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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동 지날때 우당선생 기억해요

    명동 지날때 우당선생 기억해요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의 흉상이 서울 중구 명동 한복판에 선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이곳은 우당의 옛 집터이자 100여년 전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역사를 되새기고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가자는 의미를 전한다. 중구는 24일 오후 4시 명동11길 2 서울YWCA 마당 입구에서 흉상 제막식을 갖는다. 청동 재질의 흉상은 높이 2m 20㎝, 너비 1m에 이른다. 구는 지난해 3월 우당기념사업회의 흉상 설치 제안을 받고 부지 소유주인 서울YWCA와 수차례 협의를 통해 설치를 결정지었다. 우당 집안에선 형제와 자식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시영(1869~1953)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우당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동생의 동상이 남산에 세워져 있으니 형제가 지척에 서게 되는 셈이다. 우당은 남산골(저동)에서 이조판서 이유승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4년 중구 남창동 상동교회가 설립한 민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을사늑약 무효 투쟁과 젊은이들의 독립정신 함양에 주력했다. 항일 민족운동 조직력과 인적 토대를 제공했던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집안 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에 내놓고 6형제 60명의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독립협회에 참가해 신민회를 조직하고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는 등 독립투쟁을 벌이다 1932년 일제에 검거돼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순국했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우당의 독립운동 정신과 애국심을 널리 알리는 장소로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아베가 참배한 요시다 연구 전무… 한국역사가 日우경화 방조한 것”

    “아베가 참배한 요시다 연구 전무… 한국역사가 日우경화 방조한 것”

    “한국 역사학계에서 이들(요시다 쇼인과 도쿠토미 소호)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가장 큰 피해국인 한국이 오늘 일본의 우경화를 방조하는 행위가 된다.”(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1905년 을사늑약이나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원천무효였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에 의해 강박된 1907년 광무 황제의 황위 이양은 유효했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한국의 역사교과서들도 좀 더 논리적 정합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김명섭 연세대 교수) 2010년 한일병합조약 무효 선언을 내놓았던 한·일 지식인들이 27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동북아역사재단에 다시 모였다. 이날 ‘2010년의 약속, 2015년의 기대’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에 참석한 지식인들은 현 한·일 상황에 대한 문제를 진단하고, 제안을 내놓으면서 발전적인 양국 관계 설정을 모색했다. ‘근대 일본 한국 침략의 사상적 기저’를 주제로 발표한 이 교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역사관과 행보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요시다 쇼인과 도쿠토미 소호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선 2013년 8월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대신 요시다의 묘소를 선택한 것을 한국 언론들이 ‘개인적 취향’으로 판단한 것을 두고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요시다 쇼인은 기토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고 한국 침략에 수훈을 세운 인물들의 스승”이라면서 “그는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정한론(征韓論)을 일본이 나아갈 길로 가르쳤다”고 설명했다. 정한론은 1870년대 일본정계에 일었던 조선 침략론을 일컫는다. 그는 아베 총리가 지난해 말 야스쿠니 신사를 찾은 것에 대해서는 “기습적인 기획이 아니라 정확한 순서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요시다의 묘소를 참배한 뒤 그의 가르침으로 대외 침략정책을 수행하면서 희생된 자들을 위로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가는 수순이었다는 것이다. 이어 일본 제국의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평론가였던 도쿠토미 소호를 “요시다의 팽창주의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 간 주역”으로 소개하면서 아베 총리의 역사관은 팽창주의 사관을 이어 가면서 “제국의 옛 영광을 되찾는 역할을 해내겠다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김영섭 교수는 국내 역사 인식과 역사교과서의 변화를 요구했다. 김 교수는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은 원천무효라면서 1910년을 대한제국의 ‘역사적 종점’으로 설정한 현행 교과서의 서술은 논리적으로 상충될 수 있다”고 했다. 한일병합으로써 대한제국이 소멸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 한일병합조약의 영향력은 유효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토론자로 나선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교수는 한·일 간 ‘새로운 21세기 패러다임’을 제안하면서 “아베 정권은 20세기 전반 제국주의시대 패러다임으로 돌아가 있다. 21세기 패러다임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한·중, 한·미, 일·중 관계가 연동되면서 한·일 관계는 더 구조적이고 어려운 상태가 됐다”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정도다. 식민지 책임론을 가지고 논쟁하면 끝이 없다. 한·일 간극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는 대상을 놓고 대화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서울광장] 20세기 영·러·일, 21세기 미·중·일/문소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20세기 영·러·일, 21세기 미·중·일/문소영 논설위원

