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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공문서 훼손 어떻게 했나

    일제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규장각 도서 정리작업을 통해 조선의 기록관리 체계를 조직적으로 무너뜨리고 식민통치 정책을 수립한 것으로 드러났다. 22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2004년부터 진행한 ‘한국 국가기록 체계화 사업’에 따르면 조선총독부의 고의적인 문서 조작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증빙 자료가 묻혀 있었다. ●절반이 경제 관련… 경제적 식민화과정 규명 기대 연구팀은 재분류한 공문서 가운데 5000∼6000여종이 경제 관련 공문서인 점에 주목, 이번 재분류 작업을 토대로 일제의 황실 재산 침탈과 경제적 식민지화 과정을 낱낱이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를 위해 ‘대한제국기 황실재정 공문서 발굴·정리와 체계화사업’을 2007학년도 연구 과제로 정하고, 황실 재정과 관련된 공문서 분석을 통해 1904년 이후 일제가 ‘황실재정정리’를 명분으로 황실의 재산을 침탈해간 과정을 밝힐 계획이다. 조선총독부는 황실 재정 관련 서류들은 여러 책을 한 권으로 묶고 내용과 관련 없는 제목을 붙여 은폐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궁내부제실재산정리국(宮內府帝室財産整理局)’이 1908년 생산한 수십종의 문서들을 단행본으로 취급해 구체적인 내용을 숨기는 효과를 냈다. ●도서명 고의로 조작·은폐 ‘전라남도각군문서급소장철(全羅南道各郡文書及訴狀綴)’이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철에는 경상도와 경기도 등에서 생산한 문서를 포함시키고 문서뿐만 아니라 보고서, 지령 등을 한데 묶었다. 규장각 목록에는 실제 내용과 상관없는 ‘본청관원 4월 조봉급지출청구서(本廳官員四月條俸給支出請求書)’라고 적었다.‘각도청원철(各道請願·1905년)’ 등에는 청원 내용과 첨부 문서, 조치 내용 등을 각각 별개의 도서에 포함시켜 알 수 없도록 하는 등 연관된 문서를 별개 도서명의 책으로 묶어 분산시키기도 했다. 또 의병 활동과 조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 문서인 1907년 충청도 임천군 입포리에 내걸린 의병의 격문은 아예 목록에서 제외했다. 연구팀은 대한제국기 백두산에서 압록강을 경계로 설치된 진위대의 대지도형을 묶은 공문서철인 ‘진위대대지도형(鎭衛隊岱地圖形)’과 간도에 한인이 거주했다는 간도 영토주권에 관한 공문서인 ‘함경남북도내거안(咸鏡南北道來去案·1903년)’을 찾아냈다. 또 통상 및 개방에 관한 공문서인, 인천항에 거류하는 일본인 거류지를 표시한 채색지도와 1900년 강원 통천군의 일부 지역을 러시아인에게 조차한 공문서와 지도·관세관 등의 복장 및 견장·모자 등의 그림을 담은 ‘관세관복장(管稅官服將·1906년) 규칙 및 복장도식(服將圖式)’ 등과 함께 토지개혁 공문서인 ‘대한제국전답관계(大韓帝國田沓官契)’, 근대적 교육에 관한 공문서인 ‘사범학교교습합동(師範學校敎習合同·1897년)’ 등을 체계적으로 재분류했다. ●대한제국기 중요 공문서 체계적 분류 이상찬(국사학과) 서울대 교수는 “조선총독부의 ‘정리작업’은 그 목표가 식민통치 정책 수립을 위한 문헌 조사에 있었다.”면서 “조선시대 기록관리 체계를 복원시키고 묻혀 있던 자료 연구를 통해 식민화 과정을 낱낱이 밝혀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공문서 목록을 ▲최종 소장 관리기구별 ▲문서 생산 기관별 ▲규장각 도서 번호순 ▲도서명순 등 4가지 형태로 간행할 예정이다. 또 목록을 규장각 홈페이지와 ‘e-규장각’에 공개해 일반인들에게 제공한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 땅끝~ 강진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 땅끝~ 강진

