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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무회의 오간 말/자민련 “안보에 문제” 한목소리

    ◎‘군 문민화’거론 이채/내각제 언급 전혀없어/개헌­유보로 갈등 깊어져 자민련이 모처럼 입을 맞췄다. 안보를 놓고 한 목소리를 냈다. 16일 당무회의에서는 내각제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전날까지 ‘격전’을 치렀지만 이날은 피했다. 金鍾泌 총리가 내각제에 대해 침묵을 선언한 것과 무관치 않다. 당무위원들은 안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먼저 당안보특위위원장인 金顯煜 의원이 “정부 여당이 군사안보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소재는 金勳 중위 사망사건이 됐다. 李健介 의원은 “국가기강은 물론 조사팀과 유가족간의 대화가 없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李東馥 의원은 “유가족이 갖고 있는 자료를 군이 입수하려는 노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李元範 의원은 “직속상관인 중대장을 징계해야 마땅한데도 기자회견에 내보내 아연실색케 했다”고 국방부를 성토했다. 金顯煜 의원은 ‘군 문민화’를 아이디어로 냈다. 李完九 대변인은 두가지 방안을 군 문민화로 설명했다. 국방장관과 몇몇분야에서의 군 전문요원을 민간인 출신으로 기용하자는 뜻이라고 했다. 千容宅 국방장관 해임건의안을 놓고 여야가 대립중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朴泰俊 총재도 맞장구를 쳤다. “차제에 검토해볼 만하다”고 金의원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金勳 중위 사건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하라”고 말했다. 韓英洙 국회국방위원장에게 맡겼다. 韓위원장은 “해군 金현욱하사 의문사에 대해서도 오는 21일 국방위 조사단을 진해에 파견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朴총재는 이날 내각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론과 유보론으로 갈등이 깊어가고 있다. 朴총재로서는 당을 추스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 의문사 특별조사위 설치법 국회 제출

    ◎의원 50명 서명땐 조사위 구성 여야 의원 30명은 15일 金勳 중위 사망사건을 계기로 의문 또는 의혹이 있는 사망사건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과 대책마련을 위해 ‘고통 및 의문사에 관한 특별조사위원회 설치에 관한 조치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의원 연구단체인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협력제도 연구모임’(대표 자민련 李健介 의원) 소속의원 25명은 이날 국회에서 회의를 갖고 억울한 사망으로 인한 유족 등 피해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이같이 추진키로 했다. 법안은 제도적 결함이나 국가기강과 직결되는 고통·의문 또는 의혹에 의한 사망에 대해 정보제공이나 신고가 있을 경우 의원 5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특별조사위를 구성토록 하는 것 등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또 특별조사위는 조사착수 후 또는 현장조사 전이라도 해당기관이나 단체에 소명자료나 진술을 요구할 수 있으며 해당기관이나 단체의 감독기관은 반드시 조사협조를 하도록 의무화했다. 특별조사위는 필요한 경우 검사·수사 공무원의 파견을 요청할 수 있으며, 피조사인이조사협조 의무를 위반하면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 국회 막판까지 파행… 개혁법안 ‘낮잠’/정략만 있고 민생은 없다

    ◎577개 법안·국회제도 개선안 등 처리 불투명/본회의 불출석·법안연계 투쟁에 비난 목소리/“국민 이익 외면한채 이익집단 대변” 지적도 회기가 4일 남은 정기국회가 비틀거리고 있다. 정치권이 현안을 지나치게 정략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은 14일 ‘金勳 중위 사건’등을 구정권때 사건으로 규정,야당의 국방장관 해임결의안 처리를 무력화하기 위해 본회의에 ‘불참’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여권의 정치해결 방식에 “정치적 의도…”라며 건건이 제동,규제개혁법안등 각종 민생·개혁법안 처리를 지연시키고 있다. 여야의 대치로 190여건의 규제개혁 일괄처리 법안을 비롯,계류중인 577개 법안의 회기내 처리가 어렵게 됐고 국회 정치구조개혁특위가 추진중인 국회제도 개선안의 회기내 처리도 불투명해졌다. ▷여권◁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열린 ‘국방장관해임결의안’ 본회의 처리에 불참했다. 안건발의 72시간을 넘겨 이 안건을 폐기시키기 위해서 였다. 朴浚圭 국회의장은 본회의에서 “등원거부,불출석등은 의회민주주의가 아니다”라며 이를 비판했다. 상당수 정치학자들은 이에 대해 “여당이 입법부를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줘서는 안된다”며 우려하는 분위기다. 여권이 새해 예산안이 처리된 직후 경제청문회 개최를 위한 국정조사계획서를 단독으로 제출한 일도 매끄럽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야당의 반발만을 샀고 경제청문회 개최를 위한 협상을 더욱 꼬이게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의 동생 會晟씨의 체포·구속시기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여권내 지도부조차도 “국회일이 잘 돼가고 있었는데…”라며 갸우뚱거릴 정도다. 야당 반발을 일으켜 국회파행의 빌미를 준 일이 또 있다.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이 이날 군내의문사,96년 4·11총선 당시 판문점 북한군 무력시위사건등을 조사하겠다고 방침을 밝힌 대목이다. ‘판문점 북한군 무력시위사건’은 이미 안기부등이 조사방침을 밝힌 터여서 야당을 새삼 자극할 필요가 필요했느냐는 지적이다. ▷한나라당◁ “국회 문을 닫을 때가 멀지 않다”. 한나라당 安澤秀 대변인의 14일 국회 본회의 발언이다. 국방장관 해임건의안의 자동 폐기에 따른 대여(對與)경고성 메시지다. 원내사령탑인 朴熺太 총무도 “이제 국회와 본회의는 끝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나라당이 국회를 대여(對與)투쟁의 장(場)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 대목이다. 한나라당은 특히 李會昌 총재 동생 會晟씨의 구속을 빌미로 국회 투쟁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다. 千容宅 국방장관 해임건의안 처리를 고리로 내걸었지만 會晟씨 구속에 따른 반발심리가 깔려 있다. 당 지도부는 심지어 세풍(稅風)수사나 千장관의 해임 건의안을 법안 처리와 연계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이날 총재단회의에서는 “여당이 국방장관 해임 결의안에 불참하면 국회가 순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면서 “법안처리는 임시국회 소집을 통해 다룰 수도 있다”며 ‘선(先)정치투쟁,후(後)법안처리’의 당론을 분명히 했다. ‘당론 관철’을 위해 고유의 입법 활동을 얼마든지 유보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여당의 국방장관 해임 건의안 처리 거부는 반(反)의회주의”라는 朴총무의 비난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국회를 경시하는 풍조에는 야당도 예외가 아니다. ▷경제·시민단체◁ 시민단체들과 경제단체들은 각종 규제개혁법안과 관련,“국제신인도 제고와 경제회생을 위해 이번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朴元淳 참여연대사무처장은 “개혁법안은 우리사회 전체를 재조직하는 구조조정 법안”이라면서 “이 법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개혁에 대한 허무주의가 확산돼 총체적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朴사무처장은 이어 “개혁법안의 처리는 정부 여당의 의지에 달려있다”며 “반개혁적인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익집단의 로비에 굴복, 각종 규제법안의 처리가 차질을 빚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金榮培 경총상무는 “산업구조조정안을 국회에서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호전되고 있는 국가신인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金상무는 특히 “기업에 부담을 주는 법안들은 통과시키고 규제완화특별법등 기업활동에 필요한 법은 계류중이여서 기업활동을 심각히 위협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河承彰 경실련정책실장은 “국회는 이익집단의 이익을 대변할 것인가 국민의 이익을 대변할 것인가”기로에 서 있다면서 “약사법,공인회계사법,부패방지법 등은 이번 회기내 반드시 통과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의문사 증언(金三雄 칼럼)

