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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은 촛불까지 이어진 민주주의·민족운동의 뿌리”

    “동학은 촛불까지 이어진 민주주의·민족운동의 뿌리”

    11일 동학농민혁명 첫 국가기념일 행사 그간 농민반란으로 의미 축소 안타까워 반일 민족항쟁 출발점으로 재조명돼야 내년 전북 정읍에 동학 기념공원 완공“동학농민혁명은 낡은 신분제 중심 사회에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내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원이자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운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형규(66)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신임 이사장은 9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항일 의병과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광화문 촛불혁명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조선 고종 31년(1894) 동학교도인 전봉준은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불법 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는 조선 봉건사회 억압 구조 타파 시도로 확대돼 전라·충청 일대의 농민이 대거 참가해 전국 단위 혁명이 됐다. 지난 2월 정부는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올해부터 정부 주도로 기념식을 치르기로 했다. 11일에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제125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열린다. 이 이사장은 국무조정실에서 최규하 전 총리부터 고건 전 총리까지 28명의 총리를 보좌한 명실상부한 ‘총리실맨’이다. 이후 전라북도 행정·정무부지사 등을 거쳐 새만금위원회 민간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가 동학혁명에 애착을 느낀 건 전북행정부지사 시절 동학농민혁명 최초 승전지인 황토현 전적지(국가사적 제295호)에 기념관을 조성하는 데 나서면서다. 이 이사장은 “동학농민혁명이 단순한 농민반란으로 왜곡되고 의미가 축소돼 지난 한 세기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 왔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사람이 하늘’이라는 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학혁명은 탐관오리를 징벌하고 노비 문서를 소각하고 과부의 재혼을 허락하는 등 신분제를 폐지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반일 민족항쟁의 출발점으로도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단은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전라감영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황토현 전적지(전북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일대에 370억원을 들여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 이사장은 “내년에 완공되는 기념공원은 역사와 문화, 교육·체험, 관광이 어우러지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조성해 동학농민혁명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는 다양한 사업들을 펼쳐 국민들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되새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광복군 ‘이자해 전기’ 초고본 문화재 된다

    광복군 ‘이자해 전기’ 초고본 문화재 된다

    1930~40년대 내몽골 지역에서 의사로 일하며 광복군으로 활동한 이자해(1894~1967)가 남긴 전기 ‘이자해자전 초고본’과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병조(1877~1948)가 쓴 책 ‘한국독립운동사략(상편)’이 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항일독립유산인 ‘이자해자전 초고본’과 ‘한국독립운동사략(상편)’을 비롯해 교육시설 ‘익산 구 이리농림고등학교 본관’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다고 7일 밝혔다. 독립운동가 이자해가 저술한 ‘이자해자전 초고본’은 옛 만주 서간도 지역에서 일어난 대한독립단의 조직과 변화, 내몽골 지역에 거주한 다수의 한인들이 일제 패망 후 한인회를 조직해 활동한 기록 등을 서술했다. ‘한국독립운동사략(상편)’은 3·1운동의 배경과 각 지방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 국내외 독립운동의 양상, 일제의 탄압 실태 등을 정리한 책이다. 두 자료는 각각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을 수록하고 있으며, 3·1운동 연구의 기본 문헌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익산 구 이리농림고등학교 본관’은 1963년 전북 이리 이리농림학교의 제2본관으로 건립됐다. 전체적으로 붉은 벽돌 건물로, 출입구 상부의 계단실과 현관부를 화강암으로 쌓은 점이 특징이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순절한 독립운동가 매천 황현(1855∼1910)이 남긴 ‘매천야록’ 등 문집과 유물 6건은 모두 문화재가 됐다. 여성 독립운동가 윤희순(1860~1935)이 지은 가사를 모은 ‘윤희순 의병가사집’과 1956년 건립된 ‘서울 한양대학교 구 본관’도 각각 문화재로 등록됐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장범준, 5개월 앞당겨 제대 이유는?

    장범준, 5개월 앞당겨 제대 이유는?

    장범준 제대일이 재조명됐다. 최근 방송된 KBS2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는 장범준이 가족과 함께 전남 담양군에 위치한 모교를 찾는 장면이 그려졌다. 장범준이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활약하는 가운데 그의 제대일이 재조명됐다. 장범준은 전역을 5개월 앞둔 시점에 의병 제대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장범준은 지난 6월 수도방위사령부 52사단에서 상근예비역으로 복무하다, 무릎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어 의병 제대가 결정됐다. 장범준은 부상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오다 최근 의병 전역 심사 명단에 올랐다. 장범준은 당시 자녀가 있는 기혼자로서 현역 복무가 아닌 상근예비역으로 복무해 왔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임진왜란 영웅 충무공 후손, 항일투쟁으로 가문의 명예 잇다

    임진왜란 영웅 충무공 후손, 항일투쟁으로 가문의 명예 잇다

    28일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 탄신 474주년이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백척간두에 놓인 조선을 구해 낸 할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자 일제에 뺏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한 후손들의 이야기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올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충무공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독립운동 명문가의 사연을 들여다봤다.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충무공 후손(덕수 이씨) 가운데 항일투쟁 활동을 인정받아 국가유공자 서훈을 받은 이는 모두 11명이다. 이들이 받은 훈·포장은 14개다. 이규갑(1888~1970)과 이애라(1894~1922), 이세영(1869~1938), 이필희(1857~1900), 이민화(1898~1923), 이붕해(1896~1950) 등 6명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 2개와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 2개, 건국포장 3개, 대통령표창 1개도 충무공 가문에 수여됐다. 신채호(1880~1936)와 신규식(1880~1922) 등 13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산동 신씨 가문과 쌍벽을 이룬다. ●독립군 양성 신흥무관학교 이끈 이세영 이 가운데 국민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충무공의 12대손인 이세영이다. 1889년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8월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1851~1895)를 시해하자 같은 해 10월 전국 각지에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도 봉기에 참가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모차장에 취임했고 이듬해 5월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교장도 맡았다. 이후 중국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938년 쓰촨성에서 숨을 거뒀다. 이민화(11대손)와 이붕해(12대손)는 1920년 10월 만주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민화는 1907년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1889~1930)이 이끌던 북로군정서에서 중대장을 맡았다. 이붕해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곧바로 만주로 탈출해 청산리 전투에서 이민화처럼 중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지린성에서 만들어진 고려혁명군에서 꾸준히 항일투쟁을 이어 갔다. 이규갑과 이애라는 부부였다. 충무공의 10대손인 이규갑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전도사로 활동했다. 이애라는 이화학당을 나와 충남 공주의 영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둘은 1913년 혼인하고 평양에 살다가 3·1운동에 참가했다. 이규갑이 일본 경찰에 쫓기면서도 서울에 한성임시정부를 세우고 곧바로 상하이임시정부와의 통합 작업에 나서자 이애라는 남편을 돕고자 모금 활동에 나섰다. 안타깝게도 부부의 연은 짧았다. 1922년 이애라가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보훈처 공적조서에는 그가 만주에서 독립운동 관련 밀서를 숨겨 조선에 들어오다가 일본 헌병에 붙잡혀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함경도 웅기에서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당한 뒤 그 후유증으로 1921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숨졌다는 주장도 있다.●일제에 맞서 함께 싸운 이규갑·이애라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2014년 충무공 직계 종손 이종옥(1887~1941·13대손)과 그의 아들 이응렬(1914~1993)의 독립운동 사료를 새로 발굴해 학계에 알렸다. 충무공 종가는 2016년 보훈처에 이들에 대한 서훈을 신청했다. 이응렬은 1941년 7월 회사 동료에게 일제의 내선일체론(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주장)을 비판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1년 가까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2016년 보훈처는 그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이종옥은 1914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독립운동 시국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다. 민족종교인 증산교 계열 태을교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태형 70대를 맞기도 했다. 다만 이종옥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충무공 종가에서 두 차례 더 포상을 신청했지만 떨어졌다. ●아들 이응렬은 서훈, 부친 이종옥은 탈락 보훈처는 “이종옥에 대한 구체적 활동과 수형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응렬보다도 이종옥의 서훈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기에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충무공 종가의 종부(宗婦) 최순선씨는 “할아버님(이종옥)에 대한 새로운 독립운동 자료를 찾아내 내심 기대가 컸는데 연이어 탈락해 아쉬움이 크다”면서 “앞으로도 광복회 등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독립유공자 포상을 추진할 것”이라고 전했다. 아산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서울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임진왜란 영웅 충무공의 후손들, 항일투쟁으로 명예 지키다.

    임진왜란 영웅 충무공의 후손들, 항일투쟁으로 명예 지키다.

