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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우리의 색이 바뀌었다/김병식 동국대 부총장

    컬러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색깔의 의미는 중요하다. 사람이 외계와 소통하는 창구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오감 가운데 색깔을 인지하는 눈이 먼저이고, 신체 부위 중 최상단에 위치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독일 월드컵의 우리 경기가 이제 끝나고 아쉬움을 남겼지만, 모두 일상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의적 성격을 보인 두 번의 월드컵 대회는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한류로 거듭난 거리응원, 모두 즐기는 공감의식으로 자연스럽게 형성시킨 국민의 축제, 세계가 한 곳에 모인 축약된 공간속에서 우리 전통문화인 소리, 율동, 디자인, 색깔 등에 대한 객관적 확인이 그것이다. 나는 이 중 우리의 색감 변화에 주목하고 싶다. 2002년 우리 안방에서 열렸던 대회와 달리 이번 월드컵은 지구 반대편에서 열렸다. 우리 경기는 주로 새벽 4시였다. 새벽 4시는 깨어 있기에 정말 힘든 시간이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들은 전국에서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뿔을 달고 대한민국을 외치고 또 외쳤다. 우리 경기 때 독일 스타디움도 붉은 빛으로 가득했다.TV를 통해 본 우리의 붉은 빛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 빛은 감정을 솟구치게 하였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붉은색이 이제는 세계 속에서 우리를 상징하는 색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흰색을 좋아한다고 알려져 왔다. 문헌 위지(魏志)에 보면 부여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백의(白衣)를 입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양반 계층부터 서민까지 모두 백의를 즐겼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폄하할 의도로 염색기술과 여력이 부족하여 그러하였을 것이라는 잘못된 해석도 있으나 아마도, 흰색은 유교사상의 청렴 등 당시 시대사조와 어울리는 색이어서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러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갑오개혁부터는 색의(色衣)착용이 장려 되었으며, 심지어 1906년(고종 광무 10)에는 법령으로 백의 착용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색에는 상징이 숨어 있다. 이데올로기적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 백색과 적색의 의미는 남다르다. 어느 시인이 전후시절, 그의 시에 “빨강 자전거가 오지 않는다.”는 구절을 넣었다가 감시와 곤욕의 시간을 보냈었다고 회고했던 것이 기억난다. 애달게 기다리던 편지를 배달하는 우체부아저씨를 연상하며 표현한 것이 검열관의 빨강색에 대한 시각은 달랐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젊은이들의 열정의 용광로에서 우리의 색깔 콤플렉스를 모두 녹여 내었다. 그것도 일거에 녹여내었다. 선입견이 없는 젊은이의 색감에 대한 순수함이 이를 가능케 하였다. 말끔한 뒤처리와 함께 우리 태극기와 애국가, 대∼한민국의 구호는 이를 지지하는 강력한 지렛대였다. 아름다웠다. 빨강은 ‘빨주노초파남보’의 시작색이다. 멀리서 가장 잘 보이는 색이다. 정지신호등이 국제공통으로 적색인 이유이다. 전통적 시각에서는 남쪽, 여름, 희열, 행복 등을 의미한다. 서구에서는 열정, 사랑, 흥분, 힘, 속도, 위험 등을 상징한다. 우리의 상징색이 바뀌었다. 경건하고 평화스러운 흰색에서 열정과 힘의 색인 빨강색으로 바뀌었다. 은둔에서 자신감으로 색이 바뀌었다. 이제,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 젊은이에게 어울리는 색은 빨강색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기기 위해 몸부림치는 각국 선수들을 볼 때, 월드컵경기는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세계 모습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원에서 우리가 수적으로 적어도 유독 크게 느껴졌다. 일을 할 때 자신감은 중요하다. 자신감은 힘든 상황에서도 성공을 담보한다. 혹자들은 월드컵이 우리를 너무 들뜨게 하였다고 걱정도 하였다. 그러나 거리응원에서 우리는 세계를 향해 나타내 보였다. 함께 외치면서 자신감을 배가시켰고 스스로를 신뢰하였다. 이제 세계를 향해 도전하는 우리 젊은이에게 어울리는 색은 힘과 정열의 빨강 색이 되었다. 우리의 색이 바뀌었다. 김병식 동국대 부총장
  • 폴 세잔, 그가 환생했다

    폴 세잔, 그가 환생했다

    |엑상프로방스(프랑스) 함혜리특파원|파리의 리옹역에서 남부 TGV를 타면 3시간만에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한다.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 엑상프로방스가 우리에게 익숙한 이유는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세잔(1839∼1906)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일생의 3분의 2 이상을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그리고 이곳의 생피에르 묘지에 묻혔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던 세잔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꼭 1세기가 흘렀다. 엑상프로방스에선 그의 100주기를 기념, 대대적인 회고전 ‘프로방스에서의 세잔’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엑상프로방스시가 마련한 세잔의 해(www.cezanne-2006)행사 가운데 하일라이트는 시립 그라네미술관에서 9일부터 열리고 있는 ‘프로방스에서의 세잔’ 전시회다. 오는 9월17일까지 100일간 열리는 전시회에는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런던 내셔널갤러리, 파리 오르세 미술관, 생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등 전세계 유명 미술관, 박물관과 개인들에게 흩어져 있던 세잔의 작품 117점(유화 85점, 데생 및 수채화 32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의 젊은 시절 작품과 드물게 남긴 초상화, 정물화들이 포함돼 있지만 대부분은 그가 이젤과 물감통을 메고 다니며 그린 프로방스의 풍경들이다. 어린시절 친구 에밀 졸라와 자주 놀러 다니던 아르크 강가와 비베뮈스 채석장, 샤토 느아르, 작은 해변마을 레스타크, 생트 빅투아르 산을 담은 풍경화들과 ‘목욕하는 여인들’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그라네 미술관의 드니 쿠르타뉴 관장은 “폴 세잔은 평생 프로방스의 자연을 스승삼아 빛과 색채가 지닌 진실을 회화로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했다.”면서 “시기별·주제별로 그가 남긴 예술적 자취를 볼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쿠르타뉴 관장은 “그의 작품들이 워낙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한꺼번에 이처럼 많은 작품을 보는 것은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며 “세잔의 예술혼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전시회에 언론과 일반인들의 반응이 뜨겁다.”고 전했다. 그라네 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위해 4년간의 보수공사를 거쳐 전시공간을 900㎡에서 4500㎡(1360여평)로 넓혔다.12개의 방을 옮겨가면서 세잔의 작품이 지닌 가치와 예술 창작의 내면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장 지하에는 영상물과 함께 ‘세잔 다르게 보기’라는 기획전도 마련했다. 세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엑상프로방스에서 열리는 전시회에는 최소 40만명이 관람할 것으로 미술관측은 기대했다. 전시의 공동 큐레이터를 맡은 예술사가 브뤼노 엘리(타피스리 박물관장)는 “세잔은 자신만의 구성과 색채로 현대회화의 기원을 열었다.”고 평했다. 엑상프로방스에서는 모든 것이 세잔과 연결된다. 외부인들이 도착하는 관문인 TGV역에는 세잔이 그린 생트 빅투아르 산이 걸려 있다. 시내에서 15㎞ 정도 떨어진 이 역의 지붕모양은 세잔이 열정적으로 그렸던 생트 빅투아르 산의 능선에서 따온 것. 역의 메인 출입구 이름도 ‘세잔의 문’이다. 구시가지 중심 대로 쿠르미라보에는 세잔의 해 기념 깃발이 가로수를 따라 걸려 있다. 푸른색 바탕의 깃발들이 강렬한 태양 빛 아래서 축제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시내에는 세잔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도록 보도에 ‘세잔’의 이름과 엑상프로방스 시 마크가 새겨진 동판을 박아 놓았다. 동판은 관광안내소에서 시작돼 부르봉 중학교(지금은 미네 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와 생소뵈르 성당, 마지막 거주지인 불르공, 세잔이 친구들을 만나 자주 차를 마시던 식당 ‘2명의 소년’, 그가 결혼식을 올린 시청 등을 따라 이어진다. 그가 어린시절을 보낸 저택 ‘자 드 부팡’, 세잔이 말년에 작업했던 로브 아틀리에, 그가 이젤을 메고 생트 빅트와르산을 스케치하러 다녔던 길 ‘세잔 루트’, 마르세유와 연결되는 기찻길 옆에 있는 마을 가르단과 해변 마을 레스타크 등도 모두 세잔 그림의 모델이 됐던 곳들이다. 세잔의 해를 맞아 전시회와 토론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들도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자 드 부팡’에서는 멀티미디어 설치전이 열리고 세잔의 재능에 찬사를 보낸 독일의 시인 릴케와 세잔의 예술적 교감을 다루는 토론회,1906년 파리와 엑상프로방스 사진전, 프로방스 지역 화단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에콜 프로방살,1800∼1870’ 전시회가 방돔관에서 열린다. 세잔은 해발 1011m의 생트 빅투아르 산을 거의 신성시하며 8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기간 중인 다음달 5일 생트빅투아르 산이 바라다 보이는 퓌르비에 채석장에서는 세잔을 기리며 베를린 필하모니가 말러교향곡 5번을 연주한다. 엑상프로방스 관광청의 아니 토르세는 “자연과 고독을 향한 여정을 살다 간 세잔이 1세기 만에 되살아난 듯하다.”고 말했다. lotus@seoul.co.kr ■ 화가의 길 걷는 후손 마리 로지 |엑상프로방스(프랑스) 함혜리특파원|“위대한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게 자랑스럽다.”폴 세잔의 후손 중 유일하게 화가의 길을 걷는 마리 로지(45)를 지난 7일 세잔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서 만났다. 로지의 외할머니인 알린 세잔(89)이 세잔의 손녀딸. 촌수로 따지면 외고종손녀다. 순간적인 인상을 담는 추상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로지는 엑상프로방스의 갤러리 클레르 로랭(www.gallerie-laurin.com)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세잔의 후손이라는 점이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나. -세잔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는 사람들이 내 작품에 새삼 관심을 표하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 손을 만지면서 세잔의 후손을 만났다는 것에 감격스러워 한다. ▶책임도 느끼나. -예술가는 각자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외고조 할아버지인 세잔이 그랬듯이 나도 나만의 예술세계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각자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책임있는 예술가의 자세다. ▶가족 소유의 그림이 남아 있나. -없다. 이번 전시회는 세잔의 작품들이 그려진 현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세잔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린 풍경화들을 좋아한다. 단순하지만 힘이 넘치고, 프로방스 지방의 자연이 주는 느낌이 담겨 있어 좋다. lotus@seoul.co.kr ■ ’근대회화의 아버지’ 세잔은 |엑상프로방스(프랑스) 함혜리특파원|폴 세잔은 1839년 1월19일 엑상프로방스의 오페라가 28번지에서 태어났다. 은행을 설립할 정도로 재산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평생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지만 화가로서는 불운했다.1859년 엑상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입학했으나 1861년 그만 두고 파리로 올라간다.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작업하며 모네와 피사로,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과 인연을 맺는다. 그의 동반자 오르탕스 피케도 이곳에서 만났다. 국립미술대학 시험에 두차례나 낙방한데다 살롱전에서 거듭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던 그는 1874년 제1회 인상파 화가전에 출품한다. 빛과 색의 배합에서 인상파 작가로 접근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인상파 화풍과는 다른 작업은 전개한다. 쏟아지는 비난에 충격을 받은 그는 다시는 전시회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때부터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그의 그림은 프로방스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색채를 반영한다. 그의 첫 전시회가 파리에서 열린 것은 56세때였다. 젊은 화상 볼라르가 기획한 이 전시회를 계기로 그의 재능과 독특한 작풍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론은 여전히 적대적이었지만 르누아르, 모네, 드가, 피사로 등 당대의 화가들은 그를 칭송했다. 세잔 전문가인 드니 쿠타뉴(그라네 미술관장)는 “그는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해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갔다.”며 “입체파, 야수파, 추상주의 미술 등 20세기 미술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한다. 하지만 그의 고향 사람들은 누구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세잔은 말년에 큰 명성을 얻었으나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작업에만 열중했다. 말년에 작업했던 로브 작업실의 안내인 크리스틴은 “세잔은 아침 일찍 작업실에 나와 작업하고, 이젤을 메고 산으로 갔다. 작업실을 찾은 사람은 4년간 16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은둔의 삶을 살았다.”고 전했다. 세잔은 1906년 10월15일 로브 작업실 근처의 산에서 그림을 그리다 폭우속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튿날 의식이 깨어난 뒤 다시 산에 올랐다가 또 쓰러져 폐렴으로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1906년 10월23일 새벽이었다. lotus@seoul.co.kr
  • 儒林(61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儒林(61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1568년 선조원년 춘3월. 도산서당 정문 앞에 행색이 남루한 노인 하나가 이제 막 도착하여 문 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아직 초봄이라곤 하지만 한기가 가시지 않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노인의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허리에 메고 있는 걸망에는 해질 때 갈아 신을 짚신이 대롱대롱 매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먼 길을 내쳐 걸어온 모양이었다. 정오가 지나고 어느덧 짧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 도산서당은 이퇴계가 완전히 퇴거계상(退居溪上)하여 살고 있었던 은둔처였다. 단양과 풍기군수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퇴계는 고향에 ‘계상서당’을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계당시대는 10여 년간 계속되었는데, 청년 이율곡이 스승 퇴계를 만나러 와서 2박3일의 운명적인 상봉을 하였던 바로 그 곳이었다. 그러나 계당은 좁고 허술하였으므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적당치 않았으므로 퇴계는 그의 나이 57세 되던 1557년 도산 남쪽 기슭에 서당을 새로 짓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여기는 작은 골짜기가 있어 앞으로 산과 물을 굽어보고 있고 골짜기 속은 깊숙하고 넓으며 바위기슭이 선명하고 돌우물의 물이 감미로워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퇴계 스스로가 쓴 ‘도산기’에 나와 있는 묘사 그대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땅을 발견한 퇴계는 ‘그 안에서 밭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가 있어 대금을 치르고 사서 토지를 확보한 후’ 1558년 3월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하는 착공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서당을 짓는 일은 퇴계 집안의 종택으로부터 서쪽으로 4㎞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용수사라는 절의 법연스님이 도맡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사이 퇴계는 잠시 명종에게 불려 한양에서 공조판서라는 중책을 제수하고 있었는데, 퇴계는 그동안에도 법연에게 서당의 설계도를 그려 보이는 등 서당의 건립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당을 맡아 짓던 법연은 1년 만에 입적하고, 뒤를 이어 역시 용수사에 있던 정일스님이 뒤를 이어 공사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유년(1561년)에 이르는 5년 동안 서당인 도산과 살림집인 농운정사 두 집이 대강 이루어져 퇴계는 마침내 평생소원이었던 자신의 서원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퇴계는 온 식구들을 이끌고 정사로 이주하였으며, 그의 가문을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는 대학사(大學舍)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즐거움은 퇴계가 지은 ‘도산서당’이란 시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순임금은 그릇을 구우면서 즐겁고 편안했고, 도연명은 농사를 지으면서 즐거운 얼굴이었네. 성현의 마음을 내 어찌 알겠냐만 백발의 나이에 돌아와서 숨어 사는 즐거움을 맛보노라.” 스스로 노래하였던 대로 퇴계가 꿈에 그리던 도산서당으로 돌아와 숨어사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은 그의 나이 61세 때의 일이었다.
  • 儒林 (607)-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3)