    “나는 궁극적 승리를 확신한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고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다. 진실이 땅속에 묻히더라도 그것은 그 속에서 자라나고 무서운 폭발력을 온축한다. 이것이 폭발하면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이다”. 올해로 꼭 100돌이 되는 ‘나는 고발한다’에서 에밀 졸라는 절규했다. 진실이 땅속에 묻혀서는 안되기 때문에. 판문점 金勳 중위 사망사건을 계기로 군에서 발생한 유사한 의문사 규명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유가협 등 인권단체에 따르면 특히 5공과 6공초기인 80년부터 88년사이에 18건의 군의문사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녹화사업’등 군사정권이 시국관련 대학생들을 징집하면서 발생한 것이 대부분이다. 군사독재 시대에 군인뿐아니라 민주인사·학생·노동자등 많은 사람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경기도 약사봉계곡에서 의문사한 장준하,중앙정보부에서 변사체가 된 서울법대 교수 최종길,조선대 교지편집장으로 경찰수배를 받다 강물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이철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대우조선 파업과 관련 구속되어 구치소에서 심한 상처를 입고 입원중 의문의 자살을 한 것으로 알려진 박창수… ○역사상 완전범죄 없어 그들은 어떻게 죽었는가,누가 죽였는가. 군사독재에 치열하게 싸웠던 양심적 민주인사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많은 의혹에도 아직 한건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 암살배후도 규명하지 못한 것이 우리 현대사다. 역사상 완전범죄없어 모든 암살은 두꺼운 베일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여간해서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특히 정치권력이 개입한 암살사건은 더욱 그러하다. 더구나 반세기 동안 같은 뿌리의 정권이 지속된 사회에서 정치목적 암살의 진상을 밝히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역사앞에 완전 범죄는 없다. 드레퓌스 사건도 ‘완전범죄’로 묻힐뻔 했다. 국가주의를 앞세운 왕당파와 그를 부추기는 국수주의적 언론이 진실을 규명하려는 공화파 지식인들을 “프랑스와 이념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그들은 진실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에밀 졸라와 같은 용기있는 지식인,클레망소같은 언론인,장 조레스같은 정치인, 마르셀 프루스트같은 소설가,클로드 모네같은 화가,에밀 뒤르켕같은 사회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드레퓌스 영어에서 증인(證人)을 Martyr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어의 순교자에서 어원한다. 증인이 순교자의 뜻을 갖는 것은 참으로 오묘하다. 진실을 증언하려면 순교와 박해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일 터이다. 김구선생 암살을 지령한 사람,장준하선생 의문사를 모의한 사람,최종길교수를 고문치사한 수사관,이철규군을 죽여 강물에 던진 집단,김훈 소위를 위해하고 자살로 꾸민 군인. 또 이들로부터 정보를 들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순교의 증인 나서라 이들이 증언해야 한다. 비록 고통과 시련이 따르더라도 진실을 밝혀 역사의 진보를 이뤄야 한다. 드레퓌스 사건의 세계사적 의미는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한 무고한 인간에게 가해졌던 인권유린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는 것만으론 모자란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공화정치의 기틀을 이룩한 것이다. 민주열사와 유족들이 국가유공자로 명예회복되고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는 시점에서 관련사건의 증인들이 용기있게 나서서 증언해야 한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일 뿐이다. 이 외침으로 인해 법정으로 끌려간다 해도 나는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에밀 졸라의 정신으로 의문사 진실을 밝히고,관계자 또는 정보취득자는 증언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전진한다.
  • ‘金勳 사건’ 安秉熙 변호사 인터뷰

    ◎“공범 최소 2명… 타살 확실” “훈이는 자살한게 아닙니다.적어도 2명이 가담한 타살입니다” 10개월째 金勳 중위 의문사 사건의 진상 규명에 관여하고 있는 安秉熙 변호사(36)는 13일 기자와 만나 이렇게 주장했다. 安변호사가 金중위 사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버지 金拓씨(55·예비역 중장)와의 의리 때문.그는 30사단과 1군단에서 법무참모로 근무하면서 당시 사단장,군단장을 지낸 金씨를 1년7개월간 모신 인연이 있다. 육사 생도였던 金중위도 이때 처음 만났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사망 두달 전인 지난해 12월.“판문점공동경비구역(JSA)에 근무하게 됐다고 하더군요.표정도 밝았고 의욕에 차 있었어요” 두달 뒤 金拓씨로부터 金중위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때부터 사고현장,육군본부,국방부,국회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는 사고 당시 핏자국 방향 등 현장 증거와 법의학자들의 소견,전역병들에게서 들은 정황 등을 종합해 볼 때 金중위는 적어도 2명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 모든 군 의문사 철저규명을(사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소대장 金勳 중위 사망사건을 계기로 80년대 이후 군(軍)내에서 일어난 모든 의문사도 재조사키로 한 것은 당연하고 잘한 결정이다. 金중위의 경우뿐만 아니라 그동안 군이 밝힌 사망원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유가족들이 많은데다 자식을 군복무중 잃은 유가족에게 정확한 사망원인을 알려주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군은 한창 혈기가 왕성한 각양각색의 젊은이들이 모여있는 특수집단이다. 게다가 개인화기와 폭발물등 위험한 장비들을 가지고 각종 훈련과 작전을 해야하는 군에서 갖가지 사고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애통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죽음의 원인이 석연치 않을때 유가족들의 안타까움과 억울함은 대단할 것이다. 군대 안에서 일어나는 사고사의 경우 부대 밖에서는 구체적인 사고 내용이나 원인을 알 길이 없다. 군에서 통보해주는 대로 믿을 도리밖에 없다. 그러나 사고 경위나 사망원인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의 사망사고가 적지않아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이나 재조사를 탄원하지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그동안의 현실이었다. 양쪽 가슴과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숨진 병사나 머리의 함몰상으로 과다한 출혈때문에 숨진 하사관을 자살이라고 하는 군의 처리를 믿을 유가족이 어디에 있겠는가. 육군 중장출신의 金중위 아버지가 30여년 동안 몸담았던 군을 상대로 그토록 애타게 타살가능성을 제기했지만 끝내 외면당했을 정도이니 다른 경우는 오죽하겠는가. 군에 따르면 매년 각종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400여명에 이르며 이들 대부분이 자살로 처리되고 있다. 자살의 경우 유가족들은 대개 사고 경위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가족을 잃은 슬픔도 견디기 어려운데 재조사를 진정하거나 탄원하려고 몇년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고생까지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군 의문사에 대한 이번 재조사로 유가족들의 의혹이 명백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그래야만 군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국민들이 안심하고 자식들을 군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 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사의 조사에는 민간 전문가와 유가족대표를 참여시켜 한점 의혹이 없도록 하는 것을 제도화하기 바란다. 지금처럼 사고조사를 군에게만 맡긴다면 문책이나 복잡해질 뒤처리를 피하기 위해 손쉽게 적당히 처리하는 일이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金勳 중위 사망의혹 파문­국정조사 제의 배경

