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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閣議 ‘국민인권위’ 설치 인권법 제정안 의결

    정부는 30일 金大中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신문·방송등 ‘매체 관리’ 행정을 국정홍보처로 이관하지 않고 문화관광부가 계속 관장토록 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개정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국정홍보처는 국정에 대한 국내외 홍보,정부내 홍보 조정,국정에 대한 여론수렴,정부발표에 관한 사무 등을 관장하게 된다. 국무회의는 또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인권침해 행위및 차별행위를 조사해 구제하는 ‘국민인권위원회’ 설치를 규정하는 인권법제정안을 의결했다. 국무회의는 이와 함께 매년 말 각 부처가 남는 예산을 마구 집행하는 폐해를 막기 위해 경상비의 5%는 다음해로 넘겨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예산회계법시행령개정안도 의결했다. 국무회의는 아울러 유아교육진흥법시행령도 고쳐 생활보호대상자 및 월 소득액이 일정 수준 이하인 가구의 자녀에 대해서는 유아원의 수업료 및 입학금을 감면하도록 했다. 국무회의는 이와 함께 육군항공사령부령을 개정,육군항공사령부를 육군항공작전사령부로 개편해 육군의 항공부대를 통합하고 지휘체계를 일원화하도록했다. 국무회의는 이밖에 거창사건 관련자 명예회복사업을 지원하기 이해 30억원의 예산을 지출하기로 했다.
  • [외언내언] 文藝峰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 묵객 등 예술가나 성공한 사람의 일생을 살펴보면그들이 걸어온 인생의 뒤안길은 영욕과 희비가 엇갈리기 마련이다. 슬픔이있는가 하면 성취의 기쁨이 만발하고 절망이 있는가 하면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오기가 도사린다. 그중에서도 문화예술계의 경우는 예민한 감수성으로인해 시대적 아픔과 사상적 배경을 과장해서 받아들이는 예가 흔하다. 엊그제 타계한 북한배우 文藝峰의 경우는 북한 배우 이전에 1930년대와 40년대 우리 영화 초창기를 풍미한 최고의 배우였다. 지난 32년 이규환감독에게 발탁되어 ‘임자없는 나룻배’에서 나운규와 공연했고 고전적인 용모와청초미로 인해 당장 3,000만의 연인으로 부상됐는가 하면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의 타이틀롤로 인기절정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몇푼의 돈을 위해 화면에 눈물과 웃음을 팔며’ 식민지 배우로서의 설움과 고통이해방 후에도 가시지 않아 민족문화예술이 난만(爛漫)하는 이북이야말로 희망의 등대라는 판단아래 월북을 단행했다고 한 수기에서 밝히고 있다.월북의감격에 대해서도 ‘엄혹한 겨울이 물러가고 따뜻한 계절이 시작되던 그 3월의 봄은 예술가로서의 저의 인생에서 과거와 영원히 결별하고 새출발한 인생전환의 뜻깊은 봄이었다’고 했다. 월북 다음해인 49년부터 십수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나 지난 65년,영화전문지 조선영화 4월호에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를 ‘청사에 길이 빛날 천재’로 찬양한 것이 빌미가 되어 협동농장으로 추방되는 등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80년대 이후 복권되었고 86년에는 북한 예술영화촬영소가제작한 ‘봄날의 눈속에’가 성과작으로 평가를 받긴 했지만 그의 영화의 삶은 월북 15년만에 막을 내린 셈이다. 배우는 정치적 사상이나 이념 등 자신이 맡은 역할 외엔 언제나 예술에 뜻을 두고 예술밖에 모르는 순수한 정신의 소유자다. 그래서 괴테는 ‘예술가는 그 이름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가 엄혹한 북한체제에서 나운규를예찬한 것은 바로 예술가의 순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50여년전 봄에 과거와 결별하고 월북으로 인생을 전환한 것처럼 금강산 관광등 남북교류의 변화가 빈번해진 봄날에 그가 파란많은 생애를 마감했다니 인생무상이 느껴진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이나 이념과는 상관없이 그의 공적이 북한에서 ‘인민배우’로 호칭된 것처럼 우리 영화사에서도 무성영화시절과 최초의 발성영화 출연배우로서의 활약상 등으로 그 이름이 기억될 것이다. 이세기/논설위원
  • 대전지역 예산규모 적은 區가 이자수익 더 올려

    대전시내 5개 자치구 가운데 대덕구 등 예산규모가 적은 구가 지난해 상대적으로 많은 이자수익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상대적으로 농촌지역이 많은 구가 농로 유실 등에 따른 수해복구비를 비롯한 사고이월사업비도 많아 이 예산을 금리가 높은 정기예금 등으로 적립해뒀기 때문이다.수해복구비는 11월쯤 배정되나 겨울철을 피해 다음해 상반기에나 집행된다.일부 구가 초긴축예산 편성 등 예산관리에 만전을 기한것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26일 자치구에 따르면 대덕구는 98년 총예산 665억7,200만원 중 이월사업비 82억6,400만원 등을 정기적금(6개월)에 넣어 5개 구 가운데 가장 많은 12억3,000만원의 이자수익을 올렸다.대덕구는 이자수익을 소규모 주민숙원사업에 투입하는 등 예산운용의 묘를 기했다. 유성구(총예산 654억원)도 이월사업비 50억1,600만원 등으로 8억4,000만원의 이자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중구와 서구,동구 등 예산총액이 다른 구보다 200억∼800억원 정도 많은 구는 상대적으로 이월사업비가 적어 이자수익이 낮았다. 중구는지난해 860억원의 예산을 운용했으나 명시 및 사고이월사업비가 28억원에 불과해 8,800만원의 이자수익을 올리는데 그쳤다.
  • 발칸전쟁의 역사

    역사적으로 발칸반도에 화약냄새가 풍기기 시작한 것은 두 차례 일어난 발칸전쟁 때부터.발칸동맹(세르비아·몬테네그로 등)과 오스만제국 사이에 발발한 1차전쟁은 1912년 10월 개전돼 다음해 5월 발칸동맹의 승리로 끝났다. 발칸반도는 특히 1차대전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으로 작용,세계의 화약고라는 오명을 얻었다.1914년 6월 세르비아 청년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암살한 것이 유럽에 전쟁의 불꽃을 지핀 것이다. 2차대전은 발칸반도에 가장 뼈아픈 전쟁.소련을 공격하려던 독일이 영향력확대를 위해 발칸반도 ‘사냥’에 나섰다.승리한 독일은 크로아티아계를 우대하고 세르비아계를 탄압,40년 뒤 보스니아내전의 빌미가 됐다. 2차대전 후 공산정권을 수립한 티토는 6개 공화국의 독립을 견제하는 정책을 취해 연방을 유지했다.하지만 그의 사망으로 공화국지도자들은 권력유지를 위해 민족주의를 자극,내전의 방아쇠가 됐다.91년 6월 일어난 보스니아내전은 크로아티아계 중심의 보스니아정부와 인구 30%의 세르비아계 갈등이 내전으로비화됐다. 밀로셰비치의 유고연방이 세르비아계를 지원,‘인종청소’에 나서 95년 12월 평화협정이 조인되기까지 3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코소보주 민족분규는 89년 밀로셰비치가 코소보 자치권을 박탈하며 촉발돼오늘에 이르고 있다.주민의 90%인 알바니아계는 그동안 10%(20만명)의 세르비아계에 모든 기득권을 빼앗긴 채 밑바닥 생활을 해왔다. 金奎煥 khkim@
  • [제2공화국과 張勉]- (9) 신구파 대립과 分黨(상)/비교

