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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비 협박 옛 애인 구속

    서울 강남경찰서는 2일 여자친구였던 인기 여가수 아이비(25ㆍ본명 박은혜)에게 함께 찍은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 한 유모(31·무직)씨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유씨는 지난달 3일부터 27일까지 아이비에게 200여 차례에 걸쳐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관계를 폭로하겠다. 동영상을 갖고 유포하기 전에 돈을 내놔라.”라고 협박해 4500만원을 받아 내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유씨는 또 아이비와의 관계를 토대로 한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겠다며 연예계와 언론계 인사들을 접촉해 아이비의 명예도 훼손했다. 유씨는 경찰 조사에서 “2년 전부터 사귀어 왔는데 최근 헤어지자는 요구를 해왔다”면서 “결코 때리거나 돈을 받지는 않았으며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아이비의 소속사인 팬텀엔터테인먼트 측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유씨는 아이비의 가족에게까지 ‘(동영상을 유포시켜) 연예인 인생을 끝내게 해주겠다.’고 위협했다.”면서 “하지만 유씨의 주장과 달리 아이비는 유씨와 합의 하에 동영상을 찍은 적이 없으며 유씨가 동영상을 저장했다고 주장하는 노트북에서도 동영상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유씨는 그동안 여러 차례 방송과 뮤직비디오 등에 출연하며 뛰어난 외모와 재치있는 말솜씨로 인기를 얻었다.2004년 한 지상파 구직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유명 광고회사에 취직해 디자이너로 일해 오다 “영화감독 일을 하고 싶다.”며 지난달 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아이비 협박 추정男 싸이 들어가보니…

    가수 아이비(본명 박은혜·25)를 협박한 혐의로 2일 구속된 유모씨(추정)의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공개돼 네티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날 ‘아이비 협박’ 기사들에는 “전 남자친구가 광고대행사에서 일했으며,TV프로그램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는 소식이 담겨있었다. 네티즌들은 이 정보를 토대로 유모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싸이월드 미니홈피 주소를 파악,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실제 그의 미니홈피를 살펴보니 주소에 아이비의 생일을 뜻하는 ‘821107’이란 숫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사진첩 한 코너의 제목도 ‘821107’로 되어 있었다. 이 사진첩에는 아이비의 사촌으로 알려진 수영선수 박태환(18·경기고)과 함께 찍은 사진도 올려져 있었다. 한편 일부 네티즌들은 그의 ‘자기소개’에도 주목했다.‘여자는 때리지 말자.아예 죽여버리던지.’,‘너한텐 지난 사랑의 기억이겠지만 나한텐 그게 배신이야.’라는 글이 아이비와의 관계를 뜻한다는 것. 문제의 싸이에는 네티즌들의 관심을 방증하듯 1만 4000명이 넘는 방문자가 다녀갔다. 그의 방명록에는 “언론플레이에 속지말자.난 그를 믿는다.”란 글들과 “협박해서 돈 뜯어낼 생각말고…참 인생 안타깝게 산다.”는 의견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강남경찰서는 아이비에게 함께 찍은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 한 혐의를 받고 있는 유모(31)씨를 구속했다.유씨는 ‘동영상 유포’를 미끼로 4500만원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뉴스부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 [여자프로농구] 짜릿한 역전승

    우리은행이 31일 부천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농구에서 신세계를 52-49로 간신히 따돌리고 1패 뒤 첫 승을 신고했다. 신세계는 2연패. 내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더블포스트 김계령-홍현희(이상 190㎝)가 신세계의 양지희(185㎝)-장선형(179㎝)에게 밀렸다. 특히 양지희에게 8개 등 공격 리바운드만 20개를 내주며 머쓱해졌다. 우리은행은 개막전에서 26점을 넣은 김계령이 상대 더블팀에 막히며 전반 4득점에 그쳐 더욱 어려운 경기를 해야 했다. 예상을 깨고 리바운드에서 우위를 보인 신세계도 마음이 급했는지 경기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 우리은행은 박세미와 임영희에게 자주 득점을 내주며 4쿼터 중반까지 뒤쳐졌다. 하지만 김은혜가 팀을 살렸다. 경기 종료 약 3분을 남겨놓고 44-48로 뒤진 상황에서 3점슛 2개를 연달아 터뜨려 승부를 뒤집었다. 신세계는 종료 5초 전 장선형이 자유투 2개 가운데 1개를 놓쳐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갈 기회를 놓쳤다. 신세계가 반칙 작전으로 나왔으나 김계령이 자유투를 침착하게 성공시키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두번째 삶을 준 당신은 나의 영웅”

    “두번째 삶을 준 당신은 나의 영웅”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부인 낸시 여사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심장병 수술을 받은 뒤 입양됐던 한국인 남성이 24년 만에 낸시 여사와 극적으로 재회했다. 이길우(28·미국명 브레트 핼버슨)씨는 26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북서쪽 시미 밸리의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에서 낸시 여사와 반갑게 만나 “두번째 삶을 살게 해준 은혜에 이제야 감사를 표한다.”며 기뻐했다. 이씨와 낸시 여사의 첫 만남은 1983년 11월14일 백악관에서였다. 낸시 여사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수술시키겠다고 작정하고 이씨와 당시 일곱살이던 안지숙(31)씨를 초청했다. 한국에서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미국땅을 밟았던 이씨는 뉴욕에서 수술을 받은 뒤 미국 가정에 입양돼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백악관 방문의 순간을 잊지 못하던 이씨는 최근 인터넷을 통해 레이건 기념관 측에 낸시 여사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낸시 여사는 이날 열린 토니 스노 전 국무장관 강연에 이씨를 초대했다. “어느새 이렇게 컸느냐.”고 묻는 낸시 여사에게 이씨는 “당신은 제 영웅입니다. 늘 감사하며 지냈습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지금 기억나는 것은 낸시 여사가 건넨 사탕과 빨간 카펫이었지만 이제 당신과 함께한 진정한 추억을 갖게 돼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레이건 대통령 재단에 힘을 보탤 계획이라는 이씨는 “곧 한국을 방문해 친부모를 찾을 계획”이라며 “어서 빨리 잊혀졌던 한국에서의 일들을 찾아내고 싶다.”고 밝혔다. 로스앤젤레스 연합뉴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여자프로농구] “토종 코트여왕은 나!”

    27일 춘천 호반체육관에서 열리는 우리은행-삼성생명전을 통해 막을 올리는 07∼08시즌 여자프로농구에서는 외국인 선수를 볼 수 없다.7년 만에 처음이다. 내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국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것. 그동안 센터는 외국인 선수들의 전유물이었다. 또 새 시즌은 단일리그로 치러진다. 전체 7라운드로 팀당 정규 35경기, 전체 105경기. 플레이오프도 5전3선승제로 늘었다. 장기 레이스라 체력 안배와 적절한 선수 활용이 승부의 관건으로 꼽힌다. ●센터의 귀환 이번 시즌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많다. 부상 등으로 지난 시즌을 뛰지 못한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센터들이 많아 외국인 선수가 없는 이번 골밑 경쟁을 뜨겁게 달굴 전망이다. 금호생명의 강지숙(28·198㎝)이 가장 눈에 띈다. 신한은행의 주축 선수로 지난해 9월 세계선수권에도 출전했었으나 심장 판막에 구멍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코트를 떠났다.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은 뒤 금호생명 유니폼을 입은 강지숙은 “하은주를 잘 알기 때문에 막아낼 자신이 있다.”며 각오를 다졌다. 신세계에는 허윤자(28·183㎝)와 정진경(29·190㎝)이 있다.2004년 아테네올림픽 멤버인 허윤자는 무릎 부상 후유증으로 1년 동안 코트를 떠나 있었다. 다시 팀 주축으로 일어서야 할 때다. 정진경 역시 국가대표 출신으로 타이완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2005년 국내 코트를 밟았다. 무릎 부상으로 긴 재활을 거쳤고 정상 컨디션을 찾아가는 중. 삼성생명은 이종애의 초반 공백 탓에,2002년 코트를 떠났던 허윤정(28·183㎝)을 긴급 수혈했다.‘제2의 정은순´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큰 활약 없이 은퇴했던 허윤정은 “조금이라도 팀에 보탬이 되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모두 약점은 있다 우승 0순위는 신한은행이다. 그 뒤를 삼성생명이 추격하고 있고, 나머지 네 팀이 플레이오프 티켓 2장을 놓고 승부를 벌일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2강4중 판세. 신한은행은 전주원-최윤아가 번갈아 지키는 앞선에서 정선민-하은주가 버틴 포스트까지 빈틈이 없다. 이영주 감독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바통을 이어받은 임달식 감독의 지휘 스타일에 선수들이 얼마나 적응하는지가 관건이다. 삼성생명 또한 박정은-변연하-이미선 등 ‘빅3’가 건재하다. 특히 오랜 부상 끝에 지난 겨울리그 플레이오프부터 팀에 합류한 이미선은 전성기 기량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은행은 전력이 약화됐다. 물론 김진영-김은경-김은혜-홍현희-김계령으로 이어지는 베스트5는 탄탄하다. 하지만 식스맨 층이 얇고 주전과 기량 차이가 크다. 만년 하위권 금호생명은 강지숙을 영입해 높이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팀의 버팀목이 될 해결사가 눈에 띄지 않는다. 국민은행은 큰 변화가 없다. 세계청소년여자선수권 득점왕 출신인 루키 강아정을 뽑은 것은 전력의 상승 요인. 무엇보다 김영옥-김지윤이 얼마나 시너지를 내느냐가 중요하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논산 연무~상월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논산 연무~상월

