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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상필벌」 국정원칙 거듭강조/김 대통령­군 수뇌부 오찬의 함축

    ◎미그기 유도 유공자 치하… 포상 지시/“방공망 구멍” 서울시엔 엄중한 질책 김영삼 대통령이 25일 낮 청와대에서 수석비서진을 비롯,일체의 배석자를 물리친 채 군수뇌부와 오찬을 한 것은 의미있는 행사였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설명했다.이 관계자는 『북한은 지난 83년 2월말 이웅평씨가 미그기를 몰고 우리에게 귀순하자 그해 10월초 아웅산 테러만행을 저질렀던 일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은 정전협정의 무력화를 노리고 휴전선·서해상에서 의도적 도발을 거듭하고 있다.우발적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질 우려가 지적된다.북한 고위층이 미그기 귀순으로 기분이 상했을 것이므로 도발의 강도나 횟수가 늘어나면서 긴장이 고조될 수도 있다. 정부로서는 모든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할 필요가 있다.거기에 더해 미국과 함께 북한에 4자회담을 제의해 놓은 상태이므로 북한을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이날 예정에 없던 두가지 일정을 추가했다.주창성 소장(공군 제30방공관제단장)최용섭소령·홍붕선 대위(이상 F­16 조종사)이기영 중사(공군 중앙방공통제소 공중감시수)등 북한 미그 19기 귀순과정에서 공로가 있는 유공자들을 격려했다.국방장관,합참의장과 3군 참모총장 등 군지도자들과 오찬도 추가된 일정이다. 김대통령이 미그기 귀순 사건이래 계속 강조하는 것은 「신상필벌」이다.군에 대해서는 방공태세가 제대로 가동되고 있음을 치하하면서 더욱 정진할 것을 독려했다.유공자 포상도 지시했다.그러나 방공망에 구멍을 드러낸 서울시에 대해서는 『반드시 시정토록하겠다』며 가차없는 질책을 퍼붇고 있다.국민들의 안보불감증에도 경고를 보냈다. 김대통령은 이날 공군 관계자들의 귀순 유도과정을 상세히 물어본 뒤 『이번에 공군이 기민하게 대처한 것은 훈련의 중요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칭찬했다.청와대 행사에 참석한 군 관계자들은 『신명을 다 바쳐 국토방위에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이목희 기자〉 ◎김 대통령­공군 유공자 대화 내용 김영삼 대통령은 25일 상오 북한 미그기 귀순과정에서 기민하게 대응한 공군 유공자를청와대로 불러 노고를 치하했다. 다음은 윤여준 청와대대변인이 전한 이날 대화내용. ▲김대통령=이번에 공군이 잘 대처,군에 대한 국민 신뢰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국민도 우리 군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것입니다. ▲이기영 중사(방공통제소 공중감시수)=최근 북한 공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습니다.그날도 북한 공군의 활동이 있어 긴장하고 경계중이었습니다. ▲김대통령=자그마한 일에도 세심하고 기민하게 상황을 판단한 이중사의 근무자세가 바람직합니다. ▲주창성 소장(제30방공관제단장)=레이더 포착후 귀순까지 23분이 걸렸습니다.숨가쁜 시간이었고 서울을 피해 수원으로 유도했습니다. ▲최용섭 소령(F­16 조종사)=당시 가평상공에서 육군훈련 지원임무를 띠고 선회중이었는데 최대한 빠른 속도로 작전지역으로 가라는 임무전환 지시가 있었습니다. ▲홍붕선 대위(〃)=주기적으로 귀순기 유도훈련을 받고 있습니다.평소 훈련받은대로 했습니다. ▲주소장=귀순기 유도훈련은 「물오리훈련」이라고 하는데 최근 북한상황을 고려,1주일에 한번씩 하고 있습니다. ▲김대통령=훈련의 중요성을 보여준 것입니다.이번 일은 우리 군이 밤낮없이 국가보위임무에 헌신하고 있음을 국민 모두에게 인식하게 했습니다.앞으로도 기민하고 효율적인 태세로 국토방위임무를 해주십시오.〈이목희 기자〉
  • 미군 헬기 저공비행/민가 10채 지붕파손

    【수원=김병철 기자】 3일 상오 10시45분쯤 미육군 모부대 소속 앰뷸런스 UH60 헬기(기장 맥릴리대위)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상공을 저공 비행하다 김탄식씨(60·안정리 113의 30) 집 등 민가 10채의 슬레이트 지붕과 유리창 등을 파손,모두 2백60여만원 상당의 재산피해를 냈다. 이날 사고는 미군 헬기가 주한미군 가족들의 암거래 상황을 감시하기 위해 마을상공 75m 위를 날면서 강한 프로펠러 바람을 일으켜 일어났다.
  • 민들레 별곡/강진호 지음(화제의 책)

    ◎목수가 된 어느 목사의 이웃사랑 이야기 한때는 교회를 갖고 목회활동을 했고 재야에서 반독재투쟁도 했지만 지금은 서울 외곽도시 변두리에서 목수 일을 하는 「노가다」목사의 이웃사랑 이야기. 인천시 부평동 백마장,굴포천 개울가에 사는 그가 늘 마주치는 동네사람들은 예비역 육군 대위로 공사판에서 석고보드 일을 하는 「정씨 성님」,늘 아는 체하고 약삭빠른 「조씨」,술주정 심한 「박가」,양색시 출신인 「윤씨 아줌씨」들.이들은 당연히 교양과는 담쌓고 살아간다.입만 열면 걸쭉한 상소리에다 「누런 개가 맛있냐,검정개가 맛있냐」를 놓고 멱살잡이를 하는 하찮은 인생들이다. 이들의 삶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들이 「악」은 아니다.이 시대를 살아오며 깨어지고 망가졌을뿐 어떤 상태에서도 잡초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이웃이다.지은이는 이들을 미화하거나 동정하지 않는다.다만 짙은 애정을 갖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준다.그리고 그 이야기는 해학을 담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로 이뤄진이 책에서 우리는 자칫 잊기 쉬운 가난한 이웃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모처럼 가슴 뭉클하게 해주는 책이다. 사회평론 5천5백원.
  • 육군 인사카드 공개/올 소령진급 대상자부터

    육군은 28일 육군본부에 보관돼 있는 장교들의 인사평가기록을 해당 개인에게 공개키로 하고 우선 올해 소령진급 심사대상이 되는 6년차 대위부터 적용한다고 밝혔다. 올해 첫 소령진급 심사대상이 되는 6년차 대위 1천5백여명은 희망하면 오는 3월말까지 육본에 「자력 공개신청서」를 내면 근무평정과 경력,교육성적,상훈에 대한 개인성적과 함께 동일계급자가운데 보병,포병 등 병과별 등급 및 육사·학군 등 출신별 등급을 개별통보받을 수 있게 됐다.
  • 「12·12」·「5·18」 핵심 5명 영장

