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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3·1 정신으로 제2국난 극복

    기미년 3·1독립항쟁 80주년을 맞는다.남북분단 상태와 우리의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북한의 모라토리엄(대외채무지불정지)상태에서 맞는 3·1항쟁은 과거 어느때보다 의미가 각별하다고 하겠다. 3·1항쟁은 개항을 전후하여 외세에 대항하면서 전개된 일련의 민족운동의결과로 민족내부에 축적된 독립운동 역량이 자발적으로 발산된 항일구국투쟁이다. 3·1항쟁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상황을 보면, 집회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피검자 5만 2,770명, 불탄교회 47개, 불탄민가가 715채나 되었다.이러한 수치는 일제의 은폐에도 불구하고 밝혀진 것에 불과하고 실제는 더 많은 희생을 가져왔을 것이다. 비록 3·1항쟁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엄청난 희생을 낸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드러냈으며,중국 인도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 등 피압박 민족의 해방투쟁의 봉화가 되었다.이런 의미에서 3·1항쟁은 세계피압박민족해방투쟁의 선구적 혁명이라 하겠다. 3·1항쟁은 갑오농민운동·애국계몽운동·의병운동을 비롯하여 모든 민족운동이 집약되고,그 이후의 항일구국운동도 여기서 발원하는 민족운동의 요람이다.계층 노소 지역 성별 신분을 초월한 거족적인 항일투쟁이었다.봉건왕조에서 식민지로 전락한지 9년만에 전민족이 대동단결하여 통일역량을 보여주고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일깨웠던 구국항쟁이었다. 대한민국 존립의 준거 3·1정신은 바로 오늘 우리가 존립하는 대한민국의 준거이기도 하다.그것은 3·1운동을 계기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정은 26년 동안이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카이로선언을 계기로 민족해방을 쟁취하게 되었다. 임정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에 놓여있음을 유의하여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라는 카이로선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3·1항쟁은 순수한 민족역량의 자발적인 결집이고 발산이었다.흔히 학계 일각에서는 3·1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받아 일어난 독립운동으로 평가하지만,당시 일제의 철저한언론통제로 파리평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됐을 때 유일한 국내 한글신문이었던 총독부기관지는 한줄도 보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한국민중은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한 학계일각에서 주장해온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설도 비슷한 상황으로서 한국 민중이 이를 알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다.당시 러시아 한인사회에서는 국내의 3·1항쟁 소식을 접하고 3월 17일에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축하회를 개최한데서도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국민화합의 가치관 3·1항쟁으로 시작된 민족의 저항은 마침내 8·15해방으로 귀결되었지만 통일조국을 이루는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내부분열과 외세개입 때문이었다. 그리고 분단과 동족상쟁과 대결의 시대가 50년 이상 지속되면서 남한의 IMF사태,북한의 모라토리엄상태로 민족적 시련을 겪고 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은 일제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면서도 겨레가 하나되어 독립항쟁에 나섰던 선열들에게 부끄럽고 죄스런 모습이다.분단 남쪽은다시 동서로 갈리고 지역별로 토막쳐서 대립과 갈등을 겪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야간의 비생산적인 정파싸움,제 밥그릇 챙기기에 개혁을 거부하며 거리투쟁에 나선 일부 세력,부패와 복지부동의 관료집단,탈세와 외화도피를 일삼는 반사회적 기업가 등 반 3·1정신적인 행태가 도처에서 국난극복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80년전 선대들의 애국정신을 회복하는 역사적 결기(結起)가 있어야겠다.망국의 백성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일제의 폭압에 맞섰듯이 3·1정신으로 다시하나되어 IMF국난을 극복하고 분단조국 통일의 구심점으로 삼아야겠다. 우리 건국이념이고 민족통합의 원형질인 3·1정신을 화합과 통일이념으로승화시켜야 한다.그리하여 작은 이해와 갈등 따위는 80년전 선대들의 구국정신으로 용해하면서 10개월 후 열리는 2000년대에 한민족이 세계무대에서 우뚝서는 이념적 지표를 세워 나가자. 3·1항쟁과 항일구국투쟁으로 희생된 순국선열과 그 후손들이 대접받고, 양심적이고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정직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이것은 50년 만에처음으로 여야 정권교체를 통해 집권한 金大中정부의 책무이면서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국민이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민의 정부’를 선택한 것은 바로 3·1정신을 잇는 ‘정직한 역사’를 만들자는 소망의 결집이었다.3·1정신은바로 정직한 사회·정직한 국가를 만들자는 겨레의 소망이며 실천운동의 거대한 축(軸)이다.
  • 대한광장-국회와 양비론

    오랫동안 여당 단독으로 열려서 경제청문회까지 마친 국회가 여야(與野)합의에 의하여 22일 임시국회부터는 정상적으로 문을 연다고 한다.정치가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것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 국민의 처지에서는 이렇게 파행(跛行)국회를 만들어온 당사자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국회 소집요구를 해놓고 오히려 출석을 거부하면서 소위 ‘장외집회’라는 것으로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치 대단한 정치행위를 하는 것처럼 비치게 한 것도 책임의 일단일 뿐 아니라, 검찰에서 체포동의안을 요구한 비리 국회의원에 대하여 시시때때로 적당한 타협안을 내놓고 정치적 흥정을 한것도 옳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회를 바라보면서 책임의 경중이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싸잡아 양쪽 모두 다 잘못되었다는 식의 양비론은 더욱 무책임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여야가 다 똑같고 이럴 바에야 국회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핏대를 올리는 일은 결국 기분풀이는 될지 모르지만 문제의 핵심을 제기하지 못하고 문제의 해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사실 우리는 이와같은 양비론에 너무나 익숙해왔다.그 양비론은 결국은 진실을 은폐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올바른 방향을 잡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게만들었다.따라서 양비론은 오히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고 판단기준마저도모호하게 만들어 왔다.사실 정치는 적절한 타협의 과정 또는 그 타협의 예술이라고 까지 말하지만 그렇다고 거짓이나 비위를 덮어가면서 적당히 체면이나 지키자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정치는 국민을 위해 국민의 뜻을 반영하면서 좋은 나라,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끊임없는 역사적 성찰과 새롭고 올바른 목표를 제시할 수있어야 한다.이런 뜻에서 국회는 ‘신성’해야 한다.개인의 치부를 감추기 위하여 국회를 모독하거나 당의 이익을 위하여 교묘하게 국회를 이용하려 한다면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인 것이다.따라서 국민은 이것을 밝혀내야 할 책임이 있고 국회에 대하여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지난 경제청문회가 환란(換亂) 위기와 함께 국가부도의 위기를 초래한 일에 대한 책임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과정으로 이러한 불행이 일어났는가를 따지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그것은 어떤 한 개인을 탓하거나 책임을 묻기보다도 어떤 논리로 어떤 외환정책이 세워졌으며 또 그 정책을 실천하면서 어떤 과정에서,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청문회를 통하여 밝힌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 일은 국회의 책임이었으며 동시에 국민의 권리였다.어떤 이유에서도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왜냐하면 그토록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처지를 보면서 국회는 그 배경과 사유를 밝혀야하기 때문이었다.사업장이 무너지고,가정이 깨지고,자식들의 희망마저 사라져서 좌절해 있는 사람들에게 국회는 답변을 들려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양비론으로 덮어놓을 수도 없고 또 양보할 수도 없는 일이다.여야가 함께 임시국회를 열면 이 진실부터 밝히고 잘못을 저지른 국회의원들에게준엄한 결정을 내려 국회의 권위를 되살려야 한다.그래야 희망이 있다.
  • 崔淳永회장 영장 청구

