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음독
    2026-01-23
    검색기록 지우기
  • 선물
    2026-01-23
    검색기록 지우기
  • 대비
    2026-01-23
    검색기록 지우기
  • 보철
    2026-01-2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21
  • 딸 농약먹여 살해/비정아버지 자살

    【연천=김명승기자】 강제로 농약을 먹여 딸을 숨지게 하고 달아났던 이충열씨(38·농업·연천군 연천읍 고문1리 6)가 농약을 먹고 숨졌다. 이씨는 지난 24일 하오 10시 자기집 안방에서 음독후 쓰러져 신음하다 여동생 혜옥씨(33)가 발견,전곡의료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왔으나 26일 상오 7시5분 숨졌다. 이씨는 지난 24일 하오 2시 부천에서 부인 이명자씨(36)와 함께 살고 있던 큰딸 영숙양(17·S종고 3년)을 마구 때리고 강제로 농약을 먹여 숨지게 한뒤 달아났었다. 경찰조사 결과 숨진 이씨는 지난 4월초 교육문제로 부인 이씨가 영숙양 등 자녀 3명을 데리고 부천으로 이사해 식당종업원으로 취업하자 부인이 외도를 하는게 아니냐며 의심해 오다 지난 16일 부천의 부인집에 찾아가 부인을 구타해 왔으며 영숙양이 이를 말리며 대들자 범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 60대 “손녀 보고싶다”/셋방서 음독자살

    【부산=이기철기자】 가정불화로 아들집을 나와 사글세방에서 혼자 살던 60대 노인이 손녀가 보고싶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살했다. 14일 상오 8시쯤 부산시 북구 감전2동 271 단칸 사글세방에서 조천호씨(64)가 극약을 마시고 숨져 있는 것을 친구 임기석씨(67)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임씨는 『숨진 조씨가 지난 13일 밤 다음날 아침 일찍 자기방으로 와달라고 해 이날 아침 찾아가보니 조씨가 창문앞에 쪼그리고 앉은채 숨져있었다』고 말했다.
  • 조사받던 기소중지자 경찰서서 음독 자살

    【고양=김명승기자】 10일 하오4시45분쯤 경기도 고양경찰서 형사계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대기중이던 백승구씨(61·무직·충남 당진군 송악면 기지서리)가 극약을 마시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경찰은 『형사계 의자에 앉아 있던 백씨가 화장실에 다녀온 뒤 「극약을 마셨다」며 쓰러져 서울 청구성심병원으로 옮겼으나 2시간 뒤인 하오6시50분쯤 숨졌다』고 밝혔다. 경찰은 숨진 백씨의 양복 상의주머니에서 잡초제 5백㎖들이 빈병을 찾아냈다. 백씨는 이날 하오3시10분쯤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고양시의 동생집에 다녀오던중 삼송리검문소에서 검문을 받다 사기혐의로 충남 당진경찰서에 의해 지명수배된 것으로 밝혀져 연행됐다.
  • 범죄의 특성(신세대범죄 왜 흉악해지나:중)

