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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주군 소양면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무덤 확인

    임진왜란 당시 웅치전투 격전지로 추정되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서 조선군의 무덤이 확인됐다. 웅치전적지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로 침투하던 수천 명의 왜군에 맞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이 합심, 대승을 거두면서 호남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한 곳이다. 완주군은 옛 웅치길(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진안 부귀면 세동리)에서 시신 매장 여부를 파악하는 총 인·총 칼슘 함량 분석을 한 결과 웅치고개 정상에 있는 성황당 터 토양이 주변 일반 토양보다 인과 칼슘 함량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고 17일 밝혔다. 이는 당시 치열한 전투로 인한 무덤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을 입증하는 근거로 분석된다. 특히, 이번 조사 결과는 조선군 무덤이 최초로 확인된 것으로 역사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완주군은 조선왕조실록·국조보감 등 사료에 남겨진 웅치전투 실증자료를 확보하고자 2016년부터 전투지로 추정되는 옛 웅치길에서 고분군 등 매장문화재를 조사해 왔다. 앞서 2017년 웅치 고갯길 일대에서 임진왜란 당시 활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과 진지 터 등을 발굴했다. 완주군은 추가 발굴을 마무리한 뒤 국가 사적 지정과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박성일 완주군수는 “소양면이 웅치전투 격전지였다는 객관적 사실이 입증됐다”면서 “웅치 성역화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는 역사의 평가를 바로잡고 숭고한 애국정신과 문화유산을 후대에 물려주겠다”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씨줄날줄] 비운의 홍범도 장군/오일만 논설위원

    [씨줄날줄] 비운의 홍범도 장군/오일만 논설위원

    1919년 8월 대한독립군이 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1910년 일제 병탄 후 절치부심하던 항일 무장세력의 첫 국내 진공작전으로 기록됐다. 대한독립군은 갑산과 혜산진 등 국경에 주둔한 일본군을 타격했고 그해 10월엔 압록강 너머 만포진과 강계까지 진출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바로 홍범도 장군이다. 장군은 이듬해 6월 7일 중국 지린성 봉오동전투에서 처음으로 일본 정규군을 섬멸했다. ‘하늘을 나는 장군’이란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홍범도 평전’의 저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 중 첫째가 홍범도, 둘째가 김원봉, 셋째가 김구”라고 기술했다.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이 싸우고 또 가장 많이 이긴 독립투사가 바로 홍범도다’. 도올 김용옥도 “독립무장투쟁 당시 일본을 떨게 만든 이순신과 같은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포수 출신인 그는 구한말인 1895년 을미의병을 시작으로 1907년 정미의병으로 유인석 휘하에서 본격적으로 항일전에 가담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음에도 ‘홍범도’란 이름 석 자가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친일파를 등용했던 이승만 정권은 물론 연장선상에 있던 박정희·전두환 군부정권에서도 그를 노골적으로 외면했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이나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처럼 러시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투사라는 것이 이유였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에 가려 무시당했고, 남한에서는 반공의 잣대로 폄훼됐다. 장군은 말년에도 비참했다. 1922년 일제의 막후공작으로 소련 지역의 항일무장 투쟁단체가 해산되면서 연해주로 쫓겨갔다가 75세에 카자흐스탄의 극장 경비원으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가족사는 더 비극적이다. 첫 아내(이옥구)는 홍 장군의 행방을 좇던 일본군의 고문으로 사망했다. 장남 홍양순은 아버지와 함께 싸웠던 정평배기 전투에서 전사했다. 차남 홍용환도 일제의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다 결핵으로 죽었다. 당시 독립투사와 그 가족들은 이런 고초 끝에 생을 마쳤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간도 토벌대에 가담해 홍범도 같은 독립군들을 체포, 살해했던 친일파들이 대대손손 떵떵거리고 사는 작금의 현실이 비통하기도 하다. 지난 7일 봉오동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와 최고의 예우로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1995년 김영삼 정부가 장군의 유해 봉환을 추진했다가 무산된 전례가 있다. 이번은 반드시 성사시켜 민족의 정기가 바로 세워지길 기대한다.
  • 文대통령 “홍범도 장군 유해 모셔와 최고 예우로 보답”

    文대통령 “홍범도 장군 유해 모셔와 최고 예우로 보답”

    문재인 대통령은 7일 “코로나19 때문에 늦어졌지만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 와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 예우로 보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항일 독립전쟁의 원동력도) 100년이 지난 오늘 코로나 국난 극복의 원동력도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봉오동전투 100주년인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독립군을 기리는 일은 국가의 책무”라며 이렇게 밝혔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 당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요청했고, 이후 양측이 실무협의를 했다. 당초 올봄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 시 유해를 봉환하기로 했지만 코로나19로 방한이 연기됐다. 문 대통령은 “100년 전 오늘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이 이끈 독립군이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며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어 “독립운동가들은 자신감을 얻고, 고통받던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의 희망을 갖게 됐다”면서 “의병뿐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 등 평범한 백성들로 구성된 독립군의 승리였기에 겨레의 사기는 더 고양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승리와 희망의 역사를 만든 평범한 국민의 위대한 힘을 가슴에 새긴다”며 “코로나 국난 극복의 원동력도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고, 국민들은 나의 안전을 위해 이웃의 안전을 지켰고 연대와 협력으로 코로나 극복의 모범을 만들어 냈다”고 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文대통령 “봉오동전투, 코로나 극복… 평범한 국민의 위대한 힘”

    文대통령 “봉오동전투, 코로나 극복… 평범한 국민의 위대한 힘”

    문재인 대통령은 7일 “코로나19 때문에 늦어졌지만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와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 예우로 보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항일 독립전쟁도) 100년이 지난 오늘 코로나 국난극복의 원동력도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인 이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독립군을 기리는 일은 국가의 책무”라며 이렇게 밝혔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카자흐스탄 국빈방문 당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요청했고,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가 협조를 약속해 양측이 실무협의를 해 왔다. 문 대통령은 전날 현충일 추념사에서도 봉오동전투를 ‘독립전쟁 첫 번째 대승리’로, 청산리대첩을 독립전쟁 사상 최고의 승리로 꼽으며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의 뿌리가 독립군이었고, 2018년 국방부는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기원으로 공식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SNS에서 “100년 전 오늘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이 이끈 독립군이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며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어 “독립운동가들은 자신감을 얻고, 고통받던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의 희망을 갖게 됐다”며 “의병뿐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 등 평범한 백성들로 구성된 독립군의 승리였기에 겨레의 사기는 더 고양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너도나도 가난한 살림에 의연금을 보태 독립군의 무기 구입을 도왔고, 식량과 의복을 비롯한 보급품을 마련하는 데 나섰다”며 “승리와 희망의 역사를 만든 평범한 국민의 위대한 힘을 가슴에 새긴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코로나 국난극복의 원동력도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라며 “국민들은 나의 안전을 위해 이웃의 안전을 지켰고 연대와 협력으로 코로나 극복의 모범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문대통령 봉오동 전투 100년에 “홍범도 장군 유해 모셔와야”

    문대통령 봉오동 전투 100년에 “홍범도 장군 유해 모셔와야”

