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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는 한국땅’ 입증 고지도 경매

    ‘독도는 한국땅’ 입증 고지도 경매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지도가 대거 경매에 부쳐진다. 고미술 전문 경매사인 아이옥션은 오는 28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SK허브빌딩 경매장에서 독도 관련 지도 등 고서화 59점, 도자기 62점, 민속품 41점 등 모두 227점을 거래할 예정이라고 10일 밝혔다. 독도 관련 자료로는 일본의 에도시대 실학자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1785년 제작한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之圖)’를 토대로 1800년대에 만들어진 필사본 족자 및 지도첩 4점이 출품된다. 이 자료는 조선은 녹색, 일본은 황색 등 나라별로 색깔을 달리해 지도에 표시했는데, 울릉도와 독도는 녹색으로 칠해져 있다. 국내 처음 소개되는 ‘대일본접양삼국지전도(大日本接壤 三國之全圖)’는 1816년 일본에서 발행된 지도로, 독도와 울릉도는 물론 현재 러시아령이 돼 있는 녹둔도까지 한국령으로 표기돼 있다. 또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여지도(朝鮮輿地圖)’는 울릉도와 독도를 같은 색으로 칠해 한국령으로 표시돼 있다. 일제 시대인 1924년 제작된 ‘조선이정전도(朝鮮里程全圖)’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하고 뒷면에는 ‘경성시가전도(京城市街全圖)’도 실려 있다. 한편 이번 경매에는 195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박수근의 작품 ‘나무가 있는 언덕’과 고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회관 건립을 기념해 쓴 한글 서예 작품, 백범 김구 선생이 ‘鵬程萬里´(붕정만리)라고 쓴 한자 서예 등도 함께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총선 D-12] 김재학씨 피습사건 표심 흔드나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27일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보존회장이었던 고 김재학씨의 빈소를 찾았다. 박 전 대표는 전날 발생한 김씨 살해사건이 우발적 범행이라는 경찰 수사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그건 피의자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라면서 “수사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전날 밤 늦게 피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박 전 대표는 “어떻게 이런 일이….”라며 말을 잇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오전에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바로 그제 가서 뵈었던 분인데, 너무 억울하게, 비참하게 돌아가셔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면서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세간의 관심이 컸다. 총선 때문이기도 하고 꼭 총선 때문만은 아니기도 하다. 대중들은 박 전 대표 일가와 테러와의 악연을 습관처럼 오버랩시킨다. 박 전 대표의 모친 고 육영수 여사는 1974년 조총련계 문세광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고, 박 전 대통령은 79년 10·26사태로 운명했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박 전 대표도 지난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도중 피습을 당했다. 박 전 대표와 테러와의 질긴 악연이 질곡 많은 역사라는 형태로든,‘유명인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형태로든 개인들의 기억에 내재됐다. 그래서 고통을 당한 뒤 나온 박 전 대표의 발언은 폭발력을 가졌었다. 부친 암살 뒤 반사적으로 나왔다는 “전방은요.” 한마디가 박 전 대표를 지도자감으로 격상시켰다. 본인의 피습사건 뒤 “대전은요.” 한마디로 선거 판세를 되돌렸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지역구 유세 일정을 취소하고 경로당을 방문하며 차분하게 선거운동을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해당행위를 한다는 당 지도부의 비판에 대해 “당헌·당규 어디에도 탈당한 사람의 복당을 불허한다는 규정이 없다.”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금품살포로 공천을 반납한 김택기씨 공천에 친박(親朴·친박근혜)계 강창희 공심위원이 연관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공심위가 내 이야기를 들어줬느냐.”고 쏘아붙였다. 아무래도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박 전 대표 지원을 받을 확률이 사라져가는 분위기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정부수립 60년] 해방·분단·산업화·민주화…도전과 극복의 60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역대 정권들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양대 축과 맞물려 국가를 운영해왔다. 민중혁명과 군부 쿠데타 등 진통속에서도 민주화의 여정을 꾸준히 밟았으며, 결국 문민정부가 확고히 자리잡게 됐다. 또 끊임 없는 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지난 60년간 역대 정권들이 역점을 두었던 핵심정책들과,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주요 이슈들을 살펴본다. ■ 역대정부 핵심정책 이승만 정부(1948년 7월∼1960년 5월)는 한국전쟁 수행과 복구로 인해 정체를 빚다가 토지개혁을 통해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미국 원조에 의존하면서 소비재산업의 육성을 꾀했다. 박정희 정부(1963년 12월∼1979년 10월)는 3권을 총괄하는 제왕적 위치에서 강력한 행정을 폈다. 공업화·산업화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재건·단합, 농·공병진, 수출입국, 새마을운동을 통해 국민의식을 일깨우는 정책을 추진했다. 전두환 정부(1980년 10월∼1988년 2월)는 70년대 후반 심각한 노사분규, 산업간 불균형을 해소하는 게 당면과제였다. 이에 따라 정부재정을 축소하는 등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수차례 좌절됐던 ‘독점금지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노태우 정부(1988년 2월∼1993년 2월)는 광범위한 민주화정책을 추진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16년만에 부활하고 청문회제도를 도입했다.5·16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를 되살렸으며, 개헌을 통해 표현의 권리와 노동3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했다. 전국민 의료보험, 국민연금, 최저임금제 도입 등 굵직한 사회복지정책이 이때 시작됐다. 김영삼 정부(1993년 2월∼1998년 2월)는 30여년만에 들어선 문민정부로서 사회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금융실명제를 도입, 부패 고리 차단과 과세 형평 확보에 나섰다.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부동산실명제를 단행했다. 그러나 금융개방에 대한 대응체제 미비로 IMF 구제금융이라는 미증유의 환란을 초래했다. 김대중 정부(1998년 2월∼2003년 2월)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외환위기 극복에 정책의 기조를 뒀다.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 이후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동해선 연결, 금강산 관광 등 남북 화해·협력체계를 구축했다. 노무현 정부(2003년 2월∼현재)는 성장보다는 분배에 초점을 뒀다.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행정복합중심도시 및 혁신도시 건설에 나섰고, 지방분권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또 한·미 FTA를 타결해 글로벌경제체제에 본격 진입시키는 한편,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정권별 이슈 (1) 제1·2공화국 1948년 국제연합(유엔)의 감시하에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 같은해 7월20일 국회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돼 8월15일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이 대통령은 1953년 초대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3선 당선에 성공했으나, 장기독재에 반대하는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밀려났다.1960년 윤보선 대통령이 제2공화국을 물려받았지만 이듬해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로 1년만에 정권을 내줬다.1950년 한국전쟁으로 53년 7월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기까지 수십만명이 숨지고 남북이 60년 넘게 분단되는 결과를 낳았다. (2) 제3·4공화국 5·16쿠데타로 정권을 접수한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에 취임,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1972년 10월 국회를 해산하고 12월 유신헌법을 공포한 데 이어 74년 긴급조치를 선포했다.79년 10월26일에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라 1970년 서울∼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를 개통, 물류의 대동맥을 이었다.1977년에는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했다.1970년 청계천 봉제공장의 재단사였던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했다.71년에는 국가보안법이 국회를 통과했다.1965년에는 베트남전쟁 파병이 결정됐고 74년 육영수 여사가 피살당했다. (3) 제5·6공화국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12·12사태로 1980년 8월 전두환이 새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에 국민의 저항이 거세지자 전두환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규정,5월18일부터 열흘동안 광주시민 6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1980년에는 언론기관 통폐합이 이뤄졌다.1980년 처음으로 컬러 텔레비전이 시판됐고 82년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다.87년 대학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자 전두환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6월항쟁으로 이어졌고, 대통령직선제를 선언한 노태우가 제6공화국을 물려받았다. 정부는 87년 11월 발생한 KAL기 폭파사건 배후에 북한공작원 김현희가 있다고 발표했다.88년 아시아에서 2번째로 열린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됐다.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했고 92년 중국과 수교했다. (4) 문민정부 3당 합당을 이룬 김영삼 민자당 후보가 1992년 제15대 대통령에 당선,30여년만에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96년에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임 대통령이 비리를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94년 금융실명제 실시를 통해 금융거래의 투명화를 이뤘다.96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으나 이듬해인 97년 연쇄부도 사태와 외환보유고 부족 등으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94년 성수대교 붕괴,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등으로 수백명이 참사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5) 국민의 정부 김대중 대통령은 그동안 강경일변도의 대북정책에서 탈피,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린 온화정책으로 바꿨다.2000년 남북분단 이래 첫 정상회담이 성사됐고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됐다. 그해 김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정책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5년간 846억달러에 달하는 무역흑자를 달성 IMF 구제금융기간을 7년에서 4년으로 앞당겨 성공적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했다.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최됐고 한국이 4강에 올라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6) 참여정부 2004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으로 대한민국 초유의 대통령탄핵사태를 맞았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은 기각됐고, 열린우리당은 4월 총선에서 압승했다.11월 임기를 4개월여 앞두고 정부부처의 기사송고실을 3개로 통폐합하는 이른바 ‘취재지원선진화 방안’을 추진, 임기말까지 언론과 대립각을 세웠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선택 2007 D-4]대선 후보들 표밭갈이 분주