    서울신문의 기획 시리즈인 ‘다시 걷는 옛길-호남대로’가 영남대로에 이어 시작됐다. 전남의 해남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1000리 길을 답사하는 긴 여정이다. 길섶 곳곳에 스며 있는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쉬어도 가고, 뜀박질도 하면서 그들의 삶을 엿본다. 지금, 대부분의 옛길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도로 개발 등에 편입된 곳이 많다. 길이란 교통로 역할뿐아니라 고장의 문물, 풍속을 전파하는 정보의 소통로이다. 호남의 옛길도 ‘남도 해양문화’를 한양에 실어나르는 역할을 했다. 때로는 왜구의 침략로로, 어떤 때에는 귀양길로 이용됐다. 호남길을 따라 걸으며 길의 역사와 선인들의 삶의 자취를 천착(穿鑿)해 본다. 호남의 땅끝에서 한양에 이르는 1000리 길의 호남 시발지는 전남 해남땅 관두포항과 강진 마량항으로 보면 크게 무리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이들 일대의 길이 군사적 목적으로 개설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신라시대∼고려∼조선시대를 잇는 세월 동안 왜구 등의 침탈(侵奪)을 막기 위해 해안선에 진(鎭)과 영(營)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해남과 마량항은 제주로 가는 뭍의 마지막 지점으로,‘제주로’라고도 불렸다. 조정은 이 길을 통해 관리들을 귀양보내거나, 임지에 파견하고 군사를 이동시켰다. 제주 사람들이 범선으로 육지에 도착해 과거를 보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한양길에 오르는 길이었다. 땅끝 해안가에 살던 선인들도 마찬가지로 이 길을 이용했다. 머나먼 여정 속에 머무는 길목에는 자연스레 역(驛)과 원(院)이 생겨났다. ●관두포는 관로(官路) 전남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관두포)와 북평면 이진마을은 한양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지점이자 한양에 오르는 첫 길이었다. 이진과 관두포에서 각각 북쪽(한양)으로 출발한 길은 강진군 성전에서 다시 만난다. 관두포는 조선시대 제주로 향하는 관청 ‘물목’이었다.1653년 제주에 표류한 네덜란드 하멜 일행 36명이 이듬해 관두포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됐다. 이 마을 오른쪽에 솟아 있는 관두산은 해발 178m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수 돌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봉수터로 쓰였다. 마을 노인정에서 만난 채남두(76)씨는 “마을 안쪽에 ‘관터’와 ‘영터’가 있었다.”며 “지금은 그 자리에 김 가공공장과 집들이 들어섰다.”고 말했다. 그는 “관두산 아래 평지를 ‘몰돌지’라고 부른다.”며 “이는 제주 방언인 말(몰)을 돌리는 공간으로 사용된 흔적”이라고 추정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해남읍에서 관두포를 향해 ‘관머리’(관두)를 세번 외치면 무서운 학질도 떨어진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했다. 관청과 군영의 ‘위세’가 선인들의 삶을 얼마나 고달프게 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한때 관리와 군졸, 짐꾼·상인들로 북적였던 관동마을은 지금 한적한 농어촌으로 변했다. ●한양 향한 옛길 따라 호남길 시발지인 관두포를 뒤로 하고 국도 13호선을 따라 완도 쪽으로 8㎞쯤 가다 보면 현산면 하구시 마을이 나온다.‘구시 저수지’ 뒤쪽으론 고산 윤선도가 54세(1640년)부터 9년간 머물렸던 금쇄동(金鎖洞) 산장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은 이곳에 터를 잡아 ‘회심당’이란 집을 짓고,‘산중신곡’이란 시조를 읊었다. 지금은 고산의 묘소와 윤씨 제각(祭閣)만 방치돼 있다. 호남길은 13호선을 따라 하구시 바로 아래쪽 고현마을로 이어진다. 고려시대 때 해남현 관아였던 현산면 고현에서 서울을 가려면 ‘오도재’란 대둔사 골짜기를 넘어야 했다. 지금은 지방도가 뚫려 있다. 그러나 길은 오도재 8부 능선인 덕흥리에서 끊기고, 이 재(고개)를 넘어 대둔사 계곡에 도착하려면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이 고개를 넘던 관리들은 삼산면 평활리에 있던 녹산역에서 말을 공급받았다. 이곳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지금의 해남읍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옥천면 백호리∼송산리를 거쳐 계곡면 별진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강진군 성전으로 빠져나간다. 옛 지리지에는 해남에서 북행하는 첫 역참(驛站)은 별진역이고 북으로 30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때 ‘별진’이 ‘성진’으로 이름이 바뀌어 계곡면 소재지가 되면서 별진역 터를 확인할 길이 없다. 주민들은 “이 역을 지나간 관리들이나 찰방(조선 때 역참 일을 맡던 외직 문관 벼슬) 송덕비 10여개가 마을앞 거리에 서 있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 사업 때 모두 없어졌다.”고 증언했다. ●또다른 출발지 이진항 관두포항이 관리들이 주로 이용한 ‘관로’ 였다면 이진항은 민·관이 두루 활용했다. 이진마을은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바로 건너편이다. 이곳은 강진 마량항에서 고마도를 지나 완도와 해협을 이루는 길목으로 통한다. 이진 역시 수군만호가 주둔했던 주요 군사 거점의 하나이다. 이곳은 성을 쌓는 데 제주사람이 동원될 만큼 한양∼제주를 오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이곳에서 시작하는 호남길은 강진군 신전·도암면과 강진읍을 거쳐 성전·영암 등 북쪽으로 이어진다. 성전은 해남읍과 강진 방면에서 각각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으로, 석제원(石梯院)이란 나그네 쉼터가 있었다. 이진∼강진읍에 이르는 옛길은 지방도 813호선으로 포장된 신작로로 변했다. 지금은 옛길임을 짐작할 만한 표지나 건물터를 찾기 어렵다. 도암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쯤 가다 보면 바위를 깎아지른 듯한 석문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석문교 오른쪽으로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다. 석문협곡에 들어서면 절리를 이룬 바위덩이가 무너져내릴 듯 자리한다. 이 길은 옛 강진 읍성을 지나 최근 확·포장된 2번 국도와 나란히 성전으로 이어진다. 이 도로는 구한말 일본 경찰에 붙잡힌 항일 의병들이 강제 동원돼 건설된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다산 18년간 머물며 불후의 저작 남겨땅끝마을∼한양간의 옛길 시발지는 ‘귀양길의 끝자락’이다. 전라도의 해안가 고을은 귀양지였거나 섬 귀양지인 제주로 향하던 길목이었다. 각종 문헌에서는 강진과 제주, 해남, 진도 등이 귀양지로 자주 등장한다. 강진군 도암면에는 다산초당이 있다.1801년(순조 1년)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다산 정약용은 형인 정약전과 호남 옛길을 따라 나주까지 귀양길을 동행한다. 형과 헤어진 다산은 영암∼풀치재∼성전(석제원)을 거쳐 강진으로 들어오고 정약전은 나주에서 흑산도로 유배된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 머물면서 목민심서 등 불후의 저작을 남겼다. 강진읍의 남강서원은 송시열(1607∼1689년)을 모시고 있다. 송시열이 1689년 강진항을 통해 제주로 귀양가던 길에 바람이 불어 백련사에 잠시 머물 때 강론한 것을 기념해 세운 서원이다. 해남읍 연동리의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1587∼1674년)가 1640년 영덕 유배 생활을 마치고 은둔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는 완도, 보길도와 해남을 오가며 시조문학의 백미로 치는 어부사시사·오우가 등을 저술했다. 이들 조선시대의 관리는 한양땅에서 출발, 호남 옛길을 따라 전라도 벽지와 제주로 향했다. 이 때문에 문학과 그림 등 선현들의 수많은 저서가 호남대로의 끝자락에서 탄생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광해군은 노회한 명과 사나운 후금 사이의 대결 속으로 말려들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가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강구하며, 자강 능력을 배양하려 애썼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정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비록 외교적 노력을 통해 누르하치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었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한, 그 때문에 양자의 관계가 갈등으로 치닫는 한, 조선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1618년(광해군 10) 누르하치가 푸순성을 함락시킨 이후 벌어졌던 일련의 상황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출병 여부를 둘러싼 갈등 명은 관응진(官應震) 등이 주장한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에 따라 조선도 병력을 내어 후금을 공략하는 데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1618년 윤 4월, 명의 병부시랑(兵部侍郞) 왕가수(汪可受)는 조선에 보낸 격문(檄文)에서 병력을 뽑아 별도의 기별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고 요청했다. 형식은 요청이지만 사실상 ‘지시’였다. 명의 통첩을 받았을 때 조선 조정의 의견은 확연히 갈라졌다. 광해군은 파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먼저 조선의 군사적 역량이 미약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1618년 5월1일, 신료들에게 내린 교시(敎示)에서 ‘병(兵)과 농(農)이 분리되지 않은 조선의 병력을 동원해 봤자 후금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굳이 병력을 보내야 한다면 수천명 정도를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기각(角)의 형세를 이루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사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국경 바깥으로 출전시킬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광해군은 명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했다. 그는 후금의 군사력이 막강하므로 명의 원정군이 일거에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오랜 동안 후금 관련정보를 수집함으로써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이자 판단이었다. 광해군은 명에 보내는 회답서신 속에 “경솔하게 정벌에 나서지 말고 다시 생각하여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을 첨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 신료들은 반발했다. 그들은 명에 보내는 서신에 명에 대해 ‘충고’의 성격을 담은 문구를 삽입하는 것 자체를 비판했다. ‘조선은 소방(小邦)이자 명의 번국(藩國)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국(大國)인 명의 군무(軍務)에 간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저 명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결정해야 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비변사 신료들은 또한 ‘명은 조선에 부모의 나라’이며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망할 뻔했을 때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를 베풀었다.’며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켰다. ‘자식’의 처지에서 ‘은혜를 베푼 부모’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면 그저 있는 힘을 다해 구원하려 노력해야 할 뿐, 자신의 강약(强弱)이나 처지를 따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광해군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조차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지키고, 재조지은에 보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채근했다. ●굴레가 돼버린 再造之恩 ‘명이 재조지은을 베풀었고, 조선은 그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 지배층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왜란 초반,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나라의 존망 자체가 불투명했던 상황에서 명군의 참전은 그야말로 한줄기 ‘복음’이었다. 더욱이 1593년 1월, 명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세가 역전되면서부터 ‘재조지은’은 조선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지고(至高)의 은혜’로 굳어졌다. 아예 ‘임진왜란’을 ‘재조(再造)’라고 부르는 인물조차 등장할 정도였다. 비록 명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회피하고, 조선 백성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조지은’의 위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같은 분위기를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선조(宣祖)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끝낼 수 있었던 모든 공로를 명군의 역할 덕분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조선 관군이나 의병의 역할은 평가절하했다.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 이순신은 두개의 적과 맞서야 했다. 하나는 일본군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선조다. 이순신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할수록, 따라서 그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선조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의병장 곽재우와 선조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난 뒤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조는 이순신을 제치고, 정곤수(鄭崑壽)를 1등 공신이자 원훈(元勳)으로 책봉했다. 그가 명군을 불러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나마 곽재우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조선군 영웅들의 위상은 낮아지고, 선조의 실추된 위상이 다소나마 회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지식인들은 조선 내부의 그 같은 분위기에 반색했다. 푸순성 함락 이후 등장한 ‘주요석획(籌遼碩)’에서 요동을 수복하는 데 조선을 이용하자고 주장했던 인물들이 내세운 논리는 거의 똑같았다. ‘임진왜란 때 우리는 모든 힘을 기울여 변변찮은 조선을 도왔다. 이제 그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신료와 명의 지식인을 막론하고 ‘재조지은’을 강조하고 있던 분위기를 광해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명에 보내는 회답서신에 ‘혈기를 갖고 있는 조선 백성은 누구라도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라는 내용으로 문장을 잘 다듬을 것을 지시했다. 외교를 위해 겉으로라도 ‘재조지은’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외교적 노력이 물거품되다 ‘재조지은에 보답하려면 출병하라.’는 안팎의 공세에 맞서 광해군은 외교적 ‘카드’를 총동원했다. 광해군은 먼저 조선에 출병하라고 요청한 주체가 명의 황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자문을 보낸 왕가수는 명의 신료일 뿐, 황제가 아니므로 번국의 입장에서는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명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황제에게 직접 알리기 위해 사신들을 줄줄이 베이징으로 보냈다. 황제에게 조선 사정을 제대로 보고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사신들이 소지한 국서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조선은 아직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의 미약한 군사력을 동원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명 조정은 후금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총괄할 경략(經略)으로 양호(楊鎬)를 낙점해 랴오양(遼陽)으로 보냈다. 임진왜란 때도 총사령관으로 참전했던 그는 조선 사정에 밝았다. 양호는 조선 사신들이 소지한 국서의 내용을 문제 삼아 베이징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조선이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사신 왕래를 통해 요행을 바란다고 질책했다. 광해군은 양호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칙서가 없는 상황에서는 파병할 수 없다고 버텼다. 양호는 조선 사신 박정길(朴鼎吉)에게 “북관과 연락하고 조선을 고무하라.(聯絡北關鼓舞朝鮮)”는 문구가 담긴 황제의 칙서를 보여주었다. ‘북관’은 당시 누르하치의 후금에 밀리고 있던 해서여진의 예허(葉赫)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양호는 또한 당시 요동지역에 ‘조선이 후금, 일본과 내통하고 있으며 후금군 가운데 3000명이 조선인’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음을 들어 협박했다. 박정길 일행은 양호의 협박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조선 영내로 돌아오고 말았다. 1618년 10월.‘조선은 병력을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는 데 협조하고, 양호의 지휘를 받으라.’는 내용의 명 황제의 칙서가 날아들었다. 광해군의 입장에 반대했던 비변사 신료들은 힘을 얻었고, 출병하라는 채근 또한 더 심해졌다. 안팎으로 곱사등이가 된 처지에서 광해군은 소신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시기 명군의 참전을 통해 떠오른 ‘재조지은’은 17세기 초에도 조선 정치와 외교 전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책꽂이]

