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육군 일병
    2026-03-31
    검색기록 지우기
  • 직선거리
    2026-03-31
    검색기록 지우기
  • 기부채납
    2026-03-31
    검색기록 지우기
  • 한화에너지
    2026-03-31
    검색기록 지우기
  • 누리꾼들
    2026-03-3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043
  • 뇌사 군인 이시우 일병의 부친 6명에 기증

    뇌사 판정을 받은 20대 군 장병의 장기를 가족들이 난치병 환자 6명에게 기증해 감동을 주고 있다. 지난 1일 수원 아주대학병원은 가족들의 희망에 따라 난치병 환자 6명에게 뇌사상태에 빠진 이시우(李施雨·20) 일병의 간,신장,췌장 등 장기를 이식했다. 동명정보대학교 정보공학부 2학년에 재학중이던 고(故) 이 일병은 지난 2월에 군에 입대한 뒤 5월부터 육군철벽부대에서 열상감시장비(TOD)운영요원으로 일하다 뇌내출혈로 국군수도병원에 입원,아주대학병원,삼성의료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고 이 일병의 부친 이철호(李哲浩·47·운전학원강사·부산시 남구 대연동)씨는 지난달 31일 국군수도병원 관계자를 만나,이 일병의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다.이에 따라 국군수도병원측은 1일 아주대학병원으로 이 일병을 옮겼으며,아주대학병원측에서는 이 일병에게 뇌사판정을 내렸다. 부친 이철호씨는 “아들이 군생활을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가슴이 아프지만,아들의 장기로 불치병 환자들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면 값진 일이 될것이라 생각해 기증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고 이 일병의 유해는 3일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오석영기자 palbati@
  • 군초소서 총기사고 근무사병 2명 사망

    3일 오전 11시40분∼낮 12시 사이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육군 모부대에서 총기사고로 사병 2명이 숨졌다. 군당국에 따르면 사천면 방동리 사천해수욕장 인근 해안초소에서 해안 경계근무중이던 최모(21) 상병과 박모(21) 일병이 K-2소총 실탄을 맞고 숨져 있는 것을 오후 1시쯤 근무 교대자가 발견했다. 군당국은 사망 사병을 국군 강릉병원으로 옮기는 한편 인근 주민들이 총성2발이 울린 뒤 잠시 후 1발이 더 들렸다고 말한 것과 총상 형태 등을 확인하며 자살 여부 등 정확한 총기사고 원인을 조사중이다.최 상병과 박 일병은 각각 지난해 3월13일과 지난 1월2일 입대했다. 강릉 조한종기자 bell21@
  • “한국인으로서 떳떳한 삶 살겠다”

    최근 인기가수 유승준씨의 병역의무 회피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외국 영주권을 포기한 뒤 강원지역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어 화제다. 육군 제1군수지원사령부 산하 정비부대 육인철(29)이병은서른을 바라보는 늦은 나이에도 군에 입대해 보급병으로 열심히 군생활을 하고있다.육 이병은 지난 91년 미국으로 이주해 고교와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한항공 현지 지점에서 승객서비스분야에 근무하다 지난해 귀국,자원 입대했다. 또 한신대 신학과 2년 재학중 입대한 박수찬(25·1군지사 13보급대대)병장은 가족 전원이 미국 영주권을 획득한 상태이지만 군에 입대해 이젠 고참 병장이 됐다.박 병장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군대생활에서 배운 것도 많다.”며 “군에서 배운 협동심과 자립심을 간작하고 전역 후에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1군지사 71정비대대와 603경자동차 대대에 복무중인 박재현(24)일병과 조경수(23)일병도 외국 영주권자들이지만 각각호주와 그리스에서 대학 재학중 귀국해 국방의무를 다하고있다.박일병은 전역후 무역업에,조 일병은 전공을 살려 물리치료 의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동부전선 최전방 초소에서도 아르헨티나의 영주권을 포기하고 입대한 이경학(25)병장이 혹한을 견디며 군복무를 하고 있다.이 병장은 주위의 만류에도불구하고 “한국인으로서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고 강조했다. 원주 조한종기자 bell21@
  • 장병 135명 집단 설사

