사]
  • [義烈 독립투쟁](5) 안중근 의사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자 일제는 이를 ‘암살’이라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안 의사는 공판정에서자신은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공격, 처단했다고설명했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향반(鄕班)집안에서 태어났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안 의사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 있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팔아 진남포로 이사한 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였다.두 학교의 교장이 된 안 의사는 애국교육과 신학문 교육을 통해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안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설치하여 자신이 지부장을 맡고 부인과제수의 패물까지 모두 헌납하는 모범을 보였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고 한국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안 의사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의병부대를 조직,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在亨)등 연해주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아 300여명의 동포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추(煙秋·노보키에프스크)에서 의병부대를편성한 안 의사는 당시 이 부대의 실질적 통솔자였다. 안중근부대는 모두 세차례의 전투를 치렀다.1908년 4월 초순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 일본군 수비대 진지를 공격한 안중근부대는 단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는 귀환하였다.이어 1908년 7월 제2차전투에서는 함경북도 신아산(新阿山) 부근의 일본군 수비대를 수 차례 기습공격,10여 명의 일본군 병사를 생포하였다.청년 휴머니스트였던 안 의사는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공법’에 의거,무기만 빼앗고 석방하였는데 이것이화근이 돼 제3차 전투에서는 참패를 하고 말았다.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이 안중근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기습해온 때문이었다.겨우 목숨을 건진 안의사는 부하·동지 몇 명과 연추로 돌아왔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포신문 ‘대동공보’의 연추지국장으로 일하고있던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분할 협의차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도모하였다.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 사장실에서는 총무 유진율(兪鎭律),주필 정재관(鄭在寬),기자 윤일병(尹日炳)·이강(李剛)·정순만(鄭順萬),연추지국장 안중근,회계원 우덕순(禹德順) 등 7명이 모였다.이자리에서 안 의사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이토를 처단하겠다”고 자원하였고 우덕순도 자원하고 나섰다.특공대는 2개조로 나뉘어 안중근·유동하(劉東夏)조는 하얼빈에서,우덕순·조도선(曺道先)조는 채가구(蔡家溝)에서 거사키로 하였다.그러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채가구에서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함으로써 결국 거사임무는 안중근조에게 넘어갔다. 거사당일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주위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안 의사는 러시아 경비병에게 ‘취재차 나온 신문기자’라고 속이고는일본인 환영객 집단 구역까지 깊숙이 진입하였다.이날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자 안 의사는 여섯발의 총탄을 날렸는데 그 중 세 발이이토에게 적중하였다.거사에 성공한 안 의사는 그 자리에서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창하였다. 안 의사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거사는 ‘암살’이 아니라 한국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특공작전을 전개한 결과라고 누차 밝혔다.안 의사의 의거로 일제의 만주침략은 장기간 지연되었다.중국인들이 만주·중국 관내에서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방임한 것은 바로 안 의사와 한국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안중근 의사 직계후손 근황 안중근 의사는 부인 김아려(金亞麗)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장남 분도(芬道)는 6세때 사망해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분도보다 3살 위인 장녀 현생(賢生)씨는 백범 김구 선생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황일청(黃一淸·작고)씨와 결혼,은주(恩珠·71)·은실(恩實·68·미국 텍사스 거주) 자매를 두었다.은주씨는 남편 이용문(李容文·작고)씨와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남편 작고후 귀국,경기도 용인 수지에 살고 있다.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안 의사의 유일한 직계후손이다. 항주(杭州) 호강대학을 졸업한 차남 준생(俊生·1951년 45세로 작고)씨는 부인 정옥녀(鄭玉女·91년 작고)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현재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안 의사의 장손격인 준생씨의 장남 웅호(雄浩·67)씨는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은퇴,새크라멘토에 거주하고 있다. 간호대학 출신인 장녀 선호(善浩·70)씨는 한국인 2세와 결혼,4남매를 두었으며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다.차녀 연호(蓮浩·65)씨는 시애틀에거주하고 있다.정운현기자*白凡과 안중근家의 인연 19세의 청년 김창수(金昌洙·김구의 아명)는 1894년 양반사회를 타도하고자 황해도 동학농민전쟁의 해주성 전투에 선봉장으로 참여한다.그런데 당시 황해도에서는 반농민군 세력으로 의병이 조직되는데,그 대표적 인물이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박영효(朴泳孝)가 모집한 해외파견 유학생 70명에 선발되었다.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출세의 길을 버리고,대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청계동(淸溪洞)으로 들어갔다.1894년 황해도 동학군이 일어나자 이에 맞서 안태훈은 안중근 등 그의 아들과처자들까지 편입시킨 의병을 일으켰다.그 위력과 명성이 자자하여 황해도 동학군은 안태훈 부대를 두려워하였고,김창수 부대 역시 청계동을 특별히 경계하였다. 그런 안태훈이 청년 김창수에게 밀사를 보냈다.그 결과 두 진영 사이에는서로 공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공동원조까지 성립되었다.즉 안태훈은 비록 동학군을 토벌하는 입장이었지만 인재를 아끼고 있었고 개화에 뜻을 두고 있었지만 청일전쟁 전후의민족적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창수 부대는 점차 토호화하고 있던 같은 동학접주 이동엽(李東燁)부대에의해 해체되었다.얼마간의 잠적 이후 이듬해 김창수가 찾아 간 곳은 청계동의 적장 안태훈 집이었다.청계동에서 ‘적장(敵將)과의 동거’는 청년 김창수에게 중요한 인연과 계기들을 마련해 주었다.안태훈의 각별한 후원으로 김창수는 부모님과 더불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안태훈가(家)의 식객인 고능선(高能善)은 동학의 꿈이 깨진 청년 김창수에게 새로운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또다른 식객 김형진(金亨鎭)은 같이 의기투합해 청국원정을 떠나사선을 넘나드는 동지가 되었다. 김창수는 청계동에서 스승과 동지를 얻었을 뿐 아니라,안태훈가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안중근의 아우 공근(恭根),조카 우생(偶生)은 임시정부 시절 백범의 측근이 되었으며,질녀 미생(美生)은 백범의 맏며느리가 되었다.