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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열사 열전:3/崔鍾吉 서울 법대 교수(정직한 역사 되찾기)

    ◎“유신 사죄” 외친 참지식인/법학자답게 ‘정의의 저울’로 독재에 항거/반공주의자… 간첩혐의 조사받다 의문사 崔鍾吉은 서울대 법대 교수였다.그는 70년대초 유신독재를 공공연하게 비판했다.그러던 어느날 그의 비판의 소리가 사라졌다.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 속에 죽었기 때문이었다.공작정치를 자행하던 중앙정보부는 그를 간첩이라고 발표했다.독재권력에 의해 그는 간첩으로 왜곡됐다.그러나 죽은 사람은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수사중이었던 중앙정보부는 73년 10월25일 “구속수사를 받던 崔鍾吉 교수가 간첩혐의를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화장실 창문을 통해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崔교수가 사망한지 6일 뒤의 발표였다. 그러나 당시 유가족은 물론 崔교수를 아는 사람중 중앙정보부 발표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대부분 고문으로 죽자 자살로 위장했을 것이라고 믿었다.가족들은 검시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장례마저도 소리없이 비밀리에 치러야 했다.그의 죽음은 張俊河 선생의 죽음과 더불어 유신시대 최대 의문사 사건이다.그의 의문사는 독재권력의 인권유린과 민주화 탄압 및 공작정치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사건 1년여 뒤인 74년 12월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崔교수가 전기고문 도중 조작 실수로 심장파열을 일으켜 사망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강력히 제기했다.“그러한 의혹은 당시 모 신문사 기자가 취재도중 입수해 사제단에 알려온 정보를 바탕으로 제기됐다”고 사건 당시 정보부 직원이었던 P씨가 전한다.P씨는 사제단에 있던 한 신부의 고등학교 1년 선배다.그는 “앞서 열린 1주기 추도식때도 崔교수 죽음의 의혹이 제기됐었으며 몇개 신문의 초판에 실렸던 관련 기사가 밤사이 누락됐었다”고 전했다. 사제단은 88년 10월6일 서울지검 김두희 검사장 앞으로 崔교수 사인 진상규명을 위한 고발장을 제출했다.사제단은 “崔교수 사인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간첩 누명이 씌워졌다”고 주장하고 당시 사건 관련자로 이후락 정보부장 등 22명을 고발했다.崔교수 죽음의 의혹이 사건발생 15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민의 관심사로 등장했다.고발은 사건 당시 정보부 감찰실 직원으로 있던 崔교수 동생 종선씨(미국 거주)가 비밀리에 작성했던 수기가 바탕이 됐다.그는 사건 후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친구가 있던 세브란스 정신병동에 약 1주일간 입원하며 수기를 썼다. 그러나 수사는 겉돌았고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일인 10월18일 “崔교수가 타살됐다는 증거도,자살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유족들과 사제단의 자료,88년 검찰 발표 등을 종합하면 당시 정보부 발표는 의혹 투성이다.먼저 정보부는 “崔교수는 퀼른대학 유학중 중학동창생인 이재원·노봉유(미체포)에게 포섭돼 평양에 가서 간첩교육을 받은 사실이 밝혀져…”라고 발표했다.그러나 유족들은 “주범이 체포되지 않은 상태에서 포섭된 사람이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사고이후 시체를 현장에 두지 않고 급히 국립수사연구소로 옮긴 점,가족이나 변호인·의사의 검시 참여를 불허한 점,한장 뿐인 사체사진이 투신 자살(뒷머리가 깨지고,양쪽 손발이 부러졌다는 정보부 발표)을 전혀 입증하지 못한 점 등도 정보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게 했다.떨어진 지점이라는 곳도 종선씨가 그날 새벽 몰래 가본 결과 핏자국이나 이를 씻어낸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崔교수가 뛰어내렸다는 화장실 구조도 투신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지적됐다.162㎝의 작고 뚱뚱한 그가 수사관들을 6m 거리에 둔 채 잠긴 창문을 열고 150㎝ 높이의 창문턱을 잡고 올라 투신한다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이것은 정보부 감찰실에 근무하면서 건물구조를 잘 아는 동생 종선씨가 제기하는 최대 의혹이다. 이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는 이미 10년전에 지났다.그러나 진상규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정부나 국회의 적극적인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국민들은 당시 관련자들이 참회의 ‘양심선언’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다.종선씨는 수기에서 “그들도 언젠가 증언대에 서면 진실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착한 형제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진실규명에 대한 희망을 나타냈다. ◎외아들 光濬씨/“역사의 진실에 공소시효는 없다” 崔鍾吉 교수의 외아들인 光濬씨(34·부산대 법대 조교수)는 최근 독일에 다녀왔다.학술회의 때문에 갔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데 있었다.부친 행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그러나 이번에도 새로운 것은 얻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부친 모교인 퀼른대 출신인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 죽음의 내막을 알게 됐고,그 이후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자라면서 아버지의 억울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답답함만 더해 갔습니다. 자상한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왜 간첩누명까지 써야 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독일 유학시절 부친의 은사였던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 등 아버지가 만났던 교수 동료들을 만나 부친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보려 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시절 만났던 코헨,박스터,라이샤워 교수들에게도 전화나 편지로 도움을 청했다.“그들은 한결같이 부친의 결백을 믿었으며 억울한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고 光濬씨는전한다.특히 세계적인 민법학자 케겔 교수는 75년 독일 슈피겔지에서 崔교수 관련 기사를 읽고 당시 법무장관에게 의혹을 조사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光濬씨의 어린시절은 아픈 기억으로 가득하다.“1주기 추도식 때였어요.당시 명동성당에서 갖기로 했는데 정보부에서 막아 어머님이 저와 동생을 끌고 감시의 눈을 피해 사람이 많은 시장거리 등을 몇차례씩 통과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때문에 여러번 이사를 해야 했다. 학교를 옮겨 조금만 있다보면 자신을 보는 친구나 선생님들의 눈치가 이상하게 느껴지곤 했다고.그는 결국 고등학교만 마치고 유학길을 택해야 했다. 사건 이후 미망인 백경자씨(62·의사)는 “오로지 남편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 왔다”고 했다.그녀는 당시 열살,여덟살이던 光濬·希晶 남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이사다니기를 반복해야 했고 ‘자랑스런 아버지’였다는 점을 심어주어야 했다.덕분에 光濬씨는 아버지 뒤를 이어 민법학자가 됐다.希晶씨(32)는 성신여대를 나와 출가해 미국에 살고 있다. ◎왜? 촉망받던 그가 죽음을 당했나/권력핵심부 거침없는 비판/독재정권의 ‘눈엣 가시’ 崔鍾吉 교수는 촉망받던 젊은 학자이자 의식있는 지식인이었다.그는 모교인 독일 퀼른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남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그러나 “모국에서 배움의 의지에 불타는 법대생들 앞에 서는 것이 내 소망이요 소명”이라고 뿌리치며 귀국했다고 가족과 당시 동료교수들은 전한다. 하버드 대학의 코헨,라이샤워,박스터 교수 등은 崔교수에 대해 ‘그는 애국자였으며,위대한 학자요,우리들의 친구”였다고 말했다고 한다.코헨 교수는 후일 미국의 한 신문에 ‘우울한 한국(Gloomy Korea)’이란 기고를 통해 崔교수 죽음을 애도하고 한국 공작정치를 비판했다고 아들 광준씨가 전한다. 간첩혐의에 대해서 가족들은 “본인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코웃음을 칠 것”이라고 했다.아들 光焌씨는 “아버님은 학도병 출신입니다.학도병시절 한국전쟁 전선에 투입되기 전 일본에서 몇개월간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한국말을 쓰며접근하는 사람을 매우 조심했다고 당시 친구분들에게서 들었어요.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고 해요.아버님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崔교수를 비극의 죽음으로 몰고간 시대적 상황은 무엇일까.사건 2달여전인 73년 8월8일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적으로 도덕적인 치명상을 입고 있었다.아울러 조용하던 대학가에서 반 유신시위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서울법대에서도 연이어 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교내에 진입해 시위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연행해 갔다.이에 대해 崔교수는 교수회의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생들을 구타하고 고문하는 무도한 행위에 대해 정의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모른 체하면 안된다”“서울대 총장은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와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정보부는 결국 수사중이던 간첩사건(崔교수 출두전 간첩사건은 거의 수사가 종결돼 있었다고 사제단은 판단)에 崔교수를 엮어 반유신투쟁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던 것 같다.동생 종선씨는 88년“공공연하게 정권을 비판하는 형님을 손보려고 했으나 뜻하지 않게 조사도중 사망하자 사인을 은폐하기 위해 어거지로 간첩혐의를 씌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崔鍾吉 열사 연보 ▲1931년 충남 공주에서 4남1녀중 차남으로 출생 ▲1950년 인천 제물포고 졸업 ▲1951년 학도병 입대 통역병 근무 ▲1957년 서울 법대 대학원 졸업 ▲1962년 독일 퀼른대학 법학박사 ▲1964년 서울대 법대 전임강사 ▲1970년 2년간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연수 ▲1972년 서울대 법대 교수 ▲1973년 11월16일 중앙정보부(남산)에 출두 ▲1973년 11월19일 새벽 1시30분 사망
  • 민주열사 열전:1­1(정직한 역사 되찾기)