    육군 모 부대 장병 135명이 집단 설사증세를 보여 군(軍)당국이 역학조사에 나섰다. 복통과 설사증세를 보인 사병 가운데 증세가 심한 김모(23)이병 등 5명은 지난 2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국군 덕정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으며 이중 정모(21)일병등 2명은 설사가 계속돼 수액투여 및 항생제 치료를 받고있다. 부대 관계자는 지난달 30일 오후 설사환자 6명이 첫 발생한 가운데 지난 2일까지 모두 135명의 장병이 설사증세를보였지만 더 이상의 추가 환자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양주 한만교기자
  • 軍 ‘수놓는 장병’ 골치

    신세대 장병들 사이에 십자수(十刺繡) 열풍이 불고 있다.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수를 놓는 일이 지난해부터 유니섹스 바람을 타고 20대 초반의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더니급기야 군부대에까지 확산된 것이다. 휴가 나온 장병들은 부대에 복귀할 때 십자수 재료를 사들고 가는 일이 흔하다.고참의 몫도 챙겨야 한다.십자수에 맛들인 고참들은 휴가 장병들에게 실이나 실을 감아 놓는 ‘보빈(bobbin)’,십자수용 천 ‘아이다(aida)’ 등을 부탁하기도 한다.장병들이 수를 놓는 소재는 애인에게 줄 손수건,베게,인형,열쇠고리….동전 크기만한 천에 온갖 색깔의 ‘+’모양을 수놓은 열쇠 고리는 특히 인기다. 심심풀이 수준을 넘어 총기정비 시간에도 상관의 눈을 피해 십자수에 몰두하자 최근 경기도 파주시 문산의 모 육군부대에서는 부대장의 지휘서신 형식으로 ‘십자수 금지령’을 내렸다.부대원 120여명 가운데 30여명이 십자수에 빠져 부대운영에 차질을 빚을 지경이 됐다는 것이다. 박모(21) 일병은 “예전에는 고참들이 탄피를 갈아 반지를만들며 시간을 보냈다지만 요즘은 종이접기나 십자수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기복무 부사관 등은 신세대 장병들의 이같은 모습이 영 못마땅하다.김모(29) 중사는 “아무리 신세대라지만군인이 수나 놓고 있어서야 되겠느냐”며 개탄했다. 류길상기자 ukelvin@
  • 전역앞둔 병장 ‘살신성인’

    만기전역을 4개월 남기고 군 휴양소 수상 안전요원으로 근무중이던 육군 동해 모 부대 정상훈(23 충남 청양군)병장이 익사 위기의 고교생을 구하고 실종돼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지난 2일 오후 2시쯤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해수욕장인근 군부대 휴양소에서 근무중이던 정 병장은 익사직전의서울 모 고교 1학년 윤모군(17)을 구한 뒤 파도에 휩쓸려실종됐다. 정 병장은 이날 오후 윤군이 갑자기 덮친 파도에 휩쓸려해변에서 30여m까지 밀려나자 최종헌(22)일병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윤군을 해변으로 끌고나오다 변을 당했다. 정 병장은 앞서 지난 6월 모범사병으로 뽑혀 부대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중대장 황경태(30) 대위는 “정병장은 귀찮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온 모범사병”이라고 말했다.육군은정 병장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고현장에 추모비를 세우기로 했다. 노주석기자 joo@
  • 8월의 호국인물 김용식일병

