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율동
    2026-06-16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6-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116
  • 고속전철 독·불 압축/8월 최종선정

    ◎일,기술이전 미흡… 탈락/3년 늦춰 2001년 완공/영종공항도 2년 연기… 99년 준공/이 교통 경부고속철도의 차량선정이 올 8월 프랑스의 TGV와 독일의 ICE가운데 하나로 최종 확정된다. 이계익교통부장관은 14일 경부고속철도건설계획을 최종 수정,준공연도를 98년에서 2001년으로 3년 연기하고 총공사비도 당초 5조8천4백62억원에서 4조8천9백38억원이 증가한 10조7천4백억원으로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고속철도건설에 소요되는 공사비는 정부재정지원 45%,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자체 조달 55% 비율로 정했다.공단자체 재원조달은 채권발행·해외차관도입·민자유치를 통해 충당키로 했다. 차량선정은 그동안 5차례의 평가결과 일본의 미쓰비시(삼릉)사는 비용·기술·기술이전·국산화 등 전분야에서 평가목표에 미달되어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프랑스의 알스톰사와 독일의 지멘스사로 압축,7월15일까지 이 회사들로부터 수정제의서를 받아 가장 유리한 가격및 조건을 제시한 회사를 8월중 최종선종,9월중에 공사계약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교통부는 또 고속철도역은 서울·천안·대전·경주·부산등 6개역 이외에 한수이남지역 승객의 편의를 위해 안양(석수)에 남서울역을 추가로 건설,모두 7개로 늘리기로 했다. 교통부는 이와함께 건설비 절감을 위해 서울·대전·대구역의 지하역 신설계획을 수정,기존의 지상역을 개량하여 활용하고 안양∼서울역 및 서울역∼수색차량기지 사이의 지하선신설방침을 취소,기존의 철도선로를 활용토록 했다. 이번에 확정된 7개 고속철도역은 ▲서울역 ▲남서울역(안양) ▲천안역(충남 아산군 배방면 장재리) ▲대전역 ▲대구역(동대구역) ▲경주역(경주시 율동 북녘들) ▲부산역 등이다. 또 급증하는 항공수송수요에 대비 영종도신공항 사업을 계속 추진하되 완공시기를 97년에서 98년으로 2년 늦추기로 했다.
  • 미대륙 감동시킨 휠체어 무용수

    ◎플레처,“동정은 싫다”… 장애인발레단 창설/맨해턴공연 성공… 프로 선언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고 훌륭한 업적을 이룩해낸 장애자예술가는 많다.그러나 선천적인 장애,그것도 해당 예술활동에 치명적인 장애를 지녔으면서도 그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인간승리를 엮어낸 예술가는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발레리나 메리 베르디 플레처의 인생은 그 자체로서 위대한 인간승리의 신화이자 하나의 훌륭한 예술작품이라 하기에 족하다. 플레처는 선천적인 척추장애자였다.그래서 어린시절 대부분을 허리에 부목을 댄채 침대에서 보냈다. 침대생활 속에서도 비록 3류이긴 하지만 부모의 직업이 음악가·춤꾼이었던 것은 그녀의 행운이었다.술집을 주무대로 춤을 추던 어머니와 연주가인 아버지는 딸에게 자주 춤을 보여주고 음악을 들려주었다. 4살의 플레처는 한눈에 발레의 우아함에 빠져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처지를 깨달아야 했다. 플레처는 10살이 되면서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로부터 몇년이 흐른 뒤 아주 우연찮게도 그녀의 꿈에 다시 불을 지피는 계기가 찾아왔다.플레처의 휠체어를 밀던 남자친구 토드 구드먼은 디스코춤을 추자며 장난삼아 휠체어를 빙글빙글 돌렸다.그런데 놀랍게도 돌아가는 휠체어와 그 위에서 춤을 추는 플레처의 모습이 그렇게 우아할 수가 없었다.그것은 놀라운 발견이었고 플레처에게는 새로운 의욕을 살려내는 것이었다.플레처의 상상력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플레처의 집근처 주차장에서는 이때부터 라디오와 녹음기의 음악소리가 울려퍼졌고 이에 맞춘 두사람의 춤연습이 거의 매일 이어졌다. 이들의 춤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동작 하나하나가 다 독창적이었다.그래서 그 독창성을 믿고 전미「댄스피버」경연대회에 참가,2위를 차지했다.이를 계기로 두사람은 용기를 내 학교·클럽·장애인수용시설 등을 돌아다니며 대중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대중공연은 쉽지 않았다.재정문제는 차치하고 「불구」를 응시하는 많은 정상인들의 눈길을 플레처로서는 견디기가 어려웠다.관객들은 처음 예술성보다는 묘기를기대하는 눈치였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동정심에서 우러나는 불편함이 역력했다.그러나 음악과 함께 율동이 진행되면서 그들의 표정은 변했다.그들은 두 사람의 춤에 매료되고 감동했으며 공연후에는 칭찬과 격려를 잊지 않았다. 공연때마다 이같은 고통과 희열은 반복됐으며 그속에서 플레처는 인간으로서,또 예술인으로서 성장해갔다. 플레처는 마침내 82년 「댄싱 휠스(춤추는 수레바퀴)」라는 발레단을 설립했다.그리고 그로부터 8년뒤인 90년에는 클리블랜드발레단과 합작,재정문제를 해결하면서 명칭을 「클리블랜드발레단 댄싱휠스」로 고쳤다. 이 발레단은 현재 장애자 4명이 포함된 10명의 무용수와 3명의 안무가로 구성돼 있다.물론 핵심단원은 플레처와 무용수·안무가·미술조감독등 1인3역을 맡고 있는 그녀의 친구 구드먼이다. 플레처에게 있어서 올해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한해다.지금까지는 같은 장애자들에게 뭔가 희망과 교훈을 준다는 사명감과 함께 발레단을 홍보하는데 주력했지만 올해는 「프로페셔널」을 선언한 원년이기 때문이다. 플레처와 그녀의 동료들은 최근 공연예술의 심장부 뉴욕 맨해턴에서 프로로서의 첫 원정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 플레처는 한 무용전문잡지에서 「댄싱휠스­깨어진 꿈으로부터의 승리」라는 비평기사를 발견했다.
  • 국내 첫 「음악예비학교」 7월 개교

    ◎초중고생 대상… 공개오디션 통해 선발/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실기 과정/국내외 정상음악가가 지도/레슨비 저렴… 가난한 음악도들에 호기 국내최초의 「음악예비학교」가 오는 7월 개설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교장 이강숙)가 음악원 예술실기 연수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게 될 이 예비학교는 그동안 엄청난 개인 레슨비와 외국유학비용 부담등으로 재능을 살리지 못한 음악전공 희망자들에게 실기지도를 받을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특히 국내외 정상급 음악가들을 교수진으로 확보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비교적 싼 비용으로 지도를 받을수 있게 됨으로써 그동안 일부 특권부유층의 전유물이다 시피했던 음악교육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는 것은 물론 음악계의 고질적인 부조리도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예비학교의 수업료는 학교운영비를 포함해 대학강사료 수준인 시간당 2만2천원선.이는 대학입시를 위한 개인레슨이 시간당 10만원정도인 것에 비교하면 5분의 1에 불과하다. 연수과정은 예중 예고를 포함해 초중고교 재학생을 대상으로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로 편성된다.인원은 피아노 현악 관악을 합해 초등부 1백80명,중등부는 여기에 타악과 작곡을 포함시켜 1백50명,고등부는 성악 기악 작곡을 합해 2백40명으로 모두 5백70명이다. 학생은 매년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되 결원및 수용여건을 감안,적절히 조정할 예정이다.또 매년 2월,과정별로 연수생들의 1년간 진도및 기량을 평가하는 정기 오디션을 실시,불합격자는 탈락시킨다.합격자 가운데 초중고교 졸업생은 수료증을 받게되고 수료증을 받은 학생은 자동적으로 다음 과정에 입교하게 된다. 수업은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의 시설과 교수진,강사진들이 맡아 진행한다.교과과정은 개인레슨형태의 전공실기지도와 악전 율동 시창청음 앙상블 합창 합주등 기초음악과목으로 이루어져 있다.실기지도는 학기중에는 매주 1시간씩 1회,방학중에는 2회이다. 올해 모집 요강과 일정은 17일이전에 확정,발표하며 선발시험은 6월에 공개경연으로 실시한다.선발인원은 초중등부 각 60명 고등부 1백80명 안팎이다.교육은 7월15일부터 내년 2월29일까지이며 학기중에는 매주 토요일 하오 1시부터 8시까지,방학중에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상오 10시부터 하오 6시 사이이다.내년부터는 연수과정을 3월부터 다음해 2월말까지로 할 계획이다.
  • 도예가 황종례씨(이세기의 인물탐구:23)