    ▷유학성◁ 피의자는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황영시·차규헌·박준병 등과 함께 79년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7시 사이에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그곳 참석자중 최상서열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모임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함. 하오 9시30분쯤 자신의 주도하에 전두환·황영시·차규헌 등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찾아가 최규하대통령에게 집단적으로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그 무렵 육군 정식지휘계통에서 피의자등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진압할 움직임을 보이자 정승화총장 연행에 항의하는 장태완수경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쪽으로 오라』고 회유함. 또 하오 9시부터 11시 사이에 윤성민참모차장,김용휴국방차관,1·2군사령관,제3군사령부 참모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육본측 지시에 따른 병력출동의 저지를 부탁한 것을 비롯,출동가능성이 있는 제9공수여단 제26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에 전화를 걸어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아달라고 회유하는 등 각 부대의 출동을 사전에 저지함. 전두환등과 함께 80년5월27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령으로 제안된 국보위설치령을 의결하게 한뒤 공직자숙정계획에 따라 공직자 8천6백1명에게 사임을 강요하고 각 언론사에 언론인 3백36명의 해직을 종용하는 등 계엄하의 고유업무와 무관한 조치들을 결정함. 이를 통해 전두환등의 국정수행능력을 내외에 과시,유일한 집권세력으로 부각시키는데 이용하면서 행정부와 그 수반인 대통령을 무력화하고 10월29일부터 81년 4월10일까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도록 함. 80년 9월1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언론을 계속 통제한 상태에서 집권과정의 제반조치들을 헌법에 반영하고 신당을 창당,정계를 재편하는 등 향후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81년 1월24일까지 비상계엄상태를 유지함. 이로써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해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황영시◁ 피의자는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유학성·차규헌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7시 사이에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해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그곳 참석자중 최고령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모임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함. 하오 9시30분쯤 자신의 주도하에 전두환·유학성·차규헌 등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찾아가서 최규하대통령에게 집단적으로 정승화총장의 연행재가를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또 육군 주요지휘관이나 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어 육본 정식지휘계통에 따른 병력출동을 저지하는 한편 12월13일 0시30분쯤 이상규에게 중앙청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도록 지시하고 1시10분쯤 박희도에게 고려대학교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는 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반란을 일으킴. 80년 5월초 전두환·노태우·유학성 등과 함께 수시로 만나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도록 한뒤 이를 추진하기로 모의함. 5월17일 전군에 소요진압부대 투입작전명령을 하달,5월18일 하오 2시30분쯤 광주의 전남대·조선대를 포함한 전국 92개 주요대학과 국회 및 신민당사와 공화당사,언론기관,공공기관등 1백36개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 2만5천여명을 배치하여 각 해당시설을 점거함. 5월18일 상오 1시쯤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고 국회의원들의 국회출입을 저지함으로써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함. 피의자등의 정국장악을 위한 비상계엄확대조치와 계엄군 투입 및 정치인들의 체포에 반대하고 전두환의 퇴진과 민주화추진을 요구하는 광주 학생·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발포하는 등 강경진압함. 이후 공직자 숙정,언론 통·폐합,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등 자신들의 향후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81년 1월24일까지 비상계엄상태를 유지하는 등 폭동하여 내란을 일으킴. ▷최세창◁ 피의자는 1957년 6월 육군사관학교를 제13기로 졸업했으며 10·26사건 당시에는 제3공수여단장으로 근무했던 자임. 피의자는 10·26사건과 관련,정승화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해 군 지휘권을 박탈하는 한편 군의 정식지휘계통이 이를 저지할 경우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해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다는사전계획을 세웠음. 이에 따라 노태우·유학성·황영시·차규헌·박준병·백운택·박희도·장기오·장세동·김진영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쯤부터 하오 7시쯤까지 사이에 경복궁내 수경사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유사시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했음. 피의자는 같은날 하오 11시30분쯤 자신이 여단장으로 있는 특전사 제3공수여단 육군중령 박종규에게,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했음. 박종규는 이날 자정쯤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전사령부에서 제3공수여단 제15대 소속 1개 지역대 병력 38명에게 사령부 외곽을 포위하도록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육군대위 김홍열·육군대위 나영조·육군중사 신현수·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육군하사 6명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정병주와 비서실장 육군소령 김오랑이 집무실에 있는 것을 확인했음.이어 육군하사 6명이 이들에게 M16소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해 김오랑을 살해하고 정병주에게 중상을 입힘. 피의자는 또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을 위반하고 다음날인 13일 상오 2시쯤서울 송파구 거여동 제3공수여단 연병장에서 2개 대대병력 6백여명을 인솔하고 천호대교·강북로·한남동을 거쳐 3시경 경복궁으로 진주했음. 피의자는 이같이 반란군 지휘부 결성과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자신의 부하인 박종규에게 지시하여 직속상관인 정병주를 체포하고,제3공수여단 2개대대 병력을 인솔하여 경복궁으로 진주하는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반란중요임무종사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장세동◁ 피의자는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의 잦은 월권행위와 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을 문제삼아 인사조치할 것으로 알려지자 그 지휘권을 박탈하고 무력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의함.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준병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하오 7시 사이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함. 하오 7시40분쯤 허화평으로부터 정승화총장을 무사히 연행하였으며 전두환이 정승화총장 연행조사문제를 보고하기 위해 총리공관에 갔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해 있는 장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줌. 잠시후 허화평으로부터 총장연행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연행하러간 우경윤대령이 부상을 입었으며 동원된 제33헌병대 병력이 공관경비를 맡고 있는 해병대 병력에 포위되었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장성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준 뒤 제33헌병대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김진영으로 하여금 제30경비단 소속 5분대기중대 병력 80여명을 인솔하고 총장공관으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도록 조치함. 수경사에서 비상이 발령되고 장태완수경사령관으로부터 주요 지휘관 비상소집 명령이 하달되었음에도 소집에 응하지 않음. 제30경비단 상황실로 전파되는 상황과 각 부대에 전화하여 파악한 상황등을 통해 육본 수뇌부가 비상을 발령하고 정승화총장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과 제9공수여단 제26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에 병력출동을 전제로 한 준비명령을 하달된다는 첩보 등을 수집,제30경비단장실에 모인 장성들에게 전파함. 중요임무종사자로서 반란군 지휘부 결성과정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정승화총장 연행,부대동향 및 병력이동 상황을 수시 파악,지휘부에 전파하면서 총장공관에 억류된 합수부측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병력을 출동시키는 등 전두환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이학봉◁ 피의자는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인 「10·26사건」당시 보안사대공처 대공수사과장으로 근무하고 육군준장으로 전역한 뒤 13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자임. 1,79년 「10·26」사건 합수부본부장으로 임명된 전두환은 계엄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마찰을 빚어왔음.이에 정총장의 지휘권을 박탈,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김재규의 범행에 관련됐는지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정승화총장을 강제연행키로 결의했음.연행일을 12월12일로 결정한 전두환으로부터 연행장소 등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허삼수 등에게 통보했음.또 79년 12월12일 하오 6시20분쯤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정동렬과 함께 전두환을 수행해국무총리 공관으로 가서 정총장의 연행재가를 요구했음. 피의자는 중요임무종사자로서 정총장에 대한 연행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연행장소를 결정했음.허삼수등이 정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합수부수사관 7명을 지원하는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반란을 일으킴. 2,80년 5월초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전두환의 지시를 받았음.그뒤 전국계엄의 실시,과도정부적 성격의 소극적인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비상기구 설치 및 국회해산 등 「시국수습방안」을 추진했음.5월16일 보안부대 대공과장들을 보안사로 불러 소요 배후조종자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등의 검거대상자 명단을 주고 검거를 지시,사회혼란 조성등 혐의로 김대중 국민연합공동의장,문익환목사등을 체포하고 권력형부정축재라는 불분명한 범죄혐의로 김종필 공화당총재,이후락·박종규국회의원등을 구속했음.11월12일 45개 언론사 사주들로부터 언론통폐합 조치에 이의가 없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았음. 피의자는 중요임무종사자로서 주요정치인·재야인사에 대한 수사계획을 수립,이들을 체포·구속했음.국가기관을 강압으로 전복하거나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자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 두환­노태우 군사반란죄 공소장 전문

