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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공화국과 張勉] (6) 尹潽善과의 갈등(上)/장면·윤보선

    1960년 8월19일 오후 1시24분 ‘張勉총리 인준’투표를 막 끝마친 민의원 본회의장에는 긴장과 흥분이 감돌았다.두번째로 총리 지명을 받은 장면이 인준에 성공해 취임할 것인가,아니면 그마저 실패해 정국이 계속 표류할 것인가. 1시37분 郭尙勳 민의원의장이 결과를 발표했다. “총투표수 225,가(可)에 117,부(否)에 107,기권 1.가가 정족수인 과반수이상이므로 가결된 것을 선포합니다.”4·19가 일어난 지 딱 4개월 만에 민주혁명 수행의 대임(大任)이 장면에게맡겨지는 순간이었다.총리가 된 장면은 곧바로 그를 지명해준 尹潽善대통령을 청와대로 찾아가 취임인사를 한다. 장면과 윤보선의 이날 만남은 유쾌해야 마땅한 자리였다.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한 지 5년 만에 ‘李承晩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치의 주역이 된 두 사람이었다.같은 당의 오랜 동지인 총리와 대통령은 ‘4·19정신’을현실정치에 구현하고자 서로를 격려하고 협조를 다짐했을 법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어색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다.‘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당 신·구파간 갈등이 앙금으로 짙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진 뒤 정권을 맡을 정치세력으로는 민주당이유일했다.민심도 이를 인정해 7월29일 치른 민의원·참의원(상원)선거에서민주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민의원 219개 선거구에서 민주당은 무려 172석(78.5%)을 차지했다. 문제는 민주당 신·구파가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팽팽한 의석 분포를이룬 사실이었다.따라서 신·구파 모두 내각책임제에서 국정을 실질적으로책임지는 국무총리를 차지하려고 암투에 들어갔다. 그즈음 민주당 지도층의 면면을 보면 장면이 단연 으뜸이었다.그는 56년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됐고,‘3·15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부정 탓에 낙선했지만 민주당의 대표주자였다.게다가 59년 11월부터 당수인 대표최고위원을맡아왔다. 반면 구파쪽은 조병옥 서거 후 명확한 리더가 없었다.당시 구파였던 高興門(국회부의장 역임,98년 작고)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조병옥이 없는 민주당은 곧 신파인 장면의 천하가 될게 분명해 보였다.민주당 내에서 국민적 인기로 보아 그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평소 말이 없는 윤보선과 고집이 센 金度演이 있었으나 장면의 맞수는 아니었다.”국민 여론이나 당내 인식이 이같았는데도 구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김도연을 총리로 밀어 두 자리를 독점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그 까닭은 국회 부의장선거에서 표대결로 신파를 누른 적이 있어 자신을 가진 데다 구파 내 세력이 윤보선·김도연으로 양분돼 양쪽을 함께 배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신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추대해 구파에게 일단 한 자리를 준 뒤 총리는 자파의 장면이 차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8월12일 열린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208표(재석 259명)를 얻어당선된다.이제 관심은 윤대통령이 누구를 총리로 지명할 것인가에 쏠렸다.신파의원들이나 국민 대다수는 ‘설마 구파가 총리까지 차지하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고 구파 내에서도 鄭憲柱·閔寬植의원 같은 이들은 정치 도의를 내세워 독점에 반대했다. 8월16일 윤대통령은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한다.통보를 받은 민의원의장 곽상훈은 장면을 지명하리라는 믿음이 깨지자 즉시 청와대로 쫓아가 항의한다.윤대통령의 해명을 들은 그는 “아마 김도연씨는 안 될거요” 라고 말하고는물러나와 김도연의 총리 인준을 적극 방해한다(회고록에서 발췌). 김도연은 다음날 총리 인준 투표에서 정족수보다 3표 모자라게 득표해 인준에 실패한다.8월18일 윤대통령은 장면을 총리로 2차 지명했고 장면은 다음날 인준을 받는 데 성공한다. 60년 8월 민주당의 선택은 마땅히 장면이어야 했다.그런데도 당내 파벌의 이익을 앞세워 김도연을 1차로 총리 지명하는 바람에 신·구파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렇다고 신·구파 갈등이 장면총리와 윤보선대통령에게 그대로 옮겨갈 이유는 없었다.