    ●한국의 가면극(전경욱 지음, 열화당 펴냄)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꾸며 상연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슬람 지역을 제외하면 가면은 전 세계에 넓게 분포돼 있으며, 그 기원은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귀신을 쫓기 위해 혹은 양반 계급의 풍자를 위해 가면을 이용한 연희가 널리 행해졌다. 양주별산대놀이, 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 북청사자놀음, 봉산탈춤, 은율탈춤, 진도다시래기 등 13개의 가면극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책은 가면극의 지역적 분포와 특징, 놀이꾼, 중국과 몽골 등 타 문화와의 연관성, 대사의 형성원리, 극적 형식 등을 살폈다.2만 3000원.●역대 미국 대통령 41명의 위트 리더십(박봉현 지음, 오름 펴냄)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 초 여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려는 한 미친 청년으로부터 저격을 받았다. 다행히 총탄은 심장으로부터 1인치 벗어났지만 상태는 위중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레이건은 아내 낸시에게 이렇게 농담을 했다.“여보, 내가 그만 (총알을) 피하는 것을 잊었소.” 이 말은 원래 잭 뎀프시라는 복서가 세계챔피언 결승전에서 지고 나서 아내에게 한 말로,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유머다. 미국 대통령에게 유머와 위트는 정치판에서 적과 맞서기 위한 세련되고 우아한 무기다.1만 3000원.●제왕지사(보양 지음, 김영수 옮김, 창해 펴냄) ‘맨얼굴의 중국사’‘추악한 중국인’ 등을 통해 중국사를 뼈아프게 비판한 저자가 중국 제왕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엮었다. 저자는 중국의 역대 제왕 559명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천수를 다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요임금으로 불리는 이방훈이다. 유교의 사서에는 이방훈이 사위인 요중화(순임금)에게 선양하고 하늘에 올랐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죽서기년(竹書紀年)’등 유교의 영향에서 벗어난 사서들은 요중화가 장인 이방훈의 제위를 찬탈했으며 이방훈은 감금된 채 죽어갔다고 증언한다. 저자는 제왕 27명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중국 사서의 위선을 파헤친다.2만 3000원.●공리주의(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책세상 펴냄)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는 ‘인간은 태생적으로 고통을 싫어하고 쾌락을 추구한다.’는 인간관에서 출발한다. 밀의 공리주의는 앞선 세대의 쾌락적 공리주의와 차별화된 최대 다수의 행복을 강조한다. 공리주의는 서구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이론으로 평가받는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4900원.●세계 4대해전(윤지강 지음, 느낌이 있는 책 펴냄) 기원전 480년 그리스 테미스토클레스 제독의 살라미스 해전,1588년 드레이크 제독의 칼레 해전,1592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1805년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 해전 등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해전들의 전개 양상과 배경을 살폈다. 한산도 해전은 임진왜란 7년 전쟁중 가장 중요한 전투. 한산도 해전의 승리로 일본은 보급품을 지원받지 못해 발이 묶이고 전국에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된다. 이순신은 23번의 해전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군신(軍神)’이다.1만4800원.●한권으로 이해하는 중국 차문화(이진수 지음, 지영사 펴냄) 중국 차의 역사, 차나무, 중국차의 분류, 중국의 명차, 다구, 차 우리기와 차 마시는 법도, 중국 소수민족의 차 등을 원색 사진과 함께 다뤘다. 저자는 원불교 나포리 교당 주임교무이자 원광디지털대 차문화경영학과 교수.2만원.●태양의 나라, 땅의 사람들(유화열 지음, 아트북스 펴냄) 페루 미술 기행서. 도예를 전공한 저자는 남미 미술 가운데 특히 페루 미술에 빠져 한달간 페루를 누볐다. 저자는 페루의 역사와 전통, 문화가 빚어낸 결정체인 페루 미술은 성실하고 정직하며 여러 문화가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킨 혼혈성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페루 수도 리마를 시작으로 쿠스코, 마추픽추, 티티카카호 인근 도시인 푸노, 지상회화로 유명한 나스카 등을 찾아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한다.1만 5000원.●얽힘(아미르 액젤 지음, 김형도 옮김, 지식의풍경 펴냄) 수학자인 저자(매사추세츠 주 벤틀리 칼리지 교수)가 양자역학의 태동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물리학의 논쟁을 설명한 책. 양자역학 세계에서 얽힘이란 우주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입자가 수수께끼 같이 서로 연결돼 있어 그것들 중 하나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순식간에 다른 것에도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일컫는 말.1900년 막스 플랑크는 에너지가 진동수에 따라 크거나 작은 불연속적인 꾸러미 형태로 나온다는 것을 밝히고 이 물질을 양자(quantum)라고 불렀다.1만 5000원.
  • [산이 좋아 산으로] 충남 예산 가야산

    [산이 좋아 산으로] 충남 예산 가야산

    충남 예산과 서산에 걸쳐 있는 가야산(677.6m)은 경남 합천 가야산(1430m)에 비해 높이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주변 열 고을을 거느리며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 개심사·일락사·보원사지 등의 문화유산, 그리고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로 불리는 명당 남연군묘를 품고 있어 합천 가야산에 비해 무엇 하나 꿀릴 게 없는 명산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큰 바다요, 북쪽은 큰 만이고,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을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하면서 비옥한 평야 중심에 가야산이 놓여 있다고 적고 있다. 내포란 지금의 예산·서산·홍성·당진 지방과 태안·아산 일부 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내포 지방이 배출한 인물에 주목했다. 최영 장군, 사육신 성삼문, 충무공 이순신, 추사 김정희, 의병장 최익현,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개화당 김옥균, 남로당 박헌영, 만해 한용운…, 걸출한 이 모든 인물들이 놀랍게도 내포 출신이다. 저자는 그들이 충청도 특유의 느리고 온화한 성품이 아니라 소위 ‘깡’이 센 사람들로 가야산의 정기를 받았다고 분석했다. 가야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바다가 가까워 일단 능선에 붙으면 내륙의 1000m 넘는 산이 부럽지 않고, 석문봉에서 바라보는 서산 간척지 너머 서해안 일몰이 특별한 장관을 이룬다. 봄철이면 진달래가 지천이고,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도 아름답다. 산행 후에는 덕산면의 온천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점도 큰 매력이다. 가야산 들머리는 크게 예산 덕산면과 서산 운산면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덕산 상가리를 들머리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상가리∼옥양봉∼석문봉∼상가리 원점회귀 산행을 한다. 가야산의 최고봉인 가사봉 정상은 각종 중계기지가 들어차 출입금지 지역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산꾼들은 가야산의 실질적인 주봉인 석문봉에 올랐다가 가사봉에 들르지 않고 하산한다. 서산 운산면 용현계곡을 들머리로 하면 마애삼존불∼수정봉∼옥양봉∼석문봉∼상가리 혹은 보원사∼일락산∼석문봉∼상가리 종주산행을 즐길 수 있다. 상가리 가야산 주차장은 국립공원만큼 넓지만 주차비를 받지 않아 좋다. 이곳에 차를 세우면서 산행은 시작된다. 주말에는 관광버스와 승용차로 주차장이 가득 찬다. 예전에 비해 폭발적으로 늘어난 가야산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등산객은 중·장년층이 많은데, 산행이 어렵지 않고 산행 후에는 뜨끈한 온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상가리∼옥양봉∼석문봉∼상가리에 이르는 약 7.5㎞ 코스는 3시간 30분이 걸리는 원점회귀 코스다. 가야산은 등산 시작 지점과 끝이 꼭 일치해 자가용을 이용해 접근할 경우 편리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석문봉은 가사봉에 비해 24.6m 낮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야산의 주봉 대접을 받고 있다. 예전에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남연군묘가 가사봉이 아닌 석문봉을 주봉으로 삼고 있었고, 지금은 가사봉이 출입통제 구역이라 역시 석문봉이 주봉이 되었다. 이영준 월간 MOUNTAIN기자 # 여행정보 운산면 용현계곡은 문화유산의 보고다. 국보 서산마애삼존불, 사적 보원사지 등이 대표적인데 예전에는 계곡 일대가 전부 보원사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절터에는 당간지주,5층 석탑, 법인국사보승탑과 비가 남아 예전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상가리 쪽에는 남연군묘를 빼놓을 수 없고, 주차장에서 오른쪽 길로 10분 걸리는 보덕사도 들러볼 만하다. 본래 남연군묘는 가야사의 자리였다.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 질러 스님들을 내쫓고 자신의 아버지 무덤을 만들었다. 훗날 이 사건에 마음이 불편했던 대원군은 보덕사를 지어주었다. 비구니 사찰로 소담한 분위기가 좋다.
  • ‘민주 성지’ 광주 민·관 유치 앞장

    ‘민주 성지’ 광주 민·관 유치 앞장

    광주시의 민·관이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한국민주주의 전당’과 ‘민주공원’을 유치하기 위해 손을 잡고 나섰다. 민주주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의 하나로 정부가 추진중인 ‘한국민주주의 전당’과 ‘민주공원’ 조성사업은 공원을 ‘묘지’로 인식한 서울 등 해당지역 주민들의 반발과 유가족간 불협화음으로 수년째 표류하고 있다. ●유치의 당위성 설파 광주시는 22일 유치위 위원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국회 등을 차례로 방문, 이들 시설의 광주 유치 당위성을 설명했다. 위원들은 이날 광주는 항일의병, 광주학생독립운동,5·18민주화운동 등을 통해 민주·인권도시로서 역사성과 상징성을 갖췄다고 주장했다. 또 유치를 위한 시민 공감대가 어느 지역 보다 높고,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희생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민주주의 전당은 유일하게 유치를 신청했고, 민주공원은 경기도 이천시와 경합하고 있다. 시는 이들 시설을 유치하면 국립5·18묘지 등과 함께 민주화의 상징으로 자리할 것으로 보고있다. 이에따라 5·18묘지 인근(북구 장등동)에 12만5000여평의 후보 부지를 마련했다. ●한국민주주의전당 2001년 출범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는 해방이후 민주화운동을 총망라한 전당을 짓기로하고 7만 7000여명의 범국민추진위를 발족시켰다. 추진위는 1400억원(부지 매입비 제외)을 들여 연건평 1만 2000평 규모의 기념관을 2011년∼2012년 완공할 계획이다.5월쯤 용역 결과가 나오는 대로 최종 후보지를 결정하고 빠르면 내년말쯤 착공에 들어간다. 역사성·상징성·편의성(접근성) 등이 후보지 선정에 결정적 역할을 할 전망이다. 이 곳엔 문화관·사료관·연구소·교육센터·민주테마공원 등이 들어선다. ●민주공원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하경철)는 2002년부터 부지선정에 나섰으나 주민 반대로 수차례 무산됐다. 당시 서울 수유리 일대에 공원 조성을 추진했으나 강북구와 주민 등의 반발로 무산됐다. 이어 2005년 인천시 남구가 유치를 신청했다가 주민 반대에 부딪치자 1년여만에 이를 철회했다. 주민들은 “‘민주공원’이 사실상 ‘묘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공원은 2만 7000여평의 부지에 500여억원을 들여 조성된다. 보상심의위는 착공일로부터 5∼6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고 있으나 수년째 부지 선정 조차 못하고 있다. 민주공원에는 1960년대∼현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열사’의 주검을 한데 모아 안장한다. 이들 열사 묘는 5·18 구묘역 38기와 전국 각지에 141기가 흩어져 있다. 상당수 유가족들은 접근성 등을 이유로 수도권 입지를 희망하고 있으나 부지선정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OUR STORY] 풋내나는 봄…기적이 오라네

