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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야구] 2000경기 출장 -1

    [프로야구] 2000경기 출장 -1

    18시즌을 뛰면서 변변한 개인타이틀 하나 없었던 프로야구 선수가 있다. 그의 이름은 이숭용(40·넥센).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 타이틀을 갖게 됐다. 최고령 2000경기 출장 기록이다. 심지어 이적 없이 한 팀에서만 올린 기록. 프로야구 사상 처음이다. ●18시즌 한팀에서 뛰어… 사상 첫 기록 화려하지도 강하지도 않았지만 우직함 하나로 버텨 온 이숭용의 야구인생을 가장 적확하게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숭용은 15일 현재 개인통산 2000경기 출장에 단 한 경기만을 남겨 놓고 있다. 이날 목동 두산전에는 나오지 않았다. 2008년 전준호(전 SK 코치) 이후 통산 여섯 번째, 현역으로는 박경완(SK)에 이어 두 번째다. 40세 6개월 5일인 그는 넥센의 김동수 코치가 2008년 세웠던 최고령 2000경기 출장 기록도 경신한다. 경희대를 졸업하고 1994년 태평양에 입단한 뒤 팀이 현대에서 넥센으로 바뀌는 동안 한 팀에서만 활약하며 세운 기록이라 더욱 뜻이 있다. 이숭용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야구를 해 의미있는 대기록을 세우게 됐다. 가족의 헌신과 코칭스태프, 동료 선수, 구단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기록이다. 앞으로 몇 경기 안 되지만 은퇴까지 최선을 다해 플레이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40세 6개월 5일’ 최고령 출장 기록 사실 기록만 놓고 보면 이숭용은 불세출의 톱타자는 아니다. 통산 타율 .281, 안타 1727개에 홈런 162개다. 타율이 3할대를 넘은 것은 딱 세 번, 20개 이상 홈런을 친 적은 한 시즌도 없다. 하지만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불우한 팀으로 손꼽히는 현대에서 그가 헤쳐온 나날들을 돌아본다면 이숭용은 또 하나의 레전드로 기억될 자격이 충분하다. 1996년 현대는 태평양을 인수한 뒤 12년의 팀 역사 동안 네 차례 정상에 오르며 ‘현대 왕조’로 불렸다. 이숭용은 2003년부터 5년간 주장을 맡아 팀의 우승을 견인했다. 1998년 첫 우승 때, 2003~04년 2연패를 할 때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그의 손으로 잡아냈다. 그러나 2007년 팀이 해체라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다. 불안해하는 선수들을 다독이는 것은 주장 이숭용의 몫이었다. 2008년 1월 기자회견에서 그가 보인 눈물은 아직도 많은 야구팬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후 현대는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에 의해 재창단되며 히어로즈로 바뀌었고 그동안 연봉 삭감 등 많은 우여곡절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팀을 이끌었던 것이 이숭용. “현대엔 잘하는 선수들이 많아 실력이 모자란 내가 어떻게 팀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고, 내가 내린 답이 바로 리더로 선수단을 잘 이끌어가는 것이었다.”고 이숭용은 말한다. 그의 이름 앞에 ‘캡틴’이 붙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18일 삼성전에서 은퇴… 지도자 변신 18일 삼성전에서 은퇴식을 치르는 이숭용은 지도자로 야구인생 제2막을 시작한다. 구단의 지원으로 해외 지도자 연수를 마친 뒤 코치로 현장에 복귀할 예정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 동료들을 이끌었던 ‘숭캡’ 이숭용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하프타임] 어제 프로야구 전경기 우천 취소

    26일 오후 5시부터 열릴 예정이던 프로야구 두산-KIA(잠실구장), SK-LG(인천 문학구장), 한화-롯데(대전구장), 삼성-넥센(대구구장) 경기가 우천으로 모두 취소됐다. 문학구장에서 예정됐던 김재현(전 SK)의 공식 은퇴식도 다음으로 미뤄졌다.
  • 굿바이, 호나우두

    ‘축구황제’ 호나우두(35·브라질)의 마지막은 성대했다. 호나우두는 8일 브라질 상파울루 파카엥부 경기장에서 열린 루마니아와의 평가전에서 은퇴식을 갖고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호나우두는 1-0으로 앞선 전반 30분 프레드와 교체돼 15분간 뛰었다. 현역선수로 그라운드를 누빈 마지막 순간이자, 2006년 독일월드컵 이후 5년 만에 브라질 대표팀 일원이 된 순간이었다. 브라질축구협회는 지난 2월 공식은퇴를 선언한 호나우두를 위해 이번 루마니아전에서 은퇴식을 준비했다. 등번호 9번을 달고 전반 종료 때까지 뛴 호나우두는 동료들의 몰아주기 패스와 루마니아의 느슨한 수비라인 덕에 결정적인 찬스를 세 번 잡았지만 골망을 흔들지는 못했다. 호나우두는 하프타임 때 브라질 국기를 등에 두르고 그라운드를 돌았다. 경기장 곳곳에는 ‘브라질은 호나우두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오직 호나우두뿐입니다’ 등의 플래카드가 걸려 뭉클함을 자아냈다. 팬들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호나우두는 계속 손을 흔들며 감사인사를 했다. 팬들은 경기 후 호나우두가 라커룸으로 들어갈 때까지 이름을 연호하며 ‘축구황제’와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호나우두는 “세 번 정도 찬스가 있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마지막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했다. 선수 생활 내내 함께 울고 웃어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1993년 크루제이루(브라질)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호나우두는 이후 PSV에인트호벤(네덜란드), 바르셀로나(스페인), 인테르 밀란(이탈리아),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AC밀란(이탈리아) 등 유럽 명문클럽을 두루 거쳐 2009년 조국 코린치안스로 돌아왔다. 18년간 현역선수로 뛰며 월드컵에서 두 번 우승했고,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로 세 번 뽑혔다. 월드컵 본선무대 통산 15골로 이 부문 1위에 올라 있기도 하다. A매치에도 98경기에 출전 62골을 터뜨리며 ‘삼바축구의 전설’로 이름을 남겼다. 한편 브라질은 전반 20분 프레드의 결승골로 루마니아를 1-0으로 꺾었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26일 은퇴하는 ‘첫 여성사제’ 민병옥 신부

