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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북 7곳 또 “AI 의심”

    전북 임실과 전남 목포 등에서도 조류인플루엔자(AI) 의심 사례가 보고되면서 AI의 기세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이미 지난해 수준을 넘어선 것은 물론 530만마리의 가금류를 살처분했던 2004년 수준에 육박하면서 올해가 최악의 AI 피해 연도로 기록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보상과 수매, 세금 공제 등 피해 농가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물론, 신속하고 원활한 방역 작업을 위해 군 병력까지 동원하기로 하는 등 총력 대응 태세에 돌입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 16일 전북 임실·김제(용지·백구), 전남 목포·구례·나주(공산·세지)에서 모두 7건의 AI 신고가 접수돼 현재 검사 중이라고 17일 밝혔다. 특히 김제 용지·백구면 두 산란닭 농장과 임실 토종닭의 경우 간이 키트 검사에서 AI 양성 반응이 나왔다. 이날 오후 신고 또는 발견된 AI 의심 사례는 모두 43건. 고병원성으로 판정된 것은 김제(3일 판정)와 경기 평택(16일) 등 모두 21건이다. 방역당국은 간이 키트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온 김제 용지 산란닭 농장 2곳(16일 신고)의 2만 마리를 살처분했다. 16일 오후 현재 이번 AI 사태로 살처분된 닭·오리 등 가금류는 모두 299만 8000마리. 지난해 280만마리를 넘어선 것은 물론 2004년 528만마리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다. 더구나 예년에는 100일 정도 기간의 피해지만 올해는 겨우 2주 동안 살처분이 진행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살처분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는 닭과 오리의 살처분에 군 병력을 투입하고,AI 피해지역에 대해 자진납부세금 납부기한 최장 9개월 연장, 양계사업자 손실 소득·법인세 공제 등의 혜택을 주기로 결정했다. 또 농식품부는 ‘AI 경계지역 지원 대책’에 따라 이 지역 닭·오리는 원칙적으로 농협중앙회에서 수매 시점 1주 전의 산지 평균 가격을 기준으로 사들이고, 농가가 민간에 팔 경우에도 수매 기준 가격과 실제 거래가격간 차액을 농협이 지원한다. 최대 지원 한도는 수매 가격의 35%까지다. 한편 AI가 발생한 전북 김제에서 닭 살처분을 앞둔 농민이 음독을 기도했다.17일 오전 9시30분쯤 전북 김제시 용지면 장신리 이모(55)씨의 집 마당에서 이씨가 농약을 마시려다 주민들의 제지를 받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농약을 마시지는 않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AI 발생지역인 경기도 평택에서 반입된 닭이 충남 서산시내 도계장에서 냉동 보관 중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다행히 도계장에서 외부로 반출된 닭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상습 성폭행 당한 여고생 자살 기도

    30대 남자로부터 상습 성폭행을 당한 여고생이 협박과 성폭행을 견디지 못해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경기 일산경찰서는 15일 여고생을 상습 성폭행한 김모(33)씨를 청소년성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 1월부터 두 달여간 여고 2학년생인 A양과 중학생인 A양의 여동생, 동생 친구 등을 10여차례에 걸쳐 성폭행 및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A양의 부모와 10여년 전부터 직장일로 알게 된 김씨는 A양이 만남을 거부하자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밝혔다.김씨의 협박과 성폭행이 계속돼 가족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한 A양은 지난달 중순 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동생에게 발견돼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A양 어머니의 신고를 받은 일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벌인 결과, 김씨는 불법 자동차를 구입해 가짜 번호판을 달고 다닌 혐의로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장의사에 장례비 주고 자살(自殺)

    지난 15일 부산(釜山)시내 동(東)구 석탄공사 구내식당에서 김(金)모 노인(72)이 음독자살했는데-. 자살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사후의 일까지 깨끗하게 처리(?)해 놓아 칭송이 자자. 金노인이 사망한 다음날 느닷없이 초량(草梁)동 P장의사에서 장례를 자청. 골치아픈 뒤치다꺼리에 고민하던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까닭인즉 金노인은 자살하기 전 죽은 자기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P장의사에 미리 장례비용을 지불했다는 것. -본받을 결벽증. [선데이서울 71년 5월 30일호 제4권 20호 통권 제 138호]
  • 제구실도 못하며 살아서 무엇해

    남자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자살한 두 사나이. ▶지난 18일 상오 9시께 경남 하동군 진교면 고용리 유모씨(25)는 몇년전 고환을 수술했으나 완치되지 못하고, 발기불능으로 고민해 오다가 재미없는 세상『뭣하러 살아』하고 음독자살. <하동(河東)> ▶경남 창원군 북면 한(韓)모씨는 지난해 11월 아들 한모군(19)이 약명미상의 극약을 먹고 자살해 버린 최근까지 자살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던중, 지난 10일께 비로소 원인을 알고 장탄식. 까닭인즉 한군은 이웃의 김모씨(25)와 장난을 하다가 김씨가 한군의 중요한 곳을 잡고 늘어져 버리는 통에 남성의 기능을 상실, 부모 몰래 백방으로 치료를 했으나 효과가 없어 비관자살 했다는 것. -목숨보다 그게 더 중했나? <창원(昌原)> [선데이서울 71년 5월 30일호 제4권 21호 통권 제 138호]
  • 정치권 “先보상 後정산” 한목소리

    기름유출 피해 보상이 늦어지면서 생계가 막막해진 태안 주민들의 자살이 잇따르자 다급해진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선(先)보상을 주장하고 나섰다.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표는 20일 오후 충남 태안 보건의료원에 마련된 고(故)지창환씨 빈소를 찾았다. 지씨는 ‘유류피해 특별법 제정 촉구’ 집회 도중 음독·분신했다가 지난 19일 숨졌다. 손 대표는 태안 피해 주민에게 지원이 늦어진 것이 알려지자 “대표적인 관료주의”라고 비판하며 이날 태안으로 내려가 주민 간담회를 가졌다. 통합신당은 문석호 의원 등이 발의한 ‘허베이스피리트호 유류오염사고관련 주민지원 등 특별법안’을 당론으로 채택하고 2월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킨다는 계획이다. 이 법안은 선보상과 함께 보상금 청구 등과 관련해 필요한 피해조사·증거 보전·법률 자문에 필요한 비용 청구 등의 지원 방안이 포함돼 있다. 한나라당은 21일 최종 논의를 거쳐 별도로 법안을 확정할 방침이다. 이번 태안 사태뿐만 아니라 유사 사례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먼저 보상한 뒤 나중에 정산한다는 게 원칙”이라면서 “보상을 위한 주민들의 증빙자료 확보도 정부가 적극 도와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부에서 우선 보상을 해줄 뿐만 아니라 보험사와 가해 업체로부터의 보상금도 정부가 소송을 통해 받아주겠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비대위 대표는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정부의 피해주민 특별긴급생계지원비 3000억원 지원 및 선보상을 주장했다. 심 대표는 “‘국민기초생활보장기본법’에서 보장하는 최저생계비 3개월치를 1차로 선지급해야 한다.”면서 “정부는 최소한 3000억원을 긴급대책비용으로 배정하고, 시급히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심 대표는 정부의 선보상이 가능하도록 하는 특별법 제정을 위해 4당대표 회담을 제안했다. 자유신당 창당을 추진 중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19일 보도자료를 통해 “정부에서 하루빨리 특단의 선보상 정책을 조속히 실행하지 않는 한 비극은 더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공적자금 등을 긴급히 투입해서라도 주민들의 심적 동요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나길회 한상우기자 kkirina@seoul.co.kr
  • 태안 주민들 ‘죽음의 시위’