또한 안태훈과의 화해,고능선의 교도로 백범은 양반이냐,상놈이냐 하는 계급의식 이상의 차원,즉 조국·민족문제에 눈뜨게 되었다.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安의사 5촌조카 民生씨 편지 발굴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우리 나라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가문으로 꼽힌다.그러면 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은 해방후 어떻게 살았을까.지난 8월말 학술행사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본사 김삼웅(金三雄)주필이 연변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입수한 두 통의 편지에 따르면,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 가운데 더러는 해방된 조국에서 대접은 커녕 분단과 독재권력에 맞서 싸우다 ‘한많은 일생’을 마친 것으로드러났다. 김 주필이 중국서 입수한 편지는 지난 88년 한국에 거주하던 안 의사의 5촌조카인 민생(民生·생사불명)씨가 중국 연길(延吉)에 있던 사촌여동생 경옥(京玉)씨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경옥씨는 70세였다. 88년 1월 27일자 첫 편지에서 민생씨는 “지난 (87년)11월 15일 독립기념관장 춘생(椿生)형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너의 소식을 들었다”며 연락이 닿은 경위를 밝혔다.두 사람은 안 의사의 삼촌인 태건(泰健)씨의 손자녀들로 46년 7월 민생씨가 귀국하면서 서로 소식이 끊겼었다. 민생씨는 편지 서두에서 “해방후 형제·자매들이 귀국하였으나 모두 전재민(戰災民)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어 더러는 눈물을 흘리며 미국으로 떠나버렸다”며 해방후 집안 인척들의 이산을 안타까워 했다. 특히 민생씨는 “1961년 5월(‘5·16’을 지칭함) 조국의 평화통일 이념을주장했다는 이유로 나는 반국가범죄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경근(敬根) 당숙도 7년형을 선고받아 일제때 명근(明根) 당숙이 옥고를 치르시던 서대문형무소 특감(特監)8사(舍)에서 감옥살이를 했다”며 “해방,독립된 내조국에 돌아와서 또 감옥살이를 치러야 함으로써 우리 안씨 가문은 이역과조국에서 선후대(代)에 걸쳐 50여 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고 통탄해 했다. 안 의사 집안 가운데 안 의사의 사촌동생 경근과 5촌 조카인 민생씨는 해방후 유달리 험난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두 사람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장면(張勉) 정권 하에서는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준비위원회(민자통)에 참여하기도 했었다.5·16후 군사정권의 혁신세력 탄압 때 두 사람은 반국가범죄 혐의로 투옥됐으며 경근은 출옥 직후 작고했다. 민생씨의 경우는 ‘최악’이었다.1933년 만주에서 만주군에 붙잡혀 혹독한고문을 당한 후 도주하다가 다시 붙잡혀 양쪽 발끝을 작두로 절단당한 민생씨는 그 몸으로 감옥살이를 한 데다 68년 가석방으로 풀려났으나,업친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말년에는 지팡이와 의족에 의존해야 했다. 편지를 쓸 때 이미 70고개를 넘긴 민생씨는 “헤어진 동료들과 형제들이 그리울 때면 저 머-ㄴ 북녁(만주땅을 지칭한 듯)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가슴 쥐고 나무밑헤 쓸어진다 혁명군/가슴속에 솟는 피는 푸른 풀에 절벅해’… 이 노래를 부른다”고 적은 뒤 “가마귀도 우름을 멈추고 바람만 스치고지나갈 무덤없는 그들의 핏자죽 위에 한 송이 들꽃이라도 받쳐들고 가서 명복을 빌어드릴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며 눈물지었다.현재 민생씨는 생사가불명이다.광복회·국가보훈처·안중근의사기념관은 물론 사촌형인 안춘생씨마저 민생씨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 5월 28일자 두번째 편지에서 민생씨는 “과거 우리들은 안중근의 집안이라는 이유 때문에 왜놈들에게 죽어야 했고,징역을 살아야 했는데 해방후에는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들의 피해는 여전했다”며 역대 권력자 가운데 친일경력자들의 면면을 거론하였다. 정병학(鄭秉學·79)안중근기념관장은 “안 의사 집안의 인사 가운데 민생씨처럼 해방후 불우한 삶을 보낸 인사가 적지않다”며 “이는 해방후 친일·독재정권이 들어선 것이 주원인”이라고 말했다.정운현기자* 안중근家의 독립운동가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안 의사를 포함,모두 9명이 독립유공 공적으로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현재도 몇 명이 포상 심사중이다. 1909년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 안 의사는 독립유공훈장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대한민국장(1등급)을 받았으며,안 의사의 두 친동생 정근(定根)·공근(恭根)은 각각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또 사촌동생 가운데 명근(明根)은 ‘105인사건’으로,경근(敬根)은 임시정부 활동으로 각각 독립장을 받았다. 안 의사의 조카뻘인 ‘생(生)’자 항렬에서도 여러 명이 훈장을 받았다.대표적으로는 광복군 제2지대 구대장 출신으로 해방후 육사교장·국회의원·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한 춘생(椿生·87·독립장)을 비롯해 춘생과 친형제로신민부에서 활동한 봉생(鳳生·애국장),그리고 안 의사의 첫째 동생인 정근의 장남으로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원생(原生·애족장)과 둘째 동생공근의 차남낙생(樂生·애족장) 등이 있다. 이밖에도 납북이나 공적서류 미비 등으로 서훈이 보류된 인사도 여럿 있다. 우선 공근의 장남 우생(偶生)은 중경 임시정부 시절 임정 편집부 과원으로활동했으며 해방후에는 백범의 대외담당비서로 활동했으나 그 후 납북돼 포상이 보류돼있다.또 안 의사의 사촌 봉근(奉根)의 자제인 민생(民生)과 그의형 호생(鎬生) 역시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후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이유나 서류미비 등으로 아직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운현기자
  • 병무비리 군의관등 7명 적발

    국방부 검찰부는 3일 병역대상자의 부모로부터 뇌물을 받고 군 면제나 공익근무요원 판정 등을 내린 군 간부 7명을 적발,이 가운데 부산 기무부대 소속 5급 군무원 김모씨 등 기무요원 2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알선수뢰 혐의로 구속하고 방모 소령 등 군의관 5명을 수뢰 혐의로 불구속입건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95년 7월 임모씨로부터 아들의 병역면제 청탁과 함께 1,000만원을받았으며,기무요원인 김모 중사는 97년 6월쯤 국군부산병원 군의관 이모 중령에게 300만원을 건네주고 사병 3명의 의병 전역을 부탁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방모 소령은 국군수도병원에 근무하던 97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모두 11명의 현역입대자 부모로부터 1,560만원을 받고 이들의 아들을 의병전역시켰으며,군의관 김모 소령은 입영대상자 6명을 공익근무요원으로 판정해준 혐의를 받고 있다. 군검찰 관계자는 “군의관들은 수사과정에서 범죄 행위를 시인하고 반성한반면 기무요원들은 범행을 끝까지 부인함에 따라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가있다고 판단,뇌물액수에 관계없이 구속했다”면서 “군의관들도 죄질 등을고려해 처벌수위를 재조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군검찰이 거액의 뇌물을 받은 군의관들을 불구속 입건했는가 하면,기무요원 2명으로부터 1,300만원을 받고 허위판정해준 이모 중령을 입건조차 하지 않아 법적용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우득정기자 djwootk@
  • [義烈 독립투쟁](4)송학선 의사