    ◎거의 반인륜·충동적 범행/공동체의식 없고 「극단적 이기」 팽배/이유­대상 불분명… 막연하게 분풀이 최근들어 발생하는 20대 범죄는 크게 「패륜범죄」「사회저항형 범죄」「충동범죄」「보복범죄」등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이들 범죄 가운데 80년대 중반부터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이 사회저항형범죄다.이유나 대상도 없는 「분풀이식 사회저항형 살인」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번에 발생한 연쇄납치살인사건도 똑같은 유형이다. 이같은 현상은 우리사회의 교육기능과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패륜범죄」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핵가족화로 전통적인 효자상이 무너지고 가족간의 불화에서 발생하는 대표적 범죄유형이다.평등사상이 잘못 반영돼 부모 형제도 이해타산 관계로 변질되면서 가족의 살상도 서슴지 않는 패륜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5월 19일 새벽 서울 강남에서 발생한 대한한약협회 서울지부장 박순태씨부부를 살해한 장남 한상씨(23)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박씨는 93년 8월 미국유학을 떠나 어학연수를 받던 도중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2천만원을 잃고 승용차 구입등으로 돈에 쪼들리자 귀국,1백억원대에 달하는 재산상속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했다. 살해방법이 너무나 끔찍해 경찰이 박씨를 진범이라 발표했을때 많은 국민들이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부모와 자식간의 신뢰붕괴,물질만능의 비뚤어진 의식등이 어이없는 폐륜범죄로 이어졌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92년 10월 24일 거실에서 잠자고 있던 아버지(50)를 공기총으로 살해하고 시체를 묶어 시멘트벽돌 4장과 함께 쌀자루에 넣어 한강에 내다버린 김진태씨(26·무직·절도등 전과9범)의 경우도 무너진 가족관계에서 빚어진 범죄로 분류된다.중3때 절도를 저질러 소년원에 갔다온 김씨는 이후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하고 술만 먹으면 어머니를 때려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놓았다. 「사회저항형 범죄」는 그러나 불특정 다수등을 상대로 자신들의 그릇된 한풀이를 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이번 「지존파」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사회에 대한 비뚤어진 불만,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잘못된 인식이 얼마나 인간을 잔혹한 범죄꾼으로 만들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이러한 범죄는 범의와 범행간에 아무런 인과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돼 사회불안의 원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91년 10월 훔친 프라이드 승용차로 서울 여의도 광장을 질주,2명을 숨지게 하고 21명의 어린이에게 부상을 입힌 김용제씨(21)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사례다. 선천적으로 시력이 나빠 국민학교 다닐 때 칠판글씨가 안보여 공부를 못했고 졸업뒤에도 직장마다 취직한지 한달도 채 못돼 내쫓겨 세상이 싫어졌다는 김씨는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며 행복하게 노는 모습을 보니 다 죽여버리고 싶었다』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말을 했었다. 김씨는 『국민학교때 어머니만 가출하지 않았으면 아버지가 음독자살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도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전문가들은 어릴때부터 상처받은 영혼이 성년이 되어서도 치유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회의 교육기능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충동범죄」는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경쟁심리가 이들의 인내력을 빼앗아간데다 극단적인 이기주의 팽배와 윤리교육의 부재등이 복합돼 감정폭발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8월21일 서울 송파구 잠실본동 모식당에서 이모씨(23·방위병)등 친구들과 술을 마신 김지훈씨(21·종업원)는 자리를 끝내고 택시를 잡으려다 정우진씨(20·재수생)를 칼로 찔러 숨지게 했다.먼저 택시를 잡으려 나와 있었는데 정씨가 가로채려 했다며 인근 포장마차에서 흉기를 들고와 휘두른 것이었다. 공중전화를 오래 건다고 시비가 붙어 생기는 「공중전화 살인」,술집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다 일으키는 「우발적 살인」등 이러한 충동범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밖에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거리에서 발생한 영등포 「불출이파」행동대장 오일씨(23)피살사건에서 드러나듯 다른 조직과 이권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조직간 보복살인」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이처럼 20대 범죄가 빈번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공격적·폭력적인 것이 적극적이고 「사내답다」는 우리사회에 퍼져있는 잘못된 문화적 풍토와 무관치 않다고 한결같이 지적한다.실제로 지난해 발생한 1천20건의 살인사건 가운데 20대가 저지른 사건이 3백57건(35%)으로 가장 많았다.또 같은 기간동안 살인을 포함한 강력범죄도 전체 1만4천5백27건 가운데 20대의 범죄가 5천5백30건(38%)으로 가장 많아 20대 범죄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사회인으로 나서는 20대들에게 가족구성원들과 사회 주변의 모두가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갖고 건전한 가치관을 갖도록 지도하는 길만이 그들과 사회를 범죄에서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제언한다.
  • 파업 현중 근로자/음독후 혼수상태

    【울산=이용호·강원식기자】 50여일째 노사분규가 계속되고 있는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본부 철구생산부 김금렬씨(43·울산시 동구 서부동 서부패밀리아파트)가 18일 하오4시쯤 집에서 농약을 마시고 쓰러져 인근 해성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으나 19일 현재 혼수상태다. 부인 한정순씨(41)는 『남편이 그동안 파업참여여부를 놓고 고민해왔다』며 『18일 상오에도 회사측의 「파업참여시 징계조치하겠다」는 경고장을 받고 출근했는데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남편이 거품을 물고 마루에서 신음하고 있어 병원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 고엽제 후유증/50대 음독자살

    【춘천=조한종기자】 지난달 30일 강원도 춘천군 사북면 인람리 3반 빈집에서 고엽제 휴유증으로 시달려온 임경욱씨(50·춘천시 효자1동)가 농약을 먹고 자살한 사실이 2일 뒤늦게 밝혀졌다. 가족들은 경찰에서 『지난 69년9월 백마부대원으로 파월돼 1년만인 70년8월에 귀국한 임씨가 그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며 자신만큼 중증환자가 어디 있겠느냐』며 신병을 비관해왔다고 말했다.
  • 거액도박빚 비관 병원장 음독자살