    ◎재조명의 의미/이제 ‘민족대통합의 빛’으로/60년대이후 319명 희생/진상규명·바른 평가 과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처절한 투쟁의 역사였다.질식할 듯한 독재체제의 폭압과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한 많은 사람들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그들의 희생적 투쟁이 밀알이 되어 오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굴절된 현대사에서 희망의 빛이었던 민주열사들이다. 그들은 거리에서,노동현장에서,학원에서 또는 감옥에서 민주화와 인권이 보장되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웠다.때로는 분신과 투신으로,단식투쟁으로, 시위로 독재정권과 악덕 기업주들에 항거했다.그들의 위대함은 독재정권에 굴복하지 않고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이익이 최고의 가치처럼 여겨지던 사회풍토 속에서도 개인의 이익이 아닌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점이다. 민주열사들은 비겁의 사회에서 진정한 용기를,억압의 구조에서 영원한 자유를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김상진 열사는 “무릎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며 할복했다.대학생이던 그는 “숭고한 피를흩뿌려 이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젊은 생을 마감했다.‘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는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말자”며 노동운동에 나섰다.그리고 거대한 구조악 앞에 번민을 거듭하다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 이슬이 되기 위하여”란 말을 남기고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당겼다. 많은 목숨들이 이렇게 스러져 갔다.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 알 수없는 의문사와 고문사도 적지않았다.주위의 외면 속에 죽어간 ‘이름없는 민주열사’들도 많았다.그들은 비록 이름없이 죽어 갔지만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오늘의 민주주의로 부활됐다. 전국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상임의장 李昌馥)가 집계한 60년대 이후의 민족민주열사는 319명.분신·투신·할복의 방법으로 목숨을 바치는가 하면 고문과 사건 조작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또 오랜 운동과정에서 병을 얻거나 고문 후유증,불의의 사고 등으로 숨진 열사들도 있다.노동운동 와중에 92명,학생운동 과정에 60명이 숨졌고,처형이나 옥중사망,출옥후 사망자도 103명에 이른다. 5·18 광주민중항쟁에서 희생된 열사들은 제외하고 그렇다. 그러나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는 여전히 미미하고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金三雄 친일문제연구회 회장(서울신문 주필)은 “민주열사들에 대한 법적·도덕적 예우와 진상규명이야말로 가장 먼저 서둘렀어야할 역사적 과제”라고 지적하고 있다.그는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희생당한 열사와 유족들에게 정부가 그동안 무엇으로 보답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도 “민주열사 의문사에 대한 망각은 정의의 망각”이라며 반드시 진상규명 노력이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 독재정권에 의해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그들은 이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민족의 화합과 통합을 위해서도 그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는 진정한 화해란 없다”고 강조했다. ◎李富榮 의원 인터뷰/“전과기록 없애 명예회복부터”/피살자 진상조사위 구성… 특별검사 둬야/과거·현재·미래 묶어 민족정통성 확고히 여야 정치권의 개혁그룹과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제정이 추진되고 있다.그런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는 李富榮 의원(한나라당)에게 특별법 추진의 의미와 전망을 들어 보았다. 李의원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차례 투옥당한 경험이 있는 대표적 재야출신 인사다.부인 孫守珦씨는 고(故) 張俊河 선생의 비서였다. ­민주열사 명예회복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치적으로 폭력,독재가 횡행했을 때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던 사람들의 값어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일제시대 때 독립을 되찾고자 했던 선열들을 받드는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대한민국이 민족사의 유구한 전통을 잇고 통일된 조국의 주체가 되려면 독립정신과 민주주의 확립,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세가지 시대적가치를 고양시켜야 된다고 봅니다.그런 의미에서 민주열사에 대한 재평가와 명예회복은 이 시대에 당연히 논의되어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명예회복의 구체적 방안으로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까. ▲전과기록을 우선 없애야 합니다.또 민주화에 공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훈포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더 중요한 것은 고문에 의했건,암살당했건 민주화운동과정에서 피살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진상을 밝히는 것입니다.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위를 만들고 특별검사가 임명되어야 합니다.심지어 10여년전에 의문사한 사람의 사인규명이 되지않아 가족들이 유골을 묻지 못하고 집에 보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가족들의 노력으로 진상이 밝혀진 사례도 있는데 국가공권력이 외면하고 있습니다.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정부라면 당연히 진상규명에 나서야 합니다. ­특별법은 언제쯤 제정되리라 예상하십니까. ▲연내에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봅니다.올 정기국회에서는 특별법을 만들어야지요.이는 새 정부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이런 일부터 여야의 벽을 깨야 합니다.실제로 여야 의원들 사이에 얘기가 되고 있습니다.여당에도,야당에도 이런 일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분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대화로써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자는 의견도 있는데요. ▲우리 현대사는 아직도 독립운동 흐름과 친일파 흐름의 대결이 계속되고 있습니다.민족 정통성을 세우느냐,못세우느냐 그리고 우리 자식들에게 어떤 가치관을 물려줄 것이냐를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민주열사 명예회복이 지금의 세계화 추진과 맞부딪치는 것도 아닙니다.자기 정체성 확립없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과거와 현재,미래를 함께 묶어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기고/고난·희생은 위대한 유산/張琪杓 신문명정책硏 원장 한평생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남의 나라 땅에서 옥사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그래서 사필(史筆)이 강해야 민족이 강해진다”고 설파하셨다.훌륭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으며,자기 민족의 역사를 아는국민이라야 참된 번영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민족정체성 확립 시급 지금 우리는 IMF사태라는 경제위기를 맞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장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정신적 빈곤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오늘의 이 시기는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윤리 등 사회의 전 부문에 걸친 총체적 위기이다.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경제성장 위주의 서구 근대화에 몰두한 나머지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8·15해방 후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한 일은 두고두고 민족적 수치이자 민족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러나 우리는 해방후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일만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군사독재시절 민주화와 민족통일과 민중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온 살아 있는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것 또한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더 없이 아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자랑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제1차 세계대전 후 전세계 약소민족 해방투쟁의 선구자 역할을 한 3·1 운동을 비롯하여,4·19혁명,군사독재 반대투쟁,민주노동운동,부마항쟁,광주항쟁,6월 민주항쟁 등은 민족의 위대한 전통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민족적 전통속에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고난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이 전통을 더욱더 값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분신자결과 고문사가 특별히 많았다는 사실이다.1970년대 이후 분신자결한 사람이 69명이나 되며 할복자결, 투신자결,고문사 등을 합하면 무려 226명이나 된다.전세계 어떤나라의 민족해방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서도 이런 예를 찾을 수 없다.수십년간 1,000여명의 ‘양심수’가 계속되어온 나라도 유례를 찾을 수 없거니와,특히 이념 문제 때문에 43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한 나라도 없다.한없이 가슴아프고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그동안의 투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고난에 찬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이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민족도약의 밑거름이 되게 하는가는 후세 사람의 몫이다. ○왜곡 현대사 논의 물꼬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E.H.카)라는 말이 있다.역사란 과거의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보다 더 의미있게 하기 위해 과거를 재창조해 내는 인간의 합목적적인 행위이다.그러기에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이 어떠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역사서술자의 세계관과 역사관에 따라 역사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역사적 소명감을 가져야 바른 역사를 쓸 수 있다.특히 민족정기가 훼손될 만큼 무시되고 왜곡되어온 한국현대사를 ‘역사의 장’에 올리는 일은 그 역사적 의미가 큰 만큼 책임도 클 것이다.
  • 정직한 歷史의 정립을 위해(사설)