    서울지검 특수1부(朴相吉 부장검사)는 11일 신동아그룹 崔淳永 회장(60)을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사기·재산국외도피·업무상 배임)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崔회장은 법원에 영장실질심사를 요청했다. 새정부들어 재벌총수가 사법처리되기는 처음이다. 崔회장은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신아원 전 대표 金鍾殷씨(46·구속)에게 단독범행처럼 꾸며줄 것을 요구하고,미국으로 도망간 공범 高충흡씨와도 전화등을 통해 수시로 접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崔회장은 지난 96년 5월부터 97년 6월까지 미국에 유령회사 ‘스티브 영 인터내셔널’을 설립한 뒤 국내 4개 은행으로부터 수출금융 1억8,570여만달러를 대출받아 이 가운데 1억6,590여만달러를 해외로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또 계열사인 신아원(현 SDA 인터내셔널)의 수출금융 자금을 갚기 위해 지난해 4월부터 12월까지 대한생명의 자금 1,820여억원을 신아원에 무담보로 대출하도록 했다.이와 함께 계열사에서 1,000억원을 추가 인출해 신아원 주식매입에 시용하고,해외에 체류중인 아들 2명이 직원인것처럼 꾸며 월급 및상여금조로 3억원을 지급한 혐의도 받고 있다.朴弘基 金載千 hkpark@
  • 검찰‘沈고검장 항명’대처 미진

    검찰은 沈在淪 대구고검장이 지난 27일 “검찰이 구체적 물증도 없이 李宗基변호사의 진술에만 의존해서 나를 희생양으로 몰고 있다”고 검찰 수뇌부를 다그치면서 ‘정치검찰’로 매도한데 대해 마땅한 대응논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검찰의 반박과 沈고검장의 입장철회 거부가 이어지면서 대전 법조비리 수사의 공정성을 가름하는 잣대로 여겨졌던 이 문제는 이번 수사결과 발표에서도 명쾌하게 해명되지 않았다. 검찰은 1일 수사결과 발표에서 沈고검장의 비위내용에 대해 ‘재직중 전별금으로 100만원을 받고 한번에 100만원씩 모두 10여 차례에 걸쳐 1,000만원상당의 술대접을 받았다’고만 적시했다. 沈고검장이 “의뢰인을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름을 도용당했으며 허름한 술집에서 한두번 만나 술을 마셨을 뿐,금품같은 것은 받지도 않았다”는항변에 구체적인 반증자료를 제시하지 않았다. 수사팀 관계자는 이날 보충설명을 통해 “李변호사의 진술이 워낙 정확하고 구체적이어서 신뢰할만 하다고 여겼다”고 덧붙였다.보기에 따라서는 沈고검장의 항변이어느 정도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답변으로 비치기도 했다. 검찰은 이를 의식한 듯 沈고검장이 조사요구에 불응하고 있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李변호사와의 대질을 거부하는 이상 강제로 조사할 수도없지 않느냐”며 책임을 전적으로 沈고검장에게 전가했다. 그러면서도 沈고검장과 의뢰인인 宋모교수와의 관계,휘하에 있던 N모 검사를 李변호사에게 보내 사건 은폐를 기도했는지 여부 등 정작 사실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핵심 쟁점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특히 정치검찰 비난에 대해서는 당초 金泰政 검찰총장의 대국민 사과문에대응논리를 포함시킬 계획이었으나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이유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대신 ‘어떠한 외부의 압력과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고 검찰본연의 임무인 부정부패 척결작업을 계속하겠다’는 선에서 우회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 沈在淪고검장 징계 어떻게

    검찰이 28일 沈在淪 대구고검장에 대한 징계절차에 들어갔다.징계 수위는검사직위를 박탈하는 면직이 확실시 된다. 沈고검장은 근무지를 떠날 때는 검찰총장의 승인을 받도록 돼있는 검찰근무규칙을 위반,검사징계법 2조2항에 의해 징계될 것으로 보인다.또 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부하 검사를 李宗基변호사에게 보내 진술 번복을 시도했고,검찰총장과의 동반퇴진을 요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기강을 문란케 해 같은 법 2조3항의 징계가 마땅하다는 것이 검찰의 생각이다. 李변호사와 관련된 비리는 징계시효 2년이 지나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법무부는 28일 검찰총장 명의로 전달된 징계청구서를 받아 부본을 沈고검장에게 보냈다.또 법무부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법무부 차관,법무부 검찰국장·교정국장,대검 총무부장,서울고검장,서울지검장 등 7명으로 구성된 징계위원회를 소집,징계기일을 정하기로 했다.징계위는 필요하면 예비조사와 감정,증인신문 등도 할 수 있다. 검사징계법에는 징계 대상자에 대해 장관 직권으로 직위해제나 직무집행정지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고검장급에 대해서는 이같은 조치가 취해진 전례가 없어 총리실과 절차 및 징계내용 등을 협의하고 있다. 검사에 대한 징계는 면직,정직,감봉 등 중징계와 견책 등 경징계가 있다.중징계는 법무부장관의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직접 집행토록 돼있다. 수뇌부가 파문의 조기진정을 원하는 만큼 이르면 29일 중 沈고검장에게 면직처분이 내려질 것 같다.任炳先 bsnim@
  • ■빨라진 검찰 수습행보