    전북 여산에서 1번 국도와 갈라진 옛길은 충남 논산 연무대와 닿아 있다. 이 길로 접어 들면 연무읍 고내리에 봉곡서원이 나온다. 서원 앞에 사는 80대 할머니는 “여자들이 꿈을 꾸면 옛날에 욕을 본 사람들이 나타난다며 (서원을) 옮기라고 해유.”라고 말했다. 이곳에는 최근까지 사람이 살다가 떠난 흔적이 있다. 특별하게 보이는 서원은 아니지만 이계맹 등 조선시대 때 귀향을 갔던 선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기에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논산훈련소 주변 경기도 옛말 서원 앞에는 ‘황화정(皇華亭)’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황화정은 서원에서 400m쯤 북쪽에 있던 정자다. 옛날 현감(군수)이 관찰사(도지사)를 맞고 배웅을 하던 곳이다. 황화정이 훼손된 뒤 비석만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황화정이 있던 마을은 지금 한적하고 쇠락한 농촌일 뿐이다. 예전에 전라도 지역에 속했던 마을이다. 이 마을 끝에서 옛길은 다시 1번 국도와 만난다. 곧 이어 육군훈련소(옛 논산훈련소·연무대)와 입소 대대가 나온다. 훈련소 앞에서 식당 호객을 하던 김영심(74)씨는 “훈련소도 옛날 훈련소지, 지금은 아녀. 자꾸 오그라져.”라며 최근의 경기를 전했다. 흔한 술집도, 다방도 없다. 입소병의 ‘총각딱지’를 떼주던 아가씨촌도 사라졌다. 교통이 좋아져 입소날에 부모의 차를 타고 오고 면회 때도 멀리 나가 먹는다고 말했다. 김씨와 함께 호객을 하던 70대 할머니는 “재수 있으면 하나 걸리고 공 치는 날이 많아.”라고 한탄을 했다.“밥 먹고 가슈.” 두 할머니는 끝내 객(客)의 소매를 잡아끈다. 훈련소 입소 대대 앞도 마찬가지다. 식당이 줄지어선 거리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논산은 역사상 최고 전쟁터 훈련소에서 옛길을 따라 좀더 올라가다 옆길로 2㎞쯤 빠지면 견훤 왕릉이 나온다. 이 왕릉은 기념물 26호로 연무읍 금곡리에 있다. 견훤은 완산(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세력을 키웠으나 아들 신검과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을 빚으면서 고려 왕건에게 멸망했다. 죽으면서 “완산이 그립다.”고 해 이곳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날씨가 좋으면 이곳에서 전주 모악산이 보이는 것도 이런 연유다. 논산은 후백제가 왕건과 전투를 벌였고 백제가 멸망할 때 계백장군이 신라와 싸운 황산벌이 있는 곳이다. 육군훈련소도 이곳에 있고 계룡대도 있다. 삼군본부가 있는 계룡대는 현재 계룡시에 속하지만 이전에는 논산 땅이었다. 논산지역 향토 사학자 류제협(61)씨는 “논산은 넓은 곡창지대여서 전투식량 조달이 손쉬워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치러졌다.”며 “삼국시대 때는 접경 지역이라 전쟁이 많았고 계룡대는 높은 계룡산이 둘러싼 천혜의 요새여서 들어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논산은 최대 전쟁터일 뿐만 아니라 삼국 통일을 이끌어 통일을 상징하는 고장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견훤 왕릉에서 다시 탄 옛길은 연무터미널과 개태골을 거쳐 1번 국도와 갈라져 은진향교로 향한다. 은진면 교촌리에 있는 이 향교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봄과 가을에 제향을 지낸다. 공자 등 성현 22명의 위패를 모신 향교는 평상시에 문이 닫혀 있다. 향교 안에 30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떨어진 은행 열매가 옛 정취를 이어준다. 향교에서 1㎞쯤 올라가면 망보기마을이 나온다. 고개에서 적들이 오는지 망을 보았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양이나 전라도로 갈 때 선비들이 이곳에서 쉬었다고 한다. 큰 정자나무 밑에 계단식 서낭당이 있다. “20년 전만 해도 소몰이꾼들이 정자나무 밑에서 쉬다 갔어.” 나무 밑에서 붉은 고추를 널어 말리던 70대 할머니가 넋두리처럼 내뱉었다. 이 마을을 지나면 옛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관촉사가 있다. 보물 232호 석등도 있지만 높이 18m의 국내 최대 석불인 은진미륵(보물 218호)이 서 있어 유명하다. 고려 목종 9년(1006년)에 완공된 이 석불은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구절초가 절 안에 가득 꽃망울을 터뜨려 가을 분위기를 한껏 뽐냈다. 사찰로 들어가는 계단 옆에 세워진 이승만 박사 추모비는 이 곳의 옛 정취와 달라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 추모비는 방공청년회 논산지부가 1965년 건립한 것이다. ●‘춘향전´에 7군데나 지명 나와 옛길은 다시 논산시 부적면으로 이어진다. 향토 사학자 류씨는 “전북 여산에서 충남 공주 경천까지 가는 길의 지명이 춘향전에 7군데나 나와 이 구간이 ‘춘향전 옛길’이라고 불린다.”고 말했다. 새다리도 이 가운데 하나다. 부적면 신교리 논산천에 있는 이 다리는 새로운 교량이 건설되면서 다리를 놓았던 돌이 냇가에 묻혔다고 한다. 부적면사무소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진 옛길은 지금도 넓은 논 사이를 달린다. 호남선 건널목을 건너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2리의 자연부락인 지밭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무당이 후백제를 멸망시키려 왔던 왕건의 꿈을 해몽해줘 왕건이 이를 믿고 공격, 끝내 멸망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서용호(81)씨는 “한양으로 가던 길은 농로가 됐거나 경지 정리로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푸념했다. 4∼5㎞쯤 되는 비포장 농로를 달리다 보면 노성천이 나오고 이 하천을 건너자마자 초포마을이 나온다. 이 일대 주민들은 이 마을을 ‘풀개’라 불렀다. 주소는 광석면 항월리다. 이곳은 한양을 오갈 때 반드시 거치는 마을이었다. 자연히 주막촌이 형성됐고 왈패들이 많았다.‘최장사’니 ‘팔장사’니 하는 힘센 전설적인 장사 이름이 전설로 내려온다. 주민들은 이들이 들었던 거대한 돌이 있다고 전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새로운 교량이 들어섰지만 예전 다리를 쓰던 돌들이 냇가에 흩어져 있다.20∼30년 전까지만 해도 논산장을 가려면 지나던 길이다. 주막집들은 지금 슬래브 주택으로 바뀌었다. 허름한 기와집 한 곳에서만 막걸리를 팔았다. 주민 이유영(67)씨는 “주먹 깨나 쓰던 장사들이 많아선지 ‘아사리 풀개’라고 불렀다.”면서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이곳에 5일장이 서면 노성, 상월 등 인근 동네 아이들이 무서워 오는 걸 꺼렸다.”고 회고했다. 풀개를 떠난 옛길은 노성천 옆을 따라 올라간다. 노성면으로 들어서자 교촌리 ‘윤증고택’이 맞는다. 윤증(1629∼1714) 선생은 조선시대 숙종 때 한학자로 스승 송시열 선생의 논리를 비판하는 등 성품이 대쪽 같았다. 대사헌, 우의정 등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고택은 윤증의 성품대로 간결하고 품위가 있다. 중부지역 양식에 남도풍이 가미돼 있다. 중요민속자료 190호다. 길은 이어 상월면을 거쳐 공주시 계룡면으로 들어간다. 논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부인2리 지밭마을 유래 “옛날 선비들이 한양에 말 타고 갈 때 서낭당 앞에서 내려서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대유.” 논산시 부적면 부인2리 지밭마을 주민 오영근(65)씨는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을 전하면서 대뜸 이렇게 말했다. 마을안 논 옆에 세워져 있는 서낭당은 무당을 모신 곳이다. 이 무당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의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사건과 관련이 있다. 왕건이 후백제를 치려고 개태사 근처에 진을 치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자신이 무쇠솥을 쓰고 물속에 빠지는 꿈이었다. 왕건이 “불길하다.”고 고민하자 부하들이 “이 마을에 해몽을 잘하는 무당이 있으니 한번 물어보자.”고 했다. 무당의 딸로부터 ‘흉몽’이라는 얘기를 듣고 낙심해 되돌아가던 왕건을 때마침 집에 돌아온 무당이 붙잡았다. 무당은 “길몽이다. 솥은 왕관을, 물은 등극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왕건은 무당의 말에 곧바로 후백제를 쳐 멸망시켰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뒤 무당의 은혜를 갚고자 ‘부인’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땅을 하사했다. 지금의 마을 이름도 이 작위명에서 유래하고 있다. 지밭이란 자연부락명도 ‘제사를 지내는 데 쓰는 밭’이란 뜻에서 변형됐다. 오씨는 “쳐다봐서 보이는 땅은 전부가 무당 땅이었다고 해요.”라고 전했다. 재미있는 것은 왕건이 하사한 엄청나게 넓은 토지의 일부가 지금도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 땅은 두 마지기(400평 정도)로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경작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온 쌀로 매년 대보름 전날 마을 서낭당에서 무당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요즘 서낭당 앞에는 건축폐기물이 어지럽게 쌓여 있지만 제사 때는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지낸다고 한다. 제삿날이면 일부 주민이 풍물을 치면서 서낭당으로 올라간다. 제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이다. 이 풍물소리를 들은 이웃들이 준비해놓은 음식을 하나씩 가지고 뒤따른다. 제사는 성대하다. 오씨와 함께 도랑에서 우렁이와 참게를 잡고 있던 서일웅(67)씨는 “(제사를 지내는) 그날은 주민 모두가 멸치도 안먹는다.”고 웃었다. 비린 것을 피할 정도로 무당의 제사를 신성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여년 전만 해도 제사 때면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했다.”면서 “지금도 제삿날 직전에 초상집에 갔던 주민은 서낭당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논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강아정 국민은행 갔다

