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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대표 자택 첫 공개 ‘감성정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자택 내부가 방송으론 처음 30일 MBC-TV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행복한 나눔-고맙습니다’ 코너에 공개됐다. 유명인사의 애장품을 경매에 부쳐 그 수익금을 소년소녀 가장돕기에 쓴다는 취지에 공감한 박 대표가 10·26 재선거 자원 유세 기간 중인데도 불구, 지난 19일 녹화했다. 박 대표는 진행자인 개그맨 김용만, 여성보컬 주얼리의 박정아와 함께 정담을 나누며 정원과 거실,2층을 보여주었다.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찍은 사진, 육영수 여사의 사진,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해수욕 장면 등이 등장했다. 특히 20년 넘게 쓴 ‘금성 에어컨’,30년 된 카세트라디오, 컴포넌트 오디오 등 ‘세월의 더께’가 묻은 가전제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어 박 대표는 건강유지 비결인 요가 몇 동작을 시범으로 보여준 뒤 김용만과 함께 즉석 탁구 시합도 벌였다. 또 피아노를 치면서 조카인 세현 군에게 들려주기 위해 연습한 ‘자장가’를 부르는 등 ‘감성 정치’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박 대표는 애장품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좋아하던 문구인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적힌 백자를 내놓았다. 백자는 프로그램 뒤 바로 10만원 호가를 시작으로 경매에 부쳐졌다.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씨줄날줄] 추도식/이상일 논설위원

    제사는 귀신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음식을 차리는 것도 귀신에게 먹이려는 것이다. 귀신을 부정하는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전통적인 제사와의 절충점으로 추도식(追悼式)이나 추도예배를 가졌다는 설이 있다. 추도예배는 음식 없이 꽃을 놓고 기도한다. 매년 갖는 추도식 말고 사망 직후 장례식장에서 친지와 친구들이 갖는 추도식도 있긴 하다. 엊그제 10·26때 고 박정희 대통령의 26주기 추도식이 서울 국립현충원뿐 아니라 경북 구미시 박 전 대통령 생가에서 동시에 거행됐다. 추도식과 별도로 가족들은 집에 돌아가서 따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유명인이 사망할 경우 더 이상 ‘제사=추도식’은 아니다. 사회행사로 추도식, 집안행사로 제사를 각각 갖는다. 우리 사회는 한마디로 추도식 홍수다. 박 대통령과 별도로 부인 육영수 여사의 31주기 추도식뿐 아니라 박 대통령을 살해한 뒤 사형당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25주기 추도식도 열렸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67주기, 유진산 전 신민당 총재 31주기, 청산리전투 영웅 이범석 33주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의 40주기 등. 각 행사에 수십명에서 심지어 1000명이 넘는 참배객이 몰린다. 박근혜 대표는 박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 “많은 국민이 아버지의 뜻을 새삼 되새기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에는 “아버지가 여전히 국민 마음속에 살아계신 것 같다.”고 말했다. 비슷한 말을 매년 해오고 있다. 살아있는 저명인사들이 여기저기 추도식에 겹치기 출연도 한다. 작년 추도식에 왔던 인물이 올해에도 또 보였다. 고인의 뜻을 기리기보다 정치상황에 맞게 고인의 뜻을 해석하는 점도 없지 않다. 정치뿐 아니다. 창업주의 추도식이 회사 공식 행사로 자리잡은 기업도 있다. 창업주의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신입사원이 매년 창업주 묘소에 참배를 하러 가야 하는 곳도 있다. 망자가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사람이 이용하는 것인가. 외국과 달리 비슷한 추도식을 매년 치르는 데 따른 사회적 낭비가 적지 않아 보인다. 어제 명성황후 서거 110년 기념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꼭 추모할 생각이 있다면 엇비슷한 추도식을 매년 갖느니 문화행사 등으로 바꾸면 어떨까. 이상일 논설위원 bruce@seoul.co.kr
  • 朴대표 淑大서 블루오션정치 강연

    朴대표 淑大서 블루오션정치 강연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21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여대생을 대상으로 강연에 나섰다. 이날 숙명여대를 찾아 ‘블루오션 정치’를 주제로 ‘탈정치’와 ‘선진화’를 강조했다. ●“전투복 입고 왔다고 할까봐 치마 입었다” 회색 치마정장 차림의 박 대표는 “전투복 입고 여대에 왔다고 할까봐 바지 대신 치마를 입었다.”는 조크로 대학생 청중 600여명의 이목을 사로잡으며 강연을 시작했다. 중간중간 “너나 잘 하세요.”,“그 까이꺼 대충…” 등 최근 유행어를 섞어가며 대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기도 했다. 박 대표는 무거운 정치 주제에서 비켜나 부모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차례로 흉탄에 잃었을 때의 심정 등 아픈 개인사를 털어놓기도 했다. ●“어려웠던 시절 태어난것 원망한 적도…” 특히 “어려웠던 시절 태어난 것에 대한 원망을 한 적도 있었다.”면서 “그러나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그림을 보면서 바위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극복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여권의 선거구제 개편 주장에 대해선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은 지역구도를 없애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어 “지역구도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권의 ‘정략적 의도’를 경계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광북 60주년 만감 교차하는 2人] 朴대표 홀로 부르는 ‘思母曲’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8·15 광복절은 희비와 만감이 교차하는 특별한 날이다.●`공인 박근혜´서 `딸 박근혜´로 정치인으로 ‘공인 박근혜’는 ‘해방의 의미’를 되새기고 축하하면서 이를 미래지향적 비전제시로 연결시키는 책무를 안고 있다. 한편 ‘딸 박근혜’라는 사적 영역에서는 31년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는 슬픔도 겹친다. 이런 ‘역설’은 15일에도 되풀이됐다. 박 대표는 이날 서울 광화문의 8·15경축식에 참석한 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가 ‘고 육영수 여사 31주기 추도식’에 참여했다. 이 행사에서 박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대해 “우리는 자꾸 과거로만 가는 것 같다.”고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잠시 공적 영역으로 나왔다. 그러나 무게 중심은 어머니를 기리는 사적 공간에 놓였다.●지만씨 “아버지에 대해 나쁜 인식주려는 세력있다” 박 대표는 동생 지만씨 부부와 묘소에 분향한 뒤 독일 파견 간호사였던 임경희씨가 “육영수 여사가 독일을 방문한 뒤 눈물을 흘렸을 때 나도 울었다.”며 추도사를 읽는 동안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지만씨는 추도사에서 “요즘 아버지를 괴상하게 왜곡시켜 자라나는 아이들과 젊은 세대들이 아버지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갖도록 노력하는 일부 세력이 있다.”면서 “어머니가 이를 아시면 많이 안타까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기춘 여의도연구소 소장, 김무성 사무총장, 전여옥 대변인, 곽성문·공성진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들과 황인성 전 국무총리, 김성진 전 문공부장관을 비롯,‘박사모’회원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박 대표는 전날 밤 10시에 미니홈피 게시판에 ‘사모곡(思母曲)’을 올리며 사적 공간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31주기가 됐는데도 항상 가슴 속에는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다.”라고 시작한 글은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 노력했던 육여사를 기리고 있다. 이어 “오늘 밤은 유난히 어머니가 그리워지고, 그 분이 생전에 하시던 일들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라고 맺는다.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50년 ‘목소리 인생’ 성우 고은정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50년 ‘목소리 인생’ 성우 고은정씨