    일제에 맞서 국권수호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의병·독립군·광복군·의사·열사 가운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다.신돌석(申乭石)의병장을 비롯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洪範圖)장군,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의사 같은 분이 그런분들이다.1926년 순종(純宗) 승하 직후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송학선(宋學善)의사 또한 그러한 인물 가운데한 분이다. 1893년 서울 천연동에서 출생한 송 의사는 13살 때 보통학교를 1년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또 극심한 가난 때문에 어려서는가족이 흩어져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구상점·사진관 등을 전전하며 호구(糊口)를 해결하기도 하였다.말년에는 영양실조로 각기병까지 걸려 고생한 송 의사였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은 배운 사람 못지않았다. 1926년 ‘금호문 의거’로 체포된 후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어떤 주의자(主義者)인가,사상가(思想家)인가?”라고 묻자 송의사는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답변하였다.송 의사는 사상·주의는커녕 배후세력이나 후원자조차 없었다.굳이 송 의사를 평가하자면 순수한 애국심에서비롯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송 의사의 의거는 1926년 4월 26일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승하가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쓰라림을 경험한순종의 승하 소식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망국의 슬픔을 절감하게 했던 것이다.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머리를 풀고 엎드려 궁성을 향해망곡(望哭)하였으며 서울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창덕궁으로 몰려들어 통곡하기도 하였다.고종 승하후 3·1의거를 경험한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군경(軍警) 총동원 채비를 갖춘 채 창덕궁 일대에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평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의사를 흠모해오던송 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하고 의거에 사용할 칼을 구입,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그러던 차에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송 의사는 사이토가 조문차 순종의 빈소가 있는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확신하고창덕궁 입구에서 처단키로 작정하였다.이튿날 송 의사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군중들 틈에 끼여 사이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사이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장소를 바꿔 돈화문 서쪽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던 송 의사는 오후 1시 10분경 고관 차림의 일본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그 중 1명이 사이토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얼마후 그들이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오자 송 의사는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 올라 왼쪽에 앉은 자의 오른쪽 가슴과 왼편 허리를 찌른 후 다시 중앙에 앉아 있는자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송 의사는 차에서 내려 인근 재동(齋洞) 방면으로 내달렸다.현장을 목격한 일경들이 추격하여 송 의사를 에워쌌으나 이들은 송 의사를붙잡기는커녕 오히려 육탄전에서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송 의사는 결국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일경 5,6명은 칼을 빼들고는 달려들지도 못한 채 한참 서서 송 의사를 바라보다가 돌멩이를 집어던졌다고 한다(‘동아일보’,1926.5.2).송 의사는 일경 수 명과 대치 와중에도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한편 송 의사가 처단한 자들 가운데 사이토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그들은경성부 평의원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사토 도라지로(佐藤虎次郞)·이케다 조지로(池田長次郞) 등 3인이었다.이들 가운데 칼을 맞은 다카야마는 즉사하고,사토는 중상을 입었다.또 육탄전 와중에 송 의사의 칼을 맞은 조선인 순사 오환필(吳煥弼)과 일본인 기마경찰 1명도 중상을 입었다. 일제에 피체된 송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 거사 이듬해인 1927년 5월 19일서대문형무소에서 3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송 의사의 의거는 비록 목표로삼았던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그 반향은 실로 대단했다.3·1의거 이후 급격히 활성화되었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또 일부 조선인들은 사이토의 교활한 ‘문화정치’ 전략에 일시적으로 말려들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바로 이러한 때 서울 한복판에서 한 순박한 애국청년의 의거를 계기로 조선민족은 다시 민족의식을 회복하게 되었고 비록 3·1의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이는 다시 6·10만세 의거로 불타오르게 된 것이다. 1962년 정부는 송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송 의사피체 후 보도된 신문기사에는 가족으로 부모와 동생 2명만 언급돼 있을 뿐처자에 대한 얘기는 없는 것으로 봐 의거 당시 송 의사는 미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현재 송 의사 관련 기념사업회나 추모모임이 없는 것은 물론 보훈처에서 유족의 근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나라를 위해 목숨을바친 순국선열이 가신 지 한 세기도 채 못돼 벌써 잊혀지고 있으니 안타깝고 부끄러운 노릇이다. 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문학박사*의거 현장 금호문 앞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좌우에는 작은 문 두 개가 있다.오른쪽으로는 단봉문(丹鳳門),현대그룹 사옥쪽인 왼쪽으로는 금호문(金虎門)이 있다. 바로 이 금호문 앞이 송학선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현장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 궁궐 가운데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지켜본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망국을 맞았기 때문이다.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순종은 황제 즉위 후 덕수궁에서 이곳 창덕궁으로 옮겨 기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일제는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시킨 후 ‘이왕(李王) 전하’ 혹은 창덕궁에 기거한다고 해서 ‘창덕궁 전하’라고 부르곤 했다. 일제는 ‘망국의 임금’인 순종을 위로한다는 미명하에 망국 이듬해인 1911년부터 인근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을 훼손하였다.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송 의사의 의거 현장인 금호문 앞 일대는 창덕궁 관광객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현재 이곳에는 송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물론안내판 하나도 서 있지 않다.