    전 세계 식민지 개척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임을 자랑하던 영국은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상당히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188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이유도 조선과 러시아 간 밀약설(1884년 조러수호조약)이 흘러나온 탓이었다. 요즘 ‘외교의 달인’처럼 소개되는 고종은 당시 국제정세에 둔감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더니 러시아공사로 아관파천(1896년)을 했고, 1904년까지 친러정책을 폈다. 영국 입장에서 역린(逆鱗)이었다. 조선이 러시아의 손에 떨어지길 원하지 않았던 영국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을 끌어들였다. 영국이 먼저 1901년 7월 주영 일본공사를 불러 1902년 1월 제1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익 보호’는 받아들여졌다. 제1차 영일동맹은 1905년 8월 제2차 영일동맹으로 강화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3개월 전으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에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용인받은 것이다. 이 동맹은 비극으로 끝났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함께했던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영국을 배신했고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안전을 위협했다. 21세기 최강국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는 나라는 G2로 떠오른 중국이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시대는 20세기 말에 막을 내렸지만,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의 팽창은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G2 중국의 등장 이후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올 초부터 아베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받아들인 일명 ‘평화헌법’을 개정해 집단 자위권을 획득하겠다는 입장을 꾸준히 주장했다. ‘보통국가’가 되겠다는 의미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가 되겠다는 것이다. 한데 평화헌법은 맥아더 장군이 2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물어 패전국 일본에 부여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과거 침략전쟁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요설을 늘어놓았다. 잘못된 역사 인식에 기반한 아베 정부의 일본 재무장에 대해 일제에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의 우려와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자신감의 배경은 미국의 지지였다. 한국의 ‘혈맹’ 미국은 한국정부와 국민의 우려, 걱정에 동조하지 않고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 같다. 미 존 케리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은 지난 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2+2)에서 “미국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포함한 일본의 방위력 증강 구상을 환영한다”고 공동성명을 내 일본의 재무장을 공식화했다. 집단적 자위권은 일본이 직접 공격받지 않아도 미국이나 한국 등 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반격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아베 총리가 주장하는 바 “적극적 평화주의”인 것인데,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군대가 진주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 결과를 두고 우리 정부나 외교부 등은 ‘아차’ 싶겠지만, 이미 깨진 항아리다. 한국인들의 반발을 우려한 우리 정부는 “아니다”라고 반박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안보를 강조하는 한국의 보수는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물론 자녀도 군 복무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정부는 전시작전권도 미국에서 찾아가라고 하는데 연기를 요청했다. 전시작전권 연기와 연계해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에 편입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중국에 던져줘 갈등의 소지도 남겼다. 복잡하게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고, 대처할 수 있는 외교적 능력이 절실한 시기이다. 100여년 전 개항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과 선택으로 겪은 어려움을 21세기에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symun@seoul.co.kr
  • [열린세상] 타나토스의 시대를 어찌할 것인가?/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열린세상] 타나토스의 시대를 어찌할 것인가?/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이제는 사라진 여신이 되었지만 동양의 여신 서왕모는 양면성을 지녔다. 그녀는 마귀할멈과 같은 모습일 때는 죽음의 여신이지만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일 때는 불사약을 지닌 생명의 여신이었다. 신화를 상징으로 풀면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내재하는 삶과 죽음의 양면성이라 하겠다. 프로이트도 우리에게는 삶의 본능인 에로스적인 욕망과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적인 욕망이 공존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유명 인사의 자살 이후 이를 모방하는 이른바 베르테르 신드롬, 과거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자살 공유 사이트라는 것의 존재, 꽃 같은 나이의 학생들이 서슴없이 목숨을 버리는 안타까운 실정 등을 볼 때 확실히 타나토스적인 욕망이 목전의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가 상황에 따라, 소신에 따라 정당화되고 때로는 찬미되기도 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시엔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를 보면 로마의 현인 세네카가 총애하는 여종의 시중을 받으며 우아하게 자기 손으로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 있다. 신미양요 때의 미 해병대 측 기록을 보면 강화도 전투에서 패배한 조선군이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죽음을 택해서 그 투혼에 감동했다는 대목이 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충정공 민영환은 음독해 순국한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는 충절의 일화를 남기고 있거니와 오백년 조선 시기를 통해 여성들이 정절 이데올로기에 의해 목숨을 버린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과거에는 자살이라 하지 않고 자진(自盡)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썼다. 그러나 나라가 망할 때 명분에 죽고 사는 노론계의 인물들은 즉각 자진하는 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행합일을 추구하는 소론계의 인물들은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저항하는 방식을 택해 투쟁을 지속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 어떤 충절의 행위라 해도 자진이 미사(美事)로만 여겨진 것은 아니었다. 근래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필자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무명의 한 젊은 주부와 한때 화려한 은막의 스타였던 최진실씨의 자살이다. 특히 최진실씨의 경우는 친인척의 잇따른 자살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슬픔을 주었던 사건이었지만, 필자는 좀 다른 각도에서 비극의 본질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무명의 한 젊은 주부. 남편은 떠돌이 노동자였다.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지만 이제는 손 벌릴 곳도 없는 그녀는 생활고를 못 이겨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투신했다. 아이 때문에 산다고 했는데 그런 이유마저도 존재하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그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구원받기를 포기하고 어린 두 아이와 더불어 자살을 감행한 극한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는,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최진실씨는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일어나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한 입지전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이 나라에서 누구든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표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중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 인터넷에서의 갖은 음해와 비방은 결국 그녀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근대의 불우한 여성 작가 김명순이 절망한 ‘독한 세상’을 감내하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 그녀의 모습은 이 사회가 약자의 부상에 대해 얼마나 가혹한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아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국민 소득이 3만 달러로 향하고 한류가 세계를 석권한다 할지라도 자살률 1위의 국가라면 결코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나라가 아니다. 금수강산, 한강의 기적, IT 강국, K팝 등 그 모든 찬사도 죽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으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한국의 존재도 빛이 바랜다. 자살률 1위라는 이 불행한 현실은 젊은 날의 ‘아픔’이나 누구나 겪는 삶의 ‘무게’ 정도로 진단하고 치유할 수 있는 단계를 훨씬 벗어났다. 무명의 한 젊은 주부와 최진실씨의 비극적인 사례에서 보았듯이 그것이 설사 개인의 ‘아픔’이나 ‘무게’에서 출발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이 사회가, 우리가 껴안고 책임질 일이었다. 황지우의 시구를 넓게 인유하자면 우리 모두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는 마음가짐이 절실한 시점인 것이다.
  • 근대사 간직한 1㎞ ‘서울 정동길’

    근대사 간직한 1㎞ ‘서울 정동길’

    12일 오후 7시, 케이블채널 서울신문STV로 방영되는 ‘TV 쏙 서울신문’은 봄을 맞은 서울 정동길을 영상에 담았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신문로까지 1㎞ 남짓 이어지는 이 길은 ‘덕수궁돌담길’이라고도 부른다. 19세기 후반 개화기에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들어서면서 서구식 교육기관과 종교건물이 집중됐던 근대문물의 중심지였다. 높다란 덕수궁 돌담 옆 아름드리 가로수길을 걷다 보면 옛 대법원 건물을 단장해 사용하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과 만난다. 미술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개신교 최초의 건물인 정동교회가 있다. 1887년 10월 미국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세운 베델예배당을 1898년에 증축한 건물이다. 맞은편에는 정동극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춘향전을 뮤지컬 형식으로 각색해서 공연한다. 무용·판소리·기악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을 한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다. 관람객의 75%가 외국인인데 매회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정동극장을 끼고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중명전이 나온다. 이곳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된 치욕적인 공간이다. 이 밖에도 정동길에는 이화여고(옛 이화학당)와 고종이 외세의 위협을 피해 1년 동안 피신했던 러시아공사관 등 근대사를 설명해주는 장소나 유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TV 쏙 서울신문’은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해금니’를 만든 건국대 예술디자인대 영상학과 학생들도 만났다. 해금니는 탈북자의 눈으로 북한의 어두운 현실을 그려 오는 6월 열리는 ‘2013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 학생 경쟁부문에 초청된 작품이다. 안시 페스티벌은 세계 4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중 하나로 권위 있는 행사다. 해금니는 탈북자 김영순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만들었다. 제목인 ‘해금니’는 물속에서 흙과 유기물이 썩어 생기는 냄새 나는 찌꺼기를 뜻하는 말로 북한 내부의 정체된 사회상을 뜻한다. 감독을 맡은 성준수(28·영상전공4)씨는 “김영순씨의 삶을 통해서 탈북자뿐만 아니라 북한의 현실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헬스talk’ 에서는 전문가로부터 신장질환에 대해 들어본다. 정훈 서울시 북부병원 내과 과장은 “초기에 고혈압 이외에는 별 다른 증상이 없는 게 신장질환의 특징”이라고 밝히면서 “평소에 기운이 없거나 메스꺼움·구토·빈혈 증세가 나타난다면 신장질환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톡톡SNS에서는 연일 고조되고 있는 남북 긴장 상황과 관련한 다양한 반응을 전한다. 성민수 PD globalsms@seoul.co.kr
  • “독립운동 김창숙 계승 ‘심산償’ 부활시켜야”

    “독립운동 김창숙 계승 ‘심산償’ 부활시켜야”

