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은퇴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1조원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전입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친한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여권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686
  •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 때로는 동지로, 때론 맞수로 ‘숙명적 관계’를 이어 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민주화 시대를 연 두 전직 대통령은 정치사에서 양김(兩金)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에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합치면 3김(三金)이 된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세 사람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양김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김 가운데는 김 전 총리만 남아 3김 시대의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DJ는) 나하고 가장 오랜 경쟁 관계이자 협력 관계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 관계다.”(2009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면서) 22일 타계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일생을 되돌아볼 때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숙명의 맞수’이자 ‘동지’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둘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과 맞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는 든든한 ‘동지’였지만 권력 앞에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경쟁자’였다. ‘양김’은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야당의 차세대 주자로 자리매김하며 고비마다 협력과 경쟁을 이어 갔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을 시작으로 70년 대선 후보 경선, 87년 대선, 92년 대선까지 정치적 명운을 건 승부를 벌였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국회 등원은 훨씬 빨랐던 YS가 첫 승부였던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맞붙었던 1970년 대선 경선에서는 1차 투표에서 승리하고도 결선투표에서 DJ에게 역전패했다. YS는 1971년 대선에서 DJ를 도와 “김대중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라면서 지원 유세에 나섰지만 95만표 차로 패배했다.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는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1985년 2월 총선에서 신민당의 극적 승리를 일궈 냈다. 양김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며 6월 민주항쟁을 이끌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 냈다. 하지만 협력은 여기까지였다. YS와 DJ는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대선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실패한 뒤 DJ는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양김은 국민적 여망을 저버리고 대선에 뛰어들었고, 결국 정권 창출에 실패했다. 훗날 DJ는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자책했다. YS도 DJ 서거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한테도 미안하고…”라고 회고했다. 이후 대립 구도는 가속화했다. YS는 1990년 1월 당시 여당인 민정당 및 김종필(JP)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결행했다. YS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했다.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1992년 대선에서 DJ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 끝에 먼저 청와대에 입성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DJ는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제1야당 대표로 정계에 복귀했다. 1997년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돼 YS에게 권좌를 넘겨받았다. 양김은 1987년 단일화 실패 이후 2009년 DJ가 서거할 때까지 22년간 반목을 이어 갔다. DJ는 3당 합당 이후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YS를 비난했고 YS도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렸다. 두 사람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조우’했지만 서로 외면한 채 다른 곳을 응시했다.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독재’라는 표현을 써 가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자 YS는 “이제 그 입을 닫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YS가 사경을 헤매던 DJ를 문병한 뒤 취재진에게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한국 현대사의 두 거목은 극적으로 화해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이건희 첫 사면·복권… 정주영과는 ‘사후 화해’

    이건희 첫 사면·복권… 정주영과는 ‘사후 화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시절 재계 총수들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재계 총수로는 단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꼽힌다. 이 회장은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첫 번째 사면·복권을 받은 재계 인사다. 1996년 8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노 전 대통령에게 직무와 관련해 4회에 걸쳐 100억원을 전달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서 서울지법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회장은 항소하지 않아 1심이 그대로 확정됐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7년 김 전 대통령이 개천절을 맞아 이 회장 등 경제인 23명을 특별 사면·복권했다. 이 회장에게는 첫 번째 사면·복권이었다. 반면 이 회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 설화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사건은 그가 1995년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현지 특파원단과 가진 간담회에서 “기업은 이류, 관료는 삼류, 정치는 사류”라고 정부를 일갈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문민정부 정권 실세와 관료들까지 이 회장의 베이징 발언에 상당히 불쾌해했다는 후문이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도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재계 인사로 회자된다.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초기 당시 현대그룹이 큰 수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 명예회장은 1992년 제14대 대선 당시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김 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어 대선 패배 직후인 1993년 1월 정 명예회장은 출국 금지를 당한 데 이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직후 그는 의원직을 포기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를 두고 당시 재계에서는 일종의 보복 수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이후 정 명예회장은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사면·복권됐다. 김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정 명예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면한다”고 통보한 일 이외에는 별도 회동을 하지 않는 등 불편한 심기를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2001년 3월 정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빈소를 직접 찾아가 아들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우리나라에서 대업을 이룬 분인데, 그런 족적을 남긴 분이 가시니 아쉽다”고 조문하며 ‘사후 화해’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상도동 가신그룹] ‘킹메이커’ 김윤환에 좌는 김동영 우는 최형우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인맥 계보는 상도동 가신 그룹이 핵심이다.  상도동계 핵심은 최형우·서석재·김덕룡·김윤환 전 의원, 김동영 전 장관, 서청원·김무성 의원 등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김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YS 집권을 전후한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중반 사이 정치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이들은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다.  한국 정치사의 대표적 킹메이커인 김윤환 전 의원은 ‘김영삼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 정무수석을 역임한 그는 문민정부 출범 때 대구·경북 의원들을 결집시켜 김영삼 정권 탄생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아호 허주(虛舟)로 더 유명한 그는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대권을 노렸으나 이회창 후보에게 투항하면서 꿈을 접었다. 이 후보의 대선 패배 뒤에는 “권력은 자신이 가져야 한다”는 발언을 남겼고, 2000년 한나라당 공천 탈락 후 민주국민당을 창당했지만 낙선, 2003년 말 신장암으로 별세했다.  상도동의 ‘좌동영 우형우’ 가운데 한 명인 최형우 전 의원은 일찍 세상을 뜬 김동영 전 장관과 함께 YS의 최측근으로 분류된다. 1971년 야당 신민당 소속으로 8대 국회 첫 배지를 달며 YS와 인연을 맺은 그는 YS 당선 이후 민자당 사무총장으로서 공직자 재산공개를 주도하는 등 변화와 개혁의 선봉에 섰지만 1994년 부천세무서 탈세 사건으로 경질됐다. 1996년 15대 총선에 당선돼 차기 대선 후보로도 거론됐으나 1997년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2009년 별세한 서석재 전 의원은 김동영·최형우·김덕룡과 함께 민주계 실세 4인방이었다. 164㎝의 단신인 탓에 ‘작은 거인’이란 별명으로 불린 그는 조직의 귀재였다. 1992년 대선 당시 나라사랑실천본부란 사조직을 이끌며 YS 당선에 일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를 총무처 장관에 발탁했으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4000억원 비자금설을 주장해 8개월 여만에 물러났다. YS는 이를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김덕룡 전 의원은 지난해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지지를 선택하며 상도동계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앞서 2007년 대선 경선 때 이명박 후보 지지 핵심멤버인 6인회 멤버로 박근혜 당시 후보와 대립각을 세웠다. 1970년 신민당 총재 비서실장으로 정계 입문해 5선을 지낸 관록의 정치인이다.  반면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은 이명박 정부에서 낙천, 총선 공천헌금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정치적 암흑기를 겪다 최근 복권돼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부활했고, 10·30 재보선을 통해 원내 복귀에도 성공했다. 기자 출신으로 민한당 국회의원 시절이던 1981년 YS와 처음 만난 그는 1989년 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1996년 신한국당 원내총무 등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2002년 한나라당 불법대선자금 사건을 책임지고 탈당, 실형 선고를 받는 등 부침을 겪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과 연을 맺고 친박(친박근혜)계 원조 좌장 역할을 해 왔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현재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4·24 재보선으로 복귀한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상도동계의 막내다. 1992년 대선에서 정책보좌역을 맡으며 YS와 첫 인연을 맺었다. ‘무대(김무성 대장)’라는 별명도 보스 정치의 한복판이었던 상도동에서 정치 역정을 겪으며 얻게 됐다.  YS의 가신이자 대변인격으로 불렸던 박종웅 전 의원은 현재 대한석유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는 YS 퇴임 이후에도 대립했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연대21이라는 조직을 주도하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원했지만 18대 총선 때 부산 사하구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낙천했다.  부인 손명순 여사는 한때 건강이 악화됐지만 최근에는 기력을 많이 회복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대선 때도 고인과 함께 투표소에 나와 한 표를 행사했다. ‘YS 황태자’로 불렸던 차남 현철씨(전 여의도연구소장)는 지난해 총선 공천 때 경남 거제에서 낙천한 뒤 탈당해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다. 김 전 대통령 집권 시절 ‘소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권부의 핵심에 있었지만 집권 말기 조세포탈 혐의로 실형을 살기도 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부고] ‘한국의 소피아 로렌’ 배우 김혜정