    충남 태안 유류피해 주민 2명이 최근 잇따라 음독 자살한 데 이어 피해 시위에 참여했던 50대가 또다시 분신 자살을 시도해 기름유출 피해의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태안 주민들은 “손님도 없고 피해 보상 등 일말의 정부 대책마저 없어 생계 걱정 등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며 절망감에 휩싸인 분위기다. 진태구 태안군수는 사태가 악화되자 18일 ‘대군민 호소문’을 내고 “온 국민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 더이상 목숨을 버리는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거듭 안타까운 호소를 했다. ●분신전 농약 마신 데다 화상도 심해 18일 오후 1시50분쯤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태안군수산경영인회관 옆 도로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주민 지창환(56)씨가 제초제를 마신 뒤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 자살을 시도,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중태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지씨는 이날 태안지역 어민들로 구성된 태안유류피해 투쟁위원회 주최 ‘특별법 제정 촉구 대정부 결의대회’에 참석,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이 연설하는 도중 갑자기 무대 옆으로 뛰어나와 준비한 시너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지씨는 인근 태안의료원으로 옮겨졌으나 분신 기도 전에 농약을 마신 데다 화상도 심해 생명이 위독하다. 지난 15일에는 태안군 근흥면 마금리 김모(73)씨가 자신의 집에서 극약을 마시고 신음하는 것을 부인이 발견해 119에 신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튿날 숨졌다.10일에도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해변에서 굴양식장을 해오던 이모(66)씨가 원유유출 사고로 자신의 양식장에 큰 피해가 발생하자 처지를 비관해 자신의 집에서 극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고 직접 책임자도 안 나서 시위가 벌어진 태안은 지금껏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고 나서지 않고 언제, 어떤 식으로 보상을 하겠다는 언질조차 없어 피해 주민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 정부가 300억원을 지원하고 어느 기업이 성금 몇 억원을 내놨다는 소식이 이어지지만 정작 주민들은 1원짜리 동전 하나 구경하지 못했다며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강모(47·태안군 소원면)씨는 “사고 후 40일이 지나도록 마을 출신 외지인들이 보내온 성금 410만원이 전부”라며 “사람 다 죽고 나서 피해 보상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반문했다. 며칠 전 음독 자살한 이씨의 양식장에 가봤다는 김모(54·태안군 소원면)씨는 “애써 키운 양식장이 기름 범벅이 됐는데 손을 쓰지도 못한 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라고 토로했다. 피해 주민들은 삼성중공업의 침묵과 무대응에도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한 주민은 “살 일이 막막한 주민들이 자살하고 있는데 삼성이 뭐라고 말 한마디 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개했다. ●충남 “추가지원을”… 정부 “집행부터”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이완구 충남도지사는 지난 16일 정부와 정치권에 불만을 표출했다. 이 지사는 “1만가구가 넘는 어민이 피해를 입었는데 정부가 쥐꼬리만 한 생계비를 주고 생색만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지사는 18일 이명박 당선인을 만나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고로 피해를 본 주민들을 위해 긴급 생계자금 300억원을 추가 지원해 줄 것을 건의했다. 한편 해양수산부는 이날 생계 절망감에 빠진 유류 피해 주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생계지원자금 300억원의 조속한 집행을 충남도에 강력 요청했다. 유류 피해 주민들을 위한 생계지원자금 300억원은 지난달 28일 충남도에 배정됐다. 하지만 충남도와 관련 지자체가 긴급 생계지원자금의 배분 기준을 둘러싸고 주민 반발을 우려해 집행을 늦추고 있다. 이 때문에 다음달 설까지 피해 주민들에게 긴급 생계자금을 배분하지 못할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태안 피해어민 음독 자살

    충남 태안의 60대 어민이 원유유출 사고로 굴양식장 피해를 입은 것을 비관해 극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10일 오전 8시10분쯤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 이모(66)씨 집에서 이씨가 제초제를 마시고 신음중인 것을 아들(34)이 발견,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이씨는 농사를 짓다가 30여년 전부터 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인 260칸(약 2000㎡)의 굴양식장을 운영해 연간 3000만원의 순수입을 올려왔으나 이번 원유유출 사고로 기름에 오염돼 복구불능 상태에 빠졌다.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과부사정 외면에 비관 목숨끊어

    1월16일 새벽 1시 전남 해남군 황산면에 사는 과부 김(金)모여인(47)이 자기 집에서 음독 자살을 했는데…. 김여인은 평소 말술을 마다않은 주당으로 이날도 전신이 늘씬하도록 술을 마시고는 같은 마을에 사는 홀아비 정부 임(林)모씨(47)를 찾아갔겄다. 그렇지 않아도 앙탈(?)이 심한데다가 술까지 취해서 주정을 하는데 견디다 못한 임씨는 김여인을 때려 내쫓았다나. 임씨의 무정한 마음에 비관을 한 김여인은 마침내 세상을 등지기로 작정했던 모양. 과부 설움을 홀아비가 몰라준대서야…. <해남(海南)> [선데이서울 71년 1월31일호 제4권 4호 통권 제 121호]
  • 고의·교통사고도 건강보험 혜택

    자해 등 고의사고나 교통사고에 대한 건강보험 이의신청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29일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건보공단에 제기된 이의신청 건수는 1189건에 달했다. 이 가운데 91.2%인 1086건은 병·의원이 아닌 일반 국민들이 제기했다. 이의신청 내용별로는 보험료 부과·징수가 630건(53%)으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그동안 보험적용이 되지 않았던 고의사고나 일반 교통사고도 451건으로 38%나 됐다. 진료비에 대한 반발은 35건(3%)에 그쳤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올 6월부터 자해, 음독 등 고의사고는 물론 신호위반 등 중대위반사고 10대 항목을 제외한 본인과실 교통사고도 건강보험이 적용되고 있으며 일부 소급적용도 가능하다.”면서 “건강보험 이의신청 절차가 의외로 간편한데다 심사위원 10명 가운데 변호사와 시민단체 인사가 8명을 차지해 의외로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마무리된 1148건의 이의신청 가운데 수용된 것은 14.6%인 167건이었다.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세상을 등지려 했던 사연은 무엇일까

    세상을 등지려 했던 사연은 무엇일까

    그 자신 배우이면서 「톱·스타」김진규(金振奎)의 아내인 김보애(金寶愛)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사실은 영화계 안팎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평소 별다른 말썽없이 영화인중에서도 가장 원만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것으로 알려진 김진규부인이 뭣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것일까? 「스타」라는 화려한 명성뒤에 도사린 이 의외의 비극을 훑어보면-. 성질 못돼서 만 되풀이 눈뜨고 보니 부끄럽다고 『참을성이 없었어요. 저만 혼자 편하려 했으니까 제가 잘못된거겠지요』 사건이 일어난 3일뒤에 의식을 회복한 김보애양은 기자를 만나자 이렇게 첫마디를 열었다. 9월29일 김양의 음독소식이 신문 방송에 실려나가자, 수십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염치없는(?) 이 취재공세에 김보애는 그 자신이 소문없이 가버릴수있는한 평범한 여인일수 없었다는 점을 새삼 실감한 것같다. 무엇때문에 삶의 의욕을 버렸던가를 생각하기전에 자신의 행동이 몰고온 여파에 관심을 두는것 같았다.『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요.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것 같아요』 무엇때문에 죽을 생각을 했는지? 이 물음에 김보애는『성질이 못돼서, 참을성이 없어서』를 되풀이 할뿐 확실한 답변을 꺼려했다. 한 측근자는 그날 아침 김보애는 부부싸움을 했다고 귀띔했다. 부부싸움의 이유는 경제문제가 됐고 이 싸움이 자살을 생각케한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일까…. 부부싸움은 소문처럼 영화『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과 관계가 있었던듯…. 남편의 영화제작을 비롯 벌여놓은 사업등이 얽혀 그의 남편 김진규는 약 6개월전부터 이『성웅이순신』제작에 일체의 재력과 정력을 쏟고있다. 특수촬영을 위해 「풀」을 만들고 거북선을 주조하는등 영화가 촬영되기전에 이미 4천만원가량이 투자됐다는 소문. 당초 보통영화의 3배쯤 예상한 제작비가 의외로 확대되었으니까 자연 무리가 따를밖에 없었을 것. 지난 추석전날엔 밀린 노임을 내놓으라고 70여명의 인부가 한남동 김씨집에 몰려들어 농성을 했고, 이 소동속에 휘말린 김보애는 왼쪽엄지손가락이 절반가량 끊겨지는 상처를 입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김보애가 영화「이순신」에 짜증을 느꼈을건 추측할 수 있는일. 또 하나의 경제사정은 김보애자신이 벌이고있는 사업이 뜻같지 못하다는 점이다. 유달리 활동적인 성격으로 알려진 김보애는 한때 광화문에 「희원(喜苑)」이란 음식점을 내어 직접 팔을 걷고 나섰었다. 그리고 지난 봄에는 충무로에 5백만원을 투자해서 「커튼·숍」을 차렸다. 이 사업들이 부진하자 그는 또하나의 사업을 구상했었다한다. 한남동 집을 「스틱·하우스」로 개조해서 영업을 하자는 구상. 본격 「스틱·하우스」를 배우기 위해 그녀는 지난 8월에 일본에 다녀오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스틱·하우스」의 자금이 그녀의 힘으로는 벅찼던 것 같다. 그리고 남편은 「이순신」영화에 몰두해서 전처럼 도와주지도 못했다. 그녀는 스스로 이 사업설계를 추진해왔는데 그러는 동안 누적된 불평과 욕구불만이 이날 아침 폭발했을거란 관측이다. -돈이 그렇게 절실한 형편이었던가요? 『남들이 빚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빚이 있다면 벌어서 깨끗이 갚아야지 그냥 죽는건 비겁하잖아요? 그리고 사실 저의 형편에 돈 천만원쯤 빚졌다고 그렇게 큰 타격은 아녜요』 돈을 모아 거부가 되고싶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단다. 사업체를 벌이는 것은 남편과 아이들(그는 3남3녀의 어머니)의 뒷받침을 해주자는 목적이외에 잠시도 놀지못하는 성격 탓이라고 풀이했다. 『광우리 장수나 연탄장수를 하면 어때요. 돈이 행복의 전부는 아녜요. 남루한 옷차림으로 야채 「리어카」를 끄는 채소장수 부부에게서도 행복한 웃음은 있어요. 내가 김진규의 아내 김보애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여성도 있을줄 압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야채장수부부가 부러울 때도 있답니다』 남편이 일에 파묻인 탓에 답답한 일 의논할수 없어 김보애는 자신의 과거가 연속극에서 살아온것 같다고 말했다. 「팬」이나 사회에서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강렬하기때문에 때로는 그 시선에 억눌리어 자기의 생활을 진실하게 가져보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선 무대는 너무 고달팠어요. 산다는 것이 힘겨웠어요. 저의 가정은 「스크린」속의 인물이나 가정은 아니었어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것은 자기자신에게 충실할수있는 여건인 것 같아요. 사회가 보는 눈과 실제의 생활이 균형을 잃으면 그보다 비참할 수가 없어요. 저는 사회의 눈에 우리집의 현실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어요. 22세때 처녀몸으로 저는 10살과 8살짜리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읍니다. 그때의 보잘것 없던 작은 보금자리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맨주먹에서부터 오늘을 이뤄왔읍니다-』 -무엇이 불만인가요? 『깊이 생각하면 참을수 없을 정도의 불만은 없어요. 일이 잘 안될때, 답답할때 저는 상의할 사람이 없어요. 남편은 자기일에 열중했고 오랫동안 우리는 의견교환조차 제대로 못했어요』 -의식을 찾았을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먼저 오늘이 며칠인가? 하는거였어요. 남편과 꼬마 「진근」이가 곁에 있더군요. 남편은 처음부터 계속 제곁에 있어줬어요. 남편의 애정을 실감하면서 왈칵 눈물이 나오더군요. 어린것을 두고 못할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와 함께 혼자 편안히 죽을생각을 한것이 욕심이 많아서였다고 반성하게 되더군요. 그 뒤 여러 사람들이 저를 찾아주셨어요. 혼자가 아니다, 따뜻한 인정이 있다, 살아야겠다… 이런거였어요』 [선데이서울 70년 10월 11일호 제3권 41호 통권 제 106호]
  • “캐스팅 조건 성관계”…대만 여배우 자살시도