    [선택 2007 D-4]대선 후보들 표밭갈이 분주

    ■ ‘민생·경제 챙기기’ 주력하는 李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14일 거리유세를 잠시 멈추고 다시 민생행보에 나섰다. 일요일인 16일까지 거리 유세 대신 민생챙기기에 주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후보는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대우증권을 방문한 자리에서 “정권교체가 되면 세계 경제가 어렵더라도 국민이 화합하고 지도자를 신뢰하면 내년 증시 3000포인트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제대로 되면 임기 내 5000포인트까지도 올라가는 게 정상이다.”고 덧붙였다. 이 후보는 “우리 주가가 기업의 실질적인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면서 “주가가 진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정권교체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아시아에서 금융 중심지의 역할을 할 수 없겠나 하는 게 나의 목표”라며 “그런 점에서 제2금융권인 증권회사들이 세계시장에, 특히 우리 기업들이 많이 진출한 곳에 진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후에는 종로구 견지동 사무실에서 이날 밤 SBS 대담과 16일 대선후보 합동TV토론회에 몰두하는 것으로 막판 표심잡기 행보의 초점을 맞췄다. 주말에도 유세 일정을 잡지 않고 민생과 관련된 행사에만 참석하는 방안을 고려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이날 이 후보 지지 의사를 밝혀온 국민중심당 정진석 의원이 탈당했다. 정 의원은 탈당 이유에 대해 “할 얘기는 많지만 떠날 때는 말없이 가려고 한다.”며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이어 그는 “당분간 무소속으로 있으면서 보수대통합에 의한 정권교체를 위해 헌신하겠다.”면서도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핫바지론’으로 충청 민심 호소한 昌 무소속 이회창 후보는 14일 대전·충청 지역을 찾아 지지를 호소했다. 이 후보는 이날 오전 충남 천안시 아라리오 광장을 시작으로 조치원 시장, 대전역 앞을 돌며 유세를 한 뒤 국민중심당 심대평 대표 등과 함께 전략회의를 가졌다. 오후에는 충북 옥천의 육영수 여사 생가를 찾은 뒤 경북 안동·영천·포항으로 강행군을 이어가다 대구에서 잠자리에 들었다.15일에는 대구와 부산, 제주 등을 방문키로 했다. 이날 표를 갈구하는 이 후보의 목소리는 한층 강해졌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 대한 공격은 더 매서워졌다. 이회창 후보는 유세에서 이명박 후보를 겨냥해 “어떻게나 재주가 좋은지, 아니면 정권과 타협이 잘 됐는지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서 면죄부를 받았다.”고 비판의 고삐를 죄었다. 이 후보는 “이명박 후보 때문에 한나라당 모습이 일그러졌다.”면서 “정체성 있는 후보를 제치고 후보가 된 이명박 후보는 새치기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 일간지에서 이명박 후보와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의 이념적 좌표가 10점 만점에 4점(중도보다 약간 진보)으로 같은 것으로 분석한 것을 빗대 “(이명박 후보가) 스스로 좌파라고 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같은 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는 더 보수색이 짙은 좌표 6의 평가를 받았다. 한편으로 그는 “충절의 충청이 YS와 DJ, 노무현에게 속았다. 또 이명박에게 속아서 곁불 쬐는 핫바지가 되고 싶으냐.”며 지역정서를 건드렸다. 이 후보는 정 후보와 역전돼 지지율 3위로 나온 여론조사들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그는 “그거 엉터리다. 믿지 말라.”며 한나라당 경선 때 여론조사가 실제 투표결과와 큰 차이를 보였음을 상기시켰다. 앞서 이 후보는 서울 선거사무소에서도 “처음에 지지율이 20% 넘게 나와 용기백배해 시작한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는 지지율이 아닌 국민을 보고 모인 것”이라고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이어 “이순신 장군이 12척 남은 배를 갖고 시작했을 때는 더 처참했다.”면서 “진정한 상유십이는 지금부터”라고 다짐했다. 천안·대전 구동회기자 kugija@seoul.co.kr ■ 서울~제주 서부벨트 강행군 나선 鄭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14일 서울을 출발해 대전∼익산∼장성∼제주로 이어지는 ‘서부벨트 공략’에 돌입했다. 정 후보는 ‘첨단경제’ 대 ‘삽질경제’라는 주장을 내놓으며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의 대립구도를 집중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 후보의 경제정책을 대기업 중심의 ‘특권 경제’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정 후보는 이날 구로디지털단지에서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내용을 소개했다. 그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 제목을 봐라.‘한국은 과거로 돌아가려는가. 덩치 큰 삽질꾼이 과시적 프로젝트로 한국인을 모으고 있다.’라고 보도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다시 우리가 70년대 삽질경제로 후퇴하면 세계표준에서 멀어진다. 정동영의 첨단경제가 이명박의 삽질경제를 이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역유세에서도 ‘정동영 경제’의 차별성을 거듭 강조하고 나섰다. 정 후보는 대전 으능정이 거리에서 유세를 갖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 방식으로는 안 하겠다.”고 했다. 또 “경험을 갖고, 함께 할 수 있는 전문가들과 좋은 일자리 만드는 데 매진하면 한국경제를 반드시 살릴 수 있다.”고도 했다. 정치적 고향인 전북지역을 찾아서는 역전에 대한 마지막 희망도 피력했다. 전북 익산과 장성을 방문해서는 “상대 후보는 기소됐어야 할 무자격 후보이자 시한폭탄 후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닷새면 대역전이 가능하다. 정상적 선거라면 역전하기 힘든 시간이지만, 확신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그는 주말에는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 공략에 치중할 계획이다. 정 후보측 한 관계자는 “부동층의 대다수가 모인 수도권이 최대 격전지가 될 것이다. 수도권 30·40대 공략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선택2007 D-19] 박근혜 “BBK 발표뒤 유세 계속할지 판단”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29일 이명박 후보 지원유세를 계속할 것인지 여부에 대해 “검찰이 (BBK 수사결과) 발표를 하면 그때 보고 또 판단할 일”이라고 말해 주목된다. 이회창 후보의 무소속 출마를 “정도가 아니다.”고 평가해 이명박 후보를 지원했던 그가 이같은 언급을 하자 한나라당은 술렁이는 분위기다. 수사 결과에 따라 입장을 철회할 수 있다는 뉘앙스로도 읽혀지기 때문이다. 이명박 후보측은 진의를 파악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이회창 후보측은 “물꼬가 터졌다.”며 고무된 분위기다. 여기에 곽성문 의원이 이날 탈당을 선언하면서 “추가로 탈당할 의원이 몇 분 있다.”고 말해 기름에 불을 끼얹는 형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발언은 모친인 고 육영수 여사의 82주기 생일을 맞아 열린 숭모제에서 나왔다. 검찰 수사에 대해 “BBK 문제는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다. 특히 “사실 관계를 한 점 의혹 없이 밝히고, 그에 따라 국민이 판단하실 일”이라고 덧붙였다. 비록 ‘수사발표를 보고 나서’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꿀 수도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명박 후보에게 ‘불미스러운 결과’가 나온다면 원칙과 신뢰·도덕성을 중시하는 그가 어떤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유세 중단은 물론이고, 지지 철회가 그중 하나로 거론된다. 한 핵심 측근은 “말씀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 원칙을 말한 것”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친박(親朴) 의원들의 움직임은 분주해졌다.“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게 핵심 의원의 설명이다. 그는 “수사결과 이명박 후보의 심각한 거짓말이나 불법이 드러나면 박 전 대표를 포함해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치열한 격론의 장이 열려 어떤 식으로든 의사 표시를 하게 될 거란 얘기다. 공교롭게도 곽 의원의 탈당이 겹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됐다.3∼4명이 탈당할 것이란 소문도 돈다. 곽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이명박 후보에 의한 정권교체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며 “이회창 후보를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어 “경선의 승자가 패자를 단죄하려는 오만한 태도와 승자독식을 당연시하는 독선적 자세는 자신에게 큰 좌절을 가져다 줬다.”며 ‘이 후보가 자초한 탈당’임을 주장했다. 곽 의원은 “신상에 관한 문제라 말하기 곤란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분이 몇 분 있고, 다음 주에 정치상황에 따라 몇 분이 동참하리라고 본다.”고 공개적으로 거론해 이 후보측을 긴장케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측 내부에서는 일단 검찰이 새달 4,5일쯤 어떤 결과를 내놓는지를 보자는 의견이 많다. 김무성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의 발언이 꼭 당장 ‘정도가 아닌’ 쪽(이회창 후보)으로 간다는 말은 아니지 않으냐. 추가 탈당설도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조선도공 후예 도고 서울대 초빙교수 “아직도 핏줄이 당긴다”

    조선도공 후예 도고 서울대 초빙교수 “아직도 핏줄이 당긴다”