    儒林 (607)-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3)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3) 별시해를 보기 직전인 그해 가을, 산림거사인 지정과 술을 마시며 ‘국화를 술잔에 띄우고’란 즉흥시를 지은 율곡은 자신을 ‘서리맞은 국화(霜中菊)’로 비유함으로써 자신의 심정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한 초나라의 불우한 정치가이자 비극시인이었던 굴원이 쓴 초사(楚辭)의 ‘아침엔 목란의 추로(墜露)를 마시고 저녁엔 가을국화의 떨어진 꽃(落英)을 씹는다.’라는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굴원처럼 불우하고 비극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율곡은 강릉에 낙향하여 본의 아니게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비유하고 있음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 속에 도연명의 음주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일찍이 귀거래사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와 청빈을 달게 여기고 전원에서 밭을 갈며 고풍청절하게 지내던 전원시인 도연명은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한다. 그러나 마차나 방울소리는 없다/그럴 수가 있냐고 물을 것이다. 마음이 떨어져 있으면 땅도 자연히 멀다. 동쪽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자르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 산공기가 석양에 맑다. 날던 새들은 떼 지어 제 집으로 돌아온다. 여기에 진정한 의미가 있으니/말하려 하다 이미 그 말을 잊었노라.(피천득 번역)” 율곡은 도연명의 ‘동쪽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자른다(採菊東籬下)’란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이 무렵 ‘서리맞은 국화’와 같은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자조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별시에는 율곡으로서는 배수의 진을 치고 치른 과거시험이었다. 율곡이 성균관에 도착하자 반수당 안은 이미 결과를 보려는 수많은 과유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의 유생들은 심부름하는 종자들까지 데려오고 또한 이들을 상대로 한 술 파는 장사치들까지 판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반수당 안은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들 중에는 전번에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부문을 통과하려 하였을 때 율곡의 앞을 막아세웠던 세도가의 모습도 보였으므로 율곡은 한 곁에 멀찌감치 물러서서 방방(放榜)을 기다리고 있었다. 율곡은 이번 별시의 결과에 은근히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지난봄의 과거와는 달리 이번 별시의 책제는 ‘천도책’이란 철학 시험문제로 난해하고 까다로운 것이었으나 율곡에게는 오히려 족집게처럼 집어낸 예상문제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율곡은 지난 일년 동안 스승 퇴계로부터 점지받은 거경궁리의 화두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율곡은 자연 한대 유학에서 제기되고 있었던 ‘사람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人者天地之心也)’이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게 되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역시 순하게 된다(人之氣順則天地之氣亦順矣).’는 ‘천인상감설’에 대해서 이미 깊은 궁리를 끝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네팔 국왕, 권력이양 선언

    네팔 국왕, 권력이양 선언

    히말라야 산맥에 수천년 은둔해온 네팔 왕국이 드디어 ‘피플 파워’의 감격에 휩싸였다. 지난해 2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내각을 해산한 후 직접 국정을 장악했던 갸넨드라 국왕이 21일 대국민 연설을 통해 권력을 국민에게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총파업 16일만에 백기 투항 갸넨드라 국왕은 이날 미리 녹화된 연설에서 “입헌군주제와 다당제를 향한 신조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가능한 한 빨리 7개 야당이 총리를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특히 “행정 권력은 오늘 이 시간부터 국민에게 돌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왕은 또 “이른 시간안에 선거를 통해 정통성 있는 기구들이 가동됨으로써 민주주의의 실천이 담보될 것”이라며 “현 각료협의회는 새 총리가 임명될 때까지만 운영될 것”이라고 밝혔다.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길 희망한다는 말도 보탰다. 그러나 그는 선거 일정이나 권력 이양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전날에 이어 이날도 수도 카트만두 시내 진입을 시도하던 15만명의 시위대는 외곽지대로 물러나 국왕 연설을 경청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연설이 끝난 직후 일부 시민은 거리를 행진하며 “민주주의 만세!갸넨드라는 이 나라를 떠나라!”고 외치고 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대체로 시위대는 국왕 연설을 환영하는 것으로 전해졌지만 정치 일정이 구체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헨드라 슈레스타는 “싸움에서 이겼지만 아직도 이겨내야 할 전투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주요 정당 지도자도 연설 직후 회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내용은 즉각 전해지지 않았다. 이로써 지난 6일 국왕 하야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한 지 16일만에 국왕의 투항으로 네팔은 새로운 민주주의 역사를 쓰게 됐다. ●“평화 티켓을 놓친 것이 결정적 실책” 갸넨드라 국왕은 7개 야당 연합의 총파업에 맞서 지난 6일 통금령을 발포한 데 이어 20일에는 사살령까지 내리는 강압 조치로 일관했으나 결국 무릎을 꿇게 됐다.16일 이어진 반정부 시위로 모두 14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명이 다쳤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날 “갸넨드라 국왕의 도박은 사실상 실패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국왕의 ‘권력 배후’인 보안군의 가족들까지 시위에 동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업인과 전문직, 공무원까지 시위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보냈다. 마지막 외부 지원세력인 미국과 중국, 힌두 민족주의 세력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미 국무부는 최근 “(전제정치가) 모든 분야에서 실패했다.”고 밝혔으며 제임스 모리아티 네팔 주재 미국 대사는 이날 “그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말로 결정타를 날렸다. 일부 전문가는 갸넨드라 국왕의 가장 큰 실정(失政)으로 ‘평화 티켓’을 놓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마오이스트 반군이 제안한 평화협정도 거부했다. 그렇다고 사회적 갈등을 봉합한 것도 아니었다. 경제 안정과 도덕성 측면에서도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1999년 50만명이었던 해외 관광객은 지난해 27만명으로 크게 줄었다.3주째 접어든 총파업으로 생필품 가격은 폭등했다. 국왕은 왕자 시절부터 뺑소니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또 왕실 총기 사건을 직접 일으켰다는 의혹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동안 왕실 예산은 6배가 늘었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정책은 민심을 돌려세웠다. 국토의 40%를 점유한 마오이스트 반군은 가난한 농촌을 중심으로 꾸준히 세력을 키웠다. 피폐한 현실에 절망한 농민들이 마오쩌둥(毛澤東)의 혁명 이론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김반석 LG화학 사장 경영키워드 “외부 탓 하지 말고 내실 최우선”

    김반석 LG화학 사장 경영키워드 “외부 탓 하지 말고 내실 최우선”

    “외부 탓 하지 마라. 외부 환경을 극복하고 안을 살찌워야 살아남는다.” 지난달부터 국내 최대 화학업체인 LG화학을 이끌고 있는 김반석(57) 사장이 던진 올해 경영 키워드는 ‘내실 경영’이다. LG에 따르면 김 사장은 지난달 10일 CEO에 취임한 뒤 가급적 외부 노출을 피하고 있다. 대신 임직원 회의 등을 통해 ‘내부적으로 실속있는 경영 성과’가 올해 최우선 경영 과제라는 점을 수시로 강조하고 있다. 김 사장은 내실 경영 키워드 전파를 위해 서울 여의도 본사 및 여수 공장 등지를 돌며 지금까지 40개 팀의 부서장 및 직원들과 대화를 가지면서 업무 현황 파악에 나서는 동시에 자신의 경영 키워드를 강조했다. 김 사장이 내세우고 있는 내실 경영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고유가로 인한 원자재값 상승 등 수익성과 관련된 악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부적으로 비용절감 등 다양한 자구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 사장은 “외부 환경이 나쁘더라도 실적이 좋지 않은 것은 결국 회사 내부의 잘못에 기인한다.”며 임직원들이 아무리 어려운 경영환경이 예상되더라도 이를 쉽사리 수용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김 사장은 그러나 내실 경영 때문에 좀처럼 밖으로 나서지 않는 은둔 스타일의 경영인과는 사뭇 차별화된다. 우수 인재 채용 등 회사 경영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안에는 직접 나서는 적극적인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김 사장은 최근 미국 시카고와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해외 고급인력 채용설명회에는 직접 나서기도 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결혼도 하지 않은채 25년째 동굴서 사는 이유