    검찰이 沈在淪 대구고검장의 ‘항명 파문’을 수습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조기 수습에 실패하면 또다른 ‘돌발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는우려 때문인 듯하다. 검찰은 수습방안으로 정면돌파를 택했다.정면돌파만이 후유증을 최소화할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검찰은 이 때문에 사태 발생 직후 沈고검장의 항명파문을 ‘자신의 비리를은폐하기 위한 부도덕한 행위’로 규정했다.沈고검장을 근무지 무단이탈과검사의 품위 손상행위 등을 이유로 법무부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것도 같은맥락이다.沈고검장이 李변호사로부터 여러차례 향응을 받은 사실을 입증해‘파렴치한 혐의’를 입증하겠다는 게 검찰의 의지다. 金泰政 검찰총장은 28일 확대 간부회의를 소집,“검찰 내부의 불만이 있더라도 국민여론과 재야단체의 의견을 수용,李변호사 사건을 철저하고 엄정하게 수사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수임경위 ▒금품수수 ▒향응여부 등전방위 수사를 통해 검찰이 수사에 최선을 다했다는 모습을 가시적인 성과로 입증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중수부의 수사를 통해 혐의가 입증된 검사는 징계와는 별개로 사법처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암초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무엇보다 沈고검장은 자신의 무혐의 항변에 그치지 않고 검찰조직의 가장민감한 치부까지 들쑤셨다.‘정치권력의 시녀가 된 검찰수뇌부가 차기 총장구도와 관련,특정인을 제거하고 검찰 조직과 후배 검사들을 담보로 개인의영달를 추구하려 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야당은 물론 시민·사회단체들도 사태의 본질은 제쳐둔 채 沈고검장이 쏟아낸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감을 표시하면서 ‘검찰 수뇌부 퇴진론’에 가세하고 있다. 검찰은 법조계 정화대책 뿐 아니라 ‘검찰 중립화 방안’까지도 동시에 내놓아야 하는 부담을 새롭게 떠맡은 셈이다. 게다가 법조계 일각에서는 검찰 수뇌부의 ‘난투극’으로 검찰의 생명인 ‘검사동일체 원칙’이 훼손된 만큼 ‘제 2의 항명파동’도 배제할 수 없다는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검찰은 사상 초유의 대량 사퇴 및 항명 파동 외에 검찰의 명운을 결정짓는 기로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 검찰 ‘沈고검장 항명’반박

    검찰은 沈在淪대구고검장의 ‘돌출 항명’이 대전 李宗基변호사 수임비리사건에 대한 공정하고도 엄정한 검찰수사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沈고검장은 수사망이 좁혀오자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정치검찰 논쟁’으로 호도하려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沈고검장이 비중을 두고 주장한 ‘차기총장 임명을 둘러싼 파워게임 와중에 희생양으로 지목됐다’는 항변에 대해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李源性대검차장은 “沈고검장이 사시 7회인데 어떻게 총장후보군에 들어갈수 있느냐”고 반문했다.沈고검장의 ‘자가발전’이 지나쳤다는 것이다. “李변호사의 입을 빌려 수뇌부가 숙정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특정인을 선별 제거하기 위해 ‘뒷거래’마저 하고 있다”는 沈고검장의 발언도 자신의 무모한 항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역(逆)음모’로 규정했다. 沈고검장의 혐의사실도 마찬가지다.잘 알던 대학교수로부터 행정소송의 시간을 끌어달라는 청탁을 받고 李변호사에게 무료 변론을 강요했고 추석을 전후해 떡값 명목으로 100만원을 받은 것이 ‘진실’이라는것이다.“의뢰인으로부터 이름을 도용당했다”는 沈고검장의 주장은 의뢰인과 미리 입을 맞춘‘허위 시나리오’라고 반박했다. 沈고검장은 “李변호사와는 허름한 술집에서 한번 인사를 나눈 적은 있으나 향응이나 금품을 받지는 않았다”며 결백을 주장했으나 향응을 10여차례나가졌을 뿐 아니라 매번 2차,3차를 강요했다고 공개했다. 검찰은 沈고검장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李변호사의 외사촌인 후배 검사를 시켜 李변호사를 특별 면회하도록 하고 ‘당신이 도와주면 내가 살 수 있다’고 회유한 사실에 격분하고 있다.任炳先
  • ‘정치와 지역감정’공청회

