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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군 DMZ 도발… 포격전/철원/김 대통령 “철저 대처”

    ◎북 14명 월경에 경고사격… 23분간 교전 16일 상오 11시2분부터 11시25분까지 23분동안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목실리 육군 백골부대 전방 비무장지대에서 아군과 북한군 전방경계초소(GP) 사이에 포탄까지 동원된 총격전이 벌어졌다. 총격전은 북한군 7명이 상오 10시57분쯤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 70m 지점까지 내려오는 바람에 일어났다.북한군은 낮 12시2분쯤 북한쪽으로 돌아갔다. 이날 충돌로 아군측은 GP 관측소구와 지하벙커 입구 일부가 파괴됐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그러나 교전후 북한군 GP쪽으로 앰뷸런스가 들어가는 것이 확인돼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는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비무장지대에서 총격을 가한데 대해 유엔사를 통해 항의하고 재발방지를 촉구하기로 했다. 비무장지대에서 아군과 북한군 사이에 경고사격은 더러 있었지만 양측이 조준사격으로 총격전을 벌인 것은 92년 3월20일 이후,포탄을 사용한 것은 70년 이후 처음이다.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아군은 이날 상오 10시50분 북한군 7명이 북방한계선과 군사분계선 사이의 철책을 넘어오는 것을 발견했다.이어 이들이 군사분계선까지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자 연속적으로 “경고한다”는 경고방송을 내보냈다. 아군은 북한군이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11시2분 유엔사 교전규칙에 따라 K­2 소총 2백여발을 하늘을 향해 경고사격했다.당시 북한군은 아군 초소에서 1.3㎞ 가량 떨어져 있었다. 3분쯤 후인 11시5분쯤 북한군 GP에서 아군 GP를 향해 소총과 기관총 70∼80발을 조준사격했다.이에 우리측도 캘리버50 기관총 70여발을 응사했다. 북한군은 11시21분 아군 초소 부근에 아군의 무반동총에 해당하는 비반충포 2발을 발사한데 이어 박격포 10여발을 쏘았다. 아군은 기관총 사격과 함께 11시25분쯤 57㎜ 무반동총 1발을 발사했다. 총격전은 11시47분쯤 아군이 ‘상호 사격을 중지하자’는 경고방송을 내보내면서 일단락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사건 발생 직후 반기문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의도가 있는 행위인 것 같다”며 철저한 대처를 지시했다. ◎북 “남측이 도발 다수 부상” 주장 북한은 16일 강원도 중동부전선에서 북한군 7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우리 군과 총격전을 벌인 것과 관련 “남조선측의 무장도발 행위“라고 주장하며 도발책임을 한국군에 전가했다. 내외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이날 하오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을 통해 “괴뢰군 무장 악당들이 대구경 기관총을 비롯한 3천60여발의 총포사격을 가하는 무지막지한 야수적 만행으로 인민군 군인들이 심한 부상을 당했으며 초소건물들이 파괴됐다”고 주장했다.
  • 백두산호 갑판사관 최영섭 예비역 대령의 감회

    ◎북 수송선 격침… 6·25 첫 “해상 승전보”/국민성금으로 미서 구입… 훈련한번 못하고 참전/게릴라 600명 침투저지… 숨져간 전우모습 생생 6·25를 맞을 때마다 예비역 해군 대령 출신인 최영섭씨(70·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강촌마을)는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47년 전 6월25일 최씨가 갑판사관으로 승선한 해군 함정 백두산함(PC 701)은 대한해협에서 후방에 게릴라를 침투시키기 위해 접근해 오는 북한의 1천t급 무장수송선을 포격전 끝에 격침시켰다.해군 최초의 6·25 승전이었다.해사 3기로 입대,소위로 막 임관한 최씨의 당시 나이는 22살. 백두산함은 어려운 국가재정 때문에 해군 장병들과 국민들이 낸 성금 6만달러로 미국에서 구입한 국내 유일의 전투함이었다. 진해에 머물고 있던 백두산함의 승무원 42명은 당시 동해안에 이상한 배가 나타났으니 출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하오 3시쯤 목선 소해정 2척과 함께 진해를 떠난 백두산함은 하오 8시12분쯤 부산 동북방 30마일 지점에서 괴선박을 만났다.600여명의 무장병사들을 태운 북한군 수송선이었다. 즉각 3인치 직사포로 공격에 나섰고 적함도 기관포로 응사했다.20여분 동안의 치열한 교전 끝에 아군 2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했다. 하지만 아군은 함포 30발을 쏠 때까지 적함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연습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작전을 바꿔 1천m 이내로 끌어들여 쏘기로 했다.예상은 들어맞았다.직사포탄이 기관실에 적중,적함은 움직이지 못하고 기울어지다가 침몰했다. 『그해 4월 초순 하와이에서 전투함을 인수해 왔는데 어찌나 오래됐던지 쇠덩어리가 모두 빨갛게 물들 정도로 고철이었고 돈이 없어 3인치 직사포탄도 100발밖에 못샀어요』 25일 부산 중구 대청공원에서 열리는 「대한해협 전승 47주년 기념행사」에 거주지가 확인된 백두산함 승무원 15명과 함께 참석하는 최씨는 『적함이 가라앉고 있다는 소식에 만세를 부르며 숨져간 전우들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 코언 장관 미 국방대 연설 「합동작전」 요지