    26일 은퇴하는 ‘첫 여성사제’ 민병옥 신부

    “처음 전도사로 부임받은 교회에서 신부님이 성경을 가르치라고 했는데, 남자 교우들이 여자한테 배울 수 없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시더라고요. 사제 서품을 받기까지 20년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죠.” 어디에나 최초는 있다. 그리고 최초는 늘 고통과 신산한 삶을 피해 갈 수 없다. 민병옥(65) 신부는 한국 사회에 대한성공회가 들어온 1890년 이후 처음 탄생한 ‘여성 신부’다. 로마가톨릭과 달리 성공회 교회는 여성에 대한 사제 서품을 허용한다. 하지만 민 신부는 다른 남성 신부들과 달리 성공회 사목원(현 성공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무려 22년의 시간을 전도사로 지내야 했다. 그리고 2001년 4월 부산 주교좌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있었다. 다시 10년이 지나 은퇴할 때가 돼 버렸다. 부산교구 소속의 민 신부는 12일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22년 기다림의 시간 동안 다 포기하고 떠나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에너지가 고갈됐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정작 사제로 살아온 10년의 시간은 너무도 훌쩍 지나갔다.”면서 “사제 활동에 대한 아쉬움은 크지만 처음으로 문을 여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5년은 부산의 산동네 개척교회를 맡았고, 나머지 5년은 거제교회를 맡았다.”면서 “처음에는 선입견과 거부감이 있었지만 사실 교우들은 여자가 훨씬 많은 만큼 여신부가 목회활동을 하기가 오히려 훨씬 좋다.”고 여사제만의 장점을 얘기했다. 민 신부는 “교우들과 함께 지내면서 섬세한 감정으로 돌보고 자매처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점은 남자 사제들이 따라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장점을 확인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은 많았다. 민 신부와 함께 사목원을 졸업한 여자 동기가 두명 더 있었지만 모두 사제의 길을 포기했다. 그 뒤 10년 동안 신학대학원은 여자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사회 전체는 물론 교계 분위기도 보수적이었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주교좌교회에서 ‘여성 성직 10주년을 기념하는 감사 성찬례’를 가졌다. 민 신부가 힘겹게 다져 놓은 길 위를 따라온 후배 사제들은 이제 20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민 신부를 위로했고, 축하했고, 그처럼 살겠다고 다짐했다. 민 신부는 “미국 여주교, 일본 신부 등도 직접 와서 축하해 주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며 축제처럼 즐겼다.”면서 “은퇴를 절감하기보다는 흥겨운 잔치처럼 치렀다.”고 말했다. 그는 “여사제 후배들이 신앙의 성장과 함께 다른 전공을 갖고 사람들과 접할 수 있는 면을 넓혀 갔으면 좋겠다.”면서 “노래를 잘 불러도 좋고, 음식을 잘 만들어도 좋으며, 구체적인 기술이 있어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목회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당부의 말을 건넸다. 그는 오는 26일 부산주교좌교회에서 은퇴식을 갖는다. 행복하고 감사해하는 삶이 자연스레 스며들 수 있는 신앙 문화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첫 은퇴 여사제’로서 걷는 새로운 길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하프타임] 배구 김건 태심판 FIVB 특별공로상

    한국 배구를 대표하는 김건태(55) 심판이 국제배구연맹(FIVB)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한국배구연맹은 김 심판이 지난 15~21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세계클럽선수권대회 결승전에 앞서 열린 은퇴식에서 특별공로상을 받았다고 27일 밝혔다. 1990년 국제심판이 된 김 심판은 1998년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로 FIVB 심판으로 뽑혀 굵직한 국제 대회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명심판으로 활약했다. 김 심판은 국제무대에서는 은퇴했지만, 국내 프로배구에서는 2013년까지 활약할 예정이다.
  • ‘살아있는 전설’ 가네모토 기로에 서다