    정치개혁시민연대(공동대표 孫鳳淑)는 27일 국회에서 ‘한국 정치와 지역감정’을 주제로 공청회를 열었다.이날 공청회에서는 金萬欽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이 주제발표(지역감정과 국가공동체의 과제)를 발표를 한 뒤 徐京錫한국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 등 4명이 토론자로 나서 다양한 시각에서 지역감정 극복방안 등을 제시했다.주제발표와 토론내용을 요약한다. ■주제발표(金연구원) 지역감정 ‘망국론’이 다시 들먹거리고 있다.국민 대다수가 지역주의 극복을 희망하고 있지만 정치적 사회적 구조와 형태는 과거와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이다. ‘金大中정부’의 등장은 지역주의 구도에 발전적인 계기가 됐다.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다수세력은 선거때 지역주의만 동원하면 승리할 수 있지만 소수의 호남 기반세력은 필연적으로 탈지역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그동안 다수 기득권세력들의 연고주의에 따른 독점과차별구조가 완화될 수 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특정지역이 일방적으로 국가적 자원을 독점할 수 없는 시대로 나아가는 ‘진통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정부는 지난 1년간 경제위기 극복에 몰두하면서 사회적 통합과 원리 제시엔 다소 미흡한 측면이 있었다.현재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제도화하는 정도로 지역감정 해소를 추진하고 있지만 이는 문제의식과 대처의식의 안이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현재로서 지역주의를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국가체제의 총체적 재조명차원에서 현재의 지역주의 구도를 수용하되 이를 지역사회 발전의 동력으로전환시켜야 한다.지방분권화를 포함한 국가권력의 다원화와 이를 위한 제도적 보완과 정치공동체의 통합이념 및 원리를 제시가 필요한 시점이다.정치적,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강화하여 연고주의의 병폐를 줄이는 방향이 돼야 한다. ■토론내용 ▒林鍾仁변호사 金大中대통령이‘DJP연합’을 통해 집권했지만 집권 전후의 경제구조와 호남 차별구도도 변하지 않았다.영남인들의 정서적 상실감을 이용하는 한나라당의 최근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언론도 이러한 한나라당의 지역감정 조장에 대해 비판강도를 높여야 한다. 하지만 국민회의가 추진하는 법적인 처벌,즉 ‘지역감정 조장행위’ 처벌은 단호히 반대한다.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도덕적 정치적 문제를 법적 처벌조항을 만들어 해결하자는 발상은 적절치 못하다.▒李南永교수(숙명여대 정외과) 한나라당은 시민을 동원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지역주의를 활용하는 것이 문제다.하지만 법으로 해결하자는 발상은 반대한다.법적인 호소를 통해 부부의 갈등을 해소하는 경우는 대부분 이혼으로 결론이 난다. 정치적 실패를 법으로 해결하려는 발상은 단견이다.민주주의는 통합과 분열을 조화시키는 ‘정치기술’이다.정치인들이 정치력이 없으니까 막바지에 법으로 가자는 것은 자신들의 정치 실패를 은폐하려는 기도와 다름없다.▒崔文洵언론노련위원장 지역감정 조장은 朴正熙시대부터 최근 한나라당 마산집회까지 시대에 따라 외양만 바꾼 상태로 구조화되는 분위기다.이는 근본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세력이 이익이 된다는 판단에서 출발한다.따라서 지역주의를 조장하고 편승하는 사람이나 집단에 손해가 되도록 분위기가바뀌지 않고는 치유될 수 없는 고질병이다.지역주의 발언자에 대해 도덕성을 문제삼고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줘야한다. 특히 지역 언론이 지역감정을 확대 재생산하는 측면이 크다.지역주민들의선입감과 편견에다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주요한 이유는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상업주의 때문이다.지역 신문의 재벌·족벌체제를 부수는 것이 선결과제다. 하지만 지역감정 조장자에 대한 법적 처벌은 문제가 있다.지난 24일 한나라당 의원들의 지역감정 발언은 “현정권의 빅딜은 영남 기업을 죽이기 위한것” 등 대부분 자신들의 의견을 ‘선동화’시킨 사례다.▒徐京錫한국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 마산집회에서의 한나라당 행태는 가혹하게 비판받아야 한다.우리의 정치발전을 또 한번 저지하고 ‘동물적’방식으로 정치를 끌고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지역감정 발언을 법으로 제재하는 것은 부작용만 증폭시키게된다.법으로 제재를 가하게 되면 법망을 피하는 수법은 더욱 고도화되고 지역감정은 속으로 곪게 된다. 그렇다면근본 조치는 무엇일까.무엇보다 국민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공정한 게임의 룰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인사문제의 경우 중앙인사위원회를 공명정대하게 가동해 예상되는 시비를 원천 봉쇄할 수 있다.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원칙을 정립하는 것도 시급하다.현정권의 무원칙과정치권의 당리당략이 겹치면서 지역주의로 확대되는 측면이 크다.이 때문에빅딜이나 기업구조조정 등 현정권의 정책이 지역주의 논란으로 불똥이 튀는경우가 많았다.
  • 李변호사·金사무장 사건은폐 사전 협의

    대검 감찰부(金昇圭 검사장)는 13일 李宗基변호사(47)의 비장부에 사건의뢰인으로 기재된 현직 검사 6명을 소환해 사건소개 경위,직무관련성 등을 조사한 뒤 오후 6시쯤 귀가조치했다.14일에는 의뢰인 6명과 전직 부장검사 1명,현직 부장검사 3명,지청장 1명,평검사 2명 등 모두 13명이 비공개 소환된다.소환조사는 이번 주 안에 마무리될 전망이다. 검찰은 조사결과 직무관련성이 드러나거나 금품이나 향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면 대검 중앙수사부(李明載 검사장)로 넘겨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날 소환된 검사들은 “사건을 소개한 기억이 없다” “소개한 것은 사실이나 대가를 받지 않았다”는 식으로 혐의사실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李변호사 수임비리사건을 수사중인 대전지검(검사장 宋寅準)은 이날李변호사와 전사무장 金賢씨(41)가 사건알선수수료 지급사실을 자백함에 따라 이들을 변호사법 위반과 뇌물공여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金씨에게는 공갈 및 업무상횡령 혐의가 추가 적용됐다. 金씨는 검찰조사에서 “李변호사의 비장부 비용란에 액수가 빠진 사람들에게도 사건소개비를 지급했으며 판·검사를 포함한 법조계 고위층은 李변호사가 직접 관리해온 것으로 안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이에 따라 李변호사가 또 비장부를 갖고 있을 것으로 보고 이날 오후 李변호사의 서울 여의도 집을 압수수색하는 한편 李변호사와 가족,金씨와 현 사무장 金모씨,여직원 3명 등 모두 9명의 예금계좌에 대한 자금흐름 추적에 들어갔다. 또 李변호사가 사건발생 직후인 지난 8일 삭제한 컴퓨터 디렉토리 128개와파일 1,901개를 완전 복구했다. 검찰은 이에 앞서 李변호사와 金전사무장이 검찰에 출두하기 앞서 사건을축소·은폐하기 위해 진술내용에 대해 입을 맞춘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은 지난 9일 오후 11시30분쯤 충북 청원군의 한 모텔에서 李변호사의주문에 따라 진술내용에 대해 협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 북한 인권의 허상/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북한은 흔히 인권감시의 사각지대로 비유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0일 올해 세계인권선언 50돌을 맞아 인류의 진정한 권리보장이 국제적으로 요구되면서 북한인권에 대한 비판도 거론되고 있다. 지난 4월 국제사면위원회가 북한 인권유린 실태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50차 유엔인권소위원회도 북한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 국무부가 12월15일 발표한 연례보고서도 북한을 전세계에서 인권상황이 가장 나쁜 국가중에 하나라고 지적했다. 특히 북한인들의 자유정도는 이라크,쿠바,수단과 함께 세계최악이며 191개 조사대상국 가운데 기본적 정치적권리,시민자유,자유언론이 존재하지 않고 시민생활이 억압되는 가장 탄압적인 국가로 꼽았다. 그동안 북한의 인권문제는 정권의 폐쇄성 때문에 국제적 관심밖에서 맴돌았고 정확한 실상이 은폐됐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식량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졌고 탈북자들에 의한 북한의 절망적인 인권상황이 고발돼 열악한 북한 인권실태가 공식적으로 밝혀지게 됐다. 북한의 인권실태는 金日成사후 더욱 악화된 가운데 초법적인 살인과 인간 실종이 빈발하고 있으며 고문과 강제수용등 최악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북한에는 현재 10여개 정치범 수용소에 약 20만명이 정치적 이유로 갇혀 있으며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형과 실종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유엔회원국이자 국제인권규약 비준국이면서도 87년이래 10년이 넘도록 인권보고서 제출자체를 거부하는 등 국제적 의무를 저버리다가 97년 8월 국제인권규약에서 탈퇴까지했다. 바로 이같은 북한의 열악한 인권수준으로 말미암아 최근들어 북한내부에서 金正日 체제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으며 반체제 성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중요한 과제는 북한이 사회주의 민주화를 통한 인권문제를 개선,주민들의 자유를 신장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주민들이 자기가 노력한 만큼 인간적 대우를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는 사회주의 민주화가 북녘땅에서 하루속히 실현돼야 함을 강조한다.
  • 민주열사 열전:18회/前 조선대생 李哲揆(정직한 역사 되찾기)