    피고인 전두환은 1955.9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이래 제1공수여단장,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제1사단장등을 거쳐 1979.3부터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중 10·26 중앙정보부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인 세칭 「10·26사건」(이하 「10·26사건」이라한다)이 발생함에 따라 10·27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부소속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라한다) 본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1980.4.14부터 7.17까지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고 5.31부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 근무하다가 8·6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8·27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9.1,취임하고 다시 1981.2.25 개정헌법에 따라 새로 구성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제12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3.3 취임한후 1988.2.24까지 대통령직에 있던 자, 같은 노태우는 위 전두환과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으로서 1955·9 육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제9공수여단장,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거쳐 「10·26사건」당시에는 제9사단장으로 근무하였으며 그후 수도경비사령관,국군보안사령관을 거쳐 1981·7 육군대장으로 전역한후 정무제2장관,체육부장관,내무부장관등을 역임하고 1985.2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및 총재로 재직하다가 1987·12·16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2·25 취임한후 1993·2·24까지 대통령직에 있던자로서 1995·12·5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으로 서울지방법원에 구속기소되어 현재 재판계속 중에 있는자 등인바, 「10·26 사건」이후 국내정치상황은 유신헌법을 개정하여 점진적인 민주화를 추진하여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1979·11·8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개정을 통한 정치발전을 약속하고 11·21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국민주권과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질서의 창출이 모색되는 가운데 12·8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방행위를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가 해체되어 유신체제의 폐지가 기정사실화되고군 내부에서도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비롯한 군수뇌부가 계엄의 성격과 목적을 「10·26사건」이후 발생한 사회혼란을 수습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데 국한함으로써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등 정국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피고인 전두환이 계엄업무 수행과정에서 「10·26사건」과 관련하여 직무유기혐의로 구속된 이재전 대통령경호실 차장의 석방,청와대에서 발견된 금원의 처리,부정축재자의 처리 및 재산몰수,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출국허가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정승화 총장과의 사이에 잦은 의견대립으로 인해 마찰을 빚어 오던중,11월 중순경에 단행된 군인사에서 비정규육사 출신들이 군요직에 배치되고 정규육사 출신의 피고인등이 중심이 된 소위 「하나회」소속 장교들이 배제되자 자신들의 군내 입지에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고 12월 초순경 군 일각에 피고인 전두환이 잦은 월권행위와 군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으로 곧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인사조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정승화총장이 국방부장관 노재현에게 피고인 전두환의 인사조치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지자,피고인등은 위 전두환에 대한 인사조치를 차단하고 「하나회」소속 장교들의 군내입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군의 주도권 장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정승화총장이 「10·26 사건」당시 박대통령 시해 현장부근인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의 본관 식당에 있다가 김재규와 육군본부(이하「육본」이라한다)로 동행한 사실로 인한 일부 군인들 사이에 정승화총장이 위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음을 기화로 이미 그동안의 수사과정에서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정승화총장을 김재규와의 관련 혐의에 대해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강제연행하여 그 지휘권을 박탈하는 한편,군의 정식지휘계통이 이를 저지할 경우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제압함으로써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의하고 12·7경 국군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라한다)에서 서로 만나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 문제를 논의한 끝에 그 연행일을 12·12로 결정하고 피고인 전두환이 보안사 대공2과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 육군중령 이학봉에게 연행장소등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여 그 검토결과를 토대로 12·8경 육군참모총장 공관(이하 「총장공관」이라 한다)을 연행장소로 결정한후 12·9경 위 이학봉,보안사인사처장 겸 합수부 조정통제국장 육군대령 허삼수,육본 헌병감실 범죄수사단장겸합수부 수사2국장 육군대령 우경윤 등에게 구체적인 연행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정승화총장의 연행에 대응하여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특수전사령관 육군소장 정병주,수도경비사령관 육군소장 장태완,육본 헌병감 육군준장 김진기 등을 12·12 당일 만찬 초청 명목으로 유인하여 부대지휘를 사전 차단키로 하고 피고인 노태우 등 소위 「하나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지역 주요부대 지휘관들은 그날 저녁 경복궁 구내 수도경비사령부(이하 「수경사」라 한다)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필요시 자신들의 지휘하에 있는 병력을 동원하기로 하고 국방부 군수차관보 육군중장 유학성,제1군단장 육군중장 황영시,수도군단장육군중장 차규헌,제20사단장 육군소장 박준병,제71훈련단장 육군준장 백운택,제1공수여단장 육군준장 박희도,제3공수여단장 육군준장 최세창,제5공수여단장 육군준장 장기오,수경사 제30경비단장 육군대령 장세동,수경사 제33경비단장 육군대령금진영,국군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군대령 허화평,위 이학봉·허삼수,보안사 정보처장 육군대령 권정달,위 우경윤,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육군대령 성환옥,수경사 제33헌병대장 육군중령 최석립,육본 헌병대장 육군중령 이종민,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육군준장 정동호,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 육군대령 고명승,수경사 헌병단장 육군대령 조홍,수경사 헌병단부단장 육군중령 신윤희,보안사 보안처장 육군대령 정도영,제30사단장 육군소장 박희모,제30사단 제90연대장 육군대령 송응섭,제2기갑여단장 육군준장 이상규,제9사단 참모장 육군대령 구창회,제9사단 제29연대장 육군대령 이필섭,제9사단 작전참모 육군중령 안병호,제1공수여단 제2대대장 육군중령 서수열,제1공수여단 제5대대장 육군중령 박덕화,제3공수여단 제15대대장 육군중령 박종규등과 순차로 공모하여, ○피고인 노태우는 사전계획에 따라 위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박준병·백운택·박희도·최세창·장기오·장세동·김진영 등과 함께 12·12 18·00경부터 19·00까지 사이에 위 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하는 한편,위 허화평·권정달·정도영 등은 보안사 상황실을 거점으로 하여 각급부대 지휘관의 전화를 도청하는 등의 방법으로 부대동향과 병력이동 상황을 파악,수시로 위 지휘부에 보고하는 체제를 갖추고, ○위 조홍은 미리 계획한대로 12·초경 계엄업무로 수고하는 수도권 주요지휘관들을 보안사령관이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위 장태완·정병주·김진기등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12·12 18·30경 약속장소인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소재 상호불상 한정식집에 오게하여 유인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오전 국군보안사령관 사무실에서 현직 육군 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체포하려면 그 중대성에 비추어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의 사전승인을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절차를 무시한채 총기와 실탄을 준비하여 강제적인 방법으로 연행하라고 위 허삼수등에게 지시하고 이에 따라 허삼수·우경윤·성환옥·최석립·이종민등은 같은날 18·00경 합수부수사관 7명,경복궁 구내 주둔 수경사 제33헌병대 3개 제대 병력 60여명을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소재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집결시켜 총장공관 경비병등을 제압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권총과 엠(M)16 소총으로 무장케 한 다음 18·50경 정당한 이유없이 위 부대를 인솔하고 수소를 이탈하여 서울 용산구 한남동 소재 총장공관에 도착,각자 분담한 임무에 따라 무장한 합수부 수사관들을 총장공관 부관실,공관입구 헌병초소,공관현관등을 제압하고 제33헌병대 병력은 퇴로를 확보하고 19:10경 허삼수·우경윤이 총장공관 응접실로 들어가 정승화 총장에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받아야 하겠으니 녹음준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가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요구하였으나 정승화 총장이 이를거부하면서 수행부관 육군소령 이재천에게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재가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하여 동인이 부관실에서 전화를 걸려고 하자 합수부 수사관 육군소령 김대균,육군소령 한길성,육군상사 박원철등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권총을 난사하여 상관인 이재천과 경호장교 육군대위 김인선등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그들의 머리와 허리 등에 총상을 입히는데 그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그 무렵 허삼수·우경윤은 정승화 총장을 끌고 나오던 중 우경윤이 성명불상자로부터 총격을 받고 쓰러지자 부관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길성이 허삼수를 도와 정승화 총장의 양팔을 붙잡고 박원철은 엠(M)16소총 개머리판으로 응접실 대형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정승화 총장을 위협하면서 함께 끌고 나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태워 19·30경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연행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18·20경 위 이학봉,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정동렬과 함께 서울 종로구 삼청동소재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총장이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은 새로운 혐의 사실이 발견되어 연행.조사하여야 하겠으니 재가하여 주십시오』라고 요구하였다가 현직 계엄사령관을 연행.조사하는 것은 중대한 사안이므로 국방부장관의 의견을 듣지 않고서는 재가를 해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20:20경 위 정동호·고명승에게 국무총리공관을 장악하여 출입을 통제하라고 지시하고 정동호·고명승 등은 그시경 대통령의 승인이나 대통령 비서실과의 협의 없이 청와대 경비업무를 담당하는 제55경비대대 부대대장 육군소령 권중원 및 5분대기조 24명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출동하여 20·40경 대통령 특별경호대장 육군중령 구정길과 그 대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후 그곳 막사에 억류하고 위 제55경비대대 2개 제대 병력 64명을 추가로 출동시켜 그 일대에 배치함으로써 국무총리공관을 장악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21·30경 위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백운택·박희도등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승화 총장의 연행. 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였으나 다시 거절당하고 그무렵 육군 정식지휘계통에서 정승화 총장의 원상복귀를 강력히 요구하면서 피고인등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여 진압할 움직임을 보이자 피고인등은 계엄지역에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사전승인을 받지 아니하거나 명시적인 병력출동 금지명령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지휘하에 있는 병력을 동원하여 선제공격하기로 하고 그 사실을 숨긴채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지시에 따라 출동할 가능성이 있는 제9공수여단,제26사단,수도기계화사단등에 전화를 걸어 그 부대장이나 참모들에게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아 달라고 회유하여 각 부대의 출동을 사전에 저지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23·00경 위 박희도에게 제1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하고 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해오라고 지시하고 위 조홍에게는 수경사 헌병단 병력을 출동시켜 수경사에 있는 육본 지휘부와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지시하고 위 최세창에게는 특전사령관을 체포한후 제3공수여단 병력을 경복궁으로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24·00경 위 장기오에게는 제5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하라고 지시하고 피고인 노태우는 12·12 24·00경 위 구창회에게 중앙청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황영시는 12·13 00·30경 위이상규에게 중앙청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01·10경 위 박희도에게 고려대학교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위 박희도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12·13 00·05경 서울 강서구 공항동소재 제1공수여단 연병장에서 제 1,2,5,6대대 병력 1천5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행주대교·능곡·수색을 거쳐 01·35경 용산 삼각지에 도착한후 제1,2대대 병력은 육본 정문에 근무중인 헌병등을 무력으로 제압한후 무장을 해제시키고 안으로 진입하여 육본 건물을 점령하고 제5,6대대 병력은 국방부정문에 근무중인 헌병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국방부 청사를 점령하고 그 과정에서 제5대대 제15지역대 소속 성명불상 장병들이 국방부 초소에 근무하는 초병 육군병장정선엽에게 총격을 가하여 살해하고 02·40경 국방부장관실에 난입하여 합동참모의장육군대장 김종환등 장성 8명의 무장을 해제시킨 다음 국방부 청사를 수색한 끝에 03·50경 지하 1층 상황실 입구에서 국방부장관 노재현을 발견하여 보안사로 연행하고, ○위 최세창은 12·12 23·30경 특전사령부(이하 「특전사」라 한다) 제3공수여단 육군중령 박종규에게 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 육군소장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하고 박종규는 24·00경 서울 송파구 거여동 소재 특전사에서 제3공수여단 제15대대 소속 1개 지역대 병력 38명으로 하여금 사령부 외곽을 포위케 한 다음,육군대위 김흥열,육군대위 나영조,육군중사 신현수,육군하사 성명불상 6명과 함께 안으로진입하여 위 정병주와 비서실장 육군소령 김오랑이 집무실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육군하사 성명불상 6명이 이들에게 엠(M)16 소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상관인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정병주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제1수장골무지우부개방성분쇄골절상을 입히는데 그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위 최세창은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12·13 02·00경서울 송파구 거여동 소재 제3공수여단 연병장에서 2개 대대 병력 6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천호대교·강북로·한남동을 거쳐 03·00경 경복궁으로 진주하고, ○위 장기오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제5공수여단 제23대대장육군중령 정낙준과 제26대대장 육군중령 장용주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정낙준·장용주 등은 12·13 02·00경 인천 북구 부평동 소재 제5공수여단 연병장에서 제23대대 및 제26대대 병력 4백80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경인고속도로,제1한강교를 거쳐 03·25경 용산 삼각지에 도착하였으나 국방부와 육본이 제1공수여단에 의해 이미 점령되어 있어 효창운동장으로 이동하여 진주하고, ○위 조홍은 12·12 23·30경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에게 당시 서울 중구 필동 소재 수경사에 모여 있던 위 장태완·윤성민,육본 작전 참모부장 육군소장 하소곤,합동참모본부장 육군중장 문홍구 등 육본측 장성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하고,신윤희는 12·13 03·00경 헌병단 소속 육군대위 임대식·윤태이 등으로 하여금 헌병 55명을 지휘하여 사령부 외곽과 1,2층 복도를 포위케 한 후 03·40경 육군대위 한영수,육군대위 이재우,헌병단 정보과장 군무원 최순호,성명불상 헌병 5명과 함께 사령관실로 진입하여 장태완·윤성민·하소곤·문홍구 등을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한영수가 엠(M)16 소총 1발을 발사하여 상관인 하소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좌흉부관통상을 입히는데 그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위 이필섭은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구창회의 지시를 받아 12·13 02·20경 경기 고양군 벽제읍 소재 제29연대 연병장에서 제29,30연대 병력 1천3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구파발·홍은동을 거쳐 03·30경 중앙청으로 진주하고, ○위 이상규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제16전차대대 대대장 육군중령 김호영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김호영은 12·13 02·30경 경기 파주군 금촌읍 아동리 소재 제2기갑여단 연병장에서 제16전차대대 전차 35대와 병력 1백80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통일로·구파발·서대문 등을 거쳐 03·25경 중앙청으로 진주하고, ○위 박희도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위 송응섭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송응섭은 12·13 03·30경 고양시 신도읍 삼송리에 집결한 제90연대 병력 1천1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홍은동·세검정을 거쳐 06·20경 고려대학교 운동장으로 진주함으로써 계엄지역에서 각 지휘관이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없이 부대를 각 진퇴시키고 정당한 이유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각 수소를 이탈하고 상관인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이재천·김인선·정병주·하소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각 미수에 그치고 초병인 정선엽을 살해함과 동시에 피고인 전두환은 수괴로서,같은 노태우는 중요업무종사자로서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것이다.
  • 최 전대통령 오늘 방문조사/「5·18」 본격 수사