    ‘살아있는 전설’ 가네모토 기로에 서다

    2008년 10월 1일은 오릭스 버팔로스와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이 열린 날이다. 그러나 이날 경기의 승패를 기억하고 있는 이는 거의 없을것이다. 그도 그럴게 이 경기가 정규시즌 1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합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소프트뱅크는 이미 리그 꼴찌가 확정된 상황에서 치른 경기였다. 모처럼만에 리그2위에 오른 오릭스로서는 1위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포스트시즌을 대비한 워밍업에 불과한 소프트뱅크전이었다. 하지만 이날 경기에 쏠린 관심은 전일본을 떠들썩하게 했음은 물론, 야구팬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텔레비젼 앞으로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던 이슈가 있었다. 바로 ‘일본프로야구의 반쵸(대장)’인 기요하라 카즈히로(오릭스)의 마지막 경기이자 은퇴식이 거행된 시합이었기 때문이다. 기요하라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스즈키 이치로(시애틀)가 태평양을 건너왔다는 사실로 미루어볼때 이건 단순한 은퇴식이 아니었다. 이날 경기에는 가수 나가부치 츠요시가 직접 경기장을 찾아 기요하라의 응원가이자 자신의 노래인 ‘톰보’를 직접 라이브로 부르며 대타자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때 눈물을 흘러던 기요하라 앞에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 선수가 있었다. 바로 ‘오사카의 호랑이’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가네모토 토모아키(한신)였다. 기요하라의 은퇴는 동시대를 함께 해온 가네모토 입장에서도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항상 옆집 아저씨와 같은 포근한 인상의 가네모토지만 그리고 철인으로 불리울 정도로 의지가 뛰어난 그였지만 어느새 가네모토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혀 있었다. 가네모토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가네모토 토모아키라는 이름보다는 김박성으로 더 유명한 재일교포 3세인 그 역시 이러한 날(은퇴를 하는)이 멀지 않았다는걸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요하라가 야구계의 대장이라면 가네모토는 간사이 지방을 대표하는 ‘서쪽의 반쵸’다. 젊은시절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가네모토는 아마츄어때부터 유명했던 기요하라를 동경해왔다. 고교시절 가네모토는 1년 선배격인 기요하라와 구와타의 PL학원(오사카 가쿠엔고교)이 고시엔대회에서 상종가를 달리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을때 기요하라의 모습을 구경하러 갔을정도로 엄청난 팬이었다고 한다. 또래들에 비해 야구에 소질도 없었을뿐더러 힘든 훈련을 소화하지 못하고 야구를 그만두기를 거듭했던 가네모토 입장에서는 고시엔 스타로 명성이 자자했던 기요하라가 동경의 대상이 된건 어쩌면 당연한 일. 프로지명을 받지 못했던 가네모토는 지인의 도움으로 어렵게 대학(동북복지대학)에 들어간 후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을 통해 일취월장의 기량을 선보이게 된다. 일본대학 야구선수권에서 3년연속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던 그는 마지막 기회였던 4학년때 관서대학을 결승에서 물리치며 결국엔 우승을 차지한다. 별볼일(?)없었던 그의 야구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순간이었다. 1992년 고향팀인 히로시마 토요카프에 입단한 가네모토는 탄탄대로를 달릴것 같던 기대와는 달리 공격과 수비 모든면에서 함량미달이란 평가를 받는다. 하체를 이용하지 못하는 타격폼, 그리고 부정확한 송구능력은 외야수로서 매리트가 없었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관련자료를 찾아보면 그때 가네모토의 별명이 ‘두더지 죽이기’ 였다고 한다. 송구만 하면 어깨에 힘만 들어가 공을 땅바닥에 패대기쳤기 때문이다.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한 그는 이후 하체의 근력강화는 물론 타격시 하체를 이용하는 방법에 온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94년을 기점으로 히로시마의 주전선수가 된 가네모토는 이후 에토 아키라(히로시마의 전설적인 강타자)의 요미우리 이적을 기회삼아 2000년부터 팀의 4번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이해에 생애 처음으로 30-30클럽을 달성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1,002 타석 연속 무병살타의 일본신기록까지 작성한 그는 공수주 3박자는 물론 찬스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타자로 우뚝서게 된다. 2002년을 끝으로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어 한신 타이거즈로 이적한 가네모토는 이적 첫해인 2003년에 한신을 18년만에 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비록 다이에 호크스(현 소프트뱅크)에게 일본시리즈 패권(3승 4패)을 내주긴 했지만 3경기 연속 홈런포를 쏘아올리며 총 4개의 일본시리즈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할것 같았던 가네모토의 전성기는 2005년 리그 MVP를 끝으로 기록이 하향세에 있다. 물론 연속 경기 풀이닝(1,492경기)출전이란 대기록을 수립하며 기네스북에도 그 이름을 올리는등 ‘철인’으로서 존경의 대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올해 야쿠르트와의 개막전에서 어깨부상을 당한 가네모토는 결국 4월 18일 경기(요코하마전)를 끝으로 연속 경기 무교체 출전기록도 중단됐다. 가네모토는 올해 전경기에 출전했다. 144경기를 뛰고도 규정타석에 들지 못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2년연속 전경기 출전 기록을 이어가기 위해 대타로 출전한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선수가 은퇴를 하는 경우는 크게 두가지 이유때문이다. 하나는 체력적인 저하로 인한 노쇠화 그리고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부상. 내년이면 한국나이로 44살(1968년생)이 되는 가네모토에겐 이 두가지 악재가 동시에 찾아왔다고 볼수 있다. 2년연속 1억엔씩 연봉이 감소한 가네모토의 내년 몸값은 3억 5천만엔. 한번 더 날기 위한 가네모토의 선수생활은 어쩌면 내년시즌이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기요하라의 은퇴식에서 눈물을 보였던 가네모토 역시 영원할수만은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야구통신원 윤석구 http://hitting.kr/
  • [22일 TV 하이라이트]

    ●불멸의 전쟁 제2편 이름없는 영웅(KBS1 오후 11시 30분) 90년 전 만주에서 울린 승전보, 봉오동 청산리대첩. 그것은 망명 조선인들이 일군 일생일대의 승리였다. 일본군에 맞서 만주벌을 내달린 조선의 청년들. 그들은 언제 어떻게 그곳으로 흘러들어 간 것일까. 청산리전투 현장을 직접 답사, 주요 전투 과정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엄마도 예쁘다(KBS2 오전 9시 20분) 정수는 그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드디어 경매사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정수는 존경하는 경매사로부터 유학을 권유받고 기쁘게 승낙을 하는데 영준은 자신을 완전히 잊은 듯 행동하는 정수에게 화가 난다. 한편 명숙은 TV를 통해 제니가 명숙의 직책과 모든 재산을 기부한다고 대리로 인터뷰한 것을 보게 된다. ●주홍글씨(MBC 오전 7시 50분) 경서는 재용에게 앞으로 자신이 하니와 함께 있을 것이라 말한다. 한편, 석호는 하니를 잃어버려 찾고 있는 경서를 보고 화를 내며, 동주에게 경서 대신 다른 작가를 구하라고 말한다. 혜란은 순임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 검사 결과를 받고, 하니가 자신의 딸임을 확신한다. 혜란은 재용을 찾아가 자신의 딸을 돌려달라고 말을 하는데…. ●맛있는 초대(SBS 오후 9시 55분) 18년의 야구인생 동안 전설 같은 기록들을 남기고 전격 은퇴하여 야구팬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양준혁이 출연한다. 데뷔 시절 이야기로 시작해서 선수 시절 최고가 되기 위해 했던 철저한 자기관리와 끝없는 노력, 그리고 얼마 전 은퇴식의 후끈한 현장과 은퇴 이후 계획까지, 굴곡 많은 야구인생 풀 스토리를 대공개한다. ●세계테마기행+(EBS 오후 8시 50분)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의 대자연을 즐기며,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봐야 할 여행지로 꼽히는 스위스의 걷기 여행지를 살펴본다. 치즈와 와인 축제를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진정한 낭만을 만끽한다. 가난했던 나라에서 세계적인 부국으로 성장하기까지의 비밀. 스위스만의 경제적·문화적 특징을 알아본다. ●명불허전(OBS 오후 10시 5분) 한국영화계의 거목 정일성 촬영감독의 삶은 어떠했을까. 일본에서 태어나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우연히 영화계에 입문한 정일성 촬영감독의 영화 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독학으로 영화·영상·카메라를 공부해야 했고, 생사를 넘나든 고비도 있었다. 50년 영화인생을 이어 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프로야구]990홈런·방어율 4.58… 타고투저

