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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아아, 안중근/고영회 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변리사

    [열린세상] 아아, 안중근/고영회 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변리사

    100년 전 8월이었군요.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고, 1907년에는 군대마저 해산당해 주권을 잃은 상태였고, 1910년 8월29일에는 남아 있던 겉모습마저 없어졌습니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뒤 사람들의 행동이 몇 갈래 나뉩니다. 당시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관리들 가운데 의분을 느낀 사람은 자결도 하며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권력자들 중 많은 사람이 나라를 팔아서라도 권력과 부를 누리려 했습니다. 그들은 일제에 더 잘보이기 위해, 나라를 더 빨리 팔아먹도록 일제에 충성경쟁을 했더군요. 대한제국 말기의 영웅 안중근 의사를 떠올립니다. 교과서에서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뤼순감옥에서 사형됐다는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얼빈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에서 ‘안중근 연구’란 책을 사 읽어 봤습니다. 위인의 행동과 뜻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낯이 뜨겁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법률지식이 높았다고 합니다. 국제관계법과 일본형법을 잘 알아, 일본 형법에는 국사정치범은 사형에 처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쏴 죽임으로써 일제가 부당하게 조선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재판절차를 통해 온 세계에 알리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선진국인 것처럼 자랑하고 있었는데 사건을 엉터리로 처리한다면 세계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니 어느 정도 절차는 지킬 것이라는 것을 활용한 것이지요. 안중근 의사를 체포한 러시아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그를 일본에 넘깁니다. 안중근 의사는 독립전쟁을 수행한 것이니 국제사법에 따라 처리하라고 요구합니다. 한국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맞지만, 일본은 을사늑약을 빌미로 일본법에 따라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재판합니다. 검사·변호인·판사 거의 일본인인 가운데 재판이 진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일제의 범죄를 낱낱이 법정에서 진술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목적(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므로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니 도망갈 이유가 없다. 그를 쏴 죽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을 안다. 하나 둘 행동이 쌓이면 반드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라고 큰 뜻을 밝혔습니다. 이 재판은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법원장과 협상하여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책을 쓸 시간을 얻습니다.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씁니다. 동양평화론은 5장을 계획했지만 2장까지 쓰고, 시간을 더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합니다. 그리고 의연하게 사형장으로 들어갑니다. 김좌진 장군의 독립운동역사를 보면 독립운동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재산과 가족까지 희생해야 합니다. 반면에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은 나라 팔고 받은 돈으로 잘살고, 자기 민족을 괴롭히는 권력까지 가졌습니다. 그 결과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지금까지 힘들게 살고 있고,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은 그 후손까지 잘살고 있다는 기사를 봅니다. 안중근 의사 아들 안중생은, 아버지의 일을 이토 히로부미 아들에게 사죄했다 하여 ‘호랑이 같은 아버지에 개 같은 아들’이라고 비난받았다고 합니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보통 사람이야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안중생은 아버지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거사 때문에 핍박을 받고 살았을 것입니다.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사죄한 것인데, 안중생을 그렇게까지 비난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비난 정도는 자기의 행위에 대해 걸맞아야 할 것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 친일행각에 나선 유명인사들, 그들보다 더 안중생을 비난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큰 별이어서 상대적으로 비교되어 큰 비난이 돌아간다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선열들이 ‘내가 왜 독립운동을 했을까?’하고 후회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이 ‘그래 그때 잘했어!’하며 웃음 짓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 “日 조선어 말살, 강제병합 전부터 계획한 것”

    “日 조선어 말살, 강제병합 전부터 계획한 것”

    “통감시대 교과서를 보면 그 당시 일제는 사실상 조선을 거의 통제하고 있었고 모든 어문정책과 교육정책이 강제병합을 목표로 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당시부터 이미 조선어 말살 정책을 차근차근 준비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병합 이전 교과서 56종 연구 강제병합 이전 56종의 교과서를 모으는 등 일제 강점기의 어문(語文) 교육과 교과서를 연구해온 허재영 단국대 교양학부 교수는 16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는 그나마 한국어(조선어) 수업이 일본어 수업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고 1930년대 말부터는 한국어 수업이 사라지게 됐다.”면서 ‘조선어 말살 정책’이 사실상 한·일강제병합 이전부터 준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통감시대(統監時代)는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에 따라 설치된 통감부 감독을 받던 1906년부터 1910년 8월29일 강제병합 직전까지를 말한다. 허 교수는 “기록에 보면 일제가 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부터 조선어를 제외한 모든 수업에서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하게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병합 직후에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궁금했다.”면서 연구를 시작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강점기 일어 사용인구 20% 이상 그 결과 학교 교육에서는 일본어를 필수 교과로 삼고 조선어(한국어)보다 더 많이 가르치도록 했고 일부 교과서는 아예 일본어로 만들었다. 그는 “이런 정책을 실시한 결과 병합 직전에는 일본어를 쓸 수 있는 인구가 조선 전체의 0.5%에 불과했으나 1943년 조사에서는 22%로 늘어났다.”면서 “일어 사용 인구가 20% 이상 되기 때문에 조선어 말살 정책을 자신 있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서적, 문서에 대한 검열도 심각하게 자행됐다고 덧붙였다. 허 교수가 최근 수집해 내놓은 일제의 1909년 교과서 검정 기준에는 ‘편협한 애국심을 말하는 내용’, ‘일본과 기타 외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내용’, ‘비분한 글로 최근의 역사를 서술하는 내용’ 등이 모두 통제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출판물에 대한 금지 및 압수 조치도 많아 ‘20세기 조선론’, ‘금수회의록(안국선)’, ‘면암(최익현) 선생 문집’ 등이 모두 금지 압수 처분을 받았다. 연합뉴스
  • 조선 근대화위한 고종의 노력과 좌절

    조선 근대화위한 고종의 노력과 좌절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고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한다. 사람들은 이 책임을 조선의 26대 왕 고종의 무능함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고종은 조선에 입맛을 다시던 세계 열강과 친일파들의 감시 속에서 나라를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16일부터 이틀간 오후 9시50분부터 방송되는 EBS 다큐프라임 ‘한일강제병합 100년 특별기획-잊혀진 나라 13년’은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하다고만 알려져 있던 고종이 조선을 근대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과 좌절을 했으며 얼마만큼의 성과를 일궈냈는지 살핀다. 1부 ‘제국의 꿈’은 1903년에서 1906년 사이 여러 차례에 걸쳐 독일 은행에 입금되었던 ‘대한제국 국고예치금 100만마르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종이 먼 외국은행에 그 많은 돈을 예금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899년 초가지붕 사이로 전차가 다니기 시작하고 호기심 많은 시민들은 전차 주위로 모여든다. 당시 종로를 달리던 전차는 도쿄보다 3년이나 빠른, 동양에서 두 번째로 부설된 승객용 전차였다. 고종은 근대적 국가로 가는 길에 방해가 됐던 신분제도와 보수파의 사상을 타파하고자 의제 개혁과 관립학교를 설립하는 등 백성들의 의식계몽에도 힘을 쏟는다. 정동에는 각국의 공사관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파란 눈의 선교사들에게 신식교육도 적극 허가한다. 고종의 자비로 만든 독립신문은 국민들의 자주정신을 일깨우게 되고 국민들은 만민공동회라는 토론의 장을 마련, 사회문제에 눈을 떠간다. 전신선과 전기를 가설하고, 철도를 부설하며 도시개조 사업을 전개하는 등 고종의 조선 근대화시키기 계획은 점점 무르익어 갔다. 아관파천 뒤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내세우고 ‘광무황제’로 즉위한다. 방송은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 유물을 출품해 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대한제국 알리기에도 적극 참여하는 고종의 모습을 전한다. 2부 ‘제국의 전쟁’은 열강에 대한 고종의 치열한 투쟁을 전한다. 세계 열강들 속에서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고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외교활동과 자주독립국가 국민의식이 중요했다. 고종은 관립외국어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들을 근황세력으로 끌어들여 각국에 파견한다. 방송은 고종의 기밀문서를 가지고 비밀스럽게 움직이던 근황세력들과 그 뒤를 쫓던 일본 스파이의 모습을 전한다. 근황세력은 고종의 강제 폐위 뒤에 해외 독립운동에 나선다. 스티븐슨 사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까지 모두 배후에 고종이 있다는 근거 자료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한다. 해외 의병활동에 군자금을 보태고, 끊임없이 세계 열강에 밀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고종. 방송은 고종이 조선의 끝이 아닌, 항일 투쟁의 시작으로서 그의 업적을 조명한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순종, 대한매일신보 몰래 도왔다”

    “순종, 대한매일신보 몰래 도왔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황태자 시절 영국 언론인 배설(Bethell·1872~1909)이 운영하던 항일언론 대한매일신보와 영자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비밀리에 도왔다는 증언이 나왔다. ‘을사늑약(1905년)의 무효’ 논평 등을 통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판했던 배설의 손녀 수전 블랙(55·영국 국립보건국)은 15일 “할아버지는 1904년 조선에 입국한 뒤 두 살 차이인 황태자와 친하게 지냈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광고주들을 위협, 신문사 경영이 악화되자 황태자가 할아버지의 신문사에 여러 차례 도움을 줬다는 말을 할머니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65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두 딸과 함께 방한한 블랙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할아버지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주고 상세히 기억해줘서 큰 영광”이라면서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 관리 등도 잘 돼 있어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또 “순종이 황태자 때 할아버지에게 보낸 ‘나의 벗 지미에게(My friend Jimmy)’로 시작되는 엽서 등 다수의 한글 편지와 자료, 문서들을 보관하고 있다.”면서 “할아버지를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진다면 사본 등을 기증, 한국민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는 블랙의 쌍둥이 두 딸 니콜라·린제이 블랙도 “증조 할아버지께서 일제 치하의 한국인들을 위해 많은 애를 쓰셨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는데, 한국에 와보니 실감이 난다.“면서 “한국인들이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어서 크게 감동했다.”고 말했다. 배설은 일제의 ‘국외 추방’ 기도와 옥살이 등 숱한 고생과 음주, 흡연 등으로 심장병이 심해져 1909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배설의 부인은 3개월 뒤 외아들 허버트 오웬(1963년 사망)을 데리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블랙은 이에 대해 “할머니는 ‘신문을 잘 경영해 한국민들을 구해달라.’는 남편의 유언을 따를 생각이었지만, 이듬해 영국인 비서가 일제에 매수돼 신문사를 팔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는 등 모든 것을 잃게 되자 귀국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 태평양 비극의 씨앗 심은 루스벨트 항해