    ‘목소리의 마술사’가 있다. 반세기 동안 격동의 현대사를 ‘목소리’ 하나로 관통했다. 질곡의 50년 세월속에 가느다란 성대의 떨림으로 감동과 추억의 파노라마를 무수히 연출했다. 타고난 ‘천(千)의 목소리’는 대중들의 가슴을 쥐락펴락했다. 암울했던 1960∼70년대, 라디오의 ‘연속방송극’과 ‘추억의 영화’ 등 무려 1000여편에 출연했다. 엄앵란 문희 남정임 정윤희 등 내로라하는 당대 여배우들의 목소리를 도맡아 ‘얼굴없이’ 많은 인기를 누렸다. 뿐만 아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김영삼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치권 주변에서 이꼴저꼴 다 보면서 연설과 다큐멘터리 대역(代役) 등을 해 흥미진진한 야화도 간직하고 있다. ●‘여자의용군 예술대’ 자원입대 고은정(70)씨.1954년 12월 KBS 성우 공채 1기로 출발,50년 ‘목소리 인생’을 걸어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 12월과 올 4월 단막극을 직접 쓰고 출연까지 했다. 최근에는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 서초동의 모호텔 정원에서 만났다. 먼저 해마다 6월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고 고백했다. 다름 아닌 6·25에 참전했던 것.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50년 11월 어느날. 수도여중 3학년 재학 중이었다. 학생들 사이에는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금방 통일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고은정은 친구들과 모여 “서울고와 용산고 학생들도 학도의용군에 뽑혀 북진대열에 합류하는데 우리 여학생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고 말했다. 결국 며칠 뒤 고은정은 단짝 친구 3명과 함께 여자의용군에 자원입대했다. 훈련막사는 서울 충무로의 일신초등학교(현 극동빌딩 자리). 때마침 한성여고 밴드부와 동덕여고 무용반 학생들도 와 있었다. 가칭 ‘여자의용군 예술대’가 결성됐다. 고은정의 군번은 0995862. 훈련은 주로 아침 일찍 남산을 한바퀴 돌아오는 것이었다. 20일쯤 지나자 외출허가가 떨어졌다. 이때 가족들이 “난리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귀대하지 말라고 붙잡았다. 그러나 “어떻게 외출나왔다가 안 들어가느냐.”며 귀대했다. 그런데 동료 3분의1가량이 귀대하지 않았다. 남은 예술대원은 20여명. 이튿날 예술대원은 부산으로 떠나기 위해 겨울용 잠바와 담요 한장씩을 들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수백명의 남자군인 틈에 끼어 무개화차에 막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나타나 “왜 여자들을 지붕 없는 차에 태우느냐.”고 호통을 쳤다. 할 수 없이 다음날 별도의 트럭을 이용해 인천항을 거쳐 함정(LST)을 타고 3일 만에 부산항에 당도했다.(관련자료에 따르면 50년 9월 여군교육대가 부산에서 결성됐으며, 군부대와 병원 등의 위문을 위해 군악 및 예술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군번 0995862 육군 제대 부산에 도착한 예술대원은 영도초등학교의 임시막사에서 지냈다. 며칠 뒤 크리스마스 이브때 고은정은 면회 온 목사의 도움으로 십수권의 책을 장만할 수 있었다. 워낙 책을 좋아한 데다 병원위문을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숙소 앞에 ‘소공녀의 방’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그러던 51년 2월 부대에서 휴가를 다녀오란다. 딱히 갈 곳이 없어 지난번 도움을 받은 목사가 있는 대구로 향했다. 때마침 목사는 제주도의 피란민들을 위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고은정도 목사와 함께 떠났다. 도착했더니 돌아올 여객선 사정이 여의치 않은 데다 목사의 강력한 권유로 부대복귀를 하지 못했다. 고은정은 관계요로를 통해 이같은 사정을 전한 뒤 그해 2월 제주 오현중에 설치된 피란민학교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이와 관련, 고씨는 “얼마전 육군에 확인해 보니 군번도 있고 제대처리돼 있었다.”면서 당시 입대했던 친구들을 가끔 만나 추억담을 나눈다고 귀띔했다. # 에피소드 1. 74년 8월14일이었다. 영화 ‘맹물로 가는 자동차’ 더빙을 하느라 밤을 새운 뒤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꿈을 꾸었다. 고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로 초청했다. 고씨는 의사 동생과 함께 갔다. 육 여사는 진작 보고 싶었다며 “조국을 위해 고생이 많은데 부탁이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고씨는 “서울신문에 다니던 오빠가 필화사건으로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걱정”이라고 했다. 고씨는 육 여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단골로 등장했지만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얼마만큼 잤을까. 일어나 방문을 열어 보니 아이들이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탕탕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TV 전원이 꺼졌다.8·15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영부인 피격사건’이었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육 여사 다큐멘터리에 더욱 많이 출연하게 됐다. 박근혜씨가 영부인 역할을 맡을 때 방송국으로 찾아왔다. 박씨는 “아버지는 고 선생의 목소리가 엄마하고 똑같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 뒤 연말마다 청와대에서 금시계를 보내왔다. ●대통령 부인들과 자주 만나 # 에피소드 2. 5·16 직후였다. 동아방송에서 ‘천일야화’라는 대담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하루는 김종필(JP)씨를 초청했다. 시간이 됐는데도 그가 오지 않아 찾아나섰다. 점퍼차람의 한 사람이 방송실 입구에서 “나를 찾는 겁니까.”하고 말했다. 인사를 하자 JP는 “고 선생은 골라쓰는 단어가 아주 달라요.”라고 했다. 인연이 돼 나중에는 JP자택에서 부인과 자주 만나게 됐다. “80년대 초반 민정당 창당대회 때 권정달씨의 부탁으로 봉두완씨와 사회를 같이 보게 됐지요. 이때부터 본의 아니게 정치 언저리에 맴돌게 된 것 같아요. 여성계 대표라는 명분으로 종종 청와대에서 이순자·김옥숙 여사와 식사도 했지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소영씨는 마침 우리 아들과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습니다.” 87년 대선을 일주일 앞둔 때였다. 노태우 후보측에서 63빌딩에서 저녁을 먹자는 연락이 왔다. 갔더니 이종찬씨도 함께 있었다. 노 후보는 목이 꽉 잠겨 있었다. 노씨는 “고 선생, 어떻게 하면 목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이종찬씨는 달걀을 먹어야 한다고 거들었다. 고씨는 “소염제를 먹고 당분간 필담으로 대화할 것”을 주문한 뒤 연설 때 5만,10만 관중을 염두에 두지 말고 오직 자신 앞에 있는 마이크를 상대로 감동을 시킬 것을 권했다. 낮은 톤의 목소리가 오히려 장점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어 노 후보가 여성정책 아이디어를 달라고 하자 “이제와서 새로운 정책을 내놓은들 먹혀들지 않기 때문에 선거 때까지 애처가라는 소문만 잔뜩 퍼뜨릴 것”을 주문했다. 전직 대통령의 목소리에 대한 평가도 흥미롭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설득력은 있으나 노 전 대통령의 현대적 감각에는 뒤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10분 동안 113개의 언어가 틀릴 정도였는데 대통령에 당선돼 ‘우리나라에선 통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지만 발음을 비교적 정확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 편이라고 했다. 고씨는 “스피치는 공인의 덕목 가운데 매우 중요한데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 출강에 여전히 방송활동 고씨는 4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고흥숙.‘흥’자 돌림이다. 막내동생이 한나라당 국회의원 고흥길(성남시 분당갑)씨. 오빠 고흥욱(72)씨는 청와대 출입을 오래한 기자출신으로 현재 LA에 산다. 얼마전 국제전화를 걸어와 “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는데 무슨 일이냐.”고 뜬금없이 물어 “아냐, 길은정이 죽은 것을 보고 그러겠지.”하고 대답했단다. 어머니는 5남매를 남겨놓고 30대 나이에 요절했다. 새 장가를 든 아버지도 54년 교통사고로 일찍 명을 달리했다. 새어머니는 5남매를 친자식 이상으로 키웠다. 현재 94세로 분당 아들집에서 산다. 고씨 자신은 59년에 결혼, 이듬해부터 연년생으로 자식 넷을 낳았다. 함께 지내는 둘째딸(44)을 제외하곤 다들 결혼했다. 고씨는 5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해 고비를 맞았지만 요즘은 서울예대 장로신학대 출강과 극동방송에서 매일 10분짜리 방송 등을 하며 정열적으로 일하고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족사를 쓰고 있어요. 여름방학 때는 밀린 대본을 완성할 예정입니다. 일생을 담은 모노드라마도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 1936년 서울 출생 ▲ 51년 제주 피란민학교에서 수도여자중학 졸업 ▲ 54년 수도여고 졸업, 숙명여대 영문과 재학시절 KBS 성우공채 1기 ▲ 56년 최초 연속방송극 ‘청실홍실’ 성우 ▲ 58년 연속방송극 ‘산너머 바다건너’에서 상하이 여자 ‘미라’역을 맡아 주목받음. ▲ 이후 ‘장희빈’‘고운정 미운정’‘왕비열전’‘대동강은 알고 있다.’‘불꽃의 소리’‘113수사본부’등 드라마와 영화를 합쳐 1000여편 출연. ▲ 77년 드라마 ‘대니할머니’당선으로 방송작가 데뷔. ▲ 97년 고은정언어예술원 개원 ▲ 98년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 2000년 방송위원회 위원, 방송언어특별위원회 위원장 ■ 방송극본 가을에 온 손님, 불모의 수령, 저녁노을, 사랑의 계절, 두고온 언니에게 등. ■ 소설작품 고운정 미운정, 위험한 체험 등. ■ 상훈 국민훈장동백장(2000년)
  • 친일·군부독재 비판 ‘만화 박정희’ 나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과 군부 독재 의혹을 다룬 ‘만화 박정희’가 5·16 쿠데타 44주년을 맞아 16일 출간됐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뉴스툰(전국시사만화 작가모임), 도서출판 ‘시대의 창’이 공동 기획해 제작한 두 권 분량의 이 만화는 박 전 대통령의 출생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5·16 군사쿠데타, 유신을 비롯해 10·26에 이르는 일생을 통해 그의 친일행각과 군부독재 의혹을 주로 다루는 등 비판적 내용을 담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만화 출간에 맞춰 이날 오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열린 출판기념 기자회견에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지금은 악마와 천사도 구분 못하는 가치혼란의 시대”라며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인물에 대해 국민들이 냉철하게 판단하는 근거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내게 됐다.”며 기획 취지를 밝혔다. 만화는 박 전 대통령이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던 과정과 군관학교를 수석 졸업하며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다.”고 선서하는 모습, 박 전 대통령이 다른 여자와 호텔방에 함께 있는 장면을 보고 육영수 여사가 눈물을 흘리며 치를 떠는 모습 등 상당히 자극적이면서도 그동안 금기시돼왔던 의혹들을 비판적 시각에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만화의 그림은 시사만화작가 박순찬 화백이, 글은 서울신문에 시사만평을 싣고 있는 백무현 화백이 각각 맡아 집필했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팬클럽인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는 14∼15일 충북 충주호리조트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만화 박정희’가 ‘박근혜 죽이기’의 일환이라고 보고 이에 대응하는 ‘인간 박정희’ 만화를 출판키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박근혜대표 본지 단독 인터뷰] “당권·대권 조기분리 논의 비례대표의원 확대해야”