    강아정 국민은행 갔다

    세계청소년여자농구선수권 득점왕에 빛나는 강아정(18·180㎝·동주여상)이 16일 서울 중구 삼성 본관에서 열린 2008년 여자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국민은행에 지명됐다. 강아정은 빼어난 슛 등 농구 센스를 뽐내 일찌감치 한국 여자농구 차세대 주역으로 꼽혔었다. 강아정은 “공격은 나름대로 자신있지만 수비가 부족하다.”면서 “고교 무대와 프로는 다르기 때문에 빨리 적응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2순위 명신여고 포워드 김단비(182㎝)와 3순위 삼천포여고 가드 김유경(171㎝)은 금호생명과 신세계에 낙점됐으나, 이전 트레이드 합의에 따라 모두 신한은행 소속이 됐다. 전체 4순위로 삼성생명에 지명된 센터 이유진(185㎝·숙명여고)은 남매가 동시에 프로에 데뷔하게 돼 화제를 모았다. 오빠가 동부의 루키 이광재(187㎝)다. 아버지는 실업 삼성전자에서 뛰었던 이왕돈씨, 어머니는 국가대표 출신 홍혜란씨로 농구 가족이다. 숭의여고 포워드 배혜윤(185㎝)과 숙명여고 가드 이은혜(171㎝)는 신세계와 우리은행 유니폼을 입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미스터리와 버무린 안개속의 첫사랑, 영화 ‘M’

    미스터리와 버무린 안개속의 첫사랑, 영화 ‘M’

    이명세 감독의 신작 ‘M’을 부산에서 먼저 만났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화제작 가운데 하나인 ‘M’은 영화란 모름지기 ‘보는 재미를 줘야 한다.’는 기본 명제에 충실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느낌을 따라 가야 한다. 극장에 가기 전 당신의 잠든 감각을 먼저 깨우는 일이 필요하다. TV에 나오는 유명 향수 광고의 연속.‘M’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이 영화의 내용을 먼저 끄집어 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약혼자 은혜(공효진)와 결혼을 앞둔 유명 소설가 민우(강동원)가 어느날 갑자기 튀어 나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 첫사랑 미미(연희)에 대한 기억을 찾아 헤맨다는 이야기다. 단순한 서사는 스크린에 일렁이는 검은색의 물결, 하얗게 피어 오르는 안개를 먹고 몸피를 늘린다. 뭘 얘기하느냐보다 어떻게 들려 주냐에 방점을 찍었기에 기승전결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다. 민우의 복잡한 머릿속처럼 뒤죽박죽 전개된다. 모든 상황과 장면은 꿈인 듯 싶다가 현실이 되고, 현실인 듯 싶다가 환상이 된다. 배우들의 연기도 선을 그을 수 없다. 진지하다가 갑자기 코미디를 하고 웃다가 운다. 민우가 사람을 만나는 일식집의 협소한 방마저 미세하게 움직인다.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지 않으면 도무지 느끼기 어렵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햇살처럼 영화에는 사실적인 느낌을 주는 구석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꿈꾸듯 따라가다 보면 뿌연 안개 속에 첫사랑의 수줍은 속살이 드러난다. 첫사랑의 설렘을 이렇게 잘 풀어 놓은 영화가 있을까. 마주 선 두 연인의 다리, 꽉 잡아 당기는 손, 질끈 감았다 동그랗게 뜨는 미미의 눈에서 첫 키스의 짜릿함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하다. “내 영화는 애피타이저, 메인요리, 디저트가 다 있는 코스 요리지만 순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이명세 감독의 말이다. 골목길에서 민우를 놓친다면 맛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25일 개봉,12세 관람가.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씨줄날줄] 주꾸미 공덕비/황성기 논설위원

    살면서 수없이 듣고 수없이 하는 게 “덕을 쌓아라.”는 말이다. 논어에 덕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정치를 덕으로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는데 뭇 별들이 그를 향해 도는 것과 같다.”는 말도 그중 하나다. 그렇지만 덕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은 ‘국어 낱말 뜻’숙제를 내고 수렴청정, 선왕 다음으로 덕이란 단어를 조사하라고 했다. 덕이란 뜻을 이해하고 숙제를 해간 아이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덕(德)은 인간이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일 것이다. 덕을 물어 왔을 때 제대로 답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전적 의미로는 첫째, 마음이 바르고 인도(人道)에 합당한 일, 둘째 도덕적 이상 또는 법칙을 좇아 확실히 의지를 결정할 수 있는 인격적 능력, 셋째 은혜이다. 덕을 베풀면 사람이건 동물이건 기렸던 것이 우리 민족이다. 불타는 집에서 주인을 구한 전북 임실군 오수마을의 충견에게도 베푼 덕을 기린다는 뜻에서 공덕비가 세워졌다.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고려 청자를 안고 침몰한 배를 찾는데 결정적 공로를 세운 주꾸미의 동상을 세운다고 한다. 주꾸미를 건져 올린 어민에 공이 있는지, 청자대접을 움켜 쥐고 있던 주꾸미에 공이 있는지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주꾸미가 소송을 건다면 법원은 주꾸미에게 상당 부분의 공을 인정할지 모른다.1994년 건립된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신안 앞바다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지어졌다. 수천점의 태안 앞바다 고려청자를 인양하는데 도움을 준 주꾸미에게 공덕비 같은 동상을 세워 주는 일은 지자체 발전을 꾀하는 태안군으로선 당연하다. 주꾸미에게 공덕비를 세우는 일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공덕비를 많은 사람의 말이 이루는 ‘만구성비(萬口成碑)’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직접 그렸다는 동상 설계안을 보면 통발 어선에 낚아 올려지기 전의 주꾸미의 모습을 생생히 그리고 있다. 고려 시대의 유물을 900년이 지난 지금 현대인들에게 선사한 주꾸미의 공도 크지만 그것을 건져올린 어민 김용철씨에게도 청자 1점을 보상하는 것 이상의 공덕을 기리는 게 예의가 아닐까 한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병자호란 다시 읽기]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1627년 4월21일, 용골산성의 영웅 정봉수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평안도 구성부터 곽산까지 후금 군사들이 가득 차 있고 용골산성은 고립되어 있다. 성안에는 7000명 가까운 군사가 있지만 양식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은 자가 이미 30명이 넘었다. 후금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오는 백성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다.’고 했다. 정봉수는 죽어 가고 있는 평안도 백성들을 살릴 진휼(賑恤) 대책을 속히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서북 백성들의 비극 정묘호란 시기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끔찍했다. 조정에서 버림받은 채 후금군의 칼날 앞에 가장 먼저 노출되었던 그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후금군에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을 버리고 피란을 떠났다. 피란길에 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해에 있는 섬으로 들어갔다. 후금군이 바다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섬으로 들어가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갑자기 들어간 섬 안에 식량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을 리 없었다. 후금군을 겨우 피했지만 섬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강화가 맺어져 전쟁은 끝났지만 서북 백성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 고을을 가든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린 사람들로 넘쳐났다.‘황해도의 마을들은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고, 평양성 안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압록강 부근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도 처참했다. 후금군에 끌려가던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강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후금군은, 투신을 막으려고 포로들을 결박하고 배에다 울타리를 치기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강으로 뛰어들어 압록강이 시체로 뒤덮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묘호란이 일어났던 초기, 평안도 백성들 가운데는 후금군의 앞잡이가 되어 모문룡 휘하의 명군(모병:毛兵)을 공격하는데 가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난이 일어나기 이전 모병들이 자행했던 극심한 민폐 때문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강화가 이루어지고 후금군이 철수하자 모병들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곽산, 구성, 삭주, 선천, 창성, 철산, 의주 등 모병의 주둔지 부근에 살고 있던 무고한 양민들까지 모병들에 살해되었다. 정묘호란 직후 모병들의 살육과 약탈은 극에 이르렀다.1627년 4월19일 무렵, 모문룡의 부하 모유후(毛有厚)는 안주에 정박해 있던 조선 선박 3척을 나포했다. 조선 피란민들이 타고 있는 배들이었다. 모유후는 배들을 기습하여 건장한 남자들과 노약자들은 모두 살해하고 여자들과 화물만을 남겨 끌고 갔다. 중군(中軍) 진계성(陳繼盛)이란 자는 조선 조정이 황해도 장연의 선박들을 쇄환하려는데 불만을 품고 조선인 역관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귀를 자르는 악행을 저질렀다. 서북 지역에서 조선의 행정 체계와 공권력이 허물어진 상황에서 모병들은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정묘호란 중의 모문룡 후금의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키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 것은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조선에 대한 공격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모문룡은 후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가도에서 다른 섬으로 도피하여 용케 목숨을 보전했다. 그는 이후 평안도 연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관망했다. 조선 조정은 그가 배후에서 후금군을 공격하거나 견제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선 정부의 통제력이 사라진 틈을 이용하여 청북(淸北) 지역 주민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평안도 지역의 조선 의병이나 백성들 가운데는 모문룡에게 의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용골산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던 중군 이립(李)과 품관 장희범(張希範)은 자신들이 벤 후금군의 수급(首級-머리)을 모문룡에게 가져다 바쳤다. 용천(龍川)의 군관 김여의(金汝義)는 수급뿐 아니라 후금군에서 노획한 말을 바쳤다. 모문룡은 그들에게 은이나 식량 등을 상으로 주었다. 적과 싸워 군공을 세워도 그에 합당한 포상을 받지 못하던 서북 지역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모문룡이 상으로 주는 식량 등이 아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문룡에게 수급을 바친 사람들 가운데는 조선인의 머리를 후금군의 것으로 속이는 자들도 있었다. 모문룡은 그렇게 얻은 수급을, 마치 자신이 적과 싸워 얻은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명 조정에 군공으로 보고했다. 청북 지역에 대한 조선 조정의 통제력이 사라진 데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조선 조정은 강화가 성립된 후 모문룡에게 문안사(問安使)를 보냈다.1627년 4월27일, 문안사 신달도(申達道)는 모문룡을 면담했다. 신달도가 “수로와 육로가 모두 막혀 이제야 노야(老爺)를 찾아 뵙게 되었다.”고 공손히 안부의 인사를 전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괜찮았다. 문제는 신달도가 가져간 자문(咨文)의 내용이었다. 자문 속에는 ‘귀하의 진영에서 조선을 돕기 위해 한 무리의 군대도 동원하지 않아 섭섭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자문을 읽은 뒤 모문룡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조선이 후금군을 끌어들여 명군을 도살했고, 의주부윤 이완(李莞)은 후금군이 자신을 죽일 수 있도록 고의적으로 그들을 방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조선이 후금과 강화를 체결한 것은 명의 은혜를 배신한 ‘패륜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신달도가 ‘강화를 체결한 것은 조선의 본심이 아니며 적을 기미(羈-어르고 달래는 것)하기 위한 목적에서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모문룡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 백성들을 죽이거나 약탈하지 못하도록 부하들을 단속해 달라.’는 신달도의 요청도 묵살했다.‘조선 사람들이 먼저 자신의 부하들에게 적대 행위를 했기 때문에 보복한 것’이라며 입을 막았다. ●모문룡에 미곡 5만석·은 10만냥 하사 4월28일, 정묘호란의 전말을 명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북경으로 가고 있던 주문사(奏聞使) 일행이 가도에 도착했다. 주문사 일행은 모문룡에게 면담을 신청했지만, 그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다. 모문룡은 부하들을 시켜 조선의 주문사 일행이 명나라로 가는 것을 저지하도록 했다. 주문사 일행의 보고를 통해 정묘호란 중 자신의 행적이 탄로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문룡은 아예 주문사 일행에게 명 조정으로 가져 가는 보고서의 내용을 뜯어 고치라고 강요했다.‘조선이 후금군의 침략을 받아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모문룡의 활약 덕분에 적이 크게 패하여 철수했다.’는 내용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면 북경으로 가는 해로를 열어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주문사 일행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 결국 그의 요구대로 따랐다. 정묘호란 직후 명의 천계제(天啓帝)는 모문룡의 사기 행각에 완전히 넘어갔다. 요동에 파견되었던 태감(太監) 유응곤(劉應坤)은 정묘호란과 모문룡에 관련된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다. 그것은 한마디로 ‘소설’이었다.‘오랑캐 군사 6만이 조선을 공격했는데 모문룡이 기책(奇策)을 내어 제압하여 그들이 심양으로 도망쳤다.’는 내용이었다. 모문룡은 다른 경로로 올린 보고서에서는 ‘자신이 세 차례 대승을 거둠으로써 조선이 보전되었다.’고 허풍을 치는가 하면 ‘조선이 요민들이 끼치는 민폐에 불만을 품고 후금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무고까지 했다. 1627년 5월 천계제는 모문룡의 ‘군공’을 치하하고 그에게 미곡 5만석과 양곡 구입 자금으로 은 10만 냥을 주도록 재가했다. 평소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들을 뇌물로 ‘구워 삶았던’ 모문룡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최고 지도자가 환관과 간신들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고 있던 명의 앞날이 어떤 모습일지 예감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700만 동포에 인정 넘치는 서비스”