    “캐스팅 조건 성관계”…대만 여배우 자살시도

    대만 연예계가 또다시 슬픔에 잠겼다. 대만의 한 여배우가 음독 자살을 시도해 대만 연예계를 발칵 뒤집어놨다. 그런데 자살시도의 이유가 더 심각하다. 바로 드라마 출연을 미끼로한 성관계가 그것이다. 왕(王)이라고만 밝혀진 이 여배우는 지난 2월 대만의 인기여배우 리안슈가 출연하는 드라마의 오디션에 참가했다. 이 오디션중 그는 한 프로듀서를 만났고 그는 왕에게 “좋은 배역을 주겠다. 촬영이 끝나면 베이징에 함께 가자”고 말하며 성관계를 강요했다. 이후 이들은 5~6회의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왕은 드라마에 단지 한번 엑스트라로 출연한 후 드라마는 종영해버렸다. 화가난 왕은 프로듀서가 묵는 호텔에 몇차례 찾아가 봤지만 프로듀서는 이미 자취를 감췄고 왕은 망연자실했다. 특히 자살을 시도한 날에는 호텔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경비에게 제지당한 후 경찰에 인도돼자 준비해왔던 독약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물론 경찰과 함께 있던 상태라 곧바로 응급처치를 해 생명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건으로 대만의 언론들은 도덕적 해이에 빠진 드라마 제작사들을 질타하며 해당 프로듀서를 찾기에 여념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전 미스 대만의 자살사건과 모델 사칭 성매매 사건의 후폭풍이 가시지 않은 상태라 더욱 충격에 휩싸였다”고 각종 매체들은 전했다. 스포츠서울닷컴 제공@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꼭 햇볕을 다시 찾아야죠