창덕궁 관계자는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늘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사이토총독 어떤 인물인가 일제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처단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5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재임기간은 10년 1개월로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중임한 사람은 사이토가 유일하다.1856년 일본 이와테(岩手)현에서 태어난 사이토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인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이후 해군에서 승승장구,41세인 1898년에는 해군차관,1906년에는 49세의 나이로 해군의 수반인 해상(海相)에 올라 8년여 동안 자리를 지켰다.이어 1919년 8월부터 두 차례나 조선총독을 역임했고,1932년 5월 일본 내각의 수상에 취임하였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정치엘리트로 내각 수반직에까지 오른 사이토는두 얼굴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사이토는 3·1의거 후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이 가장 고조되어 있을 때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총독 취임 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슬로건 아래 문관(文官)총독제허용,헌병경찰제 폐지,지방자치제 실시,산미증산계획 등을 내걸었다.그러나이러한 사탕발림식의 제도는 그의 재임기간 내내 거의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강화된 무단통치로 나타났다.즉 문관출신 총독은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임명된 적이 없고,경찰은 이름만 바뀐 채 이전보다 더 늘었으며 증산된 쌀은 한국인의 입으로 들어가는 대신 모두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사이토는 부임 초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었다.경성(현 서울)에 부임하는 날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64세의 노 투사 강우규(姜宇奎)의사로부터 폭탄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24년 5월에는만주의 독립군단인 참의부(參議部) 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는 그와 그의일행을 공격,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결국 귀임 후 1936년 2월 26일 소위 ‘2·26사건’때 후배 청년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채영국 연구원
  • 교사들 교단 抗日투쟁 54년만에 ‘햇빛’

    일제때 청년교사들이 교원노동조합을 결성,조선인 위주의 교육을 주창하며교단에서 항일운동을 벌였던 사실이 밝혀졌다.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국내외에서 독립군이나 의병으로 활동한 선열들의 활약상은 많이 소개됐으나 교단에서의 항일운동 사실이 발굴되기는 처음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묻혀있던 청년교사들의 항일운동은 항일투쟁사 연구가인 추경화(秋慶和·48·경남 진주시 신안동)씨에 의해 광복 54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추씨는 최근 부산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이들에 대한 판결문을 찾아냈다. 일제 강점기였던 28년∼33년 사이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김두영(金斗榮·하동군 하동읍 두곡리)·이명상(李明祥·창원군 웅천면 북부리)·강용운(姜龍雲·함안군 군북면 소포리) 등 청년교사 18명이 우리 고대사를 가르치며민족의식을 고취하고,우리말의 중요성을 일깨우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옥고를치렀다. 이들은 1932년 경남 교원노동조합을 결성,노동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같은해 진해 동양제사공장의 파업을 지원하고,공장노동자 동맹파업을 유도하는 전단을 등사해 배포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경에 체포된 뒤 각각 징역 1년∼4년까지 선고받고 복역중 다음해 6월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진주 이정규기자 jeong@
  • 독립운동가 10명 후손 근황

    일제하 독립투쟁에 헌신한 순국선열·애국지사의 후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대의 위업을 현창하면서 꿋꿋하게 살고 있다.더러는 독립운동가 단체에서 활동하는 후손도 있다.몇몇 후손들의 근황을 살펴본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장손 최창규(崔昌圭·63)씨는 서울대 교수 출신으로 국내 최초로 서울대에 ‘한국학’ 과목을 개설한 주인공.국회의원과 독립기념관장을 거쳐 98년부터 성균관 관장으로 재직중이다.의암 유인석 선생의 유일한 손자 유준상(柳濬相·77)씨는 광복회 정화위원회 활동을 주도한 바 있으며 교편생활과 개인사업을 하다 현재는 은퇴,노후를 보내고 있다. 13도 의병총대장 이인영 선생의 손자 이종갑(李鍾甲·78)씨는 전직 경찰 출신으로 10여년째 순국선열유족회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조부를 비롯해 숱한 선열들이 순국한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관내 사무실에서 월간지 ‘순국(殉國)’을 발행해 오고 있다.의병장 운강 이강년 선생의 증손 이경규(李經揆·59)씨는 지난해 증조부의 의병전투상황을 기록한 ‘운강창의일록(雲崗倡義日錄)’을 공개한 바 있으며 역시 운강의 ‘작전지도’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바 있다. 초대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 이석희(李奭熙·67)씨는 대우그룹 공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통한다.서울대 졸업후 68년 대우그룹에 입사한 이씨는 그룹내 주요기업 사장·회장을 역임했으며 지난해 경영일선에서은퇴,㈜대우의 상담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씨의 부친은 내과의사로 유명했던 이의식(李義植)씨로 해방후 반민특위 검찰관을 지냈으나 6·25때 납북됐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외아들 신수범(申秀凡)씨는 91년 작고했다.지금은 며느리 이덕남(李德南·56)씨가 단재 선생의 기념사업 활동을 하고 있다.단재의손자 신상원(申尙原·28)씨는 올해초 국가정보원에 특채됐는데 이는 단재와같은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李會榮)선생의 손자인 이종찬(李鍾贊) 국민회의 부총재가 안기부장 재직 시절 배려한 결과다. 백암 박은식 선생의 후손은 현 독립기념관장 박유철(朴維徹·61)씨로 박씨는 건설부 행정관료 출신이다.박씨의 부인 양준자(梁俊子·56)씨는 백암과 같이 구한말 항일지 ‘대한매일신보’에서 같이 근무했던 양기탁(梁起鐸)선생의 손녀다. 임시정부의 상징적 인물인 백범 김구 선생은 두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 김인(金仁)은 해방 직전 타계했으며 차남 김신(金信·77)전교통부장관이 가계를대표하고 있다.올봄 김전장관은 모친을 경기도에서 이장,효창원의 부친 묘소와 합장했으며 조모 곽낙원(郭樂園)여사와 형 김인 선생의 묘소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했다.장남 김진(金振·50)씨는 지난해 11월 주택공사 상임감사(차관급)로 부임했다.현 정권의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배려차원이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유족으로는 탤런트 김을동(金乙東·54·여)씨가 잘 알려진 인물이다.장손 김경민(金慶珉·44)씨는 지난 91년 가이후 일본총리의 방한에 항의,탑골공원 맞은편 노상에서 할복자살을기도한 바 있다.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백산 지청천(일명 이청천)장군의 딸 지복영(池復榮·79)여사는 부친과 같은 광복군 출신으로 지난 95년 부친의 일대기‘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끌며-항일 무장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을 펴낸 바 있다.지여사는 해방후 교편생활을 거쳐 독립유공자협회 상무이사를 역임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滿洲 항일영웅 허극은 한국인”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단체인 동북항일연군(聯軍)에서 ‘이희산’또는‘이삼룡’이란 이름으로 활동한‘만주 항일운동의 영웅’허극(許克·1909∼1942)은 구한 말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선생의 친조카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학술발표회 참석차 중국 옌지(延吉)를 다녀온 신상성(申相星·56·소설가) 용인대 교수가 조선족 역사연구가 유순호(劉順浩·39)씨의 연구성과를 본사에 제보해옴으로써 밝혀졌다. 