    90세를 눈앞에 둔 독신남이 심산유곡의 동굴 속에서 나홀로 생활하는 까닭은? 중국 대륙에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세상을 등지고 20여년째 깊은 산속 동굴 속에 틀어박혀 은둔하는 늙은 ‘괴인(怪人)’이 등장,시선을 끌고 있다. 중국 중남부 후난(湖南)성 평장(平江)현에서 살고 있는 한 노인은 결혼도 하지 않고 깊은 산속 동굴에서만 25년동안 살아와 주변 사람들로 ‘도인’ 취급을 받고 있다고 장사만보(長沙晩報)가 4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도인’으로 통하는 사람은 올해 86살의 리지보(李基佰)씨.지난 1980년대 초반 입산한 뒤 지금까지 동굴에서만 도인과 같은 생활해왔으니 벌써 25년이나 되는 셈이다. 1981년 핑장현 석회공장에서 퇴직한 리씨는 지금까지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연애 한번 하지 않았으므로 무려 86년 동안 ‘완전한 동정’을 지키고 있어 ‘기네스북’로 등재감으로도 결코 손색이 없다. 그가 25년 동안 첩첩산중 산속의 동굴 속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에 대해 아직까지 명확하게 알려진 사실은 없다.리씨가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소문이 무성하다. 이들 소문 중에서 리씨가 여자를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한다는 것을 이곳 주민들의 대부분은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그 이유는 아직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그는 젊은 시절 여성을 만나기만 하면 멀리 피하는데만 급급했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예컨대 다른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좁은 길 위에 여자와 마주치면 리씨는 몸을 잔뜩 움추리고 한쪽에 비켜서서 여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부득이 여자의 얼굴을 쳐다봐야 할 때도 여자 얼굴을 쳐다보기도 전에 자신의 얼굴이 먼저 붉어지고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리씨의 부모는 자연히 안달이 날 수 밖에 없었다.그를 장가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였다.해서 인근 지역의 처녀들을 물색,선을 보여줘도 리씨는 도무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여러 수십 번 선보는 자리를 마련해도 언제나 도망 다니기에만 급급했다. 이에 따라 리씨의 부모들은 감히 그에게 선을 보라고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결국 ‘여자를 호랑이보다 더 두려워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리씨의 결혼대작전’은 포기해버렸다.이후 평생을 ‘완벽한 총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온라인뉴스부
  • ‘김형욱 사건’ 비밀 영영 묻히나

    1979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납치살해 사건에 깊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이상열 전 프랑스 주재 공사가 지난 3일 지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77세.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국정원 과거사위)는 지난해 5월 김형욱 사건의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씨를 현지에서 김씨 살해를 지시한 장본인으로 지목했지만, 이씨는 면담조사에서 “노(No)라고 했다고 기록해 달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이에 따라 김형욱 사건의 완전한 규명은 힘들게 됐다. 과거사위는 당시 중정의 프랑스 책임자였던 이씨가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지시를 받아 김씨를 파리 상젤리제 거리로 유인했으며 파리에 체류 중이던 중정 어학연수생 2명과 제3국인에게 김씨를 납치, 살해토록 지시한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이씨는 군 출신으로 1963년 ‘원충연 대령 반혁명사건’ 처리 과정에 김씨와 인연을 맺어 중정에 발을 들여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얀마·리비아·이란 대사를 지냈으며 서울 근교에서 은둔해오다 최근 폐렴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알려졌다.2004년 말 외아들을 잃었고 과거사위의 김형욱씨 사건이 보도된 뒤 큰딸마저 쓰러지는 등 불행한 말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발인은 5일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치러졌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명문여고 옛언니·동생 관계

    명문여고 옛언니·동생 관계

    자가용 한대를 은퇴한 옛 교장에게 선사했다. 불난 모교 교사(校舍)신축기금을 수십만원씩 기부했다. 모교의 생활관 건립기금으로 4백만원짜리 적금을 붓고 있다. 어느 남자동창회들 얘기가 아니다. 근래에 여고(女高)동창생들이 끼리끼리 모여 만든 화제들. 다음은 그래서 수소문해 본 명문여고출신(名門女高出身) 아무개와 아무개 부인들. 꾸준하게 모이기는 배화(培花) 육(陸)여사는 언니와도 동기(同期) 여자들의 경우 출신(出身)과 동창(同窓)을 대학에서보다 여고(女高)에서 꼽는 것이 상례(常例). 「언니」,「그애」의 친밀한 대명사를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 못버리는 사이가 여고(女高)동창들이다. 「뭔지 모르게 서로 통하는게 있어서」통성명하고 출신을 캐 보니까 동창이더라고 여자들은 곧잘 무릎을 치면서 감탄한다. 아무리 그처럼「얘,쟤」하면서 모이는 사이라도『여자 셋만 모이면 시끄럽다』는 심술궂은 익살은 저리 가라고 엄청난 일을 척척 해 내고 있다면 통 큰 신사들도 조금은 놀랄 것이다. 은퇴한 교장 이세정 (李世禎)씨에게 진명여고(進明女高)동창생들이 자가용「코로나」1대를 선사한 것이 금년봄, 몇해전 경기여고(京畿女高) 구교사가 불탄뒤 경운회(慶雲會)(동창회)가 동창모금을 해서 교사신축을 도운 것이 2백여만원. 역시 금년봄 숙명여고(淑明女高) 동창회인 숙녀회(淑女會)의「올드·타이머」들이 돈을 모아 해방전의 친한국(親韓國) 일인(日人) 교장 야촌성지조(野村盛之助)씨를 초빙했었는가 하면 배화여고(培花女高) 동창회는 모교돕기 4백만원 적금을 붓고 있다는 소문. 여자들의 눈칫돈으로는 꽤 큰 액수. 모두 명문이니까 시집들을 잘 가서 그렇지 뭐냐고 한다. 배화동창(培花同窓)=우선 팔자지수(指數) 최고로는 작년 10월 70년 창립기념을 가진 배화(培花)를 들 수 있다. 해방전후만 하더라도 김윤경(金允經)씨를 비롯한 애국자들이 은둔생활 겸 교편을 잡던 여학교였기 때문에「미션·스쿨」다운「프라이드」가 있었다. 게다가 아내 최고의 좌(座)인「퍼스트·레이디」육영수(陸英修)여사를 배출한 학교. 육영수여사의 언니 혜수(蕙修)여사도 한살 차이의 동기동창생. 명부에도 나란히 적힌 자매(姉妹)였기 때문에도 유명하다. 1942년 16회인 이 동기들은 전부터도 꽤 열심히 모이는 열성동창들이었다. 알뜰히 기금(基金)을 마련해서 벽촌에 책보내기 운동도 22세부터 25년간 체신부에서 일하면서 공무국장(工務局長), 전기통신시험(電氣通信試驗)소장을 지낸 안동렬(安東烈)씨(며칠전 퇴임)의 부인 김영연(金英蓮), 보광(保光)「알미·사슈」사장 서정호씨 부인 남정길씨. 변호사 고병국(高炳國)씨 부인 김함득(金咸得)씨. 이들을 중심으로 한달에 한번씩 모이는 16회 동창들은 조그만 기금을 마련해서『어깨동무』등 아동잡지를 벽촌국민학교에 보내는 등 복지사업을 소규모 해 왔다. 『공직생활이 시작된 뒤로는 오히려 만날 틈이 없는「퍼스트·레이디」지만 동기생(同期生)의「프라이드」가 그런 보람 있는 일을 찾게 한다』는 한 동창의 얘기. 「올드·타이머」로서 15년전 동창(同窓)교장추대의 움직임까지 있었던 장화순(張和順)씨는 쌍용양회회장(雙龍洋灰會長) 조병준(趙炳俊)씨 부인. 김성곤(金成坤)씨 장녀(長女)와 임송본(林松本)씨 3녀(女)를 며느리로 맞는 다복한 노부부(老夫婦)로 알려져 있다. 김상돈(金相敦)씨 부인 김자혜씨가 장화순씨와는 비슷한 또래의 노장파「엘리트」들. 이호(李澔)법무장관 부인 성낙은(成樂恩)씨 외국어대학(外國語大學)이사장 김여배(金與培)씨 부인 이옥경(李玉慶)씨. 작곡가(作曲家) 김순애(金順愛)씨. 정경화등 음악자녀를 키운 어머니 이원숙(李元淑)씨. 한국민예사(韓國民藝社)여주인 견덕균씨. 의학박사 장재섬(張在暹)씨. 황진주씨. 동창회장 박종옥(朴鐘玉)씨는 낙사회(樂師會)부녀부장. 중앙여중교장 김두원(金斗媛)씨 이들 모두가 쟁쟁한 배화50대(代)다. 문단(文壇)주변에서 배화는 드문 명문으로 꼽히는데 여류(女流)의 중진 장덕조(張德祚)씨가 배화출신인 것을 큰 자랑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명문다운 모습은 문예(文藝)쪽에도 뚜렷하다. 7월초 주부「클럽」의 초대 신사임당상을 받은 서예가(書藝家) 이철경(李喆卿)씨와 그 동생이며 역시 서예가인 이미경씨가 배화출신이다. 한전(韓電)부사장 진의종(陳懿鍾)씨 부인 이학(李鶴)씨도 자신의 서도(書道)로 이름이 알려졌다. 여담이지만 신사임당 본상(本賞)뿐만 아니라 장기(長技)백일장의 수필 서도부문 수상자들까지 배화출신이었다. 수상식(受賞式) 다음날 청와대 초청「파티」에서 육여사는 그것을 무척 흐뭇해 했단다. 외환은행장(外換銀行長) 홍승희(洪升熹)씨 부인 서귀숙(徐貴淑)씨. 상은(商銀)이사 강정한씨 부인 이설자(李雪子)씨. 장경순(張坰淳)국회부의장인 문순자(文順子)씨. 논산훈련소장 박남표(朴南杓)소장 부인 이송자(李松子)씨도 배화출신. 경기(京畿)출신엔 학자가 많아 박사 백여명중 30여명이 경기동창(京畿同窓)=똑똑하고「프라이드」높은 것이 자타공인(自他共認) 사실도 돼 있는 경기출신.『딸은 자랑하고 싶어서 경기 보내지만 며느리는 콧대가 높아서 경기를 피한다』는 속설(俗說)이 예비 시어머니들간에 떠돌 정도다. KS라는 별명으로 서울대학과 붙어 다니는 이름이 경기니까 그런 말들은 본인들의 자존심을 충족시킬지언정 조금도 상하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짭짤한 여류학자들을 꼽아보면 거의가 우리 동창 아냐!』라고 자랑한 한 경기출신 여교수의 학계(學界)「리스트」부터 추려보면 배정현(裵廷鉉)씨의 부인이고 숙대가정대학장 농학박사 김삼순(金三淳)씨. 일본체류중인 수학박사 홍임식씨. 최근에 귀국한 농학박사 이미순(李美淳)씨. 부부박사로 3년전 재국당시「매스·콤」의「탤런트」가 되다 시피했던 정치학박사 이범준(李範俊)씨. 윤일선(尹日善)씨의 따님인 사회학박사 윤은구(尹恩球)씨. 아무튼 알려진 여자박사 1백명중 3분지 1인 30여명이 경기여고 출신이라는 숫자가 동창회 명부에 올려져 있다. 이대의 이춘란(李春蘭)씨. 이남덕(李男德)씨. 안인희(安仁姬)씨. 나영균(羅英均)씨. 김세영(金世永)씨등의 실력파교수들. 서강대(西江大)의 김인자(金仁子)씨. 서울대에서는 농대(農大)의 김번옥씨. 사대(師大)의 현기순(玄己順)씨. 중앙대(中央大)의 윤서석(尹瑞石)씨. 서울여대학장이고 대한어머니회 회장인 고황경(高凰京)씨. 성신여사대 부학장 조기흥씨. 창덕(昌德)여고교장 현병진씨. 서울여중교장 최정현씨. 동대분여중교장 김영옥씨. 서울시 장학사 김정애씨. 전 보사부 부녀국장 주정일(朱貞一)씨. 미모의 여류작가 강신재(康信哉)씨. 예능(藝能)과 미모로 이름난 오위영(吳緯泳)씨의 딸 자매들 정주(貞珠) 덕주(悳珠) 현주(賢珠) 제씨가 나란히 경기출신. 실력파「디자이너」「노라·노」씨는 경기라는 딱지가 금상첨화 격의 위광(威光)이며 그가 키워 낸 후배 「디자이너」박충정(朴充貞)씨는 여고후배이기도 하다. 방향을 남편쪽으로 돌리면 체신부장관 김태동(金泰東)씨 부인 이재원(李宰遠)씨. 재무부차관 정소영(鄭韶永)씨 부인 박재옥씨. 외무부차관보 황호을(黃鎬乙)씨 부인이며「피아니스트」인 정영자씨. 차일석(車一錫) 서울시부시장 부인 백영자(白英子)씨. 지금은「카메라」의 초점에서 빗나간 왕년의 인물중에는 송요찬(宋堯讚)씨 부인 권영각(權寧珏)씨가 있고 김유택(金裕澤)씨 부인 박흥덕(朴興德)씨. 전상공부(前商工部)장관 이병호(李丙虎)씨 부인 한경선씨. 전재무부장관 천병규(千炳圭)씨 부인 박용주씨. 前문교부장관 현 고대교수 김상래(金相淶)씨 부인 김인숙씨. 이재학(李在鶴)씨 부인 이정수씨. 장도영(張都暎)씨 부인 백정숙(白亭淑)씨가 있다. [ 선데이서울 69년 8/10 제2권 32호 통권 제46호 ]
  • GS그룹 매출27조 재계7위 안착