    [박근혜대표 본지 단독 인터뷰] “당권·대권 조기분리 논의 비례대표의원 확대해야”

    “한겨울에 난로 하나로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4일 서울신문 구본영 정치부장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런 비유를 경제해법으로 제시했다. 이어 “400조원이 훨씬 넘는 시중 부동자금만 쓸 수 있게 하면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고 봐요.”라고 진단했다. 경제를 살리려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분위기부터 조성해야 한다는 논거였다.‘4·30 재보선 대첩’을 이끌어낸 여장(女將)에게 소회를 묻자 이런 경제론으로 연결지었다. 재보선 뒷얘기와 당 안팎의 주요 정치 현안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다음은 문답 요지. 이번 선거에서 느끼신 점은. -국민들이 경제난의 원인을 다 알고 있어요. 현 정권에 있다는 것을 알아요. 정부와 여당이 민생과 상관없는 국가보안법과 과거사법 같은 것에만 전력을 쏟다보니 거기에 대한 실망감이 이번 선거를 통해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원유세를 할 때 그 말만 하면 박수가 나오더라고요. 경제 살리기를 위해 시급한 과제가 있다면. -부동자금이 자연스럽게 투자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지 정부가 어거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만큼 공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힘을 합해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해요. 투자가 돼야 청년실업이나 신용불량자 문제도 풀 수 있다고 봐요. 이번 재보선이 어렵지 않았나요. -유권자들이 후보라든가 국회의원 개개인의 역량, 평소 노력, 나라 일이나 지역 일 열심히 보느냐에 대해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너무 힘든 선거를 치르다 보니 전우애가 싹텄다고 하더라고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나이 드신 분들만 저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20대 젊은이들과 10대 초등학생들까지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걸 보고 기뻤습니다. 젊은이들과 사진도 많이 찍었어요. 어떤 초등학생은 ‘한수진 한수진’ 하면서 이 다음에 커서 한나라당으로 갈테니 자기 이름을 잘 기억해달라고 하더군요. 6곳 중 5곳에서 승리했다고 하나, 앞으로 호남지역에서 재보선이 이뤄진다면 선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꾸준히 노력하고 있어요. 호남에서도 후보를 내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는데 그동안에는 신청자도 없고 해서 아직 후보를 못내고 있는데…. 앞으로는 호남에서도 후보를 낼 수 있도록 더 노력할 겁니다. 여야 모두 그렇지만, 한나라당의 공천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인데. -그동안 밀실공천이라든가 그런 얘기들이 많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새로운 시스템에서 공천심사위에 모든 것을 맡겼는데 그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고 봐요. 하지만 과연 주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했느냐 하는 점에서 일부 문제점도 나타났어요. 앞으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가면 될 거라고 봐요. 일각에서는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서라도 비례대표 국회의원 수를 늘려야 한다고 하는데요. -지역주의를 깨는 것보다는 국민 생활과 외교·안보 등 국내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첨을 맞춰야 한다고 봐요. 직능별 정책전문가들이 많이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비례대표 늘리는 것은 찬성해요.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념적 성향상 진보·보수로 나눠져 있고, 한나라당이 시대 변화나 젊은 층의 정서를 읽는 데 둔감하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진보·보수 싸움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낡은 틀은 시대가 지난 일이고, 그런 것을 갖고 국민을 가르고 분열시켜서는 안된다고 봐요. 한나라당에서는 ‘공동체 자유주의’를 새로운 이념적 좌표로 택했어요. 공동체 안에서 개인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고, 개인의 경쟁을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이자는 취지예요. 경쟁에서 밀려나는 개인을 국가 차원에서 책임지고 돌봐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 자유주의는 제3의 길일 수 있습니다. 최근 대선에서 세번 패배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이번 선거를 통해 자신감을 얻고 가능성을 느낀 건가요.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꾸준히 바뀌어야 합니다. 하루 아침에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고 봐요. 당 혁신이나 재보선 이런 것들이 쌓여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는 거고요. 공식적으로는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적이 없지만 사실상 대권 주자로 각인된 상황인데. -민생이라든가 외교안보라든가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이 너무 많아요. 그런 현안부터 해결하는 게 야당 대표의 도리 아닐까요. 박 대표를 제외하고 어떤 분이 유력 대선 주자로 부상할 것 같나요. -(박 대표는 웃음으로 대신한 뒤) 저도 당연히 꿈이 있고요. 이런 나라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하는 그 꿈을 이루고 싶은 거죠. 저도 제가 꿈꾸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어요. 국민들이 편안하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꿈 때문에 정치를 하고 있어요. 최근 민간정부 집권과정에서 독자적으로 정권을 창출한 정당은 없었다. 한나라당도 차기 대선에서 특정 정파와 연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리는데.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우리가 어떤 가능성을 차단하고 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도 다 국민의 뜻과 같이 가야 합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정치논리나 당리당략으로 그런 것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계획이나 생각하는 것 없어요. 북핵 문제가 계속 꼬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과거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적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대북 특사를 맡을 의향은 없습니까. -마다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이 하루가 지날수록 꼬이고 있거든요.3년전 북한에 갔을 때 김정일 위원장에게 북한도 국제사회의 일원이 돼야 하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남한이나 국제사회에 한 약속을 꼭 지켜달라고 했어요. 결혼은 안하실 생각인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오고 가는 것이라고 하든데 시집가고 장가가고 시집오고 장가오고…(다소 당혹스러웠던 듯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수줍어하는 모습도 내비쳤다.) 박 대표를 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육영수 여사를 떠올리게 되는데 정치인 박근혜의 독자적 이미지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아이구, 이젠 그런 말 그만할 때가 안됐나요. 저는 독자적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하며 정치한 적이 없어요. 다만 시대에 맞는 정치, 국민에게 도움되는 정치를 하고자 했을 뿐이죠. TV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박 대표 역할하는 탤런트를 봤나요. -시간이 없었어요. 선거를 치르느라 밤에 늦게 들어오고 새벽에 나가고, 민박하고 하느라 한번도 못봤어요. 교육문제에 대한 관심도 큰 것으로 아는데. -우리나라는 사람만이 자산이라고 봐요.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야만 국가경쟁력도 생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념 과잉, 하향 평준화, 극심한 관치 등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고, 학교와 교사에게 자율권을 많이 줘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현 정부의 교육방향은 밑으로 같이 끌어내리는 쪽으로 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지난번 결혼한 동생 지만씨 부부로부터 조카가 생기게 되셨는데. -동생의 결혼으로 기뻤고 출산을 기다리고 있어요. 딸·아들 구분하지 않습니다. 대담 구본영 정치부장 kby7@seoul.co.kr 정리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박근혜대표 인터뷰를 마치고 4·30 재보선의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가운데 4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만났다.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였다. 유세전에서 강행군하느라 감기 기운이 있다고 참모들이 귀띔했다. 하지만 승자의 여유 때문일까,1시간40분여 동안의 인터뷰 내내 꼿꼿한 자세였다. 이 때문인지 사진으로만 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단있는 표정과 육영수 여사의 단아한 이미지의 편린이 약간씩겹쳐져 느껴졌다. 문득 거물 정객이었던 고 김윤환(허주) 전 의원이 초선 의원 때의 그를 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즉 “국가경영 수업 면에서 퍼스트레이디 1년 경험이면 금배지 3번 다는 것 이상이다.”라는 언급이었다. 박 대표가 적지 않는 기간동안 퍼스트레이디 역을 수행한 경험의 잠재력을 평가한 것이겠지만, 기자는 당시 솔직히 귀담아 듣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 유세장에서 그는 “10대 소녀들로부터도 악수나 카메라폰 공세를 받았다.”고 토로한 데서 짐작되듯 만만찮은 대중성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 대중성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부모의 ‘후광’에만 기인하는 것인지, 다른 ‘무엇’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한나라당이 재보선 등 전투에는 강하지만 전쟁(대선)에는 약한 이유는 뭐라고 보는가.”,“영화 그때그사람 등의 기획의도가 뭐라도 보나.”라는 등 거북해할 만한 질문을 연거푸 던져보았다. 하지만 얼굴 표정이나 매무새는 별반 흐트러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당략이나 개인적 이익 등)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국가에 이익이 되느냐를 기준으로 정치를 할 것”이라는 원칙론을 또박또박 피력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일행 중 의자를 가장 반듯이 정리하고 자리를 뜨는 뒷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허주의 언급을 곱씹어 보았다. 구본영부장 kby7@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극장업계 성공한 CEO 고은아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극장업계 성공한 CEO 고은아

