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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324)-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24)-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나으리.” 두향은 그러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으리께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나으리를 모신 몸으로 더 이상 기적에 올라 있을 수는 없사오니 일부종신할 수 있도록 면천하여 주소서.” 기생에 있어 면천(免賤)이란 기적에서 이름을 빼어 양민을 만들어 주는 일을 뜻하는 것이다. 그 일은 어렵지 않은 것이었으나 문제는 자신이 떠난 뒤 홀로 남아 있을 두향의 처지였다. 때는 9월. 반쯤 열린 창밖으로 만월의 달빛이 은장도를 들이댄 듯 눈부시게 흘러 들어오고 있었으나 술잔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은 정작 말이 없었다. 가타부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퇴계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하였다. “오래간만에 네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싶구나.” 두향은 묘비에 새겨있듯 거문고에 능한 명인이었다. 거문고는 원래 소리가 깊고 장중하여 예로부터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일컬어졌는데, 퇴계 또한 율객(律客)이었으므로 거문고를 연주하는 두향이나 이를 감상하는 퇴계가 서로 호흡이 맞았다. 두향은 거문고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는 슬대를 잡아 힘차게 현을 내치면서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윽고 거문고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즐겁도다. 산 속에 숨어 사는 삶은 큰 사람의 너그러운 모습일러라. 홀로 잠자고 홀로 말하니 그 깊은 뜻 길이 잊지 말거라.” 그 노래는 평소 이퇴계가 좋아하던 노래였다. 원래 공자가 편찬한 ‘시경(詩經)’속에 나오는 ‘고반(考槃)’이란 시였다.‘시경’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으로 ‘공자세가’에서는 ‘옛날에는 시 3000편이 있었는데, 공자 때에 이르러 중복되는 것을 빼어내고 합당한 것만을 취하여 305편의 시경을 편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특히 시는 본래 노래의 가사로서 무엇보다도 민심을 솔직하게 반영하여 가장 올바른 정치의 득실을 알 수 있게 하고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와 귀신까지도 감동시킬 수가 있어 그 효용이 심히 막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이런 말을 했을 정도였다. “그대들은 왜 시경을 공부하지 않는가. 시는 사람의 감흥을 일으켜 주고 사물을 올바로 보게 하여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한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게 한다. 또한 새나 짐승, 풀, 나무 등의 이름들도 많이 알게 한다.” 그중에서도 ‘고반’이란 시는 산속에 은둔 생활하는 군자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가로서 평소에 탄금대에서 퇴계가 즐겨 듣던 노래였던 것이다. 두향은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계속 불러나갔다. “즐겁도다. 언덕에 숨어 사는 삶은/큰사람의 한가로운 마음일러라. 홀로 잠자고 홀로 노래하니/그 기쁨 이에서 지나침이 없으리. 즐겁도다. 물가에 숨어 사는 삶은/큰사람의 유연한 모습일러라. 홀로 잠자고 홀로 밤을 새니/그 즐거움 남에게 알려 무엇하리.” 철저하게 산과 언덕, 그리고 물가에 숨어 사는 군자의 은둔 생활을 찬미하고 있는 이 노래는 단양에 있을 무렵 앞으로의 마음을 다짐하는 이퇴계의 애창곡이기도 했던 것이다.
  • 빌게이츠 ‘Think Week’

    세계 최대 갑부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이 1년에 두차례씩, 일주일간 은둔한다. 이른바 ‘생각주간(Think Week)’이다.MS의 미래 경영전략을 짜고 새로운 사업구상을 하기 위해서다. 가족이나 측근의 방문을 거절하고 식사를 챙겨주는 관리인 1명의 출입만 허용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9일 게이츠 회장의 ‘아이디어 산실’인 별장의 위치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난달 그와 함께 지낸 은둔생활의 하루를 공개했다. 은둔지는 미 서북부 호숫가의 2층짜리 별장으로 전해졌다.1980년대 할머니 집의 조용한 분위기에서 MS 전략을 짠 뒤 연례행사로 이뤄졌다. 보완성이 강화된 소프트웨어의 개발이나 온라인 비디오 게임의 진출도 ‘싱크 위크’에서 비롯됐다. 그는 아침을 생략하고 하루 두끼만 먹는다. 메뉴는 치즈 샌드위치나 조개 수프 등으로 간단하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대부분 2층 침실에서 보낸다. 이곳에서 그는 전 세계 MS 직원들이 작성한 업계 동향이나 사업 보고서를 읽고 자신의 생각을 관계자들에게 e메일로 보낸다. 사흘간 56편의 보고서를 읽었고 18시간 독서 삼매경에 빠지기도 한다. 이번에 읽을 목록에 오른 보고서 300편 가운데 31편이 컴퓨터 바이러스 차단에 관한 내용들이다. 그는 기존의 기록인 112편을 깰 수 있을지 모르나 이번에 100편은 읽을 것이라고 밝혔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토요일 아침에] 풍성한 삶, 행복한 노년기/하용조 온누리교회 담임목사

    나이를 나타내는 여러 방법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같은 연령이라도 나이를 나타내는 방법에 따라 연령이 다 다르다는 사실이다. 보편적·일반적으로 사용되어지는 나이를 ‘역연령, 생활연령(CA: Chronological Age)’이라고 한다. 달력상의 시간 경과에 따른 나이를 의미하는 ‘달력 나이(Calendar Age)’이다. 전통적인 우리의 나이 계산법과는 달리 태어나서 만 1년이 지나야 한 살이라 셈하는 나이이다. 흔히 만 나이라고 표현하는 나이로 학교 입학, 군 입대, 투표권 행사, 결혼 연령, 은퇴의 법적 연령을 말한다. ‘생물학적 연령(BA: Biological Age)’이 있다. 신체적 활력의 정도를 따지는 나이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신체의 생물학적 퇴화 과정을 초래하는 유기체적 삶을 나타내는 연령이다. 보통 생리적이고 신체적인 기능에 따라 ‘육체 연령, 신체 연령’이라고도 표현한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60대가 전혀 운동을 하지 않는 40대보다 생물학적 연령이 더 젊을 수 있다. ‘심리적 연령(PA: Psychological Age)’이 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나타나는 정신 기능이나 정신적 구조의 변화에 따른 나이를 말한다. 생활연령이 같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환경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며 예기치 않은 생활사건이 주는 스트레스에 얼마나 잘 대처하는가에 의해 측정이 된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형제의 집에 얹혀살면서 다른 사람과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50대 중년 남성은 독립적이고 자신의 인생을 잘 통제하는 20대 젊은이보다 심리적 연령이 더 어리다. 심리적 연령은 ‘건전한 성격’,‘심리적 성숙도’,‘건강한 정신 발달’의 기준이 된다. 이와 유사한 개념이 ‘정신 연령(MA: Mental Age)’이다. ‘사회적 연령(SA: Sociological Age)’이 있다. 사회의 규범과 기대에 따라 개인의 사회적인 지위와 역할과 관련된 나이이다. 개인이 속한 사회에서 자신의 연령에 적합한 역할을 얼마나 훌륭하게 수행해내느냐가 기준이 된다.40대 중반에 첫아기를 가진 여성은 동년배에 비해 늦게 부모의 역할을 하게 되므로 이 여성의 사회적 연령은 매우 젊다고 할 수 있다. ‘기능적 연령(FA: Functional Age)’이 있다. 신체적, 심리적 기능의 정도를 따지는 연령이다. 개개인이 어느 특정한 직무를 수행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는 나이이다. 축구선수의 활동 연령, 운전면허 취득 가능 연령, 예술가의 활동 연령 등을 말한다. 출생 후 1년이 지나면 첫돌이 되고 70년이 지나면 칠순을 맞는다. 생활연령이 ‘70세’가 되면서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기능적 연령이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단정한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어딘가 의지할 곳을 찾는다. 직업, 친구, 배우자, 자녀, 돈, 건강, 마침내는 자존감과 희망마저 멀리 떠나고 이제 남은 일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힘겹고 삭막하기만 하다. 그래서 은둔을 생각하고 비탄에 빠지고 자살을 결행한다. 이에 비해 같은 생활연령 ‘70세’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풍성하게 보내는 어르신들이 많이 계신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60대 후반에 신학을 공부하여 선교사가 되셨다.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제2의 인생을 아름답게 시작하고 계신다. 어떤 분은 공직에서 정년퇴직하고 자기의 전공을 살려 자원봉사로 아름다운 노년을 꽃 피우고 있다. 이런 분들은 30대,40대 젊은이 못잖은 활력으로 일상생활에 윤기가 흐른다. 이런 분들의 ‘자각 연령(SAA: Self-Aware Age)’은 30대,40대이다. 나이의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자각 연령’,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나이야말로 노년기를 행복하게 보내는 척도가 된다. ‘아직은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어!’ 생활연령을 뛰어 넘어 이런 생각으로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들(?)로 가득 찬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풍성한 삶, 행복한 노년기를 보내고 싶다면 자신에게, 자식에게, 이웃에게 큰소리로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모세는 나이 80에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부름 받았어!” “뭐, 칠순잔치? 웃기지 마. 나는 4학년 2반이야, 아니 영원한 3학년 5반이야!” 하용조 온누리교회 담임목사