    ◎예술혼 담긴 「귀얄문양」 대가/탁월한 기품·여성스런 섬세함 한획으로 표출/망망대해·일렁이는 갈대숲 등 깊은맛 일품/32세 “늦깎이” 입문… 남을 의식않고 제작에만 몰두 벽제의 하늘은 아름답다.청자의 비색처럼 영롱하다.산자락에 걸친 구름은 분청사기의 문양인듯 엇비슷 비껴있다.이곳이 바로 현대도예에서의 일인자 위치를 지키는 도예가 황종례씨의 작업실이다.절간같은 고요,사람의 기척이라곤 별로 없이 작가 혼자서 흙으로 성형하고 소성한 도예에 그림을 그릴 뿐이다. 그가 벽제에 온것은 72년 초봄이다.그때까지만 해도 진흙구덩이가 푹푹 패이는 삭막한 황무지였으나 도심에서는 가마를 가질수가 없어 일찌감치 이곳 정착을 서둘렀다. 그리고 드넓은 터에 장작을 때는 흙가마와 기름을 때는 현대식 가마를 갖추었다.그로서는 가마를 갖게된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그동안 축적한 것을 이뤄나가면 그만이다. 새벽 6시면 그는 벌써 작업실로 내려온다.직접 흙을 반죽하고 까다로운 여러 공정을 거쳐 유약칠과 채식에 들어가 한 획으로 문양을 넣기 시작한다.물론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의 도예에서의 특징은 귀얄문양이다.그는 이 과정에서는 거의 몰아의 경지다.느긋하고 너그러워 호들갑스러운 데가 전혀 없으나 이때만은 비호처럼 날쌘,귀신같은 솜씨를 발휘한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그 순간을 포착하기 힘들다.그때도 그의 얼굴표정에는 온화한 여유가 만만하다. 처음에는 힘없는 붓이 자꾸 흙에 달라붙어 기면의 흡수에 비해 둔한 붓놀림이 따르지 못하자 유화붓을 쓰거나 강도가 센 페인트 붓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귀얄만으로 능란하게 그림을 구사하게 되었다. 귀얄문의 특징은 그릇의 표면이나 내면에 속도감있게 붓자국을 내며 돌리지않으면 습기있는 기면이 당장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단숨에 그릴 수 있는 기량과 기술이 필요하다.그릇의 한면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미리 구상해두었던 그림을 일순간에 성립하는 식이다. ○분청사기에서 힌트 옥색하늘이 아득히 푸르르고 망양한 바다와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숲,희미한 새벽 서광과 붉게 타는 낙조등 도예기가 보여주는 회화세계는 화선지에서와는 다른 그나름대로의 참신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다.안료의 농도에 따라 얼마든지 절묘한 표현을 자유자재롭게 만들어 나갈수 있는 것도 한 장점이다. 물론 이런 필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그는 60년대 초부터 청전 이상범에게 붓놀림과 먹의 농담이용법,옥산 김옥진에게 사군자,오당 안동숙에게 풀 나무 산과 바위를 사사하면서 수년간 자기표현을 위한 기초적 탐색을 감행해 왔다. 그의 귀얄무늬는 물론 분청사기에서 쓴 귀얄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고려상감(상감)같은 상감을 이용한 화장법을 거쳐 분청사기의 귀얄무늬를 추상적 회화로 모색해 나갔다. 그 시절의 그런 그릇에 왜 귀얄 붓자국을 썼는가,시간틈틈이 골동품가게나 박물관을 기웃거리며 관계서적과 도록을 빌려다가 밤을 지새워 연구하기도 했다. 발이나 호·기에다 투각수법의 무늬로 부분장식을 표현하거나 단일색인 소문백자의 경우엔 부드럽게 흐르는 몸체에서 무한한 품위가 배어나왔다. 더구나 화사기에서 쓰이던 회청·회회청의 코발트색깔은 지금도 창조하기 힘든 기발한 색조임에 스스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꽃잎흩날리는 비화문이며 풀잎 나뭇잎 얼킨 초엽문의 활달한 율동감,살얼음이 깨어진 듯한 빙렬등은 현대도예에서도 시도해 봄직한 분방한 방법임에 틀림 없었다. 황종례의 그릇의 형태는 비교적 큼직하고 대담한 편이다.쑥쑥 뻗은듯 휘어진 곡선을 지니면서 탁발한 기품과 여성적인 섬세함을 담고 있다.너무 작아 조잡하거나 너무 우람하여 넘치지 않는다.야무진 티나 인위적인 기교는 없다.꾸미지않은 순결함속에 오랜 전통을 바탕에 둔 든든한 경륜의 실력이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안심과 환희를 안겨준다. 도예의 기물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악하자 이번엔 좀더 새로운 세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시도에 앞장 섰다.무한한 가능성에 비해 시간이 짧기만 했다. 몇사람 되지않는 창작도예에서 「독자성」을 두루 인정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도예의 길은 멀고 그리고 어렵다』고 말한다. ○성취가 일생 과제로 고전하여 어렵게 이룬것만큼 높이 평가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도무지 그런 울결(울결)과 방종에서 벗어나 흔연한 자세다. 남에게 관심을 갖거나 남을 의식하지도 않는다.그런 자자분한 세상사에 눈돌릴 겨를이 없다.예술가의 자세란 작품에 밀착하여 새 세계에 도전하는 일,그리고 성취만이 평생의 과제이며 목적이다. 그는 인건비등으로 다투는등 사람들에게 시달리기도 싫어 인부들과 손을 끊고 몇년전부터는 흙만드는 일을 직접하고 있다. 12번째 개인전을 연후 수많은 해외전시에 참가,틈틈이 86년 13번째의 개인전을 앞두고 준비해온 1천여점의 작품을 하루 아침에 망친 사건이 있었다. 어느때보다 실험작품이 많아 스스로 기대에 부풀었던 그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허허!」 한바탕 웃는 것으로 이를 단념해 버렸다.이미 끝난것에 집착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원인은 간단하다.필요한 양을 정확하게 혼합하는 과정에서 인부들이 물과 흙의 분량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이를 지켜보지못한 자신의 불찰로 돌렸다.광주나 이천에 나가면 만들어진 흙을 얼마든지 사다 쓸수 있는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직접만들어 쓰려다가 생긴 이 낭패가 그로서는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그후론 아직 결혼전인 차남(영학씨·조각·상명여대 출강)이 어머니를 돕고 있다.엎친데 덮친격으로 같은 시기에 그의 도예일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던 부군 이진우박사(전 영동피부과 제일의원)가 몸져 눕는 바람에 한동안 간호에 매달리느라 이럭저럭 작업을 미룰수 밖에 없었다. 황종례씨는 고려청자의 재현이라는 전통도예를 가업으로 가진 황인춘씨를 부친으로 역시 원로 도예가인 황종구씨(전 이대교수)가 그의 오빠다. 어릴때 영등포 대방동에 있던 그의집 과수원속에 부친의 가마가 있었고 그는 그릇을 빚고 건조시키고 조각하고 백토칠에다 다시 이를 벗겨내고 유약등 까다로운 작업을 지켜보는 유년시절에도 하나의 사기나 파와(파와) 한쪽을 어루만지면서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옛 고려왕조·이조왕조의 생활이 따뜻하게 전해졌다고 기억한다. 그후 국민학교 1학년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가족이 강제로 개성에 이주,일인들이 선죽교부근에 마련해준 연구소에 살면서 호수돈여고에 다녔다. 미대진학을 꿈꾸며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스승이던 유달영선생의 가르침은 「버려진 제것에 대해 눈뜨라」는 것이었고 특히 졸업을 앞두고 「청년이어 일어나라」는 교훈은 그에게 「나도 무엇인가 나의 일을 하겠다」는 의욕을 심어주었다. 집안형편이 극도로 어려웠으나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있는 이대미술학부에 진학,어릴때 손바닥 감촉으로 느꼈던 사기의 온기를 못잊어 대학졸업 9년만인 32살때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도예를 전공했다.그때도 부군이 그의 협력자가 되어주었다. 대학원 졸업전인 61년에 첫 개인전,청자의 태토에 백토로 분장하고 그곳에 단숨에 귀얄문을 그려내는데 매력을 느낀것은 68년 6번째 개인전때부터다. ○“독보적 존재” 평가 「청·백자의 선이 아무리 탁발하다 해도 이를 단순히 재현하는데 그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조작적이고 기교적이 아닌,이른바 이조자기에서 볼수 있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멋』을 담아 새롭게 선보였다. 실내장식품에 지나지 않던 도예를 널리 일상생활에 참여시킨일종의 도예의 활성화 시도였다. 『몇 안되는 창작도예를 만드는 도예가중에서 독자적인 색유사용으로 새 경지를 개척해 왔다는 점에서 황종례는 현대도예에서 단연 독보적 존재』라는게 미술평론가 박래경씨의 평이다.1천여점 작품실패로 9년간 미뤘던 13번째 개인전은 오는 13일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리게 된다. 흰색으로 시작됐던 그의 귀얄문은 더욱 다양한 아름다운 색깔로 변모되었고 매끄러운 표면은 입체감과 함께 품위있는 추상회화로 조형효과를 이뤄내고 있다. 청자빛 하늘과 파도치는 바람,흩날리는 꽃잎등 조선시대의 사람의 감정과 미의식을 담은 그의 현대적도예 세계는 그의 성격처럼 온유하고 따뜻하여 번거로움과 무질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인정과 사색,그리고 은은한 기쁨을 넉넉하게 뿌려주는 안식의 경지다. □연보 ▲1927.12.9 서울출생 개성호수돈녀고 26회 졸업 ▲1945.∼1950.5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 미술학부 서양화과(학사) ▲1959.9∼1962.2 이화녀자대학교 대학원(도예전공·석사) ▲1963∼19 81 이화녀자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 출강 ▲1965.3∼1966.2 상명녀자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조교수 ▲1975.3∼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공예미술학과 교수 ▲1961.12 도예개인전(서울중앙공보관) ▲1963.10 도예개인전(〃) ▲1964.11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6.5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7.8 도예개인전(미팔군전시장) ▲1968.8 도예개인전(일본,경도 조화랑) ▲1971.9 도예개인전(신세계백화점 전시장) ▲1975.4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78.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81.1.20 도예개인전(미국 뉴욕) ▲1982.1.29 도예개인전(미국 로스앤젤레스) ▲1984.4.24∼4.2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61∼1983 대한민국 미술전 출품 ▲1968.7∼1981 대한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디자인 포장센터)심사위원 ▲1973 한국현대도예작가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5 전국공예가 초대전(미술회관)문예진흥원 주최 ▲1976 여유도예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7 역대 국전수상작품전(국립현대미술관) ▲1979 한·중·일 국제도예전 초대출품(일본명고옥) ▲1979 한국도예가회 창립전(신세계 미술관) ▲1979 한국미술전람회(뉴질랜드) ▲1980.9.27 한국도예가전 회원전 2회(신세계미술관) ▲1980 국전 초대출품(국립현대미술관) ▲1980.7.10∼7.16 도예2인전 일본 매일신문사 주최(일본 동경도 대환백화점) ▲1981 한국도예가회 회원전 3회(신세계미술관) ▲1982.3.6 도예2인전(일본 구주 복강시) ▲1983 도예2인전(일본 대판시) ▲1984.3.15∼3.20 도림전 출품 ▲1981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81∼1990 현대도예전 일본 순회전(10연간) ▲1982 제1회 대한민국미술제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82 서울신문사도예공모전 초대출품·심사위원,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출품(미국) ▲1982 한국현대도예가 회원전 9회(신세계미술관) ▲1983 한독수교 100주년기념출품(독일) ▲1983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68.8 국제미술교수협회 주최 도예세미나(일본,경도) ▲1975.5 한국도예특강 초대(일본 요업시험소) ▲1980.2 자유중국 교육시찰 ▲1983.8.2∼8.20 한일교류전 출품및참가(일본 구주)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주최 ▲1983.12 MBC초대전 출품(MBC별관 전시관) ▲1986.9 한국현대도예가회 일본 전시 ▲1987.6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출품 ▲1987.8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출품및 참가(일본 구주) ▲1987.9 서울신문사주최 도예공모전 심사및 초대출품 ▲1989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및 운영위원장 ▲1988 대한산업미술가 협회 이사장 역임 ▲1990 서울현대도예비엔날례 초대출품 ▲1991 대한민국 미술협회 부이사장 ▲1992 서울 공예대전 출품 ▲1993 벨기에 앤트워프 박물관 주최 ▲1993.3.26 한국도예문화 특별전 출품 ▷작 품 집◁ 황종례 도예작품집(미진사간) ▷수상◁ 국무총리상·국전 초대작가상·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현재◁ 경희대 수원캠퍼스 출강·대한미술산업가협회 회원·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이사
  • 러시아 남발레신성 젤렌스키/뉴욕무대 환상의 율동 선보여

