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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품권 보증보험에도 로비”

    “상품권 보증보험에도 로비”

    “시작부터 끝까지 다 로비라고 보면 됩니다.” 경품용 상품권 탈락업체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지정제로 바뀐 뒤 조건이 추상적이어서 심사하는 쪽의 주관이 개입할 소지가 큰 데다 지정제 실시 후 새로 시장에 들어가려는 업체는 진입 로비를, 기존 업체들은 진입저지 로비를 하느라 시장이 혼탁해졌다는 것이다. 상품권 업체 지정을 준비하다 포기했던 한 업자는 “가맹점 100개는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이걸 어떻게 심사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졌다.”면서 “허수나 마찬가지인 가맹점을 눈감아 주느냐, 문제 삼느냐에 따라 지정 여부가 갈렸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부 업체를 제외하곤 가맹점 100개 조건을 충족한 곳이 없다.”고 덧붙였다. 업체 지정에서 탈락했던 또 다른 업자는 “거의 될 줄 알고 있었는데 서버실에 에어컨이 없다는 이유로 탈락했다.”면서 “어떤 업자는 ‘무비 카메라가 한 대 정도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는 통보를 받고 떨어졌다.”고 전했다. 이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업체를 지정하는 기준이 ▲가맹점 100개 이상 확보 ▲6개월 동안 일정 금액 이상의 상환 유무밖에 없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관련 시스템 등에 대해서는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상품권 발행 업체로 지정되기 직전 단계인 보증보험 역시 로비 대상이었다는 주장이 잇따랐다. 경품용 상품권 업체 선정을 준비했던 한 업체 관계자는 “최종 심사 권한은 개발원이 쥐고 있지만 실질적인 서류 심사는 보증보험쪽이 한다고 보면 된다.”면서 “당시 업체들 사이에서는 ‘(게임산업)개발원이 아니라 보증보험 눈치를 봐야 하는 거냐.’는 불만이 나올 정도였다.”고 말했다. 경품용 상품권 업체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서울보증보험의 보증예정서가 필요하다. 보증예정서는 서울보증보험이 서류심사 등을 거쳐 개발원으로 바로 보내도록 돼 있다. 따라서 서울보증보험 심사에서 떨어지면 개발원에 제출조차 할 수 없는 구조다. 지난해 업체 선정에서 탈락한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보증보험쪽 담당자들이 원없이 접대를 받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면서 “돈이 수천억이 왔다갔다 하는데 그(술 접대)보다 더한 로비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전했다. 이에 대해 서울보증보험 관계자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인데 누가 접대나 로비 받겠느냐.”면서 “탈락한 사람들이 우리를 음해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정부는 1999년 2월 개별업체가 상품권을 발행할 경우 일정 금액을 지방자치단체에 공탁하거나 금융기관의 지급보증을 받도록 한 규정을 폐지했다. 그러자 정상적인 상품권이 아닌 교환권일 뿐인 이른바 ‘딱지 상품권’이 남발돼 금융기관이 경품용 상품권을 보증하도록 다시 규제를 가했다. 이에 서울보증보험은 지난해 8월 상품을 개발, 판매에 들어갔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시론] 한국경제 성장동력을 살리리면/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시론] 한국경제 성장동력을 살리리면/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정부와 민간경제연구소 간에 경기상황을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정부는 경기 확장 흐름속에 일시적으로 경기가 둔화되는 양상인 ‘소프트 패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민간연구소들은 내수 회복세가 미흡한 가운데 수출 증가세마저 약화되고 있어 경기의 완만한 하강국면이 지속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경기가 전환되는 국면에 즈음해서 경기의 정점이나 저점을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또한 중·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그렇게 중요한 논쟁거리도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경제가 당면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잠재 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잠재 성장률이란 실제 성장률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특정 국가가 추가적인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성장률을 의미한다. 마치 야구에서 3할대를 치는 타자나, 방어율이 2점대인 투수처럼 잠재 성장률은 한 나라의 평소 경제 실력을 반영한다. 실제 성장률이 잠재 성장률을 밑돌게 되면 그 나라가 생산할 수 있는 최대 수준보다 총 수요가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경기는 하락하게 된다. 마치 3할대 타자가 9이닝 내내 범타로 물러나거나 방어율 2점대 투수가 대량 실점으로 타율과 방어율이 떨어지는 경우와 같다. 이럴 때에는 선수들이 컨디션을 회복해 일시적인 난조에서 벗어나 다음 경기에서 잘 치거나 잘 던지면 된다. 경제도 부양책을 통해 일시적인 어려움에서 회복하면 그만이다. 선수들이 특정 경기에서 잘하고 못할 수 있듯이 국가 경제도 특정한 해에는 성적이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평소 실력이 어떠냐 하는 점이다. 최근의 경기 하락이 순환에 따른 일시적 둔화 현상이라면 큰 문제로 볼 수는 없다. 반면 우리 경제의 평소 실력인 성장 잠재력 자체가 과거보다 떨어지고 있다면 실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최근 우리 경제의 잠재 성장률은 지속적으로 둔화돼 4% 중·후반대로 추정되고 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도 사견을 전제로 잠재 성장률이 4% 초반으로 둔화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같은 성장 잠재력 둔화 원인의 하나는 투자의 부진이다. 지난 5년간 연평균 실질 설비투자 증가율은 1.2%에 그쳤다. 지난해 실질 설비투자는 78조 2000억원으로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의 77조 8000억원을 갓 넘은 수준에 불과하다. 세계화와 개방화 속에서 경쟁이 격화됐던 지난 10년간 우리 경제의 투자규모는 제자리걸음을 한 셈이다. 여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정부와 기업, 금융권, 근로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정부는 규제완화 등 기업의 투자환경 개선을 숱하게 외쳐 왔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기업은 보수적인 투자성향을 보이며 수익모델 발굴을 게을리 했다. 금융권도 기업대출보다 가계대출을 선호하면서 금융중개 기능이 약화됐다. 노동권에서는 전투적인 노사갈등이 지속됐다. 경제는 단판 승부가 아니라 마라톤 같은 ‘장기 레이스’이고 우리 경제는 아직도 성장에 배고프다.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기업, 근로자 모두가 힘을 모아 우리 경제의 평소 실력인 성장 잠재력을 높이고 허약한 경제체질을 개선토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투자 주체인 기업이 원하는 방향으로 투자여건을 과감하게 개선할 필요가 있다. 기업도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서 차세대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미래의 먹을거리를 미리 마련해야 한다. 노동권은 법과 원칙에 기초한 노사관계를 적극 도모해야 할 시점이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 톱·스타 10년 신성일의 영광과 고독

    톱·스타 10년 신성일의 영광과 고독

    10년간 주연작품이 5백편에 육박하고 있다. 국산영화의 3분의1 이상이 신성일(申星一·33)의 것이었다면 신성일아성(申星一牙城)이란 낱말만으로는 모자란다. 5백편 주연이란 기록은 세계 어느 영화사에도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다. 한 마디로 60년대의 국산영화는 신성일에 의한, 신성일을 위한 신성일의 것이었다고 할 수 밖에. 10년 겹치기·5백편주연 3천만원 짜리 집도 짓고 영화제작자·연출자는 신성일(申星一)의 「스케줄」에 따라서 촬영 일정을 정한다. 배우가 촬영 「스케줄」에 따르는게 아니고 제작자가 배우의 「스케줄」에 맞춰 촬영계획을 짜는 것이다. 신성일이 한 영화에 주는 시간은 보통 1개월에 하루 정도를 꼽고 있다. 그가 이틀동안 출연해야 한다면 그 영화는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하는 셈이다. 69년에 내놓은 작품이 개봉된 것만도 이미 50편. 요즘도 『만종(晩鐘)』(신상옥(申相玉)감독)을 비롯해서 15편에 동시 출연 중. 한 때는 최고 33편의 겹치기 기록을 세웠다. 아무리 쉽게 만드는 영화라 해도 초인적인 정력이다. 겹치기 출연의 강행군 속에서 10년을 보내 신성일의 오늘의 느낌은-. 『연애 한번 못한다고 병신이라고 하더군요. 한가지만 바라보고 살았으니까 그 말이 곧 내 생활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배우 신성일은 있어도 인간 강신영(姜信泳 본명)은 잃은 것 같다면서 『허무하다』고 덧붙인다. 그가 『로맨스·빠빠』(신상옥감독)로 「스타돔」에 나선게 59년(개봉은 60년). 10년간 나라에 바친 세금만도 5천만원이 넘는다. 68년에 7백20만원을 낸 그는 69년도에도 7백만원을 내어 연예인 중 최고 납세자의 위치를 계속 유지했다. 국가소득을 증대시켰다는 점에서도 신성일은 매우 중요한 인물. 23세 때 병아리 「스타」 신성일은 서울 종로구 계동에서 구화 1만7천환짜리 하숙생활을 했다. 신(申) 「필름」이 내놓은 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 신성일(申星一)이 그 때 신「필름」에서 받은 월급이 지금돈으로 5천원(구화 5만환). 하숙비 주고 옷 사입고 용돈이 항상 모자랐다. 그러나 3년 뒤엔 가회(嘉會)동에 50만원짜리 전셋집을 얻었고 다음해엔 소격(昭格)동에 1백20만원짜리를 샀다. 지금 살고 있는 이태원(梨泰院) 집은 63년에 7백20만원을 주고 산 것. 2층집을 전면개수해서 건평 1백52평, 싯가 3천만원 짜리 4층 저택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가옥구조의 변천으로 비유해 본 신성일의 경제성장률. 청춘(靑春)영화 「붐」타고 출세길 상대역 돼야 여우(女優)도 햇빛 10년동안 신성일의 상대역이 된 주요 여배우는 지금의 부인 엄앵란(嚴鶯蘭)과 김지미(金芝美), 태현실(太賢實), 김혜정(金惠貞) 그리고 문희(文姬), 고은아(高銀兒), 남정임(南貞任), 윤정희(尹靜姬) 등이다. 이 중 절반이 자의든 타의든 「스크린」과 멀어졌다. 신성일의 상대역이 됐다는 건 곧 「톱·스타」가 됐다는 증거고 상대 역에서 떨어졌다는 건 바로 인기저락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3차전이 벌어지기 시작할 때 세 배우는 신성일과 공연하기 위해 남모를 경쟁을 벌였다. 신성일의 의사에 의해 상대역이 결정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지금 이들 세 여배우가 차지하는 신성일과의 공연 비율은 대충 3대 1 정도, 어쨌든 공평하게 나눠졌다. 5백편에 육박하는 작품이지만 신성일의 위치를 확고히 다져준 건 60년대 상반기의 청춘(靑春)영화 「붐」이었다. 『가정교사』 『맨발의 청춘』 『성난능금』 등 당시 「아카데미」극장 단골의 청춘영화는 신성일의 「포스터」를 그려붙이는 것만으로도 우선 「만원사례」였다. 신성일의 연기개안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은 유현목(兪賢穆)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지만 그가 꼽는 대표작은 『안개』 『까치소리』 『날개』 등 문예영화. 청춘 영화에서 올린 「스타」로서의 명성이 문예영화 「붐」에서 완숙의 연기력으로 결실한 셈이다. 「톱·스타」 10년의 신성일이 생각하는 「스타」의 조건은? 그는 『영화적인 「센스」 70%와 30%의 양식』이라고 단정했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영화연기가 퍽 안이한줄 알고 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예민한 관찰력, 적응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 연예인들이 「스캔들」때문에 기를 못 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양식의 문제다. 30%의 양식을 70%로 활용하면 그런 것(스캔들)에 말려들 우려는 없다』 인기있는 날까지 배우로 현역 물러나면 감독생활 『연애 못한다고 감정이 메말랐다는 평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스타돔」에 오르고 정상을 극복한다는게 그리 쉬운줄 아는가?』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이 오직 영화만 알고 살아 온 생활이 오늘의 위치를 갖다준거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착실히 살았기 때문에 대중이 좋아하고 아껴주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그러나 정상만 바라보고 뛴 생활이 그 자신에게서 사생활을 빼앗아갔다고 후회도 했다. 『전혀 인생을 즐겨보지 못했어요. 위축된 생활, 긴장과 초조감으로 살았을 뿐인 걸요』 그래서 이제는 밤 12시 이후의 촬영은 안하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나면 「무스탕」자가용에 부인 엄앵란을 태우고 경인(京仁)고속도로 「드라이브」를 즐긴다. 70년 부터는 작품을 골라서 출연함으로써 무리한 겹치기를 안할 생각. 『사실 요즘 국산영화는 찍으면서도 의욕을 못 느껴요. 모두 여성취향의 눈물 영화 뿐이라 진력이 나요. 국산영화도 방향을 바꿔야 해요』 -앞으로 10년간은? 『인기가 유지될 때까지 배우를 하겠어요. 배우가 인기에 무관심하다는 건 거짓말이고 언제든 대중이 싫다면 물러서는거죠. 그렇게 되면 감독생활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동안 여러 감독과 작품 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출연만 할게 아니라 내 마음에 맞는 작품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는 얼마 전 상영된 『아듀·라미』같은 남성적인 영화. 「여자(女子)」행렬의 영화에 진력이 나서 「남자(男子)」용의 영화를 해보고 싶단다. 어쨌든 60년대 「스크린」을 휩쓴 그의 위치는 이제 「스크린」 안에만 제한돼 있진 않다. 연 7백만원 납세자인 그의 집엔 정치, 경제, 문화계 인사들의 출입이 잦고 단순한 「팬」 이상의 교류(交遊)를 즐기고 있다. 신성일이 어느 때쯤 정치가(政治家)가 되겠다고 나설지 전혀 부정만 할 일도 아니다. [선데이서울 69년 12/21 제2권 51호 통권 제 65호]
  • [사설]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 보호책 세워라