    전쟁기념관은 30일 국군 창설 이래 병사로는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한 전쟁영웅 김용식(金龍植) 육군 일등병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1931년 2월8일 경기도 옹진군에서 출생한 김 일병은 6·25전쟁 발발 직전인 50년 5월 자원 입대,수도사단 17연대 3대대 9중대에 배치된지 1개월만에 최전선에 투입됐다.이어 8월 낙동강 전선의 비학산 전투에 참가,돌격작전의 선봉에서서 수류탄과 대검으로 군관 1명을 포함,15명의 적을 사살,생포하는 공을 세웠다. 김일병은 같은해 9월 19일 경북 안강 전투에서 척후병으로 정찰중 북한군의 만행을 보고 격분,홀로 적 6명을 사살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황해도 옹진군 강령초등학교와 옹진중학교 재학 시절 줄곧 반장을 맡으며,리더십과 의협심이 뛰어났던 그는 전장에서도 앞장 서는 등 불퇴전의 용기를 보여줬다. 정부는 살신보국 정신을 기리어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으나,유족이 없어 전달하지 못한채 보관해오다 이번에 호국인물로 헌양했다. 노주석기자 joo@
  • 수마 휩쓸고간 新신림시장

    폭우에 휩쓸려온 80여대의 차량들이 상가와 주택를 덮치면서 거대한 폐차장을 방불케 했던 서울 관악구 신림6·10동신신림시장은 16일 아침이 되면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2∼3시간의 폭우로 모두 9명이 숨졌고, 500여채의 가옥이침수되거나 무너지면서 이재민만 2,000여명이나 발생했다. 망연자실한 채 낙담에 빠졌던 주민들은 아침 9시쯤 먹구름사이로 햇살이 비치자 물에 젖은 가재도구와 전자제품,이불,옷가지,가게 상품 등을 거리에 내놓고 말렸다.거친 물살에휩쓸려 떠내오면서 1km에 이르는 시장 상가와 주택 등을 무너뜨렸던 차량들도 전날부터 동원된 수십대의 견인차량에의해 말끔히 치워졌다. 삽과 곡괭이 등을 나눠 쥔 주민들과 군인들의 얼굴에는 금방 구슬땀이 쏟아졌다.시장 곳곳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를 치우느라 불도저와 굴착기도 굉음을 내며 바삐 움직였다.주민들의 빨래를 돕던 육군 53사단 김일 일병(21)은 “처음 현장을 왔을 땐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만했다”면서 “그러나 하나씩 옛모습을 되찾으면서 복구지원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관악보건소와 육군 수방사 의무대,인근 강남고려병원 등에서 지원나온 의사와 간호사,위생병들은 장터를 헤집고 다니며 장티푸스 예방접종을 하는 등 방역작업을 펼쳤다. 주민들은 오후 들어 복구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삼삼오오 모여 전날 새벽의 악몽과도 같았던 기억을 떠올리며다시 한번 몸서리쳤다. 주민들은 이번 수해로 곳곳에 금이 간 상가건물들이 조금만 비가 더 와도 무너질 수 있다는 진단에 따라 낮게 드리운 먹구름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떠내려온차량에 집이 반파된 전상복씨(58)는 “신림시장에 지어진대부분의 건물들은 35년 전에 들어선 무허가 건물”이라면서 “건물도 낡았는데다 침수로 지반이 약해져 걱정”이라고 한숨지었다.신림10동 주민 강귀복씨(69·여)는 “이곳에서 33년 동안 살았지만 이런 물난리는 처음”이라면서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동네 주민들이 온통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복구작업이 진행되는 한편에서는 주민자치위원회의 대책회의가 계속됐다.구청측도 “이번 수해는 복개된 신림천 상류의 배수구가 막혀 일어난 것”이라는 주민들의 주장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그러나 구청측은 자연재해쪽에 보다 비중을둔 반면, 주민들은 배수구가 막히지 않도록 사전조치를 하지 않은 행정기관에 책임이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경계근무병 괴한에 피습 소총 뺏겨

    8일 오전 2시쯤 경북 영천시 북안면 송포리 육군 모부대초소에서 경계근무중이던 권모(22)상병과 오모(22)일병이쇠파이프를 들고 침입한 신원을 알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피습당한 뒤 M16A1 소총 1정과 공포탄 15발을 빼앗겼다. 경찰에 따르면 푸른색 체육복에 모자를 쓴 사람이 초소 철조망을 뚫고 들어와 권 상병 등을 쇠파이프로 마구 때려 실신시킨 뒤 소총 1정과 공포탄을 빼앗아 달아났다는 것. 경찰은 군과 함께 인근 주요 도로에서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한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병사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자세한 사건경위 등을 조사중이다. 영천 한찬규기자
  • 상근예비역 2명 자살관련…면대장 구속