    ◎「경복궁 모임」 장세동씨도 소환/주영복 전국방 등 3명 환문/계엄 전국확대 과정 등 추궁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3차장)는 11일 12·12사건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섬에 따라 5·18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에 나섰다.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아직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우선 기초 조사 차원에서 5·18사건 피고소·고발인 가운데 핵심 관련자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수사본부는 이날 5·18 당시 주영복 국방부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피고소인 자격으로,김윤호 광주보병학교장을 참고인 자격으로 각각 소환·조사했다. 수사본부는 주 전국방부장관과 이 전계엄사령관 등을 상대로 전군지휘관회의에서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의결한 과정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군의 지휘계통 및 과잉진압 경위 등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김 전보병학교장에게는 신군부측의 「시국수습방안」기획에 자문역할을 하게 된 배경 등을 신문했다. 수사본부는 또 12·12사건의 핵심 인물인 당시 보안사 대공2과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 이학봉씨와 신군부측에 체포된 육군참모차장 윤성민씨,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씨 등 3명도 불러 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이날 소환자중 주전장관과 이전사령관에 대해서는 철야조사했다. 수사본부는 이씨를 끝으로 이른바 「보안사 4인방」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이와 함께 이날 출석요구에 불응한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한 방문조사를 12일 중으로 실시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본부는 또 당시 「경복궁 모임」에 참석한 수경사30경비단장 장세동씨를 12일 소환할 방침이다. 검찰은 오는 13일로 만료되는 5·18헌법소원에 대한 취하 동의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하지 않기로 했다. 검찰은 또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한 1차 구속만기일이 12일로 끝남에 따라 구속기간연장신청을 법원에 냈다. 한편 12·12 당시 하소곤 육본작전참모부장의 보좌관이었던 김광해(예비역 중령)씨는 이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재가를 받을 때 전두환 전보안사령관이 최전대통령을 권총으로 위협하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최모대위는 육사31기로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사무관 최병수씨지만 최씨는 현재 목격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정승화씨 등 5명 환문/최 전 대통령에 금명 출석요구서

    ◎검찰 「12·12」 수사/전씨 2차 출장조사 12·12 및 5·18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3차장)는 7일 12·12사건 당시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씨와 정씨의 경호대장 김인선씨 등 5명을 소환,조사했다. ○오늘 차규헌씨 소환 한편 수사본부는 12·12사건 당시 경복궁 모임에 참여했던 차규헌 수도군단장 등 5명을 8일중 소환,조사하기로 했다. 또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해 금명 출석요구서를 발송키로 했다. 이날 검찰에 소환된 사람은 정총장과 김인선씨 외에 당시 박준병 20사단장의 참모장 노충현씨,노재현 국방부장관의 부관인 배상기씨,보안사 서빙고 분실장 한길성씨 등이다. 이와 함께 김상희 부장검사 등 수사팀 3명은 이날 하오 2시부터 10시간 가까이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한 2차 출장조사를 실시했다. 검찰은 전전대통령을 상대로 12·12 때 정전총장을 강제 연행한 경위와 5·18사건을 거쳐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이른바 「집권시나리오」가 있었는지 등에 대해집중 추궁했다. 전전대통령은 이날 조사에서 『정계엄사령관의 연행은 10·26사건과 연루됐다는 새로운 사실을 적발,조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서면답변서에 담겼던 내용을 거듭 주장했으며 군사반란 혐의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정전총장을 상대로 12·12 직전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출시키려했는지와 한남동 공관에서 보안사로 연행된 과정,공관에서의 총격전 등을 조사했다. 검찰은 또 당시 보안사 서빙고 분실장 한씨에 대해서는 정전총장의 연행 장소로 서빙고 분실을 택한 경위와 정전총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협박했는 지 등을 조사했다. 당시 20사단장 참모장 노씨에 대해서는 20사단의 병력의 이동여부,국방부장관 부관 배씨에 대해서는 노전장관이 정전총장의 연행 승인과정에서 강압을 받았는지를 신문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당시 하소곤 육본작전참모부장의 보좌관이었던 김광해씨(예비역 중령)가 정계엄사령관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사후재가 과정에서 신군부측이 권총으로 위협하는 광경을 최모대위가 목격했다고 진술한 것과 관련,최씨의 신병확보에 나섰다.
  • 12·12당시 박준병·고명승씨 역할

    ◎박주병­노국방에 「정총장 연행」 결재 강요/고명승씨는 총리공관 경호대 무장해제/하나회 주요멤버·대예편 등 공통점 박준병 자민련의원(62)과 고명승씨(60)는 검찰이 12·12사건의 재수사에 착수한 뒤 처음으로 소환한 하나회의 핵심 회원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박준병씨는 79년 12월 12·12사건 당시 수도권인 성남 육군 종합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의 사단장이었다. 육사 12기 가운데 선두주자였던 박의원은 당시 육사 선배이자 하나회 선배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연락을 받고 경복궁내 수경사 30경비단 모임에 참가했다. 박의원은 이어 신군부측과 육군본부측의 무력충돌이 일어나자 자신이 지휘하는 20사단 참모장에게 전화로 자신의 육성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시하였다. 그가 지휘하던 20사단 61연대 병력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체포이후 서울 장충동으로 출동했었다. 박의원은 보안사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정승화총장 연행문서에 결재하라고 강요한 인사 가운데 한사람이기도 하다. 박의원은 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될 때 주요 군 지휘관회의에서 지지발언을 한뒤 5월21일 20사단 병력을 이끌고 광주로 출동해 진압 작전을 지휘,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박의원은 지난해 10월 검찰에서 반란모의 참여 및 주요임무종사·불법진퇴·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 미수·초병살해등의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박의원은 81년 7월∼84년 7월까지 국군보안사령관을 역임하고 84년 대장으로 예편,고향인 충북 옥천 영동 보은 지구에서 12·13·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지난 10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으로 옮겼다. 육사 15기인 고명승씨는 12·12사건 당시 대령으로 청와대 경호실 작전담당관 겸 상황실장이었다. 고씨는 12·12사건 당일 신군부측이 정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 결재를 받는 동안 외부의 출입을 통제했다. 그는 당시 경복궁에 주둔하고 있던 경호실 55경비대대 3개제대,101경비단 1개소대 병력을 무단 출동시켜 총리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구정길 총리공관 특별경비대장과 특별경호대 헌병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시키고 총리공관을 장악하였다. 이때문에 지난해 검찰의 12·12사건 수사에서 반란 주요임무 종사죄에 대해 집중조사를 받았다. 고씨는 이후 80년 청와대 경호실차장,83년 백마사단장,85년 수도방위사령관,86년 국군보안사령관 등 군요직을 두루거친 뒤 89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병석의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며 쓴「휠체어에 사랑을 싣고」라는 책을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92년부터 민자당 전북 부안 지구당위원장을 맡고 있다. ◎당시 작점참모부장 보좌관 김광해씨 문답/“「권총위협」 작전참가 대가 들려줘”/총리공관 점령뒤 창문통해 현장 목격 12·12당시 반란군측의 총격으로 부상을 당한 하소곤 당시 육본작전참모부장의 보좌관이었던 김광해씨(52·「12·12쿠데타진상규명위원회」간사)는 6일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은 뒤 『합수부측이 총리공관을 장악했을 때 전두환 당시 합수본부장이 권총을 휘두르며 최규하전대통령을 협박하는 장면을 목격한 증인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다음은 일문일답. ­목격자의 신원은. ▲당시 총리공관 접수작전에참가했던 육사출신의 최모대위다.소속은 30경비단인지,101경비단인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으나 당시 중대장이었다. ­최대위로부터 당시 상황을 전해듣게 된 경위는. ▲동해경비사령부 정훈참모로 근무하던 80년말∼81년초 이 부대로 전입한 최대위가 찾아와 「참모님도 12·12의 피해자라고 들었다.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목격담을 들려줬다. ­당시 최대위가 말한 내용은. ▲총리공관을 점령한 뒤 창문을 통해 전씨가 최전대통령을 협박하는 장면을 보았다며 이처럼 군의 명예가 실추된 상황에서 더이상 군생활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전씨가 어떻게 협박했다고 했나. ▲심하게 위협적인 행동을 했다고 들었다.자세한 것은 검찰조사에서 진술했다. ­구체적으로 말해달라.총을 사용했나. ▲군인이 협박하려면 뭘로 하겠나.최대위 말로는 전씨가 대통령 면전에서 권총을 꺼내 휘둘렀으며 대통령은 꼼짝도 못하더라고 했다. ­최대위는 지금 어디있나. ▲81년 제대해 사무관으로 임용됐다.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으나 밝히기는 곤란하다.
  • 전씨,노씨등과 작당해 군사반란/전씨 구속­주요 혐의 내용