    서울신문은 광복절 기획기사로 ‘항일 허위(許蔿) 가문 후손들’을 3차례에 걸쳐 탐사보도했다. 이를 보면 대한민국과 국민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지 부끄러움이 앞선다. 왕산 허위(1854∼1908) 선생은 구한말 정미의병 때 ‘서울진공작전’을 펼쳤던 의병장이다. 형제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벌였던 선생이 일제의 탄압으로 순국한 이후 가족들은 만주로, 연해주로 뿔뿔이 흩어져 그곳에서 정착했다고 한다. 선생의 일부 후손은 90년대 중반 산업연수생으로 고국에 돌아왔다가 귀화하는 과정에서 10년 동안 불법체류자 신세였고, 대한민국 국적을 최근에야 다른 가족과 함께 취득했다는 것이다. 행정절차가 까다롭고 지지부진했던 탓이다. 이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아직도 해외의 독립운동가 후손은 집계조차 어렵고 귀화도 쉽지 않다. 세월이 흘러 ‘인증’의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지금 누리고 있는 번영이 순국선열의 얼과 피의 대가임을 생각한다면, 그 후손을 위한 특단의 보호·지원대책을 세우는 게 도리일 것이다. 부족하나마 정부는 올해도 광복절에 즈음해서 러시아·카자흐스탄·중국 등지의 독립운동 유공자 후손 17명을 초청해 고국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잔학한 탄압을 피해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독립운동가의 직계가족과 그 2∼4세대 후손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예의를 갖추는 것이 국가적·국민적 책무이다.
  • 내 여보냐 네 여보냐

    내 여보냐 네 여보냐

    성(姓) 둘을 가지고 두 여자와 각각 결혼, 두 부인을 모두 정 부인으로 호적에 따로 올려 데리고 살던 현대판 「야누스」가 경찰에 입건됐다. 한 남자 밑에 서로 다른 성(姓)을 가진 자식만도 여섯명-. 송경화(宋京和)(36·일명 김경화(金京和)·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씨가 서울 서대문 경찰서에 잡혀와 조사를 받고 있는데 형법 제231조. 234조, 228조인 사문서 위조 및 동 행사, 공정증서원본 불실기재 등 혐의-. 호적상으로나 실제로나 宋씨 에게는 김원미(金元美)(36·가명·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여인, 황경산(黃京山)(46·가명·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여인등 어엿한 두 아내가 있다. 누가 본처도 누가 후처도 아닌- 서로가 남편이 바람정도 피우는 것으로 알았던 두 여인이 우연찮게 만나 『내가 본 부인이다』『아니 내가 본 부인이다』라고 지난 달 대판 벌인 싸움 끝에 이 요절복통할 宋씨의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젓하게 법을 속이고 두 여인을 정실부인으로 아이들까지 각각 낳고 살다 경찰에 잡힌 宋씨의 직업은 사법서사 사무소의 사무원. 경력 12년의 「베테랑」급이다. 호적상 「宋」씨로 金여인과 결혼해 살던 宋씨는 자기 본명이 국내에 없는양 무호적 증명서를 사법서사 사무원으로 서의 재간을 발휘, 허위로 꾸며 「金」씨로 둔갑한 새 호적을 만들곤 黃여인에게 새 장가를 들었다. 金여인과의 사이에 3남1녀, 黃여인과는 2남 등 6명의 자식중 4명은 宋씨요 2명은 金씨 성을 가졌다고 담당형사에게 눈하나 깜짝않고 대꾸해댔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 해괴한 둔갑은 「宋」씨이자 「金」씨인 경화(京和)라는 사나이가 사법서사 경력 12년에 귓전으로 배운 기막힌 잔 재주의 결과였다. 그러나 경찰에 온 宋씨이자 金씨는 『나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슬픈 과거가 있었다』는 독백이다. 金씨(그때까지는 金씨였다)는 황해도에서 아버지를 김동산(金東山·가명)씨, 어머니를 나(羅)씨로 하고 태어났다. 얼마 안가서 어머니 나(羅)씨를 두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곧 나(羅)씨는 이웃마을 송용만(宋龍萬·가명)씨에게 재가해 아들 경화(京和)를 데리고 새 남편과 함께 살았다. 1·4 후퇴 때 세 식구는 월남, 서울서 살았다. 의부 송용만(宋龍萬)씨는 부인이 재가할 때 데려온 경화(京和)를 송(宋)씨로 서대문 구청에 가본적을 만들 때 취직시켰다. 이때부터 핏줄만은 金씨인 경화(京和)씨는 법적으로 宋씨가 됐다. 그때만 해도 군 입대는 복잡한 서류가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金씨로 입대, 제대까지 했다. 宋씨 성으로 1956년 10월 김원미(金元美)여인과 평택(平澤)에서 중매로 결혼했고 다음해 11월엔 혼인신고까지 마쳤다. 직업은 사법서사 사무소 사무원. 4명의 자식을 차례로 낳고 탈 없이 아내와 알뜰히 살았다. 집도 3채나 되었고 월수는 5만원대. 그러나 결혼생활 10년이 되던 해부터 이들 사이엔 가정불화로 싸우기가 일쑤였다. 불화가 계속되자 宋씨는 아내 金여인이 평소 시부모를 모실 수 없다고 버틴다는 이유를 들어 처가 어른들의 동의를 얻어 (宋씨의 주장) 1965년 1월 부인과 이혼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金여인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펄쩍 뛴다. 3년을 별거 끝에, 자식들이 넷이나 되는데 이혼까지 해서 갈라 설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주위의 충고와 꾸지람을 이기지 못해 宋씨는 金여인과 다시 살게됐다. 이 별거중인 3년동안 宋씨는 새 여자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또 하나의 성(姓) 金씨를 만들어 냈던 것. 金여인과의 가정불화로 이혼이다, 아니다로 다투고 있을 때 宋은 대서업무관계로 자주 사무실을 드나들던 황(黃)여인과 우연히 알게 됐다. 10년이나 연상의 黃여인을 宋은 누님이라고 불러댔다. 黃여인도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살아오던 터였다. 누님과 동생 사이는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변해 둘은 남모르게 동거생활을 벌였다. 宋씨는 부인 金여인과 이혼, 함께 살 것을 黃여인에게 다짐했다. 黃여인은 宋씨가 부인 金여인과 이혼한 것을 호적열람으로 확인, 68년 혼인신고를 서울 종로 구청에 했다. 이 때 宋씨는 사법서사로 익힌 재간을 유감없이 발휘해내고 있었다. 『나는 원래 金씨의 피를 받았는데 법적으로 이상하게 된 宋씨로야 살 수 있느냐』며 黃여인을 꾀어냈던 것. 宋씨는 아내 金여인의 호적을 말소시킬 수 없음을 알고 무적신고를 내서 또 하나의 호적을 만들 것을 결심했다. 宋씨는 2명의 무적보증인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金씨로 되어있는 제대증명서, 병적증명서를 첨부, 자기가 위조해낸 무적증명서를 만들어 서울 종로 구청에서 김경화(金京和)란 새 호적을 떼어냈고 그 위에 黃여인과의 혼인신고를, 두 아이의 출생신고까지도 마쳤다. 그 후로는 두 아내집을 거의 반반씩 드나들며 살았다. 이미 이혼한 원부인 金여인의 집엘 왜 자주 가느냐는 黃여인의 반발로 가끔 싸움도 벌였지만 자식들 문제란 핑계로 교묘하게 부인 黃여인을 속였다. 그때까지 원부인 金여인은 남편이 잠시 첩을 얻어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알았을 뿐이다. 두여인은 물론, 두 여인의 아들 딸들은 저마다 아버지 성이 宋씨요, 金씨임을 믿는데 의심이란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성으로의 둔갑은 들통이 났다. 지난 달, 첩살림으로만 믿고 있는 宋씨의 부인 金여인은 서대문구 연희동 黃여인 집을 찾아 남편을 포기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 말을 들은 黃여인은 『내가 어째서 첩이냐』 『제 남편이 싫어서 이미 이혼한 것이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 귀찮게 구느냐』 고 金씨가 자기의 정식남편이라며 대들어 두 여인사이엔 서로 떠밀고 밀치는 싸움이 벌어졌던 것. 이튿날 黃여인은 종로구청에서 떼어 온 호적등본을 남편 金씨의 어머니 나(羅)여인에게 들이대고 자기의 정당함을 호소했다. 이에 질세라 金여인도 宋씨가 남편임을 증명하는 호적등본을 떼어 호적상 적법한 부인임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두 부인은 이 엄청난 사실에 아연실색, 남편에게 宋씨와 金씨 중 어느것이 가짜 성이냐고 울면서 호소했다. 경찰에 잡혀온 그는 문초 형사에게 본명은 김경화(金京和), 일명 송경화(宋京和) 라고 거침없이 대답. 한편 자기가 진짜 宋씨와 金씨의 아내임에 틀림없다고 경찰에서 진술하고 있는 이들 두 부인은 서로 양보를 거부, 끝까지 버티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金여인은 남편 宋씨의 처벌을 원치 않으나 새 여자를 얻기위해 법을 어기고 성까지 바꾸는 파렴치 행위는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10년이나 손 아래인 내 남편이 그런 사람인줄은 몰랐다고 黃여인 은 한탄. 주인공 宋씨이자 金씨는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법의 심판을 달게 받겠지만 어떻게 하면 한 사람 밑에 각기 다른 두개의 성을 가진 자식들을 정리할 수 있겠느냐면서 앞날을 걱정하기도 했다. 담당 경찰쪽은 『宋씨에 대한 적용법규가 63년 12월에 공포된 일반사면령에 해당된다』면서 법의 약점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는 宋씨의 행위가 백번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근거가 흐려졌다고 수사상의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최광일(崔光一) 기자> [선데이서울 69년 12/14 제2권 50호 통권 제 64호]
  • 한국인인 나는…태극이요… 무궁화요… DMZ이다