    李承晩독재체제에 맞선 통합야당 민주당은 1955년 9월19일 탄생한다.이날서울 태평로 시공관은 하루종일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열기로 들끓었다.전국에서 모여든 민주당 대의원 2,000여명이 오전에는 발기인대회를,오후에는 창당대회를 잇달아 열었다.오전 대회에서 鄭一亨의 경과보고에 이어 張勉의 인사말이 장내에 울려퍼졌다. “대한민국을 구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일체의 독재를 배격한다고 정강의 서두에 내걸었습니다.우리는 진실한 민주주의를 살려나가기 위해 공정한 선거와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후의 창당대회에서는 申翼熙가 민주당 출범의 의의를 밝히는 인사말을 했고 朴順天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는 민주세력의 집결 강화만이 국정쇄신의 방도임을 확신한다”고 선언문을 읽어내려갔다. 창당대회 다음날 민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최고위원 선거에 들어갔다.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 申翼熙는 234표를 얻어 49표에 그친 張勉을 누르고 선출됐다.이어 연기명으로 실시한 최고위원 투표 결과 趙炳玉(282표)·張勉(278표)·郭尙勳(262표)·白南薰(111표)이 뽑혔다. 이들 가운데 제헌의회 의장을 지낸 申翼熙,내무장관을 역임한 趙炳玉,민국당 최고위원 출신인 白南薰은 구파였고 총리를 지낸 張勉,국회부의장인 郭尙勳은 신파였다.이밖에 중앙상무위 의장은 成元慶(신파)이 맡았다. 집행기구 16부 부장은 尹潽善(원내총무격인 의원부장)·柳珍山(노동부장)·鄭一亨(섭외부장)·玄錫虎(조직부장) 등으로 구성됐다.구파는 대표최고위원을 포함한 최고위원 세 자리와 부장 7석,신파는 최고위원 두 자리에 상무위의장과 부장 9석을 차지해 신·구파는 처음부터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출발했다. 민주당 창당후 처음 맞은 큰 이슈는 다음해 치르는 제3대 정·부통령 후보를 뽑는 일이었다.당시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로 거론될 만한 인물은 申翼熙·趙炳玉·張勉 세 사람 정도였지만 대세는 申翼熙에게 기울어 있었다.초점은 부통령후보였다.신파는 張勉을 대통령후보로 민다고 공표했으나 내심은부통령후보를 노리고 있었다.구파는 구파대로 ‘대통령후보 申翼熙’를 기정사실로하는 한편 趙炳玉을 부통령후보로 세우려고 물밑작업을 벌였다. 이 문제는 郭尙勳이 적극 나서 해결됐다.郭尙勳은 趙炳玉을 찾아가 “이번에는 당신이 양보합시다.이번에는 누가 보아도 해공(申翼熙)이 적격이니 그를 시켜야 할 것이 아니오? 차후에 입후보하면 내가 적극 지원하겠오”라고설득한다(郭尙勳 회고록에서). 이에 趙炳玉은 “운석(張勉)이 대통령후보 경쟁에 나서지 않도록 책임져라”라는 조건으로 받아들인다.전당대회에서 申翼熙·張勉을 정·부통령 후보로 뽑은 민주당은 신·구파 구분없이 힘을 합쳐 선거운동에 매진한다. 56년 정·부통령 선거는 민주당이 李承晩정권을 누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할 절호의 기회였다.52년의 ‘발췌 개헌’과 56년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어진 李承晩의 영구집권 음모와 자유당의 폭정(暴政)에 이미 많은국민이 염증을 느끼는 상태였다.게다가 申翼熙·張勉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민주당이 내건 선거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도 돌풍을 몰고 왔다. 56년 5월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유세에는 당시로서는 짐작도 못할 30만∼40만 인파가 몰려들었다.그러나 민주당의 손에 들어온 듯하던 대통령 자리는한강백사장 유세 3일 후에 그만 손아귀를 빠져나간다.호남 유세에 나선 申翼熙가 5월5일 열차칸에서 급서한 것이다. 대통령후보 부재에도 불구하고 張勉은 李起鵬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된다. 이로써 민주당은 창당 9개월 만에 수권 능력을 가진 야당으로서 당당히 자리잡는다.이같은 자리매김은 58년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로 연결돼 민주당은 78석을 확보한다.창당 때의 33석에 비하면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민주당 위상 강화와 비례해 신·구파 대립도 점차 심해져 갔다.첫 충돌은정·부통령선거 직후에 찾아왔다.56년 7월 金度演·金俊淵·蘇宣奎 등 구파중앙위원 60여명이 연명(連名)해 최고위원 불신임안을 제출한다.이에 최고위원 전원이 사표를 내고 후임자 선출을 논의하게 된다. 신파는 “국민에게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張勉부통령이 당연히 대표최고위원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구파는 표대결을 요구한다.투표 결과 대표최고위원에는 趙炳玉이,최고위원에는 郭尙勳·張勉·金俊淵·金度演이 뽑힌다. 일부에서 분당을 거론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된 끝에 신·구 양파는 다음해부터 대표 및 최고위원을 중앙상무위가 아닌 전당대회에서 선출한다는 등 몇 가지에 타협하고 수습한다.이후 구파는 부통령인 張勉에게 당의 주도권을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그를 더욱 견제하게 됐고,신파는 張勉을 중심으로 더욱 똘똘 뭉치게 됐다. 59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신·구파는 다시 한번 격돌한다.60년 정·부통령선거에 나갈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趙炳玉은 483대480 단 3표차로 張勉에게 신승한다.다음날 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는 거꾸로 張勉이 趙炳玉을 70여표차로 물리친다.최고위원에는 郭尙勳·白南薰·尹潽善·朴順天이 올랐다. 이 전당대회는 신·구파 사이에 메우기 힘든 골을 파놓았다.대회를 몇달 앞두고부터 양쪽의 경쟁은 한계를 넘어서 각종 추태가 난무했다. 趙炳玉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고 인신공격한 ‘결격사유 10개조’라는 괴문서가 전국 지구당에 배포되는가 하면,경남도당대회가신·구파 당원 간의난투극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신·구파의 격한 대립 속에서도 민주당은 趙炳玉대통령후보,張勉부통령후보 겸 당 대표최고위원 체제로 1960년을 맞는다.56년 申翼熙의 급서로 이루지못한 정권교체의 꿈을 이번에는 꼭 이룬다는 각오와 함께였다. 李容遠 - 신구파 내력과 특징 비교 민주당(民主黨)창당은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자유당(自由黨)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重任)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의 제5차 개헌안을 마련한다. 李承晩에게 영구집권의 길을 터주려는 이 개헌안은 1954년 11월27일 국회에서 찬성 135,반대 60표로 부결된다.그러나 이틀뒤 자유당은 수학의 ‘사사오입’규정을 적용하면 개헌 정족수를 통과한 것이라는 궤변으로 헌법개정을공포한다. 이후 열달동안 반(反)李承晩세력은 통합야당 결성에 노력한다.한민당(韓民黨)의 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民國黨)과 무소속 의원들은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한다.여기에는 자유당을 뛰쳐나온 ‘탈당파’의원12명도 가세한다. 당시야당으로서는 민국당이 가장 컸지만 원내의석이 15석에 불과해 다른 야당 세력을 흡수,통합하지는 못했다.따라서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전제로 55년 12월 신당촉진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러나 신당추진 세력은 곧 의견대립에 부딪친다.민국당의 申翼熙 趙炳玉과재야의 張勉 등 ‘자유민주파’는 좌익에서 전향한 자,독재 또는 부패혐의가 짙은 자 등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명분으로 혁신계인 曺奉岩과 족청계 李範奭을 배제하려고 한다.반면 張澤相 徐相日 등 ‘민주대동파’는 범야세력의총결집을 주장하며 맞선다. 결국 민주당은 ‘자유민주파’만으로 출발하는데 당시 원내 의석은 33명이었다.이에 비해 자유당은 120여명,무소속은 40여명이었다.‘통합야당’을 표방했는데도 무소속으로 남은 의원이 40여명이나 된 사실은 야당의 분열상을 보여주는 증거이자,민주당의 포용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당후 민주당은 다시 신·구파로 갈린다.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申翼熙 趙炳玉이 중심인물이었다.한민당을 실질적으로 이끈 金性洙가 55년 2월별세한 뒤여서 구파의 대표성은 申翼熙가 갖고 있었다. 반면 신파는 張勉을 지도자로 鄭一亨 朱耀翰 등의 흥사단계(張勉은 흥사단계로 알려졌지만 흥사단에 가입한 일이 없다),吳緯泳 金永善 李相喆 등의 원내자유당계,玄錫虎 李泰鎔의 자유당 탈당파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됐다. 한마디로 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구세력’이고 신파는 이를 제외한,새로 야당에 가입한 ‘신세력’이었다.하지만 더욱 중요한 차이점은 신·구파가 출신 배경,사회활동,이념적 지향에서 어느정도 구분지어진다는 점이다. 구파는 대부분 지주집안 출신에 독립운동가나 지사형이었고 상당히 보수적이었다.이에 견줘 신파는 관료·법관·금융계 출신의 전문인이 주류였다.韓昇洲 고려대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구파 지도자 가운데 80%는 처음부터 정계에나섰으나 신파 지도자는 오히려 60%가 행정·관료직으로 출발했다.韓교수는또 “연령을 보아도 구파 지도층은 평균 51세,신파는 48세로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신파의 지도력이 사실상 명확히 젊었다”고 평가했다. 정치행태에서도 달라구파는 비조직적이고 점잖아 “하나하나가 모두 장성같았지만”,신파는 조직적이고 투쟁적이어서 상부의 명령에 일거수일투족이 움직였다.(구파 출신 閔寬植 회고록에서)민주당 신·구파는 이처럼 이질적인 요소가 강한데도 ‘李承晩정권 타도’라는 공동목표아래 힘을 모았다.초기에는 그래도 단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59년 정·부통령 후보 선출을 놓고 대립이 심해졌다.4월혁명이후 정권장악이분명해지자 그때부터는 치열한 정권쟁탈전에 들어간다. 李容遠
  • 상품권