    장 콕토는 ‘영화란 영상으로 쓰는 문장’이라고 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영화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면서 시적(詩的) 구조론을 주창했다. 그렇다면, 배우란 무엇일까. 문득 생각해본다.‘문장’이요 ‘시구’가 아닐까. 추억의 영화를 얘기할 때 ‘맞아, 그 배우’하면서 대부분 주인공 배우를 먼저 떠올린다. 한 여인이 있다. 배우가 된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했다. 청초한 여대생이었을 때, 미술대에서 공예가를 꿈꿨다. 어느날 한 조각가의 화실에서 친구들을 위해 우연히 모델을 했다. 며칠 후 낯선 사람들이 학교에 찾아왔다. 영화 한편 찍자고 했다. 거절했다. 막무가내였다. 결국 영화사 사무실까지 끌려갔다. 사진 한컷만 찍으면 된단다. 얼떨결에 응했다. 이후 인생의 방향이 확 달라졌다. 여대생 ‘이경희’에서 영화배우 ‘고은아’로 바뀌었다. ●은막 떠난지 26년… 97년부터 경영 대표작 ‘갯마을’로 잘 알려진 왕년의 스타 고은아(60)씨. 추억의 팬들에게는 고 육영수 여사와 닮은 ‘정숙한 여인’으로 인상깊다. 또 ‘관능미의 여인’‘과부’ 역을 자주 맡았다.1965년 1월 ‘난의 비가’로 데뷔했으니 올해로 꼭 40년째가 되는 셈이다. 은막을 떠난 지는 26년 됐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 발전을 위해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 주변에서 고씨를 얘기할 때 극장업계의 ‘성공한 CEO’로 꼽는다. 지난 1997년부터 서울극장과 합동영화사 대표를 맡고 있다. 특히 서울극장은 지난해 말 11개의 개봉관을 갖춘 대형 멀티플렉스로 거듭 태어났다. 객석수만 해도 4600여석일 만큼 서울 4대문 안에서는 가장 큰 극장으로 변모했다. 또한 대구 중앙극장, 부산 대영극장, 대전 아카데미극장, 의정부극장 등 4곳의 지방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주 서울 종로3가에 위치한 서울극장을 찾았다.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막 타는 순간 고씨의 남편인 곽정환 서울극장회장을 만났다. 고씨를 인터뷰하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난 아니야, 고 사장이 일을 다해. 난 요즘 (뒤로)빠져 있어요.”라며 웃는다. 고씨의 집무실은 서울극장 5층에 자리해 있었다. 창너머 서울시내가 환히 보였다. 이에 고씨는 “서울은 많이 복잡한 것 같아요.”라고 특유의 정숙한 웃음을 짓는다. 요즘엔 서울신문을 열심히 본다고도 했다. 창가에 붙은 포스터 하나가 보였다. 제목은 ‘행복의 나눔’이었다. 고씨는 “원래는 ‘생명의 창고’였다. 쉽게 설명하면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 등 세계 각국의 기아를 위한 봉사단체인데 2년 전에 대표를 맡았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얼굴 내미는 것을 싫어하지만 CBS에서 15년 동안 (기아 관련 방송)MC를 맡은 경력도 있고 또 주위의 간곡한 요청으로 ‘행복한 나눔’을 이끌게 됐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서울과 지방 등을 오가는 일이 더욱 많아졌다.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에는 젊은이들에게 극장문을 활짝 연다. 다름아닌 서울극장 2관(907석)에서 기독교 예배행사를 갖는 것. 지난 1월부터 시작했다. 대상은 서울극장을 찾는 사람들이다. 말이 예배이지 재즈음악과 가요 등을 곁들인 한마당 놀이나 다름없단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고씨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으며 요즘에는 1000여명이 참석할 정도로 입소문이 점점 퍼지고 있다. ●최근 영화출연제의 받기도 극장 운영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고씨는 “직원이 100여명에 이를 만큼 단일극장으로는 규모가 꽤 커졌다. 어떻게 하면 관람객들이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면서 하루에도 수십차례 극장 주변을 돌면서 관객들과 만난다고 했다. 원래 서울극장은 지금의 곽정환 회장이 지난 78년 세기극장을 인수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고씨는 “과거의 영화는 하루에 몇커트를 찍었느냐 하는 열정을 자랑삼아 얘기했지만 지금은 영화산업의 규모 자체가 엄청나게 변했다.”면서 구멍가게 같은 사고에서 벗어나 첨단 과학으로 승부할 때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아울러 97년 극장경영을 본격적으로 맡으면서 컴퓨터와 위기관리 등에 관한 책을 읽고 또 관련 강의도 자주 듣는다고 했다. 온갖 정보 속에서 세상 전체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또한 영화 자체가 현실을 반영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본인 자신도 지금의 세상이 봄바람인지 여름바람인지 직접 쐬어 보려고 많이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요즘 영화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개봉영화를 대부분 보려 하지만 바쁜 일정 때문에 중간중간 토막을 내서 보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최근에는 ‘달콤한 인생’을 두번 봤고,‘말아톤’을 보면서 내가 고정 관념속에 많이 갇혀 있구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됐단다. 영화 출연 제의에 대해 그는 “최근에 모 영화사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아들(서울극장 기획실장)이 ‘엄마가 나오면 서울극장 간판에 얼굴을 어떻게 걸어놓겠느냐.’하는 말을 듣고 거절했다.”며 웃었다. ●가장기억에 남는 출연작 ‘갯마을’ 때마침 남편인 곽 회장이 들어오면서 인터뷰 내용을 엿듣고는 “이 사람의 인생코드는 독실한 신자이기 때문에 영화출연 같은 거 안할 걸요.”하면서 “기독교 방송을 15년이나 한 걸 보세요.”라고 거들었다. 또 “이 사람은 배우로 살려고 하지도 않았고 한때 배우로 분에 넘치는 인기도 얻었다.”고 부연했다. 고씨 역시 “사실 영화에 뿌리 내리는 작업을 못했다. 살아오는 동안 문화적 충돌로 번민도 많이 했다.”면서 “79년 영화계를 떠난 뒤 신앙에 빠져 살면서 ‘(하나님이)왜 영화를 시켰을까. 하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고 했다. “처음 데뷔작은 ‘난의 비가’였지요. 청순가련형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자 역할이었어요. 당시 영화를 찍으면서도 ‘이번 딱 한번이다.’라고 몇번이나 다짐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물론 ‘갯마을’이지요.” 고씨는 영화출연을 거절하기 위해 영화사에 갔다가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권하는 바람에 인연이 됐다고 술회했다. 나중에 곽씨와는 CBS에서 10년 동안 방송을 함께 했다.‘고은아’라는 이름은 한운사씨가 ‘정말 고운 아이’라는 뜻에서 붙여줬다. 고씨는 영화보다 주로 TV드라마에 출연했다. 마지막으로 ‘제2공화국’에서 육영수 여사역할에 이르기까지 출연작이 약 100여편에 이른다. “극장운영을 하면서 인생이란 운전자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좌회전도 해야 하고 우회전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또 고갯마루 올라갈 때에는 다리가 안부러지지만 내리막에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고씨는 어렸을 때부터 일기형식으로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단다. 이는 곧 인생을 살아가면서 귀중한 자료가 됐다. 고씨는 영화배우로 한창 인기를 끌던 20대에 곽 회장과 결혼했다.40년 가까이 결혼생활하면서 부부싸움을 얼마나 했느냐고 하자 곽 회장이 “아니 기운이 있을 때 부부싸움도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린 아직도 기운이 펄펄합니다.”면서 결혼해서 손해봤다는 생각을 안해봤다고 껄껄 웃는다. 고씨 역시 “둘이 오래 살다보니 성격도 비슷해졌다.”면서 사는 동안 소중한 사람으로 수첩에서 정리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다. 건강관리를 위해서는 과식하지 않고 일주일에 한번꼴로 골프라운딩을 하며 틈틈이 헬스를 이용한다. 슬하에 1남1녀를 둔 고씨는 일주일에 2∼3회정도 곽 회장과 같이 손을 잡고 출퇴근한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6년 부산 출생 ▲64년 부산여고졸, 홍익대 미술대 공예과 입학 ▲65년 영화 ‘난의 비가’로 데뷔, 은아필름 창립 ▲67년 결혼 ▲80년∼95년 CBS방송 ‘새롭게 하소서’프로그램 진행 ▲97년∼현재 서울극장 대표이사 사장 ▲2003년∼현재 ‘행복의 나눔’ 대표. ▲상훈 72년 영화 ‘며느리’로 대종상 여우주연상,78년 영화 ‘과부’로 제17회 대종상 여우주연상.88년 제5회 문화예술상(방송부문-새롭게 하소서) ▲주요 작품 영화 ‘난의 비가’‘며느리’‘과부’‘갯마을’‘소복’‘물레방아’‘까치소리’‘여자의 얼굴’‘겨울새’‘상노’ 등. 드라마 ‘사모곡’‘추풍령’‘즐거운 우리집’‘은하의 계절’‘제2공화국’ 등.
  • [이사람] 농구중흥 이끄는 KBL 김영수 총재