    7년째 명맥이 끊어진 ‘심산상(償)’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심산상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성균관대 창립자인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 선생의 뜻을 기려 1986년에 제정된 상이다. 1일 성균관대 등에 따르면 이 학교 교수들의 연구 모임 ‘심산사상연구회’가 제정한 심산상 시상은 2006년 제17회를 끝으로 7년째 중단된 상태다. 심산은 조선시대 성균관을 계승, 1946년 9월 성균관대를 창립해 1956년까지 초대 학장과 총장을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을사오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려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항거하다 공직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성균관대 교수 20여명은 1978년 심산사상연구회를 만들었고 1986년부터는 불의에 저항하고 민족정신을 높이는 학술·실천 활동을 해 온 지식인과 단체를 선정해 심산상을 수여해 왔다. 김수환 추기경, 송건호·리영희·강만길 선생, 민족문제연구소, 박원순 서울시장, 백낙청 교수 등이 이 상을 받았다. 그러나 2006년을 끝으로 시상이 중단됐다. 사회의 무관심과 변화한 시대상 등이 이유라는 게 성균관대 관계자들의 말이다. 연구회의 명칭도 2010년 ‘사상’이란 말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일부 의견에 따라 ‘심산 김창숙 연구회’로 바뀌고 활동도 크게 축소됐다. 연구회는 최근 들어 모임을 재정비하고 심산상을 부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 교수는 “요즘 교수들이나 과거 정권의 눈치를 봐야 했던 재단과 학교는 심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요즘 같은 때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그의 정신이 더욱 절실하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심산상의 중단은 학교의 수치”라면서 “학교의 지원을 통해 권위 있는 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씨줄날줄] 오적(五賊)/함혜리 논설위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을 강압해 조약 아닌 조약을 체결했다.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와 이사청을 설치해 내정간섭을 공식화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다. 간지로 을사년에 이뤄진 이 조약을 일제는 을사보호조약이라고 했고, 우리는 체결 과정의 강압성을 비판하는 뜻에서 을사늑약이라고도 부른다. 이 조약에 서명한 5명의 대신을 ‘을사오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이라고 한다. 나라를 넘기고 그 공로로 일본의 귀족작위를 받고 호의호식했으니, 도적질을 해도 한탕 크게 한 이들이다. 오적의 의미를 사회화시킨 이는 시인 김지하다. 그는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오적이라는 300여행의 담시(譚詩) 를 발표하고 서울 장안 한복판에 모여 사는 다섯 도둑의 부패상을 걸쭉하게 고발했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천하에 흉포한 오적으로 꼽았다. 이들 오적과 포도대장은 어느 맑게 갠 날 아침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아 급살한다. 첨예한 정치적 사건들과 이에 얽힌 사람들을 희화화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이 시로 인해 김지하와 사상계 발행인이 구속됐고, 사상계는 휴간 뒤 폐간됐다. 대선 결과를 놓고 다양한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새누리당이 선전해서 이겼다기보다 야권인사 스스로 문제 되는 언행으로 표를 깎아먹어서 졌다는 ‘민주당 5적설’이다. 여러 버전이 있는데,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는 게 목적이라고 공언하며 1, 2차 TV토론을 주도한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를 비롯해 노인 비하 발언의 정동영 고문, 신천지 연루설을 퍼뜨린 시사평론가 김용민, 종북 논란에 불을 붙인 소설가 공지영, 여성의 가슴을 드러낸 사진으로 투표 독려메시지를 보낸 한광원 전 의원 등 5인이 주로 꼽히고 있다. 이 밖에도 연예인, 진보 교수, 재야 인사 가운데 필요 이상의 거친 언사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인사들이 ‘낙선의 1등 공신’으로 질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투표장에 간 노인들과 투표장에 가지 않은 20대까지 싸잡아 비난을 받는다. 민주통합당 손학규 고문은 “대선 패배는 전체 야권과 진보적 정치세력 전체의 대오각성과 성찰을 준엄히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민주당 측 인사들은 패배의 책임을 남에게서 찾기 전에 결과적으로 자신이 ‘오적’이 아니었는지 자문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이준·손병희·이시영… 17일만큼은 꼭 기억해야 할 그들

    이준·손병희·이시영… 17일만큼은 꼭 기억해야 할 그들

    ‘순국선열의날’인 17일 서울 강북구가 수유동에 위치한 일성(一醒) 이준(1859~1907) 열사 묘역에서 ‘제1회 삼각산 순국선열 합동 진혼제’를 갖는다. 순국선열의날은 선조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고자 국가가 을사늑약 체결일에 맞춰 제정해 73회를 맞았다. 이번 진혼제는 북한산에 안장돼 있는 이준 열사, 손병희(1861~1922)·이시영(1869~1953)·신익희(1894~1956)·김창숙(1879~1962) 선생, 광복군 17위 등 독립과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애국지사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다.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한국대중예술진흥협회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식전행사인 율려춤 공연, 기천 단배공 시연, 본국검 시연을 시작으로 총 3부에 걸쳐 실시된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순국선열묘역이 지난 6월 ‘서울 근현대 미래유산화 기본구상’의 시범사업지로 선정된 데 이어 10월 순국선열묘역 5곳이 문화재청으로부터 문화재로 등록된 가운데 진혼제가 열려 뜻 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구에서는 앞으로 북한산에 안장돼 있는 순국선열들의 유품, 자료 등을 한자리에 모은 근현대사기념관을 세워 선열들이 남긴 애국애족의 마음을 후세에 널리 전하도록 애쓰겠다.”고 덧붙였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매입 완료 美대한제국공사관 우리문화 알릴 교두보로 활용”

    대한제국 자주 외교의 상징인 미국 워싱턴 주재 대한제국공사관(화성돈 공사관)이 원주인인 대한민국의 품으로 102년 만에 완전히 돌아왔다. 현존하는 대한제국 외국 공관 중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 있는 이 건물은 1891년부터 1905년까지 주미 공사관으로 사용됐고 을사늑약 체결 뒤 일제가 빼앗다시피 한 것이다. 정부는 18일(현지시간) 오후 워싱턴의 한미경제연구소(KEI)에서 기념 세미나를 열어 공사관 활용 방안을 논의했다. 문화재청 김찬 청장은 “우선 건물을 보전, 복원, 복구하는 일이 급선무다. 예산과 팀이 이미 준비돼 있다.”면서 “미국민에게는 우리 문화유산을 널리 알릴 교두보가, 우리 국민에게는 역사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헌 배제대 교수는 국권 강탈의 역사 치유, 한·미 문화의 융합 등을 위한 전시, 체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김 교수는 건물을 공간별로 구분해 1층은 1900년대 초의 공사관 건물을 그대로 재현하고 2층은 한국식 주거 체험 공간으로 구성하는 한편 3층은 기획전시 등을 위한 다목적 홀로 만드는 방안을 제안했다. 문화재청은 세미나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이 건물을 우리 전통문화와 한·미 양국 간 교류 협력의 역사를 알리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세미나에 앞서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 주미 한국대사관은 이날 낮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워싱턴의 로건 서클 15번지에 위치한 대한제국공사관 매입을 최종 완료하는 서명식을 가졌다. 정부를 대표해 김 청장이 현 소유주인 미국인 티머시 젠킨스와 최종 매매 계약서에 서명했다. 공사 관저는 대한민국 국유재산으로 편입되고 매입 대금 350만 달러는 문화재보고기금법이 규정한 긴급 매입비에서 지급된다. 행사에는 최영진 주미 대사와 최광수 미주한인회총연합회 자문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김 청장은 “100여년 전 이곳에서 자주 외교를 펼치던 선조들의 희망과 번민 등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젠킨스는 “많은 문화유산이 ‘잃어버려 없어지고 무시되고 도둑맞고 허물어졌지만’ 대한제국공사관은 온전히 옛 주인의 품으로 되돌려주게 됐다.”고 감회를 피력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 제대로 된 이름 불러줘야 제대로 된 꽃이 돼”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 제대로 된 이름 불러줘야 제대로 된 꽃이 돼”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이 맞고,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이 올바른 용어다. 을미사변이 아니라 ‘명성황후 암살 사건’인 것과 마찬가지다.” 임경석(54)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막 출간돼 따끈따끈한 ‘한국근대외교사전’(사람의무늬 펴냄)을 펴들고 지난 15일 교수회관 4층 연구실에서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 줘야 제대로 된 꽃(역사)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며 이렇게 말했다. 임 교수는 “다소 뒤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외교사전이 발간돼서 다행”이라며 “한국사는 한국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시선으로 외교사건을 정리해야지, 한·일역사를 일본학계의 시선으로 정리해서는 본질적으로 맞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1876~1910년 한국 근대외교史 정보 ‘한눈에’ 임 교수는 “‘한국근대외교사전’은 1876년 개항부터 1910년 대한제국 멸망까지 한국 외교의 역사에 등장한 사건, 조약, 인물, 조직에 대한 정보를 담은 감히 ‘국내 최초의 외교사전’이라 자부할 수 있다.”면서 “한국사뿐 아니라 중국사, 일본사, 서양사를 각각 전공한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 외교사학자, 법학자 등 28명의 학자가 모여 239개 항목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임 교수와 그의 후배이자 역사학자인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항준 서울여대 사학과 강사가 대표 편·저자이고, 주요 저자로 연갑수 서울대 교수, 조재곤·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 주진오 상명대 교수, 한철호 동국대 교수, 홍준화 고려대 연구교수 등이 참여했다. 사전에 참고문헌과 책임 저자를 명시해 기술 내용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높였다. 한국근대외교사전은 원래 2007년 교육인적자원부의 예산과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의 지원을 받아 3년 만인 2010년 결과물을 내놓았다. 당시에는 한중연의 ‘한국민속문화대백과’에 수록돼 있었다. 임 교수는 “여기에 2년 동안 수정·보완하고 20여개를 추가해 239개 항목으로 확대해 별도의 책으로 펴냈다.”고 말했다. ●가나다순 항목… 연구·실무자에게 최고의 길잡이 한국근대외교사전의 강점은 무엇인가.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나 역사와 외교관련 실무자들이 관련 항목을 가나다순으로 쉽게 찾아가며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특히 한국 관련 근대사에 영향을 미친 외국인을 많이 발굴해서 실었다. 예를 들자면 대한제국 시절의 러시아 외교관이었던 포타포프가 있다. 그는 국권이 피탈된 상황에서도 러시아 정부와 임시정부 사이에서 외교를 통해 한국의 독립에 많은 도움을 줬다. 우리 독립운동에서 러시아가 많이 배제됐는데, 러·일전쟁에서 진 러시아는 일본에 복수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항하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고, 그것은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유지됐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러시아 연해주에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권업회’나 권업회 산하의 항일무장단체였던 ‘대한광복군정부’ 등도 러시아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 근대외교史, 한국인의 시선으로 서술해야” 최근 국사편찬위원회가 을사늑약이라 쓴 역사교과서를 을사조약으로 고치라고 요구했던 것과 관련해 그는 “국사편찬위의 사고방식은 현재 한국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상당히 다르다.”며 “각국의 외교사는 국익의 충돌 속에서 존재하고 특히 한국의 근대 외교사는 외세 피침의 역사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독자적인 시선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더 나아가 임 교수는 “국사편찬위가 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다가 우경화됐다.”고 비판했다. 임 교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과정이 조약과 같은 합법적인 외양을 띠고 있지만 이것은 형식논리”라며 “최근 ‘유럽식 근대’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전 세계 외교사가 강대국 위주로 서술돼 있기 때문에 침략을 당했던 사람들의 시각으로, 강대국의 편견이 가득한 시선을 배제한 채 다시 써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단순히 외교사를 정리한 책이 아닌 만큼 오늘날 한국의 외교적 생존전략을 파악하고 정책수립에 도움을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2012 국감] “수능 國史 선택률 2005년 27.7%서 작년 6.9%로 감소”