    태평양 비극의 씨앗 심은 루스벨트 항해

    고종 “우리는 미국을 형님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오.” 1882년 고종은 첫 서방 수교국으로 미국을 선택했다. 그는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의 운명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 국무부에 이 같은 말을 여러 차례 직접 건넸다. 1905년 9월19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가 ‘임페리얼 크루즈’의 일원으로 서울을 찾았을 때도 황제 전용 열차, 황실 가마를 제공하는 등 깍듯하게 국빈의 예우를 다했다. 그러나 이때는 일본과 미국이 한국과 필리핀을 식민지로 맞바꾼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지 두 달 가까이 된 시점이었다. 고종은 절박하고 비장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루스벨트 “일본이 반드시 대한제국을 지배했으면 좋겠소.”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26대 대통령이었다. 러·일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총지휘자였다. 그가 고문과 민간인 학살 등을 통한 약소국가 강점을 정당하다고 여긴 전쟁광 제국주의자이자 백인우월주의자였다는 사실 또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침략적 제국주의는 일본의 아시아 지배 야욕을 부추겼고 한국의 비극을 넘어 궁극적으로 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지는 지구적 비극을 낳게 했다. 우리 역사 속 통절한 비극의 한 장면이다. 당시 한국은 국제 정세에 철저히 무지했고,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의 실체를 깨닫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밀약, 그리고 포츠머스 강화조약 두 달 뒤 1905년 11월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됐고, 1910년 일본은 한국을 강제로 병합했다. 그리고 꼬박 100년이 흘렀다. ‘임페리얼 크루즈’(제임스 브래들리 지음, 송정애 옮김, 프리뷰 펴냄)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기 직전 미국이 취했던 비밀외교와 식민지 침략에 대한 정밀한 보고서다. 부제는 ‘대한제국 침탈 비밀외교 100일의 기록’이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의 비극적 역사 관계만 담긴 것은 아니다. 미국이 쿠바, 필리핀, 하와이 등을 침략하며 저지른 잔인한 학살, 그리고 그 과정 속에 루스벨트가 행한 역할, 그 결과로 잉태된 비극의 씨앗들을 상세하게 기록해 나가고 있다. 훗날 루스벨트를 이어 27대 미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 육군 장관을 단장으로 한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 80여명이 1905년 7월5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한 뒤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한국을 거치는 여정을 담아냈다. 루스벨트는 이 순방단에 뉴스메이커인 천방지축 딸 앨리스를 태워 언론과 대중의 말초적 관심만을 유도하며 미국의 식민지 확대라는 비밀 임무를 감췄다. 그리고 순방단은 미국이 필리핀을 강점하는 과정에서 수십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선교사를 앞세워 하와이왕국을 강탈했으며, 조(朝)·미(美) 수호통상조약을 저버리고 일본의 침략과 강점을 용인하는 등 비밀 임무를 차곡차곡 수행했다. 역사는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이들에게만 칼 마르크스의 얘기처럼 ‘한 번은 비극(tragedy)으로, 한 번은 희극(farce)으로’ 반복될 뿐이다. 한국은 100년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폭넓은 외교관계를 구축하고 있고 다양한 이해관계, 힘의 균형이 다원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최근 일련의 외교 관계 움직임을 보면 100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미국만 쳐다보는 우를 반복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최근 드라마, 소설 등을 통해 ‘한국의 은인이자 의인’으로 이미지화된 제중원 의사 호러스 알렌 공사가 사실은 루스벨트의 제국주의적 야욕의 구도 안에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내용도 책 속에 공개된다. 알렌 공사가 거의 대부분의 국책사업을 독점하고, 한국을 강점, 탄압한 일본을 지지하는 편지, 문서를 보내는 등의 활동을 했음을 감안하면 놀라울 것도 없다. 다만 이토록 당연한 역사적 사실조차 우리는 미화에 급급할 뿐이고 진실은 미국인이 쓴 책에서 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1만 68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도시와 길] 대구 동성로

    [도시와 길] 대구 동성로

    대구 사람들은 동성로를 시내라고 부른다. 바꿔 말하면 동성로 이외는 다 시외다. 그만큼 동성로는 대구의 중심지다. 서울에 명동이 있다면 대구에는 동성로가 있다고 보면 된다. 옷가게, 영화관, 백화점, 음식점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이러다 보니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젊은이들로 북적댄다. 주말이면 대구시민 10명 가운데 1명은 동성로를 찾는다고 한다. 하지만 근대 이전 동성로 일대는 대구 읍성 내에서도 개발이 가장 뒤처진 곳이었다. 영남제일관 앞에 있던 동문시장이 1791년 현재의 대구백화점 주차장 쪽으로 옮겨오면서 상업 기능이 생기기도 했지만 주변에는 주택 몇 채를 제외하면 허허벌판이었다. 1907년 읍성이 헐리고 신작로가 난 이후 동성로는 발전을 거듭한다. 이후 100년 동안 대구가 발전해 온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곳이 바로 동성로다. 동성로는 중앙파출소에서 대구역 앞 대우빌딩까지 1㎞ 거리다. 동성로가 왜 동성로로 불리는지 아는 대구사람은 많지 않다. 대구 중구의 골목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영숙씨는 “동성로 길은 과거 대구 읍성의 동쪽 성벽이었다. 동성로라는 이름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대구 중구는 지난해 시민들이 성벽 길을 걸으면서 그 역사를 알 수 있게 동성로 중앙에 울퉁불퉁한 장대석을 폭 1.5m 정도로 이어놓았다. 하지만 그 취지가 제대로 홍보되지 않아 걷기에 불편하다는 민원이 제기돼 다시 예산을 들여 높이를 낮추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성로는 지금은 한일멀티플렉스로 변한 한일극장이 위치한 한일로를 중심으로 동성로 1가와 2가로 나뉜다. 1988년 이전엔 동성로 1가가 메인상권이어서 대구역을 중심으로 교동시장, 동아백화점이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많은 브랜드들이 동성로 1가에 입점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동성로 2가를 중심으로 의류 대리점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대구백화점 본점이 1990년대 중반 전성기를 누리면서 대구백화점 분수광장을 기점으로 메인 스트리트와 프라이빗 거리, 로데오 거리가 활발해졌다. 한일극장과 교보빌딩, 미도빌딩 일대는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방위군 성격의 군대인 진영이 있었다. 진영에는 병사 400명 정도가 주둔했는데, 지역 방위와 함께 각종 형벌 집행의 역할도 했다. 을사늑약으로 한국군이 해산당하자 진영 자리에는 수창동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가 옮겨와 주둔했다. 1916년 남구 이천동 현 미8군 자리로 80연대가 옮겨간 뒤 한동안 비어 있다가 1938년 일본인에 의해 영화관 키네마 구락부가 들어섰다. 조선흥업주식회사 산하기관인 일본의 왕단건축소가 설계했다. 키네마 구락부는 일본 본토의 건자재를 공수해 와 단단하게 지어졌다. 특히 금은박 치장을 한 커튼은 엄청 화려했다. 원래 두 조의 커튼이 있었는데 한 조는 한국인을 위해 금강산을 그림으로 그려 넣었다. 이영숙 문화해설사는 “키네마 구락부는 3층 높이로 당시 동양 최대의 시설을 자랑했다. 6·25전쟁때 국립극장으로 차출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동성로의 터줏대감은 대구백화점이다. 1969년 교동입구에서 현재의 동성로로 옮겨졌다. 당시 대구 최고인 10층 높이의 본점 건물을 지으면서 상권이 동성로 주변에 형성됐다. 3층까지만 매장으로 사용했고 4층 이상은 청구주택건설과 영남TV 등의 회사가 임대하여 사용하였다. 영남TV는 대구MBC의 전신이다. 이영숙 해설사는 “고 구본홍 대구백화점 명예회장이 1944년 삼덕동 1가 구 동인호텔 입구 모퉁이에 대구상회를 세운 것이 대구백화점의 모태다.”라고 소개했다. 구 동인호텔 자리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6·25전쟁 중 대구 계산성당에서 결혼한 뒤 이 곳에서 신혼생활을 하면서 1952년 박 전 대표를 낳았다. 동성로는 한때 제과점이 한 시대를 주름잡았다. 런던제과, 뉴욕제과, 뉴델제과 등 3개 대형 제과점이 70년대 대구 제방 제과계를 주름잡던 빅3였다. 이 중 런던제과점이 가장 컸다. 일제시대 대구 최초 백화점인 이비시아백화점 자리에 들어선 런던제과점은 중앙네거리의 미도백화점 총 매출액보다 많을 때가 있었다고 한다. 사단법인 거리문화시민연대는 ‘대구신택리지’라는 책자를 통해 “77년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수익률이 감소하게 되고 80년대 중반부터 간식과 패스트푸드업계가 늘어나면서 제빵산업은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로써 런던, 뉴델, 뉴욕제과는 80년대 초중반 문을 닫게 된다.”고 밝혔다. 동성로의 산증인 중 하나는 대구백화점 앞에 있은 인제약국이다. 1959년 8월15일 문을 연 이 약국은 50여년의 긴 세월을 동성로와 애환을 함께해 왔다. 이 약국 약사 김숙자(77·여)씨는 “당분간 푹 쉬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지난해 약국 문을 닫았다. 약국 자리는 세를 놓았다. 모녀가 대를 이어 운영하는 추어탕집인 상주식당은 동성로의 음식문화를 상징하는 명소로 손꼽힌다. 오스카양장점은 대구에서 제일 유명한 양장점이었다. 오스카양장점을 통해 배출된 디자이너들도 많았다. 오스카양장점을 중심으로 주변에 20여개의 점포가 있었다. 이들 양장점들이 동성로를 대구패션 1번지로 만들었다. 대구 중구가 추진한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 사업이 최근 마무리됐다. 야외무대 및 광장(대구백화점 앞), 바닥분수(대우빌딩 앞), 벤치 6곳 등이 조성됐다. 또 목백합과 대왕참나무 등 41그루가 심어졌다. 모두 43억원이 들어갔다. 시민 김동현(25)씨는 “예전에 동성로에는 많은 노점상과 전기시설 등이 있어 보행에 지장이 많았는데 이젠 걷기에 쾌적한 환경이 돼 좋다.”고 말한다. 동성로가 ‘테마가 있고 걷고 싶은 거리’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이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서울광장]러시아와의 지난 126년/노주석 논설위원