    GS그룹 매출27조 재계7위 안착

    GS가 31일로 ‘홀로서기’를 시작한 지 1년이 됐다. 지난해 출범 당시 ‘우려반 기대반’ 분위기에서 이제는 ‘우려반’을 빼야 할 정도로 분가에 성공했다는 평이다. 기업이미지의 안정적인 착근과 주력 계열사의 만족스러운 경영실적이 이를 증명해준다. 또 LG시절과 달리 오너가(家)의 활발한 ‘바깥 행보’도 눈에 띈다. 그러나 GS의 고민거리도 적지 않다. 우선 차세대 ‘먹을거리’ 발굴이 쉽지 않다. 내부 유보금은 쌓여가지만 투자처를 찾기가 어렵다. 허씨가(家)가 동업 정신에 입각해 “LG와 겹치는 사업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GS의 주력이 또 내수업종이어서 경기 변동에 민감한 것도 풀어야 할 과제다. ●‘소통’하는 허씨일가 GS로 분가한 이후 허씨가(家)의 평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여전히 나서기를 꺼려하지만 그래도 진일보했다는 견해가 대체적이다. 이 가운데 허창수 회장은 GS의 ‘대표 얼굴’로서 지난 1년간 꽤 달라진 행보를 보여줬다. ‘은둔의 경영자’로 알려진 허 회장은 지난해 ‘현장 경영자’라는 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허 회장은 매월 한 차례씩 계열사 사장단 회의와 분기별로 모든 계열사 임원들이 참여하는 ‘GS 임원모임’을 주재하고, 사업계획을 조율하면서 그룹 전반을 진두지휘했다. 4월에는 사외이사들과 함께 GS칼텍스 여수공장을 직접 방문했으며, 여수 방문 직후 일본으로 이동해 환경친화적 신기술 경연장인 ‘아이치엑스포 2005’를 둘러봤다. 지난해 9월과 올 2월에는 신임 임원 교육과정에서 특강을 했으며, 지난해 12월에는 청와대에서 열린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간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허동수 GS칼텍스 회장도 활발한 대외활동을 통해 허씨가의 대표 경영인이자, 에너지 전문가란 인식을 심어줬다. 허 회장은 지난해 동북아 석유포럼과 한·중·일 비즈니스 포럼 등에 참석해 ‘에너지 CEO’로서 발언권을 확대했으며, 환경과 지속가능경영에도 꾸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기업문화는 인화? 급속한 지배구조의 변화와 외형적 성장을 구가한 GS이지만 기업문화만큼은 아직 ‘LG 색채’가 강하다. 내부에선 “1년이라는 시간은 독자적인 기업문화를 정착시키기에 짧은 시간”이라며 “더구나 LG의 인화정신은 이어갈 만한 기업문화”라고 입을 모은다. 외부에서 보는 GS의 이미지는 어떨까. 뚜렷한 색깔이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성공적인 브랜드 정착과 기업이미지 통합을 높게 평가했다. 재계 관계자는 “GS만의 독톡한 이미지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출범 1년만에 유통·에너지그룹이라는 이미지는 심은 것 같다.”고 했다. GS는 출범 첫해에 인지도 확보와 친근감 형성에 성공했다고 판단하고 2년차인 올해엔 GS만의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GS 관계자는 “지속적인 홍보와 광고를 통해 소비자들이 GS를 확실히 알게 됐다고 평가한다.”면서 “자체 소비자 인지도 조사에서 인지율이 99%에 달했다.”고 밝혔다. ●내수업종 탈피가 과제 계열분리 이후 GS가 가장 자랑스럽게 내놓는 부문이 경영실적.49개 계열사를 거느린 GS는 지난해 자산규모가 21조 7000억원으로 재계 자산규모 7위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매출은 27조 5000억원으로 전년(23조 1000억원) 대비 19% 늘었다. 순이익은 1조 5600억원을 기록해 전년보다 15% 증가했다. 경영실적으로만 보면 출범 1년만에 정상궤도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계열사 중에서 GS칼텍스는 지난해 매출액이 전년 대비 15% 늘어난 16조 2339억원을 기록했으며, 매출의 48%가량이 수출에서 발생해 내수 기업 이미지에서 벗어났다.GS건설은 수주량이 전년보다 36% 증가한 8조 2403억원에 매출은 39% 증가한 5조 6308억원을 기록했다. GS는 올해 에너지와 유통, 건설 등 주력사업의 성장을 위해 2조원을 투자키로 했으며, 매출은 지난해보다 9% 늘어난 30조원을 달성할 계획이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신증권-양재봉 명예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신증권-양재봉 명예회장家