  • 박세일 “黨밖서 할일 더 많다”

    박세일 “黨밖서 할일 더 많다”

    지난 4일 국회에 의원직 사퇴서를 낸 뒤 칩거했던 한나라당 박세일 의원이 14일 박근혜 대표와 김원기 국회의장을 잇따라 만난다. 경기 안산 근처의 산사에서 열흘 가까이 은둔하면서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주목된다. 박 의원은 그동안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은둔하면서 서울대 교수 등 지인들과 의견을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대로 금배지를 떼어낼 것인지, 동료들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의원직을 유지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후문이다. 그와 가까운 지인들은 주로 전자를, 그의 동료 의원들은 후자를 주문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박 의원은 주로 “아무래도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정당 안에서보다는 정당 밖에서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가 이미 의원직 사퇴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관측이 나돈다. 한편 강재섭 원내대표는 13일 기자들과 만나 “박세일 의원의 자택으로라도 무조건 찾아가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강 원내대표는 개인적인 친분을 동원해서라도 의원직 사퇴를 만류할 생각이다. 강 원내대표는 김영삼 정부 시절에 총재 비서실장을 지냈고, 당시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비서관이자 서울대 법대 1년 선배인 박 의원과 보조를 맞췄다. 이와 함께 11일째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는 전재희 의원은 14일 수도지키기 범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면 단식을 중단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병원으로 가 건강 상태를 확인한 뒤 15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리는 대규모 집회에 참석할지 여부도 결정할 계획이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儒林(30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30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전해 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두향은 기생 신세를 면하게 되자 이듬해 봄 강선대가 눈 아래 굽어보이는 적성산 기슭에 조그마한 초당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퇴계가 70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두향은 이곳 적성산 초당에서 22년간을 수절하였다. 두향이가 이퇴계를 만난 것이 몇 살 때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이퇴계가 숨을 거뒀을 때에는 아마도 초로의 아낙네였을 것이다. 22년 동안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재회한 적이 없고 서신도 교환한 적은 없다. 다만 이퇴계가 말년에 지은 시 한 수가 두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연애시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 보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 거문고 대해 앉아 줄 끊겼다 탄식마라.(黃券中間對聖賢 虛明一室坐超然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이 시의 처음 두 행은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이퇴계의 근황을 알리는 것이지만 뒤의 두 행은 비록 만나지는 못할지언정 함께 매화를 보고 거문고를 타면서 지냈던 아련한 추억을 반추해 보는 사랑 노래가 아닐 것인가. 나는 술을 받쳐 올리고 봉분 앞에 무릎을 꿇고 배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 술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원래 흠향(歆饗)한 술은 음복(飮福)하는 법. 나는 빈 컵에 다시 술을 따라 나를 이곳까지 태워다 준 고마운 선원에게 잔을 내밀며 말하였다. “한잔 드시겠습니까.” 곁에 서서 나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선뜻 술잔을 받았다. “5월 초에 오셨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요.” 사내는 술을 마시며 대답하였다. “해마다 5월 초면 두향의 무덤 앞에서 추모제가 올려집니다. 그때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지요. 축문도 읽고 분향도 올리지요.” 무덤 앞까지 밀려든 강물은 소용돌이를 치면서 굽이치고 있었다. 선조 3년 경오년(1570년) 섣달 초여드렛날 밤 유시(酉時). 이퇴계는 마침내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전해 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두향은 퇴계가 마침내 숨을 거뒀다는 비보를 전해 듣자 목욕재계하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소복까지 준비하고 단신으로 안동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단양에서 안동까지 200리 험난한 태산준령을 여자의 몸으로 나흘 만에 무사히 안동고을을 거쳐 도산서당이 있는 토계리까지 도착한 두향은 집집마다 걸려진 만장(輓章)을 보고 소복으로 갈아입고 유해가 안치된 한서암(寒棲庵)을 보며 밤을 새워 망곡을 하였다고 한다. 퇴계가 서거하자 선조대왕은 특별히 이퇴계에게 영의정 벼슬을 추증하였다. 그런 관계로 장례는 의정예법(議政禮法)에 따라 이듬해 3월에야 거행한다는 말을 듣고 두향은 그대로 단양으로 돌아와 초당에 궤연(筵)을 꾸미고 신주를 모셔 놓은 후에 아침저녁 상식을 올리며 곡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날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긴다. “내가 죽으면 그 시신을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선대 위에 묻어 주옵소서.”
  • 儒林(299)-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9)-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그러나 이러한 일화로 인하여 이산해의 가문에서는 아버지 이지번과 작은아버지 이지함이 은둔하였던 단양의 구담을 대대로 기리고 곁들여 두향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던 것이다. 스승 이퇴계를 존경하여 애인이었던 두향의 제사까지 함께 지내준 이산해의 사제지도(師弟之道). 그러한 사제지도가 없었더라면 오래 전에 두향의 무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새겨져 있다. 나는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조선 숙종 때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호조정랑, 의금부부사, 단양군수였던 수촌(水村) 임방(任傍:1640~1724)은 ‘두향묘시(杜香墓詩)’를 남긴다.…” 묘석에 나오는 임방은 송시열의 제자로 의금부도사를 거쳐 대사성·호조판서에 이르렀던 명신인데, 일찍이 단양의 군수로 재직하다가 두향의 무덤 앞에서 추모시를 한수 읊는다. 그 추모시가 임방의 문집 수촌집(水村集)에 실려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이라네. 강 언덕 강선대 그 아래 있네.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一點孤墳是杜秋 降仙臺下楚江頭 芳魂償得風流價 絶勝眞娘葬虎丘)” 두향에 대해서 노래한 시 중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 시에서는 두향을 ‘두추(杜秋)’라고 부르고 있다. 두추는 당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최고의 명기. 따라서 임방은 두향을 감히 두추에 비유하여 시를 읊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임방은 두향이 묻힌 이곳을 ‘호구(虎丘)’라고 명명하고 있다. 호구는 오늘날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에 있는 경승지를 말함이다. 하이융산(海湧山)이라고도 하는데,‘오월춘추(吳越春秋)’에 의하면 오나라의 왕 부차가 아버지 합려를 장사지낸 지 3일 후에 백호(白虎)가 나타나 그 무덤을 지켰다는 고사에서 연유하여 호구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언덕 위에는 높이 47.5m의 8각 7층 벽돌건물인 운암사탑(雲岩寺塔)이 있고, 수목이 무성하며 기암괴석이 풍부한 절경이다. 서남쪽 교외 19㎞ 지점에 있는 영암산(靈岩山)에는 월왕 구천이 감금되었다는 굴이 있고, 구천이 복수하기 위해서 부차에게 진상하였던 서시(西施)를 위해 지었다는 별궁터가 남아 있다. 서시는 중국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절세미인. 눈길 한번 돌아보면 성이 기울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울 만큼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는데, 서시가 몸이 아파 낯을 찌푸리면 나라의 모든 여인들이 이를 흉내내어 낯을 찌푸렸다는 이 전설의 여인은 바로 이 궁터의 금대에서 거문고를 켰던 것이다. 그러나 호구가 유명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에 육조시대(六朝時代) 때에 이르러 나라의 많은 명기들은 자신이 죽으면 동양의 클레오파트라인 서시처럼 자신을 바로 이 호구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구는 유명한 미인들이나 기생들이 사후에 묻히는 북망산(北邙山)으로 유명했던 곳. 북망산이 낙양(洛陽) 북쪽에 있는 작은 산으로 제왕, 귀인, 명사들의 무덤이 많은 곳이라면 호구는 이처럼 명기들의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임방은 이곳을 빗대어 두향이 묻힌 강선대의 무덤가를 호구라고 명명하고 있음인 것이다.