    ● 고종이 태극 고안…본지 특종 세계 모든 나라가 자국을 상징하는 국기를 갖고 있으나, 우리나라처럼 그 상징에 우주만물과 철학을 담고 있는 예는 찾기 힘들다. 바로 태극(太極)과 괘(卦)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홍으로 이루어진 태극은 음(청색)과 양(홍색)의 상호 작용에 우주만물이 생성·발전하는 대자연의 영원한 진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창조와 발전을 의미한다. 태극은 우주자연의 생성근본원리이며, 창조적 우주관을 담고 있다. 이러한 태극기는 1882년 8월9일 박영효(朴泳孝)가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배 위에서 만들었고, 이를 8월14일 고베의 숙소 니시무라야에 게양한 것이 효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7년 10월9일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한 ‘뉴스피플’ 제288호에 실린 특종 기사에 따르면, 태극기를 직접 도안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인물은 고종(高宗) 임금이라고 한다. 박영효는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가면서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태극 문양을 사용한 연원은 매우 오래 되었다. 우선 선사시대 때의 고령과 울산 암각화에서도 발견되며, 고구려의 고분벽화 사신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682년(신라 신문왕 2년) 경주 감포에 세운 감은사의 기단석에도 태극 문양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태극 문양은 종묘와 궁궐 및 왕릉, 사찰 등 도처에서 다양하게 발견된다. 특히 서울대 규장각도서관에 소장된 어기(御旗) 채색도를 보면, 중앙에 4개의 동심원을 수직으로 나눈 태극과 그 주위에 8괘를 배치한 그림을 조선시대의 임금을 표상하는 깃발로 사용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굳이 의미를 달자면 태극기의 시조쯤 되지 않나 생각된다. 2002년에도 그랬지만, 석 달 전 밤잠을 설치게 했던 2006년 월드컵 때에도 변함없이 태극 문양은 붉은색과 함께 하나의 패션이 되었다. 상하와 좌우가 융합하지 못하고 커다란 장막에 꽉 막힌 듯한 세상, 태극 창제의 정신으로 극복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여겨진다. ● 산해경에도 ‘훈화초가 아침에 피고… ’ 기록 애국가를 보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후렴의 첫 구절을 장식하고 있다. 매사 따지기를 좋아하는 혹자는 이 구절이 잘못됐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노랫말처럼 무궁화가 우리 강산 삼천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지 못한 까닭이겠다. 그런데 옛 기록들을 보면 한반도가 무궁화 자생지였고, 한반도의 특징으로 인식될 만큼 도처에 만발했음을 알려준다. 무궁화가 한반도와 관련된 사실을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이다. 이 책의 ‘해외동경’편에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훈화초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는 시든다.”고 하였다. 북방에 있는 군자의 나라는 한반도이며, 훈화초(薰花草)는 무궁화를 일컫는 중국의 옛 명칭이라 한다. 또한 신라의 효공왕이 897년 7월 당나라의 광종에게 국서를 보낸 일이 있는데 그 국서 가운데 신라를 자칭하여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한 사실도 확인된다.‘근화’ 또한 무궁화의 또다른 이름이다. ● 한국인 뿌리 밝혀주는 단서 역사상징 가운데 선사시대의 것은 빗살무늬토기와 고인돌을 우리의 민족문화상징으로 삼기에 가장 적합할 듯하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출토·발굴된 수많은 선사 유물과 유적 중 이들만큼은 한반도가 주인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우리나라 전역에서 만들어 쓴 토기에 대한 통칭으로, 한국인의 뿌리를 밝혀주는 단서가 된다는 데서 그 중요성을 더한다. 빗살무늬토기 발견 분포도를 보면, 바이칼호 일대가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중심지이며 빗살무늬토기는 여기로부터 동으로는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서로는 볼가강 유역을 거쳐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반도까지 전해졌다는 것이 세계 고대사 학계의 정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고대 문명의 발상지를 바이칼호 일대로 보는 근거가 된다. 발굴 현장에서 깨진 토기 조각들이 출토되고, 그 파편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맞추어 원래의 형체를 되살린 빗살무늬토기가 이처럼 장구한 민족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가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파편 어느 것 하나조차 조상의 신주 모시듯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민족상징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사회구조와 문화를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거석(巨石) 문화유산이다. 한자로 지석묘(支石墓:일본), 석붕(石棚:중국)으로 표현되는 고인돌은 아시아를 비롯하여 유럽·아프리카 등에서 약 5만 5000여 기가 확인되는데, 그 중 약 3만여 기가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어 우리나라가 전세계 고인돌의 중심국가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반도에 그 분포가 집중되어 있는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동남아시아 또는 중국 동북부지역에서 바다를 통해 전해졌다는 전파설과 함께, 주변지역과 관련 없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생설이 맞서고 있다. 자생설은 한반도가 동남아시아나 중국 동북부지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고인돌이 많다는 점, 그리고 축조 연대가 이들 지역의 것보다 앞선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고인돌은 선돌(立石)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석문화의 요체이며, 조상들의 정신세계가 구현된 귀중한 민족상징이다. 이에 2000년 11월 29일 호주 케언스에서 열린 제2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우리나라의 고창·화순·강화 등 3개 지역의 고인돌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민족의 상처…지금은 희귀동물 서식지로 비무장지대(DMZ)와 길거리응원은 어찌 보면 우리 민족의 상처와 냄비 기질을, 또 어찌 보면 우리민족의 기회와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 마치 야누스와 같다고 하겠다. 비무장지대는 민족의 아픔인 ‘한국전쟁’에 직접 참여한 유엔군과 북한·중공군이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에 합의하면서 한반도 중앙의 동서 248㎞ 길이를 군사분계선으로 삼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비무장지대는 우리 민족이 입은 커다란 상처덩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자유로운 출입이 막힌 결과 비무장지대는 희귀동식물들의 주요서식지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생태를 조사하기 위한 남북학술조사단의 구성과 활동이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비무장지대는 민족분단의 아픔은 물론, 자연 생태의 보고(寶庫)와 민족화합, 평화공존의 현장성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주요 문화상징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문화국민으로서 성숙된 질서의식 표출 2002년뿐 아니라 2006년에도 세계를 놀라게 한 길거리응원은 남녀노소가 너나할 것 없이 공간과 시간에서 동질화되고 균일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문화행위였다. 서울 광화문과 시청을 비롯하여, 부산·대구·광주·인천·대전·울산·전주·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적게는 수만명에서 많게는 수십만명이 ‘애국’으로 하나 되어 우리 축구대표팀을 함성과 율동으로 응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길거리응원은 오직 신기록 수립과 문화국민으로서의 성숙된 질서의식만이 관심사였지 이를 가능케 한 ‘변화’에 대한 인식은 가려져 있었던 듯하다. 예전 같으면 수십만명이 한 곳에 모이는 사건(?)이 어찌 가능했을까. 우리의 기억에는 ‘집시법’이라는 반(反)민주적 잣대를 들이댄 강제해산만이 남아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이보다 더 큰 변화는 아마도 찾기 힘들지 않나 생각된다. 길거리응원은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또 내후년, 또 그 다음해에도 계속될 것이다. 이에 더해 자부심을 갖게 되는 점은 이번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나타났듯이 우리의 길거리응원이 세계 각지에서 벤치마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독재시절의 우울한 시험답안

    <1987학년도 2학기 서울대 사회학과 사회변동론 기말고사>문제=사회심리학적 변동론에 대하여 논하시오./답=사랑하는 후배의 분신 소식을 듣는 순간, 책을 잡고 있는 제 모습이 너무 역겨웠습니다. 지금 제게는 지식이 아니라 비굴한 저를 벌할 수 있는 채찍이 필요합니다.(경영학과 4학년 김○○) 진보학계의 거두였던 고 김진균(1937∼2004)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과목에서는 유난히 이런 시험 답안이 많았다. 여러 학과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문제와 상관 없이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답안지에 토해내곤 했다. 그 속에는 시대의 아픔을 스승과 함께 나누려는 제자들의 정열과 믿음이 담겨 있었다. 고인의 수택(手澤·손때)이 밴 제자들 답안지 1만 1000장이 오는 10월 세상에 공개돼 제자들과 해후한다. 답안지는 고인의 학교기증 유품의 일부. 딸 지인(36)씨는 2004년 2월 타계한 부친의 유언에 따라 그해 6월 부친이 갖고 있던 자료를 서울대에 기증했다. 책, 논문, 강의록, 연구자료, 비디오자료 등 5t 트럭 하나 가득이었다. 모든 학생들의 답안지를 문서파일(PDF)로 바꿔 저장한 석장의 CD는 고인이 투병 중에 손수 제작했다는 데서 더욱 의미가 크다. 줄곧 대장암과 싸워 온 고인은 2003년 정년퇴임 후 제자들과의 인연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1985년부터 퇴임 직전까지 18년간 단 한장도 버리지 않고 모아 온 1만 1000여장의 답안지를 딸의 도움을 받아 일일이 스캐닝해 PDF파일로 만들었다. 고인은 독재정권에 의해 필화, 해직 등 갖은 수난을 당했지만 학생들을 통해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았다. 제자였던 86학번 김모(회사원)씨의 말.“학생들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해직 되기도 했던 김 교수님을 진보적 실천 지식인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수업·시험 거부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운동권 학생들을 포함해 많은 학생들이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답안에는 87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씨가 당선된 뒤의 절망과 체념도 녹아 있고 연일 이어지는 시위로 성적이 좋지 않음을 헤아려 달라는 애교도 담겨 있다.“올해는 기필코 해방을 쟁취하는 해가 되길 바라며 저희들도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시험거부 과목이 너무 많아 성적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대기과학과 3학년생) 서울대 기록관은 10월 개교 기념일에 즈음해 김 교수 유품을 기획전시할 계획이다. 기록관 관계자는 “방대한 양의 답안지들 중에서 시대상황에 따른 학생들의 의식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추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길·집·물·전기·통신 개발 농민 삶의 질 개선에 초점”

    |뉴델리 전경하특파원|인도 농촌개발부의 2006회계연도(2006년 4월∼2007년 3월) 예산은 71억달러(6조 8500억원)로 인도 43개 중앙정부부처(2006년 7월 현재) 중 석유·가스부(81억달러) 다음으로 크다. 이외에도 ‘바라트 니르만(Bharat Nirman·인도 건설)’ 프로젝트에 쓰이는 돈 4800억루피(9조 9600억원)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거대 부서이기도 하다. 바라트 니르만 프로젝트 자금은 디젤에 매긴 세금(30%), 외부원조(19%), 국내 차관(21%) 등으로 이뤄졌다. 레누카 비슈와나탄 농촌개발부 차관은 “농촌개발의 초점은 길, 집, 물, 전기, 통신 등 5개 분야”라며 “농촌의 삶의 질을 높여야 농촌 공동화와 도시 포화현상 등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농촌개발부가 길, 집, 식수공급을 담당하고 전기는 전력부, 통신은 커뮤니케이션·정보기술부에서 맡는다. 도로는 1000개 도시를 잇는 것이 목표이며 현재 500개 도시를 연결할 예산이 확보된 상태다. 도로건설을 원하는 지방정부는 전문가에게 의뢰, 계획안을 만들어 중앙정부에 제출한다. 중앙정부는 대학이나 기관, 민간 기술자들로 이뤄진 심의위원회에서 타당성 검사를 마친 뒤 예산의 50%를 선지급한다. 나머지 50%는 사후 지급이다. 비슈와나탄 차관은 “길은 농촌과 도시를 연결, 사람과 농산물의 왕래를 쉽게 해 농촌발전을 이끌 수 있다.”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를 설명했다. 인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과일과 야채를 생산하지만 물류시설이 뒤떨어져 있고 기후조차 더워 잘 부패하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농민들이 이동·보관이 쉬운 곡류 생산에 집중하는 편이다. 주거환경 예산에는 중앙정부가 필요 예산의 75%를 댄다.2005년부터 2009년까지 매년 150만가구씩 총 600만가구를 공급하는 것이 목표다.4인 가족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방 하나, 부엌, 화장실 등이 딸린 집에 전구 하나 정도를 켤 수 있는 전기가 무료 공급된다. 물 공급은 수도, 물을 끌어올리는 모터, 저장소 등 3가지를 공급하는 프로그램이다.농촌개발부 관계자는 “지하수를 개발하면 농민들이 당장 급한 농사에 다 써버려 다음해에는 지하수를 얻기 위해 더 깊이 파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 교육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lark3@seoul.co.kr
  • [잘못된 관행 이젠 깨자] (2) 임의동행·강압수사