    꼭 햇볕을 다시 찾아야죠

    월드컵의 열풍이 막 지나간 3년 전, 고교 동창에게 전화가 왔다. 학창 시절 둘이 학교에서 사고란 사고는 모두 도맡아 치고 다녔다고 할 만큼 절친한 사이였기에 가슴이 뛰었다. 바로 그날 약속을 잡아 우리는 13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간 것처럼 당시 별명을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그동안 서로 살아온 얘기도 나누고 또 학창시절 추억도 되살렸는데 자리를 파할 무렵 친구 얼굴이 매우 굳어졌다. 말 못 할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친구한테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우거지상이냐고 했더니, 요즘 회사가 너무 안 돌아가서 죽겠다고 끙끙거렸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계속 안주도 없이 소주만 들이키는 녀석이 너무도 쓸쓸해 보여 혹시 내가 도울 방법이 없냐고 물었다. 친구는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내 손을 꽉 잡더니, 안 그래도 꼭 부탁할 일이 있었다며 보증을 서달라고 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보증은 서주기 힘든 현실이지만 술이 머리끝까지 올라 있던 터라 남자는 의리라며 사내자식이 뭔 그깟 일로 눈물까지 흘리냐고 큰소리를 쳤다. 뒤돌아서서 후회했지만 만약 내가 그렇게 어려운데 녀석이 모른 체하면 얼마나 섭섭하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총각도 아니고 이미 가정을 꾸린 몸인데 이런 일을 혼자 결정하기는 곤란했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보증 얘기를 꺼내자 아내는 펄쩍 뛰었다. 자신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돈을 빌려주는 게 낫지 보증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만약 자기 몰래 보증을 섰다가는 당장 이혼할 줄 알라고 말하는 아내를 보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고 차일피일 만남을 미루자 친구가 달려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마음이 무너졌고, 바로 그날 우리 집을 담보로 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친구는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곧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녀석과의 마지막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와의 우정을 제일 소중하게 여겼던 녀석이라 나에게 어떤 불이익도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친구는 은행에서 4억을 받자마자 이미 정리된 회사를 내팽개치고 자기 가족까지 나 몰라라 하고 내연의 여자와 외국으로 사라졌다. 친구와 갑자기 연락이 닿지 않아 불안했지만 회의 때문에 전화를 못 받는 거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이자 납부가 나에게 떠넘겨지고 계속 소식을 알 수 없어 불안했다. 그래서 회사로 찾아갔더니 이미 오래 전에 문을 닫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곧장 친구네 집으로 갔지만 가족들 모두 친정으로 떠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연이어 내 가슴을 찔렀다. 나는 동태처럼 바짝 얼어붙은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힐끗힐끗 쳐다보고 개가 짖어도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다. 남의 집 대문을 막지 말라는 주인의 손에 이끌려 그 자리를 벗어났지만 전신주에 등을 기댄 채 밤을 꼬박 샜다. 아내에게 쉼 없이 전화가 걸려왔지만 차마 아내의 목소리를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숨을 쉬면 쉴수록 목이 더 막혀오는 게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동료들이 몇 번씩 불러도 듣지 못했고 계속 죽고 싶은 마음만 들어 엉뚱한 층에 올라갔다 내려오길 반복했다. 퇴근을 했는데 아내가 왜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안 들어왔냐고 걱정을 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아내는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물었지만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은행 직원의 전화로 아내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한마디 말도 없이 불 꺼진 방을 홀로 멍하게 지켰다.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유산과 은행 빚으로 겨우 마련한 우리 집을 불과 1년 만에 다시 뺏겨야 한다는 사실에 아내는 넋을 놓고 울기만 했다. 당장 사라지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는 그녀에게 나는 큰 죄인이었다. 다른 건 우리 손으로 다시 하면 된다지만 돌아가신 아버님의 마지막 사랑을 어찌할 거냐고 항변하는데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우리 형편에 4억은 하늘보다 높은 산이라 결국 정든 집에서 내쫓겼다. 하지만 우리의 불행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경매 하루 전 아내가 아무 말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동네 인근을 샅샅이 뒤져도 보이질 않았다. 두 시간쯤 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경찰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달려갔더니 정말 아내가 있었다. 다음 날 저녁에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아내는 이미 정신적으로 폐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건 절대 눈 뜨고 볼 수 없다며 그냥 놔두지 왜 다시 살렸냐고, 아내는 링거병을 깨고 그 파편으로 팔뚝을 내리그으며 2차 자살을 시도했다. 결국 아내는 사지가 모두 묶인 채 강제 입원이 됐고 퇴원 후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몸은 완치되었지만 정신은 더욱 추락했다. 우울증에 걸린 아내를 아이한테 맡기고 출근을 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나마저 집에 있으면 우리 생활이 완전히 끝장날 것 같아 회사에 나갔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울면서 전화를 거는 딸의 다급한 목소리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아내의 입원비와 남은 빚을 정리하기 위해 사표를 썼다. 꽤 많아 보이던 퇴직금을 모두 쏟아부었는데도 빚은 남아 있었고 생활비와 아내 병원비 때문에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글렀고 또 아내와 아이도 보살펴야 했기 때문에 시간대별로 나눠서 일을 했다. 새벽엔 도시락 배달차를 운전하며 배달 일을 했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뒤엔 전기배선 공장에 나가 건설현장을 따라다니며 일했다. 두 가지 일을 해도 아내의 입원비와 생활비 대기가 벅찼다. 그래서 형의 도움으로 얻은 중고 1톤 트럭을 개조해 붕어빵과 떡볶이 장사에 나섰다. 장사를 마치고 나면 새벽 2시, 세 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곧장 도시락 공장으로 달려갔다. 하루에 너덧 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매일 육체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하루쯤 쉬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자포자기하고픈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병원에 있는 아내와 엄마의 도움 없이 혼자 모든 걸 해내는 딸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죽어라 고생했는데도 이자와 병원비를 내고 나면 손에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유치원에서 하는 연극에 출연하는 딸의 모습을 보러 가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딸에겐 멀어서 못 갔다고 변명했지만 마음만 먹었다면 갈 수 있었는데 일당 5만 원 때문에 포기했다. 세상 모든 게 암울했고, 또 마음속으로 수천 번도 더 넘게 자살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눈물 흘릴 시간도 내겐 사치였다. 그러나 항상 어둠만 들진 않았다. 아무리 긴 터널도 때가 되면 밝은 태양을 만나듯 우리에게도 기쁜 일이 하나 있었다. 1년이 지나도록 차도를 보이지 않던 아내가 작년 2월 초에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제 발로 병원 문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온 아내를 본 순간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비로소 우리 집은 사람 사는 모습을 띠었다. 지금도 아내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지만 그래도 한자리에 우리 가족이 다시 모였다는 것이 행복하다. 강력한 태풍이 우리 집을 휩쓸고 지나간 지 벌써 3년, 친구는 여전히 소식이 없고 가족들도 친구를 포기한 지 오래이다. 가끔씩 친구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나한테 가져간 돈을 돌려주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개꿈에 불과하다. 아직도 아내는 완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예전 모습을 되찾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사회생활도 다시 시작했다. 힘을 모으면 우리 집에 머문 먹구름이 빨리 사라지지 않겠냐며 월 70만 원을 받으며 대형 할인점의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아내…‘…. 지난 일은 이제 가슴에 묻고 우리의 행복을 되찾을 일만 생각하자는 아내가 고마워 눈물을 펑펑 흘렸다. 아직도 우리의 불행은 그치지 않았지만 이제 내리막길은 끝난 것 같다. 다 내려왔으니 이제는 다시 올라갈 일만 남았다. 흩어지지 않고, 깨지지 않고, 한자리에 모인 우리의 행복을 다시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2006) ‘이승욱‘_ 작은 트럭에서 어묵을 팔고 도시락 배달을 하며 사랑스런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로 소중한 모든 것을 잃을 뻔했지만 가족들에게 밝은 웃음을 돌려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를 이겨냈습니다. 그는 “이 세상 최고의 보물은 가족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희망예보 <오늘은 맑음>
  • 인기스타 문희(文姬)가 약(藥)은 왜먹어

    인기스타 문희(文姬)가 약(藥)은 왜먹어

    「톱·스타」 문희가 음독했다는 「쇼킹」한 소문이 지난 주 영화계 주변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끝없이 전파 확대되어 갔다. 놀라운 것은 이 문희 음독설을 그럴싸하게 받아들이는 층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문희 자신은 자기의 뜬소문을 그대로 믿는 층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오히려 충격을 느끼고 있는 표정. 방문 두드려도 안일어나 가족들이 놀란것은 사실 소문의 진원은 7월24일 문희가 그날 출연키로 된 3편의 촬영「스케줄」을 「팡크」낸데서부터 시작됐다. 이 날 그녀는 『샹하이 출신』(변장호(卞長鎬) 감독) 『결혼대작전』(최훈(崔薰) 감독) 『속·꼬마신랑』(이규웅(李圭雄)) 등 세 영화 촬영 계획이 서있었고 이 영화의 제작부 사람들이 아침부터 문희 집에가서 그녀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이 날 아침 문희는 평소 같으면 충분히 일어날 시간인데도 잠자리에서 나오질 않았다. 10시께 이상하다싶어서 심부름하는 소녀 김모양(18)을 2층 문희의 침실에 올려보냈다. 잠귀가 유달리 밝아서 한두번의 「노크」에도 눈을 번쩍 뜨는 문희가 이날은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 이상하게 생각한 김양이 열쇠구멍으로 들여다 봤을때 문희는 죽은듯 누워 있었다. 놀란 가족들이 뛰어올라 잠긴 문을 열고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으켰다. 이성관계다, 가정문제다 그럴싸한 소문 나돌지만 여기서 소문은 일단 문희가 수면제를 먹은 것으로 났다. 그리고 잠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살할 목적으로 먹은 것이란 추측이 그럴싸하게 뒤따랐다. 몇해전 자살한 「마릴린·몬로」를 연상케 하면서 이 한국의 「톱·스타」가 왜 세상을 버리려 했는가에 관한 해석이 구구하게 퍼졌다. 그 해석을 크게 분류하면 첫째가 「이성관계의 고민」이고 그 다음이 「가정문제」 그리고 「영화에 대한 환멸과 의욕상실에서 온 비판」등이다. 결혼적령기의 남녀치고 이성문제에 대한 그나름의 집념이 없을수 없다면 「스타」문희도 예외일 수없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더구나 「한국에서 제일 예쁜 배우」인 그녀에겐 그녀의 표현대로 「엉뚱한 스캔들」이 적지않이 있었다. 「베일」속에 곧잘 감추어졌던 이 「엉뚱한 스캔들」이 이번에 다시 표면화 하지 않았느냐는게 이 첫번째 문제에 관한 추리였다. 그 다음 가정문제. 평소 문희와 가까이 지냈다는 한 사람은 그녀가 곧잘 『속상해 죽겠다』 『중이 되고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가족관계를 보면 어머니 서여사(55)아래 4남1녀의 외딸. 오빠가 셋이고 남동생이 하나다. 표면상 다복한 가정의 귀염동이 외딸이고 사실상 서울 장위(長位)동 그녀의 집 분위기는 그다지 어두운 구석이 안보인다. 문희에게 딸린 식구는 운전사 2명, 「스케줄·맨」 한사람, 심부름하는 소녀 한사람 그리고 식모가 2명. 오빠 2명은 결혼해서 분가했고 나머지 식구가 11명이다. “너무 엉뚱한 소문때문에 진짜 아파도 누울수 없어” 한 사람은 문희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동정의 빛을 띠었다. 촬영장에서 과로로 곧잘 졸도하면서 문희는 평균 20편의 영화를 겹치기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큰 돈을 모으지도 못했다』고 자못 동정적 발언. 염세·비관론은 위 두가지 문젯점과 직결된다. 「데뷔」한지 5년이 지난 그녀는 겹치기 출연이 연기자의 생명을 단축한다는 것을 모를, 그런 무분별한 입장은 아니다. 작품에 대한 정열도 욕심도 「데뷔」때처럼 폭발적일 수는 없다. 정상을 극복했다는 포만감 뒤에 어쩔수 없이 느낄 「매너리즘」과 허탈감을 수습 못한채 지금도 20편의 영화에 강행군한다는건 마음내키는 즐거운 활동이 못된다. 이것은 문희와 같은 또래의 윤정희(尹靜姬)나 남정임(南貞妊)의 경우도 마찬가지. 다만 「유달리 내성적인」 문희에게 이 허탈감이 쉽사리 찾아 들었으리라는 관측이고 그것이 이 가상적인 음독설의 이유로 등장했다. 물론 이런 이유는 문희가 약을 먹었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닌 한 근본적으로 참새떼의 입방아가 되고만다. 그러나 인기연예인이나 명사의 신상문제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벗겨지고 분석된다면 문희에게 던져진 「구설수」는 예상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경고정도의 의미는 있다고 할는지…. 어쨌든 문희는 『수면제를 먹기는 커녕 보지도 못했다』고 펄펄 뛰었다. 『아마 그날 왔던 제작부 사람들이 잘못알고 퍼뜨린 소문같다』면서, 『너무 엉뚱한 소문때문에 아파도 누워있을 수조차 없다』고 안타까와 했다. “촬영 마치고 새벽에 귀가 10시까지 정신없이 잔것” 그녀의 말을 들으면 그날따라 몸이 몹시 아팠다. 전날인 23일에도 몸살 기운이 있어 촬영장에서 짜증을 냈다. 뚝섬에서 『약속은 없었지만』이란 영화촬영중 짜증을 내다가 조문진(趙汶眞)감독과 말다툼까지 했고 새벽 5시께 집에 와서는 『몸도 아프고 짜증도 나서 실컷 울었다. 그리고 아침 10시께까지 정신없이 잤다』는 것. 10시께 문을 두드릴 때는 눈은 떴으나 극도로 피로해서 일어날 기력을 잃었고 「알보민」이란 주사를 맞은 뒤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는 것. 그런데 문양의 한 측근이 대기하고 있던 제작부 사람들에게 『도저히 일어나지 않으니 촬영장에 가서 양해를 구해달라』고 말한 것이 음독설로 확대된 전말이라는 것이다. 그날 이후의 동정을 「체크」해 보면, 문희는 24일 낮 밤 촬영을 모두 쉬고 25일엔 가족들과 청평(淸平)쪽으로 「드라이브」했고, 26일부터는 『5형제』(고영남(高英男) 감독) 『누가 그 여인을 모르시나요』(이상언(李尙彦) 감독) 등의 촬영에 다시 들어갔다. 어째서 그런 소문이 그럴싸하게 퍼지고 있는지 - 이점이 바로 문희와 그의 가족을 가장 불쾌하게 만든 것 같다. 문희의 어머니 서여사는 말했다. 『바쁜 「스케줄」때문에 피로하고 몸도 약하기는 하지만 배우생활을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이다. 집에 와서는 별 불평없이 잘 지내고 있다. 딴생각을 하고 있을 까닭이 없다』 그리고 장본인인 문희도 『제가 뭣때문에 약을 먹었겠어요? 염려해주는 건 고맙지만 엉뚱한 소문때문에 정작 나를 아껴주는 「팬」들에게 오해될까봐 걱정이예요』 호기심과 신비의 「베일」속에 가려져 있는 「스타」의 사생활이 이렇게 엉뚱한 소문을 낳는다는 증거. 그러나 문희와 그 가족들은 이번 뜬소문을 『고마운 교훈으로 잘 소화하겠다』고 그들 나름으로 의미를 붙였다.
  • 마누라도 참다못한 목사님「프리섹스」