    9일 국회에서 진행된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우리 국사에 대한 홀대와 역사 교과서 서술 등에 대한 여야 의원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국사편찬위, 을사늑약→‘조약’ 수정 권고 김태원 새누리당 의원은 “대입 수능시험의 국사 선택률이 2005학년도 27.7%에서 2012학년도 6.9%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전환된 첫 해인 2005학년도 입시 이후 수험생들의 국사 선택률은 2006년 18.3%, 2007년 12.9%, 2010년 11.3%, 2011년 9.9% 등 꾸준히 감소해 왔다. 김 의원은 “학습량이 많고 연대, 인명 등을 외워야 하는 국사는 상대평가인 수능에서 높은 등급을 받기에 불리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면서 “2014학년도부터 수능 선택과목이 3과목에서 2과목으로 줄어들면 국사 외면 현상은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내외 역사교과서의 표현 및 서술에 대한 논쟁도 이어졌다. 정진후 무소속 의원은 “국사편찬위 검정심의위원회는 올해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제주 4·3항쟁’을 ‘무장봉기’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김태년 민주통합당 의원도 “국사편찬위가 일본 편향적인 교과서 수정을 요구했다.”며 강하게 질타했다. 국사편찬위는 지학사 교과서에 실린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으로 수정하도록 했으며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서는 일본의 ‘국왕’을 ‘천황’이라는 단어로 수정할 것을 권고했다. ●해외교과서 오류 602건중 수정 91건 불과 상당수 해외 교과서가 한국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지만 정부 차원의 대책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유기홍 민주당 의원은 “중국 인민교육출판사의 2011년 지리 교과서 7학년 상권과 초등학교 도덕교과서 등이 동해를 일본어로 표기했다.”고 밝혔다. 김태원 의원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각국 543권의 교과서 중 289권에서 한국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주는 오류 602건을 발견했지만 현재까지 수정된 것은 91건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교과위는 지난 5일에 이어 여야 의원들이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증인 채택 문제를 놓고 공방을 벌이며 진행 1시간 만인 오전 11시 정회하는 등 파행을 거듭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선택! 역사를 갈랐다] (27) ‘지조’ 황현 vs ‘매국’ 이완용