    [OUR STORY] 풋내나는 봄…기적이 오라네

    꽃의 향기가 가득한 봄의 들녘을 상상해본다. 혹 눈이라도 감을세라 온갖 꽃들이 코끝에 달려와 간지럽힌다. 가족과 연인을 부른다. 문득 낭만의 기차를 떠올린다. 봄길,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며 진달래, 개나리가 만발한 꽃동산 그림처럼 펼쳐진다. 춘정을 부추기는 이 봄날, 어찌 몸과 마음이 동하지 않을까. 추억을 쌓는, 즐거운 봄꽃 기차여행을 떠나보자. 매화의 광양, 벚꽃의 진해, 그리고 산수유의 구례 등이 대표적인 봄꽃 여행지로 알려져 있지만, 거제도의 외도 역시 봄꽃 테마여행으로 빠지지 않는 곳이다.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에 자리잡은 덕에, 섬에서 평생 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 ‘파라다이스(천국)’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 조그마한 섬을 왜 환상의 섬이라 부르는 걸까? 비록 작은 섬이지만, 눈으로 840여종의 아열대식물과 조각공원, 지중해풍 양식의 정원 등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이국적인 풍경을 보고, 코로는 섬에 가득한 꽃향기에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귀로 섬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음악을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하다 배를 놓치기도 한다. 게다가 바다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해금강까지 덤으로 구경 할 수 있는 기차여행 코스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글 사진 외도 박준규 철도여행가 ■ 환상의 섬 외도 무박2일 기차여행 외도까지 가는 일정은 무박 2일이다. 매주 금·토요일에 출발한다. 지난 금요일, 저녁밥을 일찍 먹고 가족과 함께 열차 시각에 맞춰 서울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손에 손을 잡은 가족들, 팔짱을 낀 연인들이 마냥 즐거워보였다. ■ 첫째날 22:10 서울 영등포역 2층 구내약국 앞에서 여행가이드를 소개를 받은 뒤, 일정표와 좌석표, 배지 등을 받았다. 좌석표에는 이름과 함께 버스와 열차의 좌석번호가 적혀 있었다. 22:37 개찰구를 나와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를 확인한 다음 탑승. 외도가 경남의 끝자락에 있기 때문에 열차는 3시간30분, 다시 버스로 3시간 정도 타야 하는 다소 피곤한 일정이다. 하지만 천국을 구경을 한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지루함보다는 즐거움이 앞선다. 22:47 열차가 영등포역을 출발하면서, 무박 2일간의 외도 기차여행이 시작됐다. 열차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집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곳. 따뜻한 커피와 함께 휴대한 MP3의 감미로운 음악을 감상하다, 입이 출출하면 오가는 한국철도유통 아저씨에게 구운 계란과 음료수를 사서 시장함을 잊는다. 오랜만에 만난 옆 좌석의 친구와 추억을 떠올리며 소곤소곤 수다를 떨거나,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대구역이다. ■ 둘째날 02:17 대구역에 도착하면 무궁화호 열차와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버스로 바꾸어 타야 한다. 첫번째 목적지 거제시 학동몽돌해수욕장까지는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대구역을 출발한 관광버스는 마산, 통영을 거쳐 학동몽돌해수욕장에 도착했다. 05:20 학동몽돌해수욕장은 해변이 모래가 아닌 몽돌로 이루어졌다. 학(鶴)과 비슷한 모양을 해 학동, 흑진주처럼 검은 몽돌이 합쳐서 학동몽돌해수욕장이라 불린다. 환경부에서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 지정할 만큼 파도와 몽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천연기념물 233호로 지정이 된 인근 동백림의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으니, 보면 볼수록 눈이 즐거워진다. 06:30 소나무가 바위를 뚫고 자란 묘한 모습의 신선대 바위(일명 잠수함 바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신선이 바둑을 두는 형상이다. 길 건너편을 바라보면 진달래꽃이 피어 있으니, 조심조심 꽃밭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어 보자. 진달래꽃 냄새에 취해 잠시 꽃밭의 공주와 왕자로 변신하는 것은 어떨까? 07:00 신선대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도장포유람선터미널. 유람선 출항에 앞서 MBC 드라마 ‘회전목마’ 등의 촬영지였던 바람의 언덕을 둘러보았다. 예전 마을 아낙네들이 뱃길 떠난 남편을 기다리던 곳. 티 없이 맑은 하늘과 새하얀 구름, 그리고 코발트빛 바다와 황톳빛 들판이 어우러져 한폭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바닷바람은 마치 음료수처럼 시원하기 그지없다. 오전 7시에 출발한 유람선은 해금강 선회관광을 한 뒤, 외도로 향했다.10분쯤 달렸을까. 바다의 금강산, 아니 세계 최고의 조각가라도 만들 수 없는 기암괴석군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해금강이었다. 07:20 해금강의 원래 이름은 칡뿌리가 뻗어 내렸다는 갈도(갈곶도). 지금은 명승 제2호로 바다의 금강산이라는 뜻을 가진 해금강으로 불리고 있다. 유람선 선장의 감칠맛 나는 설명을 듣고 있자니 두꺼비바위, 선녀바위 등 각각의 절벽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어느 때보다 선장의 뛰어난 운항기술을 요하는 곳이 해금강 선회관광의 하이라이트라 불리는 십자동굴.‘해금강 선회관광을 하면서 십자동굴을 못 가봤다면, 용을 그린 다음 눈을 그리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처럼 신비로움의 극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09:30 외도는 해금강과 달리 상륙관광이다. 섬 보호를 위해 주류, 담배 등은 반입이 되지 않는다. 드라마 ‘겨울연가’ 마지막회 촬영지이며, 한려수도해상국립공원인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일대 약 4만 4000평에 야자수 등 840여 종의 아열대 식물과 3000여종의 수목이 어우러져 있다. 지중해의 한 도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국적인 모습을 바라보면, 자연과 예술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공간, 마치 천국에 와있는 듯한 착각마저 느낀다. 사막식물이 모여 있는 선인장 동산, 지중해식 정원 비너스 가든, 대마도까지 볼 수 있는 전망대 등 관람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과 인간의 조화, 여행의 즐거움 등을 만끽할 수 있는 볼거리들로 가득 차 있다. 11:20 외도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시간30여분. 너무 짧은 편이라 아쉽지만, 자연보호를 위한 노력과 후대에 좋은 관광지를 남겨주기 위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외도관광을 마친 다음 마산시 호성온천으로 향했다.27℃ 청정알칼리수로 유명한 곳. 뜨끈뜨끈한 온천물로 씻고 나니 여행의 피로가 일순간 사라지는 듯하다. 12:30 마산 하면 떠오르는 것이 어시장과 아귀찜. 바다 냄새를 맡으며 싱싱하고 푸짐한 회와 해산물로 점심식사를 한 다음, 조선 영·정조 때부터 이어져 온 마산어시장을 둘러보았다. 17:10 마산어시장에서 대구광역시 망우공원까지는 2시간쯤 소요된다. 망우공원은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곳. 말위에서 장검을 곧추세운 곽재우 장군의 동상과 하얀 성벽위에 지어진 ‘영남제일관’이란 누각이 인상적이다. 18:15 동대구역을 출발했다. 갈 때는 무궁화호를 타고 3시간 30분여를 달려야 했지만, 돌아올 때는 KTX다. 시속 300㎞로 달려 1시간50분이면 서울역에 도착한다. 20:06 아쉬움을 안은 채 서울역에 도착. 무박 2일 동안 함께한 여행동료, 가이드와 석별의 정을 나눈 다음 곧바로 다음 여행을 기약했다. # 여행수첩 경인관광여행사(www.ktx7788.co.kr)는 왕복열차요금과 연계버스요금, 유람선료, 입장료 등이 포함된 외도여행상품을 내놓았다. 외도와 해금강 외에 신선대, 바람의 언덕 등 명소를 돌아볼 수 있다. 어른 8만 9000원, 어린이 7만 5000원.(032)343-7788,(080)343-7788.
  • [OUR STORY] 봄처녀를 그리다