    [프로야구]990홈런·방어율 4.58… 타고투저

    2010시즌에도 야구는 뜨거웠다. 시즌 막판까지 SK-삼성이 선두경쟁을 벌였다. 롯데 이대호와 한화 류현진은 투타에서 독보적이었다. LG 이대형과 롯데 김주찬은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달리고 훔쳤다. 역대 최다 관중 신기록을 세웠다. 삼성 양준혁, 한화 구대성 등 ‘레전드’들이 그라운드를 떠났다. 기록도 쏟아졌다. 연속 경기 홈런과 퀄리티스타트 기록이 나왔다. 한 경기 최다안타-출루-타점 기록도 세워졌다. 역대 어느 시즌보다 다양하고 풍성했다. 정규시즌을 결산해 보자. ●퇴장 10번중 8번 스트라이크 불만 올 시즌 스트라이크존을 홈플레이트 좌우 공 반개씩 늘렸다. 타고투저 완화를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별 소용이 없었다. 올 시즌 홈런 수는 990개였다. 지난 시즌 1155개에는 못 미친다. 그래도 2008시즌 646개보다는 50% 이상 많이 쳤다. 리그 시즌 타율도 .270이었다. 역대 3위다. 리그 평균 방어율은 4.58을 기록했다. 기록적인 타고투저 시즌이던 1999~2001시즌과 큰 차이가 없다. 8개 구단 가운데 선발 로테이션이 제대로 돌아가는 팀이 없었다. 개막을 10일 정도 당기면서 투수들 컨디션 조절에 문제가 있었다. 시즌 초반 유난히 추웠다. 부진과 부상이 이어졌다. 들쭉날쭉한 스트라이크 판정으로 심판의 권위만 흠집났다. 확대됐던 스트라이크존은 어느 순간 원상복귀됐다. 올 시즌 퇴장은 10차례. 이 가운데 8차례가 스트라이크 판정 불만 때문이었다. ●올시즌 진기록 봇물 올 시즌 유난히 진기록이 많았다. 이대호는 8월4일 잠실 두산전부터 14일 광주 KIA전까지 매 경기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9경기 연속 홈런 기록. 미국 메이저리그 기록(8경기)을 뛰어넘었다. 종전 리그 기록은 이승엽 등이 작성한 6경기 연속 홈런이었다. 이대호는 도루를 뺀 타율(.364)-홈런(44)-타점(133)-득점(99)-장타율(.667)-출루율(.444) 7개 부문을 휩쓸었다. 류현진은 3월30일 대전 롯데전부터 8월17일 잠실 LG전까지 23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선발 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다. 비공인 세계기록이다. 5월11일 LG전에선 삼진 17개를 잡아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다. KIA는 7월29일 사직 롯데전에서 한 이닝에 1~4점 홈런을 골고루 때렸다. 역대 최다인 592만 8626명의 관중이 야구장을 찾았다. ●구대성·양준혁 등 전설들 떠나 유독 많은 슈퍼스타가 그라운드를 떠났다. 한화 구대성은 3일 대전 삼성전에서 마지막 공을 뿌렸다. 13시즌 동안 선발과 구원을 오가던 ‘대성불패’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푸른 피의 전설’ 양준혁도 그라운드를 떠났다. 마지막 타석에서 언제나처럼 1루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SK 김재현도 올 시즌 한국시리즈가 끝나면 현역에서 은퇴한다. 15시즌 동안 KIA(해태 시절 포함) 2루를 지켰던 김종국도, 같은 해 입단해 수년 동안 3할 톱타자로 활약한 한화 이영우도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39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던 LG 박종호는 26일 은퇴식을 치렀다.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 이상 그라운드를 호령하던 세대가 이제 떠난다. 그라운드는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교차하는 자리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피플 인 스포츠] 19년만에 그라운드 떠나는 SK 안경현