유씨의 논문에 따르면,허극은 허위 선생의 막내동생인 허필(許苾)의 아들로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20년대 초 부친을 따라 만주로 이주, 요령성에 개원현에 살다가 1929년 하얼빈으로 이사하였다.허극은 1930년 5월1일 ‘5·1절시위행진’을 계기로 한인청년 40여명을 규합,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한 사건을 계기로 항일운동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 사건으로 ‘치안교란혐의’로 체포돼 봉천(奉天·현 瀋陽)감옥에 수감중이던 그는 여기서 북만(北滿)지역 항일연군의 수령격인 조상지(趙尙志)와중국 공산당 소속항일운동가 김책(金策·전 북한 부수상 역임)을 만나면서동북항일연군과 인연을 맺게 됐다.김책의 소개로 1935년 1월 동북항일연군제3군 산하 제2연대장에 부임한 그는 이듬해 부대 재편성으로 제3사(師)를지휘하면서 일약 조상지 다음가는 군사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36년 가을 일본군이 삼강성 일대의 항일세력 토벌에 나서자 그는 선발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일본군 80여명을 사살하고 말 30여필을 노획하는전과를 올렸다. 1937년 2월 북만지방의 항일연군회의가 열렸을 때 그는 북만항일연군 총사령부 및 제3군의 전권대표로 이 회의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4월제3·6·9·11군을 통합, 제3로군(路軍)이 조직되자 총참모장 겸 제3군 군장에 임명됐다.1940년에는 일본군 군사거점인 풍락진을 습격, 경찰국장을 사살하고 하얼빈 일대를 점령, 관동군을 놀라게 하였는데 당시 일본군은 그를 조상지,양정우(楊靖宇) 다음가는 거물로 취급했다. 그가 지휘한 제3로군은 용남·용북지방에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300여회의 전투를 벌여 이 일대 27개 도시를 점령하였다.자료에 의하면 제3로군은기차역 5개,일본의용대훈련소 5개,비행장 1개를 습격,만주군과 경찰 1,557명을 사살했으며 기관총 7정,박격포 4문,기타 총기류 1,500여점을 노획한 것으로 나와있다. 1940년대 들어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 조상지와 양정우가 사망하자 대부분의 대원들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 영내로 도피했으나 허극은 만주에남아 이 일대에서 반일구국회 조직에 주력했다.그러던 중 그는 예하부대의소분대사업을 검사하러 나갔다가 일본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고 격전 끝에 1942년 8월3일 33세로 전사했다. 그동안 허극은 가명 때문에 중국인으로 알려져 왔다.만주지역 항일운동사연구자인 신주백(辛珠柏·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박사는 “허극은 허형식(許亨植)이라는 가명으로 더 유명했는데 구체적인 행적이나 얼굴사진 공개 등은 처음인 것같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英기자 촬영 韓末 의병사진 배경은 양평

    영국 데일리 메일지 기자였던 F·A·매켄지(1869∼1931)가 촬영한 한말 의병사진 배경은 경기도 양평군 지역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평의향지 편찬위원회는 13일 매켄지 기자가 1907년 10월쯤 촬영한 의병사진을 2년 남짓 면밀히 조사한 결과 사진의 배경이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 뒷산 능선임을 알아냈다고 밝혔다.이 사진은 독립기념관에도 대형 사진으로 확대돼 전시되고 있으나 지금까지 어디에서 촬영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양평의향지 편찬위원회 집필위원 안금식씨(61)는 “양평 주민들이 일제에항거,의병활동을 활발히 펼쳤던 자랑스러운 지역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매켄지가 촬영한 다른 사진 1장의 배경도 양평읍에서 바라보이는용문산 지맥”이라고 주장했다. 양평 윤상돈기자 yoonsang@
  • [義烈 독립투쟁](1-2) 李在明 의사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지 채 두 달이 못돼 국내에서는 한 애국청년이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李完用)을 노상에서 습격,치명상을 입힌 의거가 일어났다.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한국 땅에는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사실상 한국정부를 대신하였다.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폐위당한 데 이어 한국군의 해산 등 일제의 한국침략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 갔다.이에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해 일제에 대해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병력과 물자에서 역부족이었다.여기서 돌파구로 모색된 것이 바로 개별단위의 의열투쟁이었다.이는 일제의 침략 주동자와 친일적신들을 처단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의지를 분쇄시키고 동시에 동포들에게 구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이완용처단의거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1909년 12월22일 오전 이완용은 5일 전인 12월17일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는 서울종현(鐘峴) 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내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었다.11시 30분경 식이 끝나자 이완용은 저동(苧洞) 자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력거에 올라 교회 오른쪽 언덕길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이때 갑자기 한 청년이 인력거 뒤에서 달려오더니 품 속에서 단도(短刀)를 꺼내 순식간에 이완용의 왼쪽 어깨(左肩)를 내리 찔렀다. 졸지에 습격당한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고꾸라지자 청년은 따라내려가 그를 타고 앉아 이번에는 오른쪽 허리(右便腰部)를 찔렀다.이완용은 이내 의식을 잃고 길바닥에 쓰러졌다.이를 지켜보던 인력거 차부(車夫) 박원문(朴元文)이 달려들어 제지하려 하자 청년은 그의 어깨를 찔러 쓰러뜨리고는(박원문은 왼쪽 폐를 찔린 후 나중에 사망함) 다시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오른쪽 신장(腎臟)부분을 난자하였다(이완용의 생질로 그의 비서관을 지낸 김명수(金明秀)가 1927년 간행한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인용).길바닥은 유혈이 낭자하고 순식간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판단한 청년은 그때서야 ‘대한독립 만세!’를외쳤다.때마침 인근에서 호위하던 순사들이 달려들어 체포하려 하자 청년은칼을 휘두르며 대항하였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일경의 칼에 하체에 상처를입고 붙잡히고 말았다.이 의거로 결국 이듬해 처형된 청년이 바로 이재명(李在明)의사로 검거 당시 23세였다. 이 의사는 평양 출신으로 13세때 예수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하였다.1904년 미국 노동이민회사의 이민모집에 응모,하와이에서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재미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활동하기도 했다.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 숙청을 결의하자 자원,그 해 10월 배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러시아령) 등 각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의처단을 결심한 이 의사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평안도) 순시때이토(伊藤博文)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평양역에서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동지 몇 사람과 정거장에서 대기했다.