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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도, 2023년도 예산안 10조 3381억 편성

    전남도, 2023년도 예산안 10조 3381억 편성

    전남도가 내년도 예산안 규모를 10조 3381억원으로 확정하고, 11일 도의회에 제출했다. 내년 예산안은 올해 본예산 10조 470억원 보다 2911억원(2.9%)이 증가한 10조 3381억원이다. 일반회계는 2300억원(2.5%) 증가한 9조 2883억원, 특별회계는 611억원(6.2%) 증가한 1조 498억원을 편성했다. 최근 대내외 경제 여건과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를 감안해 올해에 이어 2년 연속 지방채 발행없이 편성했다. 글로벌 도정기반 구축을 위한 미래첨단전략 산업 육성과 청년 및 도민행복 시책 확대 등에 중점을 두고 구성했다. 중점 편성방향은 ▲첨단 전략산업 육성 및 글로벌 에너지 대전환 선도(1조 241억원) ▲문화예술자원과 콘텐츠 융복합, 문화 관광 융성시대(4278억원) ▲농수축산업 고부가가치 및 미래생명산업화(1조 9119억원) ▲청년 응원과 따뜻한 행복공동체 전남 실현(3조 3414억원) ▲도민안전과 SOC 르네상스 기반 구축(1조 3623억원) 등이다. 내년도 주요 신규사업으로는 첨단전략산업분야에 이산화탄소의 재활용 기술 실증을 위한 탄소포집활용(CCU)실증지원센터 구축 16억원, 수소도시 조성 및 수전해시스템 성능시험센터 등 수소인프라 구축 25억원, 민선 8기 광주·전남 상생 1호 사업인 반도체산업 생태계 구축 12억원, 이차전지분야 사업화기술지원 및 전문인력양성 15억원을 편성했다. 문화관광분야에 남도의병역사박물관 건립 105억원, 마한문화권 복원 및 발굴 조사지원 15억원, 영상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남도영화제 개최 지원 10억원을 반영했다. 농수축산분야는 도내 친환경 농산물을 활용한 가정간편식(HMR) 연구개발을 위한 실증실용화 지원센터 구축 66억원, 비료가격안정 지원 375억원, 농촌 돌봄마을 조성사업 42억 등이다. 인구·청년·복지분야에는 청년의 주거안정을 위해 청년공공임대주택 건립 110억원, 세대어울림 복합센터 건립 89억원, 청년종합지원공간인 권역별 대규모 청년문화센터 71억원, 염전 근로자 등 필수근로자 주거안정 지원 사업 45억원, 노인 맞춤형 돌봄서비스사업 628억원, 독거어르신 반려로봇 보급사업 22억원을 편성했다. 대규모 지역주도 균형발전사업 추진을 통한 지역경쟁력 강화를 위해 300억원 규모의 전남형 균형발전 300 프로젝트도 추진된다. 안전·SOC 분야에 섬마을 LPG시설 구축 36억원, 농어촌 빈집정비 사업 8억원을 담았다. 중점분야별 주요예산은 우선 세계적 수준의 첨단 전략산업 육성 및 글로벌 에너지 대전환 선도를 위해 1조 241억원을 편성했다. 첨단 전략산업 거점 구축을 위해 바이오헬스 융복합 지식산업센터 구축 40억원, 수소인프라 구축사업 25억원, 반도체 생태계 구축 12억원, 조선업 스마트공장구축 사업 8억원을 반영했다. 경영안정 자금 이자지원 179억원, 지역사랑상품권 105억원을 편성해 중소상공인 지원을 이어갈 예정이다. 기업의 도내 투자유치를 위해 지방투자촉진보조금 142억원, 시설 및 입지보조금 59억원도 편성했다. 이와 함께 문화예술자원과 콘텐츠를 융복합해 문화 관광 융성시대 실현을 위해 4278억원을 편성했다. 2023년 개최되는 국제행사인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186억원, 국제농업박람회 72억원, 국제수묵비엔날레 34억원 등을 반영해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 농수축산업의 고부가가치 및 미래생명산업화를 위해 1조 9119억원을 편성했다. 농어촌 활력증진 및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기본형공익직불제 4725억, 농어민 공익수당 529억원, 청년농업인 영농정착지원 83억원, 여성농업인 행복바우처 지원 53억원 등을 편성하고, 어촌어항 현대화를 위한 어촌뉴딜 300사업은 1028억원을 반영했다. 특히 청년 응원과 따뜻한 행복공동체 전남을 위해 3조 3414억원을 반영했다. 청년마을로 프로젝트 등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 13개 사업 161억원, 청년공공임대주택 110억원, 대규모 청년문화센터 71억원을 편성했다. 연 20만원의 문화활동비를 지원하는 전남청년 문화복지카드사업은 지원대상을 확대해 91억원을 반영했다. 공공산후조리원 40억원, 세대어울림 복합센터 89억원, 필수근로자 주거지원사업 45억원, 농산어촌 유학활성화사업 70억원 등 인구회복 전환점 마련을 위해 사업을 편성했다. 시군 스스로 성장동력을 만들 수 있도록 대규모 지역주도 균형발전사업인 전남형 균형발전 300 프로젝트가 300억원 규모로 추진된다. 이밖에 도민안전과 SOC 르네상스 기반 확충을 위해 1조 3623억원을 편성했다. 동부권 행정수요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동부권 통합청사 건립 95억원, 동부권 감염병 진단센터 건립 40억원 등을 반영했다. 황기연 도 기획조정실장은 “세계로 도약하는 글로벌 도정운영을 위해 인구유입과 청년의 자립·정착 지원, 지역경제 활력화에 마중물이 될 예산을 전략적으로 편성했다”며 “탄소중립, 해상풍력, 바이오, 이차전지 등 전남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미래 전략산업에도 집중 투자했다”고 말했다. 도가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은 제367회 전남도의회 상임 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의를 거쳐 본회의에서 확정될 예정이다.
  • 전남도, 독립운동 미서훈자 발굴 추진

    전남도, 독립운동 미서훈자 발굴 추진

    의향 전남의 독립운동 유공자 가운데 알려지지 않은 미서훈자를 지자체가 직접 찾아 서훈 신청을 추진하는 미서훈자 발굴 사업이 확대 추진된다. 전남도는 광역지자체로는 처음으로 지난해 10월부터 6월까지 1단계 독립유공장 발굴을 위한 용역을 벌여 전남지역 3·1운동 독립 유공 미서훈자 80명을 찾아 서훈 신청을 마친 데 이어 2차로 미서훈자 발굴을 구한말 의병 유공자까지 확대하는 2단계 용역을 추진하기로 했다. 2단계 용역은 2023년 12월까지 1895년 구한말 의병부터 1945년 광복이 된 날까지 모든 기간에 걸쳐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서훈 신청을 추진하는 사업이다. 국가보훈처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구한말 호남의병 미서훈자는 1783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전남 출신이 964명인 것으로 파악됐다. 전남도는 구한말 의병의 선봉지가 전남인 점을 감안, 도내 전지역에 대한 집중 조사와 발굴을 추진할 계획이며 미서훈자는 2024년 1월까지 국가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할 계획이다. 또 일본, 러시아 등 전남 출신의 국외 독립유공자까지 조사 대상을 확대해 각종 문헌과 증거자료 확보에 나서는 한편 독립유공자 가족이나 후손들이 손쉽게 서훈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온라인 접수창구도 운영할 계획이다. 우홍섭 전남도 사회복지과장은 “독립유공자 마지막 한 분까지 찾아내 그 분들의 명예를 하루빨리 회복해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며 “독립유공 미서훈자를 발굴하고 서훈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해 의향 전남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겠다”고 말했다.
  • 의병연합부대 지휘, 성 주둔 적 궤멸시켜… 왜군 상주로 퇴각, 경상좌도 안전 확보[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의병연합부대 지휘, 성 주둔 적 궤멸시켜… 왜군 상주로 퇴각, 경상좌도 안전 확보[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경북 영천은 금호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고을이다. 금호강 둔치에 조성된 영천생태지구공원에서 바라보면 건너편으로 우뚝한 조양루가 그림자를 강물에 드리우고 있다. 조양루의 원래 이름은 명원각이었다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는 바람에 1638년 다시 짓고 이름도 새로 지었다고 한다. 조양루 뒤편의 나지막한 언덕 일대에 조선시대 영천성이 자리잡고 있었다.영천은 동쪽으로 포항, 남쪽으로 경주, 서쪽으로 대구, 북쪽으로 안동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중심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한양으로 향하는 왜군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요충이었다. 하지만 당시 경상좌병사 이각이 울산병영성을 버리고 도주하면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왜군의 제2군은 영천성에 무혈입성했다. 영천성은 왜침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축성작업에 들어가 왜란 바로 전해인 1591년 완성했는데 허무하게 내준 것이다.가토는 2만 2800명에 이르는 자신의 병력 가운데 일부를 영천성에 남겨두고 신령, 의흥, 용궁을 거쳐 조령으로 북상했다. 영천성 주둔 병력을 두고 일본 학계에서는 500명에서 2000명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우리 쪽 기록을 종합하면 1000명 안팎으로 보는 게 무리가 없을 듯하다.영남 성리학의 양대 축은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과 경상우도의 남명 조식이다. 5월 5일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의 격문도 지역의 학문적 배경부터 파고들었다. 김성일은 ‘영남은 본래부터 인재가 많은 고장으로 퇴계·남명 두 선생이 한 시대에 같이 나서 도학을 제창해 사람의 마음을 밝히고 사람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을 자기 책임으로 하자, 선비들도 그 감화에 점점 물들어 본받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또 평소엔 허다한 성현의 책을 읽어 그 얼마나 자신만만한 사람들이었더냐’고 도학의 본향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루아침에 변란을 당하자 오직 살길이나 탐내고 죽음을 회피하는 일만 서둘러,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돌리는 죄악에 스스로 빠져 버리니 구차스러이 세상에 산다 한들 어떻게 머리로 하늘을 이고 살고, 죽어 지하에 가서도 어떻게 선대 현자(賢者)들을 뵈올 것인가’라고 했으니 떨쳐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경상도 선비들을 질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상우도에서는 의령 의병장 곽재우가 일찍이 4월 22일 거병해 5월 18일 기강 전투와 5월 26일 정암진 전투로 왜적의 호남 진공을 틀어막고 있었다. 고령의 김면과 합천의 정인홍도 잇따라 창의해 6월 6일 무계전투를 시작으로 낙동강 서쪽의 왜적에 큰 타격을 가하게 된다. 경상좌도에서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움직임이 일었는데 김성일의 초유 활동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영천 일대에서도 의병 조직이 본격화됐다. 초기에 주목할 의병 활동이 한천 전투다. 5월 6일 의병이 신녕현 한천 대동에서 왜군 13명과 이들과 내통한 관노 희손 일당 등 30명을 소탕한 것이다. 오늘날 신녕은 영천의 일부지만 당시에는 신녕현으로 영천군과 분리되어 있었다. 한천 전투를 주도한 의병장이 권응수다. 전투 소식이 알려지면 주변에서도 창의에 속도를 냈다.백운재(白雲齋) 권응수(權應銖·1546~ 1608년)는 1583년 별시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다. 왜란 발발 당시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 막하의 무관이었다. 박홍은 4월 13일 왜적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동래의 경상좌수영을 불태우고 군선을 가라앉힌 뒤 후퇴했다. 경상좌수영 군사는 산산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권응수도 이때 고향 신녕으로 돌아갔는데 왜란 초기 우리 관군의 상황이 대략 이랬다. 전장에서 왜적과 맞붙어 전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세에 놀라 궤산한 것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관군 패잔병은 이후 고향 땅에서 다시 의병에 가담하게 된다. 권응수는 4월 27일 신녕에서 동생 권응전·권응평·권응생을 비롯해 이온수·우응거 등과 창의했다. 날짜를 보면 고향에 돌아가자마자 거병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듯하다. 권응수는 활을 잘 쏘았고, 특히 일반적인 전투용 화살의 절반 길이인 편전에 능했다고 ‘국조인물고’는 적고 있다. 그런데 영천성 공성전을 보면 권응수는 도끼를 무기로 쓰는데도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권응수는 다양한 병기를 다루면서 기백도 출중한 무인이었다. 한천 전투 직후부터 영천에서는 세아·정대임·정담·조희익 등이 거병했다. 하양의 신해, 의흥의 홍천뢰, 자인의 최문병, 경산의 최대기 등 주변 지역에서도 창의가 잇따랐다. 6월 초순에는 왜란 발발 당시 밀양부사로 이후의 전공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한 박진이 신녕을 찾기도 했다. 동시에 영천성 탈환을 위한 지역 의병의 조직화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영천성 탈환작전은 사실상 의병과 관군의 연합작전이었다. 경상좌병영의 화기(火器) 지원이 있었고, 무엇보다 경주판관 박의장, 영천군수 김윤국, 신녕현감 한척, 하양현감 조윤신의 관군이 참전했다. 본격적인 공성전은 7월 25일 시작됐지만, 영천성으로 이어지는 왜군의 보급선을 끊는 작전이 일찍부터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권응수 의병이 7월 14일 박연에서 왜적을 치고 22일 소계와 사천까지 추격해 격파한 것도 이런 노력의 하나였다.각각 소규모 왜적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던 경상좌도 의병장들은 영천성 공격을 앞둔 7월 24일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이라는 일종의 의병연합부대를 결성한다. 지역 의병이 한데 모인 만큼 자칫 실전에서 작전 능력이 미치지 못하고 지휘체계도 부실할 수 있음을 우려했을 것이다. 창의정용군은 총지휘관 선정을 박진 경상좌병사에 맡겼다. 박진이 ‘의병대장’으로 권응수를 임명한 것은 뛰어난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쌓은 전투 경험에 언제나 앞장서 돌격하는 리더십이 걸출하고, 관군과 의병이라는 두 조직 사이 소통에도 적임이라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공성군은 4000명 남짓이었는데 영천성에 웅크리고 있는 왜적을 공격하기에 결코 충분한 숫자가 아니었다. 권응수는 공성 과정의 이탈이나 소극적 전투자세를 경계했다. ‘두려워하여 말을 어지럽히면 목을 벤다. 적을 보고 다섯 걸음 물러나면 목을 벤다. 직무를 마음대로 하여 장수의 명령을 어기면 목을 벤다. 전투에서 대열을 이탈하면 목을 벤다’는 엄격한 군율을 세웠다. 영천성 탈환작전의 개요는 선조수정실록을 참고한다. 실록은 ‘영천성의 왜적은 안동의 적과 일로(一路)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천의 사민(士民)이 여러 곳에서 일어선 의병과 연결해 공격하고자 박진에게 원조를 요청하자, 박진이 별장인 주부 권응수를 보내어 공격하게 했다. 영천성에 이르니 적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권응수가 군사를 합쳐 포위하고 성문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권응수가 큰 도끼를 가지고 먼저 들어가 적을 찍어 넘기니 여러 군사들이 용감하게 달려들어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했다’고 적었다. 실록은 이어 ‘적병이 패해 관아 창고로 들어가자 관군이 불을 지르니 적이 모두 타서 죽었고, 도망쳐 나온 자도 우리 군사에게 차단되어 거의 모두 죽었으며,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고 머리를 벤 것이 수백 급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영천성을 수복해 아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해 상주로 향했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됐다’고 했다. 실록은 특히 권응수를 두고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은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했다’고 했다. 영천성 탈환작전은 7월 27일 마무리됐다. 왜적으로부터 200필의 말과 900자루의 총통 등을 노획하는 대승리였다. 1000명의 주둔병력 가운데 수십 명이 간신히 달아났을 뿐이니 사실상 적군을 궤멸시킨 것이다. 우리 피해는 전사자 80명에 부상자 230명 남짓이었다. 권응수는 영천성 탈환의 공로로 경상좌병사의 참모장인 우후가 됐다. 이듬해 2월에는 문경 당교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경상좌병사로 승진한다. 이후 정유재란까지 수많은 승리를 거뒀다. 1603년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됐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1607년 공조 판서에 올랐다.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다.
  • 판소리·탈춤·땅재주… 한국 최초 극장에선 ‘봄날 연희’가 펼쳐졌다 [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판소리·탈춤·땅재주… 한국 최초 극장에선 ‘봄날 연희’가 펼쳐졌다 [김별아의 도시 기행문-서울을 걷는 시간]