    [서울광장]러시아와의 지난 126년/노주석 논설위원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은 지 20년이 됐다. 두 나라는 수교 2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사절단을 상대국에 보내 행사를 열고 있다. 4월에 시작된 문화축제는 수교일인 9월30일을 정점으로 11월10일까지 장장 8개월 동안 계속된다. 주한 러시아연방 대사관도 지난달 15일 ‘조선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의 조·러 친교’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세미나를 개최했다. 필자도 토론자로 참석해 러시아와의 인연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항일독립투사들의 활동상에 대해 의견을 개진했다. 콘스탄틴 브누코프 주한 러시아 대사는 지난 4일 이례적인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올해는 양국에 매우 중요한 해”라면서 “한국과의 FTA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방침”이라고 말했다. 또 “올 하반기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방한이 이뤄지면 양국이 전략적 동반자관계로 격상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6자회담 재개를 희망하면서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조사와 구체적인 결과물 제시도 촉구했다. 러시아의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모종의 역할론을 시사하는 듯하다. 반응은 의외로 냉담하다. 요즘 젊은이들이 5000억원짜리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 공동개발과 재러 유학생 테러사건으로 기억하는 러시아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였던가. 해방 전후 ‘미국사람 믿지 마라, 소련사람에 속지 마라, 일본사람 일어나니, 조선사람 조심해라.’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 옛 소련은 한반도에 해방과 분단을 동시에 안겨준 나라이다. 이 땅에 이데올로기를 수출한 사회주의 모국(母國)이다. 두 나라의 관계는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자들은 조선군 150명이 청나라의 나선정벌(禪征伐)에 합류한 1652년을 기점으로 본다. 1884년에는 ‘조·러 통상조약’을 맺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기억하는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여 동안 국사를 본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전까지 러시아는 한 때 지금의 미국 역할을 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재수교 20주년이요, 수교 126주년인 셈이다. 한국에는 러시아인이 1만명 넘게 살고 있고, 러시아에는 15만명의 카레이스키(고려인)가 거주하고 있다. 1992년 2억달러에 불과하던 교역액이 2008년 200억달러를 넘볼 정도로 팽창했다. FTA가 성사되면 500억달러 돌파를 기대한다. 중국의 1400억달러에는 못 미치지만 일본 712억달러, 미국 667억달러와 비교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교역국이다. 혹 중국과의 관계에 함몰돼 러시아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통해 북한을 러시아에서 떼어놓는 데 성공했다. 1995년 러시아는 ‘러·북 우호 협조 및 상호원조 조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손자(孫子)는 “적의 동맹관계를 끊어 고립시키는 것이 전쟁하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라고 갈파했다. 천안함 침몰 원인 규명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을 놓고 ‘중국의 안보=북한의 안보’라는 냉전시대 논리가 등장하고 있다. 지금은 경제안보시대다. 안보와 경제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중국이 경제파트너인 한국을 제쳐 두고 북한에 계속 젖을 물릴 리 만무하다. 러시아의 사례가 입증한다. 러시아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6자 회담 참가국이며, 한반도 주변 4강이다. 러시아와 좀 더 살갑게 지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008년 9월 취임 7개월 만에 러시아를 방문했다. 4강 순방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러시아의 섭섭함이 전달됐다. 순방순서를 서열화하는 것은 외교적이지 못하다. 청와대는 당시 양국관계를 중국 수준의 전략적 협력 동반자로 격상시킨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러시아대사는 2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격상 가능성을 얘기한다. 재수교 20년, 수교 126년이 지났지만 두 나라 사이의 온도 차는 크게 좁혀지지 않았다. joo@seoul.co.kr
  • 가락가락 녹아있는 지사의 절개

    가락가락 녹아있는 지사의 절개

    ‘국운이 쇠한 곳에 충신이 슬피 울고/ 열사의 가실 길은 죽음밖에 없단 말가/ 낙엽도 다 진하고 눈보라 치운 날에/ 평리원 섬돌 아래 외로이 무릎 꿇고/ 이천만 동포 아껴 애틋이 눈물 지니/ 하날도 한겨운 듯 날마다 거물댄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에 ‘대구여사’(大丘女史·필명)가 발표한 ‘혈죽가’(血竹歌)의 일부다. 한 해 전 체결된 을사늑약에 반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국지사 민영환 선생을 추모한 시조다. 아직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현대시조라는 주장도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 가락을 붙였고, 경기민요 대가 김옥심 명창을 통해 민초들의 한을 대변하는 창(唱)으로 거듭 났다. 하지만 해방을 거치며 맥이 끊겼다. 그 혈죽가가 다시 복원됐다. 김옥심 명창의 제자 남혜숙(68) 명창을 통해서다. 남 명창은 21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최근 음원 녹음작업을 마쳤다.”며 “올해는 한·일 병탄 100주년 되는 해여서 감회가 더욱 남다르다.”고 말했다. 혈죽가는 서도소리 조로 의연하게 부르는 게 특징이다. 별다른 악기 없이 장고 반주에만 의존한다. 음반에는 총 8절 가운데 4절만 담겼다. 남 명창은 “나머지 4절은 민영환 선생의 자결 장면을 너무 세세히 묘사하고 있어 녹음을 생략했다.”고 설명했다. 음반 녹음은 최근에 마쳤지만 복원 작업 자체는 지난해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남 명창은 기념공연을 머뭇거린다. 징크스 때문이라고 했다. 복원에 성공한 직후인 지난해 5월, 공연을 열 예정이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자기 목숨을 끊는 바람에 8월로 미뤄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공연을 접어야 했다. 남 명창은 “그래도 복원된 혈죽가를 선보여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작년 10월 공연 일정을 다시 잡았으나 그 무렵 노태우 전 대통령의 건강악화설이 흘러나와 결국 혈죽가만 빼고 불렀다.”며 “이제는 (혈죽가를 무대에 올리기가) 솔직히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공연 대신 음원으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경제적 사정 때문에 지지부진하던 음반 작업은 혈죽가가 잊혀가는 사실에 아쉬워하던 유대용 중앙대 겸임교수가 흔쾌히 사재를 내놓으면서 속도가 붙었다. 남 명창은 “혈죽가가 오랫동안 살아 숨쉬길 원한다. 조금씩 도태돼 가는 국악의 현실 속에서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비운의 곡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오는 광복절에는 꼭 혈죽가가 울려 퍼지기를, 그래서 국민들이 민영환 지사의 혼을 오래오래 기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女談餘談] 이준 열사와 기자/정은주 사회부 기자

    [女談餘談] 이준 열사와 기자/정은주 사회부 기자

    평리원 검사였던 이준(당시 48세)은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특사로 파견됐다. 을사늑약(1905)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베를린, 브뤼셀을 거쳐 두 달 만에 헤이그에 도착했지만 그는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초청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한국 대표단은 “을사늑약은 일본이 무장 병력을 사용해 고종 황제의 승인 없이 체결한 것으로, 국제법상 무효”라는 걸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회의장 입장조차 거부당했는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해답은 기자였다. 한국 대표단은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라는 불어 성명서를 작성해 회의장 입구에서 나눠줬다. 일본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각국 대표단은 성명서를 구겨 버렸지만, 회의를 취재하던 기자는 “학식 깊고 수개 언어를 구사하는” 동양인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았다. 영국 기자 윌리엄 스테드가 편집인을 맡고 있던 ‘평화회의보’가 6월30일 자에 성명서 전문을 실으며 “1884년 모든 강대국에 의해 독립이 보장, 승인된 대한제국은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고 보도했다. 또 그는 한국 대표단의 기자회견을 주선하고, 불어에 능통한 이위종(당시 20세)을 인터뷰해 ‘축제 때의 해골’이라는 제목으로 7월5일 자 평화회의보에 실었다. “닫혀 있는 회의장 문 앞에 앉아 있던 대한제국 이위종”을 만나 일문일답을 나눈 것이다. 스테드 기자가 묻는다. “일본은 강대국이다. 우리가 헤이그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이위종은 분노하며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법의 신이란 유령일 뿐이며 정의를 존중한다는 것은 겉치레일 뿐이다. 왜 대포가 유일한 법이며 강대국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 없다고 솔직히 시인하지 않느냐.” 7월14일 이준 열사는 묵고 있던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헤이그에 도착한 지 20일 만이었다. 그의 죽음도 평화회의보와 네덜란드 신문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헤이그 ‘이준 열사기념관’에서 당시 신문을 훑어보며 역사를 증언한 기사는 100년 후에도 살아 숨쉰다는 걸 절감했다. ejung@seoul.co.kr
  • [시론] 한·일 새로운 100년과 역사 매듭 풀기/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한국고대사 교수