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당적(黨籍)을 떠나 국내정치에 초연하게끔 자리매김돼 있었다. 하지만 윤대통령은 이후에도 구파의 지도자처럼 행세하며 장면총리와 팽팽한긴장관계를 유지한다.그리고 그 긴장은 정치불안의 주요소로 작용한다. 이용원- 張勉과 尹潽善 장면과 윤보선은 제2공화국의총리와 대통령으로 만날 때까지 외형상 비슷한 삶을 살아온 듯 보인다.둘 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해외유학을 다녀오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서 차근차근 위상을 높여나간다.그러나 그같은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장면은 인천세관 간부인 張箕彬의 맏아들로 출생해 21살때 카톨릭측의 주선으로 도미,뉴욕 맨해튼대에서 교육학·종교철학 등을 공부한다.귀국해 잠시카톨릭 평양교구 일을 보다 서울 동성상업학교에서 교직을 시작,그 학교 교장으로서 광복을 맞는다. 윤보선은 구한말 중추원 의관을 지낸 尹致昭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다.본인말고도 6촌 이내에 집권당 당의장서리,장관,서울대총장 등 장·차관 이상만 13명이 나온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이다.영국 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을 배웠다. 둘은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장면만 당선된다.윤보선은 54년 3대 의원 선거때 비로소 국회에 진출한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장면은 UN총회 한국수석대표,초대 주미대사,제2대 국무총리를 잇따라 하며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큰 공을 세운다.이 기간 윤보선은 4대 서울시장,2대 상공장관을 지내지만 각각 재임기간이 1년도 안돼 물러난다. 두 사람은 55년 출범한 민주당에서 한식구가 된다.장면은 처음부터 최고위원 5명 가운데 하나였고 신파의 지도자였다.56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데 이어 59년 전당대회때는 대통령후보 경쟁에서 조병옥에게 지지만 대표최고위원 선출에서는 조병옥을 누른다.윤보선은 이 대회에서 조병옥의 구파 몫을 이어받아 처음으로 최고위원이 된다. 60년 8월 제2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정치적인 경력에서 장면은 단연 윤보선을 앞선다.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장면은 삶의 어느 시점에서 무슨 일을 했건 ‘성실하고 근면했다’는 점에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반면 윤보선은 달랐다.이는 66년에 발표한 회고록(‘사실의 전부를 기술하다’에 수록)에서 스스로 밝힌 심경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고밝혔으며,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고 회상했다.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던 그가 5·16쿠데타 후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열달 동안 대통령직을유지한다.청와대를 떠난 뒤 반(反)朴正熙 투쟁의 선봉에 서지만 박정희 사후 또 한차례 변신한다.全斗煥정권을 인정하고 87년 대선에서 盧泰愚를 지지한 것이다. 이같은 윤보선의 정치역정을 두고 학자들은 ‘명사(名士)정치’의 한 행태로 풀이한다.劉載一 대전대 정외과교수는 “명사정치의 특징은 시대적 과제를고민하기 보다 권력 획득,품위유지에 더 집중하는 데 있다”면서 “따라서명사 정치인들은 종종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궤적을 걸은 듯한 장면과 윤보선의 삶에는 이처럼 본질적인 차이가있었다.이는 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 재조명할 때 필히 고려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이용원
  • 윤보선 전 대통령/5·16쿠데타군 진압 반대