    1910년 9월 8일 밤, 시문(詩文)으로 인근에 조금 알려진 한 시골 선비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그 평생의 마지막 시가 될 글을 써 내려갔다.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가을밤 등잔 밑에서 책 덮고 옛일을 되돌아보니, 사람 세상에서 글 아는 이 노릇하기 어렵구나) 시 넉 수를 다 쓴 그는 다시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후 소주에 아편을 타 마시고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지조 굽히라는 세상에 날 세운 ‘황현’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천품(天品)을 타고 났으나, 재주와 뜻을 펼치기에는 출생시대, 출생지, 가문 중 어느 하나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러 대에 걸쳐 서울에서 벼슬을 한 ‘경화사족’(京華士族) 출신이 아니고서는 과거에 합격하기 어렵고, 설령 어렵사리 합격한다 해도 고위직에 오를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된 시대가 이미 10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꿈이 없었겠는가마는 세상은 그에게 꿈을 접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그런 현실을 확연히 깨달은 것은 나이 30이 넘어 향시(鄕試)에 합격한 뒤였다. 1888년 성균관 생원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그는 말로만 듣던 과거(科擧) 부정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고 느꼈다. 세도가 자제들이 글 써주는 사람과 글씨 써주는 사람을 다 따로 고용하여 대리시험을 치는 관행은 더 이상 비난거리도 아니었다. 돈과 연줄 없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하기를 바라는 것은 고목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과거에 더 연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의 인생의 첫 번째 ‘선택’이었다. 이는 자식들도 자기와 같은 출발점에 세우겠다는 절망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서울에서 강위, 김택영, 이건창 등 마음이 통하는 명사(名士)들을 사귀며 배울 수 있었다는 것만 위안으로 삼고 낙향했다. 서울에 올라오기 얼마 전에 구례로 집을 옮겼던 그는, 그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짓는 한편 자기가 보고 들은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를 용납하지 않았던 세상, 선비에게 지조를 기르라고 당부하는 대신 지조를 굽히라고 요구하는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의 시대를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었다. 대원군도, 왕후와 그 친척들도, 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혼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더러우면 발을 씻을 것’이라는 옛 어부의 말대로 처신했다. 그의 귀에는 전기나 기차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에 관한 소식이 계속 들려왔지만, 그는 그것들이 세상을 맑게 바꿔주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생애 두 번째 ‘선택’을 했다. 그를 버렸던 나라이자 그가 경멸하고 증오했던 더러운 자들이 지배한 나라였지만, 그는 이 뒤에 그를 기다릴 세상은 더 더러운 세상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식들 앞으로 남긴 유서에 “나라가 망했으나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원통치 않겠는가?”라고 썼다. 그는 나라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해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자들이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에 앞장서는 세상에서, 그런 자들이 계속 위세를 부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구는 “증무지하반연공(曾無支廈半椽功) 지시성인불시충(只是成仁不是忠)”(일찍이 나라를 위한 공이 없었으니, 내 죽음은 다만 인(仁)을 이루고자 함일 뿐 충(忠)은 아니로다)이었다. ●日·러·美 연줄 없던 이완용 처세로 부귀 누려 황현이 목숨을 끊던 바로 그 무렵,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은 일왕에게서 백작의 작위와 15만원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과 친인척 관계가 없는 인물로서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그는 며칠 전까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으나 어차피 허울뿐인 자리였다. 그에겐 남은 생애를 부귀 속에서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족했다. 이완용은 황현보다 3년 늦게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서울에서 가까운 편이었으나 가문은 황현 집안보다 그리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역시 어려서 남달리 총명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집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그의 일생도 황현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1세 때, 그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집안 어른들의 ‘선택’에 의해 먼 친척 아저씨인 이호준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새 삶의 기회를 준 양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서형(庶兄)인 이윤용(李允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882년, 당시 이조판서이던 양부 덕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규장각 대교, 홍문관 수찬, 세자시강원 사서 등 출세가 보장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뒤 1886년 신설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했다. ‘나라에서 영재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의 육영공원은 미국인 교사가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 학교였다. 때는 갑신정변 2년 뒤였고, 조야(朝野)에 개화파에 대한 적개심이 넘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모험일 수도 있는 육영공원 입학을 ‘선택’했다. 양부가 비록 고관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문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면, 다른 것으로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왕의 뜻이 있는 곳, 왕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이 그의 출세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덕에, 그는 주미 한국공사관 참찬관과 주미 공사 대리로 두 차례나 미국에 다녀올 수 있었고, 국내 정치에서 계속 영향력을 키우던 미국인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1890년 귀국 후 관계에서 승승장구한 그는 1894년 모친상을 당했다. 일본군을 배경으로 수립된 개화파 내각은 그에게 입각(入閣)을 제의했으나, 그는 모친상을 핑계로 일단 거절했다. 이듬해 학부대신으로 내각에 들어갔지만 을미사변(명성황후 살해사건) 이후 실각했다. 친일 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그는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 정치적 도박에 가담했다. 왕을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으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 한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그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는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 등을 지내면서 한때 독립협회 회장도 맡았다. 독립협회는 애초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워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과 만백성에게 알릴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회원들이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넘어 내심으로 ‘군민동치’(君民同治)와 ‘입헌정체’까지 요구하기 시작하자, 그는 독립협회를 떠났다. 러시아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국왕은 일본을 견제하려고 러시아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러시아는 이 기회에 한국을 자기 세력권 안에 넣으려 했다. 미국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교육, 군사, 경제 각 부문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그는 러시아의 침탈에 반발했으며, 러시아 공사는 그를 증오했다. 고종은 그를 전라도관찰사로 좌천시켜 안전을 보장해 주었으나, 그 자리조차 오래 지킬 수 없었다. 1901년 양부 이호준이 죽자, 그를 핑계로 낙향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1904년 초,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은 그를 다시 궁내부 특진관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이완용은 또 한 차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본도, 러시아도 그의 배경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배경에 충실한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일본 편이었고, 이후의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분명해 보였다. 그는 미국의 선택을 따랐다. 주지하듯이, 을사늑약 이후의 그는 ‘친일 매국노’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그 자격으로 한일병합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일제 강점기 공중변소들에는 흔히 ‘이박식당’(李朴食堂)이라는 낙서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완용과 박제순이 밥 먹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똥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완용 자신은 자기가 시세의 흐름을 잘 살펴 처신한 덕에 계속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그가 한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사실 그는 그 험악한 정변의 시대를 귀양살이 한 번 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이재명의 칼에 맞은 자리가 쑤시고 아플 때마다, 자신이 동포들의 저주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스펙·연줄·기회 강조 現사회, 제2이완용 키우나 대형서점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아무 책이나 몇 권 집어들어 훑어 보았다. 스펙을 쌓아라, 인맥을 다져라, 시세의 흐름을 살펴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등. 다들 이완용처럼 살라고 가르친다. 지조를 지켜라, 기개를 길러라 따위를 가르치는 책은 없다. 누구나 이완용을 욕하면서도 다들 이완용을 본받으려 드는 시대다. 물론 100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그러나 이완용처럼 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나라가, 모두에게 계속 안전할 수 있을까? 전우용(역사학자)
  • 옛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내부 첫 공개

    옛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내부 첫 공개

    미국 수도 워싱턴DC의 ‘로건 서클 역사지구’ 15번지 옛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내부가 102년 만에 공개됐다. 당시 명칭이 ‘대조선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大朝鮮駐箚 美國華盛頓 公使館)이었던 3층짜리 빅토리아 양식의 건물은 대한제국 시절인 1891년 11월 고종 황제가 당시로서는 거금인 2만 5000달러를 하사해 매입한 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돼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14년간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사용됐다.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은 당시 일제로부터 단돈 5달러를 받고 강제 매각당한 이 건물을 최근 350만 달러(약 39억원)에 매입하기로 했고, 경술국치 102주년인 29일(현지시간) 현지 조사단을 파견해 건물 내부 상태를 정밀 검사했다. 이날 공개된 내부 모습 역시 건물 외부와 마찬가지로 100년의 세월이 무상할 만큼 당시의 흔적들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조사단이 접견실과 집무실, 주방과 식당 등으로 사용된 1층을 둘러본 결과 벽면에 붙어 있는 세 개의 벽난로와 타일 문양, 벽체와 천장을 잇는 몰딩 장식, 샹들리에가 걸린 천장 부분의 타원형 테라코타 등 사진 속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었다. 내부 골조나 벽체를 허물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공사의 침실과 휴식 공간으로 사용됐던 2층 역시 유리창 구조와 정교하게 깎은 나무를 조립해 만든 창문 가리개 등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3층은 중간 벽이나 칸막이 없이 완전히 터진 공간으로 당시 미국 정부 관계자나 외국 외교사절을 초청해 연회를 열거나 각종 이벤트를 벌이는 다용도 공간으로 쓰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올해 안으로 건물 내·외부에 대한 정밀조사를 마친 뒤 전문가와 재미교포 사회의 의견 수렴을 거쳐 건물을 한국 전통문화 전시 및 홍보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연합뉴스
  • 102년 만에 되찾는다 원형 남은 유일한 대한제국 공관