    문재인 대통령은 7일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늦어졌지만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와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인 이날 페이스북 등 SNS에 글을 남겨 “독립군을 기리는 일은 국가의 책무”라며 이같이 밝혔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카자흐스탄 국빈방문 당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할 것을 요청했고,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가 협조를 약속해 양측이 실무협의를 해 왔다. 문 대통령은 “100년 전 오늘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이 이끈 독립군이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며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승리”라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들은 자신감을 얻고 고통받던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의 희망을 갖게 됐다”며 “의병뿐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 등 평범한 백성들로 구성된 독립군의 승리였기에 겨레의 사기는 더 고양됐다”고 떠올렸다. 이어 “너도나도 가난한 살림에 의연금을 보태 독립군의 무기구입을 도왔고, 식량과 의복을 비롯한 보급품을 마련하는 데 나섰다”며 “승리와 희망의 역사를 만든 평범한 국민의 위대한 힘을 가슴에 새긴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100년이 지난 오늘 코로나 국난극복의 원동력도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라며 “국민들은 나의 안전을 위해 이웃의 안전을 지켰고 연대와 협력으로 코로나 극복의 모범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한편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나라 독립군의 첫 승리인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6∼7일) 100년을 기리는 영상이 7일 유튜브에 올랐다. 배우 최민식이 내레이션을 맡은 4분 분량의 영상물은 ‘자랑스러운 전승의 역사, 여천 홍범도 장군’이란 제목으로, 승전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에 의해 제작됐다. 영상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길이 빛낸 위대한 승리 봉오동 전투의 전개 과정과 그 의의, 승리의 주역인 홍범도 장군의 생애 등을 상세히 소개한다. 최민식은 “대한민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봉오동 전투와 홍범도 장군을 네티즌들이 꼭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봉오동 승리 100주년’…홍범도 장군 유해 올 수 있을까

    ‘봉오동 승리 100주년’…홍범도 장군 유해 올 수 있을까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아 올해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2일 “올해 하반기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송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며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며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조국으로 봉환하여 안장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 송환도 미뤄졌다. 정부는 지난 3월 공군 수송기를 카자흐스탄으로 보내 유해를 봉환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코로나19 확산으로 지연되고 있다. 앞서 박재민 국방부 차관은 작년 9월 서울안보대화에 참석한 쉬페크바예프 카자흐스탄 총참모부 제1부총참모장과 양자회담에서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을 위해 카자흐스탄 정부가 적극 나서 달라고 협조를 요청한 상황이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1882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뒤 1895년 의병활동을 시작해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1908년 11월 연해주로 망명한 이후에도 홍범도 장군의 의병활동은 계속됐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홍범도 장군은 1937년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연해주를 떠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 1943년 75세로 숨을 거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정부는 오는 7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홍범도 장군이 활약한 봉오동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한다. 보훈처 관계자는 “올해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인 만큼 유해송환에 적극 힘을 쏟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의사 게으름에 6급 대상자 3급 입대, 소멸시효 지나

    의사 게으름에 6급 대상자 3급 입대, 소멸시효 지나

    징병 신체검사에서 면제 대상인 6급을 받아야 할 젊은이가 3급을 받아 입대했다며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패소했다. 법원은 군의관의 잘못과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배상청구권이 인정되는 기간이 지나 원고가 실제로 배상을 받을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88단독 김범준 판사는 A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A씨는 2014년 재신체검사에서 ‘과거 골절상으로 6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은 뒤 운동 제한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3급 판정을 받아 육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입대 두 달 만에 심한 고관절 통증을 호소한 끝에 다시 군 병원 진단과 검사를 거쳐 6급 판정을 받고 이듬해 의병 전역했다. 이에 A씨는 “면제처분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현역으로 복무해 신체적·정신적 손해가 발생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일단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신체검사 당시 A씨의 진술과 제출된 자료 등에 의해 운동 제한이 있음이 확인되므로 징병검사 전담 의사는 6급 판정을 해야 했는데도 만연히(주의를 게을리하여) 3급 판정을 했다”며 “징병검사 전담의의 과실로 현역 판정을 받았으므로 국가는 A씨에게 발생한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 A씨가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는 없다고 재판부는 판결했다. 민법상 소멸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다. 소멸시효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데도 행사하지 않는 기간이 일정 정도 지나면 권리가 사라진 것으로 인정하는 제도다. 민법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를 ‘손해나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으로 정한다. 재판부는 “A씨가 의병전역을 한 2015년 1월 무렵에는 손해와 가해자를 알았다고 봐야 한다”며 “소송을 2018년 12월에 냈으므로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설명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노태우 정부 마지막 국무총리’ 현승종 별세

    ‘노태우 정부 마지막 국무총리’ 현승종 별세

    노태우 정부 시절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낸 현승종 전 총리가 25일 별세했다. 101세. 현 전 총리는 1919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태어나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서 1946년부터 1974년까지 고려대 법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고려대 학생처장으로서 ‘교수 데모’에도 참여한 바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2년 10월 한림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현 전 총리를 중립내각 총리로 임명했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관권선거 의혹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고, 노 전 대통령은 민주자유당(민자당)·민주당·국민당으로부터 중립내각 구성을 일임받았다. 노 전 대통령이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의 명예총재직을 내려놓고 탈당한 뒤 현 전 총리를 임명했다. 현 전 총리는 1999년 한 언론과의 3·1절 기념 인터뷰에서 일제 말 학도병으로 간 뒤 일본군 장교로 임관해 중국 팔로군(인민해방군)과 교전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당시 그는 “조부(현희봉)와 부친(현기정)이 의병과 독립운동가로 헌신했는데, 나는 일본군 소위였다고 차마 밝힐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현군숙·현윤해·현춘해·현선해(성균관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씨 등 자녀들이 있다. 발인은 27일,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9호실이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왓츠업! 아메리카] 美 재향군인, 서핑 중 잃어버린 의족 돌아온 사연

