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함피:하(세계 문화유산 순례:35)
◎자연과 어우러진 거대한 「조각도시」
함피의 비자야나가르 유적군은 독특한 대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한 무더기의 거대한 예술품이었다.눈에 보이는 것은 벌거벗은 바위산 골짜기와 훼손된 사원 뿐이다.그러나 그것이 이뤄내는 조화는 함피를 차라리 섬세하게 계획된 「조각도시」로 여겨도 좋을 만큼 절묘했다.
함피 유적지는 워낙 넓은 지역에 걸쳐 있어 대충 둘러 보는데도 적잖은 품이 든다.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인도산 택시 「앰배서더」를 한대 빌렸다.1950년대 영국의 「모리슨 옥스퍼드」를 모방해 만든 이 차는 비록 구식이었지만 오토 릭샤보다는 한결 널찍하고 빨랐다.
비탈라 사원으로 먼저 차를 돌렸다.16세기 비자야나가르 왕조가 남긴 최고 걸작품으로 꼽히는 유적이다.유장하게 흐르는 퉁가바드라강을 따라 남쪽으로 한참을 달렸다.멀리 희미한 물상이 망막에 잡혔다.대지의 복사열 때문일까.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비탈라 사원의 모습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가물가물했다.
○곳곳에 훼손된 사원/벌거벗은 바위산과 절묘한 조화
마침내 비탈라 사원.장엄한 건축미에 압도된 채 사원안으로 들어섰다.사원 정면의 한 건물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무얼까.사원 관리인에게 물으니 함피의 명소 「뮤직 템플」의 돌기둥에서 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든 것이라고 했다.관리인은 제 나라의 문화를 자랑이라도 하려는듯 안내를 자청했다.『자,여기를 두드려 볼테니 무슨 소리가 나는지 한번 귀 기울여 보세요』 그는 돌기둥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순간 더할나위 없이 청아한 음악소리가 기둥에서 흘러 나왔다.『사,레,가,마,파,다,니,사』(인도의 도,레,미,파,솔,라,시,도)….제국시절 이곳에서 궁중연회가 열리면 악사들은 아무런 악기도 없이 이 기둥을 두드려 음악을 연주하고,무대에서는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고 한다.「뮤직 템플」은 단지 청각만을 자극하지 않는다.그 기둥에 새겨진 조각상의 정교함과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비자야나가르 건축예술의 전범을 보여준다.
높이가 3.6m에 이르는 56개의 돌기둥 마다에 새겨진 사람과 동물의 모습은 살아 숨쉬는듯생동감이 넘쳤다.돌기둥에 삐죽 나온 선반격의 받침돌 초엽은 제비처럼 날렵했다.게다가 이 사원 기둥은 하나의 커다란 돌을 깎아 만든 것이어서 신묘함을 더했다.
○비탈라사원 56개 돌기둥은 손가락으로 때려도 청아한 소리
비탈라 사원의 또 다른 주목거리는 앞마당에 있는 돌수레다.이것은 원래 남인도에서 제단에 모셔진 신상이 바깥 나들이를 할때 사용하던 나무수레를 본따 만든 것이다.화강암으로 된 이 돌수레는 비시누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비시누신은 피부색이 검고 노란색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그리고 네 손에는 각각 곤봉과 소라고둥·원반·연꽃을 들고,「가루다」라는 커다란 독수리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는 신이다.비탈라 사원의 돌수레는 그 「가루다」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한때는 실제로 굴러 갔다는 이 돌수레는 지금은 멈춰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함피의 유적을 답사하는 것은 곧 성지를 순례하는 것과 같았다.끝없이 이어지는 힌두사원과 종교적 우상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신에 멀미가 나서 아뜩한 정신을 추스리며 꽤 먼 길을 갔다.폐허가 된 옛 왕궁터를 끼고 남동쪽으로 돌자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색다른 양식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지도를 펼쳐 보았다.이곳이 바로 「로터스 마할(연꽃 궁전)」이었다.「제나나」라고 불리는 작은 성벽 안에 있는 이 2층 건물은 왕이나 군사령관이 묵었던 숙소다.종교적 색채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아 우선 신선했다.
「로터스 마할」은 함피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이 궁전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축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로터스 마할」은 인도사라세닉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매우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궁전을 떠받치고 있는 24개의 사각 기둥들은 화려한 잎사귀 모양의 아치로 연결돼 있어 더없이 위풍당당했다.또 인접한 두 아치 사이의 삼각공간인 스팬드럴(spandrel)에는 원형 돋을새김 흔적이 역력해 환상적인 여운이 감돌았다. 「로터스 마할」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8각형 구조의 천장이다.천장은 둥근 지붕과 평지붕이 엇섞여 이뤄졌다.그 한 가운데에는 고딕 양식의 대사원에서나 볼 수 있는 고창층이 있어 시선을 끌었다.이곳은 치장벽토로 장식한 아치와 띠조각,굵은 동살,까치발,커다란 닫집인 벽감 등이 정교하게 어우러져 있어 비자야나가르 제국의 뛰어난 건축술이 그대로 엿보였다.기둥과 아치는 회교양식을,바닥·천장·배내기·치장벽토 장식 등은 힌두양식을 따랐다.그토록 상극이던 힌두교와 회교가 비록 건축물에서나마 행복한 결합을 하다니….아이러니와 허무로 가득찬 역사를 「로터스 마할」에서 읽었다.
인도사라센 양식의 진수를 보았다는 뿌듯한 감흥을 안고 「로터스 마할」을 나왔다.먼 발치에서 다시 돌아보았다.건물 동쪽 모퉁이에 결딴난 채 방치돼 있는 돌기둥같은 물체가 눈에 띄었다.여인상 기둥인 카리아티드(caryatid)의 잔해임에 틀림없었다.그곳에는 뒷발로 일어선 「얄리」의 자취도 남아 있었다.「얄리」는 인도의 건축물에 흔히 등장하는 사자 비슷한 가상의 동물이다.비탈라 사원 돌기둥에서도 「얄리」를 만났다.
○왕이 머물던 「로터스 마할」굴은 인도사라센 건축양식의 진수
함피에 또다시 아쉬운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일모도궁이라 했던가.마음을 함피 유적에 묶어두고 차에 올랐다.차창밖으로 보이는 진귀한 풍경이 이국정서를 자극했다.네루가 생전에 즐겨 썼다는 네루모에 허리를 감싸는 치렁치렁한 천 룽기를 걸쳐 입은 남자,바느질 없는 원색의 옷감 사리를 휘휘감고 짓붉은 이마점 빈디를 찍은 여인의 모습이 이채로웠다.또 십자 장대목위에 사탕수숫단을 싣고 가는 소며 더위에 지쳐 혀를 한뼘이나 빼어 물은 개,거무튀튀한 맨발에 발가락지까지 낀 낙타몰이꾼….함피는 언제 보아도 넉넉하고 평화롭고 정겨운 「생명의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