    국민의 정부는 출범 이후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각종 규제의 개혁작업에 돌입했다.그러나 한편에서는 아직 실감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한매일은 규제개혁이 보다 빠르게 국민 생활에 반영되는 데 이바지하고자 규제개혁의 현장을 심층 취재 보도한다. 상품권법이 전면 폐지된 지난해 12월 이후 백화점들은 100만원짜리 상품권발행계획을 취소하고 현재 50만원짜리를 최고액으로 발행하고 있다. 현대,LG,미도파백화점이 30만원,50만원짜리를 발행하고 있으며,롯데백화점도 어린이 날을 즈음해 같은 액수의 상품권을 내놓을 계획. 100만원짜리 상품권 소동은 민관합동기구인 규제개혁위원회가 발표한 사항중 가장 빠르고 격렬하게 반응이 온 사안이다.경기불황 속에 100만원의 상품권은 위화감을 조성하는데다 뇌물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소비자단체의주장이고 여론이었다. 상품권법의 폐지로 상품권 액수 최고한도(10만원)를 폐지키로 발표했던 정부도 이같은 반응에 당혹해 백화점측에 간접규제를 들이밀었다. 백화점 관계자는 “정부에서 100만원짜리를 정말 발행할 것이냐고 알아보는 전화를 해오는 등 사실상 규제를 한 셈”이라면서 “규제가 폐지됐으면 업계의 자율에 전적으로 맡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청을 높였다. 현재 백화점들은 50만원 이상의 상품권을 발행할 계획이 없다.여론의 매를맞은 경험이 있는데다가,자체 조사에서도 100만원짜리에 대한 수요가 거의없는 것으로 나타난 때문이다. 30만원,50만원권 상품권도 판매실적이 좋지 않다.지난달 8일부터 50만원짜리 상품권을 판매하고 있는 LG백화점은 지난 14일 현재 3개 점포에서 140장을 팔아 전체 상품권 판매액수 가운데 2.02%를 차지하는데 그쳤다.설연휴를넘겨 지난달 19일부터 고액상품권을 발매한 현대백화점은 23일까지 전국 점포에서 30만원권 218장과 50만원권 375장을 판매,이 기간 전체 상품권 판매액의 0.5%를 차지했다.따라서 백화점측에서는 매출증가보다는 10만원권 5장을 50만원권 1장으로 만드는 데 따른 예산과 인력의 절감을 상품권법 폐지의 최대 효과로 꼽고 있다. 법폐지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상품권발행업체가 부도났을 경우.발행주체에 제한이 없어지면서 각종 상품권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나 상품권 발행보증금 공탁의무까지 폐지돼 부도가 나면 소비자는 보상받을 길이 없게 됐다.또상품권의 60% 이상 금액을 사용하면 잔액을 돌려주던 제도도 폐지돼 소비자와 업주간의 실랑이가 예상된다.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문은숙 조사연구부장은 “규제개혁에기본적으로 찬성하지만 소비자피해가 예상되는 상품권법 폐지에 대해서는 반대해 왔다”면서 “정부가 후속대책으로 소비자 보상 규정을 강화하겠다고밝혔으나 이는 강제력이 없어 앞으로 상당한 피해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규제를 풀 때는 시장의 게임규칙이 제대로 작용할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업계의 자율규칙에 기대를 건다”고 밝혔다.
  • 러 검찰총장 ‘섹스비디오’ 파문

    러시아 국영방송이 18일 검찰총장의 혼외 섹스 장면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방영,러시아 전역에 엄청난 파문이 일고 있다. 러시아 국영 RTR TV는 이날 오전 0시30분 유리 스쿠라토프 총장과 닮은 한남자가 젊은 창녀 2명과 한 아파트에서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방영했다. 방송이 나간 직후 옐친 대통령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총리와 스쿠라토프총장을 불러 진위파악에 나섰으며 곧 바로 RTR 방송측에 더 이상 방영하지말것을 지시했다.또 국가 안보위원회에 비디오 테이프사건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을 요구했다. 몇주 전부터 러시아에서는 검찰총장의 이같은 섹스 테이프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스쿠라토프 자신은 의회에 출석,“나를 음해하는 세력이 범죄적인 방법으로 사생활을 캐왔다”면서 사임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 러시아 연방회의(상원)는 스쿠라토프의 사임안을 부결시켰다. 지난 97년 발렌틴 코발료프 법무장관이 사우나에서 미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사진이 유포돼 사임하는 등 러시아에서는 정부 고위관료들의 사생활이 비밀 카메라에 포착돼 곤욕을 치르는 경우는 종종 있어왔다. 그러나 스쿠라토프 총장의 경우 비난보다는 동정론이 우세하다.스쿠라토프가 재계와 정계의 부패척결을 부르짖으며 과감한 개혁작업을 추진하는데 대한 반발세력의 음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 [제2공화국과 張勉] (7) 尹潽善과의 갈등/金在淳 前국회의장