    [이사람] 농구중흥 이끄는 KBL 김영수 총재

    “농구 승부가 마지막 4쿼터에서 갈리듯 인생도 4쿼터가 가장 중요합니다. 경기 종료 직전에 터지는 역전 버저비터와 같은 짜릿한 마무리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한국프로농구는 초유의 ‘몰수게임’ 파동과 총재 사퇴로 출범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한국농구연맹(KBL)은 1997년 문화체육부(현 문화관광부) 장관을 끝으로 초야에 묻혀 지내던 김영수(63)씨를 총재로 영입했다. 많은 농구인들은 “정치권 실세도 아니고, 농구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우리의 수장이 될 수 있느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불만과 우려 속에서 ‘농구 전도사’를 자처한 김 총재는 지난 1년 동안 농구계의 상처를 보듬고, 프로농구 중흥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총재는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공안검사를 거쳐 안기부(현 국정원) 차장, 국회의원, 장관 등 ‘양지’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모나지 않은 처세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았고, 물러날 때를 알고 미련없이 양지를 버렸다. 마침내 농구장까지 흘러온 그의 인생은 농구공만큼이나 둥글다. ●제1쿼터, 문세광과 공안검사 1965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김 총재는 서울중앙지검 공안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74년 8월15일 문세광이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검찰청은 발칵 뒤집혔다. 공안검사들 사이에서는 누가 이 ‘뜨거운 감자’를 맡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김치열 검찰총장은 혈기왕성한 4년차 검사 김영수에게 사건을 맡겼다. 기소까지는 끝모를 밤샘 조사와 트럭 수대분의 방대한 조서가 뒤따랐다. 최근 문세광 사건에 대해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면서 김 총재는 여러 언론매체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지만 “기소 내용 외에 달리 할 말이 없다.”며 극구 사양해 왔다. 김 총재는 “당시에도 사람들은 이 사건의 배후에 조총련과 북한이 있다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에만 매달렸다.”면서 “나는 담당검사로서 피의자가 피해자에게 총격을 가한 피의사실 규명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김 총재는 제천지청장과 제주지검차장을 거쳐 1987년 치열한 ‘공안정국’에 다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돌아왔다. 박종철 이한열 등이 공권력에 의해 희생됐고, 수많은 민주투사들이 투옥되던 때였다. 되돌아보면 시국사건보다 대공사건을 주로 담당한 게 그에게는 다행이었다.“이젠 세상이 바뀌어 그때 고생하신 분들이 정치 전면에 부상했고, 당시 공안쪽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지만 나는 다행히 그런 불상사를 피했다고 생각합니다.” ●제2쿼터, 안기부·국회를 거쳐 청와대로 제6공화국이 들어서며 김 총재는 검찰청을 떠나 안기부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배명인 검찰총장이 안기부장이 되면서 그를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한 것. 안기부 제1차장으로 활동하던 중에 ‘3당 합당’을 맞이하게 됐고,‘상도동’에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던 김 총재는 김영삼 대통령 후보에게 ‘직보’하는 역할까지 맡게 됐다. 민자당 비례대표와 당정세분석위원장까지 맡게 돼 김 전 대통령과의 친밀도는 더욱 높아졌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 김 전대통령은 자신의 가신과 고위공직자를 감시하는 민정수석비서관 자리에 김 총재를 앉혔다. 김 총재는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와 상도동 사람들이 ‘우리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나를 거부했지만 대통령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엄청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요직에 있으면서도 ‘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김 총재는 “칼을 잡았을 때는 칼을 놓을 때를 생각해야 한다.”면서 “칼은 칼집에서 뺄 듯 말 듯할 때가 가장 무섭고, 섣불리 빼서 함부로 쓰다가는 결국 내가 다친다.”고 말했다. ●제3쿼터, 청소년과 문화를 만나다 1997년 3월 문체부 장관을 끝으로 김 총재는 더 이상 ‘양지’에 기웃거리지 않기로 결심하고 휴식기인 ‘하프타임’을 맞이한다. 그는 “이 하프타임 때 전반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우선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를 만들어 청소년 문제에 천착했다. 아직도 1주일에 두세번은 자신이 소장을 맡고 있는 이 연구소에 들를 정도로 애착이 강하다. 재원이 넉넉지는 않지만 해마다 예비 대학생들을 뽑아 중국 연수를 보내고, 가을이면 한·중·일 청소년창작영화제를 주최한다. 그는 “일본과 중국 학생들은 주로 가족애를 고민하는 영화를 만드는데 한국 청소년들은 대부분 ‘왕따’문제를 다룬다.”면서 “그만큼 우리 청소년들이 놓인 상황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문화에도 관심이 깊어 한국박물관회 회장과 한국문화연구재단 이사장 등을 두루 맡았고, 지난해까지 4년 동안 예술의 전당 후원회장을 지냈다. ●제4쿼터, 농구공을 잡으며 굳이 김 총재와 프로농구의 인연을 찾는다면 1996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총재에 앞서서 총재직을 역임한 김영기·윤세영씨가 프로 출범이 지체되자 주무장관실로 쳐들어(?)왔고, 장관이었던 김 총재는 약간의 도움을 줬다. 이후 김 총재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농구계 인사들 중 몇몇이 지난해 위기 때 김 총재를 적극 추천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더욱이 농구는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운동이고, 룰에 복종하며 몸을 부대껴 승리를 성취하는 스포츠가 교육적으로 상당히 큰 효과를 발휘한다고 믿고 있었던 터였다. 김 총재는 KBL에 들어와 맨 먼저 ‘클린팀’상을 만들었다. 가장 신사적인 플레이를 펼친 팀을 팬과 기자, 경기감독관 등이 투표로 뽑아 정규리그 우승상금과 똑같은 5000만원을 주자는 것이었다. 김 총재는 “스포츠는 승부가 중요하지만 페어플레이를 떠난 승부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프로농구는 요즘 ‘봄의 잔치’로 불리는 챔피언결정전이 한창이다. 하나뿐인 챔프반지를 위해 1년 동안 숨가쁘게 달려온 선수들이 마지막 한 방울의 땀까지 쏟아 붓고 있다. 농구장에서 살다시피하는 김 총재는 “승자의 환희보다 패자의 눈물을 볼 줄 아는 총재가 되고 싶다.”면서 “어쩌면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인연을 맺은 농구가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가 될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벽돌을 쌓겠다.”고 말했다. ■ 프로필 1942년 5월10일 인천생 1965년 제5회 사법시험 합격 1971년 서울지검 검사 1987년 서울지검 공안부장 1992년 민자당 국회의원 1993년 대통령 민정수석 1995년 문화체육부 장관 1997년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 2000년 한국문화연구재단 이사장 2004년 한국농구연맹(KBL) 총재 글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사진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 문세광의 자필 일지 최초 공개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의 자필 일지가 방송을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 MBC스페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27일 밤 11시35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의 진실을 추적한 ‘육영수와 문세광’ 2편 ‘문세광을 이용하라’를 통해 지난 73∼74년 문세광이 자필로 쓴 수첩과 사형 20일 전 그를 면회한 아사히신문 다메나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 내용을 공개한다. 문세광의 당시 활동 본거지였던 오사카에는 이 사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증인들이 있다. 