    [시론] 한·일 새로운 100년과 역사 매듭 풀기/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한국고대사 교수

    최근 의미심장한 보도가 있었다. 제2기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 따르면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의 가야를 200년간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폐기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이 보도를 접하면서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시점에서 남다른 감회에 젖게 된다. 진실은 승리한다는 철칙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임나일본부설의 망령은 19세기 후반부터 한국 민족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다.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하는 정한론(征韓論)의 호재로서는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의 한반도 강탈은 침략이 아니라 과거의 지배를 되찾는 것에 불과하다는 오도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실제 이러한 주장은 영국의 유수한 신문인 ‘런던타임스’(1897년 9월17일)에 이어 중국의 잡지 ‘시무보(時務報)’에 전재되기까지 했다. 이렇듯 임나일본부설은 한국 민족에게는 독립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송두리째 박탈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로서 한껏 악용되었다. 이와 관련해 일제 강점기의 교과서에 수록된 신공황후의 신라정벌 상상도가 상기된다. 신라 해변에 상륙하여 어깨에 화살통을 멘 군복 입은 신공황후의 왼손은 긴 활채를 내려뜨려놓고, 오른손은 이마에 대고 멀리 응시하며 정찰하는 삽화인 것이다. 단 한 장의 삽화가 주는 강렬한 인상과 더불어 황국사관에 입각한 ‘일본서기’의 관련 내용은 한국인들을 끝없는 절망감에 빠지게 하거나 분노하게 만들었다. 전후에 간행된 일본 국사 교과서에도 관점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영악할 정도로 세련된 논조를 구사하며 파고들었다. 즉, 일본열도를 통일한 야마토 조정은 4세기 후반경 기술 노예와 선진 문물 및 철자원의 획득을 위해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여 가야를 자국 세력하에 두었다는 것이다. 허구로 가득 찬 임나일본부설을 붕괴시키기 위해 ‘일본열도 내 삼한분국설’을 비롯한 숱한 학설이 남북한에서 쏟아졌다. 그럼에도 임나일본부설은 철옹성처럼 군림했다. 그러던 망령이 한국과 일본 학자들 간의 공동 연구를 통해 걷히고 만 것이다. 더불어 한·일 양국의 지성과 양식이 살아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로써 자국의 입장만 강요하던 일방통행식 연구에서 벗어나 정직한 역사 해석이 가능하다는 공감대를 구축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요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랬기에 왜구의 주요 구성원이 일본 학계에서 주장하던 것처럼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사실과, 일본열도의 벼농사와 금속문명이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는 사실에도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제는 한일병합과 관련한 근대사 문제에 대한 진실 규명이 이루어져야 할 순서인 것 같다. 불법이었던 을사늑약과 독도 영유권 문제 등 근·현대사의 숱한 부분에서 양국은 여전히 커다란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한반도 진출의 역사적 근거로 여겼던 임나일본부설의 종언은 비록 구속력은 없다지만 그 자체가 지닌 상징성만으로도 큰 파급 효과를 지녔음은 부인할 수 없다. 임나일본부설에 연원을 두었던 그 뒤의 모든 불행한 사건들에 대한 진실 규명도 실타래 풀리듯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합의되지 않은 사안은 역사관의 차이로만 돌리기보다는 상대 측의 공감대를 유도하거나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이제 선수는 우리가 쥐었기 때문이다. 소위 임나일본부의 운영 주체로 새롭게 지목된 안라(安羅)가 있던 경남 함안 지역을 학생들과 종일 답사하고 온 날이라 소회가 더욱 각별한 것 같다. 한술 밥에 배 부를 수야 없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다. 이제 한·일 간의 과거사를 바로잡고 편향된 역사인식을 교정할 수 있는 역사 매듭풀기의 시작으로 본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역사의 사필귀정을 믿기 때문이다. 이번 합의를 지나간 한·일관계 100년의 악몽을 반전시킬 수 있는 미래 100년의 서곡으로 간주한다면 몽상일까?
  • [사설] 한·일 근현대사 왜곡도 바로잡아야

    역사의 기록은 승자에 치우쳤음을 세계사는 역력히 보여준다. 그런 차원에서 한·일 고대사 왜곡의 상징으로 통했던 임나일본부설의 폐기는 획기적이다.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어제 발표한 최종보고서의 내용이다.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한·일 정상이 약속해, 양국 사학자들이 도출한 공식적 사안인 것이다. 늦게나마 허구의 역사를 바로잡은 역사 교정의 인식은 반기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릇된 역사를 고쳐 현실로 옮기겠다는 실천의지는 멀기만 한 것 같아 안타깝다. 일본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중엽∼6세기 중엽 200년간 일본의 야마토(大和)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한반도 지배설이다. 백제·신라·가야를 정복해 주물렀고 가야에 둔 일본부(임나일본부)가 그 통치의 핵심이란 주장이다. 임진왜란기 중국(明)을 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내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이나, 한·일강제병합의 근저에 임나일본부설을 두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식 있는 학자·시민들이 끊임없이 허구임을 주장해 왔으나 일본 정부와 주류 사학계는 줄기차게 밀어붙였던 터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학자들이, 그것도 정상 간 약속에 따라 국가 간 차원에서 정면으로 뒤집은 인식은 환영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보편적 통사(通史)에 대한 현실적 거부이다.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인정한 마당에 근·현대사의 잘못은 왜 바로잡지 못하느냐는 의구와 불만이 크다. 양국 학자들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을사늑약과 강제병합조약, 한일협정, 식민지 강제동원과 수탈에서 일본 측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일강제병합조약만 하더라도 국제법적으로 합법적이고 한반도 식민지화는 돌이킬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태평양전쟁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을 놓고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해결됐고 지금의 조약 개정 주장은 정치적인 것으로 일축했다. 일본 측 학자들은 참고수준이나마 일본 교과서의 임나일본부 삭제를 권고키로 했다고 한다. 학자만의 협의에 머물 게 아니라 일본 정상의 약속대로 국격에 맞는 실행이 따라야 할 것이다. 도처에서 빗나간 과거사를 들추고 고발하는 증거와 사료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말만의 청산은 이제 어디서도 통할 수 없다는 역사의 뼈저린 증언을 일본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 을사늑약·강제징집 부인…日 오욕의 근대사 왜곡 고집