    [OUR STORY] 봄처녀를 그리다

    꽃을 보면 눈이 즐겁고 마음이 화사해진다.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번진다. 어떤 꽃인들 그러지 않을까마는, 차디 찬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봄꽃의 유혹은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다.3월이라…. 초순을 훌쩍 넘긴 이맘 때라면 청매실 농원이 있는 광양 매화마을로 가야 한다. 바람에 흩날린 하얀 매화꽃이 섬진강으로 떨어지는 광경, 생각만으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섬진강 자락에 기댄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마을에선 노란 산수유가 다투어 피어났다. 해마다 중순을 넘어서야 만개하더니 매화꽃을 시샘하는 까닭인가, 일찌감치 꽃을 피워 냈다. 계곡과 돌담 사이에 흐드러진 산수유가 눈부시고 애절하다. 이맘 때면 또 봄이 깃든 약숫물, 고로쇠가 매화, 산수유와 공명을 다툰다. 삼국시대 병사들이 전투 중 화살에 꽂힌 나무에서 흘러나온 고로쇠를 마시고 원기를 회복했다던가.‘나도 예 있소!’하며 목청을 높이는 듯하다. 지리산과 백운산을 휘감으며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한 모습으로 흘러가는 섬진강에 봄빛이 완연하다. 주 초반 꽃샘추위가 반짝 기승을 부리긴 했지만, 서둘러 찾아 온 봄이 개화시기를 앞당겨 놓은 탓에 서두르지 않으면 낙화하는 모습만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만화방창 때는 좋아 아니 가지는(?) 못하리라∼. 글 사진 구례 손원천 기자 km@seoul.co.kr ■ 산수유 군락지 전남 구례 산동 상위마을 전주와 임실을 뒤로하고 남원땅에 접어드니 이름도 살가운 춘향터널과 방자교차로가 이방인을 맞았다. 설핏 웃음이 흘러 나왔다. 혹시 몽룡 고가도로나 향단이 삼거리, 변학도 다리는 없을까. 도로시설 이름만으로 가슴 한자락 내려놓게 하는 남도의 해학에 장시간 운전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 # 노란 군무(群舞) 산수유 남원을 지나 20분쯤 달렸을까. 봄물에 방게 기어 나오듯, 고샅길과 개울가 곳곳에서 노오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던 산수유가 어느새 선연한 노랑색 군락을 이루며 눈앞에 펼쳐졌다. 구례군 산동면 상위마을. 국내 최대의 산수유 군락지다. 작가 윤대녕씨가 ‘마른 가지에 뿌옇게 튀어 올라 비구니 애처로운 머리통에 비죽비죽 돋는 머리칼 끝들을 생각나게 한다’던 바로 그 꽃.3월로 들어서자마자 꽃망울을 터뜨린 산수유가 산동마을 농가 앞마당과 돌담길, 논두렁이며 산기슭에 꽃구름을 피워 놓았다. 마치 마을 전체가 노란 구름에 파묻힌 듯한 느낌. 노랑빛 감도는 이끼가 낀 채 단정하게 서 있는 돌담길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좁은 돌담길을 걷다보면 남녀간 정이 도타워지고, 없던 정도 생긴다 해서 사랑의 길이라 불린다. 그 돌담 위로 산수유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산수유도 돌담도 온통 노랑빛. 때마침 내린 봄비마저 노란 색깔을 머금고 흩뿌려지는 듯하니, 그야말로 꽃처럼 아름다운 봄날이다. 아마 여수·순천 10·19사건 때 ‘산동애가’를 부르며 토벌대에 끌려갔다는 19세 백씨(氏)소녀도 그처럼 아리따웠을 게다.‘잘 있거라 산동아 한을 안고 나는 간다/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고/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산수유가 지리산을 노랗게 물들여갈 때면 이곳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산동애가의 한 구절이다. 산수유에서 왠지모를 애절함이 느껴졌던 건 이처럼 가슴아픈 해방공간의 현대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나 보다. 상위마을에서 19번 국도를 가로질러 가면 만날 수 있는 현천마을과 반곡마을 또한 사진작가들이 즐겨찾는 산수유 명소다. 구례군청 문화관광과 (061)780-2224. # 가볼 만한 곳 ●사성암 화엄사쌍계사 등 지리산을 대표하는 거찰 외에도 기암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사성암도 놓치면 아쉬운 볼거리. 절 뜨락에 서면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드넓은 토지면 등 구례 들녘과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물줄기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다. 문척면 죽마리. ●운조루 1776년 건축된 조선시대 전통 양반가옥.‘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구름 위로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뜻의 이름만큼 아름답다. 남한 3대 길지(吉地)위에 세워져 세인들의 관심을 더한다. 중요 민속자료 8호. 토지면 오미리 # 가는 길 자가용을 이용해 갈 경우, 산수유마을을 먼저 둘러본 뒤 매화마을로 가는 게 편하다.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목을 나와 남원 방향 17번 국도를 탄 뒤, 임실을 거쳐 남원시 직전에 있는 춘향터널을 지나자마자 19번 국도로 갈아 탄다. 밤재터널을 지나 지리산온천랜드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2㎞쯤 가면 산수유 마을에 닿는다. 매화마을은 산수유 마을에서 나와 다시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방면으로 가다 화엄사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861번 지방도로 바꿔 타고 직진, 화개장터 지나 남도대교를 건넌 다음 좌회전해 계속 직진하면 된다. 산수유마을에서 40∼50분 소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구례까지 가는 것이 우선. 구례행 직행버스(4시간 소요)가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하루 4차례 운행한다. 기차는 하루 15회. 구례구역에서 내린다. 상위마을까지는 구례공용터미널에서 1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닌다.(061)780-2731. ■ 지리산 피아골 직전마을 고로쇠 ‘여러분은 지금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가고 계십니다.’지리산 피아골로 향하는 섬진강변 861번 지방도로 한쪽에 서있는 입간판 글귀다. 가슴에 여실히 와 닿는 명문. 최소한 이맘때 만큼은 더없이 정확한 표현이지 않을까. # 봄이 깃든 물 고로쇠 산수유에 취해 몽롱해진 정신을 봄비에 씻기운 맑고 깨끗한 섬진강 바람에 날려보내고, 지리산 피아골 계곡의 마지막 동네 직전마을로 향했다. 고로쇠 산지로 유명한 곳. 경칩을 막 지난 요즘 이 마을 사람들은 고로쇠 채취로 분주하다. 가을엔 부지깽이도 덤빈다더니, 딱 그 모양. 봄기운이 약동하는 피아골 자락에 나무들의 수액 차오르는 소리가 가득하다. 피아골에서 고로쇠 채취로 40여년을 보낸 손경섭(53)씨의 설명.“고로쇠는 뿌리에서 새순으로 흘려보내는 수액을 뽑아낸 겁니다. 날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이맘때 아니면 채취가 안되지요. 날씨가 맑고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많은 수액이 나오지만, 비가 오고 눈이 오거나 강풍이 불어 날씨가 좋지 않으면 수액 양도 적습니다.”손씨의 자랑이 이어진다.“경칩 전후 한 달 동안 채취하는 직전마을 고로쇠 수액은 야산에서 생산되는 것에 비해 당도와 효능이 뛰어나 그야말로 산중 보약이죠.” 동행한 문화관광 해설가 박미연(35)씨는 “체내에 쌓인 노폐물을 제거하기 위해 고로쇠 수액 한 말(18ℓ)을 서너명이 밤을 도와 마시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매년 이맘때면 지리산 자락의 민박집 등에서 관광객들이 밤새 고로쇠 수액을 마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하죠.”라며 거들었다. 막 채취한 고로쇠 한잔을 들이켰다. 들척지근한 것이 온몸에 산골의 봄기운이 통째로 전해진다. 미각을 통한 봄맞이처럼 생생한 게 또 있을까. 한화리조트 지리산(www.hanhwaresort.co.kr)은 피아골 직전마을 주민들이 채취한 고로쇠 수액을 택배로 보내준다.18ℓ1통 5만 5000원.(061)782-2171. 글 사진 구례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고로쇠 수액의 약리효과 단풍과에 속한 활엽수인 고로쇠나무의 껍질을 한방에서는 ‘지금축’이라는 약재로 사용해 왔다. 지금축은 성미가 맵고 따뜻해 풍을 제거하고 습기를 없애며(祛風除濕), 혈액순환을 도와 어혈을 없애는(活血祛瘀) 작용을 한다. 따라서 풍과 습이 원인인 사지마비, 동통은 물론 골절·타박상에도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로쇠 수액은 해발 600∼1000m의 고지대에 자생하는 고로쇠나무의 뿌리에서 줄기로 올라가는 수액을 인위적으로 채취한 것이다.1m 정도 높이의 나무 몸통에 드릴로 1∼3㎝ 깊이의 구멍을 뚫은 뒤 호스를 꽂아 흘러내리는 수액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 소백산, 오대산 등 산이 깊고, 공해가 적은 곳에서 많이 재배하거나 자생하며 ‘고로쇠’란 이름은 관절통 등 관절질환에 좋다는 뜻의 골리수(骨利樹)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동안 고로쇠 수액의 성분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는데, 당분 칼슘 마그네슘 칼륨 비타민B1·B2와 비타민C, 각종 미네랄 등의 영양소가 일반 물보다 40배 정도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알칼리성의 이온화된 성분은 인체에 쉽게 흡수된다. 이 가운데 주성분인 당분은 1∼2%가량 함유되어 있으며 사당, 포도당, 과당이 함께 어울려 달콤한 맛을 낸다. 성분이나 맛의 차이는 고로쇠나무가 자라나는 토양, 기후, 채취 시기 등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고로쇠 수액은 많이 마셔도 탈이 나지 않아 평소 물처럼 하루 4∼5회 음용하면 되며, 다른 음식에 곁들여도 잘 어울린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함유 성분이 풍부하고 체내 흡수도 좋은 고로쇠 수액은 건강음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고로쇠 수액의 효능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지만 수액에 포함된 당분이 혈당조절을 원활하게 해 당뇨, 고혈압, 피로회복 등에 효능이 있고, 각종 미네랄은 류머티즘 관절염, 통풍, 신경통, 산후 후유증 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칼슘성분이 많아 노약자나 골다공증 등이 많은 부녀자에게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그 밖에 위장병, 피부병, 비뇨기과 질환 등에도 좋은 효험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 이경섭 강남경희한방병원장·경희대한의대 한방부인과 교수 ■ 전남 광양 섬진강 다압 매화마을 매화(梅花)라 한다.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과 서리를 이겨내고 피어난다.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줄 뿐만 아니라 그 자태가 연분홍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봄처녀의 아리따운 모습과 닮아 애간장을 녹인다. 매화는 또 한평생 춥게 살면서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다. 옛 선비들은 매화의 그 고결한 기품을 본받으려 늘 가까이 두고 노래했다. 청빈과 지조, 그리고 올바른 법도를 지키게 하는 절개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래서 병풍이나 족자, 청자·백자 도자기에서도 오롯이 피어나 사시사철 길잡이 역할을 했다. 퇴계 선생은 생전에 매화가 좋아 시 여러 편을 남겼다. 그 중 한 구절이다.‘옛 책을 펴서 읽어 성현을 마주하고/밝고 빈 방안에 초연히 앉아/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 보게 되니/거문고 줄 끊어졌다 탄식하지 않으리’-壬子正月二月立春(임자년 정월 초이틀 입춘) 매년 3월 한 달이면 전남 광양의 매화마을 일대에는 매화축제가 열려 많은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자,‘얼씨구나 매화로다’처럼 춘정이 그립거든 봄의 교향악이 펼쳐지는 그곳으로 훌쩍 떠나보자. 지리산과 구비진 섬진강을 덮은 매화의 시향(詩香)에 흠뻑 빠져 봄맛을 진하게 느껴 보자. 글 광양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광양시청 제공 매화마을로 유명한 광양 다압면(多鴨面). 지난달 하순부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매화는 550리 섬진강, 아름다운 지리산과 백운산 자락을 배경으로 그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경남 하동 나들목에서 매화마을로 들어섰더니 섬진강 강가 주변에는 대나무와 억새풀숲 또한 그림처럼 쭉 이어진다.‘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표지판이 그럴듯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나는 차창 밖으로는 ‘섬진강 재첩국’이라는 간판이 여기저기 눈에 띄어 입맛을 자극했다. 매화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백운산 자락에 내려앉은 연분홍 구름선녀들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가를 감상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이 광경에 ‘와∼’라는 탄성을 연발한다. 또한 연인끼리, 가족끼리 그 추억을 담아내려고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눌러댔다.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꽃잎 가까이에 다가가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볼에 비벼보는 관광객들도 많았다. # 17일부터 25일까지 매화축제 가장 이른 시기에 봄소식을 전해주는 매화꽃을 소재로 한 매화축제는 섬진강변 매화마을 일원에서 해마다 3월에 열리며 전국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개최되는 꽃 축제이다. 1997년 시작된 매화축제는 품질 좋은 매실과 매실로 만든 매실식품을 널리 알리고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시작됐으며 전국의 관광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섬진나루터와 청매실농원의 전통옹기, 그리고 섬진강 재첩잡이 풍경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강변 드라이브도 즐길 수 있다. 광양시청에서 주최하는 매화마을 축제는 매화꽃이 만개하는 오는 17일부터 25일까지 9일 동안 열린다(청매실농원 자체에서는 이미 지난 1일부터 시작됐다). 주제는 ‘달빛 어린 매화, 섬진강 따라 사랑을’이다. 특히 올해는 ‘매화학술대회’‘매화작품전시회’‘매화음악회’ 등의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다. 아울러 ‘나만의 매화만들기’‘봄을 깨워라’‘매화탁본’‘꽃차만들기’‘섬진강변 소달구지여행’ 등의 체험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이밖에 전국 매화사진 촬영대회, 매화백일장, 매화사생화대회 등의 부대행사도 이어진다. 광양시청의 한 관계자는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서 50만명의 관광객이 찾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섬진강의 유래 1385년 고려 우왕 11년 때의 일로 전해 내려온다. 경남 하동에 왜구들이 많이 출몰하면서 양민들을 괴롭혔다. 왜구들이 강을 건너려 할 때 두꺼비 수만마리가 몰려와 울음으로 왜구를 쫓아내자 이를 가상히 여긴 임금님이 강 지명을 한문으로 두꺼비 섬(蟾)자를 써서 섬진강(蟾津江)이라 부르라고 했다. 예부터 두꺼비는 집지킴이, 재복신으로 불리웠다. 액을 물리치고 부귀영화를 불러주는 동물로 여겨진 것이다. 예를 들어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고 잘 살아라’,‘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등의 동요도 있다. 또한 두꺼비가 절에 나타나면 스님이 합장을 하고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등 불가에서는 큰스님, 또는 실지 금와보살로 지칭되기도 한다. # 교통편 서울에서 갈 경우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타다가 산청으로 빠져 국도로 가는 길이 있으나 지리산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아예 진주까지 가서 하동읍내를 통해 다압면으로 가는 편이 좋다고 경험자들이 권한다. ●서울∼대전∼진주∼하동IC∼하동읍∼섬진교∼매화마을. ●천안∼논산 고속도로를 이용해 익산을 거쳐가는 방법도 있다. 익산∼전주∼구례∼간전교∼다압면∼매화마을. ●열차편으로는 하동역 또는 진상역에서 내려 시내버스로 이동하면 된다. # 주변 볼거리 ●자연관광 백운산과 4대계곡, 섬진강나루터, 광양만, 망덕포구와 배알도, 희양십경 등.(061)797-2731. ●문화유적 옥룡사지 동백림, 중흥사, 형제의병 유적지, 성불사 등.(061)797-3363. # 먹을거리 재첩국과 고로쇠 등이 풍부하며 그외 식당안내는 (061)797-2607로 하면 된다.
  • 그날의 함성 전국에 메아리