    임진왜란 때인 1598년 전북 남원에서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400년 이상 흘렀다. 그 핏줄을 이어받은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62)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뿌리찾기에 나섰다. 그는 규슈 가고시마현 미야마 마을에 정착, 지금도 14개 가마에서 그릇을 굽고 있는 조선도공들 가운데 박씨의 후손이다. 한·일관계는 물론 뒤엉킨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던 도고 교수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할아버지 시게노리 2차대전 때 외무대신 역임 도고 교수의 할아버지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개전과 패전시 외무대신을 역임한 도고 시게노리다. 아버지도, 그도 고위외교관 출신으로 3대 외교관 집안이다. 도자기노예인 조선도공 박씨 집안 3대가 일본의 고위 외교직을 차례로 역임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시게노리는 원래 박무덕이었다. 부친 박수승 대까지 도자기노예 후예로서 모진 삶을 이어갔다. 그런데 메이지유신으로 차별이 심화됐다. 수승은 박씨란 성을 자신의 대에서 끊고 귀화했다.1882년생 시게노리가 5살 때이다. 수재 시게노리는 고향에서 중고교를 졸업한 뒤 도쿄대학에 들어가 독일문학을 공부했다. 그 뒤 외교관 시험에 합격했다. 독일 외교관시절 만난 그의 아내는 독일여자였다. 아이가 다섯 있던 그녀의 사별한 남편 게오르그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기본 설계한 건축기사다. 시게노리는 독일과 소련 대사를 역임한 뒤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인 1941년 외무상에 발탁되었다. 군부에 맞서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외무상을 그만뒀으나 종전 직전인 45년 4월 외무상에 재기용됐다. 그때 일왕에게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라고 강력 주장, 조기종전으로 일본사람의 전멸을 피하게 했다는 칭송도 받았다. 시게노리는 A급 전범으로 20년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개전 반대 노력 등을 전범재판소가 평가, 사형은 피했다. 도고 교수는 “다섯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막연한 기억밖에 없다. 어머니, 형과 함께 가끔 스가모형무소로 면회갔을 때 낭하에서 검붉은 환자복을 입고 걸어나오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시게노리는 미군병원에서 1950년 7월 숨졌다. 시게노리는 겉으로는 도공 박씨의 후손이라는 것을 숨겼지만 가보지 못한 조선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국장 시절 조선에서 최초로 외교관 시험에 합격, 일본 외무성 과장으로 부임했던 직원에게 자신도 조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토로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현재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고, 무덤은 도쿄시내 아오야마묘지에 있다. ●DJ납치, 주한미군철수와 아버지 시게노리는 외동딸만을 두었다. 딸과 결혼한 자신의 비서관 출신 사위를 호적에 양자로 입적시켜 도고 후미히코라고 하게 된다. 후미히코의 한국사랑은 유별났다.1973년 한일 각료회의 때 외무성 심의관으로 한국을 방문, 김대중납치사건을 처리했다. 문세광의 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뒤 한국을 재방문, 사건수습에 진력했다고 한다. 외무성 차관 때도 한국과 인연을 맺었으며 차관 사임 뒤 부부가 한국을 다시 방문해 판문점과 휴전선 부근의 남침용 땅굴을 보고, 한국의 안보 상황을 체험했다.77년 카터 전 미 대통령 시절에는 주미 일본대사로 카터가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하자 워싱턴 조야에서 “주한미군 철수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안보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설득, 한·일 공동외교를 폈다. 부친이 한국과 공동외교전을 폈다는 사실에 대해 도고 교수는 “거의 모르지만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본다. 아버지는 사무차관 때 중국 및 한국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으셨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참 오래 전부터(400여년전) 한국과 연결됐다.”고 독백처럼 말했다. 후미히코는 20여년 전, 부인은 10여년 전 숨졌다. ●남원의 박씨 집안 후손… 뿌리를 찾아나섰다 후미히코는 태평양전쟁 말기 노약자 소개정책에 따라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을 뒀다. 형 시게히코는 워싱턴포스트지 도쿄특파원을 하다 최근 퇴직했다. 특파원 시절에는 한국도 여러번 방문, 따뜻한 가슴으로 여러편의 기사를 작성해 신문에 실었다.“현재 퇴직후 공부중”이라고 한다. 도고 교수는 도쿄대학 출신 엘리트외교관이었다.17년간 러시아관계 일을 맡아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했다. 한국어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두마디만 할 수 있다. 두 아들(각각 34·30세)은 현재 일본의 회사에 재직중이다. 형도 아들만 둘이다. 도고 교수는 “내 핏속에는 독일인 피도 4분의1이 흐른다. 일부 조선인의 피도 흐른다.”며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도 많이 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일본이 나의 유일한 조국”이라며 단호했다. 그러나 핏줄찾기 열의는 대단하다. 최근의 일본인들에게 핏줄의식은 없지만 자신에게는 “조금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가 네덜란드 대사로 부임하기 전 고향 미야마 마을을 찾았다고 밝힐 때는 고향·핏줄을 중시하는 조선도공의 영향이 느껴졌다. 그의 조상들이 남원서 왔다는 것은 형의 ‘조부 시게노리’라는 책에 실려 있다.“한국에 있는 4개월 동안 반드시 가보고 싶다.”면서 남원과 ‘춘향전’,‘광한루’ 등이라고 적은, 소중하게 갖고 온 메모지를 보여주었다. 형 시게히코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조선시대 도자기 사발을 가보로 모신다. 자신도 미야마의 조선도공 출신 심수관씨로부터 받은 몇 개의 도자기를 도쿄 미나토구 한국대사관 근처 자택에 “소중히 보관중”이라고 소개했다. 한국과 연결된 끈들이다. ●현대사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도고 교수는 2002년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촉망받던 고위 외교관리였다.1997년 유럽아시아 국장이었다.98년 11월 조선도공들의 가고시마 정착 400주년 기념식장에 당시의 한·일 각료회의에 참석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 김종필 한국 총리 등과 동석하는 큰 영광도 누렸다. 그 해에 ‘시게노리 기념관’이 생겨나는 등 고향 미야마 마을은 온통 조선도공의 열기였다고 회상한다. 특히 양국 총리와 외무장관 등이 시게노리의 동상 등을 방문했을 때는 마을의 지도자와 한국측 참석자들이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당시를 “아주 독특하고 역사적인 장면”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그는 복잡한 일본 현대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측근인 외무성의 사토 마사루가 2차대전 뒤 일·러간 현안인 북방4개 섬 일본 반환문제를 대화로 풀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다가 2002년 구속되면서다. 그도 네덜란드대사 부임 8개월 만에 해임돼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지난해 6월 사토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까지 4년 이상 일본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조국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4개 섬 일괄반환론 틀 안에서 4개 섬의 귀속을 인정해주면 러시아가 언제까지 보유해도 무방하다는 ‘가나와 제안’을 추진한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안 되면 우선 2개 섬 반환을 확실히 하고,2개 섬은 다음에 교섭하는 단계론을 펴다 우익 학자와 시민단체들의 맹렬한 공격에 사토가 구속되고 실무 추진 당시 상사였던 그는 해임됐다. 도고 교수는 “북방영토가 일본의 영토라는 원칙은 전후에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단지 교섭 방법론이 문제였다.”며 당시에는 자신도 네덜란드에서 귀국하면 구속될 수 있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돌아 일본행을 포기하고 네덜란드에 눌러앉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망명은 저널리즘적인 표현이다. 그저 일본이 싫어서 귀국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외무성을 퇴임한 뒤 네덜란드 라이덴대학에서 2년, 미국 프린스턴대학 2년, 타이완 단코대 4개월,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학 6개월 등의 교수를 거쳤다. 지난 7월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부인과 함께 일본 도쿄에 주민등록을 해 영주키로 했다. ●“한국학생들 매우 논리적” 그는 미국에서 맺은 인연으로 이번 학기 초빙교수 자격으로 서울대에서 일주일에 3시간짜리 한 강좌를 맡고 있다. 한국 학생 20명과 외국학생 10명에게 한·일관계 등 동북아 외교 현안을 정면으로 가르친다. 도고 교수는 “한국 학생들은 감성적이지 않다. 매우 논리적이다. 이들이 한국지도부에 들어가는 날 한·일 양국관계는 매우 밝다고 본다.”고 자신했다. 학자, 시민단체 등 새로운 형태의 한·일 교류가 활발한 것도 반기고 있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 정권이 한·일 관계를 잘 해갈 것이라며 급한 국내과제를 해결, 일본 내부 반발을 해소해 정권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최근 정치·경제적으로 ‘자신감’을 가진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자신감이 북한·일본과의 관계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봤다. 대통령선거 뒤 한·일 양국이 정상간 셔틀외교를 재개하길 바랐다. 아울러 ‘일본은 없다’,‘혐한류’ 등 책이 출판돼 양국관계를 왜곡하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며 우려하기도 했다. 도고 교수는 일본이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 동북아시아 평화시대를 열어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사회가 우경화됐다지만 우경화되거나 반한사상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건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역사의 흐름상으로 한반도는 통일될 시기를 맞았다.”고 분석했다. 이춘규기자 taein@seoul.co.kr ■도고 가즈히코 교수 ▲1945년 나가노현 출생(태평양전쟁말기 노약자의 소개정책으로 인해 모친이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거주중) ▲68년 도쿄대학 교양학과 졸업 ▲68년 4월 외무성 입성 ▲72년 모스크바 일본대사관 근무(모두 3차례 대사관 근무를 포함 소련과장과 유럽아시아국장 등으로 17년간이나 러시아관계 일을 맡음) ▲91년 워싱턴 일본대사관 총괄공사 ▲98년 외무성 조약국장 ▲99년 유럽아시아 국장 ▲2001년 네덜란드대사 부임 ▲02년4월 네덜란드대사 해임 ▲02년5월 일본을 떠나 유랑 ▲07년7일 5년 만에 일본 귀국 ●최근의 저서 ‘북방영토 교섭비록’(일어) ‘일본외교 1945∼2003’(영어)
  • 李, 부산 충렬사로… 朴, 육영수 추모식에…