    1902년 고종이 세운 극장 ‘협률사’전국서 명창·가무 여성 모여들어이인직 신연극 ‘은세계’ 등 공연1908년 ‘원각사’로 개명해 재개관 지금은 새문안교회 화단 표석에그때의 영광·오욕 덩그러니 남아산간벽지 분교에 부부 교사로 부임하는 젊은 부모를 따라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오지로 이주한 어린 남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심심함이었다. 전교생 63명이 전부인 분교는 산꼭대기에 있었고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은 바다에 면한 골짜기의 마을로 줄지어 내려갔다. 교사 관사는 학교 옆 산꼭대기에 있었다. 남매는 아이들이 떠난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며 기나긴 오후를 보냈다. 남매의 부모인 교사들은 자식들이 문화적으로 소외돼 우물 안 개구리로 자라는 것을 두려워했다. 극장도, 미술관도, 서점이나 학원조차 없는 오지에서 그 모두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책, 그중에서도 다양한 내용을 고루 담은 어린이 잡지가 부모가 제공할 수 있는 도시 문화의 대체물이었다.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그리고 만화 잡지 ‘보물섬’까지. 다양한 소재와 신기한 이야기가 글과 그림에 담뿍 담겨 있던 이 잡지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소년소녀들의 문화를 선도한 매체였다. 남매는 겉표지가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잡지를 읽으며 걸신스럽게 바깥세상을 엿봤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잡지에서 기사와 동화 따위의 글을 주로 읽은 누나는 자라나 문학을 업으로 삼았고, 잡지에서 긴 글은 훌훌 뛰어넘고 만화를 탐독하던 동생은 자라나 영화를 전공하게 됐다는 것이다. “뭐 하냐? 충무로 가서 회 무침에 한잔하자!” 누가 불러도 고분고분 나오지 않는 동생이 웬일로 단번에 알겠다고 한다. 종로에 들렀다 충무로에 갈 거니 충무로에서 만나자 했는데 종로로 바로 온단다. 1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광화문 방향으로 가는 길에 서울시 공유 자전거 ‘따릉이’를 타고 온 동생과 만났다. 새문안교회 앞에 있다는 한국 최초의 극장 ‘원각사 터’ 표석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협률사는 원뿔형 지붕에 2층 건물 횡단보도 앞에 서니 맞은편 낯선 건물이 눈을 쏜다. 그게 새문안교회라고 한다. 내 기억 속에 있던 새문안교회와 전혀 다른 모습에 어리떨떨하다. 인터넷 정보를 찾아보니 ‘새 성전’은 2015년 기공해 2019년 준공했다고 한다. 1887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 사택에서 14명의 조선인 신자와 함께 설립된 새문안교회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 벽돌 예배당을 지은 뒤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내 기억 속에 있는 모더니즘 양식의 예배당도 꽤 괜찮았는데, 건축 설계를 맡은 KOMA(건축사 이은석)의 고민도 비슷했는지 교회 안에 기존의 새문안교회에 사용됐던 벽돌과 스테인드글라스 한옥 창문 등을 이용해 ‘역사를 위한 기억 공간’을 조성했다고 한다. 타고난 불신자인 나는 차마 교회 안에 들어가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겉껍데기만 보고 왔는데, 나중에 내용을 찾아보니 새문안교회 자체가 탐방해 볼 만한 하나의 역사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리바리하는 사이 눈 밝은 동생이 새문안교회 앞 보도 화단에 있는 표석을 찾았다.‘협률사·원각사 터: 1902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연희회사 협률사와 1908년 설립된 원각사의 공연장이 있던 곳이다. 1908년 이인직의 신연극 ‘은세계’가 공연됐으며, 1909년에 창극 ‘춘향전’ 등이 공연됐다.’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에서 발행하는 ‘KoCACA 웹진’의 기사에 의하면 협률사는 고종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극장이자 실내 공연장인데, 관영 연회장으로 사용됐던 곳을 1908년 민간인이 불하받아 재개관하면서 이름을 원각사로 바꿨다고 한다. 협률사에는 가무를 하는 여성과 전국에서 모여든 170명의 명창이 소속돼 경륜과 기량에 따라 국록을 받았다. ‘봄날에 펼쳐지는 즐거운 연희’라는 뜻의 ‘소춘대유희’를 상설 공연했는데 판소리와 탈춤, 무동놀이, 땅재주, 궁중무용 등의 전통 연희 다섯 마당으로 펼쳐졌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그게 정설이었다. 한데 근대 공연 공간에 대한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최초’를 다투는 또 다른 장소가 나타났다. ‘인천일보’에 의하면 인천 지역 문화예술계에서는 지속적으로 1895년 개관한 인천 경동의 협률사(協律舍)를 한국 최초의 극장이라고 주장해 왔으며, 이는 그간 한국 최초의 공연장으로 정의되고 있는 서울 정동에서 문을 연 1902년의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이인직이 종로 새문안교회 터에 창설했던 1908년의 원각사보다 13년이나 먼저 개관했다는 것이다(서울의 협률사와 인천의 협률사는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름). 인천 협률사는 1921년 ‘애관’(愛館)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까지도 5관 860석의 ‘애관극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100년이 넘은 극장이라니! 그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설렌다. 조만간 애관극장에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표석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교회가 너무 높고 큰 데다 앞길도 넓어서인지 작은 표석만으로는 당시의 정경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한국문화재재단에 소장된 사진을 통해 옛적 협률사의 모습을 엿보면 원뿔형 지붕에 2층 건물이라 제법 규모 있는 공연장 같다. 이 무대에 이인직의 소설 ‘은세계’를 원작으로 한 신연극이 올랐다.●이인직, 생계형 친일파 아닌 ‘확신범’ ‘옥남이가 손을 높이 들어 “대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국민 동포 만세, 만세, 만세!” 그렇게 만세를 부르는데 의병이라 하는 봉두돌빈의 여러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며 “저놈이 선유사의 심부름으로 내려온 놈인가 보다. 저놈을 잡아가자” 하더니 풍우같이 달려들어서 옥남의 남매를 잡아가는데, 본평 부인은 극락전 부처님 앞에 엎드려서 옥남의 남매를 살게 하여 줍시사, 하는 소리뿐이라.’ 1908년 11월 ‘동문사’에서 출간된 소설 ‘은세계’는 상하권 가운데 상권만이 남아 있는데, 상권의 마지막 대목이 저리 끝난다. 원각사에서 공연된 대본 역시 남아 있지 않으니 어떤 결말이 준비돼 있었는지 예상할 도리도 없다. 하지만 상권의 내러티브상 결말의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은세계’에서 타락한 조선 관리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뒤 착한 미국인 덕분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옥남의 남매를 잡아가는 작자들은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함부로 총질하며 재물을 뺏는 무뢰배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바로 일본에 의한 고종의 퇴위에 맞서 일어난 정미의병들이다. 이인직은 ‘혈의 누’ 등 최초의 신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하지만 이완용의 비서 출신인 공식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지금은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지만 나는 제도 교육과정에서 이인직의 두 얼굴을 배우지 못했다. 이인직은 생계형 친일파도 아니고 일본의 신종교인 천리교를 신앙으로 가질 정도로 뼛속 깊은 확신범이었다. ‘은세계’에도 미개한 조선에 대한 절망과 혐오,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에 대한 동경이 절절하다. 이인직에게 소설은 자기해방의 도구가 아니라 프로파간다였다. 그러하기에 소설보다 더 선동성이 강한 연극으로 만들어 이 자리 원각사에서 공연하며 만방에 주의·주장을 퍼뜨렸다. 한편으로 야릇한 것은 이인직이 품은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혐오는 곧 자기혐오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친일파들은 신념을 넘어 종교로 영혼까지 개조해도 영원히 식민지 출신의 2등 국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인직은 1916년 초겨울 신경병으로 총독부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하던 중 사망했다. 신경병은 신경계통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질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신경증, 정신병을 비롯해 뇌중풍, 신경통, 척수염 따위를 광범하게 포함한다. 친일의 대가로 얻은 부와 권력도 자글자글 끓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치유하지 못했던 게다. 지난날의 흔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표석 주변을 서성이는 마음이 스산하다. 그때의 영광과 오욕, 그리고 욕망과 허무가 그저 검은 돌 하나로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에 누군가 엉두덜대던 말이 떠오른다. 인생은 짧고, 예술도 짧다.((하)에 계속) 소설가
  • 전남도-시군, 관광자원 개발 위해 3960억원 투입