    지난 25일 하오 7시쯤 서울 강남구 역삼동 A여관 3층 객실에 투숙한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S의원 원장 정현목씨(35)가 농약을 마신뒤 인근 강남성모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6일 상오 3시쯤 숨졌다. 경찰은 숨진 정씨가 5년전부터 슬롯머신노름을 하며 거액의 빚을 지고 돈을 갚지 못해 괴로워했다는 부인 김모씨(32)등 가족들의 말에 따라 정씨가 빚독촉에 시달린 나머지 자살한 것으로 보고있다.
  • 뒤늦은 국가체제 정비(백제를 다시본다:14)

    ◎5세기말에야 마한 완전 통합/부여족 남진정복… 토착세력과 갈등/방·군·성 지방행정망 갖춰 중앙통치/남북으로 긴 영토 사회통합 장애… 군정적 지배 의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면 백제의 국가형성 과정은 자못 다르다.주지하듯 백제는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해온 부여주의 일파가 마한사회의 북방인 현재의 서울시 일대에서 지배권을 확립한 일종의 정복국가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부여족의 이동 정주를 계기로 하여 비로소 백제국가가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마한토착세력에 의해 건국되어 발전 도상에 있던 백제 소국을 부여족이 정복한 것인지 비밀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그것은 어쨌든 백제국이 마한의 땅에서 형성된 부여족의 정권이라는 건국사정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정복자집단과 토착세력집단 간의 이중성이랄까 괴리현상이 심각했던 것으로 짐작된다.백제의 정치·사회사는 바로 이같은 이중성을 극복하기 위한 진통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직면한 또 다른 난관은 그 지형적인 특수성이었다.마한의 영역은 서해안을 끼고남북으로 길게 뻗쳐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를 차령산맥과 노영산맥이 달리고 서해로는 금강과 영산강이,남해로는 섬진강과 탐진강이 각기 흐르고 있어 여러개의 고립된 지형구를 형성하였다.그 결과 마한사회는 소백산맥 동쪽에 펼쳐진 진한·변한사회에 비하면 현저하게 지역적 통일성을 결여하게 되었다.더욱이 서해안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서 마한의 50여개 소국들은 연안항로를 따라 한반도 서북지방에 설치된 중국군현인 낙낭군이나 대방군과 자유로이 접촉했다.이는 백제 주도하의 마한세력 통합을 장기간 방해했다.신라가 진한 12개국을 비교적 단기간내에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폐적인 자연환경에 힘입은 바 컸었다.그런데 마한사회는 각기 독자적인 지역성을 고집하는 다양한 지역사회를 포괄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다원적인 지역적 구성이 백제의 정복자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지리적 특수성 한몫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의 마한정복을 시조 온조왕 27년(AD9년)때의 일인양 기술했으나 이는 엄정한 사료비판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마한의 최북방에 해당하는 현재의 서울에서 국가형성에 성공한 백제가 남해안에 이르는 마한사회 전체를 호령하게 된 것은 대체로 4세기 후반 근소고왕 때의 일로 짐작된다.다만 마한을 정복했다고 해서 백제가 곧바로 한반도 서남해안지역에까지 통일된 지배망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최근 전남지방의 고분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추측해 볼 때,백제가 이 지방의 마한세력을 명실공히 통합하여 동질화의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백년쯤 뒤인 5세기 후반,즉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475년)한 이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사실 5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백제 지배층의 묘제인 횡혈식석실분은 영산강유역까지는 확대되지 못하고 있었으며,그대신 이곳에는 옹관묘(독무덤)가 여전히 유행했다.이 지역에서 옹관묘가 석실분으로 바뀌는 시기를 고고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5세기말에서 6세기초로 보고 있다. 마한영역을 통합한 뒤 백제조정이 들고 나온 통치철학은 중국의 고전인 「주례」에서 많은 것을 차용한 느낌이 든다.이 「주례」는 중국전국시대 말기에 장차 출현하게 될 대제국의 정치적 체계를 위한 일대 청사진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거기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통일적·체계적 이론이 제시되어 있다. 사비(부여)시대 재상을 선출할 때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적어 밀봉하여 바위 뒤에 두었다가 얼마뒤 개봉하여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뽑았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는 금강 대안의 규암면 울성산성 밑 호엽사터의 바위를 정사암 혹은 천정대라고 하는데 이 「천정」이란 말 자체가 「주례」에서 나온 것이다.즉 이 책의 천관 가재조에 의하면 천관은 3백60관을 총섭하는 최고의 관직이다.