그의 가족과 한국청년동맹 동료, 오사카 중앙정보부 정보원들의 증언은 한국의 수사기록과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과 DJ 납치사건 등으로 국제적으로 고립돼 가던 박정희는 육영수 저격사건을 계기로 한·일 관계가 역전되면서 난국을 돌파할 수 있었다. 사형 집행 20일 전에 그를 만난 일본 아사히신문의 다메나 기자는 “문세광은 자신이 사형당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교도관들과 웃고 이야기하며 면회장으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73∼74년 한국청년동맹 이쿠노지부의 활동 내용이 담긴 활동수첩에는 문세광이 참가한 집회 내용과 집회 참가자, 정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아카후도 병원에 입원할 때 사용한 가명과 주소, 전화번호, 병원 입원과정 등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73년 9월7일 문세광은 한청 중앙위원장이었던 김군부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취재팀과 만난 김군부는 “편지를 받은 일이 없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편지 내용은 1974년 10월9일 민단과 중정에서 재정 지원을 받던 통일일보 지면을 통해 공개됐다. 누군가 편지를 가로챘다는 의혹이 드는 부분이다. 제작진은 “편지는 1년 동안 사라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났고, 사건 직전까지 문세광과 늘 붙어다니던 인물도 사건 직후 사라졌다.”면서 “취재 결과 누군가 문세광의 소영웅주의를 이용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선다.”고 말했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박근혜 ‘黨 내분’ 수습할까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22일 밤 7박8일간의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다. 이번 방미는 대표 취임 후 첫번째 국제 외교활동이라는 점에서 박 대표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모아졌다. 박 대표는 이번 방미기간 중 백악관·행정부·의회의 한반도 정책 관련 핵심인사와 미국내 싱크탱크 및 언론 관계자들을 만나 북핵문제와 한·미관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미국측 의견을 들었다. 특히 최대 현안인 북핵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법을 정리,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받았다. 박 대표는 특히 귀국 전날인 20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옥스퍼드팰리스호텔에서 열린 ‘LA 한인 동포 환영회’ 행사에 한복을 입고 참석, 교포들의 찬사를 받았다. 박 대표는 지난해 말 동생 지만씨의 결혼식에서 한복을 입긴 했지만 정치활동과 관련한 공식 행사에서 한복을 입기는 지난 1970년대 후반 퍼스트레이디를 대행했던 시절 이후 처음이다. 박 대표는 이날 행사에서 “해외에 계신 동포들이 조국을 그리워하니까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기 위해 한복을 입었다.”며 참석 교포들을 위로했다. 이에 대해 교포들은 “금색 치마에 주홍색 저고리를 입은 박 대표의 모습은 마치 살아 생전의 육영수 여사를 보는 듯하다.”며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박 대표의 귀국길은 그다지 홀가분할 것 같지 않다. 귀국과 동시에 당내 갈등을 매듭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 대표의 방미 이후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던 갈등 양상이 박세일 의원의 탈당계 제출로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박 대표로서는 일단 탈당을 만류하겠지만 박 의원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난감한 처지에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사무총장·비서실장·대변인 등 주요 당직자들에 대한 재신임 여부도 당내 갈등의 새로운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비주류측에서는 일괄 사퇴를 요구한 상태다. 그러나 당 핵심 관계자는 “박 대표의 인사 스타일을 감안할 때,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당내 일각의 반대 기류만을 의식해 사퇴서를 수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박근혜-럼즈펠드 ‘31년만의 해후’

    |워싱턴 이도운특파원|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31년만에 해후했다. 워싱턴을 방문 중인 박 대표는 16일 오후(현지시간) 펜타곤에서 럼즈펠드 장관을 만나 환담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74년 9월. 그로부터 한달 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 사건으로 사망한 뒤 박 대표가 처음으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했던 행사가 바로 9월의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의 방한이었다. 당시 럼즈펠드는 비서실장으로서 포드 대통령을 수행했다고 한다. 회의실에서 박 대표를 맞은 럼즈펠드 장관은 “어렸을 적 모습이 기억나는 것 같다.”며 반가워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럼즈펠드 장관은 박 대표를 집무실로 안내한 뒤 남쪽은 불빛이 환하고, 북쪽은 평양에만 불빛이 비치는 야간의 한반도 위성사진을 보여주며 “같은 민족인데도 한쪽은 풍요롭고 자유로운 민주주의 체제인데, 다른 한쪽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독재체제”라고 강조한 뒤 그 사진을 선물했다. 박 대표는 이날 저녁 워싱턴 특파원과의 간담회에서 방미 중 만난 미국측 인사들에게 “북한을 제외한 6자회담 참가국들이 만나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받을 수 있는 반대급부를 ‘대담하게’ 합의해 제시하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의 대응책도 분명히 전달하라.”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한·일간의 독도 분쟁과 관련,“일본의 일개 현인 시마네현의 주장에 우리나라 전체가 대응하고 들고 일어나는 것은 생각해봐야 한다.”면서 “독도가 속한 울릉도 등에서 문제 제기를 해야 균형이 맞다.”고 강조했다. 앞서 박 대표는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오찬간담회에서 “북한은 통일의 대상이자 한국의 안보위협이라는 이중성이 있지만 군사적으로 한국의 주적”이라고 말했다. dawn@seoul.co.kr
  • ‘실전외교’ 박근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15일부터 미국 워싱턴·뉴욕·로스앤젤레스 등지를 잇달아 방문, 대미 외교무대에 ‘첫선’을 보인다. 박 대표가 개인 자격이 아닌 정치인 자격으로 대미 외교에 나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 대표는 지난 1974년 8월 모친인 육영수 여사가 숨진 뒤 79년 ‘10·26사태’ 때까지 5년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하면서 청와대를 방문한 외국 지도자들을 만난 적은 있지만 단 한 차례도 외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79년 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그나마 ‘10·26사태’로 무산됐다. 박 대표는 이날 방미 길에 오르면서 “지금 우리 안보문제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북핵문제와 국민들이 우려하고 있는 한·미 동맹문제, 양국간 통상마찰 문제 등에 대해 미측 인사들과 진솔한 얘기를 나눌 것”이라면서 “당과 국민들의 우려를 전달하고 필요하면 미측의 이해와 협조도 구하겠다.”고 밝혔다. 박 대표는 이번 방미 기간 중 잭 크라우치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비롯해 로버트 졸릭 국무부 부장관,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리사 머코스키 상원 동아태소위원장, 짐 리치 하원 동아태소위원장 등을 만나기로 돼 있다. 또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조찬간담회,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 주최 오찬연설회, 월스트리트 금융인 간담회, 컬럼비아대학 연설, 워싱턴포스트·뉴스위크 등 주요 언론과의 인터뷰 등도 예정돼 있다. 박 대표는 이밖에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뉴욕의 9·11테러현장 등을 둘러보고 현지 교민 및 기업인들이 주최하는 간담회 및 환영행사에도 참석, 격려할 계획이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여의도in] 머리 살짝 풀어내린 박근혜