    서울신문은 내일부터 ‘민주열사열전’과 ‘친일의 군상’(14일자)을 연재한다. 일간지 사상 첫 집중탐구 될 야심적 기획이다. 우리 역사는 해방 53주년과 건국 50주년이 되는 지금까지 사회정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획기적 조치가 없었다. 오히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과 쿠데타 세력에 기생해온 정치인 관료 기업인 지식인 언론인이 국가의 주도세력이 되어버렸다. 민족을 배반한 자들을 청산하지 못한 파행적 국가경영의 결과 오늘 우리에게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상징되는 국난을 불러오고 지역 계층간의 심각한 대립과 분열상을 가져왔다. 반면에 군사독재에 저항하면서 온몸을 던진 민주열사들이 있다. 이들은 항일독립지사들의 정신을 이으면서 분신 소신 투신 자결 고문사 타살 사법살인 의문사 등 온갖 형태로 반독재민주전선에 몸을 살랐다. 민주열사들의 희생과 민주 국민의 힘으로 민주주의가 지켜지고 마침내 국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제 이들의 희생에 대한 진상규명과 합당한 자리 매김이 따라야 한다. 그동안 나라가 어려울 때 몸을 던진애국자들에 대한 대접이 너무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본보가 건국 50주년을 계기로 두가지 기획특집을 준비한 것은 정직한 역사를 만들고자 하는 시대적 사명에 충실하고자 해서이다. 이제와서 친일파 개개인에 대한 단죄의 차원보다 역사의 준엄함과 정직성을 보이자는 것이다. 또한 민주열사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자리매김으로 역사의 감계(鑑戒)를 분명히 보이면서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자는 것이다. 독재자와 왜적에게 충성을 서약한 군사독재자가 민족의 최고 지도자로 선정되는 따위의 오도된 가치관을 바로잡고 정직한 역사를 새롭게 쓰자는 국민적 소명이라 하겠다. 본보는 어두웠던 20세기 근현대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유산인 친일파와 가장 고귀한 희생의 하나인 민주열사를 동시적으로 탐구 연재함으로써 21세기를 명실상부한 정직한 역사의 새로운 천년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러한 우리의 작업은 새정권의 출범과 함께 사회전반에 걸쳐 시작되고 있는 개혁과 통합의 정신적 사상적 지침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오늘과 내일을 사는모든 지도급 인사들과 동시대인들에게 어떻게 사는 삶이 역사적 생애이고 당대주의(當代主義)적 삶인지, 삶의 지표와 가치관을 일깨웠으면 한다. 본보는 어두운 과거사를 질타하거나 미화하기에 부적격함을 스스로 자성하면서, 오로지 새로운 역사창조를 위한 미래지향의 충심으로 두가지 기획특집을 연재키로 한다. 여러가지 미흡하거나 부족한 대목이 있더라도 우리의 이러한 충심이 널리 이해되었으면 한다.
  • ‘의로운 희생’제자리 찾기 첫 발/민주열사 명예회복委 결성 의미

    ◎의문사 규명·묘소 성역화·배상 함께 추진/특별법 제정 목표… 추모제·서명운동 전개 40여개 재야 및 시민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3일 출범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 범국민추진위원회’(열사 범추위)는 지금까지 유가협 등 일부 단체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희생자 명예회복운동을 범(汎)재야 차원에서 본격 추진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열사 범추위는 이를 위해 올 정기국회 통과를 목표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 및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참여단체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마련한 초안을 기초로 각계 단체의 의견을 수렴한 뒤 다음 달 초에는 공청회도 가질 계획이다. 이와는 별도로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로비’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韓忠穆 집행위원장은 “지난 달 24일 일부 국회의원들과 특별법 제정취지를 설명하는 간담회를 가졌다”면서 “10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특별법 취지에 동감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기국회가 개회되면특별법 제정을 청원한 뒤 국회앞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는 방안도 강구중”이라고 덧붙였다. 특별법에는 △민주민족열사 명예회복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조사위 구성 △민주민족열사 묘소 성역화 △국가의 배상규정 등이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열사 범추위는 또 유가협 등 일부 재야단체가 매주 금요일 서울역 광장에서 펼쳤던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을 1인당 1,000원의 광고기금 모금운동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유관단체나 유가족의 행사에 그쳤던 열사 추모 및 기념사업도 범국민적 행사로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이밖에 다음 달 14일부터 1주일 동안 계속되는 제3차 열사 추모 및 기념주간 행사에서는 희생자들이 죽음을 맞은 장소에 희생자의 이름을 붙여 ‘열사의 거리’로 지정하는 선포식도 갖는다. 19일에는 범국민 추모제도 거행된다. 참여 단체들은 국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열사 범추위를 ‘민족민주열사 범국민 추모사업회’로 발전시키기로 하고 다음 달 중순쯤 준비위를 구성할 계획이다.
  • 反독재 희생자 331명 명예회복 범국민운동/‘열사 범추위’ 결성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희생된 민족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 및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범(汎)재야기구가 출범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 회 등 40여개 재야 및 시민단체들은 3일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약칭 열사 범추위)를 결성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민주화와 분단극복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운명한 331명의 열사 및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이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고 진정한 국민화합과 민주발전의 길을 열기 위해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열사 범추위는 명예회복 및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국가보안법과 노동관계법 등의 개폐,범국민적 차원의 열사 추모 및 기념행사 추진 등을 주요사업으로 정했다. 범추위 상임대표에는 전국연합 李昌馥 상임의장,文정현 신부,기독교서회대표 金상근 목사,李海東 목사,원불교 金玄 종무원장,실천불가승가회 공동대표 청화 스님 등이 위촉됐다. 이날 결성식에는 고 全泰壹씨의 어머니 李少仙 여사,고 李韓烈군의 어머니 裴恩深씨,고 朴鍾哲군의 아버지 朴正基씨 등 유가족을 포함,50여명이 참석했다.
  • 민주인사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 나섰다/여야 초·재선 의원들

    ◎의문사 등 진상 규명 과거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희생된 ‘민주인사’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국민회의 李吉載·한나라당 李富榮 의원 등 여야 개혁그룹 초재선 의원들은 28일 “과거 朴正熙정권이래 全斗換 盧泰愚정권을 거치며 민주화를 위해 항쟁하다 고문과 투옥,의문사 등의 피해를 당한 인사들의 명예회복과 피해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의원입법 형태로 특별법을 제정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개혁그룹 여야의원은 張永達 千正培 柳宣浩 의원과 한나라당의 李信範 李壽仁 李美卿 의원 등이다. 이들은 “朴정권이래 93명이 독재정권에 저항,분신으로 희생됐고 18명이 타살됐으며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은 확인된 것만도 42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조만간 민간 재야단체 인사들이 참여하는 ‘민족민주열사·희생자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민주인사의 범위 및 대상자를 심사·선별한뒤 여야 율사출신 의원들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변호사를 주축으로 구체적인 법률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 反독재 희생자 국가차원 보상/특별법 추진 배경