    [잘못된 관행 이젠 깨자] (2) 임의동행·강압수사

    경찰은 해마다 혁신과 수사 구조개혁 등을 외치고 있다. 개선도 적지 않게 되고 있다. 하지만 관행의 굴레로부터 자유롭다 할 순 없다. 불법적 임의동행, 인신구속과 자백에 의존하는 수사관행 등에 발목이 잡혀 있다. ●“고소하려면 해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사는 김모(40)씨는 지난 3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지하철역 화장실 앞을 지나던 중 점퍼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당신 언니가 납치됐으니 같이 가자.”며 자신을 어디론가 끌고 가려 했다. 순간적으로 ‘납치’라고 생각한 김씨는 필사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백화점 직원이 나섰다. 이에 마지 못한 듯 뒤늦게 신분증을 내민 남자는 다름아닌 경찰이었다. 이 경찰관은 “납치 용의자가 백화점에 나타날 거라는 제보가 있었고, 당신을 용의자로 잘못 본 해프닝”이라고 말하고는 사과도 없이 순식간에 도망치듯 사라졌다. 김씨는 “실수로 엉뚱한 사람을 검거하려 했다는 것은 이해한다 해도 그 뒤 사과 한마디 없이 사라진 것은 아직 국민 앞에 오만하기만한 공권력을 상징하는 것 아니냐.”면서 “그 때 놀란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을 쓸어내린다.”고 말했다. 이후 김씨는 해당 경찰서에 항의했으나 ‘납치극은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고 정 고소하고 싶다면 자작극을 벌인 사람을 상대로 하라.’는 무성의한 답변만 들었다.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 잘못된 관행은 수사과정에서도 이어진다. 아들이 강도 살인혐의로 구속됐다 1·2심에서 모두 무죄선고를 받은 아버지 조모씨는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며 울먹였다. 조씨의 아들(당시 15세·중3년) 등 3명은 5년 전인 2001년 9월 강도 살인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다음해 2월 춘천지법 원주지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경찰관들이 조군 등을 조사하면서 구타 등으로 자백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6월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강압수사가 문제였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경찰의 폭행 사실은 흡사 공포영화를 연상시킨다. 흰 종이로 감은 몽둥이로 목과 팔, 머리 등을 닥치는 대로 내리쳤는가 하면 소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기도 했다. 결국 소년들은 2건의 미제 살인사건을 모두 자신들이 저질렀다고 ‘거짓자백’했다. 조군의 아버지는 “20명이 돌아가면서 아들을 때렸고 취조 과정에선 아이를 가운데 잡아두고 경찰 2명이 앞뒤로 마주보고 서서 번갈아가며 폭행했다.”고도 했다. 그는 “맞은 사실 등을 말하면 부모를 못 만나게 할 거라거나 사형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세무 공무원으로 평생 국록을 먹고 살았지만 이젠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며 울먹였다. 하지만 법원이 조씨에게 결정한 보상은 위자료 7100만원이 고작이었다. 지난 19일 서울고법 민사13부는 “국가는 위자료 등 71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물론 수사 과정에서 폭행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유죄’가 ‘무죄’로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자백’에 폭행까지 개입됐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나길회 김준석기자 kkirina@seoul.co.kr
  • 현정은 현대회장 ‘思夫曲’으로 경협의지 다져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남북경협이 큰 위기를 맞은 가운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남편인 고(故) 정몽헌 회장에게 보내는 사부곡(思夫曲)을 통해 흔들림없는 경협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현 회장은 31일 정몽헌 회장 3주기를 즈음해 언론에 공개한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이 제창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현대그룹의 개척정신을 환기시키며 위기 극복에 대한 정신 무장을 강조했다. 현 회장은 편지에서 “당신이 첫 삽을 뜬 개성공단은 하루가 다르게 제 모습을 갖춰 가고 있고, 하나로 뻗은 경의선과 동해선이 이제 철마의 뜨거운 몸짓만을 기다리고 있다.”며 “현대의 꿈과 희망도 시련 위에서 더욱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가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앞으로 몇 해가, 아니 몇 십 년이 더 지나가도 더 선명해지기만 할 당신의 발자취들이지만 그 길을 좇아가는 저는 걸음이 느린지 자꾸 넘어지기만 한다.”면서도 “그래도, 아무 일 없었던 듯 일어서려 한다.”고 굳은 다짐을 보였다. 현 회장은 “어떻게 이뤄낸 현대인데, 어떻게 이뤄놓은 남북교류인데, 작은 바람이 홀로 남은 저를 흔들 때마다 당신 생각에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어 본다.”면서 “아내로서 남겨진 일보다는 현대그룹 회장으로서 남겨주신 일들이 더 많은 걸 알기에 오늘의 이 자리가 더 숙연해진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하늘이 맺어준 북측과의 인연을 민족화해의 필연으로 만들어가야 하며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현대그룹의 불굴의 개척정신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만들겠다.”면서 “그 무엇도 현대가 가야 할 이 숙명의 길을 막아서지 못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현 회장은 KCC와 현대중공업그룹과의 경영권 분쟁, 김윤규 전 부회장 사퇴 파문 등 온갖 풍랑을 헤쳐 오면서 중대 고비마다 국민이나 임직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위기 극복에 대한 의지를 표명해왔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시론] 인도적 문제는 협상카드 아니다/이철기 동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시론] 인도적 문제는 협상카드 아니다/이철기 동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의 후폭풍이 결국 남북관계에까지 밀어닥쳤다. 잘 나가던 남북관계가 손상되고, 우리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도 타격을 받게 생겼다.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남한이 북한에 대한 쌀과 비료 지원을 중단하자,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전면 중단을 선언했다. 북한 미사일사태로 애꿎게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남북한의 백성들이다. 식량난으로 굶주려온 북한 주민들은 더 배곯게 생겼다. 이제나 저제나 가족상봉을 눈빠지게 기다려온 남쪽의 이산가족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정치·군사적 문제의 불똥이 인도적 문제에 가장 먼저 튄 것은 아이로니컬하다. 우리 정부의 북한에 대한 쌀과 비료 지원 중단은 너무 성급한 조치였다. 섣부른 대북 식량지원 중단은 남북관계를 크게 후퇴시킬 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지렛대와 발언권의 상실로 이어져 스스로 손발을 묶는 자충수가 되고 있다. 남북간에는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허용하는 대신, 남한이 비료와 쌀을 지원한다는 묵시적인 ‘상호주의’가 적용돼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쌀과 비료 지원을 중단할 경우, 북한의 대응조치가 충분히 예견됐었다. 대북지원을 중단한다고 해서, 북한이 미사일 개발을 중단하고 미사일문제가 해결되나. 대북 지원금이 미사일 개발에 이용된다는 주장도 논리적 비약이긴 마찬가지다. 남한이 지원을 하지 않더라도, 또 설령 북한주민 수백만명이 굶어 죽더라도, 북한은 체제 생존이 걸린 미사일 개발에 모든 역량과 경제력을 최우선적으로 쏟아 부을 것이다. 결국 식량지원 중단으로 고통당하는 것은 북한주민들뿐이다. 게다가 대북제재를 반대한다던 우리 정부는 결과적으로 미국과 일본보다도 앞서 가장 큰 대북제재를 한 셈이 되었다. 이산가족 상봉사업의 전면적인 중단으로 즉각 맞대응하고 나선 북한의 옹졸함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북한의 이런 돌출행동은 남한 내에서 북한에 대한 감정과 여론을 악화시키고, 한국 정부의 대북지원사업을 더욱 어렵게 할 뿐이다. 이산가족 상봉이 우리 입장에서는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도적 문제이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매우 민감한 정치적 문제다. 외부의 개방물결이 스며들게 하고 사상통제의 이완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봉 대상자들을 찾아내 사상교육을 시키고, 상봉 후에 이들을 사후관리하는 것도 북한으로서는 보통일이 아니다. 이처럼 이산가족 상봉사업은 북한에는 큰 정치적 부담이고 사회적 비용이 만만찮게 드는 사업이다. 따라서 이산가족 상봉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북한에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음을 국민들에게 설득시킬 필요가 있다.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쌀과 비료지원 재개의 조건으로 못박은 것도 자충수를 둔 꼴이다. 남한은 대북 쌀과 비료 지원을 재개하고, 북한도 이산가족상봉 사업의 중단을 취소해야 한다. 정부 차원의 접촉이 당장 어렵다면, 우선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북한에 보내 인도적 사업의 재개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광복절에 즈음해 이산가족 상봉 재개를 실현시키고, 북한에 대한 쌀과 비료 지원도 재개해야 한다. 인도적 사안을 정치군사적 문제와 연계시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남북 모두 인도적 문제를 조건화하고 협상카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는 남북 주민들 서로 간에 증오심을 심어주고 불신감만을 키울 뿐이다. 이철기 동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 논문 표절 행정학회에 심의요청

    논문 표절 행정학회에 심의요청

    김병준 부총리가 국민대 교수시절 제자 논문을 표절했다는 의혹의 진위가 한국행정학회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건국대 행정학과 소순창 교수는 25일 “김 부총리를 대신해 김 부총리 논문이 표절심의 대상이 되는지와 대상이라면 표절 여부를 심의해 달라는 요청서를 한국행정학회에 팩스로 보냈다.”고 밝혔다. 소 교수는 “당시 논문 작성시기나 정황 등을 감안하면 표절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소 교수는 김 부총리의 국민대 교수시절 조교였다. 한국행정학회는 심의요청을 받은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윤리위원회를 열어 심의·의결하게 되어 있어 김 부총리의 논문표절 의혹은 조만간 가려질 전망이다. 교육부 엄상현 기획홍보관리관은 이와 관련,“부총리가 당시 논문을 학회에 발표하기 전에 제자인 신모(92년 사망)씨에게 데이터를 활용하는 데 공저자로 할지에 대한 의견을 물었으나 신씨가 사양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교육부는 또 김 부총리가 행정학회지 이외에 국민대 논문집 ‘법정논총’에 같은 논문을 내면서 제자의 자료 수집 사실을 숨겼다는 일부 지적에 대해 “그때는 신씨 논문이 나오지 않은 상태로 이를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었고 논문 본문에 데이터가 다른 사람의 것이고 이를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데 따른 문제점까지 언급했다.”고 반박했다. 한편 학계에서는 김 부총리의 국민대 교수시절 제자 논문 표절의혹과 관련,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김 부총리가 국민대 교수로 있을 때인 1987년 한국행정학회 연구이사를 맡았던 정정길 울산대 총장은 “그때 정황을 봐야 하는데 표절이 전혀 아니고 현재로도 별 문제가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정 총장은 “김 부총리 논문은 87년 12월에 학술대회에서 발표됐는데 그렇다면 두달 전에 쓰여졌을 것이다. 그런데 신 박사 논문은 그 다음해인 2월말 나왔다.”면서 “6월 행정학회에 발표했을 때 공동명의로 했으면 좋았겠으나 같이 이름을 올린다는게 격이 맞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서울대 교수협의회 장호완 교수는 “논문 심사에 들어간 사람이 심사 대상자의 데이터를 사용하는 것은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일”이라면서 “만일 데이터 작성에 깊숙이 관여했다면 오히려 논문 공저자에 이름이 올라가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같은 행위가 80년대라고 해서 관행적으로 통용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문제있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박현갑 김기용기자 eagleduo@seoul.co.kr
  • [창간 102주년 기획] 고이즈미 개혁 야전사령관 다케나카 헤이조 日총무상 인터뷰