  • 儒林(298)-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8)-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두향의 무덤 앞에 서 있는 표석에서도 두향과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향이 단양 팔경을 지정하기 위해서 청풍군수인 토정 이지번 선생에게 청풍경계인 옥순봉을 양보받도록 이황에게 청원하여 단양팔경을 지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표석에 새겨진 문장을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 문장은 분명한 오기이다.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의 호는 성암(省菴)이지 토정(土亭)이 아니다. 토정은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냄으로써 토정이란 호가 붙었던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이지함(李之)을 가리킨다. 이지함은 바로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은 사람으로 역학, 수학, 천문, 지리에도 해박하였던 기인이었으며, 이산해의 작은아버지였다. 이지함은 맏형인 이지번에게 글을 배웠고, 이지번역시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지번은 고려조의 대학자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벼슬을 버리고 단양에 내려와 구담에 집을 짓고 한세월을 보냈던 은사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이지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조 8년(1575 12월1일). 전 내자시정(內資侍正) 이지번이 사망하였다. 이지번은 목은 이색의 후예인데, 어릴 때부터 침착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들자 다리를 찔러 피를 받아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상중에 몹시 슬퍼하였고 한결같이 가례를 따라 행하였다.…(중략)…성균관의 추천으로 재랑이 되었으나 사은하고는 출사하지 않다가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사평이 되었다. 아들 이산해는 어릴 적에 신동으로 일컬어졌는데, 윤원형(尹元衡:당시 최고의 세도가)이 자기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으려하자 지번은 즉시 벼슬을 버리고 아우 지함과 함께 단양의 구담에 내려가 은둔하여 살면서 열심히 학문을 닦고 소박한 생활을 하여 만족스럽게 스스로를 즐기니, 사람들이 그를 구선(龜仙)이라 불렀다. 이황이 그와 벗하여 도학을 권면하였다. 금상초년에 청풍군수를 제수하여 옛날 은거하던 곳에서 가깝게 살도록 하였는데, 이황이 강요하여 취임한 뒤 애쓰지 않고도 깨끗하게 잘 다스렸다. 떠나가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으며, 후인들은 모두 그의 풍절을 숭상하였다.” ‘왕조실록’에 실려진 내용대로 은사였던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을 청풍군수로 제수케 추천했던 사람이 바로 이퇴계. 그러므로 이지번과 그의 아우 이지함은 이퇴계와 두향의 사랑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풍수에 밝은 토정 이지함은 형에게 구담봉 부근에 명당이 많은 것을 말하여 가족의 무덤을 다섯 개나 이장함으로써 당대가 지나기도 전에 아들이 영의정에 오르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 만큼 이곳일대를 사랑하였는데, 이지번은 항상 푸른 소를 타고 강가를 오르내리며, 구담과 오로봉 사이에 칡넝쿨로 큰 줄을 만들어 가로지르고 학모양의 탈것을 만들어 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다니니,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신선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도 전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지번 이름 앞에 동생 이지함의 호인 ‘토정’이 명기된 것은 분명한 오기인 것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 모범”

    “경북 안동지역은 독립운동의 출발지이며, 특히 안동사회의 독립운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에 옮긴 전형적인 모범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만열 위원장은 28일 안동시민회관에서 열린 제86주년 3·1절 및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안동지역의 독립운동을 이같이 평가했다. 이 위원장은 기조 발제를 통해 “독립운동은 의병운동을 포함해 1894년부터 1945년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전개됐으며, 그 첫머리를 장식한 것이 1894년 갑오의병”이라며 “갑오의병이 일어난 곳이 바로 안동이므로 이 지역이 한국독립운동의 출발지이자 발상지”라고 피력했다. 그는 “안동은 전국 시·군(평균 30명) 중 가장 많은 260여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고, 순국 자결인사도 60여명 가운데 10명이 안동인”이라며 “안동인은 해방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해 한국독립운동사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의병항쟁 이후 많은 유림들이 은둔생활을 했지만 안동 유림들은 자기반성과 자각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는 길을 선택했다.”며 “이러한 ‘혁신 유림’은 국내외에서 진보적이고 통일지향적인 활동을 전개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주제발표에 나선 서강대 최기영 교수는 “안동의 독립운동은 강한 선비정신에 뿌리를 둔 지역의 문화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고 강조했고, 국가보훈처 김용달 연구관은 “안동독립운동은 주체와 양상, 이념 등 모든 면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축소판이자 변화·발전 양상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고구려연구재단 장세윤 연구원은 “안동출신 인사들의 해외 집단망명과 독립운동 기지 개척은 한국독립운동사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면서 “안동지역 독립운동사는 한국근대사뿐만 아니라 세계 피압박 약소민족 독립운동의 모범이 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한편 안동지역에서는 학술세미나를 포함해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기념음악회, 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상황 보고회 등 다채로운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다. 안동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儒林(294)-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간신히 암벽위로 올라섰지만 무덤으로 가는 길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소나무가지를 헤치고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송림을 지나 무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비교적 양지바른 곳이라 무덤주위는 따뜻한 양광이 내리쬐고 있었다. 무덤 왼쪽에 묘비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검은 화강암으로 잘 깎아 만든 묘비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杜香之墓” 그 묘비를 보자 나는 마침내 두향의 무덤에 도착하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덤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봉분과 곡장(曲墻) 역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고, 곱게 입힌 떼도 한겨울을 이겨내고 누렇게 변색한 채 봄볕에 한가롭게 졸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두향의 무덤을 돌보고 있음일까. 미천한 기생의 몸으로 자식도 없이 연고도 없이 이곳에 묻힌 두향의 묘가 사후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처럼 연지곤지 찍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 단장되고 있음은. 봉분 앞에는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놓는 돌상까지 차려져 있었다. 나는 봉분 앞에 서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탁 트인 호수 저편으로 한눈에 이퇴계가 가장 좋아하였던 구담봉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비록 강선대는 수몰되어 물에 잠겼다고는 하지만 바로 이곳, 이 자리가 퇴계가 두향과 더불어 노닐고 감흥에 젖어 시를 읊었던 로맨스의 현장이었을 것이다. 구담을 노래한 사람은 이퇴계 뿐이 아니다. 조선의 대학자로 이퇴계와 쌍벽을 이루던 이율곡도 구담봉을 지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지 않았던가. “땅을 울리는 듯 잇단 피리소리에 나그네 놀라 깨니/어지러이 떨어지는 가을잎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라네/알지 못하겠구나. 밤이 새도록 찬강에 내리는 비가/수척이나 높은 구봉을 가벼이 넘나드니” 일찍이 명종 13년(1558년) 봄.22살의 청년 이율곡은 이미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은둔하고 있는 이퇴계를 만나서 사흘간의 짧은 기간동안이지만 가르침을 받는다. 이는 마치 도가를 창시한 노자와 유가를 창시한 공자의 만남처럼 세기적인 사건이다. 이때 이퇴계는 이미 58세의 노인. 비록 36살이나 차이 나는 노소의 만남이었지만 이 만남을 통해 이율곡은 개안하였으니, 눈을 뜨는 데는 천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보는 것(見)은 이처럼 찰나에 이루어지는 법이다. 따라서 이율곡이 구담봉을 지나면서 이 시를 읊은 것은 어쩌면 이퇴계를 방문하고 귀로에 오를 때였으니, 이율곡이 노래하였던 ‘알지 못하겠구나, 밤이 새도록 찬강에 내리는 비를(不知一夜寒江雨)’이라는 구절처럼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500년의 세월도 저 강 위에 내리는 한 방울의 빗줄기처럼 일말(一抹)의 거품인 것을, 그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을. “해변(海邊)의 묘지” 문득 내 머리 속으로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의 대표적인 시가 한 수 떠올랐다.20년간의 긴 침묵 끝에 태어난 순수시의 결정판. 해변의 묘지는 ‘나의 혼이여 죽음 없는 생을 구하지 말라’는 핀다로스의 말을 새겨서 20세기가 낳은 천재시인 발레리가 144행으로 삶과 죽음을 우주적인 시야에서 노래한 최고의 걸작인 것이다.