    ◎추모기념일 제정·묘역 국립묘지 승격 추진/대상자 선정·기준 5·18특별법 준용될 듯 ‘민주인사’들의 명예회복과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의 의문사 등이 본격 조명될 전망이다.‘朴正熙정권’ 이래 독재권력과 맞서 싸우다 희생됐던 ‘민주인사’들이 주요 대상이다. 개혁 성향의 여야 초·재선 의원들과 ‘전국 민족민주 유가족 협의회’ 및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합회의’ 등 재야단체가 중심이다.최종목표는 특별법 제정이다. 국민회의 李吉載·한나라당 李美卿 의원 등은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다가 사망한 전경들은 국가유공자로 대우를 받고 있지만 독재권력과 맞서 싸웠던 열사들은 국가차원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의원·재야 단체들은 1단계로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할 방침이다.분위기 조성을 겸해 정치권·재야단체가 연대,대규모 ‘열사­희생자 추모식’도 계획하고 있다. 2단계로 9월 정기국회를겨냥,재야단체에서 입법 청원의 형식을 취한 뒤 의원입법으로 법제정에 착수할 계획이다.100명 이상을 목표로 의원 서명작업도 병행한다. 입법은 ‘민주인사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과 ‘의문사 등 피해자 진상규명에 관한 법률’로 나눠 입법을 추진한다는 복안이다. 두 재야단체 대표자들과 국민회의 李吉載· 한나라당 李美卿 李壽仁 의원 등이 지난 24일 국회에서 만나 법제정 방향을 논의했다.이 모임에선 ▲의문사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민주열사·희쟁자 추모기념일 제정 ▲열사묘역의 국립묘지 승격 ▲열사와 희생자 기념관 및 민주화 운동 박물관 건립 ▲민주화 항쟁과정의 교과서 수록문제 등이 집중 논의됐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국민회의의 한 관계자는 “새정부 출범후 金大中 대통령이 과거 민주화 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총체적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만큼 법 제정에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민주인사의 범위와 대상자 선정,보상 수준 및 기준 등을 놓고 진통도 예상된다.14대 국회에서 통과됐던 ‘5·18민주화 운동등에 관한 특별법’이 준용될 것으로 보인다.
  • 遺家協 ‘이유’ 있는 빗속 시위

    ◎“의문사 규명” 경찰청장 면담 집단요구에/“신고않고 시위했다”… 전원 즉심에 넘겨 전국 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원 10여명은 9일 하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앞길에서 경찰이 회원들을 강제로 연행해 즉심에 넘긴 데 항의,8일째 시위를 했다. 이들은 “지난달 26일 회원 12명이 경찰청사를 방문,金世鈺 경찰청장과의 집단면담을 요구하다가 신고를 하지 않고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모두 경찰서로 끌려가 밤샘 조사를 받았다”면서 “결국 즉심에 넘겨져 벌금 3만원씩을 내고 풀려났다”고 말했다. 경찰청장을 만나려 한 것은 군사정권 때의 의문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후신인 보안수사대의 해체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시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경찰청장을 만나러 왔으며 아침에 팩시밀리로 면담요청서를 보냈다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흥분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고 朴鍾哲씨의 아버지 朴正基씨와 고 李韓烈씨의 어머니 裵恩深씨 등으로 “자식 죽음 진상규명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청장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들은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 독재권력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의문의 죽음을 당한 300여명의 명예회복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면서 “하지만 현 정부도 공권력으로 민의를 가로막는 등 과거 군사독재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행자부 두얼굴’ 공직사회 큰 반향/6월2일자 보도

    ◎“우리모두 자성” 공감 글 쇄도/金장관,기사 읽어주며 서비스 정신 당부 ‘행자부의 두 얼굴’(본지 1일자 23면 보도)이 관가의 화제가 되고 있다.‘행자부…’는 한 중앙부처 공무원이 지난달 31일 행정자치부 직원들의 자세 변화를 촉구하며 행자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글의 제목이다. 그는 행자부를 뒤집어 놓은 듯한 ‘부행자’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당장 金正吉 장관은 2일 간부회의에서 서울신문 기사를 한줄한줄 읽으며 “그것봐라,제대로 일했어야지”라며 직원들의 서비스 정신을 아쉬워했다. 金장관은 특히 한 국장이 “(글을 올린 사람이)안되는 것을 들고왔으니 (우리 직원이)안된다고 했을 것”이라고 ‘용감하게’ 반론을 제기하자 ”무슨 얘기냐.그래도 최선을 다해 친절히 했어야 할 것 아니냐”고 질타해 회의 분위기를 서늘하게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행자부를 발칵 뒤집어 놓은 ‘부행자’는 당시 “보고도 못본 척 얼굴을 돌리고,옆에 가서 불러야 아는 체를 하다가,일을 시작하면 ‘할 수 없다’는 대답이 일쑤”라며 행자부 직원들의 고압적 자세에 분통을 터뜨렸었다. 이 글이 나간 뒤 반응은 그야말로 뜨거웠다.3일 현재 700여명이 ‘행자부의 두 얼굴’을 들여다봤다.지난 4월7일 행자부 홈페이지가 개설된 뒤 단일품목으로는 가장 많은 조회건수를 기록했다. 뿐 만 아니라 “백번 동감한다”며 같은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사람도 6명이나 됐다.공감하는 글의 조회 건수는 1,600여건에 이르렀다. ‘soph’라고 자신을 소개한 지방공무원은 “중앙공무원에게도 그렇게 불친절한데 지방공무원에게는 오죽하랴!”며 ‘부행자’의 글을 지지했다.그는 “업무를 추진하다가 의문사항이 있어도 내무부(행자부)에 전화걸기를 얼마나 주저하는지 시·도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잘 알고 있다.이것이 내무부(행자부)의 위상”이라고 비판했다. 서울시의 한 중간간부도 “과거 내무부 주사가 도에 내려가면 도지사가 마중을 나올 지경”이었다며 행자부 공무원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귀띔했다. 이 글이 행자부 공무원 뿐 아니라 전체 공무원의 문제라며 자성하는 목소리도 있었다.‘엿보기’라고 밝힌 사람은 “국민의 공복이라는 마음가짐을 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부행자’로 부터 유일하게 칭찬을 들은 행자부 국제훈련과 직원들도 “행자부의 변화속도가 더디고 혹은 답보할지라도 실망하고 답답해 하기 보다는 지금처럼 건설적인 비판으로 채찍질해 달라”고 당부했다.
  • 과거 청산과 미래 개척(대한민국 50년:21·끝)