    마누라도 참다못한 목사님「프리섹스」

    『「섹스」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마음껏 즐겨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처자를 버려두고 놀아나던「카사노바」목사가 아내의 고발로 쇠고랑을 찼다. 광주(光州)시 모 종합병원의 목사 박형주(朴炯柱·31)씨가 성직자(聖職者)에서 성직자(性職者)로 둔갑한 이야기. 결혼하자 남편 소행알고 호소하고 설교도 했으나 62년 충남 대전시 D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모 신학교 3학년에 편입, 성직자로서의 교육을 마친 다음 광주 제중병원 원목으로 근무하던 박형주(朴炯柱)목사는 65년 8월14일 충남 대전시에 있는 어느 외국인 선교사 집에서 현재의 부인 허(許)모여인(29)과 찬물 한그릇을 떠놓고 문자그대로 재건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기전 넘지 못할 선을 넘어섰기 때문에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식을 올려야만 했던 허여인에게 박목사의 달콤한 속삭임은 모두 진실로만 들렸다. 그러나 두사람의 결합은 식을 올리자마자 먹구름이 일기 시작. 결혼을 하고 난 뒤 허여인은 박목사의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아버린것. 그러나 허여인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이제부터 새출발하면되지 않느냐』고 호소했다. 그러나 박목사의 여자관계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난잡해지기만 했다. 허여인은 만인의 귀감이 돼야 할 목사로서의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충고도 하고 성경에 있는 귀절을 들려주며 성직자의 길을 지키기를 애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와 놀아나는데 맛을 들인 박목사 귀에 아내의 설교가 들어올리 만무. 식모 손대고 홍등가 출입 놀아난 이야기 자랑삼아 법무부 대전소년원 원목으로 2년동안 일하다 67년 11월25일 종합병원의 목사로 직장을 옮기고 나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아내가 친정에 가고 집을 비운새 박목사는 식모 이경순양(당시16·가명)을 자기 방으로 조용히 불러들여 가까이 앉히고는 변태적인 장난을 강요했다. 질겁한 이양은 얼마뒤 그 집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박목사의 추태는 이 사실만이 아니었다. 그는 1주일에 한두번은 홍등가를 드나들어야 직성이 풀릴만큼 정력(?)이 왕성한 사람. 박목사가 의외로 한달 동안 아내에게 접근하지 않기에 수상하게 생각한 허여인은 그 이유를 따졌다. 끔찍한 대답-『성병에 걸렸다』고 고백을 하더라는 것. 허여인은 남편과 같이 약을 먹어가며 속죄의 뜻으로 기도했단다. 그러나 박목사는 구약성서를 아내에게 그릇되게 풀이해 들려주며「섹스」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자기 멋대로의「프리·섹스」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허여인은 남편의 외도를 원망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아내로서의 구실을 다하지 못한것이 아닌가』하고 여러모로 남편시중에 신경을 쓰며 남편이 마음돌릴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박목사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놀아난 이야기를 자세한 부분까지 아내에게 고했다. 이럴 때마다 허여인은 회개하라고 타이르며 함께 손을 모았다. 남편의 마음은 점점 믿을수 없이 변해갔다. 남편의 퇴근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마음이 돌아설 기미는 전혀보이지 않았다. 허여인은 마침내 남편에 대한 희망을 단념했다. 마음을 모질게 먹고 남편의 꼬리를 잡기로 결심했다. 병원교회 목사를 기화로 입원한 아가씨 환자하고 마침 3월22일은 박목사의 생일. 준비 해놓은 보람없이 새벽3시가 되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이 양반이 이젠 자기 생일도 몰라 볼만큼 여자에 미쳤구나』- 새벽4시가 넘어서야 남편이 돌아왔다. 날이 밝기만 기다렸다. 날이 새자 다그치는 아내에게 박목사는 근무하는 병원5병동 17호실에 있었다고 고백. 허여인은 부리나케 17호실로 뛰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예감은 들어 맞았다. 얼굴이 예쁘장한 정복숙(鄭福淑·23·광주시 산수동74)이「베드」에 누워있었다. 알고본즉 정양은 3월 10일 결핵으로 이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있는 중. 정양이 입원한 첫주일에 설교에 나선 박목사는 병원부속교회에서 정양과 눈이 맞은것. 이날부터 박목사는 17호실을 자주 드나들게 됐고 서로 친숙해졌다. 자주 만나면 정들게 마련. 허여인은 4월10일 밤 늦게 돌아온 남편의 목에서「키스·마크」를 발견하고 누구와 놀아났는지 따지자「미스」정이라고 고백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었다는 것. 그런데 그 날 밤 남자의 목소리를 빌어『정양이 음독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한 인간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에서 허여인은 할수없이 남편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6시쯤 돌아온 박목사는 정양이「세코날」을 먹고 중태에 빠졌더라고 아내에게 능청을 부렸다. 그것도 말짱한 연극이었던 것. 정양에 미쳐버린 박목사는 정양과 함께 병원을 나와 광주시 충효동 무등산 기도원으로 밀회장소를 옮겼다. 서로를 위로하며 하루를 마음껏 즐겼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전북 정읍군 내장사로 사랑의 보금자리를 바꿨다. 박목사의 머리에서 가족은 이미 사라졌고 오직 정양뿐. 이때부터 그는 퇴근후 거의 집에 돌아온 적이 없었다. 『우리가 처음 일을 저질렀을때 어느쪽에서 먼저 한것도 아니었고, 둘이 서로 진실했기에 진실을 토했을 뿐이에요. 단 한번 뿐이었읍니다. 그걸로 모든게 이뤄졌고 더욱 진실해졌읍니다』정양의 알쏭달쏭한 첫날밤 고백. 『목사의 직을 내놓고 인간으로 살고 싶습니다. 인간이 되기위해 사랑을 찾은 것입니다. 서로 울고 몸부림치며 사랑을 했읍니다』 이것은 박목사의 인간적(?)인 고백. 그들은 모든것을 등지고 무등산장 아래 깊숙한 원효사에 도피하기로 결심. 지난 4월29일 밤 10시쯤 입산하여 5월4일까지 마음껏 단꿈을 꿔오다 허여인의 끈덕진 추격에 덜미를 잡혀 결국 쇠고랑을 찬것. [선데이서울 70년 6월 14일호 제3권 24호 통권 제 89호]
  • 문주란(文珠蘭)양 가요계(歌謠界)를 떠나