    예비군 면단위 중대에 근무하는 상근예비역 사병 2명이 “면대장의 가혹행위를 견딜 수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뒤 독극물을 마시고 숨졌다. 지난 2일 오후 2시쯤 경기도 이천시 모 예비군면중대 사무실에서 이 중대에 근무하는 상근예비역 이모(20)·임모(20)일병이 제초제를 마셔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모두 숨졌다.면중대 사무실에는 “면대장의 비인간적인 대우,욕설,야근 등을 참을 수 없다.죽어서도 면대장을 증오할 것”이라는내용의 유서가 남아 있었다.육군 모 사단 정훈공보실은 “군검찰은 두 사병에 대한 가혹행위 등의 혐의로 면대장 최모씨(51·예비역 중령)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이천 윤상돈기자 yoonsang@
  • 1월의 호국인물 김종식 해병대령

    ‘1월의 호국인물’로 김종식(金種植) 해병대령이 선정돼 오는 5일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헌양행사를 갖는다. 1926년 1월 중국 하얼빈에서 출생한 김 대령은 하얼빈 대도관 상업학교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으며,중국에 머물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1948년 3월 해사 후보생 특별교육대 2기생으로 입대,같은 해 9월 해군소위로 임관했다.이듬해 2월 해병대 창설요원으로 선발되어 49년 4월15일 해병대가 창설될 때까지 선발대 요원으로 활약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낙동강지역 진동리지구 전투에 참전,수류탄전을 전개하는 과감한 공격으로 적 정찰대대를 기습 타격해 마산으로통하는 요충지인 진동리를 확보하는 등 전공을 세워 전 대원이 일계급 특진했다. 1952년 3월 서울의 관문인 장단지구를 지키는 해병대 전투단 1대대장으로서 대원들을 삭발시켜 중공군과 결전을 벌였으며,전선으로 출동하기 전 묘지에 ‘고 해군소령 김종식 지묘’라고 쓴 팻말을 꽂아놓고 출전하는 일화를 남겼다. 전쟁기간 해병대가 수행한 모든 전투에 참전하여 귀신 잡는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는데 기여한 그는 휴전 이후 해병대 1연대장,헌병감을 역임했으며,1991년 4월 30일 세상을 떠났다.정부는 금성을지훈장과 금성충무훈장을 각각 수여했다. 한편 전쟁기념관은 2001년 호국인물로 김 대령과 함께 2월 권영도(權永道)경찰 순경,3월 김금성(金錦成) 공군준장,4월 임충식(任忠植)육군대장,5월 백재덕(白載德) 육군 이등상사,6월 장세풍(蔣世豊) 육군소령,7월 김용배(金龍培) 육군 준장,8월 변규영(卞圭瑛) 육군 일병,9월 김용식(金龍植) 육군 일병,10월 백마3용사 강승우 외 2명,11월신철수(辛鐵洙)공군 소령,12월 김동하(金東河) 해병중장을 각각 선정했다. 노주석기자 joo@
  • 육군 모부대 사병 “구타 못이겨 자살”

    육군 모부대 사병이 ‘구타가 싫어 자살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숨진 채 발견돼 군 당국이 수사에 나섰다. 6일 오전 6시 30분쯤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육군 모부대 초소 옆 나무에 이 부대 소속 강현구(21)이병이 군화 끈으로 목을 맨 채 숨져있는 것을 동료 사병들이 발견했다. 강이병의 종아리에는 피멍과 긁힌 상처가 있었으며,바지 뒷주머니에는 ‘어머니께’,‘친구들에게’,‘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라고적힌 A4용지 3장 분량의 유서가 들어 있었다. 유서에는 강이병이 자신을 구타한 사람으로 김모·서모 일병 등을지목하면서 “죽어서 저주한다.대가를 치르도록 할 것”이라고 쓰여있었다. 강이병의 가족들은 “군부대측이 현구가 목을 매 자살한 것 같다고말하지만,현구를 발견한 사병들에 따르면 현구 몸에 발견 당시 토사물이나 배설물이 없었던 점으로 미뤄볼때 자살이 아니라 타살된 뒤자살로 위장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군 당국은 강이병이 유서에서 자신을 구타한 것으로 지목한 김모·서모일병에 대해 조사를 벌이는한편 7일 강이병에 대해 부검한다. 양주 윤상돈기자 yoonsang@
  • 고참이 性추행·구타 육군일병 소총 자살