    1960년 8월29일 이른 아침 張勉총리를 비롯해 제2공화국 장관들이 서울역으로 모여들었다.이들은 ‘尹潽善대통령이 휴가 겸 민정시찰을 떠나니 모두 나와 전송하라’는 대통령 비서실의 전갈을 받고 나온 참이었다.이윽고 ‘관1호’차를 타고 尹대통령 부처가 등장했다.尹대통령은 張勉내각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오전 8시 특별열차 편으로 떠난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치권에서는 한동안 수군거림이 일었다.“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전송나오라고 ‘지시’하는 짓은 무엇이며,그렇다고이에 군말없이 따르는 張내각은 또 뭐냐”하는 말들이었다.한마디로 “尹潽善은 월권한 것이고 張勉은 제 밥그릇도 못챙긴다”는 평이었다. 張勉정부 출범 닷새 후에 일어난 이 간단한 삽화는 ‘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성을 갖는다.민주당 신·구파의 대결이라는 큰 구도 말고도 ▒권위주의적인 尹潽善과 다툼을 싫어하는 張勉의대조적인 성격 ▒처음 도입한 내각책임제를 양쪽 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듯한 미숙함들이 이 삽화에는 들어 있다. 제2공화국은 의회가 정치의 중심인 내각책임제였다.대통령은 의전적인 의미의 국가원수에 불과하며,총리야말로 행정권 담당자인 동시에 국정(國政)에관한 총괄적인 책임자였다.그러므로 尹潽善대통령은 국민과의 접촉을 자제하고,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리를 두는 게 도리였다. 그런데 尹대통령은 회고록(‘사실의 전부를 기록한다’에 수록)에서 “틈틈이 민정시찰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밝혔듯이 자주 거리로 나섰다.도로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절이라서 그가 지방시찰에 나설 때면 으레 특별열차가 동원되곤 했다. 문제는 대통령과의 잦은 접촉이 국민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느냐에 있었다.정치학자들은 “국가통치의 중심이 총리인지,대통령인지 국민들이 혼동을 일으킨다”면서 “이같은 혼란은 정치안정에 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또 “尹대통령이 내각책임제에 상관없이 李承晩대통령이 누린 권위를 자신도 유지하고 싶어한 듯하다”는 풀이도 뒤따른다. 尹대통령은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여 모임을 가졌으며 張勉내각의 정책과 배치되거나,그것을 정면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불쑥불쑥 내곤 했다. 60년 10월10일 許政과도정부때 임명된 시도지사를 張정부가 경질하자 尹대통령은 구파의 입장을 반영해 ‘유감’을 표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張내각에서 “왜 정치에 관여하는가”라고 항의하자 그는 “국가적인 큰 잘못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했다”고 대응했다.다음해 1월12일 尹대통령은민·참의원 합동회의 치사를 통해 시국을 ‘국가적 위기’라고 규정하고 “정쟁의 휴전을(당파간에) 협정하라”고 촉구했다.그는 “한 개인,한 당파가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당파이익을 위해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張勉내각을 겨냥해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촉구였다. 張내각과 민주당 신파는 당연히 발끈했다.새해 들어 사회가 안정돼 가고 따라서 경제건설에 주력하려는 마당에 ‘국가적 위기’‘난국’ 운운하며 찬물을 끼얹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분개했다.朱耀翰·金永善 등 張내각의 핵심 각료들은 尹대통령이 내각을 붕괴시키는 명분을 쌓으려 한다고 의심했다. 張勉과 尹潽善의 갈등은 3월23일 ‘청와대 요인회담’(일명 청와대 4자회담)에 이르러 극점에 다다른다.그 전날 밤 서울에서는 반공법·데모규제법 제정을 반대하는 횃불데모가 있었다.張勉정부 때의 마지막 대규모 시위로,밤에 횃불을 동원한 방식 때문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23일 오후 8시 청와대에는 張勉총리·尹潽善대통령·郭尙勳민의원의장·白樂濬참의원의장이 모였다.張내각의 국방장관인 玄錫虎와 이미 신민당으로 분당한 구파의 金度演 柳珍山 梁一東 趙漢栢 徐範錫도 자리를 같이했다.참석자들이 남긴 회고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이어서 각기 조금씩 다르지만 그 윤곽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張총리는 ‘반공을 위한 국민운동 전개를 논의하자’는 연락을 받고청와대로 갔다.처음엔 그런 이야기가 화기애애하게 전개되더니 어느결에 ‘정권문제’로 화제가 바뀌었다.이윽고 尹대통령이 “혼란한 정국을 극복할자신이 있느냐”면서 은근히 총리 사임을 종용하더라고 회고했다. 반면 尹대통령은,참석자들이 張총리에게 “거국내각이라도 만들어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결단을 촉구했다고 밝혔다.이에 張총리는 “내가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더라는것.그러나 尹대통령은 모임이 서로를 이해하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고 술회했다. 한편 柳珍山은 “尹대통령이 ‘현상유지책만으로 안된다면(정국을 담당할인물을)한번 바꿔 봐야 할 게 아니오’라고 일격을 가하자 張총리가 얼굴이창백해져 변명을 했다”면서 張총리가 끝내 궁지를 면치 못했다고 기록했다. 참석자들은 밤 11시30분쯤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론을 내린 것은없었다.다만 이 모임에서 나온 말들은 일절 발설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그러나 다음날 白樂濬이 회담 내용을 공표하는 바람에 각 신문은 ‘尹대통령이 張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했다’고 대서특필했다.張정부와 신파가 격노한 것은 당연했다.李錫基 민주당 원내총무가 즉각 성명을 발표했다.“야당 대표들만 불러 놓고 張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말한 사실은 언어도단이다.청와대는 음모를 꾸미는 곳이다.尹대통령이 앞으로도 그런 식의 정치간섭을 한다면 우리 민주당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張勉과 尹潽善 사이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지경이 됐다.내각책임제에서 반목하고 갈등하는 총리와 대통령의 관계는 ‘정치력 약화’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초래했다.5·16쿠데타가 발생한 뒤 힘을 합쳐 쿠데타를 진압해야 할 두 사람은 최소한의 연락마저도 유지하지 않는다.그만큼 불신의 골이 깊었기 때문이다. - 張내각 외무부 정무차관 金在淳 前국회의장 金在淳전국회의장(76·월간 ‘샘터’ 발행인)은 張勉내각에서 외무부와 재무부의 정무차관을 지냈다.5·16쿠데타 후 ‘혁명검찰’에 의해 ‘반혁명죄’로 구속돼 복역하다 주체세력내 지인의 도움으로 열달 만에 풀려났다.이후 공화당에 참여했고 金泳三정부에서 국회의장직을 사퇴하며 정계를 떠났다. 그때 남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유행어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金전의장은 “張勉정부는 탄환 대신 투표용지로 세운 민주정부인데 지키지를 못해 아직도 국민 앞에 죄스럽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민주당이 비록 신·구파로 나뉘어 있었지만 해공(申翼熙)·유석(趙炳玉)이 계실 때는 張勉박사와의 사이에 조금도 틈바구니가 없었다”고 강조했다.그 예로 1959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정·부통령 후보를 뽑을 때도 張勉이 趙炳玉에게 3표차로 석패했지만 아무런 잡음이 없었음을 들었다. “민주당 신·구파가 대통령 후보,당 대표 자리를 놓고 표대결을 벌이지만결과에는 승복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밝힌 金전의장은 “국무총리 인준때해위(尹潽善)가 상산(金度演)을 먼저 지명한 것은 배신”이라고 단정했다. ‘7·29총선’후 대통령은 구파에서,총리는 신파에서 나눠 맡기로 했는데尹潽善을 대통령으로 먼저 뽑고 나니 구파의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그는 “학생·시민이 피 흘린 대가로 정부가 들어섰는데 구파가 민의를 거슬러대통령·총리를 독점하려던 게 배신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내각책임제 하에서 尹대통령의 정치 간섭을 제어하지 못한 것이 張총리의리더십 부족이라는 평가에 대해 金전의장은 “그것이 張박사의 성격”이라고 말했다. “해위의 월권을 막으려면 사사건건 따지고 싸워야 하는데 張박사는 누구하고 다투는 분이 아니어서”라는 설명이다.그는 “훗날 되돌아보니 張박사처럼 책임을 맡은 분이 겸양만을 내세우는 게 꼭 옳으냐는 생각도 들었다”고아쉬워했다. 金전의장은 “사실 해위는 張박사와 신파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면서 몇가지 사례를 소개했다.가령 59년 전당대회때 尹潽善이 최고위원으로 뽑힌 것도 신파에서 “점잖은 분이니 밀어주자”고 뜻을 모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張박사는 나를 평소에 ‘재순군’이라고 부르며 무척 아껴주셨다”고 회고했다.金전의장은 “민주주의는 결국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높아져야이루어지는 것인데 당시는 張박사 같은 분을 제대로 이해하는 상황에 이르지못했다”면서 “정말 아까운 분”이라고 평가했다. 이용원
  • [이런사람이 대접받는 사회]정보통신부 崔世河사무관