그러나 이토가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우려해 순종황제에게 붙어다니므로 이토를 향해 발포하다가 자칫 순종황제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도산 안창호의 만류로 이 계획은 미수에그치고 말았다.그러나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원산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일제와의 무력항쟁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제 침략괴수보다는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고 생각한 이 의사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 대상으로 지목하였다.그들 가운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첫번째 대상인물이었다.거사 1개월 전인 11월 하순경 이 의사는 동지들과 숙의끝에 자신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과 함께 이완용을,김정익(金貞益)·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12월7일 최종모임에서 일행은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다.거사 결행자 이외에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등 3인은 거사자금 조달을,조창호·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운반하는 책임을,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했다. 12월12일 상경한 이 의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사를 통해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거사 당일 아침 군밤장수로 변장,성당 정문 앞에서 군밤을 팔며 동태를 살폈다.오전 11시30분경 추도식을 마친 이완용이 인력거에 오르자 이 의사는 그를 응징하고는 현장에서 체포돼 이완용 저택 보호순사실로 끌려갔다. 의거현장에서는 이 의사 이외에 여인 2명도 같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 의사의 부인 오인성(吳仁星)여사였다.권총을 휴대한 채 성당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동수와 조창호는 이 의사가 체포된 후 현장에서 도주하였다.이 사건으로 이 의사 등 13명이 이듬해 3월13일 정식 기소되었다. 첫 공판이 열린 5월13일 오전 9시30분경 이 의사 등 일행을 태운 3대의 호송차가 신축한 지방재판소에 도착하였다.중키에 짧게 깎은 머리,흰색 죄수복을 입은 이 의사가 동지 일행과 함께 출정하자 10시5분 개정에 이어 검사의기소장 낭독이 끝나고 재판장의 심문이 시작됐다. 문:공모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답:한 사람도 없다. 문:찬성자도 없었는가?답:2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자다. 문:거사는 언제부터 준비했나?답: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에 있을 때부터 준비했다. 문:왜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나?답:죄목은 8개조(條)다.그 첫번째가 을사조약 체결이다. 거사현장에서 압수된 권총·단도 등 거사용품을 가리키며 재판장이 물었다. 문:행흉(行凶)에 사용된 무기는 이것들인가?답:행흉이라니,나는 행의(行義)를 했다.(‘일당기사’에서 인용) 18일 선고판결에서 이 의사에게는 ‘교(絞)’,즉 교살형이 선고되었고 김정익·김병록은 징역 15년,자금조달책인 이응삼에게는 최저형인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6월30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열린 2심 공판에서 검사는 “1심판결은 ‘완전무결’한 것”이라며 1심대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하였다.8월 최종선고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이의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만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며 엄숙히 경고하였다. 9월13일 사형집행에 앞서 기독교 신자인 이 의사는 “내가 보던 찬미(讚美,찬송가)책이나 갖다 달라”고 하여 207장 ‘예수가 나를 기다리심’을 1절부터 끝까지 읽고는 조용히 순국하였다. 한편 이 의사의 습격을 받은 후 다량 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이완용은 일제당국의 각별한 치료 덕분에 이듬해 2월14일 퇴원하였다.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병실이 있던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 구관)에는 통감부 소속 일본인 고관을 비롯해 고종·순종황제가 보낸 칙사,한국정부 고관,심지어 한국거류 일본인들의 병문안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퇴원 후 내각 총리대신으로 복귀한 이완용은 이 의사 순국 20여일 전인 8월22일 한국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강토와 국권을 일제에 내주고 말았다.금산(錦山)군수 홍범식(洪範植)은 이 소식을 듣고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결하였고 매천 황현(黃玹)은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순국하였다.1910년대 의열투쟁은 이로써 또하나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義烈 독립투쟁] (1-1) 역사적 의의와 성과 전문가 좌담

    대한매일은 광복 54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의열투쟁에 몸바친 의사·열사들의 독립투쟁 활약상과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의열 독립투쟁’을 주간 특집기획물로 연재한다.의열투쟁은 주로 개인차원에서 전개됐으나 중국의 장개석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두고 ‘중국 군인 30만이 못하는 일을 고려청년한 사람이 해냈다’고 할 정도로 그 성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의·열사가운데 상징적인 몇 분을 제외하고는 낯선 이름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연재에 앞서 전문가 좌담을 통해 의열투쟁의 의의,성과 등을 짚어보기로 한다. 김삼웅 주필 지난해 ‘대한매일’로 제호를 바꾼 이래 민족사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본지는 친일파들의 반민족행위를 고발한 ‘친일의 군상’에 이어이번에 새로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에 몸바치신 의사·열사들의 일대기와 항일정신을 되새기는 연재물을 기획하였습니다.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학계의 연구성과는 더러 있었다고 생각됩니다만 언론매체에서 이를 집중 조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이번 좌담모임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의열투쟁사 연재에 앞서 의열투쟁의 성과나 역사적 의의 등을 짚어보기 위해 마련하였습니다.먼저 역사학계에서 내리고 있는 의사·열사의 용어 정의부터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동양의 고전에서는 열사는도덕적 행위,의사는 사회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조동걸 교수 우선 ‘의열투쟁’이라는 용어나 개념은 1975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의열투쟁사’를 편찬해낸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의·열사를 정의한 것을 보면,의사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던져 행동으로 실천한 분’으로 대표적으로 안중근,윤봉길 의사같은 분을 들 수 있겠지요.반면 열사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로 저항한 분’으로 이준 열사가 대표적인 분이라고 할수 있죠. 채영국 연구원 의·열사 구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보이는 특이한 형태가 아닌가 합니다.중국에 갔을 때 ‘혁명열사기념탑’ 같은 것은 봤습니다만 ‘의사’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치 않는 것으로 압니다.