    “700만 동포에 인정 넘치는 서비스”

    제1회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이 외교통상부 주최로 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세계 각지의 재외동포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재외동포와 모국간 연대를 강화하고 전세계 한인의 역량을 결집하자는 취지로 열린 이번 행사에는 일본 프로야구 전설의 강타자 장훈씨, 독립운동가 조병요의 외손녀인 양은혜씨 등 재외동포들과 한덕수 국무총리, 송민순 외교부 장관 등 국내인사들이 참석했다. 한 총리는 치사에서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났기 때문에 이 자리가 더욱 뜻깊다.”며 “특히 남북 정상이 해외동포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은 동포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 장관은 기념사에서 “정부의 대외동포정책은 동포들이 거주국에서 번창하고 거주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며 “외교부는 ‘세계 한인의 날´ 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재외동포 700만 시대에 걸맞게 인정미 넘치는 맞춤형 서비스를 동포들에게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우리 국민에게 700만 재외동포의 소중함을 알리고 동포들에게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고취시킨다는 취지에서 지난 5월 ‘세계 한인의 날´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인도, 그 독특한 생존방식

    ‘인도 현대사’는 2007년 독립 60주년을 맞은 인도가 영국 식민통치하의 적대적 환경에 적응하고 저항하며 생존한 지난 3세기의 여정을 담았다. 식민체제로부터 자율적으로 작동한 인도 사회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조명하고, 긴 투쟁과 타협의 과정을 통해 국가의 해방을 이룬 인도인을 인도사의 주변인에서 주인공으로 이동시켰다. ‘정의하고 정의되는 것’이 인간세계의 법칙이라는 경구처럼, 그동안 힘을 가진 영국이 정의한 인도 근현대사는 ‘수억 야만인’에게 문명을 전해준 영국 식민주의에 대한 변명과 찬양의 기록이었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인도사도 영국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내용이 주류였다. 그 논리에 따르면, 인도는 유럽에서 온 왕자님의 ‘키스’를 기다리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 등 미국의 제국주의적 오만과 편견이 여실히 드러나는 오늘날, 지난 세기 인도에서 작동한 영국의 제국주의를 낭만화할 순 없다. 식민통치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의 영토와 삶을 빼앗고 강제로 바꾸는 것이므로 미화되어선 안 된다. 강자가 행사한 힘의 역사를 당연시하면 개인과 사회를 억압하는 현실이 반복될 것이므로…. 이 책은 인도인에게 영국 통치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를 물었다. 이별할 때까지 사랑의 깊이를 잴 수 없듯이 독립할 때까지 인도가 받은 영국 식민통치의 폐해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1600년 영국이 인도에 올 무렵 세계 GDP의 22.5%를 차지하던 인도는 영국의 통치를 마감한 1952년 세계 GDP의 겨우 3.8%를 점유하는 빈곤국으로 전락하였다. 제국사가의 화려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영국 통치는 ‘빵을 빼앗은’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인도인에게 은혜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영국이 얼마나 악독하게 인도를 이용했는가를 주목하진 않았다. 어떻게 인도인이 영국에 영웅적으로 저항했는가에 중점을 두거나 인도 민족주의를 ‘선’으로 파악하지도 않았다. 나는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이분법보다 그 둘이 빚은 변증법적 화음과 불협화음, 지배자를 자기 안에 받아들인 비영웅적 인도의 힘,‘영국으로부터 배운 언어로 영국을 저주’한 인도의 방식을 추적하였다. 인도처럼 타자에 의해 불행한 근대를 경험한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변방사로 폄하되는 인도 역사를 소개하여 미래를 향한 우리의 길목에 이정표를 더하려는 이 책은 최근 인도의 강대국 부상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영국이 오기 전에 누린 위상을 되찾는 과정이자 인도가 소지한 독특한 생존방식의 결과라는 사실을 보다 넓은 견지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
  • 16번째 시집 ‘귀중한 오늘’ 펴낸 김남조 시인

    16번째 시집 ‘귀중한 오늘’ 펴낸 김남조 시인

    “언어가 충분히 발효될수록 시가 순하고 단순해집니다. 난 절망적인 분위기로 한 편의 시를 끝내고 싶진 않습니다. 적어도 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만큼은 위로가 되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원로시인 김남조(80)씨가 16번째 시집 ‘귀중한 오늘’(도서출판 시학)을 냈다. 시인은 “귀중한 시간이 내 삶에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한다.”면서 “얼마 남지 않은 내 삶에 대한 절실함을 담아 제목을 지었다.”고 말했다. 노 시인의 얼굴과 말투는 그의 시어처럼 순하고 편안했다. 68편의 시로 채워진 이 시집은 올해 만해대상 문학상을 받았다. 사랑과 종교에 관한 성찰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시인이 평생 천착해온 시 세계와 다르지 않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나이를 먹으면서 깨닫게 되는 ‘주는 사랑’의 소중함이 더 절절하게 표현됐다는 점이다. “젊었을 땐 사랑받는 사람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조바심을 내지만, 나이를 먹으면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가는 세월을 동무처럼 여길 줄 알게 된 나이. 시인은 이제 삶을 한결 긍정하게 됐고, 그런 긍정은 ‘섣달 그믐날’‘삶의 진맥’ 등과 같은 시편에 올올이 새겨졌다. 시인은 “시인들이 나이를 먹으면 억지로 젊은이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난 나이 먹은 만큼의 세월이 묻어 있는 시, 노년을 받아들이는 시, 노년의 은혜와 풍요와 위안을 노래하는 시를 쓰려고 한다.”면서 “좀더 간결하고 따뜻하게 쓰고 싶다.”고 희망했다. “시는 삶을 비추는 거울과 같아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내가 남기는 시의 부스러기들이라도 가능한 한 따뜻하게 덥혀서 내보내고 싶습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8)정묘호란 일어나다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38)정묘호란 일어나다 Ⅲ