    농고출신의 말단 공무원이 대학교수가 됐다.9급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며 주경야독(晝耕夜讀) 끝에 일궈낸 결실이어서 더 값지다.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진흥과에서 소프트웨어(SW)진흥정책을 맡고 있는 崔世河사무관(48).70년 강원도 평창농고를 졸업,다음해 정보통신부의 전신인 체신부 9급 전송기술직으로 공직사회에 첫 발을 디딘지 30년만에 대학강단에까지 서게 됐다. 최근 산업인력 교수요원제에 도전,70대 1의 경쟁을 뚫고 모교인 동양공전전문대 정보통신학과의 겸임교수로 선발됐다.이번 학기부터 주 1회씩 강의한다. 정통부 출범 이후 말단관리 출신의 공무원이 대학강단에 서기는 처음있는일.그는 “어려서부터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생각을 실천에 옮긴 결과”라고 말하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남다른 의지와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었다. 농고를 나와 마땅한 직업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독학으로 전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체신부 전송기술직 9급에 응시해 합격,서울전파감시국에서 말단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그의 인생을 바꾸는전환점이었다. 73년 야간인 동양공업전문대 전자통신과를 나온 뒤 75년에는 명지대 전자공학과로 편입해 학사학위를 받았고 기술직 공무원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위해 85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연세대 산업대학원전자공학과에서 국비위탁생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난 2월에는 청주대학교에서 전자공학과 박사가 됐다. 그렇다고 직무에 소홀했던 건 아니다.그는 “공부때문에 일을 소홀히 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 남보다 2배 이상 더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말했다.국무총리상과 체신부장관상을 4차례나 받는 등 상도 6차례 받았고 무선설비기사 1급과 전자기사 1급 등 자격증도 4개나 갖고 있다.한국통신학회 등에 그동안 14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통신관련 전문서적 4권을 내놓기도 했다.
  •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장애 학생들이 나섰다

    “차라리 우리가 하겠습니다” 경사로 없는 계단,손잡이 없는 화장실,시각장애인용 표식이 없는 보도블록…. 장애 학생들이 열악한 교내 장애인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연세대의 장애인 동아리 ‘게르니카’는 최근 ‘장애학생 지원센터 준비위’를 구성,올해 안에 장애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연희관에 경사로와 화장실손잡이 등을 자비로 개조하기로 했다. 비용은 2002년 월드컵 개최를 기념,지난해 휠체어를 타고 유럽을 종주했던朴大雲씨(28·신방 3년)가 받은 TV출연 광고비 1,000만원과 기금모금 등을통해 마련키로 했다. 준비위는 얼마전 장애인 신입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열고 이들을 도와줄 도우미도 모집하고 있다.장애인용 대학생활 가이드도 내기로 했다.후배들이 적게 움직이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시간표도 짜주고 수강신청서를 모아 일괄적으로 수업 신청을 해줄 계획이다. 장애인 학생들이 스스로의 권익보호에 나선 것은 학교측의 무관심 때문이다.이들은 “그동안 줄기차게 장애인 시설 보완을 요구했지만 학교측은 단 한번도 공식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고 정책적 지원도 외면해왔다”고 주장했다. 연세대는 실제로 지난해 5,000만원의 장애학생 복지비 관련 예산을 편성해놓고도 3,000만원을 집행하지 않았다. 동아리 간사인 金炯壽씨(25·국문4)는 “장애인 특례입학 등으로 100여명이 넘는 장애인을 뽑아놓고도 학교측은 예산타령만 하고 있다”면서 “다음달20일 장애인의 날에 즈음해 장애학생 지원센터를 만들 예정”이라고 말했다.
  • [대한광장]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지난 연말을 전후해 ‘한반도 위기설’이 분분하더니,현재 뉴욕에서는 금창리 문제로 북·미간 회담이 진행되고 있고,서울에서는 윌리엄 페리 미국 대북정책조정관이 한·미의 대북정책을 이른바 ‘포용정책’으로 조율했다.일본에서도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설’과 더불어 ‘국교수립’이 검토되고 있다.전쟁과 평화,봉쇄와 수교 양 극단에서 어느 것이 진실인가.아니면 이러한 상극이 진실의 두 측면인가. 지난해 11월17일 전쟁시나리오(Op Plan 5027)가 언론에 공개되고 난 뒤 12월 초 북·미간 대립은 극히 첨예하게 전개됐다. 12월2일 북한 중앙방송은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의 이름으로 미국의 대북전쟁계획을 맹비난하는 성명서를 하루 동안 10회나 방송했다.다음날 북한 인민무력부 정창렬 부상은 “만약 미국이 끝끝내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단다면 우리 인민군대는 미국 본토를 통째로 날려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북한의 인민무력부와 총참모부가 표명한 ‘미국 본토공격 주장’이다.이것은 단순한 과장인가,아니면 김정일 주도아래 북한이오랫동안 준비한 군사노선의 귀결인가. 먼저 북한측의 주장을 면밀히 살펴보면 1996년에 이미 대륙간 탄도미사일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예컨대 그해 12월 노동신문은 “조선에는 군사적인 기적이 일어났다”고 흥분했으며,다음해 1월1일 사설에서도“적이 지구상 어디에 있더라도 타격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 아닌 대륙간 탄도미사일이다. 한편 미국에선 1997년 7월 전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이끄는 탄도미사일위협평가위원회가 “북한이 조만간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미국을 공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미중앙정보국(CIA)은 그것을 ‘십수년 후에나 가능한 일’로 간단히 부인했다.그런데 한 달도 되지 않아 북한이 인공위성을발사하자 CIA의 대북 관련자들은 엉망이 돼버렸다. 이후 북한의 미국 본토 공격 가능성에 대한 CIA의 태도는 전환되기 시작했다.지난해 12월 조지 테닛 CIA 국장이 한국을 방문했고 CIA 요원들을 대북전문가들로 대폭 교체·강화했다.그리고 올 2월3일 미국 상·하원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테닛 국장은 북한이 러시아·중국에 이어 3대 미사일 수출국이며 “북한 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또한 패트릭 휴즈 미국방정보국(DIA) 국장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믿기 어려울 만큼 폭력적이며 파괴적일 것”이라고 증언했다. 저간의 이러한 군사적 대립이 한편으론 전쟁위기설,다른 한편으론 북·미,북·일 수교 논의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축이 되고 있다. 즉 ‘전쟁위기설’은 한반도의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데 기존 방식으로는 별다른 카드가 없다는 고민의 표현이며,‘국교수립’은 이제 새로운 차원으로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모색의 표현인 것이다.‘전쟁위기’와 ‘평화 수교’의 동시적 출현은 기존 방식의 끝과 새로운 방식의 처음이 겹치는,과도기 특유의 화전 양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페리의 방문으로 한·미의 대북정책은 이른바 ‘포용정책’을 기조로하면서 우리 정부의 ‘일괄타결’을 단계적으로 흡수하는 ‘포괄적 접근’으로 조정된 듯하다.레드라인(한계선) 이후 단계의 대북 강경책에 대해서는 아직 조정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한반도의 주변 정세는 일단 새로운 차원의 평화적 해결 방식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북·미,북·일 수교는 우리와 옛소련,또는 중국의 수교와는 비견할수 없는,분단 반세기 한반도 정치 지형의 대변동을 예고할 것이다.그것은 동북아 국제정세뿐만 아니라 국내의 광범위한 정치사회적인 변동과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코 앞에 다가온 본격적인 변동에 비하면 ‘금강산 관광’은 차라리 군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여기에서 우리의 선택은 다가올 세기적변동에 이니셔티브를 쥐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남북정상회담은 그런 변화의 한 신호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진순 창원대 교수·한국사
  • 반론문-바른역사가 밝혀지길 고대하며