    [창간 102주년 기획] 고이즈미 개혁 야전사령관 다케나카 헤이조 日총무상 인터뷰

    |도쿄 이춘규특파원|지난 5년간 일본의 개혁작업을 진두지휘한 다케나카 헤이조 총무상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정권의 개혁 성과에 대해 “부실채권 처리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등 하고 싶은 개혁은 다 마쳤다.”고 강조했다 도쿄 도심의 관청가에 있는 총무상 집무실에서 11일 서울신문과 창간기념 특별인터뷰를 가진 다케나카 총무상은 공직사회 개혁에 대해 “공무원 5년간 5% 감축 방침은 제도화되어 누구도 되돌릴 수가 없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우정사업 민영화의 향후 10년간 구체적 실행과정 등이 차질을 빚으면 일본은 다시 1990년대로 되돌아 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고이즈미 총리 임기말인데도 여전히 방송과 통신의 개혁 등 남은 과제로 바빴다. ▶고이즈미 개혁의 의미와 성과는.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한 2001년 일본은 힘든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었다.‘잃어버린 10년’이 이어지는 때였다. 따라서 내각에 중요한 과제는 경제 구조를 개혁하는 일이었다. 경제성장을 위해서였다. 재정건전화도 중요 과제였다. ▶개혁의 추진 과정은. 우선 대증요법적인 개혁에 손을 댔다. 부실채권 정리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걸 통해 일본이 본래 갖고 있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동시에 그 본래의 힘을 끌어올리는 선제적이고 예방적인 개혁을 해야 했다. 지구촌시대의 경쟁력을 올리고, 저출산 시대에 대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민간에 맡길 것은 민간에, 지방에 맡길 것은 지방에 맡기는 개혁이다. 우정사업 민영화 등이 핵심이다. 부실채권은 당초 2년반동안 반으로 줄이려 했으나 실제는 3분의1 정도로 줄였다. ▶개혁은 어디까지 왔나. -대증요법적인 개혁은 이미 마쳤다. 예방적·선제적인 개혁은 이제 출발점에 서 있다. 개혁의 끝은 없다. 지금부터 우정민영화 작업은 시작된다. 개혁작업은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다. 이제 예방적이고 선제적인 개혁작업은 향후 5∼10년 걸린다. 개혁을 계속하지 않으면 다시 90년대로 돌아가 상황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 개혁에 대한 관료들의 저항은. -고이즈미 총리는 2개월여 지나면 임기가 끝난다. 강한 리더십의 공백이 우려된다. 이에 따른 저항과 반발이 두드러지고 있다. 첫째는 엎드려 있던 관료집단이 목소리를 높이며 ‘복권’을 시도하고 있다. 강한 리더십이 사라지면 잃어버린 권한을 되찾기 위한 관료의 반격이 시도될 것이다. 두번째는 반시장·반글로벌화 움직임이다. 시장경제시스템을 강화, 일본경제가 건강해졌는데 시장경제원리로 인해 격차가 확대됐다며 반대하는 세력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기득권자가 개혁을 막겠다는 궤변이다. 세번째는 반 세대교체 움직임이다. 젊은세대가 잘못도 저질렀지만 장점은 살려야 한다.90년대 잃어버린 10년은 낡은세대가 잘못된 판단을 해 초래했다. 세대교체를 기필코 달성해야 한다.(그는 고이즈미 정권 이후 일본정치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일부 자리에서 밝힌 바 있다.) ▶개혁의 소리는 높았지만 내용은 없다는 지적도 있는데. -틀렸다. 일본은 십수년간 부실채권 개혁을 못했다. 그걸 고이즈미 내각이 했다. 우정 민영화는 100년간의 우정사업 문제점을 개혁했다. 정책금융 민영화도 50년만이다. 앞으로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개혁이 매우 많다. ▶개혁에 대해 불만의 소리는. -고이즈미 개혁은 기득권을 깨고, 새로운 도전세력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낡은 세대의 기득권과 새로운 도전세력 중 누가 나라를 위해 필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다케나카 때리기’가 있다는 것이 역으로 개혁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 한국도 공직개혁이 진행 중이다. 일본에서 5년간 5% 공무원 순수 감축이 실제로 가능한가. -지난해 이 즈음만 해도 5%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순수감축은 1% 정도밖에 안된다고 했다. 무리라고 했다. 그런데 우정사업이 민영화되면서 국민들은 작은 정부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읽었고, 그 기세가 이어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매년 정원 관리 목표도 설정했다.1.5%는 총무성이 줄이고, 나머지 3.5%도 대상직종을 정했다. ▶차기총리의 리더십 약해지면…. -공무원 감축은 정부방침으로 각의에서 결정했다. 다음 내각도 집행해야 한다. 이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별도의 각의결정이 있어야 한다. ▶낙하산 인사는 일본도 문제인데. -국민감정이 좋지 않다. 이를 막기 위한 강한 방침을 갖고 규칙을 만들고 있다. 내각 전체에서 검토하고 있다. ▶한국경제가 썩 좋지 않다. 한국경제에 대한 조언은. -한국도 1997년 금융위기 이후 많은 개혁을 진행해 왔다. 개혁의 노하우도 많다. 일본이 부실채권을 개혁하는 방법은 한국에서 많이 배웠다. 한국과 일본은 경제구조가 닮은 점이 많다.‘경제의 이중구조(dual economy)’도 그렇다. 생산성이 높은 부문과 낮은 부문으로 된 이중구조는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미래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다. 두 부문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고 한국이 가진 많은 장점을 살리면 성장잠재력은 높아질 것이다. ▶한·일 FTA(자유무역협정)는. -한·일은 경제구조도 닮았고 공통의 이해도 갖고 있다. 교류도 많다. 두 나라의 FTA는 상호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과 인연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국인 친구들로부터 많은 감동을 받았고, 지금도 많은 친구들과 교류하고 있다. taein@seoul.co.kr ■ 다케나카 총무상은 누구 다케나카 헤이조 총무상은 고이즈미 개혁의 ‘야전사령관’ 같은 인물이다. 5년간의 ‘고이즈미 개혁’ 방안은 대부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평이다.2001년 4월 출범한 고이즈미 초대 내각 때 게이오대학 교수였다가 경제재정상으로 임명됐다. 내각책임제인 일본에서는 교수에서 곧바로 각료로 임명되기는 쉽지 않다. 다음해에는 금융상까지 겸직하며 일본경제 회복을 위한 최대 걸림돌이던 부실채권 처리를 시작했다. 이후 도로공단과 우정사업 민영화를 기득권세력의 반대를 뚫고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정치감각이 뛰어나고 작지만 단단한 체구에 뒷심이 강하다는 평이다. 원외(院外)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2004년 참의원선거에 출마, 당선됐다. 고이즈미 총리와 처음부터 5년 이상 함께 일해온 유일한 각료이기도 하다. ■ 다케나카 때리기 5년|도쿄 이춘규특파원|지난 5년간 일본의 기득권 세력은 이른바 ‘다케나카 때리기(일본식 표현 바싱구·bashing)’를 쉴 새 없이 시도했다. 기득권을 깨부수겠다는 개혁에 관료, 기업, 정계의 기득권세력은 다케나카 헤이조 총무상에게 쉼없이 ‘이지메´(집단 따돌림)를 가했다. 그가 부실채권 비율을 낮추는 과정에서 “4대 은행도 도태의 예외가 될 수 없다.”, “대기업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등 거침없이 발언할 때마다 기득권세력은 “교수출신이 현실을 너무 모른다.”며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기득권 깨부수기가 외국에선 고이즈미 개혁에 대한 신뢰성을 높인 것으로 평가됐다. 그는 인터뷰 때 다케나카 때리기에 대해 “모두 네차례의 바싱구(때리기)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제1차 다케나카 때리기는 2001∼2002년 사이다.2차 때리기는 금융재생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2002∼2003년. 제3차는 지난해 우정사업 민영화를 단행할 때다. 이 가운데 고이즈미 개혁의 초기인 1∼2차 다케나카 때리기가 가장 격렬했다. 개혁이 탄력을 받기 전에 예봉을 꺾기 위해 정계와 관료, 기업들이 총력을 다해 저항했다. 그는 “3차 때리기까지 목숨을 걸고 반대한다는 인상을 받아 긴장했다.”고 회상했다. 4차 다케나카 때리기가 시도되고 있는 요즈음은 고이즈미 정권이 앞으로 2개월만 지나면 종말을 고한다면서 관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다케나카 총무상에 대해 맺혔던 한을 풀겠다며 욕설을 퍼붓는 형식이라며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케나카 총무상은 4차 다케나카 때리기에 대해서는 “맥빠진 내용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유쾌하지는 않지만 “긴장감은 없다.”며 평온한 인상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하고 싶은 개혁은 다 마쳤다고 강조했다. 가장 애썼던 부실채권 처리는 목표 이상의 성과를 달성했다. 우정사업민영화도 초석을 깔았다. NHK와 NTT 등 방송·통신 개혁은 저항이 강하지만 고이즈미 총리의 임기가 끝나기 전 최소한 물꼬만이라도 터놓고 싶다고 의욕을 보였다.taein@seoul.co.kr
  • [데스크시각] 호우 피해에 하늘·예산 탓만 하나/류찬희 산업부 차장

    전국을 강타한 집중호우 피해 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다. 모조리 쓸려가 뭐 하나 건질 것이 없다.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엔 참혹한 상처만 남았다. 잔혹한 전쟁터보다 더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반갑지 않은 행사를 지켜보노라면 울화가 치민다.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의 마음이 이럴진대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은 오죽하랴. 이념 갈등 아니면 눈앞의 치적을 놓고 아귀다툼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과 행정부는 수재민들에게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게다. 치산치수(治山治水)는 예로부터 민생(民生)에 직접 관련돼 흔히 정치의 요체로 비유했다. ‘서경’에 따르면 중국 순임금이 왕위에 오를 때 ‘동방의 천자’를 알현해 예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순임금이 찾아간 동방의 천자는 바로 고조선 단군왕검이다. 당시 중국은 9년 홍수로 양쯔강이 범람하는 등 위기에 빠졌는데, 단군왕검이 맏아들을 보내 순임금의 신하였던 우에게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전수해 주었다고 전한다. 금간옥첩에는 산과 물을 다스리는 비결인 오행치수법을 비롯해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아홉 가지 큰 법도가 담겨있다. 치산치수는 국가 지도자의 경영 덕목이었던 것이다. 4년 전 여름으로 거슬러간다. 당시 태풍 루사가 빠져나간 뒤 엄청난 재앙이 찾아왔다. 강원 지역을 강타하고, 한강 유역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집중호우의 원인과 피해 심각성이 지금과 너무나 똑같았다.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을 편성, 복구에 나서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토목공사 설계기준을 강화하고 물관리를 철저히 해 더이상 후진국형 재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다음해 태풍 매미가 상륙했을 때도 같은 피해를 입었고,3년 뒤 한반도에서 같은 유형의 재앙이 되풀이됐다. 정부는 정확한 사고 원인이 밝혀지기도 전에 불가항력으로 몰아세우려 하는 것 같다. 설령 시설물을 100년·200년, 그 이상 빈도에 맞춰 설계했더라도 같은 재앙이 연례행사처럼 일어나는데 이를 천재(天災)로만 몰아붙일 수 있을까. 한반도에 이상기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또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다. 집중호우에 따른 재앙은 오래전부터 예견됐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하늘만 탓한다. 집중호우는 막을 수 없다. 하지만 피해는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정부는 진작 설계 기준을 강화하고,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엄청난 피해를 몰고온 주범인 산사태만 해도 그렇다. 산사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방댐’ 건설이 가장 효율적인데, 산림청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8700여개의 사방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고작 1700여개만 설치됐을 뿐이다. 도로 경사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선 설계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 사방댐 건설이나 경사면 설계기준 강화를 지적할 때마다 정부는 예산타령으로 일관했다. 건설업체는 공사비 줄이는 데 집착했고, 감독기관은 팔짱만 끼고 있었다. 이번 피해를 천재로만 몰고갈 수는 없는 이유다. 더 이상 하늘과 예산부족 탓으로 돌리지 말자. 복구비만으로도 홍수 피해를 줄이는 시설을 보강하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치산치수행정을 다른 나라에 전수할 정도로 훌륭했다. 정치 지도자가 할 일은 우선 국민을 안전하게 지키고 배불리 먹이는 것이다. 비록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격이지만 인재(人災)를 인정하고, 되풀이되는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완벽한 대책을 내놓아야 할 때이다. 류찬희 산업부 차장 chani@seoul.co.kr
  • [’서울신문 102년-종이신문 생존전략] MP3로 듣고 휴대전화로 읽고…