    문주란(文珠蘭)양 가요계(歌謠界)를 떠나

    『한번 결단을 내리니까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 가수생활을 청산키로 결심한 문주란(文珠蘭·20)양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천재적 소녀가수」칭호를 들으며 가요계에 귀여움을 독차지 했던 문주란이 마침내 은퇴를 결심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4월1일 아침 문주란은 작곡가 백영호(白映湖)씨를 찾아갔다. 5년전 그를 「데뷔」시켜 「톱·싱어」의 위치에 올려놓은 은사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한 것. 그러나 이 장면은 5년전 이들 「콤비」가 『동숙의 노래』의 「히트」 때 짓던 활기찬 웃음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문주란의 수척하고 창백한 얼굴엔 활기가 없었다. 백씨는 문자란의 「가수은퇴」를 되도록 번의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문주란은 자신의 은퇴결심을 확인이라도 하려는듯 『죽어도 가수는 다시 않겠다』고 다짐했다. 『너무 오랫동안 방황했어요. 주변에서 말리면 자꾸 괴롭기만 할 뿐예요』 은퇴할 생각은 지난해 2월부터. 즉 그가 음독소동을 벌였을 때부터 이미 갖고 있었단다. 그 까닭은? 『골치가 아파서 그래요. 몹시 피로해요. 내가 생각했던 가요계와는 너무 달라요. 어린 탓인지는 몰라도 내가 감당해 나기기에는 너무 벅찬 생활이에요』 나이답지 않게 피로하다, 환멸을 느꼈다는 발언이 자꾸 튀어나왔다.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인격적인 모독을 감당해 가면서까지 발버둥 치고 싶진 않다』고 강조했다. - 인격적은 모독이란? 작곡가 백영호씨가 곁에서 말을 받았다. 『인기가 전만 못하고 대수롭지 않은 신인들이 날뛰고 있으니까 그게 아니꼽다는 생각도 들 거』라고. 그러나 문주란은 『방송국, 「쇼」단, 어디든지 가수를 함부로 욕하고 깔보는 습성이 있다. 가수라면 누구나 당장 집어치우고 싶은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6년전 15세로 「데뷔」한 문주란은 「한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저음」의 소녀가수로 각광을 받았다. 그의 등장은 그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10대(代)가수의 「붐」을 불러 왔다. 『동숙의 노래』 『타인(他人)들』 『낙조(落照)』 『초우(草雨)』 그리고 최근의 『별빛 속의 연가(戀歌)』에 이르기까지 취입곡이 근 5백곡. 독집만도 3개 갖고 있다. 「데뷔」가 전례없이 「센세이셔널」했던 만큼이나 그의 인기 저하도 허망했다. 문주란의 명성은 처음 2년간의 급등과 그뒤 3년간의 「슬럼프」로 계산될 수 있다. 정상의 인기에 부풀었던 소녀의 마음이 그 뒤의 「슬럼프」에 여지없이 구겨지고만 셈이다. 이 「슬럼프」를 그는 감당해 내지 못한 거라는 해석도 나올 법하다. 『제일 즐거웠던 게 철 없이 기뻐하던 「데뷔」시절 같아요. 남이 알아준다는 게 무조건 즐겁기만 했어요』 『제일 슬픈게 연예계 밑바닥을 알고 나서예요. 죽어도 다시 가수는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으니까요』 - 앞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서울을 떠나 좁은 사회에서 혼자만의 생활을 하고 싶어요』- 차도 팔고 짐도 부산집(양친이 살고 있는)에 다 부쳤단다. 은퇴 이유를 「슬럼프」에 두고 있는 백영호씨는 문주란이 마지막으로 정성을 쏟은 노래 『임 찾아 왔소』가 지금 반응이 좋으니까 이 노래의 「히트」로 재기(再起)의 기회를 잡는게 어떠냐고 계속 만류했다. 이것은 백씨뿐만 아니라 문주란의 재능을 아끼는 많은 연예인의 권고다. 그러나 문주란은 『이 정도라도 알아주실 때 깨끗이 떠나겠어요』- .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선데이서울 70년 4월 12일호 제3권 15호 통권 제 80호]
  • 임신(姙娠)한 여고(女高)3년생 그로부터 13년