    주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큰 大 믿을 信’ 하면 대신증권을 단박에 떠올린다. 한때 큰 주목을 받았던 광고 카피가 알반인의 뇌리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숙한 이름만큼 회사의 규모나 역사는 일반인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대신증권은 증권업계에서 여타 대형 증권사와 다른 몇가지 ‘독자적인’ 위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선 재벌 계열이나 은행 계열이 아니면서 40년간 업계 상위권을 지켜왔다.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이후 재벌이나 은행을 끼지 않은 증권사가 살아남기 힘든 환경속에서도 여전히 ‘빅5’ 안에 든다. 대신증권은 또 선진국형 증권 시스템을 가장 먼저 도입한 곳으로 꼽힌다. 증권사 흑판에 분필로 시세를 적던 시절 최초로 ‘전광판’을 도입했다. 이후 ‘온라인 거래의 최강자’란 명성을 얻었고 사이버 누적거래 1위 자리를 지켜 오고 있다. 금융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3세 경영’을 잇게 된다.‘거상(巨商)의 꿈’ 하나로 빈손으로 대신증권을 일군 양재봉(81) 명예회장의 역할을 현재 아들과 며느리, 사위가 잇고 있으며 머지않아 손자가 이 역할을 대물림받을 전망이다. ●빈손 ‘송촌’ 거상의 꿈 양 명예회장은 1925년 전남 나주군 나주읍 송촌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 대한 애착으로 호를 ‘송촌(松村)’으로 지었고 훗날엔 이 명칭을 딴 ‘송촌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가 거상의 꿈을 품기 시작한 것은 송촌을 떠나 당시 ‘수재의 집합소’로 불리던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15대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나주에서 간 유일한 합격자’가 된 양 명예회장은 이곳에서 ‘일본인들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공부하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꿈도 키웠다. 그의 첫 목표는 한국은행 전신이었던 조선은행 입사였다. 양 명예회장은 “대학 졸업자들도 번번이 낙방하는 판에 상업학교 재학 중에 그 좁은 관문을 뚫어 자부심이 컸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 때 생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은 모험에 대한 열망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그는 안정된 은행원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거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장사를 할 기회를 살피며 아이디어만 생기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목포와 나주 일원의 쌀을 사서 부산에 파는 미곡상을 하기도 했고, 양조 사업에도 손을 댔다. 겁없이 뛰어든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다시 조흥은행 신입 은행원의 자리로 돌아와야 했고, 이후 여러 은행을 거치면서도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끊임없는 새 사업 궁리끝에 시작한 극장 사업에서 성공하면서 그는 자신감을 되찾게 된다. 금융업 경영자로서 본격 나선 것은 한일은행 서울 청량리 지점장으로 재직하던 1970년대초 무렵이다. 지점장 부임 1년도 안 돼 예금 계수를 2배로 만들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어 단자회사 설립을 권유받던 양 명예회장은 미원그룹 임대홍 회장, 해태제과 박병규 사장과 함께 ‘대한투자금융’을 설립했다. 증권 회사 설립은 그로부터 1년 뒤 일본 방문을 계기로 추진한다. 도쿄에 있던 ‘노무라증권연구소’의 선진적 체계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돌아오자마자 증권업 진출을 서둘렀다. 당시 정부는 소규모 증권사 난립을 경계해 새 증권회사 설립 허가를 꺼려했다. 양 명예회장은 75년에 직원 11명의 ‘망해가던’ 증보증권을 전격 인수한다. ●망해가던 증보증권 잘나가는 대신증권으로 증보증권은 경영 실적이 형편없는 하위권 회사였지만 그는 ‘꿈에도 그리던 증권회사를 세웠다.’는 생각에 희망에 넘쳐 있었다. 우선 회사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대신증권’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름을 바꾼 뒤부터 대신증권은 연일 승승장구했다.75년 대기업들이 탐내던 명동 국립극장 입찰에 성공해 ‘주식 투자자들의 베이스 캠프’로 만들었다. 77년 양 명예회장은 대한투자금융 전무이사직을 버리고 대신증권 사장으로 나섰다. 이어 업계 최초로 ‘전광시황 속보판’을 세우는 등 혁신을 거듭한 끝에 업계 2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성공 가도를 달리던 양 명예회장에게도 암흑기는 찾아온다. 사장 취임 4개월만에 회사 영업부장이 고객과 회사의 돈을 빼돌려 피해자만 100명에 이르는 대형 금융사고를 일으켰다. 대신증권과 자신의 신뢰에 엄청난 손상을 입힌 사고였다. 그 여파가 얼마나 컸던지 양 명예회장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3년간 시골 농장에서 가축을 기르며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다시 증권계로 돌아온 것은 81년. 대신증권의 대주주들이 양 명예회장을 찾아와 쓰러져가는 대신증권을 살려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가 대신증권 사장에 복귀했을 때, 회사는 이미 자본잠식 상태였다. 그는 “죗값을 치르겠다.”는 심정으로 일을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흐트러진 임직원들을 단합시키는 것이었다. ‘구두쇠 100일 작전’,‘개미작전’ 등 전 직원의 단합을 유도하기 위한 각종 아이디어를 짜냈다. 잘 나가던 대한투자금융 주식을 주고 미원 임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대신증권 주식을 인수, 최대 주주가 됐고, 회사 재건에 ‘올인’했다. 다행히 80년대 중반 국내 증시는 최고 활황의 시기를 맞이한다. 양 명예회장은 대신증권의 회생에 성공해 84년 대신경제연구소,86년 대신개발금융,87년 대신전산센터,88년 대신투자자문,89년 대신생명보험,90년 송촌문화재단,91년 대신인터내셔널유럽 등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대신을 명실상부한 종합금융그룹으로 만들었다. ●신뢰 중시 경영으로 IMF 극복 하지만 그에겐 또 한번의 어려움이 닥친다.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연 20%대의 살인적인 고금리 상황이 발생해 수많은 기업이 어려움에 빠졌다. 대형 증권사인 동서증권, 고려증권이 환매 사태로 하루아침에 부도에 이르면서 ‘재벌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비재벌 단독 증권사인 대신증권에도 이 분위기는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대신증권은 단기 차입금을 모두 상환해 빚이 없는 상황이었다.90년대 말 펀드 열풍으로 시중의 자금도 증권사로 몰렸다. 하지만 양 명예회장은 회사채를 편입한 수익증권 판매를 전면 중지시키고 안전한 국공채 위주의 채권형 펀드만을 취급하라고 지시한다. 예상은 맞았다. 대우그룹 부도, 하이닉스 사태,SK사태 등이 연이어 터지며 회사채로 수익증권을 판 증권사들은 잇따라 위기를 겪었지만 대신증권은 안전한 국공채를 편입한 수익증권만 판매한 덕에 손실을 입지 않았다. 결국 90년대 초반 업계를 대표하는 5대 대형사의 주인이 모두 바뀔 정도로 부침이 심한 증권업계에서 대신증권은 살아남았다. 양 명예회장이 이처럼 오뚝이처럼 일어선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업부문에 대해 과감하게 투자하는 결단력 때문이었다. 오래 전부터 전산부문이 증권회사의 성장을 이끌 것으로 본 양 명예회장은 전산부문에 과감한 투자를 감행했다. 초기 집중 투자를 통해 온라인거래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로 인해 99년 이후 온라인 거래가 폭발적으로 늘자 대신증권은 또 한번의 중흥기를 맞게 됐다. ●내실화 일군 고 양회문 회장 양 명예회장은 2001년 현업에서 물러나고, 차남인 양회문(2004년 작고, 당시 53세) 전 회장에게 회사 경영을 물려줬다. 양 명예회장의 4남4녀 중 차남인 고 양 회장은 7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신증권 공채 1기로 입사했다.10년동안 지점영업에서부터 인수, 법인, 자산운용, 기획, 인사 등 증권 전부문에 걸쳐 실무경험을 쌓으면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고 양 회장은 회장 취임후 외형 성장보다는 내실을 다지기 위해 재무 구조 정비에 나섰다. 생명, 정보통신 등을 계열 분리하고 대신증권, 투신운용, 경제연구소 중심으로 그룹을 정리했다. 그는 2002년 초 폐암진단을 받은 후 2004년 작고 때까지 약 3년간 초인적인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리더십을 발휘했다. 대신증권이 외국인 지분율이 가장 높은 내실있는 회사로 재탄생한 것은 고 양 회장의 공이 크다는 게 안팎의 평가다. 양 회장 작고 이후 대신증권을 이끄는 주역은 고 양 회장의 부인이자 양재봉 명예회장의 둘째며느리인 이어룡(52) 회장이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이 회장은 남편이 투병생활을 하던 3년여동안 집중적으로 경영수업을 받은 뒤 2004년 10월 회장에 취임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종종 비교되는 이 회장은 특유의 세심함으로 회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 달만에 109개 전 영업점을 순회방문하면서 직원들을 격려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뿐만 아니라 강단도 함께 갖췄다. 최근에는 자본통합시장법 제정에 따라 일본의 SPARX그룹과 자본 및 업무 제휴를 통해 향후 종합금융투자회사로의 전환에 대비하고 있다. 대만의 IBTS와 제휴하는 등 외국 금융기관과 국제적인 제휴를 진두지휘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 회장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며 조용히 책읽기를 좋아한다. 남편의 투병 중에는 국내·외에서 발간된 대부분의 암 관련서적을 섭렵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서울과학종합대학 최고경영자과정에 다녔다. 동기로는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유한킴벌리 문국현 사장,SK텔레콤 김신배 사장이 있다. 이 회장과 함께 대신증권의 제2도약을 이끌 인물로는 양재봉 명예회장의 사위이자 차녀 회금(52)씨의 남편인 노정남(53) 현 대신증권 사장이 있다. 연세대 행정학과를 나온 노 사장은 지난해 10월 대신증권 사장에 취임했다. 노 사장은 77년 한일은행에 입사한 뒤 29년간 금융업에만 종사해온 탁월한 금융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87년 대신증권에 입사해 영국 런던사무소장·지점장,IB담당임원, 상품운용본부장, 국제본부장 등을 두루 거쳤다.99년부터 6년 동안 대신투신운용 대표이사로 재직해 왔다. 런던 소재 코리아유럽 펀드의 이사를 지내는 등 국제적 감각이 뛰어나고 강력한 추진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신증권의 1대 주주이자 실질적인 대신증권의 차세대 주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람은 양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이어룡 회장의 아들인 홍석(25)·홍준(22)씨다. 장남인 홍석씨는 현재 서울대 경영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며, 차남 홍준씨는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이다. 홍석씨는 올해안에 대신증권에 입사해 아버지인 고 양회문 회장이 밟았던 것처럼 말단에서부터 시작해 경영 수업을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첫째이자 장녀인 정연(27)씨는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외국계 컨설팅회사 베어링포인트에서 근무하다 현재 미국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단출한 혼맥… 정략결혼은 없다 양재봉 명예회장은 부인 최갑순(78)씨와의 사이에 고 양 회장 외 3남4녀를 두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연애결혼을 해 평범한 집안에 시집·장가를 갔다. 양 명예회장이 자식들의 의사를 존중해 정략적 결혼을 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송촌 회장 및 전 광주방송 회장을 역임한 장남 회천(57)씨는 대구 교육자 집안 출신의 문홍근(58)씨와 결혼했다. 회천씨는 처음부터 대신그룹에 근무하지 않고 대신전기 등 제조업체를 경영했다. 문홍집(56) 대신경제연구소 사장이 회천씨의 처남이다. 문 사장은 비즈니스 위크에서 아시아를 이끌 50인으로 선정하기도 한 금융 IT부문 한국 최고의 전문가로 꼽힌다. 대신증권 IT본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개발한 온라인거래 시스템인 ‘U-사이보스’는 지금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격찬을 받는 등 전산부문을 한국 최고로 이끈 실력자로 평가받고 있다. 둘째인 고 양 회장과 현 이어룡 회장 역시 연애결혼을 했다. 이 회장은 충북 괴산 출신으로 부친이 한학자였다. 이 회장 동생인 제봉(43)씨는 대학 교수이고, 제영(41)씨는 대신증권 IB 1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3남인 용호(48)씨는 코스닥 상장 창업투자회사인 대신개발금융회장과 아인스 회장을 역임했다. 아인스는 세계 유명 건축물 모형 전시시설인 경기도 부천의 아인스월드를 운용하는 회사다. 서울시 공무원 집안의 조선미(45)씨와 결혼해 2남1녀를 두고 있다. 4남인 정현(37)씨는 현재 코스닥 상장 금융 IT전문 회사인 대신정보통신 전무이사로 있다. 부인 이현아(30)씨는 조선내화 이훈동 회장의 손녀이자, 민주당 이정일 국회의원의 딸이기도 하다. 장녀 영애(59)씨는 대학때 연애를 통해 만난 나영호(60) 현 경원대 겸임교수와 결혼했다. 재무학 박사인 나씨는 대신경제연구소 사장으로 재직하다가 2005년 은퇴했다. 차녀 회금씨와 노정남 대신증권 사장도 연애결혼했다. 노 사장은 한국행정연구원장을 역임했던 노정현(77) 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의 친동생이다. 3녀 미경(42)씨는 이시영(46) 현 중앙대 교수와 결혼했다. 이시영 교수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박사를 받은 뒤 중앙대에서 사회과학대학 상경학부 교수와 동대학 국제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이 교수의 부친은 전북지사와 공보부 차관을 지낸 이춘성씨다. 4녀 회경(41)씨는 이재원(46) 현 대신정보통신 대표이사와 결혼했다. 이 대표는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93년부터 금융솔루션 업체인 대신정보통신에 근무하고 있다. s123@seoul.co.kr ■ 슬로건 ‘큰大 믿을信’ 어떻게 지었나 대신증권을 오늘의 위치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은 ‘큰大 믿을信’이라는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양재봉 명예회장의 작품이다. 양 회장은 증보증권을 인수해 새 회사를 만들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믿음이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신념으로 ‘대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큰 대 믿을 신’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1986년부터다. 당시 증권 산업은 성장하고 있었지만 국민들의 증권사에 대한 인식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양 회장은 주식 투자의 대중화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회사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홍보활동을 강화했다. 86년 3월 처음으로 TV CF를 제작했지만 시청자에게는 크게 파고 들지 못했다. 새로운 홍보전략을 구상하던 양 회장은 어느 날 열차를 타고 가던 중 열차바퀴가 레일과 마찰하면서 일어나는 소리가 매우 경쾌하다고 느낀다. 그는 “마치 옛날 서당에서 ‘하늘천 따지’하고 천자문을 읽을 때의 리듬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소리가 곧 우리 정서에 잘 맞는 3·3조 가락과 닮았다는 생각에 바로 큰 대 믿을 신 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이후 TV 광고에는 ‘큰 대 믿을 신’ 이라는 슬로건을 빠짐없이 사용하게 됐다. 이 슬로건은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증권회사 하면 ‘큰大 믿을信=대신증권’을 떠올리게 할 만큼 히트했다. 이후 ‘큰大 믿을信’은 20여년간 대신증권 광고의 슬로건으로 사용되면서 대신증권을 증권명가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s123@seoul.co.kr ■ 금융통 대거 배출한 ‘증권계 사관학교’ ‘증권업계 사관학교’로 불리는 대신증권은 금융계에서 내로라할 만한 인물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주택은행장과 중소기업은행장을 지낸 박동희(76)씨, 정해왕(59)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장, 김정태(59) 전 국민은행장, 이강원(56) 한국투자공사 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1986년 대신경제연구소에 대표이사로 입사한 박 전 중소기업은행장은 대신개발금융, 대신투자자문, 대신증권 대표이사를 거쳐 대신그룹 부회장을 역임했다. 정 금융경제연구원장은 미국 켄터키 주립대에서 경영대 조교수로 있다가 대신경제연구소 상무이사로 입사,89년부터 4년간 대신경제연구소를 이끌었다.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도 대신증권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조흥은행 출신인 김 전 행장은 양재봉 명예회장이 설립한 대한투자금융에 74년 스카우트됐다. 양 명예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그는 대신증권 비서실장으로 발령났고,80년 34세의 나이로 대신증권 최연소 임원으로 승진했다. 이강원 한국투자공사 사장은 89년 대신증권 국제영업담당 상무이사로 대신증권에 입사했다. 퇴사 후 아시아개발은행을 거쳐 외환은행장, 굿모닝 증권 사장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이밖에 이준호(61) 대한화재 사장은 77년 대신증권 종합기획실 실장으로 입사한 뒤 이사, 상무이사를 거쳐 94년에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김한(52) 메리츠증권 부회장은 89년 대신증권에 입사한 뒤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이사직에 올랐다.97년까지 대신증권에서 국제본부장, 인수본부장, 기획본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증권계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s123@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향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9년만에 신작

    ‘사랑을 생각하다’라니. 한순간에 풍덩 빠지든 서서히 스며들든, 사랑은 ‘하는 것’이지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향수’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9년 만에 발표한 신작 ‘사랑을 생각하다’(강명순 옮김, 열린책들 펴냄)는 인류 탄생 이래 모든 예술이 줄기차게 재생산해 온 사랑의 변주곡 대신 사랑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 정색하고 파고든 에세이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려 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은 쥐스킨트는 스탕달과 괴테, 클라이스트와 바그너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세계에서 드러난 사랑의 다양한 유형과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지적인 통찰력으로 사랑의 의미를 차근차근 짚어가던 작가의 여정은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사랑이란 불멸의 주제에 가닿는다. 죽은 연인을 데려오기 위해 죽음의 세계인 하데스로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의 신화가 그것이다.‘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좌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아니, 바로 그 좌절 때문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더 완전한 인간이었다.’(84∼86쪽) ‘향수’‘콘트라베이스’ 등의 소설에서 맛보던 짜릿한 이야기의 매력은 없지만 대단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은둔 작가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이 반가워할 만한 책이다. 이 책과 함께 출간된 ‘사랑의 추구와 발견’은 오르페우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가의 동명 시나리오와 영화감독 헬무트 디틀의 에세이를 묶은 것이다.2004년 완성된 영화는 지난해 독일 뮌헨에서 개봉됐다. 각권 7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儒林(53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5)