    ◎수차례 회합… 군권 장악계획 음모­반란 모의/총장공관 무력 점거… 정 총장 연행­반란 실행 3일 구속수감된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해 검찰이 적용하고 있는 범죄 내용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만큼이나 「화려」하다.영장요지를 분석한 전씨의 주요 범죄혐의 내용을 정리한다. ○거사일정 등 논의 ▷반란모의◁ 10·26사건 합수본부장인 전씨는 군장성 진급심사에서 하나회소속 군인들의 진급이 여의치 않게 되고 권한 남용 문제로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과 잦은 갈등을 빚어 인사조치당할 우려가 있자 정총장을 김재규 내란사건 관련 혐의로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불법 연행해 제거함으로써 군의 실권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79년 11월 중순부터 노태우 9사단장·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황영시 1군단장·박준병 20사단장 등과 수차례 회합,논의한 끝에 12월12일을 정총장 연행 거사일로 정했다.정총장 연행에 반발,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거사 당일 하오 6시30분 만찬초청 명목으로유인하여 부대지휘를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전씨 등은 같은 시각에 보안사와 인근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정총장 추종세력이 무력으로 대응할 경우 병력을 동원해 제압하기로 모의했다. ○초병 현장서 살해 ▷반란실행◁ 12일 하오 7시경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우경윤 육본 범죄수사단장·최석립 수경사 33헌병대장 등은 보안사 수사관과 헌병을 동원,총장공관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 등에게 권총을 난사,제압한 뒤 하오 7시30분경 정총장을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했다.하오 9시30분쯤 정동호 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고명승 대통령경호실 작전담당관 등이 경호실 병력을 동원하여 대통령 관저인 총리공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전씨 등은 최규하대통령에게 정총장 연행·조사를 재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 정식 지휘계통을 제압하기로 결의했다. 하오 11시30분경 최세창 3공수여단장·박종규 3공수여단 15대대장은 특전사령관실에 3공수여단 병력을 투입,총격을 가해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낭 소령을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정 특전사령관에게 부상을 가한 후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박희도 1공수여단장·서수렬 1공수여단 2대대장 등은 13일 0시30분경 1공수여단 병력을 동원하여 육본과 국방부를 점거하고 노재현 국방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국방부 근무초병인 정선엽 병장에게 총격을 가해 현장에서 사망케 했다.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신윤희 헌병부단장 등은 김진선 수경사 상황실장의 지원을 받아 수경사사령관실에 진입,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히고 육본수뇌부의 무장을 해제한 후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장태완 수경사령관,문홍구 합참 대간첩본부장 등을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전씨 수괴역 담당 ▷혐의내용◁ 전씨는 수괴로서 노태우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탈취,반란을 일으키고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의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없이 부대를 동원해 중요 지점을 점거하는 등 부대를 진퇴함과 아울러 수소를 이탈했다.또 김오낭을 살해하고 정병주와 하소곤·이재천·김인선 등을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특별법제정 발표에서 전씨 구속수감까지 ▲11월24일=김영삼 대통령 5·18특별법 연내제정 발표 ▲29일=정동년 등 5·18 고소인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소취하 ▲30일=헌재,「5·18선고」 연기 공식발표 ▲12월1일 하오 6시10분=검찰,전두환씨 2일 하오 3시까지 출두통보 ▲2일 상오 9시=전씨 대국민성명발표후 고향인 합천으로 출발 ▲하오 6시10분=검찰,반란수괴등 6개죄를 적용,사전구속영장 청구 ▲하오 11시23분=법원,구속영장발부 ▲밤 12시=서울지검 수사1과장 등 수사관 9명,전씨가 머무르고 있는 합천 전규명씨 집으로 급파 ▲3일 상오 5시57분=수사관 9명,합천 도착 ▲6시9분=전씨에게 영장제시 ▲6시 34분=전씨,영장집행 완료 ▲6시 37분=전씨 호송차량 합천 출발 ▲10시 37분=안양교도소 도착,수감
  • 전두환 전대통령 구속영장 전문