그러니까 천정대란 바로 그같은 천관의 정사를 수행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주례」의 통치철학 백제의 중앙정치제도를 보면 5,6명의 좌평이 재상으로 내관·외관을 합친 22개의 관청을 지휘 감독했는데 그 관청의 이름 중에는 사도부·사공부·사구부 등 「주례」에서 따온 것이 적지않다.실은 좌평이란 명칭 자체가 「주례」 하관 사마조의 「이좌왕,평방국」(왕을 보좌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이라 한데서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문무백관의 관등은 좌평 이하 16등급으로 정연한 체계를 이루었는데 그 명칭 또한 매우 우아한 한식으로 되어 있다.이는 토착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고구려·신라의 관등 이름과는 큰 차이가 난다. 한편 지방통치조직은 국가권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차츰 정비되어 갔다.한성시대만 해도 전국의 각 지역세력의 대표자를 통해 성과 읍을 간접적으로 지배했다.근초고왕의 대정복사업이 성공리에 완수된 뒤 백제는 전국을 22개의 행정구역(당노)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보내어 통치했다.이같은 담로체제는 공주로 천도하면서 더욱 충실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그러나 백제가 정연한 통치망을 구축하게 되는 것은 538년 부여로 천도한 뒤의 일이다.김동용봉봉래산향로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축적한 국력이 크게 작용했다.이 사비시대에 백제는 고사성(전북 고부)을 중방으로 하여 전국을 크게 5개 방으로 구획하고 37개 군을 두어 2백개 내지 2백50여개에 달하는 성을 장악했다.이 성은 후일의 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중 가장 취약 이같은 방·군·성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국가권력은 지역사회에 어느정도 침투할 수 있었다.다만 백제의 지방지배는 멸망의 순간까지 현저하게 군사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민정을 게을리 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대체로 보아 군정적 지배로 일관한 듯하다.이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백제사회의 구성이 본디 이중성을 띠고 있는 데다가 지역공동체의 세력이 너무나 강고하여 국가권력이 밑바닥까지 파고들어가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쨌든 이는 고구려나 특히 신라의 경우와 비교할때 백제의 커다란 취약점이 아닐 수 없다.신라는 지역사회의 말단인 촌에까지 도사와 같은 행정관을 파견한다거나 혹은 지방세력가인 촌주에게 관등(이른바 외위)을 준다거나 하여 이들을 최대로 지배망에 포섭한 기반 위에서 삼국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던 것이다.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원인을 통치체제 면에서 찾는다면 바로 이같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패망후의 마한/나주지역 중심 지방호족 할거/고유의 독무덤·금동관 출토가 증거 백제가 마한사회를 통합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걸렸다.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백제가 비록 정복국가의 기틀을 잡았을지라도 토착세력을 쉽사리 편입시키지 못했다.이같은 정황은 오늘날 전남북지역에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고대묘제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지난 1917년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독무덤떼(옹관묘군)가운데 하나인 제9호분이다.마한의 전통묘제이기도 한 5∼6세기경의 이 무덤에서는 큰고리칼(환두대도),금동관,금동제신발(김동식리)등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금동관은 9호분 안에 묻힌 8개의 독 가운데 가장 큰 이음독(합구식옹관)머리부분에서 나왔다.맞새김의 초화무늬 솟을장식(입식)을 단 외관안에 모자가 붙은 수준급 금동관으로 평가되었다. 이같은 유물은 5∼6세기경 까지도 영산강유역에는 막강한 토착세력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다시 말하면 나주지역 중심의 당시 영산강유역은백제 중앙정권의 통치권이 완전히 미치지 못한 가운데 지방호족들이 어느정도 할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따라서 기층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묘제 역시 마한고유의 독무덤이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산강유역 나주지역에 백제의 묘제가 수용되는 시기는 6세기말∼7세기초다.이 시기는 사비시대에 해당하는데,백제 지배층의 묘제인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나타난다.지난 1978년 당시 전남대 최몽용교수(현 서울대)가 발굴한 전남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 제3호분이 이 시기의 백제계통 무덤이다.돌방과 널길(선도)을 갖춘 이 무덤에서는 긴목항아리(장경호),바리모양토기(발형토기),은장도조각,금실,쇠못 등이 출토되었다. 이렇듯 서남해안에 가까운 마한지역에는 백제의 발길이 더디게 미쳤다.
  • 중기전무 음독자살