    儒林(53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5)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5) 율곡이 본격적으로 불교의 교리를 그 내용에 있어서 비판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율곡의 나이 40세 되던 해 9월. 율곡은 선조를 위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서하여 올렸는데, 이 글속에서 율곡은 젊은 시절 자신이 심취하였던 달마의 선불교를 비판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살피건대 부처의 말에는 정밀한 것도 있고, 조잡한 것도 있습니다. 조잡한 것은 다만 윤회나 인과응보의 말로써 죄와 복을 확산케 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고 협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양을 바치도록 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그 정밀한 것에 있어서는 마음(心性)을 지극하게 논하였는데, 이(理)를 마음으로 여겨서 마음을 모든 법의 근본이라 하고 또한 마음을 본성이라 여겨서 본성을 견문(見聞)작용이라 하고, 적멸(寂滅)을 큰 취지로 하여 하늘과 땅, 만물을 헛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세상을 벗어난 것을 도리라 하고 인륜과 도리를 질곡(桎梏)이라 하였습니다. 그 공부의 요점은 ‘문자를 내세우지 않고 곧바로 인심을 가리키며 본성을 보면 부처님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갑자기 깨달은 뒤에 바로 천천히 닦는 것을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하였고, 만일 뛰어난 사람이면 곧바로 깨닫고 바로 수도한다 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하였습니다. 달마가 양나라의 무제(武帝) 때에 중국에 들어와 비로소 그 법을 전하였는데, 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것은 명종 9년(1554년) 봄 3월, 성혼과 도의지교를 맺은 직후였다. 그리고 율곡이 금강산에서 하산하였던 것은 이듬해 가을이었으니, 율곡은 금강산에서 1년 반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은둔생활을 보낸 것이었다. 강릉의 외갓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도 율곡은 두개의 시를 남긴다. 그 첫 번째는 ‘우연히 시를 짓는다(偶成)’는 짧은 시. “취미를 얻어선 저절로 근심을 잊는데, 시를 읊자니 글귀가 이루어지지 않네. 꿈길에 잠깐 고향 산천 돌다 보니, 가을 강 비에 낙엽만 지고 있네.”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율곡은 재빨리 불교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처럼 보인다. 마치 도가 깊은 고승처럼 현란한 선시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었던 금강산에서와는 달리 율곡은 ‘시를 읊으려 해도 글귀가 이루어지지 않음(吟詩不成句)’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정은 고향인 강릉의 옛 이름인 임영(臨瀛)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다른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은 ‘임영으로 향하다가 상운정에서 쓰다(向臨瀛祥雲亭)’. 시속에 나오는 상운정(祥雲亭)은 고려 말의 문신 안축(安軸)이 관동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노래하였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나오고 있는 설악산의 동쪽과 낙산의 서쪽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 일찍이 안축이 ‘자색 봉황타고 붉은 난새를 탄 아름다운 신선 같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현을 뜯고 있다.’고 관동별곡에서 노래할 만큼 관동의 명승지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누각인 것이다.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광그룹-故 이임용 창업주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광그룹-故 이임용 창업주家

    태광그룹은 겉의 화려함보다 내실을 추구한다. 재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사옥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서울 중구 장충동 옛 동북고등학교 교사(校舍)를 30년여년 동안 그룹 사옥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타 재벌과 달리 초고층 호화 사옥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재계 서열 30위권이면 서울 광화문 한복판이나 강남에 번듯한 빌딩을 사옥으로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룹 관계자는 “6층짜리 학교 건물이지만 아직 쓸 만하다.”고 말한다. 겉보다 속을 중시하는 태광의 사풍이 여실히 읽혀진다. 이같은 경영철학은 국내 재벌 가운데 재무구조가 가장 탄탄한 그룹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이는 창업주인 고(故) 이임용 회장 때부터 관통하는 ‘내실경영’이 면면히 이어진 결과다. ●대쪽 같은 선대 회장의 결혼과 창업, 그리고 성장 창업주인 고 이 회장은 지난 1921년 경북 영일군에서 중농이었던 부친 이우식씨와 모친 정막랑씨 사이의 3남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 창업주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간조(簡井)실업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등으로 일본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이듬 해인 42년 귀국길에 오른다. 이후 부친의 권유로 당시 22세 청년이던 그는 동네에 사는 이선애씨와 혼례를 올렸다. 신부 이씨는 이 창업주의 부친과 친분이 두터웠던 한동네 유지인 이송산씨의 맏딸이다. 민주당 총재를 지낸 이기택씨와 ‘창업 동지’ 이기화(태광그룹 회장까지 지냄)씨는 이씨의 남동생이다. 이기화씨는 부산고·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뒤 이 창업주와 오늘의 태광그룹을 일궜다. 이 창업주는 야당 거물이던 이기택씨와 처남매부지간이란 이유로 군사정권 시절 여러차례 세무조사를 받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처남이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게 이 창업주에게는 결코 득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기업은 절대 정치와 연결돼선 안 된다.”며 사업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찍히면 죽던 서슬퍼런 군사정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정경 분리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베테랑 세무조사 요원들을 투입, 몇 날 며칠을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기업사에 전례없는 일이다. 이씨와 중매 결혼한 이 창업주는 공직(면사무소) 생활을 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그러던 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다. 바로 6·25전쟁이다. 1951년 공직을 접은 이 창업주는 전쟁 이듬해인 1954년 부산 문현동에 모직 공장을 차리고 태광산업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가 바로 태광그룹의 모체다. 이후 1961년 전 삼호그룹 조봉구 회장과 동업을 시작했으나 동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창업주는 조 회장과 결별한 뒤 부산 가야동에 새로운 공장을 신설하며 태광산업사를 주식회사로 출범시킨다. 초기 태광은 이 창업주와 이선애씨가 함께 일궈냈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이선애씨가 부산에서 소규모 직물공장에 손을 댔고 기업이 커지면서 이 창업주는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기업경영에 합류했다. 이후 태광은 섬유를 기반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 개발과 수출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아크릴을 생산하던 태광은 눈부신 호황을 누렸다. 당시 아크릴은 양모 대체품으로 수요가 많았고 경쟁업체가 적어 태광의 고속 질주를 견인했다. 이 창업주는 스판덱스·나일론 등으로 품목을 다양화했다. 섬유 호황기인 1970년대까지 내놓은 제품마다 시장의 돌풍을 일으켜 국내 최대의 섬유업체로 성장했다. 태광은 이 시기에 동양합섬, 고려상호신용금고, 흥국생명, 대한화섬, 천일사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화섬·석유화학에 금융이 붙으면서 태광은 본격적인 성장과 함께 그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도약기를 맞은 셈이다. ●휴일에도 은행 이자는 큰다 태광그룹은 은행돈을 거의 안 쓰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타계한 이 창업주의 근검절약과 소탈함은 재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타계하기 전까지 이 창업주가 살던 서울 장충동 2층 양옥집은 지금도 부인 이선애(78)씨가 지키고 있다. 이 집에는 30∼40년 된 옛 가구들이 그대로 있다. 회사 관계자는 “현대 정주영 회장에 버금갈 정도로 검소했다.”고 이 창업주를 회고한다. 그는 해외이든 국내이든 출장길에는 새로 지은 고급 호텔을 이용하는 법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십년 동안 단골로 다닌 낡은 호텔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점심도 설렁탕 한 그릇으로 후다닥 끝낼 정도로 무척 소탈했다. 이 창업주는 “은행돈을 빌리면 토·일요일 등 은행이 쉬는 동안에도 이자는 불어난다.”며 무차입 경영을 추구했다. 돈을 빌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지도 않았다. 번 만큼 투자한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매출 규모 1조 3000억원인 모기업 태광산업의 부채 비율이 거의 제로인 것도 이같은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 절약 경영과 남의 돈을 빌려 쓰지 않고 수익만큼 투자하는 실속경영은 그룹을 더욱 튼튼하고 알차게 만들었다. 인수한 부실기업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건실한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창업주는 또 외부에서 전문경영인을 영입하지 않고 공채 출신을 키워 경영진으로 기용했다. 기획력과 업무 추진력을 인정받은 그의 처남 이기화씨는 이 창업주의 사후 태광그룹 회장에까지 올랐다. 또 공채 출신인 류석기·강석명·최운형씨 등이 중용됐다. 그의 이런 원칙적이고 대쪽 같은 성품은 자녀들의 혼사로도 이어진다. ●화려한 혼맥…‘연애결혼은 없다´ 이 창업주는 생전에 모두 6명의 자녀를 뒀다. 그러나 그는 자녀들의 연애결혼을 절대 허용치 않았다. 그는 평소 사대부가의 유교적인 면을 강조해와 전통 관습을 무척 중시했다. 재벌가의 혼사가 연애결혼보다 중매에 무게를 두고 있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3남3녀를 하나같이 중매결혼시켰다는 것은 가풍을 짐작케 한다. 이 창업주는 집안 어른이나 친지들이 지체 있는 가문의 훌륭한 배우자를 찾아내 중매를 넣어 혼사를 성사시키는 방식으로 자녀들의 혼사를 치러왔다. 이처럼 중매 일변도로 자녀 혼사를 치른 것은 중매야말로 좋은 가문의 좋은 배우자를 폭넓게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태광그룹 2세들의 혼맥은 서민의 가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격이 높고 화려하다. 태광의 사돈가가 사람들은 당시에 내로라 하는 정·관·재계의 유력 인사다. 하지만 이 창업주는 자녀들 혼사로 정·관·재계의 거물들과 사돈이 되었지만 이들을 경영에 끌어들이는 법은 결코 없었다. 지금도 모기업인 태광산업의 사장은 태광 신입사원 출신인 이화동(62)씨다. 이 창업주는 이선애씨와의 사이에 식진(사망)·영진(사망)·호진(44) 3형제와 경훈(52)·재훈(50)·봉훈(48) 세 자매를 뒀다. 이 창업주의 개혼(開婚)인 식진씨의 혼사는 비교적 평범한 집안과 이뤄졌다. 그러나 이후로는 모두 유력 인사와 사돈을 맺는다. 이 창업주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태광산업 영업과장으로 있던 장남 식진씨를 1975년 개인사업을 하던 진재홍씨의 맏딸 임순(54)씨와 결혼시켰다. 식진씨는 태광산업 부회장까지 역임했다. 식진씨의 장인 진씨는 면방업체인 경방에서 일하다 독립했다.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공대 동창회장을 맡기도 했다. 식진씨 부부는 정아·성아·원준 등 1남2녀를 뒀다. 장녀 정아(31)씨는 결혼했다. 연세대 상대를 나온 차남 영진씨는 어머니 이선애씨 친구의 중매로 장상준(전 동국제강 회장)가의 4남2녀 중 막내딸인 옥빈(54)씨와 1976년 결혼했다. 태광산업에 입사한 뒤 계열사인 대우파일, 흥국생명, 고려상호신용금고 등에서 중역으로 활동했다. 이들 사이에는 성준·성은 남매가 있다. 현재 그룹 회장을 맡고 있는 호진씨의 부인 신유나(42)씨는 롯데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71·일본 산사스식품 회장)씨의 맏딸이다. 호진씨는 대원고·서울대 경제학과(81학번)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 경영학석사(MBA), 뉴욕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슬하에 현준·현나 남매가 있다. 이 창업주의 세 딸은 모두 재원으로 꼽힌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세자매 모두 이화여대 선후배이라는 점이다. 이는 유교적 관습을 중시하는 이 창업주의 독특한 자녀 교육관이 스며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태광의 혼맥은 이대 출신의 세 딸을 출가시키면서 보다 화려하게 뻗어 나간다. 장녀 경훈씨는 진주의 대지주이자 LG그룹의 창업 멤버인 허만정가의 막내 며느리가 됐다. 경훈씨의 남편은 유통전문기업 GS리테일 대표인 허승조(56)씨다. 이들의 결혼은 경훈씨 친척 할머니의 중매로 이루어졌다. 이임용가에서 허만정가로 이어가면 조홍제-송인상-신덕균가와 만난다. 이연두-박치현-김준성-김우중가와도 연결된다. 경훈씨는 남편 허승조씨와의 사이에 지안·민경 자매를 두고 있다. 이 창업주는 차녀 재훈씨를 양택식 전 서울시장의 장남 원용(56)씨와 결혼시켰다. 원용씨는 현재 경희대 의대 교수로 있다. 이 창업주는 재훈씨를 양택식가로 출가시키면서 정·관계 유력인사와 연결된다. 양택식가를 통해 홍진기-노신영-정주영가로 연이 닿는다. 김한수-김복동가로도 이어진다. 특히 이 창업주는 이 결혼을 통해 업계의 라이벌인 한일합섬의 창업주 김한수가와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된다. 재훈씨 부부는 서윤·서정·서인·혁준 등 1남3녀를 두고 있다. 3녀 봉훈씨는 한국베링거인겔하임 한광호가의 외아들 태원(49·한국베링거인겔하임 회장)씨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는 동우·상우·정우 3형제가 있다. ●뉴미디어·금융으로 21세기를 준비 태광은 1996년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그 해 11월 창업주인 이 전 회장이 75세를 일기로 타계하면서 3남 호진씨가 경영 전면에 부상한다. 호진씨는 이 창업주가 그룹의 후계자로 일찍 점찍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태광산업 사장에 이어 2004년 태광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호진 회장은 섬유가 주력인 태광의 업종에 메스를 댄다. 추진력에 관한 한 부친 못지않은 ‘신형 엔진’ 이 회장은 ‘조용한 기업’ 태광에 거센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었다. 변화의 추동 세력은 MSO로 표현되는 종합유선방송과 금융 등 두 갈래다. 이 회장은 미래 태광의 신성장 동력이 여기에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1조 5000억원 수준으로 알려진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과감한 인수·합병(M&A)에 나서고 있다. 이는 섬유와 화학 중심에서 뉴미디어와 정보기술(IT), 금융기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미디어 기업으로의 급성장이다. 이 회장은 케이블TV 회사인 ‘태광 티브로드’를 세웠다. 티브로드는 태광, 미래, 통신 등의 앞글자 ‘T’와 브로드 캐스팅, 브로드 밴드의 ‘브로드’를 합성해 지은 이름이다. 티브로드는 지역 케이블TV 20개를 거느리고 있다. 가입자 300만명, 시장 점유율 24∼25%로 명실상부한 국내 1위다. 아직까지는 많은 수익을 내고 있진 못하지만 뉴미디어는 태광의 미래를 밝혀줄 한 축임에 틀림없다. 이 회장이 2003년 이후부터 미디어 부문에 집중 투자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다. 뉴미디어는 진헌진 티브로드 사장과 이상윤 안양방송 및 수원방송 사장이 이끌고 있다. 진 사장은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이 회장의 대학교 동창이다. 2002년 이 회장이 직접 스카우트했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다. 금융 쪽도 더욱 살을 붙여야겠다는 게 이 회장의 전략이다. 현재 흥국생명, 고려상호저축은행, 태광투자신탁운용으로는 아무래도 무게가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쌍용화재와 예가람상호저축은행, 피데스증권 등의 인수작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태광산업은 지난달 쌍용화재와 신주인수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태광산업은 쌍용화재 지분의 50% 이상을 확보했다.‘흥국생명+쌍용화재’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의 근거는 생명보험·손해보험 상품의 교차 판매다. 태광은 쌍용화재 인수 열기가 식기가 무섭게 피데스증권 인수에 나섰다. 피데스증권은 현재 주식거래 업무만 하는 중소형 증권사지만 태광은 이 회사를 인수해 종합 증권사로 변신시킬 계획이다. 예가람상호저축은행은 서울·경남에 기반을 둔 저축은행이다. 이들 기업의 인수작업이 순조롭게 매듭지어지면 태광그룹은 생보, 손보, 증권, 투신운용, 저축은행까지 아우르는 종합금융그룹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금융 쪽은 류석기 흥국생명 부회장과 김성태 흥국생명 사장의 투톱 체제다. 김 사장은 씨티은행 출신으로 LG증권 사장을 지냈다. 태광산업 출신인 오용일 흥국생명 전무도 눈여겨 볼 전문 경영인이다. 이호진호(號)의 태광은 대변신을 꿈꾼다. 현재의 청사진이 조만간 구체화되면 태광그룹은 화섬 석유화학, 금융, 미디어, 레저(태광관광개발), 육영재단(일주학술문화재단, 일주학원)으로 새 틀을 짜게 된다. ykchoi@seoul.co.kr ■ 정도·신의는 기업의 생명 ‘정도’와 ‘신의’.50여년 전 부산의 한 작은 시장에서 출발해 오늘의 태광그룹을 일군 창업주 고 이임용 회장이 금과옥조처럼 여긴 명제다. 이를 지키지 않는 거래처와는 두번 다시 거래를 이어가지 않았을 정도다. 정도와 신의를 기업의 목숨이자 기업의 자격이라고 늘 강조했던 이 전 회장은 한눈 팔지 않고 기업 경영에만 충실했던 기업인이다. 태광은 이 전 회장의 타계 10주년을 맞아 그의 기업·국가관 등을 조명하기 위한 자서전 출간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특히 어록 정리에 신경쓰는 눈치다. 그의 어록에서는 경영관이 그대로 묻어난다. 지난 1973년 단 닷새 만에 흥국생명을 인수한 이 전 회장은 첫 임원회의에서 “보험회사의 재산은 보험가입자의 재산”이라며 “흥국생명의 돈을 태광에서 가져다 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지켜졌다. 이 전 회장은 ‘오래된 만남’을 중시했다. 태광의 주거래 은행은 조흥은행. 양자의 관계는 5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오직 하나의 은행만을 고집한 이 전 회장은 1975년 대한화섬 인수 후 많은 임원들이 복수은행 거래를 건의했지만 “새 친구 열 명을 사귀기 위해 헌 친구 한 명을 안 버린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용은 이임용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자신의 입으로 말한 약속은 반드시 지켰으며 계약서는 단지 둘 사이에서 오고 간 이야기를 정리해 놓은 종이에 불과했다. 타계 몇해 전 신입사원 특강에서 신용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닷새 만에 서는 장에 못가는 사람이 장에 가는 친구에게 무엇 무엇을 사다 달라고 부탁을 한다. 부탁을 받은 사람은 혹 자기 물건 사는 것은 잊어버리더라도 결코 친구의 부탁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일 그 물건이 제수용품이었다면 남의 집 제사를 망치는 격이 돼 옛날 말로는 사람 같지 않은 꼴이 된다. 그래서 약속은 무서운 것이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ykchoi@seoul.co.kr ■ 베일에 싸인 오너一家 재계에서 태광그룹만큼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오너 일가’도 없다. 창업주인 이임용 전 회장은 물론 후계자인 이호진 현 회장 역시 언론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취재를 위해 이 회장 면담을 요청했으나 ‘불가하다.’는 단호한 한마디였다. 오너 일가가 이처럼 몸을 꽁꽁 숨기는 데에는 격동기를 헤쳐온 태광그룹의 기업사와 유교적 관습이 맞물려 있다. 태광에 있어 정치는 짐이었다. 창업주인 이 전 회장은 야당의 거목인 처남(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을 두면서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사찰을 받았다. 고속성장을 질주한 태광이었지만 그럴수록 기업경영만큼은 살얼음판을 걷듯이 할 수밖에 없었다. 한눈 팔면 죽는다는 것을 절감한 이 전 회장은 정치는 물론이고 언론에도 자연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유교적 관습을 중시하는 이 전 회장의 짙은 보수성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태광 일가의 여성들에게서 쉽게 발견된다. 태광가(家)의 여성들에게서는 다른 재벌가와 달리 우먼파워를 찾아볼 수 없다. 여성으로서 적합한 문화계나 학술계에는 진출해 있을 법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도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다. 이 전 회장의 세 딸도 그렇고 며느리도 마찬가지다.3형제 못지않게 똑똑한 것으로 알려진 세 딸 중 남녀공학 대학을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큰딸 경훈과 둘째 재훈, 막내딸 봉훈씨 모두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이들 모두 다른 대학은 생각지도 못한 게 아닐까. 경훈·봉훈씨는 남편이 재계의 실력자들이지만 외부활동 대신 살림을 하고 있다. 태광가의 며느리들도 전혀 노출돼 있지 않다. 삼성·현대가 등 재벌들의 며느리들이 문화·재계의 저명인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40대 중반인 이 회장도 전경련 활동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외부 노출을 기피하고 있다. 선친 스타일을 빼닮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래서 ‘은둔의 경영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현장에 매우 충실한 CEO다. 캐주얼 차림으로 불쑥 현장을 찾아 임직원들을 놀라게 한다. 이 회장은 기업경영 못지않게 예술에 조예가 깊다.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사옥도 사실상 이 회장 작품이다. 바닥재부터 인테리어, 사무실 소품 등에 이르기까지 이 회장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다. 회사 관계자는 “CEO가 안됐으면 예술가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ykcho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儒林(53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2)