    ◎여권 “의혹 조기차단” 겨냥/“변용관 상위 증언은 2월 千 국방장관과는 관련없다”/자신감 바탕 진실 접근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金勳 중위 의문사 사건’에 대해 국정조사 카드를 빼들었다. 金중위 사망사건을 둘러싼 의혹을 조기에 차단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여기에는 여권의 자신감이 밑바탕이 되고 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11일 오전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金鍾泌 총리 주재로 국민회의 趙世衡 총재권한대행,자민련 朴泰俊 총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정협의회에서 “金중위 사건에 대해 한나라당과 협의,국정조사를 실시키로 했다”고 鄭東泳 대변인이 전했다. 鄭대변인은 “북한군 변용관상위의 귀순은 2월3일이었으며,金東鎭 전국방장관이 합동신문조 보고를 받은 것은 2월11일이었다”고 밝혔다. 千容宅 국방장관은 3월3일 취임했기 때문에 변상위 신문과 연관성이 없다는 논지다. 千장관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수습에 나선 것은 11월이었으므로 한나라당이 “변상위의 증언에도 불구,金중위 사망사건(2월24일)과 경비병들의 대북 용의점을 조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여권의 시각이다. 한나라당의 정치공세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나라당은 李會晟씨의 구속을 金勳 중위 의혹사건을 은폐하고 물타기하려는 의도라면서 공세를 펴고 있다. 따라서 국정조사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 보자는 ‘역공’인 셈이다.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여당측에서 국정조사를 공식적으로 제의해오면 적극 응할 방침”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따라서 국정조사는 큰 어려움없이 성사될 전망이다. 이미 국방위 진상조사 소위에서 자료축적이 돼 있어 원활한 조사가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金중위 사망을 둘러싸고 꼬리를 물고 있는 각종 의혹사건은 국정조사 추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은 셈이다.
  • 민주열사 국가유공자로/與,명예회복법안 국회 제출

    ◎全泰壹·朴鍾哲·李韓烈씨 포함 40여명 그동안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민주열사’와 유족들이 국가유공자로서 명예회복된다. 여권은 金大中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그동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민주열사’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국가적 보상을 위해 ‘민주화운동 관련 유공자 명예회복및 예우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11일 의원발의 형태로 국회에 제출,연내에 처리할 방침이다. 여권은 이 법의 적용대상을 1969년 8월7일(삼선개헌 발의일)부터 98년 2월24일 ‘국민의 정부’ 출범 전날까지의 민주화운동관련 유공자와 유족으로 하고 현행 ‘국가유공자 등 대우에 관한 법률’에 준용해 각종 보상을 받도록 했다. 여권은 유가협 등 재야단체의 조언과 각종 조사를 통해 70년대 노동운동 과정에서 분신자살한 全泰壹씨와 80년대 고문 또는 시위 과정에서 사망한 朴鍾哲 李韓烈씨 등 40여명의 ‘민주열사’와 300여명의 부상자 등을 우선적으로 국가유공자로 예우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 사인이 불분명한 민주화 과정에서의 각종‘의문사’에 대해선 조만간 구성될 인권위원회 산하에 ‘의문사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진위가 밝혀지는 대로 국가유공자로 명예회복시킬 방침이다.
  • ‘軍 의문사’ 모두 20여건/사례와 문제점

    ◎유족들 재수사 요구해도 묵살 예사/지금까지 대부분 자살·사고사 처리 자살 타살의 여부가 분명하지 않으면서 사인에 관한 진실이 은폐되거나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있는 죽음인 의문사는 특히 군부대 내에서 많이 발생해왔다. 군의 본질인 구성원간의 수직적 관계가 잘못되어 ‘석연치 않은 죽음’을 싹틔운 토양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독재 정권 시기일수록 이 토양은 비옥해져 의문사가 많았다. 전국 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유가협) 등에 따르면 의문사는 총 40여건에 달하며 이중 군부대 의문사가 20여건으로 절반이 된다. 특히 유가협은 군사독재정권인 5공과 6공 초기인 80년부터 88년 사이에 무려 18건의 군 의문사가 있었다고 밝혔다. 국정감사가 부활된 지난 88년 10월 국방부는 이제까지 군대에서 안전사고로 3,723명이,군기사고로 2,670명이 사망했으며 군기사고중 2,254명이 자살,나머지는 폭행으로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었다. 유가협이 제기한 군 의문사는 모두 성격결함,환경비관 등의 염세성 자살이거나 사고사인 것으로 처리되었다. 즉군에는 한건의 의문사도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군 의문사 관련 가족들은 군부대가 자식들의 죽음을 연락하는 데는 크게 지체하지 않았지만 부대에 도착해도 상황을 설득력있게 설명해주기는 커녕 돌연사태에 경황이 없는 틈을 타 화장동의서를 받는 데 급급했다고 불평하고 있다. 유가협이 제기하고 있는 군 의문사는 5공 초기 시국관련 문제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하고 강제순화 교육을 실시한 ‘녹화사업’에서 처음 발생했다. 강제징집된 6명의 학생들이 프락치 역을 강요받으며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 83년말부터 학원가에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5공은 국방장관의 국회보고를 통해 이들의 죽음이 모두 염세성 자살이거나 군기사고라며 의문사 의혹을 부인했다. 84년에 사망한 허원근의 경우 아버지가 앞가슴에서 어깨뼈를 관통하여 갈비뼈가 어깨 등뼈를 뚫고 나왔는데 어떻게 팔을 움직여 다시 총을 잡아 제 2, 제3의 총알을 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부검의로 나온 군의는 “총을 일곱발이나 맞고도 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87년에 사망한 이이동의 경우 아버지가 지문채취와 부검 미실시,사체검안 및 현장검증 등에서의 의문사항을 들며 재수사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또 87년 박상구의 의문사에서는 농약을 먹고 병원에서 죽었다는 군부대의 설명과 달리 부대내에서 타살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측 목 부근에 칼 자국이 있어 어머니가 손가락을 넣어보니 끝이 닿지 않았으며 목이 졸린 흔적이 역력했다.
  • 金 중위 의문사 재수사 전말