    16일 상오 7시30분쯤 서울 송파구 잠실2동 주공아파트 225동 315호 황동휘씨(58·오성화학 전무) 집 목욕탕에서 황씨가 극약을 먹고 숨져있는 것을 부인 경선표씨(49)가 발견했다. 경찰은 중소 전자부품 제조회사 전무로 일해온 황씨가 회사 자금사정이 악화,사채업자로부터 1억4천여만원을 빌려쓴뒤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빚독촉에 시달려 왔다는 부인의 진술과 가족들앞으로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점등으로 미루어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 부도 중기사장 비관 음독자살

    【대구=이동구기자】 지난 18일 하오 1시30분쯤 대구시 달서구 두류3동 동산아파트 앞 두류산에서 덕성건업대표 김용근씨(33·대구시 남구 대명6동 1445의11)가 독극물에 중독돼 숨져있는 것을 이 마을 이근식씨(37)가 발견했다. 이씨에 따르면 이날 두류산을 오르던중 사람이 쓰러져 있어 가보니 김씨가 반듯이 누운 채로 숨져 있었고 옆에 빈 독극물 병이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숨진 김씨가 부도가 나 1억원 상당의 빚을 갚지 못해 고민해 왔다는 가족들의 진술과 『가족들을 고생시켜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비관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경영난·가정불화 비판/60대기업인 음독자살

    5일 하오 6시쯤 서울 송파구 송파동 88의7 이찬호씨(62·상원산업대표)집 안방에서 이씨가 극약을 마시고 숨져 있는 것을 이씨의 셋째아들 대균씨(23·회사원)가 발견했다. 경찰은 경기도 용인군에서 가구회사를 경영해 온 이씨가 지난 91년부터 경영적자로 어려움을 겪어왔고 최근에는 심한 주벽으로 부인(55)과 자주 다퉈 부인이 별거를 하는등 가정불화를 겪었다는 가족들의 진술에 따라 경영난에 따른 가정불화를 비관,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 유해 봉환 임정요인 5인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민족사상를 고취/박은식/을사조약때 음독/신규식/미서 독립군 양성/노백린/한국노병회 결성/김인전/상민공동회 조직/안태국 ◇박은식(1859∼1925년)황해도 황주태생.1898년 「황성신문」을 창간했으며 1905년 황성신문에 장지연의「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영국인 배설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주필을 역임하는등 민족언론인으로 민족사상을 고취. 1924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고 대통령대리를 겸직했으며 1925년 3월에는 이승만대통령의 탄핵면직을 계기로 2대 대통령으로 취임,독립운동에 헌신하다 같은해 11월1일 노환으로 상해의 한 병원에서 작고.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신규식(1879∼1922년)충북 청원태생.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비분강개,음독자살을 기도했다가 오른쪽 눈을 실명.1911년11월 중국으로 망명,손문의 신해혁명에 참여했으며 상해·남경등지에서 망명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를 조직.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출범과 함께 법무총장에 임명되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됐으며 1921년에는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취임하는 등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쳐오다 1922년 9월25일 과로로 상해에서 43세로 별세.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노백린(1873∼1926년)황해도 송화태생.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와이에서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달려가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고 군무부총장에 임명됨.1922년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다음해 국무총리에 정식 취임했으며 1924∼25년까지 국무총리,교통 및 군무총장직을 겸임하다 1926년 1월22일 상해에서 지병으로 별세.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김인전(1876∼1923년)충남 서천태생.1919년 4월 상해로 건너가 이듬해 임시의정원 재무예산위원직을 시작으로 의정원부의장,임시정부 재무부 비서국장과 임시공채관리국장,임시정부의학무총장대리 등을 역임. 1922년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에 피선됐고 같은해 4대 의정원의장에 선출돼 임시정부의 의정활동을 이끌었다.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로병회를 결성,군대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에 주력. 1923년5월24일 과로로 순국.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 ◇안태국(1875∼1920년)평남 평양태생.평양에서 협동사라는 회사를 설립,실업구국운동에 앞장섰으며 이승훈 등과 함께 상민공동회를 조직하고 1917년 신민회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입,최고위간부로 활동.1911년 간도의 독립군기지 설치운동과 관련,경찰에 체포돼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 봉환예정 임정요인 5인