    [’서울신문 102년-종이신문 생존전략] MP3로 듣고 휴대전화로 읽고…

    ■ 미국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에서 종이 신문의 퇴락과 뉴 미디어의 부상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가 되고 있다. 미 신문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전국 610개 신문의 발행부수는 전년보다 주중에는 2.5%, 주말에는 3.1%가 줄었다. 신문 부수는 줄고있지만 신문사의 인터넷 사이트를 찾는 독자는 크게 늘었다. 올해 1·4분기에 신문사 웹사이트 방문자는 지난해 같은기간보다 8%가 증가했다고 신문협회는 밝혔다. 미 신문협회의 최고마케팅책임자(CMO)인 존 킴벌은 “웹사이트 방문자 증가로 올해 신문사의 온라인 광고 수입은 25∼30% 늘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온라인 수입이 신문사 전체의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5%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온라인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이 앞으로 신문사 경영의 중요한 전략이 될 전망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의 언론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미래 신문의 모델은 놀랍게도 캔자스주의 로렌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발행하는 ‘로렌스 월드 저널’이라는 신문이다. 전문가들이 발행부수가 2만부에 불과한 이 신문에 주목하는 이유는 ‘미디어 컨버전스’를 독자들의 실생활에서 구현했기 때문이다. 로렌스 저널 월드는 신문과 인터넷, 방송(케이블TV 소유) 뿐만 아니라 전화와 MP3플레이어 등 현존하는 모든 기술과 기기를 통해 시민들에게 뉴스와 정보를 제공한다. 매일 아침 로렌스시의 남자들은 신문을 읽고, 주부들은 케이블TV 뉴스를 보며, 학생들은 아침에 로렌스 저널 월드의 신문 기사를 목소리로 서비스하는 포드캐스팅(Pod Casting)을 아이포드에 녹음해 등굣길에 듣는다. 동네 환경에 관심이 많은 주민들은 이 신문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쓰레기 처리 문제 등을 놓고 다른 주민들과 채팅한다. 스포츠 팬에게는 캔자스대학의 미식축구와 농구 팀의 경기 스코어를 실시간으로 휴대전화로 전송한다. 로렌스 저널 월드의 신문과 방송, 인터넷 직원들은 모두가 하나의 사무실에서 근무한다. 뉴스 보도뿐 아니라 제작 과정도 융합이 이뤄지고 있다. 로렌스 저널 월드의 웹사이트는 한 달에 700만 페이지 뷰(독자들이 웹사이트에서 본 화면의 총수)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신문의 모회사인 월드는 독자들이 웹사이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시의 30개 지역에 무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핫 스폿’을 설치했다. 이 신문의 발행인인 돌프 시몬스는 “로렌스 저널 월드는 ‘작은 도시의 작은 뉴스’에 집중하는 매체”라면서 “테크놀로지의 적용도 중요하지만 콘텐츠의 질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로렌스 저널 월드의 중요한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는 작은 도시에서 외부의 견제나 위협이 없이 ‘독점적인’ 사업을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경쟁에 노출된 미국 대도시의 거대 신문사들은 속도조절을 하면서 좀더 신중하게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권위지인 뉴욕타임스는 아직까지 수익의 90%는 종이신문에서 나오고 있다고 밝히면서도 “온라인 쪽의 수익이 가장 빠른 속도로 늘고있다.”고 말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올해 상반기에 웹사이트를 개편하면서 일부 콘텐츠를 유료화했다. 개편된 뉴욕타임스의 웹사이트는 종이신문과 달리 동영상과 사진 슬라이드 쇼 등 멀티미디어를 기사보다 돋보이도록 배치했다. 뉴욕타임스 웹사이트의 2004년 매출액은 5310만달러(약 530억원), 순이익은 1730만달러(약 170억원)였다. 최근 몇년간의 연 평균 성장률은 30∼40%나 된다. 욕타임스의 웹사이트 방문자는 하루에 무려 1800만명이나 된다. 뉴욕타임스의 하루 평균 발행부수는 110만부. 그러나 웹사이트를 유료화할 경우 대부분의 독자가 떠날 것으로 뉴욕타임스는 예측하고 있다. 아서 슐츠버거 뉴욕타임스 발행인은 “무료에 익숙한 인터넷 독자들에게 고급 콘텐츠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육’하는가가 과제”라고 말했다.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뉴욕타임스가 디지털 시대에도 계속 중심적인 역할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가 미디어 업계의 관심거리”라면서 “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주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지적했다. dawn@seoul.co.kr ■ 일본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의 신문 발행부수는 하루평균 5400만부로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 최고인 신문대국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조간만 1007만부다. 아사히신문은 825만부, 마이니치신문이 395만부(일본신문협회 2005년판 통계)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요미우리·아사히신문은 연간 10만부 안팎, 다른 신문들도 수천∼수만부씩 부수가 줄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의 조간신문 1000만부 시대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이에 따라 신문업계 전체가 비상이다. 일본신문협회는 모든 신문의 발행부수를 알리는 가이드북을 발행해왔으나 올해는 절판했다. 신문시장 전체 축소기류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일본 신문업계 관계자들은 “일본 국민은 아직도 인쇄매체에 대한 신뢰가 강하다. 인터넷신문은 신뢰도가 떨어져 영향력이 아직 미미하다.”면서도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종이신문 독자가 급감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위기감을 드러낸다. 위기의식에 따라 주요 신문들은 대책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모두 TV 등 계열방송사를 소유하고 있는 도쿄의 주요 신문사들은 인터넷홈페이지의 업데이트 주기를 단축시키고 있으며, 휴대전화 서비스도 강화하고 있다. 이런 전반적인 신문의 약세기조에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유일한 경제지로서 일본의 경기회복을 활용, 일본내·외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어 주목된다. 니혼게이자이는 특히 신문과 통신, 방송 등의 미디어 융합에 대비, 모범적인 변신을 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문도 인터넷에 잠식당하지 않고,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평이다. 니혼게이자이는 조간신문 발행부수가 2003년 298만부에서 2004년 300만부로 늘었고,2005년에는 306만부로 늘었다. 지난해 광고도 전년보다 5% 증가했다. 매출액은 전년보다 2% 늘어난 2300억엔(약 1조 8800억원)이었다. 이처럼 니혼게이자이는 지난해 지면 차별화와 비용 절감 등을 통해 약진했다. 지면차별화를 위해서 1면 머리기사는 다른 신문이나 주요 방송과는 다른 사안을 배치한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종이신문 기사의 독점성을 높이기 위해 인터넷신문에는 전체기사의 30% 이하만 서비스하는 ‘30%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종이신문 기사의 인터넷 게재 수는 물론 개별기사의 크기도 30%로 제한한다. 다른 주요 신문들이 인터넷에 100% 기사를 게재하는 것과 다르다. 포털사이트에는 기사를 포함한 콘텐츠를 절대로 제공하지 않고 있다. 독특한 경제비평기사도 차별화 상품이다. 또 종이신문과 인터넷의 융합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윈윈(상생)전략’을 통해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평이다. 종이지면과 인터넷 홈페이지의 세트광고를 하고, 인터넷 구독신청 코너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책임경영체제를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부문을 독립시켜 철저한 독립채산제를 실시, 경영효율을 높이고 있다. 이에 따라 니혼게이자이는 일본내의 신문 중 인터넷대응이 가장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에 따라 인터넷과 유료 정보 데이터베이스 서비스사업을 펴는 니혼게이자이 전파미디어국의 연간 매출액만 260억엔(약 2100억원)이다. 매출액과 순이익이 증가 추세라는 것이 회사관계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니혼게이자이도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고 회사관계자는 토로한다.“유일한 경제지로서 일본경제의 활황에 따른 혜택으로 반짝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taein@seoul.co.kr ■ 유럽 |파리 함혜리특파원|“내가 이 신문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떠납니다.” 프랑스의 대표적 좌파일간지 리베라시옹의 창업자 세르주 쥘리는 지난달 30일 ‘내가 리베라시옹을 떠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독자들에게 남긴 뒤 물러났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1973년 창간한 지 33년 만이다. 그는 이 글에서 “프랑스의 종합 일간지는 물론 텔레비전과 라디오도 빠르게 변화하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과 인터넷의 보급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며 리베라시옹 자체가 특별히 소비적인 신문이 아님에도 올해 예상되는 손실이 책정된 예산 250만유로(약 30억원)를 훨씬 넘는 700만유로(약 85억원)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리베라시옹의 추락은 프랑스 진보언론의 암울한 장래, 그리고 인터넷 시대의 활자 미디어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리베라시옹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다. 한때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프랑스 수아르’도 경영난 심화로 주인 바꾸기가 거듭되다 결국은 영국 타블로이드판 대중지 스타일로 바뀌는 운명을 맞았다. 프랑스 일간지 시장은 독자 감소, 이에 따른 신문사들의 재정악화, 무가지와 인터넷 매체 등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등장에 따른 경쟁력 상실이란 세가지 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다. 이에 따라 신문사들은 대기업의 자본참여를 통한 위기 극복을 시도하고 있지만 거대자본의 유입으로 신문들은 ‘독립성과 다원성의 침해’라는 또 다른 위기를 맞는다고 프랑스 정부산하 경제사회이사회 보고서는 지적한다. 보고서는 신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종합일간지가 민주주의의 핵심적 위치를 되찾도록 신문기본법을 제정하고 신문 유통의 발전과 현대화를 위해 신문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또 기존의 가두판매를 재조직하고 정기구독 체제를 지원하는 등 정부가 유통조직 재편성을 지원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정부차원에서 다양한 신문산업 지원책을 마련 중이다. 신문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비주얼 시대에 맞게 편집 스타일을 바꾸고 감각적인 젊은층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주말판을 발간하는 것은 기본. 인터넷 사이트를 보기 쉽게 디자인하면서 오디오와 비디오 뉴스를 동시에 듣고 볼 수 있도록 재정비하고 있다. 일간지 르몽드와 르피가로는 백과사전이나 박물관 화보집과 같은 도서 시리즈, 흘러간 명화 DVD 시리즈, 음악CD 등을 판매하면서 수익원 찾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벨기에의 한 일간지가 세계 최초로 휴대용 디지털 전자신문으로의 전환을 시도할 계획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벨기에 최대 항구도시 앤트워프를 기반으로 한 경제 일간지 ‘데 타이트(De Tijd)’는 지난 4월14일부터 세계 최초로 휴대용 디지털 전자신문 시험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시험 서비스 기간에 독자 200명에게 신문의 인터넷판에 접속해 기사를 내려받을 수 있는 휴대용 전자기기를 무료로 나눠줬다. 독자들은 무선을 통해 인터넷판에 접속만하면 자동으로 업데이트된 기사내용을 화면으로 볼 수 있다. 종이두께에 타블로이드판 신문 한면 크기(8.1인치)의 스크린이 장착된 휴대용 기기는 전자잉크(E-Ink)를 이용하기 때문에 어디든 들고 다니면서 쉽게 읽을 수 있다. 컴퓨터나 TV 스크린과 달리 한번 텍스트나 그래픽을 입력하면 다시 입력하기 전까지 전원이 없어도 내용이 그대로 보존된다. 독자들은 특수 펜으로 기사에 대한 코멘크를 쓸 수 있으며, 광고면을 터치하면 해당 광고업체의 홈페이지로 직접 연결된다. 전자신문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페테르 브륀셀스는 “시험 서비스 결과를 정밀 분석해 비즈니스 모델을 산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자신문 구독비용은 한달 평균 400유로(약 50만원)이나 될 것으로 추산되지만 독자 수가 늘어날 경우 대폭 내려갈 것으로 신문사측은 내다봤다. 프랑스의 경제일간지 레제코(Les Echos)와 독일의 국제미디어기술연구협회(IFRA)도 유사한 시도를 하고 있다. lotus@seoul.co.kr ■ 중국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지난 3월25일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열린 ‘중국 매체 창신(創新)회’. 중국의 거의 모든 주요 언론 관계자들이 모였다. 신문·방송 등 전통 언론 매체 경영자뿐 아니라 유력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최고경영자(CEO)들까지 망라됐다. 중국에선 처음 있는 일이다. 참석자들은 신문시장을 비롯한 전통 언론시장의 위기를 논했다. 한때 금융, 건설과 함께 ‘돈 되는’ 3대 업종으로 불리던 신문업종이 본격적인 전성기를 누린 지 불과 10여년만이다. 중국은 고도 경제성장과 13억 인구 등 ‘광고’와 ‘독자’가 모두 뒷받침되는 전통매체로서는 보기 드문 황금시장이었다. 심지어 한때 신문업계는 ‘폭리 업종’으로까지 불렸었다. 위기의 본질은 신문출판총서 스펑(石峰) 부서장의 지적대로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 신흥 매체의 등장과 매체 상호간 경쟁으로 전에 없던 도전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한때 중국에는 이른바 ‘도시신문’간의 지나친 증면 경쟁이 불붙으면서 일간지 면수가 하루에 최대 150∼200면까지 발행되는 신문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이런 가운데 2005년 중국의 신문 광고시장은 처음으로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중국 신문시장으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다. 반면 인터넷 및 디지털 매체의 광고수익은 전년보다 77% 증가한 31억위안(약 3700억원)이나 됐다. 올해는 40억위안(약 48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인터넷, 휴대전화 뉴스서비스, 디지털TV, 블로그, 포드캐스팅(Pod Casting) 등 신매체들로 인해 신문산업의 광고수익 잠식은 빠르게 진행될 전망이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매체 창신회에서 뚜렷한 대안이 제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논의의 핵심은 ‘컨버전’과 ‘경영 다각화’였다. 경화시보(京華時報)의 우하이민(吳海民) 사장은 “과도하게 광고에 의존하던 과거의 경영방식으로는 생존해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하이 동방위성TV의 쉬웨이(徐威) 본부장은 “현재 직면한 도전은 TV라도 비켜가지 않는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같은 분위기로 최근 중국 언론 매체간에 진행중인 초거대화, 초집단화 현상이 지속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최근의 현상은 1990년대 중반부터 정부 주도에 의해 미디어 그룹들이 형성될 때와는 달리 생존을 위한 당사자간의 필요에 의해 이뤄진 측면이 상대적으로 많다. 합병을 통한 거대화·집단화 작업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문회신민연합집단(文新民聯合集團)’의 탄생을 꼽을 수 있다.76년의 역사를 가진 신민만보(新民晩報)는 합병이전 이미 석간 신문시장의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66년 전 창간된 문회보(文報)는 지식인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지대한 매체였다. 그러나 둘 다 고정 독자들의 ‘노화’와 신규 독자 흡수 부진 등으로 매체 영향력이 떨어져 가는 상황이었다. 문회집단의 후진쥔(胡勁軍)신문담당 사장은 “매체간 융합과 경영 다변화가 절박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문회신민집단은 11개의 신문사,6개의 잡지사,1개의 출판사를 보유하며 영향력을 유지해가는 동시에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회사도 설립했으며, 다른 6개 주류 언론사와 합작해 만화 채널을 신설했다. 패왕별희(王別姬), 화목란(花木蘭) 등 영화에도 참여했다. 해외시장 개척에도 눈을 돌려 신민만보는 현재 17개 해외판을 운영하고 있다. 집단 전체는 매년 이익의 3분의 1은 재투자에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진화를 고민하는 ‘신문 천국’ 중국. 방향타는 잡았으나,‘어떻게’가 문제로 남는다. jj@seoul.co.kr
  • [시론] 입지 약한 日의 대북 선제공격론/연현식 국가정보대학원 국제정치학 교수