  • [그 영화 어때?]‘나인야드2’ 24일 개봉

    이웃사촌이 된 냉혹한 킬러와 소심한 치과의사의 한바탕 소동극으로 아기자기한 웃음을 선사했던 ‘나인야드’.4년 만에 등장한 속편 ‘나인야드2’(The Whole Ten Yards)는 황당한 사건끝에 1000만달러를 차지하고 운좋게 인생의 반려자까지 얻어 새 출발한 킬러 지미(브루스 윌리스)와 치과의사 오즈(매튜 페리)를 다시 난장판으로 불러낸다. 치과기록을 조작해 사망한 것으로 위장한 지미는 아내 질과 멕시코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그런데 전직 킬러의 변신이 가관이다. 꽃무늬 앞치마에 토끼 슬리퍼를 신고 청소와 요리로 소일하는가 하면 기르는 닭에 이름까지 붙여 살갑게 대한다. 가정주부로 변한 남편 대신 멋진 킬러가 되고 싶은 질은 번번이 허탕만 친다. 지미의 아내였던 금발미녀 신시아와 결혼한 오즈는 어떻게 됐을까. 소심한 성격답게 온 집안에 첨단 경비시설을 달고 살지만 사랑하는 신시아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만끽하는 중이다. 양쪽 집안을 오가며 두 커플의 개성넘치는 애정 행각(?)을 보여주던 영화는 갱단의 보스 고골락이 전편에서 죽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 신시아를 납치하면서 시끌벅적한 액션 코미디물의 수순을 밟아간다. 신시아 구출작전을 감행하는 지미와 오즈, 그리고 이들을 쫓는 고골락 일당의 엎치락뒤치락 한판 승부가 ‘나인야드2’의 중심이다. 다양한 복선과 황당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영화는 정신없이 흘러가지만 빈 수레가 요란한 것처럼 알맹이가 쏙 빠진 느낌이다. 전편에서 힘을 발휘했던 캐릭터의 개성만으로 영화를 밀어붙이기엔 줄거리가 너무 허술하고, 고골락 일당의 과장된 바보스러움도 보기에 썩 편하지는 않다.15세 관람가.24일 개봉.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儒林(283)-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83)-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조선 중기에 문인이었던 이광려. 호는 월암(月巖)과 칠탄(七灘)으로 양명학에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고, 오히려 실용적인 학문에 전념하여 조엄(趙漸)에 의해 고구마가 전파되기 전에 고구마 종자를 전국 각지에 시험 재배하였던 실학자였다. 노자를 연구하여 ‘담로후서(談老後序)’란 문집을 남긴 이광려는 따라서 평생을 은둔생활하였는데, 두향의 묘를 참배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읊고 있는 것이다. “외로운 무덤이 관도변에 있어 거친 모래에 꽃도 붉게 피었네. 두향의 이름이 사라질 때에 강선대 바윗돌도 없어지리라.” 이퇴계 사후 150년 후에 두향의 무덤을 이광려가 찾았던 것은 그처럼 이퇴계와 기생 두향의 사랑이 시공을 초월한 로맨스였기 때문이었을까. 택시는 다리를 건너 운전수가 말했던 나루터로 향하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인공호수로 빚어진 절경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아직 우기가 아니어서 수량은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지난겨울 쌓였던 눈들이 녹아 흐르고 얼어붙었던 물들이 따뜻한 양광에 녹아 굽이쳐 흐르고 있었으므로 한마디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이었다. 이곳에 제15대 군수로 온 이퇴계는 단양의 빼어난 절경에 감탄하여 ‘단양산수기’란 기행문을 지었다. 이 속에서 이퇴계는 암벽과 어우러진 산속에 피어 있는 철쭉꽃의 봄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바위의 사면에는 봄에는 철쭉꽃이 피어 마치 깊은 노을과 같고, 가을에는 단풍이 바위 위에서 불타오르는 것 같다.” 호수를 끼고 있는 산들은 기암괴석으로 마치 선경과도 같았다. 그 사이에는 드문드문 붉은 철쭉꽃들이 이퇴계의 표현처럼 ‘깊은 노을(蒸霞)’이 되어 열(熱)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마디로 찬란한 봄날이었다. 불과 9개월밖에 머물지는 않았지만 이퇴계는 이곳 단양을 애중(愛重)하였다. 이퇴계는 직접 빼어난 절경에 스스로 이름을 붙였다. 도담삼봉, 석문(石門), 사인암(舍人巖), 상·중·하선암(下仙岩), 구담봉(龜潭峰), 그리고 옥순봉(玉筍峰)의 팔경을 지정하고 일일이 그곳에 이름을 명명하고 그 모습을 산수기에 묘사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퇴계는 옥순봉을 지정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산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담봉에서 여울을 거슬러 나가다가 남쪽 언덕을 따라가면 절벽 아래에 이른다. 그 위에 여러 봉우리가 깎은 듯이 서 있는데, 높이가 가히 천길백길이 되는 죽순과 같은 바위가 높이 솟아 있어 하늘을 버티고 있다. 그 빛이 혹은 푸르고, 혹은 희어 푸른 등나무 같은 고목이 아득하게 침침하여 우러러볼 수는 있어도 만져볼 수는 없다. 이곳을 내가 옥순봉이라 이름지은 것은 그 모양 때문이다.” 이로써 옥순봉은 이처럼 희고 푸른 암벽에 비온 뒤에 죽순이 솟은 것 같다 하여서 이퇴계가 지은 이름임을 알 수 있는데, 이퇴계는 옥순봉의 선경을 따로 노래하였다. “…누가 달여울에 가로앉아 시선(詩仙)을 부를 것이며, 늦게 취하여 신공의 묘함을 알 수 있으랴. 일 많은 가을 얼굴을 한번 씻으니 푸른 물결 가운데 옥 같은 병풍이 높이 꽂혔네. 누가 능히 신선을 불러와서 묘하게 깎고 새 공을 같이 상줄 수 있으랴.…”
  • 수필가 한흑구의 고향 ‘포항’

    수필가 한흑구의 고향 ‘포항’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중략). 보리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중략)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보리, 하면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국내 수필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한흑구(韓黑鷗·본명 세광·1909∼79년)이다. 그의 대표작 ‘보리’가 지난 60,70년대 국정 중등 국어교과서에 실리는 등 널리 알려져 있어서다. 수필을 시와 같은 미문(美文)으로 쓴 작가로도 유명하다. 수필가는 남북 두 체제에서 작품활동을 한 문인이다.35년 평양에서 월간종합지 ‘동광’에 단편 ‘황혼의 비가’를 발표하며 데뷔했으나 39년 흥사단사건으로 피검된 이후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다 광복되던 해 월남해 수필 창작 등에 전념했다. ●포항에서 30여년간 작품활동 월남후 3년간 서울에서 생활하던 그는 1948년 동해의 푸른 바다가 펼쳐보이는 경북 포항으로 삶터를 옮겼다. 아마 바다와의 인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수필가는 자신의 필명을 흑구(검은 갈매기)로 했다. 일제 강점기인 29년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날 때 태평양 뱃길 선상을 외롭게 나는 검은 갈매기 한 마리를 보고 자신의 신세에 비유해 붙인 것이다. 그는 포항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는 동해가 좋아 평생 포항에서 안빈낙도의 은둔생활을 했다. 이를 두고 미당(未堂)은 “선생은 스스로 평생을 귀양살이라도 능히 해낼 수 있는 묘한 은둔의 사색가로 사셨다.”고 평했다. 