    조선 사신이 ‘재조지은을 배신할 수 없다.’며 침략을 힐문했을 때 아민은 즉각 반박했다. 반박의 핵심은 ‘조선이 명의 은혜만 기억할 뿐 자신들이 베푼 은혜에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과거 울라(烏拉)의 부잔타이(布占泰)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자신들이 부잔타이를 설득해 침략을 중지시켰던 것, 심하 전역 때 포로로 잡은 조선 병사들을 송환해 준 것 등 ‘은혜’를 열거했다. 그러면서 조선이 모문룡을 편들고 군량을 제공했던 것, 누르하치가 죽었을 때 조문(弔問)하지 않은 것 등을 침략의 원인으로 제시했다. ●형제관계를 받아들이다 아민은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 정당하다고 강변하면서, 조선 사신들에게 계속 싸울 것인지 화약(和約)을 맺을 것인지 택일하라고 요구했다. 자신들은 조선의 토지와 백성에 아무런 욕심이 없으며 조선이 화의를 바란다면 국왕이 신임하는 사람을 속히 보내라고 닦달했다. 아민은 사신인 강숙 일행이 돌아가는 편에 자신의 사자 아본(阿本)과 동나미(董納密) 등을 동행시켰다. 그들이 떠난 뒤 전진을 멈추고 중화에서 1주일을 더 머물렀다. 휴식을 취하면서 조선의 답변을 기다리자는 심산이었다. 당시 후금군이 화의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월28일 아민이 보낸 사신 일행이 강화도 건너편의 풍덕(豊德) 부근에 당도했다. 조선 조정은 ‘오랑캐 사신(胡差)’을 어느 길로 들이느냐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인조는, 조선인들이 평소 이용하지 않는 샛길로 호차를 데려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호차가 전하는 국서를 직접 받지 않겠다고 했다. 화약을 맺어 후금군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급하기는 했지만 ‘오랑캐’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2월2일, 호차가 갑곶(甲串)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그가 소지한 국서에는 ‘명과의 관계를 끊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식으로 화약을 맺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이 다시 확인되었다. 인조는 형제의 명칭은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은 후금 측이 조선과 명 사이의 기존 관계를 용인해 준다면 화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척화파들이 들고 일어났다.2월3일, 태학생 윤명은(尹命殷) 등이 상소를 올렸다.‘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예빈직장(禮賓直長) 강유(姜瑜)도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이 주축인 비변사는 뜨끔했다. 비변사는 ‘오랑캐와 화친하려는 것은 전쟁을 완화시켜 종사(宗社)를 보전하려는 부득이한 계책’임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외방에서는 ‘조정이 대의를 망각하고 더러운 오랑캐와 우호를 맺으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다고 우려했다. 인조는 여론을 의식하여 다시 교서를 반포했다.‘종사의 위기를 늦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오랑캐와 화친하지만 명과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만은 절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오랑캐와 화친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고 들어선 인조정권은 광해군대의 ‘화친’을 반복하는 데에 여론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강홍립과 유해의 화의 주선 2월5일 조정은 회답사 강인(姜絪)을 임시로 형조판서에 임명하여 적진으로 보냈다. 그가 가져간 국서에서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또 의연히 천계(天啓) 연호를 사용했다. 후금 측은 반발했다. 그들은 ‘천계’의 ‘계(啓)’ 자 대신 ‘총(聰)’ 자를 쓰라고 종용했다.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라는 요구였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서울까지 진격하여 1년 동안 머물며 철수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후금군 지휘부는 계속 전진할지의 여부를 놓고 의견이 서로 달랐다. 총사령관 아민은 다른 장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서울로 전진할 것을 고집했다. 귀순한 한인(漢人) 출신 장수 이영방(李永芳)이 반대하자 아민은 이영방에게 “내 어찌 너 같은 오랑캐 놈을 죽이지 못할까?”라고 면박을 주었다. 졸지에 ‘오랑캐’로 전락한 이영방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민의 동생 지르갈랑(濟爾哈朗)과 다른 장수들이 모두 나서서 설득한 뒤에야 아민은 전진하겠다는 고집을 꺾었다. 2월9일, 후금 측이 보낸 강홍립과 박난영(朴蘭英), 호차 유해(劉海)가 강화도로 들어왔다. 후금군 지휘부는, 천계 연호를 포기하지 않는 조선 측의 태도가 불만스러웠지만 화친을 깨려는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2월10일, 인조는 강홍립과 박난영을 접견했다. 두 사람 모두 심하 전역에서 투항했던 이후 9년 만의 귀환이었다. 상당수 신료들은 강홍립의 목을 쳐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인조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강홍립은 인조에게 “모진 목숨 죽지 못하고 9년 만에 전하를 뵈니 드릴 말씀이 없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후금 측의 내부 사정을 상세하게 보고하고 강화를 맺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 유해는 본래 한인(漢人)으로 후금으로 귀순한 인물이었다. 후금 측이 그를 사신으로 보낸 것은, 조선이 한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상황을 염두에 둔 조처였다. 실제로 유해는 조선 조정으로부터 과거 명의 칙사들처럼 대접받고 싶어했다. 그는 ‘조선이 오로지 명분에만 집착하여 종사가 망하고 백성들이 죽어 가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며 화친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촉구했다. 조정은 원창부령(原昌副令) 구(玖)를 원창군(原昌君)으로 삼아 그를 왕제(王弟)라고 칭하여 후금군 진영으로 보내기로 했다. 일종의 볼모였다.2월15일에는 목면 1만 5000 필, 면주(綿紬) 200 필, 백저포(白苧布) 250 필 등을 후금군 진영에 보냈다. 일종의 세폐(歲幣)였다. 원창군을 파견하고 세폐를 보냄으로써 화친을 위한 기본 토대는 마련되었다. ●인조, 맹세 의식에 태연 조선과 후금의 화의 과정에서 마지막 걸림돌은 화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하늘에 고하고 맹세(盟誓)하는 문제였다. 후금 측은 국왕과 후금 사신이 동참한 가운데 흰말(白馬)과 검은 소(黑牛)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거행하자고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그것을 비루하게 여겨 거부하려 했다. 언관(言官)을 비롯한 상당수 신료들은 ‘존엄한 천승지국(千乘之國)의 임금이 개돼지와 더불어 맹세하는 것은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격렬히 반대했다. 후금 측은 완강했다. 아민은, 맹세를 기피하는 것은 겉으로만 화친하려는 것으로 끝내 거부한다면 다시 싸워 승부를 가리자고 협박했다.‘청실록’이나 ‘만문노당(滿文老)’을 보면 누르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킬 때마다 희생을 잡아 회맹(會盟)하는 장면이 나오거니와 만주족의 입장에서 맹세는 서로의 신의(信義)를 담보하는 의식이었다. 신료들과는 달리 인조는 맹세 의식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맹세는 대의와는 무관하다. 두 마리 가축을 아끼려다가 위망(危亡)을 초래할 수는 없다.”며 맹세와 관련된 책임은 자신이 모두 지겠다고 나섰다. 3월8일, 인조는 대청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예를 몸소 거행했다. 조선 신료들과 호차들이 각각 동쪽과 서쪽 계단에 도열하여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인조가 예를 마치고 행궁으로 돌아가자 만주인들이 흰말과 검은 소를 잡아 피와 골을 그릇에 담았다. 조선 신료들과 호차들은 새로 만든 서단(誓壇)에 서서 맹세문을 낭독했다.‘조선이 향후 후금을 적대시하여 나쁜 마음을 품으면 이와 같이 피와 골이 나오게 되고, 후금이 나쁜 마음을 품으면 역시 피와 골이 나와 하늘 아래서 죽게 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묘호란이 화친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괄의 난이 남긴 후유증을 비롯한 내정을 추스르기에도 여유가 없었던 조선과 잠시 서진(西進)을 멈추고 내실을 다지는 것이 절실했던 후금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길섶에서] 고통과 소망/이목희 논설위원

    A씨는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안 하고 살아온 이다. 어깨가 몹시 아파 병원에 갔더니 폐암이 뼈까지 전이된 것이라고 했다.B씨는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이다. 심한 허리디스크를 무릅쓰고 봉사를 하다가 하반신 마비로 쓰러졌다. 착하고 선한 이들이 왜 이리 고통을 받을까. 후배 C는 남보다 일찍 출근해 밤늦게까지 일에 매달린다. 항상 “헉헉거린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열정적이다. 그런데 툭하면 원형탈모증에 시달린다. 다른 후배 D 역시 취재 열성이 대단하다. 신경을 너무 쓴 탓일까, 젊은 나이에 어깨가 망치로 때리는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열심히 하는데 왜 고통이 따를까. 브라질 상파울루의 한 성당을 구경한 적이 있다. 성당벽에 목발이 수백개 걸려 있었다. 그곳에서 기도한 뒤 치유의 은혜를 받은 증거라고 했다. 감동에 앞서 “사실일까?”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마음을 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반성을 했다. 신이 적당한 때 생명을 거둬가더라도 착하게, 또 열심히 사는 순간만큼은 고통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7)정묘호란 일어나다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37)정묘호란 일어나다Ⅱ