    ◎반독재 활동혐의 수배… 경찰 검문뒤 변사체로/행방불명 1주뒤 의혹에 싸인 시신 수원지에서 발견/검찰 ‘도주중 실족 익사’로 수사종결… 재부검 요청 거부 불모의 독재 정권에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민주화투쟁을 위해 스스로 몸을 받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의문사 희생자로부터도 푸른 수액을 받아 자라난다. 비록 몸은 독재의 철퇴 아래 억울하게 스러졌지만 잠들지 않는 푸른 혼은 철퇴를 두고두고 산화시켜 녹슬게 한다. 직선제 정부라던 6공화국 때도 철권 군사독재의 5공과 마찬가지로 여러 의문사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광주 조선대생 李哲揆의 죽음은 10년이 거의 지난 지금도 선명한 의문들로 덮여 있다. 이 의문들은 거꾸로 당시 정권의 정통성과 공권력의 정당성에 날카로운 의문을 던진다. 1989년 5월10일 광주시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 이철규(전자공학 4)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철규는 교지에 게재한 자신의 논문과 관련하여 4월18일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광주 전남지역 공안 합수부에 의해 수배중이었다. ○검문경찰 “추격하다 철수” 주장 수배받고 있던 그는 5월3일 밤 10시쯤 후배의 생일을 위해 택시를 타고 무등산장 쪽으로 가던 중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는데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검문 경찰은 신원 파악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피검문자가 인근 산 속으로 도주,뒤쫓아 갔으나 붙잡지 못한 채 얼마후 철수했다고 주장했다.택시강도 혐의자를 잡기 위한 일상적 검문 상황이었지 피검문자가 300만원의 현상금과 1계급 특진이 걸린 공안 수배범 이철규인줄은 전연 몰랐다는 말이였다. 이철규는 검문 1주일 후 검문을 받던 청암교로부터 76m 떨어진 곳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그는 물가에서 3m 떨어지고 수심이 70㎝ 정도되는 지점에서 얼굴을 위로 한 채 물 위에 떠 있었다. 시신의 얼굴은 검은 색으로 심하게 변색된 가운데 퉁퉁 부어 있었으며 왼쪽 눈알이 돌출된 끔직한 형상이었다. 특히 오른쪽 어깨는 왼쪽에 비해 크게 부어 있었다. 사체 상태나 실종의 정황에 비춰 단순한 익사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가족과 학생들은 즉시 진상규명 위원회를 만들었다. 5월11일 진상위에서 다수가 참관한 가운데 검찰 주도의 부검이 실시되었다. 진상위 측 참관인단은 위와 폐안에 물이 차 있지 않았으며 부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익사는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타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검찰은 보다 상세한 검사가 필요하다면서 주요 장기를 국립 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다. 14일 검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좌측 눈의 돌출과 오른쪽 어깨의 부은 것은 단지 부패 때문이며 몸의 각 장기에서 플랑크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익사라고 결론내렸다. 보강 자료로 폐부종,국소출혈,폐포파열을 들었다. 검찰은 관련조사 및 부검 결과를 종합하여 익사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에 따르면 3일 밤 산 속으로 도주한 이철규는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다시 광주 쪽으로 돌아 오려고 철조망을 넘어 수원지 내로 들어왔다가 다소의 술기운에 실족,추락하여 익사하였다는 것이다. 추락의 방증으로 사건 당일 일부 경찰이 현장 근처에서 “풍덩,어푸어푸”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점을 들었다.다만 소리를 듣고 후레쉬를 비춰 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수면도 잔잔해져 물가까지 내려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족들과 학생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조선대생 8,000여명 등 학생 시민 1만여명은 89년 5월11일 정오부터 시신을 안치한 전남대 병원 앞 도로를 가득 메우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가두집회를 가졌다. 5·18 9주기를 앞둔 가운데 13일에는 전국 70여개 대학생과 시민 등 1만5,000천명이 전남대 금남로 조선대 등을 거쳐 시신이 안치된 병원까지 도심행진 시위를 벌였다. ○부거당시 슬라이드 공개안해 한때 2만5,000명까지 불어난 시위군중은 “이철규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쳤으나 경찰과 큰 충돌은 없었다. 평화적으로 계속되던 시위는 그러나 25일 현장검증을 실시한 검찰이 30일 ‘실족 후 익사’ 라는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수사를 종결하려 하자 격렬한 항의시위로 급변했다. 25일부터 전남대 영안실 앞과 서울 명동성당에서 수백명의 학생들이 사인규명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철규 고문살인 진상규명”을 소리높이 외치며 학생들은 눈으로 보면 누구라도 사인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며 사체의 사진을 언론에 공개할 것과 진상위 측과 합수부 측이 TV공개토론를 가질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여소야대의 국회도 개별 사안에 대해 십여년 만에 첫 국정감사를 6월1일부터 광주 현지에서 실시했다. 열흘 남짓 새에 60여명의 증인을 부르고 3,000페이지에 가까운 검찰수사 기록을 검토했으나 3주간의 조사에서 별다른 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사인규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재부검 요청을 검찰이 거부해 의원들 역시 의문점만 재론했을 따름이었다. 유족과 진상위 측은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법의학자 로버트 커쉬너 박사를 초청하여 그의 참관 아래 재부검을 갖자고 했지만 검찰은 응하지 않았다. 나아가 1차 부검 당시의 슬라이드 요청마저 거부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철규가 실족해 익사한 뒤 1주일 동안 물 속에 있었다가 발견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일 밤 검문 때 경찰에 붙잡혀 연행된 뒤 조사를 받다가 살해되었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발견 지점으로 옮겨져 익사체로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의문은 수사관련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가운데 실증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늦게라도 6공 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폭발될 잠재력을 안고 있다. ○187일간 냉동안치뒤 안장 이철규는 82년 조선대에 입학하면서 학생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84년에 ‘학원 민주화 자율추진회’,85년에 ‘반외세 반독재 투쟁위원회’ 위원으로 각각 활동하였다. 85년 11월 ‘반외세’ 위원회 활동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87년 7월 가석방되었다. 더욱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나섰던 이철규는 전횡을 일삼던 조선대 재단을 밀어내는 학생들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89년 초 새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에 올랐다.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싸우던 그는 죽어서 가족에게 돌아왔다. 그의 시신은 진상규명을 위해 187일이나 영안실에 냉동되어 있다가 의문의 얼음장을 깨지 못하고 89년 11월4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의문사 진상규명 노력/50건 육박… 80년대 집중/5共 청문회 특위 무산/인권법에 조사 명시 방침 군사독재 등 정치적 혼란이 심했던 만큼 우리 현대사에서는 의문사가 여기 저기에 널려 있다. ‘타살당했다는 심적 및 물적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에 의해 은폐,조작되어 사인이 철저하게 묻혀져 버린 죽음’인 의문사는 전국민족민주 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50건에 육박한다. 지난 73년 최종길 서울법대 교수의 의문의 죽음을 필두로 한 이들 현대사 의문사는 80년대에 집중되어 있으나 문민정부 때에도 계속되었다. 그동안 유가족을 중심으로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 노력이 끈질기게 펼쳐져 왔다. 서슬퍼런 5공 때인 84년에 강제징집 희생자 진상규명 노력이 있었다. 6공 초기 여소야대 직후인 88년 10월부터 유가족들이 기독교회관 3층 시멘트 바닥에 모포를 깔고 135일 동안 추위에 시달리고 전경과 부딪히면서 줄기차게 투쟁한 결과 5공청문회에서 의문사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특위 일정까지 잡혔다. 그러나 가해자 측 증인이 나오지 않고 TV 중계도 않는다고 하자 유가족 측이 거부,무산되고 말았다. 90년부터 일반 시민 11만명의 서명을 받아 의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으나 끝내 폐기되고 말았다. 정권교체가 이뤄지자 유가족들은 98년 11월4일부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위해 또다시 국회 앞 도로에서 텐트를 치고 장기 농성에 돌입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이전 정부와는 달리 현 정부·여당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인사들에 대한 진상조사 문제를 곧 제정할 인권법에 명시하고 새로 설치될 인권위원회에 전담기구를 둬 진상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할 방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 金 중사 ‘사건당일 행적’조사/金勳 중위 사망사건 특별합동조사단