    李, 부산 충렬사로… 朴, 육영수 추모식에…

    광복절은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 유세에도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62주년 광복절인 15일 이명박 후보는 부산 충렬사에서, 박근혜 후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육영수 여사 33주기 추모식에 각각 참석해 나라 사랑에 대한 마음을 다잡는 ‘감성 행보’를 보였다. 전날 대구 유세에서 보인 ‘강 대 강’ 충돌 양상과는 달랐다. 전날 대구 합동연설회를 마치고 울산을 거쳐 부산에서 하룻밤을 묵은 이 후보는 이날 새벽부터 부산 자갈치시장 상인들과 만나며 ‘표심 다지기’에 나섰다. 부산은 이 캠프에서 경합우세로 분류한 지역이다. 부산 충렬사를 참배한 자리에서 이 후보는 “올해 광복절은 의미가 있다. 국가적으로 큰 전환기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후 항공편으로 서울에 도착한 이 후보는 청계천 광장에서 시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근처 음식점에서 대학생들과 ‘자유 토론회’를 가졌다. 이 후보는 검증공방 속에서도 여론 지지율 1위를 고수한 것과 관련해 “아마 다른 사람 같으면 무너졌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의혹들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으니까 자신있다.”고 강조했다. 도곡동 땅 차명보유 의혹에 대한 검찰 발표에 대해 이 후보는 “이상은씨 땅이 아닌 것 같은데 이명박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식으로 헷갈리게 발표했다.”면서 “내가 후보 안 되면 (범여권이) 정권을 연장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음모론을 제기했다. 주량이 맥주 1병인 그는 이날 500㏄ 석 잔을 비우며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놨다. 한편 박 후보는 고 육영수 여사 33주기 추도식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 국민께 부끄럽지 않은 정치인이 될 것”이라면서 “지하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성원해 주시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동생 근영씨, 지만씨 부부도 참석했다. 박 후보는 “어머니를 잃고 피묻은 옷에 눈물을 적시며 잠 못 이룬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어머니 돌아가실 때보다 나이를 더 먹었다.”면서 “어머니의 국민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고 느낀 경험이 지금 저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소외되고 고통받는 국민들을 뵐 때마다 어머니라면 어떻게 했을지 고민한다. 살아 계시면 상의라도 드릴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가운데 15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 여사가 꿈꿔왔던 대한민국을 두 분의 큰 딸이 이어가고 있다.”고 추도했다. 박 후보 캠프 관계자는 “강 전 총리가 사실상 지지선언을 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홍희경 김지훈기자 saloo@seoul.co.kr
  • 정수장학회 ‘이사진 교체 검토’ 법적근거는

    서울시교육청의 정수장학회 이사진 취임 취소와 개명 논의는 정부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의 권고 사항을 적극 이행하기로 결정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6월5일 국무회의에서 진실화해위 권고를 법적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국무조정실은 이를 이행할 처리단을 조만간 설치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이에 따라 부일장학회(현 정수장학회)의 원상회복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진실화해위는 5·16쿠데타 이후 고 김지태씨가 국가 강요에 의해 부일장학회를 헌납했다고 결정했다. 부일장학회는 5·16장학회를 거쳐 정수장학회로 이어졌다. 김씨 유족은 지난달 16일 정수장학회의 이사진을 교체하고 김씨의 아호인 자명장학회로 개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시교육청은 “법률 검토가 끝나면 공익법인의 이사 취임 취소권자인 관할 교육장에게 넘겨 최종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교육인적자원부 등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허가를 취소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사법부의 판단이 없으면 곤란하다고 결론졌다. 이에 이사 취임 승인을 취소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법인을 설립하려면 설립자가 일정한 재산을 출연해야 하는데(민법 제43조) 정수장학회는 1962년 설립 당시 국가도, 부일장학회도 합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내놓지 않아 설립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이사회에는 설립자나 그 친인척이 포함되는데(공익법인 설립·운영법 제5조) 정수장학회의 이사진은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지도·감독기관인 시교육청이 법률을 위반한 정수장학회에 시정을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이사의 취임 승인을 취소할 수 있다(공익법인 설립·운영법 제14조)고 유족은 주장했다. 지난 1월 성동교육청은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공익법인 설립·운영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고 육영수 여사가 설립한 육영재단의 이사 전원에 대해 이사 취임 승인을 취소했었다. 특별취재팀
  • “대통령 부인 역할 따라 국정운영 바뀔 수 있어”

    “대통령 부인 역할 따라 국정운영 바뀔 수 있어”

    “대통령 부인의 사회적 역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시대정신입니다.” 최근 ‘한국의 퍼스트 레이디(황금가지)’라는 제목의 책을 펴낸 조은희(한양대 겸임교수) 양성평등실현연합 여성정책연구소 대표는 9일 “대통령 부인의 역할에 따라 국정 운영과 내용이 바뀔 수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책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로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까지 대통령 부인 8명의 삶을 담고 있다. 기자 출신으로 청와대 비서관을 지내며 전·현직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지근거리에서 취재했던 그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이희호 여사를 비롯, 주변 인물들을 만나며 영부인의 인간적인 면모와 공적인 역할 등을 조명해왔다. 그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를 가장 인상적인 인물로 꼽았다.“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신학자로 남편 퇴임 이후 전직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 민주화 운동 동지들을 보호하는 대모역할을 했어요. 뛰어난 능력을 갖췄지만 정작 영부인 시절에는 시대상황 때문에 ‘조롱 안의 새’처럼 살았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는 “남편의 부족한 점을 지혜로 보완했는데 가장 비정치적이면서도 가장 정치적인 영부인”으로 평가했다. 이희호 여사에 대해서는 대통령을 만든 ‘정치적 동반자’로 평가했다.“이 여사는 학창시절 자신을 소개할 때 ‘히히호호’하며 크게 웃으며 자기 이름을 ‘희호’라고 말하는 등 재치 있고, 노래도 잘하고, 끼가 많았어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는 단독으로 외국 순방에 나선 첫 영부인이다. 짙은 화장과 차이나 칼라를 고집하는 패션의 이면에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백반증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림자 내조형’인 노태우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는 역대 영부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어록이 없는데 남편에게 ‘물태우’로 불린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전해줬다.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는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여성이었지만 아쉽게도 시대정신을 읽지 못해 요란한 영부인으로 평가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최태민목사 육영재단 개입 박근혜후보 몰랐을리 없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가 이사장으로 있던 육영재단 운영에 고 최태민 목사가 전횡을 했다는 주장이 31일 또 제기됐다.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한나라당 검증청문회 이후 세 차례 만나 취재한 박정희·육영수 숭모회장 이순희(78·여)씨는 이같이 말했다. 그는 지난 1989년 2월 최 목사 전횡으로 육영수 기념사업회 이사진이 일괄 사퇴하고 최씨 측근들이 대거 이사를 맡았다는 주장도 했다. 이는 최 목사가 고령이라 예우만 해줬을 뿐 재단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박 후보의 지난 19일 검증청문회 증언과 대비된다. 이씨는 “1989년 4∼5월쯤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을 만났더니 ‘기념사업회 직원들이 박근혜 당시 이사 부탁이라고 얘기해서 결재한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최태민씨가 박 이사 핑계를 대고 결재를 받아간 것이더라. 이호 이사장 등 기념사업회의 나머지 이사진들도 이를 알고 화가 나 지난 2월 박 이사를 제외하고 모두 사퇴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박 후보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는데 청문회에서는 딱 잡아떼더라.”고 주장했다. 박 후보측은 이에 대해 “당시 유족으로서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아 직접 일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사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이사진이 사임했던 것”이라면서 “최씨가 어떤 경위로든 결재하거나 또는 서류를 보내어 이사장과 이사진으로 하여금 결재하게 한 사실은 전혀 없었으며, 그런 방식으로 업무에 개입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았다.”고 반박했다. 특별취재팀
  • 이순희씨는 누구

    이순희씨는 1930년대 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문경 진상보통학교 교사로 있을 때의 제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80년대 초 고향 문경을 찾았다가 박 전 대통령이 교사 시절 머물던 집인 청운각도 수리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 무렵 박근혜 후보가 이사장과 이사로 각각 있던 육영재단, 육영수 기념사업회 등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육영수 기념사업회가 청운각 운영비 전액을 지원하고 운영권을 갖고 자신은 관리권을 갖는 것으로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그 뒤 부분적인 지원만 해오다 박 후보 동생인 박근영 육영재단 후임 이사장 때는 아예 관리권을 내놓게 됐다는 것이다. 최근 15년 동안 박근영 이사장에게 육영재단을 설립 취지와 목적에 맞게 운영하라고 지적해 왔다고 그는 말했다. 관할 성동교육청에도 민원을 제기해왔다고 했다. 성동교육청은 이 민원에 따라 육영재단의 실태를 파악하고 공익법인 운영과 걸맞지 않은 행적을 발견해 2001년 이사진 취임 취소 처분을 내렸다. 이에 반발한 이사진이 처분 취소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교육청의 손을 들어줬다. 특별취재팀
  • 진실화해위 ‘KAL858기 폭파’ 조사 착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고 11일 밝혔다.2005년 KAL기 사건을 조사했던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당시 안기부가 특정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무지개 공작’이란 이름으로 사건을 활용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KAL 858기 사건’은 1987년 김정일 당시 북한 노동당 비서가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바그다드발 서울행 비행기를 폭파시킨 사건으로 알려졌으나, 그동안 유족과 시민단체, 언론 등을 통해 수많은 의혹이 제기돼 왔다. 진실화해위는 “폭파범 김현희와 당시 안기부 핵심 간부들을 조사하지 않아 의혹을 풀지 못했다.”면서 “안기부의 사전인지와 개입여부,KAL 858기의 폭파·추락·실종 여부, 김현희의 북한 공작원 여부 등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또 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인 ‘8·15 저격사건’과 유신 반대발언을 했다며 중앙정보부가 가혹행위를 한 ‘오종상 긴급조치 위반사건’에 대해서도 각각 직권조사와 조사개시 결정을 내렸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육영수여사의 내조론(內助論) 사윗감론(論)

    육영수여사의 내조론(內助論) 사윗감론(論)