    28일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 탄신 474주년이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백척간두에 놓인 조선을 구한 할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자 일제에 뺏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한 후손들의 이야기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올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충무공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독립운동 명문가의 사연을 들여다봤다. ●국가유공자만 11명인 충무공 후손…산동 신씨 가문과 쌍벽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충무공 후손(덕수 이씨) 가운데 항일투쟁 활동을 인정받아 국가유공자 서훈을 받은 이는 모두 11명이다. 이들이 받은 훈·포장은 14개다. 이규갑(1888~1970)과 이애라(1894~1922), 이세영(1869~1938), 이필희(1857~1900), 이민화(1898~1923), 이붕해(1896~1950) 등 6명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 2개와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 2개, 건국포장 3개, 대통령표창 1개도 충무공 가문에 수여됐다. 신채호(1880~1936)와 신규식(1880~1922) 등 13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산동 신씨 가문과 쌍벽을 이룬다. 이 가운데 국민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충무공의 12대손인 이세영이다. 1889년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8월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1851~1895)를 시해하자 같은 해 10월 전국 각지에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도 봉기에 참가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모차장에 취임했고 이듬해 5월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교장도 맡았다. 이후 중국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938년 쓰촨성에서 숨을 거뒀다. 이민화(11대손)와 이붕해(12대손)는 1920년 10월 만주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민화는 1907년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1889~1930)이 이끌던 북로군정서에서 중대장을 맡았다. 이붕해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곧바로 만주로 탈출해 청산리 전투에서 이민화처럼 중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지린성에서 만들어진 고려혁명군에서 꾸준히 항일투쟁을 이어 갔다.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한 이규갑·이애라 이규갑과 이애라는 부부였다. 충무공의 10대손인 이규갑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전도사로 활동했다. 이애라는 이화학당을 나와 충남 공주의 영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둘은 1913년 혼인하고 평양에 살다가 3·1운동에 참가했다. 이규갑이 일본 경찰에 쫓기면서도 서울에 한성임시정부를 세우고 곧바로 상하이임시정부와의 통합 작업에 나서자 이애라는 남편을 돕고자 모금 활동에 나섰다. 안타깝게도 부부의 연은 짧았다. 1922년 이애라가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보훈처 공적조서에는 그가 만주에서 독립운동 관련 밀서를 숨겨 조선에 들어오다가 일본 헌병에 붙잡혀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함경도 웅기에서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당한 뒤 그 후유증으로 1921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숨졌다는 주장도 있다.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2014년 충무공 직계 종손 이종옥(1887~1941·13대손)과 그의 아들 이응렬(1914~1993)의 독립운동 사료를 새로 발굴해 학계에 알렸다. 충무공 종가는 2016년 보훈처에 이들에 대한 서훈을 신청했다. 이응렬은 1941년 7월 회사 동료에게 일제의 내선일체론(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주장)을 비판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1년 가까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2016년 보훈처는 그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아들 이응렬은 서훈, 부친 이종옥은 탈락…종손 “이종옥 포상 계속 추진” 이종옥은 1914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독립운동 시국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다. 민족종교인 증산교 계열 태을교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태형 70대를 맞기도 했다. 다만 이종옥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충무공 종가에서 두 차례 더 포상을 신청했지만 떨어졌다. 보훈처는 “이종옥에 대한 구체적 활동과 수형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응렬보다도 이종옥의 서훈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기에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충무공 종가의 종부(宗婦) 최순선씨는 “할아버님(이종옥)에 대한 새로운 독립운동 자료를 찾아내 내심 기대가 컸는데 연이어 탈락해 아쉬움이 크다”면서 “앞으로도 광복회 등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독립유공자 포상을 추진할 것”이라고 전했다. 천안·아산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서울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광복 위해 죽는 날까지 싸우겠다”… 임정 자금 대고 발해농장 개척

    “광복 위해 죽는 날까지 싸우겠다”… 임정 자금 대고 발해농장 개척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니 유한(遺恨)이 없다. 동포의 고난을 네 고난으로 알고 살아가거라. 가사(家事)든 국사(國事)든 오직 자력(自力)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58세의 백산 안희제를 일제는 9개월 동안이나 악랄하게 고문했다. 피가 눌어붙은 죄수복을 입고 반송장이 돼 풀려난 백산은 장남 상록에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몇 시간 후인 1943년 9월 12일 새벽 2시, 백산은 숨을 거두었다.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 두 해 전이었다.백산은 1885년 9월 12일 충절의 고장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설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의 생가가 지척에 있는 곳이다. 백산의 선조 안기종은 왜병과 싸운 의병장이었다. 입산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유곡천이 마을 앞에 흐르는 비옥한 땅으로 백산의 집안은 700석 부자였다. 안향의 후손인 탐진 안씨가 조선 중기부터 이 마을에 정착했으며 선생의 생가인 ‘백산고가’(白山古家)가 남아 있었다. 부산에서 살고 있는 백산의 장손자 안경하(80)씨를 만나 백산의 일생에 대해 들었다. 안씨의 어머니, 즉 백산의 며느리는 왕산 허위의 형인 방산 허훈 가(家)의 자손과 결혼했다고 한다. 안씨는 “할아버지는 가족이 무슨 일을 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했다”고 말했다. “새는 한가하여 벽곡(僻谷)을 찾았는데 해는 싫어하여 중천에 떠 두루 비치도다.” 한학에도 뛰어났던 선생이 유년 시절 지은 시다. 백산은 20세에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달이 밝은 날 밤 몰래 구국의 일념으로 상경했다.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양정의숙으로 옮겼다. 백산의 조국독립 방략은 무력 저항보다는 실력 양성, 계몽운동이었다. ●발해농장, 실질적인 국외 독립운동기지 1909년 먼저 부산 구포에 구명학교를, 의령에 의신학교를, 입산마을에 창남학교를 세웠다. 그해 9월에는 남형우, 김동삼, 서상일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26세 때인 1911년부터 3년 동안은 러시아와 만주를 돌아보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국민을 교육하는 일이 급선무인데 우리가 가난해서는 어렵습니다. 부산을 일본인 손에 넘겨줘서야 되겠습니까.” 귀국한 백산은 부산으로 가서 이렇게 호소해 1914년 9월 백산상회를 창립했다. 고향 논 2000마지기(40만평, 132만㎡)를 팔아 자금으로 썼다. 백산상회는 곡물, 면포, 해산물을 위탁 판매하는 개인기업이었다. 3년 후 합자회사로 전환, 경남 양산의 대지주 윤현태와 경주 최부자로 유명한 최준 등 영남 자산가들로부터 거액의 협력을 받았다.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일 무렵인 1919년 초 백산상회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됐다. 주주들의 출자금 대부분은 임정 운영자금으로 보내졌다. 윤현태의 동생 윤현진은 아예 상해로 건너가 임정 재무차장을 맡았다. 백산상회는 국내외 20여 곳에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두었다. 겉만 기업이었지 독립운동 자금원이자 연락조직이었다. 김규식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때 백산은 경비를 제공했다. 낌새를 알아차린 일제는 수색, 고문, 장부 검열을 계속했지만 단서를 잡지 못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장부상 결손으로 꾸며 추적을 따돌렸다. 백산은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겼다. 일본인 여관에 묵었으며 금테 안경을 쓰고 일본식 복장을 했는데 의심을 사지 않으려는 위장술이었다. 그러나 1921년부터 자금난이 심해졌고 주주들 간에 마찰이 생겼다. 경영 부실보다 독립운동 자금 탓이 컸다. 1928년 1월 백산상회는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광복 후 백범 김구가 최준에게 독립운동 자금 장부를 보여주자 최준은 백산의 묘소를 향해 엎드려 통곡했다. 그가 준 돈이 한 푼도 어김없이 임정에 전달됐음을 보았기 때문이다.백산상회를 경영하는 한편으로 백산은 자산가들의 지원을 받아 후학 양성을 위한 기미육영회를 결성했다. 국회의원과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북한 조평통 위원장을 지낸 국어학자 이극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신성모 등이 육영회 돈으로 독일, 영국에서 유학했다. 백산의 눈길은 언론으로 향했다. 이미 1920년 4월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창간에 참여했었다. 1928년 6월 당시 3대 일간지의 하나로 필화사건을 겪던 중외일보를 인수, 사장으로 취임했다. 임원진 중에는 독립운동가 최윤동, 임유동도 있었다. 백산은 조석간 발행 등 지면 및 경영혁신을 꾀했다. 그러나 일제 통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다 1929년에 26회, 1930년에 31회 신문을 압수당하는 등 탄압을 받았다. 그러는 새 경영은 날로 어려워져 1931년 9월 중외일보는 결국 해산하고 말았다. 조국 땅을 지키며 민중과 더불어 합법적인 조직과 방법으로 독립을 꾀하겠다던 백산의 계획은 뜻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좌절밖에 없었다. 백산은 지인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조국은 감옥이다. 자유 천지에 나가서 활개를 펴고 조국 광복을 기어코 달성하는 데 죽는 날까지 싸워보겠노라.” 백산이 선택한 또 다른 길은 만주였다. 만주 땅을 일궈 빈농의 자립을 돕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김태원이라는 경제적 협력자를 구했다. 그는 경북 봉화 금광에서 노다지를 캐내 일약 거부가 되어 백산과 가까이 지내던 인물이었다. 만주 목단강성 영안현에 토지를 매입했다. 발해국 고도인 동경성이 있었던 곳이다. 1932년부터 목단강 상류 일부를 석축으로 막고 수로를 내 황량한 땅을 개간했다. 백산은 발해농장으로 이름 짓고 조선에서 실농 300여호를 이주시켰다. 자작농창제(自作農創制)를 고안했다. 농민에게 분배한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의 절반을 받아 다른 농지를 개간하고 수도를 개설하며 토지는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자작농으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35년까지 농장 직경은 4㎞가 넘었고 수로는 16㎞에 이르렀다. 수차 증자받은 돈은 농장경영 자금 외에는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몰래 보냈다. 백산은 청년기에 귀의했던 대종교에 심취했다. 발해농장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대종교로 정신적 결집을 이루고자 했다. 대종교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옮겼다. 대종교 서적을 간행하고 단군전인 천진전을 건립했다. 이를 통해 독립투쟁을 벌이고자 했다. 발해농장은 표면적으로는 농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국외 독립운동기지였다.●백산 장손자 “후손들 할아버지 이름 기억” 농장 규모가 커지고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백산을 붙잡을 기회만 노렸다. ‘대륙 첩보의 귀신’ 난베가 그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었다.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백산을 체포할 빌미를 잡았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이극로가 대동교 교주 윤세복에게 보낸 ‘널리 펴는 말’을 ‘조선독립선언서’로, 글 가운데 ‘일어서라’를 ‘봉기하자’로 조작했다. 일경은 대종교 간부 2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했다. 이른바 ‘임오교변’이다. 입산마을에서 치병 중이던 백산은 목단강성 경무청으로 포박되어 끌려갔다. 10명이 숨질 정도로 고문은 악랄했다. 사건 배후에는 밀고자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숨을 거두기 전 그를 용서하라고 유언했다. 광복 후 후손들은 밀고자를 찾아냈지만, 유언을 따라 응징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 안민석 의원과 발해농장에 다녀온 장손자 안씨는 “지금도 개척자의 4~5세가 농장에 살고 있고 후손들은 할아버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광복군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 육군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광복군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 육군박물관