    ◎유족 등 잇단 타살 의혹 제기에 ‘총격 자살’ 사건 원점서 재조사 金勳 중위 의문사 사건이 재수사에 이르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지난 2월24일 金중위는 권총에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됐고 군 수사당국은 金중위가 자살했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었다.그러나 유족들은 金중위가 타살됐다는 확신 아래 국회 국방위에 탄원서를 내는 등 진상규명에 나섰다. 金중위가 타살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제기됐다.지난 9월 미국 뉴욕 주정부의 법의학자 루이스 에스 노 박사(한국 이름 노여수)는 金중위의 사망이 ‘자살로 교묘하게 위장된 타살의 전형’이라는 소견을 밝혔다.권총을 오른손으로 잡고 자살했으면 신체 구조상 탄환은 왼쪽 머리 위쪽으로 나와야 하는데 金중위의 경우는 아래쪽으로 나왔다는 것이다.모 주간지는 사망 현장에 있던 권총번호가 金중위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도하며 타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같은 의혹 제기에 따라 결국 육본 고등검찰부는 약 5개월 동안 사건을 재수사한 결과,지난달 27일 사망원인을 ‘격무와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로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 10월 구성된 국회 국방위 ‘金勳중위 사망사건 진상파악 소위원회’ 비공개회의가 처음으로 열린 지난 3일 밤 金중위 소대의 부소대장인 金영훈 중사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군기무사에 체포되면서 국면은 바뀌기 시작했다.국방위 소위의 조사와 유족들의 노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金중위의 아버지 金拓씨가 그동안 확보한 전역 병사들의 증언도 타살 가능성을 내비쳤다.증언을 종합하면 金중위의 사망 시간에 있어서도 군 당국의 발표와 실제 상황에서는 차이가 났다.이들은 金중위의 사망 시간이 아침 10시35분에서 11시 사이라고 증언했다.하지만 군 당국은 오전 11시50분에서 12시20분 사이라고 발표해 1시간 가량 차이가 났다. 사건이 일어난 지 한달 후 조사차 방문한 1군단 헌병대 수사팀은 소대원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서로 상의하면서 그 날의 행적을 쓰게 했다.중대장 金모 대위도 ‘이미 자살로 결론이 난 사건이니 상의해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이 때 金중사는 ‘내가 사고 현장에도착해 시계를 보니 12시29분이었다’고 강조,소대원들은 이를 기준으로 진술토록 유도했다.그러나 金중사의 증언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결국 金중사의 구속,전역병들의 증언,국방위 소위의 조사 등과 유족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사건은 9개월 만에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 ‘판문점 병사 내통’이라니(사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근무하는 우리 병사들의 북한군 접촉사실은 국민들에게 또한번 충격을 주고 있다. 미사일 오발에다 불발포탄 폭발,조명탄 사고에 이어 최전선 병사들의 ‘적과의 내통’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최근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군관련 사고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도 군기(軍紀) 해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한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근무하는 장병들에게는 투철한 군인정신과 보안의식이 필수적이다. 이들이 북한군과 수시로 접촉하며 값비싼 손목시계를 선물로 받는가 하면 몰래 북쪽으로 넘어가 술까지 마셨다니 우리 군의 기강이 얼마나 흐트러져 있는지 짐작할 만한 일이다. 더욱이 북한 경비병들은 심리전의 특수훈련을 받은 ‘적공조’요원들로 알려져 있다. 우리 병사들이 이들과 접촉하면서 어떤 중대한 정보를 얼마나 주었는지 걱정스럽다. 군 관계자들은 공동경비구역 장병들이 북한 경비병들과 접촉하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로 그리 놀라워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언제 어떤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공동경비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익히고 지내는 것이 긴장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사의 엄격한 통제아래 이루어져야 하며 결과는 반드시 지휘계통에 보고되어야 한다. 병사들이 멋대로 북쪽을 오가며 적과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지휘체계나 안보의식이 엉망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우리 군의 보안체제이다. 구속된 김모중사의 경우 지난해 7월부터 북쪽을 들락거렸고 부대 안에서도 몇차례 문제가 됐었는데도 보안계통에 전혀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지난 2월 귀순한 북한군 상위가 우리 병사들의 북한군 접촉사실을 진술했는데도 이에 대한 조치가 없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군 당국이 알고도 방치하거나 은폐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한다. 이 사건이 판문점에 근무하던 한 소대장의 의문사와 관련됐다는 의혹도 주목된다. 군 당국이 스트레스로 인한권총자살이라고 발표한 소대장의 죽음이 유가족들의 주장대로 북한 접촉사실을 숨기기 위한 타살이라면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철저한 재조사로 정확한 사망원인을 밝혀야 할 것이다. 군의 생명은 군기이다. 군의 기강이 이처럼 흐트러져서는 튼튼한 국방이나 안보는 기대할 수 없다. 특단의 대책을 거듭 촉구한다.
  • 이제 내 아들 죽음 진실 밝혀져야/金 중위 아버지 金拓씨 인터뷰

    “피와 눈물로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근무하다 지난 2월24일 의문사한 金勳 중위(25·육사 52기)의 아버지 金拓씨(55)는 9일 “이번 사건이 모든 의문사를 뿌리뽑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金씨는 사고 이후 아들을 잊지 못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밖에서 통곡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잠도 서너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꼭 풀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가족들은 힘을 모았다. 아들의 죽음을 타살로 의심하게 된 것은 영결식 때였다. 영결식 도중 미군 수사기관 사람들이 와서 아들의 지문을 채취해 갔기 때문. 군의 초동수사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金씨는 스스로 증거 확보에 나섰다. 아내,처제와 함께 부대 근처에 살다시피하며 몇시간씩 눈물을 흘리며 병사들을 만나 사정하기도 했다. 갖은 고생끝에 아들이 자살할 때 사용했던 총에 지문이 없다는 점,머리 위쪽에 피멍이 있었으며 반항한 흔적이 있는 점 등 타살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러나 군당국으로부터 번번이 묵살당했다. 육사 21기로 군단장을 거쳐 중장으로 전역한 예비역 장성인 金씨는 평생을 몸담은 군당국의 무성의한 태도와 싸우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나는 36년,아들은 6년의 군생활을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군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면서 “군당국이 사실대로 수사해 진실을 밝혀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 경비병 北 접촉 10개월 방치/나사 풀린 民·軍 수사기관