    儒林(53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2)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2) 금강산의 운수행각 중에 쓴 20여 편의 시중에서 이 ‘풍악산에서 작은 암자에 있는 노승에게 시를 지어주다(楓岳贈小庵老僧)’라는 시야말로 1년반에 걸친 율곡의 행장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일종의 고해시(告解詩)인 것이다. 이 시를 보면 율곡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불자가 아닌 유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며, 유가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젊은 선비, 즉 유생임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조그마한 암자에서 은둔하며 솔잎을 먹으며 참선하고 있던 노승과 한바탕 선문답을 벌여 자신이 노승을 거꾸러트리고 이겼음을 의기양양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한 이 시속에는 노승을 위해 써준 자신의 칠언절구를 마치 진리를 깨닫고 쓴 오도송(悟道頌)으로까지 인용하고 있어 이러한 율곡의 모습을 보면 1년여에 걸친 금강산에서 율곡은 결코 불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던진 궁극처’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록 율곡의 행색은 ‘의암(義菴)’을 법명으로 하고,‘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하는 조주의 화두를 결택함으로써 겉으로는 완전히 불제자가 되었으나 실체는 여전히 유생의 모습을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곡은 돈오의 불법을 깨우치고는 싶어 하였지만 ‘목숨을 내던질 곳(放身命處)’의 궁극처는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선의검객 마조는 제자 백장(百丈)이 와서 ‘부처의 본뜻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바로 자네의 목숨을 내던진 곳에 있다.(正是汝放身命處)’고 대답하였다. 또한 마조의 제자 중 출가하지 않았던 방(龐) 거사는 마조의 문하에서 2년간 머물며 깨달아 ‘온전히 깨달은 범부’로 일생을 보냈는데, 어느 날 스승 마조에게 ‘일체의 존재와 무관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마조는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셔버리면 그때 가르쳐주겠다.’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자네의 목숨을 내던진 곳’에 부처의 본뜻이 있고,‘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셔버린 그곳’에 ‘일체의 존재와 무관한 진인(眞人)이 있다.’는 마조의 대답은 불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면 한마디로 ‘죽으라’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율곡은 그러나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율곡의 마음속에는 유가의 실리(實理)가 가득 들어있었으므로 율곡은 비록 겉은 불자와 같은 행장을 차리고 있었으나 불법을 향해 목숨을 내던질 수가 없었으며,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셔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율곡은 금강산 입산과 동시에 예정되어 있었던 하산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똑똑한 세속의 선비였던 율곡을 만난 순간 그가 쓴 절구를 소매 자락에 집어넣은 후 자신만의 공간이 젊은 선비에게 노출되었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오히려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노승이 바로 부처의 현신임을 아마도 율곡은 평생 동안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 “우린 여자인형과 결혼해요”

    일본의 오타쿠 문화가 10억달러(약 1조원)의 소비시장을 형성하며 주류 문화로 부상중이라고 AP통신이 1일 보도했다. 오타쿠는 만화와 미소녀 캐릭터를 광적으로 탐닉하는 남성 마니아들을 일컫는다. 오타쿠 문화는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의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에서 출발했다. 오타쿠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사람 크기의 여자 인형을 수집하고, 여종업원들이 만화 주인공처럼 옷을 입은 카페에 간다. 도쿄의 전자제품 상가 아키하바라는 만화책, 비디오게임, 애니메이션 DVD 등을 사려는 20∼40대 오타쿠들로 늘상 북적인다. 섹시한 사슴눈을 하고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자 인형이 가장 잘 팔리고, 길목마다 오타쿠들을 위해 하녀 복장을 한 여종업원이 있는 ‘메이드 카페’가 있다. 인형 제작사인 가이요도는 올해 매출을 지난해보다 10% 많은 30억엔으로 추산했다. 컴퓨터 엔지니어 마사(32)는 150㎝짜리 여자 인형 고노하, 아이리스와 함께 살며 결혼할 생각도 여자친구를 만날 생각도 없다.70만엔이 든 고노하와 아이리스를 위해 산 중국풍 실크 드레스, 부츠, 운동화 등으로 그의 작은 아파트는 빈 틈이 없다. 이러한 오타쿠 문화는 젊은 층의 자신감 상실을 반영해 100만명에 이르는 사회적 은둔자 ‘히키코모리’로 연결되기도 한다.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한국형 니트족 부모학력·가구소득 낮다