    전남도-시군, 관광자원 개발 위해 3960억원 투입

    전라남도가 관광객 1억명 시대를 위해 관광자원 개발사업과 기반시설 마련에 나섰다. 전남도는 25일 전남여성가족재단에서 시군 관광과장 등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관광자원 개발사업’ 점검회의를 갖고 관광자원 개발의 애로사항을 공유하고 사업 촉진을 위한 공동 노력과 협조 방안 등을 논의했다. 주요 관광자원 개발사업 내용은 ▲관광지 개발 ▲문화관광 자원 개발 ▲생태녹색관광 자원 개발 ▲관광거점도시 육성 ▲계획공모형 지역개발사업 등이다. 전남도와 시군은 올해 142개 사업에 1360억원을 투입하는 등 3년간 325개 사업에 3960억원을 들여 지역 관광자원을 활용한 특색있는 관광콘텐츠를 발굴하고 관광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다. 박용학 전남도 관광과장은 “전남은 해양과 내륙 등 천혜의 자연 관광자원과 마한부터 구한말 의병 정신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역사문화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며 “관광자원 개발사업을 잘 이끌어 국내 관광객 1억 명, 해외 관광객 300만 시대를 앞당기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이토 저격한 오늘… 안중근 의사 의거 113주년 기념식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며 독립 의지를 떨쳤던 의거를 기억하는 ‘안중근 의사 의거 제113주년 기념식’이 26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국민의례, 약전 봉독, ‘의거의 이유’ 낭독, 기념식사, 기념사, ‘안중근 장학금’ 전달식, 기념공연 순으로 진행된다. 박민식 보훈처장, 김황식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다. 개인 3명과 단체 3팀이 안 의사의 애국정신과 동양평화론을 기리는 제19회 ‘안중근 장학금’을 받는다. 안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학교 설립 및 의병 활동을 벌였다. 1909년 하얼빈역에 도착한 조선통감 이토를 저격한 뒤 뤼순감옥에 갇혔다. 심문과 재판을 받으면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비판했고 조선 독립과 동양 평화를 주장하다가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3월 26일 순국했다. 정부는 안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박 처장은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안 의사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혼을 엄숙한 마음으로 되새길 것”이라고 밝혔다.
  • 안중근 의사 의거 113주년 기념식 26일 열린다...‘안중근 장학금’ 전달식도

    안중근 의사 의거 113주년 기념식 26일 열린다...‘안중근 장학금’ 전달식도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며 독립 의지를 떨쳤던 의거를 기억하는 ‘안중근 의사 의거 제113주년 기념식’이 26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국민의례, 약전 봉독, ‘의거의 이유’ 낭독, 기념식사, 기념사, ‘안중근 장학금’ 전달식, 기념공연 순으로 진행된다. 박민식 보훈처장, 김황식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다. 개인 3명과 단체 3팀이 안 의사의 애국정신과 동양평화론을 기리는 제19회 ‘안중근 장학금’을 받는다. 안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학교 설립 및 의병 활동을 벌였다. 1909년 하얼빈역에 도착한 조선통감 이토를 저격한 뒤 뤼순감옥에 갇혔다. 심문과 재판을 받으면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비판했고 조선 독립과 동양 평화를 주장하다가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3월 26일 순국했다. 정부는 안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박 처장은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안 의사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혼을 엄숙한 마음으로 되새길 것”이라고 밝혔다.
  • ‘수군 동원 日본토 역습’ 상소한 기개… 변응정, 횡당촌전투 큰 공적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수군 동원 日본토 역습’ 상소한 기개… 변응정, 횡당촌전투 큰 공적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충남 금산 칠백의총의 종용사(從容祠)에는 임진년(1592년)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사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7월 10일 눈벌전투의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 8월 18일 연곤평전투의 옥천 의병장 조헌과 공주 의승장 영규대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8월 27일 횡당촌전투를 이끈 해남 현감 변응정은 조금 낯설 수도 있겠다. 그는 왜군의 기세가 최고조에 올라 있는 상황에서도 ‘수군을 동원한 일본 본토 역습’을 상소한 기백 있는 젊은 장수였다.● 종용사 방명록 ‘천오백의총 바꿔야’ 필자가 칠백의총을 찾아갔던 날, 누군가 종용사 방명록에 ‘칠백의총이 아니라 천오백의총으로 이름을 바꿔 주세요!’라고 적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연곤평전투 당시 조헌 휘하 칠백의병과 더불어 영규의 의승군이 장렬하게 순절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일 것이다.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600~1000명이었다는 영규의 의승군은 평균해 800명 남짓으로 보곤 한다. ‘천오백’이라는 숫자의 근거가 된다.칠백의사의 시신은 연곤평전투 나흘 뒤인 8월 22일 박정양과 전승업이 거두어 조헌이 군사를 독려한 경양산 어귀에 하나의 봉분으로 모셨다. 1634년에는 금산 군수 김성발과 제원 찰방 조평이 조헌·고경명·변응정은 물론 휘하 막료까지 모두 봉안했으니 칠백의총이라는 이름은 이미 어울리지 않았다. 훗날 사액되며 이름을 종용사로 바꾼 종용당을 이때 세우며 영규대사의 사당도 지었다. 하지만 이제 영규 사당은 찾아볼 수 없다. 칠백의총에 변응정이 향사된 것은 횡당촌전투가 조헌과 영규가 이끈 제2차 금산전투의 연장선 위에 있기 때문이다. 변응정은 당초 조헌과 금산성을 함께 치기로 했지만, 행군에 차질을 빚으면서 뒤늦게 도착했다고 한다. 변응정은 조헌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찌하여 약속을 하고도 기일을 어겨 함께 죽지 못했다는 말인가” 하며 탄식했다는 것이다. 변응정 부대는 금산성의 서남쪽 조종산성에서 왜군과 맞부딪쳤다. 변응정(邊應井·1557~1592)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으로 원양군에 봉해진 무신 변사겸의 증손이다. 1588년(선조 21년) 식년시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당시 나이가 32세였다. 과거 합격자의 인적사항을 담은 방목(榜目)은 한양 거주 변응정의 무과 합격 이전 경력으로 충의위(忠義衛)를 들었다. 왕실 측근을 호위하는 충의위는 공신 자손을 등용한 뒤 별다른 역할을 부여하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면 관직을 부여하곤 했던 특수층이었다. ● 32세 무과에… 왕실 측근 호위 충의위 변응정은 왜침(倭侵)의 기운이 높아진 1589년 비변사가 시행한 불차채용(不次採用)에 추천됐다. 전력이나 서열과 관계없이 왜적 방어에 필요한 인물을 등용하는 제도다. 당시 이름을 올린 사람으로는 이순신, 손인갑, 박진, 정담, 정발 등이 있다. 변응정을 추천한 사람은 당대의 맹장이었지만 충주전투에서 왜군에 무참히 패한 신립이다. 변응정은 충의위 시절부터 무인으로 주목을 끌었기에 바로 전해 무과에 급제한 신출내기임에도 불차채용의 추천 대상에 올랐을 것이다. 그가 급제하자마자 월송만호에 부임한 것도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월송진은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 있던 수군기지였다. 첨사진보다 규모가 작기는 했어도 4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지역 사령관이다.변응정이 왜란 직전 현감으로 부임한 해남은 전라우수영이 자리잡고 있던 고을이다. 당연히 해남은 우수영 소속 관포의 하나였으니 현감은 수령이면서 동시에 수군 지휘관이었다. 그러니 우수영 핵심 고을의 수령이 당시 전라좌수영의 이억기 수군절도사 휘하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싸웠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영의 핵심무장 순천부사 권준이 한때 전라도 관찰사 이광 휘하로 차출됐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박동량(1569~1635)은 일기 ‘기재사초’에 ‘웅치 전투 며칠 전’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변응정이 상소하기를 ‘적이 북으로 함경도, 서쪽으로 평안도에 이르고, 동남쪽 수천리에는 각각 군사를 두어 지키고 있으니, 그 형세가 30만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작고 추악한 왜적이 군대를 30만이나 내보냈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비었을 것이니, 우리가 수군 4만~5만으로 바람을 이용해 돛을 올리면 순식간에 왜적의 땅에 도착할 수 있고, 곧장 근거지를 쳐부수면 나머지는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정에서 그 말을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계략을 채용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당시 일본 전역에서 동원한 병력은 30만명 남짓이었고 이 가운데 16만~17만명을 조선 침략에 내몰았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상식이다. 그러니 일본에도 13만~14만명의 병력은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4만~5만 수군으로 비어 있는 일본 본토 공격’을 주장한 변응정을 철없는 무인으로 대우하는 것은 온당치가 않다. 일본의 병력 상황은 이후에 밝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조선에서 일본 본토에 남은 왜적의 병력이 어떤 규모였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日 본토 공격’ 기히 여겨… 채용 못해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본거지 역습’을 주장한 조선 장수의 존재는 자랑스럽다. 전라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이 병력 현황과 훈련 상태에서 상소를 뒷받침할 만큼 전투에 나설 준비 태세가 잘 갖춰져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군인으로서의 변응정의 정체성도 육군보다는 수군에 가까웠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변응정이 전사한 이후 선조가 전라좌수사를 추증한 데도 이런 배경이 작용했을 것 같다. 횡당촌전투를 두고 연곤평전투에 이어 의리만 앞세운 소수 병력의 무모한 공격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하지만 1596년 4월 6일자 선조실록에는 함흥 판관 신충일의 임진년 당시 행적이 전해진다. ‘신충일은 앞서 강진에 부임했다가 왜란을 당해 변응정과 금산 싸움에 나서면서 사생을 언약했다. 변응정은 신충일의 말만 믿고 먼저 출전해 싸웠다. 적의 형세가 그리 강성하지 못했으니, 신충일이 나아가 구원했다면 변응정이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것인데 구원 요청을 못 들은 체하고 군사를 물렸다’는 내용이다. 횡당촌전투에는 이보와 소행진이 이끈 익산 의병도 참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람과 뜻을 같이한 의병은 400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순절한 날이 횡당촌전투가 있었던 8월 27일이다. 이들의 의로운 죽음은 이치 정상에 세워진 ‘임란순국무명사백의병비’로 기리고 있다. 횡당촌전투에는 최소한 해남, 강진, 익산의 관군 및 의병이 연합해 출전한 것이었다. ‘적이 강성하지 못했다’는 실록의 기록대로라면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변응정이 언제 어디서 순절했는지를 두고는 혼선도 없지 않다. 1594년 4월 3일자 선조실록은 ‘변응정이 몸소 적의 공격을 받으면서 강개한 마음으로 죽기를 맹세하고 싸우다가 웅치 싸움에서 전사했으므로 지금까지도 말하는 자들이 못내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다’는 비변사의 보고내용을 전하고 있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물론 송시열이 지은 변응정의 묘표까지 ‘웅치 전사’로 적었다. 하지만 신석겸(1754~1836)은 ‘선묘증흥지’에서 과거 기록을 조목조목 검토해 ‘7월 웅치가 아닌 8월 금산 전사’가 옳다고 봤다.금산에는 당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제6군에 안코쿠지 에케이가 이끄는 별동대가 합류해 있었다. 안코쿠지(安國寺)의 승려 에케이는 앞서 김해에서 의령을 넘어 전라도를 침공하고자 했지만 곽재우와 김면의 의병에 차례로 막히며 금산까지 북상한 상태였다. 일찌감치 ‘전라감사’를 사칭했던 안코쿠지는 금산에서 ‘대일본 대왕이 정치의 도(道)를 조선에 베풀어 백성들을 구휼하고자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바다와 육지의 길을 막아 도리어 원수가 되려 하는가’로 시작하는 포고문을 내걸고 주민 회유에 나서기도 했다. 왜군은 전라도 초입이었던 금산에 들어서는 과정에서부터 거센 저항에 시달려야 했다. 금산 군수 권종은 6월 22일 불과 200명 남짓한 병력으로 충청도 영동 방면에서 금강을 넘으려는 왜군을 막아서다 순절했다. 조선군은 전주로 향하는 왜적과 싸워 7월 7일 웅치에서 선전했고, 7월 8일 이치에서는 승리를 거뒀다. 이후 조선군은 눈벌전투, 연곤평전투, 횡당촌전투에서 잇따라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고, 결국 왜군은 금산에서 철수했다. 변응정의 횡당촌전투는 왜적으로 하여금 호남을 포기하게 만든 마지막 결정타였다.
  • 신민호 전남도의원 “의향 전남 정체성 확립하는 독립운동사 편찬해야”

    신민호 전남도의원 “의향 전남 정체성 확립하는 독립운동사 편찬해야”