    金勳 중위 사망사건을 재수사 중인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단장 楊寅穆 중장)은 14일 金榮勳 중사(구속)를 상대로 사건 당일의 행적 등을 캐묻는 등 金중위 사망사건 연루 혐의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특조단은 金중사가 대부분 혐의 내용을 부인함에 따라 사건 당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근무했던 전역병들을 참고인으로 불러 金중사의 행적 등을 조사했다.또 2소대 현역병들도 판문점 근무가 끝나는 오는 16일 이후 본격 조사키로 했다. 또 사건 발생 당시 JSA 중대장이었던 金益賢 대위(육사 영어강사)를 불러 金중사의 알리바이 조작 등이 사실인지를 물었다.특히 사건 당일 2소대 상황일지와 金중위가 작성한 업무보고서가 분실됐다는 유족의 주장에 따라 JSA경비대대에서 사건을 조직적으로 축소·은폐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도 추궁했다. 이에 대해 金대위는 “소대 상황일지는 A4용지 1장에 소대에서 발생하는 시간대별 특이상황을 메모해 놓은 것으로 金중위 사망후 근무소대가 바뀌는 과정에서 없어졌으며 고의적으로 폐기시킨 적은 없다”고 진술했다.
  • 與,金 중위사건 공세 전환/경비병 북한군 접촉 등 현정권과 무관

    ◎“한나라당 주장은 자가당착일뿐” 반박 여권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경비병들의 월경 및 북한군 접촉과 金勳 중위 사망사건에 대해 공세로 전환했다. 이들 두 사건은 구 정권때 일어난 것이며 현 정부는 사태 수습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때문에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千容宅 국방장관 해임 건의안은 정치공세에 불과하다는 시각이다. 국민회의 鄭東泳 대변인은 14일 “한나라당이 제기한 국방장관 해임 건의안의 시점이나 논리에 있어 문제가 있다”면서 “판문점 경비병의 북한군 접촉은 기본적으로 전 정권에서 발생해 마무리된 사건으로 국방장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밝혔다. 구 여권의 책임론을 집중 거론했다. 북한군 변용관 상좌가 귀순한 것은 2월3일이고 이 사건이 종결 처리된 시점도 구 정권 때라는 것이다. 鄭대변인은 “金東鎭 전 국방장관은 2월10일,林載文 전 기무사령관은 2월18일 경비병들의 대공용의점이 없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처리했다”면서 “경비병들의 월경과 대공 용의점은 현 정부와 무관하며 金중위 사망과의 연계성은 최근에 드러난 일”이라고 역설했다. 잘못이 있다면 金전장관 등 구 정부의 지휘부가 책임져야 하며 千장관과는 무관하다는 논지다. 그러나 金중위 사망사건에 대해서는 신중론을 보이고 있다. 2차에 걸친 수사에서 자살로 드러난 것이 3차 조사에서 타살로 밝혀질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3차 조사 결과 및 청문회를 지켜본 뒤 그 때 가서 千장관의 해임건의를 해도 늦지 않다고 여운을 남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구 정권 때 일어난 일로 수사상의 잘못은 있을지언정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은폐·축소 사실은 없다고 일축했다. 千장관은 이날 국민회의 의총에서 “과거 정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정정당당하게 한점의 의혹도 없이 조사해 군이 국민에게 신뢰를 받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 美 하원 클린턴 탄핵안 17일 표결/共和,견책안 상정 봉쇄하기로