    정확히 100년 전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비록 모양새는 조촐하여도, 제대로 된 임시헌장이 발표되었고 여기서 공표한 건국강령에 따른 국체(國體)는 지금 대한민국이 따르는 민주공화정 그대로였다.반면 일제강점기 이전 대한제국이 1899년 8월에 반포하였던 ‘대한국 국제’에서는 조선은 황제국이며, 황제는 무한한 군주권을 가진다고 규정하여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조항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하니 당연지사 지금 우리나라의 뿌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분명하고 또 분명한 셈이 된다. 바로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 국군이 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으로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충칭에서 창설되어 중국군, 연합군 등과 함께 항일전선에서 투쟁하였다. 의병, 독립군, 광복군 그리고 현재의 대한민국 육군으로 지나간 시간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육군박물관으로 가 보자.아마도 봄나들이 공간으로 서울 시내에 이만한 곳도 없을 듯하다. 육군박물관은 서울 시내 노원구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하기가 편하다. 그냥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 내리기만 하면 된다. 육군사관학교의 규모는 149만 6979㎡(약 45만평)에 달해 캠퍼스 크기로는 여느 일반 대학들을 한번에 압도한다. 바로 이처럼 드넓은 육군사관학교 내부에 육군박물관이 있어 방문객들은 육사 교정을 천천히 가로 질러 산책하는 여유로움도 한껏 느낄 수 있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전문박물관. 전시유물로만 13,341점에 이르러육군박물관은 원래 1956년 10월 3일에 육군사관학교 기념관으로 개관한 이후 2001년 3월 19일에 이르러서는 문화관광부에 육군박물관으로 공식 등록하였다. 당연히 육군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전문박물관으로 다른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전문 군사 관련 유물 등을 대거 소장 전시하고 있다. 현재 육군박물관에는 13,341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는 데 이중 역사 유물로는 4.999점, 현대 유물로는 5,544점, 그리고 기타 기념자료 2,798점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무기, 군사 관련 박물관으로 최고 수준이어서 관람객들은 연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현재 육군박물관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무기류, 장비류, 서화류, 복식류, 기치류 등 다양한 군사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데 크기는 연건평 1,815평에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이고, 2개의 전시실 이외에도 사무실과 학예실 및 278석을 구비한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관람실인 2층 제1전시실에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무기와 장비 등을 도검·궁시·화약병기·군사장비·회화·전적류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3층 제2전시실에는 고려, 조선, 대한제국의 군대, 의병, 독립군, 광복군, 대한민국 육군의 발전 과정과 이들이 의병항쟁, 독립전쟁,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사용했던 무기와 장비 그리고 주요 문서들을 전시하고 있다. <육군박물관에 대한 방문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추천하는 방문지야? - 꼭 가보길 권한다. 드넓은 육군사관학교 교정을 마음껏 품을 수 있고 볼거리도 풍부하다. 2. 누구와 함께? - 어린 자녀들과 함께. 군인의 꿈을 품는 청소년이 있는 가정이라면 3. 가는 방법은? - 미리 견학신청을 해야 한다. 당연히 무료. - 관광시간 : 화ㆍ목ㆍ금 오전 10시~12시, 오후 2~4시(수요일은 10시~12시) 전화통화가 어려울 경우 이메일로 문의 가능. kma0520@kma.ac.kr 4. 놀라는 점은? - 육군사관학교의 깨끗한 조경. 외부 군사 무기 전시품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생각보다 관람객들이 많지는 않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관람품 구입 코너, 육사기념관, 화랑대 7. 관람시 주의사항은? - 군사 시설이어서 통솔자의 안내를 따라야 한다.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s://kma.ac.kr/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서울 시립 북서울 미술관, 서울 시립 과학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육군박물관은 전문 군사박물관으로 방문 가치가 아주 뛰어난 곳이다. 미리 견학 신청을 해서 나들이를 다녀 온다면 뜻깊은 하루가 될 듯. 제대로 된 진짜 박물관.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4월에 ‘빨간날’ 생길까…‘임시정부 수립일 국경일 지정법’ 발의

    4월에 ‘빨간날’ 생길까…‘임시정부 수립일 국경일 지정법’ 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안이 나왔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11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과 광복군 창설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현재 3·1절(3월 1일), 제헌절(7월 17일), 광복절(8월 15일), 개천절(10월 3일), 한글날(10월 9일)이 국경일로 지정돼 있다. 박 최고위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수립돼 이날 대한민국 국호와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공포했다”며 “현행 헌법 전문에서도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고 강조했다. 박 최고위원은 이와 함께 국군의 날(10월 1일)을 광복군 창설일(9월 17일)로 변경하고 국경일로 격상하는 법안도 발의했다. 그는 “현재 국군의 날은 1956년 6·25전쟁 당시 육군이 38선 돌파를 기념하는 의미로 정해진 날”이라며 “국군의 역사적 뿌리를 제대로 살리려면 광복군 창설일을 국군의 날로 변경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방부가 지난 2월 발표한 ‘대한민국 국군’ 책자에도 대한민국의 첫 공식군대가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라고 기술돼 있다. 국방부는 “강제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가 의병으로, 일제 강점기 독립군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발전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됐다”고 설명했다. 박 최고위원은 친일반민족행위를 하고도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물의 묘지 옆에 반민족행위 행적을 담은 조형물을 설치하는 국립묘지법 개정안도 발의했다. 박 최고위원은 “국립묘지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와 이를 탄압했던 친일인사의 묘지가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며 “포용과 통합의 미래로 나아가려면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학계 “독립운동 서훈, 이념 아닌 1945년 광복 기준으로 평가해야”