    [왓츠업! 아메리카] 美 재향군인, 서핑 중 잃어버린 의족 돌아온 사연

    카터 헤스는 2012년 중동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재향군인이다. 그는 전쟁에서 사고로 왼쪽 다리를 잃었고, 그 일을 계기로 의병 제대했다. 다리를 잃고 한 동안 우울증을 겪었던 헤스는 오랜 재활 끝에 의족을 달고 일반인과 다르지 않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됐다. 평소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해양스포츠인 서핑도 즐길 만큼 상태가 좋아졌다. 틈틈히 바닷가에 나가 서핑을 즐기던 헤스는 지난달 높은 파도에 중심을 잃고 쓰러진 뒤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서핑용 의족이 사라진 걸 발견했다. 그는 지인들과 함께 수일에 걸쳐 바닷가 인근과 모래사장을 뒤졌지만 3000달러(한화 약 360만원)나 되는 고가의 특수제작된 의족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라진 헤스의 의족은 바닷가 인근 공원에 묻혀 있었고, 이는 13세 소년 세비 모리스에 의해 발견됐다. 모리스는 시간이 날 때 마다 공원이나 해변을 찾아 간다. 금속탐지기를 이용 땅이나 모래사장 밑에 묻혀 있는 동전이나 금속물 등을 찾는 취미가 있기 때문이다. 모리스는 자신에겐 아무 쓸모 없는 의족이지만 분명 누군가에겐 매우 필요한 물건임을 직감하고 온라인을 통해 주인을 찾아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모리스의 노력은 결국 지난 주말 의족 주인인 헤스에게 전달됐다. 모리스를 통해 잃어버렸던 의족을 전달 받은 헤스는 "예전에도 높은 파도에서 서핑을 즐겼지만 단 한 번도 서핑용 의족이 다리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며 "잃어버렸던 의족을 다시 못 찾을 줄 알고 포기했는데 이렇게 찾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헤스는 자신의 의족을 찾아 준 모리스를 가리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착하고 대단한 소년"이라며 모리스와 그의 부친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감사함을 전했다. 허남주 피닉스(미국) 통신원 willbeback2@naver.com
  •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고창, 국가적 차원서 성지화 작업 필요”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고창, 국가적 차원서 성지화 작업 필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고창 성지화 작업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해 왜곡된 역사의 면모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유기상 전북 고창군수는 11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무장봉기(무장기포)가 제7차 교육과정 한국사 교과서에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으로 수록돼 역사적 사실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무장은 고창의 옛 지명이고 기포는 동학의 조직인 포(교구 또는 집회소)를 중심으로 봉기한 것이다. “고창 동학농민혁명사 재조명 과업의 첫 번째 사명인 무장봉기 역사교과서 수록이 126년 만에 이뤄져 그 의미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자긍심 찾기 노력이 이제야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는 “고창 동학농민혁명 성지화, 무장기포지·전봉준 장군 생가터 국가사적 등재, 동학농민혁명 역사벨트 조성을 적극 추진하겠다”면서 “동학선양사업을 의향정신을 살린 자랑스러운 군민운동으로 승화시키겠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유 군수와의 일문일답.-‘고창 무장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라는 내용이 새 학기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에 모두 수록됐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1894년 3월 20일 고창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라는 사실이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정설이었다. 한국사 교과서 수록으로 동학 전문연구자와 고창군민 등 소수만 알던 역사적 사실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이로써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빚어졌던 동학농민혁명 시발지 논란은 정리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달 25일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에서 선열들에게 교과서를 봉정하는 행사를 가졌다.” ●‘보국안민’ 혁명의 목표 최초로 제시 -고창 무장봉기가 동학농민혁명에 미친 영향은. “조선 후기에는 지역적 한계를 넘지 못한 수많은 민란이 있었다. 무장봉기는 혁명의 이념이자 지표인 ‘무장포고문’과 농민군 행동강령인 ‘4대 강령’을 정립 발표함으로써 농민혁명의 틀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보국안민’이라는 혁명의 목표가 최초로 제시됐고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전국적인 대규모 항쟁으로 커졌으며 봉건제도 개혁의 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민족·민중항쟁의 근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창 무장봉기를 부각시키기 위한 과정과 지자체의 노력은. “자주와 평등의 위대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고창군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학술·연구·문화사업을 하고 있다. 동학기념사업회, 동학유족회 등 지역 단체와 울력해 매년 학술대회를 열고 무장기포기념제·무장읍성축제를 개최한다. 기념제와 축제는 ‘동학농민혁명은 무장기포지로부터, 3월 20일의 함성은 전국적인 봉기로’라는 주제로 개최된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 정신과 무장기포일의 참다운 의미를 널리 알리는 한편 전국적인 축제로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기념제에서는 동학농민혁명군들이 읽어 내려갔던 무장포고문을 낭독하고 농민군이 걸었던 진격로 걷기 체험행사를 한다. 축제 기간에는 무장현 관아·읍성 무혈입성 재현 등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전북 정읍시가 동학의 시발점은 무장봉기가 아니라 ‘고부봉기’라며 역사왜곡 바로잡기에 나서기로 했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이제 동학농민혁명은 지역을 넘어 한국사에 빛나는, 세계 속의 혁명으로 재평가돼야 한다. 지역주의가 발목을 잡는 것은 선열들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한국사 역사교과서에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농민운동’으로 기술했다. “동학농민혁명의 대의와 의미, 가치를 생각할 때 교과서에도 운동이 아닌 혁명이라고 기술해야 한다. ‘실패한 혁명’이라는 일부의 평가절하를 극복하고 혁명을 운동으로 표기한 현행 교과서를 개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대접주 손화중의 근거지… 혁명 기반으로 -고창에서 대규모 농민봉기가 발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조선 말기 고창에는 판소리 사설로 사회적 모순과 봉건제도 타파를 꿈꾸는 민중들의 사상적 깨우침이 깔렸었다. 특히 고창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가장 강력하고 중심적인 활동을 했던 전봉준의 태생지이자 대접주 손화중의 근거지였다. 전봉준이 고창 출신이었기에 협력기반이 두텁고 호남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손화중포의 인적·물적 동원능력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도소(도접주들의 총집회 기관) 거소에는 주물공장, 대장간, 마방 등이 있고 보부상을 비롯한 장꾼들이 드나들며 정보 공유 및 조직이 활성화돼 혁명을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무장봉기가 일어난 공음면 구수마을의 넓은 충적지는 수천의 동학군들이 집결해 훈련하기 쉬운 지형이었고 석교 세창과 장터 포구는 군수품과 군량미 조달이 쉬운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 -고창군과 동학농민군을 이끈 전봉준과의 관계는. “고창이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간 정읍 고부, 정읍 태인, 전주 등 여러 설이 분분했지만 많은 연구자가 전봉준의 출생지가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임을 밝혀냈다. 현재 생가터를 사적으로 지정하고 전봉준 장군 동상을 세우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단체장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의의와 평가는. “동학농민혁명은 아래로부터 민중혁명이라는 측면에서 1만년 민족사의 가장 빛나는 한 장면이다. 제대로 조명되면 세계 4대 혁명의 맨 앞자리에 평가될 역사다. 동학농민혁명은 자주와 평등, 민주적 절차를 확립하고자 했던 근대 민중운동의 효시로 참여자와 유족, 기념사업, 발상지 고창군의 상징성 등이 높이 평가돼야 하나 일제와 군사정권 등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고 평가절하됐다. 126년이 지난 이제라도 동학농민혁명 고창 성지화 작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원활하게 진행돼 자주적인 우리 역사의 흐름을 계속 이어 가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며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당당하게 지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창은 의향… 청소년 역사교육의 장 활용 -동학농민혁명이 고창군의 정체성에 미친 영향은. “고창은 의향이다. 정의로운 고창군민들은 불의를 보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서 항일의병 운동, 독립구국운동, 최근의 촛불시위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에 고창·무장·흥덕 의병이 모두 참여했다. 임진·정유 왜란 때도 고창 흥덕 남당회맹단 등의 의병이 일어났다. 고창 성내 출신 근촌 백관수 선생은 당시 서른의 나이로 일본 유학생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거사를 주도했다. 그 독립선언서의 초안이 국내로 전달돼 3·1운동을 촉발시켰다.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국가유공자도 90여명으로 전북에서 가장 많다.”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 과제는. “고창 동학농민혁명 성지화, 무장기포지·전봉준 장군 생가터 국가사적 등재, 동학농민혁명 역사벨트 조성을 적극 추진하겠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과 국가기념일을 제정하고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아쉽다.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을 세계 혁명사의 한 축으로 알리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동학농민혁명을 지역발전과 연계 방안은. “전봉준 생가와 무장기포지를 역사문화유적지로 가꿔 청소년들의 역사교육과 체험의 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과 선운사, 고창읍성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해 관광벨트로 육성하겠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민초를 상징하는 녹두, 추운 겨울을 이겨 낸 청보리를 주제로 한 음식 등 동학농민혁명 콘텐츠를 개발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겠다.” 고창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목숨 걸고 광복군에 무기 공급… 항일투쟁 중 사료 모아 독립사 집필