    [부고] ‘한국의 소피아 로렌’ 배우 김혜정

    1960년대 ‘한국의 소피아 로렌’으로 불렸던 원로 배우 김혜정이 19일 새벽기도를 위해 교회에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74세. 1941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8년 이만흥 감독의 영화 ‘봄은 다시 오려나’로 스크린에 데뷔한 이후 10여년 동안 ‘비련의 섬’(1958), ‘육체의 고백’(1964), ‘아내는 고백한다’(1964) 등 128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데뷔 시기가 비슷한 도금봉과 함께 육체파 여배우로 이름을 알렸던 고인은 최원석 동아그룹 전 회장과 만나게 되며 1969년 돌연 은퇴했다. 빈소는 서울성모장례식장 12호실. 발인은 21일 오전 6시 45분.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소자본창업 주점창업 인기 아이템 ‘에피타이저 주점

    소자본창업 주점창업 인기 아이템 ‘에피타이저 주점

    은퇴 연령이 빨라지면서 소자본창업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설계하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30~40대는 물론이고 20대 창업자들도 크게 증가하는 추세로, 이들을 만족시킬 다양한 소자본 창업 브랜드도 잇따라 소개되고 있다. 주점창업은 예비창업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업종 중 하나다. 비교적 수월하게 시장에 뛰어들 수 있고, 호황과 불황에 크게 개의치 않고 일정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소자본 창업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시장 구도와 비슷비슷하기만 한 프랜차이즈 창업의 한계는 소규모 주점 창업의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홍대 3대 튀김 맛집으로 유명한 에피타이저 주점 ‘치치’(www.chi-chi.co.kr)가 가맹사업을 시작했다. 주점 창업시장의 인기 아이템으로 떠오른 ‘치치’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 최초로 에피타이저식 요리 안주를 도입, 40여 종에 이르는 다양한 메뉴를 소량씩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주점들이 똑같은 메뉴를 상당한 가격대에 선보이는 것과 달리 ‘치치’는 프로 셰프들이 만들어내는 고급 요리들을 부담 없는 가격으로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고객 입장에서는 수많은 에피타이저 안주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어 만족스럽고, 창업자 입장에서는 그만큼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 상호 윈윈할 수 있는 전략인 셈이다. 다양한 메뉴 구성은 매장을 운영해야 하는 창업자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부분이지만 ‘치치’ 측은 모든 메뉴를 원팩화해 각 매장에 공급하는 시스템으로 이 같은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또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통해 창업자들이 주기적으로 신메뉴 교육을 받고, 트렌드 변화에 부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여타의 술집창업이 주로 저녁장사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치치’는 다양한 점심 메뉴 개발로 점심 수익까지 올릴 수 있도록 지원한다. 덕분에 매장 효율성이 높아지고, 그만큼 투자금 회수도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이 본사 측 설명이다. ‘치치’ 프랜차이즈 본사 관계자는 “경쟁력 있는 창업아이템에 목말라 있는 예비창업자들에게 치치는 가장 효율적인 프랜차이즈 창업이 되어 줄 것”이라고 전하면서 “본사의 체계적인 지원 속에 경쟁력 있는 아이템을 선보이는 만큼 많은 예비창업자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구마테쓰 목소리에 송강호 캐스팅 고려했었다”