    ◎“누레예프 대이을 재목” 극찬/그루지야운동선수 출신… 힘·유연성 겸비 그루지야태생의 러시아 발레댄서 이고르 젤렌스키(22)가 루돌프 누레예프를 잃은 세계무용계에 샛별로 떠오르고 있다.세계의 무용계는 요즘 젤렌스키가 미국 뉴욕의 무대위에서 펼치는 환상적인 율동에 넋을 잃고 있다.그가 예술가로서 성장한 이야기 또한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뉴욕의 언론들은 1m85㎝의 키에 붉은빛 도는 갈색머리,독수리발톱처럼 강한 발,유연한 몸놀림등 젤렌스키가 갖춘 무용수로서의 장점들을 열거하며 그에게 「젊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다. 발레전문가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한마디로 『힘과 개성을 지닌 재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재능에 대한 찬사보다 더 값진 것은 진흙속에서 진주가 발굴되는 듯한 그의 성장과정에 얽힌 휴먼 드라마인지도 모른다.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태어난 젤렌스키는 어린시절 다른 아이들처럼 발레보다는 옛소련이 범국가적으로 육성한 스포츠에 매력을 느꼈다.우연히 발레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의 관심은 늘 스포츠에만 쏠려 방과후 스포츠클럽에 가는 것이 일상의 낙이었다.스포츠 가운데서도 그가 열중한 것은 4백m 허들경기와 수영,그리고 롤러스케이팅이었다. 젤렌스키가 별로 관심이없었던 발레로 눈길을 돌리게되는 계기는 15살 되던 해에 찾아왔다.학교 발레단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의 한 발레 페스티벌에 참여하고는 발레에 강한 충동을 느꼈다.그리고 기왕에 발레를 할바에는 좋은 학교를 선택해야 한다고 판단,페름의 국립발레학교로 옮겼다. 그는 발레에 관심을 갖기가 무섭게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우연의 일치라 할 정도로 전에 그가 열중했던 수영,롤러스케이팅,허들 등의 운동은 발레에 필수적인 요소들의 원천이 되었다. 그의 재능은 곧 무용계의 원로였던 바크탕 미하일로비치 차부키아니의 눈에 띄어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됐다.80대의 차부키아니에게는 마지막 제자와의 만남이었고 젤렌스키에게는 스승이자 「발레에의 사랑을 가르쳐준 친구」와의 만남이었다. 차부키아니는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젤렌스키에게만 매달렸다.심장병의 고통을 무릅쓰고 하루에도 몇시간씩 무대위에서 제자의 몸동작 하나하나를 다듬어 나갔다.밤에는 제자를 집으로 데려가 발레이론과 역사를 가르치고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공유해갔다. 이렇듯 「조련」에 가까운 각고의 노력을 3년동안 기울인 노스승은 젤렌스키가 18살때인 87년 그를 발레의 메카 상트 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로 보냈다. 그뒤 젤렌스키의 앞길은 대체로 순탄했다.바가노바 발레아카데미를 졸업할때는 졸업작품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미녀」의 주연무용수를 맡았다.졸업후 바로 러시아 유수의 키로프발레단에 입단,역시 주연댄서로 발탁되는 행운을 잡았다.졸업 1년뒤인 90년 12월에는 파리 국제콩쿠르에서 입상,19살의 나이로 국제무대에 등장하는 능력을 과시했다.차부키아니의 숭고한 열성과 젤렌스키의 예술적 재능이 결합한 결과가 성공하는 순간들이었다. 뉴욕시립발레단의 초청댄서로 미국에 온 젤렌스키는 지난 시즌 뉴욕시립발레단원들과 함께 「잠자는 미녀」,「아폴로」,「호두까기 인형」,「테마변주곡」등 전에도 공연경험을 한 고전적 발레레퍼토리를 공연했다.그러나 이번 뉴욕공연을 통해 그는 러시아발레의 장점인 유연성에 미국발레의 장점인 스피드를 접목,완벽한 발레댄서로 한발 더 다가서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 서예가 김기승씨(이세기의 인물탐구:21)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 원곡체 창안/한자명체 두루 통달… 독창적 변형경지 도달/고 최현배박사도 “한글 본연성품 표출” 칭송/성경구절 작품화 유명… 도산선생 묘비문 등 명필남겨 글씨를 이루기전 작업대앞에 선 원곡 김기승씨의 모습은 신을 향한 기도처럼 절실하고 경건하다. 눈부신 백지위에 붓길이 닿는순간 율동처럼 이어지는 묵향,어느때는 일필휘지,어느 때는 점 하나에도 혼신을 다해 멈출듯 흐느끼는 ▦황은 그 자체가 이미 통신의 경지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니라 신에 의해 움직이는것처럼 힘차게 그어내린 획마다에선 맑고도 밝은 상서로운 향기를 뿜어낸다.그리고 그 몇순간의 긴장은 폭풍전야의 정적인듯 은은히 주위를 압도한다. 원곡의 문향실은 그가 38년간 머물렀던 종로구 적선동에서 이곳 워커힐 아파트로 옮긴지 올해로 만 10년이된다. 요즘도 여전히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독교 방송을 들으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근처 아차산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바로 작업에 임한다. 그리고 하루 2시간에서 3시간,전날 독서로 구상해두었던명언·명구를 마음속에 새겨 우러나오는 진한감동을 작품속에 담아낸다. 그는 글씨를 이루는데 있어 아름다움은 언제나 「선」이어야함을 전제하고 있다.이른바 선하지 않은 것은 미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기술이 피부라면 인격은 근골이다.티없이 청정한 피와 살과 뼈대가 합일될때만 비로소 미의 영혼이 글씨와 글속에 첩식된다는 것이다.순수한 서체에서의 체삽이나 시속기는 천착스러움의 극치다.글이 뜻하는 바를 거르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선 심혼의 혈서로 성자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씨 내재의미 중시 「초학자시 불가진형세 선상자성의 재필전」­글씨는 처음 대할때 그 형세를 알수없으니 먼저 글씨가 이루어짐을 생각하면 뜻은 쓰기전에 있게 된다,즉 원곡은 서의 진수는 글씨의 모양에 두기보다 그 내부에 내재된 뜻을 소중하게 여기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등 한자체에 두루 통달하여 일가를 이룬동안에도 그는 한때 중국말로 된 성경을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다.막상 이를 내놓았으나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때부터 그만의 독특한 원곡체를 창안,한문각체의 독창적 변형을 한글에 적용시킨 이 서체는 한자와의 대련 작품을 쓸때도 조화와 균형을 깨지않는것이 특징이다. 옛날 궁중에서 궁녀들이 소설을 베낄때 사용한 궁체가 부드러운 반흘림의 반행초의 실용글씨라면 원곡체는 한문보다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구슬을 꿴듯한 우아미보다 먹물이 뚝뚝 듣는 힘의 분출이 돋보이는 서체다. 한글학자 고 최현배박사는 원곡의 한글체를 보고 『산같이 망막하고 강같이 줄기차다.우리의 한글이 제본연의 성품으로 온전히 나타났다』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의 독창성이 지나쳐 그 자신이 스스로 「전위예술」이라 일컬었던 「묵영기법」은 서예계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묵영기법이란 청묵의 번짐을 사용하거나 먹물의 농담으로 거듭써서 시각효과를 앞세운 일종의 회화적 서예 회화인 셈이었다. 서예계는 『전위예술,즉 묵영은 서예에서는 있을수 없다』고 발칵 뒤집혔고 심지어는 『전통을모르고 전통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난 예술』로 혹평되기도 했다. ○「묵영기법」 논쟁불러 이때도 젊은감각과 시대에 부응하는 예술을 지향해온 원곡으로서는 전통예술을 지키기 위해선 고루하게 전통만을 고집하기 보다 오히려 여러각도의 실험과 시도를 언해 새로운 조형언어를 발굴,전통의 소중함은 물론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평생동안 그가 써온 작품은 개인전때마다 40점에서 60점씩 32회.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평소에 아끼는 성경구절들은 그때마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육당 최남선의 「삼·일독립선언문」을 비롯,제갈량의 「전후출사표」는 3천자이상,아가서8장 4천여자,무위자연의 노자 「도덕경」5천여언,특히 굴원의 「이소경」의 경우는 사적고증,한자구성·암기 등으로 6개월준비,집묵만도 10일이상 걸린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랜 연륜과 우수사려가 없는 마음가짐으로 인해 그의 글씨에는 향기는 물론 불가사의한 힘이 담겨 있다. 올해나이 84세.그러나 그 음성과 행동에서 연노의 기색은 찾아볼수 없다. 또 서예계 최고 원로의 권위의식 같은것도 없다.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격의없이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한다. 1909년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김정현씨와 김취옥여사의 2남중 차남으로 출생.5세때부터 조부인 동효공이 설립한 한문서당 삼언재에서 글씨와 천자문을 배웠고 홍산소년백일장에 나가 한시짓기 장원,11세때 보통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신교육을 받게됐으나 공주고보 2학년때 일인체조교사를 배척하는 맹휴의 주동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그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 문회고급중학과 상해중국공학대학 경제과에 다녔다. 상해유학시절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입단하여 도산 안창호선생을 모신 독립운동에 가담,국내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정리하여 국내정세를 보고하거나 흥사단 행사때마다 글씨를 잘 쓴다고 해서 식순을 쓰는 일 등을 맡아보기도 했다. ○흥사단서 독립운동 그때부터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보다 글씨 쓰는 일에 심취하여 졸업후 고향에 돌아오자 고장의 명필인 산정 신익선선생에게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웠다. 하루종일 쓴 글씨가 집안마당에 흰눈처럼 수북히 쌓였던 기억은 지금도 그에게 불길같은 작업의지를 당겨준다고 한다. 그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소전 손재형선생에게 사사.『재주는 있으나 헛 공부했다』는 혹독한 질책을 받으면서 그는 구양순 안진경 왕희지의 법첩으로 겨울밤이 지새도록 수련을 쌓아갔다. 봉천 문회고급중학교때 남경서 신학대학을 나온 백영엽목사의 영향을 받아 크리스천이 된 그는 조국에 돌아가면 목사가 되려했으나 글자 한자한자의 그 묘한 성자에 빠져 글씨쓰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그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글씨로 전한다는 의도에서 성경구절을 작품에 담게 되었고 성경구절을 쓴 작품만도 6백여점에 이른다. 새문안교회에 다닌지 45년,출중한 건강을 타고난 그는 담배나 커피·술은 입게 대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 차인실씨(82)와는 1939년에 결혼,외아들인 명호씨(53·미앨라배마에서 병원)와 4녀가 있다. 원곡은 주변을 조금씩 정리해 본다는 뜻에서 지난83년 그가 아끼던 자작품 2백87점을 골라 국립현대미술관에 보내던날,아들 딸을 결혼시켜 내보낼때보다 더 가슴저미는 허망함과 섭섭함에 그날밤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지난 90년에는 그가 한평생동안 소장해왔던 추사 김정희의 「고시행서」위창 오세창·김구선생의 글씨,청전 이상범과 절친했던 운보 김기창,청계 정종여의 금물로 그린 「독수리」등 30억 상당의 골동서화를 아들의 모교인 연대박물관에 기증. 1958년 제1회 개인전을 필두로 신세계미술관이 주관하는 개인전이 끝나면 부인과 자녀들이 권유하는대로 이대와 고려대 중앙대등 각 대학에 작품을 나누어 보낸다. ○33회째 개인전 준비 그가 제정한 원곡서예상은 올해 16회째,오는 10월25일부터 제33회 원곡서예개인전을 역시 신세계미술관에서 갖게된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묘비문을 비롯,수백여개의 비문과 동상문 현판글씨 시비등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글씨가 산재해 있으나 단 한글자도 그는 허트로 내놓는 일은 없다. 그의 마음가짐은 「논어」에 나오는­ 「불지명이면 무이위군자야요 불지례면 무이립야요 불지언이면 무이지인야라(천명을 알지못하면 군자가 될수 없고 예를 모르면 세상에 나서 행세할수 없고 말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를 실천하며 앞만보고 살아왔다.분한이 있으면 향기로운 글,빛을 발하는 글에 이를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대덕약곡」(큰덕은 골짜기 같아야 한다)」에서 따온 그의 아호인 원곡처럼 그래서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고 마음을 텅비운 맑고 깊은 골짜기,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포용하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정진하는 예인의 자세를 지킬 뿐이다. □연보 ▲1909년 충남 부여 홍산출생 ▲1927년 만주 봉천 문회고급중학졸업 ▲28년 흥사단 원동위원부입단 안창호 김구 이동령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입당 ▲1932년 중국 상해 중국 공학대학부 경제과 졸업 ▲1936년 소전 손재형선생사사 ▲1939년 조선서도 진흥회 주최 전국서도전 입선 ▲1942년 중국 상해서 전중국서화전 입선 ▲1946년 전국 서화전 이등상 ▲1949년 제1회국전 서예부 특선(문교부장관상) ▲53∼55년 국전 제2·3·4회 특선 ▲〃 대성 서예학원 설립 ▲〃 서울대·숙대·상명여대 출강(15년간) ▲56∼58년 국전 제5·6·7회 추천작가(출품) ▲58년 제1회 원곡 서예전 ▲59·60년 〃 제8·9회 초대작가(출품) ▲61∼82년 국전 제10∼30회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 ▲59∼89년 원곡서예전 제2회∼29회 개최 ▲1976년 미국·유럽 미술여행 ▲78년 제1회 원곡서예상 제정 ▲79년 동아일보 주최 원곡서예 회고전 ▲79년 북유럽및 캐나다 미술여행 ▲〃 제1회 원곡 미술상 제정 시상 ▲79∼92년 제2∼15회 원곡서예상 시상 ▲83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자작 대표작(2백87점 기증) ▲84년 주일 한국 대사관 한국문화원 초대 서예전 ▲87년 봄베이·카이로등 유럽지역 여행 ▲기독교 미술인 협최 회장역임 고왕경·김강경·경천애인·시편23편·이소경·삼일독립선언문·애경·전후출사표·1오일삼성오신·불원천불우인·묵시록등 1천여점 은관문화훈장 한국서예사 원곡서문집
  • 김자경오페라단,「카르멘」 공연/18∼22일 서울오페라극장서

    ◎전용극장 개관기념,창단 25돌 자축 김자경오페라단은 비제의 「카르멘」을 18일부터 22일까지 서울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다. 국내 최초의 민간 오페라단인 김자경오페라단의 이번 공연은 오페라 전용극장 개관을 기념하는 감회어린 무대이자 김자경오페라단의 창단 25주년을 자축하는 무대. 김자경오페라단은 이 공연을 위해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과 다국적 스태프를 기용해 어느때 보다도 충실한 무대가 되도록 애썼다. 먼저 주인공 카르멘 역에는 프랑스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마가렛 다몬테와 메랄 자클린,그리고 강화자가 나선다.돈호세 역에도 프랑스의 테너 모리스 마이브스키와 최원범,박치원이 교체 출연해 본고장의 소리와 우리 성악가의 능력을 비교해 볼수 있게 됐다. 이밖에 미카엘라 역에는 소프라노 박순복과 이연화,투우사 역에도 바리톤 박수길과 고성진 등 정상급 성악가 10명이 나서는 호화판 무대이다. 이번 공연의 연출자는 파리오페라좌의 연출가인 루시앵 들라크로아.그는 주옥같은 노래들과 발랄한 오케스트라,씩씩한 합창 등 「카르멘」의 특징을 무대 구성에도 그대로 살려 극적인 무드를 충실하게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반주는 불가리아의 루산 루이체프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맡는다.루이체프는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오페라단의 상임지휘자.이와함께 이상길이 지휘하는 수원시립합창단과 풀초롱어린이합창단,전미례재즈발레단이 나서 정열적인 스페인 풍의 노래와 율동을 선보이게 된다. 이밖의 스태프는 기술총감독에 이주경,무대미술에 이화여대 이정순교수,의상디자인에 프랑스의 테루와 탱,무대감독 장수동 등 이다. 공연문의는 393­1244.
  • 불 전위무용가/프레르조카주 일 공연 화제

    ◎「혼례」·「어느 관계」 2개작품/성충동·고독감 표현 압권 「프랑스 전위무용의 충격」.지난 91년 다양한 에로티시즘의 표현으로 일본에 충격을 주었던 프랑스 권위무용의 기수 프레르조카주의 작품이 다시 일본에서 공연되어 일본무용팬들을 또 한번 들뜨게 했다. 문제의 작품은 최근 도쿄에서 공연된 「혼례」와 「어느 관계」.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전위무용 안무가 프레르조카주가 이끄는 무용단에 의해 공연된 「혼례」는 20세기 천재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러시아 농가의 결혼식을 주제로 창작한 발레곡을 새롭게 안무한 작품.공연시간은 30분. 혼례는 운명에 몸을 맡긴 신부의 비장한 아름다움과 환희를 긴박감 넘치는 남녀 10인의 군무로 구성,중후하고 비장한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결혼식이라는 성스러운 의식속에 감추어진 성의 충동을 선명히 표현하고 있다. 「어느 관계」는 2명의 청년이 상호관계성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서로서로의 고독을 메우는 자세를 곡예사적인 율동으로 표현한 작품.마루에 누워있는 상대방을 발끝으로 들어올려재빨리 팔로 안는 곡예사적인 동작이 압권이다.공연시간은 30분. 프랑스의 전위무용을 리드하는 프레르조카주는 알바니아이민 2세로 1957년 파리에서 태어났다.그는 파리와 뉴욕에서 고전및 현대무용을 공부한뒤 무용가로 활약. 1984년 「컴퍼니­프레르조카주」를 설립,안무가로 새롭게 출발했다.그는 다음해 신인 안무가의 등용문인 「바뇨레국제안무대회」에 입상한뒤 의욕적인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그는 90년 리옹오페라좌발레단을 위해 「로미오와 줄리엣」을 안무했으며 곧 파리오페라좌의 의뢰로 신작 「파라드」와 「장미의 정」을 발표하기로 돼 있다. 「혼례」와 「어느 관계」는 지난 89년 초연된 작품으로 당시 프랑스 르몽드지로부터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프레르조카주는 지난 91년 다양한 성애의 자세를 무대화시킨 「육체의 리큘」의 일본공연으로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 영 전통춤 모리스댄스 복원