    본보 3월1일자 13면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연재물 26회는 ‘민족대표 33인중 1인 李甲成’편을 “先애국 後변절 … 日帝 고급밀정 활동의혹”제목으로 다뤘다.이에 대해 유족대표 李在賢씨는 반론문을 다음과 같이 보내왔다. 삼일운동 33인중의 한 분인 이갑성옹의 후손인 우리들은 매년 삼일절이 다가오면 가족 전체가 노이로제에 걸린다.‘선애국,후변절’,‘일제 고급밀정의혹’이라는 특별 기획물이 어느 언론 매체에 또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그 내용은 항상 창씨개명,상해 망명시 밀정행위,중국 신경에서 일본회사에취직,총독부 고위관리의 촉탁을 했다는 것이다.먼저 이러한 주장이 모두 터무니 없는 이야기임을 밝힌다. 이갑성옹의 상해에서의 활동은 관련 인사 대부분이 이미 작고하셨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인을 세울 수가 없다.그러나 세상이 다 알다시피 상해 임정의주요 인물로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신 신익희선생이 해방 직후 서울에서 이옹과 함께 공개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신익희선생이 상해에서일제 밀정으로 널리알려진 사람과 해방직후 손잡고 일을 했다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신익희선생께도 큰 누가 되는 이야기다. 다음,이옹이 거주한 적이 전혀 없는 신경에서의 일본회사 취직,평생 일어를 안하고 사신 이옹이 한국말을 못하는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1922∼23서울근무)의 촉탁으로 취직(이옹은 이 당시에도 일제감옥에서 수형 생활 중이었음)했다는 주장도 사실처럼 이야기되고 있으니 우리 후손들은 가슴을 칠일이다. 이중 그래도 인정할수 있는 것은 창씨개명이 되어있다는 사실뿐이다.우리가 이옹에게 직접들은 이야기는 이옹은 자신이 창씨 된 것을 전혀 몰랐으며 이러한 사실을 이옹 자신이 생전에 직접 공개한 바도 있다(대한일보67년5월12일자). 이옹에 대한 이러한 음해성 험담의 연원은 1960년대 초부터다.독립운동 유공자 모임인‘광복회’설립과정에서 튀어나온 이 문제는 이옹이 그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급기야는 경쟁자간의 성명서 전쟁으로까지 비약되었다.이러한 와중에서 광복회 회장으로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되는 일제밀정문제 등을 상대측에서 조작 유포시킨 것이었다.그후 1967년에 2대 회장으로 재 선임되자 상대측에서 이 문제를 재 제기하여 결국은법정까지 비화했었다.당시 서울지검에서 조사한 결과,그러한 혐의를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종료했다. 이옹 때문에 일제 35년을 힘들게 살아야했던 우리 후손들은 터무니없는 음해 때문에 해방된 내 나라에서 다시 마음고생을 하면서 살고 있다.수차 보훈처에 조치를 요구하고 항의도 해 보았다.보훈처에서는 이갑성옹의 독립운동족적에 어떠한 흠결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에서 수여한 훈장이나 대우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다. 지난 30여년간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이옹은 물론 그 가족 누구도 어떠한 친일 행적도 수혜 사실도 발견되지 않았다.단순히 해방후 단체장 선거 때 상대측이 선거용으로 주장한 혐의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이 아닌 것도 혐의라는 명목으로 자주 거론되고 크게 보도되면 사실처럼 된다.사실이 아닌 이갑성옹에 대한 흠결을 혐의라는 제목으로 재탕하고삼탕,사탕할 것이 아니라 그리한 혐의가 사실인지 누명인지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족대표(장손)이재현
  • 영화계 ‘쉬리’ 희비 교차