    1627년 후금이 갑자기 정묘호란을 도발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합적이었다. 조선과 후금,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과 명(-모문룡 문제를 포함) 사이의 문제점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특히 누르하치가 죽은 뒤 추대 형식으로 즉위했지만 한(汗)의 위치에 걸맞은 권력과 권위를 갖지 못했던 홍타이지는 전쟁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했다. ●조선과 무역 통한 식량 확보도 전쟁 도발 배경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해 강경론자였다. 그는 일찍부터 부친 누르하치에게 조선을 공격하라고 청했다. 특히 1619년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심하 전역에서 패하여 투항한 뒤에는 ‘후금과의 화의에 미온적인 조선의 장졸들을 전부 살해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누르하치나 홍타이지의 형 다이샨(代善)의 입장은 달랐다. 두 사람은 ‘조선이 명의 배후에 있는 점을 고려하여 적대하지 말고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을 삐딱하게 보고 있었던 홍타이지가 한으로 즉위한 것 자체가 조선에는 재앙이었던 셈이다.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즉위 당시 홍타이지의 권력은 미약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한이었지만 실제로는 그의 형제들과 연정(聯政)을 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촌형 아민은 홍타이지 추대에 반발하여 자신의 기(旗)를 이끌고 독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면 홍타이지가 조선을 치러 가는 원정군 사령관으로 아민을 임명한 것은 시사적이다. 아민에게 원정의 모든 책임을 지움으로써 그의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고,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다. 아민은 실제 원정 도중 홍타이지의 방침과는 배치되는 독단적인 행보를 보임으로써 홍타이지의 ‘기대’에 부응한 바 있다. 후금이 전쟁을 도발했던 원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제적 문제였다. 홍타이지의 즉위 직후 만주 지역에는 심각한 기근이 닥쳤다.‘청태종실록’에는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여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고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할 수 없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점령 지역은 늘었지만 농작에는 아직 서툴렀던 후금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명나라 상인들과 곡물 무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명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심각한 기근 때문에 위기에 처한 후금에 조선의 존재는 특별했다.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유일한 나라였다.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무역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고자 했다. 후금의 전쟁 도발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역시 ‘모문룡 문제’였다. 모문룡이 가도에 머무는 한, 후금의 서진(西進) 시도는 언제나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모문룡의 존재 때문에 한인들이 계속 후금을 탈출하고 있었다. 모문룡이 군사적으로는 미약했지만 후금에는 ‘목에 걸린 가시’였다. 그 ‘가시’를 제거하여 ‘후고(後顧)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일으킨 결정적인 배경이었다. ●아민, 홍타이지에 증원군 긴급 요청 조선 조정은 황해도 이북의 방어선이 붕괴되자 전열을 다시 정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도원수 장만과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에게 평안도 지역의 패잔병과 함경도, 강원도 등지의 병력을 모아 임진강을 방어토록 했다.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는 남한산성을 본거지로 삼아 하삼도 군사를 통괄 지휘하여 한강을 방어토록 했다. 그리고 통제사 구인후(具仁)가 거느리는 수군 병력으로써 적의 강화도 상륙을 저지하도록 조처했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역시 인조가 머물고 있는 강화도를 수비하는 문제였다. 전쟁 초반의 전체적인 전황(戰況)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상황이었지만 후금군은 의외로 신중했다. 후금군은 의주성을 함락시킨 직후 총사령관 아민의 명의로 평안감사 윤훤에게 서신을 보내 화의(和議)를 제의했다. 윤훤은 후금 측에, 조정에 품의(稟議)한 후 회답을 주겠다고 했고 1월18일 조정은 윤훤의 장계를 통해 후금이 화의를 제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시점에 후금이 갑자기 화의를 제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당시 후금군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점이다. 후금은 조선 침략에 약 3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민은 그 숫자로는 서울까지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청천강 이북을 점령했던 직후, 이미 홍타이지에게 사람을 보내 증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3만명의 병력으로는 한편으로 전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점령 지역을 방어하고 그곳의 조선 관민들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은 원숭환의 위협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이 조선으로 쳐들어가면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명군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미 살폈듯이 1626년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이후, 후금군의 서진은 좌절되었고 오히려 영원성에 주둔하는 원숭환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명의 병부는, 후금군이 조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틈을 이용하여 후금 지역을 공격하자고 건의한 바 있다. 산해관과 영원의 병마와 모문룡의 병력을 동원하여 배후를 협공함으로써 조선을 원조하자는 내용이었다. ●답장 내용 놓고 설전 후금이 화의를 제의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조선 조정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양사(兩司) 관원들은 ‘평안감사 윤훤이 엄한 말로 오랑캐의 서신을 물리치지 못하고 답장을 주겠다.’고 응답한 것을 비난하고 인조에게 신중히 대처하라고 촉구했다. 이윽고 후금 측은 강홍립의 종자인 언이(彦伊) 등을 다시 윤훤에게 보내 ‘화의를 논의하기 위해 사람을 서울로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윤훤의 장계를 통해 두번째 화의 제의를 받자 인조는 비변사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인조는 “서신을 받자마자 화친을 허락하면 우리가 겁을 내서 그런다고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흠(申欽)은 ‘명나라도 그들과 화친하려는 판에 우리만 화친을 피할 수 없다.’고 했고, 이귀는 ‘적이 평양으로 진격해 오면 사태 수습이 불가하다.’며 답서를 꾸며 강홍립의 아들 강숙 편에 부치자고 했다. 최명길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먼저 서신을 보낸 주체가 후금의 한 홍타이지가 아니라 사령관 아민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도체찰사 장만의 명의로 답하되, 무고하게 침략하여 군민들을 도륙한 허물을 따지고 ‘위협적인 맹약은 죽어도 따를 수 없으며 침략 사실을 명에 알리겠다.’는 내용을 집어넣자고 했다. 명을 이용하여 후금군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긴 의견이었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후금 측의 화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사간 윤황(尹煌) 등 삼사 신료들은 인조가 강화도로 떠나기 전부터 반정공신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윤황 등은 ‘전하께서 총애하는 김류 이귀 이서 신경진 김자점 등 반정공신들은 해도(海島)로 들어가거나 산성으로 올라가고, 혹은 호위(扈衛)를 칭하거나 검찰(檢察) 직책을 맡아 안전하고 편안한 자리를 차지하고 오로지 힘없고 배경이 없는 장만만을 맨손으로 적진에 보냈다.’고 성토했다. 그들은, 맨 처음 도성을 떠나자고 주장한 자의 목을 베고 인조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여하튼 강숙 등은 조정의 답서를 가지고 1월27일 후금군 진영에 도착했다. 후금군은 이미 중화(中和)까지 남하해 있었다. 답서의 핵심은 이러했다.‘조선은 명을 200년 이상 섬겨왔고 임진왜란 때 명에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조선의 답서 내용에 반발했다. 그는 ‘조선은 명의 은혜만 강조하는데 과거 후금도 조선에 커다란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고 맞받았다. 바야흐로 ‘은혜’를 둘러싼 설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15일 TV하이라이트]