    고참병들의 성추행과 구타를 견디지 못한 육군 사병이 소총으로 자살했다. 10일 육군에 따르면 강원도 철원군 육군 ○○사단 수색대대 소속 이재준 일병(21)이 지난 8일 낮 12시5분쯤 중대 막사에서 200m쯤 떨어진 부대내 야산계곡에서 K-2 소총을 머리에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해 12월27일 이 부대로 전입해온 이 일병은 지난 2월부터 최근까지 같은 부대 남궁모 병장으로부터 취침시 10여차례 성추행과 폭행을 당하고 정모 상병으로부터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등 부대 고참병들로부터 가혹 행위를 당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노주석기자 joo@
  • 육군사병 총기휴대 탈영…춘천·인제일대 검문 강화

    사병이 훈련중 총기를 휴대한 채 탈영한 사실을 군부대가 7시간 이상 지난후 경찰에 통보했다. 26일 오후 3시쯤 중부전선지역인 강원도 양구군 육군 노도부대 소속 박경환일병(21)이 K2소총 1정을 가지고 달아났다.경찰에 따르면 박일병은 부대 훈련장에서 훈련하던 중 총을 들고 이탈했으나 군부대측은 이날 오후 10시 30분쯤에야 파출소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 군·경은 170㎝의 키에 부산 말씨를 쓰는 박 일병에 대한 검거에 나서 인근 야산에 대한 수색과 함께 춘천과 인제지역으로 통하는 검문소의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 양구 조한종기자 bell21@
  • 자유총연맹 전국 웅변대회

    한국자유총연맹(총재 楊淳稙)는 23일 서울 장충동 자유센터에서 남북화해와 협력을 다지기 위한 전국 웅변대회를 마련했다.6·25발발 50주년을 계기로남북사이에 새롭게 열리고 있는 화해시대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자리로 전국에서 예선을 거친 20명이 참가해 실력을 겨뤘다.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대통령상 김종래(자영업 38 울산) ◆국무총리상 오동춘(육군 15사단 일병)◆통일부장관상 박은지(강원 강일여고 1년)◆국방부장관상 김기태(충북 충주대원고 1년)◆행정자치부장관상 신현주(주부 28 충남 천안)◆교육부장관상김희현(서울 명원초등 6년)◆대회장상 천지형(인천경찰청 기동1중대 상경)?장려상 조영희(주부 40 제주시)
  • 軍 의문死 6건 ‘순직·일반사망’ 판정

    국방부는 8일 80년 이후 지난해 9월까지 발생한 군내 의문사 사건 166건 중 2차로 34건을 재조사해 변사나 병사로 처리됐던 6명을 순직 및 일반 사망으로 변경,판정했다고 밝혔다. 변사나 병사로 처리됐던 육군 문항기 일병과 해군 임재천 준위 등 5명은 순직으로 인정하고,병가로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숨진 해군 김지영 병장은일반사망으로 변경했다. 34건 중 28건은 당초 조사 결과와 같아 유족의 동의 아래 사건을 종결했다. 국방부 의문사특별조사단(단장 金鍾華 육군소장)은 “현재 나머지 102건을재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주석기자 joo@
  • 美육군 ‘성조지’ 만화가 워커에 최고 훈장 수여