    한국형 니트족 부모학력·가구소득 낮다

    A(34)씨는 현재 결혼한 형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그 나이 되도록 빈둥거린다는 부모의 꾸지람이 지겨워 지난해 집을 나왔다. 처음에는 형과 형수, 조카들 대하기가 민망했지만 이제 만성이 됐다. 이른바 명문대를 졸업한 터라 20대 후반까지는 몇군데 직장 생활을 했다. 하지만 적응을 못하고 번번이 사표를 냈다. 마지막 퇴사 이후 지금까지 만 5년여 동안 TV보기, 책보기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앞으로 직장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도, 일을 하겠다는 의지도 없다. 이 상태로는 결혼도 어려울 것 같다. 하루하루 마음 속에 스트레스만 쌓여간다. ●한국형 니트는 부모 학력 낮고 비정규직 15∼34세의 구직 단념 니트(NEET)족이 80만명을 넘어서면서 A씨와 같은 사례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한국노동연구원 남재량 연구위원은 ‘청년 니트 실태와 결정요인 및 탈출요인 연구’ 보고서를 통해 저성장·고실업·고학력 시대를 맞아 대규모 한국형 니트족의 출현을 경고했다. 연구에 따르면 국내 니트족은 외국과는 적잖은 차이를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의 학력이 높을수록 ▲아버지의 학력이 낮고 비정규직 상태에 있을수록 ▲1인당 가구소득이 낮을수록 니트족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유한 가정의 나태한 자녀들 사이에 니트족이 많은 선진국의 ‘은수저(Silver Spoon) 증후군’과 달리 국내에서는 빈곤 및 양극화와 연결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니트족 30%는 은둔형 외톨이 위험 보고서는 한 개인이 니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기간을 1.43년으로 추산했다.2003년과 2004년 8월 경제활동인구 조사결과를 토대로 보면 66%가 1년 안에 니트 상태를 탈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니트족이 아주 정체돼 있지는 않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반면 30%는 니트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은둔형 외톨이를 비롯한 더욱 심각한 상태로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고 남 연구위원은 지적했다. 은둔형 외톨이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지역에 따라 니트 탈출 확률 달라져 니트 상태에서 빠져나온 이들을 분석해 보면 거주 지역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지역은 니트족이 취업할 가능성이 높지만 전남, 전북, 충북의 경우 그 확률이 크게 낮았다. 이는 지역별 노동시장의 편차에 따라 취업 가능성이 달라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역균형발전이 니트족 문제의 완화를 위해서도 필요함을 시사했다. 니트 상태가 될 확률은 학력이 높을수록 높지만 동시에 니트에서 빠져나올 가능성 역시 대졸 이상 고학력자가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또 연령이 높아질수록 니트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적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일요영화]

    ●파인딩 포레스터(SBS 밤 12시55분) 천재 작가와 한 고등학생의 세대를 초월한 우정을 그린 휴먼 드라마. 세상을 등진 고령의 작가와 이제 막 세상에 나서려는 소년이 서로의 삶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일어나는 훈훈한 이야기를 그렸다. 존재만으로도 내공을 뿜어내는 숀 코너리와, 데뷔작이지만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롭 브라운의 앙상블이 빛난다. ‘호밀밭 파수꾼’으로 유명한 작가 J D 샐린저를 모델로 삼았다는 얘기도 있다. 앞서 구스 반 산트 감독은 비슷한 내용의 ‘굿 윌 헌팅’(1997)도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도 수학에 재능을 보이는 젊은이(멧 데이먼)와 심리학 교수(로빈 윌리엄스)의 우정이 그려진다. 이 때문인지 멧 데이먼은 ‘파인딩 포레스터’에 특별출연한다. 거리에서 친구들과 농구를 하던 고교생 자말 월러스(롭 브라운)는 인근 아파트에 살고 있는 괴팍한 남자 윌리암 포레스터(숀 코너리)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어느 날 밤 호기심에 끌려 포레스터의 아파트에 몰래 들어간 자말은 가방을 떨어트리게 된다. 포레스터는 가방에서 범상치 않은 자말의 글들을 발견한다. 자말은 가방을 되찾으려 하지만 포레스터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알고보니 포레스터는 40년 전 퓰리처상을 받은 천재작가였지만 이후 은둔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포레스터는 내심 자말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문학세계로 이끌려고 하는데….2000년작.133분.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천국으로 가는 계단(EBS 오후 1시50분) 국내에는 ‘80일간의 세계일주’(1956),‘나바론 요새’(1961),‘핑크팬더’(1963) 등으로 잘 알려진 콧수염 배우 데이비드 니븐의 30대 중반 시절을 살펴볼 수 있는 영화. 배우이자 ‘간디’(1982) 등의 감독으로도 유명한 리처 아텐보로도 앳된 얼굴을 내민다. 영국의 명감독 마이클 파월과 에머릭 프레스버거가 함께 연출하고 시나리오를 쓴 팬터지 작품으로 1946년 크게 성공을 거뒀다. 지상 세계는 컬러로, 천상 세계는 흑백 화면으로 촬영, 당시 유행하던 사실주의를 벗어나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살리고자 했다. 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영국 폭격기 조종사 피터는 비행기가 추락하려고 하는 바람에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피터는 미국 여성 무선사 준과 마지막 무선 교신을 하며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피터는 약간의 뇌 손상을 입지만, 무사히 생명을 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연히 준과 실제로 만나게 된 피터는 사랑에 빠진다. 사실 피터가 살아난 것이 천국의 실수 때문이었는데….1946년작.104분.
  • 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백경훈 글

    ‘무스탕’. 겨울철에 입는 옷 얘기가 아니다. 네팔 중북부, 티베트 남쪽과 국경을 마주한, 히말라야 산맥에 둘러싸인 고원과 협곡의 땅.14세기 나라의 기틀을 세워 역사를 이어오다가 1760년 네팔에 자치권을 빼앗긴 옛 왕국이다.1년 내내 강풍이 불고 물이 귀해 척박한 데다가 해발 4000m를 넘는 고산지대가 대부분이고 외부인의 출입도 자유롭지 않아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은둔의 땅’으로 불린다. 여행작가이자 시인 백경훈과 사진작가 이겸이 함께 지은 ‘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호미 펴냄)는 히말라야 설산의 신비로움이 지배하는 네팔 깊숙이 숨겨진 은둔의 땅 ‘무스탕’을 20일 동안 캠핑 트레킹으로 탐사한 여정을 글과 사진으로 생생히 기록한 국내 최초의 ‘무스탕 여행서’이다. 특히 글을 쓴 백경훈은 우연한 계기로 네팔에 사로잡혀 직장을 관두고 지난 7년간 네팔을 7차례나 다녀온 자칭 ‘네팔병 환자’. 오랜 염원인 무스탕 트레킹을 결심한 것은,‘삶이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일종의 구도 행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특히 한국인은 아직 아무도 간 적이 없는, 이른바 ‘죽음의 코스’를 선택, 위험을 무릅쓴 모험을 통해 무스탕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담았다. 오지 탐험가들에 의해 간간히 소개되던 무스탕의 신비를 한 꺼풀씩 벗겨 보여주려는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무스탕에 첫발을 디딘 저자들은 무스탕을 한마디로 ‘문명의 입김이 닿지 않은 태고의 신비’라며 감탄한다. 거칠고 황량하지만 동시에 휘황하게 아름다운 태곳적 윈시 모습 그대로였다. 히말라야 설산을 굽이굽이 돌 때마다 새로운 절경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풍경, 윈시의 빛깔로 신비롭게 빛나는 자연의 모습, 마을이 있는 곳마다 하늘에서 펄럭이는 신성한 깃발 ‘룽다’, 척박하고 거센 땅에 맞서 사는 종교적이고 순박한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 등이 책 페이지마다 살아 숨쉰다. 저자들은 태초의 하늘 그대로인 무스탕의 하늘을 ‘천공(天空)’이라고 표현한다. 발을 질질 끌며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고, 천길 낭떠러지 절벽을 보면서 절망과 희망을 함께 느꼈다는 그들은 무스탕 여정을 끝내면서 “잠시 신(神)과 동행했다.”고 중얼거렸다.20일간 스쳐간 온갖 풍경과 자연에서, 사물과 사람에서, 역경과 고난에서, 희열과 환희에서 그들은 신을 만난 것.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과 순박한 무스탕 사람들의 미소에서 인간의 순수함을 발견할 수 있다.1만 8000원.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시론] 김정일 방중은 미국에 잘보이기?/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 교수

    [시론] 김정일 방중은 미국에 잘보이기?/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 교수

    은둔의 지도자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동안 북핵과 위폐로 곤경에 처했던 김 위원장은 그의 방중 행적과 동선에 쏟아지는 언론의 관심을 충분히 활용해서 ‘범죄 정권’ 논란을 하루아침에 개혁개방 의지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듯하다. 그의 방중 일정이 남부 경제특구 시찰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 점에서 중국식 개혁개방에 대한 현장학습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특히 수행 인사의 면면을 보면 김 위원장의 이번 방중이 경제 학습에 집중된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실세 총리로서 경제사업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박봉주 총리와 지난해 북·중 경제협력 확대를 진두지휘한 노두철 부총리, 북한의 경제계획을 입안하고 관장하는 박남기 당중앙위 부장 그리고 ‘과학기술 강국’의 책임자인 이광호 당과학교육부장 등 말 그대로 북한 경제 실세의 총출동이라 할 만하다. 지난해 김 위원장의 경제현장에 대한 현지지도가 부쩍 늘었고 수행 빈도 순위에서도 군인 3인방을 제외하고 박봉주 총리가 4위에 올라 있다. 분명 김 위원장은 이번 남순 코스 시찰을 통해 경제회생을 위한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스스로 절감하고 이를 대내외에 역설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방중이 바로 중국식 개혁개방의 전면적 수용으로 이어진다고 자신하기 어렵다. 중국 모델이 북한에 적용되기에는 ‘북한식’이라는 여과장치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7·1 경제개혁 조치를 취하면서도 체제유지를 위한 국가주도의 통제를 놓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번 방중은 본격적인 중국식 개혁개방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이른바 실리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는 북한식 개혁개방에 중국의 경험을 충분히 반영하는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오히려 이번에 특히 중국 경제특구 시찰에는 중국의 개혁개방 권유에 대한 북한식 호의를 표시하고 이를 통해 중국으로부터 보다 많은 경제협력과 지원을 확보하려는 실리적 계산이 충분히 감안되었을 것이다. 올해부터 1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막대한 달러보유국 중국으로부터 향후 5년 동안 수십억달러의 경제지원을 받는 것은 북한이 결코 놓치기 싫은 기회이다. 또한 김 위원장은 방중을 통해 자신의 개혁개방 의지를 미국이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기를 바라는 대미 유화 제스처의 의미를 보낸 것이었다. 즉 위폐문제를 내세워 강화되고 있는 미국의 대북 압박을 돌파하기 위해 김 위원장은 당면한 정치적 곤경을 경제적 이슈로 우회하고자 한 것이다. 귀국길에 베이징에 들른 것은 북핵문제 등 당면한 현안을 북·중간에 협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북·중간 협의를 통해 교착되고 있는 6자회담의 돌파구가 열릴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관건인 위폐문제에 대해 북한의 요구와 미국의 고집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절묘한 해법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안인 위폐문제 해법과 6자회담 재개 여부는 힐 차관보와 김계관 부상의 극적 회담 결과가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 위원장은 대외적으로 북한의 개혁개방 의지를 과시하면서 미국에 위폐문제의 숨통을 터달라는 간접적 메시지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의 대북압박을 완화시키려는 의도가 첫번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의치 않을 경우 미국의 대북 압박 지속을 염두에 둔 방패막이로 북·중 경제협력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도 이면에 깔려 있다. 대미 대결 속에서도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과의 협력 강화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평양으로 돌아간 김정일 위원장은 속마음이 착잡할 것이다.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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