    [피플 인 스포츠] 19년만에 그라운드 떠나는 SK 안경현

    지난 7일 오전 10시 문학구장. ‘안샘’ 안경현(40·SK)이 더그아웃에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 굳은 결심을 한 듯 비장한 표정…. 김성근 SK 감독은 당시 투수들의 피칭을 지도하고 있었다. 안경현은 2군 로커룸에서 TV를 보며 다섯 시간을 기다렸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오후 3시. 입속에서 맴돌던 말이 겨우 튀어나왔다. “감독님, 야구를 그만두려 합니다. 한 것도 없이 나가서 죄송합니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 감독은 “생각 좀 해보자.”며 일단 반려했다. 안경현은 당시를 떠올리며 “그렇게 긴 시간은 처음이었다. 19년 야구인생 중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며 한숨을 내뱉었다. ●17년간 두산 프랜차이즈 스타로 안경현은 어릴 때부터 타고난 운동신경을 지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스케이트 선수였다가 4학년 때 신설된 야구부에 들어갔다. “축구시합에서도 제가 항상 골을 넣으니까 눈여겨보시던 야구부 감독님이 저에게 야구를 시키셨죠.” 외아들이라서 부모의 반대도 심했지만 그의 고집도 보통이 아니었다. 19년 야구 외길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두산팬들에게 그는 최고의 2루수로 기억된다. 대학 시절 유격수였던 그는 1999년 2루수로 전업하면서 프랜차이즈 스타 탄생을 알렸다. 전성기는 2001년. 그해 두산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최고의 해를 보냈다. 플레이오프 최우수선수(MVP), 2루수 골든 글러브 등 상을 휩쓸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두산은 2008년 이후 그에게 은퇴를 종용했다. “구단 측에서 코치 수업 등 얘기가 오고 갔죠. 야구를 더 하고 싶었어요. 그만두더라도 내가 결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죠.” 그는 결국 SK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후배들에게 길 터주자는 생각 굳혀 왜 하필 SK였을까. “SK가 왜 두산보다 나은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가서 직접 배워 보고 싶었죠.” 그는 SK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두산에 앞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 놀랄 만큼 뛰어났죠.” SK의 선수층은 두터웠다. 체력에서는 자신 있었지만, 2군에 머무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1군에 올라가도 예전처럼 감이 오지 않더라고요.” 악순환이었다. 마침내 안경현은 지난 13일 그간 정들었던 그라운드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은퇴 결심은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었다. 7월부터 은퇴를 생각하게 됐다. “솔직히 목표가 없었어요. 대타도 나보다 뛰어난 선수가 많은데, 1군에 올라간다고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죠.” 세월만 흐를 뿐이었다. 2군 경기에도 자연스레 자주 빠지게 됐다. 그를 대신해 어린 후배들이 뛰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깨달았다. “나 때문에 밀린 후배들에게 정말 미안했어요. 후배들은 1군에 올라가겠다는 목표가 확실했죠.” 한달 전부터 그는 재활군에 들어가 버렸다. 완전히 방망이를 놨다. ●야구인생 제2막은 이제 시작 그는 구단이 예우 차원에서 추진한 은퇴식까지 극구 사양했다. “SK에 와서 안타 14개, 홈런 2개 친 게 전부인데 무슨 은퇴식을 해요. 미안해서 빨리 나가려고 한 건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후배들에 대한 애정 어린 당부도 잊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때, 2군 생활할 때 포기하고 고향 갈까 했는데 하루를 참으니 나아지더라고요. 포기하려고 할 때 기회가 온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남은 인생 목표는 뭘까. “기회가 된다면 훌륭한 감독이 되는 게 목표예요. 아니면 유소년 야구를 제대로 키워 보고 싶은 꿈도 있어요.” 그의 야구인생 제2막은 이제 시작이다. 글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안경현은 누구 ▲출생 1970년 2월13일 강원 원주 ▲학력 중앙초-원주중-원주고-연세대 ▲체격 182㎝, 82㎏ ▲가족관계 부인 김윤정(41), 딸 다희(13)와 아들 준(12) ▲취미 영화감상 ▲특기 스케이트(초등학교 때 선수) ▲별명 안샘 ▲좌우명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수상경력 2001년 플레이오프 최우수선수(MVP), 2001·2003·2005년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등
  • [프로야구] 굿바이! 대성불패

    [프로야구] 굿바이! 대성불패

    또 한 명의 ‘위대한 투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 한화 구대성(41)이 3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삼성과의 홈경기에서 선발로 등판, 국내무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프로데뷔 18년 만이다. 그러나 선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 미국 무대를 모두 경험한 구대성은 이제 호주 프로야구 시드니 블루삭스에서 2년 동안 뛴다. 이날 한화 한대화 감독 등 선수단 전원은 구대성을 위해 노란색 독수리가 날갯짓하는 그림에 ‘대성불패(臺晟不敗)’라는 문구를 새긴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했다. 사실 은퇴 소식이 전해지고 구대성과 연락이 닿지 않는 등 구단과 불화설이 흘러 나오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동안의 섭섭함을 털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대한 은퇴식이었다. 구대성은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에게 모자를 벗고 답례하며 마운드에 올랐다. 2000년 10월12일 대구구장에서 벌어진 삼성과의 경기 뒤 10년 만의 선발 등판. 구대성은 삼성 1번타자 조동찬을 상대로 직구만 4개를 던졌다. 최고 구속은 시속 129㎞. 조동찬은 4구째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에 걸친 공을 퍼올렸고 중견수 뜬공으로 잡혔다. 그리고 구대성은 포수 신경현과 포옹한 뒤 팬들에게 인사하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화는 이날 삼성에 2-6으로 졌다. 잠실에서 열린 SK-두산전은 SK가 10-2로 이겼고, 김광현은 16승째를 올렸다. 광주에서 벌어진 롯데와 KIA의 4위 맞대결은 난타전 끝에 롯데의 10-6 승리로 끝났다. 한편 LG와 넥센의 목동 경기는 태풍 ‘곤파스’에 쓰러진 외야 그물 복구 작업 때문에 취소됐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아듀! 구대성

    아듀! 구대성

    ‘대성불패’ 구대성(41·한화)이 18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프로야구 한화는 15일 “베테랑 좌완 구대성이 올 시즌을 끝으로 선수 유니폼을 벗는다.”고 밝혔다. 한화는 다음 달 2일 대전 삼성전에서 구대성의 은퇴식을 마련할 계획이다. 등번호(15번)를 영구결번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대전고와 한양대를 거친 뒤 한화의 전신 빙그레에 입단한 구대성은 지난 18년 동안 한국 최고의 좌완 투수로 군림했다. 국내에서 뛴 13시즌 동안 통산 568경기 67승71패 18홀드 214세이브 평균자책점 2.85의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1996년에는 다승·평균자책점·승률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해 투수 3관왕에 올랐고,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활약한 1999년에는 한화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견인하며 MVP를 거머쥐는 등 프로야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야생마’ 이상훈과 함께 한·미·일 3개국 프로야구를 모두 경험한 구대성은 ‘일본 킬러’로도 이름을 날렸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3·4위전에서 만난 일본을 9이닝 완투승으로 누르며 한국의 첫 동메달 주역으로 활약했다. 2001년 일본프로야구 오릭스에 입단, 4년간 통산 24승34패 평균자책점 3.86으로 활약했다. 2005년에는 미프로야구 뉴욕 메츠에 입단해 33경기 동안 승패 없이 3.91의 평균자책점을 남겼다. 구대성은 “많은 사랑을 보내준 팬 여러분과 묵묵히 옆에서 나의 야구 인생을 함께해준 가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면서 “누구나 야구에 대한 더 큰 욕심이 있지만 아쉬움이 남는 상황에서 떠나는 것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에버랜드 우주관람차 28년만에 은퇴