    “구마테쓰 목소리에 송강호 캐스팅 고려했었다”

    “나이대와 체격도 그렇고 야성미 넘치는 분위기가 구마테쓰 목소리에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해 송강호씨를 캐스팅하려고 했었죠.”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로 손꼽히는 호소다 마모루(48)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이 한국 영화에 대한 애정을 진하게 드러냈다. 오는 25일 신작 ‘괴물의 아이’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6년 만에 한국을 찾은 그는 지난 12일 인터뷰에서 “애니를 만들기 위해 실사 영화를 자주 보는데 봉준호 감독 작품이나 ‘추격자’, ‘써니’ 등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은 한국 영화들을 좋아한다”면서 “도대체 한국 사회 예술가들은 어떤 비밀이 있길래 이렇게 재미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작의 핵심 캐릭터인 구마테쓰의 목소리를 연기할 성우로 송강호를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뒷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판타지물인 ‘괴물의 아이’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9살 소년 렌이 도쿄 시부야의 뒷골목을 떠돌다 제자를 찾으려고 인간 세계로 나온 곰 모습의 괴물 구마테쓰를 만나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괴물 세계인 ‘주텐가이’에 발을 들이게 된 렌은 규타라는 새 이름을 얻고 구마테쓰의 제자가 된다. 둘은 사사건건 부닥치지만, 점점 서로에게 의지하고, 혈육이나 다름없는 정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게 된다. 호소다 감독은 전작인 ‘늑대 아이’ 때는 아이가 없어 부모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는데 이후 실제 아들을 낳아 그 체험을 바탕으로 ‘괴물의 아이’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어른과 아이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에 대해 그는 “스승은 완벽하고 완성된 존재이며 아이는 미성숙한 존재라는 게 전통적인 사고 방식인데 자식을 키우다 보니 내 자신이 아이에게 배우며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에서는 자식을 적게 두거나 결혼을 늦게 하고, 아예 결혼하지 않는 등 전통적인 가족관이 무너지고 아이를 키우는 방식이 달라지는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하며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아이들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애니메이션으로 그려나가며 그 안에서 긍정과 희망을 찾고 싶다”고 강조했다. 컴퓨터그래픽(CG)을 바탕으로 한 3D가 횡행하는 요즘, 여전히 손그림을 활용한 2D를 고집하고 있는 까닭을 묻자 애니는 영화 세계가 아니라 그림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지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림 역사의 최전선에 애니가 있다고 봐요. 인류 문화에 있어서 미술이 갖고 있는 가치를 생각하면 손그림으로 애니를 만드는 방식을 유지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포스트 미야자키’는 피해갈 수 없는 질문. 해외에 나가면 특히 더 많이 듣게 된다고 웃는 호소다 감독은 “미야자키의 작품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지만 그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선을 그었다. “저는 제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들고 싶지 미야자키와 유사한 작품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각자 시점으로 그려내야 세상이 더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미야자키 같은 작품을 기대하거나 그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까운 일이죠.”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대한 책임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미야자키의 은퇴와 함께 지브리 스튜디오는 앞으로 더이상 장편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어요. 그런데 일본에는 손그림으로 장편을 할 수 있는 스태프들이 많아요. 그러한 재능을 계속 살려가고 싶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그리지 않은 이야기가 무궁무진합니다. 사회적으로, 예술적으로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죠.”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연재 중인 라크리모사 이후 내용은 어떻게?”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연재 중인 라크리모사 이후 내용은 어떻게?”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연재 중인 라크리모사 이후 내용은 어떻게?”웹툰작가 임인스 네이버 웹툰작가 임인스(본명 임만섭)가 은퇴를 선언했다. 임인스는 14일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 ‘라크리모사’ 10회분과 함께 은퇴를 알리는 내용의 글을 함께 올렸다.임인스는 공지글을 통해 “먼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작품을 이어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재 중이던 웹툰을 마무리 짓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며 모든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사과했다. 임인스는 “‘라크리모사’는 시놉시스의 형태로 블로그에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임인스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잊지 않겠다”면서 “독자 분들도 건강하고 고독하지 않으며 행복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임인스는 지난 2007년 6월 네이버 웹툰 ‘싸우자 귀신아’를 연재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2013년 ‘싸귀2: 퇴마록’과 올해 ‘라크리모사’ 등의 시리즈를 연재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베이비붐 세대… ’ 19일 심포지엄

    ‘베이비붐 세대… ’ 19일 심포지엄

    한국정책재단(이사장 임태희)은 오는 19일 오후 1시 30분 경기 성남시 분당수서로 한국잡월드에서 ‘베이비붐 세대, 한국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라는 주제로 정책 심포지엄을 연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안상훈 서울대 교수 등이 참석해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국가 경제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짚어보고 은퇴자의 경험과 경륜을 활용한 서비스 모델, 일자리 지원에 따른 경제적 기대효과 등에 대해 논의한다.
  •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연재 중인 라크리모사 이후 내용은?”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연재 중인 라크리모사 이후 내용은?”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연재 중인 라크리모사 이후 내용은?" 웹툰작가 임인스 네이버 웹툰작가 임인스(본명 임만섭)가 은퇴를 선언했다. 임인스는 14일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 ‘라크리모사’ 10회분과 함께 은퇴를 알리는 내용의 글을 함께 올렸다.임인스는 공지글을 통해 “먼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작품을 이어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재 중이던 웹툰을 마무리 짓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며 모든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사과했다. 임인스는 “‘라크리모사’는 시놉시스의 형태로 블로그에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임인스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잊지 않겠다”면서 “독자 분들도 건강하고 고독하지 않으며 행복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임인스는 지난 2007년 6월 네이버 웹툰 ‘싸우자 귀신아’를 연재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2013년 ‘싸귀2: 퇴마록’과 올해 ‘라크리모사’ 등의 시리즈를 연재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스타뷰] KBL 첫 ‘1000블록슛’ 8개 남겨둔 동부 센터 김주성