    ◎“군사력의 혁명적 변화 필요”/첨단기술 연결 새로운 작전 개발을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24일 하오 워싱턴 포트 맥나이어에 위치한 미 국방대학에서 행한 「합동작전」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첨단기술 적용을 통한 미군사력의 혁명적 변화를 역설했다.코언장관의 연설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지난 3월 캘리포니아의 포트 어윈기지를 방문,현대 지상전에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적용시키려는 육군의 「포스(Force)21」 작전실험을 관람했을때 군사력과 관련한 하나의 혁명적인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병사들은 그들의 배낭에 위성항법장치를 장착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손에는 열감지기와 레이저 탐지 조준경 등이 부착된 M­16 소총이 들려 있었다.또 전장전체의 병력 위치를 보여주는 계기판이 부착된 컴퓨터스크린을 갖고 있었다.그들은 지휘관과 일종의 전장 인터넷을 통해 연결돼 그때그때 전장의 상황에 적합한 명령을 하달받을수 있었다.우리는 전장에서 마이크로칩이 이루고 있는 승리를 목격할수 있었다. 이 기술을 군사력으로 연결시키고,실험을통해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수 있도록 하고,이를 충분히 이용하기 위한 작전개념과 전술들을 개발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느꼈다. 우리 군의 미래 모습을 규정짓는 중장기 계획으로 「조인트 비전 2010」이 있다.이는 첫째 우리의 군병력들에게 전장 전체의 상황을 파악케하는 전전장감지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둘째는 발달된 화력과 효율적 조직구성으로 압도적 기동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세째는 정확한 병참지원으로 어떤 목표에 대해서도 정확한 장소와 정확한 시간에 지원하는 것이 필수적이다.마지막으로는 전방위 보호능력으로 대륙간 탄도탄에서부터 세균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위협에 대처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전장에 적응해낼수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모든 병사들은 앞서 말한 사실들의 실현을 위해 연구하고 실험하고 훈련하고 있다.육군의 「포스21」뿐 아니라 공군은 「전투실험」(Battle Labs)이라는 이름하에 사이버 스페이스와 우주공간에서의 작전개념 수립에 몰두하고 있다.작전 영역을 공중뿐 아니라 우주로까지 확대하려는 것이다.해군은「협동작전능력」(CEC)체제 구축을 위한 함대전투실험을 하고 있다.이는 전장의 함정들을 모두 연결시켜 그중 어느 하나라도 적 미사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전체 함정이 함께 추적,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함정에서 응사하는 시스템으로 「네트워크 중심전투」라고도 부른다. 해병대는 「해룡(Sea Dragon)」 작전실험을 하고 있다.이는 경무장한 단위병력이 넓은 해안지역을 어떻게 신속하게 장악하느냐는 것으로 해안을 통해 상륙하는 것이 아니라 B­22수송기로 적진에 투하,내부에 광범위하게 흩어져서 포킷용 컴퓨터를 이용,함정이나 전투기,헬기 등 적목표에 대한 정확한 사격 제원을 통보해 집중사격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오늘날의 실험이나 기술,개념들은 축적된 것이 아니다.단지 시작에 불과하다.우리가 지난달 발표한 4개년 국방백서(QDR)를 구성하고 있는 3가지 기본요소인 환경 조성(shape),대응(respond),준비(prepare)도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그리고 이제 국방개혁특별팀(Defense Reform Task Force)을 창설하려는 것도 이같은 기술혁명에 대응코자 하는 것이다.앞으로 국방부의 모든 조직,기구,장비계획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중복되는 것을 폐지하고 전체적인 다운 사이징(감량)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선택을 주었고,과학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다.나라 사랑은 우리에게 미래에 도달할 비전을 앞당겨 실현하라는 의무를 주었다.〈정리=나윤도 워싱턴 특파원〉
  • DMZ서 남·북 총격/철원

    ◎북한군 5∼6명 침범… 경고사격하자 철수 합동참모본부는 10일 상오 9시30분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월정리 북방 비무장지대(DMZ)지역의 군사분계선(MDL)부근에서 북한군 5∼6명이 활동중인 것을 아군이 발견,경고방송을 했는데도 철수하지 않아 공중으로 경고사격을 가하자 북측도 대응사격후 철수했다고 밝혔다. 휴전선 부근에서 남북 군인이 서로 총격을 가한 것은 올해들어 처음있는 일이다. 합참 관계자는 『오늘 양측은 서로 10여발씩 사격했으나 조준사격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 연두회견 DJ “나 어떡해”/택일 못하고 잇따라 연기되는 사정

    ◎강경노선 택하자니 「색깔시비」 걱정/온건카드 내밀자니 노동계반발 우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지난 10일 연두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다.김영삼 대통령과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기자회견을 보고 「종합판」을 낼 계산에서다. DJ(김총재)는 그러나 회견을 15일로 한차례 연기했다.그러다가 또다시 오는 21일로 미뤘다.이 마저도 유동적이다.파업시국 상황변화를 본뒤 결정하려고 잠정적으로 잡은 일정이다. DJ는 크게 두가지 까닭으로 회견을 머뭇거리고 있다.첫째 회견내용의 강도조절 문제를 둘러싼 딜레마다.정국이 파업의 늪에 빠져 있는 탓이다. 그는 강도,온도 부담스럽다.「강」은 12월 대선을 앞둔 그가 가장 꺼려하는 대목이다.「색깔론」의 약점 때문이다.강성 이미지를 탈피하려고 무던히 애써왔다. 그렇다고 해서 「온」도 현재의 카드로는 내키지 않는다.노동계는 물론 재야 학계 종교계 등이 파업시국에 가세한 형국이다.이들은 DJ에게 강도높은 투쟁을 요구하고 있다.「온」은 이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다. 둘째는 당장 다양한 「메뉴」를동원할 수 없는 형편이다.그는 경제회생,통일문제,지역갈등 해소 등을 회견의 「삼두마차」로 준비중이다.이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비전제시를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집권능력의 부각으로 「표심」을 파고들겠다는 복안이다. 하지만 지금상황에서 이런 얘기들이 통할리가 없다.경제,특히 파업과 관련된 발언만이 효력을 발휘할 공산이 크다.나머지는 파업의 늪에 묻혀버리기 십상이다. DJ는 14∼15일 공공부문으로의 파업 확대,그에 대한 정부의 대응사태 등을 보고 기자회견을 가질 생각이다.
  • 공비 최후 발악… 혈전 6시간/무장공비 사살­입체 작전 상보

    ◎새벽 매복조에 응사… 도주… 추격… 교전끝 사살 6시간에 걸친 숨가쁜 전투였다.무장공비들은 전사 3명,부상 14명 등 아군에 막대한 피해를 안기며 마지막까지 발악을 하다 최후를 맞았다. 5일 상오 4시28분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3리 연화동 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 신축공사장 부근.전날밤부터 이곳에서 매복작전을 펴고 있던 육군 산악군단 불사조연대 2대대 7중대 소속 박수완 상병(22)과 송명훈 상병 앞으로 수상한 물체가 움직였다. 박상병이 암호인 수화로 신원을 확인하려 하자 그쪽에서는 단지 『나 중사다』라고만 했다.공비임을 직감했다.송상병이 먼저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그쪽에서 「철컥」하고 탄알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뒤이어 박상병 등이 사격을 시작했고 적은 응사와 동시에 수류탄을 밑으로 던졌다. 송상병이 수류탄 파편상을 입는 바람에 일단 교전이 중단됐다. 이어 상오 6시쯤 교전소식을 들은 기무부대장 오영안 대령 등 합신조가 현장 지휘를 위해 최초 교전지점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오대령은 『아직 주변이 어두우니 일단 흩어져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라』고 하는 순간 숲속에서 9발 가량의 총탄이 날아왔다.오대령은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현장에서 전사했고 대대장 박경상 중령은 허벅지 관통상을 입었다. 이어 대대장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는 과정에서 7중대장 김용석 대위,7중대 행정보급관 이동환 상사가 빗발치는 공비들의 사격에 중상을 입었고 통신병이 부상을 입었다. 연대 정보장교 서형원 대위는 부상당한 통신병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다 등에 관통상을 입고 산화했으며 강민성상병도 숨졌다. 공비들은 숲속에 몸을 숨긴 채 아군보다 유리한 고지대에서 차량이나 나무 뒤로 몸을 숨긴 아군을 조준사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또 부상 당한 상관과 동료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피해가 늘어났다. 불사조연대의 정면 교전이 계속되는 동안 상오 9시30분쯤부터 장선용상사 등 공수특전단 비호부대원 12명은 산아래 개천을 건너 공비의 후미에서 조심스럽게 전진해갔다. 비호부대원들은 1시간여 동안의 추적끝에 산밑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고 있는 공비들을 발견,정조준사격을 가해 이중 1명을 사살했다.이어 장상사는 공비를 생포하기 위해 4차례에 걸쳐 『투항하라』고 외쳤으나 공비가 수류탄을 던지려는 자세를 취하자 일제사격을 가해 사살했다.
  • 미기 또 이라크 미사일 공격