이곳에서 수필가는 100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다.58년부터 17년간은 영일만에 자리한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보리’를 잉태한 영일만 수필가가 ‘보리’를 쓸 당시 포항은 지금의 서산(西山)에서 내항 사이를 시가지로 하는 조그마한 어항이었고, 그 주변은 거의 보리밭이었다. 특히 그가 이육사를 비롯한 다수의 문인들과 자주 찾았다는 영일만의 구만리(九萬里)는 온통 보리밭 물결을 이뤘다. 동네 처녀들이 쌀 한 말을 다 못먹고 시집간다고 했을 정도로 보리밭 천지였다. 포항문협의 창립멤버이자 한흑구 생존시 절친했던 박이득(64·아동문학가)씨는 “흑구 선생은 푸르른 바다와 보리가 조화를 이루며 넘실대는 영일만 일대에서 주로 작품 구상을 했었다.”면서 “‘보리’를 쓸 수 있었던 영감도 영일만에서 얻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보리 작품속의 구절 대부분은 흑구 선생과 함께 영일만의 보리밭을 거닐며 이야기로 나누던 것들”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지금 영일만 일대의 들녘은 파밭으로 그득하다. 보리밭은 그저 일부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80년대 이후 주민들이 보리농사가 돈이 되지 않자 파 재배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가 몸담았던 수산대학도 아파트 신축 부지로 팔린 뒤 얼마전 헐리고 말았다. 다만 수필가가 생전에 그토록 사랑했던 동해의 푸른 파도만이 남았다. ●포항문학의 개척자 수필가가 이곳에 정착할 무렵만 해도 인구 5만의 포항은 문화의 변방이었고, 문학의 불모지였다. 하지만 그가 이주한 뒤 문학적 토양을 일궈 싹을 틔우면서 포항문학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51년에 20여명의 신진 문인들로 구성된 포항문인협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고, 이듬해 시 동인 ‘효안’,55년 ‘청패’ 동인이 탄생됐다. 67년에는 흑구 선생을 정점으로 한 ‘흐름회’란 향토문화단체가 출범했다. 지역 문화행사를 주도하고 소속 회원들이 제각기 문학작품집을 내놓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문협 포항지부가 정식으로 출범하던 해인 79년 수필가는 향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묘지는 영일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흥해읍 죽천2리 언저리에 마련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인 81년에 나온 포항지역의 대표적 문학지인 포항문학 창간호는 온통 한흑구의 특집으로 꾸며져 그가 포항문단에 남긴 큰 자취를 증언한다. 그의 후학들은 83년,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청하골 보경사 인근 길섶 숲속에 문학비를 세웠다. 비의 앞면에는 ‘보리’의 마지막 문장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흑구가 이 지역 문단에 남긴 업적이 수록돼 있다.88년부터 매년 문협 포항시지부 주최로 구만리에서 ‘보리누름문학제’가 열려 작가의 문학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포항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儒林(276)-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76)-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이퇴계의 사상과 변화를 기준으로 하여 그의 생애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은 세 시기로 압축된다. 제1기는 초년기(初年期)로 이 시기는 그의 출생부터 33세 되던 해까지로 연산군 7년(1501년)으로부터 중종 28년(1533년)까지의 시기인데, 이는 수학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제2기는 이퇴계가 급제, 출신한 33세 때부터 은퇴를 결심하고 단양에 군수로 외직에 나간 후 풍기군수로 재직하다가 경상감사에게 병으로 사직서를 제출하여 해관(解官)을 청한 49세까지이다. 이 시기는 나아가 벼슬을 하였던 출사기(出仕期)였는데, 이는 중종 29년(1534년)으로부터 명종 4년(1545년)까지의 약 15년에 걸친 시기이다. 제3기는 말년기(末年期)로 이퇴계가 50세 되던 해 감사의 허락 없이 임지를 떠날 때로부터 7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도산서원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에 정진하였던 20년에 걸친 시기였다. 명종 5년 서기1550년으로부터 선조 3년(1570년)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이를 은둔 강학기(講學期)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이처럼 세 시기로 크게 구분되는 이퇴계의 생애는 놀랍게도 공자의 생애와 대동소이하다. 기원전 551년에 태어난 공자가 학문에 뜻을 두고 공부하다가 나이 35세 때 노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제나라로 1차 망명을 하였던 시기까지를 수학기라고 할 수 있다면 이후 13년 동안이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천하를 주유하였던 시기를 포함하여 출사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정치적 방황은 기원전 484년 공자의 나이 68세 때 계강자의 초청으로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옴으로써 비로소 끝이 나게 된다. 이후 73세의 나이에 죽을 때까지 공자는 오로지 학문과 경전편찬에 전념하였는데, 그렇게 보면 이퇴계가 단양군수를 자원하여 내려온 것은 공자가 주유열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시기와 일치되고 있음인 것이다. 물론 이퇴계는 공자의 짧은 공직생활과는 달리 단양의 군수로 내려오기 전에 벌써 14개 아문(衙門)에서 29종의 벼슬을 하였었다. 그 중에서 재직기간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홍문관(弘文館)의 본직 30개월과 승문원(承文院)의 겸직 31개월이었다. 다음으로 장기간 벼슬을 하였던 것은 경연의 24개월, 춘추관(春秋館)의 21개월 벼슬이다. 공자가 스스로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내려오기 전에는 주로 홍문관, 승문원, 경연, 춘추관 네 관아의 벼슬을 중심으로 등용되었던 것이다. 이 관아들은 봉건시대의 군주국가는 임금의 명령으로 국정이 움직여지기 때문에 국왕 및 왕세자를 보좌하는 주무관청이었으므로 이퇴계는 조정의 핵심부서에서 이를 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퇴계가 단양군수로 내려올 무렵에는 ‘퇴거계상(退居溪上)’, 즉 ‘벼슬에서 물러나 산속의 시냇물’에서 살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이퇴계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퇴계가 단양에 군수로 내려온 것은 공자가 천하주유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과 비견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이퇴계는 청송(靑松)의 군수를 자청하였다. 그러나 청송의 군수는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었고, 마침 청송과 이웃한 단양군수 자리가 비어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단양의 군수로 부임했던 것이다. 이때가 명종 3년 정월. 이퇴계의 나이 48세 때의 일이었다.