    ◎이데올로기·개발독재 넘어 통일로/反民특위 “실종”… 건국 최초 과거청산 실패/‘제주 4·3’ ‘거창사건’ 아직도 어둠 속에/지역할거 정경유착 파당정치 악습 깨고 군사정권 시대 숱한 의문사도 밝혀내야 1948년 8월15일 신생정부 출범 당시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약소국이었다.한반도 면적 22만1,487㎢ 가운데 3·8선 이남인 9만9,221㎢만 확보했고 인구도 2,002만명(48년 미군정청 추정치)에 불과했다.또 국민 가운데 80%가량이 농업 등 1차산업에 종사했고,그해 수출액이 2,230만달러에 그칠만큼 경제력도 볼품없었다. 정부수립 50돌을 눈앞에 둔 지금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어떠한가.97년 말 현재 인구는 4,666만명,수출액은 1,361억6,430만달러,1인당 GNP는 9,511달러에 이른다. ○‘삶의 질’ 향상되지 않아 지난 50년동안 인구는 2.3배,수출규모는 6,106배로 급증했다.1인당 GNP는,가장 이른 통계치인 53년의 67달러에 비교해도 142배나 늘었다.가히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비약적인 성장’이라는 찬사가 부끄럽지 않은 양적 팽창이었다.그러면 이같은 성장이 우리 사회의 내적(內的) 발전이나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그대로 동반한 것일까.여기서 한국에 대한 외국의 시각을 잠깐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펴낸 책자 ‘South Korea’(92년 간)는 한국의 기본사항을 소개한 데 이어 ‘재벌 중심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독재정권 시대에 고착된 퇴행적인 정치질서에,통제받는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라고 덧붙였다.또 65만의 군대와 한해 100억달러(89년 기준)에 이르는 군사비도 주요항목으로 들었다.다른 나라의 일반적인 한국관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 의회도서관 책자의 표현이 비록 유쾌하지는 않지만,우리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지적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대한민국 성장의 뒤안길에는 필히 청산해야 할 역사적 잔재가 누적돼 있기 때문이다.이는 정치·경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구조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특정사건의 진상을 은폐·왜곡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치 분야에서의 청산대상은 분단체제에서 파생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악용과 개발독재 논리이다.해방이후 정치의 흐름을 살펴보자.3년동안의 극심한 좌우대립 끝에 남과 북에는 상호 배타적인 정부가 들어선다.2년이 채 못돼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져 분단체제는 더욱 굳어진다.이후 한국에서는 李承晩 정부가 장기집권하고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만연한다. 4·19혁명이 일어나 민주주의가 되살아나는 듯 했지만 곧바로 5·16쿠데타로 무너진다.朴正熙 정권은 개발논리를 앞세워 독재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른다.군사정권은 全斗煥­盧泰愚 시대까지 이어졌지만 80년의 5·18광주민중항쟁,87년의 6월항쟁 등 국민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쳤고 그 결과 93년에 문민정부가,그리고 50주년이 되는 올해 국민의 정부가 탄생한다. 대한민국 50년 정치사를 일별하면,그것은 정치적 억압과 이에 맞서 민주사회를 추구한 국민의 대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그 과정에서 억압적 정권이 양손에 든 무기가 반공이데올로기와 경제개발 논리였다. ○가치관 대혼란 초래 남북이 체제의 존립을 걸고 대립하는데다 6·25라는 비극을 겪은 마당에 반공이데올로기는 필연적인 역사의 부산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문제는 권력이 이를 정치적 대항세력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악용한 점에 있다. 멀게는 한국전쟁 전의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서 가깝게는 지난 대선의 ‘吳益濟 월북 및 편지사건’‘흑금성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집권세력은 늘 ‘용공조작’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려고 시도했고 대부분 목적을 달성했다. 朴正熙 정권이 들어서서는 경제성장을 내세운 개발독재 논리가 못잖게 위력을 발휘했다.국민 대다수가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잘 먹고 잘 살려면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추상적 가치는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쉽게 먹혀들어갔다.시민의식이 어느정도 성숙하기 전까지 ‘중단없는 전진’과 ‘잘 살아 보세’는 국민적 합의처럼 보였다. 이같은 정치적 적폐(積弊)는 지금도 파당정치·지역할거주의·정경유착 등 여러 유형의 악습으로 고착됐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의식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전통을 잇는 문화와 사상은 ‘전근대적’이거나 ‘비효율적’이란 이유로 외면받는 대신 출세지상주의·이기주의가 넘쳐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재벌의 소유 집중,극심한 빈부격차 등 경제 분야의 해묵은 과제도 해결이 쉽지 않은 부분이다. 정치사의 굴절이 가져온 또다른 폐해는 역사적 진실의 은폐·왜곡이라 할 수 있다.대한민국 최초의 ‘과거청산 실패’사례로는 48∼49년에 걸친 ‘반민특위 사건’이 꼽힌다.일제강점기에 친일과 반민족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고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한 제헌국회는 곧이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위원회는 반민족행위자 305명을 검거하지만 참다운 활동을 벌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만다.친일파에 권력기반을 둔 李承晩 행정부의 반발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나쁜 선례는 길이 남게 마련인가.해방정국에서 수차례 벌어진 정치지도자 암살사건,6·25를 전후해 빚어진 ‘제주 4·3’이나 거창사건을 비롯한 양민학살,군사정권에서 발생한 민주인사·학생들의 숱한 의문사와 실종들이 아직껏 그 실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어둠에 묻혀 있다. 사건 발생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례도 있다.예컨대 49년 12월24일 경북 문경군에서 일어난 국군의 양민학살 건이다.미국 국립공문서 보존관리청(NARA)에서 최근 발굴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나타난 실상은 이렇다. 육군 25연대 7중대 병력이 석달이라는 산간벽지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모은 다음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무차별 살해한다.보고서는 “(주민들이) 도발하지도 않았는데 카빈 소총·수류탄·바주카포 등으로 공격해 성인 86명,학생 9명,어린이 3명이 숨졌다.또 집 27채 가운데 23채를 불태웠다”고 밝혔다.이 사건이 세상에는 빨치산의 만행으로 알려졌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민족의 성지’국립묘지에도 존재한다.문민정부 출범 초기인 93년 7월 국가보훈처가 金性洙·李甲成·尹致暎·李殷相·徐椿·李鍾郁·尹益善·全協 등 8명에 대한 친일행각을 조사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이들은 모두 독립유공자로서 각종 훈·포장을 받았고 사회의 지도층인사로 행세했다.이 조사 역시 결말없이 끝났고 뒤이은 문민정부의 ‘역사바로 세우기’도 정치적인 의도라는 오해만 샀을 뿐 결실을 맺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특별한 책무 한민족이 빛나는 21세기를 향해 전진하려면 두가지 전제조건이 이뤄져야 한다.하나는 물론 통일이요,또 하나는 역사에 덕지덕지 낀 찌꺼기를 걷어내는 일이다.통일은 북한이라는 상대와 더불어 장기간에 해결해야 할 민족의 숙원이지만 잔재 청산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국민의 정부는 우리 현대사를 정화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 특별한 책무를 안고 있다.
  • ‘민주화 재조명’ 학술회의 姜萬吉 교수 기조연설

    ◎“抗日 열사­민주희생자 역사성 동일”/개인 투쟁이 釜馬­光州­6월 항쟁 잇는 고리역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의장 李昌馥)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회장 裵恩深)는 22일 서울 종로성당에서 ‘민족민주열사·희생자정신계승과 명예회복을 위한 학술회의’를 가졌다.‘한국현대사에서의 열사·희생자들의 지위와 역할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명예회복의 원칙과 방향’을 주제로한 고려대 姜萬吉 교수(한국사)의 기조연설을 요약 소개한다. 朴正熙 정권에서 全斗煥·盧泰愚 정권까지로 이어지는 30여년간의 군사독재시대에는 釜·馬 항쟁과 광주민중항쟁,그리고 87년 6월항쟁과 같은 대규모 민중항쟁이 일어났다.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 아래 이들 대규모 민중저항이 계속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이들 대규모 민중저항이 일어나기까지에는 수많은 개인차원의 의열투쟁이 계속되었고,이같은 개인차원의 투쟁이 계속 공백을 메워줄 수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민중항쟁이 가능했다. 이 개인차원의 의열투쟁은 첫째,윤봉길·이봉창·나석주 등 일제 강점시대 개인차원 항일열사들과 그 역사적 역할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둘째,李承晩 독재정권에 대항했던 4·19 희생자나 군사독재정권의 재등장에 대항했던 5·18 희생자와도 그 역사적 역할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다만 그들이 희생된 경위가 다를 뿐이다. 4·19 희생자나 5·18 희생자들은 시위와 ‘전투’의 현장에서 희생되었다.개인차원의 민주열사들은 시위현장에서 희생된 경우도 있지만 혹은 고문실에서 희생되거나 희생된 장소가 분명치않은 의문사의 경우도 있다.사인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는 더 조사해야겠지만 분명한 경우는 그 역사성이 4·19 희생자나 5·18 희생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일제 강점시대의 독립유공자와 마찬가지로 해방후 민주열사의 경우도 집단적 희생과 개인차원의 희생 사이에 차별을 둘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역사적·민주주의적 정통성이 강한 정권일수록 양심수 및 민주열사에 대한 정책이 강화되기 마련이라 생각해보면,양심수정책이 거의 답보상태였고 개인 차원 의열투쟁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가 없는 점은 金泳三 문민정권의 민주정권으로서의 한계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5·16 세력 일부와의 연합정권임에도 불구하고 金大中 정권이 짊어진 역사적 과제의 중요한 부분은 역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의 획기적 발전과 평화적 통일에의 적극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획기적 발전문제 속에는 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포함되어 있다.金泳三 정권이 군사정권 집권자들을 사법처리하고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회복한 후에 성립된 金大中 정권으로서는 이제 개인 차원에서 활동한 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사업,그리고 양심수 석방의 과감한 확대를 통해서 金泳三 정권과의 또하나의 중요한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 민주화 운동 희생자 유가족 대담