    ◎국방부 “이동 레이더 추적받고 응사” 【워싱턴 AP 연합 특약】 미 공군 F­16전투기가 이라크 방공레이더에 또 한차례 미사일 공격을 했다고 미 국방부 대변인이 4일 밝혔다. 미 국방부 샘 그리즐 대변인은 『이날 하오 6시(한국시각)쯤 F­16전투기가 이라크측 이동식지대공 미사일레이더망에 의해 추적당하고 있다는 신호를 받고 이 시설에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밝히고 『이는 미 공군 전투규칙에 따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지난 3일동안 모두 2차례에 걸쳐 이라크에 대한 공격이 단행된 것인데 이번 공격은 지난 2일에 있었던 미사일발사지역으로부터 40㎞ 떨어진 곳으로 목표물이 파괴됐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번 미사일 공격과 관련,미 공군전투기가 미사일레이더에 포착,조준됐었다고 밝혔으나 정밀조사결과 그같은 현상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 총상 무릅쓰고 남행 사투 32시간/곽 중사 북 탈출서 귀순까지

    ◎급식부족·잦은 구타에 시달리다 결행/매복중 새벽이탈… 눈치챈 북한군 총격/낮엔 은신… 어둠틈타 DMZ넘어 국군에 수건 흔들어 13일 낮 강원 고성군 통일전망대 군사분계선을 통해 북한군 중사 1명이 귀순해옴으로써 12일 상오 이곳에서 났던 총성과 폭발음은 귀순을 저지하기 위한 북한군의 비상조치였음이 드러났다.이날 귀순한 북한군 제31사단 민경대대 소속 곽경일 중사는 탈출시도 직후 추격에 나선 북한군과 총격전을 벌여 총상을 입었음에도 목숨을 건 귀순에 성공했다. 곽중사의 필사의 탈출 32시간을 재구성해본다. 비무장지대 근무자인데도 평소 급식부족과 잦은 구타에 시달리던 곽중사가 남행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12일 새벽은 안개가 짙게 끼고 달빛도 희미했다. 곽중사는 11일 저녁 매복근무에 투입돼 구선봉 부근 참호에서 동료의 경계가 허술한 틈만 기다렸다.12일 상오 4시쯤 탈출기회를 포착한 곽중사는 AK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참호를 벗어났다.평소 비무장지대 수색을 통해 이곳 지형과 지뢰매설지역을 익혀놓은 곽중사는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곽중사의 이탈소식을 보고받은 북한군 민경대대는 곧바로 수십명의 병력을 긴급투입했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상오 4시30분쯤 군사분계선 동해안 철책선과 인접한 통일전망대 북쪽 구선봉 북한군 경계초소 부근에서 여러발의 총성이 났다.북한군의 사격과 곽중사의 응사였던 것이다.곽중사가 총상을 입은 것은 이때였다. 이어 상오 7시쯤 북측 지역 미확인 지뢰지대에서 폭발음이 났다.수류탄이나 지뢰폭발로 추정되는 폭발음이 난 뒤 북쪽에선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다만 군인 1명이 업혀가거나 북쪽 해안에서 20∼30명의 북한군이 수색을 벌이는 것이 목격됐을 뿐이다. 곽중사는 총상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간신히 군사분계선 부근까지 간 뒤 수풀에 몸을 숨기고 북한군의 동향을 살피며 날이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렸다. 일몰 직후 곽중사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넘어왔다.우리측 미확인지뢰지대를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곽중사의 이동은 느리기만 했다.국군의 OP(관측초소)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미리 준비한백기를 아군에 흔들어 보이며 귀순의사를 표시했다.귀순을 확인한 국군이 다가왔다.자유의 품에 안긴 것이다.〈황성기 기자〉
  • 칠성산의 새벽 치열한 총격전/무장공비­추적 전투상보

    ◎두 젊음 장렬한 산화/한밤 매복중 공비발견 교전/강정영 상병·송관종 일병 앞장서 추격… 전사/강 상병·송 일병 1계급 특진 추서 【강릉=김경운·강충식·이지운 기자】 무장공비 토벌작전 5일째인 22일.강릉시 강동면 칠성산은 깊은 어둠에 싸인 채 바람소리만 풀섶을 스치고 있었다.전날 저녁 7시부터 매복에 들어간 육군 노도부대 31연대 7중대 유탄발사기 사수 송관종 일병(21)은 흔들리는 나뭇가지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바로 전날 특전사 이병희 중사가 공비의 총탄에 전사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오 1시쯤 됐을까 인근 매복조의 한 병사가 계곡에 은신중인 공비 2명을 야간투시경으로 포착했다. 『전방 50m 계곡에 공비 2명 발견,전투준비』 『지지직』하는 무전기 작동소리와 함께 소대장으로부터 전투태세 준비명령이 하달됐다. 송일병이 방아쇠에 긴장된 손가락을 얹은 채 동료들과 2m 간격을 유지하며 계곡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가자 이를 눈치챈 공비들이 AK소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이에 송일병은 계곡을 겨냥,M­60 유탄발사기를 발사했다.동료들도 K­1 소총과 조명탄 등을 공비들을 향해 응사했다.칠성산 계곡은 한순간 조명탄이 대낮처럼 밝혀진 가운데 총성과 화염에 휩싸였다.총성이 무척이나 요란하다고 생각하던 순간 송일병은 누가 머리를 세게 치는 느낌을 받았다.바로 어둠이 송일병의 눈길을 가로막았다. 교전 30여분만에 공비들이 은닉한 곳으로 접근한 동료들은 얼룩무늬 군복,통일화 차림의 공비 시신 1구가 심장과 허벅지에 피를 흘리며 바위틈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안내원 김윤호(34·대위)였다.김이 지녔던 M­16은 10여m 떨어진 숲에서 발견됐다. 『1명은 사살하고 1명은 달아났다』,『운동화를 신고 긴 반바지를 입었으며 견장이 없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었다』 무전기에서 쏟아지는 다급한 목소리에 칠성산 서쪽 목계리 계곡에서 뜬눈으로 지새던 화랑부대 13연대 9중대 3소대 강정영상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주변에서는 간헐적으로 총성이 이어졌다. 상오 6시40분쯤 먼동이 틀 무렵 강상병은 산정상으로 도주하는 공비 1명을 포착했다.강상병은 탄창이 빌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 힘을 가했다.공비를 향한 일제사격이 시작되면서 계곡은 총성으로 가득찼다. 표적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드는 순간 무언가 앞면에 날아들며 별이 번쩍였다.그리곤 정신을 잃었다.강상병은 산 아래에 대기중이던 앰뷸런스에 실려 강릉 국군병원으로 긴급후송됐으나 후송중 숨졌다. 교전 25분여만에 머리와 상체에 총탄을 맞고 쓰러진 공비 1명이 새벽 안개와 계곡을 메운 초연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육군은 송일병과 강상병에게 1계급 특진을 추서하는 한편 전날 전사한 이병희 중사와 함께 서울 국군통합병원에서 1군사령부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장례일자는 유족과 협의해 결정하기로 했다.
  • 함장 사살 이상호 대위·조현덕 하사/무장공비­사살 유공자