    가을이 익는 쾌청한 하오. 「퍼스트·레이디」 육영수여사가 대학가 나들이를 했다. 10월15일 하오 2시 중앙대학교 여학생회가 마련한 자리였다. 반가움과 친근감으로 충만한 1시간30분 동안 서로 주고받은 화제는 『여성과 내조』 그리고 사윗감… “딸이 미남을 좋아하는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군요” 『딸이 미남을 좋아하는지 어떤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왔군요. 사상이 건전하고 신체건강한 대한민국의 남성이면 누구든지 자격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남이 많은 중앙대학교 학생들 중에서 사윗감을 고를 생각이 없느냐는 남학생의 질문에 대한 대답. - 계신 곳이 너무 고고해서 때로는 외로움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으시는지? 학생대표들이 따로 마련한 다과회의 자리에서는 즉흥적인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누가 함께 있지 않대서가 아니라 때때로 문득 그와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해요. 스스로를 객관할 때 같은 때…』 묻는 얼굴의 당돌함이 이내 풀려 버리는 여린 미소를 담고 있었다. 청와대란 유일한 집의 주인이 언젠가는 한번 되고 싶다는 총학생회장 이인영군(법4)의 말에는, 『좋은 생각이어요. 택하고 있는 전공과목과도 맞는군요』 여학생회장 조범제양이 대행한 여학생의 질문이 좌담회에서는 우선권을 가졌다. - 집무에 바쁜 아버지대통령과 자녀간의 간격, 그리고 특히 따님 교육에 대해서… 『보통의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와 하듯이 저녁식탁은 자녀와 대화하는 자리로 힘쓰고 있어요. 그분이 워낙 어렵고 중요한 일을 하시니까 짧지만 충실한 시간을 갖도록 노력하죠. 딸들에게는 언니도 되어주고 친구도 되어주죠. 아직도 고삐는 엄머가 쥐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자율적으로 잘들 해줘요』 -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해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몇갑절 어렵다고 하지만 현재로는 만족할만한 상태라고 할 수 없겠어요. 좀더 여성능력이 개발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 지니신 인품과 명성을 존경합니다. 그런 인격을 갖추게 된 평소의 신조와 명언 같은 것은? 『…분에 안맞는 생활은 염두에 두지 않아 왔을 뿐이고…. 성실하기만 하면 된다는 신념은 옛날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변치 않을 거예요』 “유행에 민감한건 좋지만 대학생 지성으로 분별을” - 외국에 나가셨을 때의 내조방법은? 『나가서는 그분이나 나나 서로 바빠서 시간과 마음이 여유가 없어요. 여성은 또 시간이 더 걸리죠. 준비를 먼저 끝내고 대통령께서 오히려 도와 주시기까지 해요. 이런 일은 있어요. 저녁의 공식만찬은 늦기도 하고 기호에도 안 맞으셔서 못드시는 때가 많아 미리 마련해간 라면을 삶아 드려 본 적이 있어요. 냄새도 안나고 그분 든든해 하시고 괜찮은 방법이었거든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밖에 소분내지는 말아요』 - 여대생이 유행에 민감한 것 어떻게 보시는지? 『민감한 것은 젊음을 말하는 것 아녜요?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도를 지나친 것은 참았으면 싶죠. 대학생의 지성으로 분별한 정도를 권하고 싶어요. 지난번의 「미니」단속 때는 좀 유감스러웠어요. 스스로 재고할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의견을 나도 피력했었죠』 “내조라 자각해본적 없고 대화의 슬기찾으면 될듯” - 그토록 현명하신 내조자로서의 마음가짐은 어떤것인지? 『내 행동에서 이것이 내조라고 자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다만 생각만으로 해본 현대의 내조란 옛날부터 내려오는 아내의 본분에 더해서 창의적인 지혜를 발휘하고 민주방식의 교육을 알고 남편과 더불어 나눌 대화의 슬기를 찾는 여성이어야 할것 같아요. 대답이 이정도로 되겠어요?』 - 어머니로서 자녀에게 주시는 말은? 『이 학교 교훈이 꼭 좋겠어요. 의롭고 참되면 안될 것이 없거든요. 특별한 연구는 못했지만 민주주의의 바탕도 그런 것 아녜요?』 - 청와대의 안주인이 되신 이후 가장 흐뭇하고 가장 괴로왔던 일을- 『괴로왔던 일 너무너무 많아요. 흐뭇했던 일은 그분이 대통령에 당선되셨을 때였을 거라고 여러분은 당연히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고사리 손으로 전달해 온 낙도어린이들의 책을 고마와하는 편지, 스스로의 손으로 그려주는 아이들의 엄마 생일 「카드」, 그런 일들이 늘 흐뭇해요. 국가일이 잘되어서 대통령께서 기뻐하시는 것 물론 같이 기쁘고…. 어저께 같은 참사(14일 경서중학생 소풍사고), 얼마나 괴로운지 몰라요. 또 가장 안타까운 일의 하나는 학생들이 민주방식이 아닌 방법으로 거리로 뛰어나오는 일이죠. 내게 이야기해 주면 그 뜻을 충실하게 전해줄 약속은 지금도 할수 있어요』 - 대통령의 괴로움을 위로할 때는? 『모든 해결은 그분이 하시니까 마음을 상해 드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뿐이죠. 도움이 됐는지 모르지만 나쁜말 피하고 좋은 이야기 골라서 열심히 해보죠』 “견해차 생기면 양보해도 옳다고 믿으면 지구력을” - 사적인 생활에서 견해의 차이가 생기면 어느분이 먼저 양보하시는지?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체로 여성이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야 할 것 같아요. 나도 그래요. 하지만 부러지지 않는 정도의 지구력을 가지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뜻은 관철하는 것도 아내의 지혜예요. 남성은 보통 자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여성이 맞서는 것을 꺾기 위해 고집을 피우기도 하니까요』 하오 3시30분 좌담회를 끝내고 총장실에 마련한 다과회로 들어갔다. 관상을 할 줄 아노라고 자처하는 한 남학생이 『가까이서 뵈니까 무척 복스린 얼굴이십니다』하자 『그건 틀렸어요. 내가 어디가 그래요?』 『임영신 개인과 임영신 산하에 있는 2천2백만(교련 7백만, 한국부인회 1천5백만)을 다 기울여 찬양하는 대통령이지만 특혜는 한번도 받은 적 없다』면서 맞아준 노총장의 영접을 받으며 개교 축하의 「케이크」를 잘랐다. 여학생들이 마련한 선물은 24인용 「테이블·커버」. 청와대 살림에 꼭 필요하다는 정보를 알아내어 여학생들이 직접 수놓아 만든 것. <송정숙(宋貞淑) 기자> [선데이서울 70년 10월 25일호 제3권 43호 통권 제 108호]
  • [한나라 경선레이스 점화] 李·朴 사활 건 승부만 남았다