    학계 “독립운동 서훈, 이념 아닌 1945년 광복 기준으로 평가해야”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우리 사회의 이념 논쟁에 불을 붙인 인물이 있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학계에서는 ‘재평가와 복권이 이뤄져야 할 독립운동가 1순위’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물을 복권할 수 없다’, ‘김일성도 반일투쟁을 했다는데 그에게도 훈장을 줘야 하느냐’며 극단적 거부 반응을 보인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한반도가 분단되기 전 항일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들을 평가하는 지금 우리는 분단의 결과물인 ‘이념’을 잣대로 들이댄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늘 배제돼 온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김원봉, 항일투쟁 업적에도 월북해 논란 “공산당 활동을 하고 월북한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겠다고 한다. ‘뼛속까지 빨갱이’였던 이를 서훈하겠다는 이 정부가 원하는 게 무엇이겠나.” 지난달 26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수여 가능성을 언급하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보인 반응이다. 피 처장은 ‘김원봉을 국가보훈 대상자로 서훈할 것인가’라는 정태옥 한국당 의원의 질문에 “의견을 수렴 중이며 (서훈 수여) 가능성은 있다”고 답했다. 이어 “지금 기준으로는 (서훈이) 되지 않는다”면서도 “우리가 (북한과) 평화와 번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북한 정권에 기여했다고 해서 (서훈 수여를) 검토하지 말라고 하는 부분은 (적절하지 않다). 북한과 6·25전쟁을 치렀지만 그런 부분은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한국당은 피 처장의 발언을 문제삼아 해임결의안을 추진 중이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꾸려 조선총독·일본군·친일파 등을 암살하고,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주요 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영화 ‘암살’, ‘밀정’ 등에서 의열단장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일제는 김원봉을 “재외 반일 조선인의 거두”라고 표현하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런 업적에도 그는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해방 뒤 월북 행적 때문이다. 1947년 김원봉은 극우주의자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자 남조선노동당 지도자 박헌영(1900~1955)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해 국가검열상(검찰총장)에 임명됐고 노동상(노동부 장관)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58년 숙청될 때까지 북한에서 최고위직으로 활동했다. 사회주의자인 이동휘(1873~1935)와 한위건(1896~1937), 김두봉(1889~?)도 업적에 비해 저평가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분단 특수성 이유 사회주의자 대부분 저평가 한위건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위원과 함경도 의원을 지냈다. 1920년 일본 유학 당시 독립군 자금 모집 사건에 연루돼 검거됐고 이듬해 조선유학생회 주최로 만세 시위 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1930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독립운동사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2005년 좌파 독립운동가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져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장규식 중앙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 초기 학생 조직을 만드는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동휘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총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1907년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다 체포됐고, 안창호(1878~1938) 등과 신민회를 조직해 항일운동 전면에 나섰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1913년 시베리아·북간도 지역으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한 무관 양성에 앞장섰고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박한용 전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이동휘는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으로 일제에 맞서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며 “그의 활동에 비해 우리 교과서에서도 언급이 적다보니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어사전 ‘말모이’ 편찬을 진행한 한글학자 김두봉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40년대 중국 옌안의 조선독립동맹 주석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이후 북한에서 조선신민당을 조직했고 북한 정권에서 최고인민회 상임위원장과 김일성대 초대 총장을 지냈다. 그는 김원봉과 마찬가지로 1958년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중노동을 하다가 1960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옥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김구나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안다. 하지만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잘 모른다. 분단 상황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사회주의계열 인물들이 독립운동사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분단 상황 때문에 제대로 부각이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 주의 택한 것은 독립운동 위한 한 방법” 사회주의자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제에 맞섰지만 지금도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김원봉과 김두봉은 현행법에선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다. 단순히 사회주의 활동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한반도를 소위 ‘붉은 국가’로 만들고자 치밀한 계획을 갖고 항일투쟁을 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학계의 의견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이들이 사회주의를 택한 것은 조국 독립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 정확한 평가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동휘조차도 “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라고 고백했다. 익명을 요구한 역사학자는 “일제 침략 시기에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사회주의 사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제국주의 폭압에 맞서는 대안 이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리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사회주의자였던 것에는 이런 사정이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연안파는 6·25전쟁 뒤 김일성이 중심인 빨치산파에 의해 북한 지도부에서 완전히 축출돼 남북한 양측에서 ‘잊힌 존재’가 됐다. 연안파는 중국 옌안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뒤 입북한 조선의용대 출신 세력을 뜻한다. 조선의용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에서 치열하게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조직이다. 일부는 임정과 손잡고 한국광복군에 참여했고 나머지는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꿔 중국 건국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해방 뒤 남쪽에선 좌파로 몰려 박해당했고, 북쪽에선 김일성 독재에 반대하다가 사라졌다. 우리부터라도 ‘비운의 독립군’으로 불리는 이들의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광복 이전 독립운동 했다면 유공자로 봐야” 역사학계에서는 1948년 이후 남북을 가른 이념이 아니라 1945년 8월 광복 당시 행위를 기준으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지난 1월 국가보훈처 자문기구로 활동한 보훈혁신위원회가 “1945년 8월 15일 이전 독립운동을 했다면 독립유공자로 봐야 한다”는 권고도 같은 맥락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념이라는 기준보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에 맞춰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며 “이념이나 사상에 관계없이 1945년을 기준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면 그에 합당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장군의 손녀’ 최성주가 말하는 잊혀진 장군 ‘최운산’“99년 전 봉오동전투는 당시 세계 최강이라던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빛나는 전과입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 특히 홍범도(1868~1943)·김좌진(1889~1930) 같은 영웅이 화승총으로 매복을 잘 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 독립군이 체계적으로 훈련받고 무기와 군장비를 잘 갖췄기 때문에 이긴 겁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잊혀진 영웅 최운산(崔雲山·1885~1945)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당시 사진사를 동원해 전쟁 현장을 촬영했던 준비된 전쟁이었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이유이지요.”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61) 이사를 최근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자신이 장군의 손녀라며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의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학교에서 익히 배웠던 ‘홍범도·김좌진 장군의 영웅담’과는 결이 달랐다. 기자만 최운산 장군에 대해 모르나 싶었지만 최 이사는 “역사학자조차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기에 지난 22일 서울신문사에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최 이사는 노트북을 들고와 현장에 다녀왔던 사진과 관련 서류들을 보여줬다. 이 봉오동 전투의 총사령관은 그의 형인 최진동(崔振東·1883~1941), 참모장은 최운산이고, 홍범도·김좌진은 그 부대의 연대장이었다고 말했다. 최 이사는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봉오동 전투 현장이 수몰됐다고 했지만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은 봉오저수지를 10km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이라고 말했다. 최 이사는 거의 해마다 전투지를 답사한다고 했다. “봉오동전투 사진사 동원한 준비된 전쟁전투 모습 3장…임정에 보냈다는 기록만”- 봉오동전투 당시 현장을 촬영했다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최진동이 국민회에 보낸 공문(‘기안104’)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기록을 보면 ‘봉오동전쟁 전황 촬영사진 3매, 상해를 보낼 예정. 별지 전쟁 촬영 사진 3매는 제2남지방의 박준재씨가 전쟁 당시 실시 전황을 보고 촬영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로 보내서 석판으로 인쇄하여 세계에 선전하려는 것인데 보신 뒤에 반송하기 바란다.’고 적혀 있습니다. 번역해서 문서로 남아있는 것을 역사자료실에서 찾은 것입니다. 최운산 장군은 당시 종군기자라고 할 수 있는 전문 사진사를 동원해 기록을 남기도록 했던 겁니다. 그만큼 준비가 철저했던 거지요.” - 당시 돈이 있다고 무기를 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했을까. “최운산 장군이 러시아와 무역거래를 하고 있던 관계로 지속적으로 무기를 구입해 왔습니다. 그러나 뒷거래로 수천명이 무장할 무기를 확보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소련에 배속됐던 체코 군의 무기로 무장한 겁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은 체코군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국시킵니다. 이들이 장기간에 걸쳐 러시아 대륙을 횡단해 1918년 말에 동쪽 끝에 도착합니다. 체코군은 무기는 필요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반면 우리 독립군은 대량의 무기 확보가 절실한 상태였습니다. 무기가 있어도 돈이 없었거나, 돈이 있어도 무기를 파는 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겠지요. 하늘의 뜻인지 최운산 장군에게 재력이 있었고, 체코군은 무기보다 현금이 더 필요했지요. 체코군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산 무기로 무장했다고 하니 우리 독립군도 당시로서는 최신의 미국 무기를 갖췄다고 봅니다.” “독립군들, 귀향하는 체코군 무기로 무장독립군들의 무기 구매 대금 출처는 최운산1920년 토지 팔아 5만원 마련… 무기 매입”- 막대한 무기 구입 대금은 어디에서 나왔나. “이 부분이 만주 무장독립운동 연구에서 가장 미진한 부분입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최운산 장군이 지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의병 수준의 독립군 통합 부대원들을 훈련하고 무장시키기 위해 1920년 1월 최운산 장군이 석현의 대규모 토지를 5만원에 팔아 그 돈으로 대한북로독군부 부대원 전원을 완전무장시켰습니다. 당시 5만원은 전투기 한대 가격이라 합니다. 최운산 장군의 부인인 김성녀(金性女·1894~1975) 할머니가 1969년 남편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면서 밝힌 장비를 보면 ‘대포 10여문, 기관총 수십정, 수류탄 수천개, 장총 천여정, 권총 수백정, 실탄 수만 발’을 갖췄다고 합니다. 당시 훈련소 격인 사관연성소 병사 1인당 무장 상태를 보면 ‘소총 1정, 실탄 500발, 수류탄 1개, 좁쌀 6되, 짚신 1족이었다’는 일제의 밀정보고서도 있습니다.” - 최운산 장군, 얼마나 부자였나. “간도 제1의 거부였죠. 부를 일군 배경으로 중국이 토지 정리사업을 할 때 엄청난 규모의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았습니다. 이를 조선 동포들과 함께 개간해 옥토로 바꿔 신한촌(新韓村)을 만들었습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생전에 말씀하시길 ‘우리 땅은 사흘을 둘러봐도 다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1960년대 우리가 부산에 살 때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부하 한 사람이 국제시장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할머니께 인사와 우리에게 이야기하길 ‘최운산장군의 땅 면적이 이 부산의 6배였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콩기름공장·국수공장·주류공장·성냥공장·비누공장·과자공장을 비롯한 다수의 생필품 기업을 운영했습니다. 또 대곡상이자 축산업자로 한 번에 수백 마리의 소를 창춘이나 훈춘으로 몰고 가서 팔았답니다. 이 소떼와 곡물은 러시아 군대 식량으로 들어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게 연결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최재형(1858~1920) 선생이 소고기를 러시아군에 공급했다고 하는데 두 분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겠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오늘날 삼성과 비견 되는 재벌이었지만 40여년에 이르는 무장 독립운동으로 그 막대한 재산을 거의 다 소진했습니다. 