    피의자는 55년 9월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육군 제1공수특전단장,제1사단장을 거쳐 79년 3월5일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재직중 같은 해 10월26일 소위 「10·26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계엄사령부 소속 「고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쳐 80년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80년 9월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80년 10월27일 제8차 개헌에 의해 실시된 81년 2월25일 제12대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81년 3월3일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88년 2월24일 임기 만료로 대통령직에서 퇴임하여 현재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자인 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중인 79년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유신헌법을 개정해 민주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국회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새로운 헌법질서 창출이 모색되는등 유신체제의 폐지가 기정사실화되고 군 내부에서도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음에 즈음, 합수부 본부장인 피의자의 권한 남용으로 인해 정승화 계엄사령관겸 육군참모총장과 잦은 갈등을 빚는 한편 군장성 진급심사에서 피의자를 중심으로 한 소위 「하나회」 소속 군인들의 진급이 여의치 않게 될 뿐 아니라 피의자의 여러 가지 월권 등이 문제가 되어 정승화총장이 이를 이유로 인사조치할 기미를 보이자 정승화총장을 김재규내란사건 관련 혐의로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불법 연행해 제거함으로써 군의 실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육군 소장으로 제9사단장인 노태우,육군 중장으로 국방부 군수차관보인 유학성,육군 소장으로 제20사단장인 박준병,육군 준장으로 제71방위사단장인 백운택,육군 준장으로 특전사령부 제1공수여단장인 박희도,육군 준장으로 특전사 제3공수여단장인 최세창,육군 준장으로 특전사 제5공수여단장인 장기오,육군 대령으로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인 장세동,육군 대령으로 수경사 제33경비단장인 김진영,육군 대령으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인 허화평,육군 중령으로 보안사 대공처 대공2과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인 이학봉,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인사처장겸 합수부 조정통제국장인 허삼수,육군 대령으로 육본 헌병감실 범죄수사단장겸 합수부 수사2국장인 우경윤,육군 중령으로 수경사 제33헌병대장인 최석립,육군 중령으로 육본 헌병대장인 이종민,육군 준장으로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인 정동호,육군 대령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인 고명승,육군 대령으로 수경사 헌병단장인 조홍,육군 중령으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보안처장인 정도영,육군 소장으로 제30사단장인 박희모,육군 대령으로 제30사단 제90연대장인 송응섭,육군 준장으로 제1군단 제2기갑여단장인 이상규,육군 대령으로 제9사단 참모장인 구창회,육군 대령으로 제9사단 제29연대장인 이필섭,육군 중령으로 제9사단 작전참모인 안병호,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1공수여단 제2대대장인 서수열,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1공수여단 제5대대장인 박덕화,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3공수여단 제15대대장인 박종규,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정보처장인 권정달등과 공모하여, 1979년 11월 중순경부터 피의자는 상피의자 노태우및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준병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장세동 김진영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등과 수차례 회합하여 정승화 총장 연행·조사 문제등을 논의한 끝에 같은해 12월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먼저 정승화 총장 연행에 반발하여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거사 당일 18시30분 만찬 초청 명목으로 유인하여 부대 지휘를 사전 차단하고,피의자를 비롯한 위 15명은 거사 당일 같은 시각에 보안사와 인근 수경사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정승화 총장 추종세력이 무력으로 대응할 경우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하기로 모의하고, 이에따라 피의자는 위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우경윤 등에게 지시,정승화 총장 연행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연행에 필요한 인원의 차출과 차량,권총,M16소총및 실탄을 준비하게 한후, 같은해 12월12일 18시30분경 위 계획에 따라 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박준병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장세동 김진영 등은 수경사 제30경비단실에 집결,보안사에 있는 피의자및 위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과 함께 지휘부를 구성하고 위 조홍 등은 피의자 등의 지시에 따라 같은 시각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김진기 육본 헌병감 등을 연희동 요정으로 유인하여 놓은뒤, 같은날 19시경 위 허삼수 우경윤 성환옥 최석립 이종민 등은 무장한 보안사 수사관 7명과 수경사 제33헌병대 병력 60여명을 동원하여 한남동 육군 참모총장 공관을 무력으로 점거하고,정승화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 등에게 권총을 난사하여 이들을 제압한 다음 같은날 19시30분경 정승화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고, 피의자와 위 이학봉은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여,『정승화 총장이 10·26사건에 연루된 새로운 혐의사실이 발견되었으므로 연행·조사하겠다』면서 그 재가를 요구하였으나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한 상황에서 정승화 총장 강제연행 사실을 인지한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장태완 수경사령관,정병주 특전사령관등이 정승화총장을 원상복귀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같은날 21시30분경 위 정동호 고명승 등이 대통령 경호실 병력을 무단 동원하여 대통령 관저인 총리공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피의자및 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희도 백운택 등이 집단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여 재차 정승화 총장 연행·조사를 재가해 줄것을 다시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 정식지휘계통을 제압하기로 결의하고, 같은날 23시경 피의자는 위 박희도에게는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해 올 것을,위 최세창에게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체포와 휘하 병력의 경복궁 출동을,위 장기오에게는 휘하 병력의 육본 출동을 각 지시하고,상피의자 노태우는 위 구창회에게 휘하 병력의 중앙청 출동을 지시하고,위 황영시는 위 박희도에게 휘하 병력의 고려대학교 진주를 지시하고,위 황영시 백운택은 위 이상규에게 전차부대의 중앙청 출동을 지시하고 위 정도영 등은 위 김정룡 신우식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작전 지원을 지시하고 위정도영 허화평 허삼수 권정달 등은 피의자를 비롯한 지휘부에 각 지휘관의 전화도청및 각 부대 보안부대장의 보고를 통한 각 부대 이동상황을 수시로 보고토록 하는 한편,제26사단 제30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의 지휘관·참모 및 보안부대장에게 합수부측의 위와 같은 조치에 동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이에따라 같은날 23시30분경 위 최세창 박종규는 특전사령관실에 제3공수여단 병력을 투입,총격을 가하여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을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부상을 가한 후 그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하는 한편 같은달 13일 2시경 제3공수여단 병력을 경복궁에 진주시키고, 위 박희도 서수열 박덕화 등은 같은 날 0시30분경 제1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국방부 근무 초병인 정선엽 병장에게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위 장기오는 같은 날 3시경 제5공수여단 병력을 효창운동장으로 진주시키고 위 구창회 이필섭 안병호 등은 같은 날 1시30분경 제9사단 제29연대 병력을 출동시켜 같은 날 3시30분경 중앙청을 점령하고 위 박희모 송응섭은 같은 날 3시30분경 제30사단 제90연대 병력을 고려대학교에 진주시키고 위 이상규는 같은 날 1시30분경 제2기갑여단 제16 전차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같은 날 3시30분경 중앙청을 점령하고, 위 조홍 신윤희는 같은 날 3시40분경 위 김진선의 지원을 받아 수경사 사령관실에 진입,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총격을 가하고 부상을 입게 한 후 육본 수뇌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장태완 수경사령관,문흥주 합참 대간첩대책본부장 등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함으로써 피의자는 수괴로서,상 피의자 노태우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탈취,휴대하고 반란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의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 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중요지점을 점령하는 등 부대를 진퇴함과 아울러 수소를 이탈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위 정병주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하소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이재천 김인선을 각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친 자로서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염려가 있는 자임.
  • 전두환씨 오늘 구속/반란수괴 등 6개죄 적용 영장

    ◎전씨,소환 불응 선언… 합천행/검찰,서울 압송 방침 12·12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 3차장)는 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검찰소환에 불응함에 따라 전전대통령에 대해 군사형법상 반란수괴 등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이날 하오 11시23분 발부받았다. 구속영장은 이 사건 주임검사인 김상희 부장검사가 청구했으며 서울지법 형사항소3부 신흥철 판사가 심리,발부했다. 이에 따라 수사본부는 이날 자정쯤 이수만 서울지검 수사1과장을 팀장으로 하는 수사관 9명을 승용차편으로 전씨가 머물고 있는 경남 합천으로 급파했다. 검찰은 전씨에게 영장을 제시한 뒤 신병을 확보하는대로 안양교도소로 압송,수감해 조사하기로 했다. 이종찬 본부장은 『전씨를 검찰청사로 데려 오지 않고 수감 즉시 조사를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사본부는 또 비자금사건과 관련,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된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일단 오는 4일 기소한 뒤 군사반란혐의를 추가하기로 했다. 이날 출국금지된 전전대통령에게적용된 죄목은 반란수괴죄를 비롯,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불법진퇴 등 6가지다. 수사본부는 영장에서 『전전대통령은 수괴로 노태우전대통령 등과 작당해 병기를 탈취,반란을 일으켰으며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의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 없이 부대를 인솔,중요한 지점을 점령하는 등 부대를 진퇴함과 아울러 수소를 이탈했다』면서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전전대통령은 10·26 직후 보안사령관과 합수본부장으로 군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최규하대통령의 재가 없이 공수부대와 20사단 등을 동원,정승화계엄사령관을 강제로 연행하는 한편 특전사령관실에서 총을 발사,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낭소령을 살해하는 등 일련의 과정에서 2명을 숨지게 하고 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것이다. 영장에는 피살자로 김소령과 초병인 정선엽병장,살해미수 대상으로는 하소곤 당시 육군작전 참모부장,이재천 육참총장수행부관,경호장교 김인선대위 등이 명시됐다. 최환 서울지검장은 이날 『전전대통령이 성명을 통해 검찰의 소환요구에 협조하지 않겠으며 사법처리를 하려면 이미 제출된 자료에 의거해 진행하라고 밝힌 만큼 소환한다 하더라도 특별한 진술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12·12에 국한해 영장을 발부받았다』고 설명했다. 수사본부는 전전대통령에 대한 5·18사건 수사를 앞으로 제정될 특별법의 내용에 따라 진행할 계획이며 특별법 제정이 늦어지면 일단 구속기소한 뒤 조사하기로 했다. 수사본부는 또 이날 상오 11시40분쯤 채동욱·임성덕·이재순검사 등 검사 3명을 비롯한 수사팀 8명을 서울구치소에 파견,노태우전대통령을 상대로 12·12 및 5·18사건 때의 구체적인 역할분담 등 사건의 전개과정에 대해 3시간 남짓 집중 조사했다. 수사본부는 이와 함께 최규하전대통령에 대해 참고인 자격으로 직접 조사를 벌인다는 방침 아래 최전대통령의 측근을 통해 조사여부를 협의중이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통보를 받았다. ◎문민 도덕성 공격 전두환 전 대통령은 2일 12·12 및 5·18과 관련한 검찰의 소환조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또 현정부의 도덕성과 이념을 공격함으로써 5·18특별법 제정에 대해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전씨는 이날 연희동 자택 앞에서 발표한 성명에서 『이미 종결된 사안에 대한 검찰의 수사재개는 진상규명이 아니라 현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으로 봐 소환요구 등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며 검찰수사에 대한 전면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는 『다만 검찰이 사법처리를 하려한다면 이미 제출한 자료에 의해 진행해주기 바란다』며 『그에 따른 사법부의 어떠한 조치든 수용하고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전씨는 검찰소환 불응이유에 대해 『지난 13대국회 청문회와 장기간에 걸친 검찰 수사과정을 통해 12·12,5·17,5·18사건과 관련,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답변을 했으며 검찰도 적법절차를 거쳐 수사를 종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6년전인 89년12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야당총재의 영수회담 결정에 따라 국회 증언대에서 과거문제를 매듭짓게 됐음에도 이문제가 또다시 제기돼 온 나라가 극도의 혼란과 불안에 빠져 있다』고 주장하고 현정부의 통치이념등에 대한 김대통령의 설명을 요구했다. 전씨는 3당합당을 거론하며 『내가 국가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내란세력과 야합한 김대통령 자신도 응분의 책임을 지는 게 순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대통령이 이승만 정권을 친일정부로,3·5·6공화국을 내란에 의한 범죄집단으로 규정,과거 모든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좌파운동권의 운동방향과 같다』며 『김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역사관을 분명히 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씨는 성명발표 직후 측근들과 함께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한 뒤 고향인 합천으로 떠났다. 한편 전씨의 핵심측근인 이양우 변호사는 이날 전씨의 대국민성명 발표후 시내 장교동 사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향후 대응방안과 관련,『가능한 한 모든 법적 대응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또 『이같은 대응은 검찰의 수사방향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며 『현재까지는 정치적 대응은 고려치 않고 있다』고덧붙였다. 이씨는 5공 출범전후를 소재로 한 정치드라마를 방영중인 SBS와 MBC 양TV방송사에 대해 『민사·형사를 모두 포함해 즉각적으로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 지각입소 예비군에 장교가 공포탄 발사