    [스타뷰] KBL 첫 ‘1000블록슛’ 8개 남겨둔 동부 센터 김주성

    “기록을 달성한 날 외박을 다녀왔는데 다음날이 마침 생일이었습니다. 여고생 팬들이 보낸 케이크에 ‘오빠 생일 축하하고 기록 달성도 축하한다’는 쪽지가 있었습니다.” 여섯 살과 네 살짜리 두 딸의 아빠인데 오빠라니. 14년을 한결같이 프로농구 동부의 골밑을 지켜 온 김주성(36)이 지난 11일 강원 원주종합체육관 옆 선수단 숙소에서 털어놓은 얘기다. 그는 지난 8일 KCC와의 2라운드 대결에서 리바운드 9개를 걷어내 통산 4007개를 기록하며 서장훈(은퇴·5235개)에 이어 프로농구연맹(KBL) 두 번째로 리바운드 4000개를 넘어섰다. 13일 LG전까지 4014개가 됐다. 최다 리바운드에 욕심을 내볼 만하지 않느냐고 떠봤다. “힘들 것 같습니다. 서른 살 초반에만 4000리바운드를 했어도 됐을 텐데. 세 시즌 내내 한 경기 10개씩 해야 하는데, 요즈음 6개 정도밖에 못합니다.” 지난 시즌 경기당 평균 11.86득점 6.52리바운드 3.06어시스트 0.85스틸 1.09블록슛을 기록했는데 13일까지 8경기를 뛴 올 시즌 13.6득점 6.9리바운드 3.3어시스트 1스틸 0.3블록슛으로, 블록슛만 제외하곤 모두 나아졌다. 그는 “2년 전만 해도 경기당 33~35분 정도 소화했는데 지난 시즌도, 올 시즌도 27~28분 뛰는 것 같다. 김영만 감독이 효율적으로 시간을 배분해 주니 나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쓸데없는 움직임을 줄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어 동부와의 계약이 다음 시즌까지인데 “올 시즌을 포함해 세 시즌 뛰는 것을 목표로 일단 잡고 있다”고 답했다. ●여고생 팬 4000리바운드 돌파에 “오빠, 생일·기록 축하” 4000리바운드를 돌파한 날 3점포를 1쿼터와 2쿼터에 두 방씩 터뜨려 절정의 감각을 보여줬는데 팬들은 왜 그동안 외곽슛을 자제했는지 궁금해한다. 그는 “KCC를 상대할 때는 과거에도 한 경기에 한두 개는 쐈던 것 같다”면서 “골밑에서 리바운드 잡아줄 선수가 한 명 줄게 되니까 자제했었는데 올 시즌부터 외국인 둘이 동시에 뛰는 쿼터가 있고 해서 기회가 주어지면 던지려고 노력한다”고 답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트레이닝복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지방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윗몸을 드러냈다. 그러나 곳곳이 손자국들이었다. 그는 “14년 동안 골밑을 지키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생채기”라면서 “상대 가드들이 공 뺏겠다며 달려들어 ‘손질’을 하기 때문”이라고 씁쓸해했다. KBL 최초의 기록도 그의 정복을 기다리고 있다. 13일 블록슛을 하나 더해 이제 1000블록슛에 8개만 남았다.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KBL에도 큰 의미가 있어서죠. 그런데 요즘 거의 안 나와 걱정되긴 하는데 순리대로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은퇴하기 전 1000블록슛과 1만 득점은 꼭 해보고 싶다고 그답지 않은 욕심을 드러냈다. “1만 득점을 넘긴 선수가 서장훈(1만 3231개), 추승균(1만 19개)뿐이어서 세 번째가 되고 싶습니다.” 13일까지 통산 득점은 9303점. ●막내 실수 감싸고 용병 농구화 챙기고… ‘리더의 품격’ 그는 현재 양동근, 함지훈(이상 모비스)처럼 코트에서 후배들을 지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고참 중의 하나다. 그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너무 확연했다. 동부가 거듭된 악재와 그의 부재에도 두 라운드를 버텨낸 것은 그가 돌아오면 반등할 수 있다는 믿음 덕이었는지 모른다. 2라운드 몇 경기에서 막내 허웅의 결정적인 실책으로 경기를 내줬을 때도 그는 허웅을 감쌌다. 그는 “다섯 명이 골 하나를 넣기 위해 공을 돌리는데 마지막 공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못 도와줘서, 제대로 슛을 쏠 기회를 만들어 주지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웅이에게도 네 마지막 슛이 성공하건 실패하건 관계없이 그런 경험이 미래의 자산이 되고 해결사 능력을 키워 주는 기회일 것 같다고 얘기해줄 뿐”이라고 돌아봤다. 교체 영입된 외국인 웬델 맥키네스가 발에 맞는 농구화를 들고 오지 못했다는 걸 알고 서슴없이 자신의 농구화를 건넸다. 팀의 리더로서 여러 가지 챙겨야 하니까 힘들겠다고 떠봤다. “이 팀에 오래 있다 보니까 전통적인 습성, 나쁜 습성을 많이 안다. 나쁜 건 내 때에 끝내겠다고, 다음 세대는 변화된 환경에서 농구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고 털어놓은 그는 “최근에는 아무래도 후배들과의 나이 차도 많아져 대화하는 데 힘이 들고 나부터 (부상 등으로) 힘들어서 세세하게 챙겨 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팀의 중심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져 달라고 주문한다고 했다. 그는 “내가 어렸을 때는 허재(전 KCC 감독) 형 등이 하는 대로 따라 했다. 팀의 중심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참 뒤에야 했다. 그게 많이 후회됐다. 진작 그런 생각을 갖고 훈련을 하고 경기를 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다른 내가 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불편한 몸으로 응원 오시는 부모님… 내가 뛰는 이유” 농구 외에는 비시즌 잠깐 골프와 당구로 머리를 식힌다고 했다. 그 큰 키에 힘차게 스윙하면 볼만하겠다고 농을 건네자 “폼은 완벽한데 레슨을 받는 것도 아니고, 공이나 열심히 주우러 다닌다”며 소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려진 대로 늘 경기장을 찾아 응원해 주는 부모님 모시고 외식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긴다. “장애가 있으신 부모님들이 제 경기를 열심히 응원해 주시니 그분들이 자랑스러움을 오래 느끼도록 하겠다는 것이 어쩌면 제가 오래 뛰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틈틈이 공격과 수비 때의 패턴을 그려 보고 메모도 한다고 했다. 그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꿈인데 감독 자질이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다”면서 “책도 열심히 보려고 노력하며 짬이 나면 미국과 유럽리그 동영상도 찾아보며 나중에 우리와 많이 다른 미국보다 유럽으로 연수를 떠날 생각도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남자농구 선수로는 유일하게 아시안게임 금메달 두 개를 목에 건 그는 연금 포인트 20점을 얻어 월 30만원의 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 그런데 “통장에 들어오는지 확인해 보지 않았다”고 했다. 재테크는 “은행 프라이빗뱅킹(PB)의 도움을 받아 보험 들고, 까먹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홈 경기를 할 경우 터널을 통해 바로 선수단 숙소로 이동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구단보다 세상과 접할 일이 없습니다. 딱히 할 일도 없구요. 후배들과 커피 마시며 수다 떨고 산책하는 것 외에는, 부모님이나 후배들을 위해 열심히 뛰는 것 말고 뭐가 있겠어요.” 그늘을 넓게 드리우는 나무, 그게 김주성이란 선수였다. 다음은 김주성 선수와의 일문일답.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나?  -약을 잘 챙겨 먹는 스타일이 아닌데 지금은 열심히 챙겨 먹으려고 한다. 웨이트트레이닝도 시간을 따지지는 않고 열심히 하려고 한다. 