    을사늑약·강제징집 부인…日 오욕의 근대사 왜곡 고집

    제2기 한·일 역사공동위원회가 23일 양국 정부에 제출한 결과 보고서를 발표하며 공식 활동을 종료했다. 2기 공동위원회는 한·일 고대사 중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확인하는 등 부분적인 성과를 냈다. 하지만 1기 위원회의 쟁점 사항이었던 근·현대사의 식민지 과정 등 민감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을 보인 채 각자 의견을 병기하는 선에 그쳤다. 또 독도와 종군위안부 문제 등은 논의조차 하지 못해 무거운 과제를 남겼다는 평가다. ●고대사… 임나일본부 허구 확인 2기 위원회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은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확인한 것. 한·일 고대사 부분을 연구한 제1분과에서 한국은 “‘일본서기’ 신공(神功) 49년조의 해석을 통해 왜의 임나 지배를 논하던 전형적인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을 상실했다.”며 “임나일본부의 외무관서적 성격으로 미루어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제시했다. 일본 또한 “한반도에서 왜인의 활동 흔적은 여러 곳에서 인정되지만, 왜국의 영토가 존재했다는 이해는 불가능하다.”며 “왜국이 한반도에서 대대적인 군사 전개를 했다는 이해에는 재검토와 정정이 필요하다.”고 동의했다. 아울러 일본의 벼농사와 금속 문화가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사실에도 대체적인 의견일치를 보았다. ●중·근세사… 왜구는 일본 어부 1300~1400년대 한국 연안에서 출몰했던 왜구의 정체에 대해 ‘고려·조선인설’ ‘제주도 해민설’ 등의 주장이 그동안 일본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 이들이 쓰시마와 이키, 마쓰우라 등의 영주와 해민(어부)들이었다는 결론을 냈다. 아울러 양국 연구진은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도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내부 불안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인식을 같이했다. ●근·현대사… 양국 인식차 커 한일병탄 과정과 식민지 시대에 대한 성격 규정 등 근·현대사 부분에서는 양국의 역사 인식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무엇보다 “일본이 한반도를 일방적으로 침략한 것이 아니라 한국 주류 세력도 이에 동조했다.”거나 “고종이 을사조약을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약의 주체로서 반대 운동을 탄압했다.”는 등 일본의 편향된 인식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인 노동자 동원 과정에서 강제와 폭력이 없었다는 주장도 반복된 것으로 드러났다. ●교과서 왜곡관련 논의도 난항 2기 공동위원회에서 처음 수행한 양국 교과서에 대한 연구 역시 현저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한·일 관계의 지뢰밭’이라 할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문제 등은 주요 의제에서 제외됐다. 한국 측 위원장인 조광 고려대 교수는 “유럽이 30~70년 걸려 공동교과서를 만들었고 아직 의견이 합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는 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며 지속적인 공동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3기 위원회 출범 여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2001년 일본 후소샤(扶桑社)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이듬해 출범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05년 6월 1차 보고서를 낸 뒤, 2007년 6월 34명의 위원이 참여한 2기 공동위원회를 출범시켰고, 24개 공동 연구주제에 대해 67차례 회의 끝에 이날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10)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고전 톡톡 다시 읽기] (10)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① 이름없는 고양이, 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아, 고양이 ‘로소’구나.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에게 ‘~로소이다’는 냉큼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낯선 어투였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고양이다? 그냥 보면 아는 건데, 이 무슨 말장난인가. 그러니 고양이 이름이 ‘로소’라고 나름 상상력을 동원할밖에.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나오는 고양이는 정말 이름이 없다. 주워온 고양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슬그머니 기어들어와 빌붙어 사는 고양이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쥐는 절대 잡지 않는다는 ‘철학’이 있는, 희한한 고양이다. 소세키는 이 고양이의 눈을 통해 1905년의 일본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풍부한 학식을 쌓은 지식인, 수완 좋은 사업가, 진리를 부르짖는 철학자, 지체 높은 귀족, 야망 가득한 청년 등 이른바 그 시대의 선두 주자들이 낯선 풍경으로 새롭게 재구성된다. 소세키에 따르자면 이는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어디를 걸어도 엉성한 소리가 나지 않는 고양이의 발놀림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이름 없는 고양이의 발걸음은 어떤 경계도 두지 않고, 그 무엇도 아랑곳없이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새로운 움직임을 감지해 낸다. ② 고양이의 시선에 비친 근대인 나, 고양이에게 인간들은 참으로 기이한 족속이다. 날로 먹어도 되는 음식을 굳이 삶고 굽고 볶으면서 유난을 떨고, 옷이랍시고 온갖 것을 다 피부에 얹어 놓으며, 발이 네 개인데도 불구하고 두 개밖에 사용하지 않는 ‘사치스러운 동물’이다. 그뿐이랴.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토지 따위를 자기 소유로 정하고, 심지어 그 ‘소유권’을 팔고 사는 짓거리도 한다. 땅이 생겨나는데 인간이 무엇을 노력했고 어떤 도움을 주었냐고 고양이는 되묻는다. 또 인간들은 돈과 다수 세력에 복종하거나, 동의할 수 없더라도 맞춰 살려고 갖은 애를 다 쓴다. 그야말로 ‘미치광이’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이런 미치광이들이 그 당시 대표적인 인간이다. 고양이에 따르면 그들은 자나깨나 자기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데 여념이 없다. 거의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꾸며내고 방어하느라 바쁘다.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자신을 몰아친다. 불나방떼들처럼 문명의 이기를 좇을 뿐이다. 이런 ‘미치광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초열지옥’이다. 이에 비해 고양이의 주인인 구샤미 선생과 메이테이, 간게쓰 등은 무력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다. 뭔가 하기는 하지만, 세상의 시선으로 보자면 쓸모 있거나 의미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구샤미 선생 집에 모여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는 게 고작이다. 중학교 영어선생인 구샤미는 재주도 지혜도 별로 없는, 불어터진 국수 같은 인물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서재에 틀어박히기 일쑤지만, 실은 그저 책상에 침을 흘리며 낮잠이나 자고 있을 뿐이다. 메이테이는 끊임없이 허풍스러운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 그 거짓말에 아는 척, 있는 척하고 싶어 하는 ‘사치스러운 동물’들은 쉽게 속아 넘어간다. 간게쓰는 학자인데, 그는 ‘목 매기의 역학’, ‘도토리의 스태빌리티(stablility)를 논하고 아울러 천체(天體)의 운행을 논함’, ‘개구리 눈알의 전동 작용에 대한 자외 광선의 영향’ 등처럼 학문의 대상이 절대 될 수 없는 것들을 연구한답시고 바쁘다. 구샤미 일당의 무력하고 무능한 모습은 초열지옥인 현실에서 한쪽 발을 슬쩍 빼고, 딴청을 피우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지만, 그래서 그들은 느긋하고 자유롭다. 이 자유는 인간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 의미 있다는 것들에 대해 “정말 그래? 왜?”라고 되묻게 만들어 준다. 의심을 품게 하고 질문을 만드는 힘, 이 때문에 고양이는 구샤미 일당을 ‘고급스러운’ 무능력을 가진 인간들이라고 부른다. ③ 거인의 시대에 살아가는 방법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나오는 장면 하나. 아이들은 하늘 높이 공을 던진다. 그러다 왜 공이 떨어지는지, 왜 위로 오르지 않는지 묻는다. 엄마는 거인이 땅 속에 살아서 ‘거인 인력’으로 공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 거인은 공만이 아니라 세상만물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 거인의 시대가 소세키의 시대다. 나쓰메 소세키가 잡지 ‘호토토기스’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연재하기 시작한 1905년 무렵, 일본은 러·일전쟁 승전으로 한껏 고무돼 있었다. 이후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한다. 대한제국은 열강의 묵인 속에 을사늑약을 강요당했고, 1910년에는 강제로 일본에 병탄된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확보하면서 일본은 강력한 제국에 대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여받은 근대적 개인들은 국민이라는 사명을 띠고 역사적인 개인이 되어야만 했다. 모든 것은 국가를 중심으로 끌어당겨졌고, 일본은 제국으로 향해 내달렸다. 이런 초열지옥과도 같은 현실에서 구샤미 일당은 딴청만 피우고, 우리의 주인공 고양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끊임없이 돌아다닐 뿐이다. 고양이는 마지막 죽음까지도 태평스럽게 맞이한다. 이름 없는 고양이와 무능한 인간들이 보여주는 이 유유자적한 자유가 거인의 시대를 살아가는 소세키의 방식이다. 물론 이로써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지는 못하지만, 거인 인력에 끌려가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비켜 나가는 틈새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나쓰메 소세키는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처음 쓴 소설작품에서,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시대를 벗어나는 방식을 시도했던 것이다. 또한 이 방식은, 그리고 이름 없는 고양이의 눈과 발걸음은 비단 1905년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이력서에 채워 넣을 내용,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점수와 자격증을 위해 삶을 바쳐야 하는 우리 시대. 고양이는 가늘지만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지른다. 고양이의 눈과 발로써 시대의 낯선 틈새를 만들어 보라고. 거인의 시대를 가로질러 보라고. 김연숙 수유+너머 연구원
  • [정은주 순회특파원 세계의 법원 가다] 고종, 특사파견 독립호소문 배포

    [정은주 순회특파원 세계의 법원 가다] 고종, 특사파견 독립호소문 배포

    │헤이그 정은주 순회특파원│“법과 정의, 평화의 신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먼 나라에 왔다.”(1907년 7월5일 만국평화회의보 ‘축제 때의 해골’ 중에서) 고종 황제는 1907년 6월15일~10월18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World Peace Conference)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특사 3명을 파견한다.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인 평리원 검사 이준(48), 의정부 전 참찬 이상설(37), 주러시아 공사관 참사관 이위종(20)이 그들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상트 페테르부르크, 베를린, 브뤼셀 등을 기차로 달려 두 달 만에 헤이그에 도착했지만, 이들은 회의장 입장조차 거부당했다. 초청장이 없다는 게 공식 이유였지만, 일본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당시 참석자는 회고한다. 그러나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6월30일 ‘헤이그에서의 한국독립호소문’을 프랑스어로 발행해 45개국 대표 239명에게 보냈다. 을사늑약은 ▲고종황제의 승인 없이 ▲일본이 무장 병력을 앞세워 ▲법률을 무시한 채 체결돼 무효라는 내용이었다. 출입기자단이 발행한 평화회의보가 ‘왜 대한제국을 제외하는가?’ ‘축제 때의 해골’이라는 제목으로 호소문과 이위종 인터뷰를 보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07년 7월14일 오후 7시 이준 열사는 갑작스레 헤이그 호텔방에서 사망했다. 당시 네덜란드 신문은 뺨에 난 종기수술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는 할복 자결로 보도했다. 사인은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이 호텔에는 1995년 8월 이준 열사기념관이 세워졌다. ejung@seoul.co.kr
  • [정은주 순회특파원 세계의 법원 가다] (2) 상설중재재판소