    ◎헌정 사상 3번째… 클린턴은 “사임할 뜻 없다” 밝혀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 예루살렘 외신 종합】 중동을 방문중인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13일 하원 법사위가 위증 및 사법방해,권력남용 등의 혐의로 자신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시켰음에도 불구,사임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에게 “사임할 뜻이 없고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고 밝히고 “전 백악관 인턴직원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위증을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중동방문 직전 그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으나 거짓말을 하거나 죄를 범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공화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미 하원 법사위는 12일 헨리 하이드 위원장 주재로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유 4가지중 마지막 항목인 권력남용 혐의를 표결에 붙여 찬성 21 반대 16표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탄핵안은 오는 17일 하원 본회의에 표결에 붙여질 예정이다. 미 하원 법사위가현직 대통령을 해임하기 위해 탄핵사유를 인정하고 탄핵안을 하원 전체투펴에 넘기기로 한 것은 1868년 앤드루 존슨 대통령과 1974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이어 세번째다. 공화당은 이와 함께 17일 하원 본회의에서 클린턴에 대한 탄핵안을 심의할 때 민주당의 견책 동의안 상정을 봉쇄하기로 결정,견책처리는 사실상 무산됐다. 하원 법사위의 이같은 결정은 대통령으로서 저지른 잘못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달성하고 비록 상원부결이 확실하고 여론이 등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탄핵안을 가결시켜 행정부 견제라는 의회 본연의 임무를 다했다는 실리를 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높은 지지도를 등에 엎은 클린턴 대통령이 법사위원장이 보낸 81개 항목의 질문서에 성의없는 답변을 하는 등 법사위를 거의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그에게로 돌아선 일부 공화당 의원들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것도 한몫을 했다는 지적이다.
  • “金 중위 사망 당일 소대상황일지 파기됐다”

    ◎비상 발령시간 등 기록… 사건은폐 의혹 金勳 중위 사망사건이 발생한 지난 2월24일 당시 金중위 소속부대의 상황일지가 파기된 것으로 드러나 사건은폐 의혹이 일고 있다. 국회 국방위 ‘金중위사망사건 진상조사소위’는 이 상황일지가 金중위 사건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고,국방부측에 제출을 요구했으나 파기됐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13일 소위의 한 관계자가 말했다. 상황일지에는 金중위 사망 이후 비상 발령시간과 함께 식당차 도착시간,부대차량 운행시간 등 金중위 소속부대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 2소대 동향이 시간대별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金중위사건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金榮勳 중사의 행적 등을 놓고 金중사와 참고인 3명의 진술내용이 1시간 정도 차이가 나는 부분 등을 규명하는 데 상황일지가 필요하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 金勳 중위 사망의혹 파문­국정조사 제의 배경

    ◎여권 “의혹 조기차단” 겨냥/“변용관 상위 증언은 2월 千 국방장관과는 관련없다”/자신감 바탕 진실 접근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金勳 중위 의문사 사건’에 대해 국정조사 카드를 빼들었다. 金중위 사망사건을 둘러싼 의혹을 조기에 차단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여기에는 여권의 자신감이 밑바탕이 되고 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11일 오전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金鍾泌 총리 주재로 국민회의 趙世衡 총재권한대행,자민련 朴泰俊 총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정협의회에서 “金중위 사건에 대해 한나라당과 협의,국정조사를 실시키로 했다”고 鄭東泳 대변인이 전했다. 鄭대변인은 “북한군 변용관상위의 귀순은 2월3일이었으며,金東鎭 전국방장관이 합동신문조 보고를 받은 것은 2월11일이었다”고 밝혔다. 千容宅 국방장관은 3월3일 취임했기 때문에 변상위 신문과 연관성이 없다는 논지다. 千장관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수습에 나선 것은 11월이었으므로 한나라당이 “변상위의 증언에도 불구,金중위 사망사건(2월24일)과 경비병들의 대북 용의점을 조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여권의 시각이다. 한나라당의 정치공세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나라당은 李會晟씨의 구속을 金勳 중위 의혹사건을 은폐하고 물타기하려는 의도라면서 공세를 펴고 있다. 따라서 국정조사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 보자는 ‘역공’인 셈이다.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여당측에서 국정조사를 공식적으로 제의해오면 적극 응할 방침”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따라서 국정조사는 큰 어려움없이 성사될 전망이다. 이미 국방위 진상조사 소위에서 자료축적이 돼 있어 원활한 조사가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金중위 사망을 둘러싸고 꼬리를 물고 있는 각종 의혹사건은 국정조사 추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은 셈이다.
  • 金勳 중위 사망의혹 파문­金 중사에 농락당한 중대장

    ◎‘北 물품 습득 신고땐 포상휴가’ 악용/金 중사,北서 얻어온 담배 등 나눠줘/특별휴가 선심쓰며 부대원 입막음 부대원들의 근무기강을 세우려던 판문점 경비대대 중대장의 의욕이 무모한 하사관의 탈선으로 농락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金勳 중위 사망 당시 중대장이었던 金益賢 대위(32·육사45기·육사 영어강사)는 11일 “金榮勳 중사가 북한을 넘나들며 가져온 담배 맥주 등을 부하들이 습득한 것으로 속여 특별휴가를 갔을 가능성을 부인키 어렵다”면서 “金중사가 북한을 넘나들었다는 사실조차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金대위가 경비대대 중대장으로 부임한 것은 지난해 2월. 중위 때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리대에서 산업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 3사단 중대장을 막 끝낸 때였다. 부임하자마자 金대위는 군사분계선상에서 북한군이 우리측을 향해 담배꽁초 등을 던지는 등 군기문란행위가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대남심리전의 일환이라고 판단하고는 경비병들에게 각별한 정신무장을 강조했다. 또 북한군이 접촉을 시도하거나 물건등을 던질 때는 카메라로 찍어두라며 이를 정전협정 위반으로 비서장회의에서 항의하겠다고 주지시켰다. 그는 부대원들의 근무기강 확립을 위해 북한군이 던지는 각종 물건을 습득해 신고하는 사병들은 특별휴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더러 부대원들 사이에 북한군이 던진 물건들을 몰래 갖고 있는 사례가 빈번하게 적발되는 터이기도 했다. 金대위의 지시로 북한물품이 상당량 습득됐으며 이 덕분에 40∼50명의 부대원들이 특별휴가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기무사 등 군 당국의 조사결과,특별휴가는 金대위가 아닌 金중사의 어처구니없는 ‘작전’으로 둔갑돼 악용되고 있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金중사는 金대위의 특별휴가를 자신의 북한군 접촉 은폐수단으로 삼았다. 金중사는 부대원들의 입을 막기 위해 자신이 북한군으로부터 얻어온 담배 맥주 등을 부대원들에게 돌아가며 나눠준 뒤 습득물로 신고해 특별휴가를 보내는 선심을 썼던 것이다.
  • 金勳 중위 사망의혹 파문­국회 국방위 중계