    임신(姙娠)한 여고(女高)3년생 그로부터 13년

    자신이 쓴 수기(手記)가 영화(映畵)로 기획되자 그 영화의 주연까지 맡게 되어 자신의 생활을 「스크린」위에서 재연하게 된 이색여심(女心)- . 『이 여인의 슬픔이』(전조명(田朝明)감독)의 원작자이자 주연배우로 등장하는 김소연씨(金昭延·32·본명 김지연(金志延))『영화보다 더 슬프고 쓰라렸던 13년간의 결혼생활』을 영화 속에서 되뇌어 보려는- 이 한맺힌 여인의 사연을 들어보면- . 순결뺏은 선생님과 결혼…두아이 낳고 2년후 이혼 「이 여인의 슬픔」은 18세때, 춘천(春川)의 모 여고 3학년생이던 김여인이 그녀보다 13세 손위인 수학선생 한테 처녀를 빼앗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 스승과 결혼해서 13년. 金여인은 세상 여자가 그렇듯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 다만 다른 여인들처럼 평탄하게 살아오지 못한 데서 「드라머」가 형성된다. 13년간의 결혼생활은 2년간의 동거, 5년간의 별거 그리고 합의이혼 뒤 3년간의 독신생활, 다시 돌아온 남편과의 재결합, 그뒤 오늘까지의 아내의 위치가 기둥 줄거리로 구성된다. 『한 남편에 대한 집념이 여자를 얼마나 슬프게 했는가를 보여주는 거죠』- 김여인은 자신의 과거가 「픽션」이상으로 「드라머틱」하다고 한숨지었다. 3살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게 15살때. 그럴싸해서인지 김여인에게는 일본 여인에게서 풍기는 특이한 분위기가 있다. 지금도 30대여인으로는 볼 수 없게, 더구나 파란곡절을 겪은 여인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게 애잔한 얼굴. 옷차림 역시 「스타」 지망생답게 화사하다. 여고 3년때의 그녀는 학교 안에서 손꼽히는 미녀였단다. 수학선생이 제자를 범한 이유인즉 『졸업하면 남에게 빼앗길것 같아서』. 예쁜게 탈인 소녀는 멋도 모르고 그 수학선생에게 몸을 바쳤단다. 그리고 임신. 졸업하기가 바쁘게 그 스승한테 시집을 갔다. 스승과 제자의 결합이 용납되질 않았다. 직장을 내놓은 남편은 고생을 모르고 자란 아내를 찢어진 가난 속에 빠뜨렸다. 그리고 돈을 벌자 2호, 3호를 얻어 들였다. 영화 속에서 김소연의 남편 역으로 등장하는 게 신영균(申榮均). 신영균은 지사(志士)적인 호탕함은 있으나 아내를 살뜰히 보살필 수 있는 자상한 남편은 아니었다. 하고싶은 일은 무책임할이만큼 늘어놓는 성미였다. 직장을 내던지고 제자와 사랑의 줄행랑을 놓을만큼 대담한 사랑이었지만 그것도 순간뿐. 사업을 벌여 돈이 생기자 2호, 3호를 얻어 들이고 어린 아내를 내동댕이쳤다. 2호는 「호스테스」, 3호는 여비서. 그 밖에 수많은 여자에게 아이를 잉태시켰다. 결혼 2년만에 두 아이를 낳은 김여인은 갓 스물살 때부터 자신의 행복보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 의무적으로 살아야하는 여자가 됐다. 남편이 살림을 돌봐주지 않자 자신의 손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몸을 파는 짓 이외는 안해본 게 없다』. 『더욱 기막힌 것은』남편에게 이혼당할 때. 그녀는 2백만원의 빚을 안고 헤어졌다. 유혹도 많았으나 9년만에 다시 만나 위자료 대신 남편의 빚더미를 짊어진 것이다. 집을 담보로 2백만원의 부채를 청산했을 때 김여인에게는 새로운 유혹이 뻗쳐왔다. 담보를 맡은 변호사(지금도 명사급 인사)가 동거생활을 요구해 왔다. 의젓하게 아내를 가진 신사였다. 자신의 불행은 고사하고 『또 한사람의 불행한 여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김여인은 그 변호사의 「프로포즈」를 뿌리쳤다. 또하나의 유혹- . 그것은 김여인이 음독자살을 꾀했을 때 죽음에서 구해준 한 착실한 청년(영화에서는 신성일(申星一))의 구혼이었다. 총각이었던 그 청년은 김여인의 과거를 고백받자 한층 더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다. 『사랑이 이런것인가』하고 처음으로 깨우쳐준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구혼에도 고개를 저었다. 고통을 참고 외로움을 견디는 여성의 인고(忍苦). 그 때는 이미 법적으로 남이 되었지만 그녀는 언젠가 있을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남녀가 부부로 맺어진다는 것은 애정보다는 인연의 결과입니다. 그 인연이 끊기지 않았던가 봐요. 여자로서의 자존심 같은건 문제가 아녜요』 2년 전에 남편은 방황을 끝내고 귀가했다. 별거부터 따지면 거의 9년만의 재결합이다. 지금은 행복하냐는 질문에 김여인은 『과거보다는- 』하고 소리를 죽였다. 수기를 쓰게 된 것은 『한 맺힌 과거를 스스로 정리해보려고』69년 봄부터 착수했다. 대학「노트」에 쓴 것을 2백자 원고지에 옮기니까 2천장 가량. 『지금도 더 쓰자면 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 누구한테도 쏟아놓을 수 없던 괴로움을 독백하듯 수기로 엮었다는 것. 쓰고 나면 조금쯤은 속이 후련해졌단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쏟아 놓을 수 없던 이 여인의 슬픔은 엉뚱하게도 영화가 되어 만인 앞에 공개될 판이다. 노트에 적은 여자의 슬픔 우연한 인연으로 영화화 김여인의 친척뻘되는 사람이 우연히 이 수기를 읽고 소문을 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기획자인 박건태랑씨(朴健太郞·한때 전조명 감독의 조감독생활도 했다)는 김여인의 수기를 입수하자 이의 영화화를 서두르게 됐고 전조명 감독도 바짝 열을 올리게 됐다는 것. 전감독의 말은 『자기를 버린 남자에게 끝까지 쏟는 무서운 여자의 집념』을 「픽션」아닌 실화로서 「리얼」하게 그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화는 허락했어도 출연까지는 『상상도 못했다』고 김여인은 말했다. 김여인을 직접 등장시키자는 「아이디어」는 박씨와 전감독이 김여인을 만난 순간에 떠 오른 것으로 『배우 못지 않은 「마스크」에 맘이 쏠렸다』는 것. 망설인 끝에 남편의 허락을 받고 출연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성공할 경우 어떻게 심경이 변할지는 몰라도 『출연은 이 작품 하나뿐이고 배우될 생각은 없다』는 게 金여인의 말. 「스크린」에서 자기의 과거를 실연(實演)할 김여인은 이를테면 수기로서 못다한 애증(愛憎)의 세계를 영화에서 털어 놓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13년간 견딘 슬픈 여인의 사연이 어떻게 작품으로 승화될 것인가가 남아 있는 문제다. [선데이서울 70년 4월 5일호 제3권 14호 통권 제 79호]
  • 모텔 투숙 남녀3명 음독자살

    1일 오후 8시10분쯤 부산 동구 초량동 S모텔 3층 객실에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30대 남자 투숙객 1명과 20대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투숙객 2명 등 3명이 숨져 있는 것을 모텔 종업원 김모(37)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숨진 3명은 특별한 외상은 없었으며 남자는 침대에 엎드린 채로, 여자 2명은 방바닥에 쓰러져 숨진 채로 발견됐다. 경찰은 방안에 약을 싼 것으로 보이는 봉지와 맥주병이 널려 있는 점으로 미뤄 이들이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이들의 신원확인과 함께 정확한 사건경위 등을 조사 중이다.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죽여도 좋다’ 각서를 쓸때

    ‘죽여도 좋다’ 각서를 쓸때

    연약한 여자를 고위층과 친분이 두텁다고 속여 정조를 유린한 다음, 못질을 한 방에 가두고 폭행을 일삼는 등 모진 학대를 해온 파렴치한이 경찰에 붙들렸다. 서울 성북경찰서는 1월 16일 자칭 철도청 영등포 공작창 화물 하역소장이라는 민병진(閔丙振)(35)을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입건. 구속영장을 청구함으로써 여심(女心)을 울린 이 사기한의 행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민(閔)은 지난해 9월 10일, 전직 국회의원 金모 여사의 중매로 알게된 신정숙(申貞淑)양(24·가명·서울영등포구 상도동)을 총각이라고 속이고 농락한 뒤 강제로 자기 집 방에 가두어 놓고 모진 학대를 하며 신(申)양의 어머니 정(鄭)모여인으로부터는 돈까지 갈취했다는 것. 주로 처녀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해온 민(閔)이 행여나 다른 여자에게 또이런 사기행각을 할까 두려워 경찰에 고발한 것이라고 신(申)양은 한숨짓듯 말한다. 민(閔)의 사기극에 걸려들어 감금생활을 하면서 학대를 받아오던 신양의 입을 통해 그의 행각을 들어보면-. 신(申)양이 민(閔)을 알게된 것은 지난해 9월. 이미 작고한 신(申)양의 아버지가 어느 고을 군수로 재직때 뒤를 도와주던 전직 국회의원 김모여사의 중매로 맞선을 본 것이 신(申)양에게 인간 지옥 속을 헤매게 한 동기였다. 지난 해 9월, 신(申)양과 민(閔)이 맞선을 보는 자리에는 신(申)양의 어머니 정(鄭)여인과 중매를 선 김여사가 자리를 같이 했다. 김여사의 신랑감에 대한 칭찬은 정(鄭)여인으로 하여금 딸을 맡겨도 안심이 될 정도로 홀딱 반하기에 충분했다. 소개가 끝나자 두 여인은 이 남녀들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기위해 자리를 떠났다. 민(閔)은 신(申)양에게 자신이총각이라면서 35세가 되도록 장가를 못간 것은 청년운동을 하다 때를 놓친 때문이라면서 자기 소개를 그럴듯 하게 청산유수 처럼 늘어놨다. 『그 사람 첫 인상은 별로 탐탁치 않았지만 그만 그의 감언이설에 제가 속은 것이지요』 신(申)양은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말을 잇지 못한다. 민(閔)은 신(申)양에게 『앞날의 설계를 세울 우리 집을 가보자』고 유인, 민을 따라간 신(申)양은 그 날로 그의 집에서 정조를 빼앗겼다. 그가 신(申)양에게 들려준 학력과 이력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학생운동에 참여해 오다가 도덕재무장 한국본부 부총장을 거쳐 대한 국토건설단 중앙단 부단장, 전국 청년단체연합회 기획위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국민도의선양회 회장에 있노라고 제법 굵직굵직한 직함들을 장광설로 늘어놓았다는것. 신(申)양은 민(閔)의 거짓말이 뻔히 들여다 보일 때도 남자의 허세이거니 생각하고 탓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민(閔)의 가면은 신(申)양앞에 하나씩 그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민(閔)은 자신의 가면을 벗기지 않으려고, 차차 의심을 품기 시작한 신(申)양의 어머니를 찾아가 신(申)양과 약혼식을 올려줄 것을 강요하면서 만약에 이를 거절한다면 폭탄을 들고와서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위협을 했다. 민(閔)의 강압에 못이긴 정여인은 지난해 10월 25일 8만원을 들여 약혼식을 올려주었다. 민(閔)은 전처의 소생이 3명이나 있는 홀아비. 신(申)양은 약혼식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았다. 그래도 신(申)양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나 민(閔)은 신(申)양의 태도가 점점 자기 곁을 빠져 도망칠 것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지난해 11월 2일부터 밖에 나갈 때는 신(申)양을 방에 가두고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 민(閔)은 신(申)양을 방에 가두고 방문을 쇠창살로 굳게 못질하고 큰 자물쇠를 채워놓고는 식사는 식모를 통해 부엌으로 통하는 샛문으로 들여보내게 하고 대소변까지 방안에서 보도록 했다. 『작년 가을이었읍니다. 일요화가회에서 미술전을 열었을때의 일입니다』 그때 민(閔)은 신(申)양이 보는 앞에서 방문객 「사인」난에 「金鍾X형」이라고 쓰고는 『이래도 날 의심하느냐』고 할 정도로 지능적이었단다. 신(申)양은 68연도 M미술대학 서양화과를 나온 아가씨. 『그래도 저는 모든 것을 믿으려 했읍니다.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의 마음을 돌리려 했읍니다. 아마 학대만 하지 않았어도 그를 고발치는 않았을 것』이라고 신(申)양은 한숨짓는다. 그의 감시·학대벽은 점점 극에 달해 하다못해 극장에서 화장실을 가면 여자화장실까지 쫓아와 도망치려고 하느냐면서 마구 엉덩이를 구둣발로 차기도. 이런 날은 집에 들어와 단도를 빼어들고 『배반하면 죽여버려도 좋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라고 강요하기가 일쑤였다. 만일 신(申)양이 각서를 쓰지 않으면 뜨거운 주전자물을 머리에 붓는 등 그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했다. 그 때 그가 신(申)양의 머리에 부운 물에 신(申)양은 화상을 입고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다. 이렇게 난폭한 민(閔)은 항상 주머니에 명함대신에 요인들과 찍은 사진 3장을 넣고 다녔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할때는 사진을 내보이며 요인들의 팔과 같은 일꾼이라고 속여 청와대를 무상으로 출입한다고 큰 소리쳐 왔다는 것. 딸의 이런 생활을 까마득히 모르던 신(申)양의 어머니 정(鄭)여인은 신(申)양이 지난해 12월 29일 수면제를 먹고 음독자살을 기도했을 때야 뒤늦게 알고 경찰에 고발했다. 지금은 K병원에 입원해 있는 신(申)양은 『더 이상 상고 싶지 않았다』면서 그 때의 감금생활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난다고 부르르 떨었다. 경찰이 민(閔)의 집을 수색한 결과 그의 「캐비니트」 속에서 신(申)양 이외에도 다른 여자로부터 『배반하면 죽여도 좋다』는 내용의 각서를 발견, 경찰은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다. 민(閔)은 경찰신문에 1건의 전과도 없다고 딱 잡아떼어 그의 사기술을 활용하려다 지문조회결과 68년 6월28일자 서울 서대문서에서 폭행혐의로 구속된 것을 비롯, 전과 5범으로 판명됐다. 민은 경찰에 검거되던 날도 전화로 당직형사계장을 찾아 『나같이 높은 사람이 어떻게 경찰에 출두할 수 있겠느냐』면서 담당형사가 직접 찾아와 조서를 받도록 하라고 호통을 칠 정도로 허풍을 떨었다. 장석영(張錫英) 기자 [선데이서울 70년 1월25일호 제3권 4호 통권 제 69호]
  • [왕산家의 독립운동사] (2) 서울 진공작전