    ◎MBC 입수보도 「미국정부 비밀문서」 밝혀/김종필씨 “혁명위해 박정희도 전복” 기록 5·16쿠데타 당시 윤보선 대통령은 박정희 장군이 이끄는 군사혁명을 병력을 동원해 무산시키는데 극구 반대,결과적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8일 문화방송이 입수해 보도한 미국 정부비밀문서에 따르면 윤대통령은 1961년 5월16일 하오 청와대를 방문한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군사계엄 선포에 반대하지만 군사혁명을 무산시키는 어떠한 단호한 조치도 반대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윤대통령은 또 이날 4천명에 불과한 서울 진입 쿠데타병력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과 마샬 그린 주한 미국대리대사와의 3시간에 걸친 밀담에서도 『장면정권의 퇴진과 거국내각 구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한것으로 이 비밀문서는 전하고 있다. 이는 당시 매그루더사령관이 미국 합참의장에게 보낸 비밀전문의 일부이다. 이와함께 쿠데타가 성공한 뒤인 1961년 7월27일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가 딘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은 김종필 당시 정보부장이 『혁명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박정희까지도 뒤엎을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러스크 장관은 8월 5일 『미국은 앞으로 몇년동안 박정희나 박정희가 선택한 사람을 한국의 지도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김종필은 정보책임자로 역할을 한정시켜야 한다』는 답신을 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냈다. 특히 미국 국가안보위원회의 로버트 존슨이 6월28일 로스토 대통령 안보담당 부보좌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쿠데타 주도세력이 남북통일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믿는 것이 더 큰 위험』이라고 지적한 내용도 문서에는 포함돼있다.〈강충식 기자〉
  • 경제부총리 홍재형씨/김 대통령/정재석씨 신병상 사퇴로 소폭개각

    ◎재무장관 박재윤씨·경제수석 한이헌씨 김영삼대통령은 4일 신병으로 사표를 제출한 정재석경제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후임에 홍재형재무부장관을 임명하고 재무부장관에는 박재윤대통령경제수석을 발령했다. 후임 경제수석에는 한이헌경제기획원차관이 기용됐다. 주돈식청와대대변인은 이날 발표를 통해 『정재석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이 지난 1일 하오 청와대로 김대통령을 방문,신병으로 업무수행이 불가능함을 설명하고 사표를 제출해 개각요인이 발생했다』고 밝히고 『김대통령은 현재 우리의 경제상황이 잘 돼가고 있다는 판단에서 현경제기조를 유지하면서 인사폭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제팀 안에서 순환변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인사에 앞서 이영덕국무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개각에 대해 협의했다. 주수석은 인선배경과 관련,『홍신임부총리는 수출입은행장을 지내는등 국제감각이 뛰어나 우리경제의 국제화에 적임자라고 판단했으며 박신임재무부장관은 경제수석으로서 경제부처와 꾸준한 교감을 가져왔고 문민정부의 경제설계에 직접 참여해와 경제기조를 차질없이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고 설명했다. 김대통령은 5일 이들 신임장관과 경제수석에게 임명장을 수여한다. ◇홍부총리 약력=▲충북청주(56) ▲청주고·서울상대졸 ▲경제기획원 대외경제조정실장 ▲재무부 기획관리실장·1차관보 ▲관세청장 ▲수출입은행장·외환은행장 ▲재무부장관 ◇박장관 약력=▲경남 울산(53) ▲부산고·서울상대졸 ▲서울대경제과 교수 ▲금융통화위원 ▲김영삼대통령후보경제특보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한수석 약력=▲경남 김해(50) ▲경남고·서울상대졸 ▲행정고시 7회 ▲기획원 정책조정국장·경제기획국장 ▲민자당 경과전문위원·총재보좌역 ▲공정거래위원장 ▲경제기획원차관
  • 서울대병원 12층 대통령 전용병실/16년만에 철거…일반특실로 개조

    ◎80평규모 방9개… 재임중 이용 전혀없어 서울대병원의 「대통령 전용병실」이 16년만에 철거된다. 서울대병원은 지난달 말부터 12층에 있는 80여평 규모의 전용병실을 철거,6개의 일반용 특실로 개조해 이달말부터 사용할 방침이다.이 병원 김광우 진료1부원장은 『현직 대통령이 전용병실을 이용한 적이 한번도 없고 앞으로도 이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최근 청와대측에 부족한 일반 병실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자 청와대측에서 흔쾌히 이를 승낙,철거공사를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서울대병원에 대통령 전용병실이 생긴 것은 이승만대통령 시절인 55년으로 당시 구병동 3층에 「신특병동」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대통령 전용병실을 운영했다. 이후 고 박정희대통령 재임시절인 78년 구병동이 철거되고 지금의 건물이 들어서면서 『국립서울대병원에 대통령 전용병실을 둬야 한다』는 정치적인 명분으로 12층 왼쪽에 대통령 전용병실을,오른쪽에는 국무총리 병실을 함께 마련했다.러나 60여평 규모의 총리병실은 90년 철거돼 5개의 특실로개조됐다. 