    ◎金榮勳 중사 북한군 접촉행위/정권교체기 정치배경 여부 추궁 국방위는 10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병들의 북한군 접촉과 金勳 중위 사망사건을 집중 추궁했다. 먼저 여당의원들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병들의 북한군 접촉에‘정치적’배경은 없는지를 따졌다. 국민회의 張永達 의원은 “북한군과 접촉한 金영훈중사가 간첩으로 포섭돼 활동한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우리쪽에서 첩보활동을 위해 보낸 것은 아닌지 알아봐야 한다”면서 접촉시기가 지난해 대선과 비슷한 점을 부각시켰다. 자민련 李東馥 의원은 “미스터리였던 95년 4·11총선 당시 판문점 북한군 무력시위 사건은 金중사의 북한군 접촉으로 단서가 나왔다”며 이번 사건과 판문점 총격요청사건의 연관성을 물었다. 반면 한나라당의원들은 정부가 이번 사건을 축소·은폐한 의혹을 집중 캐묻고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했다. 한나라당 許大梵 朴世煥 의원은 “金중위는 정황상 타살 가능성이 많다”면서 “군 수사당국이 수사과정에서 사건을 축소·은폐한 의혹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답변에 나선 千容宅 장관은 “필요할 경우 특별합동조사단에 민간 변호사와 법의학자를 참여시켜 金중사 등의 대공 용의점과 金중위 사망사건의 연계성 등 모든 의혹에 대해 원점에서 재수사하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千장관은 4·11 총선 당시 북한군 판문점 무력시위 사건과 관련,“내부조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千장관은 또 귀순한 변용관상위가 ‘판문점 내에서 북한이 대남공작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진술한데 대해 “당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병사들의 대공 용의점에 대해 한번도 공식보고를 받지 못했다”면서 “최근에는 ‘대공 용의점이 없어 종결지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정권교체기여서 이 문제를 소홀히 했거나 직무유기했을 가능성도 있어 이 부분을 확실히 조사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千장관은 또 “카투사에 대한 지휘체계가 최선인지 한·미간 공동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밖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우리측 정보기관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데도 유엔사가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면서 이를미국측과 협의하겠다고 덧붙였다.
  • ‘金 중위 타살 가능성’ 진술 확보

    ◎국방부 조사단,金榮勳 중사 등 10여명 조사 金勳 중위 사망사건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병들의 북한군 접촉사건을 수사중인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은 10일 金중위가 살해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金중위 소대의 부소대장을 지낸 金榮勳 중사(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를 상대로 사건 당시의 알리바이 등을 집중 추궁했다. 이미 전역한 해당 소대 병사 10명도 참고인으로 소환,조사했다. 군 관계자는 “이들로부터 북한의 ‘공작조’와의 연계 하에 金중위가 타살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진술 등을 일부 확보한 것으로 안다”면서 “권총을 소지할 수 있는 장병이 金중위와 金중사를 비롯해 4명이라는 점을 중시,살해됐다면 金중위를 제외한 3명중 한 명이 용의자일 것으로 보고 정밀 조사중”이라고 말했다. 조사단은 金중사가 북한군 공작조조장과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찍은 사진과 이들이 통성명한 내용이 적혀 있는 메모지 등을 증거물로 확보했다고 밝혔다. 조사단은 金중사 등이 사건 발생일인 지난 2월24일하루동안의 부대내 행적을 지난번 육군 검찰부에서의 조사 때와는 일부 다르게 진술하고 있는 점을 중시, 사건 당일의 행적을 캐는 데 주력하고 있다. 조사단은 또 사인규명을 위해 JSA를 관할하는 미8군사령부의 협조를 얻어 금명간 JSA내 벙커와 소대장실 등에서 현장검증 및 총성 실험을 하기로 했다. 조사단은 이와 함께 그동안 金중위의 사인을 둘러싸고 유족 등이 각종 의혹을 제기했음에도 자살로 결론지은 육군 검찰부가 이 사건을 고의적으로 축소 또는 은폐했는지 여부를 조사,문제점이 드러나면 관련자 전원을 중징계할 방침이다.
  • ‘軍 의문사’ 모두 20여건/사례와 문제점

    ◎유족들 재수사 요구해도 묵살 예사/지금까지 대부분 자살·사고사 처리 자살 타살의 여부가 분명하지 않으면서 사인에 관한 진실이 은폐되거나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있는 죽음인 의문사는 특히 군부대 내에서 많이 발생해왔다. 군의 본질인 구성원간의 수직적 관계가 잘못되어 ‘석연치 않은 죽음’을 싹틔운 토양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독재 정권 시기일수록 이 토양은 비옥해져 의문사가 많았다. 전국 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유가협) 등에 따르면 의문사는 총 40여건에 달하며 이중 군부대 의문사가 20여건으로 절반이 된다. 특히 유가협은 군사독재정권인 5공과 6공 초기인 80년부터 88년 사이에 무려 18건의 군 의문사가 있었다고 밝혔다. 국정감사가 부활된 지난 88년 10월 국방부는 이제까지 군대에서 안전사고로 3,723명이,군기사고로 2,670명이 사망했으며 군기사고중 2,254명이 자살,나머지는 폭행으로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었다. 유가협이 제기한 군 의문사는 모두 성격결함,환경비관 등의 염세성 자살이거나 사고사인 것으로 처리되었다. 즉군에는 한건의 의문사도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군 의문사 관련 가족들은 군부대가 자식들의 죽음을 연락하는 데는 크게 지체하지 않았지만 부대에 도착해도 상황을 설득력있게 설명해주기는 커녕 돌연사태에 경황이 없는 틈을 타 화장동의서를 받는 데 급급했다고 불평하고 있다. 유가협이 제기하고 있는 군 의문사는 5공 초기 시국관련 문제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하고 강제순화 교육을 실시한 ‘녹화사업’에서 처음 발생했다. 강제징집된 6명의 학생들이 프락치 역을 강요받으며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 83년말부터 학원가에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5공은 국방장관의 국회보고를 통해 이들의 죽음이 모두 염세성 자살이거나 군기사고라며 의문사 의혹을 부인했다. 84년에 사망한 허원근의 경우 아버지가 앞가슴에서 어깨뼈를 관통하여 갈비뼈가 어깨 등뼈를 뚫고 나왔는데 어떻게 팔을 움직여 다시 총을 잡아 제 2, 제3의 총알을 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부검의로 나온 군의는 “총을 일곱발이나 맞고도 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87년에 사망한 이이동의 경우 아버지가 지문채취와 부검 미실시,사체검안 및 현장검증 등에서의 의문사항을 들며 재수사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또 87년 박상구의 의문사에서는 농약을 먹고 병원에서 죽었다는 군부대의 설명과 달리 부대내에서 타살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측 목 부근에 칼 자국이 있어 어머니가 손가락을 넣어보니 끝이 닿지 않았으며 목이 졸린 흔적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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