무릎이 좋지 않으니까 팀 훈련보다 먼저 나와 근육도 풀고 그래야 부상도 피할 수 있으니까. 근력이 떨어지지 않게 열심히 하는 편이다. 보약도 비타민도 잘 챙겨 먹는다.    →부모님에게 좋은 몸을 물려받은 거라고 할 수 있나?  -두 분 다 장애인이신데 항상 미안해 하신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다. 살도 잘 안찌는 편이고. 자주 아프고 그랬다. 농구할 때도 허약해 걱정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 몰래 중학생들이랑 어울려 높이뛰기 같은 것도 하다가 일주일 아파 학교를 못 가거나 그러기도 했다. 지금도 그런 걱정을 하신다.    →늘 부모님이 관전하시더라.  -어머니가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 척추측만증인데 나이가 들면서 중력 때문에 계속 아프신데 유일한 낙이 내 경기를 관전하는 것이니 내가 더 오래 뛰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부인은 잘 안 보이더라.  -전에는 자주 왔었는데 이제 두 애가 치대는 나이라 아빠 경기를 제대로 관전하며 재미를 느낄 나이도 아니고 무엇보다 아내가 힘들어 하니까 오지 마라고 했다. 하지만 서울 집에서 가까운 경기장에서 경기하면 나와 보곤 한다.    →가족들과 외식하는 게 유일한 낙일 정도로 건전하다고 들었다. 뭐 딱히 하는 게 없나?  -정말 없다. 결혼했어도 집에 가서 지내는 시간은 별로 없고. 부모님 집이라야 잠만 자고 나오는 경우가 많고. 부모님께 고기 대접하려고 하는데 부모님들은 너 좋아하는 거 먹어라 하시고. 그래도 부모님 자주 찾아뵈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주성이 형이 지켜주니까 든든하다, 이런 얘기 많이 듣죠?  -열심히 하니까 듣기 좋으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고. 너희들도 팀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해준다. 허재 감독이나 선배들처럼 조금 더 빨리 팀의 중심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했을 것이다. 책임감을 갖고    →스트레스를 잘 받는 편인가?  -조금 받는 편인데 희한하게 잠을 잘 잔다. 스트레스는 수다로 많이 푼다. 원주에서 (숙소 밖으로) 나가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같이 많이 모여서 예전에는 아파트를 빌려 많은 후배들과 얘기할 수 있는 일이 많았는데 현재 숙소에서는 2인실과 1인실로 나뉘어져 있어서 대화 기회가 많이 줄었다.    →두 딸이 커서 운동하겠다고 하면 어쩔 건지?  -너무 힘드니까 말릴 것 같다. 그래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운동이라면 밀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농구보다는 다른 종목, 세계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예를 들어 골프나 테니스 같은 것을 해보라고 할 것 같다.    →붙어보니까 어떤가? 어느 팀이 가장 힘든가?  -모든 팀이 어렵다. 일대일로 할 생각은 없고 팀적으로 대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외국인 중에는 라틀리프와 사이먼 등, 역시 상위권 팀들이 그 위치에 있는 건 외국인 선수들, 예를 들어 헤인즈 같은 선수들이 버티고 있어서라고 본다.    →기록말고 KBL 코트에서 꼭 이런 걸 해보고 싶다, 이런 게 있나?  -더 공격적인 선수가 되고 싶다. 이대로 계속하고 싶다. 어떤 선수를 데려오든 내가 어떻게든 맞춰주는 노력을 하겠다는 것이다. 출전 시간도 갈수록 줄어들테니 더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겠고.    →올 시즌이 끝나면 동부의 승패는 어떨지.  -1라운드와 2라운드 모두 4승씩했고 3라운드부터 5승씩 하면 20승 더해 28승(26패)을 거두는 것이 목표로 보고 있다.    →5할 승률을 노린다면 너무 낮게 잡는 것 아닌가?  -현실적으로 지금 치고 올라가긴 힘들 것 같다. 28승 해서 6강에 안착하는 게 우선이라고 본다. 현재 워낙 중위권이 혼전 상황이라 연패로 조금만 물리면 하위권으로 추락할 수 있다. 6강 성적을 유지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동부의 자랑도 해주시죠.  -우승을 두 번 정도 했고 원주는 소도시로 팬들과 지역 주민과 잘 정착돼 있고 모든 일은 팬들의 힘으로 하는 것 같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 2위로 다시 올라선 것도. 1라운드도 힘들었지만 지금 팀이 반등의 힘을 찾은 것도 팬들 덕분이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주성 씨가 워낙 시원시원하게 말해주니까 벌써 끝났다.  -어렸을 때는 허재 형이 다 얘기하고 난 단답으로 답했다. 그러니 기자들도 힘들어 하더라. 조리있게 재미있게 풀어주려고 노력하니까 하나만 말하지 않고 연결시켜서 다른 것도 얘기하니까 좋아들 하더라. 제가 먼저 얘기하고 장난도 쳐가며 인터뷰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조언도 하고. 그런데 요즘은 잘 안 불러주시더라. 조금은 서운하기도 한데 새 얼굴들이 자꾸 나가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래야 농구 붐도 일어나고 여고생 팬도 늘어날테니까.     원주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김주성은 ▲1979년 11월 9일 부산 출생 ▲ 205㎝ 92㎏ ▲영남중-동아고-중앙대 ▲ 2002년 TG 삼보(현 원주 동부) 입단 프로 데뷔 ▲ 2000년 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MVP), 2003년 프로농구 신인상, 2004년 정규리그 MVP, 2005년 플레이오프 MVP, 2008년 올스타전 MVP ▲ 2008년 베이징올림픽 대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 2014년 한국희귀난치성질환 홍보대사
  •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 대체 무슨 일?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 대체 무슨 일?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 대체 무슨 일? 웹툰작가 임인스 네이버 웹툰작가 임인스(본명 임만섭)가 은퇴를 선언했다. 임인스는 14일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 ‘라크리모사’ 10회분과 함께 은퇴를 알리는 내용의 글을 함께 올렸다.임인스는 공지글을 통해 “먼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작품을 이어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재 중이던 웹툰을 마무리 짓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며 모든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사과했다. 임인스는 “‘라크리모사’는 시놉시스의 형태로 블로그에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임인스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잊지 않겠다”면서 “독자 분들도 건강하고 고독하지 않으며 행복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임인스는 지난 2007년 6월 네이버 웹툰 ‘싸우자 귀신아’를 연재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2013년 ‘싸귀2: 퇴마록’과 올해 ‘라크리모사’ 등의 시리즈를 연재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임인스 은퇴, 연재 진행 중에 돌연… “더 이상 여력 안 돼” 대체 이유가?