    102년 만에 되찾는다 원형 남은 유일한 대한제국 공관

    대한제국이 주미공사관으로 1891년부터 1905년까지 사용했던 미국 워싱턴 소재 건물을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되사들였다고 21일 밝혔다. 대한제국 외국 공관 중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건물로 일제 강점기 과정에서 강제 매각된 소유권을 102년 만에 되찾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특히 재미교포들이 2003년부터 이민 1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 매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건물이라는 점에서 이번 매입은 큰 의미를 지닌다. 1877년 건립된 이 건물은 백악관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로간서클 역사지구(Logan Circle Historic District)에 소재하고, 지하 1층·지상 3층의 빅토리아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조선왕조는 1891년 11월 당시 거금 2만 5000달러에 매입했고, 을사늑약 이전인 1905년 11월까지 주미 공사관으로 사용했다. 공사관은 ‘대조선주차 미국화성돈 공사관’(大朝鮮駐箚 美國華盛頓 公使館)이라 불렀다. 주차는 ‘주재’를 의미하고, 화성돈은 워싱턴의 한자 표기다. 그러나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늑약으로 관리권이 일제로 넘어갔고,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을 2개월 앞둔 1910년 6월 단돈 5달러에 건물의 소유권이 주미 일본공사 우치다에게 넘어갔다. 3개월 뒤인 9월 1일 미국인에게 10달러에 재매각됐다. 현 소유주가 매입한 것은 1977년 9월이다. 문화재청은 “우리 정부와 재미교포 단체의 숙원사업 중 하나가 해결됐다.”면서 “재미교포 사회는 1997년 이후 모금 운동을 전개했고, 2003년, 2005년, 2007년 등 매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문화체육관광부도 2010년 매입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올 2월 문화재 긴급매입 심의위원회 의결을 거쳐 매입을 결정하고 민간에 이를 위탁했다. 이 건물의 가격은 한때 600만 달러(약 68억원)까지 치솟고 건물주가 매각을 거부해 협상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CBRE코리아 부동산 에이전트가 맹활약해 결국 성사됐다.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매입가격은 350만 달러(약 39억 5600만원)로 많이 깎았고, 계약금 35만 달러를 걸어놓아 앞으로 법적인 절차를 잘 밟아나가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야 “을사늑약처럼 비밀 처리…즉각 사퇴를” 김 외교 “국민의견 제대로 못받아들여 죄송”

    야 “을사늑약처럼 비밀 처리…즉각 사퇴를” 김 외교 “국민의견 제대로 못받아들여 죄송”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는 11일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을 출석시킨 가운데 전체회의를 열어 한·일 정보보호협정 졸속처리 문제를 집중 추궁했다. 회의에서 민주통합당 정청래 의원은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대통령도 국민도 모르게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었느냐.”면서 “이번 협정은 강도에게 금고 번호를 알려준 것과 마찬가지다. 을사늑약을 비밀 처리한 것처럼 즉석 안건으로 국민 모르게 국익을 팔아먹으려 했던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 외교부 장관은 즉각 사퇴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이에 김 장관은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국민의견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죄송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김영우 의원은 “한·일 정보보호협정이 결국은 한·미·일과 북·중·러 간 신냉전 구조를 다시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봤느냐.”고 따졌다. 이에 김 장관은 “우리 정부는 미·일 일변도 외교를 하지 않았고, 올해에도 네 차례에 걸쳐 중국 정상급과 회담을 가졌다.”고 맞받아쳤다. 당초 군사정보보호협정에서 ‘군사’를 삭제하고 정보보호협정으로 명칭이 바뀐 데 대해 김 장관이 “군사동맹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내부 협의를 통해 결정한 뒤 일본에 이같이 제의했다.”고 설명하자 민주당 원혜영 의원은 “그게 바로 꼼수고, 하자가 있는 협정이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해찬 의원은 “일본 자위대가 군사정보의 당사자인 만큼 한국 외교부가 일본 자위대를 군으로 인정한 꼴”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민주당은 이날 국회에서 당 지도부와 외통위·국방위 소속 간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대책 연석회의’를 개최했다. 이해찬 대표는 이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한·일 군사협정 관련 책임자를 문책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송수연기자 songsy@seoul.co.kr
  •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서울 통일로 ‘서대문형무소’는 1905년 을사늑약 때일제가 만든 경성감옥이었고 1912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이 형무소의 신세를 졌다.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다 떠난 서대문형무소에는 누가 수감됐을까? 왜 곧바로 일제의 악행을 고발하는 역사박물관으로 직행하지 못했을까? 김삼웅(69) 전 독립기념관장은 4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관 무궁화홀에서 열리는 ‘이승만 집권기의 서대문형무소’란 학술대회에서 ‘1948~1959년 서대문형무소’란 제1주제 논문을 통해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들의 변천사를 밝혔다. 김 전 관장은 “1948~1959년 12년은 이승만의 1인 통치와 자유당의 전횡기였다.”면서 “1949년 1월 반민특위의 검거활동으로 서대문형무소가 악질적 친일파인 소설가 이광수, 일제경찰관 노덕술 등 친일파로 가득했지만, 겨우 1개월 만인 그해 2월 15일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을 비난하고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으로 서대문형무소가 다시 독립운동가들로 가득 차게 됐다.”고 탄식했다. 소설가 이광수는 수감 20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고, 노덕술은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의 기술자이며 경험자이므로 그를 제거하고는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기 어렵다.”면서 석방을 요청하던 중 그해 6월 6일 반민특위가 와해되자 풀려났다. 1949년 6월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했다. 신의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약수 의원과 반민법 제정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노일환·서용길 의원 등 13명의 의원이 체포됐다. 김 전 관장은 “헌병사령부 산하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이들을 심하게 고문해 ‘자백’을 받아 냈다.”면서 “당시 헌병대에는 친일경찰 김정채, 윤우경, 최운하, 김호익 등이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노일환은 재판 과정에서 “남로당 가입 사실과 남로당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는 자백이 고문을 못 이긴 허위 자백”이었다고 진술했다. 즉 반민특위 활동이 와해된 후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강점기와 비슷하게 독립운동가들이 가득해졌다는 것이다. 1947~1954년 제주 4·3사건으로 2530여명이 일반재판 및 군정재판, 군법회의 등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중 16~30세 여자 수감자 70여명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다. 제주도에는 형무소가 없어서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수감된 탓이다. 김 전 관장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기 위해 특별히 여사(女舍)를 지어서 관리했기 때문”이라면서 “6·25전쟁으로 이 중 일부는 인민군에 편입되거나 여맹에 들어갔고, 또 일부는 잡혀서 총살됐다.”고 설명했다. 6·25전쟁 직후부터 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는 북한군이 사용했다. 반공·친미 인사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을 투옥하고, 후퇴할 때는 대량 학살하거나, 북으로 끌고 갔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이승만 정부는 서울시민 중 북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들을 색출해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민은 대략 145만명이었고, 이 중 40만명만이 피란을 떠났다. 김 전 관장은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라디오방송을 거듭하다가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피난도 못하게 해 놓고는 잔류한 서울시민을 부역자로 모는 것은, 임진왜란 때 한성을 떠난 선조나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 갔던 처자를 ‘환향녀’라며 비난했던 인조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다소 줄었지만, 당시 부역자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자는 867명에 이르렀다. ‘종로의 협객’ 김두한은 1947년 4월을 시작으로 1954년 5월, 1965년, 1966년 ‘국회오물투척사건’ 등으로 4차례 수감됐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배설 선생 서거 103주기] “기념관 부지 마련에 정부·지자체 협조 있었으면…”

    [배설 선생 서거 103주기] “기념관 부지 마련에 정부·지자체 협조 있었으면…”