말년에 남은 것이라고는 살고 있던 집과 그에 딸린 수남촌 토성리 일대의 땅 뿐이었습니다.” “최운산… 간도 최고의 갑부이자 대지주부산 6배 넓이 땅 소유…무장투쟁에 소진”- 최운산 장군, 정확한 이름은 어떻게 되나. “일본군의 눈을 속이자면 변장이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여러 개를 썼습니다. 어릴 때는 최명길(崔明吉), 장작림 군벌에 있을 땐 중국식의 최풍(崔豊), 간도 제1의 거부로서 경제활동을 할 때는 최만익(崔萬益), 무장투쟁을 할 때는 최문무(崔文武)·최빈(崔斌)·최운산(崔雲山)을 사용했고,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崔高麗),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활동을 할 때 최복(崔福)을 사용했습니다. 8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모두 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복잡다단한 삶을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년 시절, 장작림 군벌서 군사지식 습득중국군 이직시 자위대 조직…私兵 100여명” - 무법천지 만주에서 대규모 재산 지키자면 자위대가 필수였겠다. “최운산 장군은 청년 시절, 중국 동북3성 지배세력인 장작림(張作霖·1875~1928) 군벌에 들어갔습니다. 전투에서 장작림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어 장작림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때 형 최진동, 동생 최명순과 함께 3형제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군사 지식과 군조직 운영을 익히며 만주군벌과 혈맹의 관계를 맺은 겁니다. 최운산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양쪽의 신뢰를 다졌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 최운산 장군이 중국군을 이직하고 마적떼로부터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명목으로 자위부대 구성하겠다고 했을 때 장작림이 기꺼이 허락해준 겁니다. 그가 사병(私兵)을 모집할 때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따라 나왔다 합니다. 100명이 넘는 규모라 처음부터 정규 군대와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몇 명의 중국 사병이 포함된 이 자위부대가 대한민국 국군의 작은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도독부(都督府)의 복장은 중국군과 같은 색깔이어서 잘 구별되지도 않았답니다. 독립군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1915년엔 봉오동 산중턱을 벌목하고 개간해 연병장과 막사를 지어 독립군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이때가 500명이 넘었습니다.” “3·1운동 후 열혈청년들 간도로 몰려 들어6개월 과정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도 창설안무·홍범도 등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과정은.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운영하던 670명의 자위부대를 대한민국 첫 정식 군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로 재창설합니다. 그때 중국 지방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최진동, 최치홍 두 사람도 대한군무도독부에 합류합니다. 사령관인 부장(府長)에 형인 최진동 장군을 추대했습니다. 자신은 참모장으로 재정 등 군대 운영의 전반을 책임졌지요. 병참을 맡은 겁니다. 동생 최치홍도 참모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인 서대파에 대한북로군정서를 창설합니다. 3·1운동 이후 간도로 들어오는 열혈 청년들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이들을 모두 받아들여 다음해에 6개월 과정의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십리평에 설립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북로군정서 무장과 사관연성소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군자금으로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소진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언했습니다. 일본군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치르려면 대군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판단을 한 최운산 장군은 만주의 독립군 모두에게 무기와 식량, 군복 등 군자금 일체를 제공하기로 약조하여 본격적인 대통합을 이뤄냈습니다. 북만주의 대소 독립군부대가 모두 합류했고 최종적으로 안무(1883~1924)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에 최씨 형제의 군대를 합쳐 독립군 통합부대를 만들었습니다. 명칭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였고, 통합 서약서에 서명 날짜는 대한민국 2년 즉 1920년 5월 19일이었습니다. 국민회, 신민회, 광복단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독립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 기치로 모였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의 신분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입니다.” - 봉오동전투 상황은.“통합을 이룬 대한북로독군부는 두만강을 건너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며 실전 훈련을 쌓아갔습니다. 봉오동을 중심으로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기에 당시 일제는 독립군 토벌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정보전으로 이를 파악한 우리 독립군은 마을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고, 연대별로 각 산에 주둔하고 산능선을 따라 참호를 파고 매복했습니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봉오동전투 현장에 가면 낙엽이 가득 차있는 참호를 볼 수 있습니다. 1920년 6월 7일 새벽 일본군 1개 연대 이상의 병력이 봉오동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봉오동을 둘러싼 산에서 맹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어서 봉초봉 아래에선 백병전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돌멩이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뿌연 안개가 앞을 가렸던 거죠. 우리 독립군이 짙은 안개와 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승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후퇴하던 일본군이 지원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서로 총격전을 가해 더욱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봉오동전투서 적군 500여명 사살…기존보다 많아청산리전투는 봉오동전투 연장… 6일간 교전”- 봉오동 전투 전과는. “전과에서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차이가 많이 납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낸 진정서를 보면 ‘적군 사살이 500여명, 중상자 700여명, 경상자 1000여명입니다. 노획물자는 대포 4정, 기관총 수십 정, 장총 500여정, 탄환 수만 발에 수류탄 다수’라고 기록합니다. 홍범도 일지에도 일본군 사망자가 5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는 여전히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으로 축소돼 있습니다. 우리의 피해가 거의 없다고 했지만 독립군도 사망자 수십명과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고 김성녀 할머니가 증언합니다. 총상 환자 치료를 위한 의사가 부족해 애를 태웠고, 용정 제창병원에 의사를 보내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군 지도부는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줄이고, 더 많은 독립군이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합니다. 4000여 명에 이른 독립군들이 부대별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이 그해 10월 21일 청산리에서 따라 잡아 전투를 벌인 게 청산리전투입니다. 청산리전투는 하루 전쟁이 아니라 대한북로독군부의 여러 부대가 6일 동안 치른 전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청산리전투가 별개의 전투가 아니라 봉오동전투의 연장전이라 생각합니다.” “최운산, 6차례 옥고…이름 8개 사용광복 40일 전 평양 장남 집에서 사망”- 최운산 장군, 역할에 비해 많이 잘못 알려졌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이 몇몇의 영웅담 위주로 신화화 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들이 겨우 화승총으로, 청나라 및 러시아에도 이긴 세계 최강의 일본군에 승리했다는 것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사학계도 언론도 처음의 잘못된 기록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류의 논문을 낸 역사학자를 직접 만나 물어보면 ‘앞선 논문을 인용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역사학계가 정말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최운산 장군 그 뒤 어떻게 됐나. “연해주에서 자유시참변을 겪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장독립운동을 계속합니다.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전투, 나자구전투, 대황구전투, 도문대안전투, 안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장남 최봉우(일명 최치영·1922~2001)가 학도병 징집을 피해 고향 봉오동으로 돌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장례나 치르라며 내주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최봉우가 평양으로 숨어들자, 아버지 최운산장군이 아들을 보러 왔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 40일 전인 1945년 7월5일 평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최운산장군은 1924년~1926년 3년간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일본 경찰서 습격과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10개월간 감옥에 갇힌 것까지 일생동안 모두 6번 옥고를 치렀는데, 매번 심하게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습니다. 가족들도 그가 언제 감옥에 갔다 왔는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유공자 인정 조건 뒷돈 요구에 주먹 날려1977년 서훈…동생 최치홍은 여태 안 돼”- 정부는 최운산 장군의 역할 일찍 인정해줬나. “1961년 1월 최운산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정부로부터 받고 총무처로 아버지 최봉우가 갔더니 담당공무원이 ‘뒷돈’을 요구하더랍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모든 가산을 독립군 무장에 썼는데….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아버지가 그 공무원에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그 이후론 독립유공자 선정에 번번히 밀려났습니다. 십수년동안 미운털이 박혔던 게지요. 아버지는 생전에 ‘내가 욱하는 성질을 못 이겨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가렸다’며 후회하곤 했습니다. 그 후 할머니가 1969년에 진정서를 냈지만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뒤인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셨습니다. 같이 독립운동한 동생 최치홍은 100년이 지난 올해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김성녀 할머니도 큰 역할을 했다. “저도 할아버지의 삶을 살펴보다보니 할머니의 역할이 과소평가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할머니는 독립운동가를 내조한 차원을 넘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남편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낸 진정서를 보면 독립운동을 내조한 정도에서는 알 수 없는 당시 북로독군부의 조직 현황과 봉오동전투의 전과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봉오동전투를 바로 앞두고 최운산 장군이 집에 계시지 않을 때 도착한 중요한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어 직접 산속의 본진으로 올라가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또한 군사들이 없을 때 집으로 쳐들어 온 마적들을 향해 직접 총을 쏘고 일꾼들을 독려해 무장 강도들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물론 주민 부녀자들을 동원해 군복제작과 세탁 등 의복을 조달하고 식사를 준비했지만, 한 끼에 3000명분의 식사를 마련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김성녀 할머니에 대해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부인 김성여도 무장독립운동 한 축무장독립운동사, 영웅담서 벗어나야 할 때”-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우리 5남매는 만주 무장독립 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후손들의 주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가들의 연구가 깊어지면 언젠가 역사가 바로 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여태까지 바로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잘 못된 기록이 반복되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희가 직접 일제 문서를 찾고, 봉오동전투와 최운산 장군의 삶을 역사학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반가워하면서 학술적 재조명이 필요한 일이니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셋째인 제가 60대입니다. 독립전쟁의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일 것입니다. 우리 남매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고자 뜻이 맞는 분들을 중심으로 2016년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집안 자랑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군들이 함께 지켜낸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의 진실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영웅담 위주의 독립운동사를 넘어서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이 봉오동전투 100주년이다. 계획한 행사는. “사실 최운산 장군이 잘 알려진 분이 아니라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5남매가 비용을 갹출해서 학술세미나 개최나 봉오동 답사 등 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손주들도 나이가 들어 경제활동에서 물러나 있으니 기념사업회 활동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이 어려워 필요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올해는 당시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를 살펴보는 학술세미나를 열고 7월 5일 국립현충원에서 순국 74주기 추도식을 개최합니다. 100주년이 되는 내년엔 봉오동전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행사와 최운산 장군을 연구한 책을 한 권 펴내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독립유공·헌신 잊지 않겠습니다” 김포시, 유공자집에 명패 달아주기 예우