    [워싱턴 AP 연합] 미국 육군은 24일 한때 국방부에서 기피인물로 간주되기도 했던 성조지(Stars & Strips,星條紙)의 만화가 모트 워커(76) 화백에게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루이스 칼데라 육군장관은 이날 국방부에서 비틀 베일리 일병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성조지 만화 ‘캠프 스웜피’ 연재 50주년을 맞아 코네티컷주(州) 출신의 워커화백에게 ‘최고민간수훈 훈장’을 수여하고 “캠프 스웜피는전세계에서 복무하는 모든 미군에게 매일 인생의 밝은 면을 비추어주고 잔잔한 웃음과 감동을 선사했다”고 치하했다. 캠프 스웜피에는 나태한 말썽꾸러기 비틀 베일리 일병과 엄격한 최고참 하사관 오빌 스노컬 상사,그리고 골프를 좋아하고 장교클럽에서 살 정도로 자주 가는 지휘관 아모스 해프트랙 장군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성조지는이 만화가 장교에 대한 존경이 결여됐다는 이유로 두차례나 수년간씩 연재를 금지하기도 했다. 2차대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만화를 그리고 있는 워커 화백은“세상은 변했다”고 소감을 말하면서“나를 기피인물로 만들었던 고위 장교도 내 만화에 조금은 웃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美언론 ‘노근리’보도 논란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워싱턴 포스트,ABC방송 등 미 주요 언론들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다룬 AP통신 기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를 잇따라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들은 사건 관련 확인 과정에서 이미 정부 기록에 상당한 허위기록이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허위사실이 담긴 정부기록을 근거로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하면서 사건 조사의 신빙성에 의문을 갖도록 만들고 있다. ◆증인들은 사건 현장에 있었나 = 미 언론들이 AP 보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미 육군사관학교 역사학 교관인 로버트 베이트먼 소령이 미주리주 국립개인기록센터 기록을 조사한 결과 데일리 상병은 사건 현장에서 수마일 떨어진정비부재 소속이었고 플린트 일병도 부상으로 호송됐음을 확인했다는 주장을근거로 증인들의 증언 자체를 믿기 힘들다는 때문. 그러나 AP통신은 데일리가 자신의 낡은 군대 운전면허증 등 H중대 복무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들을 제시했으며 여러 전우들도 그에 관해 증언했다고 밝히고있다.또 당시 H중대 일조점호기록에 따르면 플린트도 부상 정도가 경미해 후송되지 않고 계속 잔류한 것으로 돼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정부 기록은 정확한가 = AP통신은 정부 기록이 전쟁의 혼란기에 작성됐기 때문에 기록이 부정확하고 그나마 73년 세인트루이스 육군 인사기록보관소 화재로 한국전 참전군인 인사 기록의 80%가 소실돼 이를 재작성하는 과정에서서로 엇갈리는 내용이 많은 등 기록 자체가 매우 부정확함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정부의 공식기록이 중대 일조점호기록과 다른 것은 양민학살에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고의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란 우려도나오고 있다. ◆사건 조사의 핵심은 = 양민학살 사건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조직적으로 저질러진 것인지 아니면 전시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인지를 가리는 것이 이번 사건 조사의 핵심. 노근리에서 끔찍한 양민학살이 벌어진 것 자체는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그러나 상부의 지시에 따라 저질러진 것이라면 미 정부의 책임이 커지고문제가 복잡해지는 반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정부의 입장이 상대적으로 편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AP 보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언론들은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는증인들의 증언에 신빙성이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이들이 현장에 없었다는 기록을 들고 나오고 있는 것이다. ◆미 정부의 언론플레이 = 유에스 뉴스 등 AP 보도에 의문을 제기한 언론들은모두 베이트먼의 주장과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이는 미 육군부 내에서 이들언론에 정보를 흘려주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부르고 있다.또 미 정부내에 정부보관 기록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목소리가 존재함을 우려하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hay@
  • 군에간 아들 컴퓨터로 만난다