    ◎“젊은이들 값진 죽음 관심 가질때”/묻어둔 진실 캐 역사속의 자리 찾아줘야 연세대생 李韓烈군이 전경이 쏜 직격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숨진게 87년 7월5일.그의 어머니 裵恩深씨(58)는 10년이 더지난 지금도 아들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裵씨는 자신처럼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가족을 둔 사람들이 모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회장을 맡고 있다. 이보다 앞서 같은해 1월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끝에 사망한 서울대생 朴鍾哲군의 부친 朴正基씨(69) 역시 이들의 명예회복에 앞장서고 있다.두사람의 대담을 통해 민주화 희생자 가족의 바램을 알아본다. ▲朴씨=서울신문이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서울신문 독자들,나아가 전 국민들이 피지도 못하고 죽어간 젊은이들에게 깊은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裵회장=자식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내 가족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자식이 죽은 뒤 많은 것을 배웠어요.자식의 죽음이 행여나 헛될세라 노력하면서 1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회원 어머님들이 매달에 만원씩 내고 대학생 축제에서 장터를 열어 협의회 운영비를 대지만 돈 불평은 없습니다. ▲朴씨=유가족협의회는 86년 만들어졌습니다.87년 韓烈,鍾哲이가 죽었을때만 해도 회원수가 20명을 넘지 않았으나 5·6공과 金泳三 정부를 거치면서 328명으로 늘었습니다.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학생,그리고 노동운동을 하다 사망한 근로자 등 희생자들은 자기 개인을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양심에 따라 하다보니 죽음에까지 이른 것 아닙니까. ▲裵회장=5·18 18주기 행사를 보고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어요.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구요.4·19나 5·18희생자들은 명예회복이 되는데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희생당한 이들도 빨리 명예회복이 되어야한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朴씨=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공권력에 의해 죽어간 사람이 많습니다.지금 진상을 덮는다고 앞으로도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정부와 기성세대가 의문사 진상규명과 민주 희생자 명예회복의책임을 져야 합니다.민주희생자 합동묘지를 만들고 기념관도 건립,후세에 남겨야 합니다.정부는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경제에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경제도 중요하지만 민주화도 중요합니다.인권 이상 가는 가치가 어디 있습니까.바로 특별법을 제정해 민주 희생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합니다. ▲裵회장=金대통령을 직접 만나기 힘들어 이렇게 언론을 통해 말씀드립니다.대통령께서도 유신시절 일본에서 납치되어 바다에 산채로 던져질뻔한 경험이 있고,또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사상시비로 고초를 겪었습니까.대통령 스스로는 저희들의 심정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그때문에 金대통령의 당선과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손꼽아 기다려온 것입니다.대통령 혼자 새기시지 마시고 바로 실천하도록 지시를 내려주십시오.민주희생자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은 대통령 직권으로 해주셔야 합니다.양심수 추가석방도 간절히 호소합니다.
  • 60년대 이후 민주화 희생자 328명

    ◎정치적 의문사·학생운동 강제징집 사망 등 60년대 이래 민주화 투쟁이나 노동운동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는 모두 328명(4·19,5·18희생자 제외)에 이른다고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 연대회의는 밝히고 있다.이중 사인이 은폐·왜곡된 의문사가 42건.의문사 유형은 공권력이 개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치적 타살,학생운동을 이유로 강제징집되어 사망한 이른바 녹화사업 희생자,시위와 노조활동 관련 희생자 등이다.대표적 사례를 모아본다. ◇정치적 의문사 ▲장준하선생=오랜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을 하던 그는 유신헌법 철폐를 목적으로 한 개헌운동을 벌이다가 75년8월17일 포천 약사봉밑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최종길 서울법대교수=중앙정보부에서 ‘동백림사건’으로 조사받다가 73년 10월19일 의문의 죽음. ◇녹화사업 희생자 ▲정성희씨=연세대 학생으로 시위과정에서 연행되어 강제징집된 뒤 철책초소 야간근무중 82년 7월23일 의문의 죽음.▲한영현씨=한양대 학생으로 부천의 야학활동을 한 선배의 조사과정 중 그의 이름이 나와 조사를받고 강제징집된 직후 군수사기관에 끌려가 조사받다 83년 7월2일 의문의 죽음. ◇시위·노동운동 ▲우종원씨=서울대 운동권에서 핵심적 위치에 있던 그는 민추위 관련으로 수배를 받아오다 86년 10월11일 경부선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이내창씨=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으로 활동중 안기부 직원과 함께 학교를 나간뒤 89년 8월15일 남해안 거문도 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정경식씨=대우중공업 창원공장 노동자로 노조활동을 하던중 노조지부장선거뒤 87년 6월8일 의문의 죽음.
  • 사회단체 대표 청와대 오찬 이모저모

    ◎“지방선거후 정계개편 시기올것” 金 대통령/金炯旭 실종·각종 의문사 사건 진상규명/적재적소 인재등용·장애인 고용 등 촉구 金大中 대통령은 14일 낮 청와대에서 가진 시민단체와 사회단체 대표 39명과의 오찬에서 이전과는 달리 말을 극도로 아꼈다.국정현황과 국정운영 철학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자제하는 모습이었다.참석한 단체장들로부터 허심탄회한 질문을 듣고 핵심만 답하는 ‘간소함’을 즐겼다. ○현안 폭넓게 질문·건의 단체장들의 질문은 무척 광범위했다.인사문제에서부터,대통령의 ‘고군분투’모습,유(柔)한 모습으로 비쳐지는 국정운영,장애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전반적인 현안들이었다.그러나 金대통령과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애정은 짙게 깔려있었다. 다음은 단체 대표와의 대화록. ▲權快福 광복회=국난때마다 온 국민이 일치단결해 슬기롭게 극복했듯이 다함께 극복해 나가자. ▲徐英勳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회=임기중 민족의 운명이 번영의 길로 나가도록 대통령을 밀어 국난을 헤쳐 나가자. ▲姜汶奎 녹색연합=기업구조조정은 부진하고 노동계만 불평등하게 고통이 분담되고 있는 것 같다.‘작은 정부’ 실천에도 국민의 이해가 부족하다. ▲明魯根 한국YMCA연맹=유하게 정국을 이끌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기업은 개혁돼야 할것 ▲金대통령=기업은 개혁돼야 할 것이다.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느껴지는 점도 있을 것이다.노사정 2기 활동기간중 고치자는 것이다.대통령만 고군분투하는 건 아니다.나는 외환위기 극복에 주력하고 있고,정부도 함께 노력하고 있다.유하다고 하는데,강하게 하는 것은 내 전문이다(웃음).그러나 국민과 대화하고 의견을 수렴하면서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宋寶炅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개혁성과 전문성을 고려,적재적소에 인재를 써야 할 것이다. ▲배다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회=통일부을 개방,수시로 협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민주화운동의 희생자도 보훈법 대상이 되어야 하고,의문사도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金대통령=개혁성과 전문성을 기준으로 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지적은 매우 옳다.전국연합이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라고 통일부에 얘기해 주겠다(웃음).의문사 진상규명과 관련,金炯旭씨 실종사건 등은 당사자가 민주화투사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진상은 규명돼야 한다. ▲金성재 장애인권익문제연구소=장애인고용 약속이 외환위기로 지켜지지않고 있다. ▲徐敬錫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회=인도적 관점에서 탈북자를 처리하고,현정계개편이 제한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金庸來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시민단체지원법 제정이 이뤄져야 한다. ▲金대통령=장애인에 대한 국민인식이 달라져야 한다.지방선거 끝나고 정계개편 시기가 오지 않나 생각한다.
  • ‘주가폭락’ 증권사간부 의문사