    3·1절 기념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다채롭게 열렸다. 정부는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노무현 대통령 및 정부 주요인사, 독립유공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88주년 3·1절 기념식’을 개최했다. 평양에서 열린 제20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참석한 이재정 남측수석대표 등도 고려호텔 3층 극장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서울시는 이날 낮 12시 애국지사 남상은 선생의 아들 만우씨 등 12명이 참석한 가운데 종로구 보신각에서 타종행사를 열고 독립만세를 각색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독립유공자유족회와 한민족운동단체연합 등 ‘3·1절 기념 민족공동행사조직위원회’는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제 및 탑돌이를 한 뒤 서울 도심에서 ‘문화대제전’을 열었다. 세계국학원청년단은 서울과 부산, 대구, 광주, 제주 등 전국 14개 도시 30여 곳에서 태극기로 만든 옷을 입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태극기 플래시몹’을 선보였다. 자정에는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버 의병’을 통해 포털 사이트에 일명 ‘애플’(애국리플) 달기 운동을 벌였다. 시민사회단체도 동참했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저지 범국민본부는 보신각 앞에서 ‘3·1절 맞이 한·미FTA 반대 시민문화제’를 개최했다. 통일연대도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군국주의 일본 규탄 3·1절 88주년 기념 자주대회’를 열었다. 보수단체인 뉴라이트전국연합과 국민행동본부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대한민국 살리기 3·1국민대회’를 개최했다. 한편 보수와 진보단체간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날 오후 2시10분쯤 서울 청계천 인근에서 집회를 열던 평화통일시민연대 소속 최모(68)씨 등 2명이 집회 장소를 지나던 북한민주화운동본부 박모(38) 대표 등 보수단체 회원 5명에게 맞아 이가 부러지는 등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박씨 등 5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보수단체 관계자는 “집회에서 한반도기를 휘두르고 있어 태극기를 써야 한다며 승강이를 벌이다 다툼이 일었다.”고 말했다.이문영 이재훈기자 2moon0@seoul.co.kr▶관련기사 12면
  • [문화플러스]

    ●경복궁관리소는 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에서 쓰여진 일상생활용품들을 1일부터 공개한다. 강녕전에 즉석도병풍 등 24종 42점, 교태전에 곽분양행락도병풍 등 68종 102점이다. 도감의궤 등 관련 자료와 국립고궁박물관 등이 소장한 궁중유물들을 참고하고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인간문화재)와 명장을 참여시켜 원형에 가깝게 재현했다. 경복궁관리소는 1999년 근정전을 시작으로 궁중생활상 재현전시사업을 벌이고 있다. 강녕전과 교태전을 포함하면 모두 8개 전각에 모두 248종 488점의 궁중생활용품이 전시된다. ●문화재청은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있는 전라남도기념물 제153호 쌍산의소(雙山義所)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하기 위해 28일 예고했다. 쌍산의소는 구한말 의병들이 왜경에 대항하여 전투를 준비하던 창의소(創義所)터로 호남 의병뿐만 아니라 한말 의병사에 빛나는 문화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무기를 제작한 대장간터, 화약의 재료를 채취한 유황굴, 자연석으로 쌓은 의병성의 훈련장과 막사터, 호남창의소 본부 등이 남아 있다.
  • [씨줄날줄] 정치내통/이목희 논설위원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란 그림은 ‘내통(內通)’을 처단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활동상을 담은 기념비가 북관대첩비다. 창의토왜도는 그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전투가 한창 진행중임에도 왜군과 내통한 자의 목을 치고 있다. 우적(友敵) 대치상황에서 간첩질을 의미하는 내통은 즉결처분이 원칙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을 회고하면서 내통을 언급했다. 당시 노 대통령이 속했던 민주당의 일부 인사들이 다른 후보나 정당을 기웃거린 상황을 빗댄 말이었다. 대선 승리 가능성에 따른 정치철새떼의 움직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염치없는 행태였지만 간첩질에 바로 연결시킬 수 있을지는 논쟁거리다. 그때 ‘후단협’ 인사들은 거의 공개리에 정몽준씨를 여권의 통합후보로 밀었다.“내통 현장이 국민에게 포착됐다.”는 노 대통령의 말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내통이란 용어에서 정치적 복선이 느껴진다. 노 대통령의 행적을 풀이하는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왜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을까. 지역감정 해소는 명분일 것이다. 내통자와 더이상 함께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작용했다고 본다. 최근의 통합신당 논의 역시 마찬가지다. 즉결처분해도 시원찮을 내통자와 다시 손을 잡으라니…. 노 대통령의 선택을 쉽사리 추정할 수 있다. 정치기상도가 더욱 복잡한 올해는 정치 내통이 한층 판칠 듯싶다. 여당은 후보가 정해지기도 전부터 탈당사태가 벌어지고, 야당 대선주자 빼내기까지 거론하고 있다. 한나라당 손학규씨가 여권 후보로 영입돼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소설까지 등장했다. 야당은 유력주자간 경쟁이 너무 빡빡한 바람에 내통설이 나온다. 노무현·이명박 연대론, 김대중·박근혜 연합론 등이다. 여기에 한나라당 집권을 저지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선 북한을 빼놓을 수 없다. 북한과 내통 의혹은 선거판의 단골메뉴다. 뉴라이트, 뉴레프트를 위시한 각종 단체들…. 겉주장과는 달리 특정 정파와 내통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정치판이 언제쯤이나 내통처럼 살벌한 용어에서 벗어나게 될지, 안타깝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새해 ‘이달의 독립운동가’ 13명 선정

    저항시인 윤동주,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부회장을 지낸 권동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활동한 이위종 등 13명이 2007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21일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내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발표했다. 내년이 신민회 창건과 국채보상운동, 헤이그특사 파견 100주년이라는 점을 고려해 관련 인물들이 대거 뽑혔다. 신민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임시정부 연통제 참사를 지낸 임치정,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김광제·서상돈 등이 대표적이다. 순국 100주년을 맞는 의병장 정환직·권득수, 탄생 150주년을 맞는 구춘선 북간도 대한국민회 회장, 좌·우합작 여성운동단체 근우회를 창립한 조신성 등도 함께 뽑혔다. 보훈처는 국민들의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 포털사이트에 이달의 독립운동가 카페(cafe.naver.com//bohunstar)를 개설, 각종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다음은 월별 독립운동가 명단이다. 임치정(1월), 김광제·서상돈(2월), 권동진(3월), 손정도(임시정부 교통총장·4월), 조신성(5월), 이위종(6월), 구춘선(7월·대한독립군단 결성), 정환직(8월), 박시창(9월·한국광복군 상하이지대장), 권득수(10월), 주기철(11월·신사참배 거부 옥사), 윤동주(12월).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부고]