    “어머니 무릎 편찮으신 것은 어떤지요” “광철아 전방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니” 군사상 최초로 컴퓨터 화면을 통해 장병과 부모가 면회를 하는 ‘인터넷 면회’가 시도된 30일 오전 11시 경기도 옹진군 백령도 해병부대. 비록 컴퓨터 화면을 통한 짧은 만남이었지만 부모와 자식간의 대화는 정감이 넘쳐 흘렸다.이곳 부대에 근무하는 김광철(金光澈·21)일병은 부모님과형제들의 안부를 물었고 부모는 연신 아들의 건강을 걱정했다. 김일병은 부대 내에 시범 설치된 ‘팝콤’이라는 공중 컴퓨터를 통해 인터넷 면회를 했고,김일병의 아버지 김종일(金鍾一·52)씨와 어머니 권석순(權石順·48)씨는 충북 제천전화국에 설치된 컴퓨터를 통해 자나깨나 그리던 아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김씨는 “백령도는 워낙 멀어 아들이 입대한 뒤 한번도 면회를 가지 못했는데 컴퓨터를 통해 면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이날 강원도 인제 육군부대에 근무하는 장병 2명도 부산 및 제주도에 거주하는 부모와 각각 인터넷 면회를 했다. 이날 시연에서제천 및 제주도에 사는 장병 부모는 공공기관에 설치된 컴퓨터를 이용했지만,부산에 사는 부모는 집에서 개인컴퓨터로 인터넷 면회를 했다. 국방부는 오는 5월부터 연말까지 고속통신망이 깔려 있는 700여개 부대에인터넷 면회용 컴퓨터를 보급하고 내년까지는 2,800여개 부대에 추가로 설치,장병들이 일과 후 이용토록 할 방침이다. 국방부는 “앞으로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은 면회를 하기 위해 굳이 바쁜일을 제치고 수백리 길을 달려가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백령도 김학준기자 hjkim@
  • [의열 독립투쟁](8)김익상 의사