    ◎“바람쐬러 나간다”… 한밤 운전중 절벽 추락/수억대 관리… 투자자 항의 비관 자살 가능성 증시폭락 사태와 관련,고객 돈 수억원을 관리해온 유명증권사 간부가 교통사고로 숨져 경찰이 사인 조사에 나섰다. 지난 24일 0시쯤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월리 밤티재 정상에서 D증권 군산지점 김현칠 과장(36)이 자신의 전북 29 라7312호 프린스승용차를 운전하다 길옆 2백여m 절벽 아래로 떨어져 그 자리에서 숨졌다. 경찰 조사결과 김씨는 23일 하오 11시쯤 부인 김모씨(35)에게 “직장문제로 머리가 아파 바람을 쐬고 오겠다”고 말한뒤 차를 몰고 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김씨의 사고사와 함께 최근의 주가폭락으로 투자자들로부터 자주 항의를 받아왔다는 직장동료들의 말에 따라 이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사중이다.
  • 자살… 표절… “시끄러웠던 한해”/’96 가요계 결산

    ◎서지원·김광석 죽음 이어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소동/룰라 자해파문… 마이클 잭슨 우여곡절끝 공연 올 가요계에는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다. 95년말 김성재의 의문사에 이어 올초 서지원,김광석의 자살 등 한두달 사이 가수들의 죽음이 잇따라 온갖 루머를 낳기도 했다.이들의 사망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즉 가요계에 산재해 있던 병폐들(마약·음반흥행에 따른 부담 등)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어 지난 4년간 가요계를 좌우했던 그룹「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들이 정식으로 은퇴기자회견을 갖기전 언론을 필두로 한 온 사회가 서태지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소동이 일어났다. 정초부터 큰 사건들을 겪은 가요계는 이후 남은 기간동안 끊임없이 표절시비 도마위에 올랐다.그룹 「룰라」가 3집 「천상유애」를 발매하기도 전에 표절임이 확인돼 멤버중 한사람이 자해소동을 일으키고 방송활동을 중단한데 이어 김민종이 자신의 「귀천도애」가 일본노래의 표절임을 스스로 밝힌 뒤가수활동 중단을 발표했다.공식적인 표절시인을 제외하더라도 수십곡의 노래가 표절시비를 겪었다.이처럼 올해 표절혐의곡이 유난히 많았던 것은 PC통신에 표절방이 따로 생길 정도로 통신인들을 중심으로 한 보이지 않는 「표절감시단」의 활동이 컸기 때문이다.주로 10∼20대 초반인 이 감시단들은 위성방송 등을 통해 일본노래를 자주 접한 탓에 일본노래를 베끼다시피하는 표절가요들을 놓치지 않고 골라냈다.이때문에 일본문화개방이라는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의 내한공연을 앞둔 찬반여론도 96년의 큰 사건에 속한다.잭슨의 성추행,고액 개런티 등을 문제삼은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 반대대책위원회」까지 생겨나 반대활동을 벌였으나 문화개방이라는 대세에 밀려 공연은 성사됐다.이 공연의 성공으로 내년에는 해외가수들의 내한공연이 줄줄이 예정돼있어 우리 공연의 내실을 기해야한다는 여론이 높다. 가뭄속에 단비도 있었다.지난 6월7일 음반에 대한 사전심의가 완전폐지된 것.이에 따라 정태춘의 5,6집과 서태지의 「시대유감」이 다시 살아났다.하지만 방송사의 자체심의는 여전히 남아있어 정태춘의 노래 일부와 패닉의 「벌레」 등은 방송을 타지 못하고 있다.
  • 북 식량난 논의 「4자회담」 갖자/윌리엄 클라크(지구촌 칼럼)

    ◎무작정 경제지원은 한반도 통일만 지체시켜 북한이 실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지금 북한을 움직이는 권력기관들은 어떻게 일을 해나고 있으며 김정일은 과연 최고권력을 장악할 것인가.북한 인민군의 방위 및 전쟁 「준비태세」는 진짜 어느 수준인가. 북한에 관한 이같은 의문사항에 대해서 나 자신 답을 알지 못하며 또 이를 제대로 알고있는 사람도 아직껏 보지 못했다.북한 실상에 대한 인지가 이 정도이기 때문에 아직도 북한정권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인 것이다.우리는 북한의 엉뚱한 행위를 지난 수년간 경험했다하더라도 하나의 전략을 택일해 밀고나가야 한다.이같이 모순된 상황은 미국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혼랍스럽기는 한국,일본정부도 매한가지다. 북한과 관련있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북한경제의 점진적 개방과 개선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그런데 북한정권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전망이 강해지면서 이 문제가 복잡해지고 말았다.북한이 한국에 버금갈 정도로 개발될 때까지 북한의 붕괴를 늦추기위해 식량,투자 등의 경제지원이 시급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하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북한정권이 권력을 상실하리라는 견해가 적지않으며 나 역시 동감한다.그러나 이 정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경제지원이 제공되면 권력상실 전망이 크게 변할 것이라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이런 도움이 실현된댔자 결국 통일을 지체시키고 지금도 큰 남북간 경제적 불균형만 한층 심화시킬 따름일 것이다. 그러나 힘써 통합된 정책을 도출해야 하는 한 분야는 바로 식량문제다.식량은 매우 심정적인 이슈인데 특히 한국민에겐 그렇다.북한주민도 어쨌거나 한국인이다.북한의 식량난을 그들의 자업자득이라며 모른 체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자세가 상당기간 지속되거나 한국인의 민족 의식에까지 배어들기에는 아프리카나 이라크의 굶주린 어린이들이 TV화면에 너무 자주 비추고 있다.식량지원과 다른 분야에서의 진보를 맞바꿀 수 있으리라고도 보지 않는다.정치적 목표를 위해 굶주린 어린이를 볼모로 삼는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내걸고있는 정의,의로움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북한은 그러나 식량지원에 대한 고마움을 다른 사안의 협상에서 응분의 대가로 표시하지 않을 것이다.식량문제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를 살펴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식량부족은 북한이 「다루기 힘들게 굴어야 요구가 관철된다」는 단골 협상전략을 사용할 수 없는 분야다.핵개발에서부터 최근의 비무장지대 침투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나쁜 행동이 좋은 보답을 끌어낸다는 걸 배웠다.식량부족은 이런 전술을 용납하지 않는다.더욱이 유엔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식량부족은 평양이북 2개,이남 1개 등 3개도에만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큰 도시들은 부족이 심하지 않아 보인다.이런 점에서 북한은 사태가 진짜 나빠지기 전의 이라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또 북한은 한국에 대한 90일간의 전쟁비축용인 1백20만t의 곡물을 유지하고 있다는 보도를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사실들은 꺼림직하지만 북한 식량부족의 주요 이슈는 이 부족현상이 만성적이라는 점이다.북한의 곡물생산량은 풍년의 경우에도 전주민을 먹여살리는데 필요한 양보다 1백만∼2백만t이 부족한 것으로 추산되어 왔다.그래서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오로지 적선만 베푼다는 것은 사태를 악화시킬 따름이다.북한의 농업분야가 이처럼 엉망인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비효율성이 드러난 옛소련식 집단·국영농장 모델을 북한이 거의 유일하게 답습하고 있는 사실이 주된 원인이다.이 체제는 개인으로 하여금 일을 더 많이,더 열심히 하도록 유발하는 동기가 전혀 없다.이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북한의 식량부족은 계속될 것이다.여기에 경제 침체로 살충제나 비료의 구득률이 급격히 떨어지고 석유와 연료부족 탓으로 농기계 활용률이 줄어들게 돼 사정은 한층 나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식량난과 관련,무엇을 해야 하는가.미국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 등 4개국은 오로지 식량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모임을 가져야 한다.이 모임에서 미국은 거론하고 싶더라도 미사일이나 유해송환 문제를 언급해서는 안되며 남북대화의 거론도 절대금물이어야 한다.오로지 식량문제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이 회의는단순히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점점 증대되는 북한의 식량생산량과 소비량 사이의 간격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한다.구체적으로 무엇을 제안할 것인가가 금방 떠오를 만큼 이 문제는 잘 알려진 상태다.북한정권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식량이나 돈이 제공되어서는 안된다.지원 식량은 최근의 한국,일본 지원물량처럼 도움이 있기 전에도 잘 먹고 지내온 대도시인에게 가지 않고 진정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도록 철저하게 체크되어야 한다.또 북한은 농업분야 구조가 실제로 의미있게 변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4개국이 이같은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할 수 있을때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혜택다운 혜택을 주게될 것이다.
  • 미군 군속과 동거 30대 여인 의문사