    임인스 은퇴, 연재 진행 중에 돌연… “더 이상 여력 안 돼” 대체 이유가?

    임인스 은퇴, 연재 진행 중에 돌연… “더 이상 여력 안 돼” 대체 이유가?임인스 은퇴 네이버 웹툰작가 임인스(본명 임만섭)가 은퇴를 선언했다. 임인스는 14일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 ‘라크리모사’ 10회분과 함께 은퇴를 알리는 내용의 글을 함께 올렸다.임인스는 공지글을 통해 “먼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작품을 이어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재 중이던 웹툰을 마무리 짓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며 모든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사과했다. 임인스는 “‘라크리모사’는 시놉시스의 형태로 블로그에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임인스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잊지 않겠다”면서 “독자 분들도 건강하고 고독하지 않으며 행복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임인스는 지난 2007년 6월 네이버 웹툰 ‘싸우자 귀신아’를 연재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2013년 ‘싸귀2: 퇴마록’과 올해 ‘라크리모사’ 등의 시리즈를 연재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임인스 은퇴, 연재 진행 중에 돌연… “더 이상 여력 안 돼” 대체 왜?

    임인스 은퇴, 연재 진행 중에 돌연… “더 이상 여력 안 돼” 대체 왜?

    임인스 은퇴, 연재 진행 중에 돌연… “더 이상 여력 안 돼” 대체 왜?임인스 은퇴 네이버 웹툰작가 임인스(본명 임만섭)가 은퇴를 선언했다. 임인스는 14일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 ‘라크리모사’ 10회분과 함께 은퇴를 알리는 내용의 글을 함께 올렸다.임인스는 공지글을 통해 “먼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작품을 이어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재 중이던 웹툰을 마무리 짓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며 모든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사과했다. 임인스는 “‘라크리모사’는 시놉시스의 형태로 블로그에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임인스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잊지 않겠다”면서 “독자 분들도 건강하고 고독하지 않으며 행복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임인스는 지난 2007년 6월 네이버 웹툰 ‘싸우자 귀신아’를 연재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2013년 ‘싸귀2: 퇴마록’과 올해 ‘라크리모사’ 등의 시리즈를 연재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더 이상 여력 안 돼”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더 이상 여력 안 돼”

    웹툰작가 임인스 은퇴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더 이상 여력 안 돼" 웹툰작가 임인스 네이버 웹툰작가 임인스(본명 임만섭)가 은퇴를 선언했다. 임인스는 14일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 ‘라크리모사’ 10회분과 함께 은퇴를 알리는 내용의 글을 함께 올렸다.임인스는 공지글을 통해 “먼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작품을 이어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재 중이던 웹툰을 마무리 짓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며 모든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사과했다. 임인스는 “‘라크리모사’는 시놉시스의 형태로 블로그에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임인스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잊지 않겠다”면서 “독자 분들도 건강하고 고독하지 않으며 행복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임인스는 지난 2007년 6월 네이버 웹툰 ‘싸우자 귀신아’를 연재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2013년 ‘싸귀2: 퇴마록’과 올해 ‘라크리모사’ 등의 시리즈를 연재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임인스 은퇴, 연재 진행 중에 갑작스런 결정 “더 이상 여력 안 돼” 대체 이유가?