    목숨 걸고 광복군에 무기 공급… 항일투쟁 중 사료 모아 독립사 집필

    “위협과 모욕을 수없이 퍼붓다가 필경에는 온갖 악독한 형벌을 행한다. 나를 꿇어 앉힌 후에 직경 삼촌(三寸)쯤 되는 통나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양단에 두 놈이 올라서서 통나무를 디디면 형문(刑問) 다리가 부러질 듯 기절하게 되는데, 나는 끝까지 아무 말도 않고 당하였다.” 1929년 2월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힌 김승학 선생이 고문을 받던 상황을 기록한 ‘망명객행적록’ 부분이다. 희산(希山) 김승학 선생은 만주 대한독립단에서 활약하고 독립신문 사장과 참의부 참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1881년 7월 12일 평북 의주군 비현면 마산동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이웃집 방아를 찧어 주고 삯으로 등겨를 받아와 먹었다고 한다. “등겨에 백태(白太·흰콩)를 약간 섞은 것은 상미(上味)라 하여 우리 형제를 먹이고 부모님은 순전한 등겨만을 자시었다. 아침은 겨밥, 저녁은 송피 범벅, 이런 생활을 매일 계속하였다.”배움에 대한 열의가 강했던 선생은 가난한 살림에도 7년 동안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익혔다. 1899년 선생은 명망 있던 유학자 조병준(건국훈장 독립장)의 문하생이 됐다. 조병준은 “우리는 섬 오랑캐 왜노(倭奴)와 400년 동안 원수인데 을미년에 우리 국모 명성황후를 참시(慘弑)하였으니, 우리 선비로서는 거의하여 왜노를 토벌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다”라고 말했다. 선생은 스승의 우국충절에 크게 감동해 서간도 지역을 다섯 달 동안 답사하며 독립운동을 꿈꾸었다. 선생은 1904년 한문박사과 시험에 응시했는데 시험 부정으로 탈락하고 말았다. 이에 학무국장을 찾아가 항의했다가 타협책으로 한성사범학교 입학을 제의받아 1년 남짓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자 선생은 서울 종로에서 배일(排日) 강연을 하다 체포돼 석 달 동안 구금당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극명학교 등에서 근무했는데 매일같이 일경이 찾아와 “김승학과 같은 불온분자에게 교육을 받으면 순량한 자제들까지 불량자가 된다”며 이간질을 했다. 더는 고국에서 있을 수 없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선생은 만주로 건너가 봉천성 관립 강무당에 입학, 군사교육을 받고 의병단에 가담해 6년 동안 활동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주에서 대한독립단이 결성됐는데 선생은 재무부장이 됐다. 선생의 첫 임무는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지단(支團)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평남북 일대를 다니며 친지, 동창들을 설득해 지단과 연통제 기관을 만들었다. 첩보를 접한 일경은 집요하게 추적했고 선생은 배추씨 장수와 좁쌀 장수로 가장해 그때마다 따돌리며 활동을 계속했다. 목숨을 건 활동 덕분에 1920년 1월까지 평안남북도 일대 52곳에 하부 조직을 만들고 독립운동 자금도 수만원을 모았다.선생은 이어 상하이임시정부에 대표로 가서 만주 독립운동 통합단체 명칭을 받고 무기를 구입해 오는 임무를 맡게 됐다. 마우저 총과 루저 권총 240정, 탄환을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구입하기는 했는데 운반이 문제였다. 철궤 4짝을 사서 포장한 뒤 누에고치 거래로 위장해 우여곡절 끝에 압록강변 안동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경이 정보를 듣고 대기 중인 상황이었다. 독립군을 도와주던 이륭양행 주인 아일랜드인 조지 쇼의 도움으로 무기는 내렸지만 선생은 야음을 틈타 상륙하다 경찰견까지 동원한 일제의 추적을 받게 됐다. 옥수수밭에 사흘이나 숨고 맨발로 산골짜기를 헤매며 천신만고 끝에 귀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주는 것이니 제군들은 무기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여 한 발의 탄환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고 1탄에 왜적 1명씩 잡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1920년 광복군사령부 무기수여식에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 무기로 광복군사령부는 서너 달 동안 일본군과 78회 교전하면서 주재소 등을 습격해 일경 95명을 사살하는 막대한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가 한인들을 학살한 경신참변 후 선생은 임정에 상황도 알릴 겸 두 번째로 상하이로 갔다. 뜻밖에도 선생은 독립신문 사장을 맡게 됐다. 당시 독립신문 책임자였던 소설가 이광수는 변절해 국내로 돌아갔고 프랑스 조계에 있던 신문사는 일제의 방해로 인쇄 도구가 압수되고 신문 발행이 중단된 상태였다. 선생은 프랑스 영사관과 교섭한 끝에 신문을 복간, 1927년까지 6년 동안 발행을 책임졌다. 그동안 일제의 추적을 피하고자 28번이나 인쇄소를 옮겼는데 한번 옮길 때마다 마차 2량과 인력거 20여대가 필요했고 한밤중에 이사를 다니기도 했다.선생은 1924년 무렵 임정 학무부 총장 대리 등의 직도 맡았다. 그런데 당시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와 참의부의 알력이 깊어져 유혈극이 벌어졌다. 독립신문의 글 때문에 불똥이 선생에게까지 튀자 사장직을 사임했다. 그것도 잠시 선생은 임정의 임명으로 비어 있던 참의부 제4대 참의장이 됐다. 갈등을 겪으면서도 참의·정의·신민 3부는 통합을 추진했는데 통일 단체 이름은 ‘혁신의회’였다. 1929년 2월 5일 선생은 혁신의회 회의를 마치고 나오다 환인현 와니전자에서 일경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상하이에서 무기를 구입한 일, 독립신문을 발간한 일 등을 캐물으며 일경은 혹독한 고문을 했다. 특히 선생이 틈틈이 수집해서 보관하던 독립운동사 사료를 내놓으라고 추궁했다. “왜경에게 피포(被捕) 후 손발이 요절되는 수십 차 악형이 주로 이 사료 수색 때문이었다”고 선생은 밝힌 바 있다. 선생은 굴복하지 않았고 5년의 옥살이도 버텨냈다.출옥 후 선생은 다시 만주로 망명, 임정 베이징 조직을 맡고 만주 천금채에 맡겨 둔 독립운동 자료를 찾았다. 독립운동 자료는 선생에게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베이징 조직이 탄로 나는 바람에 선생은 베이징을 탈출, 70여일 동안 무려 1000㎞를 뚫고 한구에 도착했고 만주로 돌아와 은둔하다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선생은 정치 참여는 자제하고 독립신문 복간과 독립운동사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복간은 중단됐고 ‘한국독립사’는 1964년 탈고했지만 출간 직전인 1964년 12월 17일 선생은 별세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경기 고양에 있던 묘소는 2012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다. 광복회 학술연구원장으로 있는 장증손자 김병기 박사를 만났다. 선생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도 여러 번 감옥에 갇혔고 자손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선생과 가족들은 피란지 부산에서 10여년을 살았는데 부두 노동자 취업도 못하게 이승만 정권의 탄압과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오리를 키우고 행상을 해서 생계를 잇는 형편이라 자손들이 포상 신청을 하자고 하자 선생은 “독립운동을 한 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느냐”고 화를 내며 만류했다고 한다.김 박사에 따르면 정부가 독립운동가 포상을 시작한 때가 1962년인데 처음에는 친일 역사학자들이 심사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들이 반발해서 이듬해 독립운동사 편찬자인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도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선생은 심사를 하면서 이병도 등 학자들에게 “자네들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뭘 아는가”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김 박사는 40대에 독립운동사 연구를 시작해 만주 참의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선생의 유업을 이어받아 ‘한국독립사’를 7권으로 나눠 현대화하고 보완해 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국토종주 끝내는 안철수 “코로나 위기 임진왜란과 닮아”