    [한나라 경선레이스 점화] 李·朴 사활 건 승부만 남았다

    ‘드디어 루비콘강을 건넜다. 오는 12월19일 대선으로 가는 샛길은 없다. 사활을 건 승부만 있을 뿐이다.’한나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는 11일 대선 경선 후보로 등록,70일간의 경선 레이스에 들어갔다. 이제 현행 선거법에 따라 후보로 등록하면 다른 정당의 후보로 나서거나 독자 출마가 불가능하다.8월19일 경선에서 명운을 건 외길 승부를 펼쳐야 한다. 원희룡·고진화 의원은 12일, 홍준표 의원은 마감일인 13일 후보 등록을 하고 경선레이스에 공식 가세한다. ■이명박 “지도자 못될만큼 살지 않아” 이 전 시장의 출마 선언문은 박 전 대표와 달랐다. 박 전 대표가 대통령의 딸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유산이자 부담인 점을 장점으로 활용하려고 접근한 반면 이 전 시장의 선언문에는 이렇다 할 인간적인 풍모나 체취를 담지 않았다. 이 후보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당 안팎의 도덕적 시비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박하는 데 오히려 초점을 맞췄다.“저는 살면서 실수와 잘못도 있었겠지만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지 못할 만큼의 도덕적 기준을 갖고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거의 포기할 뻔했지만 야간인 포항 동지상고에 수석 합격, 돈 한푼 내지 않고 고교 생활을 무사히 마쳤다. 이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대학 진학의 꿈을 잃지 않아 고려대 상대에 합격했다. 학생운동으로 복역한 전과 때문에 취직이 어렵게 되자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편지로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현대건설에 입사해 29세에 이사, 35세에 현대건설의 사장이 됐고 이후 최장수 CEO의 역사를 쓰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를 일궈냈다. 그러나 ‘정치인 이명박’은 만만치 않았다.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정치 1번지’ 종로구에 출마해 이종찬씨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1998년에 다시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 최병렬씨와 경쟁했지만 선거법 재판으로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2002년 삼수만에 서울시장으로 재기해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 체제 개편으로 강력한, 추진력있는 정치인 이미지를 굳혔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박근혜 “내겐 오직 대한민국만 있다” 박 전 대표는 ‘대통령의 딸’로 살아온 얘기로 출마 선언문을 풀어갔다. 먼저 “철들기 시작할 무렵, 밥상에서 가난한 국민의 모습을 보면서 목이 메어 밥을 넘기지 못하시는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고 말했다. 이어 “평생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시다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육영수 여사)의 삶을 대신하여,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며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10년 전 IMF(국제통화기금) 위기가 터졌을 때, 국민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해 제 한 몸을 아낌없이 바치겠다고 정치에 뛰어들었다.”면서 “이제 다 쓰러져가는 한나라당에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호소 드렸던 그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소신과 정치 철학에 대해서는 “일평생 저의 삶을 견인해 온 것은 바로 ‘정직과 신뢰’였다.”면서 “단 한 번도 ‘국민과의 약속’을 가벼이 생각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박 전 대표에게 부친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치적 자산이자 부담이기도 하다. 박 전 대표는 1952년 군인이던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 사이의 2녀 1남 중 장녀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청와대에 입성한 것은 11살.1974년 피습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뒤를 이어 1979년 10·26 때 아버지를 잃을 때까지 퍼스트 레이디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이때부터 가슴에는 조국, 민족, 국가라는 단어들이 깊이 각인됐다고 한다. 지난해 피습을 당하고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한 ‘내공’을 쌓은 시절이다.“저에겐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없다. 저에겐 오직 대한민국만 있다.”고 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李 국정운영 방향 “청계천 살렸듯이 경제 살릴것” “청계천을 살려냈듯이 대한민국 경제도 살려내겠습니다.” 이명박 전 시장은 향후 5년간 국정운영 포부를 이렇게 밝혔다. 경제 성장을 요체로 하고 있다. 이 후보는 “당이 나서 국정을 바로 세우고 헌정 질서를 지켜내는 데 앞장서야 한다.”며 “잃어버린 10년을 끝내고 대한민국 선진화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려는 모든 세력의 지지를 호소한다.”고 말했다. 이어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선진화세력, 미래지향적 실용주의 세력이 모두 모여야 한다.”며 “이를 위해 한나라당뿐 아니라 뉴라이트와 중도·보수 시민세력, 정치세력을 포괄하는 ‘대한민국 선진화 추진회의’(가칭) 구성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그는 “청계천을 살려냈듯 대한민국 경제도 살리겠다.”며 “‘대한민국747 비전’(7% 경제성장·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세계 7대 강국)을 성공시켜 대한민국을 세계 일류국가의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고 공약했다. 특히 주요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와 관련, 이 후보는 “중도하차 가능성은 완벽하게 없다.”며 “수질을 좋게 하고 수량을 보존하는 운하를 계속 국내외 전문가와 협의,3만∼4만달러 경제적 효과의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朴 국정운영 방향 “나라 근본 세워서 선진국으로” “나라의 근본부터 바로 세워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진국을 만들겠습니다.” 박 전 대표는 ‘원칙을 통한 선진한국’을 향후 5년간 국정운영 목표로 제시했다. 박 전 대표는 “아버지께서 못다한 두가지를 꼭 하려 한다.”며 “하나는 대한민국의 선진화이며, 또 하나는 그 시절 고통을 받았던 분들에게 보답하는 것”이라며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나라를 잘 살게 하는 것만이 보답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작은 정부, 큰 시장의 철학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며 “공교육을 살려 사교육비 문제를 해결하고 가난의 대물림을 막겠다.”고 다짐했다. 또 “원칙있는 대북정책으로 북한 핵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것”이라며 “대한민국을 외교강국으로 만들어 치열한 경제경쟁, 국가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대처리즘 공약’에 따른 복지예산 감축지적에 대해선 “대처리즘이 경제를 살리고 번영을 구가하는데 지금도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며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세금 감면과 규제 개혁을 통해 작은 정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제가 추구한 바와 같지만 제가 복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李 검증 역공 논리 “朴·범여권서 ‘李죽이기’ 대연정” 이 전 시장 측은 검증 공세에 대해 “박 전 대표와 범여권의 ‘이명박 죽이기’ 대연정”이라고 역공을 펴고 나섰다. 박 전 대표측이 제기한 각종 의혹들이 ‘여권발(發)’이 아니냐는 의심을 드러냈다. 이 전 시장은 경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나쁜 상상으로 그림을 그려놓고 아니면 말고식의 폭로를 하면서 ‘없는 땅’ ‘없는 재산’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과연 같은 식구가 할 수 있는 짓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박 전 대표 측에 직격탄을 날렸다. 진수희 캠프 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이명박 후보를 음해하려는 일련의 작업들을 여권에서 제조, 유통시키는 역할은 박근혜 캠프 핵심 의원들이 도맡아 하고 있다.”며 “이적 행위를 해서라도 경선에 승리하겠다는 것이 ‘박근혜식 원칙’인가.”라며 거들었다. 이 전 시장 측이 검증 공방에 대해 전에 없이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은 각종 의혹 제기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 시장은 한때 50%를 넘는 지지율을 보이다, 지난달 박 전 대표 측의 검증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부터 지지율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이 전 시장과 20% 이상 격차를 벌렸던 박 전 대표와의 격차가 10%대까지 좁혀졌고 일부 조사에서는 한 자릿수대로 바짝 좁혀진 것으로 나타났다. 기획본부장을 맡고 있는 정두언 의원은 “박영선 의원이 열린우리당을 대표해서 지지율 1위 후보 죽이기에 나선 것”이라며 “최근 상황을 보면 범여권과 박 전 대표 진영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朴 검증 역공 논리 “국민 알권리 李측서 본질 호도” 박 전 대표는 대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검증 공방과 관련,“자꾸 공방 정국으로 몰고가려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이 전 시장 측에서 검증공세를 네거티브 전략으로 몰아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실체 없는 얘기를 하면 네거티브가 되겠지만 실체가 있는 것은 국민이 확실히 알 권리가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박 전 대표는 “(검증 문제는)캠프간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의구심에 대해 국민에게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전 시장측이 ‘여권과의 연계 의혹설’을 제기하며 역공을 가한 데 대해 이혜훈 공동대변인인은 “말도 안 된다.”고 일축했다. 박 전 대표 측은 이날 추가적인 의혹 제기는 하지 않고 한발 빼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이 전 시장에 대한 의혹 제기가 이슈화에 성공했고, 이날 경선 후보 등록을 신호로 여권에서도 파상 공세를 퍼붓기 시작하면서 일단 사태를 관망하겠다는 분위기다. 캠프의 한 관계자는 “정책토론회와 검증을 통해 역전을 꾀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여론조사에서 미묘한 변화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고, 철저한 검증이 이뤄진다면 이 전 시장의 ‘거품’도 빠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박 전 대표측은 ‘6·7월 검증 총공세’를 통해 반전의 발판을 마련, 내달 열리는 후보 검증 청문회까지 승부를 걸겠다는 계획이다. 캠프의 이정현 공보특보는 “외부에서 계속 새로운 의혹이 나오고 있다. 검증위가 새롭게 제기되는 여러 의혹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리라 믿는다.”고 기대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李·朴, 경선 등록부터 ‘신경전’ 한나라당 경선 후보 접수를 둘러싼 이­박 진영의 장외 신경전도 뜨거웠다. 누가 먼저 경선 후보로 등록하느냐에 적잖은 관심이 쏠린 가운데 박근혜 전 대표가 한발 앞서 후보로 등록했다. 박 전 대표는 선거대책위 구성을 공식 발표한 데 이어 이날 후보 등록 1호를 기록한 뒤 공식 출마 선언을 하는 등 세몰이를 가속화했다. 그러자 지난달 10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이명박 전 시장도 후보 등록 후 기자회견을 갖고 출사표를 던졌다. 박 전 대표측 유정복 비서실장은 오전 9시에 접수가 시작되자마자 후보 등록을 했다. 박 전 대표는 30여명의 국회의원과 캠프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사 주변에는 아침 일찍부터 박사모 회원과 박 전 대표 지지자 등 2000여명이 모여 박 전 대표를 응원했다. 이 전 시장은 오전 11시에 백성운 캠프 종합행정실장을 통해 후보 등록을 하고 오후 2시에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홍문표·이윤성 의원 등 30여명의 국회의원과 100여명의 취재진이 몰린 가운데 이 전 시장은 ‘출마선언문’을 읽으며 결의를 다졌다. 홍준표·원희룡·고진화 의원 등은 12∼13일 각각 후보 등록을 한 뒤 출마 선언을 할 예정이다. 한상우기자 cacao@seoul.co.kr ■朴 “아버지 시대 희생자에 죄송” 박근혜 전 대표는 ‘대국민 선언문’에서 ‘과거와의 화해’ 의지를 천명했다. 먼저 “아버지 시대에 불행한 일로 희생과 고초를 겪은 분들과 그 가족분들에게 항상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그 시절에 불행을 당한 분들께 사과를 드리는 것은 진심과 충정을 담은 말이다. 진실하게 다가갈 때 마음을 열고 화해가 이뤄질 수 있다.”고 사과했다.“산업화, 민주화 세력이 손을 잡아야 경제도 살리고 선진한국 건설도 이룰 수 있다. 국민 모두가 화합해서 하나가 되는 100%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다.”는 이유도 댔다. 캠프 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그동안에도 사과의 뜻을 내비쳐 왔지만 공개적으로 진심어린 사과의 마음을 표시한 것은 선친의 부채를 짊어진 국민 대화합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표를 의식한 정치적 제스처’라는 시각에는 “정치하면서 단 한 번도 표를 의식해서 거짓을 말하거나 거짓된 행동을 한 적이 없다.”면서 “국민들이 더 잘 아실 것”이라고 일축했다. 열린우리당 유은혜 대변인은 “진심이라면 참으로 다행스럽고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위선과 이율배반의 전형”이라고 깎아내렸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세계적 명성얻은 큰무당 김금화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세계적 명성얻은 큰무당 김금화씨