    [정은주 순회특파원 세계의 법원 가다] (2) 상설중재재판소

    │헤이그 정은주 순회특파원│ 지난해 7월22일, 수단 북부 정부와 남부 반군은 상설중재재판소(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이하 PCA)의 유전지역 아비에이(Abyei) 경계선 확정 결정을 받아들인다고 공식 발표했다. 아비에이는 수단 중앙에 위치한 목초지로 원유 매장량이 풍부하다. 북부 이슬람계 정부와 남부 기독교계 반군은 이 땅을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20년간 피를 흘렸다. 2005년 1월 150만명의 목숨을 빼앗은 내전을 끝내는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이 지역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었다. 2008년 5월 아비에이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수단 정부와 반군은 분쟁 해결을 PCA에 요청했다. 중재재판관 5명이 그해 10월 확정됐다. 수단 정부와 반군이 재판관을 각각 지명했고, PCA 국제사무국이 피에르 마리 드푸이 재판장 등을 뽑았다. 중재재판관 선정에 당사자가 참여하기에 그만큼 신뢰도가 높다. 이듬해 4월18~23일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궁(Peace Palace)에서 공개재판이 6차례 열렸다. 수단 국민이 재판을 지켜볼 수 있도록 PCA는 인터넷으로 재판을 중계했다. 같은 해 7월 재판부는 아비에이의 경계를 확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사건이 시작된 지 1년 만이었다. 북부 정부는 “우리의 승리”라고 환영했고, 남부 반군은 “균형잡힌 결정”이라고 만족했다. PCA 헤더 클라크 변호사는 “이것이 당사자의 주장을 분석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중재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PCA는 국가 간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국제사회의 첫 시도로 1907년 탄생했다. 유럽 열강의 경쟁적인 영토 확장으로 긴장감이 높아지자 1899년 러시아 차르 니콜라스 2세는 제1차 만국평화회의(World Peace Conference)를 발의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모인 각국 대표들은 전쟁이 아니라 법으로 국가 간 분쟁을 해결하자고 합의했고(헤이그협약), 1907년 제2차 회의에서 PCA 설립을 확정했다. 고종 황제는 이 회의에 이준 열사 등 특사 3명을 파견해 을사늑약(1905년)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중재는 전통적인 재판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분쟁 당사자가 재판관을 선정하고, 두 재판관이 합의해 재판장을 임명한다. 재판 장소, 기간, 공개 여부 등도 당사자가 결정한다. 그리고 항소절차가 없다. 중재 결정이 내려지면 확정 판결과 같은 구속력을 지닌다. PCA는 영토, 인권, 조약 등 국가 간 분쟁에서부터 국제기구, 국영기업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클라크 변호사는 “중재 내용이 공개되지 않는 데다 법원보다 결정이 신속해 2000년부터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진행 중인 41건 가운데 7건만 공개 중재다. 미국과 유럽의 대형 로펌은 PCA 사무국에 젊은 변호사를 파견해 중재 노하우를 배운다. 최근에는 싱가포르와 중국 로펌이 인턴을 보냈다. 한국인은 지금까지 없었다. 글 사진 ejung@seoul.co.kr 후 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 [한·일 100년 대기획] 민족종교, 항일독립운동 구심점

    19세기 후반 이 땅에는 대종교·동학·천도교 등 새로운 민족종교들이 발흥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세력이 급감했다. 일본 정부가 1915년 10월 종교 통제안을 공포, 민족성을 일깨우는 민족종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한 결과였다. 당시 민족종교는 단순히 종교 차원을 떠나 민족을 지탱한 구심점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1920년을 전후한 4년은 민족종교의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절정기에 속한다. 대종교의 경우 1대 교주 나철이 비밀결사조직인 유신회를 조직, 기울어지는 국권을 일으키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청 3국은 상호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를 부조하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일본정계에 전달했다. 이어 일본궁성 앞에서 사흘간 단식투쟁한 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 이완용·권중현 등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1918년에는 대종교 신도 및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이 만주 동삼성에서 무오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해 북로군정서로 발전시킴으로써 무장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시켰다. 특히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 1개 연대를 섬멸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경신 대토벌작전을 전개, 대종교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1919년에는 천도교가 주축이 돼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는 3·1운동 직후 ‘특별 성미’로 교인 1명당 3~10원씩 모두 30만원을 모아 독립군의 군자금이나 임시정부의 활동비로 조달했다. 천도교는 개신교 신자가 불과 20만명에 불과했던 1920년에 300만명의 신도를 거느릴 만큼 이 땅의 대표 종교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최린 등 일본 유학생 출신 요인들을 포섭해 천도교를 분열시켰다. 또한 혁신세력을 통해 종교단체에서 사회개혁운동 단체로 전향하도록 유도해 종교로서의 권위를 잃도록 했다. 동학과 단군신앙을 결합한 민족종교인 청림교는 1920년대 무장조직 ‘야단’을 조직, 직접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대종교의 북로군정서와 합병해 북간도 지역의 반일무장투쟁단체들의 연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림교도들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승리를 위해 군자금을 모으고 군수품을 제공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청림교를 ‘가장 극심한 민족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1944년 청림교 사건을 조작, 120여명의 교인들을 체포하고 이 가운데 50~60명을 살해했다. 일본의 강도 높은 탄압에 결국 청림교는 소멸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을사오적은 누구인가

    [한·일 100년 대기획]을사오적은 누구인가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다섯 사람을 말한다. 이른바 을사조약으로도 표현하지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방적으로 박탈한 불평등 조약이기 때문에 굴레 ‘늑(勒)’을 써 을사늑약이라 불린다. 을사년에 체결됐다. 어찌나 일제의 무자비한 강압 속에 이루어졌던지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였다. 일본은 군을 추가 파병해 황궁 전체를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대한제국을 압박했다. 늑약 체결 8일 전에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위협했지만 황제는 늑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대신들에게 일일이 가부를 물었고 한규설 참정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하자 이토는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질렀다. 한규설을 비롯해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무대신 이하영만이 을사늑약 불가(不可)를 썼고, 을사오적인 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했다. 을사오적 가운데 이근택은 피란 시절의 명성황후에게 생선을 바쳐 요직으로 진출했지만 돈에 매수돼 일본의 첩자로 변신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날 그는 가족들에게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토록 혁혁(赫赫)할 거요.”라고 자랑했다. 을사오적은 숱한 암살 시도에 시달렸고 칼을 맞기도 했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본강점기 전반에 걸쳐 각종 협약과 합의를 체결하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른다. 게다가 이완용과 이근택의 후손들은 국가에 귀속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수십 차례에 걸쳐 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조선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군림했던 이완용의 후손은 재산 소송에서 일부 승소해 땅을 되찾았으나 주변의 비난에 땅을 팔고 국외로 도피했다. 을사오적 가운데 이지용은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고, 박제순의 상속자 박부양은 10대의 나이에 일본에서 자작 작위를 받고 당시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파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 선진화의 굴레이자 사회 구조적 불평등의 근간으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한·일 100년 대기획]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꼬박 100년이 흘러갔다. 아시아의 평화와 대한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안중근은 옥중에서 미완성 수고(手稿) ‘동양 평화론’을 쓰다가 형이 집행됐다. 머리말과 목차만을 남겼을 뿐이다. 일련의 상황들은 얼핏 역설 또는 가치의 전복에 가깝다. ‘동양 평화’ ‘대동아공영’을 주창했던 일본의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를, ‘동양 평화를 원하던’ 안중근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총살했으니 말이다. 안중근의 의거 10개월 뒤인 1910년 8월 일본은 한국을 병탄(倂呑)한다. 100년이 지났건만 평가는 엄정하고, 치밀해야 한다. 새로 오는 10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더더욱 냉철하고,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 또한 지난 역사의 평가작업으로서 제기되는 몇몇 의문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필요하다. #장면 1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10분 중국 하얼빈 기차역. 일본의 전 총리이자 조선 통감부 제1대 통감(총독)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탄 기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러시아 군복 스타일의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대합실에서 일어나 천천히 플랫폼으로 걸어나갔다. 만 서른 살의 청년,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안중근이다. 이토는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68세의 노정객 이토는 기차 안에서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20분 남짓 대화를 나눈 뒤 모습을 드러냈다. 안중근은 러시아 사열병 바로 뒤쪽까지 다가섰다. 신문기자로 위장했기에 접근에 어려움은 없었다. 이토가 사열병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안중근은 앞으로 뛰쳐나가 품 속에서 권총을 빼내 세 발은 이토에게 명중시키고, 나머지 세 발은 수행원들을 쐈다. 그리고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우레 코레아!(한국, 만세!)”를 외쳤다. 이토는 30분 뒤인 오전 10시 사망했다. 현장에서 붙잡힌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 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고 밝힌 뒤 사형을 선고받았고, 항소를 포기하며 죽음을 선택했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뤼순(旅順) 감옥에서 형이 집행됐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였다. 뤼순 감옥 뒷산에 묻힌 그의 유해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지난해 9월 동상으로나마 돌아온 안중근은 여러 논란 속에서 제자리를 못 잡다가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경기 부천 안중근 공원(구 중동공원)에 어렵사리 정착할 수 있었다. #장면 2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일방적 을사늑약 체결, 1906년 조선 1대 통감으로서 펼친 각종 조선 말살 및 식민지화 정책,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등 일제가 벌인 동아시아 침략에 주도적 역할을 맡는 등 씻을 수 없는 죄과를 남긴 인물이다. 크고 작은 저항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 그는 안중근에 4년 앞서 또 다른 대한제국 청년의 의거로 중상을 입었다.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1906년 3월)하기 직전 수원으로 사냥 나들이를 나서는 등 여유 있는 한때를 보냈다. 해 저물녘 안양을 들러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자리에 앉았는데 을사늑약 체결에 비분강개하던 스물 세 살 원태우가 돌멩이를 여러 개 던져 유리창을 깨뜨렸고, 이토의 얼굴에는 파편 여덟 개가 박혔다. 원태우는 징역 2개월에 장형(곤장 100대)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과 일본 역사 안에서의 평가는 또 다른 극점에 놓여 있다. 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격(格)으로 평가받는다. 빈농의 아들에서 출발한 그는 일찍이 영국 런던대학으로 유학해 화학을 전공하는 등 서구 문물과 근대 교육을 받아들였고, 일본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마련했으며, 내각제 등 일본 정치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다. 초대 총리와 5·7·10대 총리를 지냈고, 추밀원 의장, 귀족원 의장을 맡는 등 36년 동안 일본의 최고 핵심권력에 있었다.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총리에서 몸을 한껏 낮춰 조선의 초대 통감을 자처했으니, 일본에서는 개인의 욕망보다는 겸손하게 대의에 충실한 인물, 동양 평화를 추구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토의 장례는 1909년 11월4일 히비야공원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1963년 발행된 일본의 천엔(円)권 화폐 속 인물이 됐을 정도로 지금도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다.
  • [한·일 100년 대기획] “큰 고통받은 위안부·강제징용 문제 반드시 털고 가야”