    [시론] 입지 약한 日의 대북 선제공격론/연현식 국가정보대학원 국제정치학 교수

    최근 일본 유력 정치인들의 대북 선제공격론 언급은 일본에 대한 기존의 국가 이미지에 적지 않은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전후 일본은 평화국가를 지향한다는 목표하에 수비위주의 ‘전수방위(專守防衛)’,‘비핵3원칙’,‘문민통제’ 등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이러한 경향은 서서히 약화되어 갔다.19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사건,2001년 미국의 9·11 테러 사건 발생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점진적인 변화가 이번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즈음해 대북 선제공격론 발언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원래 선제공격의 개념은 9·11 이후 2002년 가을, 미국의 ‘신국가안보전략보고서’에서 정립, 채택되었다. 미국은 9·11 이전까지는 방어력중시의 이른바 ‘억지(deterrence)전략’을 견지했다. 테러집단에 의한 불의의 공격을 당하고 나서 선제공격(1격능력)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일본도 이와 비슷하게 그동안 전수방위를 국방정책의 근간으로 지켜왔으나 북한의 지속적인 군사적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공격적인 전략의 채택 가능성을 언급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일본정부는 무력행사에 의한 공격적인 평화유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은 이전의 수세적·피동적·소극적인 이미지로부터 탈피하여 공세적·능동적·적극적인 이미지의 국가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미사일방어(MD)시스템의 조기 배치 등 첨단 무기체계의 정비, 확충과 국가정보역량의 대폭 강화 등을 강력히 추진하여 동북아 안보와 관련해 전면에 나서 독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의 공세적인 발언은 이상의 안보적인 요소외에 국내 정치적인 함의가 의외로 중요할 수 있다. 뉴욕 타임스 등 외지의 분석과 같이 일부 유력한 정치인사들이 국내여론의 지지 기반을 확충 또는 확고하게 하기 위해 대북 강경론을 여과없이 강력히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납치문제를 주도하고 있는 아베 관방장관이 북한 미사일 발사 사건에 납치문제를 연결해 더욱 대북 강경노선을 강화, 주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이즈미의 후계자로 유력한 아베는 미국처럼 상대국의 민주화와 인권상황을 고려하는 외교를 추진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북한문제뿐만 아니라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강경자세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강력한 지도자상을 확립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강력한 군사력과 군대의 보유를 아마도 기정사실화할 것이다. 일본의 공세적인 대응의 직접적인 원인은 물론 북한의 무모한 미사일 발사에 있었지만 일본의 즉각적이고도 공격적인 대응 또한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러차례 전쟁을 경험한 한국민들은 누구나 한반도의 재전장화를 원치 않는다. 한반도에서의 어떠한 형태의 무력사용도 반드시 배제되어야만 한다. 다행히 일본내 거의 모든 야당과 일부 언론매체들이 선제공격론에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갖게 한다. 특히 아사히(朝日)신문은 사설에서 선제공격의 비현실성, 도발성을 지적하고 미국의 억제력에 의지하는 전수방위를 전제로 하면서 외교적인 결착을 꾀하라고 권하고 있다. 또한 일본과는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 미국의 신중한 대처도 일본의 강경일변도적인 대북정책을 어렵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과도한 대응을 자제하고 한국정부와 협력하면서 다국간관계를 이용한 외교적인 해결책을 신중히 모색할 필요가 있다. 연현식 국가정보대학원 국제정치학 교수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절대음’의 하모니 이시스터즈(1)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절대음’의 하모니 이시스터즈(1)

    밝고 경쾌한 하모니에 고음이 특히 매력적이었던 3인조 여성 트리오 이시스터즈. 마치 ‘톡’쏘는 콜라 맛처럼 매우 짜릿짜릿한 하모니를 구사하던 이시스터즈의 등장은 ‘소리의 변화’로 대변되는 1960년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들의 화음에 대해 작곡가 이봉조씨는 ‘절대음’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세계적인 인기그룹 ‘맥과이어시스터스(McGwire sisters)’의 영향을 받아 출발했던 이들 멤버는 세살 터울의 친자매 김천숙, 김명자씨와 멜로디 이정자씨. 처음 김씨 성을 가진 멤버 둘, 그리고 이씨 성을 가진 멤버 한 명으로 결성되었다. “우리가 데뷔하기 전에 국내엔 이미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김시스터즈가 있었어요. 김해송-이난영 부부, 그리고 이난영씨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 선생의 딸들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는 김씨 둘, 이씨 한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래서 우리 팀은 김씨 성이 둘이었지만 이들을 피하기 위해 이시스터즈란 이름으로 출발했지요. 이 것은 미국의 맥과이어시스터스나 앤드루시스터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당시엔 성씨를 붙여 그룹명을 정하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였던 것 같아요.” # 美 ‘맥과이어시스터즈´ 따라 그룹명 얼마 전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이시스터즈의 맏언니 김천숙(68)씨의 설명이다. 이들 이시스터즈는 김천숙씨의 모처럼 고국 나들이에 즈음해 지난 5월, 브라운관을 통해 오랜만에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 것은 18년 만에 TV에 등장했던 지난 90년부터 또다시 16년만이다. 그러나 이들은 늘 곁에 있었던 것처럼 여전히 친숙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들이 일반 대중들 앞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64년 번안곡인 ‘워싱턴 광장’으로부터이지만 이들의 결성은 이보다 앞서 미8군 쇼 연예인 공급업체 ‘화양’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먼저 친자매 중 동생인 명자씨가 수도여고를 막 졸업하자마자 미8군 가수 오디션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대 출신의 작곡가 겸 연주인 박선길씨로부터 여성보컬그룹을 제의받는다. 그래서 가세한 멤버가 당시 철도청에 근무하던 언니 김천숙, 그리고 그의 직장 후배였던 이정자씨다. 둘은 함께 철도청에 근무하면서 ‘철도의 날‘을 비롯한 교통부 행사 때마다 무대에 섰을 만큼 노래실력에 관한 한 정평이 나 있었다. 충북 영동 출신의 두 자매는 학창시절부터 각종 콩쿠르를 휩쓸던 소문난 재주꾼들. 또한 함흥 태생의 ‘함경도 또순이’ 이정자씨 역시 한국전쟁 기간 중 ‘경찰어린이합창단(단장 정세문)’에서 일찌감치 활동했던 재원이다. 이들은 ‘화양’에 전속되면서 쇼단 ‘어라운드 더 월드’를 거쳐 박선길씨가 ‘쇼 오브 쇼’ 단장으로 독립하자 전속가수로 합류, 미8군 장교클럽을 통해 무대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무렵인 62년, 이들은 당시 서울 중앙방송국(현 KBS) 연말 톱싱어대회 연말 결선에 출전하기도 했다. 월말 예선을 거쳐 최종 결선을 벌인 이 대회에서 예선을 통과한 한 여성보컬 팀이 연락이 두절되자 방송국 측에서 긴급히 박선길씨에게 섭외, 이들의 출전을 요청해온 것. 방송국 전속가수 자격이 주어지는 이 대회서 이들 이시스터즈는 평소 레퍼토리인 ‘신시어리(Sincerely)’를 불러 2위로 입상한다. 이 대회 1위는 이재성,3위는 차도균씨가 차지했다. 하지만 이들 이시스터즈는 이미 미8군쇼단 소속이었기 때문에 방송국 전속가수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미8군 무대에서 출발한 이시스터즈, 그러나 이들의 첫 음반 취입은 63년 두 자매만으로 구성,‘허니-김스’라는 이름으로 먼저 LKL음반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작곡가 이봉룡씨가 운영하던 음반사 LKL은 이봉룡, 김해송-이난영 부부 이름의 이니셜을 따 지은 이름. # 1964년 ‘워싱턴 광장´으로 급부상 “사실 ‘이시스터즈’로 이미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할 때였는데 어떤 연유로 우리가 ‘허니-김스’라는 이름으로 따로 음반을 취입했었는지 기억이 어렴풋해요. 아마도 당시 절친하게 지내던 김시스터즈의 남동생들인 김보이스 멤버 김영일씨가 음반 취입을 제안했고 역시 김보이스 멤버였던 김영조씨가 곡을 만들어줘 우리가 ‘허니-김스’라는 이름으로 음반만을 취입한 것 같아요.”-김명자(65)씨의 회고. 이들은 ‘쇼 오브 쇼’단의 주축이 되어 활동하던 중 이시스터즈 이름으로 64년,‘워싱턴 광장’을 발표하며 급부상한다. 서울대 음대 출신의 작곡가 박선길 단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은 이들의 성공에는 먼저 결혼한 언니 천숙씨의 부군 장준기(68)씨의 외조도 한몫 했다. 당시 KBS 전속악단의 기타리스트였던 그는 이들 노래에 대한 모니터는 물론,‘워싱턴 광장’의 1절 가사를 직접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당시 해외로 진출했던 김시스터즈,‘아리랑 목동’의 김치켓,‘새드 무비’의 정시스터즈, 그리고 ‘워싱턴 광장’의 이시스터즈 등장으로 인해 우리나라에도 비로소 여성보컬 전성시대가 개막된다. 이시스터즈는 이후 번안곡인 ‘레몬트리’를 비롯해 ‘울릉도 트위스트’ ‘남성금지구역’ ‘서울의 아가씨’ ‘목석같은 사내’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날씬한 아가씨끼리’ ‘별들에게 물어봐’ ‘모래 위에 적어본 이름’ 등 창작 곡들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전성기를 한껏 구가했다. 아울러 66년, 동갑내기 김명자, 이정자씨가 각각 결혼,9개월 만삭의 몸이 되어 무대 활동을 잠시 접을 때까지, 불과 2년 동안 무려 스무 장이 넘는 음반을 발표했다. 출산과 함께 6개월 정도 휴식기를 가지는 동안 멤버 이정자씨가 솔로로 전향하며 그룹을 탈퇴한다. 이 빈 자리에 65년 KBS 톱싱어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며 등장한 김상미(63)씨가 1년간의 방송국 전속가수 활동을 끝내고 새롭게 멤버로 가세했다. 이 때가 67년 2월. 이로써 이시스터즈는 김천숙, 김명자, 김상미씨로 구성된, 말하자면 이씨가 한 명도 없는 김씨들로만 구성된 ‘제2의 이시스터즈’가 탄생된다.(계속) sachilo@empal.com
  • 해외 한국정보 오류수정 네티즌의 힘