    1983년 10월 아웅산테러사건이 발생하기 1년여 전, 그러니까 1982년 봄 어느날이다. 한 전직 장관(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부인이 지인 소개로 용하다는 무당을 서울에서 만났다. 부인의 남편은 다름아닌 외무장관 후보로 하마평에 올라 있었다. 무당은 부인에게 “염려말라. 가만히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면서 말미에 “요즘 들어 국상(國喪)이 자주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원혼을 풀어야 한다.”는 말을 뱉었다. 며칠 후 무당의 말대로 전직 장관 부인 등을 포함, 몇몇 지인들이 서울시내 모처에 모여 고 박 전 대통령 부부의 원혼을 달래는 굿을 조용히 치렀다.(이때 지난해 작고한 사진작가 김수남씨가 무당옷을 빌려 입고 유일하게 외부인으로 참석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무당은 전직 장관 부인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장관 지명에서 자신의 남편은 탈락되고 대신 이범석씨가 신임 외무장관이 됐다는 것이었다. 목소리에는 약간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무당은 “변명 같지만 전화위복이 될 테니 두고 보라.”고 위로했다. 해가 바뀌어 1983년 9월. 무당은 매년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생일날(음력 8월18일)에 주위 친한 사람들을 일부 초청, 점을 봤다. 그런데 이날따라 뭔가 이상했다. 무당은 “버마(미얀마) 가면 안 되는데, 버마 가면 정말 안 되는데!”라고 하며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뱉어냈다. 한달 뒤인 10월7일 밤, 무당은 대통령이 죽는 꿈을 꾸었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건 개꿈이야, 개꿈!”하면서 남쪽을 향해 침을 퉤퉤 내뱉었다. 공교롭게도 이튿날 아침 아웅산테러라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대통령은 위기일발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이범석 외무장관을 포함,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수행원 17명이 사망했다. 인간의 운명을 ‘재천’이라고 할 때 몇 가지 흥미로운 상황이 떠올려진다. 첫째, 당초 전직 장관 부인의 뜻대로 남편이 외무장관에 발탁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무당의 말대로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둘째, 무당이 ‘버마’를 운운한 점, 또 ‘대통령꿈’을 꾸고 벌떡 일어나 미얀마가 있는 남쪽을 향해 침을 뱉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어쨌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운 좋게도 살아 돌아왔다. 운명의 조화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역사적인 사건을 앞두고 신(神)의 전주곡 같은 기묘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특히 삶과 죽음이 피범벅이 된 끔찍한 사건일수록 그 뒷얘기는 더욱 신기하게 다가온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살아온 60년 이 시대의 큰무당, 인간문화재 만신 김금화(金錦花·77)는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뿌린다. 작두 타며 신을 만나는 그야말로 이승과 저승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뭔가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는 17세 때에 처음 신과 만났으니 올해가 꼭 60년째가 된다. 한때는 혹세무민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설움도 많이 받았지만 이제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한국인’이 됐다. 그가 세계 여러 나라에 갈 때마다 단연 ‘인기캡’으로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국내에서 서해안풍어제(무형문화재82-2호) 굿판을 벌일 때도 많은 외국팬들이 일부러 찾아올 정도다. 그는 2년 전 강화도 북쪽 해안가에 3000여평의 부지를 마련해 무속체험장인 ‘금화당’ 간판(글씨는 ‘도올’이 썼다.)을 내걸었다. 서해안풍어제 굿판을 벌이기에도 좋고 고향인 황해도 연백땅을 바라보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서울 이문동의 서해안풍어제연구소와 금화당을 오가며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신과 가까이에서 ‘경계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주 이문동 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소박한 한복차림에 활짝 웃으면서 반긴다. 평범하고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금화당’ 얘기를 먼저 꺼냈더니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뉴욕·워싱턴·LA 공연을 비롯, 유럽 각지의 해외공연을 수십차례 다니면서 무속 체험장 같은 공간을 꼭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여러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줘 뜻을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외국으로도 소문이 퍼져 최근에는 세계 연극평론가 70여명, 외국 신문사 기자, 천주교 수녀들이 다녀갔다고 귀띔했다. ●무속박물관이 내 꿈 아울러 여력이 되면 무속박물관을 세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부연했다. 그는 200여년된 탱화 등 우리 무속사 연구에 가치가 있는 귀중한 사료들을 다수 소장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31년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의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자동생을 본다는 뜻에서 처음에는 ‘넘새’라는 이름을 가졌다. 나이 다섯에 남동생이 태어나자 이름을 ‘금화’라 했다. 그의 신기는 어릴 적부터 신통방통했다. 열살 무렵에는 아이들과 놀면서 시퍼런 낫을 맨발로 타고 올라가 춤을 췄다. 또 어느 집에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고, 임신한 사람을 보면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맞혔다. 열일곱살되던 정월 대보름날 밤이었다. 시름시름 무병을 앓던 그가 달맞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개울을 건너려 하자 무수한 별들이 머리 위에 쏟아져내렸다. 한참 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이때부터 ‘신의 딸’이 됐다. 그러자 외할머니가 신 어머니가 돼 금화의 허주굿(온갖 잡신을 몰아주는 굿)을 해주었다. 금화는 이어 내림굿을 하면서 작두를 탔다. 열아홉살되던, 즉 6·25직전 어느날었다. 금화는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뚝뚝 떨어지고 달구지가 피묻은 옷가지를 싣고 가는 광경을 보게 된다. 물론 신의 계시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무당을 반동분자로 취급했던 터였다. 나라에 큰 난리가 날 것을 안 금화는 숨어다녔으나 자주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인들이 찾아와 피란간 사람들의 명단을 대라며 윽박지르더군요. 반동으로 몰리자 마을 원두막에 앉아 혼자 인공기를 만들며 위기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9·28수복 직후에는 남한 군인들이 와서 빨갱이 노릇한 사람의 명단을 대라고 하더군요.‘너는 무당이니 다 알지 않느냐.’고 하면서 목에 총을 들이대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지요.” ●올해 일어날 일은 비밀 결국 우여곡절을 겪으며 난리 중에 인천으로 피란오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질 때에는 굿을 할 수가 없어 많이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석, 우수상·공로상·개인상·단체상 등을 싹쓸이하면서 당당한 민속예술인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장의 초청공연이 계기가 됐다. 이때 작두 타는 모습 등을 비롯, 한국의 토속 샤머니즘을 선보여 많은 관중을 불러모았고 이후 매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해외공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올해 큰 사건은 없느냐고 하자 “그건 천기누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회가 너무 빠르다. 순리대로 가야 하며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9월 금화당에서 무녀인생 60년을 맞아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큰 굿판을 벌일 예정이니 그때 구경 오라고 당부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1년 황해도 연백 출생. ▲46년 외할머니에게 허침굿(허주굿), 내림굿, 솟을굿을 받음. 방수덕·권만신에게 대덕굿, 철물이굿, 배연신굿, 대동굿 등 전수. ▲82년 한·미수교100주년기념사업 문화사절단으로 방미. ▲84년 미국 하와이주 인간학연구위원회 및 하와이대재단 초청공연, ▲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서해안배연신굿·대동굿 기능보유자 지정. ▲95년 김금화대동굿(연강홀) ▲2000년 서해안풍어제보존회 이사장
  • 진실화해위 “부일장학회 中情서 강탈”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9일 전원위원회를 열어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 재산 등 강제헌납 의혹사건’에 대해 강압에 의한 재산 헌납이라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면서 “국가는 재산권을 침해한 점을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강탈한 재산을 반환하는 한편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화해를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중앙정보부의 수사권은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범죄에만 한정돼 있는데 이와 상관없는 김지태씨를 구속 수사한 것은 권한 남용에 해당된다.”면서 “구속 재판을 받고 있어 궁박한 처지에 있는 김씨에게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토지 10여만평과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MBC), 부산문화방송 등 언론 3사를 국가에 헌납할 것을 강요한 것은 개인의 의사결정권 및 재산침해 행위”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헌납 토지에 대해서는 “부일장학회에 반환하고 반환이 어려울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하라.”면서 “부일장학회가 이미 해체된 만큼 공익목적 재단법인을 설립해 그 재단에 돌려주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 이어 “헌납 주식도 돌려줘야 하는데 정수장학회가 이 주식을 국가에 반환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김지태씨 유족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또 “정수장학회가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 운영되고, 언론사 주식을 정수재단의 경비 조달 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공익성에 반하기 때문에 국가는 이를 시정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진실화해위는 “강탈 당한 언론 3사는 단순한 재산권 침해에 머물지 않고 언론기관의 존립 근거에 속하는 공공성 또는 중립성 등 언론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정수장학회는 현재 MBC 주식 30%, 부산일보사 주식 100%를 소유하고 있다. 부일장학회 설립자 고 김지태씨의 차남 영우(65)씨는 지난해 1월27일 “1962년 박정희 정권이 아버지를 국내재산 도피방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한 뒤 처벌을 면제해 주는 조건으로 부일장학회와 아버지 소유의 땅 10만평, 부산일보 등 언론 3사를 강제로 헌납시켰다.”며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용어클릭 ●부일장학회 1958년 11월 부산의 대표적인 기업인이었던 김지태(전 삼화고무 사장)씨가 토지 10만 147평을 기본 재산으로 설립한 장학회다.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몰수돼 5·16장학회로 바뀌었다.82년 박정희 대통령의 ‘정’과 육영수 여사의 ‘수’를 따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 이사장으로 있었으며 최필립씨가 현재 이사장이다.
  • 朴, 소록도서 ‘한센가족 보듬기’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17일 소록도에서 열린 ‘소록도병원 개원 91주년 전국 한센가족의 날’ 행사에 참석했다. 특히 박 전 대표의 이날 소록도 방문은 ‘장애인 낙태’ 발언 논란으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과 맞물려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는 소록도로 가는 배 위에서 기자들과 만나 “감회가 깊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곳 복지관에 2000만원을 기증하셨는데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유업이 돼버렸다.”면서 “복지관 완공식을 1974년 12월18일 했는데 어머니는 안타깝게 여기에 참석하지 못하셨다.”며 소감을 밝혔다. 박 전 대표는 고 육영수 여사 공적비와 육 여사가 세운 양지회관을 둘러본 뒤 축사를 통해 “한센병은 병 자체보다는 잘못된 편견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한센인은 국민기초생활보호법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장애인 등록도 안 된다. 한센인 2세의 교육문제와 정착촌 주민 보건의료문제 등 한센인 여러분이 필요로 하고 아파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소록도 방문에 이어 순천으로 이동, 지역 여론주도층 모임인 ‘섬진강 포럼’에서 특강을 갖고 ‘화합’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영호남을 아우르며 바다로 흘러가는 섬진강처럼 진정한 국민화합이 필요하다.”며 “이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모두 가슴을 열고 손을 잡아 선진화와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다. 우리는 호남도 아니고, 영남도 아니고, 대한민국”이라고 강조했다.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딸자랑] 홍병식씨 막내딸 미숙양