    “독립유공·헌신 잊지 않겠습니다” 김포시, 유공자집에 명패 달아주기 예우

    경기 김포시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을 시작했다고 21일 밝혔다. 정하영 김포시장은 지난 20일 독립유공자 신관수 애국지사의 유족 신현준씨의 자택을 방문해 직접 명패를 달아드렸다. 신관수(1884~1922) 지사는 당시 정용대 의병장 휘하에서 통진군 교하면·풍덕면, 강화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 1909년 6월 강화도 고도 해안에서 선박을 습격해 군량을 확보하는 등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됐다. 같은 해 7월 15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정 시장은 “오늘의 대한민국은 독립유공자 분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뤄진 것으로, 독립유공자와 국가유공자 자택에 명패를 달아드리게 돼 매우 뜻깊다”면서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으로 국가유공자에 대한 사회적 예우 분위기를 더욱 확고하게 하고 자긍심을 높여드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시는 독립유공자 유족 49가구 등 올해 말까지 국가유공자 등 총 2507가정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소박함만 한국의 美라더냐… 고려의 호방함 서린 ‘독립운동 성지’

    소박함만 한국의 美라더냐… 고려의 호방함 서린 ‘독립운동 성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으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재는 단연 경북 안동의 임청각(보물 182호)이다. 경술국치 직후 집주인 이상룡은 일가 친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막대한 재산을 처분한 자금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독립운동의 주역들을 양성하고, 임시정부 제3대 대통령 격인 국무령을 역임했다. 오랫동안 방치되던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어 대대적으로 복원 정비할 예정이다. 이 집은 올해 창건 500주년을 맞으며, 고려 주택의 전통을 가진, 매우 드물고 소중한 건축 유산이기도 하다.●고성 이씨 법흥파종택… 이명이 1519년 창건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한 분파가 안동 법흥동에 건립한 파종택이다. 하나의 옛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가문의 역사를 들추는 수고를 해야 한다. 집은 곧 인격의 표현이고, 종택은 오랜 시간의 축적물이기 때문이다. 고성 이씨의 시조는 고려 문종 때 호부상서를 지낸 이황이다. 그는 거란의 침략을 막아 내는 큰 무공을 세워 철령군(철령은 경남 고성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이 가문은 고려조에 정승급만 5명이나 배출한 명문가로 성장했고, 조선 초 좌·우의정을 지낸 이원이 용헌공파를 이루게 된다. 그의 아들들은 전국에 걸쳐 번성했는데, 6남인 이증(1419~1480)은 안동부 남문 밖으로 이주해 안동 지역의 입향조가 됐다. 그의 차남인 이굉은 낙동강 건너 현 정상동에 귀래정을 지었고, 이 일대는 고성 이씨의 씨족 마을로 발전했다. 이증의 3남 이명은 1519년 영남산 남록, 법흥동의 낙동강변에 정자를 지어 임청각이라 이름하니, 현재의 군자정 건물이다. 1540년, 여기에 본격적인 살림채와 가묘를 세워 파종택으로 정착시킨 이는 이명의 6남인 또 다른 이굉이다. 임청각 정착의 역사는 한 가문이 어떻게 명문가로 성장하는지, 그리고 어떤 건축적 장치가 필요했는지를 보여준다. 소수 귀족만이 성씨를 가졌던 고려시대에는 국가적 공헌을 이뤄 성씨를 하사받았다. 성씨와 동시에 일정 지역을 식읍으로 받는데, 곧 본관이 된다. 왕조가 바뀌는 조선 초는 기존 명문가들의 명암이 엇갈리는 시기였다. 새 왕조에 참여한 가문은 더욱 번창하게 되지만, 반대의 경우 멸문지화를 입던지 재야의 향반으로 전락하게 된다. 조선 초의 향촌은 고려적 장원 체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는 큰 변혁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번창한 가문의 자손들은 전국 각지의 새로운 소유지를 찾아 분파하게 되며, 파종가들이 출현했다. 종가가 되려면 종택을 짓고, 시조를 제사할 사당을 세워야 한다. 또한 향촌의 절경 곳곳에 개인 소유의 정자를 세운다. 지역의 경관을 소유하는 자가 바로 지역의 세력가가 되기 때문이다. 임청각은 별장인 정자로 시작해서 살림집과 사당을 가진 종택으로 확장한 경우다. 가문을 연지 500년 만의 결실이며, 그로부터 또 다른 500년이 흘렀다. ●고려 한옥의 또 다른 흔적, 온돌이 드문 2층집 우리의 건축들은 임진왜란 때 거의 파괴되어 현존하는 대부분은 17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임란 이전의 것으로 임청각같이 큰 집이 온전히 남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 집은 오래되고 거대할 뿐만 아니라 후대의 다른 살림집과 확연히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남아 있는 부분만도 1층 50칸, 2층 12칸의 큰 규모로 후대의 한옥이라면 적어도 5채의 독립 건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 집은 별채인 군자정을 제외한 모든 살림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하늘에서 보면 마치 불완전한 용(用)자와 같이, 5개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기와지붕의 선들이 이어진다. 평면 구성만도 밀집되고 복잡한데, 경사지를 활용한 3차원적 구성은 더욱 복합적이다.임청각의 눈에 띄는 특징은 2층 구조가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현재 2층 공간은 12칸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20여 칸이나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머리가 부딪힐까 걱정해야 하는 다락이 아니라 충분히 생활이 가능한 정식 2층 공간이다. ‘한옥은 단층’이라는 상식은 임청각에서 여지없이 깨진다.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이생규장전’은 고려 말 개성을 무대로 전개되는 연애기담이다. 2층루가 있고 이들을 은밀한 복도가 연결하는 것으로 여주인공의 집을 묘사했다. 아마도 이 소설을 쓴 조선 초까지, 개성과 한양의 큰 살림집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임청각의 2층 바닥은 물론 1층 대부분도 마루 바닥이었다.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온돌은 총 70칸 중 5칸에 불과했다. ‘한옥은 온돌’이라는 상식도 깨진다. 후대에 온돌로 개조한 부분까지 다해야 겨우 10칸이다. 서울 종로의 공평지구 재개발 때 조선 전기의 한옥 마을을 발굴하게 되었다. 보통 10여 칸 집에 단 1칸만 온돌방이며 마루가 주된 바닥을 이룬 집들이었다. 온돌이 한옥의 주된 바닥형식이 된 것은 17세기 이후이다. 이 집의 창호들 역시 후대의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창틀이 벽 가운데 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이른바 ‘액자창’들이 대부분이며, 아예 벽의 일부에 창을 끼운 것 같은 붙박이창도 여럿이다. 2짝 여닫이창들은 예외 없이 가운데에 문설주를 둔 ‘영쌍창’들이다. 이러한 액자창, 붙박이창, 영쌍창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며, 18세기 이후의 한옥에서는 보기 힘든 오래된 기법들이다.한마디로 임청각은 고려 살림집의 전통을 간직한 호방하고 웅장한 집이다. 흔히 한국적 미학이라 일컫는 ‘소박하고 단순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수도 개성의 풍물을 그린 ‘고려도경’의 묘사와도 같이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건축이다. 13칸 행랑채의 수평적 장대함, 거의 3층 높이 안채의 수직적 당당함, 오래된 창호형식의 고졸함, 낙동강의 풍경을 감싸 안는 군자정의 넉넉함…. 이제는 거의 사라져 임청각만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 건축의 또 다른 전통이다. ●보수 속 혁신… 남자는 군자정·여자는 살림채 써 임청각의 500년 세월 가운데 수차례 대대적 수리를 했지만, 후손들은 선조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 원론적 보수는 아니었다.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마루들을 온돌방으로 개조했다. 남자 주인들은 별당인 군자정을 거처로 삼아, 살림채 대부분의 사용권을 여자 가족과 하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옛 형식은 지키되, 새로운 내용을 수용한 은밀한 혁신의 결과다.석주 이상룡(1858~1932)은 이 가문의 가장 혁신적인 인물이다. 퇴계학파의 정통을 이은 안동의 큰 유학자로서 을사늑약 때부터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1년 노비를 해방하고 조상들의 위패를 묻은 뒤 서간도에 망명, 만주 땅에서 74세로 운명할 때까지 무장독립 투쟁에 헌신했다. 노비 해방과 제사 철폐는 정통 유림에게 있을 수 없는 패륜이다. 심지어 종손으로서 종가인 임청각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그러나 그는 군자정의 주인답게 진정한 ‘군자’였다. 군자란 누구인가? 세상의 문제와 해답을 깨달은 사람, 더 나아가 깨달음을 온몸으로 행하는 지행합일의 인간이다.1700년대 언저리, 이 집안의 두 형제가 분가해 임청각 좌우로 탑동파종택과 평지파종택을 세웠다. 1941년 일제는 고성 이씨 3형제 동네 앞에 중앙선 철도를 부설했다. 임청각의 대문채 등이 파괴되었고, 탑동파종택 앞의 법흥사지7층전탑(국보16호)은 기울어졌으며, 철도 노선에 포함된 평지파종택은 아예 흔적이 사라졌다. 일가족 10명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불령선인의 가문에 대한 야만적 보복이었다. 1913년 임청각을 한 일본인에게 2000원(현 가치 200억원 추산)에 팔았는데, 이를 알게 된 고향의 일가들이 합심하여 3000원에 곧 되사 보존할 수 있었다. 이 거액 매입을 주도한 이는 석주의 20촌 동생인 평지파종택의 이태희였다. 그는 일제 식민 치하의 수모를 감내하며 자신의 방법으로 고향과 가문을 지켰다. 보수와 혁신은 한몸이었다. 정통 유림이 무장투쟁가로 변신하고, 해방된 노비가 독립군이 됐다. 망명해 딴 나라에서 순국한 이도 있고, 고향에 남아 은밀히 독립운동을 도운 이도 있다. 비록 모두를 추서할 수는 없어도, 모두가 애국자이다. 280억원의 예산으로 임청각 일대를 복원 정비한다고 한다. 철도 이설과 임청각 정비뿐 아니라 사라진 평지파종택을 비롯해 외거 노비들의 가랍집까지 복원해야 한다. 이들 모두가 보수의 전통 속에서 혁신을 꿈꾸고 몸 바쳤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건축학자
  • 좌익 경력 298명 포함 여성·의병 독립운동가 적극 발굴