    ◇신규식(1880∼1922)을사조약 때 죽음으로 항거하려고 음독했다가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 손문의 신해혁명에 참여했다.1919년에는 임시정부의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됐으며 법무총장,국무총리겸 외무총장을 역임했다.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하며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목숨을 끊었다. ◇박은식(1859∼1926)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민족사상을 고취하다 3·1운동때 시베리아로 망명,항일운동을 전개하며 고대사 발굴과 저술에 힘썼다.그후 상해로 건너가 독립신문등을 발간하였고 1925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피선됐다.26년에는 대통령이 되었다가 헌법의 개정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뒤 그해 11월 병사했다. ◇노백린(1874∼1925)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뒤 한국무관학교등에서 후진양성에 진력했다.경술국치때 낙향하여 교육운동에 전념하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을 맡았고,국무총리도 역임했다.1925년5월에는 참모총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헌신했다.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구미위원부의 외교위원으로 소련에 파견돼 외교활동을 벌였다. ◇안태국(?∼1920)1905년 을사조약후 평양에서 협동사 건립,실업구국운동에 종사했으며 이승훈 최응두등과 상민공동회를 조직했다.1907년 안창호선생등이 창립한 신민회에 가입,최고위간부로 활동하다 일제의 신민회탄압으로 1911년 검거돼 5년간 복역한뒤 출옥,만주로 망명했다.3·1운동이후에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임시정부와 협의차 상해로 갔다가 1920년2월 병사했다. ◇김인전(1876∼1923)1920년2월 상해로 망명한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원과 부의장,임시정부 국무원 학무총장대리,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등 임시정부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1922년에는 제4대 의정원의장에 선임돼 입법활동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계획·실천했다.김구·여운형등 16명과 함께 군인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조달을 목적으로 한국로병회를 결성,인재육성에 앞장섰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2)