그동안 입원실과 집무실·응접실·가족실·경호원실·드레스실·주방등 9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대통령 전용병실을 이용한 사람은 단 3명뿐이다. 87년 9월 방한중이던 바르코 콜롬비아대통령이 복통으로 입원한 적이 있고 고 윤보선대통령,최규하 전대통령이 퇴임후 각각 한번씩 이용했을 뿐이다.특히 고 윤대통령은 90년 이 병실에 입원중 별세했다. 그러나 재임중인 대통령이 전용병실을 이용한 적은 한차례도 없었다. 국가기밀상 현직 대통령은 주치의가 직접 청와대를 방문하거나 일반에 노출돼 있지 않은 국군서울지구병원을 이용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병원측은 문민정부 출범후 대통령 전용병실을 일반인도 하루 80만원씩에 이용할 수 있는 VIP병실로 사실상 개방했으나 입원환자가 거의 없자 아예 특실로 개조하게 됐다.
  • 은행 「재벌 지분」 대폭 축소/박 경제수석

    ◎“행장인사 외부입김 안타까워” 【경주=우득정기자】 정부는 현재 8%로 돼 있는 동일인소유지분한도를 산업자본(재벌)의 경우 이를 대폭 낮출 방침이다. 박재윤대통령경제수석은 11일 경주 힐튼호텔에서 한국금융학회 주최 학술세미나에 참석,금융개혁방향에 대해 『일반은행의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금융자본에 대해서는 8%의 소유상한을 상향조정해야 하나 재벌의 사금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재벌의 소유한도를 대폭 축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박수석은 『그러나 금융전업그룹을 인위적으로 조장하기 위해 조세상·공정거래상 특혜성 지원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금융전업자본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경우 은행의 소유한도를 높여주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수석은 또 일부에서 논의되는 일반은행의 국민기업화문제에 대해 『국민기업은 책임경영이 불가능한 정부기업과 큰 차이가 없다』며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실물경제와 보조를 맞춰 금융전업군이 소유와 경영을 지배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대주주가금융자본이라면 기업의 원리에 따라 인사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며 『현재의 은행장추천위원회제도 역시 내부인사가 유리하다는 지적도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박수석은 『지난해 은행장추천위제도가 도입된 이래 외부의 압력은 철저히 차단했다』고 강조하고 『그러나 자율적으로 선출된 은행장이 임원선임과정에서 외부의 입김에 영향받는 사례가 있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최근의 은행권 인사풍토를 개탄했다.
  • 부처간 이견맞서 막판 삭제·변경 “진통”/계획안작성 이모저모

    ◎박 경제수석,“대만족”… 실무자 노고 치하 ○…19일 발표된 신경제 5개년계획 작성지침은 일부 내용이 막판에 삭제·변경되거나 관계부처간에 협의가 끝나지 않아 혼선. 토지이용 규제제도와 관련,당초 원안에는 건설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농업진흥지역 밖의 농지와 준보전임지는 준보전지역으로 지정해 토지공급을 늘리기로 했으나 농지의 감소를 우려한 농림수산부가 강력히 반대,이경식부총리가 17일 장관 간담회를 통해 주말의 막후조정을 했는데도 끝내 이견이 맞서 진통. ○…세제·재정·금융개혁등 파격적인 개혁방향을 담은 이번 지침은 초기에 재무부와 내무부등 이른바 「텃세」가 강한 일부 부처에서 미온적인 반응을 보여 기획원이 취합하는데 애를 먹었다는 후문. 그러나 정치상황과 맞물려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자 이들 부처도 순순히 따라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기획원의 한 관계자는 『관료들의 속성에 비춰볼 때 뒤늦게 나마 각 부처가 한덩어리가 되어 막대한 분량의 지침을 완성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그동안의 경제부처 분위기를 전달. ○…신경제계획의 구상자인 박재윤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이번 지침에 대단히 만족감을 표시.박수석은 지난주 열린 신경제계획위에서 지침내용을 보고 『대단히 잘 반영됐다』며 실무자들의 노고를 치하했으며 민간출신 계획위원들도 『이 정도면 됐다』며 흡족해 했다고. ○…경제기획원은 그동안 박수석등 청와대측과의 부단한 절충을 통해 「YS경제학」의 감 살리기에 심혈.이번 지침작성의 실무총책인 강봉균차관보는 『비록 준비기간은 짧았지만 김영삼대통령 측근에서 후보 시절부터 구상해 온데다 기획원등 각 부처에서 과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준비해 온 안이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고 일부의 「졸속」주장을 일축.