    【청주=김동진 기자】 29일 상오10시쯤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육군 제746 예비군관리대 정문앞에서 이 부대 중대장 김현중 대위(28)가 입소시간에 늦어 부대로 들어가지 못한 예비군을 향해 공포탄 1발을 발사했다.예비군들은 김대위의 처벌과 책임자사과 등을 요구하며 2시간여동안 농성했다.
  • 부산 정치파동(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5)

    ◎우남,「대통령 직선」 시도… 야서 강력 반대/계엄 선포·민의 조작… 발췌개헌안 통과 1952년 초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유엔군과 공산군이 51년 11월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양쪽의 접촉선을 일단 군사분계선으로 인정키로 합의한 뒤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1월 초 서부전선인 문산 북쪽 두매리고지와 중동부전선의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충돌이 있었을 뿐 양쪽의 작전은 수색·정찰,간헐적인 포격전 등 일상적인 군사활동에 그쳤다.이 군사분계선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휴전까지 이어져 지금의 휴전선으로 고정됐다.한편으론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정전회담이 거듭 열려 휴전과 포로교환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쯤 후방은 전쟁의 공포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안정을 되찾아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1월19일에는 제32회 전국체전 동계대회가 수원에서 열리기도 했다.그러나 백성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월남 동포 1백20만∼1백50만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두 7백만명가량의 피란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대부분 도시로 몰리는 바람에 생필품은 매우부족했다.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의 경우 전쟁전 43만명이었던 인구가 1백50여만명으로 늘어났다.52년 초 물가는 「6·25」전보다 13배나 뛰어올라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치권에서는 헌정사에 큰 오점을 남긴 「부산정치파동」이 서서히 싹터갔다.부산정치파동은 1952년 5월25일 계엄령선포에서 7월7일 제1차 헌법개정,이른바 발췌개헌 공포에 이르기까지 부산에서 벌어진 일련의 정치사건들을 말한다.그 발단은 51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에 따라 정부가 발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서 비롯됐다. ○첫 표결 압도적 부결 이승만은 개헌발의에 앞서 자유당을 창당,이를 발판으로 국회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자유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원내세력과 지지하는 원외세력으로 갈라져 결국 창당 한달여만에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으로 분리됐다.이런 가운데 헌법개정안은 해를 넘겨 1월18일 국회 표결에 부쳐졌는데 찬성 16,반대 1백43,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이승만은 자신을 반대하는 국회에더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대신 충성을 다하는 경찰력을 이용,민의를 동원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이때부터 원외자유당 주도로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헌법규정에도 없는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이는 등 갖은 수법을 동원해 국회에 압력을 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먼저 4월25일 실시한 읍·면의원선거와 5월10일의 도의원선거 등 첫 지방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원외자유당이 압승을 거두었다.이승만은 지방의회와 원외자유당을 양대 축으로 삼아 직선제개헌안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내각책임제 개헌에 앞장서던 서민호 의원이 4월24일 육군대위 서창선을 저격한 사건도 반이승만파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계기가 됐다.서의원은 지방의회선거 감시차 전남 순천에 갔다 숙소에서 술취한 서대위와 시비가 벌어졌다.서대위가 먼저 권총 6발을 쏜 뒤 서의원이 응사했지만,서의원은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국회는 서의원의 살인이 정당방위인데도 그를 구속한 것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서의원 석방결의안을 의결했다. ○대낮 야 의원에 테러 서의원이 5월19일 석방되자 부산 거리에는 이를 항의한다는 구실로 조작된 민의가 활개를 쳤다.민족자결단·백골단·땃벌떼 등 정체모를 집단들이 때를 만난듯 거리를 누비며 대낮에 야당의원들에게 공공연하게 테러를 가했다.이들은 또 「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며 정부·국회·대법원 청사를 습격하기도 했다.피란수도 부산시내에는 공포 분위기가 확산됐다.때맞춰 이승만지지파가 주를 이룬 7개 도의회가 국회해산 요구를 결의했고,지방의회 대표는 반민의국회 해산궐기대회를 열었다. 정부의 공세는 5월25일 0시를 기해 부산·경남북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공비소탕을 내세운 계엄을 악용,야당의원을 철저히 탄압한 것이다.계엄당국의 언론 검열이 시작됐고 25일 밤부터 서민호의원 등 내각제 지지의원들을 잡아들였다.26일에는 헌병대가 국회의원 40명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에 달아 끌고갔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우방들의 비난이쏟아졌다.맨 처음 반응은 유엔한국통일 부흥위원단(UNCURK)에서 나왔다.언커크는 5월28일 이승만에게 성명을 보내 『한국에서 유엔을 대표하는 본 위원단은…부산시의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현재 체포·구금된 국회의원들을 석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트루먼 미국대통령도 항의각서를 보냈지만 이승만은 「계엄령은 공비토벌을 위한 것이며,국회의원 체포는 공산당과의 공모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둘러대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어 6월25일 반이승만 세력에게 결정타를 먹인 「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했다.부산 충무로광장에서 벌어진 「6·25기념식전」에서 유시태(당시 62)가 이승만에게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그러나 총알이 발사되지 않는 바람에 이승만은 암살을 면할 수 있었다.이 사건으로 유시태에게 신분증과 옷을 빌려준 민주국민당 김시현의원 등 야당의원 5명이 배후세력으로 체포됐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은 온갖 테러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재집권 야욕을 꺾으려던 야당에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장택상의 수정안수용 이처럼 반이승만 세력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장택상 국무총리가 제안한 제3의 개헌안이 등장했다.이 개헌안이 바로 정부의 안과 국회의 안을 적당히 절충한 「발췌개헌안」이었다.하지만 대통령직선제·양원제를 뼈대로 한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개헌의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국회안을 몇가지 수용하긴 했지만 이는 야당의원들에게 타협할 명분을 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했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으로 기진맥진한 야권은 장총리의 「발췌개헌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52년 7월4일 밤 발췌개헌안은 기립표결로 통과됐다.출석 1백66명 가운데 1백63명이 찬성했고 3명이 기권했다.정부는 7월7일 개정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부산정치파동은 막을 내렸다.이 개헌에 따른 정·부통령 직접선거가 8월5일 실시돼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 권좌에 올랐다. 우리 헌정사에 첫 개헌으로 기록된 발췌개헌은 이처럼 불미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후 거듭된 정치파동의 선례가 됐다.역사는 부산정치파동을 「여야간의 정치운영 방식을 폭력을 통한 극한대립 양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헌정사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만든 분기점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부산 정치파동」에 미 직접개입 주장/휴전협상·군사작전에 악영향 판단/한때 이승만 제거·임정수립을 암사 1952년 한국 정정이 부산정치파동으로 위태로워지자 미국은 한때 이승만 대통령의 제거를 고려하는 등 대책 마련에 크게 고심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미국 정부의 입장을 보여주는 극비문서를 최근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정책수립처 문서」(Records of Policy Planning Staff)더미에서 발굴했다.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이 문서는 「한국에서 정치적 위기의 지속」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3쪽분량.미 국무성 유엔과장 힉컬슨이 1952년 6월13일 작성,정책수립처의 니체를 포함해 국무차관보 매튜,극동과의 앨리손과 존슨등 간부들에게 발송한 것으로 돼 있다. 힉컬슨은 이 문서에서 부산 정치파동의 해결책으로 미국의 직접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그는 미 국무성이 제한적인 차원에서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전제아래 위기의 책임을 이승만보다는 그의 측근인 이범석·임영신·윤치영에게 돌렸다.그 까닭은 한국에서 이승만을 대체할 만한 『전 국가적인 명망성』을 지닌 인물이 없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때문에 이승만의 지위는 인정해 주면서도 주변의 추종자를 거세함으로써 그의 독재적 경향을 제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며칠 뒤 발췌개헌안을 내놓은 장택상 국무총리를 미국이 비난대상에서 제외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미국은 지지부진한 휴전협상보다 한국의 정치적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미국은 이 위기가 휴전협정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의 시행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따라서 이승만을 제거하고 임시정부를 세울 계획이 한때 있었음을 이 문서는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미국의 개입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음을 밝혔고 이 내용대로 미국은 발췌개헌안 통과­이승만 재선의 과정을 묵인하게 된다.
  • 육군장교 음주운전/택시충돌 2명 사망

    2일0시50분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 의왕∼과천간 고속화도로 청사 IC 부근에서 육군 모부대 소속 김명화대위(32)가 음주 상태(혈중 알코올 농도 0.1%)에서 서울1포 4728호 쏘나타 승용차를 몰고 가다 같은 방향으로 가던 서울 2자 1014호 프린스 개인택시(운전사 손남주·34·안산시 선부동 한양아파트 126동 606호)와 부딪혔다. 이 사고로 택시가 전복되면서 운전사 손씨와 35세 가량의 남자승객이 그자리에서 숨졌다.
  • 「4천억 발언」 진원지 추정/송석린·김익창씨는 누구