    [여의도in] 머리 살짝 풀어내린 박근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7일 트레이드 마크인 ‘육영수 여사’ 스타일 대신 단발머리를 살짝 변형한 모습으로 나타나 화제가 됐다.“훨씬 젊어보인다.”는 평가와 “박 대표가 드디어 ‘과거사와 결별을 시도하느냐.”는 정치적 해석이 곁들여졌다. 새 모습은 뒷 머리를 봉긋하게 말아올린 평소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머리칼이 어깨에 닿을 듯한 단발머리 모양새였다. 평소엔 갈색 플라스틱에 큐빅이 촘촘이 박힌 머리핀을 즐겨 꽂았는데, 이날은 검정색 실핀을 X자 모양으로 교차시켰다. 달라진 헤어스타일로 참석한 아침 상임운영위 회의에서는 오랜만에 농담도 했다. 이규택 최고위원이 밝은 연두색 넥타이를 하고 온 것을 보고 “남성들은 넥타이가 밝아지거나 하면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이냐.”면서 “점점 야한 색깔의 넥타이를…”이라고 말해 며칠 딱딱했던 회의실 분위기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비공개 회의에서는 “저는 어떤 말을 듣더라도, 의지를 갖고 일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대표도 저만큼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더욱 당차게 소신을 밝혔다고 한다. 이날 박 대표의 머리 스타일 변화를 놓고 당내에선 “원내대표 경선도 본 궤도에 올랐고, 내홍을 봉합할 실마리도 찾았기 때문에 당무를 꾸리는 태도도 한층 ‘편안’해졌다.”는 해석도 나왔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서울시 “어린이회관내 골프연습장 불가”

    경영난을 겪고 있는 육영재단이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옆 어린이회관 내에 골프연습장 건립을 추진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6일 서울시에 따르면 육영재단은 어린이회관 내에 있는 야외수영장과 눈썰매장을 허물고 이 자리에 3층 규모의 골프연습장을 건립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시에 요청했다. 어린이대공원은 서울시 소유지만, 어린이대공원과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는 어린이회관은 육영재단 소유로 재단측이 1970년 남산에 지었다가 75년 현재의 자리인 3만평 부지로 이전했다. 이에 따라 시는 지난 1월 시 도시공원위원회를 열어 이 안건을 심의했으나 부결시켰다. 시 관계자는 “골프연습장을 짓게 되면 최소한 40∼45m의 철탑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주변 경관은 물론 임야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고 말했다. 또한 인근 어린이시설과 어울리지 않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해당 부지는 공원용지로 골프연습장을 포함한 체육시설이 들어갈 수 있지만 반드시 시 도시공원위의 심의를 거치도록 돼 있어 재추진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설립한 육영재단은 그동안 방만한 경영과 공익재단이라는 한계 등으로 재정난에 허덕여왔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씨줄날줄] 의혹과 진실/이목희 논설위원

    총리를 지낸 인사가 이런 회고담을 들려줬다.“재직 시절 평범한 보고서보다 첩보성 보고서에 더 관심이 가더라.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는데도 은연 중 믿게 된다. 첩보성을 근거로 어떤 결정을 내려 오류를 범할 때가 종종 있었다.” 분류된 고급정보를 접하는 고위관리가 이러니, 일반인들이 음모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암살된 지 40여년이 흘렀다. 미국 ABC방송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민의 70%는 아직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이 음모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리 하비 오스월드의 단독범죄가 아니며 배후가 있거나, 제2의 저격수가 있다고 믿고 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에서는 미 CIA와 군부가 오스월드를 함정에 빠뜨린 것으로 묘사돼 있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말을 많이 한다.’는 법의학 격언이 있다. 과학적으로 살피면 사인이 명백해진다는 얘기다. 케네디 암살사건과 최근의 육영수 여사 논란은 이 격언이 비켜간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었고,TV 화면과 음성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권력’의 은폐 개연성으로 ‘과학’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처지에 몰렸다. 지난달 문세광 관련 외교문서가 공개됐지만 의혹은 더 부풀어 올랐다. 검찰이 조만간 육 여사 사건 수사기록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의혹이 해소될 것 같지 않다. 검찰 수사기록은 ‘권력쪽의 주장’이라고 받아들여지는 탓이다. 배명진 숭실대 교수는 총성을 정밀분석한 결과 “육 여사는 청와대 경호원이 잘못 쏜 총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고인이 된 이건우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은 생전에 언론 인터뷰에서 탄흔으로 볼 때 육 여사는 문세광의 총에 맞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 맞는지 단정할 수 없다. 국민 정신건강을 위해, 나아가 역사의 올바른 기술을 위해 생존한 관계자들은 입을 열어야 한다. 권력측이 일부러 사건을 유발했다는 ‘대음모설’은 객관성이 떨어진다. 육 여사 피격 및 고 장봉화양 사망에 있어 당시 경호실이 실수를 조금이라도 숨기려 한 부분이 있다면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일이다. 육 여사를 피격한 총탄 탄두가 어느 총에서 발사됐느냐는 지금이라도 가려질 수 있는 ‘과학적 사안’이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육여사 경호원 오발로 사망” 주장

    육영수 여사는 저격범 문세광이 아닌 경호원의 오발탄에 맞아 숨졌다는 주장이 나왔다. 숭실대 소리공학연구팀 배명진(정보통신공학부) 교수팀은 11일 “1974년 8·15 경축식장에서 문세광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해 4발을 쏘았고 나머지 3발은 경호원들이 발사한 것”이라면서 “경호원들이 쏜 총은 네번째, 여섯번째, 일곱번째였는데 네번째로 쏜 총탄에 육 여사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배 교수는 “이 총소리는 뛰어나오면서 총을 쏘고 있는 문세광을 저지하기 위해 후방 좌측 5∼10m 거리에 배치된 경호원의 총에서 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세광이 쏜 세번째나 여섯번째 총탄은 객석과 연단과의 거리, 소리의 속도 등을 종합해 계산한 결과 육 여사를 명중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배 교수팀은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취재팀의 요청에 따라 총소리를 분석했으며, 당시 녹화된 비디오와 총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검찰은 이날 지난 1월 SBS와 MBC가 제기한 박 전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 정보 공개 청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수민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관련자 진술조서 등 사생활 유출의 우려가 있는 자료는 제외하고 객관적 사실에 관한 자료는 공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검찰이 공개하기로 한 자료는 ▲대통령 저격사건 발생 관련 저격범 검거 보고 ▲문세광씨 입국신고서와 숙박기록 등 문씨 행적과 관련한 자료 ▲압수조서 현장검증 조서 ▲총탄 감정 결과 ▲혈흔 감정 회보 ▲저격현장 녹음분석 결과 보고 ▲문씨를 만경봉호에 승선시킨 안내원의 몽타주 ▲만경봉호에서 문씨에게 대통령 암살 지령을 내린 북한 지도원 몽타주 사진 등이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육영수 여사 쏜 범인 따로 있다?

    육영수 여사 쏜 범인 따로 있다?