    ◎15세기 풍요기원 의식… 소멸 백년만에 재현 유럽의 섬나라 영국에서는 요즘 약 1세기 전에 거의 자취를 감춘뒤 관광포스터에서나 찾아볼수 있었던 모리스 댄스라는 전통춤의 복원운동이 활발히 일고있다. 꽃과 리본으로 장식된 화려한 중절모,깨끗한 와이셔츠에 십자반도를 두르고 다리에는 스타킹 위에 방울을 주렁주렁 매단 일단의 신사들이 야외풍경을 배경으로 펼치는 경쾌한 율동.아코디언,바이올린,콘서티나(아코디언과 비슷한 악기의 일종)가 어우러져 내는 포크음악에 맞춰 서로 빠르게 교차하면서 발뒤꿈치를 두드리기도 하고 나무막대기를 맞닥뜨리기도 하며 이따금씩 손수건을 꺼내 머리위로 흔들기도 한다.마치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리스 댄스 춤꾼들의 모습이 클레이게이트,헤딩튼,애더베리,셔본 등의 작은 마을들에서 자주 목격되고 있다. 모리스 댄스는 그 기록이 1458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깊은 뿌리를 갖고있지만 시대상황이 변하고 춤의 유래에 관한 해석이 달라짐에 따라 혹독한 수난을 당하다가 끝내 종적을 감췄던 이 나라비운의 전통춤이다. 이 춤의 유래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초기에는 영국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풍요를 기원하던 전통의식에서 파생된 고유의 춤으로 이해됐다.그 결과 이 춤의 장려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헨리7세 등 국왕들이었다.이들은 댄서들에게 재정보조를 해주고 왕궁에서 공연을 갖도록 배려했으며 상류층들의 후원을 적극 독려했다.이에 힘입어 모리스 댄스는 쉽게 대중화되어갔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댄서들은 시련을 맞기 시작했다.성직자들은 왕궁을 누비는 호화스런 차림의 이 춤에 대해 탐탁지 않게 여겼다.그리고 이에 맞물려 춤의 유래에 관한 해석도 명칭(Morris)에서 나타나듯 아프리카 북서부의 무어인들(Moorish)의 전통에서 파생된 외래춤이라는 쪽으로 바뀌었다.당시 댄서들은 얼굴을 검게 분장했는데 이는 모리스 댄스가 무어인의 춤이라는 해석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17세기 청교도혁명을 계기로 모리스 댄스는 마침내 불법화되고 댄서들은 음주,신성모독,춤의 난잡성 등을 이유로 재판까지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그 이후로는 음성적으로 명맥만 유지되다 그나마 세기말에 들면서 거의 사라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모리스 댄스가 부활의 기회를 갖게된 것은 작고한 음악사가인 세실 샤프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그는 1899년 이 춤을 목격하고는 복원을 결심,어린시절 이 춤을 추었거나 본적이 있는 80∼90대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증언과 자료를 수집했으며 이를 토대로 나중 포크댄스협회를 창설했다.요즘 이곳저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모리스 댄스는 이 협회의 고증과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모리스 댄스는 아직은 다양한 직업과 연령층으로 구성된 소규모 마을사람들이 아마추어수준에서 재현해내는 동호인활동차원에 머물고 있다.그러나 일반적으로 남성춤으로 인식돼온 이 춤이 여성들에게도 급속히 확산되고있고 최근에는 국내뿐 아니라 홍콩,캐나다에서도 모리스 댄스 클럽이 결성되는 등 사라질뻔한 한때의 위기를 딛고 귀중한 전통 문화유산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 21세기 한국의 문을 여는 “이어령과의 대화”:14

    ◎지게와 바퀴… 그 도구관의 차이/곤충에 바퀴 안달아준 하늘의 뜻은/도로개설 없이도 짐 나르는 지게/환경보호 측면서 바퀴보다 우수/자연순응의 바이오 테크놀로지 모델/계산 등 외곬일 잘하는 컴퓨터·로봇/상황에 따른 균형대응능력은 없어/자연그대로 이용하되 새기능 창출/한국인의 지게정신 되살려 나가야 □황규호문화부장=우리는 변변히 산업시대의 혜택을 누리지도 못해보고 지금 그 해독만을 받게 된 것같아 억울한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지난번에 리사이클문제를 이야기 해주셨는데 우리는 훌륭한 자연존중의 전통문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환경파괴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신경한지 모릅니다. ■이어령전문화부장관=사실 한국인처럼 자연의 훼손을 꺼려온 민족도 이 지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객관적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지게를 보면 압니다.가까운 일본에도 중국에도 우리와 같은 그런 형태의 지게는 없습니다.물론 유럽에나 다른 제삼국에도 지게와 같은 운반체를 사용한 예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유례없는 운반체 □지게와 환경보호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요. ■인간의 문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 바퀴라고 합니다.바퀴가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 자동차는 엔진으로 가는 것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자전거를 타보면 바퀴의 편리함을 금세 알 수 있지요.두다리로 걸어다니는 것보다 그것으로 바퀴를 굴려서 가면 훨씬 빠르고 편합니다.같은 힘을 들이고도 멀리 빨리 쉽게 갈수가 있지요.유럽에서 여자가 남자처럼 바지를 입게 된 것도 이 편리한 자전거가 생기고 난 다음부터라고 하지만 일단 이렇게 편한 바퀴도 조금만 경사가 있거나 턱이 있는 곳이거나 땅의 표면이 울퉁불퉁하거나 혹은 단단하지 않으면 걷는 것보다 오히려 불편합니다. □그렇지요.길이 없으면 바퀴문명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바퀴와 길,그리고 세계의 지배는 떼낼 수 없는 인과관계를 지니고 있다고들 하지요.온 제국의 영토에 포장도로를 깔았던 대 로마제국의 문명이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로마제국의 포장도로도 제국이 망하고 난 뒤 보수를 못하게 되자 차가 다니지 못하게 되고 나귀나 낙타가 등에 짐을 지고 다니는 길로 바뀌고 말았던 것입니다.한마디로 평탄한 길에서는 바퀴의 회전운동은 전후 상하의 운동과 같은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기때문에 그 효율이 높지만 요철이 있는 곳에서는 반대로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요.보통 차량은 직경의 4분의1까지의 높은 단까지는 움직일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무리라고 합니다.요철만이 아니라 진흙길이나 풀섶과 같은 길에서 바퀴가 구르려면 콘크리트보다 회전의 저항은 8배이상이라고 합니다.생물학자의 말을 들어보면 만약 쥐에게 바퀴가 달려 있다고 한다면(웃음)그 몸집의 비율로 보아 그 바퀴의 직경은 약 6㎝정도가 되리라고 합니다.그러면 1·5㎝의 돌이나 나뭇잎도 지날 수가 없습니다.쥐덫을 놓지 않아도 잡을 수가 있지요.더구나 개미같은 작은 곤충이 바퀴가 달려 그것으로 달린다고 하면 4㎜의 바퀴정도가 될 것이므로 1㎜의 모래도 넘지 못하고 쩔쩔 맬 것입니다. □알겠습니다.왜 하느님은 다리 대신 그 편한 바퀴를 달아주시지 않았는지 말입니다.(웃음)생긴 그대로의 자연은 어디를 보나 편편하고 단단하고 똑바른 길처럼 생긴곳은 없지요.진흙이거나 자갈이 널려 있거나 언덕 낭떠러지 돌­천지가 그렇습니다. ■바퀴가 편하게 구르기 위해서는 지금 말씀하신 것같은 그런 자연을 훼손하여 길을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자연의 그 땅을 뚫고 깎고 무너뜨리고 하지 않으면 길이 날 수가 없습니다.바퀴가 다니는 곳에는 모두가 이처럼 인공적인 환경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그 바퀴문명이 절정에 다다른 것이 오늘 우리가 환경오염의 주범이며 자연 파괴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자동차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자연파괴와 훼손을 하지 않기 위해서 바퀴보다는 지게를 개발했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우리라고 왜 바퀴가 편하고 힘 안드는 운반수단이라는 것을 몰랐겠습니까.중국도 일본도 손으로 끄는 수레라 하더라도 바퀴를 이용하는 일이 많았습니다.그런데 우리는 이규경이 「북학의」라는 글에서도 말 한적이 있듯이 한국인만이 유독 바퀴를 잘 쓰지 않았습니다.바퀴를 사용하면 길을 닦아야하고 길을 닦으려면 자연의 특히 풍수사상이 강해 지맥을 끊는 결과를 가져 오지요.그래서 자연을 그대로 두고도 무거운 짐을 운반할 수 있는 도구를 생각해 낸 것이 지게였던 것입니다. ■선생님도 「흙속에 저 바람속에」의 저서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길이 없는 곳에서는 지게 이상가는 운반도구가 없지요.모든 것이 기계화된 미군들도 한국전에서 군수품을 고지에 실어나르려 할때에는 지게부대에 의존해야만 되지 않았습니까.그런데 지게의 도구적 특징은 무엇인지요. ■지게의 어원은 짐을 「지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막는것이 마개고 머리에 베는 것이 베개인 것처럼 지는것이 지게이지요.그런데 이것이 똑같이 지는 것이라고 해도 멜빵으로 지는 것 즉 배낭같은 것과 다른점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요한 균형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역도선수라해도 자기 체중의 3배이상 되는 짐을 들어 옮기기 힘들지만 지게를 이용하면 누구나 벼 몇섬 지고 다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이를테면 수레바퀴처럼 끄는 것이아니라 지고 다니는도구가운데 지게보다 더 많은 무게를 쉽게 질 수 있는 도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지게는 우스워보여도 한국인의 원초적 사상이 철학이 배어 있는 도구입니다.천지인의 삼태극사상처럼 조화와 균형의 힘을 이념으로 삼은…. □지게의 원리는 균형과 율동의 힘을 이용한 조화의 도구라는 말씀이신가요. ○균형과 율동 원리 ■실제로 지게를 져 본 사람이면 다 알 것입니다.아무리 가벼운 짐이라도 좌우의 중심이 즉 균형이 잡히지 않으면 지게에 지고 한 발짝도 움직이기 어렵습니다.뒤로 벌렁 자빠지거나 비틀거려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양쪽 물동이의 무게가 서로 다른 물지게를 졌을 때처럼 말입니다.반대로 자기 키보다 두서너배가 넘는 짐이라도 좌우 무게의 밸런스만 맞으면 거뜬히 질 수가 있습니다.지게 진 사람은 마치 출렁이는 파도처럼 그렇게 리드미컬하게 걷지요.출렁 출렁 말입니다.리듬으로 균형을 잡고 속도를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게는 결국 바퀴에 패하고 말았지요.우리도 이제 고속도로를 만들어 본격적인 자동차문명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그런데도 지게의 의미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면 어떤 분야 어떤 형태로 남게 될는지요. ■두말 할 것없이 바퀴의 편의성과 기능성 앞에서 지게는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춘게 사실이지요.이제는 농촌에 가도 지게는 볼 수가 없어요.그러나 지게로 상징되는 도구관이나 균형문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우리만이 아니라 세계가 21세기의 새 문명이 그러한 정신을 갈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비근한 예로 날이 갈수록 서비스업,인간을 상대로 한 통신분야등 산업사회때의 2차산업과 다른 생업들이 불어나고 있지 않습니까.이런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정신이 균형감각입니다.보통 컴퓨터나 로봇은 외곬수로 계산하는 일은 잘 하나 상황에 따라 균형을 살리는 눈치 감각 마인드는 어렵습니다.애매한 상황에서 그때 그때 밸런스를 유지해주는 힘은 생체감각과 같은 생명력을 가진 주체에서만이 가능해지지요. □그것말고 직접 물건을 만드는 산업현장에서도 지게 정신이 발휘될 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지프는 지게형 차 ■구체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지프가 그렇지요.이것은 처음 군사용으로 2차대전때 개발되었지만 한때 사라졌다가 요즈음 서서히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도 요즈음 지프가 많이 눈에 띕니다.같은 자동차라고 해도 지프는 지게형에 가깝습니다.길을 내지 않아도 비교적 자연상태의 지면을 달릴 수가 있습니다.자연을 덜 파괴하고도 다닐수 있는 차형입니다.그래서 지프의 선전문에는 「길이 아니라도 좋다」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하지요. □보통 세단보다 지프가 자연적응이라는 면에서 지게형도구에 가깝다는 말씀이시군요.차체가 높다든지 4륜구동이라든지 차체가 짧아 좁은 공간에서도 회전할 수 있다든지 모두가 자연환경과의 균형을 살리려고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구요. ■자동차만이 아닙니다.요즈음 일본에서 대 히트상품이 된 것으로 퍼지 선풍기라는 것이 있지요.선풍기 바람은 기계로 일으키는 바람이므로 자연바람과는 아주 다릅니다.강약조절을 해도 일정한 속도,일정한 회전수에서 생기는 바람이므로 풍향과 풍력이 규칙직이고 정형화되어 있습니다.판판한 고속도로처럼 말입니다.바퀴처럼 매끄럽게 굴러가는 바람이지요.그래서 도무지 선풍기 바람을 항창 쐬고 있으면 시원한 생각이 들지않아요.그러나 선풍기 바람을 방향이나 풍력등을 불규칙적으로 랜덤하게 해놓으면 마치 산들바람이 부는 것 같아 훨씬 시원하게 느낀다는 거지요.이것도 지게식 도구관을 살린 것입니다.자연 그대로를 따르면서도 그 자연에서 새로운 인공적인 도구의 힘을 만들어 내는 정신말입니다. 지게와 같은 도구는 바이오의 새 기술 시대를 여는데 절대적인 모형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주도하는 기술은 바이오 테크놀로지라고 하는데 지게의 도구관이 그와 어느 점에서 연결될 수가 있을 까요. ■산업문명시대의 기술은 대개가 다 기계 즉 무생물·무기물을 이용한 도구들입니다.자동차·비행기·로켓,그리고 모든 일렉트로닉스가 그렇습니다.그런데 바이오는 생명체를 즉 살아있는 것을 다루는 기술로 정말 신의 영역에 인간이 들어가는 것입니다.유전자 이 배합기술등 기계를 만들어 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자연 그대로를 이용하여 스스로 그것이 에너지와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지요.예를 들자면 대장균을 이용하면 전기를 발생시킬 수가 있는데 이것이 실용화하면 수세식변소의 정화조를 이용하여 가정용 전력을 확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공해도 줄어들고 리사이클로 지구 자원도 보존 됩니다.인분을 퇴비로 하여 먹고 배설하는 것이 영원한 순환을 하듯이 에너지도 그렇게 순환됩니다.이런 발상 그리고 이런 분야로 눈을 돌리게 되면 한국인의 지게정신이 되살아나 남의 나라보다도 그 마인드가 더 풍부해지지요. ○가까워지는 자연 □자연을 자연 그대로 이용하여 보통 자연과는 다른 기능을 창출하는 것,이것을 지게정신이라고 이해 해도 좋을는지요. ■그렇습니다.지게라는 도구자체가 무슨 못을 쳐서 만들었거나 기계를 사용하여 만들었거나 한 것이 아닙니다.Y자형의 지게가지나 작대기 머리의 V자형의 기능적 형태는 나뭇가지를 있는 그대로 이용한 것이지만 이미 나뭇가지와는 전혀 다른 물건을 져나르는 기능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한군데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그것을 조립하고 응용한 것만으로 자연속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물건이 생겨난 것입니다.천의무봉이라는 기술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지요.산업사회의 기술은 꿰맨자국이 보이지만 정말 기술이 발전되면 꿰맨자국(인공성)이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요즈음 폐광이나 채석장의 굴을 이용하여 발효공장이나 식품보존 창고로 응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이 바로 지게적 발상에 속하는 미래형 기술이라고 할 겄입니다. □우리가 미련없이 버렸던 지게도 잘 뜯어보면 미래의 자원이 있군요.지게정신을 살리면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발상법이 새겨날 것 같습니다.그러면 공해도 없어지고 자연과 인간도 더 가까워질 것이고요.정말 감사합니다.
  • 한국무용가 최현씨(이세기의 인물탐구:14)