  • 새 산문집 펴낸 김지하 시인

    새 산문집 펴낸 김지하 시인

    김지하(63) 시인이 산문집 ‘생명과 평화의 길’(문학과지성사 펴냄)을 냈다. 지난 2년여 동안의 강의와 여러 매체에 발표해온 글들을 묶은 이 책은 21세기 세계 속 한반도 역할에 대한 전망과 붉은악마 세대에 보내는 메시지로 채워졌다. 4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만난 김씨는 “세계질서를 다듬는 데 있어 동아시아적 담론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라면서 “인간 내면의 황폐, 전쟁과 테러,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생긴 문제 등을 고민해보는 글들”이라고 책을 소개했다. 오랫동안 생명운동을 주창해온 그가 정의한 오늘날은 ‘대혼돈(Big Chaos)의 시대’.“끝없는 절망과 문명에 대한 회의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전제한 그는 동아시아, 특히 한국의 ‘붉은악마 세대’를 주목했다. “새로운 문화의 길, 새로운 문화코드는 새 세대 즉 700만 붉은악마 세대만이 성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신화와 과학, 고대와 미래, 디지털과 아날로그, 정착과 이동, 중력과 초월 등 쌍방향 통행이 가능한 세대는 지금의 10·20대,30대 초반 네트워크 세대뿐이라고 나는 봐요. 이들에게서 새 시대의 생명과 평화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겁니다.” 붉은악마 세대에 대한 고찰은 산문집의 뼈대를 이룬다. ‘치열한 민족의식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세계인으로서의 보편의식과 아시아인으로서의 분권적 융합의지를 보여주었다.(…)수많은 군중의 의상이 붉은색 셔츠 일색이어서 통일성과 융합(퓨전)을 드러냈으나 동시에 그 패션은 수천만가지로 각양각색이어서 철저한 개성과 개체성(아이덴티티)을 과시하였다.’(‘붉은악마의 세가지 테마에 관하여’ 중에서) “바람직한 세계질서를 위해서는 기존의 ‘연합’이나 ‘커뮤니티’ 형태가 아닌 ‘탈중심적 네트워크’가 구축돼야 하는 것”이라고 밝힌 그는 “붉은악마 세대가 뭉치고 소통하는 형식이 다름아닌 ‘탈중심적 네트워크’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책 곳곳에서 미래사회를 예견하기도 했다.“19세기 한반도를 휩쓸었던 동학과 정역(正易) 등 후천개벽사상이 새로운 생명학의 도인(導因)으로 부활할 것”이라면서 “중국의 주역(周易)과 한국의 정역이 서양과학과 결합해 머지않아 새로운 우주과학으로 차원변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것이 이른바 혼돈질서(카오스모스,Chaosmos)의 새 과학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12월 시집 ‘유목과 은둔’을 펴내기도 했던 그는 “이번 산문집을 끝으로 담론글은 마무리짓겠다.”면서 “동화책도 내고, 그림전시회도 갖는 등 쉬워서 정이 가는 글쓰기를 하겠다.”고 계획을 밝혔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儒林 속 한자이야기] (52)

    儒林 245에는 ‘歸去來辭’가 나온다. 이 말은 晉書(진서) 陶潛傳(도잠전)에 나오며 도잠의 글귀 가운데 나온다. 도잠은 門中(문중)이 매우 뛰어난 家門(가문)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그렇게 풍족한 형편이 아니었다.29세에 벼슬길에 들어 진군참군, 건위참군 등의 관직에 몸담았다. 그는 41세 때 누이의 죽음을 핑계로 彭澤縣監(팽택현감)에서 물러나 落鄕(낙향)하여 隱遁(은둔) 생활을 하였다. 도연명은 이 작품의 서문에서 성격에 맞지 않는 관직을 누이동생의 죽음을 구실로 그만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일화에 의하면 감독관의 순시를 衣冠束帶(의관속대)하고 맞이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五斗米(오두미:적은 봉급)를 위해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며 그만두었다고 전한다. 일생의 절정에 은둔생활을 선언한 높은 氣槪(기개)와 高潔(고결)한 人品(인품)에다가 風流(풍류)가 곁들여져 오늘까지 膾炙(회자)된다. ‘歸’는 원래 ‘시집가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用例에는 ‘歸結(귀결:어떤 결말이나 결과에 이름)’‘歸耕(귀경: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음)’‘歸省(귀성:부모를 뵙기 위하여 객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 등이 있다. ‘去’의 자원에 관해서는 두 주장이 팽팽하다. 하나는 사람의 상형인 ‘大’와 움집의 상형으로 구성된 글자로 ‘‘사람이 어느 곳을 떠나다.’라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한참 용변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설이다.去(거)의 用例(용례)에는 ‘去年(거년:지난해)’‘去者日疎(거자일소:서로 떨어지면 차차 멀어져 마침내 완전히 잊어버림)’‘去就(거취:일신의 進退)’가 있다. 來자는 보리의 뿌리와 줄기, 이삭을 그린 것으로 ‘보리’가 본래 의미다. 그런데 ‘오다’라는 의미의 낱말과 음이 같아 ‘오다’라는 뜻으로 더 널리 쓰이면서 본뜻은 麥(보리 맥) 자를 따로 만들어 나타냈다.用例로는 ‘來談(내담:와서 이야기함)’‘來歷(내력:겪어온 자취)’‘捲土重來(권토중래:어떤 일에 실패한 뒤에 힘을 가다듬어 다시 그 일에 착수함)’가 있다. ‘辭’의 앞부분은 ‘한 손에 실감개를 들고 한 손으로 실을 고르는 모양’의 상형이다. 원래는 오른쪽에 코바늘을 나타내는 글자가 쓰였다. 그런데 小篆(소전)으로 넘어오면서 형벌 도구인 ‘끌’의 상형으로 ‘죄’라는 뜻을 가진 ‘辛’으로 대체되었다.辭의 본래 뜻은 ‘죄를 다스리다.’인데,‘말’‘글’‘그만두다.’의 뜻으로도 쓰인다.‘辭免(사면:맡아보던 일을 그만둠)’‘辭讓(사양:겸손하여 받지 아니하거나 응하지 아니함)’‘固辭(고사:제의나 권유를 굳이 사양함)’에 쓰인다. 도연명은 歸去來辭에서 “이미 가버린 것은 만회할 수 없음을 알았고, 장차 다가올 것은 쫓아갈 수 있음을 알겠도다(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오이왕지불간 지래자지가추).”라고 읊었다.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二步(이보) 前進(전진)을 위한 一步 後退(후퇴)의 反芻(반추)가 지혜로운 행동이다. 그러나 지난 일에 대한 아쉬움은 과감히 떨쳐버릴수록 좋다. 왜냐하면 지난 것에 대한 아쉬움의 저편에는 밝은 미래가 나의 새로운 挑戰(도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연명은 ‘장차 다가올 일은 쫓아갈 수 있다.’고 하지 않았을까?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일요영화]

    [일요영화]

    ●우나기(MBC 밤 12시30분) ‘나라야마 부시코’ 등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1997년작.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평범한 회사원 야마시타는 어느날 익명의 편지를 받고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다. 배신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그는 아내를 살해하고 곧장 자수한다.8년 뒤, 모범수로 가석방된 야마시타는 작은 이발소를 차리고 새 삶을 시작하지만, 우연히 기르게 된 뱀장어(우나기)만을 말벗으로 삼고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한 채 은둔자처럼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야마시타는 근처 연못가에서 자살하려던 여자 게이코를 구해 주고 이발소에서 일하게 해준다.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지지만, 예전 감방 동료가 나타나 야마시타의 과거를 폭로하는가 하면, 게이코의 애인이었던 도지마가 이발소로 찾아오는 등 크고 작은 소동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급기야는 도지마가 불량배들을 이끌고 이발소로 들이닥치는데….117분. 채수범기자 lokavid@seoul.co.kr ●에블린(KBS1 오후 11시50분)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브루스 베레스포드 감독 2002년작. 피어스 브로스넌, 소피 바바소 출연. 1950년대 아일랜드에서 불합리한 가족법 때문에 딸과 생이별한 아버지의 실제 투쟁을 영화화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살고 있는 도일은 올해 일곱 살 난 딸 에블린과 아들 둘, 아내와 함께 조촐히 살고 있다. 그러나 어느날, 도일이 실직자 신세가 되고 아내까지 집을 나가버리자 아이들은 가족법에 따라 강제적으로 수녀원으로 보내진다.92분.