    에버랜드 우주관람차 28년만에 은퇴

    국내의 대표적 놀이공원인 경기 용인 에버랜드의 상징물인 ‘우주관람차’가 28년간의 운행을 마치고 철거된다. 우주관람차가 가동을 시작한 것은 에버랜드 전신인 용인자연농원 시절인 1982년. 가동이 중단된 지난 3월13일까지 총 27년 10개월 동안 635만 5470회나 운행됐다. 이 기간에 놀이공원을 찾은 1억 5000만명의 관람객 중 2000만명이 탔을 정도로 우주관람차는 에버랜드의 명물이었다. 특히 10분 동안 독립적인 탑승 공간으로 운행하기 때문에 연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에버랜드는 오는 14일 오후 9시30분 이례적으로 은퇴식을 열기로 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이운재 태극마크 반납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주역인 ‘거미손’ 이운재(37·수원)가 태극마크를 반납한다. 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과 대한축구협회는 3일 명예롭게 은퇴를 결정한 이운재를 위해 오는 11일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릴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서 은퇴 경기를 치러주기로 했다. 지금까지 대표팀 경기를 하면서 은퇴식을 치르는 선수는 이운재가 처음이다. 이운재가 나이지리아 평가전에 나서면 A매치 132경기를 뛰게 된다. A매치 135경기를 기록한 홍명보(올림픽 대표팀 감독)에 이어 역대 두 번째 A매치 최다출전자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이운재는 “그동안 내가 보기에도 대표팀에 헌신해 왔다고 생각한다.”면서 “사람은 자신이 떠날 시기를 알아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라고 밝혔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람보 슈터’ 문경은도 떠난다

    ‘람보 슈터’ 문경은(39·SK)도 코트를 떠난다. 프로농구 SK는 13일 “선수 생활 연장과 은퇴의 기로에서 고민했던 문경은이 코칭스태프, 구단 사무국과 협의를 거쳐 은퇴를 결정, 30여년간 정들었던 코트를 떠나게 됐다.”고 발표했다. 문경은은 앞으로 SK의 전력 분석코치로 제2의 농구 인생을 펼치게 됐으며 2010~11시즌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치를 예정이다. 문경은은 연세대 재학 당시 최근 은퇴한 이상민, 우지원 등과 함께 대학팀으로는 사상 첫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했다. 문경은은 실업농구 삼성전자로 진로를 정한 뒤 프로농구 삼성, 신세기, 전자랜드를 거쳐 2006년 1월 SK 유니폼을 입었다. 국가대표 주전슈터로 활약한 문경은은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20여년 만에 아시아 정상에 오르는 데 큰 힘을 보탰다. 문경은은 1997~98시즌부터 프로 13시즌 동안 통산 610경기 출전, 9347점(평균 15.3점), 1254리바운드(평균 2.1개), 1351어시스트(평균 2.2개)를 기록했다. 특히 3점슛은 1669개(평균 2.7개)로 역대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문경은은 14일 오후 SK텔레콤 본사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한편 농구대잔치 세대들이 줄줄이 코트를 떠나는 가운데 ‘피터팬’ 김병철(37·오리온스)은 소속팀에서 1년 더 뛰기로 했다. 오리온스는 “올 시즌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린 김병철과 플레잉코치로 뛰는 것을 조건으로 1년간 재계약했다.”고 밝혔다. 연봉은 구단이 알아서 결정하기로 했다. 정통 슈팅가드인 김병철은 프로농구 원년인 1997년부터 지금까지 같은 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선수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우지원 은퇴 발표

    ‘황태자’ 우지원(37·모비스)도 코트를 떠난다. 모비스는 3일 우지원의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우지원은 “선수생활 연장과 은퇴의 기로에서 고민을 많이 했지만 올 시즌 주장으로서 팀을 통합챔피언에 올려놓는 등 박수를 받으며 떠날 수 있는 좋은 시기라고 판단해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우지원은 선수생활은 그만두지만, 모비스에 계속 남아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하면서 지도자 수업을 받게 된다. 우지원은 “유학도 생각해 봤지만 유재학 감독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는 게 더 가치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연세대 재학 시절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며 농구대잔치 스타로 군림했던 우지원은 프로에 입문한 뒤에도 높은 인기를 누렸다. 프로원년인 1997년 대우에서 프로생활을 시작, 군복무 시기인 1998~99시즌을 제외하고 13시즌 동안 573경기에 출전, 경기당 평균 12.8점, 2.5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모비스는 우지원의 공로를 인정해 그의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시키기로 했으며, 2010~11시즌 개막전에 앞서 은퇴식과 영구결번식을 갖기로 했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훈련중 숨진 이승엽 ‘절친’ 키무라 타쿠야는?

    훈련중 숨진 이승엽 ‘절친’ 키무라 타쿠야는?