    ◎“새벽 매복지점 15m앞 공비 발견”/공비,바위뒤 응사… 집중사격… 시체확인 무장공비를 태우고 온 잠수함 함장 정용구(42·중좌)를 사살한 육군 11사단 13연대 9중대장 이상호 대위(28)와 화기소대 2분대장 조현덕 하사(23)는 『적을 발견하는 순간 꼭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고 밝혔다. ­언제 칠성산에 배치됐나. ▲21일 밤 작전명령을 받고 칠성산 9백34m 고지에 매복준비를 마쳤다.3개소대 병력 72명을 1개조에 3∼5명씩 매복시키고 실탄과 수류탄 등을 지급했다. ­매복조는 어떻게 운용했나. ▲능선의 2㎞에 걸쳐 물샐틈없이 주요 목과 지형지물에 매복조를 배치했다. ­공비를 발견할 당시 상황은. ▲22일 상오 6시30분쯤 2분대 매복지점에서 3시 방향으로 15m쯤 떨어진 곳에서 발견했다.당시 공비는 짙은 밤색바지에 흰색 상의,끈없는 운동화 차림이었다. ­사살 순간은. ▲바위뒤에 은신한 공비를 향해 조분대장의 K2 소총사격을 신호로 수류탄 2발을 던졌다.안전핀을 뽑은 뒤 3초후에 던져 상대방이 집어던질 틈을 주지 않았다.이어 소총사격을 했다. ­공비의 대응은. ▲사격이 시작되자 공비도 바위뒤에 숨어 AK 소총으로 4발을 응사해왔다.그러나 아군의 집중사격으로 더이상의 저항은 없었다. ­확인 사살은. ▲사격후 20분뒤에 다시 수류탄 2발을 던졌다.적은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숨져있었다.앞니에 금이빨 3개를 한 점으로 미뤄 정용구로 판별했다. ­유류품은. ▲AK 소총과 탄창안 실탄 17발,북한제 권총과 실탄 5발을 수거했다.스위스제 시계와 국산담배 디스 5개비,성냥,구운 옥수수 18개가 나왔다.번호표시가 없는 M16 탄알 6발도 갖고 있었다. ­3소대 소속 강정영 상병은 어떻게 총에 맞았나. ▲교전이 끝난뒤 이상유무를 점검하다 왼쪽 이마에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전우를 잃어 착잡하다.
  • 무장공비­침투서 탈출까지

    ◎14일 퇴조항 출발 38시간 걸려 강릉에/15일­오후 9시 공작원 등 5명 상륙/17일­2차접선 성공… 귀항준비중 좌초/18일­공작원 3명 탈출뒤 차례로 도주 생포된 무장공비 이광수의 진술을 토대로 무장공비 26명이 북한을 떠나 강릉 해안에 집단 침투할 때까지의 상황을 재구성해 본다. ▷침투◁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의 상어급 소형 잠수함이 함남 퇴조항을 출발한 것은 지난 14일 상오 5시.보통 이 정도 규모의 잠수함 함장은 중좌(소령급)가 맡아 왔으나 이번에는 특수 임무를 띠고,두 계급 높은 대좌(대령급)가 함장을 맡았다. 3명의 공작원(정찰조)을 비롯,안내원·승조원 등 모두 26명을 태운 잠수함은 15일 하오 7시 강릉해안 3백∼4백m 지점에 도착한 뒤 하오 9시쯤 공작원 3명과 안내원 2명 등 모두 5명을 해안에 침투시켰다.잠수함은 이내 공해상으로 빠져 나가 인민무력부 정찰국과 교신,침투 성공을 보고하고 다음 지령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이 사이 국군 장교복으로 위장한 공작원들은 강릉비행장 등을 오가며 주요 시설물을 사진에 담았다.다음 날인 16일 하오8시30분 임무를 마친 공작원을 태우려고 했으나 접선에 실패,또다시 공해로 멀리 나갔다가 17일 하오 8시30분 같은 장소로 접근해 공작원 등을 모두 잠수함에 실었다.성공이었다.1차 접선이 실패하면 2차 접선은 하루 뒤 같은 시각,같은 장소에서 재시도하라는 것은 상부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은 내용이다.그러나 방심한 탓일까.하오 11시쯤 그만 잠수함이 파도에 올라타는 바람에 좌초되고 말았다. ▷탈출◁ 무장공비들은 18일 새벽 1시 전원 탈출키로 결정하고 30분후 가장 먼저 공작원 3명이 해안을 떠나 도주했다.이들은 각자 M16 1정과 실탄 90발,권총 1정·수류탄 2발 등으로 중무장했다.국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얼룩무늬 전투복에 전투모와 배낭을 매고 체크 무늬 티셔츠를 속에 입었다.산악루트를 이용한 월북이 목표였다.2시간 뒤 이광수와 안내원 2명이 『밥을 구해 오겠다』며 두번째로 대열을 이탈했다.곧 이어 나머지 공비들도 모두 잠수함을 떠나 도주 길에 올랐다.이들이 떠난 잠수함에는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확약하는 「충성맹세문」이 놓여 있었다. ▷사살◁ 이들에게 탈출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도토리·머루·다래로 끼니를 때운 승조원 11명은 18일 하오 『사살하라』는 상부의 긴급 지령을 받은공작원들에 의해 가장 먼저 죽음을 맞았다.청학산 정상에서였다.비전문가인 탓에 기동성이 떨어져 혹여 남쪽에 「일망타진」의 기회를 줄까봐 우려한 처사였다.전략적 가치가 많은 공작원들의 「무사귀환」도 빼놓을 수 없다.다음날인 19일 상오10시10분쯤에는 공비 3명이 만덕봉에서 수색대에게 발각되자 권총으로 응사하다 전원 사살됐다.하오 2시57분쯤에는 칠성산에서 3명이 저항 끝에 사살됐다.하오 4시26분쯤에도 강릉시 강동면 산성우리에서 추적 중인 국군 수색대와 교전끝에 사살됐다. 유일한 생포자인 이광수는 이에 앞서 18일 하오 6시쯤 경찰에 체포됐다.
  • 적이다! 엎드려! 긴박의 15분/불사조부대 장병 공비사살 순간