    ◎암흑속의 공로/언어탄압에도 우리말 지켜와/한국최초의 여기자 1920년에 선발/인신매매 비리 등 추적… 언론기능 수호 한일합방후 그 제호에서 「대한」을 떼버리고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한 매일신보(1938년부터 매일신보로 개제,이하 「매신」으로 통칭)는 일제의 한국병탄을 합리화하는데 이용됐다.민족의 존재를 부인한 언론으로 오욕의 역사를 대변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그래서 민족주의적 입장의 신문사 연구학자들 가운데는 일제통치하에서 민족지가 존재하지 않던 1910∼20년,1940∼45년의 두 시기를 「무신문기」로 분류하는 이도 있다. ○일제치하 1차사료 그러나 정진석교수(외국어대)는 그의 저서 「한국언론사」에서 ▲민족지가 없던 시기의 1차사료 ▲민족지와의 비교 대상 ▲우리 언론인및 문인들의 피난처및 발표지면 제공등의 이유를 들어 매신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매신은 비록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보도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지만 사회·문화 보도에 있어서는 문제점을 적시,총독부의 그릇된 정책을 일깨우기도 했다.그리고 일제말기 우리글 말살정책하에서 유일한 한글매체로 우리글 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신은 또 조선 동아의 강제폐간으로 오갈데 없어진 당시 언론인들의 은신처로 제공돼 그들이 해방후 민족정론을 펼칠수 있는 기반을 닦을수 있도록 했다.특히 최초로 기자공채제도를 도입,여기자를 채용하는등 부분적으로는 신문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도 부인할수 없는 것이다. 매신은 인재의 폭넓은 등용을 위해 최초로 기자공개채용을 실시했다.이는 당시 아는 사람의 소개등으로 신문기자가 되던 관행으로는 혁신적인 것이었다.매신의 첫 기자채용은 1918년 이다.이무렵 홍란파와 유지영이 매신에 합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들은 후에 음악도로 이름을 날렸는데 당시 신문사는 시인 소설가뿐 아니라 음악·미술학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예술인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그후 기자공채가 지상에 보도된 것을 중심으로 보면 20년7월,29년8월,35·36·38·39·40년 1월에 이뤄져 비교적 정기적으로 이뤄졌음을 알수 있다. 40년 이후에도 여러차례 견습기자를 모집했다.매신보다는 10여년 늦은 민간지는 조선일보가 1930년에 처음으로 기자를 공채했으나 그나마 지속시키지 못했던데 반해 매신은 공개채용의 제도화와 함께 타사와의 활발한 기자교류도 시도했다.당시 기자채용의 자격요건은 전문학교 졸업자로 초기에는 30세미만이었으나 40년부터는 27세로 연령을 낮추었다. ○인재를 폭넓게 등용 기자공채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여기자 공채였다.매신 20년 7월2일자에는 부인기자를 채용한다는 사고가 실려있다.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 탄생을 알리는 신호같은 것이었다.당시의 사고는 부인기자의 채용이유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부인계의 해방을 위해 가정개량및 부녀개조의 완벽을 기함에는 현숙박학한 숙녀의 책임있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시세의 요구」때문이라고 강조했다.또 응시자격은 ①가장있는 부인 ②20세 이상 30세 이하 ③고등보통학교 졸업정도 이상으로 문필취미가 있는 부인등으로 못박았다. 이무렵은 조선과 동아가 창간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때다.그때까지 유일한 우리말 신문으로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던 매신은 경쟁상대들의 출현으로 편집국을 개편하고 그들과의 차별화와 새로운 이미지를 심기위한 노력을 기울였다.여기자채용은 그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지만 여자들의 문밖출입마저 철저히 금하고 있던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 여성의 기자직 진출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때 뽑힌 여기자가 이각경이다.지금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로 알려져온 최은희(1924년 조선일보 입사)보다 4년이 앞섰다.1897년 2월 서울에서 출생한 이각경은 한성여자고등학교(현경기여고) 기예과와 사범과를 나와 2년간 교편생활을 하다 매신에 입사,9월5일 정식으로 발령을 받았다.그녀는 9월14일자부터 기사를 쓰기 시작해 「부인기자의 가정방문기」「축첩에 대한 이해」「위생에 대한 주의」를 비롯,가정·여성·아동·교육문제등 수많은 기명기사를 남겼다. 총독부기관지로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신의 기자들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파헤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30년대말 「기생 박애란 음독자살사건」은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권번기생 출신인그녀는 24세때 돈많은 지주의 소실로 가게 되었다.그러나 그녀는 따로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끝까지 거절하자 기생어미가 그녀를 창녀굴에 팔아넘기려 했다.그러자 머리물들이는 약을 입에 털어넣고 자살한 사건이었다.매신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신매매가 공공연하게 허용되고 있는 사회비리에 초점을 맞춰 심층보도했다. ○사회의 문제점 고발 그 결과 한달후 총독부령으로 전국적인 인신매매행위 엄단이 공포되었고 현재 빚에 묶여있는 기생이나 창녀들을 무조건 해방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지기에 이르렀다.또 「용인보통학교 생도구타사건」도 비슷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용인 어느 학교 3학년생이 수업료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인 교사에게 매를 맞고 늑골이 부러졌는데 이를 항의하던 생도의 아버지도 교장에게 구타를 당한 사건이었다. 생도가 서울 의전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독자의 제보를 받고 뛰기 시작,사건의 전모와 학생체벌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보도를 했다.결국 보도가 나간지 얼마 안돼서 그 교장과 교사가 파면되었으며 각급학교에 생도들에 대한 체벌을 경고하는 지시가 내려졌다. ○40년대 45만부 발행 매신은 40년대들어 일제의 우리 언어말살정책에 따라 각급학교에서 우리말을 못가르치게 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일체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시킨 상황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켜나간 유일한 매체였다.이때문에 전쟁중 45만부에 달하는 엄청난 부수 신장을 가져오기도 했다. 매신은 또 조선 동아가 폐간당하자 해고된 수많은 언론인들에게 호구지책이든 호신지책이든 일종의 피난처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매신은 전쟁중 어려운 시기에도 자체 감원이나 감봉없이 사원들을 안정시켰다.그리고 오갈데 없어진 언론인들을 포용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이무렵 매신에 들어온 대표적 언론인들은 백철 정비석 정현웅 이관구 우승규 서승효 김규택 조풍연 곽복산 조경희 노천명 이홍식 박종수 홍종인씨등이다.이들은 광복후 대한민국의 문화·언론계를 이끌어나간 인재들이기도 했다.매신은 이들이 좌절하지 않고 때를 기다릴수 있도록 피난처를 제공해준 것이다. 매신이 총독부기관지라는 굴레속의 언론이라는 사실은 결코 숨길수 없다.그러나 일제통치 기간중 한번도 중단됨없이 우리말 신문의 위치를 지키는 가운데 많은 역할들을 수행해 왔다는 점에서 그 존재가치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한국언론사」(정보석·나남 1990) 「언론비화 50편」(한국신문연구1978) 「한국언론인물사화」상·하(대한언론인회 1992)
  • “자식 안찾아 온다”/비관 60대 음독자살