    ◎절제된 몸짓… “여백의 미” 표현 일품/고고한 기품 넘치는 타고난 재능의 예인/김해랑문하서 승무·태평무 등 두루 이수/완벽주의적 성격… 대선배와의 불화 “천추의 한”으로 갓쓰고 도포입고 부채들고 최현이 무대에 나타나면 이도령이 광한루에 나선듯 화사하고 눈부시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헌칠하고 단정한 매무새,운신의 폭이 조용하면서도 민첩하다.삭풍이 이는 한겨울에도 그의 분위기에는 오월 단오같은 싱그러운 신록이 묻어있다. 부채끝으로 오작교(오작교)를 가리키고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리면 그때마다 한양의 풍류와 선비의 기품이 동시에 엇갈린다. 무용계에서 「푸르름을 몰고다니는 예인」으로 불리는 것처럼 그는 20대 미장부의 멋과 미를 변치않는다.나이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젊고 기개에 넘쳐있다.언제 어디서나 누구앞에서나 당당하다. 우선 그의 춤솜씨부터가 그렇다.타고난 재능과 기량으로 그는 빠르고 느린 어떤 곡조에도 절묘한 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중동이 절제된 그의 「승무」나 「살풀이」등 그의 춤의 매력은 그 움직임마다에 여백의 미를 살리는데 있다.뿌리치고 내뻗는 손짓하나에도 선과 배경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마치 한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듯 하다.힘이 들어가지 않은,몸속으로부터의 흥취가 절로 살아나 어느땐 멈추고 어느땐 다시 흐른다.그리고 조각처럼 푸르고 흰 얼굴에는 한과 슬픔을 자제한 인고가 담겨있다. 그는 춤뿐아니라 춤과 관련된 영화와 연극,창극과 뮤지컬을 두루 섭력한 예술가다. ○춤관련 영화·연극 출연 완벽주의자인만큼 한가지를 알아도 끝까지 파고들어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쌓고있다.대강대강 그럭저럭은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사람을 사귀어도 한번 사귄 사람은 절대로 놓지않는다. 이렇게 흑백이 분명하기때문에 무용계에서의 그의 위치는 자칫 외롭기 십상일수가 있다.그러나 서로서로 인맥·학맥,제자 스승으로 얽히고 설킨 속에서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타고난 재능,탁월한 춤솜씨 하나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춤추는 사람이 춤잘추는데야 누가 뭐라하겠는가.위로는 막강한 선배들이 기라성처럼 좌정하고 이리저리 끈이 닿는 무용풍토에서 최현자신은 그런 자부심과 오기 하나만으로 고고하게 버티어왔다 할수 있다. 그가 춤으로 무용계에 어필하기 시작한 것은 65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초라니」에서다.조택원이후 송범 김진걸 이매방으로 이어지는 남자무용수중 수려한 춤과 미모마저 갖춘 그의 출현은 무대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51년이후 한때 영화에 심취하여 조미령 김승호 허장강 등 당대 스타들과 영화 「춘향전」「시집가는날」등에서 주연,이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춘향전」「마의태자」「황진이」등은 노련미 넘치는 춤기교와 함께 영화에서 닦은 연기솜씨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작품들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비상」은 그 자신이 끊임없이 추어왔고 지금도 무용인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의 하나다. 소매가 긴 백삼에 상투관 차림,부채 하나만으로 무대를 누비는 이 「비상」은 희로애락의 일상사를 살고있으나 저 하늘을 향한 끝없는 의지,꿈을 잃지않으려는 인간의 끈질긴 열망이 춤속에 담겨져 「마음을 비운 춤」「생의 환희와 승리를 득도의 경지로 이끈 춤」「아무도 비상을 최현만큼 출수 없다는 경계선을 확실하게 그을수 있다」고 시인이며 무용평론가인 김영태가 쓴적이 있다. 영화·연극 못지않게 그의 음악취미또한 광적이다. 76년 호암 이병철회장의 도움으로 독립문쪽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최현무용단을 창단했을때 그의 연구소는 무용연구소라기보다는 마치 음악연구소처럼 사방벽이 온통 오리지널 디스크로 둘러싸여 있었다.그의 오디오 취미는 「마니아」급으로 오디오전문지들은 걸핏하면 드보르자크에서 수재천에 이르는 그의 음악취미·오디오기기들을 탐방취재하고 있다.이 방면에서는 특히 김영태와 의기투합하여 두사람은 충무로에서 용산전자상가를 곧잘 기웃거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취미도 “광적” 최현은 마산에서 성장했지만 본래 부산사람이다.본명은 최윤찬,후에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최현이란 예명을 가졌다. 16세때 전국가요경연대회에서 특상한 것을 계기로 「천재소년가수」가 되어 지평선 가극단을 쫓아 마산에 정착,마산의부호이자 한량으로 소문난 김해낭문하에 입문하여 그곳에서 궁중무에서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를 고루 이수했다. 그러나 스승이 초기엔 장작이나 패게하고 집안청소를 하게 할뿐 도무지 춤을 가르쳐주지 않아 그때도 당돌했던 그는 『왜 춤을 가르쳐주지 않느냐』고 스승에게 항의하곤 했다. 『예술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네가 보고 느끼고 깨달아라』그는 머리속에 꽉 찼던 안개가 걷힌 듯 스승의 이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때부터 춤이 몸속에서 피돌기처럼 돌고 흥이 기운처럼 솟구치기를 기다렸다.스승은 그제서야 그에게 춤 한자락씩을 지도해나갔다. 예술의 겸손을 엄숙하게 익히고도 인격수양이 덜 됐거나 춤을 잘 춘다는 주변의 칭찬에 우쭐한 나머지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 잊히지 않을 큰 「잘못」을 하나 저지른 적이 있다. 58년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스승 김해랑 안무로 「독무」를 출때였다. 당시 명고수인 지영희씨가 장단,그의 부인인 성금련씨가 가야금을 연주,진양조에서 중머리 중중머리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지영희씨가 그만 잦은몰이 장단을 잘못친 것이다. 박자와 호흡,시간조절에 의해 손의 움직임을 감을 수도 펼수도 있는 그로서는 리듬이 맞지않아 크게 당황했고 무대는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지영희씨에게 덤벼들었다. 『무대는 생명입니다.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선 안돼요.관객에게 손가락질 받으면 나는 이것으로 끝납니다』 지영희씨는 『최선생 내가 정말 잘못했네.큰 실수였다』고 백배사죄했으나 그로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망발.당대의 명인이자 대선배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자신의 방만함을 후회했다고 탄식한다. 이제 그는 참다운 예술가가 되고 싶다.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고 진지하게 나를 점검하여 「몸짓」하나 「소리」하나에도 자연의 질서가 깃든 지혜와 노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그리고 내 춤속에 관객을 끌어들여 나의 한과 정취와 풍류의 빛,내가 살아온 춤의 굽이굽이를 함께 향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최현의 많은 이야기중에서 그가 54세때 27세 연하의 신부를 맞아들인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화제중 하나다. ○54세때 27세 신부 맞아 84년 12월,일밖에 모르던 까다로운 성품의 최현이 갑자기 결혼을 발표,더구나 신부는 서울예고를 졸업,그가 지도위원으로 있던 국립무용단 단원이라고 해서 주변의 놀라움은 한층 컸다. 신부인 원필녀씨는 나이보다 깊고 의젓한 성품으로 춤추는 스승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혼자서 그를 사모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두사람의 결혼은 올해로 만 9년.제자로서 스승으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결혼초기때의 사랑과 정성과 존경을 변함없이 나누고 있다. 최현씨는 그동안 부인을 한성대와 이대대학원에 다니게 했고 지금은 한성대에 출강.『내가 아프면 밤새 내 머리맡에 앉아 나를 지켜준다』고 자랑한다. 지난해 6월엔 제1회 원필녀개인무용발표회를 주선해 주었다.그리고 그가 사랑해마지않던 그의 춤 「비상」을 부인에게 추게 했다. 그는 88올림픽 폐막식때는 10만군중과 수천명의 출연자들에게 청사초롱 「안녕!」을 추게 하여 방대한 스케일로 각계의 시선을 모았었다.지난해엔 청소년예술제에 「파란풍선」에 이은 「비단안개」를 안무,서울예고 무용단을 이끌고 일본 도쿄 무장야시민문화회관에서 「시집가는날」을 공연,올해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기금을 받아 그의 개인발표회를 준비중이다.작품은 정철의 「사미인곡」. 차범석극본·최종원음악의 이 작품은 그의 춤 60평생을 정리한 집대성의 일환으로 그의 특기인 「춤에서의 여백의 미」를 유장하게 전승시킨다는 집념을 담고 있다. 그는 아무리 춤을 잘추어도 훈련된 춤,숙련된 춤은 단호하게 부정한다.긴 세월 스스로 깨달아 마음속에서 몸속에서 자연스러운 율동으로 우러나오는 극미(극미)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기를 축적시키면서 이를 어느 한순간 우주의 무한한 공간속에 힘차게 내뿜는다.장삼자락을 낙화로 흩날리며 탄식의 숨결을 하공에 흩뜨려놓듯,그래서 그의 춤의 한끝은 결국 끝없는 비상임을 그는 알고 있다. □연보 ▲1929년12월 부산 영도 출생.최재용씨와 이말념씨의 2남5녀중 장남 ▲1946년 마산으로 이사 ▲1953년 마산상고졸업 ▲1959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 졸업 ▲1988∼1990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예술학과 수학 ▲1946∼1953년 마산 김해랑 무용연구소 입문 전통무용 유형과 기법사사 ▲1953년∼ 오광대일인자 장재봉,민속춤의 김숙자씨등에게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 등 이수 ▲1955년 최윤찬무용연구소 개설 ▲1961∼1962년 서울대 음대 무용강사 ▲1965∼1985년 서울예고 강사 ▲1967∼1974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강사 ▲1976년 최현 무용단 창단 ▲1980∼1981년 중앙대 예대 무용과 강사 ▲1981∼1985년 서울예전 무용과 주임교수 ▲1982년 최현 무용연구실 개설,한국무용협회이사,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예총)이사,문공부 문화재 전문위원,국립무용단지도위원,한국무용협 부이사장,대한민국 무용제 심사위원 문예진흥원 지원기금 심사위원역임 (영화)「삼천리의 꽃다발」 「시집가는날」 「춘향전」 「불멸의 성좌」 (무용·안무출연)무용극 「초라니」 「춘향전」 「시집가는날」 「마의태자」 「황진이」국립창극 「심청가」 「강릉매화전」 「광대가」 「변강쇠타령」 「시집가는날」 「대춘향전」 「허생전」 「심청」 「서동가」 「이춘풍전」 「놀부전」 「소태산」 「아리랑」 ▲1970년 일본 EXPO70 한국의날 안무·출연 ▲1971년 국립무용단 유럽지역 10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5년 국립무용단 일본 10개도시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 「녹」 「비상」안무·출연 ▲1980년 국립무용단 동남아 9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82년 시립무용단 「한국 명무전」에 「비상」출연 ▲1985년 호암아트홀 개관 초청공연 「헌화가」안무·출연 ▲1987년 88서울예술단 창단공연 「새불」구성·안무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안무총괄 「안녕」 ▲1990년 국제문화협 주최 일본 지역 공연 창극 「심청전」안무 ▲〃 동아일보창간70주년기념 모스크바지역등 5개국 순회공연 창극 「아리랑」안무·출연 ▲1991년 국립극장주최 청소년예술제 「파란풍선」안무 ▲1992년 국립극장주최 「비단 안개」안무 ▲〃 서울시립무용단 무용극 「춘향전」객원안무 ▲현재 문화부 문화재 보호협회 「한국의집」예술총감독,서울예고 무용과장 서울올림픽 안무총괄 공로 대통령 표창
  • 서양화가 도문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13)