    구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구국의 필봉을 휘둘렀던 영국인 배설이 8일로 서거 103주기를 맞는다.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당시 국내에서 발행 중이던 모든 신문 부수를 합친 부수보다 많은 발행 부수 1만 3000부를 자랑하던 당대 최고의 신문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비판한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한문과 영문 호외로 만들어 세상에 널리 알린 것도,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해 국민운동화한 것도 대한매일신보였다. 선생은 언론을 통한 항일운동을 펼치다 수감됐고, 옥고를 이기지 못해 세상을 등졌다. 그는 영국인으로 태어났지만, 대한국인으로 죽었다. 선생의 뜻을 펼치는 배설기념사업회는 8일 서울 양화진 선생 묘역에서 103주년 추모기념식을 갖는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 박원순 서울시장, 박유철 광복회장, 스콧 와이트먼 주한영국대사 등이 참석해 선생의 뜻을 기릴 예정이다. 7일 배설선생기념사업회 김재원(81) 회장을 만나 선생 사후 103년이 지난 오늘에 되새겨야 할 선생의 얼을 탐구해 봤다. →내일이면 서거 103주기를 맞는다. 배설 선생의 항일구국혼을 이 시대에 어떻게 승화시킬 생각인가. -100여년 전 선생이 생각하던 대한제국의 시대정신이 독립이었다면, 오늘의 시대정신은 대한민국이 선진 열강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이 같은 세계사적 비전을 가지고 국민의식을 한 단계 높이도록 역사문화정신 고취의 중심에 자리하는 사업회를 만들 생각이다. →기념사업회가 발족한 지 7년이 지났지만 선생을 기리는 여러 가지 사업은 지지부진하다는 지적이 많다. 새 사업 발굴과 기존 사업 추진에 대한 구상을 소개해달라. -창립 때부터 기념사업회를 이끌어 오던 고 진채호 초대회장에 이어 지난해 말 제2대 회장의 중책을 맡았지만 미진한 점이 많다. 기념관을 건립해 한국과 영국·일본 등지에 흩어진 선생 관련 자료와 기념품 등을 집대성하는 사업을 최우선으로 추진했지만, 아직 부지도 구하지 못한 상태이다. 선생이 묻힌 마포 양화진 묘역 일대나 면목동 용마산에 기념관을 세우고자 관련기관과 협의에 나설 예정이다. 또 대학생을 비롯한 각급 학교 학생들로 가칭 ‘배설봉사단’을 구성해 선생의 뜻을 우리 사회에 되새기도록 지원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선생이 태어난 영국과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영국 브리스틀대학 등과 정기적으로 친선우호 세미나를 개최하는 방법도 모색해 보겠다. →사업을 시작하려면 재원 마련과 관련 기관과의 협조가 필요한데 어떻게 조달하고 협의할 생각인가. -재원을 생각하면 머리가 띵하다. 회장직을 맡고 보니 사업회는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일단 사재를 털어 마포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지만, 사업회 유지비용과 추모식 행사자금 마련에 애를 먹었다. 이번 추모식도 서울지방국가보훈청과 종교단체의 자금 지원으로 준비했다. 다행히 지난해 12월 국가보훈처로부터 기부금 모집 적격단체로 지정받아 앞으로 기부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 →기부금은 어느 정도 모였나. -안타까운 일이다.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한 푼도 모금하지 못했다. 대한독립운동사의 큰 스승인 선생을 기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을 쾌척할 독지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기념관 부지 마련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관련 기관의 협조가 있었으면 한다. 김 회장은 광주 태생으로 조선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매일경제신문 창간멤버로 입사해 외신부 기자와 경영기획실 기획부장, 판매·광고국장으로 일했다. 일본경제신문 광고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매일경제 신문이사를 역임했다. 언론계 퇴직 이후 개인사업을 하다 진채호 초대회장과의 인연으로 2010년부터 부회장에 영입됐다. 지난해 말 사업회 성격상 언론인 출신이 적합하다는 이유로 회장에 추대됐다. 노주석기자 joo@seoul.co.kr
  • [열린세상] 제국주의에 선악은 없다/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열린세상] 제국주의에 선악은 없다/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지난 한달간 4차례에 걸쳐 원로 사학자인 최문형 선생의 특강을 들었다. 한국연구재단 주최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였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 올바른 역사 인식의 저해 요인은 역사 연구의 쇄국화에 있다. 원인과 결과를 따로 분리해서 기술하면 그 역사는 이미 가치를 잃게 된다.” 좌정관천(坐井觀天)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국제사적 시점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는, 한국 사학계에 주는 고언이 마음에 와 닿는다. 마지막 강의에서 노학자는 물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병합’을 공식 선언할 때까지 왜 5년이란 세월이 걸렸는지 그 이유를 아느냐고? 평생 학문 연구에 천착해 남다른 업적을 쌓은 석학의 일갈(一喝)이 죽비소리처럼 미몽을 깨운다. 의병의 줄기찬 저항 때문이었다는 한국 사학계의 통설은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다. 러일전쟁에서 진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막을 힘이 없었다거나,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을 맺은 후 미·영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했다는 우리의 통념도 틀린 것이었다. 당시 만주에 대한 기득권을 지키려 한 러시아는 일본에 여전히 버거운 존재였다. 만주 이권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미국도 일본의 독식을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일제가 한반도를 집어삼키는 데 5년이나 걸린 이유는 만주 이권을 둘러싸고 러·미와의 갈등 해소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열강에게 만주에 대한 문호 개방과 기회균등을 보장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공수표에 불과했다. 열강은 일본의 만주 지배를 막기 위한 카드로 한국을 이용했다. 우리는 외교권을 빼앗겼지만 1906년 러시아 총영사로 부임한 플란슨은 신임장을 일왕이 아닌 고종황제에게 제정했다.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보호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지 병합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논거였다. “대한제국의 주권 불가침을 인정하며 국제사회에서 이를 밝힐 수 있도록 대표를 초청한다.” 1907년 니콜라이 2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우리 대표를 초청했다. 그러나 그해 6월 넬리도프 러시아 대표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우리 특사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몇 달 사이에 러시아의 대유럽정책이 독일과 보조를 맞추던 것에서 영·불과 협력하는 쪽으로 바뀌면서 일본과의 적대관계가 해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주에서의 이해가 일본과 합치한 러시아가 수수방관하자, 일제는 고종을 폐위하고 ‘정미7조약’을 강박해 내정 관할권까지 강탈해 갔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 대놓고 한국을 삼킬 수 없었다. 일본의 만주 지배를 반대하는 미국이 걸림돌이었다. 미국은 1909년 태프트 정권이 들어선 이후 만주 침투에 박차를 가해 ‘만주 제철도 중립화안’을 내걸고 러·일 두 나라의 만주 분할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의 포석에 위협을 느낀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1910년 7월 제2차 러일협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병합’을 허용했다. 독일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려 했던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의 동맹국 러시아와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만주에 일본과 같은 사활이 걸린 이해를 갖고 있지 않았던 미국은 대일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었으며 그럴 능력도 없었다. 대한제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그때 열강 중 어느 하나 우리 편은 없었다. 중국이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러시아도 자국의 국익을 위주로 우리를 이용했을 뿐이다. 침략할 능력이 있거나 없을 뿐 제국주의에 선악(善惡)은 물론 최악(最惡)·차악(次惡)도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개화기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기 지속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징은 열강의 이해가 엇갈리는 세력 각축장이라는 점이다. 주변국의 동향에 대한 위정자들의 오판과 무지가 어떤 참극을 빚는지를 잘 말해주는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가 우리의 진로를 비추는 등대로 다가서는 오늘. 우리가 찾을 ‘징전비후’(懲前毖後)의 교훈은 자력 없이 남의 힘을 이용하는 책략만으로는 다시 돌아온 제국의 시대에 우리의 생존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견실한 자강만이 우리의 번영을 지키는 방패일 터이다.
  • “백암은 동양평화와 공존의 세상 꿈꿔 ‘국가’·‘민족’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것”

    “백암은 동양평화와 공존의 세상 꿈꿔 ‘국가’·‘민족’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것”