    『이 애는 걱정을 안 끼쳐주는 아입니다』-유실물(遺失物)찾기봉사「센터」대표 홍병식(洪秉寔)씨(65)가 막내따님 미숙(美淑)양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하는 첫마디. 건강한데다가 공부도 잘 하고 무엇이든 시키면 척척 해내는 솜씨이니 단연 최고가 아니냐는 것. 피아노 잘치는 미술학도 만능 스포츠 선수이기도 집안일 잘 돌보아 걱정 끼친일 없어 서울大 미대(美大) 서양화과 4학년에 재학중인 미술학도 홍양은 1남6녀중 막내. 오빠 언니들이 모두 결혼해서 따로 살고 있기 때문에 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 하는 재롱동이(?)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해방전에 낳았는데 얘만 해방 후에 얻었읍니다. 막 낳아서 이름을 지으려고 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뭐라 말 할 수 없이 예쁘잖아요? 그래서 언니들이 이름자 돌림인「숙」위에「아름다울 미」자를 얹어 주었죠』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예쁜 따님은 이름 그대로 아름답고 정숙하게 자라 귀엽고 마음이 착한 미대생(美大生)이 되었다고. 아무래도「미」와 인연이 많은 모양이라고 아버지는 싱글벙글이다. 『자식에 대한 걱정이란 건강과 공부가 아니겠어요? 그런 뜻에서 이 애는 부모의 속을 안 썩이는 아이죠. 별탈 없이 건강하게 자랐고, 또 공부도 잘 해서 소위 1류학교라는 데만 척척 합격했으니 말이에요』 67년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 집안 식구들은 모두 좀 쉬운 데를 골라서 가라고 했지만 한사코 본인이 고집, 서울대 미대를 지망했다는 이야기. 『발표 하루 전 날이었어요. 아는 분을 통해서 알아보았더니 아, 글쎄 떨어졌다는 거예요. 하늘이 캄캄해지는 것 같더군요. 어떻게 얘한테「쇼크」를 주지 않을까 궁리하면서 넌지시 물어 보았죠. 너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이에요. 그랬더니 절대로 자기는 떨어질리가 없다고 자신만만이에요』 본인의 자신대로 발표를 보니 당당히 홍양의 이름이 들어있더라고. 미리 알아본 것이 잘못된 정보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합격한 홍양이 서울대학교 여학생회 주최 신입생 환영「페스티벌」에서 육영수(陸英修)여사가 준 시계를 타오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고. 행운권 추첨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1등 상을 차지한 것.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보통 집안 일은 통 모르고 그저 예술입네 하고 체하기가 십상인데 얘는 집안 일도 잘 할줄 알아요. 시키면 무엇이든 할 줄 알죠. 그리고 다방면에 취미가 많은데다가 모두 극성일만큼 열심이에요』 운동이라면 무엇이든 할 줄 안다는 만능 운동선수이기도 한 홍양이 요즈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테니스」.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우표도 상당히 모은적이 있고 또「피아노」솜씨도「아마추어」의 경지를 넘어선 실력이라고. 사위감에 대해서는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생각을 않고 있지만 본인만 좋다면 아버지로서 무조건 OK하겠다고. 지금까지 자식들 결혼을 시킬 때 모두 그런 식으로 본인의 의사에 맡겨 왔다는데 똑똑한 따님이 골라 잡는 신랑감일 테니 부모로서 무슨 반대할 말이 있겠느냐는 것. 이번 여름에는 학교의 교수님들과 함께 홍도와 경주 문무왕릉을 답사하고 왔다는 홍양은 졸업하면 둘째 언니가 있는 미국에 건너가서 그림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꿈이란다. 서울 서대문구 부암동에서 엄마 朴南順(63)여사와 함께 세식구가 단란하게 살고 있다. [선데이서울 70년 8월 23일호 제3권 34호 통권 제 99호]
  • 미식가 사로잡은 곰탕집 하동관 ‘68년 을지로시대’ 접는다

    미식가 사로잡은 곰탕집 하동관 ‘68년 을지로시대’ 접는다

    구수한 국물로 지난 68년간 미식가들의 혀끝을 중독시켜온 서울 중구 을지로의 곰탕 전문점 ‘하동관’ 건물이 철거된다. 역대 대통령들은 물론 유명 인사들이 즐겨 찾던 이 허름한 건물은 중구 수하동 일대 재개발로 오는 6월 초 철거될 예정이다. 하동관은 인기 만화가 허영만씨의 ‘식객’에 소개되면서 최근에는 젊은이들 사이에도 이름이 알려졌다. ●맏며느리·둘째아들이 가업 이어 철거를 앞두고 12일 찾은 하동관은 여전히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밀려들었다. 재개발을 앞두고 일대가 대부분 철거되고 곳곳이 펜스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스산한 바깥 풍경과는 달리 하동관의 맛은 여전했다. “내포 둘, 맛보기, 깍국요.” 암호와 같은 구호가 오가자 넉넉한 놋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곰탕과 다소 야박해 보이는 깍두기 한 접시가 ‘식객’들을 맞이했다. ‘내포’는 내장을 많이 넣어 달라는 말이고,‘맛보기’는 밥의 양을 줄여달라는 뜻이며,‘깍국’은 깍두기 국물을 곰탕에 부어달라는 의미다. 날계란을 놋그릇에 톡톡 쳐서 풀어먹는 맛은 하동관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특별 옵션이다. 하동관은 창업자인 고 김용택씨가 1939년 이 자리에 문을 연 뒤 김씨와 친분이 두터웠던 고 장낙항씨가 1964년 인수해 줄곧 수하동 26번지인 이 자리를 지켜왔다. 고 장낙항씨의 맏며느리인 김희영(70)씨는 가게를 우선 명동 외환은행 뒤편으로 옮길 계획이다. 철거 이전에 재개업 준비를 마쳐 단 하루도 손님들이 헛걸음하지 않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이와 별도로 장낙항씨의 둘째 아들인 석철(68)씨는 강남구 대치동에 분점을 낼 계획이어서 강남·북에서 모두 하동관을 만날 수 있을 전망이다. 장낙항씨의 부인이자 하동관의 명성을 이끌어낸 고 홍창록씨로부터 맛의 비밀을 전수받은 맏며느리 김씨는 “수십년 동안 지켜온 이 자리를 떠나는 마음을 서운하다는 정도로 표현할 순 없다.”면서 “등받이가 없는 나무의자를 쓰다가 뒤로 넘어지는 손님들이 많아져 등받이가 있는 걸로 바꾼 것 말고는 탁자 하나까지 예전 그대로”라며 아쉬워했다. ●단골들 “이 맛에 중독… 쫓아가야지 별 수 있나” 그는 “수십년 단골들은 눈 감고도 찾아올 정도인데 옛날 분위기와 맛을 지키기 때문에 하동관을 좋아하는 것”이라면서 “새 가게로 갔다가 재개발이 끝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말했다. 장소가 바뀌면 손님들이 ‘하동관 맛’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는 “주방장이 아닌 내가 40년 동안 주방을 지켰어. 사람과 재료, 식기까지 그대로 옮기니 걱정 안 해도 돼요. 기자 양반”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동관의 역사만큼이나 거쳐간 손님들의 면면도 굵직굵직하다. 역대 대통령 중 하동관 곰탕 맛을 보지 않은 이는 거의 없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은 초도 순시를 나갈 때마다 점심으로 배달시켜 먹었고, 육영수 여사도 여러 차례 찾았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뒤 온 적은 없지만 이전에 몇 차례 찾았다고 한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손자들까지 3대에 걸친 단골이고, 이해찬 전 국무총리도 하동관 마니아다.‘장군의 아들’ 김두한씨는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도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60여년 동안 쌓아온 신뢰 덕분에 광우병 파동에도 끄떡 없었다는 하동관의 수하동 시대는 이제 역사 뒤로 사라진다. 하지만 장소는 옮겨도 하동관의 깊은 맛은 이어질 것 같다. 20여년째 단골인 한 할아버지는 “(하동관을) 옮긴다면 정말 서운하지.”라면서도 “이미 이 맛에 중독돼서 쫓아가야지. 별 수 있나.”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글 사진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대선후보 취약점 보완 분주] 이명박 ‘불심 껴안기’ 박차

    한나라당 유력 대권주자 가운데 한명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올들어 부쩍 ‘불심잡기’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이 전 시장은 그동안 시장 재직 시절 ‘서울 봉헌’ 발언으로 냉담해진 불심을 끌어안는데 주력해왔 다. 최근 당내 ‘불교계의 대리인’격인 주호영 의원을 캠프 비서실장으로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이 전 시장은 1일 경북 김천의 직지사를 방문, 불교계의 큰 스님인 녹원 스님과 배석자 없이 1시간 가량 환담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 녹원 스님은 이 전 시장에게 “여름에 청계천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봤는데 세계에서 이렇게 좋은 곳을 보지 못했다.”면서 “한반도 대운하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청계천을 보고 나는 믿는다. 깔끔하게 잘 해달라.”라며 덕담을 건넸다. 직지사 주지인 성옹 스님도 ”앞으로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고자 하는데 그 뜻을 꼭 이루기 바란다.”고 말했다. 직지사는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을 모신 사찰이라는 점에서 이 전 시장의 이날 방문은 정치적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당내 경쟁자인 박근혜 전 대표의 ‘텃밭’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일보 여론조사에서 이 전 시장은 불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47.8%로 박 전 대표(22.4%)에 크게 앞선 것도 이같은 자신감을 뒷받침한 것같다.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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