    ●특파원 현장보고(KBS1 오후 11시) 호주 정부가 최근 이민 정책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다문화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하워드 총리는 ‘이민다문화부’를 ‘이민시민사회부’로 바꾸는 등 동화를 강조하는 쪽으로 이민 정책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민자들이 사회 전반에 많은 기여를 해 온 호주에서 새 이민 정책이 몰고 올 파장을 살펴본다. ●드라마시티 ‘쉿, 거기 천사’(KBS2 오후 11시15분) 병역의무를 마친 심형탁의 몸을 아끼지 않은 액션연기와, 주목받는 신예 한나연의 가슴 절절한 사랑연기가 펼쳐진다. 신장이 필요한 여자와 불법 장기밀매를 하는 남자의 독특한 러브스토리가 내용이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 두 남녀가 보여줄 그들만의 사랑에 주목해보자. 유현기 PD의 세 번째 연출작이다. ●찾아라! 맛있는TV(MBC 오전 9시) ‘아나운서계의 식신’ 오상진이 사이판 완전정복에 나섰다. 열대의 열기가 가득한 사이판 전통음식과 기상천외하고 입맛 도는 음식들이 가득한 쪽빛 바다. 아름다운 지상 낙원 사이판에서 오상진은 해삼을 잡는 쾌거를 거둔다. 사이판 마나가하 섬의 해저에는 놓치면 후회할 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SBS 오후 11시05분)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평범한 소시민들을 두 번 울리는 재혼전문업체들의 실태를 알아본다. 특히 탤런트 K씨가 CEO인 H재혼전문업체는 커플 매니저들의 수당을 불리하게 책정, 매니저가 자신의 수당을 위해 회원에게 등급을 올리라고 부추김으로써 재혼을 원하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데…. ●‘EBS스페이스-공감’(EBS 오후 10시) 9인조 브라스 스카 밴드 킹스턴 루디스카와 독일의 재즈삼중주단 발터랑 트리오가 출연한다. 킹스턴 루디스카는 2004년 봄, 첫 공연을 시작으로 홍대, 이태원, 압구정동 등지의 클럽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차분하면서도 에너지가 뜨거운 발터랑 트리오는 비틀스의 히트곡 ‘Yesterday’ 등을 들려준다. ●글로벌 코리안(YTN 오전 10시35분) 세계 4대 영화제 중 하나인 토론토 영화제에 한국 영화 4편이 소개돼 한국영화에 대한 인지도를 실감케 했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은 마스터스 부문에 초청됐고, 한국에서도 아직 개봉 전인 이명세 감독의 미스터리 멜로물 ‘M’은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영화로 소개되는 ‘비전 부문’에 선정됐다. ●한국말 요리쇼(EBS 오후 9시30분) 한국 주부라면 꼭 알아야 할 요리인 된장찌개. 그러나 이주 여성에게는 된장찌개 맛을 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만드는 방법은 알아도 요리하고 나면 무언가 부족한 듯한 ‘무늬만 된장찌개’가 된다. 결혼 2년차 주부 차미(24)씨가 된장찌개 맛을 전수받고자 출연했다. ●깍두기(MBC 오후 7시55분) 달래는 동진의 신붓감을 보려고 방송사로 향한다. 달래는 은호를 만나 사귀는 남자가 있느냐며 동진이는 어떠냐고 묻는다. 난감해진 은호는 방송사 구경을 시켜준다며 일어선다. 한편 금희는 동진에게 황상범씨를 찾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은혜를 입은 분의 아들인 것 같다며 거처를 알게 되면 가르쳐 달라고 말한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홍타이지는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오랫동안 후금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한 뒤 모문룡도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모문룡이 조선의 비호 속에 가도에 머물면서 후금을 탈출하는 반민(叛民)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의주·정주·안주성 차례로 함락 후금군은 1월13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으로 들이닥쳤다. 당시 후금군은 다국적군이었다. 만주족 병사들뿐 아니라 한족과 몽골 출신 병사들도 있었다. 사령관은 아민이었고, 한족 출신의 이영방(李永芳), 조선 출신의 강홍립과 한윤(韓潤)도 지휘부에 끼어 있었다. 이영방은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투항했고, 강홍립은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 참전했다가 투항했다. 한윤은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켰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이었다. 후금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한윤은 변장하고 몰래 의주성으로 들어왔다.14일 새벽 후금군이 성을 포위하여 전투가 시작되자 한윤은 병기고에 불을 질렀다. 혼란한 와중에 후금군에 내응하는 자들이 성문을 열었고 후금군은 수월하게 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성을 지키던 의주목사 이완(李莞)은 사로잡혀 피살되었다. 의주성 함락 후 후금군은 정주(定州)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포위했다. 성을 지키는 조선 병사들은 일제히 조총을 쏘았지만 다시 탄환을 재기도 전에 돌격해 들어간 후금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선천부사 기협(奇協)이 전사하고, 정주목사 김진(金搢)과 곽산군수 박유건(朴惟建)은 포로가 되었다. 성 함락 후 후금군은 저항했던 군사들을 전부 살해했다. 백성들은 적에게 포로로 잡힌 뒤 전부 머리를 깎였다. 머리를 깎은 것은 포로들이 이제 자신들의 소유가 되었음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후금군은 1월21일 청천강을 건너 안주(安州)로 들이닥쳤다. 안주는 당시 청북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조선이 나름대로 오랫동안 방어태세를 점검해 왔던 곳이었다. 성 안의 군민도 3만 6000이나 되었다.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은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결전을 준비했다. 적의 돌격이 시작되자 대포와 화살을 일시에 발사하여 저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삼남(三南)의 농민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던 조선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금군의 대병력이 순식간에 성을 넘어왔고, 조선군은 우왕좌왕했다.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남이흥은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 더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장렬한 순국이었다. 안주 함락 후 아민은 병사들에게 4일간 휴식 시간을 주었다. 그들은 느긋했다. 반면 안주성이 함락된 후, 숙천(肅川)과 평양의 조선 관민들은 풍문만 듣고도 무너졌다. 후금군의 승승장구였다. ●당황하는 조선 조정 후금군의 침략 소식이 서울의 조정으로 날아든 것은 1월17일이었다. 인조는 급히 신료들을 불러보았다. 인조는 신료들을 보자마자 “이들이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이냐? 아니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모문룡 문제’를 빼놓으면 후금과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 자체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장만(張晩)은 속히 하삼도에서 병력을 징발하고, 황주(黃州)와 평산(平山)에 별장(別將)을 보내 방어 태세를 갖추자고 촉구했다. 이귀(李貴)는 황해도를 방어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강화도를 피란처로 정해 놓았다가 안주에서 패전 소식이 들어오면 곧바로 강화도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패전을 이미 기정사실로 설정해놓고 대응하려는 자세 같았다. 최명길은 임진강을 방어할 계책을 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비변사 신료들도 무신 신경진(申景 )을 임진강으로 보내자고 했다. 하지만 인조의 마음은 이미 강화도로 들어가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 방어를 위해 삼남 지방에서 1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수사(水使)들을 시켜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인조의 우선 관심사는 자신의 호위(扈衛:궁궐을 지킴) 문제였다. 인조는 아마도 ‘이괄의 난’ 당시 권력을 잃어버릴 뻔했던 아찔한 기억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은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궁벽한 강화도로 들어가면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고, 조운(漕運)도 어렵다고 우려를 제기했다. 그럼에도 굳이 강화도로 들어가려면 분조(分朝)를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가되, 왕세자를 삼남으로 보내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흠(申欽)은 인조에게 민심 수습을 위해 백성들에게 ‘애통해 하는 교서(敎書)’를 내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일종의 ‘사과 성명’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건의를 받아들여 장유(張維)에게 교서를 짓도록 했다. 인조는 교서에서 ‘반정 직후 민생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채 백성들을 기만한 것’,‘옥사(獄事)가 빈발하여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 때문에 화기(和氣)가 손상된 것’,‘모문룡을 접대하기 위해 세금을 혹독하게 거둔 것’,‘호패법(號牌法)을 가혹하게 시행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것’ 등 ‘실정’에 대해 사과했다. 이어 자신을 ‘임금답지 못한 임금’이라고 자책한 뒤 ‘부디 열성(列聖)의 은혜를 생각하여 기댈 곳 없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했다.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굴욕까지 감수했던 것이다. 인조는 10년 뒤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1637년 병자호란이 항복으로 끝난 뒤에도 백성들에게 다시 사과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강화도 이외의 방어를 포기하다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여타 지역에 대한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 인조는 신료들과 가졌던 대책 회의에서 장만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했다. 방어를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장만은 황해도의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적과 조우할 경우에 대비하여 어영군(御營軍) 가운데 사격술이 뛰어난 포수 100명을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인조는 거부했다. 호위에 충당할 어영군의 병력을 덜어낼 수는 없다고 했다. 비변사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반정공신들 또한 극도로 몸을 사렸다. 강화도로 피란하기로 결정한 직후 논란이 된 것은 임진강을 방어하는 문제였다. 훈련도감과 어영군의 병력을 호위에만 투입하게 되자 임진강 방어에 충당할 병력을 차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김류는 이시백(李時白) 휘하의 수원부 군사들을 임진강 방어에 투입하자고 했다. 그러자 이귀가 발끈했다. 이귀는 ‘군량이 궁핍한 상황에서 수원의 병력을 임진강으로 보내면 오직 죽음 뿐’이라고 반발했다. 이시백은 이귀의 아들이었다. 이귀는 수원의 병력도 인조를 호위하는 데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류는 반박했다.‘적병이 이미 깊숙이 들어왔는데 장강(長江)의 요새를 버리고 나라를 도모할 수 있겠냐?’고 힐문했다. 인조는 결국 이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수원의 군병도 강화도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보다 못한 보덕(輔德) 윤지경(尹知敬)이 상소를 올렸다. 그는 “적이 아직 천리 바깥에 있음에도 먼저 도성을 버릴 궁리만 하고 있다.”고 통탄하고 인조에게 경솔히 파천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병력 500명만 주면 임진강을 사수하겠다고 다짐했다. 1월26일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가기 위해 노량(露梁)으로 거둥했다. 하지만 배가 부족하여 강을 건너기가 여의치 않았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모래밭에 앉았다. 이괄의 반란군을 피해 한강변으로 나왔던 이래 두 번째 맞는 파천이었다. 다음날 인조는 김포를 경유하여 저녁에 통진(通津)에 도착했다. 조정이 강화도로 옮겨가면서 임진강을 포함한 다른 지역의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포함하여 한강 이북 지역의 백성들은 후금군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정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켜야만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7) 조희룡이 지은 전기집 ‘호산외기’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7) 조희룡이 지은 전기집 ‘호산외기’