    “지구촌에 여전히 나라 간 분쟁과 종교·인종·자원 전쟁이 끊이지 않은 상황에서 강자의 수탈과 침략에 맞서 약자의 평화를 향한 저항을 밝히고, 공생의 의미를 되새긴 한국통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한국의 고전일 수밖에 없다.” “백암 박은식을 민족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여론이 최근 형성되고 있는데, 1915년 쓴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제대로 읽어 보면 양명학자인 박은식은 동양평화, 약자나 강자가 공존하는 세상을 꿈꿔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시리즈로 나온 ‘한국통사-국망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거울’(아카넷 펴냄)을 번역하고 해제를 붙인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교수는 12일 이렇게 논평했다. 서울대 사범대 연구실에 만난 김 교수는 “냉전의 시대가 끝난 지구촌에 여전히 나라 간 분쟁과 종교·인종·자원 전쟁이 끊이지 않은 상황에서 강자의 수탈과 침략에 맞서 약자의 평화를 향한 저항을 밝히고, 공생의 의미를 되새긴 한국통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한국의 고전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국민국가’가 살아있는 현실 인식을 최근 일본의 진보학자들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사실상 국가 간 분쟁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따라서 이를 해체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적지 않지만, 21세기에 ‘국민국가’라는 단위가 엄존하고 해체되지 않는 현실도 인식해야 한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그는 “유럽은 절대왕정이나 근대국가 형성기에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발명해 나갔지만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중앙집권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했던 한반도에서 ‘국민’이나 ‘민족’은 만들어진 전통이 아니었다.”면서 “박은식이나 신채호는 근대적 방식으로 역사 서술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한반도에 이미 존재하는 민족이나 국민을 발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족이라 칭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민의, 민인, 인민 등 다양한 명칭과 민족의 실체가 있었다.”면서 “고려 태종의 유훈인 훈요십조에서도 우리는 중국과 다르다고 했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도 우리는 중국과 다르다고 했던 것에서 우리의 실체를 찾아 나갈 수 있다.”고 했다. 한국통사의 중요성을 김 교수는 몇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1910년대의 아픈 현실 속에서 당대사를 어떻게 쓸까를 고민한 최초의 역사 개설서라는 점이다. ●‘생존’을 고민한 최초의 근대적 역사서 지금의 시선으론 근대사지만, 당시에는 현대사였을 그 역사를 편년체(일기체)나 왕과 영웅을 다룬 기전체가 아닌 인과관계를 가진 근대적 역사 서술 방식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후 한국사 서술의 틀은 박은식류를 따르게 됐다고 했다. 둘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파리 평화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을 위해 외교 활동을 시도하는데, 이때 주요하게 인용된 자료가 한국통사다. 1905년 을사늑약 등 일제가 대한제국을 얼마나 부당하게 강점했는지를 알리는 사료였던 것이다. 현재는 황현의 ‘매천야록’이나 정교의 ‘대한계년사’ 등이 구한말을 증언하는 자료로 많이 인용되지만, 당시 각 가문에만 존재했을 뿐 공개된 자료가 아니었다. 셋째, 한국통사가 1915년 상하이에서 출판되자 일제는 1910년대까지의 역사 무시라는 소극적 전략에서 역사 왜곡이란 적극적 전략으로 전환했다. 일제는 한국인이 한국통사의 영향을 받아 항일투쟁에 참여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중국과 러시아, 미국 등에서 한국인이 이 책을 탐독하거나 전해 들었다. 1917년에 이 책은 한글로 번역 간행돼 재미 한인 학생들의 교재로 사용됐다. 결국 일제는 1916년 1월 조선사편수회라는 어용학회를 만들어 식민사관 형성에 열을 올렸다. 조선반도사 편찬 취지문에서 일제는 “재외 조선인의 저서 같은 것이 지상을 규명하지 않고, 함부로 망설을 드러내…(중략)…인심을 현혹시키는 해독 또한 참으로 크다.”이라며 한국통사를 비난했다. 조선사편수회는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이름이 바뀌었고, 식민사관에 바탕한 ‘조선사’와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을 간행했다. ●정신이 멸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 김 교수는 국혼이 살아 있으면 된다는 박은식의 한국통사 서문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박은식은 서문에서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를 멸할 수는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의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기고] ‘독도는 우리땅’, 체계적으로 관리할 때/안병준 한국신문윤리위원 경북도 독도정책자문관

    [기고] ‘독도는 우리땅’, 체계적으로 관리할 때/안병준 한국신문윤리위원 경북도 독도정책자문관

    정부는 지난 16일 정부합동 독도영토관리대책단 회의를 했다. 일본의 소위 ‘다케시마의 날’(22일)의 각종 행사에 대한 동향파악 회의다. 그 행사들에 대한 일본 중앙정치권 및 언론의 관심과 참여가 날로 늘어나는 추세라는 보고가 있었다. 그리고 2005년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한 시마네현의 카운터파트인 경상북도가 지금까지 잘 대응하고 있다는 평가만 있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100주년을 맞는 시점을 이용해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했다. 그후 매년 영토포럼과 한·일 잠정수역대책협의회, 한·일어업문제 의견교환회 등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지방정부의 행사에 발맞추어 겐바 고이치로 일본 외상은 지난달 24일 중의원에서 독도의 영유권을 언급하며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국에) 전달하겠으며 끈기를 가지고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경상북도는 이에 대해 비교적 차분하게 각종 행사를 하고 있다. 15일 ‘다행복사회네트워크’ 주최로 경북대에서 열린 학술토론회를 필두로 영남대·대구대·독도박물관·안용복재단 주최로 동대구역 등에서 전시회, 세미나 등을 이달 말까지 개최한다. 이와 함께 10월 ‘독도의 달’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경상북도의 향후 독도 콘셉트는 ‘문화·예술·평화의 섬’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독도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아이디어를 가진 도지사와 환경해양산림국 소속 독도정책과 직원 그리고 민간단체인 안용복재단 등이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울릉군·국토해양부·한국해양연구원·반크·경북대·영남대·대구대·독도학회·해양경찰청 등은 그림자처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의 대응과 대비는 부족한 상태다. 일본은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을 명분으로 아시아 각국을 침략했던 것처럼, 정교한 각본을 짜놓고 움직인다. 자위대의 비밀스러운 전력 증강과 평화유지군을 명분으로 한 해외 전투경험 축적, 연이은 국제사법재판소장 배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세계적 국제법 전문가와의 교류, 국제법 전문가 양성 등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환(본명 정재민·판사)씨의 소설 ‘독도 인 더 헤이그’는 시사하는 점이 크고 심각하다. 한국의 정치인은 “독도에 해병대를 파견하자.”라는 몰상식한 인기발언만 한다. 대부분 한국인과 언론은 일본 총리의 신사 참배와 각료 등의 망언에 대해 일시적인 감정 대응만을 한다. 정부는 ‘조용한 외교’를 내세워 독도 영유권에 대해 체계적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일본은 중장기적 전략에 따라 위에 예를 든 것처럼 만반의 준비를 한다. 어느 날, 국제여론을 무릅쓰고 일본 함대가 독도를 에워싼다. 한·일 양국은 전면전으로 가지는 못한다. 한국은 유엔과 강대국들의 권유로 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강대국들이 영향력을 갖고 있다. 결과는? 우리가 불리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소설은 논픽션처럼 생생하다. 독도에 관한 문제의 핵심은 국력이다. 우리가 약하니까 일본이 수시로 집적대는 것이다. 역사적·지리적·실효적 지배 사실만 강조할 것이 아니다. 체계적·장기적 준비를 더욱 강화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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