    지난 74년 8월15일 발생, 육영수 여사를 사망케 한 ‘박정희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이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난달 20일 이 사건과 관련된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불거져 나온 논란의 초점은 과연 육 여사가 당시 북한과 조총련의 조종을 받은 범인 문세광의 총탄에 맞았느냐 하는 점.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이 아닌 다른 인물의 총에 희생됐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짜맞추기 수사’가 있었다는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사건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으로 수사에 참여했던 고 이건우 당시 경감은 지난 89년 “현장 검증 전에 경호실에서 탄두를 수거해 갔다.”는 주장을 내놓으며 의혹에 불을 지폈다. 문세광의 오발과 연단·태극기·천장 등 현장에서 발견된 4개의 탄흔, 그리고 한 발이 남은 문세광의 총을 감안했을 때 육 여사는 문세광의 총에 맞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문세광이 비표도 없이 총을 소지한 채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었던 점도 이해되지 않는다. 당시 취재를 했던 한 외신기자는 “현장의 다른 카메라에 육 여사를 쏜 제3의 저격수가 포착됐다.”고 말했다. 12일 방영되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TV프로그램으로서는 처음으로 이같은 의혹을 과학적인 검증을 통해 다각도로 조명한다. 제작진은 사건 당시 컬러화면을 최초로 입수해 공개하고, 목격자 증언 그리고 총성 분석 등을 통해 진실에 접근한다. 또 일본 현지로 가 문세광의 가족을 만나는 등 심층 취재를 통해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의 내용과는 다른 사실들을 밝혀내고, 새로운 의문점을 제기할 예정이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7개 과거사 진상규명] 7개 과거사 개요·쟁점

    [7개 과거사 진상규명] 7개 과거사 개요·쟁점

    1. 정수장학회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온 장학회다.5·16 군사 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부산의 유력 사업가이던 김지태씨의 부일장학회를 모태로 5·16 장학회로 출범했다. 삼화고무와 부산일보를 운영하던 김지태씨는 재산해외도피 혐의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두달정도 구금생활을 했다.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등의 운영권 포기각서를 쓰고 며칠뒤 풀려났다. 서류상으로는 김씨가 자진납부한 것으로 돼 있으나, 유족들은 부산군수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수갑을 찬 채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라고 도장을 찍었다면서 명백한 강탈이라고 주장해 왔다. 특히 지난해 8월에는 “서류상은 자진납부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나 실재와 다른, 물목(物目·물건의 목록)조차 보지 못하고 있다.”는 김씨의 비망록이 발견돼 이런 의혹은 증폭됐다. 군부세력이 김 사장으로부터 부일장학회를 강탈했는지, 아니면 헌납과정에서 강제력이 동원됐는지에 조사의 관건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장학회는 문화방송 주식의 30%와 부산일보 주식의 100%를 소유하고 있다. 2. 동백림 사건 1967년 7월8일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반정부 간첩단사건이라며 이른바 ‘동백림사건’을 발표했다. 고 윤이상씨와 재 프랑스화가인 이응로씨 등 194명이 동백림을 거점으로 대남적화 공작을 벌이다 적발됐다는 것이다. 동독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활동을 했고, 일부는 평양을 방문해 밀봉교육을 받았다고 발표됐다. 몇몇 독일 유학생들이 북한 또는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어마어마한 간첩단인 것처럼 조작됐다는 게 의혹의 골자다. 당시에는 3선 개헌을 앞두고 총선에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며 대학가 등에서는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끓어오르던 시기였다. 이런 점과의 연계성도 조사대상이 될 것 같다. 3.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1975년 4월8일 대법원이 도예종, 여정남 등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해 사형을 확정한 이후 불과 20여시간 만인 4월 9일 오전 6시에 이들의 사형은 전격적으로 집행됐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반 유신체제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 상황에서 저질러졌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하며 엄중하게 항의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253명 중 유인태 의원, 이철 전 의원 등 민청학련 관계자들에게 사형, 징역 15년∼무기징역 등 중형이 선고됐지만 국내외적인 압력에 못이긴 박정희 정권은 1975년 2월 대부분을 석방했다. 사건 진실규명의 핵심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용공 조작여부에 있다.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통한 사건 조작, 군사법원 재판부의 공판조서 허위 작성 의혹 등도 진실규명이 필요한 대목들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공안부 검사들마저도 피의자들의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하는 ‘항명파동’이 일어났고 그 중 3명은 사표를 던졌다. 4. 김대중 납치 사건 1973년 8월8일 일본 도쿄에서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납치된 사건.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체류중이던 김대중씨는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벌였다. 사건 당일 도쿄에서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 간 김씨는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됐다가 129시간 만에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여부가 가장 큰 쟁점이다. 미국이 이 사건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느냐도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또 배를 이용해 한국으로 데려오는 과정에서 김씨를 수장시키려 했다는 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5.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 ‘청와대 근처 지하실에서 사살됐는지, 센강에 던져졌는지, 아니면….’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사건이다. 김 전 부장은 1979년 10월 7일 파리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를 나선 이후 행방불명됐고 프랑스측이 함께 수사했음에도 아직까지 미제사건이다. 김 전 부장은 박정희 정권 역대 정보부장 중 최장수인 6년 3개월을 역임하는 등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으나 내부 권력 투쟁으로 밀려난 뒤 73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1977년 박동선 로비 사건을 조사중이던 미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 등에 나가고, 회고록을 집필하는 등 ‘반(反)박정희’ 행보를 계속했다. 6. 대한항공(KAL) 858기 사건 1987년 11월29일 승객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KAL 858기가 미얀마 상공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3대 대선 투표일을 불과 하루 앞둔 12월 15일 북한 특수공작원인 ‘폭파범 김현희’가 김포공항으로 압송돼 왔다. 대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당시 정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특수공작원 김현희, 김승일이 기내에 라디오 시한폭탄을 설치, 아부다비에서 내렸으며 김승일은 체포직전 자살했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7. 중부지역당 사건 1992년 10월 대선을 두 달 남짓 앞두고 터진 ‘초대형 간첩단 사건’. 중부지역당 총책으로 지목된 황인오씨가 구속되는 등 62명이 구속되고 300여명이 수배됐다. 단순한 남한내 조직이 아니라 북한 권력서열 22위라는 ‘남파 여간첩 이선실’이 등장했고 전국적으로 노동계, 학생, 단체 등에서 300여명의 조직원을 확보한 지하조직으로 발표됐다. 이는 최근 이철우 의원의 ‘간첩 논란’을 통해 다시 한 번 부각된 사건이지만 사건 연루자들은 “안기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어 고문, 사건 조작 여부 등이 풀어야할 부분들이다.
  •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당시 수사 맡은 김기춘의원

    [‘박정희 저격사건’ 문서 공개] 당시 수사 맡은 김기춘의원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혐의로 1974년 8월15일 낮 중앙정보부에 체포된 문세광은 다음날 오후까지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중정 요원들은 여권에 적힌 일본인 이름 말고는 문세광의 인적사항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이때 중정부장의 법률보좌관으로 파견 중이던 서른 다섯살 ‘김기춘 검사’가 투입됐다. 신직수 중정부장의 명이었다. 김 검사는 링거를 꽂은 채 누워 있던 문세광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을 읽어 봤는가.” 하루 종일 묵비권만 행사하던 문세광이 그제서야 눈을 번쩍 뜨더니 “네. 혹시 센세(선생님)도 읽어 보셨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김 검사는 빙그레 웃으며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고 답한 뒤 “혁명을 하기 위해 왔다면서 이렇게 비겁하게 입을 다물면 되겠는가. 당당하게 밝힐 것은 밝히라.”고 추궁했다. 그러자 문세광은 입을 열어 범행을 자백하기 시작했다. 검찰총장·법무부장관을 지낸 한나라당 김기춘 의원이 20일 기자들과 만나 설명한 문세광 수사 뒷얘기다. 그는 “‘자칼의 날’은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을 담은 추리소설로 사건 보름 전쯤 대천 해수욕장에 휴가차 내려가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 수사에 응용해 봤다.”고 전했다. 또 “문세광은 38구경 권총을 분해한 뒤 라디오에 넣어서 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는데, 소설 주인공도 장총의 총구를 라디오에 숨겨 들여왔다. 암살자에겐 교과서 같은 책”이라고 설명했다. 김 의원은 “문세광은 나중에 육 여사가 숨졌다는 말을 듣고 ‘정말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참회했다.”면서 “젊은 나이에 포섭이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이것은 살인 사건일 뿐 정치적으로 악용할 소지는 없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한편 당시 서울지검 공판부장으로 수사 실무책임자이던 정치근 변호사는 “문은 처음에는 ‘빨리 죽여 달라.’는 말만 하다가 나중에 ‘한국군에 입대하겠으니 살려만 달라.’며 삶의 집착 같은 것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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