    사마천은 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으로 본기(本紀)·표(表)·서(書)·세가(世家)·열전(列傳)의 다섯 가지 체제를 채택했다. 본기는 제왕들의 이야기이고, 표는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이며, 서는 제도를 서술한 부분이다. 세가는 제후들의 이야기이고,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제외한 각계 각층의 이름난 사람들 이야기이다. 전(傳)은 ‘그 사적을 적어서 후세에 전한다.’는 뜻인데,‘사기’ 식의 역사서술을 기전체(紀傳體)라고 분류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역사를 서술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벼슬도 못한 중인들의 삶을 전기로 전(傳)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남다르게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라야 후세에 전해진다. 한문학의 갈래 가운데 전(傳)이 있어서, 예전부터 충신, 효자, 열녀의 이야기를 전(傳)의 형태로 기록했다. 충(忠)·효(孝)·열(烈)은 삼강(三綱)의 덕목이니, 충신, 효자, 열녀가 생기면 그의 후손들이 이름난 사대부에게 찾아와 전기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름난 문인이 전기를 지어야 그의 문집에 실려 그 이름이 후대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충신, 효자, 열녀에게는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기 때문에, 임금이나 관찰사, 군수 등이 이름난 문인에게 전기를 지으라고 명하기도 했다. 양반들의 직업은 관리 하나뿐이지만 중인들은 직업이 다양한데다 봉건체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도 또한 달랐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지은 전들도 또한 사대부들의 전과는 내용이나 분위기가 달랐다. 특히 당대의 질서를 거부하고 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던 몇몇 중인들의 전이 관심을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대부들이 교유관계에 따라 중인의 전을 지어주기도 했지만, 중인 후배들이 자랑스러운 선배의 전을 짓기도 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가가 조희룡이다. 그는 중인들의 전기를 책으로 내게 된 동기를 ‘호산외기(壺山外記)’ 서문에서 밝혔다. “내가 집에 머물면서 무료한 나머지, 내 귀로 직접 듣고 눈으로 직접 보았던 몇 사람의 삶을 기록하여 전을 지었다. 다행히도 이 전기가 천지간에 남아 있다가, 뒷날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 사람이 옛날의 ‘사기’를 대했던 것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가 전기를 지었다고 해서, 중인들의 생애가 후세에 꼭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 첫머리에 ‘백이·숙제’를 싣고, 그 끝머리에서 이렇게 질문하였다.“여항인(閭巷人)이 품행을 닦고 이름을 세우려 하더라도, 청운지사(靑雲之士)의 붓에 실리지 못한다면 어찌 그 이름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 사마천이 다행히도 청운의 선비였기에 사기에 실린 인물들은 그 책과 함께 이천년 동안 이름이 전해졌지만, 조희룡은 “내가 어찌 사마천 같은 사람이겠는가?”하고 탄식하였다. 후세에 전할 만한 중인들의 전기를 다 지어 놓고도, 역시 중인인 자신의 신분 때문에 이 책마저 땅에 묻히고 말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였다. 그러나 그가 첫 번째 중인들의 전기집을 냈기 때문에 중인들의 남다른 삶이 기록에 남겨졌고, 그 뒤에도 이를 바탕으로 한 중인들의 전기집이 계속 지어지게 되었다. ●찬의 형식을 빌려 중인들의 삶을 평가 조희룡이 56세에 지은 ‘호산외기’에는 효자 박태성부터 시인 박윤묵에 이르기까지 39항목 42명의 전기가 실렸는데, 이 차례는 직업순도 아니고 나이순도 아니다. 대체로 영·정조 때의 사람들 이야기를 자신이 보고 들은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다가, 직하시사의 선배격인 송석원시사의 마지막 시인 박윤묵에서 끝냈다. 박태성의 증손자 박윤묵의 이야기에서 끝낸 것은 우연이다. 역관·화원·의원·악공 등 전형적인 중인들뿐만 아니라 바둑꾼·책장수·아전·협객, 심지어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그 직업도 다양하다. 지배층 양반이 아닌 사람은 고루 다 포함시켰다. 물론 지배층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삶은 위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그 속에 참이 있었고, 또한 몸부림이 있었다. 조희룡은 자기의 호인 호산거사의 입을 빌려서, 또는 본문 뒤에 덧붙인 찬(贊)의 형식을 빌려서 이들을 평했다. 서리 박윤묵의 경우를 보자. “처음부터 그에게 인욕(人慾)이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끝내 천리(天理)로써 이긴 자이다. 그런 까닭에 존재(存齋 박윤묵)는 군자다.” 뛰어난 글재주를 지니고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던 그였지만,“평소에 닦은 학문의 힘이 드러나서” 죽은 친구의 첩이 은혜를 고마워하며 스스로 시중 들기를 원했는데도 다른 곳으로 개가시킨 행위를 칭찬했다. 그야말로 사대부들의 궁극적 목표인 ‘군자’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협객과 함께 놀던 시절을 회상하며 지어 사대부들은 대개 전기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자료를 보고 전기를 썼지만, 조희룡은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기로 썼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자신이 확실히 모르는 사람의 전기도 썼지만, 조희룡은 대부분 자신과의 관계를 밝혔다. 그랬기에 그가 지은 전기는 더 신빙성이 있다. 협객 김양원의 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김양원(金亮元)은 이름을 잃어버리고 자(字)로 불려졌다. 젊었을 때는 협기있게 놀기를 좋아했으며, 계집을 사서 술청에 앉아 술도 팔았다. 몸집이 큰 데다 얼굴도 사납게 생겼다. 기생집이나 노름판으로 떠돌아다녔는데, 서슬이 시퍼래서 사람들이 감히 깔보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처사들과 일행이 되어 시에 맛들이더니, 지금까지의 버릇을 꺾고 시인들을 따라 노닐게 되었다. 시로써 이름난 사람이라면 젊고 늙고 할 것 없이,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만난 것처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시를 짓는 솜씨가 재빨라서, 남이 열을 지으면 자기도 열을 짓고, 남이 백을 지으면 자기도 백을 지었다. 남에게 뒤지기를 부끄러워했다.(줄임) 시사(詩社)에 갔다가 하루라도 시를 짓지 않으면 화를 내며 “어찌 시사가 모이는 의미를 저버린단 말이냐?”고 꾸짖었다. 호산거사가 이렇게 말했다.“문인이 술청에 앉아 그릇을 씻었던 모습을 위로는 사마상여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고, 아래로는 양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양원이 어찌 사마상여겠는가마는 그 뜻을 따랐을 뿐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게 글공부를 했는데, 김양원은 여자를 사서 술집을 차렸다. 기생집뿐만 아니라 노름판까지 휘어잡은 협객이었는데, 시를 배우더니 문장판도 휘어잡았다. 성품 그대로 급하게 지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게으른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랬기에 성서시사(城西詩社)도 그가 이끌 때에는 시끌벅적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적막해졌다. 사마상여가 부잣집 딸 탁문군을 꾀어 동거했는데도 장인이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자, 이들 부부는 술집을 차렸다. 자기의 딸이 술장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장인도 결국 살림을 나눠 주었다. 김양원이 사마상여같이 위대한 문장가는 아니었지만, 시대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술장사를 하게 된 것은 서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김양원의 전기 후반부는 조희룡의 회상이다. <20년 전에 김학연과 함께 흔연관(欣涓館) 화실로 소당(小塘·이재관)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서로 “양원에겐 말하지 말자. 시를 지어 그림 그릴 흥취를 깨뜨릴까 염려되니까.”라고 약속했다. 소당이 시를 못 짓기 때문이었다. 흔연관에 이르렀더니 봉우리 그림자가 뜨락에 와 덮였고, 사람의 발자취도 없이 고요했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소당이 이웃집 중에게 관음상을 그려주고 있었는데, 미처 다 끝내지 못했었다. 서로 손을 맞잡고 즐거워하면서, 좀처럼 얻기 어려운 오늘의 만남을 놀라워했다. 천장사의 중 금파(錦波)와 용해(龍海)도 마침 이르렀는데, 모두 시를 짓는 중들이었다. 용해는 묘향산에서 온 지가 겨우 며칠밖에 안 되었다. 여러 명승지들을 두루 얘기하는데, 산속의 안개와 노을이 그의 혀뿌리에서 일어나는 듯했다. 이때 비비람이 몰아치더니 안개가 일어나며, 마치 신군(神君)이 오는 듯했다. 갑자기 검은 구름 속에서 “고기 사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로 우스갯소리로 말했다.“아마도 선재동자(善才童子)가 관음보살의 연못에서 잉어를 훔쳐와 우리 인간들을 놀려 주나 보네. 그러지 않고서야 비바람치는 빈 산속에 고기를 팔러 오는 자가 어찌 있겠나?”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마치 세상 사람들이 그려 놓은 철선(鐵仙) 같았다. 어깨엔 큰 고기 한 마리를 둘러메고 구름을 헤치며 나타나서, 수염을 떨치며 한바탕 웃어댔다.“내가 은하에서 고기를 낚아 왔다네!” 깜짝 놀라 바라보니, 바로 양원이었다. 그가 크게 소리쳤다.“자네들이 나하고는 차마 같이 오지 못하겠다니, 누군들 참을 수 있겠나?” 그러고는 고기를 삶고 술을 데우며, 서로 예전처럼 시 짓기를 재촉했다.> 사대부가 썼다면 전기에 들어가지도 못할 이야기지만, 조희룡의 체험으로 쓰다 보니 김양원의 협객적인 면모가 실감나게 드러났고, 시인과 화가, 스님들이 어울리던 시사의 모습도 구체적으로 남게 되었다. 화가 이재관의 전기가 뒤에 실렸다고 소개해, 관심있는 독자들이 찾아 읽게 만들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Local] 쓰레기 투기예방 ‘양심거울’ 설치

    강원 원주지역 상습 쓰레기 무단투기지역에 6일 일명 ‘양심 거울’이 설치됐다. 설치 지역은 ▲봉산동 이하우 신경외과 앞, 로아노크 광장 ▲명륜2동 새마을지도자 공원, 도영쇼핑 뒤, 가마솥 손두부 앞 ▲은혜마을 입구 ▲창대교회 밑, 원주 구세군 어린이집 입구 ▲제일은행 뒤, 국민은행 옆 ▲대흥아파트 옆 ▲우산동사무소 앞 ▲법원 옆 골목 ▲일산성당 앞, 원주기독병원 뒤 등 모두 15곳이다. 양심 거울은 쓰레기 불법투기 때 자신의 모습이 비쳐지도록 지름 1m의 도로 반사경과 같은 원형 볼록거울 형태로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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