    【대구=남윤호기자】 26일 하오 2시쯤 대구시 수성구 만촌 1동 통일전시관 신축공사장 1층계단에서 이상기씨(67·대구시 수성구 만촌1동 1329의56)가 극약을 마시고 숨져 있는 것을 건물현장을 둘러보던 수성구청 공원계장 김동열씨(45)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숨진 이씨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3남2녀의 자식 가운데 4명을 대학졸업까지 시켰으나 취직후 생활비 한푼 보태준 적이 없고 신정과 설이 되어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뿐 아니라 최근 아내까지 집을 나갔으나 자식들이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아 더 이상 세상을 살고 싶지않다』고 씌어 있었다.
  • 사채·종업원 체임 비관/중기 사장 음독자살

    【수원=조덕현기자】 지난 5일 상오5시30분쯤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889의5 이일조씨(32·공예업)집 안방에서 이씨가 극약을 마시고 신음중인 것을 부인 정인순씨(32)가 발견,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부인 정씨는 『남편 이씨가 전날 하오7시30분쯤 인근 술집에서 동생 이 호씨(31)와 술을 마신뒤 돌아와 잠을 자던중 새벽에 갑자기 사지를 비틀고 입에 거품을 물며 신음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고 말했다. 이씨는 집근처에 「이조공예」라는 가구공장을 차려놓고 운영해 왔으며 지난해 사업자금으로 빌린 사채 3천만원과 종업원 3명의 지난 12월분 봉급을 주지못해 고민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씨집 마당에 놓여있던 극약병이 비어있고 전날 술을 마시면서 「죽고싶다」는 말을 했다는 동생의 진술에 따라 음독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주민과 추곡수매 마찰/50대 이장,음독자살

    【김포=조덕현기자】 추곡 수매량 할당을 둘러싸고 주민들의 항의를 받던 마을 이장이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지난 13일 하오1시쯤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오류4리 이장 이종근씨(51)가 집안방에서 농약을 마시고 중태에 빠진 것을 이씨의 부인 오금자씨(47)가 발견,병원으로 옮겼으나 15일 상오8시쯤 숨졌다.
  • 사업실패에 일가족 자살기도/2명 사망

    【부산】 지난 3일 하오6시쯤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금정산 대성암 부근 숲속에서 최재득씨(68·식당업 영도구 신선동 3가 38)와 부인 박순자(61),딸 후불씨(36)등 일가족 3명이 음독자살을 기도,최씨부부는 숨지고 딸 후불씨는 이모부 김종경씨(49·금정구 남산동)에 발견돼 병원에 옮겨져 목숨을 건졌다. 김씨에 따르면 4일 하오6시쯤 귀가하던 중 집앞에 이질간인 후불씨가 의식을 잃은채 쓰러져 있어 침례병원으로 급히 옮겼다는 것이다. 의식을 회복한 후불씨는 5일 『동생 태성씨(33)가 친척들로부터 사업자금 1억여원을 빌려 당구장을 경영하다 최근 실패해 빚을 진 것을 부모와 함께 고민해오다 농약과 수면제를 마시고 동반자살을 기도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최씨부부의 사인과 자살동기 등을 가리기 위해 사체를 수색하는 한편 사건경위에 대한 후불씨의 석연치 않은 진술에 대해서도 조사중이다.
  • 윤락녀와 관계한 30대교사/에이즈감염 오인,비관자살(조약돌)

    터키탕에서 여종업원과 성관계를 맺은 30대 고교교사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대한 공포와 가족에 대한 죄책감으로 10개월동안 고민해오다 음독자살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지난 16일 상오7시30분쯤 대전시 대덕구 와동 구모씨(38·K공고교사)집 안방에서 구씨가 농약을 마시고 숨져있는 것을 부인 김모씨(35)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구씨는 유서에서 『지난해 8월20일 대전시 동구 용전동 피카소관광호텔 2층 터키탕에 친구들과 함께 들어가 여종업원과 성관계를 가진뒤 혀에 백태가 끼고 몸에 부스럼이 나는 것이 AIDS에 걸린 것 같다』면서 『교사로서의 양심과 아내와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먼저 떠난다』고 밝혔다.
  • 며느리와 불화 비관/70대 노파 음독자살

    5일 하오4시쯤 서울 동작구 상도4동 김모씨(52·회사원)집 안방에서 김씨의 어머니 박영녀씨(75)가 농약을 마시고 숨져있는 것을 김씨의 딸(13·S여중2)이 발견했다. 경찰은 박씨가 평소 후처로 들어온 며느리 최모씨(41)와 부채문제로 자주 다투어왔으며 최근 허리가 아파 성당에 나가지 못해 경기도 성남에 사는 큰딸에게 『죽겠다』는 전화를 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고부간의 불화와 신병을 비관,자살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고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