    19일 상오 2시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호아파트 10동 204호 주한미군 군속 M씨(36·미국 켄터키주출신)집에서 M씨와 동거중인 강운경(39·유학알선업)씨가 숨진채 발견됐다. M씨는 경찰에서 『자다 깨보니 강씨가 호흡곤란증세를 보여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호흡이 멈춰 상오 6시쯤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 PC통신 새 광고매체 부상/“값싸고 쌍방향대화 장점”60개사이용

    ◎“사용자 구매력 높은 계층” 인식/올 시장 40억원규모… 단가 월최고 2천만원/소비자 불만 곧바로 파악 유리 PC통신이 새로운 광고매체로 급부상하고 있다.30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PC통신 광고시장규모는 20억원 정도였으나 올해에는 이보다 2배가 늘어난 40억원이 될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PC통신 광고는 신문·방송·옥외 간판등 기존의 광고매체에 비해 비용이 저렴한데다 소비자와 직접 대화가 가능한 점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 내년에는 1백억원대를 넘어설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한국PC통신 「하이텔」의 경우 현재 현대자동차·선경건설·삼성전자등 60여개사가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지난해 하이텔 광고를 통해 12억5천만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올 매출액은 18억원을 기록했다. 한국PC통신은 『지난 93년 초기의 광고주는 컴퓨터 관련업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최근들어서는 자동차판매회사,건설회사,식품회사 등으로 이용업체들이 다양해지는 추세』라고 밝혔다. 이 회사가 제공하는 광고서비스는 줄광고·포럼광고·그림광고등 3종으로,광고요금은 월 3백만원과 5백만원 등 2종류가 있으며 초기화면의 경우 월 3천만원에 제공된다.데이콤이 제공하는 「천리안 매직콜」은 현재 80여개사가 광고를 게재하고 있으며 월 1억5천만원의 광고수입을 올리고 있다.올총 매출액은 20억원으로 집계됐다. PC통신 「나우누리」를 운영하는 나우콤은 지난 10월부터 광고서비스를 시작,비교적 뒤늦게 출발했으나 무역협회·대우자동차등 4개업체가 광고를 게재하고 있으며 곧 5∼6개업체가 가세할 예정이다. PC통신을 통한 광고 단가는 제일 비싼 경우가 월 2천만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업들이 이처럼 PC통신 광고에 눈을 돌리는 이유는 PC통신만이 갖고 있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특성을 이용,고객들과 대화가 가능하며 이를 통해 소비자의 불만 및 의문사항을 곧바로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국내 PC통신이용자가 지난해 50만명에서 올해 80여만명으로 늘어나는 등 매년 30% 이상씩 늘어나는데다 이들이 구매력이 높은 소비자라는 점을 감안할 때 앞으로 PC통신을 이용한 기업광고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나도 민선” 소신답변 목청 높다/국정감사 받는 기관 이모저모

    ◎검찰­총장 법사위 예방… 수감 “성의 표시”/재경원­홍 부총리 질책때마다 즉답 회피/국방부­감사전부터 실무진 보내 브리핑 종반으로 접어들고 있는 이번 국정감사에서 수감기관들의 자세 또한 각양각색이다.무성의한 답변으로 일관하는 「구태」를 벗지 못한 기관장이 있는가 하면,대담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의원들과 당당하게 맞서는 기관장도 적지 않았다.일부 민선 시·도지사에게는 오히려 의원들이 굽히고 들어가는 진풍경도 나타났다. 김기수 검찰총장은 지난달 25일 국정감사가 시작되면서 국회로 박희태 법사위원장과 여야간사를 이례적으로 예방,눈길을 끌었다.이는 「정치권 표적수사」 시비 및 「5·18불기소」논란등 첨예한 현안을 고려한 측면도 있지만 일단 원만한 국정감사를 위한 「성의 표시」라는 점에서 의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김종구 서울고검장과 최환 서울지검장은 지난달 26일 법사위에서 5·18 문제와 관련,『앞으로는 잘하겠다』는 식의 종래 수세적 답변 패턴에서 벗어나 「소급입법 불가론」등 법논리를 전개하며 야당의원들의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하기도 했다. 내무위 감사에서 안병욱 서울경찰청장은 국민회의 소속 최선길 서울 노원구청장 구속과 관련,야당의원들이 「표적수사」 시비를 끈질기게 제기하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런 일 없다』『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맞섰다.이 때문에 부하직원들은 물론 일부 의원들로부터 『강단있는 청장』이라고 호평을 받았다. 반면 재정경제위 감사에서 홍재형 경제부총리는 금융소득 종합과세 문제를 둘러싼 당정간의 혼선 등 현안들에 대해 의원들의 따가운 질책이 잇따를 때마다 즉답을 회피,의원들로부터 적지 않은 원망을 사기도 했다.김시형 산업은행총재는 업무보고에서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가 국민회의 박태영 의원 등 야당측이 『예산도 없이 무슨 세계화냐』고 목소리를 높이자 『죄송하다』고 사과를 연발하다 담당 부총재보가 답변을 대신하는 곤욕을 치렀다.산은이 의원들의 자료제출 요구에 제대로 응하지 않아 이러한 질책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민태형 조폐공사사장은 정부와 민자당이 조폐공사를공익사업장으로 지정키로 합의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뒤 『그러나 조폐사업은 국가신용질서의 기본이기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제도장치가 필요하다』고 이중적으로 답변,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민선단체장 시대의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첫 국감에서는 민선단체장이 누구냐에 따라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랐다.국회의원 출신인 문정수 부산시장,이인제 경기지사,허경만 전남지사는 의원들의 격려성 질의에 화답하듯 부드러운 분위기속에 국감을 받으려고 성의를 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러나 유종근 전북지사는 농림수산위 국감에서 민선지사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며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가 여야의원 모두로부터 항의를 받고 사과하기도 했다. 조순 서울시장은 이번 감사에 앞서 간부들에게 『서울시의 현황을 있는 그대로 밝히라』고 주문하는 등 민선시장으로서의 자신감을 보였고 실제로 국정감사장에서 이를 솔선하기도 했다. 국방부,합참,3군본부,병무청 등 국방위의 국감 대상기관들은 대부분 「A급」판정을 받았다.이들은 국정감사 전부터 국방위 소속 의원들에게 실무자를 보내 의문사항 등에 대해 브리핑을 하는 등 성의를 보였다.이같은 적극성 때문에 공군측은 미리 배포한 답변서에 일부 군사기밀 사항을 공개했다가 뒤늦게 회수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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