    ◎신선한 감각으로 원색의 미 묘사/변화에의 열정으로 새 조형방법창출 온힘/「정적질서」 보다 동적 유동세계 표출 돋보여/부친 도상봉화백 그늘벗어나 독자적 예술세계 추구 그림속의 꽃들은 모든 꽃이 활짝 피어 꽃바다를 이룬다.캔바스의 한정된 공간이 아닌 드넓은 벌판에 얼마든지 펼쳐진 채 꽃들은 꽃이 파리 바람에 흩날리듯 꽃향기 퍼뜨릴 듯 꽃마다 싱싱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화가 도문희의 회화세계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유랑의 필치로 원근법과 사실적기법을 적절하게 원용하면서 큐비즘과 포비즘의 요소를 포함시킨 새로운 조형방법에 능란하게 반응하고 있다」는게 원로미술평론가 이경성씨의 말이다. 「언제나 신선한 속도감과 힘을 머금고 있는 그의 화면은 정적인 질서의 세계가 아닌 동적인 유동의 세계를 절제와 생략으로 탐구하면서 격동속에서 미의 원형을 찾아내고 있다고. 도문희씨는 과연 몸속으로부터의 열망과 열정이 끓어 넘치는 힘의 화가다. 그의 작품에서는 물론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잠시도 한군데 오래 머물지 않는다.서울에 있는가하면 뉴욕에 샌프란시스코에 콜로라도나 산타모니카 라구나 비치에서 또는 괌도나 하와이의 빅아일랜드에서 화사하고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곳이 어디든지간에 그가 머물고 있는 곳에는 음악이 있고 음악의 흐름에 따른 경쾌하고 격렬한 사색적인 붓놀림이 그치지 않는다.자신의 예술의지와 방법을 위해 그는 자극적인 체험을 얻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한줄기 빛이 물체에 닿는 순간,그 빛은 물체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라고 말한 르노아르의 방법처럼 도문희는 꽃이면 꽃이라는 대상을 공간이동시키 듯이 생명감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화면속에 옮겨놓고 있다.그래서 그의 꽃은 어느때는 무복을 입고 회전동작을 하는 발레리너처럼 생기발랄한 율동적터치로 음악에서의 비오렌토와 알레그리시모의 리듬감을 팔팔하게 되살리기도 한다. ○생명감 화면에 담아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일상생활에서의 그는 될수록 그림과 연관시킨 일들 속에 참여하고 있다.그래서 공식적이거나 형식적인 행사자리보다연극이나 영화 한편 아르튀르 랭보의 「갈증의 희극」을 읽는 것이 그림에 대한 감동을 유발시켜준다고 생각한다. 음악이 없는 도문희란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다.클래식뮤직에서 디스코나 록뮤직,흘러간 닐다이아몬드나 젤리리에 이르기까지 그는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신들린 감흥에 물들여지기를 원한다. 아니면 그는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그랜드캐니언의 장엄한 황혼,달빛아래 사슴과 노루들이 뛰어노는 멕시코국경,크라이드강변의 성곽과 끝없이 불어오는 북풍 속에서 어디선가 「히드크리프!」를 부르는 캐서린의 목소리… 경탄과 감탄의 탄성이 절로 질러지는 눈부신 풍광을 찾아 또하나 새로운 여행계획을 세워야 한다. 초기에는 동양화에서의 삼원법과 같은 느낌으로 색채와 형태를 극대화시키면서 인물이나 꽃의 표현에서 몰골법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극도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를 승화시켜 감각화된 화면효과를 과시해 보이고 있다. 이런 심적충만을 위해 그는 시간과 정열을 아낌없이 투자해 왔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캔버스와의 오랜 대결끝에 빛이 공간속에 흐르듯 몸속에 정제돼 있던 예술에너지를 이끌어 조형언어를 구축해 나갔다. 도문희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최상의 환경에서 자랐다.나혜석의 불우하고 외로웠던 말년의 생애를 뺀다면 그의 화려함과 정열과 적극적이고도 진취적인 창조의식은 초기의 나혜석을 연상시키는 구석을 많이 지니고 있다. ○초기의 나혜석 연상 그의 부친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에서 선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바로 도상봉화백이다. 부친의 권유로 그림을 시작했으나 화가로서의 열망·야망이 꿈틀거리는 순간 그는 그림으로 향하는 두껍고 높은 벽을 스스로 힘차게 꿰뚫었다.물론 한사람의 여성으로서의 행복이 아닌 화가로서의 대성을 목표로 정하자 시련과 고통을 감수하는데 그는 주저가 없었던 것같다.고통없는 성취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상봉화백의 그늘은 예상외로 넓고 컸다.동경미술학교 출신인 부친은 국전창설멤버에다 대한미협위원장 한국미협이사장 예총회장 문총최고위원 예술문화윤리위원 위원장 등등 화단의 중책을 두루거친 거봉으로 도문희는 언제나 「도상봉씨의 딸」로 불리워야했다.그는 부친의 이 후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화격도 특성도 다른 작품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그 역시 쉽지 않았다. 혜화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발레리너를 꿈꾸면서 송범무용연구소에 넘나들다가 엄격한 부친의 반대에 부딪쳐 경기여고 때 그림을 시작했다.대학에 들어가기전에는 부친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김인승씨에게 그림을 사사,「화가지망」을 굳게 결심하고 정확한 데생,탄탄한 기본실력을 닦아 나갔다. 그때는 동아음악궁전이며 종로의 쎄시봉·르네상스음악실에서 하루종일 살다시피 했고 클래식판 수집광에다 블라맹크와 칸딘스키 루오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본래부터 화려하고 솔직한 성격이어서 그는 무슨일에든 쉽게 좌절하거나 좌절해도 실망하지않았다.결과가 안좋을땐 「좋은 경험」으로 돌릴만큼 낙천적인 편이다. 그에게 그림그리기를 권유한 부친은 막상 그에게 붓한번 바로잡아준적이 없었다.오히려 대학재학중 국전에 출품하기위해 열심히 그려논 그림위에다 가위표를 해논적이 있을 뿐이다.도문희는 국전에 출품하고 싶었다.자신의 작가적 재능과 자질을 인정받을수 있는 미술관문이었으나 부친이 심사위원·운영위원·고문등으로 연루되어있어 작품을 자유롭게 낼수없는것이 불편했다.3학년과 4학년때 부친몰래 가명으로 출품해서 연2회 입선했을때도 주변에서 「부친의 후광」으로 아는 것이 억울해서 아예 국전출품은 포기하고 말았다. 부친에게 영향을 받았다면 어릴때부터 아틀리에가 있는 분위기에서 아버니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는 것뿐.오히려 동경여자미술학교 출신인 어머니 나상윤씨가 『나는 아버지때문에 그림을 포기했지만 너만이라도 나대신 열심히 하라』는 배려의 힘이 더 컸다고 할수있다. ○예술적 분이기서 성장 대학졸업후 대한미협과 이대출신그룹의 녹미회를 중심으로 그룹활동을 펼치면서 환상과 기억속의 사물들을 거칠고 대담한 야수파적인 축제분위기로 이끌어 화단의 주목을 한데 모았다. 그러나 기왕에 주어진 화가로서의 과정을 답습하는 형식에서 벗어난다는 차원에서 69년 첫번째 개인전을 연후 그는 미련없이 모든것을 떨쳐버리고 유럽으로 떠났다. 영국과 독일을 거쳐 스코틀랜드에 정착하여 그는 북구의 바다와 하늘의 변화표현에 현혹된 시기를 보냈다. 남청·담청·군청·감청·선록 보라와 옥색에 이르기까지 서로다른 수백가지 청색으로 출렁이는 바다와 천사의 날개 같은 구름의 흐름에 홀려 그는 마치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연상케하는 청색조 시기를 이곳에서 거쳤다. 「시간따라 바람따라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단 한장면도 같은 색조,같은 표정을 보인적이 없었다」는 것과 「줄이엣의 푸른얼굴,로미오의 푸른눈매」머리카락과 머리에 장식한 액세사리까지도 굵고 짙은 푸른 선묘로 보여준것이 그시기의 작품들이다. 터질듯한 원색이 분방하게 펼쳐진 그 아름다움이 독특하여 독일의 벰버그 스코틀랜드 그린옥등 지방신문들은 「푸른 잎에 매달린 빗망울처럼 투명한 기쁨이 깃든 경관등으로 크게 취급한바 있다. 그의 부친이 딸의 그림을 칭찬한것은 77년 조선화랑 초대전때다. 그때 전시오프닝에 왔던 여러 화가 평론가들이 도문희 그림의 「축제분위기」를 호평하자 단지 한마디 『마치 이 세상이 천국임을 아는것같다』고 했었다.같은해 도상봉씨는 타계했고 도문희로서는 그때 그 말이 부친에게 들은 유일한 「촌평」이 된셈이다.서울에서는 지난 30년동안 끊임없는 우정의 교분을 갖고있던 선화랑의 김창실씨(화랑협이사장)와 진화랑의 유진씨의 초대전에 응하고 있다. 누구보다 도문희의 신선한 감각과 번뜩이는 젊음의 화면을 아끼는 김창실씨는 도문희의 「장미를 곧잘 「살아있는 보석」에 비유하고 「하탄과 하화가없는 그러나 화치의 극치」의 작가라고 말한다.화단의 대선배인 천경자씨는 「그의 식을줄 모르는 정열」도 정열이지만 무엇보다 「화가의 얼굴을 하고있는 화가」라는데 호감을 갖기도한다. 그는 여전히 무엇에 구애되지도 소속되지도 않는다.자신이 한일을 후회하지않는다.서울에 오면 이제는 다자란 딸과 아들과 친구처럼 어울려다닌다. 그는 화려한 치장을 즐기고 여러층의 사람들과 다양한 교분을 트고있지만 의외로 보수적이어서 안하는것 가리는것 투성이다.자유분망과는 상관없이 「맥주 한모금」등에는 남의 눈치를 보는 면이 있다. 뉴욕에서는 소호를 중심으로 일릭 드라곤루드 그레고리비치 조각가 스티븐 래등과 작품활동을 펼치고 그중 일릭 드라곤은 오는 5월 조선화랑 초대전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그는 지금 비로소 「화가의 길」을 걷게해준 부친께 감사하고 있다. 언제나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어보이는 그에게 누군가 『무엇이 그리 행복하냐』고 물었을때 그는 오히려 『슬픔과 아픔은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축복받은듯 활짝 핀 그의 꽃들은 아마도 남이 모를 아픔과 시련을 딛고 피어난 것이기에 보는이에게 보는것만으로도 진한 감동의 빛을 전달해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이 빛의 힘은 조금도 퇴색하는 기색없이 더욱 영롱하고 선명하게 그가 좋아하는 음악과 바람의 흐름에 실려 그의 화면속에서 기쁨의 빛으로 용해되고 있는것 같다. □연보 ▲1938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출생.서양화가 도상봉씨(77년 타계)와나상윤여사(87)의 1남 2녀중 막내 ▲57년 경기녀고졸업 ▲59·60년 국전입선 ▲61년 이화녀대 미대 서양화과졸업(김인승·이준·유경채·심형구사사) ▲80년 뉴욕 그래픽 버딘스 아카데미 ▲69∼72년 유럽체류(영국·옥일·스코틀랜드) 그린옥 아트갤러리·스코틀랜드 글래스코우 아트랠러리·렌프레쉬어 아트갤러리 등 개인전시 ▲73년 서울개인전(미술회관) ▲74년 아시아 련대작가전(일본 도쿄) ▲76년 세계여류미술전(인도네시아) ▲77년 서울 조선호텔 갤러리 초대개인전 ▲79년 진화랑초대 제4회 서울개인전 ▲80∼81년 미국체류(뉴욕맨해턴·버지니아 우드빌리지) 80년 비스비(Bisbe)전참가 ▲81∼8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벰버그(Bemberg)풀다(Fulda)빌트프릭켄(Wildfricken)개인전 ▲87년 서울선화랑 초대「장미」개인전 ▲89년 〃 진화랑 초대 개인전 ▲91년 〃선화랑 초대 개인전 ▲91년 〃정화랑〃 〃 ▲92년 MBC후원 부산호텔 미술관·아천미술관초대전 ▲93년1월 LA 앤드루 셔(Andrew Shire)갤러리 초대전 ▲한국미협·녹미회 회원 ▲작업실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국립현대미술관 간 한국서양화대관(작품수록)
  • 가요 「서태지와 아이들」(92문화계 주역:10)