    ◎귀순자 통해 2월에 ‘40명 포섭’ 알아/“과장 진술”“구체적 혐의 없다” 무시/관련자 소환 등 조사않고 미온 대처 민·군 수사기관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내 경비병들이 북한 대남심리전 특수요원들과 접촉한다는 귀순자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10개월이 지나도록 본격적으로 수사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9일 국방부에 따르면 전 북한군 상위 변용관씨가 지난 2월3일 귀순한 뒤 JSA내 우리측 경비병 40여명과 접촉해 포섭공작을 했다고 진술했다.하지만 안기부 국방부 경찰청 기무사 정보사 등 5개 기관은 관련자들을 소환해 조사하는 등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변씨는 2월3일부터 9일까지의 5개기관 합동신문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판문점내 2초소와 북측 4초소 부근 군사분계선상에서 남한경비병들을 몰래 만나 선물을 교환하는 등 포섭활동을 펴고 있다”고 밝혔다.이어 “한국군 경비중대 4개소대 152명이 북한 공작조의 포섭대상이며 개인적으로 A일병,B일병,C일병과 직접 접촉했다.98년 2월 현재 한국군으로 북측 공작요원과 접촉하고 있다.2소대 김모상병과 친숙하게 만나 공작했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그러나 합동신문조는 ‘변용관이 한국군과 접촉,대화만 했음에도 실적을 인정받기 위해 포섭된 자라고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변씨의 진술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군 기무사도 2월12일 변씨를 독자적으로 조사,‘한국군 경비병 3명을 직접 만났으며 또다른 4명을 포섭했다는 동료 특공조원의 보고서를 봤다’는 내용과 함께 이들의 이름까지 진술받았으나 ‘아직 포섭단계에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판단 아래 관련자들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무사 관계자는 “변용관이 우리측 경비병 3명을 1∼2회 만났지만 그 이상 접촉하려 하면 피했다고만 말할 뿐 구체적인 혐의 내용을 제시하지 못해 특이 사항이 없는 것으로 보고 적극 수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JSA내 우리측 경비병들의 대공 근무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지난 2월18일 유엔사측에 기무사 요원이 상주해 활동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무사는 또 지난 6월부터 金勳 중위 사망사건에 대한 정밀 재수사를 실시한 육군 검찰부로부터 수사협조나 협의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해 군 검찰의 수사가 허술하게 진행됐음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군 수사당국은 JSA에서 근무하다 전역한 병사들은 수사대상이 아닌 데다 구체적인 혐의나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수사에 나설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군 수사 관계자는 “이번에 구속된 당시 부소대장 金모중사는 변용관도 전혀 거론하지 않아 조사하지 않았으며 지난 6월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미18의 무사 행정관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했다”고 말해 金중위 사망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극히 미온적이었음을 시인했다. ◎김훈 중위 의문사 일지 ●2월3일=판문점 대표부 소속 북한군 변용관 상위 귀순. ●2월24일=金勳 중위(JSA 소대장) 권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 ●2월25일=金중위 부대 공동경비구역에서 후방으로 빠지는 날. ●4월∼11월=金중위 아버지 金拓 예비역 중장,군 수사당국의 자살발표에 의혹 제기,국회 국방위에 탄원서 제출 등 진상규명 활동. ●10월26일=국회 국방위,金중위 사망사건 진상파악 소위원회 구성. ●11월27일=육군본부 고등검찰부 金중위 사망사건 최종수사 결과 발표.자신의 권총으로 자살 결론. ●12월3일=국방위 소위,JSA 소속 金영훈 중사(28)가 북한군과 자주 접촉했다는 참고인 진술 확보. ●12월4일=기무사령부,金중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12월9일=국방부,金중위 사건 전면 재조사 착수.
  • 의문사 국가인권위서 규명/당정,진상조사 근거 법제화 계획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될 국가 인권위가 각종 의문사 진상규명에 나선다. 정부와 여당은 현대사 전개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인사들에 대한 진상조사 문제를 당정이 추진중인 ‘인권관련법’에 명시,‘국가인권위’ 등 전담기구가 진상조사에 나설 수 있게 할 방침이다. 당정은 인권법의 내용에 대한 당정간 이견을 최종 조율한 뒤인 오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맞춰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 한 ‘인권관련법’을 정기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국민회의의 한 관계자는 6일 “최근 열린 법무당정회의에서 인권관련법에 의문사 진상조사 근거를 법제화,별도 전담기구를 통해 조사에 착수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밝혔다. 그는 “의문사 진상조사 대상기간은 국민회의와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가 합의한 ‘민주화운동 관련 유공자’에 대한 조사 대상기간과 같은 ‘69년 3선개헌부터 지난 2월 현 정부 출범직전까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민주열사 열전:16/연세대생 李韓烈(정직한 역사 되찾기)