  • 5ㆍ16­유신등 헌정 굴곡 한몸에/윤보선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

    ◎군사혁명에 “올 것 왔다” 이듬해 퇴진/대권경쟁 2번 실패… 반 박정희 투쟁 93세의 일기로 타계한 해위 윤보선. 그는 고집의 거목정치인이었다. 그의 일대기는 40년 헌정사의 점철된 굴곡을 그대로 투영해 주고 있다. 이 나라 최후의 구 정치인 1세대의 보루를 지켜온 그는 해방후 손꼽히는 과묵한 선비형 정치가로 입신하다가 조병옥박사를 잃어버린 민주당구파가 그를 보스로 추대하면서부터 무섭도록 고집센 지도자가 되었다. 4ㆍ19혁명후 민주당정권시절 실권은 없지만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지위에 오른 그는 5ㆍ16군사혁명을 만나 고독한 몸부림으로 대처하다가 박정희씨와 두차례나 대권경쟁을 벌여 패했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반독재의 강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961년 5월16일 상오 9시30분 윤대통령은 혁명군지도자 박정희장군과 첫 대좌를 하게되자 그 유명한 『올것이 왔구나』하는 탄식을 지었다. 훗날 해위는 이 대목과 관련,군사쿠데타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온다고 걱정하던 일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났구나』하는 탄식조의 말이었다고 해명했다. 그의 생애중 가장 긴 날은 5ㆍ16 새벽부터 17일 밤까지 40여시간이었다. 윤대통령은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의 쿠데타군 진압작전의 승인요청에 『적이 집결하고 있는 휴전선을 눈앞에 두고 아군끼리 피를 흘릴 수는 없다』며 거절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그는 1897년 8월26일 충남 아산군 음봉면 신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으며 그의 조부는 육군부장으로서 삼남도포사를 지내는등 무골의 집안이었다. 그는 조부를 따라 서울로 와 소학교를 마친 후 17살때 일본으로 건너가 현 경응대학 전신 중학부에 들어갔다. 20살때 몽양 여운형을 따라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의 실황을 알리는 진단보를 주보로 발간하기도 했다. 22살때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로 유학을 가 3년동안 공부를 하면서 영국과 영국국민성을 배웠다. 그는 언제나 단추 3개가 달린 전통적인 영국식 신사복을 착용하기를 즐겨했는데 이같은 격식도 이때 몸에 익힌 것이라고 한다. 에든버러대를 졸업한 후에도 수년간을 유럽대륙등을 여행하며 세계정세를 살펴본 뒤 35살되던 해인 1932년 여름 16년만에 고국에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침묵의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1945년 8ㆍ15해방이 되자 아놀드소장이 군정장관으로 있는 미군정청 농상국고문으로 일했다. 48년 제헌국회의 5ㆍ10선거에 고향인 아산에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고 이승만박사가 국회의 초대의장으로 당선되자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정부수립이 되고 이승만대통령이 조각을 하면서 서울시장에 그를 임명했는데 이는 그에 대한 이대통령의 각별한 신뢰감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19세때 치렀던 민씨와의 혼인은 처음부터 결합이 되지 않았고 민씨에게 딸들이 있었으나 모두 출가시켰기 때문에 서울시장이 된 그로서는 매우 외로웠다. 그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지금의 공덕귀여사(당시 한국여자신학교 교수)와 연분을 맺었다. 