    1921년 9월12일 오전 10시10분경.일제의 조선 통치의 거점인 서울 남산 왜성대(倭城臺·현 중구 예장동 일대)의 조선총독부 청사(구 한국통감부 청사)2층에서 굉음소리와 함께 폭탄이 터졌다.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이터진 이 사건으로 일제가 초긴장함은 물론 경성(서울) 시내가 떠들썩했다.일제는 범인을 잡기 위해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였으나 범인은 좀처럼 잡히지않았다. 일제로서도 이 사건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총독부 정문에는 항상 무장한 헌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총독부 관리나 고용원이 아니면 임의로 출입을 못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폭탄을 휴대한 수상한 인물이,그것도 벌건 대낮에 총독부 청사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사건의 진상은 해가 바뀌고 그 해 겨울이 다 지나도록 오리무중이었다. 사건이 있은 후 6개월이 지난 1922년 3월28일 오후 3시30분 육중한 몸체의배 한 척이 상하이 부두에 입항하였다.상하이는 국제도시인 만큼 평소에도중국인·조선인·서양인·인도인·일본인 등 여러나라 사람들이 들끓었다.특히 이 날은 필리핀을 방문하고 상하이에 들르기로 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후에 수상 역임)를 맞기 위해 중국의 고관,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직원,각국 신문기자,일본거류민이 부둣가로 몰려나와 더욱 혼잡한 상황이었다. 배에서 내린 다나카는 출영나온 인사들의 환영을 받는 바로 그때 군중 속에서 중국인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다나카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다.세 발의총성이 울리자 총을 든 청년은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그러나불행하게도 총탄은 다나카에게 맞지 않았다.총탄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다나카 앞을 급히 지나던 젊은 서양 여자의 가슴에 박혔다. 청년은 다나카가 맞은 줄 알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놀란 다나카일행은 황급히 달아났다.그런데 이번엔 양복을 입은 또 다른 한 청년이 달아나는 다나카를 권총을 쏘고 이어서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이 총탄도 역시 다나카에 명중되지 않았고 폭탄도 불발되고 말았다.다나카는 두번의 피습을 용케피했고 두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중국 옷을 입은청년은 오성륜(吳成崙·본명 李正龍)이었고,양복을 입은 청년은 김익상(金益相)이었다.6개월전에 일어난 ‘조선총독부 투탄사건’은 김익상 의사가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김 의사의 의거임이 비로소 밝혀졌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상하이에서 다나카에게 폭탄을 던졌던 김의사는 당시 28세로 아내와 딸 하나를 조국에 두고 온 몸이었다. 서울 태생인 김의사는 15세때부터 서울 용산역 철도노동자,용산전기회사,황해도 수안의 광업회사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일본인 밑에서 일한 까닭에일본어에 능통했고 일본인들의 습관까지도 몸에 익히고 있어 거사에 나섰을때 능숙하게 일본인 행세를 해 곳곳의 일경들의 경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 김익상 의사는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큰 꿈을 지니고 있었다.장차 비행사가 돼 폭탄을 싣고 일본을 향해 투하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유년시절아버지가 일본인에게 멸시·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분개한 김 의사도 일본인밑에서 냉대와 학대를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김 의사는 이 고통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고통이란 사실을자각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20년 5월 조국을 떠나,1921년 5월에는 베이징으로 가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만난 뒤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조선총독부 투탄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조국독립을 위해 일제 통치거점에 폭탄을 안기자는 의열단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 의사는 거사를 자청했다.1921년 9월10일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3개와 권총 1정,탄환 100발 및 현금 200원을 받아 베이징을 출발했다.김원봉 이하 동지들이 베이징역두에 나와 장도에 오르는 김 의사를 전송하였다.동지 가운데 한 사람이 “壯士一去兮 不復還일세(壯士가 한번 가면,돌아오지 못하는구나)”하고 격려의 말을 건네자 김 의사는 “쓸데없는 소리 말게.이제 1주일이면 내 넉넉히성공하고 돌아올 것이니 술상이나 잘 차려놓고 기다리게”하고 껄껄 웃으면서 화답하였다. 그처럼 담대했던 김 의사는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경계망을 돌파한 뒤 서울로 들어와,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고 총독부 구내로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진 후 경비병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홀연히 김의사는 청사를 빠져 나왔다. 다나카 저격직후 체포된 김의사는 일본 나가사키로 이송됐고 1923년 11월 6일 항소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사형이 집행되기 전 일본 황태자(후에 昭和천황이 됨)의 결혼식으로 일제로부터 은사(恩赦)를 받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또 1932년 2월에는 만주국 독립기념 명목으로 다시 20년으로 감형됐다.1942년 김 의사는 30대의 몸으로 감옥에 들어간 이래 20년만에 50대 중노인이 돼 규슈 구마모토 감옥을 나왔다.서울로 돌아온 김의사는 해방직전한 일본인 형사에 의해 연행되었는데 그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현재 조선총독부의 청사가 있었던 자리 인근(현 예장동 숭의여자대학 입구)에는 의열단원 김익상이 이곳에서 폭탄을 던졌다는 내용이 적힌 비석 하나만외롭게 서 있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 -金의사 투탄 조선총독부는…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조선총독부 청사는 지난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철거된광화문 청사가 아니라 남산에 있던 초기 청사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일제는 한국통치기관으로 한국통감부를 만들었다. 청사는 남산 중턱에 있던구 일본공사관 건물을 사용했다.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찬탈한 일제는 남산 통감부 청사에 ‘조선총독부’ 간판을 내걸고 이 건물을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하였다.1926년 경복궁 앞마당에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건립되기까지 16년동안 이곳은 일제 조선통치의 본거지였다. 김익상 의사는 바로 이곳에 전기수리공으로 변장,잠입해 폭탄을 던진 것이다. 경복궁의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1916년 6월 25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가 시작되어 10년만인 1926년 10월 1일 ‘시정(始政)기념일’을 맞아 준공하였다.일제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670여만엔을 들여 10여년에 걸쳐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건립하면서 이곳을 조선의 영구통치의 본거지로 삼고자 했다.그러나 신청사 준공 19년만에 패퇴하여 이 땅에서 물러갔다. 정운현기자 jwh59@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