    ◎공포 쏜 후 자수권유… 공비들 권총응사/포위망 좁혀 반격… 유탄 발사 후방차단 육군 산악군단 불사조부대 정하욱 소령(40)과 민원기(22)·번성훈 병장(23),안경복(22)·김용우 상병(22) 등 5명이 군용트럭을 타고 만덕산으로 향한 것은 상오 9시40분쯤. 송이버섯을 캐던 주민이 무장공비가 있다는 신고를 해온 것이다.상오10시쯤 만덕산 마을에 도착하자 한 주민이 『산 중턱에서 군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고 추가 신고했다. 그곳은 우리 군부대가 수색중인 곳이 아니었다.정소령은 5명의 인원으로는 불안하긴 했지만 운전병 번병장까지 소총으로 무장시키고 지체없이 부대원을 이끌고 만덕산으로 올랐다. 1백50여m쯤 오른 상오10시15분쯤 나무 풀숲 사이로 짧은 머리의 남자 4명이 모여있는 것이 포착됐다. 정소령은 『적이다.엎드려라』고 소리쳤고 부대원들은 침착하게 일제히 나무와 바위 뒤에 엎드려 사격자세를 취했다. 공비들은 우리 군 부대원을 보고 재빨리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정소령이 공중에 대고 3발을 위협사격하며 『총을 버리고나와라』고 소리치자 공비들은 권총으로 응사하기 시작했다. 부대원들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이들이 숨은 것으로 보이는 풀숲과 바위를 향해 일제히 총격을 퍼부었다. 『타타탕,쾅』 어렴풋이 한명이 도주하는 것이 보였다. 최고참 민병장이 후방차단을 위해 K-201 유탄발사기로 6발을 쏘았다.2명은 좌우로 돌아 공비들을 포위했다. 1인당 20∼30발정도씩 15분여정도 사격하자 적의 응사가 없어졌다. 상오10시30분쯤 부대원들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수색을 시작했다.3명이 머리와 가슴 등에 총상을 입고 숨진채 바위뒤에 쓰러져 있었다. 주변에는 소련제 TT 권총 1정과 탄피 20여개가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총성을 듣고 달려온 지원부대는 이미 달아난 공비를 추격하고 있었다.
  • 「12·12」 「5·18」 26차 공판/증인신문 지상중계

    ◎“임무 받고 출동때 부대원들에 실탄 지급”·“차량통행 저지해도 계속 다가와 사격”­김광택 증인/“승용차에 대한 총격 어떻게 발생했나”­재판장 12·12 및 5·18사건 제26차 공판이 1일 서울지법 제417호 대법정에서 열렸다.지난 6월27일 제17차 공판이래 마지막 공판은 김광택 당시 20사단 61연대 2대대 6중대장에 대한 증인신문으로 시작됐다.채택증인 91명중 40명에 대한 증인신문이 이날로 마무리 됐다. ○김광택 증인 ▲박봉식 검사=증인이 소속됐던 20사단 61연대 2대대 6중대는 80년 5월21일 하오6시 광주와 목포간 도로를 봉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죠. ▲김증인=그렇습니다. ▲박검사=임무를 부여받고 출동할 때 실탄을 수령해 부대원들에게 지급했습니까. ▲김증인=그렇습니다. ▲박검사=5월21일 밤 10시10분쯤 효천역 부근에서 도로 차단임무를 수행하던중 목포쪽에서 차량 6대에 탑승한 시위대와 교전한 적이 있습니까. ▲김증인=있습니다. ▲박검사=5월22일 새벽 1시쯤 같은 지역에서 근무하던중 광주쪽에서 버스 5∼6대를 타고 오는시위대와 교전한 적이 있습니까. ▲김증인=예. ▲박검사=5월22일 상오 8시30분쯤 효천역 부근에서 광주쪽에서 오던 승용차 1대에 총격을 가해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을 사망케한 사실이 있습니까. ▲김증인=먼저 총을 뺐기때문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김영일 재판장=5월22일 상오 8시쁨 승용차에 대한 총격은 어떻게 발생했습니까. ▲김증인=사병이 차량통행을 막으려 해도 계속 다가와 사격을 했고 총격이 끝나고 가보니 승용차에 탄 4명이 모두 사망했으며 그중 1명이 총일 갖고 있었습니다. ○최규진 증인 ▲김상희 부장검사=당시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장이던 증인은 5월21일 하오 1시 전남도청앞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이 장갑차와 버스를 타고 돌진해 오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최증인=알고 있습니다. ▲김부장검사=5월24일 하오 2시븜 증인의 부대가 주남마을에서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하던중 효천역 부근에 이르렀을때 매복중이던 보병학교 병력이 증인의 부대에게 90미리 무반동총으로 사격을 가했습니까. ▲최증인=그렇습니다. ▲김부장검사=당시 보병학교병력이 신분확인이나,사전경고를 했습니까. ▲최증인=폭도로 오인해서 사전경고는 없었습니다. ▲김부장검사=증인은 보병학교 병력의 당시 총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최증인=잘못된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익원 변호사=사병들에게 실탄을 분배한 시점은 언제입니까. ▲최증인=구체적으론 기억이 나지 않으나 5월 21일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상균 증인 ▲박태식 검사=당시 20사단 62연대 2대대 5중대장이던 증인이 소속돼있던 2대대는 80년 5월21일 하오 광주 서구 화정동소재 광주통합병원 앞돌고개로 출동해 시위대와 대치한 사실이 있지요. ▲이증인=그렇습니다. ▲박검사=다음날인 22일 하오 연대로 부터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고 통합병원쪽으로 이동하던중 이를 저지하던 무장시위대와 민가지역에서 교전한 사실이 있나요.또 당시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병력들은 응사를 하면서 통합병원으로 이동했나요. ▲이증인=교전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대장의 발포지시가 있었던것이 아니고 상대편에서 발포함에 따라 병사들이 스스로 자위권을 위해 총을 쏜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익원 변호사=5월22일 돌고개 작전 전후에 자위권 발동 지시나 관련지침을 받은 사실이 있나요. ▲이증인=총기 사용은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절대 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또 출동에 앞서 중대장과 병사들의 작전에 임하는 자세애 대한 설명도 있었습니다. ▲서변호사=당시 총기를 일체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만 있었고 총기사용 허가는 22일 통합병원으로 이동할 당시 이후의 일이지요. ▲이증인=그렇습니다. ○박종규 증인 ▲이부영 검사=당시 3공수여단 15대대장이던 증인은 3공수여단 병력이 5월22일 새벽 0시40분 광주교도소 앞에서 시위대와 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의 서종덕등이 총상으로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박증인=알고 있습니다. ▲서익원 변호사=광주에 있을 동안 정호용 특전사령관이나 상급부대로부터 자위권 발동 지시를 받거나 계엄사령관의 자위권천명 방송을 본적이 있습니까. ▲박증인=지시를 받거나 방송을본적은 없었고 광주교도소로 이동하고난뒤 교도소에 뿌려진 삐라를 보고 알았습니다. ○박준병 증인 ▲이부영 검사=당시 20사단장이던 증인은 5월22일 광주 효천역앞에서 20사단 병력이 승용차에 총격을 가해 민간인 3명을 사살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박증인=알고 있습니다. 시신을 광주 국군 병원에 인계했습니다. ▲이검사=5월26일 광주 재진입 지시는 최종적으로 누가 했습니까. ▲박증인=전교사령관이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세동 증인 ▲김수연 변호사=달시 특전사 작전참모였던 증인은 광주사태 기간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수행해서 광주에 내려간 사실이 있습니까. ▲장증인=세차례 수행했습니다. 5월21일과 23일,26일 세차례 내려가 각각 다음날 올라왔습니다. ▲이부영 검사=7공수여단장이 전교사에 머문 사실을 알고 있죠. 7공수 33대와 35대대는 31사단에 작전배속돼 여단장에게는 작전 지휘권이 없는데도 7공수여단이 전교사에 상황실을 만든 사실은 틀림없죠. ▲장증인=상황실인지 여단장의 통신축선을 유지하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상황판과 무전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 이 국방 「북방 한계선」 발언 전말