    ◎랩 돌풍… 데뷔 3개월만에 정상/빠른음·율동 경쾌… 젊은층 매료/일부선 요란한 복장·몸짓 “눈총”/방송활동 쉬며 2집앨범 준비… 미·일 시장도전꿈 키워 올 가요계는 확고한 영역을 구축했던 발라드가 퇴조기미를 보이는 가운데 랩음악 또는 리믹스곡이 돌풍을 일으킨 한해였다. 발라드나 트롯 위주의 가수들조차 랩을 가미하거나 기존의 히트곡을 리믹스해 부르는등 가요계의 기상도는 일변했으며 그 위세에 눌려 다른 장르의 음악들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형편이었다. 우리에게 낯설기만 했던 랩음악을 본격 확산시킨 장본인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서태지와 아이들」.그룹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던 서태지를 주축으로 양현석,이주노로 구성된 이 랩댄싱트리오는 실험적인 테크노음악과 환상적인 무대로 데뷔 3개월만에 가요계를 강타,사회전반에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랩은 곧 「젊음」입니다.순수하고 솔직한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대변해주는 음악이죠.또 긴박감 넘치는 율동이 곁들여져 폭발할 것같은 젊음을 한껏 발산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고요』 이들은 랩음악이 젊은층의 환호를 받는건 어쩌면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청소년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음악외적인 또 하나의 「심벌마크」가 있다.상표도 떼지 않고 차려입은 복장과 등에 멘 조그만 배낭등이 그것이다.세대간 문화격차를 실감케 하는 이러한 자유분방한 행태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지난 10월 국회에서는 이들의 공연규제 여부를 놓고 한때 논란이 일기도 했다.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음악이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에 강력히 맞선다. 『저희들이 청소년층에 인기가 높은만큼 그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있는 행동은 절대로 하고싶지 않아요.요란한 차림새나 공격적인 춤동작 자체가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죠.오히려 「환상속의 그대」같은 곡은 청소년 선도에 큰 도움이 되는 매우 건전한 가사를 담고 있어요』 데뷔이후 한시도 쉴틈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이 「무서운 아이들」은 당분간 방송활동을 쉬는 대신 연습시간을 최대한 확보,항상 새롭고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최고」가 되기위해 노력하겠다며 강한 프로의식을 내보인다.내년 2월경 발표될 제2집 앨범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이들은 일본시장 진입을 위해 현지에 직접 홍보프로덕션을 차릴 예정이다.또 94년에는 랩의 본고장 미국에도 진출,월드스타로 도약한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거의 10년간 가요계를 「독식」하다시피한 발라드의 아성을 일시에 퇴조시킨 이들의 랩음악관은 확고하다. 『랩음악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이 「남이 하니까 한다」는 식의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는 음악인들도 결코 적지않을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은 「뿌리없는 음악」 「종속화된 음악」을 자초할 뿌이죠.가수는 모름지기 자신만의 음악성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에선 랩음악이 음악적인 깊이보다는 현란한 춤과 감각적인 가사로 청소년층만을 겨냥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 만큼 이 음악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이다.아무튼 신세대 음악인들,특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랩이라는 새로운 음악장르의 출현은 올 한해 가요계를풍성하게 했음에 틀임없다.
  • 침체 미 오페라단 “새 활로 찾기”

    ◎유럽식 화려한 무대·난해한 음악 자제/흥겨운 음율·율동·간결한 대사 시도 침체기의 미 오페라무대에 활로을 모색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가 펼쳐지고 있다.지금까지의 장중하면서도 건조한 유럽식 스타일에서 벗어나 관객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4일까지 공연을 가진 시카고 오페라단의 「맥티그」는 이같은 변신노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그 성공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미 오페라의 새로운 방향타가 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맥티그」는 프랭크 노리스의 1899년 원작소설 「탐욕」을 지난 24년 에릭 본 스트로하임이 희곡으로 각색한 것을 이번에 다시 윌리엄 볼콤이 오페라화해서 무대에 올린 것이다. 「맥티그」의 내용은 어찌 보면 유치할 정도로 진부하다.구두쇠이자 난봉꾼으로 무면허 치과를 개업하고 있는 맥티그는 친구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그러나 곧 노여움을 산 친구의 고자질로 망하게 되고 반면 여자는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뒤 변심,탐욕의 갈등이 벌어진다.맥티그는 여자를 살해하고 돈을 훔쳐 달아나지만 친구의 집요한 추적으로 결국 붙잡힌다는 줄거리다.그러나 볼콤은 「맥티그」에서 종래의 오페라양식과 전혀 다른 두가지 시도를 했다. 우선 오페라에서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파격적인 음악을 도입했다.뚜렷이 구별되는 음조의 다양한 장르를 섞어 혼성곡을 도입했지만 곡의 전환을 매끄럽게 처리,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았다.또한 화려한 장면이 묘사된 원작과는 달리 무대장치를 대폭 생략하고 대사 역시 절제되고 단순명료한 어구들로 구성했다.한마디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음악성의 오페라,관객에게 즉흥적인 만족감을 주는 오페라를 연출했다. 결과적으로 이 두가지 새로운 시도는 관객의 동원과 비평가들의 평가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작곡가 볼콤과 대본가 로버트 알트만의 오랜 호흡이 이뤄낸 역작이라는 호평도 받고 있다.일부 비평가들은 「맥티그」에서 미국의 오페라계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미국식 오페라의 새 양식을 발견했다고 까지 격찬하고 있다. 근년들어 미국에서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두 대작인 존코리글리아노의 「베르사유의 유령」과 최근 존 글라스의 「항해」를 제외하고는 뚜렷한 성공작이 없었다.이같은 상황에서 파격을 주창하고 나선 시카고 오페라단의 예상치 않은 성공은 분명 하나의 계기임에 틀림없다. 하워드 핸슨,딤스 테일러등 미국의 몇몇 오페라작곡가들은 이미 지난 30년대에 미국식 오페라의 창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그뒤로도 글러스 모어,로버트 워드,새뮤얼 바버등 대가들이 이같은 시도를 이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때 미국 관객들을 매료시켰던 유럽중심주의의 오페라는 이제 죽어가고 있다.미국인들은 소화하기 어려운 음의 소동과 난해한 대사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그에 맞춰 춤을 출수있는 오페라를 원하고 있다.「맥티그」는 이러한 취향을 충족시켜주고 있으며 비평가들은 이를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맞은 미국 오페라의 모더니즘으로의 회귀」라고 평하고 있다.
  • 「92화랑미술제」 어제 막내려/“참신한 예술성” 여류 8명 부각

    ◎김순남씨 등 서양화전공 주류/독자적 색조·화면구성 돋보여/남성위주 화단에 “신선한 자극”으로 평가 일부 여성작가들의 참신한 예술성이 지난 30일 폐막된 92한국화랑미술제의 새로운 수확으로 꼽히고 있다. 올해 화랑미술제에 출품한 여성작가는 10여명으로 이중 평면회화부문의 작가 8명이 미술전문가와 일반의 호평속에 밝은 가능성을 점치게 한것. 주인공들은 대부분 서양화 전공자들로 장영숙(가람화랑)강남미(갤러리상문당)홍승혜(국제화랑)김명희(그로리치〃)김순남(선〃)박승순(인〃)이희재(한선갤러리)유인랑(현대화랑)등. 이 여성작가들의 부상은 입지형성에 있어서 남성에 비해 열등한 화단현실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장영숙씨는 그동안 판화작가로 잘 알려져 있던 인물로 이번 미술제에서는 최근 몇년간 매달려온 유화작품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강남미씨는 한국화 전공자이지만 그의 이번 작업은 동서양의 간격을 찾기 힘들만큼 독자적인 현대성을 보여주었다. 특수안료플 사용한 그녀의 그림들은 지난 몇년간 천착해온 달팽이 소재로 편안한 중간색조위에 오묘한 형상들이 남다른 조화를 이룬 것으로 평가됐다. 동화적인 구성위에서 회화성도 놓치지 않고있는 그녀의 그림들은 작가적 재능을 읽게 했다는 평을 받았다. 40대중반의 김명희씨는 지난 20여년동안 미술계를 의식치않고 묵묵히 작업실에만 묻혀온 작가. 「철저한 조형성을 바탕으로 인간의식의 파동을 캔버스에 옮겨놓았다」는 평을 받은 그녀는 역동적이고 율동적인 획의 궤적이 연속적 파상을 이루며 화면전체를 메운 작업들을 선보였다. 김순남씨는 재불화가로 현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는 학구파이다.지난 79년에 도불,꾸준한 노력끝에 현지에서 어느정도의 입지를 마련한 그녀는 한국민화를 독창적이고 환상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울대미대출신의 재불작가 박승순씨와 이화여대 서양화과 출신의 이희재씨 등도 독창성이 돋보이는 화면창출로 기대를 받은 인물들. 한편 유의랑씨는 지난 90년 화랑미술제에 현대화랑 출품작가로 첫 선을 보여 그해 관객이 뽑은 인기작가 1위를 차지,주변의 눈길을 받았던 인물이다. 올해에도 유씨의 그림들은 「섬세한 화면」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잡았다. 큐레이터 정준모씨는 『화랑미술제가 상업화랑들의 잔치인 만큼 상업성이 우선되지만 올해는 특히 예술성보다 얄팍한 상혼의 기획들이 많았다.그런 반면 평소 발견하기 힘든 역량있는 일부 여성작가들의 출현은 신선한 소득이었다』고 전시평을 했다.
  • 「기쁨조」는 김 부자 등 “고위층의 노리개”

    ◎「만족」「행복」「가무조」로 구분… 별장 등에 배치/사상 투철하고 미모갖춘 20대여성 선발 ○…북한의 「기쁨조」 운영실태가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기쁨조」는 김일성·김정일을 비롯,당·정 고위층 간부들의 엽색행각및 피로회복을 위한 봉사활동,그리고 각종 주연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가무요원 등으로 동원되고 있는 여성들이 소속돼 있는 조직을 말한다. 최근의 귀순자및 입수된 관계자료에 따르면 이 「기쁨조」는 크게 「만족조」「행복조」「가무조」등으로 구분돼 김일성·김정일 별장및 각 초대소 등에 배치돼 있는데 전체 구성원은 약 2천명 정도이다. 그 가운데 「만족조」의 임무는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며 따라서 특별히 몸매가 좋고 성적매력이 풍부한 여성이 선발되고 있다. 「행복조」는 안마·마사지 등을 통해 피로회복을 시켜주는 것을,「가무조」는 반라무용·노래·악기연주 등을 통해 술좌석의 여흥을 돋우어주는 것을 주임무로 하고 있다. 「행복조」에는 평양적십자병원의 1년과정 특별반에서 안마·마사지 등의 교육을받은 여성들이 선발되고 있는데 매년 배출되는 인원은 20∼30명 정도이다. 이 20∼30명에 달하는 여성들은 1백% 각 시·도 예술전문학교 출신이며 때로는 평양적십자병원대신 동유럽이나 옛 소련서 3개월간 교육을 받고 오고도 있다. 「가무조」에는 보천보전자악단 등 각 예술단체나 대학생중 노래·무용·기악 등에 재질이 있는 여성이 선발되고 있고 이들은 외국에서 율동을 배워온 뒤 김일성·김정일 또는 당·정간부들이 갖는 파티에 참석하고 있다. 지난 91년말의 일본공연과 가요 「휘파람」으로 외부에 얼굴이 알려진 보천보전자악단 소속의 여자가수 전혜영,그리고 역시 같은 보천보전자악단소속으로 일본순회공연을 했던 김광숙·이분이·이경숙·조금화 등이 바로 「가무조」의 일원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이 3개팀으로 대별되는 「기쁨조」구성원 선발은 호위총국 주관 아래 「당간부과」산하 도·시위원회에서 맡고 있는데 선발기준은 ▲미모에 키 1m60cm 이상 ▲사상성분 투철 ▲질병 전무 등이다. 이 「기쁨조」구성원들에 대한 대우를 보면 거주지는 평양시 보통강구역의 호화아파트이고 일용품으로는 일제가 무상으로 지급되고 있다. 이 「기쁨조」구성원들은 25세가 넘으면 당간부과에서 소개하는 호위총국 소속의 군관이나 국가 공훈자와 결혼,「과업」을 마치고 있다.
  •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마라톤 3총사 금스퍼트