두 용어를 구분하는것은 우리만의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신용하 교수 의암 유인석 선생이 선비의 저항정신으로,첫째 무기를 들고적과 싸우는 유형,둘째 외국으로 망명,몸을 깨끗이 보존하는 유형,셋째 국내에서 자결,자정(自靖)하여 지조를 지키는 유형 등 세 유형을 들고는 그 가운데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첫번째 유형이라고 하였습니다.바로 이 저항정신이 의·열사의 정신으로 계승됐다고 봅니다.그 중에서도 의사는 개인차원이나혹은 집단적으로 특공작전을 한 분으로 개인 차원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안중근 의사를,집단적인 차원으로는 의열단,한인애국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김 주필 그러면 이같은 의·열사들의 의열투쟁은 언제,무슨 사건을 계기로 시작됐으며 어떠한 행태를 띠고 있었는지,또 의병과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있는지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어떤 책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격분을 참지 못해 현지에서 자결한 주영공사 이한응(李漢應)선생의 순국을 의열투쟁의 효시로 보는 견해도 있더군요. 조 교수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이후부터 의열투쟁이 산발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의열단체로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 등장한 ‘오적(五賊)암살단’이 최초라고 봅니다.본격적으로 의열투쟁은 1908년 전명운·장인환 의사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것이며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아무래도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부터라고 봅니다. 신 교수 의열투쟁의 계보는 1906년 나철(일명 나인영)·오기호(일명 오혁)등이 ‘오적’ 암살을 모의한 것이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물론 이들의 오적 처단계획은 도중에 발각돼 좌절됐지만 이를 계기로 1909년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탄생하였죠.전명운·장인환 두 의사의 의거는 국내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물론 미국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돼 당시 세계적인 반향을불러 일으켰습니다.흔히 일제하 의사들의 의거를 ‘테러’로 규정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는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왜냐하면 제국주의 하에서 약소민족이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행한 의열투쟁은 일종의 ‘특공작전’으로 봐야한다고 봅니다. 조 교수 미국이나영국 같은 나라들이 약소국의 그런 행위를 ‘테러’로규정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미군의 OSS작전 같은 것도 그렇게 따진다면‘테러’지요.주임무가 주요기관 파괴·요인 처단 아니었습니까? 채 박사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의 ‘선언서’나 ‘격문’ 등에 나타난 의열투쟁 정신은 근본적으로 생존권 획득과 인류의 자유·행복추구를 목적으로 했다는 차원에서 피지배민족으로서는 정당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가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불렀듯이 우리입장에서 보면 일제는 ‘강도(强盜)’나 다름없었지요. 김 주필 일제하 의열투쟁은 개인차원에서 결행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독립진영에 미친 그 성과는 대단했다고 생각됩니다.안중근 의사의 의거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의열투쟁의 전개양상과시기별 특성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신 교수 무기를 사용한 의열투쟁은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전쟁적 성격 ▲유격전 성격 ▲특공작전 등 세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병전을 전면전이라면 유격전은 전쟁중 적을 기습공격한 후 재빨리 빠져나와 계속 작전을 하는 방식입니다.반면 특공작전은 강대한 적의 목표물을 공격,치명타를 입힌 후 특공대원 자신도 자폭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조 교수 의열투쟁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특공대원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결행한다는 신 교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반면 일제말기 ‘가미가제(神風)’의 경우 자기의 의사와 무관하게 죽음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이는 학살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신 교수 의열투쟁의 경우 거사의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효과가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여러 의사 가운데는 의거에 성공한분도 있지만 더러는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거사 전에 좌절됐거나 또 거사는결행했지만 실패한 분들도 있습니다.그러나 ‘살신성인’의 정신은 어느쪽할 것 없이 모두 파급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채 박사 1910년대에 작성된 한 문건에 따르면,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간도지역에서는 조선동포들이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만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절을 하면서 신(神)처럼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시기별 의열투쟁의 특징으로는,우선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는 대개 ‘국권수호’를 내걸었습니다.1910년대의 의열투쟁은 의병의 세력이 쇠퇴한 상황에서 만주에서 의열투쟁을 준비한 기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본격적인 의열투쟁은 1920년대 들어 의열단 결성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3·1의거후 고조된민족의식과 의열투쟁의 여건이 성숙됐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독립운동이 전반적으로 침체기에 있던 1930년대에는 중국을 무대로 활동한 임시정부 산하한인애국단의 활동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겠죠. 김 주필 끝으로 의열투쟁이 독립운동사 측면에서의 의의나 평가 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보면 의열투쟁은 독립운동이 침체기에 빠져있거나 또는 일제의 통치가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주로 터져나왔습니다.이로써 일제에게는 큰 타격을 준 반면 우리 민족진영에는 활력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조 교수 일제하 독립운동은 처음에는의병이나 계몽운동의 형태로 출발했다가 점차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의열투쟁은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그런데 의열투쟁은 개인차원의 독립운동치고는 성과가 컸고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에 활력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독립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후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가리켜 ‘안중근과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부른 경우라든지 또 윤봉길 의사의거후 중국의 장개석 정부가 임정을 주목,물심양면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수 백명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것보다 훨씬 효과가 큰 것이었지요.