    국토종주 끝내는 안철수 “코로나 위기 임진왜란과 닮아”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지난 1일 시작한 국토종주를 1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마무리한다. 안 대표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오늘 국토종주 14일째, 마지막 날로 오후 2시에 광화문까지 가려 한다”며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며 유권자들의 분명한 판단을 당부했다. 안 대표는 여수 이순신 광장에서 시작한 14일간 400㎞ 국토대종주를 끝내며 지금의 대한민국은 400여년 전 국난 상황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400여년 전 정치인들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아 조선은 임진왜란을 맞았고 나라를 구한 건 의병을 일으킨 백성들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이었다고 주장했다. 대구에서 의료 봉사를 하면서 임진왜란 때와 같은 국민들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보았으며 “현 정권의 무능으로 우리는 경제난 상태에서 코로나19 사태를 맞았다”고 강조했다. 안 대표는 코로나19 이후에는 장기불황이란 위기가 기다리고 있다며, 현 정권은 선거가 끝나도 국채를 발행해서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자는 것 외에는 답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그 이유로 이미 코로나 이전부터 소득주도성장, 기계적 주52시간제, 탈원전 등으로 경제를 망쳐왔는데 선거가 끝나면 갑자기 없는 능력이 생기겠느냐고 설명했다. 이어 “현 정권은 코로나 대처과정에서 인기영합주의 행태만 보였다”며 “현 정권의 최대 관심은 선거에서 이기면 윤석열 검찰총장체제를 무력화시켜서 울산시장 불법공작선거, 라임, 신라젠, 버닝썬의 4대 권력형 비리를 덮는데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는 청와대의 사병이 되어서 그 폐해가 독재정권시절 정보기관 못지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서울포토] 문 대통령, 임정 기념관 ‘합토’

    [서울포토] 문 대통령, 임정 기념관 ‘합토’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부지에서 열린 기공식에서 전국의 독립·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곳의 흙을 합토하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기념식에 쓰인 흙은 울릉도와 연평도, 한라산, 임진각, 종로 탑골공원, 제천 의병광장,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비롯해 3·15 의거가 있었던 경남 창원, 4·19 혁명 현장인 광화문, 광주 5·18 민주광장 등에서 공수됐다. 왼쪽 이종찬 임정기념관건립위원장, 오른쪽 김원웅 광복회장. 2020.4.11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위성정당 앞세운 거대 양당… 의석 독과점 노려 연합정치 정신 유린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위성정당 앞세운 거대 양당… 의석 독과점 노려 연합정치 정신 유린

    “지금 예조판서 이이첨의 하는 짓은 괴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광해군 8년(1616년) 12월 한 유생의 상소가 조정을 뒤흔들었다. “전하의 팔다리 노릇을 하고 귀와 눈 역할을 하며 목구멍과 혀 노릇을 하는 관원들이나, …인재를 선발하는 일을 맡은 이들 가운데 이이첨의 복심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무릇 지금 삼사에서 나온 간단한 상소문도 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문무관을 뽑는 이조, 병조가 추천한 사람들 또한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필자는 태학(성균관)생 윤선도였다. 일개 학생이었지만 그 내용이 얼마나 아팠으면 이이첨은 한동안 사람 눈을 피해 칩거했다고 한다. 윤선도가 함경도로 유배돼 논란이 잦아들자, 이이첨은 ‘잔당 척결’을 위해 다시 칼을 빼 들었다. 인목대비를 폐출하라! 광해군에게는 두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 하나는 서자 출신의 왕이라는 것, 둘째는 서자 중에서도 둘째라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세자 책봉에서부터 왕위 승계에 이르기까지 매번 온갖 시달림을 당했다. 선조 말년엔 폐세자 논의가 공공연했고 세 살짜리 적장자 영창대군에게 왕위가 승계될 뻔하기도 했다. 즉위 후엔 명(明)이 승계의 정당성을 따졌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 구명도생이나 하던 선조 대신 사직과 국가를 지켰다. 전후에도 국가재건을 위한 제도 정비와 혁신에 앞장섰다. 개혁 군주로서의 자질은 뚜렷했다. 그러나 왕권의 문제에 관한 한 병적인 집착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광해군의 이런 불안을 이용해 이이첨은 국정을 전단하고 권력을 독점했다. 말년엔 광해군조차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오죽하면 인조반정 때 도망가며 “이이첨의 짓인가”라고 물었을까. 이이첨의 집념은 유별났다. 22세(1582년)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현감 재직 중이던 159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1608년 성균관 사성으로 재직하면서 중시 갑과 장원으로 급제했다. 교원으로 있으면서 제자들과 함께 시험을 치러 장원한 것이었다. 재주와 집념은 특별했지만 그를 거두어 줄 사림은 없었다. 그는 무오사화의 발단이었던 이극돈의 직손이었다. 그를 받아 준 유일한 사람이 남명 조식의 제자 정인홍이었다. 강개한 의병장이었던 정인홍은 죽음을 무릅쓰고 세조 어진을 지킨 그를 애틋하게 챙겼다. 이이첨은 정인홍의 줄을 잡고 동인에 발을 디밀었다. 1592년 광해군 건저의 사건과 관련한 정철의 처리 문제로 동인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 북인의 편에 섰으며, 임진왜란 중 왜와 강화를 추진했다는 이유로 유성룡 등 남인을 조정에서 밀어낼 땐 북인의 전위대 역할을 했다. 북인이 1599년 홍여순의 대제학 임명 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할 땐 정인홍을 따라 소장파(소북)를 공박했다. 잇따른 권력투쟁에서 이이첨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1608년 선조의 후계를 놓고 대북과 소북이 정면충돌할 땐 대북을 이끄는 존재가 됐다. 영의정 유영경 등 소북 지도부는 선조의 마음을 읽고 영창대군을 밀었다. 소북 안에서도 내분이 생겨 광해군 승계를 주장한 기자헌, 남이홍 등의 청소북과 유영경 등의 탁소북으로 분열했다. 이이첨은 정인홍과 함께 광해군 승계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선조가 급서해, 광해군의 총아가 됐다. 광해군은 즉위 후 선조의 유교까지 숨겨 가며 승계를 방해한 일곱 대신과 탁소북을 조정에서 몰아냈다. 대신 이원익(남인) 등을 영입해 대북, 남인 그리고 이항복(서인), 기자헌(청소북) 등을 중용해 연합정치를 추구했다. 이이첨은 예조판서 겸 대제학으로 이데올로기를 관장했다. 광해군 즉위년에 숙청된 이들의 사주로 명나라가 승계 과정을 조사할 사신을 파견했다. 걸림돌은 광해군의 친형이자 서장자인 임해군이었다. 이이첨은 임해군이 모반을 도모한다는 고변을 일으켰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3사를 동원해 임해군의 처단을 주장했다. 임해군은 강화도에 유배됐고, 그곳에서 의문사했다. 임해군은 성정이 포악하고 흉폭한 짓을 많이 저질러 그를 안타까워하는 이는 없었다. 고변의 효과에 눈뜬 이이첨은 이후 고변을 정적 제거에 적극 활용했다. 다음 표적은, 한때 선조가 염두에 두었던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 1612년 ‘김직재의 옥’을 일으켜 진릉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고변을 유도해 탁소북의 잔존세력을 제거했다. 이때부터 원성이 일기 시작했다. 1613년엔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마침 ‘일곱 서자’의 강도 사건(칠서의 옥)이 일어났다. 이이첨은 이 가운데 박응서로 하여금 ‘서얼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수괴로 지목된 김제남(인목대비의 아버지)과 세 아들이 처형됐다.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 이에 반대하던 이덕형·이항복·신흠·이정구·김상용 등 서인과 남인들이 숙청됐다. 영창대군은 이듬해 유배지에서 이이첨의 심복(강화부사 강항)에 의해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계축옥사로 대북 세상이 됐다. 1615년엔 소명국의 고변을 이용한 ‘신경희의 옥’이 일어났다. 능창군이 표적이었다. 당시 시중에는 ‘정원군(능창군의 아버지)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느니 ‘능창군(인조의 동생)의 기상이 비범하다’ 따위의 항설이 나돌았다.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했고, 정원군의 집은 허물었다. 집터엔 경덕궁을 지어 ‘서기’를 가로챘다. 윤선도의 병진소는 이즈음 나온 것이었다. 무고하면 상을 받고, 당하면 처벌당하니 온갖 고변이 횡행했다. 장령 배대유는 개탄했다. “김덕룡이라는 자는 간음하다 붙들리자 고변했고, 김언춘은 도둑질하다 붙들리자 모역을 고변했다.” 대미는 인목대비 폐모론이었다. 이이첨은 계축옥사 때에도 태학(성균관)생 이위경 등을 사주해 폐모소를 올리도록 했었다. 이이첨은 1617년 다시 폐모론을 전면적으로 전개했다. 11월 전현직 관리 1000여명과 종실 170여명이 인목대비의 폐출을 주장했다. 광해군이 거듭 거부했지만 이듬해 1월 우의정 한효순이 주도해 폐모정청이 열렸다. 광해군은 하소연했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이다지도 한결같이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이제 광해군도 이이첨을 이길 수 없었다. 5월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출 대신 서궁(경덕궁)에 유폐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대북 안에서 폐모에 반대하던 기자헌, 정창연, 유몽인 등 골북, 중북은 숙청됐다. 남은 건 이이첨을 추종하는 ‘육북’뿐이었다. 8월엔 폐모론에 앞장섰던 허균마저 ‘남대문 벽서’를 핑계로 처형당했다. 독점은 완성됐다. 그러나 1623년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과 전향한 북인이 동조한 인조반정을 막을 순 없었다. 광해군은 쫓겨나고, 대북은 멸종했다. 이이첨은 줄이 필요할 땐 광해군의 호위무사였지만, 권력의 중심에 서면서 스스로 권력의 화신이 됐다. 개혁 정책에는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전후복구의 토대였던 대동법 실시에 반대했고, 명과 후금 사이의 등거리 실리외교에도 반대했다. 명이 요구한 지원군 파병을 주저하는 광해군을 비난하기도 했다. 민심을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한 궁궐 건설에는 앞장섰다. 전란 중 불탄 종묘나 창덕궁 중건 이외에 경덕궁, 인왕궁, 자수궁을 신축했다. 명분은 ‘창덕궁은 불길하다’, ‘경덕궁에 서기가 있다’ 따위가 고작이었다. 광해군이 유배당할 때 백성은 이렇게 조롱했다. “돈 애비야 돈 애비야 거두어들인 금은은 어디에 두고 이 길을 가느냐.” 민주화 이후 21대 총선처럼 지저분한 선거는 없다. 의석 독과점을 위한 거대 양당의 이른바 위성정당 때문이다. 사표를 막아 연합정치의 토대를 마련하려던 개정 선거법의 정신은 여지없이 유린됐다. 민주당은 선거법 개정을 주도했으니 할 말이 없다. 1당을 내줄 순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지만, 실제 목표는 단독 과반이다. 하승수 전 정치개혁연합 사무총장은 그 배후로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을 꼽았다. “그는 연합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다.” ‘대북’은 한때 조선사에서 가장 개혁적이었다. 광해군 초기 ‘연합정치’로 재건과 혁신의 동력을 확보했지만, 이이첨의 무모한 권력독점과 함께 몰락했다. 그런 부류는 언제나 있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서울과기대, 외국인 학생 700여명에게 격려 물품 전달