    전남도가 의향 전남의 정체성 확립을 도정 핵심 정책 방향으로 추진하기로 해 결과가 주목된다. 신민호(더불어민주당·순천6) 전남도의원은 18일 제366회 임시회의 도정질문에서 “의향 전남의 정체성 확립을 도정의 핵심 정책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해 김영록 지사로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신 의원은 최근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에서 부여와 고구려 등 우리나라 상고사를 없애려는 중국 동북공정과 일본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정진석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망언(妄言)을 예로 들었다. 그는 “올바른 역사 인식과 정체성 확립이 매우 중요하다”고 전제한 뒤 이를 위해 전남도가 추진 중인 미서훈자 발굴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신 의원은 ‘(가칭)전남독립운동사’ 편찬 필요성을 역설해 김영록 지사로부터 “곧 추진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독립운동의 성지’ 전남의 정체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독립운동팀’의 직제 신설을 주장해 김 지사로부터 “다음 직제 개편 때 반영하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전남교육청과 전남도의 친일 잔재 청산 조례 제정을 대표 발의한 바 있는 신 의원은 친일 잔재 현황 전수조사를 제안해 “내년도 예산에 반영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는 “친일 잔재 자료집을 제작해 교육, 홍보함으로써 그 실상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신 의원이 요구한 전남 출신 국외독립운동가의 현황 파악에 대해서도 전남도는 “미서훈자 발굴 용역에 포함해 추진 중이다”는 답변을 받았다. 신 의원이 주장한 “여수 순천 10·19 사건의 희생자 조사를 위한 전문조사관의 증원 문제, 여순 사건의 전국화와 10월 19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김 지사는 동감을 표시하고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답변했다. 전남교육청 질의에서 “올바른 역사교육 방향은 독립운동 자료 발굴→자료 개발→교사 연수→학생 체험교육의 단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제한 신 의원은 전남교육청의 선도적 역할을 주문했다. 그는 “현재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교사 답사 연수프로그램 ‘남도민주평화길’의 지속적 추진과 더불어 이를 전국 교사의 전남 체험 연수프로그램으로 확대할 것”을 주문했고 김대중 교육감으로부터 확답을 받았다. 특히 신 의원은 “독립운동가 출신 전남 교사들을 전남교육의 사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들의 삶을 교사 연수 및 학생 교육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해 교육감으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의 자유학기제를 이용한 지역 역사유적 답사 프로그램 운영 등을 주장해 긍정적 답변도 이끌어냈다. 신 의원은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전한 동학접주 오윤영, 1908년 고흥의병을 이끈 의병장 신성구, 제2학생독립운동인 무등회 사건의 주역 신균우의 집안 후손으로 평소 역사의식 함양에 앞장서고 있다.
  • 과거 공부보다 ‘위기지학’ 실천…최익현·임병찬 ‘항일의병’ 결의[이동구의 서원 산책]

    과거 공부보다 ‘위기지학’ 실천…최익현·임병찬 ‘항일의병’ 결의[이동구의 서원 산책]

    영암 구림, 나주 금정, 정읍의 원촌은 호남의 3대 양택지로 꼽힌다. 그중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리에 자리잡은 서원이 무성서원이다. 호남정맥(노령산맥)을 바라보며 특이하게도 마을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의 서원들이 대개 백성이 살고 있는 마을을 벗어나 한적하고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를 잡아 유생들로 하여금 학문과 유식을 통해 심신을 수양하도록 했던 것과 사뭇 다르다. 서원의 제향 인물 등 무성서원만의 내력에서 그 원인을 엿볼 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마을 안에 위치하지만 단출한 멋 무성서원은 여느 서원과 달리 단출하다. 서원의 출입문이자 누각인 현가루(絃歌樓)와 강학기능의 명륜당(明倫堂), 제향자의 신위가 모셔진 태산사(泰山祠)가 전부다.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조차 없고 서원담장 밖에 강수재(講修齋)라는 작은 건물 한 채뿐이다. 가장 기본적인 건축물로만 이루어져 파격적이다 못해 고즈넉한 분위기가 서원을 압도한다. 건물 수를 늘리는 건축행위를 자제함으로써 검소하고 청빈으로 대변되는 선비 정신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현가루의 좌우에는 서원과 이 지역에 공적을 남긴 이들을 칭송하는 비석과 비각이 줄지어 있다. 안성렬(64) 무성서원 별유사는 “서원이 위압적이거나 요란스럽지 않고 단순해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줄 정도로 평안하다”면서 “마을 안에 위치한 데다 편안한 분위기로 사람 중심의 서원이라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호남의 수원… 세계문화유산 등재 무성서원의 사당인 태산사는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해 신잠(申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 김관(金灌) 등 7위를 제향하고 있다. 우리나라 유학사상 최초의 도통(道通)으로 추앙받는 최치원은 통일신라 정강왕 때 태산(지금의 태인) 군수로 부임해 이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상춘곡의 저자 정극인은 이곳에서 고현동 향약을 창시했고, 신잠은 태인현감으로 부임해 4개의 학당을 세우는 등 모두가 이 일대의 학문 발전과 선정을 이끌었던 인물들이다. 무성서원이 마을 한가운데에 입지하면서도 품격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을 선정으로 다스렸던 관리를 향사하고 주민과 한데 어우러지면서 지역문화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라 평가되고 있다. 숙종 22년인 1696년에는 무성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으나 현판의 저자는 지금껏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무성서원은 전라우도의 수원(首院)으로 필암서원, 포충사와 함께 훼철을 면해 호남의 대표 서원으로 남았다. 서원에 아로새겨진 ‘사림수선’(士林首善)이란 문구가 무성서원의 위상을 대변해 준다.무성서원은 호남지역의 성리학에 깊이를 더했을 뿐 아니라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이 됐다. 1906년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의병(丙午倡義)을 일으키기로 결의한 곳도 바로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의 강회(講會)와 유림 동원력, 대표성을 기반으로 가능했던 의거로, 이 서원의 정신사적 위상을 가늠케 한다. 취재에 동행한 신시섭 한국의서원통합관리 본부장은 “담백하고 강직한 선비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는 곳으로 평가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도 큰 이견이 없었다”고 했다. ●춘추향사, 황토가 뿌려진 신도 무성서원의 춘추향사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거행된다. 향사 이틀 전에 서원에 모여 집사를 정하는 분방의식을 행한다. 향사에 필요한 제물을 현가루부터 사당까지 중앙의 문을 통과해 운반하는데 이 길을 신도(神道)라고 한다. 다른 서원과 달리 이 신도 양쪽으로 드문드문 황토를 깔아 놓는다. 황토를 깐 안쪽이 신도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제물에 부정한 일과 악귀가 침입하는 것을 막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기자가 찾은 날은 추계향사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서원 마당에는 뿌려진 황토가 여전히 제 빛을 잃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특이하게도 향사 때에 제수 목록에 소금(형염·刑鹽)이 포함된 것도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관행이라고 한다. 서원에 모셔진 인물에게 향을 올리고 예를 갖추는 것은 ‘봉심’(奉審)이라고 한다. 무성서원에 봉심한 사람들의 방명록인 무성서원 심원록(尋院錄)에는 1858년부터 1879년에 이르기까지 약 20년 동안의 봉심객 이름과 사는 곳, 방문 날짜등이 소상히 자필로 기록돼 있다.●학문 강의로 도를 밝히는 강습례 서원은 설립 초기부터 개개인의 인격적 완성을 공부의 일차 목표로 삼았다. 관학이 과거 공부에 얽매여 있는 것을 비판하며 오직 학문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장소로 서원이 설립된 것이다. 무성서원 또한 원규에서 이 같은 원칙을 고수했다. “성현의 글이나 성리의 학설이 아니면 서원 안에서 읽을 수 없다. 역사책은 반입을 허락하되 만약 과거 공부를 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다른 곳에서 하도록 한다”고 명문화했다. 무성서원에서 발간된 ‘무성서원지’에는 강습례(講習禮)라는 독특한 성격의 강회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강회를 준비하는 과정과 참석자들의 위치, 몸가짐을 비롯해 유생들의 앉고 서는 위치까지 그림에 담았다. 1873년(고종 10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한 강습례는 ‘학문 강의로 도를 밝히는’ 서원의 본질적인 기능을 모범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서원철폐령 이후 서원에 대한 재정 지원 등이 끊기면서 강습례는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사람을 주빈으로 모시는 향음주례(鄕飮酒禮)로 대체되기도 했다. 유학자들은 향음주례를 통해서도 화목한 사회가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훼손된 경관 회복은 숙원 무성서원에서는 요즘도 정가수업(향음주례 때 사용됐던 시조 등 선비들의 음악)을 비롯해 붓글씨 수업과 인문학 강의 등이 열리고 있다. 이 지역 유림과 향토 학자들, 그리고 성리학 등 한학에 관심이 많은 주민 30여명이 매주 1차례 이상 모여 토론과 강의를 이어 간다. 선비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가족단위 방문객과 학생 및 청소년들의 방문도 이어진다. 무성서원은 자치단체와 함께 서원 인근에 현대식 수련원 건설을 추진 중이다. 물론 지역민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지금까지는 문화재청의 재정 지원으로 서원주변 경관정비 사업도 꾸준히 진행해 왔다. 자치단체로부터는 춘추 향사비 등 각종 행사비도 지원받고 있으나 충분하지는 않다. 더욱이 내년부터는 일부 재정 지원이 끊길 위기에 있어 걱정이다.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과 달리 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입구가 좁고 시야가 막혀 있는 게 아쉽다. 게다가 서원 앞에는 민가 2~3채가 자리하고 있어 탁 트인 경관 확보가 어렵다. 서원의 누각인 현가루의 진가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재정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서원의 운영과 관리를 총괄하고 있는 안 별유사는 “서원이 머물면서 선현의 학덕을 체험하고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본연의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꾸준한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 “조선은 썩어 망했다”? “옹호하다 지나친 궤변”…정치의 역사 편집, 문제 [클로저]

    “조선은 썩어 망했다”? “옹호하다 지나친 궤변”…정치의 역사 편집, 문제 [클로저]