백범김구 주석이 환국후 그 복잡한 정치상황 하에서도 의·열사들의 유해봉환을중대사업으로 취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신 교수 안의사와 윤의사 두 분의 의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안의사가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 후 일본과 러시아의 만주분할 계획이 좌절되자 중국의 언론과 지사들은 안의사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돼만주와 중국땅이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가 됐습니다.또 ‘만보산사건’으로 생겨난 한·중 간의 적대감은 윤의사의 의거후 곧바로 봄눈 녹듯이사라지고 말았으며 당시 장개석은 ‘30만 중국군대가 못한 일을 고려청년 한 명이 해냈다’며 극찬했습니다.‘김구-장개석회담’이 바로 윤의사 의거 직후에 처음으로 성사됐으며 중국측의 지원도 이 때부터 공식 시작됐지요.제국주의자들의 이론을 극복하고 의열투쟁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이론정립이필요하다고 봅니다. 김 주필 일제하 선열들의 의열투쟁정신은 해방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부 계승된 점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은 요즘과 같은 어려운 시기일수록 의열투쟁의 정신이 더욱 값진 교훈으로 다가온다고 하겠습니다.오늘 좌담에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리=정운현기자 jwh59@
  • 독립군 지도자 김정규선생 일기 원본 첫 공개

    의병 및 독립군 지도자이자 성리학자인 용연(龍淵) 김정규(金鼎奎)선생이 한일합병을 전후해 15년 동안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실들을 중심으로 쓴 일기원본이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독립기념관이 광복 54주년을 앞두고 공개한 이 일기는 1907년 3월27일부터 1921년 11월16일까지 무려 15년에 걸쳐 쓴 17권 18책 2,044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천안연합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친일파 청산과 민족정기선양

    친일파 척결의 의의는 과거사 청산과 그로 인한 민족정기 선양으로 압축할수 있다.그러나 해방 54주년이 되는 현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두가지 모두만족스럽지 못했다.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척결은 단순히 과거사에 대한 회고나 보복차원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한 일종의 ‘정언적(定言的)명령’이었다.다시말해 일제하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처단은 새 시대를 맞는 입장에서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자 시대적 당위였다고 할수 있다. 북한정권이 해방직후 친일파를 처단하면서 국가차원의 보훈정책을 편 것은바로 이 때문이었다.반면 남한은 친일파 처단은 물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보훈정책 역시 6·25 이후에야 겨우 시작됐다.그러나 이 역시 군·경찰을 위주로 하고 있고 독립운동가들은 여기서도 뒷전이었다. 현재 우리정부의 보훈예산은 전체 국가예산의 1%에 불과한데 이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다.특히 독립유공자들이 받는 예우수준이 예비역 장성·영관급 장교들보다 낮은 것은 우리의 보훈정책이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이같은 사정으로 우리사회에는 일제잔재문제에 대해 거의 몰역사적·무비판적 견해가 팽배해 왔다.일제의 입장에서사용한 이조(李朝)·의병토벌·정신대·징용 등의 용어가 아무 비판없이 통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매국노의 후손들이 친일의 대가로 획득한 선조의 땅을 되찾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매국노의 재산환수를 골자로 한 특별법 제정은 외면하고 있으며 사법부는 실정법 만능의 법정신에서 매국노의 재산을 보호해주는판결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사정이 이러고 보니 일본군 장교출신의 독재자가 ‘근대화의 기수’로 미화되고 있으며 친일파들이 사죄·반성은 커녕 역사왜곡조차 서슴지 않고 있다.‘시작은 언제나 늦지않다’는 서양격언을 되새기며 몇 가지를 제안한다.우선 순국선열의 생애와 애국정신을 담은 역사교육,국립묘지에 묻힌 친일파 제거,보훈업무의 재정비,친일파 청산을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 등이 필요하다고 본다. 정리=정운현기자 jwh59@
  • 醫師 병무비리 무더기 적발

    병역 대상 치·의과대학 졸업자나 전문의들이 신검 담당 군의관들에게 뇌물을 주고 병역면제나 공중보건의 판정을 받았다가 군검찰에 무더기로 적발됐다.뇌물액수는 500만∼5,000만원이다. 국방부 검찰부(부장검사 高奭대령)는 23일 이같은 병무비리로 병역을 면제받은 14명과 공중보건의 판정을 받은 8명 등 의사 22명을 적발,사건기록을대검찰청에 넘겼다고 밝혔다. 군검찰은 또 군의관과 짜고 의병전역하면서 질병등급을 올려 전·공상자 판정을 받은 뒤 보훈혜택을 받아온 12명 등 의병전역자 52명을 비롯,병역면제자 78명,공익근무요원 판정자 24명,보훈신검 청탁자 3명 등 병무비리 관련자 157명의 수사기록도 검찰에 넘겼다.이들에게 뇌물을 받은 군의관은 모두 12명으로 이들 중 일부는 지난번 발표된 1·2차 병무비리 수사와 관련,이미 기소된 상태다. 군검찰은 이번 수사결과는 서울을 제외한 전국 지방병무청과 군병원에서 95년부터 98년 사이에 저질러진 병무비리라고 밝혔다. 한편 군검찰은 전국적으로 340여건의 병무비리와 10∼20여건의 군치·의신검비리 혐의자를 추가로 포착,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김인철기자 ickim@
  • 병무기피 실태와 수법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외면하기는 최고 ‘엘리트층’인 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23일 군검찰의 병무비리 수사결과에 따르면 치·의대를 졸업한 의사 또는수련의 과정까지 마친 전문의 등 의사 22명이 돈을 주고 병역 면제나 공중보건의 판정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대학 선배나 친구인 군치의(軍齒醫) 신검 군의관에게 직접 로비를하거나 군병원 간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학교수나 선배,부모등의 인맥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거액의 뇌물까지 건넸다. 군병원 고위 간부 등에게 뇌물을 주고 햇볕을 쬐면 물집이 생기는 광발진증과 수핵탈출증 환자로 둔갑해 병역을 면제받은 김모씨(24·부산 G대 졸업)와전모씨(부산 B대 교수)는 대학 선배와 친구를 동원한 대표적인 사례. 김씨는 친구의 대학선배로 국군 부산병원 진료부장이던 이모중령에게 97년11월 4,000만원을 건네고 군의관 입대를 면제받았다.전모씨는 96년 12월 대학 친구인 최모씨(예비역 대위) 등을 통해 국군 수도병원 진료부장이던 손모씨(예비역 중령)와 군치의 군의관 임모소령등에게 5,000만원을 주고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다. 22명 가운데 16명이 디스크 질환으로 병역면제 판정을 받는 등 대부분 수핵탈출증과 같은 신경외과 계통의 질병을 이용했다.다른 질병에 비해 의사의주관적 판단 범위가 넓은데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완치됐다고 주장하면 허위판정 여부를 쉽게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1인당 500만∼5,000만원의 뇌물을 건넸다고 주장하고 있다.하지만이들이 군복무기간에 해당하는 3년 동안 개인의원을 열면 적어도 3억원 이상의 수입과 의사 경력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실제로 오고간 금품은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게 수사 관계자들의 추정이다. 의병전역 비리 관련자 52명 가운데 12명이 군의관에게 뇌물을 건네고 전·공상자 판정을 받아 의병 전역 후 정부로부터 달마다 30만∼60만원의 보훈연금을 받아 챙긴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군병원의 신검 비리가 병무행정에서더 나아가 보훈행정에까지 미쳤음이 확인된 것이다. 김인철기자 ic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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