    임인스 은퇴, 연재 진행 중에 갑작스런 결정 “더 이상 여력 안 돼” 대체 이유가?

    임인스 은퇴, 연재 진행 중에 갑작스런 결정 “더 이상 여력 안 돼” 대체 이유가?임인스 은퇴 네이버 웹툰작가 임인스(본명 임만섭)가 은퇴를 선언했다. 임인스는 14일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 ‘라크리모사’ 10회분과 함께 은퇴를 알리는 내용의 글을 함께 올렸다.임인스는 공지글을 통해 “먼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작품을 이어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재 중이던 웹툰을 마무리 짓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며 모든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사과했다. 임인스는 “‘라크리모사’는 시놉시스의 형태로 블로그에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임인스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잊지 않겠다”면서 “독자 분들도 건강하고 고독하지 않으며 행복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임인스는 지난 2007년 6월 네이버 웹툰 ‘싸우자 귀신아’를 연재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2013년 ‘싸귀2: 퇴마록’과 올해 ‘라크리모사’ 등의 시리즈를 연재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임인스 은퇴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더 이상 여력 안 돼” 무슨 일?

    임인스 은퇴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더 이상 여력 안 돼” 무슨 일?

    임인스 은퇴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더 이상 여력 안 돼” 무슨 일?임인스 은퇴 네이버 웹툰작가 임인스(본명 임만섭)가 은퇴를 선언했다. 임인스는 14일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 ‘라크리모사’ 10회분과 함께 은퇴를 알리는 내용의 글을 함께 올렸다.임인스는 공지글을 통해 “먼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작품을 이어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재 중이던 웹툰을 마무리 짓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며 모든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사과했다. 임인스는 “‘라크리모사’는 시놉시스의 형태로 블로그에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임인스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잊지 않겠다”면서 “독자 분들도 건강하고 고독하지 않으며 행복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임인스는 지난 2007년 6월 네이버 웹툰 ‘싸우자 귀신아’를 연재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2013년 ‘싸귀2: 퇴마록’과 올해 ‘라크리모사’ 등의 시리즈를 연재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임인스 은퇴, 돌연 은퇴 대체 왜? “더 이상 여력 안 돼” 무슨 일인가 보니

    임인스 은퇴, 돌연 은퇴 대체 왜? “더 이상 여력 안 돼” 무슨 일인가 보니

    임인스 은퇴, 돌연 은퇴 대체 왜? “더 이상 여력 안 돼” 무슨 일인가 보니 임인스 은퇴 네이버 웹툰작가 임인스(본명 임만섭)가 은퇴를 선언했다. 임인스는 14일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 ‘라크리모사’ 10회분과 함께 은퇴를 알리는 내용의 글을 함께 올렸다.임인스는 공지글을 통해 “먼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몸과 정신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작품을 이어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재 중이던 웹툰을 마무리 짓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며 모든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사과했다. 임인스는 “‘라크리모사’는 시놉시스의 형태로 블로그에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임인스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잊지 않겠다”면서 “독자 분들도 건강하고 고독하지 않으며 행복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임인스는 지난 2007년 6월 네이버 웹툰 ‘싸우자 귀신아’를 연재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2013년 ‘싸귀2: 퇴마록’과 올해 ‘라크리모사’ 등의 시리즈를 연재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프로농구] 지금은 ‘헤인즈 시대’

    [프로농구] 지금은 ‘헤인즈 시대’