    국정홍보처 해외홍보원이 ‘네티즌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독일 월드컵 대회를 즈음해 유럽지역 인터넷 사이트 등에 잘못 소개된 한국 정보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때로는 민간이 정부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해외홍보원은 월드컵 기간 동안 유럽지역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거나, 울릉도 및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한 사이트와 ‘한·일 월드컵’을 ‘일·한 월드컵’으로 표기한 사이트 등의 우리나라 관련 오류 32건을 수정했다고 27일 밝혔다. 하지만 해외 인터넷·백과사전·지도 등에 나타난 오류를 수정하는 작업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다. 일반적으로 정부가 제시하는 통계 등 각종 정보는 의심없이 받아들여지지만, 잘못 소개된 한국 관련 정보만은 예외였다. 해외홍보원 관계자는 “오류 수정을 정부 차원에서 요청하면 국가간 갈등이나 대립 문제로 간주해 수정에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면서 “오히려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수정 요청에 더 협조적”이라고 털어놨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www.prkorea.com) 관계자도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기 어려운 분야가 해외 오류정보 수정”이라면서 “수정 요청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려면 민간 활동이 강화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오류 수정 문제를 ‘얼마나 많이 고쳤느냐.’는 양적 접근에서 탈피,‘오류가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를 어떻게 차단할 수 있느냐.’는 질적 접근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반크 관계자는 “전세계적으로 콘텐츠를 공급하는 야후와 월드뱅크 같은 300여곳의 거점 사이트를 중심으로 수정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정부는 오류 실태에 대한 백서를 만들고, 대국민 홍보를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해외홍보원 관계자는 “앞으로는 정부가 직접 오류를 수정하기보다는 잘못을 바로잡는 데 적극적인 민간단체를 네트워크화하는 지원에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데스크시각] 이분(二分) 정치는 이젠 안돼/박대출 정치부 부장급

    지난 1993년 늦은 봄이나 초여름쯤으로 기억된다. 한 기자가 영국에 있던 김대중(DJ)씨를 찾았다. 카메라기자를 대동했다.DJ는 화장을 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았다. 그 기자는 그때 DJ의 정계복귀를 확신했다고 한다. 화장은 재기의 메시지였다. 1992년 12월19일.DJ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눈물도 흘렸다.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패한 다음날이다. 다음해 1월엔 영국으로 떠났다. 더 이상의 정치는 없다고 했다.94년 귀국해선 아태평화재단부터 설립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복귀했다. 김종필(JP)씨와 연대해 권좌도 거머쥐었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 합의를 깼고,JP와 결별했다. 약속을 깬 뒤의 해명도, 배반한 뒤의 사과도 없었다. ‘뒤집기’는 진행형이다. 현 정권은 2003년 11월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호남당을 벗어나기 위해”라고 했다.3년도 안 됐다. 정계개편론이 꿈틀거린다.‘민주개혁세력통합론’ ‘민주세력대연합론’이란 포장을 달았다. 이름이야 어떻든 양당이 다시 합치자는 얘기다. 전부든, 일부든 구성원은 민주개혁 세력이라는 논리다.3년 전 분당은 ‘민주개혁세력 분열’인 셈이다. 통합론에는 그 분열에 대한 반성도, 사과도 없다. 국민의 동의를 묻는 절차는 더욱 없다. 그저 손을 다시 잡고 정권을 또 얻겠다는 정욕(政慾)만 보일 뿐이다. 되돌리려면 반성과 사과, 그리고 동의를 얻어야 할 일이다. 열린우리당은 논의를 연말로 미뤘다.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민심을 의식한 임시 처방에 불과하다. 대신 민주당과의 연합공천론이 한때 고개를 들었다.7·26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손을 잡자는 주장이다. 두 뒤집기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병존한다. 우선 ‘이분(二分) 정치’를 근간으로 한다.DJ는 ‘독재와 반독재’ ‘호남과 비호남’의 한편에 섰다. 둘로 나누는 정치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수혜자였다. 이분 정치는 그에게 핍박을 줬지만 정치동력을 부여했고,‘뒤집기’도 가능케 했다. 현 정권 들어 적과 동지는 양산됐다.‘민주와 반민주’ ‘개혁과 반개혁’ ‘과거와 비과거’ ‘강남과 비강남’ 등으로 갈래갈래 쪼개졌다. 통합론에도 ‘이분의 대선 전략’이 깔려 있다.‘한나라당과 반한나라당’이 요체다. 굳이 다른 점은 내부 저항에 있다.DJ는 정계복귀를 번복해도, 내각제 합의를 깨도 내부 반발은 별로 없었다. 그저 ‘선생님’을 따르거나 받들 뿐이었다. 뒤집기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예측을 가능케 한 요인이 되긴 했다. 지금은 다르다. 열린우리당부터 찬반 논란이 거세다. 김근태 의장, 정동영 전 의장 등 대권주자들이 통합론을 주도하고 있다.‘친노그룹’ 일각은 반대다. 노 대통령은 딱 부러지게 찬반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창당 초심(初心)’으로 표현하는 정도다. 노 대통령은 ‘지는 해’다.‘정·김’은 ‘뜰지도 모를 해’다. 서로가 부딪친다면 핵분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당 속사정 역시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겉으론 열린우리당을 ‘배신자’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하지만 속내는 ‘딴 길’을 갈 대상이 아닌 듯한 발언들을 내놓고 있다. 모두가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게 하는 대목이다. 둘로 나누는 정치는 한나라당도 예외가 아니다.7·26 국회의원 재·보선 공천, 전당대회 대표경선을 놓고 ‘과거와 비과거’로 갈라지고 있다. 과거 인물은 악(惡)이고, 멀리해야 할 대상처럼 보는 시각이 많다. 옥(玉)인지, 돌(石)인지 가리자는 주장은 별로 없다. 그저 상대의 공격을 미리 차단하려는 조급함, 비겁함만 엿보인다. 이분 정치는 이제 과거 유물로 돌려야 한다. 다원화 시대엔 통합의 정치가 필요하다.‘내편’ ‘네편’만으론 안된다. 십분·백분·만분으로 자연스레 다원화되고, 이를 통합·조정하는 화합의 정치가 필요하다. 다음 대통령은 ‘통합의 지도자’가 돼야 한다. 박대출 정치부 부장급 dcpark@seoul.co.kr
  • 반갑다! 3色 흥행작

    뒤늦게 “그 연극 재밌더라.”는 얘기를 듣고 아쉬워했던 이들이라면 귀가 솔깃할 반가운 소식. 두번 놓치기 아까운 흥행작 3편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기회, 이번엔 놓치지 말고 꽉 잡자. 올 대종상영화제 15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 연극 `이´(김태웅 작·연출)가 29일∼7월14일 LG아트센터에서 또 한번의 감동과 웃음을 선사한다. 지난 12월 영화 개봉에 즈음해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막오른 연극은 영화와 동반흥행하며 두차례 연장공연했고,2월부터 지방 11개 도시를 순회했다. 이번 공연에서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3인3색의 공길. 영화배우 이준기의 여성스러운 이미지로 각인된 공길역에 오만석, 박정환, 김호영 세 배우가 번갈아 출연해 각기 다른 색깔을 내보인다.1588-8477. 초연 10주년을 맞아 원년 배우들이 합심해 지난 3월 극장 용에서 공연했던 연극 `날 보러와요´(김광림 작·변정주 연출)도 7월7일부터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으로 무대를 옮긴다. 지난 4월2일 공소시효가 끝난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날 보러와요´는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으로도 유명하다.5년 만에 소극장 무대로 돌아온 데다 배우들도 전부 새 얼굴로 바뀐 만큼 이전 공연과는 다른 차별성을 기대해볼 만하다. 제작사 이다의 오현실 대표는 “원작의 소름끼치는 공포감은 대극장보다 소극장 무대가 훨씬 효과적”이라고 말했다.9월3일까지.(02)762-0010. 마당극으로 친숙한 배우 김성녀의 특별한 변신으로 화제를 모았던 모노드라마 `벽속의 요정´(배삼식 극본·손진책 연출)이 1년 만에 관객 앞에 다시 선다.7월6일부터 23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하는 `벽속의 요정´은 전쟁 때문에 벽속에 숨어지내는 아버지와 딸의 애틋한 정을 그린 작품으로,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노리의 원작을 우리 정서에 맞게 각색했다. 어린 소녀에서 할머니까지 1인3역을 소화하는 김성녀의 연륜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무대.(02)747-5161.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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