    【바르셀로나=올림픽특별취재단】 『애틀랜타에서 만납시다』16일 동안 몬주익 메인스타디움을 밝혔던 성화가 불길을 거두었다.5대양 6대주에서 모여든 지구촌올림픽가족들이 4년뒤 미국 애틀랜타에서의 재회를 다짐하며 석별의 정을 나눴다.1백72개국 1만5천여 선수단이 2백57개의 금메달을 놓고 조국의 명예를 위해 기량을 겨뤘던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은 10일 새벽 남자마라톤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한국은 8일 여자핸드볼 결승전에서 노르웨이를 28­21로 꺾고 우승,올림픽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며 11번째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은 남자마라톤에서 황영조(22·코오롱)김재용(26·한국전력)김완기(24·코오롱)가 금메달에 도전했다. 이번 대회에서 독립국가연합(EUN)미국 독일이 나란이 1·2·3위를 차지,「빅3」의 위세를 떨쳤으며 한국은 서울올림픽에 이어 두자리수 금메달을 거둬들여 스포츠강국임을 다시 입증했다. 특히 한국은 유도 레슬링 사격 양궁 배드민턴 역도 핸드볼등 7개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폐막식은 세계적인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가 개막식에 이어 다시 한번 감동의 멜로디를 들려주었고 스페인 민속춤인 플라멩고의 율동속에 화려한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수놓는등 3부로 나누어진 프로그램으로 2시간30여분동안 화려하게 진행됐다.
  • 월간 심상사 주최 「경포해변시인학교」를 가다

    ◎3박4일이 짧은 바닷가의 시잔치/시인·독자 3백여명 진지한 대화/실수연발 시극경연땐 박수로 격려 월간시지 심상사가 주최하는 「경포해변시인학교」가 이틀째 열리고 있는 1일 밤 11시께의 강릉 경포국민학교 강당.방학중 내내 잠자던 이 강당은 시극경연대회에 참가한 3백여명의 뜨거운 열기에 의해 새롭게 깨어났다.이날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시극경연대회에서 해변시인학교 참가자들이 보여준 열기는 이웃주민들의 원성을 살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즉흥극 형식으로 꾸며진 이날 시극경연대회에서 경연자들은 마치 이번 해변시인학교의 참가의의가 거기에 있는 듯 연기에 열과 성의를 다했으며 관람자들도 아는 노래가 나오면 박수를 치며 보조를 맞췄다.젊은이들의 경쾌한 춤과 율동,40∼50대 아주머니들의 시낭송과 어설픈 연기,때론 실수가 빚어내는 폭소등 그 모든것이 어우러지며 참가자들의 욕구를 시심으로 승화시킨 이번 시극경연대회는 참가독자들의 시에 대한 원초적 욕망을 자발적으로 키우고 계발한다는 주최측의 목적에 꼭 부합하는 것이었다.결국 이날 시극경연대회의 최우수상은 「시의 바다에서 온 어린왕자」를 공연한 가족(반)에게 돌아갔다.바닷가에 온 도둑이 시인과 시를 사랑하는 소녀에게 감명받아 개과천선 한다는 내용을 다룬 이 시극은 배(복)에 훔친 물건을 잔뜩 감춘 도둑을 시를 써서 뚱뚱해졌다고 착각한 소녀가 심사위원석의 훌쭉한 시인들을 「바람둥이 시인」이라고 지적하는 바람에 폭소를 자아냈었다. 지난달 31일부터 3일까지 3박4일동안 열린 심상해변시인학교는 시종 이같은 자발적 참여와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진행됐다.국내에서 열리는 문학캠프로는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이 행사는 올해가 14회째로 박동규교수(서울대)를 비롯하여 김광림 허영자 김종원 장윤우 이건청 이근배 윤강로 박리도씨등 50여명의 시인과 2백60여명의 일반독자가 참가,큰 성황을 이루었다.남녀비율에 있어선 1대5 정도로 여성이 월등히 많았지만 연령에서는 언니를 따라온 10대 소녀부터 76세의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14회에 걸친 행사로 이미 널리 알려진 심상해변시인학교에의 노인층의 대거 참가는 주최측의 새로운 두통거리이자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이번에 8명의 동아리를 이끌고 세번째 참가한 이미현 할머니(65·경기 분당)는 『시를 좋아하고 즐기던 학창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라며 『강의가 재미있고 젊은이들 노는 것 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친구따라 강남가듯 이할머니를 따라온 주중여할머니(74·서울 흑석동)도 『문학에 특별한 관심은 없었지만 강의가 재미있어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앉아 있었다』고 한 마디.이 할머니들은 문학참여도에 따라 나뉜 반편성에서 가장 하위의 C반에 편입되자 주최측에 불만을 표해 이를 조정케 했으며 장기자랑코너에서는 「창부타령」을 춤과 함께 열창해 큰 상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해변시인학교가 결코 오락성만이 중시된 행사는 아니었다.유명시인 초청강의,시창작실기교실,시인과의 대화 시간등은 엄격하고도 진지하게 이뤄졌으며 부진한 담임시인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경고도 주어졌다.시인과의 대화시간에는 원론적인 강론외에 등단절차,작법요령 등 실질적 문제가 다뤄져 호응이 높았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참가독자들이 적극화되면서 시인과 독자간의 긴밀한 소통이 이뤄졌다.특히 젊은 문학지망생들이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나 모방문제에 있어서는 시인들이 답변에 절절매는 모습도 연출됐다.머리가 희끗희끗한 김광림시인도 『포스트 모더니즘때문에 진땀난다』고 피력할 정도. 이번 해변시인학교에는 또한 8년째 이 모임에 참석해 왔던 정주영 국민당총재도 잠시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2일 초청강의에서 그는 자신을 『당총재 이전에 이화여대 명예문학박사』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밖에 주변의 안목해수욕장에서의 임해수련,파하기 전날밤의 캠프파이어 등은 이번 해변시인학교의 낭만을 한껏 돋워준 행사였다. 거의 매년 이 행사에 참여해온 장윤우시인은 『바다가 있는 곳에서 동료 시인과 시를 사랑하는 마음 좋은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얼마나 낭만적인 자리인가』하고 말한다.이번 모임에 처음 참가한 유병렬씨(28·회사원)도 『짧은 기일이지만 좋은 강의를 많이 듣고 사람들을 여럿 사귀어 퍽 많이 배운 느낌이 든다』고 소감을 말했다.
  • 수출용생수 시판 강력제재/「설악」 허가취소… 7곳 추가방침/보사부

    ◎5곳엔 영업정지등 조치/「무허」 48곳 적발,사법처리 요청키로 허가조건을 어기고 생수를 국내에 시판해온 유명생수업체들이 영업허가가 취소되는등 생수시판에 대한 제재가 한층 강화됐다. 보사부는 16일 수출 또는 주한외국인판매를 조건으로 생수영업허가를 받은 뒤 불법으로 생수를 시판해온 설악음료를 허가취소하고 다이아몬드정수등 7개업체에 대해서는 허가취소를 위한 청문과정절차를 밟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따라 앞으로 추가로 허가취소가 예상되는 7개업체는 다이아몬드정수를 비롯,한국청정음료 산수음료 풀무원샘물 스파클 산성정수등이다. 보사부는 이밖에 허가조건을 1∼2회 위반한 크리스탈정수등 5개 업체에 대해서는 영업정지나 과징금을 물게했다. 보사부에 따르면 영업허가가 취소된 설악음료는 전량수출과 대중광고금지등을 조건으로 광천음료수 제조허가를 받고서도 일간지에 광고를 내고 내국인에게 생수를 팔아오다 지난 5월말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위반사항이 적발됐으며 다이아몬드정수등 7개업체는 3개월의 영업정지처분과 함께6백30만∼1천1백만원의 과징금이 부과된 상태에서도 영업을 계속해왔다는 것이다.보사부는 이와함께 무허가 생수업계에 대한 일제단속을 벌여 정수나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은 계곡물이나 농업용수등을 생수로 속여 팔아온 48개 업체를 무더기로 적발했다. 적발된 참샘생수유통은 전북 남원군 산내면 내령리 지리산 계곡에서 계곡물을 여과하지 않고 20ℓ들이 용기에 담아 전북 이리시 일원에 팔아왔으며 제조업체를 갖고 있지 않은 황판기씨(경남 밀양군 삼랑진읍 율동리)는 과수원의 농업용수로 굴착한 지하수를 20ℓ들이 용기에 넣어 삼랑진읍내 1백여가구에 매일 20여통씩 배달,판매해왔다. 보사부는 이번 단속에서 적발된 무허가 생수업체에 대해서는 명단을 사직당국에 통보,엄중한 사법처리를 요청키로 했다.
  • 한·일문화 동질­이질성 열띤 토론

    ◎92문화통신사 「한일문화포럼」 중계/“일 차도스타일 고려다원서 본받은것”/예술·생활·종교등 주제놓고 비교분석 「한일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주제로 한 「한일문화포럼」애 30일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개막되어 1일까지 주제발표와 토론을 모두 마쳤다. 「92한국문화통신사」행사의 하나인 「한일문화포럼」은 5개의 소주제로 나뉘어져 양국에서 각각 1명씩의 학자가 나서 주제발표에 이은 참석자들의 토론으로 진행됐으며 마지막에는 총괄토론으로 마무리됐다. 발표자는 제1주제인 「생활문화」에서 이광규서울대교수(인류학)와 구마쿠다 이사오 민족학박물관조교수,제2주제인 「선비사회와 무가사회」에서 김용운한양대교수(운명비평가)와 카사야 가즈히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조교수였다. 제3주제인 「종교적 에로스와 사회적 배경」에서는 최길성 나고야중부대학교수와 야마오리 데쓰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교수가,제4주제인 「한일문화교류」에서는 김태준동국대교수(국문학)와 하카 도루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교수가 주제발표를 맡았다. 5번째 주제인 「예술의 상상력­한국과 일본」에서는 조동일서울대교수(국문학)와 마쓰오카 신페이 도쿄대조교수가 각각 발표자로 나섰으며 총괄토론에는 지명관도쿄여대교수와 하카 도오루 교수가 좌장이 되어 단상토론이 벌어졌다. 이번 「한일문화포럼」에서 발표된 내용 가운데 특히 청중들의 주목을 끈 대목을 소개한다. ▲이광규교수 「한일양국의 생활문화 비교」=한국은 집을 긴 시간의 연속체로 파악했고 일본은 집단적 표상으로 파악했다.따라서 한국에서는 혈연이 중요했고 일본에서는 의리가 중요시됐다.더 나아가 한국은 충보다 효가 중요하고 일본은 효보다 충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것이 물질세계에 상징적으로 반영되어 한국은 곡선미,일본은 각선미를 추구하며 한국은 조화를 강조하고 일본은 정돈된 상태를 중요시한다.이런 세계관이 의식주에 모두 반영되고 있다. 이처럼 유사하면서도 특이한 문화적 창조능력을 발휘한 두 나라는 앞으로 문화가 경쟁의 중요한 내용이 되는 시기에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구마쿠다교수 「다도의 색과 형」=일본다도의 도구에 있어 스타일을 완성시키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 고려다완이었다.한국에서는 평가되지 못하는 삐뚜러짐의 미가 일본에서는 가장 존중되어 일본문화를 풍부하게 한 것은 현대의 국제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최길성교수 「한국기독교와 샤머니즘」=한국에서 기독교는 크게 번성하고 있지만 신비주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한국기독교는 샤머니즘적 풍토위에서 불가피하게 한국교회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야마오리교수 「기독교는 왜 일본에 정착하지 못했는가」=일본의 기독교는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초에 걸쳐 전성기를 맞았으나 곧 기독교 금제의 시대를 맞아 급격히 쇠퇴해갔으며 절과 시주의 관계가 확립되어갔다.따라서 전파의 숨통이 끊겼다.불교는 일본인의 고유신앙을 적극적으로 인정해 토착화했으나 기독교는 실패했다.이밖에 일본 종교의 정수라고 해야할 조상숭배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는데 태만했다. ▲조동일교수 「한일문학 특질론 비교」=일본에서는 문학사 서술을 통해 일본문학의 특질을밝히는 것을 지속적인 과제로 삼은 반면 우리측에서는 문학사 전개과정에 어떤 보편성이 있는가를 찾는데 힘썼다.이런 학풍의 차이가 고려되어야 한다. 이제 양국은 동아시아문학사의 공동 전개라는 차원에서 서양의 문학이론과 경쟁해 나가야 한다.이를 위해 연구성과의 상호교환과 직접 교류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마쓰오카교수 「능(노)의 상상력」=농악이나 사물놀이에서 보듯이 한국의 민중예능은 매우 다이내믹한 신체동작을 요하나 능(노)은 정태적 신체에 바탕을 둔다.그러나 일본은 중세의 전락에서처럼 다이내믹한 율동이 있었다.그러나 살아있는 육체의 빛을 부정하고 신체의 움직임을 붙잡아 매어놓음으로써 또다른 신체의 빛남을 획득한다는 능(노)의 정신적 기반이 확립됨으로써 일대전환이 이루어졌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