    국가보훈처가 좌익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 포상 보류자’를 일부 포함해 여성·의병 독립운동가를 적극 재심사해 발굴하겠다고 밝히면서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 선생 등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투쟁가들이 포함될지 관심이 쏠린다. 보훈처가 13일 해외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에게 서면보고한 ‘2019년 업무보고’에 따르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계기로 광복 후 좌익활동 경력자 298명을 포함해 독립유공자 포상 보류자 2만 4737명에 대해 재심사를 실시한다. 우선 여성 및 의병 독립운동가 중 미포상자 1892명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적심사를 실시한다. 전체 2만 4737명인 포상 보류자에 대해서는 수형 기준 미달자 3133명과 광복 후 좌익활동 경력자 298명 등을 재심사하기로 했다. 보훈처는 지난해 광복절에 수형최저기준 3개월을 완화하고 ‘광복 후 행적 불분명자’(사회주의 활동 경력자)도 포상할 수 있도록 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 독립유공자 지정 여부로 논란이 된 김원봉 선생은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는 이유로 올해 재심사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광복 후 행적 불분명자의 포상 기준에는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은 인물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독립운동가 포상 기준은 국무회의나 국회를 거치지 않는 내부지침이다. 따라서 향후 심사기준이 개정되면 김원봉 선생이 재심사 대상이 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김원봉 선생은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히 일제 수탈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 암살 등으로 투쟁을 했다. 1930년대부터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며 중국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고,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키도 했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도 지냈지만 1948년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됐다. 이후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을 지냈으나 1958년 숙청됐다. 이외 보훈처는 기존 독립유공자의 공적을 전수조사해 친일 행위 등이 확인되면 서훈을 취소할 방침이다. 특히, 심사가 미흡했던 1976년 이전 서훈자부터 단계적으로 검증한다. 우선 검증 대상자는 587명으로 오는 7월에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시대를 잘못 타고난 개혁군주 고종(1852~1919), 조선을 지키려다가 억울하게 살해된 명성황후(1851~1895),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에게 독립의식을 키워 준 덕혜옹주(1912~1989).’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금 대한민국의 영화와 드라마, 소설, 뮤지컬이 보여 주는 조선 황실 인물의 모습이다. 이들은 열강의 조선 침탈 압박에도 나라를 구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으로 그려진다. 문제는 이런 내용이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부 문화계가 돈벌이를 위해 부끄러운 우리 역사까지 항일이라는 이름으로 세탁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문화 콘텐츠의 특성상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상이 허용되지만 일부 작품은 가히 역사 창조 수준”이라고 비판한다. 조선 황실의 과오를 희석시키고자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게 모두 전가하는 ‘분노 마케팅’의 산물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는 일본이 위안부 강제 동원 책임을 인정하지 않아 “역사 왜곡을 일삼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역사 왜곡’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조선 황실 남성들 日장교 돼 일왕에 충성” 지난해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은 항일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의병과 긴밀히 소통하는 ‘우국(憂國) 군주’의 모습으로 나왔다. 이태진(76)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도 “개혁가로서 그의 진면목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광무개혁(1896~1904) 등을 통해 청과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국가를 만들려고 애썼다는 설명이다. 이런 이미지는 다양한 작품에 투영돼 고종을 ‘비운의 군주’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학계 대다수는 이런 현상에 매우 회의적이다. 다른 나라들이 입헌군주제로 전환해 민주주의로 나아갈 때 오직 고종만이 조선을 전제군주제로 되돌려 망국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1894~1895) 때는 미국 공사관으로, 러일전쟁(1904~1905) 땐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비싼 대가를 치렀다. 갑신정변(1884)과 을미사변(1895) 등 변고가 생길 때마다 자신을 외세에 의탁하기 바빴다. 1898년 독립협회가 의회 개설 등 개혁을 요구하자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이들을 탄압한 것도 큰 과오다. 당시 조선사회를 기록한 외국인들도 그를 ‘무능한 군주의 전형’으로 여겼다. 1910년 중국의 대표적 개혁가 량치차오(1873~1929)는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궁정 자체에 있었다”고 개탄했다. 조선이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하지 못해 세계 발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이로 인해 결국 일본에 병합됐다는 것이다. 망국의 가장 큰 책임이 왕 자신에게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무엇보다 고종은 자신의 안녕을 위해 조선 민족 전체를 일본에 넘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13일 “고종과 황실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지키고자 조선의 식민지화에 앞장서 협력했다”며 “조선 황실은 식민지 기간 내내 (백성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이 제공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반민족 행위”라고 꼬집었다.실제로 조선 황실은 1910년 경술국치 뒤로 별다른 국권 회복 노력에 나서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이왕가’(李王家)로 책봉된 뒤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 경술국치 때 작성된 한일병합조약에는 조선 황실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조문이 빼곡히 담겨 있다. 황실 인사들은 일본식 고등교육을 받았고 특히 남성들은 일본군 장교가 돼 일왕에 충성했다. 그나마 1919년 의친왕 이강(1877~1955)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한 것이 유일한 항일 운동이었다. 3·1운동 시위에 참가한 학생의 기록에는 “주민들은 가난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데 (고종 사망을 계기로) 그간 조선 황실이 너무도 호화롭게 지내 온 사실을 알게 돼 크게 실망했다”고 나온다. ●백성들에게 ‘늙은 여우’로 조롱받은 명성황후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명성황후 역시 매스컴에 의해 이미지가 조작된 대표적 황실 인사다. 일부 문화계 인사들은 그를 ‘조선의 잔다르크’로 칭송한다. 국민들의 인식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개인적 원한 때문에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1821~1898)과 권력 다툼을 벌여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고 무속 신앙에 심취해 국가 재정을 파탄 낸 ‘세기의 악녀’로 평가한다. 일부에서는 그가 “조선의 국가 규모를 감안할 때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를 넘어서는 사치를 부렸다”고 지적한다. 1895년 시해 때 일본 자객들은 명성황후를 ‘늙은 여우’라고 칭했는데, 이는 일본인이 만든 별명이 아니다. 조선 민중들이 그의 악행에 분노해 스스로 지어낸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명성황후는 소설과 드라마, 영화, 뮤지컬, 무용, 뮤직비디오 등에서 조선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희생된 애국자로 등장한다. 그의 최후가 너무 비극적이어서 대중의 안타까움이 과잉 이입된 탓이다. 역사 전공자들은 “(그런 사정을 감안해도) 명성황후 미화가 도를 넘었다”고 비판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문화평론가는 “명성황후가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로 포장된 것은 2001년 KBS에서 그의 삶을 드라마로 방영하면서부터다. 국민에게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야 할 공영방송이 되레 망국의 주범을 구국의 위인으로 탈바꿈시켰다.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시청률 지상주의에 매몰돼 ‘조선은 선(善), 일본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덕혜옹주 조선에 살 때부터 기모노 입어” 2016년 개봉 당시 6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은 영화 ‘덕혜옹주’도 역사 왜곡 논란으로 입방아에 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이덕혜는 1912년 고종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925년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고 1931년 쓰시마번주 귀족과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 1962년 정신질환 상태로 한국에 돌아와 1989년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간 이덕혜’는 분명 우리 역사의 안타까운 희생물이다. 영화 속 그는 시대 상황을 마음 깊이 고민하고 일제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일본 옷 입기를 거부하고 조선인 유학생들과 항일 교류 모임을 가졌다.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연설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고자 중국 상하이 망명도 추진했다. 그러다가 일제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정신병을 얻어 힘든 말년을 보냈다. 하지만 실제 덕혜는 조선에 살 때부터 기모노를 입었다. 정신질환도 일본의 압박이 본격화되기 전인 10대 때 나타났다. 그가 일본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없다. 영화 속 내용은 모두가 원작소설 ‘덕혜옹주’를 바탕으로 허진호 감독이 머릿 속에서 만든 상상의 소산이다. 역사소설가 이원규(72)씨는 “대중 문화계에 근대 역사 왜곡이 심각하다. 어떤 작품에서는 살아있는 왕에 대해 ‘우리 고종께서…’라며 묘호(죽은 뒤 왕에게 내려지는 이름)를 썼다”면서 “최소한의 지식도 없는 작가들이 역사의 궤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놓으려는 듯한 콘텐츠를 생산해 우려스럽다. 문화계 내부에 문제의식은 있지만 ‘동업자 정신’ 때문에 비판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안중근에 사격 가르쳐 준 최재형 선생 업적 알려지길”

    “안중근에 사격 가르쳐 준 최재형 선생 업적 알려지길”

    연해주 독립운동 활약사 국내 첫 소개 오는 8월 러시아 고택서 흉상 제막식 “선생의 삶 알리는 다양한 사업 벌일 것”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58~1920) 선생의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택에 추모비와 동상이 건립된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인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는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간담회를 열고 “최재형 선생 고택에 들어설 최재형기념관에 추모비와 흉상 건립을 추진, 오는 8월 12일 현지에서 제막식을 갖는다”고 밝혔다.최재형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아홉 살 때 연해주 연추(얀치헤·현 크라스키노)로 이주해 일찍부터 무기와 식량, 의류 등의 군납 사업을 통해 연해주 최대의 부호로 성장했다. 한인들에게 농사와 축산을 장려하고 생산물을 러시아군에 납품해 번 돈을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국내 진공작전을 펼친 의병조직인 동의회 총재, 한인 신문인 대동공보 사장, 한인 실업인 모임으로 위장한 독립운동단체 권업회 초대 회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특히 최재형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 거사와 깊숙이 관련돼 있다. 안중근 의사와 저격 거사를 함께 짰으며 자신의 집에서 사격 연습까지 실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우수리스크에 거주하는 최재형의 딸 최올가는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을 통해 “우리 집에서 안중근이 아버지에게 사격훈련을 받았고 나중에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알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러시아 현지에는 기념비는커녕 안내판 하나도 없는 실정. 3년 전 현지에서 선교사를 통해 최재형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소강석 목사가 흔적을 추적해 국내에 알리기 시작했다. 소 목사의 노력을 통해 뒤늦게 최재형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을 비롯해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 등이 최재형의 우수리스크 마지막 거처에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 와 이달 말 개관을 앞두고 있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 유가족협의회 등과 함께 제작한 추모비와 흉상은 기념관 안에 세워진다. 2.6m 높이의 추모비에는 최재형 행적과 함께 ‘애국의 꽃, 연해주의 별’이란 문구가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새겨진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4일 밤 빨치산 토벌을 구실로 연해주 일대 한인촌을 습격해 무차별 살상하고 방화와 약탈을 저지른 이른바 ‘4월 참변’ 때 일본군 총에 맞아 희생됐다. 이에 따라 관련 부처와 한민족평화나눔재단,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등은 추모위원회를 발족해 순국 100주년인 내년 다양한 선양사업을 벌인다. 소 목사는“최재형은 사실상 연해주 독립운동의 전부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이끈 중요한 인물인데도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은 채 잊혀져 왔다”며 “앞으로 최재형의 삶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영화, 드라마 제작을 비롯한 선양사업을 적극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죽음으로 항거했던 황현 유산 ‘매천야록’ 등 4건 문화재된다

    죽음으로 항거했던 황현 유산 ‘매천야록’ 등 4건 문화재된다

    일제의 탄압에 죽음으로 항거한 독립운동가 매천 황현(1855~1910)의 유산 4건이 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황현이 1910년 경술국치 후 순절하기 직전에 남긴 ‘절명시’가 수록된 ‘대월헌절필첩’(待月軒絶筆帖)을 비롯해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 ‘매천 황현 시문, 관련 유묵·자료첩, 교지·시권·백패통’ 등 황현 관련 자료 4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11일 밝혔다. 조선말부터 대한제국기의 역사가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황현은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무력감을 토로하며 사랑채였던 대월헌(待月軒)에서 자결했다. ● 당시 위기상황·지식인 동향 파악 가능한 자료 황현의 대표 저서인 ‘매천야록’은 흥선대원군이 집정한 1864년부터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1910년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글로 7책으로 구성됐다. 구한말 위정자들이 저지른 비리와 비행, 일제 침략상을 상세히 기술해 근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매천야록’의 초고로 추정되는 ‘오하기문’에도 19세기 후반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적 사실과 항일활동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매천 황현 시문, 관련 유묵·자료첩, 교지·시권·백패통’은 뛰어난 문장가였던 황현이 지은 친필 시문과 저술, 그의 친구들이 보낸 편지, 1888년 생원시 장원급제 당시 작성한 시험지인 시권과 왕명서 교지, 이 자료를 보관한 백패통 등으로 구성됐다. 황현이 당대 문장가들과 교유한 편지와 그가 모은 신문기사는 당시 국가의 위기 상황과 지식인들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꼽힌다. ●여성 독립운동가 ‘윤희순 가사집’도 등록 예고 문화재청은 또 다른 항일문화유산인 ‘윤희순 의병가사집’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인 윤희순(1860∼1935)이 의병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지은 낱장의 친필 가사들을 절첩(折帖) 형태로 이어 붙인 순 한글 가사집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문집이라는 점에서 희소가치가 있고, 순 한글로 기록돼 국어학·국문학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엄태준 시장 “의병항쟁 중심 이천, 일제 총칼에 당당히 맞서”

    엄태준 시장 “의병항쟁 중심 이천, 일제 총칼에 당당히 맞서”