    [한·일 100년 대기획] “큰 고통받은 위안부·강제징용 문제 반드시 털고 가야”

    한완상 전 부총리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서울신문과의 신년특집 인터뷰에서 “한·일 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서로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전 부총리는 정부 차원에서 청소년 교류를 적극 추진하기를 희망했다. 와다 명예교수는 일왕의 방한 문제에 대해 “방한한다면 방문 자체로 그쳐서는 안 되며 역사적이어야 한다.”면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순종의 묘에 참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 전 부총리는 일왕의 방안을 전제로 “100년 전 병탄의 부당성 등 일본의 잘못을 정중하고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고 말했다. 다음은 대담 형식으로 구성한 두 원로의 인터뷰다. │도쿄 박홍기특파원·서울 홍지민·강병철기자│ →한국(일본)에게 일본(한국)은 무엇인가. 한완상 전 부총리 일본은 20세기 초부터 36년간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억압·수탈·차별한 나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데다 아시아에 속하면서도 서구 열강에 속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나라다.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 일본과 한국은 무척 깊은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은 한국을 침략, 식민지화했다. 반성해야만 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 봐도 한국은 일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이웃 나라다. →지난 100년간 한·일 관계는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 전 부총리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있었다. 1910년 한일병탄이 이뤄졌다. 늑약의 1조는 ‘통치권을 완전히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이양한다.’이다. 519년 조선 왕조가 끝나는 순간이다. 1936년 일본은 내선일체를 외쳤다. 창씨개명, 한글사용 금지 등도 강요했다. 문화와 민족혼마저 빼앗는 통치를 시도했다. 태평양전쟁에 패전한 일본은 승전국인 미국과 함께 한반도의 분단에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 전범국인 일본은 통일된 자유 국가로 남고, 식민지로 질곡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한반도는 갈라져 있다. 100년을 되돌아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와다 명예교수 단적인 예로 조선은 식민지였기에 일본에 저항하지 못하고 침략전쟁에 말려들었다.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가장 큰 죄다. 1945년 한국은 독립을 맞았지만 일본은 침략과 식민 지배에 사과하지 않았다. 역사 자체를 내동댕이쳤다. 때문에 일본은 그때의 역사를 잊고 살아오게 됐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맺었는데 그 당시에도 과거의 반성 없이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한국은 엄청난 노력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일제 강점이 현재 한국인이나 일본인에게 미친 영향은. 한 전 부총리 한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 충격을 줬다. 씻기 힘든 수치심과 분노다. 백색(서구) 제국주의의 흐름을 타고 등장한 황색(아시아) 제국주의의 제물이 된 사실에 대한 울분과 함께 민족자주의식이 형성됐다. 해방됐을 때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믿지 말자. 일본이 일어난다. 조선은 조심해라.’라는 민담을 들었다. 백색·황색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일본을 향한 불신과 거부감이 한국인의 성격 속에 내면화된 것이다. 와다 명예교수 일본은 한국에 대한 병합(와다 명예교수의 표현대로)한 사실을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잊으려 했고, 실제 잊어버렸다. 그런 탓에 일본 젊은이들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었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길 정도다. 반면 한국의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역사다.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를 받은 사람의 고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지나쳐 버리고 싶어 한다. 한국을 병합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의 생활 속에서는 별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인은 분명하게 한국인의 감정을 읽어야 한다. 한 전 부총리 너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에게 감정적인 대응을 자제하라는 건 정말 잔인한 일이다. 울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가장 큰 고통을 받은 두 부류가 위안부와 강제 노동자다. 합리적으로 털고 가야 한다. 경제적 보상 이전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잘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시인 받아야 한다. 또 최소한의 경제적 보상도 있어야 한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람직한 미래는 가능한가. 한 전 부총리 가능하다. 19~20세기는 서세(西勢)의시대였다. 19세기는 팍스브리태니카 시대, 20세기는 팍스아메리카나 시대였다. 21세기는 동세(東勢)의 시대다. 동세의 기운을 정보기술(IT) 혁명이 활성화시키고 있다. 줄씨알(네티즌)이 국경을 초월하고 있다.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는 데다 연대 강화도 쉬워졌다. 동세의 기운이 솟구치고 있다. 21세기에 일본과 한국, 중국까지 평화의 중심세력으로 힘을 합칠 수만 있다면 글로벌 이슈, 즉 기후나 테러 등 어떤 문제에서든지 굉장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일간 평화 강화에 반하는 열악한 조건의 존재가 냉전벨트다. 한국 정부의 힘만으로 해체할 수 없다. 미국과 일본의 지원이 필요하다. 북한 경제에 대한 대국적인 지원은 한반도 냉전을 해체하는 출발점이다. 그렇게 되면 남·북, 북·일, 북·미 관계 정상화가 쉬워질 것이다. 한국, 미국, 일본 정부가 함께 한반도 냉전 체제를 확실히 깨 21세기에 세계에서 냉전체제가 종식됐다는 선언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와다 명예교수 미래를 생각하면 일본과 한국은 자국의 테두리만이 아니라 지역적인 공동 번영, 공생을 위해 협력해 나가야만 한다. 동아시아공동체 구축에서도 한국은 중심에 서서 추진자, 대안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일본도 성심성의껏 힘을 보태는 게 한·일의 미래지향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일본은 섬나라다. 한국은 반도국으로 대륙과 맞닿아 있는 만큼 지리적으로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 중요한 위치에 있다. 과감하게 말하면 한국과의 협력 없이 일본의 미래는 없다. →국제 사회에서 한·일의 경쟁과 협력은 필연적이다. 한 전 부총리 정보기술(IT), 생명공학(BT), 문화 기술(CT) 분야는 일본과 격차가 없다. 서로 협력하며 경쟁할 수 있다. 협력 없는 경쟁은 금물이다. 21세기는 협력을 통한 경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처럼 서로 먹고 먹히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 실제 엇비슷한 수준의 IT, 동물 복제 등에서 강한 BT, 특히 한류로 대변되는 CT는 일본에 자극을 줄 수 있다. 또 제조업, 조선, 자동차 분야 등도 한국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단계에 올라섰다. 와다 명예교수 잘할 수 있는 분야는 서로 이끌고 격려해야 한다. 뒤처진 부분은 서로 배우면서 따라가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앞으로 나가길 바란다. 달리 말해 모든 것은 한 가지 사안 속에 경쟁, 협력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 어떤 것은 경쟁, 어떤 것은 협력이라는 식으로 이분화할 게 아니다. 조화시키며 동시에 추진해 나가야 한다. 한국의 에너지는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한·일 양국의 국민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와다 명예교수 과거 역사에 대해 반성하도록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렸으면 한다. 인내심을 갖고 말이다. 한국의 노력 덕에 일본에도 여러 변화가 가능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흘린 땀에 비해 일본 전체적으로는 크게 변하지 않는 점도 알고 있다. 초조하기도 하고, 불만이 있는 줄도 잘 안다.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한국을 여러 면에서 좋아하는 사람들도 크게 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인은 과거의 역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역사는 역사대로 놓아두고 미래로 나갈 수는 없다. 미래를 위해 더더욱 과거 문제를 인식하려고 힘써야 한다. 한 전 부총리 일본은 한반도에서 저지른 부당한 조치들을, 최소한 독일이 연합국에 보여줬던 수준으로 시인했으면 좋겠다. 독일 정부는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고개를 숙인다. 나치 전범에 대해서는 시효가 없다. 일본이 왜 못하는지 안타깝다. 일본 지식인들의 말처럼 늘 아시아를 넘어 서구를 좇는다면 적어도 독일 수준으로는 가야 한다. 불행한 역사는 청산해야 한다. 양국에는 이를 거부하는 세력이 있다. 한국 쪽에도 식민지는 한국을 근대화시킨 시기라고 긍정하는 일부 지식인·정치인들이 있다. 일본에도 이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우파들이 있다. 친일 세력과 일본의 보수적 민족주의 세력의 냉전적 연대와 연계를 어떻게 성숙하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가가 중요한 과제다. 이런 것을 위해 한·일간 여러 차원에서 교류·협력이 필요하다. 와다 명예교수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뛰어넘는 ‘하토야마 담화’가 발표되기를 희망한다. 무라야마 담화는 침략과 조선지배에 대해 사죄하고 반성하는 내용으로 발표됐다. 담화가 나온 이후 일본 국회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병합을 강제적인 것으로 볼 것인지,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다. 담화로부터 15년이 지났다. 적잖게 훼손됐다. 그러나 식민지화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등에 대한 역사연구는 꾸준히 진행됐다. 병합은 한민족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에 의해 강제됐다. 따라서 ‘하토야마 담화’에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적 판단을 담아야 한다. 전향적이고 획기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병합 100년은 상징적으로 아주 좋은 계기다.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바른 역사관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 전 부총리 젊은 세대는 조부모·부모 세대가 이룬 성취, 즉 독립운동, 민주화, 인권운동, 평화운동 등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요 문제는 좋은 직장과 안정된 삶 등 개인 중심적인 복지다. 어느 나라나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다. 분단의 아픔, 억울함에 대해 체계화되고 설득력 있는 지식을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됐으면 한다. 젊은이들은 지식을 획득하는 속도나 양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걸 보면 인터넷 시대에 새로 깨우쳐 줄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와다 명예교수 젊은이들이 옛일에 대해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사회에 있어서든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태평양전쟁을 잊지 않도록 젊은 세대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사람들이 역사의 연구, 조사를 계속해야 한다. 역사란 건망증이 심하다. 방치해 두면 잊혀진다. 따라서 자국만이 아닌 넓은 범위에서 지역적 협력을 통해 건망증을 방지해야 한다. 한 전 부총리 일본 젊은이들은 조상들이 제국주의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10여년 전 중국 창춘(長春)에서 겪은 일인데 일본 청년이 위화관에서 인체실험인 마루타 전시를 보고 기절한 일이 있었다. 자기 조상들의 만행을 믿지 못해서다. 일본 교육이 문제다. 불과 할아버지 세대에 있었던 반인류 범죄인데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서대문 역사박물관에 있는 독립투사의 고문받는 모형을 보고도 충격을 받는다. 양국 청년들이 서로 불행했던 과거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서로 용서해 주는 두 민족 간의 정신적 트라우마(충격)를 극복하는 치유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일 청년들의 교류를 정부 차원에서 적극 추진했으면 한다. 비정부기구(NGO)나 종교단체도 앞장서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을 한국에 초청하겠다고 했는데. 한 전 부총리 일왕 초청엔 두 가지 조건이 전제돼야 한다. 100년 전 병탄의 부당성 등 일본의 잘못을 정중하고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그래야 한·일, 북·일 관계 모두에 도움이 된다. 동아시아공동체에도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 일왕의 가계는 한민족의 조상에 닿는다. 종묘에서 경의를 표하고, 특히 100년 전 병탄과 105년 전 늑약 때 가졌던 고종황제, 명성황후, 순종의 아픔 등을 되새기고 참배했으면 한다. 대학생들과 자유로운 간담회를 갖는 것도 좋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일왕 초청은 전적으로 찬성한다. 와다 명예교수 천황은 일본 국민의 상징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전쟁이 끝날 당시 지금의 아키히토 천황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신춘 휘호로 평화를 염원하는 글자를 썼었다. 마음이 깃든 휘호라고 본다. 천황은 히로히토 전 천황이 방문할 수 없었던 중국도 찾았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방문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단 한국 방문 자체에 그쳐서는 안 된다. 역사적이어야 한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순종의 묘에 참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2010년에 실행된다면 매우 뜻깊을 것이다. 2010년은 100년이라는 역사 속에서 마지막 기회의 해다.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 문제도 병탄 100년을 맞는 시점에서 중요한 문제다. 한 전 부총리 하토야마 정권이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들려면 대북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방북 의사가 있다고 했다. 북한 지도자와 허심탄회하게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한 환경 조성에 앞장섰으면 한다.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하토야마 정권의 노력은 긴요하다. 역사적인 성취를 하려면 대북 관계를 전향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북한과 대화를 통해 두 나라 관계를 개선하면 불가피하게 거쳐야 할 부분이 식민지 청산문제다. 과감한 사죄와 적절한 보상조치를 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1965년 한·일 기본조약보다 훨씬 평가받는 북·일 기본조약이 나오고, 하토야마 정권이 주창하는 동아시아공동체가 구축될 것이다. 하토야마 정권은 동아시아의 비핵화도 강조해야 한다. 동아시아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화는 함께 해야 할 과제다. 와다 명예교수 일본과 북한의 국교 정상화는 실현돼야 한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100년이 된 이때 피해를 입은 국가의 반쪽과 아무것도 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다. 어떻게 해서든 국교를 정상화해야 하는 것이 옳다. 교섭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 불행하게도 북한의 핵개발이 국제적인 이슈가 됐다. 그러나 국교 정상화를 절차적으로 본다면 북한의 핵포기와 국교 정상화 추진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한다. 병합 100년이라는 측면에서 절호의 타이밍이다. 일본은 국교 정상화를 한 뒤 과거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경제협력을 약속할 수 있다. 경제 원조를 갑자기 추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국교정상화 뒤라면 자연스럽다. 그러면 남북대화에도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본다. 통일은 필연적인 것이며 머지않은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전제는 모든 과정이 완전히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 전 부총리 북·일 관계에서 한국의 역할은 분명하다. 일본이 6자회담 밖에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를 꺼낼 경우, 북한이 전향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권고할 수 있다고 본다. 또 일본에 대해서도 납치문제가 한반도 평화 정착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6자회담에서 납치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새로운 채널을 가동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hkpark@seoul.co.kr ●한 前부총리는 1980년대 초까지 저항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이다. 제5공화국이 끝나도록 금서였던 저서 ‘민중과 지식인’은 운동권뿐만 아니라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다. 사회과학자이면서 교육, 정치, 종교계 등을 넘나들었다. 시민단체인 경실련에도 관여했다. 교수 시절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두 차례 해직과 복직을 거듭한 데다 수형 생활을 하기도 했다. 문민 정부와 국민의 정부 등 2대 정권에서 통일부총리, 교육부총리를 역임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한성대 등 3개 대학의 총장도 지냈다. 최근에는 언론, 논객, 시민과 대화한 내용을 묶으며 YS(김영삼 전 대통령)부터 MB(이명박 대통령)까지 돌아보는 대담집 ‘우아한 패배’를 출간했다. ●와다 하루키는 일본을 대표하는 진보학자이자 한반도 전문가다. 1960년 도쿄대 문학부를 졸업, 66년부터 도쿄대 강단에 섰다. 소련사와 북한 현대사가 전공이다. 1970~80년대 일본 지식인으로서 민주화 운동 때문에 투옥된 김대중·김지하씨 등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1980년 김대중씨 사형 선고와 관련, 교수 신분으로 주일 한국대사관 앞에서 매일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조만간 러·일전쟁을 중심으로 1875~1904년의 역사를 다룬 저서를 상·하권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그는 “최근 틈나는 대로 대장금, 태왕사신기, 주몽 등 한국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혁명 1991’, ‘역사로서 사회주의’, ‘조선전쟁’ 등 30권 이상의 저서를 집필했다.
  • [데스크 시각] 헌재와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문소영 문화부 차장