    서울과기대, 외국인 학생 700여명에게 격려 물품 전달

    서울과학기술대학교는 코로나19로 인해 기숙사에 머물고 있거나 외부 숙소에서 자가 격리 중인 외국인 학생 700여명에게 지난달 25일부터 30일까지 4일간 격려 물품을 전달했다. 이번 전달은 방역 물품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 학생을 위해 마련됐으며 서울과기대 각 부서를 비롯해 노원구청, 원자력의학원에서 물품 기부에 동참했다. 격려 물품은 마스크, 손소독제, 문구류, 개인위생용품, 간식 등으로 구성됐으며 물품 전달은 직접 배송과 방문 수령의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동안 외국인 학생은 마스크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외국인 학생은 병원진료를 위한 ‘유학생보험’이란 상해질병 실비보험에만 가입돼 있어 아직은 국민건강보험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외국인 학생을 국민건강보험 당연 가입자로 분류하는 정책이 내년 3월에야 시행될 예정이라 현재 공적 마스크 판매대상에서 제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서울과기대 국제교육본부 직원들이 ‘외국인학생을 위한 격려물품 전달’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으며 자가 격리, 개학 연기, 온라인 수업 등으로 위축된 외국인 학생의 불안감 해소에 도움을 주고자 기부가 추진됐다. 노원구청 ‘면 마스크 의병단’과 원자력의학원도 마스크 700여개, 덴탈 마스크 900여개, 손소독제 700여개를 기부하며 행사에 동참했다. 김선민 서울과기대 부총장은 “코로나19 확산으로 힘들어하는 국내 거주 외국인 학생들이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기를 바라며, 함께 해준 노원구청과 원자력의학원 관계자들께도 감사 인사를 보낸다”면서 “코로나19를 극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성공적인 유학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서울비즈 biz@seoul.co.kr
  • 日 육사 출신으로 조국 독립 위해 헌신한 ‘전설적인 항일 영웅’

    日 육사 출신으로 조국 독립 위해 헌신한 ‘전설적인 항일 영웅’