    ◎‘최루탄 희생’ 6월항쟁 시민참여 계기로/대학입학후 사회의식 눈떠 시위 적극 동참/‘뇌사상태’ 알려지자 시민·학생 공감대 확산 1987년 6월9일은 80년대 한국 민주운동사에서 시민 승리의 한 분수령이 됐던 날이다.그날 일어난 연세대생 李韓烈(경영학과 2년)의 최루탄 피격 사건이 민주화 열망이 폭발한 6월항쟁의 중요한 기폭제가 된 것이다.시민들은 신문에 실린 이한열 사진을 보고 분노했다.그는 피를 흘리며 눈의 초점을 잃은 채 힘없이 동료에게 안겨 있었다.외국기자가 찍은 그 한장의 사진은 독재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하기에 충분했다.시민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그 분노의 폭발은 민주화 투쟁의 원동력이 됐다. ○신문사진 보고 시민들 분노 이한열은 그날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6·10대회를 위한 연세인 총 결의대회’를 마치고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그리고 오후 5시 쯤 최루탄을 쏘며 달려드는 경찰에 쫓겨 학교 안쪽으로 달리다 SY44 최루탄에 ‘직격’으로 뒤통수를 맞았다.그가 쓰러진 교문 안 3m 지점과 최루탄을발사한 경찰과의 거리는 20m에 지나지 않았다.마지막으로 쫓겨 들어가던 한 학생에 부축돼 경찰의 손을 피한 그는 동료들에 의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다음 날 申廷淳 세브란스 병원장이 발표한 이한열의 용태는 거의 절망적이었다.신경외과 중환자실에 산소마스크를 쓴 채 입원해 있던 그는 두개골 골절 및 뇌좌상,뇌출혈,뇌이물질 등으로 의식불명이고 수술은 불가능한 상태였다.그러나 그의 절망은 민주화의 희망으로 승화됐다.그는 입원한지 27일만에 2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입원기간 동안 밖에서는 민주화를 향한 도도한 물결이 온 나라에 넘실대고 있었다. 그 물결은 87년 1월 서울대생 朴鍾哲 물고문 사망사건으로 비롯된 물줄기가 불어난 것이었다.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점화된 국민의 분노는 정권의 고문사건 축소조작 음모가 만천하에 폭로되면서 뜨겁게 타올랐다.4월 5공정권의 직선제 개헌 유보 발표는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결과를 가져왔다.‘호헌철폐’‘독재타도’로 압축된 외침은 서서히 학교를 빠져나와 도심 곳곳에 울려 퍼졌다.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사건은 독재정권에 결정타가 됐다.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열렸으며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외침이 곳곳에서 메아리쳤다.회사원들이 빌딩 위에서 꽃다발과 휴지다발을 던지는 현상을 보고 외국언론은 ‘충격적’이라고 표현하고 ‘또 다른 형태의 민중의 힘’이라고 보도했다.‘넥타이부대’를 비롯한 중산층이 시위에 적극 가세하면서 부터는 6월항쟁을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중산층의 민주화 욕구 분출로 결론짓기도 했다.6월26일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에는 6월항쟁이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은 인파인 25만여명이 참여했고,결국 정권의 6·29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넥타이부대’ 대거 시위 참여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던 禹相虎씨(36)는 “한열이의 최루탄 피격은 학생과 시민의 결집력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회고했다.6월9일 이전까지만 해도 민주화투쟁의 승리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했지만 한열이가 뇌사상태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공감대가 학생·시민들에 확산됐다는 것.그것은 도심 가두시위에 겁을 내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한열은 당시 학생운동권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86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와 서서히 사회의식에 눈을 뜨면서 1학년 2학기 이후 시위에 적극 참여했는데,이는 운동권 조직원으로서가 아닌,개인적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대학에 들어와 광주항쟁의 참상을 알고 분노한 수많은 학생 중 한명이었으며 고문 추방을 외치며 명동과 을지로 골목을 누비던 ‘보통학생’ 중 하나였다. ‘…그대 왜 갔는가/어딜 갔는가/그대 손목 위에 드리워진 은빛 사슬을/마저 팔찌끼고 갔는가’라며 박종철의 죽음을 목놓아 서러워 했던 여린 마음의 젊은이였다. 특별히 과격하지도 않은 우리의 착한 아들 딸도 정권폭력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 때문이었을까.이한열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시민들은 6월29일 당일보다도 오히려 이한열의 장례일인 7월9일 6·29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듯 했다. ○시청앞 1백만 장례 행렬 연세대에서 10만여명으로시작된 추도행렬은 신촌네거리 노제를 지내며 30만,시청 앞에선 100만여명으로 불어났다.대형 태극기와 영정,‘한열이는 부활한다’‘한열아,너의 가슴에 민주를’ 등이 적힌 300여개의 만장을 앞세운 운구행렬을 수십만의 시민·학생이 따랐다.참으로 장엄했다.그것은 이한열을 애도하는 인파였고,민주사회를 갈망하는 국민 염원의 물결이었다.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낸 6월 항쟁은 민주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의 발전이었다. □양력 ·1966년 8월 전남 곡성 출생 ·82년 2월 광주 동성중 졸업 ·85년 2월 광주 진흥고 졸업 ·86년 3월 연세대 경영학과 입학 ·87년 6월9일 연세대 교문 안쪽에서 시위 중 최루탄 피격 ·87년 7월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 ◎이한열 어머니 裵恩心 여사/아들 소망 풀려고 민주화 운동/의문사 진상규명 법 제정해야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어두웠던 시대에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자식을 잃은 많은 어머니들.이들의 가슴에는 자식을 잃은 슬픔과 함께 자식이 죽기전 이루고자 했던 소망도 고스란히 묻혀 있다.이한열의 어머니 裵恩心(58) 여사 또한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관심과 100만 추도 인파 속에 ‘성대히’ 아들의 장례를 치뤄 ‘속없는’ 사람들의 ‘부러움’까지 샀던 배여사.하지만 배여사는 오늘도 여의도 국회 앞 차가운 천막속에 있다.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는 것.벌써 24일 째다. “민주를 달라고 싸우다 숨진 사람들이 아직도 범법자의 굴레를 쓰고 있어요.암울한 시대에 권력에 의해 숱한 의혹을 남긴 죽음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고요.이것을 그대로 묻어둔 채 진정한 새출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장례식에서 “이제 다 풀고 가라.엄마가 갚을란다.한열아… 한아 가자,우리 광주로”라고 피끓는 통곡을 토해냈다.그 이후 아들의 소망을 풀기 위해 민주화와 노동운동 현장에 항상 있었고,지금도 아스팔트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배여사는 “대통령도 특별법 제정 검토를 지시했고,국회의원들도 만나는 사람마다 협조하겠다는데 법안은 아직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며 답답해 했다. ◎피격현장 동료 이종창씨/한열이 모습 아직도 생생/항쟁의 정신 잊지 말아야 6월항쟁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한장의 사진이 있다.이한열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힘없이 늘어져 있고,한 학생이 그를 껴안은 채 분노의 눈빛으로 앞을 쏘아보고 있는 사진이다.로이터통신 기자가 극적으로 잡은 이 장면은 세계 곳곳으로 한국 민주화투쟁을 알리는 생생한 기록으로 알려졌다. 그 분노한 눈빛의 주인공인 이종창씨(32·연세대 상경대도서관 사서)는 “‘내일 시청 앞에 가야 하는데’라고 힘없이 말하던 한열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도서관학과 2학년이던 그는 그날 학교 앞 택시정류장 쪽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경찰에 쫓겨 최루가스로 거의 앞이 안보이는 상태에서 뛰어 들어가다 왼쪽에 검은 물체를 느꼈지요. 한열이었습니다. 20여m 앞에 전경들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그를 껴안고 무조건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는 이한열을 20m 이상 끌고 가다 먼저 쫓겨갔던 학생들이 달려왔을 때에 야 기진맥진해 주저앉았다.“쓰러진 한열이가 경찰 손에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오싹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이씨도 6월항쟁의 대표적 피해자 중 하나다.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은 며칠뒤 그 또한 학교 앞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던진 돌을 머리에 맞았다.2회에 걸친 뇌수술을 받았고 다행히 회복될 수 있었다. 6월 항쟁의 한 가운데 있던 그는 항쟁의 정신이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것 같다며 못내 아쉬워 했다.언젠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연세대 백양로를 지나는 학생들에게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사진을 보이자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라는 것.민주화의 밑거름이 됐던 그때의 뜨거운 열정과 희생의 참뜻은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에 꼭 살아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
  • 의문사 규명 특별위 만든다/金元吉 정책위의장