    히로시마와의 원정경기(2일)에 앞서 훈련도중 그라운드에 쓰러진 키무라 타쿠야(요미우리 코치)가 7일 오전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를 끝으로 18년의 현역생활을 마감한 키무라는 올해부터 요미우리 1군 수비·주루코치로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하던 중이었다.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감독을 비롯해 과거 한팀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인연을 맺었던 마티 브라운(현 라쿠텐 감독) 등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며 고인을 애도했다. 현역시절 키무라는 어느 한가지 부문에서 특출한 재능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지만, 투수를 제외하고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수 있는 진정한 유틸리티 플레이어중 한명이었다. 인품 또한 뛰어나 그를 믿고 따르는 후배들도 많았고 야구에 대한 열정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만큼 투지가 대단한 선수였다. 2006년 6월 야마다 신스케와 맞트레이드 되어 요미우리로 이적한 키무라는 그해 요미우리로 건너온 이승엽과도 절친해 국내팬들에게도 꽤 친숙한 인물이다. 흔히 ‘타격왕은 세단을 타고, 홈런타자는 리무진을 탄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럼 키무라는 어떤 차를 타야 어울리는 선수였을까? 그가 걸어온 야구인생을 놓고 보면 값비싼 렌트카가 가장 어울리는듯 싶다. 키무라는 언제 어느때라도 필요하면 사용할수 있는 렌트카처럼 감독이라면 그를 좋아하지 않을수 없게 만드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로 유명했다. 미야자키가 고향인 키무라의 프로 첫 정착지는 니혼햄 파이터스다. 당시 포수로 입단했던 그는 그러나 프로입단(1992)해부터 외야수를 겸업했다. 수비에 비해 타격이 약했던 그로써는 주전은 언감생심이었고 가끔 대수비나 대주자로 경기에 나서는게 전부였다. 1997년 히로시마 토요 카프로 이적한 키무라는 그해 팀의 주전 유격수였던 노무라 켄지로(현 히로시마 감독)의 부상으로 유격수를 시작하면서부터 내야수와 인연을 시작한다. 이당시 그는 주로 2루와 외야를 겸업하는데 수비력에 비해 떨어지는 타격을 만회하고자 스위치 타자로의 전환을 시도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프로데뷔 후 첫 규정타석을 채워 그해 타율 .288와 리그 최다 2루타(34개)까지 작성하는 맹활약을 선보이며 그동안 수비에 비해 박한 평가를 들었던 타격에서도 진일보한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도 참가해 일본이 동메달을 획득하는데 일조한 그는 그러나 2006년 시즌도중 히로시마를 떠나게 된다. 신임 마티 브라운 감독의 성향이 젊은 선수들을 선호, 팀 체질개선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키무라의 이적은 전력과 선수들의 네임밸류에 있어서 비교할수 없을만큼의 강했던 요미우리라는 점을 감안할때 사실상 주전선수로서의 종말을 고하던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세간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요미우리에서 키무라는 2루와 외야를 번갈아 보면서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쳤다. 2007년 2루수 주전감으로 점찍으며 영입한 외국인 타자 루이스 곤잘레스(약물문제로 퇴출)가 부상으로 시즌초반 팀 전력에서 이탈하자 곧바로 2루수로 투입돼(113경기) 그해 요미우리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008년에는 자신의 커리어 최고 타율(.293)을 기록하며 노장 투혼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수생활의 마지막해 였던 지난해 키무라는 역시 주전 2루수감으로 데리고 온 외국인 타자 애드가르도 알폰소의 부진을 틈타 2루수로 출장하며 한때 리그 타율 4위까지 올라올정도로 불같은 방망이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타율이 떨어지면서 와키야 료타에게 2루자리를 양보하는 경기가 많아졌고 비록 팀이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데 있어 큰 보탬이 되지는 못했지만 떠날때를 알았던 키무라는 작년 11월 23일 은퇴식을 거행하며 정들었던 현역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키무라는 투수도 타석에 들어서는 센트럴리그 특성상 투수교체에 따른 대타나, 대수비 그리고 대주자로 경기에 나서는 일도 많았다. 언젠가 하라 감독은 “키무라의 플레이는 젊은 선수들의 모범이 될뿐만 아니라 그의 인품을 보고 있으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라고 말했을 정도다. 키무라가 은퇴후 공백기 없이 곧바로 팀의 1군 수비 주루코치를 맡을수 있었던 것도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왔는지를 엿볼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자택이 히로시마에 있는 키무라는 10일 오전 11시에 발인식을할 예정이다. 요미우리 키요타케 히데토시 구단 대표는 요미우리가 이달 23일 히로시마 홈구장인 마쯔다 줌줌 스타디움에서의 시합일정이 있는것을 감안, 이때 3연전중 한경기를 추모경기로 열겠다고 발표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야구통신원 윤석구 http://hitting.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US오픈 4강 오를 꿈나무 키울래요”

    “너 같은 선수를 키워서 정말 행복했다. 고맙다.” 1일 올림픽코트에서 주원홍(53) 삼성증권 명예감독이 울먹이며 말했다. 윤용일·김일순·조윤정 등 선후배들은 줄지어 꽃과 감사패를 전달했다. 쌀쌀한 날씨에도 자리를 지킨 백여명의 관중들은 ‘대들보’의 은퇴에 서운한 박수를 보냈다. 두 어깨에 한국테니스를 짊어지고 10여년을 고독하게 싸워온 이형택(33·삼성증권)이 이날 공식은퇴식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접었다. ● US오픈 16강 두번 진출 청춘을 다 바친 코트를 떠나는 맘이 얼마나 아쉬웠을까. 그동안의 세월을 곱씹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이형택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감사하는 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경기 스트레스 안 받고 힘들게 몸관리를 안해도 돼 시원하지만, 더이상 선수로 코트에 설 수 없다는 게 섭섭하다.”면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지도자 이형택’에게 앞으로도 많은 성원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이형택은 한국 테니스에 한 획을 그은 선수. 메이저대회인 US오픈 16강에 두 번(2000·2007년)이나 진출했고, 미프로테니스(ATP) 투어 36위까지 올랐다. 2003년 호주 시드니에서 벌어진 아디다스컵 결승에서 당시 세계 4위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스페인)를 꺾고 한국인 최초로 ATP투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고향인 강원 횡성에서 어머니 최춘자씨와 함께 시내 카퍼레이드를 할 정도로 대단한 성과였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로 병역혜택을 받았던 이형택은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로 후배들에게 똑같이 보답했다. 테니스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에 한국대표로 출전, 51승(단식41승·복식10승)23패를 거두며 월드그룹 진출을 이끈 것도 그의 몫. ● 춘천에 ‘이형택아카데미’ 열어 이룬 것이 많기에 은퇴가 아쉬울 법도 하지만 그는 강원 춘천에 문을 연 ‘이형택아카데미’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테니스에 입문, 그동안 숱한 스승들을 만나며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구체화시켰다. 피트 샘프라스, 안드레 애거시,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직접 부딪히며 느낀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하다. 이형택은 “경기 당일 기상시간부터 식사, 몸풀기 방법, 상대와의 기싸움까지 사소한 것들도 챙겨주고 싶다. 진짜 ‘프로’를 만들고 싶다.”고 설명했다. 코트에서 말이 안 통해 마음껏 어필하지 못했던 탓에 아카데미엔 영어 전담교사까지 둘 예정이다. 신뢰와 소통을 바탕으로 첫 발을 내딛는 ‘지도자 이형택’의 꿈은 ‘이형택아카데미를 졸업한 꿈나무가 US오픈 4강에 오르는 것’이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이형택, 코트 아듀!