    김경천은 김좌진, 홍범도를 뛰어넘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이다. 백마를 타고 일본군을 무찔렀고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나경석은 “조선의 유지 청년이 노령에 수천수만이 출입하였으나 김 장군같이 위대한 공적을 성취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김경천은 백범일지에 버금가는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라는 친필 수기를 남겼다. 늦게서야 발견된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시영이 보고 싶다. 신동천이 보고 싶다. 신용걸이 보고 싶다. 안무가 보고 싶다.…” 독립군 전우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김경천은 1888년 6월 5일 함남 북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정우는 구한말 군기창장 등으로 일한 고위인사였다. 1900년 10월 김경천 가족은 서울 사직동으로 이사했고 김경천은 1904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의 진로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서점 주인이 건네준 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1905년 9월 김경천은 도쿄 육군유년학교 예과 학년에 입학했다. 650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예과를 마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23기생으로 들어가 1911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재학 중에 나라는 일본으로 넘어갔고 김경천은 엄청난 심적 갈등을 겪었다. 김경천은 그래도 실력 양성을 위해 기병학교까지 마친 뒤 1919년 2월 귀국했다. 2·8 독립선언이 선포되던 때였다. 귀국하자마자 3·1운동이 일어났고 시위 현장을 보면서 김경천은 피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자동차에 우리 청년 4~5명이 실려 있다. 모두 죄수복을 입었다. 그 근방에 나이가 40가량 되는 부인이… 그 뚫어지고 더러워진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는 것이 보인다. 아, 나도 가슴이 막히면서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함남 북청서 태어나 서울 사직동 이주 김경천은 더는 일본 군인으로 살 수 없었다. 일본 육사 후배 이응준, 지대형(지청천)과 함께 서간도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응준은 중간에서 길을 달리했다. 김경천은 1919년 6월 6일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수원으로 내려가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간 뒤 압록강을 건넜다. 일본 육사 출신 군인이 망명하자 일제는 충격에 빠져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부인 유정화를 체포해 고문했지만 부인은 남편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았다. 김경천은 일단 중국 안동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했다. 그러나 활동이 어려워지자 하루 20㎞ 넘게 보름 동안 걸어 봉천성 유하현 신흥무관학교에 도착, 교관으로 일했다. 그곳에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인 신팔균도 있었다. 경천(擎天) 김광서, 동천(東天) 신팔균, 청천(靑天) 지석규 세 사람은 남만주 삼천(三天)이라 불렸다. 1919년 9월 중순 김경천은 길림 서간도 군정서에서 무기구입 위원으로 선정돼 연해주로 출발, 이듬해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달 12일 소비에트 적군과 한인 빨치산부대가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옙스크의 일본군을 전멸시킨 전투가 있었다. 일본 시베리아 주둔군은 보복으로 4월 4일 연해주 신한촌을 공격, 한국인 빨치산과 민간인 5000여명을 학살한 ‘4월 참변’을 일으켰다. 독립운동가 최재형도 이때 살해됐다. 김경천은 간신히 피신했다가 한인 빨치산 근거지인 내수청 대우지미로 이동했다. 당시 간도나 연해주에는 중국 마적이 날뛰었다. 마적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민가를 습격해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납치했다. 일제는 마적단에 무기를 대주고 한인들을 괴롭히도록 했다. 김경천은 마적을 일본군과 동일시하고 대우지미에서 마적토벌대를 만들어 토벌에 나섰다. 4월 8일 마적 380여명이 침입하자 김경천의 토벌대 45명은 소비에트 적군 600명과 연합해 360여명을 몰살시켰다. 이어 창해청년단을 조직, 총지휘관을 맡아 1920년 5월 다우지미 전투에서 마적 300여명 중 60명만 살려 보냈다. 1921년 1월 김경천은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정부 격인 대한국민의회에 참석하라는 공문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김경천은 “독립을 하자는데 너무도 희생이 없다. 너무도 정치에만 눈이 팔리고 실천력이 적다. 너무도 자칭 영웅이 많다. 너무도 당파가 많다”고 한탄했다. 군인인 그에게는 오직 무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었고 자리다툼만 하는 임정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21년 4월 트레치푸진에서 혈성단 강국모의 요청으로 한인 빨치산부대 사령관이 됐다. 더불어 ‘수청의병대’를 조직했다. 각지에서 모인 한인 빨치산 병력이 800여명이었고 소총과 군마로 무장했다. 김경천은 트레치푸진에 설립된 사관학교 교장도 맡아 사관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시베리아 내전서 가장 위대한 ‘이만 전투’ 그해 8월 수청의병대는 연해주에 있는 러시아 적군(赤軍·혁명군)과 연합했다. 일본군은 러시아 백군(白軍·반혁명군)과 연합해 의병대와 적군을 공격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혁명 이후 극동 지역이 혼돈에 빠지자 시베리아를 차지할 기회라고 판단해 17만여 병력을 배치했다. 1921년 11월 수청의병대와 적군은 일본군과 백군에 포위돼 퇴각했고 카르톤 마을에서 적군 대대장이 항복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김경천은 적군 패잔병과 의병대의 혼성 부대를 이끌고 이만(달레네친스크) 지역의 백군을 공격했다. 200여명의 혼성부대는 700여명의 백군과 6시간 동안 전투를 벌인 끝에 이만을 정복했다. 이 전투는 시베리아 내전에서 가장 위대한 전투라는 극찬을 받는다. 김경천은 그때의 상황에 대해 “(군사들이 지나가는) 발자국마다 피가 고이었다”고 썼다. 1922년 여름 이후 김경천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러시아 육사에서 교관을 초청해 급여를 주며 교육시켰다. 김경천의 목표는 조국의 독립이었다. 러시아 땅에서 독립운동을 펼쳤기에 러시아인들과 협력했고 적군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로 진공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패퇴를 거듭하던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러시아는 빨치산부대도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김경천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김경천은 이후 1932년부터는 하바롭스크 합동국가보안국 통역으로 일했고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사범대에서 군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5년 무렵 스탈린의 강압정치가 한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김경천은 간첩죄로 체포돼 1936년 9월 3년형을 받았다. 1939년 2월 일단 석방됐다. 그 사이 가족은 카자흐스탄 카라간다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재회도 잠시 그해 12월 간첩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김경천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런 점이 이유가 됐을 것이다.●광복 못 보고 유배지서 심장질환 사망 김경천은 2년 동안 철도 건설 노역에 동원됐다가 1942년 1월 2일 소련의 북동쪽 끝 코미자치공화국으로 유배돼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이 죽은 뒤 김경천은 무죄 선고를 받았고 사후 복권됐다. 김경천은 수용소 근처에 집단으로 묻혀 별도의 묘소가 없다. 김경천은 2남 4녀를 두었다. 아내와 자식들은 밀항선을 타고 연해주로 가 같이 살았지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제 이주는 더욱더 큰 고난을 주었다. 가족들은 국영농장에서 힘든 노동에 동원됐고 인민의 적으로 박해를 받았다. 후손들은 현재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1998년 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막내아들 김기범(1932년생)씨와 막내딸 김지희(1928년생)씨는 정부의 초청으로 아버지 사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2015년 8월 정부는 모스크바에 사는 의학박사인 김경천의 손녀 옐레나 필랸스카야 등 후손 7명의 특별귀화를 허가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보성군, 전국 최초 필터 교체용 마스크 전 군민 무료 보급

    보성군, 전국 최초 필터 교체용 마스크 전 군민 무료 보급

    전남 보성군이 23일부터 전국 최초로 필터 교체용 마스크를 전 군민에게 무료로 보급한다. 지난달 5일 전 군민의 면 마스크 보급에 이어 자체 제작한 필터 교체형 면 마스크 4만 2000매를 전 군민에게 무료로 지급한다. 마스크는 이날 읍·면사무소를 통해 군민들에게 전달된다. 1인당 면 마스크 1매와 필터 5매다. 면 마스크는 세탁해서 재사용할 수 있어 마스크 수급 안정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면 마스크 제작은 지난 11일부터 20일까지 ‘보성군 마스크 의병단’을 꾸려 보성군여성단체협의회와 소비자교육중앙회 보성지회 등 10개 봉사단체에서 재능나눔 봉사자들 100여명이 힘을 보탰다. 주말도 없이 공동작업장, 일터, 가정 등에서 자원봉사자들이 구슬땀을 흘려 면 마스크를 제작했다. 군은 마스크 제작에 들어가는 재료비를 재난관리기금을 투입해 전액 지원했다. 김철우 보성군수도 연일 마스크 제작 현장인 농업기술센터를 찾아 재봉틀 앞에서 마스크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봉사자들을 격려했다.자원봉사자 최모 씨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 지역은 내 손으로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마스크 제작에 참여했다”며 “작은 노력이지만 힘을 보탤 수 있어서 뿌듯하다”고 말했다. 김 군수는 “이웃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위하는 자원봉사자 여러분들의 마음이 지금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힘이 되리라 믿는다”면서 “여기 계신 봉사자 한분 한분이 보성군의 영웅이다”고 감사를 전했다. 군은 지난 1월말 저소득층을 위해 마스크 11만매를 배부했다. 지난달 5일에는 전 군민에게 면 마스크를 지급했다. 이어 마스크 수급이 불안정해지자 군 보유물량을 풀어 임산부와 고위험군에 마스크 2000매를 긴급 지원했다. 또 장도, 해도 등 도서지역에도 700매를 지원하는 등 마스크 수급 안정화에 힘쓰고 있다. 보성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국민안심마스크 특별제작 협약…이인영 “마스크 의병운동”

    국민안심마스크 특별제작 협약…이인영 “마스크 의병운동”