    ●이우용(서울신문 제작국 윤전1부 과장)씨 모친상 19일 안산 사랑의병원, 발인 21일 낮 12시 (031)487-4755●김재우(김&장 법률사무소 수석전문위원·전 공정거래위원회 부이사관)재식(경북대 교수)재욱(진주 우리치과병원장)준우(기아자동차)씨 부친상 1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1일 오전 7시 (02)3410-6912●김오우(동국대 교수)광우(자영업)근홍(강남대 교수)영수(대신증권 여천지점장)씨 부친상 정해진(자영업)강상희(〃)씨 빙부상 19일 전북대병원, 발인 21일 오전 9시 (063)250-2441●박관순(동가래농장 대표)채순(트랜스문도 〃)번순(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하순(사회진보연대 운영위원장)도순(거평산업개발 상무이사)윤순(선라이즈 이사)씨 모친상 이진희(수원 매현중 교사)씨 시모상 18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1일 오전 6시 (02)3410-6905●홍원석(한화유통 경영관리팀장)씨 부친상 19일 부산 침례병원, 발인 21일 오전 9시 (051)583-8902●김학성(법무사)씨 별세 인경(수원축협)미영(남원주중 교사)미희(건축사)씨 부친상 이상호(원주농협)성기홍(연합뉴스 정치부 기자)양현도(회사원)씨 빙부상 19일 수원 효원장례문화센터, 발인 21일 오전 8시 (031)231-8909●장문봉(뉴질랜드 거주)기봉(현대자동차 중부트럭지점 과장)석봉(헤럴드경제신문 기획취재부 차장)재봉(현대자동차 선행디자인팀장)씨 모친상 1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1일 오전 10시 (02)3010-2237●이신명(미도패션 사장)신애(국민은행 동부이촌동지점 대리)씨 부친상 이희준(국민은행 E-비지니스부 과장)씨 빙부상 1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1일 오전 7시 (02)3010-2263●임종규(경북식품 대표)정해(정진에이전시 과장)씨 부친상 황용배(베니건스)나선국(아세아물류 영업부장)씨 빙부상 1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1일 오전 6시30분 (02)3410-6914●이원숙(경인일보 편집부 차장)씨 부친상 18일 동국대 경주병원, 발인 20일 오전 10시 (054)776-9413●최경석(경주초등학교 교사)경진(코뷰 대표)경득(연세대의료원 홍보팀장)씨 부친상 18일 동국대 경주병원, 발인 20일 오전 9시 (054)776-9412●유희용(HHS무역 대표)씨 모친상 18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0일 오전 8시30분 (02)3410-6909
  • 친일 행위자 106명 첫 확정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1년여의 조사활동을 토대로 친일 반민족행위자를 이같이 최종 확정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노무현 대통령과 국회 등에 제출했다고 말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에는 적극적 매국행위를 했던 이완용, 중추원 부찬의를 지낸 오제영, 의병탄압에 적극 앞장섰던 경찰 최진태 등이 포함됐다. 또 동양척식회사 설립위원으로 일제의 경제침탈에 적극 협력했던 백완혁, 친일단체의 대명사인 일진회 회장을 지낸 이용구, 조선총독의 직속 유림기관인 경학원 사성(司成)과 ‘경학원잡지’ 편찬주임을 맡았던 이인직,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발행인을 지낸 선우일 등이 들어 있다. 보고서는 총 2권으로 돼 있으며,1400쪽 분량이다.1권은 위원회 사업 및 조사활동이,2권에는 106명의 결정이유서가 담겨 있다. 위원회는 조사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법적으로 이의신청기간이나 심의·의결과정 등에 있는 것은 보고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밝혔다. 을사오적에 포함된 인물이라도 결정보고서에 포함되지 않은 것도 있다는 설명이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는 지난해 5월부터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9년 5월30일까지 활동하도록 돼 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친일반민족행위 최종 확정자 106인 이용구 유학주 양재익 김택현 최운섭 윤정식 원세기 이범철 홍윤조 한경원 백남신 이인직 김용곡 이준용 고영희 이재면 민종묵 윤웅렬 이건하 이봉의 이용원 이범팔 김낙헌 유동작 홍종억 이희두 김성규 강병일 박요섭 최기남 강경희 권봉수 김명수 서회보 성하국 송헌빈 엄태영 오제영 이재정 최상돈 최병혁 계응규 최진태 백성수 신상호 박제순 이근택 임선준 조중응 김성근 김학진 남정철 민영소 이근명 이주영 정낙용 정한조 최석민 박경양 이봉로 이준상 정인흥 조원성 조재영 홍승목 홍재하 변 일 신광희 선우일 최영년 박치상 김재순 유일선 신재영 조진태 백완혁 백인기 정치국 김시현 홍긍섭 정운복 한국정 김진태 백낙원 박지양 서창보 이범찬 이학재 김사영 김정국 김재룡 김준모 김규창 한남규 한창회 한교연 안태준 신태항 장동환 조인성 조덕하 이종춘 이완용 권중현 이재곤 이병무
  •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 35년만에 복원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 35년만에 복원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격인 경북 경주 최씨 교촌가(校村家)의 고택 사랑채가 35년 만에 제 모습을 찾았다. 29일 경주시에 따르면 1970년 화재로 불탄 뒤 방치돼 오던 경주 최씨 가옥의 37평 규모 사랑채를 최근 1년 동안 5억 3000만원을 들여 원형 복원했다. 이번에 복원된 사랑채는 18세기 신라 요석궁 자리에 위치한 300년 만석꾼인 경주 최씨 정무공파 종가집 고택(중요민속자료 제27호) 99칸 집 중 하나다. 이곳 사랑채는 많을 때는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수많은 일화와 사연을 간직한 곳으로 유명하다. 구한말 영덕 출신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피신했고,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 수백명과 함께 며칠 동안이나 묵었다.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도 1년 이상 사랑채에 머물며 ‘동경지’라는 책을 집필했다. 해방 이후에는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의 설립에 전 재산과 함께 기부됐다. 특히 이 사랑채를 통해 퍼져 나간 ‘최부잣집 가훈’은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재산을 만 석 이상 모으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과 밭을 사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이다. 경주시 관계자는 “앞으로 경주 최씨 고택의 별당과 낡은 대문채, 방앗간, 도장 등도 추가 복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산이좋아 산으로] 전북 완주 대둔산

    [산이좋아 산으로] 전북 완주 대둔산

    충남 논산시와 금산군, 전북 완주군에 걸쳐 있는 대둔산(大芚山·877.4m)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푸근한 육산(흙산)과 날카로운 골산(바위산)의 두 얼굴을 가진 산이다. 충청도 쪽에서 보면 그네들의 느릿느릿한 말투가 생각나고 전라도 쪽에서 보면 억센 사투리가 먼저 떠오른다. 대둔산 이름의 유래에 대한 의견도 여러 가지다. 옛 이름은 ‘한듬산’으로 계룡산의 지세와 겨루다 패해 한이 맺힌 것이라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순 우리말로 ‘크다’는 뜻의 ‘한’과 ‘덩이’라는 뜻의 ‘듬’을 한자화 하다 보니 대둔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한 맺힌 산’이라는 대둔산의 이름처럼 대둔산의 역사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임진왜란때는 대둔산 일대에서 김제군수 정담이 이끄는 의병대와 권율장군의 군대가 일본군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이치대첩’으로 기록되는 이 전투 이후 퇴각하던 일본군은 ‘조선의 충신과 의사를 조문한다.’는 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대둔산에서 뻗어 내린 배티재 정상에 이치대첩비가 있어 산행을 끝내고 둘러볼 만하다. 조선 말기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도 대둔산을 찾아 일본군에 대항한 마지막 항전을 벌였다. 험한 바위지형 탓에 접근이 어려웠을 당시로서는 천혜의 요새였을 테지만 동학군은 결국 바위벼랑에 모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만다. 대둔산 마루 삼선계단 가기 직전에 ‘대둔산 동학군 최후항전지’ 표지가 있어 이런 역사를 후세에 알리고 있다. 마천대에 오르면 바라보이는 완만한 금산쪽 대둔산은 한국전쟁 이후 1955년까지 국군과 빨치산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군인들의 지옥’이라는 뜻의 군지골로 불리고 있으니 대둔산의 이름에 얽힌 한들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대둔산은 1977년 전라북도에서,1980년에는 충청남도에서 각각 도립공원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케이블카와 구름다리, 삼선계단 등 시설물이 몰려 있는 완주쪽 개발이 두드러져 교통이 편리하고 숙박시설이 다양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찾는다. 완주쪽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구름다리와 삼선계단을 거쳐 마천대까지 30분 정도 걸린다. 집단시설지구에서 배티재 방향으로 200m 지점에 있는 용문골 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용문굴과 칠성봉 전망대를 거쳐 마천대로 오를 수 있다. 대둔산 동쪽 바위 군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코스다. 어느 쪽에서 올라도 두세 시간이면 산행을 마칠 수 있어 가족이나 산악회 송년 산행지로 좋다. # 여행정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대전 서부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대둔산 집단시설지구까지 1일 6회 버스가 운행하고 40여 분이 걸린다. 입장료는 완주쪽이 어른 1300원이고 논산 수락계곡쪽은 500원이다. 대둔산 케이블카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행하며 편도 3000원, 왕복 5000원이다. 완주쪽 집단시설지구에는 숙박시설과 식당이 몰려 있다. 대둔산 아래 괴목동천 변에 있는 산아래 장승마을(063-263-8694,www.jsvill.com)은 마당이 넓어 가족단위 숙박이나 송년회 모임장소로도 좋다. 대둔산산악구조대에서 활동하는 이기열씨가 운영하는 카페를 겸한 펜션으로, 직접 깎아 만든 장승이 볼 만하다. 글 이영준 사진 남영호 (월간 MOUNTAIN 기자)www.emountain.co.kr
  • [기고] 순국선열들이 있었으매/박유철 국가보훈처장