    한국 테니스를 말할 때 이형택(33·삼성증권)을 빼놓을 수는 없다. 메이저대회인 US오픈에서 두 번이나 16강에 올랐고, 윔블던 3회전에도 진출했다. 2007년엔 한국테니스 사상 최고랭킹(36위)을 꿰찼다. ‘테니스 변방’ 한국이 데이비스컵 월드그룹에 올랐던 것도 태극마크를 달고 후배들을 이끌며 51승(단식41승·복식10승) 23패를 거둔 ‘맏형’ 이형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지난 10여년간 한국 테니스계의 대들보로 군림해 온 이형택이 마침내 고별무대를 갖는다. 2000년 첫 대회부터 9년 동안 결석없이 참가, 두 번(2002년·2007년)을 제외하고 모두 우승컵을 들어올려 ‘이형택배’로 불리는 남자프로테니스(ATP) 삼성증권배 국제남자챌린저대회가 그 무대. 새달 1일 공식 은퇴식도 마련됐다. 디펜딩챔피언 이형택은 “삼성증권배는 나에게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준 의미 있는 대회”라면서 “이 대회에서 은퇴식을 하는 자체가 영광이다. 너무 많은 눈물을 보이지 않을지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대회 6번 시드를 받은 이형택은 27일 서울 올림픽테니스코트 센터코트에서 열린 대회 1회전에서 14살 어린 후배 조숭재(775위·명지대)와의 경기 도중 부상으로 기권했다. 1세트를 4-6으로 졌고, 2세트 첫 서브게임을 브레이크 당한 뒤 백기를 들었다. 지난주 전국체전 때 무리한 탓이었다. 이형택은 3월을 마지막으로 ATP 투어에 나서지 않고 춘천에 문을 연 ‘이형택테니스아카데미’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개인연습을 못했던 것은 당연했던 터. 하지만 이형택 특유의 긴 톱스핀 포핸드는 여전했고 시원한 백핸드는 예리하게 코트 구석을 찔렀다. 문제는 허벅지와 허리 통증. 김선용(829위·삼성증권)과 나가려던 복식경기도 출전을 취소했고, 마지막으로 나서려던 벼룩시장배(31일~11월8일·강원도 춘천)에서도 단식참가는 어려울 전망.이형택은 “기권하게 돼 아쉽지만 후배가 좋은 성적을 냈으면 좋겠다.”고 밝게 웃어 보였다. 이어 “은퇴한다고 생각하니 서운하기도 하지만 지도자로의 새 출발이 있어 설렌다. 그동안 과분한 사랑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조숭재는 김선용을 누르고 올라온 마린코 마토세비치(174위·호주)와 8강행을 다툰다.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전국체전 열전 7일 돌입

    제90회 전국체육대회가 20일 대전에서 개막, 7일간 열전을 벌인다.전국 16개 시·도, 2만 5000여 선수가 41개 정식 종목과 3개 시범 종목에 출전해 고향의 명예를 걸고 메달 레이스를 펼친다. 특히 역도의 장미란 등 각 종목 스타플레이어들이 총출동, 수준 높은 경기력을 선보인다. 경기도 대표 장미란은 대회 첫날인 20일 여자 역도 일반부 최중량급에 출전해 금메달 사냥에 나선다. 세계 최강 여자양궁에서는 고교생 ‘신궁’ 곽예지(대전체고)가 지난달 말 양궁월드컵 리커브 우승의 여세를 몰아 베이징올림픽 메달리스트 선배들과 금빛 대결을 벌인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도 고향인 충남 대표로 출전해 은퇴 레이스를 펼친다. 천안 태생인 이봉주는 21일 통산 41번째 완주에 도전한다. 레이스 뒤 마라톤 영웅을 위한 은퇴식도 마련된다. 한국 수영의 간판 박태환은 유럽 전지훈련으로 불참한다. 2002년 이후 1위를 독주하는 경기도를 어느 시·도가 넘어설지도 관심사. 한편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채화된 성화는 20일 오후 6시 개막식 장소인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화려한 축하행사와 함께 불을 밝힐 예정이다.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LG 박종훈사단 새판짜기 박차

    박종훈 감독이 지휘봉을 쥔 LG가 새판짜기에 박차를 가했다.프로야구 LG는 30일 김영직 2군 감독을 1군 수석코치로 임명하고, 윤학길 히어로즈 2군 감독을 투수코치로 영입하기로 했다. 서용빈 육성군 코치는 타격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또 구단의 살림을 담당하던 염경엽 운영팀장은 수비코치로 임명했다. LG는 김용수 전 투수코치에게 스카우트 코치를 제의했다.이로써 지난 27일 박종훈 감독과 김기태 2군 감독을 차례로 영입한 LG는 코칭스태프 인선 작업을 완료했다. 박종훈 감독은 김영직 수석코치와 서용빈(타격), 유지현(작전·주루), 송구홍(1루), 서효인(배터리), 성영재(불펜) 등 LG 출신 6명을 1군 코치진으로 임명해 LG 색깔을 뚜렷이 드러냈다. 2군에서는 김기태 감독(전 요미우리 코치)만 외부에서 영입했을 뿐, 기존 코치들이 그대로 유임됐다.이날 은퇴를 선언하고 코치진에 합류한 이종열 신임 코치는 1991년 LG에 입단한 뒤 19년 동안 한 팀에서 활약해온 프랜차이즈 스타다. 통산성적은 타율 .247에 1175안타·448타점으로 내야수비의 주축을 맡아왔다. LG는 그동안 이종열의 활약과 공로를 인정해 2군 육성군 코치로 임명했다. 이종열 코치의 선수 은퇴식은 다음 시즌초에 진행할 예정이다.이종열은 “19년 동안 LG선수로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 행복했다. 선수 생활을 접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영원히 LG맨으로 남고 싶어 결심했다.”고 소감을 말했다.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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