    이낙연 “마스크 부족은 세계적 현상”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코로나19국난극복위원장은 13일 코로나19 확산 사태와 관련해 “마스크 공급이 수요보다 훨씬 부족한 일이 세계적 현상이 돼 버렸다. 취약계층에 먼저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이날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국민안심마스크제작협의회’와 함께한 ‘국민안심마스크’ 특별제작 협약식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국민안심마스크는 정전기 방지 필터를 삽입해 사용하는 면마스크로 재사용이 가능하며, 한국의류시험연구원 평가를 통과했다. 국민안심마스크의 하루 생산량이 약 60만장(최대 100만장)에 이른다면 마스크 품귀 현상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민주당은 기대하고 있다. 이 위원장은 “어떻게 수급을 맞출 것인가가 만만찮은 일이지만 저희 나름대로는 ‘일단 배분을 공정하게 하자’, ‘취약계층에 마스크가 안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인영 국난극복위 총괄본부장은 “국민안심마스크는 국민의 힘으로 코로나19를 극복하자는, 국난을 이겨내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아주 작은 상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안심마스크는 나눔의 마스크이기도 하고, 서로 양보하는 마스크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아껴 쓰는 새로운 마스크 의병운동이기도 하다”면서 “오늘 협약식을 시작으로 더 많은 분이 면마스크 생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새로운 협약도 더 많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민주당 비례연합정당 참여키로, 앞으로가 더 문제

    민주당 비례연합정당 참여키로, 앞으로가 더 문제

    전 당원 투표 결과 74%가 찬성번호 배정, 현역 꿔주기 등 과제더불어민주당은 13일 전 당원 투표를 통해 비례대표용 연합정당에 참여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앞서 최고위원회, 의원총회 등을 거치면서 예상했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주말부터 본격적인 연합정당 참여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연합정당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아 미래한국당의 ‘비례 독식’을 막아 내겠다는 전략이 제대로 먹힐지는 미지수다. 민주당은 13일 권리당원 78만 9868명 중 24만 1559명이 비례 연합정당 참여 여부를 묻는 조사에 응해 이 중 74.1%인 17만 9096명이 찬성했다고 밝혔다. 반대는 25.9%(6만 2463명)였다. 민주당 최고위원회는 조사가 나온 직후 결과를 공유하고 절차에 따라 민주당의 비례 연합정당 참여를 공식 결정했다. 연합정당 참여는 예정됐던 수순 이날 결과는 이미 정치권에서 예상했던 그대로다. 민주당은 최근 코로나19 확산 등으로 중도층의 표심 이탈이 우려되는 가운데 비례의석마저 미래통합당의 비례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이 독식할 것이란 분석이 나오자 일종의 ‘절충안’으로 비례 연합정당 참여를 저울질해 왔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도적으로 도입한 정당으로서 비례위성정당 창당이 불가능한 상황에 군소정당들과 함께 연합정당을 만들어 미래한국당의 비례 독식도 막고 다당제 활성화라는 명분도 살리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민주당 최고위원회는 일부 최고위원의 반대로 연합정당 참여를 직접 결정하지 않고 전 당원 투표를 붙였다. 당원들 사이에서는 연합정당 참여를 원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전 당원 투표가 일종의 명분쌓기용 ‘요식행위’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민주당이 전 당원 투표 결과를 등에 업고 연합정당 참여에 나서게 됐지만 앞으로 풀어야 할 문제도 적지 않다. 우선 연합정당에 참여하는 주체들 사이에 비례대표 순위를 어떻게 배정할지를 정해야 한다. 민주당은 애초 병립형 비례의석에서 얻을 것으로 예상된 7석 외에는 더 얻을 생각이 없으며 이마저도 ‘후순위 번호’에 배정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7석을 얻을 수 있는 후순위 번호가 과연 몇 번부터인지, 앞 번호는 누가 채울지 등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문제가 정리되지 않으면 연합정당에 이미 참여를 결정했거나 참여 여부를 고심하고 있는 단위들 간 갈등이 불가피하다. ‘현역 꿔주기’ 가능할까 또 연합정당 자체의 득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투표용지 앞번호를 얻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의원 꿔주기’를 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민주당과 통합당을 빼면 현역 숫자가 가장 많은 민생당(19명)이 투표용지 첫째칸, 정의당(6명)이 둘째칸, 미래한국당(5명)이 셋째칸을 차지한다. 연합정당에 현역이 참여하지 않으면 투표용지 번호는 한참 뒤로 밀리게 된다. 하지만 이 번호를 앞당기기 위해 ‘총대’를 맬 현역의원이 얼마나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군소정당이 연합정당에 얼마나 참여할지도 여전히 문제다. 정의당은 불참 입장을 분명히 했고 녹색당은 참여 여부를 묻는 당원 총투표를 실시한다. 미래당은 참여를 결정하고 정의당 등을 끝까지 설득하겠다는 입장이다. 민생당은 참여 여부를 두고 내부에서 격론이 벌어진 상황이다. 군소정당의 참여가 저조할 경우 연합정당이 결국 ‘비례민주당’이란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의병’을 자처한 정봉주 전 의원과 손혜원 의원의 열린민주당도 변수다. 민주당이 열린민주당을 끌어안느냐 아니냐에 따라 연합정당의 효과도 달라진다. 당 관계자는 “열린민주당이 따로 나올 경우 적지 않은 지지율을 가져가는 것으로 나온다”고 전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명분이냐 실리냐, 산토끼냐 집토끼냐…비례정당 꼼수 앞에 무너지는 민주당

    명분이냐 실리냐, 산토끼냐 집토끼냐…비례정당 꼼수 앞에 무너지는 민주당

    10일 의원총회 열어 비례정당 논의 더불어민주당이 비례연합정당 참여 결정을 놓고 명분과 실리, 산토끼(중도층)와 집토끼(지지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의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자 민주당은 10일 의원총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했다.비례연합정당 논의가 탁상에 오른지 2주가 다 되도록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칫 산토끼와 집토끼 둘 다 잃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다. 산술적으로는 비례정당을 내는 것이 의석 확보에 더 유리해 보이지만, 지역구 의원들 사이에서는 중도층 이탈로 지역구에서 더 큰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중도층 흔들...지역구 15% 통합당과 접전 실제 2016년 치러진 20대 총선에서의 접전 지역을 살펴보면 좌측으로도, 우측으로도 안심할 수 없다. 민주당은 지역구 253석 가운데 110석을 얻었는데, 이 중에서 2등과의 3% 이내 표차로 신승을 거둔 지역은 모두 16군데다. 2등은 모두 새누리당(현 미래통합당)이었다. 민주당이 중도 유권자들에게 통합당 보다 더 낫다는 확신을 주지 못하면 언제든지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지역들이다. 박용진 의원은 이날 반대 입장문을 내고 “명분만큼이나 실리에 대한 판단이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비례연합정당 참여는 중도층의 민주당에 대한 소극적 혹은 비판적 지지를 철회하게 만들 수 있는 나쁜 신호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밝혔다.여기에 정의당이 참여한다면 범진보 연대를 꾀해 볼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어서 진보 성향 유권자들의 표심 이동도 고민의 대상이다. 정의당, 노동당, 녹생당, 민중연합당(현 민중당) 등은 20대 총선에서 102개 지역구에 후보를 내 평균 6.6%의 득표율로 진보 진영의 표를 흡수했다. 정의당은 이번 총선에서도 70곳 가량의 지역구에 진출할 예정이다. 민주당 김영춘 의원은 “비례연합정당은 우리(민주당)가 참여하지 않아도 든든한 우군이 될 것”이라며 “국민을 믿고 현명한 선택을 요청드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비례연합정당에 대한 비판적 여론 때문에 입장 표명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는 숨은 찬성론자들도 많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송영길 의원은 “이 제도의 악용을 막기 위해 선거법 개정안을 주도한 사람들이 비례연합당 만들어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록 해야한다”면서 “미래한국당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긋난 것을 바로 잡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한편 무소속 손혜원 의원과 정봉주 전 의원이 ‘의병’을 자처해 만든 ‘열린민주당’은 손 의원을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선정하고 공천 과정에 들어갔다. 총선 후 민주당과의 합당 가능성에 대해 손 의원은 “우린 (정치권을) 떠날 사람들”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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