    ‘쉬리’의 대성공으로 영화계 안팎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우선 가장 큰 행복을 맛보고 있는 이는 비용을 뺀 총수익의 40%를 챙기게돼 있는 강제규 감독이다. ‘쉬리’가 강감독에게 안겨줄 보너스 등은 무려 25억∼30억원.9일 현재 관객수는 118만명(서울기준)이며 이르면 다음주 150만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강감독은 관객수가 200만명(서울기준)을 넘을 경우 30억원 이상의 수입을올릴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강제규필름’에서 일하고 있는 조감독 박재현씨는 “피부로 느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이는 강감독의 수익분이 그의 수중에 들어 오는 데는 적어도 5∼6개월,늦으면 1년이상 걸려 실제로 당장 돈을 만져보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감독은 지난 96년 흥행에 성공한 ‘은행나무 침대’의 여세를 몰아 다음해인 97년 ‘지상만가’를 직접 제작했으나 흥행에 참패,빚더미에 올라 앉았다.그는 경기도 평촌의 30평짜리 아파트에서 탤런트인 부인 박성미씨 및 아들(5)과 함께 ‘근근히’ 살고 있다. 이번 성공은 앞으로 그에게경제적 편안함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영화계의 사정은 100% 이를 보장할 수는 없게 하고 있다.강감독은 “보너스 등을 받으면 우선 지난 3년 여 동안 진 빚을 갚고 나머지는 영화에 재투자할 것”이라고 밝힌다. 현재 강감독이 구상중인 새영화는 멜로와 액션이 합친 ‘재미’있는 영화. ‘쉬리’의 뼈대가 완성될 즈음인 지난 97년부터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강감독은 “새영화가 ‘쉬리’를 뛰어넘는 대작이 될 경우 이번 작품을 함께 한 삼성영상사업단측에 다시 투자를 요청하겠지만 아직 그림이 완전히 그려지지 않아 뚜렷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한편 ‘쉬리’는 일신창투가 먼저 투자를 검토했다 ‘포기’했던 것으로 밝혀져 영화계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일신창투는 ‘퇴마록’‘8월의 크리스마스’ ‘조용한 가족’ ‘접속’ 등에 자금을 대 흥행을 성공시킨 역량을갖고 있다. 지난 97년초 강감독은 ‘은행나무 침대’의 제작비를 댄 일신창투를 찾아가 대본을 보여 줬으나 “성공 가능성이 미지수이고 투자비가 너무 크다”는이유로 흔쾌한 답변을 얻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러던 중 삼성영상사업단 측에서 강감독에게 “대본을 보자”고 요청,선뜻 투자를 결정했다는 것이다.한 관계자는 “일신창투로서는 대어를 놓친 뼈아픈 일이었다”고 아쉬움을토로했다. 朴宰範
  • 공인중개사 자격증따기 열풍

    “일단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놓고 보자” 4월 24일 시험을 앞두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려는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서울 노량진의 학원가는 몰려든 수강생들로 ‘아우성’이다. 수원의 J학원 金石基 기획부장도 “수강생들로 만원사례”라고 말했다.6만277명이 합격했던 85년의 뜨거운 열기가 되살아난 듯하다.이런 열기는 8일 시작되는 서울과 경기지역의 원서접수장에서 그대로 나타날 전망이다. ◆지원자 20만명 안팎이 지원할 것으로 학원관계자들은 예상한다.수험생들사이에는 35만∼40만명명이 응시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어 더욱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지난해 원서접수자 12만여명 가운데 실제 응시자는 7만여명. 시험의 커트라인은 없다.평균 60점이 넘으면 자격증을 주는 절대평가 방식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난이도 조정으로 얼마든지 합격자 숫자 조절은 가능하다. 여하튼 올해 합격자는 지난해(3,469명)보다 늘어나리라는 기대감이 확산돼있는 가운데 7,000∼1만명이 자격증을 딸 수 있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새로운 경향 학원가 강의실은 20대 초반의 대학생부터 60대의 정년퇴직자,가정주부들까지 남녀노소가 뒤섞여 있다.가장 큰 특징은 ‘복덕방장이’라는 부정적 인식 때문에 공인중개사 시험을 기피해온 20대의 젊은 층이 몰려들고 있다는 점이다. 노량진 제일고시학원의 金在源부원장은 “20∼30대의 젊은층이 수강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한 대학생은 “시험봐서 아버지께 자격증을빌려 드리고,부동산중개사무소를 열게해 드릴 작정”이라고 말했다. 가정주부들은 언제 정리해고당할지 모르는 남편과 개업하려고 자격증을 노린다.30대 후반의 주부 姜모씨는 “남편이 정리해고 당하면 함께 중개사사무실을 차리려고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합격가능성 시험은 결코 만만치 않다.金相洙씨(33)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최소한 6개월은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특히 민법은 7급공무원 시험보다 어렵다는 게 그의 느낌이다.최근들어 공인중개사 준비에 뛰어든 수험생들은 이번에 1차를 목표로 하고 다음해 2차를 노리는 것이 바람직스럽다고학원 관계자들은 권한다. ◆향후 전망 전세나 매매를 주로한 ‘복덕방’식 중개업자는 주택경기 침체로 사무실 관리비 대기도 쉽지 않다.이런 상황에서 생존하려면 ‘복덕방’식 중개업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국부동산중개업협회측은 생존전략으로 전문성을 키우고,전국의 정보전산망을 이용해야 하며,부동산 컨설팅도 하는 세가지 방안을 권하고 있다. 朴政賢 張澤東
  • 道政 시·군담당자가 평가…경남도 ‘逆평가제’ 도입

    경남도는 도민이 만족하는 질높은 행정서비스를 창출하기 위해 ‘도정 역(逆)평가제’를 시행한다고 4일 밝혔다. 도정 역평가제는 도가 추진하는 주요 시책의 효과성과 주민만족도,시행상문제점,개선방안 등을 일선 시·군 담당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결과를 도정에 반영하는 제도다. 도정과 시·군정의 연계성을 강화하고 다양한 평가채널을 구축함으로써 보다 생산적인 도정운용이 가능하고 실무부서의 자기진단 효과가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특히 종전 도-시·군 행정조직간 수직화된 관계가 수평관계로탈바꿈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역평가를 받는 시책은 시·군과 연계성이 높은 업무 80건과 도민 생활환경 및 현안 10건 등 모두 90건이다.평가항목은 도 본청 실·과별로 2개 업무 정도씩 배분할 계획이다.설문조사 대상자는 시·군 전체 공무원의 9.1%인 1,500명으로 구성되며,직급 및 직렬,담당업무,성별 등 3개 기준에 따라 표본을 추출한다.평가는 매년 6월과 10월 두차례 실시하며 결과는 목표관리제평가자료로 활용하고 다음해 도정업무에 적극 반영할 방침이다.
  • 東중국해 복어어장도 ‘포기’

    해양수산부가 한·일어업협정 실무협상에서 기선저인망 쌍끌이 조업을 입어대상에서 통째로 누락시킨데 이어 동중국해의 복어 황금어장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전국오징어채낚기연합회와 부산오징어채낚시협회는 3일 “오징어채낚기 어선을 이용해 매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말까지 동중국해 일본수역 내에서 복어잡이를 해왔으나 해양수산부가 한·일 어업협정 타결 이후 일본측이 억지주장하는 EEZ(배타적경제수역)내에서 우리 어선의 철수를 종용함으로써 일본수역내 조업이 불가능해 졌다”고 주장했다. 지난 달 17일 중·일 잠정조치수역에서 복어를 잡다가 일본순시선에 의해나포됐던 우정호 선주인 金明洙연합회 회장은 “해양부는 우리 어선이 중·일 잠정조치 수역 내에서 일본순시선에 의해 나포된데 대해 항의 등 외교적노력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일본이 주장하는 EEZ를 묵인하고,복어어장을 잃게 됐다”고 말했다. 동중국해의 중·일 잠정조치수역 내 일본 수역에서 복어를 잡아 온 채낚기어선은 부산 40척,동해 22척,속초와 구룡포 각20척등 120척에 이르며 이들은 300억∼350억원의 어획고를 올리고 있다.이에 대해 해양수산부 관계자는“중·일 잠정조치수역은 국제법상 일본수역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중·일간 명확한 구획선이 그어지기 이전까지는 이 수역에서 조업하지 말도록 지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咸惠里 lotus@
  • 2년제 중·고교 문연다