    애런 헤인즈(오리온)가 외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두 라운드 연속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연맹(KBL)은 12일 헤인즈가 기자단 투표 91표 중 40표를 받아 이정현(KGC인삼공사·33표)을 제치고 2라운드 MVP에 선정됐다고 밝혔다. 올 시즌을 앞두고 SK에서 오리온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헤인즈는 앞서 1라운드에서도 MVP를 수상했다. 지난 시즌까지 월간 MVP로 수여된 이 상을 2회 연속 받은 선수는 서장훈(당시 SK·1999~2000시즌)과 오세근(인삼공사·2011~12시즌), 김선형(SK·2012~13시즌)에 이어 헤인즈가 네 번째며 외국인으로는 처음이다. 헤인즈는 또 지난해 2월과 올해 1월 이 상을 받은 데이본 제퍼슨(당시 LG)에 이어 두 번째로 2회 이상 수상한 외국인이 됐다. 헤인즈는 2라운드 9경기에 모두 출전해 경기당 평균 30분을 소화하며 25.3득점 8.7리바운드 3.7어시스트 1.4스틸을 기록했다. 특히 지난 7일 인삼공사전에서는 조니 맥도웰(은퇴)이 갖고 있던 역대 외국인 개인 통산 득점 7077점을 뛰어넘었고, 8일 전자랜드전에서는 26득점 18리바운드 11어시스트로 올 시즌 리그 첫 트리플더블을 달성했다. 헤인즈의 활약에 힘입은 오리온은 2라운드에서 7승(2패)을 거뒀으며, 이날까지 17승3패로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다. 오리온은 지난 5일 모비스전에서 17경기 만에 15승을 달성해 역대 기록을 세우는 등 우승을 향해 순항 중이다. 한편 오리온은 12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SK와의 경기에서 헤인즈(27득점)와 김동욱(15득점)의 활약에 힘입어 99-90 승리를 거뒀다. 전반 10득점을 성공한 헤인즈는 후반에만 17득점을 성공한 데다 11리바운드 9어시스트로 두 경기 연속 트리플더블을 달성할 뻔했다. 모비스는 인천삼산월드체육관에서 커스버터 빅터(22득점)와 양동근(16득점)의 활약을 앞세워 전자랜드를 66-59로 따돌렸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어떤 퇴진/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세종로의 아침] 어떤 퇴진/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최근 두 거물의 퇴진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예사롭지 않은 두 퇴진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극명하게 교차된다. 국정 역사 교과서 대표 집필진으로 초빙됐다가 성추행 의혹으로 이틀 만에 자진 사퇴한 최몽룡(69) 서울대 명예교수와 한국 고별 무대를 환호 속 눈물로 장식한 발레리나 강수진(48)이 그 엇갈린 명암의 주인공들이다. 한평생 한길을 걸으며 쌓아 온 업적과 명성이 상반된 평가로 마무리되는 두 퇴진의 극적인 대비가 안타깝다. 최몽룡 교수가 한국 고고학계에서 인정받는 역사학자라면 강수진은 ‘세계 정상의 발레리나’로 추앙받는 무용인이다. 최 교수는 노태우 정부 때 고교 국정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뒤 2011년까지 사용된 마지막 국정 교과서의 고대사 집필을 맡았고 7차 교육과정에 따라 2007년 편찬한 고교 역사 교과서에선 상고사 집필을 맡았다. 일부 학계에선 검증되지 않은 고고학 발굴 성과를 성급하게 교과서에 수록한 사례를 들어 최 교수를 비판한다. 하지만 최 교수는 서울대에서 30년 넘게 후학을 가르치며 고고학계를 지탱해 온 역사학자로 평가받는다. 강수진은 15세 때 모나코로 발레 유학을 떠나 1985년 스위스 로잔 발레 콩쿠르에서 우승해 주목받은 데 이어 이듬해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최연소 무용수로 입단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명실상부하게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 정상의 발레리나로 활동하다 지난해 국립발레단장을 맡아 무용가와 발레단 대표의 역할을 병행해 왔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일궈 왔던 화려한 이력의 끝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최 교수는 부끄러운 성추행의 불명예를 안았다. 국정 역사 교과서 대표 집필진 선정 사실이 알려진 뒤 자택으로 찾아간 일간지 여기자에게 성적 농담과 신체 접촉을 했다는 추문의 끝이다. 여기자 추행에 앞서 최 교수는 동료 학자들과 제자들로부터 “집필진을 맡지 말라”는 목소리를 감내해야 했다. 집필진 사퇴 압력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것까진 좋았지만 어처구니없는 추행으로 막다른 길을 자처한 셈이다. 그 불명예는 최 교수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일 수 있다. “‘올바른’ 역사 교과서 편찬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집필진에서 사퇴한다”는 뜻을 전한 노학자가 안고 살아야 할 여생의 멍에가 안타깝다. 그런 반면 발레리나 강수진은 떠나는 순간 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함께 무대에 올라 선보인 ‘오네긴’ 전막 공연에서였다. 내년 7월 이 작품의 독일 공연을 끝으로 30년간의 현역 발레리나 인생을 접고 은퇴하기 앞서 고국 팬들에게 선사한 마지막 공연. 공연이 끝난 뒤 2200명의 관객이 모두 일어나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강수진은 고별 무대를 마무리한 뒤 이런 소감을 전했다고 한다. “끝이지만 시작입니다.” 흔히 마지막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고들 한다. 이른바 ‘유종의 미(有終之美)’다. 그런데 아름다운 마무리를 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국정 역사 교과서 집필을 만류했던 동료 학자와 제자들 말을 더 잘 들을 걸 그랬다. 사필귀정인가 보다.” 노학자의 뒤늦은 토로가 왜 이렇게 허허로운가. kimus@seoul.co.kr
  • 중세시대에 정교한 ‘기계 의수’ 존재...글씨도 가능

    중세시대에 정교한 ‘기계 의수’ 존재...글씨도 가능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물건을 쥘 수 있는 ‘로봇 의수’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개발 중이며, 팔이 없는 많은 환자들의 인생에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첨단기술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무려 500년 전의 중세 유럽에도 물건을 단단히 쥘 수 있는 의수가 존재했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4일(현지시간), 팔을 잃고도 특수한 의수를 사용해 전투를 벌였던 중세 신성로마제국의 기사 겸 용병 ‘괴츠 폰 베를리힝엔’(Götz von Berlichingen)의 전설적 이야기를 소개했다. 사실 중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의수나 의족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수들은 대부분 갈고리나 막대 형태의 기초적 의수들로, 팔의 기능 중 극히 일부만을 재연할 수 있을 뿐이었다. 반면 괴츠의 의수는 용수철 및 톱니바퀴 등으로 구성된 기계장치를 통해, 각 손가락을 필요에 따라 구부린 뒤 단단히 고정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 의수는 그 기능이 상당히 정교해 심지어 깃털 펜을 쥐고 글씨를 쓰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것 또한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팔을 잃은 것은 23세였던 1504년 바이에른의 공작 알버트 4세에 고용돼 싸우던 중, 포탄에 피격 당하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로 그는 64세의 나이까지 전투를 계속했으며 이후 성주가 돼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노령인 82세까지 생존했다. 괴츠는 공적을 세울 수 있거나 돈을 벌 수 있다면 어느 쪽을 위해서라도 싸우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전투에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바이에른 지역의 귀족들 편에서 싸웠지만 하면 독일농민전쟁에서는 농민군 측에 들기도 했었다. 은퇴 이후에 그는 자서전을 집필한 바 있는데 이는 1731년에 뒤늦게 출판됐으며,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이 이야기를 각색해 희곡을 각색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괴테의 초기 성공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강철 의수는 지금도 그가 말년을 보낸 독일 바덴 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주 호른베르크(Hornberg)성에 잘 보관돼 있다. 사진=ⓒ위키피디아(위)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