    ◎「한계선」·「분계선」 차이 설명중 오해/국방부의 상세한 해명으로 “진화” 이양호 국방장관의 「서해 북방한계선(NLL)」관련 발언 파문이 국방부측의 적극 해명으로 진정되고 있다. 16일 국회 통일·외교·안보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국민회의 천용댁의원은 북한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월경때 국방부가 미온적 대응을 한 이유를 따졌다.이장관은 『서해상의 북방한계선은 우리측이 임의로 정한 선』이라며 『때문에 군사분계선 침범때처럼 즉각 응사하지 않고 동태를 감시했다』고 답변했다.이에 야당 의원들이 항의했고 이장관은 즉석답변을 하면서 북방한계선은 북한측이 침범해도 괜찮다는 오해를 살수 있는 언급을 했다. 야당측에서는 16일에 이어 17일에도 논평을 발표,이장관을 비난했다.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이장관의 발언은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중대사태』라고 주장하며 이장관의 파면을 정부측에 촉구했다.자민련 안택수 대변인도 『경솔하고 국무위원으로서 품위를 잃은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국방부측은 해명과 함께 유감을 표시하며 진화에 나섰다.청와대측도 이장관의 국회 답변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군사분계선(MDL)」과 「북방한계선」의 차이점을 설명하려다 오해를 일으킨 것이지 근본적으로 문제될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방부측은 서해 북방한계선은 해상의 군사적 긴장을 방지하고 우리 어선 보호를 위해 지난 53년8월30일 유엔군사령관이 일방 설정한 것이라고 밝혔다.유엔측과 공산측이 합의,서명한 정전협정상의 육상 군사분계선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그러나 북한측도 묵시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인정,평상시에는 이 선을 넘어오지 않고 있다. 국방부는 북한측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할때 이제까지 강력대응해왔고 앞으로도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과 같이 즉각 응징하겠다고 다짐했다.지난 4월과 5월,북한 함정이 잇따라 북방한계선을 침범했을때 호위함·고속정을 긴급출동시키고 공군 요격기를 비상대기시키는 등 자위조치를 충분히 취했다는게 국방부측 설명이다.이와함께 「동해 북방경계선(NBL)」과 서해 북방한계선의 명칭도 모두 「북방한계선」으로 통일하기로 했다.〈황성기 기자〉
  • 이 국방 발언 취소 촉구/국민회의

    이양호 국방부 장관은 16일 국회 통일·외교·안보분야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지난 4월 서해5도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과 관련,『북방한계선은 엄밀한 의미의 휴전선이나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우리의 어로보호를 위해 공해상에 우리측이 임의로 정한 선』이라며 『때문에 군사분계선 침범의 경우처럼 즉각적인 응사 대신 동태를 감시했다』고 답변했다. 이장관의 답변은 국민회의 천용택 의원이 『북한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5㎞이상 월선을 했어도 국방부가 미온적으로 대응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에대해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이장관의 발언은 지난 50년간 지켜온 북방한계선을 포기하는,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중대사태』라고 주장하며 발언취소 요구와 함께 이장관의 즉각 파면을 정부측에 촉구했다.〈오일만 기자〉
  • 올드 산후안(푸에르토리코:중)

    ◎15세기초 조성된 도시… 과거와 현재 공존/주요거리엔 5백년전에 깐 구운 벽돌 그대로/골목엔 스페인풍 카페 즐비… 「코키」인형이 명물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후안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초현대식 호텔이 즐비한 콘다도에서 다리를 건너 자동차로 10분쯤 가면 푸에르토리코의 역사가 숨쉬는 올드 산후안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동쪽의 산 크리스토발성과 서쪽의 엘 모로성으로 둘러싸인 5평방마일 정도의 올드 산후안은 15세기초부터 조성돼 5백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이곳 입구에 있는 「산후안 역사 현장」이라는 안내판에서 보듯 1523년에 지어져 초대 스페인총독이 살다 지금은 타이노 인디언 박물관이 된 카사블랑카를 비롯해 산후안 성당,59년 위싱턴의 미국 국회의사당을 본떠 지은 국회의사당,3백년이 넘은 올림픽위원회 등 유서 깊은 건물들이 콜럼부스 광장 서쪽으로 늘어 서 있다.또 상가로 변하기는 했지만 스페인 식민지시대에 지은 8백여채의 건물이 아직도 위용을 뽐낸다. 명소는 엘 모로성과 산 크리스토발성.1525년부터 1787년에 걸쳐 축성된 이곳에는 1898년 내슈빌호를 앞세운 미국함대가 산 크리스토발항을 포격했을 때 응사했던 사정거리 약 8㎞의 6인치 대포와 1797년 영국함대의 침공을 격퇴할 때의 병영 등이 보존되어 있다. 샌프란시스코와 포르탈레자,레신토 수르 등 올드 산후안의 주요 거리에는 5백년 전에 깔아 놓은 검은색 벽돌이 그대로 남아있고 긴 골목 양쪽으로는 스페인풍의 카페와 상점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다.가공솜씨가 뛰어난 금세공품과 꼬끼(푸에르토리코에만 사는 개구리로 독특한 울음소리를 내며 섬을 떠나면 죽는다)인형은 인기 쇼핑품목. 올드 산후안까지는 호텔에서 수시로 셔틀버스를 운행하며 택시를 이용하면 요금은 8달러 정도.〈산후안(푸에르토리코)=오병남 특파원〉
  • “북 도발 사전제압” 의지 과시/육군 교전규칙 시달 배경