    논쟁거리 된 정진석 위원장 글정 위원장, 해명 이어가고 있지만여야 비판 지속…“역사의 감정화, 좋지 않아”과거부터 지속된 역사 기반 정쟁화“내부 문제 많은 것과 식민지 된 것, 다른 문제”“정치권에서 역사를 독점해 풀어가는 과정 자체가 유쾌하지 않습니다. 어떤 해석은 맞고 어떤 해석은 틀렸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역사학자 심용환, 12일 서울신문 인터뷰)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글 하나가 여야간의 ‘식민사관’ 논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정 위원장은 전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고 적어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와 관련, 기자들의 질문에 “식민사관이 아니라 사실이다. 공부 좀 하라”고 하거나, 거듭 페이스북을 통해 글을 올리며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한 적이 없다고 썼다. 전쟁 한번 못하고, 힘도 못써보고 나라를 빼앗겼다는 얘기다”, “어느 국가가 자멸하지 아니하고 타국의 침략을 받았는가(만해 한용운, 반성)” 등의 글을 잇따라 다시 올리며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진의 드러내고자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날 올렸던 그의 글은 이미 논란을 재생산하며 여야의 정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여권에서도 “사퇴하라”(유승민 국민의힘 전 의원), “전형적인 가해자 논리”(김웅 국힘 의원) 등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야권은 “굴종적 친일노선에 대한 우려를 끊을 수 없다”(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믿기지 않는 발언”(이재명 민주당 대표)라는 등 잇따라 비판하고 있습니다. ● 일본, 조선왕조와 전쟁한 적 없나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 “조선 왕조는 무능하고 무지했다. 백성의 고혈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다가 망했다. 일본은 국운을 걸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했고, 쓰러져가는 조선 왕조를 집어삼켰다. 조선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다. 구한말의 사정은 그러했다.” 논란을 일으킨 글의 일부입니다. 정 위원장은 해명을 이어가고 있지만, 단정적으로 일본과 조선왕조가 전쟁을 한 적이 없다고 발언한 부분은, 인용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지 127년인 지난 8일 이후 3일 만에 이 같은 글을 올린 점은 더 모호합니다. 그러나 그의 글 전부가 틀렸다고 하기에는, 실제 당시의 조선이 주변국으로부터 잦은 침탈을 받을 만큼 약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 “정치권의 역사 논쟁, 태도 자체가 문제” 이와 관련,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장은 이날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정치권이 역사 이슈를 독점해 풀어가는 과정 자체가 유쾌하지 않다”며 “‘어떤 해석이 맞고, 어떤 것은 틀렸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것은 식민사관’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맞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심 소장은 “정치권이 역사라는 장르를 독점해 해석하는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심 소장은 논란이 된 글에 대해 “정 위원장 글에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일견 타당한 얘기도 했다”며 “세도정치 시기,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이 심했던 사실 등은 맞다. 자중지란의 요소 가운데서 조선이 일본이나 중국보다 국력이 약해 식민지로 전락한 사실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침탈이 없었던 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이 멸망하고 식민화가 된다는 것은 어쨌든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컸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청나라도 원래는 사대국가였지만 식민화를 시도했다. 러시아도 그랬다”며 “그러나 우리나라랑 식민화하려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킨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조선을 식민화시킨 게 결정적인 사건이다.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과 우리나라가 식민화가 됐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보면, 한미일 군사훈련을 옹호하는 점에서 정 위원장이 지나친 궤변을 만든 것이다”라고 강조합니다. ● 춘원 이광수 논리와 유사현대판 변용일뿐 춘원 이광수는 대표적인 ‘변절 친일파’로 꼽힙니다.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으나, 다른 길을 걷기로 한 그는 민족개조론을 발표합니다. 독립투쟁보다 민족이 독립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먼저라는 내용입니다. 이와 관련, 심 소장은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하는 지점에서 보면, 정 위원장의 글은 이광수의 논리랑 비슷한 것이다”라며 “이광수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독립운동의 의지를 포기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그 때 민족개조론을 발표한다. 독립투쟁의 의미를 폄하하고 민족이 개조될 때까지 독립을 미루자는 논리다. 그의 글이 오늘날 변용된 것이다. 이광수는 이로써 단순히 자치를 주장한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인 친일파가 된 것이다”라고 지적합니다. 심 소장은 “이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정 위원장의 주장이 일견 타당하더라도 그 같은 주장이 국가와 민족을 발전시키는데 오염·타락·남용된 사례로 활용된 것은 이광수의 사례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공인이자 국가를 대표하는 분이 그 같은 말을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 일본군이 조선 의병 진압했는데日, 누구랑 싸운 건가?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호남 일대의 의병들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이 지역 항일의병대를 소탕하기 위해 한국에 일본군을 파병합니다. 의병운동으로 가장 유명한 동학농민운동도 일본군이 진압했습니다. 자, 일본군은 누구랑 싸운 걸까요. 심 소장은 “조선왕조와 싸운 적이 없다는 말은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라며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관군도 진압에 나섰으나, 일본군이 주역이었다. 이 외 의병도 일본군이 진압했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호남 지역 의병을 들며 “강력할 역할을 했는데, 이들을 일본군이 잔혹하게 죽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 일본군은 당시 탄압 과정에서 의병들을 잔혹하게 죽인 사진을 배포하고, 공포를 유발했습니다. 이 같은 탄압 탓에 조선 의병들은 연해주 등지로 이전해 국내진공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심 소장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 한국과 조선이 싸운 적이 없다는 말은 우리 민족사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행동이라 문제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 역사를 잊은 민족, 미래는 없지만이제 역사를 새롭게 바라봐야 할 때 심 소장은 “역사학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며 “과거에는 민주화 운동의 수단으로 역사가 활용된 적이 있다. 바뀐 시대에서는 역사를 미래로 나아가는 창조적 도구로 써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과거 한국의 역사를 톺아보면, 역사의 일부 사실을 활용해 정쟁의 도구로 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심 소장은 “박근혜 정권 당시 친일 미화와 반일 논쟁이 있었던 것과 현재가 뭐가 다른가”라며 “이 외에도 반중 갈등도 있다. 이 같은 역사의 감정화, 진영화는 무리가 있다. 민주당의 비판은 공감하나 정쟁의 수단으로 역사를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논쟁은 빨리 끝나는 게 좋다”고 당부했습니다. 이번 논쟁이 일어났던 원인으로 돌아가봅시다. 정 위원장의 글은 한미일 군사훈련 관련한 야권의 비판에 대응하며 나온 글입니다. 심 소장은 “비판받을 부분은 비판받아야 한다”며 “결정적인 문제는 남북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경제력, 국력을 보면 미국과의 관계는 중요하지만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이 실효성이 있는지, 정치쇼인지 봐야 한다. 역사를 감정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 영규, 휴정 승군 통솔 이전에 공주서 봉기… 청주성 탈환 일등공신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영규, 휴정 승군 통솔 이전에 공주서 봉기… 청주성 탈환 일등공신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영규, 전국 의승 기치 높이 든 기폭제왜군 “승산 없다” 판단 청주서 퇴각청주 앞서 1·2차 금산성전투에 참여 휴정 제자 영규는 동명이인설도당상관 제수 했으나 금산서 전사조선왕조, 전사 영규 유교식 예우무덤 만들고 진영 모시고 제사도임진왜란의 의승장(義僧將)이라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휴정이 조선 승군을 통솔하기 이전에 공주 의승장 영규가 있었다. 영규대사의 봉기는 전국의 의승이 잇따라 기치를 높이 드는 기폭제가 됐다. 낫으로 무장한 영규의 승군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근접전의 전력을 당대 최강으로 끌어올린 왜군을 압도하는 전투력을 과시했다. 왜군이 청주성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영규의 승군과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산대사 휴정의 문하로 20년 공부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1592)의 흔적이 가장 진하게 남아 있는 고장은 당연히 고향인 충남 공주다. 공주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는 계룡산 자락과 함께 남쪽으로 달리는데 갑사 초입에 계룡면 소재지가 있다. 영규대사를 기리는 한 칸짜리 작은 여각(閭閣)은 계룡면행정복지센터 마당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고 보니 행정복지센터 앞길의 이름도 ‘영규대사로(路)’다. 이 길을 따라 논산 방향으로 조금 더 달리면 영규대사 묘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런데 ‘스님의 무덤’이라니 좀 생소하다. 고승이 입적하면 화장해 부도에 모시는 것이 불교의 전통이다. 무덤 아래 그의 진영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영정각도 보인다. 조선왕조는 금산성싸움에서 전사한 영규대사를 불교식이 아닌 유교식으로 예우한 것이다. 속성(俗姓)이 밀양 박씨로 알려진 영규는 계룡산 널티(板峙)에서 태어났다. 갑사로 출가하고, 휴정 문하에서 공부를 마치고는 처음 머리를 깎은 갑사 청련암으로 돌아가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회양 표훈사 청허당 휴정대사비’에는 대사의 제자로 영규라는 이름이 있지만, 두 사람이 꼭 사제 관계였는지는 그다지 분명치 않다는 느낌도 든다. 갑사에 전하는 ‘임진의병승장복국우세 기허당대선사일합영규사실기’(事實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영규는 성품이 침착하고 강직했으며, 말수가 적고 용력이 뛰어나며 공부의 진척 속도가 빨랐다. 경전과 그 밖의 책을 20년 남짓 공부하고 나자 휴정은 영규에게 이제 고향인 호서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는 것이다.갑사로 돌아온 영규는 스스로 불목하니가 돼 장작을 패고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절에서 가장 위계가 낮은 불목하니는 영규의 이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각종 전승에는 영규가 장작을 다루며 무기로 만들어 무예를 익히는 모습을 부각시킨다. 금산 보석사에 1840년(헌종 6)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건립을 주도한 당시 영의정 조인영도 비석 뒤편 ‘영규대사순의비명병서’에 ‘영규는 본래 신통한 힘이 있어 선승들이 쓰는 지팡이로 무예를 연마했다’고 적었다. ‘사실기’에는 갑사 대중이 “왜 불목하니 역할을 하느냐”고 묻자 영규는 “다른 사람이 반나절 걸리는 일을 나는 단번에 해낼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내가 번거롭더라도 잠깐 동안 열 군데 불을 때면 되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쓰겠는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곧바로 ‘휴정의 제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명단에는 영규(靈圭)라는 이름을 가진 승려가 둘이다. 당대 의승군으로 활약한 동명이인의 존재를 보여 주는 게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우리가 영규에 주목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의 법맥(法脈) 때문이 아니다. ● 영규 천체 움직임에서 국난 조짐 읽어 조선 후기 문인 연경재 성해응(1760 ~1839)은 ‘금산순절제신전’(錦山殉節諸臣傳)에 영규의 봉기 과정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서술했다. 영규는 천체의 움직임에서 국난의 조짐을 읽었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불가의 계율에도 국가에 은혜를 갚고자 나무로 무기를 만들고 낫 수천 개를 주조했으며 오백 남짓한 용맹한 승려를 모아 때를 기다렸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왜적이 침입했는데 승려들이 흩어지려 하자 의(義)를 일으켜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3일 낮밤을 통곡하니 감동한 승려 1000명 남짓이 죽기를 각오하고 갑사에서 봉기했다는 것이다. 하이라이트는 임진년 8월 1일의 청주성 전투다. 선조수정실록은 ‘영규는 사람됨이 장건하고 키가 보통 사람의 갑절이나 됐으며 지략과 계책이 있고 많은 무리를 잘 부렸다. 청주 전투도 실로 영규가 지휘하고 계획한 것이었다. 조헌이 금산전투를 굳이 고집하면서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자 틀림없이 패하리라는 것을 알고도 권율에게 서면으로 보고하고 군사를 합쳐 진군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열(義烈)로 세상에 일컬어졌으니, 불교가 있은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고 했다. 청주성 탈환의 일등 공신으로 영규를 꼽은 것이다. 영규와 승군의 청주성전투 과정은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의 문집인 ‘문소만록’(聞韶漫錄)에 비교적 자세히 담겨 있다. 훗날 윤국형으로 이름을 바꾸는 윤선각은 의병 활동을 방해한다며 조헌이 불만스러워했던 인물이다. ‘문소만록’의 영규 관련 서술도 고위 인사의 냉정한 시각으로 한껏 내려다보는 분위기지만 평가만큼은 정밀하다는 인상이다. 윤선각이 만난 영규의 인상은 이랬다. ‘매우 건장하기는 하나 별다른 지혜나 꾀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녹록한 사람에 비할 바는 아니어서 한 방면을 방어하게 할 만은 했다. 내가 “만일 그대에게 승군 약간 명을 준다면 그대는 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치겠소?” 했더니, 그는 기꺼이 승낙했다. 이에 내포의 승군 수천 명을 뽑아서 그에게 거느리게 하고, 승병패두(僧兵牌頭)라 불렀다.’ 윤선각은 ‘영규는 글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의 성명 정도만 조금 분별했다’고도 적었다. 윤선각은 ‘영규는 청주성전투로 안팎에서 명성이 났다’고 했다. ‘청주 전투 이후 승병이 곳곳에서 계속 일어났으니, 실로 영규가 불러일으킨 것’이라는 것이다. 조정에 올린 장계에는 ‘영규가 저희 무리를 많이 모았는데, 모두 낫을 가졌고 기율이 매우 엄해 적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투 과정의 일화도 흥미롭다. ‘영규는 청주에서 적을 칠 적에 관군 수령들이 혹 물러서면 짚고 있던 큰 몽둥이로 등을 치면서 “평일에는 고기를 먹으며 잘 지내더니, 이제 와서는 도망갈 생각밖에 없느냐?” 하니 감히 뒤처지는 수령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적 침입하자 “義 일으켜야” 봉기 선조실록은 “충청도는 적의 요새가 되는 곳이다. 그런데 적이 청주를 차지한 지 벌써 넉 달이 넘었다. 중 영규가 의(義)를 분발해 성 밑으로 진격했는데 제일 먼저 돌입해 마침내 청주성을 공략했다. 그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그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000명의 중들이 돌진하자 다른 군사들도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는 비변사의 보고 내용을 옮기고 있다. 영규의 의승군은 청주성전투에 앞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순국한 제1차 금산성전투에도 참여한 듯하다. 고경명의 종사관 유팽로가 남긴 ‘월파집’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해가 질 무렵 성문을 두드리며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그가 급하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전일 말씀하신 영규상인(靈圭上人)이 승도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공(고경명)은 즉시 나가서 맞아들여 인사를 나눈 다음 장수들에게 말했다. “영규가 왔으니 이는 반드시 하늘의 도움이다.”’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 고경명 진영의 불제자 영규에 대한 예우가 깎듯하기만 하다. 제2차 금산성전투의 경과는 ‘문소만록’을 참고한다. 조헌에 대한 윤선각의 시선이 차갑다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영규는 “전라도 순찰사가 군사 수만 명으로 진격하려 하면서 나에게 선봉이 돼 주기를 청했으나 시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경솔히 나갈 수는 없다”며 조헌에게 순찰사와 날짜를 약속하도록 권했다. 그런데 답장이 오기도 전에 조헌은 적을 속히 쳐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금산으로 들어가니 영규도 마지못해 따랐다. 부하들이 “반드시 패할 것이니 가지 마소서” 했으나, 영규는 “가부를 의논할 때는 말을 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먼저 갔는데 따르지 않는다면 누가 구원하겠느냐?”고 했다.’ 당시 금산성의 왜군은 1만명을 헤아린 반면 조선군은 조헌 의병이 700명 남짓, 영규 의승군도 600~1000명 수준에 그쳤다. ‘문소만록’의 영규 관련 서술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청주의 적을 몰아냈다는 보고가 의주에 이르자, 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영규에게 당상관을 제수하고 옷감까지 보냈다. 하지만 영규는 이미 금산에서 죽어 받지 못했다.’
  • 낫을 든 의승군에 왜군 야반도주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낫을 든 의승군에 왜군 야반도주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의 의승장(義僧將)이라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휴정이 조선 승군을 통솔하기 이전에 공주 의승장 영규의 봉기가 있었다. 영규대사의 활약은 전국의 의승이 잇따라 기치를 올리는 기폭제가 됐다. 낫으로 무장한 영규의 승군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근접전에서 당대 최강이었던 왜군을 압도하는 전투력을 과시했다. 왜군이 청주성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영규의 승군과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1592)의 흔적이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고장은 당연히 고향인 충청남도 공주다. 공주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는 계룡산 자락과 함께 남쪽으로 달리는데 갑사 초입에 계룡면 소재지가 있다. 영규대사를 기리는 한칸짜리 작은 여각(閭閣)은 계룡면행정복지센터 마당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고 보니 행정복지센터 앞길의 이름도 ‘영규대사로(路)’다. 이 길을 따라 논산 방향으로 조금 더 달리면 영규대사 묘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런데 ‘스님의 무덤’이라니 좀 생소하다. 고승이 입적하면 화장해 부도에 모시는 것이 불교의 전통이다. 무덤 아래 그의 진영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영정각도 보인다. 조선왕조는 금산성싸움에서 전사한 영규대사를 불교식이 아닌 유교식으로 예우한 것이다.  속성(俗姓)이 밀양 박씨로 알려진 영규는 계룡산 널티(板峙)에서 태어났다. 갑사로 출가하고, 휴정 문하에서 공부를 마치고는 처음 머리를 깎은 갑사 청련암으로 돌아가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회양 표훈사 청허당 휴정대사비’에는 대사의 제자로 영규라는 이름이 있지만, 두 사람이 꼭 사제관계였는지는 그다지 분명치 않다는 느낌도 든다.  갑사에 전하는 ‘임진의병승장복국우세 기허당대선사일합영규사실기’(事實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영규는 성품이 침착하고 강직했으며, 말수가 적고 용력이 뛰어나며 공부의 진척 속도가 빨랐다. 경전과 그 밖의 책을 20년 남짓 공부하고 나자 휴정은 영규에게 이제 고향인 호서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갑사로 돌아온 영규는 스스로 불목하니가 되어 장작을 패고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절에서 가장 위계가 낮은 불목하니는 영규의 이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선지 각종 전승에는 영규가 장작을 다루며 무기로 만들어 무예를 익히는 모습을 부각시킨다. 금산 보석사에 1840년(헌종 6)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건립을 주도한 당시 영의정 조인영도 비석 뒷편 ‘영규대사순의비명병서’에 ‘영규는 본래 신통한 힘이 있어 선승들이 쓰는 지팡이로 무예를 연마했다’고 적었다.  ‘사실기’에는 갑사 대중이 “왜 불목하니 역할을 하느냐”고 묻자 영규는 “다른 사람이 반나절 걸리는 일을 나는 단번에 해낼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내가 번거롭더라도 잠깐동안 열 군데 불을 때면 되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쓰겠는가”고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곧바로 ‘휴정의 제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명단에는 영규(靈圭)라는 이름을 가진 승려가 둘이다. 당대 의승군으로 활약한 동명이인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우리가 영규에 주목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의 법맥(法脈) 때문이 아니다. 조선 후기 문인 연경재 성해응(1760~1839)은 ‘금산순절제신전’(錦山殉節諸臣傳)에 영규의 봉기 과정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서술했다. 영규는 천체의 움직임에서 국난의 조짐을 읽었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불가의 계율에도 국가의 은혜를 갚고자 나무로 무기를 만들고 낫 수천개를 주조했으며 오백 남짓한 용맹한 승려를 모아 때를 기다렸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왜적이 침입했는데 승려들이 흩어지려하자 의(義)를 일으켜야한다고 호소하면서 3일 낮밤을 통곡하니 감동한 승려 1000명 남짓이 죽기를 각오하고 갑사에서 봉기했다는 것이다.  하이라이트는 임진년 8월 1일의 청주성 전투다. 선조수정실록은 ‘영규는 사람됨이 장건하고 키가 보통 사람의 갑절이나 되었으며 지략과 계책이 있고 많은 무리를 잘 부렸다. 청주 전투도 실로 영규가 지휘하고 계획한 것이었다. 조헌이 금산전투를 굳이 고집하면서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자 틀림없이 패하리라는 것을 알고도 권율에게 서면으로 보고하고 군사를 합쳐 진군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열(義烈)로 세상에 일컬어졌으니, 불교가 있은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고 했다. 청주성 함락의 일등공신으로 영규를 꼽은 것이다. 영규와 승군의 청주성전투 과정은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의 문집인 ‘문소만록’(聞韶漫錄)에 비교적 자세히 담겨있다. 훗날 윤국형으로 이름을 바꾸는 윤선각은 의병활동을 방해한다며 조헌이 불만스러워했던 인물이다. ‘문소만록’의 영규 관련 서술도 고위인사의 냉정한 시각으로 한껏 내려다보는 분위기지만 평가만큼은 정밀하다는 인상이다.  윤선각이 만난 영규의 인상은 이랬다. ‘매우 건장하기는 하나 별다른 지혜나 꾀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녹록한 사람에 비할 바는 아니어서 한 방면을 방어하게 할 만은 했다. 내가 “만일 그대에게 승군 약간 명을 준다면 그대는 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치겠소?”했더니, 그는 기꺼이 승낙했다. 이에 내포의 승군 수천 명을 뽑아서 그에게 거느리게 하고, 승병패두(僧兵牌頭)라 불렀다. 윤선각은 ‘영규는 글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의 성명 정도만 조금 분별했다’고도 적었다.  윤선각은 ‘영규는 청주성전투로 안팎에서 명성이 났다’고 했다. ‘청주 전투 이후 승병이 곳곳에서 계속 일어났으니, 실로 영규가 불러 일으킨 것’이라는 것이다. 조정에 올린 장계에는 ‘영규가 저희 무리를 많이 모았는데, 모두 낫을 가졌고 기율이 매우 엄해 적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투 과정의 일화도 흥미롭다. ‘영규는 청주에서 적을 칠 적에 관군 수령들이 혹 물러서면 짚고 있던 큰 몽둥이로 등을 치면서 “평일에는 고기를 먹으며 잘 지내더니, 이제 와서는 도망갈 생각밖에 없느냐?”하니 감히 뒤처지는 수령이 없었다’는 것이다.  선조실록은 “충청도는 적의 요새가 되는 곳이다. 그런데 적이 청주를 차지한 지 벌써 넉달이 넘었다. 중 영규가 의(義)를 분발해 성 밑으로 진격했는데 제일 먼저 돌입해 마침내 청주성을 공략했다. 그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그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000명의 중들이 돌진하자 다른 군사들도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는 비변사의 보고 내용을 옮기고 있다. 영규의 의승군은 청주성전투에 앞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순국한 제1차 금산성전투에도 참여한 듯 하다. 고경명의 종사관 유팽로가 남긴 ‘월파집’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해가 질 무렵 성문을 두들리며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그가 급하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전일 말씀하신 영규상인(靈圭上人)이 승도 수백명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공(고경명)은 즉시 나가서 맞아들여 인사를 나눈 다음 장수들에게 말했다. “영규가 왔으니 이는 반드시 하늘의 도움이다”’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 고경명 진영의 불제자 영규에 대한 예우가 깎듯하기만 하다.  제2차 금산성전투의 경과는 ‘문소만록’을 참고한다. 조헌에 대한 윤선각의 시선이 차갑다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영규는 “전라도 순찰사가 군사 수만 명으로 진격하려 하면서 나에게 선봉이 되어 주기를 청했으나 시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경솔히 나갈 수는 없다.”며 조헌에게 순찰사와 날짜를 약속하도록 권했다. 그런데 답장이 오기도 전에 조헌은 적을 속히 쳐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금산으로 들어가니 영규도 마지못해 따랐다. 부하들이 “반드시 패할 것이니 가지 마소서”했으나, 영규는 “가부를 의논할 때는 말을 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먼저 갔는데 따르지 않는다면 누가 구원하겠느냐?”고 했다. 당시 금산성의 왜군은 1만명을 헤아린 반면 조선군은 조헌 의병이 700명 남짓, 영규 의승군도 600~1000명 수준에 그쳤다.  ‘문소만록’의 영규 관련 서술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청주의 적을 몰아냈다는 보고가 의주에 이르자, 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영규에게 당상관을 제수하고 옷감까지 보냈다. 하지만 영규는 이미 금산에서 죽어 받지 못했다’    
  • 이재명 “한미일 합동훈련, 친일” vs 국힘 “죽창가 시즌2”