    “나라를 빼앗겼을 때 그 나라를 찾고자 목숨을 바치고 풍찬노숙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들을 잡아 죽이고 곤죽을 만듦으로써 영달과 편안함을 취하고 있었다면 선열들은 무엇 때문에 나라를 찾고자 애썼고 목숨을 바쳤던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 최일남 선생이 쓴 ‘거룩한 응달’의 일부다. 오늘은 예순일곱 돌을 맞는 ‘순국선열의 날’이다. 소크라테스가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했듯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일 것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일제에 항거하다 희생된 선열들의 위훈을 기리고자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이 모태다.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비운을 맞게 되자 조국 광복을 위해 방법은 각기 달랐으나 국권회복에 대한 염원은 오직 하나로 수많은 선열들이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미얀마 인도 등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장기간 지속되었다. 의병투쟁을 시작으로 3·1운동 임정활동 의열투쟁 무장투쟁 외교투쟁 등의 항일 독립운동이 광복을 맞기까지 50여년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선열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으로 옥사하거나 일본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처럼 일본에 맞서 국내외에서 희생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선열들의 순국정신은 시대를 초월한 역사 발전의 동인이며,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참다운 시대정신이다. 조국을 찾기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신 선열들의 살신성인의 정신,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이기심을 버리는 멸사봉공의 정신, 이런 정의의 정신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우리가 반드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삶의 지표다. 100년 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가 이제 차기 유엔 사무총장직을 맡게 되었으니 세계 외교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다. 순국선열들의 값진 희생으로 오늘의 대한민국 위상은 세계 속에 빛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적 풍요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극단적인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로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 할 정의의 정신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더불어 세대와 계층, 지역간의 벽을 넘어 국민대통합을 이루고 선진한국 건설의 기반을 튼튼히 조성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보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보훈은 만년지대계(萬年之大計)라 했다. 정부는 국민이 공감하는 미래지향적 보훈체계 확립과 수준 높은 의료·복지체계 구축, 국민과 함께하는 나라사랑 정신의 확산 등 한 차원 높은 보훈정책을 펼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민족은 생존할 수 없다. 수난과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국선열의 날에 우리는 오늘의 사표가 되는 애국선열들의 순국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아야 한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책꽂이]

    ●대당서역기(현장 지음, 권덕녀 옮김, 서해문집 펴냄) 당나라 승려 현장이 1500년 전에 쓴 인도여행기. 서기 627년 스물 여섯의 청년 현장은 국법을 어기고 몰래 취경(取經)여행을 떠났지만 18년 뒤 인도에서 견문을 넓히고 수많은 불경을 구해 돌아오는 길엔 장안이 들썩일 만큼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서기 645년 현장은 640질의 불경과 불상 등 귀중한 자료를 가지고 당으로 돌아왔다. 트로이전쟁에 참가해 활약한 뒤 긴 세월 동안 온갖 위기를 이겨낸 끝에 집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와 닮은꼴. 당나라 때 불경은 오역이 많아 승려들 사이에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1만 1900원.●노블레스 오블리주(예종석 지음, 살림 펴냄)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제국의 2000년 역사를 지탱해준 힘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철학이라고 지적했다. 로마의 귀족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스스로 전장의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적과 싸웠다고 한다.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벌인 16년간의 제2차 포에니전쟁 중 최고 지도자인 콘술(집정관)의 전사자 수만 해도 13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역사를 다룬 책.3300원.●남명 조식의 학문과 선비정신(김충열 지음, 예문서원 펴냄) 조선 중기의 유학자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당대의 사상계를 이끈 영남유림의 종장이다. 그러나 정권과 타협하기보다는 현실개혁에 관심을 둔 남명학파는 정치적으로 소외됐다. 남명학의 권위자인 저자는 남명이 문묘배향을 불허한 점, 북인정권의 영수인 내암 정인홍의 실각, 곽재우 등 남명 문하에서 의병장이 많이 나와 일제강점기 때 역사가 왜곡된 점 등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자득과 실천을 중시한 남명의 학문세계와 강의직절(剛毅直切)한 선비정신을 살폈다.2만 6000원.●공자와 논어(요시카와 고지로 지음, 조영렬 옮김, 뿌리와 이파리 펴냄) 공자는 조국 노나라를 떠나 56세부터 69세까지 14년간 제자들을 이끌고 산동 하남의 여러 제후국을 방문했다. 그것은 “외뿔소도 아니고 범도 아닌데 저 광야에 떠돈다.”라고 공자 자신도 말한 것처럼 황량한 방랑이었다. 정나라 성문 밖에서 제자들과 떨어져 혼자 서 있을 때의 공자는 상갓집 개와 같았다고 ‘공자세가’는 전한다. 공자는 학자이자 동시에 정치가였다. 공자의 정치 중시, 그것은 ‘논어’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공자 평전이라 할 만한 글과 논어에 대한 설명이 실렸다.1만 8000원.●거울 속의 원숭이(이언 태터솔 지음, 정은영 옮김, 해나무 펴냄) 우리는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에렉투스로, 다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는 이야기에 익숙하다. 그러나 인류학자인 저자는 이같은 자연선택론의 아성에 반기를 든다. 그런 식의 단선적 이야기는 진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진실을 심각하게 오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화의 세계에는 적응의 증거도 있지만 비행을 위해 생겼던 펭귄의 날개가 지금은 나는 데 사용되지 못하고 수영에 이용되는 ‘탈응’의 증거가 있는 것처럼, 인간도 진화할 때가 있었지만 가끔은 숨을 고르기 위해 한 박자 정지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1만 1000원.
  • [심상덕의 서울야화] (25) 기생 국심이를 아시나요

    국화 향기가 코끝에 더 가까이 묻어나는 계절인데요. 옛날 우리 서울엔, 국화 향기 같은 그렇게 고운 마음의 여인이란 뜻에서 ‘국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생이 있었습니다. 구한말, 지금의 서울시청 부근 을지로 입구쪽. 예전엔 이 지역을 곤당골이라 했습니다. 이 곤당골에 서울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국심이란 기생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난 1907년 8월1일. 내일이면 연호가 광무에서 융희로 바뀌게 되는데, 당시 우리나라에 와있던 일본 사람들은 조선황실의 재정을 좀 더 여유있게 하고, 국고낭비를 막기 위해 조선보병대를 무장 해제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엉뚱하게도 이런 명분을 내세우는 바람에 조선보병대의 무장봉기가 일어나게 됐었잖아요. 희생자가 말도 못하게 많았던 겁니다. 그리고 그날 밤 서울시내 곳곳에서 골목골목마다 대규모 검문이 펼쳐졌던 거죠.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곤당골 기생 국심이네 집으로 뛰어든 조선보병대원 한사람. 온몸에 피를 흘리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이 순간 기생 국심이는 그 부상병의 운명을 떠맡기로 결심을 했던 겁니다. 그 부상병을 다락에 숨겨줬거든요. 그 조선 보병대원,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기 때문에 난생 처음 보는 기생 국심이의 앞날이 너무 위험하게 됐잖아요?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심은 한사코 못 떠나게 말리면서 자기를 찾아온 술 손님들에겐 요즘 몸이 아파서 손님을 맞이할 수 없다며. 이런 핑계로 대문을 걸어 잠근 뒤, 정성껏 부상병을 돌봐줬던 거죠. 그런데 그 부상병은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병대열에 끼어 대일 항쟁을 해야겠으니, 더 이상 나를 가로 막지 마십시오.”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던 겁니다. 그 뒤로 그 부상병은 단 한번도 기생 국심이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그때 그 부상병은 나라를 찾기 위해 용감하게 일본군과 싸우고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를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곤당골 국심이네 집에선 그 뒤로 오랜 세월 동안 바깥 출입이 없었다는 거죠.그 곤당골 기생 국심이. 국화꽃 향기 짙어가는 이 계절에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은 겁니다. 그 옛날 그런 여인들을.
  • [열린세상] 이율곡과 김대중/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610년에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다섯 분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런 분들은 국가가 충신 도학자로 공인한 셈이어서 후손들은 더없는 영광으로 알았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서인은 추가로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모시자고 주장했다. 남인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이이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된 적이 있으려니와 주자의 학문을 충실히 계승한 이황의 학설에 어긋나는 주장을 폈으며, 성혼은 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북쪽으로 파천하면서 그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고 의병을 일으키지도 않았다고 헐뜯었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숙종 때 서인이 득세하자 서인은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다. 영의정과 좌의정이 동조하고 노론인 송시열까지 지지하자 숙종은 배향 논의가 제기된 지 50여년이 지난 1681년에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배향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숙종이 1689년에 송시열 등을 귀양 보내고 남인을 중용하자 일은 다시 꼬였다. 정권을 잡은 남인은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빼라고 아우성쳤다.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분의 출향(黜享)을 단행했다. 그 일은 그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는가? 아니다.5년 뒤인 1694년에 숙종은 다시 남인을 내쫓고 노론을 불러들였다. 노론 세상이 되자 이이와 성혼을 다시 배향해야 한다는 복향론(復享論)이 제기되었다. 숙종은 다른 당파의 눈치를 살피느라 질질 끌다가 마침내 이를 허락했다. 조선조 최고의 학자였던 율곡 이이 선생마저 당파싸움 때문에 사후에 갖은 풍파를 겪은 셈이다. 율곡만 그런 훼예(毁譽)를 당한 것이 아니다. 현종 때 정태화나 조경 등도 문묘에 배향되었다가 출향당했다. 명예를 내렸다가 거두고 벼슬을 주었다가 빼앗는 건 왕조시대에는 다반사였다. 특히 논리의 힘이 아니라 힘의 논리가 지배할 때면 별의별 일이 다 벌어졌다. 요즘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이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언젠가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가 후광을 찾아가 만나자 그 당 사람들은 동서화합의 새 기운이 조성되었다고들 자찬했다. 그러나 그 뒤 그 당의 대변인은 후광과 햇볕정책을 호되게 몰아세웠다. 한 인터넷신문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그 대변인은 후광이 5000억원을 김정일 개인 계좌에 넣어주고 김정일이 공항에서 껴안아 주니까 치매든 노인처럼 얼어 서 있다가 6·15선언에 합의해줬다고 막말을 했다. 그러나 후광을 둘러싼 반전은 되풀이되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보수정객들은 한결같이 햇볕정책 때문에 대북정책이 꼬이게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에서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을 차별화해야 한다는 내부 보고서가 나왔다. 햇볕정책이 옳고 그르고의 문제를 떠나, 호남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전술적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요즘은 비둘기파가 사람 많은 곳에서 입조차 열기 어려운 형편인데, 한나라당이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을 차별화해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겠다니 이건 후광에 대한 놀라운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율곡의 시대와 후광의 시대는 거의 4세기에 가까운 시차가 난다. 그런데도 자기 당색의 인물이 아니면 헐뜯고, 당색이 다르더라도 치켜세우는 것이 이로울 것 같으면 눈 딱 감고 경배하는 풍조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특정 인물이나 사상·정책 등을 평가할 때 정파적 이해관계나 전술적 판단은 배제해야 한다. 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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