  • [이경기의 스크린1인치]유령! 얼굴 좀 보여 봐봐봐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무대로 미모의 소프라노 여가수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스크 신사의 간절하면서도 파국이 예상되는 러브 스토리. ‘오페라의 유령’이 2004년 연말 전 세계 흥행가의 뉴스를 만들어 내고 있다. 연극, 오페라 등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이 소재는 이번에는 ‘배트맨과 로빈’ ‘폴링 다운’ 등으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조엘 슈마허 감독이 록 오페라 형식으로 각색해 화려하고 기품 있는 영상 무대극을 선사해 주고 있다. 1861년 파리 오페라 극장. 천상의 목소리를 자랑하던 이가 불의의 얼굴 화상을 입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뒤 늘상 오페라 극장 2층 5번 박스에 단골로 착석하고 있다. 그는 오페라 ‘한니발’의 프리마돈나 크리스틴을 보고 단번에 사랑에 빠진다. 그렇지만 크리스틴은 미남 청년 라울의 뜨거운 애정을 받고 있는 상태. 분노한 ‘오페라의 유령’은 여러 악의적인 사건을 만들어 내지만 크리스틴의 사랑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은둔해 있는 마궁에 분신과도 같은 마스크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기둥 즐거리. 극중 ‘오페라의 유령’이 크리스틴을 납치하여 마궁(魔宮)으로 노를 저어 가는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멜로디가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꿈결에서 그가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고 있네요. 나를 불러 주는 그 목소리,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발견할 수 있지요.”라는 노랫말이다. 이 노래로 파페라 샛별로 부상한 주인공이 사라 브라이트만. 흥미로운 점은 1910년 프랑스 추리 작가 가스롱 르루가 발표한 동명 소설을 1986년 10월 뮤지컬로 각색할 때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당시 2번째 부인인 사라에게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이 주제곡을 취입시켜 밀리언셀러로 만든 후일담을 남겼다. 원작에서는 선천적인 기형을 갖고 있는 악한(惡漢) 에릭이 오페라단의 미모의 프리마돈나를 짝사랑하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온갖 악행을 벌이다 어느날 홀연히 종적을 감추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학 전문가들은 공포스러운 존재인 ‘유령’을 통해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름다움, 추함, 선과 악 그리고 죽음과 삶의 의미를 골고루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오페라의 유령’은 흉측한 외모의 괴한이 미녀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에서 동화 ‘미녀와 야수’를 떠올리게 하고 있는 동시에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피의 복수를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 86년 영국 공연 이후 88년 뉴욕 브로드웨이로 진출해 오페라계의 아카데미라는 애칭을 듣고 있는 토니상 가운데 작품·남우·감독 등 7개상을 석권했다. 오페레타 형식으로 각색한 주역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뮤지컬계의 미다스 손’으로 칭송 받고 있는 작곡가.73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은 것을 시발로 해서 ‘캐츠’‘에비타’ ‘코니와 칼라’ 등의 뮤지컬을 히트시켰다. 타이틀 곡외에 수십개의 촛불을 배경으로 ‘오페라의 유령’이 불러 주는 ‘Music of the Night’을 비롯해 크리스틴과 라울이 듀엣으로 불러 주는 연가 ‘Wishing You Were Somehow Here Again’ 등의 삽입곡은 음악 애호가들의 환대를 받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미스틱 리버’에서 숀 펜의 딸 키티역을 맡았던 에미 로섬이 히로인 크리스틴역을 맡아 영화와 오페라계를 주도할 21세기 유망주로 조명 받고 있다.
  • [生生 인터뷰] 새시집 ‘유목과 은둔’ 펴낸 김지하 시인

    [生生 인터뷰] 새시집 ‘유목과 은둔’ 펴낸 김지하 시인

    9번째 시집을 낸 김지하(63) 시인을 지난 30일 아침 일산에서 만났다. 신도시의 회색빛 늦가을이 희멀겋게 내려다뵈는 오피스텔 11층. 그곳에서 이태째 거처해온 시인은 많이 쇠잔해져 있었다. 생로병사의 성벽 앞에 순하게 무릎을 접는 시인 김지하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새 시집 ‘유목과 은둔’(창비 펴냄)에서 시인의 키는 낮아졌다. 시대를 발언하는 사상가, 운동가이기보다는 생활인으로 돌아와 목청을 낮게 다듬었다. 그 자신 “가장 허름하고 가장 허튼 글모음”이라고 당찮은 겸사로 메어친다. 그러나 잦아진 사변적 발언들에 사뭇 달라진 시인의 지향을 감지하게 되는 건 사실이다. 틀림없이 그는 어느 때보다 삶에 밀착했다. ●현기증·고혈압… 육체적으로 지쳐 “육체적으로 아주 지쳐 있어요. 현기증에 좌골신경통, 혈압까지. 육체가 지치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거든. 논리적 담론 형태의 글쓰기를 쉴 때가 온 거라.” 94편의 시를 묶은 시집에서 그는 평범한 생의 순리에 자주 귀를 내맡겼다. 첫 시 ‘몸’(시인이 가장 아끼는 시)으로 “예전엔/잘 몰랐지//몸이 무너지면서/몸을 알았지”로 운을 떼더니 “늙어가는 길/외로움과 회한이/가장 큰 병이라는데//사람이 그리우나/만나기는 싫다”(‘오늘’)며 게으른 회한을 쏟아내기도 한다. 지친 몸과 죽음에 대한 사유도 부쩍 깊어졌다.“고담준론도 질퍽하게/아아/무엇이 아쉬우랴만//문득 깨닫는다//죽음의 날이 사뭇 가깝다는 것”(‘김지하 현주소’)이라고 물끄러미 오늘 발아래를 내려다보는가 하면,“자유당 말기의/내 정신풍경을 한마디로 뭐라 할까//매독환자/아니면/아편쟁이(…)이제는 아무것도/아무것도 없고//외로움밖에 없고//후회할 일밖에 없으니//참/개똥같은 인생”(‘김지하 옛주소’)이라고 쓸쓸히 탄식한다. “조동일(계명대 석좌교수)씨가 얼마 전 지용문학상 시상식에서 만났더니 그럽디다. 미학적으로 정련된 시, 엄격히 리듬을 따진 시만 쓰지 말고 이젠 좀 쉽고 허름한 시를 써보라고. 그렇게 열편 스무편 막 쓰다 보면 거기에 사금파리가 들어 있는 거라면서…” 지난 시절 민중문학운동을 함께 했던 지우의 권유에 시인은 진지하게 귀를 열었다.“동화를 쓸 요량입니다. 붉은악마 세대의 감수성에 맞추되 신화적 상상력을 움직이는 그런 동화 말이지.” 동화의 환상성과 소설의 리얼리즘을 모아 집필에 들어간 동화는 내년 여름 이후 발표할 계획이다. ●4년쯤 뒤 생명운동에서 은퇴 “내후년쯤부터 차츰 후배들한테 지금 일(‘생명과 평화의 길’ 이사장을 맡고 있다)을 넘겨주면서 늙은 그루터기 역할을 할 생각”이라는 그는 “4년쯤 뒤엔 생명운동에서 은퇴할까 한다.”고 했다.“앉아만 있어 달라고들 하니 죽은 제갈량이지 뭐.(웃음)” 시인은 “앞으로의 내 시는 문명을 비판하는 잠언쪽으로 갈 것”이라고 밝혔다. 형식적으로 쉽고 짧은 시를 쓰겠다는 부연설명도 했다. 이번 시집 속에도 시의 뜻을 곧추 세우는 고백글이 들어있다.“50여년을 내내/시를 써온 이 뒷날에야/느지막이 시의 뜻을 세운다//다시 태어나리라//한 작가로,/꼭 자유자연만이 아닌/활동하는 무(無),/흰 그늘로//(…)//다시 진화하리라”(‘재진화(再進化)’) “육신이 지쳤다.”는 말을 인터뷰 도중 여러번 했다. 그러나 영혼의 나이만은 더 먹지 않으려는 시인의 정신은 청청히 살아 있다.“나는 언제나/반역의 사람/(…)/살아있다면/친구여/바람을 거슬러라”(‘바람이 가는 방향’)라고 반역의 정신을 드러낸 시인은 “나이를 먹어도 비판정신만은 늙지 않는 미국의 삐딱이 사상가 노엄 촘스키가 부럽다.”고 고백했다. 그는 내년 초 산문집 ‘생명과 평화의 길’(문학과지성사)과 미학이론을 다듬은 ‘흰 그늘의 미학’(실천문학사)을 또 내놓는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儒林(233)-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3)-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유일한 희망이었던 소왕이 죽자 공자는 완전히 줄 끊긴 연(鳶)이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날아갈 수밖에 없었고 제자들의 불만은 극도에 달해 폭발직전이었다. 