    ◎민주유공자 명예회복특별법도 추진 국민회의가 내년에 설치될 국가인권위원회에 수사권을 가진 특별위원회를 두고 의문사 진상규명에 나서는 방안을 적극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회의 金元吉 정책위의장은 22일 오전 당사에서 裵恩心 회장 등 농성중이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관계자들을 만나 이런 뜻을 밝히고,민주유공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도 이번 회기내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고 유가협 관계자가 전했다. 유가협 회원 30여명은 지난 4일부터 국회 앞에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노숙 농성을 벌여왔으며,21일 오후부터 국민회의의 적극적인 법안 제정 추진을 요구하며 당사안 복도에서 농성을 했다. 이들은 21일 金의장을 면담한 뒤 당사안 농성을 풀었다. 그러나 인권위에 수사권을 주는 문제는 그동안 이에 반대해 온 법무부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 의문사 규명 특별법 제정 절실/任昌龍 기자·특집기획팀(오늘의눈)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끝내 어둠의 역사 속에 묻히고 말 것인가. 새정부 들어 의문사 관련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등이 그토록 기대했던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무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金鍾泌 총리는 13일 열린 국회 대정부질의 답변에서 의문사 문제는 시효가 지나 재수사는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지난 11일 열린 국민회의 확대간부회의에서도 ‘민주화 관련자 명예회복 및 예우에 관한 법’ 제정은 추진하되,의문사 진상규명 문제는 내년에 설치될 국가인권위원회에 넘기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인권위는 그 지위나 수사권 확보 등을 놓고 법무부,국민회의,시민단체들 간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유가족들은 이때문에 수사권이 보장될지 의문인 인권위에 의문사 문제를 넘겨서는 안되며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안기관 전·현직 관계자 조사가 불가피한 작업을 수사권 없이 한다는 것은 ‘진상규명을 포기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의문사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 적지않은 사람들의 죽음이 권력에 의해 은폐·조작되며 사회문제화되어 왔다. 지난 70년 이후 유가족들과 인권단체 등이 공식 제기한 의문사만 해도 40건이 넘는다. 그러나 진상이 규명된 것은 거의 없다. 유가족들은 군사독재하에서 숨죽여 살며 여기까지 왔는데 새정부마저 시효가 끝나 조사할 수 없다면 의문의 죽음은 영원히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허탈해하고 있다. 남아공은 수사권을 가진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치,권력에 의해 자행된 고문·살해범죄의 진상을 낱낱이 밝혔다. 그리고 화해차원에서 범죄자들을 사면해주었다. 이는 진정한 화해는 진실을 바탕으로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우리에게도 특별법이든,인권위든 의문사 진상규명에는 수사권이 꼭 필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유가족들은 지난 4일부터 국회앞에 천막을 쳐놓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추위에 떨며 ‘진실의 햇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범죄자들을 진정용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 사회·문화분야 대정부 질문

    ▷金秉泰(국)◁ ­해방 이후 발생한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 용의. ­통일에 대비한 ‘남북한 문화교류 센터’ 설치 용의. ­휴전선내 상태계 보존을 위한 ‘남북환경당국자회의’ 추진 의향. ▷金洪信(한)◁ ­2002년 월드컵 남북단일팀 구성을 위한 정부의 노력. ­‘제2건국운동’이 신한국 창조와 다른점. ­독도와 배타적 영유권을 간접적으로 포기했다는 비판에 대한 견해. ▷金文洙(한)◁ ­실업예산이 목적외로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 ­공공근로사업의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한 대책. ­결식아동 대책을 위한 별도예산 편성 의향. ▷秋美愛(국)◁ ­전자주민 카드 시행을 중단할 의향. ­공무원 비리 근절을 위한 획기적인 대책. ­법무부의 인권법 시안 중 문제조항의 수정 용의. ▷金範明(자)◁ ­영화 완전등급제 반대. ­일본 문화 개방에 따른 제도적 장치마련 여부. ­수입식품에 대한 사전 검사제도 도입에 대한 견해. ▷李海鳳(한)◁ ­지방재정 안정화 대책. ­대통령 직속으로 중앙인사위를 설치하는 이유. ­비정부기구(NGO) 등의 자발적 국민운동 참여유도 용의. ▷黃圭宣(한)◁ ­심야영업 규제완화의 시행보류에 대한 총리의 견해. ­보육시설의 부실에 대한 실태파악과 대책. ­사회복지전문요원의 직렬화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鄭一永(자)◁ ­문화개방에 대비한 우리 문화의 경쟁력 제고 방안. ­추징금의 강제집행 등 대체 형벌제도 마련에 대한 견해. ­각 부처의 정책조정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방안. ▷趙漢天(국)◁ ­노사정위원회의 위상강화에 대한 정부의 입장. ­영월지역의 대규모 건설사업을 재검토할 의향. ­영세사업장에 대한 안전관리 기술자문 시범사업 확대실시 용의. ▷黃祐呂(한)◁ ­사회복지시설 입퇴소 절차 개선 의향. ­교육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한 총리의 견해. ­해외입양인 관리 사무국을 설치할 의향. ▷洪文鐘(무)◁ ­실직자와 노숙자에 대한 정부의 대책. ­지방대학 육성을 위한 개혁 방안. ­환경 마크제도와 환경 친화기업 지정제도 추진 상황.
  • 민주열사 열전:15/前 서울대생 朴鍾哲(정직한 역사 되찾기)