    이재명 “한미일 합동훈련, 친일” vs 국힘 “죽창가 시즌2”

    국민의힘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동해상에서 실시한 한·미·일 합동훈련을 두고 ‘극단적 친일행위’라고 비판한 것에 대해 “이 대표의 반일선동은 ‘죽창가 시즌2’”라고 8일 맞받았다. 박정하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북한의 거듭되는 무력도발을 막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한·미·일 연합훈련을 민주당과 이 대표는 ‘극단적 친일행위’라고 말하고 있다”며 이 같이 반박했다. ‘죽창가’는 동학농민혁명 및 항일 의병을 소재로 한 노래다.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양국 갈등이 고조됐을 때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이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박 대변인은 “이 대표의 주장은 연일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본인의 ‘불법리스크’를 감추기 위한 물타기”라며 “없던 외교 실패를 만들고, 때마다 반일선동을 해도 이 대표의 어떤 의혹도 덮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 도발로부터 한반도 평화를 유일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은 한·미·일 세 나라의 굳건한 공조임은 자명하다”며 “‘문재인 정권의 북한바라기’가 결국 탄도미사일과 굴욕스러운 말폭탄만 남긴 걸 똑똑히 보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민주당의 선동에 더는 속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국회 국방위원회 국민의힘 간사인 신원식 의원도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하다 하다 이젠 국군의 훈련을 ‘극단적 친일행위’로 매도하고 우리 국군을 ‘친일국방’으로 모독하나”라고 비판했다. 그는 “한미일 연합훈련은 문재인 정부 때도 했고, 동해 대잠훈련은 문재인 정부도 한미일 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더 강화하기로 합의한 것”이라고 했다. 신 의원은 합동참모본부 차장 출신이다.신 의원은 “제1당 대표의 국가관과 안보관을 의심케 하는 안보 자해의 내로남불 짙은 천박한 ‘죽창가’”라며 “한일 해상훈련을 승인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친일 대통령으로 매도한 자가당착”이라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전날 민주당 최고위원회의를 통해 “왜 하필 독도 근처에서 한·미·일 합동훈련을 해야 하느냐”며 “일본의 군사 이익을 지켜주는 행위로 극단적 친일행위이자 대일 굴욕외교에 이은 극단적 친일국방”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이 대표는 지난 6일에도 국회 국방위원회의 합동참모본부에 대한 국정감사를 통해 “일본 자위대와 특히 독도 근해에서 합동 훈련을 하면 자위대를 정식 일본 군대로 인정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는 “그렇지 않다”는 김승겸 합동참모의장 답변에 “역사적으로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며 “한미일 군사동맹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고 경제 침탈까지 하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인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훈련을 독도 근처에서 하는가. 굴욕외교다”라고 했다.
  • 경주·순천·남해…가을밤 수놓는 ‘문화재 야행’ 어디로 떠나 볼까