    [데스크 시각] 헌재와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문소영 문화부 차장

    이완용,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그에 대해 4~5년간 생각이 많았다. 미술관 갤러리를 다니면서 이완용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더 많았다. 가까이는 올 초 상업화랑에서 근대 서화전이 몇 차례 열려 이완용의 글씨가 등장하면 꼼꼼히 살펴보게 됐다.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서당대유가서후’에서 “무릇 글씨는 그 사람을 닮는다. 옛적에 글씨를 논하는 사람들은 작가의 평생도 아울러 논하였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완용의 유려하고 맺히는 데 없는 글씨체와 항일독립운동의 군자금을 댔다는 김진우의 단정하고 깐깐한 글씨체, 거칠 것 없이 호방한 안중근의 글씨체를 비교해 보기도 했다. 이완용을 생각할 때 문득 머릿속으로 더듬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완용은 외교권을 헌납한 을사늑약과, 국권을 고스란히 갖다바친 경술국치를 체결했을 때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스스로의 자각이 과연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완용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자 예술인, 고위 공무원,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일본·중국 등에서 들어오는 최신 저서를 직접 읽었을 것이고, 국제 정세에 대한 고급 정보도 이런저런 통로를 통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꾼 조국의 운명이, 사실은 풍전등화라고 직감했을 것이다. 그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 나라를 일신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은 물론 서양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로 서양과 대등하게 올라선 일본과 손을 잡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그의 불행은 일본이 1945년에 그렇게 빨리 패권을 잃어버릴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2009년 11월에 광화문에서 안중근 의사의 얼굴이나, 약지를 단지한 그의 손바닥 도장 대신 이완용의 얼굴이나 글씨를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가정과 상상도 해본다. 정치인이자 고위 공무원인 이완용의 오판을 1905년, 1910년에 막아줄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행정부의 잘못된 결정을 평가해 뒤집을 수 있는, 이를테면 의회라든지, 법적으로 효력을 다투는 사법부 말이다. 그랬더라면 이완용의 판단은 국회나 사법부를 통해 바로잡힐 수 있지 않았을까. 이완용의 처지에서 100여년 전에 절차로서의 민주주의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도 없었던 것이 안타까울 수 있겠다. 요즘 헌법재판소(헌재)를 자주 생각해본다. 헌재는 최근 미디어법과 관련해 국회 본회의에서 대리투표 등 위법행위가 있었지만, 미디어법의 국회 통과는 유효하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하다.’라는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 방식에 대해 배우고 자라온 상식선에서 볼 때 의외의 판결이다. 대리시험을 봤지만, 합격은 유효하다, 도둑질은 위법이지만 장물취득은 유효하다, 커닝해도 좋은 성적은 유효하다, 간통을 했지만 기존 결혼은 유효하다는 식의 인터넷 유머가 나돌아다니는 까닭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헌재는 1987년 학생·직장인 등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호헌철폐, 직선쟁취’를 외치고, 꽃 같은 목숨을 여럿 잃어가며 만든 제6공화국 헌법으로 탄생한 기구이다. 그간 사법부가 워낙 행정부(검찰)의 시녀처럼 굴었던 탓에 사법부를 불신하며, 헌법정신을 지켜보자고 대법원 위에 옥상옥으로 만들어졌다. 헌재는 집권당의 통치행위를 옹호하고 국민의 법 감정과 법질서를 교란하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라고 만들어진 기구가 아니다. 이번 미디어법 결정을 볼 때 절차로서의 민주주의를 수호하지 못하는 헌재가 존재할 이유를 통 모르겠다. 헌재는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나 수단이 없었던 이완용처럼 핑계도 없으면서 말이다. 문소영 문화부 차장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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