    경기 이천시는 1일 오전10시 이천아트홀 소공연장에서 제100주년 3.1운동 기념행사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날 기념행사에는 시장,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독립유공자 후손, 기관사회단체 및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시민과 함께 3.1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시민화합을 이루는 기념행사를 추진했다. 기념식은 이천예총과 소녀상건립추진위원회 이천평화나비의 3.1운동 100주년 기념 공연을 시작으로, 이천 항일운동 영상 시청, 최상돈 이천시광복회 사무국장의 독립선언서 낭독, 엄태준 시장, 송석준 국회의원, 홍헌표 시의회의장의 기념사, 이천어린이합창단과 함께하는 3.1절 노래 제창, 안송란 광복회장의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또한 이날 이천아트홀 로비에서 이천항일운동 및 이천소녀상 관련 사진전시회, 독립만세운동 체험 포토존, 손 태극기 나눠주기, 다도체험 등 다채로운 부대행사를 마련해 시민들과 함께 3.1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엄태준 시장은 기념사에서 “의병항쟁의 중심이었던 이천의 만세시위는 모두가 혼열일체가 되어 일제의 총칼 앞에 맨손으로 맞서 당당히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의 자주독립을 외쳤다”면서 “100년전에도 그랬듯이 시민 여러분과 다함께 손을 잡고 우리 후손들이 자랑할 만한 이천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은수미 시장 “3.1운동 정신으로 한반도 평화와 민족 통일 이뤄야”

    은수미 시장 “3.1운동 정신으로 한반도 평화와 민족 통일 이뤄야”

    은수미 경기 성남시장은 “3.1운동 그날의 함성은 분단에 갇히지 말고 한반도 평화와 민족 통일을 이뤄 세계로 날아오르는 대한민국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들린다”고 말했다. 은 시장은 1일 성남시청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성남3.1만세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100년 전 그 날의 간절하고 단호했던 목소리가 여전히 들린다”며 이 같이 밝혔다. 이어 “비록 어제 북미 정상회담은 결렬됐지만 한반도 평화와 민족 통일의 과정은 이미 시작됐다”며 “포기하지 말고 담대하게 나아가라는 격려로 다가온다”고 덧붙였다. 은 시장은 또 “만세운동이 독립을 갈구하는 세계 여러 약소민족의 희망의 등불이었듯 앞으로 우리가 만들 100년은 3.1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한반도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도전이자 도도한 물결이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그는 또 “성남에서는 남상목, 윤치장, 이명하 선생 등이 일본군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셨고 남태희, 한백봉, 한순회, 이시종 선생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셨다”면서 “성남에 살았던 5천 여명의 시민 중 3천3백 여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했을 정도로 성남은 뜨겁고 용감했다”고 말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열린 이날 행사는 만세운동 추념제, 태극 길놀이 퍼레이드, 100주년 기념식 등 3부로 나눠 진행됐다. 이와 함께 독립운동가 웹툰 캐릭터전이 시청 누리홀에 마련돼 시민들의 주목을 끌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이 총리, 한용운·오세창 선생 묘소 첫 참배

    이낙연 국무총리는 1일 오전 3·1운동 100주년인 해를 맞아 서울시 중랑구 망우공원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한용운·오세창 선생의 묘소와 항일의병 13도 창의군 탑을 참배했다. 역대 총리중 한용운·오세창 선생 묘소를 참배한 것은 이 총리가 처음이다. 지난 1월 손병희 선생 묘소와 지난달 26일 백범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데 이어 이번에 망우공원묘지를 찾았은 것은 100년 전 3월 1일 당시 뜨거웠던 만세 열기를 담아 애국선열들의 헌신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 의창 오세창 선생은 1919년 3월 1일에는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독립선언식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두 선생 모두 독립운동에 대한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과 대통령장을 각각 받았다. 이 총리는 일제 침략에 맞서 서울을 탈환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국의 13도에서 모인 의병들이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고 순국한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13도 창의군 탑에도 들러 참배했다.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유공자 후손의 DNA를 확보하여 묘지를 확인하는 사업과 국외에 안장된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는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또 한용운·오세창 선생을 포함한 민족대표의 뜻을 기리자 학생과 국민들이 보다 쉽게 3·1독립선언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풀이본을 보급하고 있다. 최광숙 선임기자@seoul.co.kr/
  • 그때 그날의 함성과 눈물 따라 가볼까

    그때 그날의 함성과 눈물 따라 가볼까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된 해다.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과 활약상을 되새길 전국의 역사적 장소들이 후손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독립운동의 흔적이 짙게 배인 7개 지역을 3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했다. 우리 근대사가 기억하는 선조들의 뜨거운 함성과 눈물에 귀 기울여볼 때다.① 서울 독립문… 역사박물관·경희궁 등 일제강점기 흔적 서울에는 도심 곳곳에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등 시대별로 서울의 변화상을 전시한다. 특별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서울과 평양의 3·1운동’도 열린다. 박물관 옆 경희궁은 아픈 역사가 서린 궁궐이다. 인현왕후와 혜경궁홍씨 등이 거주했던 궁은 일제가 집중적으로 파괴한 대상이었다. 경희궁을 나서면 강북삼성병원 내에 있는 경교장이 금방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도심재생예술을 입은 돈의문박물관 마을, 아관파천의 아픔이 서린 정동길 등으로 시간 여행이 이어진다. 3·1운동 열사들이 옥고를 치른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선언서를 전 세계에 타전한 앨버트 테일러가 살던 행촌동 딜쿠샤 등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② 서울 망우리공원… 만해 한용운·위창 오세창 넋 기린 곳 망우리공원은 뜨거운 역사를 품은 야외박물관이다.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 방정환 등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잠들었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연보비를 읽다 보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난해 9월엔 ‘유관순열사 분묘합장표지비’가 세워졌다. 이곳은 20년 전까지 망우리공동묘지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약 83만 2800㎡(25만여평) 규모로 문 열어 1973년까지 운영됐다. 2만 8500기가 넘는 무덤이 있었지만 꾸준히 이장해 현재 7400여기가 남았다. 이장으로 생긴 빈자리에는 나무를 심었고 울창한 생태 공원으로 변신했다. 숲이 우거져 고즈넉한 곳에 5.2㎞ ‘사색의 길’도 조성됐다. 망우리공원에는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 소설가 계용묵, 조각가 권진규 등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묘지도 있다.③ 충북 괴산 홍범식 고택… 1919년 1500명의 함성 생생히 독립운동가 홍범식은 대한제국이 1910년 한일병탄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그는 아들에게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다. 아버지의 유훈을 받은 소설가 벽초 홍명희는 고향 괴산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홍범식 고택에 들어서면 홍명희가 3·1운동을 준비했다는 사랑채를 만난다. 그의 주도 아래 1919년 3월 19일 괴산산막이시장 거리에서 1500여명이 목 놓아 만세를 외쳤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 안채는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택을 둘러봤다면 진주성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 괴산호의 절경이 아름다운 연하협구름다리 등을 함께 둘러봐도 좋다.④ 충남 천안 유관순 생가와 7개 전시관 있는 독립기념관 천안에는 독립운동의 함성과 결의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를 살펴볼 수 있는 독립기념관이 대표적이다. 높이 51m ‘겨레의 탑’과 동양 최대 기와집인 ‘겨레의 집’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우리 역사를 시기별로 전시한 7개 전시관은 다양한 문헌자료와 체험시설로 방문객을 맞는다. 꼼꼼히 둘러보려면 5시간 정도 걸리니 미리 동선을 짜서 가는 것이 좋다. 주변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캠핑 공간에는 꼬마열차, 어린이방 등 편의시설이 있어 한나절 가족 소풍지로도 손색이 없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기억할 수 있는 병천에는 유관순 열사 생가가 있다. 유관순 열사가 체포돼 옥사할 당시 전소된 가옥과 헛간을 복원했다. 가까운 곳에 그의 영정을 모신 기념관이 있다.⑤ 전남 완도 소안도 항일운동기념관… 항일운동의 성지 완도 본섬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소안도에는 1년 내내 태극기가 휘날린다. 함경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불릴 만큼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땅이다. 소안도에 가려면 완도 화흥포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10~12회 운항하는 배편을 이용해야 한다. 여객선 이름부터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가면 이곳이 어떻게 항일운동 성지가 됐는지 알 수 있다. 당사도등대 습격사건과 사립소안학교 설립 등을 알게 된다. 인구 6000여명밖에 안 되는 섬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가 20명, 기록에 남은 독립운동가가 89명에 이르는 사실도 소안도가 항일운동의 성지였음을 뒷받침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과 몽돌해변 등도 소안도를 방문해야 할 이유다.⑥ 경북 안동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 독립지사의 투쟁사 안동은 시·군 단위로 전국에서 독립 유공자(약 350명)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광복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안동과 경북 독립지사의 투쟁사를 문헌과 자료,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유학이 뿌리 깊은 지역이지만 의병활동이 실패한 뒤 신학문을 받아들인 혁신유림이 생겨났다. 이들은 국권을 빼앗긴 후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일제의 고문시설인 벽관 체험 등 체험 프로그램이 많아 흥미롭다. 기념관을 나서면 독립운동 성지로 알려진 내앞마을이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 생가 등이 있다. 안동의 명소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임청각도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다. 가까운 월영교의 밤경치도 놓치면 아깝다.⑦ 경남 밀양 의열기념관…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도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밀양은 영화 ‘암살’을 통해 재조명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고향으로 항일 독립운동 요람이다. 의열단은 식민지배자와 민족반역자 처단, 조선총독부 등 식민지배기관 파괴에 집중했다.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등 모든 투쟁의 배후에 김원봉이 있었다. 김원봉이 태어난 집터에 지난해 의열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단정하고 아담한 건물로 들어가면 영상과 자료들로 그의 삶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일대는 밀양의 만세운동으로부터 태극기 변천사 등을 살펴볼 수 있는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로 꾸며졌다. 이 지역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난 밀양 관아지와 보물 147호 밀양 영남루도 독립운동과 연결되는 장소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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