    ◎5공 정권연장 야욕 꺾은 ‘民主불씨’/‘체육관선거’ 잡음 없애려 시국사범 검거령/‘남영동’으로 연행당해 물고문 도중 질식사/6·10항쟁 도화선… 4개월후 전모 밝혀져 1987년 1월14일 만 21세의 대학생 朴鍾哲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5공 독재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고문살인이었다. 철권통치로 국민을 억압해온 5공은 여느 때처럼 국민을 속이려 했으나 1987년 역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권의 안위와 관련된 시국사건에서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런 군사정권에게도 박종철의 죽음은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층 더 예기치 않았던 것은 박종철의 죽음이 일으킨 역사적 파장이었다. 내각제 및 직선제 개헌론이 심각하게 대두되는 가운데 5공은 87년 연말의 대통령선거를 ‘체육관’ 선거로 치뤄 정권을 연장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86년 말 경찰 수뇌들은 운동권 수배자들을 전원 검거하라고 강력 지시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는 87년 1월초 서울대 언어학과 3년생인 박종철이 서울대 민민투위원으로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중요 수배자인 朴鍾雲을 은닉하고 연계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고 박종철을 연행 수사하여 박종운 등 민민투 지하 중앙조직원들을 검거할 계획을 세운다. 1월14일 아침 7시20분경 조한경 강진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 대공 소속 경찰들은 신림동 하숙집을 급습해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로 연행,신문했다. 10시40분경 신문장소를 옮겨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박종철을 닥달하였으나 모른다고 하자 조한경 등은 박종철의 가슴과 다리를 때리고 옷을 모두 벗게 한 뒤 물이 가득 채워진 조사실 안의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들은 조사실 안의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손과 발목을 결박하고 나서 반금곤 황정웅이 각각 겨드랑이를 잡고 등을 누른 상태에서 강진규가 욕조안에 들어가 양손으로 박종철의 머리를 잡아 물 속으로 집어넣고 한참 후에 끌어내는 물고문을 반복했다. 이때도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더 혼내주라는 조한경의 지시에 이정호가 가세,결박된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 올린 채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고문을 가했다. 이때 박종철은 목부분이 욕조의 턱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게 되어 11시20분경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사망했다. 30,40분 만에 저질러진 이 물고문 살인으로 결국 5공의 정권연장 야욕은 물건너가게 된다. 박종철의 물고문 질식사는 4개월 후에야 그 잔혹한 진상 전반이 파악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여곡절 끝에 당시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처음부터 일반에 알려졌다. 그간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시국사건으로 죽어갔으나 의문사란 말만 남기고 그대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박종철의 죽음은 경찰과 정권이 몇겹으로 세운 두꺼운 벽을 뚫고나와 ‘양지’로 향하는 묘한 힘을 발휘했다. 이 힘은 정통성없는 5공 정권의 취약한 근저를 흔들었다. 2월7일의 박종철 열사 국민추도회와 3월3일의 고문추방 대행진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5공은 각각 3만명,6만명의 전경들을 동원해야 했다. 결국 박종철의 죽음은 6·10 민주항쟁을 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고 궁지에 몰린 군사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 밖에없었다. ‘제2의 김주열’로 불리기도 하는 박종철은 앳된 얼굴의 젊은이였지만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의지는 남달리 강했다. 그는 결코 다른 사람 때문에 재수없게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다가 고문사함으로써 우연히 역사의 무대에 떠오른 인물이 아니다. 대공 3부의 고문경찰들이 연행 직전 작성한 수사계획서는 박종철을 민민투의 중요 지도자로 지목하고 각종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검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에서 말단 공무원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박종철은 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들어온 직후부터 동아리 가입과 농촌활동참여 등을 통해 현실 인식을 깊게 했다. 2학년 때 미국 문화원농성 지원 가두시위로 구류 5일을 살았으며 여름방학에는 안양공단 근처의 ‘닭장집’에 살면서 노동자로 취직하기도 했다. 86년 3학년때 언어학과 과회장에 뽑힌 박종철은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가두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과거 전과 때문에 구속됐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7월15일 출소했다. 86년11월23일 81학번 사회학과의 동아리 선배로 민추위 사건에 지명수배된 박종운이 박종철의 하숙방에 찾아와 하룻밤을 묵은 뒤 떠난다. 87년 1월8일 박종운이 다른 동료와의 연락을 부탁하기 위해 다시 박종철 하숙방을 찾았다. 6일 뒤 박종철은 발가벗기고 손발이 묶인 채 박종운의 거처를 추궁하는 경찰들에게 물고문당하다 죽었다. □朴鍾哲 연보 1965년 4월:부산 출생 83년 2월:혜광고 졸업 84년 3월:서울대 언어학과 입학 86년 4월: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참가,구속 86년 7월:징역 10월·집행유예 2년으로 출소 87년 1월: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사 ◎구속 경찰관·유족들 지금은/5명 실형선고… 형기 마치고 출소/경찰청 산하단체 근무하다 해임도/유족들 배상금 2억여원 수령 고문 경찰관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종철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된 경찰관 5명은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고 3년 만기에서 최고 7년3개월의 수형 후 가석방 등으로 현재 모두 출소했다. 올 6월 이들 중 3명이 규정을 어기고 경찰청 산하 단체에 근무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곧 해임됐다. 이정호씨와 강진규씨는 감옥에서 나온 뒤 경찰공제회에 들어가 일반직 4급으로,조한경씨는 총포화약안전기술협회 과장으로 근무했다. 이들과는 달리 범인도피 및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던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박처원 전 치안감 등 4명은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유죄취지 파기환송,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한편 박종철의 유족은 89년 9명의 경찰관과 국가를 상대로 1억2,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95년 11월 “국가와 조씨 등 고문 경찰관 5명은 연대해 1억4,700만원을 배상하고 강씨 등 경찰수뇌 4명은 직무유기 및 범인도피의 책임을 지고 2,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유족은 국가로부터 이자를 포함한 손해배상금 2억4,000만원을 수령했다. 국가가 배상금 전액을 지급한 만큼 검찰은 직접적 책임이 있는 조씨 등에게 구상금청구 소송을 통해 배상금 일부를 받아내야 하나 최근 이들에 대한 재산 자력조사 결과 배상금 지급 능력이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부인이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꾸리거나 노점상으로 생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문 밝혀지기까지/모든 수단 동원해 은폐 시도/3차 수사후 고문치사 확인/치안총수 등 경차 9명 구속/‘탁치니 억 쓰러져’ 유행어로 경찰과 5공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박종철의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지만 결국 3차의 수사 끝에 치안총수를 포함 9명의 경찰이 구속됐다. 1월14일 물고문하던 경찰들은 박종철의 상태가 이상하자 즉시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 오연상씨를 불러 응급처치를 간청했으나 이미 박종철은 숨진 뒤였다. 다급해진 경찰은 이날 오후 보호자와 이미 합의를 했다며 서울지검에 시신의 화장을 요청한다. 증거인멸을 위한 경찰의 이 요청은 거부됐다. 15일 석간신문에 조사받던 학생이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나간다. 오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변사사실을 공식 시인했으나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으며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부연설명했다. 이날 밤 9시 안상수 검사 입회하에 행해진 부검에서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1과장은 물고문 도중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질식사한 것 같다는 부검소견을 피력한다. 강 치안본부장 등은 황 과장에게 심장마비사로 부검감정서를 써줄 것을 협박 회유하기 시작한다. 16일 가족들이 벽제에서 화장한 유골을 임진강에 뿌렸다. 이때 아버지 박정기씨는 “잘 가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해 국민들을 울렸다.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신문이 보도됐다. 결국 치안본부 특수대는 17일 수사에 착수 19일 고문사를 공식인정하면서 조한경 강진규 2인을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5월20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이 즉시 구속된다. 5월29일에는 범인 축소조작에 나선 박처원 치안감,유정방 경정,박원택 경정 등 3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됐다. 88년 1월15일 황적준 국과수 과장의 경찰 회유 메모가 보도되면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된다.
  • 어머니의 한/한충목 열사범추위 집행위원장(굄돌)

    20년전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절규하며 산화한 청년 전태일이 있었습니다. 87년,‘독재 타도,호헌 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이한열 군이 직격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이렇게 죽어간 꽃다운 청춘이 430명. 자기 한 몸의 안락보다도 모두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꿈꾸다가 지금 우리와 함께 할 수 없게 된 이들을 우리는 열사라 부릅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98년 스산한 초겨울,여의도 국민회의 당사앞에선 먼저 간 아들·딸보다 더 오래동안 싸우고 있는 어머님·아버님들이 ‘민족민주유공자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무기한 천막농성에 돌입하셨습니다. “살아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올해 안엔 특별법 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국민의 정부’의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유가족회장단을 초청한 자리에서 특별법이 정기국회에서 통과되도록 정부와 여당에 적극 협력할 것을 지시하겠다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법안이 아직 국회 법사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가족의 가슴은 한번 더 무너져내립니다. 김대통령은 지금 제2의건국 즉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 모든 국민이 함께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나라가 바로서려면 민주화를 외치며 스러져간 분들에의 올바른 역사적 평가,의문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 그리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분들 가슴에 맺힌 한과 억울함이 법제정으로 씻기리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특별법 제정은 우리 역사와 나라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 될 것이며 죽은 자식과 살아 있는 어버이들의 한맺힘을 푸는 소중한 시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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