    ◎“융통성 보이면 조직적 도발 확대” 판단 육군이 9일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 북한군에 대해 교전규칙에 따라 강력조치토록 전 야전군에 시달한 것은 북한의 도발은 물론 도발의도마저 사전에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뜻이 있다. 육군의 이 방침은 교전규칙을 원칙대로 적용,북한군이 경고에 응하지 않으면 전원 사살하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이 지난 4일 정전협정을 파기한다는 선언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군은 교전규칙 적용에 「융통성」을 보여왔다.지난해 4∼5월 북한군 10여명이 군사분계선을 한때 월경했을 때 3차례 경고한 뒤 이들이 귀환하자 사격을 하지 않았다.우발적 군사충돌을 가급적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북한이 정전협정 파기선언 이후 조직적이고도 치밀하게 협정위반행위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측만 「융통성」을 보일 경우 북한군에게 오히려 경거망동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한다고 군 수뇌부는 판단한 것 같다.특히 춘궁기가 시작되는 4월부터 북한군의 나물채취 등 수렵활동이 늘어나고 무너진 진지 보수 등으로 월경이 잦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지상에서 「만만하게」 보이면 북한군이 해상이나 공중에서의 도발까지 자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까지 고려,각급 부대 장병들에게 교전규칙을 철저히 지킬 것을 지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육군의 한 관계자는 『북한이 판문점은 물론 비무장지대에서 도발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이같은 행동지침은 정당한 조치』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원칙적인 교전규칙 적용은 남북 양쪽으로 너비 4㎞의 비무장지대를 완충지대로 둔 남북한간에 자칫 우발적 충돌에 따른 군사분쟁의 가능성을 높여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이 더욱 고조되는 측면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교전규칙이란◁ 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진 뒤 유엔군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시달한 것으로 비무장지대,해상,공중 등 최전방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이 북한군과 충돌했을 때 자위를 위한 무력대응절차를 규정한 것.현행 유엔사 교전규칙은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해오면 경고와 함께 신원확인을 하고 ▲이에 불응하거나 도주하면 사격을 하고 ▲적으로부터 소총,자동화기,야포 등의 선제공격을 받으면 일선지휘관이 자체 판단에 따라 자위권을 발동하도록 하고 있다. 응사하는 무기별 결정권한을 보면 ▲소총은 소대장 ▲기관총은 연대장 ▲박격포나 야포는 군사령관 ▲미사일은 한미연합군사령관 등이다.이밖에 해상이나 공중에서는 함장이나 조종사가 적이라고 판단하면 즉시 대응하고 사후보고하도록 하고 있다.〈황성기 기자〉
  • 나이지리아·카메룬 교전/바카시반도/양측 모두 사상자 발생

    【라고스 로이터 연합】 나이지리아군과 카메룬군이 지난 주말 기니만에 위치한 바카시반도에서 무력 충돌해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나이지리아군 소식통이 5일 말했다. 이 소식통은 4일까지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카메룬군 병사 수명이 사망했으며 나이지리아군 병사 2명과 민간인 2명도 희생됐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3일 카메룬군이 먼저 도발을 해와 나이지리아군이 응사했으며 현재 카메룬군의 또다른 공격에 대비해 전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양국은 지난 94년 2월 원유매장량이 풍부한 기니만에 위치한 바카시반도 소유권을 놓고 처음 충돌한 이후 각각 병력을 배치한채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 “북 대남전략 불변… 철통방위를”/김 대통령

    ◎어제 새벽 임진강서 무장침투 북한군 1명 사살 【밴쿠버=이목희 특파원】 캐나다 밴쿠버를 방문중인 김영삼 대통령은 17일 낮(이하 한국시간)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이는 북한의 대남전략에 변화가 없다는 산 증거』라며 『북한이 남북대화에 응할 수 있도록 인내를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숙소인 팬 퍼시픽호텔에서 공로명 외무장관 등 공식수행원들과 비공식 만찬을 한 자리에서 김동진 합참의장으로부터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보고받고 『북한이 무장공비를 침투시키는 등 대남 호전적인 자세를 계속 취하고 있는만큼 우리는 국토방위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주자 있는 듯 17일 새벽 2시20분쯤 경기도 파주군 임진강 하류 자유의 다리 남쪽 1.5㎞ 지점에서 남측지역으로 침투하려던 무장 북한군 1명이 아군경계병에 의해 사살됐다. 통합방위본부(본부장 김동진 합참의장)는 이날 『임진강 철책초소(GOP)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모사단 소속 정인제 상병과 이종훈 이병 2명이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잠수복차림의 남자 1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하고 『아군 피해는 없었다』고 밝혔다. 합참 작전참모부 작전차장 정화언 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사살 현장에 이들이 신고온(수중 수영용) 오리발 자국이 여러개 나있는 점으로 보아 도주한 북한군이 1∼2명 있을 것으로 보고 대침투 경계태세 「진돗개 하나」를 발령,임진강 주변과 강물속을 수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들은 만조 때 임진강 하류에서 물길을 따라 수중침투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전방 아군병력 및 무기체계 배치현황과 유사시 침투로 확보등을 위한 정찰조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주한유엔사령부는 이날 군사정전위 비서장 옴즈대령을 포함,군정위 소속 요원 5명을 현장에 보내 조사에 나섰으며 사체의 신원이 확인되는대로 북한측의 명백한 휴전협정 위반행위를 공식항의할 방침이다. 정차장에 따르면 경계근무 중이던 정상병등은 상오 1시35분쯤 나무가 흔들리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이를 추적하던중 2시20분께 적의 모습을 발견,수류탄 2발을 투척하고 10여분간 K­2소총 75발을 쏘았다는 것이다.북한군은 전혀 응사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단사령부는 즉각 「위기조치반」을 가동,수색 끝에 상오 7시15분쯤 숨진 북한군 사체 1구와 장비등을 발견했다.
  • 부산 정치파동(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5)