    경주·순천·남해…가을밤 수놓는 ‘문화재 야행’ 어디로 떠나 볼까

    깊어가는 가을 속에 달빛과 문화재를 연계한 문화재 야행이 전국에서 잇따르고 있다. 경북 경주시는 오는 10월 2일까지 3일간 교촌한옥마을 일원에서 ‘2022 경주 문화재 야행’을 운영한다고 30일 밝혔다. 이번 문화재 야행은 야간 경관 즐기기, 문화재 답사, 전통놀이 체험, 전시, 문화공연, 먹거리 체험, 전통공예장터, 한옥숙박체험 등으로 구성된다. 주낙영 시장은 “문화재 야행을 통해 경주만이 지닌 문화유산 가치와 경주 야경 아름다움을 가을 정취와 함께 만끽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전남 순천시도 다음달 2일까지 3일간 문화의 거리와 옥천변 일원에서 가을밤의 낭만과 함께 지역 문화재를 향유하는 야간형 프로그램인 ‘2022 순천 문화재야행’을 개최한다. 이번 ‘문화재 야행’은 ‘옥천에 새겨진 역사, 문화로 꽃피우다’라는 주제로 야경(夜景), 야로(夜路), 야화(夜花), 야시(夜市) 등 8야(夜)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문화의 거리와 옥천변 일대는 천변과 거리를 중심으로 야간 경관조명을 설치해 도심 속 밤거리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예정이다 경북 영덕군도 10월 8~9일 각 오후 6시부터 4시간 동안 영해면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 일원에서 ‘2022 영덕 문화재 야행(夜行)’을 한다. 참가자들은 영해장터거리를 걸으며 야간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서경덕 교수 역사 토크쇼, 국악·댄스공연, 뮤지컬 갈라쇼, 마당극, 연극형 만세 퍼레이드 등도 체험할 수 있다.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2019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고 이필제 영해동학혁명운동,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 항일투쟁, 1919년 3·18 만세운동 등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다.예천군도 10월 8~9일 용문면 금당실마을 일원에서 야간관광프로그램인 ‘2022 금당야행’을 연다. 올해로 4회째다. 야경·야로·야설·야식·야사·야숙 6개 주제로 ▲프리마켓 ▲야간경관 ▲전통음식체험 ▲한복체험 ▲전통놀이체험 ▲작은음악회 ▲보물찾기 ▲돌담길체험 등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경남 남해군은 10월 8~9일 남해향교와 남해유배문학관, 남해전통시장 등 남해읍 일원에서 ‘2022년 남해 문화재 야행’을 연다. 행사는 ‘유배자처! 낭만객의 밤’을 주제로 야경, 야로, 야사, 야설, 야식, 야시 등 6야(夜)로 구성된 16개의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첫 날 오후 6시에 남해향교에서 읍사무소, 효자문 삼거리, 유배문학관으로 이동하는 퍼레이드로 문화재야행이 시작된다. 800여명이 참여하는 퍼레이드는 취타대의 가락과 북청사자, 북춤, 화전매구 등 공연패가 함께 한다.
  • 보급로 ‘중추’ 청주성 탈환 왜군에 치명타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보급로 ‘중추’ 청주성 탈환 왜군에 치명타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격렬한 상소로 조정 괴롭히던 선비임진왜란 일어나자 의병 모집 격문동지·문생 1700명 곳곳서 모여들어 승장 영규와 청주성 수복에 큰 공금산성으로 진격하다 왜적에 포위“구차하게 살 수 없다” 항전 끝 순절조헌은 과격한 상소를 일삼는 조정의 골칫거리 선비였다. 하지만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해 청주성을 탈환하는 큰 승리를 주도했다. 청주성은 부산에서 한양, 의주를 잇는 가장 중요한 보급로에 자리잡았으니 왜군이 입은 타격은 매우 컸다. 당시 호남의 초입인 금산성으로 진격하다 왜적에 포위된 상황에서는 ‘죽을지언정 국난이 닥쳤는데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며 북채를 잡고 끝까지 군사를 독려하다 순절했다. 그의 금산성 탈환작전을 두고 무모함의 극치라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조헌을 비롯한 ‘무모한 죽음’이 이어지면서 왜군은 곡창 호남을 포기했고, 나라를 지켜 낼 수 있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따른 서인이었다. 그는 격렬한 표현을 담은 상소로 조정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일쑤였다. 율곡조차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뜻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재능은 미치지 못하며 고집이 극심하여 시세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또 다른 아호는 ‘율곡 정신을 잇는다’는 후율(後栗)이다. 충청도 옥천에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지어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공부하고 토론하는 공간으로 삼기도 했다. 그 흔적인 후율당(後栗堂)은 지금도 남아 있다. 조헌은 선조 22년(1589)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장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승려 겐소를 조선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자 ‘청절왜사소’(請絶倭使疎)로 일본에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조정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신들의 목을 베라는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가 뒤따랐다. 군제를 개혁하고 일본과의 외교를 끊으라는 상소도 거듭했다. 한양으로 올라와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거든 이 도끼로 목을 치라는 뜻의 지부상소(持斧上疏)가 이어지자 선조는 결국 조헌을 함경도 길주에 유배한다. 정치적 주도권을 동인이 잡고 있던 시절이다. 유배는 7개월 만에 풀렸지만 귀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대신들을 꾸짖는 소를 올렸다. 선조는 “조신들을 다 탄핵하고 몇 사람만 찬양하면서 직언(直言)이라 하니 웃을 일”이라면서 “아직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조정을 경멸하여 더욱 거리낌 없이 날뛰니, 다시 마천령을 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곧바로 함경도 변방 유배지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중봉은 청주성을 탈환하고 올린 상소에서도 ‘류성룡이 화친을 주장해 도적을 불러들인 것은 진회보다 심하고, 이산해가 현인(賢人)을 죽이고 나라를 그르친 죄는 이임보와 다름없으며, 김공량이 원한을 쌓고 환심을 산 것은 양국충과 다름없다’면서 ‘바라건대 세 사람의 머리를 베어 의순문 밖에 매어 달고, 김수와 이광의 머리도 한강 남쪽 언덕에 매어 다소서’라고 했다. 동인정권 대신들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임란 발발 당시 이산해는 영의정, 유성룡은 좌의정이었다. 진회는 중국 남송시대 고종의 재상으로 주전파(主戰派)를 탄압해 금나라와 굴욕적 화친을 맺게 했다는 인물이다. 이임보는 당 현종시대 재상으로 아첨을 일삼으며 유능한 관리를 배척했고, 같은 시대 양국충은 인사를 문란케 하고 백성으로부터 재물을 수탈해 ‘안사의 난’을 불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경상우감사 김수는 동래성이 함락되자 도망다녔다는 비판을 받았고, 전라감사 이광은 삼도근왕군의 용인참패 책임자다. 의순문은 선조가 머물던 의주의 중국사신 객관 의순관(義順館)의 정문이다.조헌의 고향은 경기 김포다. 김포시 감정동 옛집 터에는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있다. 서원의 가장 높은 곳 중봉을 기리는 사당 문열사(文烈祠)의 한쪽 마당에는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도 세워졌다. 그럼에도 옥천이 조헌을 상징하는 고장이 된 것은 보은현감을 지내다 물러난 그가 이웃한 이곳으로 낙향했기 때문이다. 조헌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중봉은 ‘하늘과 땅의 큰 덕은 생명이니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게 할 것을 생각하라. 귀신과 사람이 미워하는 것은 적(賊)이니 원수를 같이 쳐서 그 고을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자’로 시작하는 격문을 써서 삼도(三道)에 보냈다.금산 칠백의총에는 1603년 세운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重峰 趙先生 一軍 殉義碑)가 있다. 일제가 ‘반시국적 고적’으로 지목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한 것을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복원했다.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지은 비문은 ‘이때 공이 옥천 시골집에 있다가 분연히 일어나 피를 뿜으며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했다’고 했는데 ‘순찰사와 수령들이 모두 방해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럼에도 동지와 문생이 앞다투어 모여들어 7월 4일 공주에 깃발을 세웠으니 1700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조헌은 1571년 홍주향교 교수로 재직했다. 1586년에는 공주향교의 제독관으로 부임했다. 제독관(提督官)은 각 도의 행정 중심지에서 지방유생들의 교육에 관한 일을 맡은 벼슬이다. 공주향교 제독관의 지방유생에 대한 영향력은 주변 고을에 두루 미쳤다. 조정에서는 과격하다는 평가를 받은 중봉이지만 지역의 사족 사이에서는 따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중봉이 공주에서 봉기한 것도 충청도관찰사가 청주에서 벗어나 이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지지세력의 중심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청주공성군은 방어사 이옥의 관군, 조헌의 의병, 영규의 의승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의비는 ‘공이 청주로 진군해 승장 영규와 8월 1일 성 서문 밖을 두드렸다. 공이 친히 화살과 돌팔매를 무릅쓰고 종일토록 독전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마침내 저들의 송장을 태우고 밤에 달아났다’고 적었다. 중봉의 당시 전투 흔적은 청주성의 옛터인 중앙공원에 있는 ‘조헌전장기적비’(趙憲戰場記蹟碑)로 남아 있다. 왜군은 청주성에 빼앗은 군량미를 그대로 버려두고 달아났다. ‘재조번방지’에는 조헌이 이옥에게 쌀 수만 석을 곤궁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와 말 수백 마리는 마을에 나눠 주어 농사를 짓게 하자고 했지만, 이옥은 “이미 순찰사와 의논해 결정했다. 남겨두었다가 적이 다시 점거할 때 쓰게 해서는 안 된다”며 곡식을 다 태웠다고 했다.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은 청주성 전투의 총지휘자 역할을 했다. 윤선각은 이후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 ‘관군이 마음대로 의병에 참가하면 처벌할 것이니 원대복귀하라’고 했다. 결국 중봉 막하의 관군은 흩어지고 700명 의사(義士)만이 남았다. 윤선각은 중봉이 거병하는 단계에서도 청양현감 임순을 옥에 가두어 관군의 의병진 참여를 막기도 했다. 현감이 지휘하는 관군이 의병진에 통째로 가담해 의병장의 지휘를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정에는 조헌이 요즘식 표현으로 시한폭탄 같은 존재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만큼 이런 인물이 많은 병력을 거느리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것이 윤선각의 우려였다. 선조도 중봉을 가리켜 간귀(奸鬼)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윤선각은 의병을 이끌고 근왕하겠다는 조헌을 오히려 위태롭게 바라보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윤선각이 중봉에게 “근왕에 앞서 금산으로 나아가 호서와 호남을 지켜야 한다”고 설득한 것도 선조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조헌이 기병(起兵)한 다음 선조가 내린 교서에는 ‘내가 밝지 못해 물정을 살피지 못하고 충성스런 목소리를 알지 못했다. 나에게 진언하는 자들 중에 국가 존망의 위기가 조석간에 달렸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내가 비록 그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실로 깨닫지 못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조헌의 상소가 결과적으로 충언(忠言)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일종의 반성문 성격도 담겨 있는 듯하다. 교서는 청주성 탈환 이전에 작성됐다. 하지만 조헌은 교서를 보지 못하고 금산 전투에 나섰다. 금산 전투의 과정을 되풀이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칠백의총은 의병과 의승이 순절한 자리에 조성됐다. 조헌의 제자들은 전투 나흘 뒤 의병의 유해를 한 봉분 아래 모셨다. 1603년(선조 36)과 1647년(인조 25) 각각 순의비와 사당을 세웠고, 현종은 1663년 사당에 종용사(從容祠)라는 이름을 내렸다. 조헌은 칠백의총에 묻히지 않았다. 동생 조범이 형의 시신을 거두어 오늘날의 옥천 안남면에 장사 지냈고, 인조 14년(1636) 무덤을 멀지 않은 안남면으로 옮겼다. 대청호를 품은 청정고을이다.
  • 조정의 골칫거리 선비, 의병 규합해 청주성 탈환하다 [서동철 논설의원의 임진왜란열전]

    조정의 골칫거리 선비, 의병 규합해 청주성 탈환하다 [서동철 논설의원의 임진왜란열전]