    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왕산도 1905년 1월 일제 헌병대에 며칠 동안 구금됐다.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일제는 같은 해 3월부터 4개월 동안 왕산을 다시 구금했다. 구금에서 풀려난 뒤 은거생활을 하던 왕산은 이해 9월 지금의 휴전선 일대인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지방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킨다. 성산 허겸도 아우의 부대에 합류했다. 왕산은 경기도 이인영 의병부대와 강원도 서부 이은찬 부대 등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전력을 극대화시켰다. 서로 연락을 이어가던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하순쯤 왕산과 이인영 부대를 주축으로 의병 1만명을 모아 13도창의군을 조직,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했다. ●日 치열한 방해공작에 뜻 못이뤄 작전에 앞서 왕산은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 의병 항일전의 합법성을 공포했다. 그리고 1908년 1월27일 왕산은 선발대 300명을 거느리고 동대문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다. 이 때 이인영이 친상을 당해 귀향을 했다.5000명 규모의 후발 본대도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서울진공계획이 노출돼 언론이 이미 두달 반 전부터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방해공작이 치열했던 것이다. 결국 수적·전략적으로 열세했던 왕산의 부대는 패했다. 실패 뒤 왕산은 연천에 머물며 전력을 다시 모으고 있었지만, 항간에는 왕산이 음독 자살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2월13일자에서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의병장 허위씨는 파주 등지에서 약을 먹고 자처하였다더니 항설을 들은 즉 죽기는 고사하고 도당 4000∼5000명을 거느리고 가평 등지에 둔취하여 병졸을 연습한다더라.”라고 근황을 전했다. 기사처럼 사태가 수습된 뒤 왕산은 다시 임진강 근처에서 의병을 일으켜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괴롭혔다. 이들은 일본군 진지를 기습해 통신을 마비시키고, 관공서를 습격하고 부일매국노를 처단했다. ●외교권 회복 등 30개조항 日에 요구도 1908년 2월부터 5월까지 왕산 부대는 왜군과 15차례의 교전을 벌였다. 왕산은 이 기간에 부하 박노천, 이기학을 서울로 보내 통감부에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이권침탈 중지 등을 골자로 하는 30여개의 요구조항을 내기도 했다. ■ 참고 서적 왕산 허위의 나라사랑과 의병전쟁(왕산허위 기념사업회 편),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허은 여사 구술집)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새 ‘화동사진’ 발견 … 김현희 北공작원 확인

    KAL 858기 폭파사건의 핵심인 김현희(44)씨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국정원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의 줄기찬 면담 요청에 김씨는 응하지 않고 있다. 진실위는 국정원이 지난해 10월 말 김씨의 주거지를 방문해 최근까지 10여차례나 면담을 요청했지만 남편 등으로부터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따라 김씨가 기내에 폭탄을 어떻게 반입했는지, 실제 음독했는지, 북한 출신인지 등의 의혹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궁금증만 자아내고 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은 김씨의 음독자살 시도 등 7가지의 의혹을 제기해 왔다.●미완의 KAL 858기 폭파사건 조사 김씨는 1997년 12월28일 자신의 신변경호를 맡았던 전직 안기부 직원 정모씨와 결혼하면서 공개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김씨는 서울과 시댁이 있는 경북 일원을 오가며 생활하면서 2000년 아들,2002년 딸을 각각 출산했다. 하지만 2003년 KAL 858기 조작설이 제기되면서 사회적 관심을 모으자 세간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김씨가 국정원과 진실위의 면담요청을 거부한 이유가 관심을 모은다. 김씨는 “국정원이 KAL 858기 폭파사건을 재조사하도록 결정한 것에 강한 배신감”을 이유로 들었다. 진실위 관계자는 김씨의 ‘배신감’에 대해 “국정원이 과거 안기부와 달라졌고, 재조사를 하려 한다는 점에서 복합적으로 배신감이란 표현을 썼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배신감은 약속 위반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어서 ‘배신감’이란 표현을 사용한 배경이 주목된다. 진실위는 “김씨가 안기부의 지원으로 사회 유명인사로 활동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사정에 비춰 배신감 발언은 수긍하기 어렵다.”면서 면담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명분이 없다고 비난했다. 강제조사권마저 거론했으나 실제로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김씨가 입을 다무는 데다 미얀마 인근 해안에서 KAL 858기의 동체로 추정되는 인공조형물 조사가 남아 있어 이날 조사결과 발표는 미완으로 끝났다.●새로 드러난 사실은 KAL기 폭파사건의 주범인 김현희씨가 북한의 공작원임을 입증하는 새로운 ‘화동’(花童) 사진이 발굴됐다.1972년 11월2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당시 남측 장기영 대표에게 꽃을 전달한 북측 화동소녀 가운데 한 명이 김씨라는 사실이 추가 발굴사진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진실위는 남북조절위 개최 당시 일본 공산당 기관지인 ‘적기’(赤旗)의 평양 특파원이었던 하기와라 료가 보관하던 총 36장의 사진 가운데 그동안 미공개됐던 사진에서 화동 소녀 김현희를 발견했다. 안기부가 1988년 1월5일 KAL858기 폭파사건 수사발표 당시 제시했던 사진과 하기와라 료가 촬영한 사진 중 김현희 본인이 ‘자신이다.’고 진술했다는 사진 속의 소녀는 김씨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가 1990년 4월12일 특별사면 이후 사회정착에 대비해 1995년 4월부터 외고종조부 김모(1990년 당시 73세)씨의 집에 입주해 살았다는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 외고종조부는 김씨의 입주로 늘 주위를 살펴야 하는 정신적 긴장 등으로 생활에 제약을 받자 고령 및 노환을 이유로 김씨에게 결혼 또는 분가를 요청했다고 한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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