    ◎우남,「대통령 직선」 시도… 야서 강력 반대/계엄 선포·민의 조작… 발췌개헌안 통과 1952년 초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유엔군과 공산군이 51년 11월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양쪽의 접촉선을 일단 군사분계선으로 인정키로 합의한 뒤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1월 초 서부전선인 문산 북쪽 두매리고지와 중동부전선의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충돌이 있었을 뿐 양쪽의 작전은 수색·정찰,간헐적인 포격전 등 일상적인 군사활동에 그쳤다.이 군사분계선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휴전까지 이어져 지금의 휴전선으로 고정됐다.한편으론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정전회담이 거듭 열려 휴전과 포로교환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쯤 후방은 전쟁의 공포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안정을 되찾아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1월19일에는 제32회 전국체전 동계대회가 수원에서 열리기도 했다.그러나 백성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월남 동포 1백20만∼1백50만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두 7백만명가량의 피란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대부분 도시로 몰리는 바람에 생필품은 매우부족했다.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의 경우 전쟁전 43만명이었던 인구가 1백50여만명으로 늘어났다.52년 초 물가는 「6·25」전보다 13배나 뛰어올라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치권에서는 헌정사에 큰 오점을 남긴 「부산정치파동」이 서서히 싹터갔다.부산정치파동은 1952년 5월25일 계엄령선포에서 7월7일 제1차 헌법개정,이른바 발췌개헌 공포에 이르기까지 부산에서 벌어진 일련의 정치사건들을 말한다.그 발단은 51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에 따라 정부가 발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서 비롯됐다. ○첫 표결 압도적 부결 이승만은 개헌발의에 앞서 자유당을 창당,이를 발판으로 국회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자유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원내세력과 지지하는 원외세력으로 갈라져 결국 창당 한달여만에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으로 분리됐다.이런 가운데 헌법개정안은 해를 넘겨 1월18일 국회 표결에 부쳐졌는데 찬성 16,반대 1백43,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이승만은 자신을 반대하는 국회에더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대신 충성을 다하는 경찰력을 이용,민의를 동원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이때부터 원외자유당 주도로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헌법규정에도 없는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이는 등 갖은 수법을 동원해 국회에 압력을 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먼저 4월25일 실시한 읍·면의원선거와 5월10일의 도의원선거 등 첫 지방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원외자유당이 압승을 거두었다.이승만은 지방의회와 원외자유당을 양대 축으로 삼아 직선제개헌안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내각책임제 개헌에 앞장서던 서민호 의원이 4월24일 육군대위 서창선을 저격한 사건도 반이승만파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계기가 됐다.서의원은 지방의회선거 감시차 전남 순천에 갔다 숙소에서 술취한 서대위와 시비가 벌어졌다.서대위가 먼저 권총 6발을 쏜 뒤 서의원이 응사했지만,서의원은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국회는 서의원의 살인이 정당방위인데도 그를 구속한 것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서의원 석방결의안을 의결했다. ○대낮 야 의원에 테러 서의원이 5월19일 석방되자 부산 거리에는 이를 항의한다는 구실로 조작된 민의가 활개를 쳤다.민족자결단·백골단·땃벌떼 등 정체모를 집단들이 때를 만난듯 거리를 누비며 대낮에 야당의원들에게 공공연하게 테러를 가했다.이들은 또 「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며 정부·국회·대법원 청사를 습격하기도 했다.피란수도 부산시내에는 공포 분위기가 확산됐다.때맞춰 이승만지지파가 주를 이룬 7개 도의회가 국회해산 요구를 결의했고,지방의회 대표는 반민의국회 해산궐기대회를 열었다. 정부의 공세는 5월25일 0시를 기해 부산·경남북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공비소탕을 내세운 계엄을 악용,야당의원을 철저히 탄압한 것이다.계엄당국의 언론 검열이 시작됐고 25일 밤부터 서민호의원 등 내각제 지지의원들을 잡아들였다.26일에는 헌병대가 국회의원 40명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에 달아 끌고갔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우방들의 비난이쏟아졌다.맨 처음 반응은 유엔한국통일 부흥위원단(UNCURK)에서 나왔다.언커크는 5월28일 이승만에게 성명을 보내 『한국에서 유엔을 대표하는 본 위원단은…부산시의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현재 체포·구금된 국회의원들을 석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트루먼 미국대통령도 항의각서를 보냈지만 이승만은 「계엄령은 공비토벌을 위한 것이며,국회의원 체포는 공산당과의 공모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둘러대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어 6월25일 반이승만 세력에게 결정타를 먹인 「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했다.부산 충무로광장에서 벌어진 「6·25기념식전」에서 유시태(당시 62)가 이승만에게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그러나 총알이 발사되지 않는 바람에 이승만은 암살을 면할 수 있었다.이 사건으로 유시태에게 신분증과 옷을 빌려준 민주국민당 김시현의원 등 야당의원 5명이 배후세력으로 체포됐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은 온갖 테러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재집권 야욕을 꺾으려던 야당에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장택상의 수정안수용 이처럼 반이승만 세력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장택상 국무총리가 제안한 제3의 개헌안이 등장했다.이 개헌안이 바로 정부의 안과 국회의 안을 적당히 절충한 「발췌개헌안」이었다.하지만 대통령직선제·양원제를 뼈대로 한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개헌의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국회안을 몇가지 수용하긴 했지만 이는 야당의원들에게 타협할 명분을 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했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으로 기진맥진한 야권은 장총리의 「발췌개헌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52년 7월4일 밤 발췌개헌안은 기립표결로 통과됐다.출석 1백66명 가운데 1백63명이 찬성했고 3명이 기권했다.정부는 7월7일 개정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부산정치파동은 막을 내렸다.이 개헌에 따른 정·부통령 직접선거가 8월5일 실시돼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 권좌에 올랐다. 우리 헌정사에 첫 개헌으로 기록된 발췌개헌은 이처럼 불미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후 거듭된 정치파동의 선례가 됐다.역사는 부산정치파동을 「여야간의 정치운영 방식을 폭력을 통한 극한대립 양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헌정사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만든 분기점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부산 정치파동」에 미 직접개입 주장/휴전협상·군사작전에 악영향 판단/한때 이승만 제거·임정수립을 암사 1952년 한국 정정이 부산정치파동으로 위태로워지자 미국은 한때 이승만 대통령의 제거를 고려하는 등 대책 마련에 크게 고심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미국 정부의 입장을 보여주는 극비문서를 최근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정책수립처 문서」(Records of Policy Planning Staff)더미에서 발굴했다.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이 문서는 「한국에서 정치적 위기의 지속」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3쪽분량.미 국무성 유엔과장 힉컬슨이 1952년 6월13일 작성,정책수립처의 니체를 포함해 국무차관보 매튜,극동과의 앨리손과 존슨등 간부들에게 발송한 것으로 돼 있다. 힉컬슨은 이 문서에서 부산 정치파동의 해결책으로 미국의 직접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그는 미 국무성이 제한적인 차원에서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전제아래 위기의 책임을 이승만보다는 그의 측근인 이범석·임영신·윤치영에게 돌렸다.그 까닭은 한국에서 이승만을 대체할 만한 『전 국가적인 명망성』을 지닌 인물이 없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때문에 이승만의 지위는 인정해 주면서도 주변의 추종자를 거세함으로써 그의 독재적 경향을 제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며칠 뒤 발췌개헌안을 내놓은 장택상 국무총리를 미국이 비난대상에서 제외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미국은 지지부진한 휴전협상보다 한국의 정치적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미국은 이 위기가 휴전협정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의 시행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따라서 이승만을 제거하고 임시정부를 세울 계획이 한때 있었음을 이 문서는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미국의 개입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음을 밝혔고 이 내용대로 미국은 발췌개헌안 통과­이승만 재선의 과정을 묵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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