     조헌은 과격한 상소를 일삼는 조정의 골칫거리 선비였다. 하지만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해 청주성을 탈환하는 큰 승리를 주도했다. 청주성은 부산에서 한양, 의주를 잇는 가장 중요한 보급로에 자리잡았으니 왜군이 입은 타격은 매우 컸다. 당시 호남의 초입인 금산성으로 진격하다 왜적에 포위된 상황에서는 ‘죽을지언정 국난이 닥쳤는데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며 북채를 잡고 끝까지 군사를 독려하다 순절했다. 그의 금산성 탈환작전을 두고 무모함의 극치라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조헌을 비롯한 ‘무모한 죽음’이 이어지면서 왜군은 곡창 호남을 포기했고,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따른 서인이었다. 그는 격렬한 표현을 담은 상소로 조정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일쑤였다. 율곡조차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뜻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재능은 미치지 못하며 고집이 극심하여 시세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또 다른 아호는 ‘율곡 정신을 잇는다’는 후율(後栗)이다. 충청도 옥천에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지어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 공부하고 토론하는 공간으로 삼기도 했다. 그 흔적인 후율당(後栗堂)은 지금도 남아있다.  조헌은 선조 22년(1589)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장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승려 겐소를 조선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자 ‘청절왜사소’(請絶倭使疎)로 일본에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조정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신들의 목을 베라는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가 뒤따랐다. 군제를 개혁하고 일본과 외교를 끊으라는 상소도 거듭했다. 한양으로 올라와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거든 이 도끼로 목을 치라는 뜻의 지부상소(持斧上疏)가 이어지자 선조는 결국 조헌을 함경도 길주에 유배한다.  정치적 주도권을 동인이 잡고 있던 시절이다. 유배는 7개월 만에 풀렸지만 귀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대신들을 꾸짖는 소를 올렸다. 선조는 “조신들을 다 탄핵하고 몇 사람만 찬양하면서 직언(直言)이라 하니 웃을 일”이라면서 “아직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조정을 경멸하여 더욱 거리낌 없이 날뛰니, 다시 마천령을 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곧바로 함경도 변방 유배지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중봉은 청주성을 탈환하고 올린 상소에서도 ‘류성룡이 화친을 주장해 도적을 불러들인 것은 진회보다 심하고, 이산해가 현인(賢人)을 죽이고 나라를 그르친 죄는 이임보와 다름없으며, 김공량이 원한을 쌓고 환심을 산 것은 양국충과 다름없다’면서 ‘바라건대 세 사람의 머리를 베어 의순문 밖에 매어달고, 김수와 이광의 머리도 한강 남쪽 언덕에 매어다소서’라 했다. 동인정권 대신들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임란 발발 당시 이산해는 영의정, 유성룡은 좌의정이었다.  진회는 중국 남송시대 고종의 재상으로 주전파(主戰派)를 탄압해 금 나라와 굴욕적 화친을 맺게 했다는 인물이다. 이임보는 당 현종시대 재상으로 아첨을 일삼으며 유능한 관리를 배척했고, 같은 시대 양국충은 인사를 문란케 하고 백성으로부터 재물을 수탈해 ‘안사의 난’을 불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경상우감사 김수는 동래성이 함락되자 도망다녔다는 비판을 받았고, 전라감사 이광은 삼도근왕군의 용인참패 책임자다. 의순문은 선조가 머물던 의주의 중국사신 객관 의순관(義順館)의 정문이다. 조헌의 고향은 경기도 김포다. 김포시 감정동 옛집 터에는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있다. 서원의 가장 높은 곳 중봉을 기리는 사당 문열사(文烈祠)의 한쪽 마당에는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도 세워졌다. 그럼에도 옥천이 조헌을 상징하는 고장이 된 것은 보은현감을 지내다 물러난 그가 이웃한 이곳으로 낙향했기 때문이다. 조헌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중봉은 ‘하늘과 땅의 큰 덕은 생명이니 만물이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할 것을 생각하라. 귀신과 사람이 미워하는 것은 적(賊)이니 원수를 같이 쳐서 그 고을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자’로 시작하는 격문을 써서 삼도(三道)에 보냈다.  금산 칠백의총에는 1603년 세운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重峰 趙先生 一軍 殉義碑)가 있다. 일제가 ‘반시국적 고적’으로 지목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한 것을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복원했다.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지은 비문은 ‘이때 공이 옥천 시골집에 있다가 분연히 일어나 피를 뿜으며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했다’고 했는데 ‘순찰사와 수령들이 모두 방해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럼에도 동지와 문생이 앞다투어 모여들어 7월 4일 공주에 깃발을 세웠으니 1700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조헌은 1571년 홍주향교 교수로 재직했다. 1586년에는 공주향교의 제독관으로 부임했다. 제독관(提督官)은 각 도의 행정 중심지에서 지방유생들의 교육에 관한 일을 맡은 벼슬이다. 공주향교 제독관의 지방유생에 대한 영향력은 주변 고을에 두루 미쳤다. 조정에서는 과격하다는 평가를 받은 중봉이지만 지역의 사족 사이에서는 따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중봉이 공주에서 봉기한 것도 충청도관찰사가 청주에서 벗어나 이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지지세력의 중심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청주공성군은 방어사 이옥의 관군, 조헌의 의병, 영규의 의승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의비는 ‘공이 청주로 진군해 승장 영규와 8월 1일 성 서문 밖을 두드렸다. 공이 친히 화살과 돌팔매를 무릅쓰고 종일토록 독전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마침내 저들의 송장을 태우고 밤에 달아났다’고 적었다. 중봉의 당시 전투 흔적은 청주성의 옛터인 중앙공원에 있는 ‘조헌전장기적비’(趙憲戰場記蹟碑)로 남아있다.  왜군은 청주성에 빼앗은 군량미를 그대로 버려두고 달아났다. ‘재조번방지’에는 조헌이 이옥에게 쌀 수만 석을 곤궁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와 말 수백 마리는 마을에 나눠 주어 농사를 짓게 하자고 했지만, 이옥은 “이미 순찰사와 의논해 결정했다. 남겨두었다가 적이 다시 점거할 때 쓰게 해서는 안된다”며 곡식을 다 태웠다고 했다.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은 청주성 전투의 총지휘자 역할을 했다.  윤선각은 이후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 ‘관군이 마음대로 의병에 참가하면 처벌할 것이니 원대복귀하라’고 했다. 결국 중봉 막하의 관군은 흩어지고 700명 의사(義士)만이 남았다. 윤선각은 중봉이 거병하는 단계에서도 청양현감 임순을 옥에 가두어 관군의 의병진 참여를 막기도 했다. 현감이 지휘하는 관군이 의병진에 통째로 가담해 의병장의 지휘를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정에는 조헌이 요즘식 표현으로 시한폭탄같은 존재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만큼 이런 인물이 많은 병력을 거느리면 무슨 일을 저지를 지 모른다는 것이 윤선각의 우려였다. 선조도 중봉을 가리켜 간귀(奸鬼)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윤선각은 의병을 이끌고 근왕하겠다는 조헌을 오히려 위태롭게 바라보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윤선각이 중봉에게 “근왕에 앞서 금산으로 나아가 호서와 호남을 지켜야한다”고 설득한 것도 선조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조헌이 기병(起兵)한 다음 선조가 내린 교서에는 ‘내가 밝지 못해 물정을 살피지 못하고 충성스런 목소리를 알지못했다, 나에게 진언하는 자들 중에 국가 존망이 위기가 조석간에 달렸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내가 비록 그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실로 깨닫지 못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조헌의 상소가 결과적으로 충언(忠言)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일종의 반성문 성격도 담겨있는 듯하다. 교서는 청주성 탈환 이전에 작성됐다. 하지만 조헌은 교서를 보지 못하고 금산 전투에 나섰다.  금산 전투의 과정을 되풀이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칠백의총은 의병과 의승이 순절한 자리에 조성됐다. 조헌의 제자들은 전투 나흘 뒤 의병의 유해를 한 봉분 아래 모셨다. 1603년(선조 36)과 1647년(인조 25) 각각 순의비와 사당을 세웠고, 현종은 1663년 사당에 종용사(從容祠)라는 이름을 내렸다. 조헌은 칠백의총에 묻히지 않았다. 동생 조범이 형의 시신을 거두어 오늘날의 옥천 안남면에 장사 지냈고, 인조 14년(1636) 무덤을 멀지 않은 안남면으로 옮겼다. 대청호를 품은 청정고을이다.
  • 이정선 광주교육감 옛 대구감옥터 참배 눈길

    이정선 광주교육감 옛 대구감옥터 참배 눈길

    이정선 광주광역시교육감이 22일 한말 호남의병장들이 순국한 옛 대구감옥 터를 찾아 헌화, 참배했다. 대구감옥은 일제 침탈이 본격화한 1910년대 심남일, 안규홍 등 호남의병 43명이 사형을 당한 역사적 현장이며 광주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요 인사 151명이 수감됐던 곳이다. 이 교육감은 삼덕교회 입구에 설치된 대구형무소 상징 조형물 앞에서 순국 의병장과 항일독립운동가들을 기리며 헌화하고 묵념했다. 상징조형물은 옛 대구감옥과 대구형무소 때 사용된 붉은 벽돌로 만든 담벽으로, 벽돌에는 호남 의병장들의 이름이 흰색 페인트로 씌여 있다. 호남 주요 기관장 중 옛 대구감옥을 찾은 것은 이 교육감이 처음이다. 이 교육감은 “한말 의병과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항일 애국지사들이 숨지거나 모진 고초를 겪은 역사 현장을 이제야 참배하게 돼 만시지탄을 금할 수 없다”면서 “학생과 교직원의 역사 직무연수 현장으로 자주 찾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 교육감은 특히 광주교육청과 대구교육청이 협력해 달구벌과 빛고을의 역사교육 협력방안인 이른바 ‘달빛 역사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교육감은 참배 후 이날 오후 열린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정기총회에서 강은희 대구시 교육감을 만나 양 지역의 역사교육 협력 방안도 제안했다. 시교육청은 대구의 2·28 학생운동, 국채보상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5·18민주화운동을 상호 연계하는 현장 직무연수 프로그램을 마련할 방침이다. 시교육청은 오는 11월 남도지역 항일운동과 인연이 있는 대구·경북지역 역사현장을 답사하는 교원 역사 직무연수를 실시하고 점차 양 지역의 학생 교류도 병행할 계획이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이 교육감이 참배한 옛 대구감옥 뿐 아니라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요 인사들이 출옥 후 기념촬영한 대구 달성공원,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모자로 옥고를 치른 김보섭 선생의 고향인 안동 지역 등을 포괄적으로 묶어 ‘대구에서 바라본 광주학생독립운동’ 같은 연수 프로그램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 임진왜란 육상전투 첫 승리 웅치전적지… 완주·진안 경계지역 국가사적 지정 전망

    임진왜란 육상전투 첫 승리 웅치전적지… 완주·진안 경계지역 국가사적 지정 전망

    임진왜란 당시 육상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웅치전적지’가 국가사적으로 지정될 전망이다. 21일 전북도에 따르면 전주성으로 진격하려던 왜군에 맞서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 일대에서 벌어진 웅치전투 전적지를 문화재인 국가사적으로 지정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임진왜란의 양상을 바꾼 중요한 전투 지역을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웅치전적지는 지난 7월 완주군과 진안군의 경계지역 352만㎡를 국가사적으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했다가 범위가 너무 넓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전북도는 범위를 23만㎡로 대폭 줄여 재신청했다. 다음달 중순 문화재청의 심사를 앞두고 있다. 이영일 전북도 학예관은 “문화재청 심의에서 역사적 가치는 인정되나 전체 면적을 지정할 수 없다는 의견에 따라 전문가 의견 수렴, 관련 문헌을 보충하고 당시 봉화터와 군대가 주둔했던 진친골 등 9개 공간으로 조정해 재심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웅치는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오는 교통의 요지다. 만덕산(해발 763m), 주화산(565m)으로 이어지는 험한 지형이다. 웅치전투는 관군과 의병이 합세해 결사항전 끝에 왜군의 진격을 막은 전투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8월 금산과 진안을 점령한 왜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웅치로 진격해 오자 조선군은 지형을 이용해 물리쳤다. 관군과 의병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보급창 역할을 할 호남과 전주성을 지켜 내 임진왜란의 전황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왜군은 이 전투에서 병력과 장비의 손실이 커 전력이 크게 약화돼 전주성과 호남평야 점령을 포기해야 했다.
  • 임시정부 아버지 신규식 선생 고향에서 부활하다

    임시정부 아버지 신규식 선생 고향에서 부활하다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아버지로 불리는 예관 신규식 선생의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고향 청주에서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다. 예관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예관 선생의 치열한 독립정신과 통합정신을 기리고 이를 계승하기 위해 22일 청주 청남대 임시정부 기념관 광장에서 추모식과 특별기획전을 연다. 추모식에서 눈길을 끄는 행사는 가족관계부 전수식이다. 망명 이후 무호적자로 남은 예관 선생을 위해 서울가정법원이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 근거해 만든 가족관계부가 예관 선생 외손인 민영백 후손에게 전달된다. 예관 선생은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뒤 1922년 9월25일 중국 상하이에서 순국해 호적이 없었다. 특별기획전은 예관 선생의 삶을 엿볼수 있는 다양한 자료로 꾸며진다. 순국 4개월전에 자신의 심경을 사위 민필오에게 피력한 친필편지는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이 편지에서 예관 선생은 “몸조리를 잘해 속히 일어나길 도모하니 염려하지 말라. 동지들과 애정으로 힘을 합하는 데 힘써라. 가족이 평안하길 바란다”고 적었다. 일제가 예관 선생의 동향을 사찰한 극비문서 20여점도 전시된다. 부인 조정완 여사와 아들이 1910년대 찍은 사진도 만나볼 수 있다.23일에는 충북 미래여성플라자에서 예관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열린다. ‘동아시아 민족 운동사에서 신규식의 위상’(김희곤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장), ‘예관 신규식의 국권회복운동 방략과 실천’(박걸순 충북대 교수),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석을 다진 예관 신규식’(양지선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연구관), ‘예관 후기 시 연구를 위한 선결과제’(진옥경 예관전집편찬위원) ‘신규식과 파리 강화회의’(배경한 신라대 명예교수) 등의 학술 발표와 토론회가 이어진다. 박걸순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은 “순국 100주년을 맞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기념사업을 해 죄송하면서도 감개무량하다”며 “독립투쟁사에서 북극성 같은 역할을 하신 예관 선생의 정신을 후손들이 이어받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청주 가덕면에서 태어난 예관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눈의 신경이 마비돼 늘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흘겨본다’는 뜻을 지닌 예관을 호로 정한 이유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 국무총장 대리겸 외무총장 등을 지냈다. 선생은 임시정부가 내분에 휩싸이자 25일간 단식을 강행하다 42세 나이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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