그래도 공자는 초나라를 버릴 수가 없었다. 초나라에 머물면서 차일피일 허송세월을 하고 있자 미치광이 행세로 떠돌아다니던 접여(接與)가 공자의 곁을 지나면서 노래를 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그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하여 덕은 그토록 쇠하였는가. 지난 일은 탓해도 소용없지만 앞일은 바로잡을 수 있는 것 아서라 아서라 지금 정치를 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짓이니라.” 접여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수레에 접근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광인(狂人). 이 미친 사람 역시 공자가 만났던 도가의 사상을 따르는 여러 은둔자 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타난 은둔자들이 때로는 밭을 가는 농부로, 혹은 대바구니를 메고 가던 노인으로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 미치광이로 나타나는 것은 공자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기 위한 죽비(竹)소리처럼 통렬하다. 접여가 노래한 봉황(鳳凰)은 고대중국에서 귀하게 여기던 상상의 새로 머리는 뱀, 턱은 제비, 등은 거북, 꼬리는 물고기 모양이며, 깃에는 오색의 무늬가 있던 상서로운 새였던 것이다. 여기서 봉황이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봉황과 같은 귀한 존재인 그대 공자여, 어찌하여 위태로운 세상에 말려들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가.‘아서라 아서라(已而已而)’두 번이나 강조하여 이를 경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미치광이 접여의 등장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연상시킨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일부러 미친 것으로 행동하는 햄릿처럼 접여는 어지러운 난세에 숨지 아니하고 위태로운 정치에 뛰어들어 위험을 자초하고 있는 공자를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공자를 꾸짖는 장면의 클라이맥스인 것이다. 이 클라이맥스의 장면을 장자가 놓칠 리가 있겠는가. 장자의 인간세(人間世)편에 보면 공자를 꾸짖는 접여를 더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초에 갔을 때 미친 체 행세하는 은자 접여가 그 대문 앞에 나타나 이런 노래를 불렀다. ‘봉황새야 봉황새야/너의 덕도 쇠했구나./오는 세상 나 못 보고/가는 세상 나 못 좇네./도 있을 땐 성인나와/천한 정사 도우시나/도 없을 땐 몸을 숨겨/명철보신(明哲保身) 하시는 것/지금이야 형벌이나/면하는 게 고작이니/새 깃보다 가벼운 복(福)/잡는 사람 아무도 없고/땅보다 무거운 복/피하는 이 전혀 없네./그만둬라. 도덕으로/남에게 대하는 일/위태롭게 예의 가져/남을 꽁꽁 묶는 사람 /가시 가시 가시나무/나의 발은 그 못 밟네./돌아 돌아가는 내 발/찔리지를 그 못하네.’” 접여의 노래 중에 나오는 가시나무는 미양(迷陽)을 가리키는 말로 미양이란 초나라에서 나는 풀로 촘촘하고 줄기가 길며, 그 거죽에는 가시가 많은 나무인데, 이 가시나무와 같은 세상에서 돌아 돌아가지 어찌하여 가시밭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가 하고 비웃는 노래인 것이다.
  • 儒林(22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2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이 모습을 본 애공은 감동하여서 친히 신포서의 머리를 받들어 급히 물을 먹이고 약을 써서 정신이 돌아오도록 한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내가 모극(矛戟)을 구비함은 그대와 함께 한 원수를 치기 위함이고 내가 갑병(甲兵)을 훈련함은 그대와 함께 거사하기 위함이네.” 함께 무기를 들고 공동의 적인 오나라와 싸우겠다는 애공의 뜻이 담긴 이 시를 들은 후 신포서는 아홉 번 절하여 최대의 사의를 표한다. 그 후 진나라에서는 4만 명의 병력인 전차 500승을 파견하여 단번에 오나라의 군사를 격파한다. 이로써 오나라에 빼앗길 뻔한 초나라는 부흥하고 다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진나라의 궁중 뜨락에서 7일 낮밤을 통곡하면서 나라의 위기를 구한 신포서의 충심에서 ‘곡진정(哭秦庭)’, 즉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진나라의 궁궐 뜰에서 울면서 도움을 청하다.’라는 성어가 나온 것. 이처럼 소왕은 신하를 아끼고 하늘의 도를 알았던 그 무렵 최고의 군주였던 것이다. 공자가 채나라에 머물고 있을 무렵 오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니, 오나라와 철천지원수인 초나라는 진나라를 도우려고 군사를 출동시켰던 것이다. 소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에 나서 오늘날 안휘성의 호현(毫縣)인 성보(城父)라는 진나라 땅에 머무르고 있었다. 진나라의 성보와 채나라는 지척지간의 거리. 그러지 않아도 파다한 소문으로 공자를 한번 친견하고 싶었던 소왕은 이 기회에 사람을 보내어 공자를 초빙한다. 공자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평소에 소왕을 ‘하늘의 도를 알았던 위대한 군주’라고 칭찬하였던 공자였으므로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즉시 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이 소문을 전해들은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아연 긴장하였다. 왜냐하면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제후들의 약점과 대부들의 비행을 낱낱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공자를 초강대국인 초나라의 소공이 초빙하여 등용한다면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모두 위태로운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이들은 서로 연락하여 군사들을 풀어 공자의 일행을 들판에서 포위한다. 이로써 공자일행은 또다시 포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때의 곤경을 논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나라에 있을 때 양식까지 떨어진데다가 (공자가어에는 ‘공자가 채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7일간이나 양식이 떨어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자들 간에는 병이 나서 드러눕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때도 공자는 강송(講誦)도 하고 악기를 타며 노래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자로는 성이 나서 공자를 뵙고 말하였다. ‘군자도 곤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군자도 곤경에 빠지게 마련이다. 다만 소인이 곤경에 빠지면 함부로 굴게 되는 것과 다를 뿐이다.’” 지금까지 자로는 스승 공자에게 대놓고 ‘성을 낸()’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침묵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도가를 따르는 은둔자들의 얘기를 전하는 간접표현으로 공자에게 불만을 표출하였으나 마침내 자로는 스승의 면전에서 대놓고 직설적으로 ‘군자도 곤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君子亦有窮乎).’라고 노골적인 비난을 단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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