서울시장을 6개월여 맡은 그는 다시 임영신장관 후임으로 상공장관으로 전임된다. 6ㆍ25동란중 국민방위군사건이 터지자 당시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그는 이대통령에게 그가 본 처참한 정경을 보고했으나 이대통령은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역정을 내자 이때부터 이박사와는 인연을 끊고 야당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는 부산 정치파동을 계기로 야당인 민국당(한민당 후신)에 몸을 담고 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입후보하였다. 그는 종로갑구에서 박순천ㆍ주휘한ㆍ장후영ㆍ유석현씨 등 쟁쟁한 인물과 한판 승부를 겨뤄 윤씨이외의 12명 입후보자들의 득표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표를 얻어 압승했다. 56년 5월 정ㆍ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자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씨가 급서하자 민주당은 당을 개편,조병옥박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고 이때 윤보선씨는 당내 구파이면서도 신파의 지지를 얻어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59년 가을 다음해에 있을 정ㆍ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은 후보자지명을 위한 전당대회를 개최,대통령후보에 조병옥박사,부통령후보와 대표최고위원에 장면박사를 선출했고 해위는 신파의 곽상훈ㆍ박순천씨와 함께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그는 구파보스인 조병옥박사가 대통령선거 한달을 앞두고타계하자 조박사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으면서 지금까지의 「과묵한 영국신사」에서 「행동하는 투사」로 변신하게 된다. 4ㆍ19학생의거와 이승만정권의 몰락으로 4대 민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은 압승을 했고 신ㆍ구파간의 불꽃튀는 협상끝에 그는 60년 8월12일 민ㆍ참의원 양원합동회의에서 제2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국무총리지명을 하면서 신파의 장면씨 대신에 자신과 같은 구파이 김도연씨를 지명했으나 신파의 벌떼같은 반발로 과반수에서 3표미달로 인준안이 부결되자 하는 수 없이 2차에 장면씨를 지명했다. 그는 5ㆍ16군사혁명 사흘뒤 대통령직 사임을 결심,하야성명까지 발표했으나 이를 번의,이듬해 물러났다. 그는 63년 10월 5대 대통령선거에 민정당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후보와 맞서 15만여표로 고배를 마셨으나 스스로를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면서 박정권과의 극한대결에 앞장섰다. 박정권이 65년 타결한 한일협정을 매국이라고 단정,흡사 「아파치족의 추장」처럼 싸웠고 같은해 한일협정 준비파동이 절정에 달할 무렵 의원직 사퇴에 미온적인 민중당 온건파와 손을 끊고 탈당,의원직을 사퇴했다. 67년 4월 6대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다시 박정희후보와 숙명의 대결을 벌였으나 1백10여만표차로 패배했다. 그후 그는 정치2선으로 물러났으며 박정권의 유신체제아래서 재야의 거두로서 박정권의 비정을 공격했다. 10ㆍ26으로 박정권이 붕괴되고 5공화국이 출범하자 그는 전직대통령의 위치에서 전두환대통령에게 이따금 조언을 하는등 박정권때와는 다른 우호적 태도를 보였고 노태우대통령의 6공정부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취해왔다. 해위,그는 60년대 한국정치사에서 대여 극한투쟁의 화신이었다. 굳은 신념에 불퇴전의 강경노선을 견지한 그는 박정권과의 투쟁 당시 이렇게 말했다. 『정책대결이 정당정치의 원형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네와 같은 군사독재와 부정부패와 정보정치아래서는 무기력한 대안제시와 무원칙한 타협을 앞세워서야 야당의 사명이 말살되고 만다』 그는 훗날 또 이렇게 말했다. 『싸우는 게 최선이 아니고 싸우는 게 유일한방법일 때 싸워야 한다,정권을 무너뜨리는 게 민주투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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