    2년제 고등학교와 중학교 3곳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25일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올 1학기부터 서울 경일경영정보고,전남 목포 제일정보고,부산 신성여중 등 3개교가 1년에 3학기인 2년제 학제를 도입,수업을 시작한다. 일반 중·고교와는 달리 근로 청소년과 일반 학교 탈락자, 주부 등을 교육대상으로 하는 ‘사회교육시설’이지만 학업을 마치면 중·고교 졸업 정규학력을 인정받는다. 운영 결과가 좋으면 1년 3학기,2년제는 일반 중·고교로 확대 실시될 전망이다. 올해 문을 연 부산 신성여중은 4개 학급 216명의 정원을 채워 곧 1학기 수업에 들어간다. 86년에 개교,2·3학년 재학생들이 있는 경일경영정보고와 제일정보고도 각각 200명과 120명의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올해 신입생들은 현재 2학년 학생들과 같이 졸업하게 된다. 이 학교들의 1학기는 3∼6월,2학기는 7∼10월,3학기는 11월∼다음해 2월까지다. 수업 일수는 학기당 90일 이상이며 교육 과정에서의 이수단위는 현행 204단위에서 168단위 이상으로 낮춘다. 경일경영정보고鄭承澤교장은 “2년제 학교는 사회에서 소외당한 청소년들이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다닌 사람들이 교육을 짧은 기간에 마치도록 하기 위해 설립됐다”라고 설명했다. 서울시교육청 평생교육 담당자는 “정규학교와 같은 학력을 인정받는 이들학교에 2년제를 2년 동안 시범 운영해 교육 성과를 평가해 볼 계획”이라고말했다.
  • 국내 첫 ‘명예의 전당’ 짓는다

    국내 최초의 ‘명예의 전당’이 정부 대전청사에 설립된다. 특허청은 24일 부활되는 발명의 날(5월19일)에 즈음해 문을 여는 ‘발명인의 전당’ 안에 ‘우리의 위대한 창조인’과 ‘발명대왕’ 코너로 구성되는명예의 전당을 설치한다고 밝혔다. ‘창조의 세계’라는 주제로 정부 대전청사 특허청 1층에 개관하는 발명인의 전당은 모두 700㎡ 안팎의 전시공간을 이용,명예의 전당·역사관·전시관·미래관으로 꾸며진다. 명예의 전당의 ‘우리의 위대한 창조인’ 코너에는 근대화 이전 및 이후에국가의 위상을 높인 발명가와 국가경제 발전에 공헌한 경제인·기술인 등 모두 10명의 동판부조 초상이 발명품과 함께 헌액된다. 특허청은 발명인의 전당 설립자문위원회가 이미 선정한 5인(세종대왕,이순신장군,지석영,정약용,장영실)과 갑오경장 이후 100년 동안 활동한 인물 가운데 선정될 2인 등 7인을 개관시 우선 헌액할 예정이다.또 인터넷 또는 발명인의 전당 방문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통해 발명가·경제인·학자 중에서 2인을 뽑아 2000년 발명의 날에 헌액하고 나머지 1인을 추후 선정한다. 발명대왕 코너에는 해마다 발명의 날 행사에서 발명대왕으로 선정된 사람의발명품이 전시된다. 발명의 전당에 설치되는 역사관은 밀레니엄 발명사,우리 선조들의 발명사,국산품 1호 등을 전시하며 전시관에는 국민이 많이 알고 있는 상표 변천사및 슈퍼미꾸라지 등 현대 첨단개발품을 소개한다.미래관에는 감각기능을 가진 센서로봇을 비롯,21세기 초에 등장할 생활제품을 선보인다.
  • 국무회의-”장관들 자료수집·보고 부실”

    22일 오전 세종로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는 분위기가 무거웠다.金大中대통령이 장관들을 잇따라 질책했기 때문이다. 취임 1주년에 즈음해 부분개각이 예측되는 상황이어서 金대통령의 이날 질책은 개각을 둘러싼 숱한 관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했다. ◆金대통령은 먼저 金成勳 농림부장관에게 농협에 대한 감사원 감사결과를적시하며 “보고를 받았는가”라고 직격탄을 날렸다.이어 “너무 많은 부조리와 비능률이 드러난 감사결과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서 조속한 시일내에 대책을 강구,보고토록 지시했다. ◆金대통령은 국무위원들에게 임시국회에 대비,“선진국에서는 장관이 야당공세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응하느냐가 평가의 기준”이라며 충분한 자료수집과 준비를 당부한 뒤 곧바로 金慕妊 보건복지부장관을 겨냥했다.“국민연금은 선정(善政)중에 선정”이라고 말한 金대통령은 “보건복지부는 마땅히국무회의에 보고,실정을 알리고 의견을 구했어야 옳다”고 질타했다.또 “중요한 국무를 국무회의에 회부하지않던 권위주의적 정권때의 어용화,형식화된 국무회의와 다르므로 국민연금의 실정을 보고하라”고 즉석에서 지시했다. 그러자 金장관은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대통령께서 국민과의 대화에서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송구스러웠다”고 운을 뗀 뒤 문제점과 보완대책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金대통령은 보고가 끝난뒤 “고충이 많은 것을 느끼고 있으나 미리 대비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연금관리공단이 국민을 찾아가는 서비스를 하지않고 앉아 보고만 받는 과거 권위주의시대의 관료적 태도를 가진 것의 결과”라며 관료주의 탈피와 국정홍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끝으로 “국민에게 사실을 알려 국민과 함께 한다는 참여민주주의 정신에 역점을 두길 바란다”고 당부하면서 거듭 노후생활 안정을 위해 국민연금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金鍾泌국무총리는 오는 25일 金대통령의 취임 1주년을 상기시키면서 “올1년도 최선을 다해 선진국가가 되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참석 장관들에게 호소했다.
  • 사업성과 적으면 예산 깎는다

    내년부터 예산을 들인 만큼 제대로 성과가 났는 지를 따져 예산배정에 차등을 두는 성과주의 예산제도가 단계적으로 도입된다. 우선 내년에 도입이 유력시되는 부문은 교통,환경,실업훈련,경지정리 등의사업분야이다. 기획예산위원회는 5일 성과주의 예산제도를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하기로 하고 오는 5월 시범사업을 선정한 뒤 관련법을 제정해 내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성과주의 예산제도란 해당기관이 수요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과목표와 목표달성을 위한 전략을 정한 뒤 나중에 목표달성 여부를 평가해 그 기관의 인사,보수와 예산배정에 차별을 두는 제도다. 예컨대 민원부서의 경우 접수창구에서 고객이 대기하는 시간을 5분 이내로제시한 것을 제대로 지켰는지를 측정,다음해 예산에 반영하는 식이다. 거리청소사업비는 미화원 인건비,청소차량 구입비 등이 예산대로 집행됐는지를 보기보다 ‘거리환경이 얼마나 깨끗해 졌는가’를 평가하고,실업대책비는 공공근로사업,교육훈련으로 실직자의 가계소득이 얼마나 늘었고 훈련종료후 직장을 구한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늘었는 지를 평가해 다음해 예산을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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