    ◎정가 맴돌며 정치인과 친분 유지/우이동 「고향산천」 주인… 5공인사와 친밀­김/총선 3번 낙선… 정계 실력자와 교분 과시­송/이우채·이삼준·이종옥씨는 체육동호인 모임간부 우리사회 전반을 뒤흔들고 있는 「전직대통령의 4천억원 가·차명 계좌설」.서석재 전 총무처장관이 9일 검찰에 출두하면서 이 설의 「진원지」가 드러나고 있다.검찰은 「4천억원 보유설」에 대한 서전장관의 발언이 김일창씨(55·요식업)로부터 나온 것으로 확인했다.그러나 김씨가 『내가 최초의 발설자가 아니다』라고 발뺌하고 있어 자칫 진원지에 대한 수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위험성마저 안고있다. ▷김일창◁ 현재 서울시 배드민턴연합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서울 도봉구 우이동 북한산 기슭에 2백억원대에 달하는 대형음식점 「고향산천」의 실제 소유자로 전해지고 있다.정치권 주변을 맴돌면서 특히 「5공」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김씨는 87년 영신상호신용금고 회장으로 있으면서 1백60억원을 빼내 부동산투기를 하다 횡령혐의로 대검 중앙수사부에 의해 구속돼 3년6월을 복역한 경험을 갖고있다.한때 사채시장에서는 한꺼번에 2백억∼3백억원을 동원할 수 있는 큰손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지난 78년에는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남 홍성·예산·청양에 출마했다가 선거법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다.85년 총선에도 출마를 고려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로 정계입문을 노리면서 정치권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았다.「고향산천」을 자주 드나들던 서전장관과 인연을 맺은 것도 그의 정치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게 주변의 평이다. 여기에 배드민턴을 통해 동호인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냈다.특히 서울시 배드민턴협회 회장을 맡고있는 송석린씨(61)와 절친한 사이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송씨로부터 「수천억원을 가진 5공 실력자의 가·차명 계좌」에 대한 실명방안 요청을 받고 서전장관에게 이를 부탁한 것도 이같은 친분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씨는 전두환전대통령의 형인 전경환씨와도 가까운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송석린◁ 서전장관에게 「4천억원 가·차명계좌」의 실명전환방안을 간접 타진한 것으로 밝혀진 송씨는 GMG라는 상호의 오퍼무역상을 하면서 서울시 배드민턴클럽연합회장을 맡고있다.오퍼무역상은 서울 서대문구 평동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의 2층에 자리한 20평 크기의 사무실로 5∼6명의 직원이 정수처리기 등 주로 환경상품을 국내에 판매하는 수입중개회사다. 직원들은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매사에 정열적이었으며 직원 회식때도 칼국수를 먹는 등 검소한 성품이었다』고 전했다. 송씨는 63년 6대 총선때 충남 대덕·연기에서 민한당후보로 처음 국회의원에 출마,낙선의 고배를 마셨다.그 뒤 9대와 10대에도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정치권에서 배회,야당가에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송씨는 국회의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근 서울 종로구 수송동 모한정식집에 자금을 대고 정치인들과 꾸준히 교분을 쌓아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특히 지난해 11월 서울시 생활체육대회를 열면서 최형우 당시 내무부장관 등을 비롯,국회의원 15명을 초청해 회원들에게 정치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육군 대위출신인 송씨는 5·16군사쿠데타 직후 당시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김종필 부장시절 조정관으로 일한 경력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씨는 그러나 전직대통령의 비자금 문제에 대해 『카지노업체가 갖고있는 1천억원의 실명화를 거론했을 뿐』이라며 자기가 전직대통령의 가·차명계좌의 실명화를 의뢰한 「대리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평소 잘알고 지내던 이우채씨(54)는 서울시 관악구 사당동에서 한약 건재상을 하며 1년전부터 관악산에서 매일 아침 모이는 배드민턴 동우회 「거북이 클럽」의 회장을 맡고 있다. 이씨는 이전에도 이 클럽의 회장을 하다가 94년초 1년 임기의 회장을 다시 맡았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 이씨는 방송통신대 법과를 졸업했고 현재 부인과 2남2녀를 두고 있다. 또 이씨와 동서인 이삼준씨(54·이태원 국제상가 연합회 사무장)는 거북이 클럽의 전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모 빠찡꼬 관련인사 이모씨(43)와 이우채씨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삼준씨와 사업관계로 알고 지내는 이종옥씨(45·부일종합통상 대표)란 사람도 거북이 클럽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 검찰조사를 받은 이우채·이종옥씨는 이모씨로부터 거액의 실명화 방법을 타진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주민등록번호와 통장계좌번호를 받아 김일창씨에게 전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해방전후 대형사건 판결문 필사본 발견/김종휘씨,부산지법에 기증

    해방 전후 우리나라의 정치 및 사회상과 맞물린 대형 사건·사고의 판결문의 필사본들이 발견됐다.당시 법원에서 입회 서기로 일했던 창원지방법무사회 김종휘(77)씨가 소장해 오다 최근 「1백년사」를 준비하는 부산지법에 기증했다. 지난 52년 4월24일 전남 순천에서 발생한 서민호 의원의 육군대위 총격살해 사건과 45년 9월 부산에서 결성된 민주노동당 당수 김억조씨의 사기사건,현직 경찰관 신판득씨의 강도치사 사건,53년 1월 다대포 앞바다에서 발생한 여객선 창경호 침몰사건(3백65명 사망)의 판결문 등이다. 이밖에 해방 직후의 사상논쟁 또는 좌·우익간의 갈등에서 빚어진 공안사건 관련 판결문과 영남지역 법원 청사의 전경을 담은 사진도 있다.
  • 미 한국전참전비 27일 워싱턴서 제막

    ◎“자유민주주의 수호”/미 국민정신 되새겨/한·미 정상·참전용사 등 참석 성대한 행사/한반도서 숨져간 3만3천여 병사의 넋 기려/부산 피란당시 텐트촌 재현 등 다양한 행사도 27일 제막식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는 워싱턴의 한국전참전비는 단순히 한국전쟁에서 싸우다 숨진 미군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고 지키려 애쓴 미국민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한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매년 수백만 미국민들이 찾아오는 워싱턴 한복판 몰(Mall)공원에 「자유는 공짜로 얻는게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세워진 한국전참전비는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에서 숨져간 3만3천여 영령들의 귀중한 자유수호 의지를 역사 속에 길이 빛나게 할 전승기념비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더욱이 한국전참전비가 워싱턴 한가운데 자리잡게 됨으로써 한국전쟁이 2차대전 후 냉전체제 아래서 최초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간 전쟁으로, 또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보병전쟁으로 미국이 끝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전쟁이라는 미국역사상,미군전사상 새롭게 자리매김되는 의미 또한 갖는다. 이같은 역사적 의미를 뒷받침하듯 오는 27일 김영삼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대통령,그리고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과 참전용사,한국전 참전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성대한 제막식과 이를 전후해 개최되는 각군 주관 행사 등은 이른바 「미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내용들로 돼있다. 또 전장터를 의미하는 삼각형 부분은 삼각형의 긴 꼭지가 원의 중앙에 도달케 돼 있으며 주진입로가 되는 좌측 변에는 한국을 비롯한 유엔참전국들의 국명을 돌판에 새겼고 우측 변에는 화강암 벽면을 길게 설치해 한국전쟁중 미군활동의 전체과정을 부조했다. 미국 참전비건립위원회와 한국전참전기념사업위원회의 주관으로 미육군 공병대가 시공한 이 참전비는 92년6월에 착공,3년1개월만에 완공되는데 총비용은 1천8백만달러가 들었으며 한·미 양국 기업들의 모금과 기념주화 판매 등 수익사업 등으로 충당됐다. 참전비 제막식 관련행사는 다음과 같다. ◆26일=낮 12시몰공원에서의 텐트촌(Tent City) 개장식으로부터 본행사가 시작된다.부산 피난 당시를 연상케 하는 이 텐트촌에는 각국 참전재향군인회,정부유관기관 등 현재 16개 단체가 입주를 신청했다.하오 7시에는 미해병대가 이와지마 기념비에서 미해병대의 황혼(Sunset) 퍼레이드를,미육군은 백악관앞 엘립스광장에서 군악연주회를 갖는다. ◆27일=상오 10시 알링턴 국립묘지의 무명용사묘에서 진혼제를 시작으로 하오 3시에는 양국 대통령이 참석,제막식을 갖는다.하오 8시부터는 불꽃놀이 등 축제가 열리고 같은 시각 미해병대의 이브닝 퍼레이드가 열린다. ◆28일=상오 11시 워싱턴기념탑 아래 광장에서 3만여명의 참전용사와 현역병이 참가하는 대형 열병식이 거행된다.20세기 들어 처음이며 남북전쟁 이후 최초로 행해진다.하오 1시에는 해군기념비에서 진혼제가 열린다. ◆29일=상오 11시 참전용사 귀환 환영 퍼레이드가 시내 중심가에서 펼쳐지며 하오 4시 텐트촌의 철거로 모든 행사를 끝맺는다. ◎“참전비는 전장서 잃은 내몸의반쪽”/참전기념위 사무국장 웨버 예비역대령/“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무한한 긍지”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이 참전비를 세움으로써 한국전쟁의 끝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한국전참전비 공사장에서 만난 윌리엄 웨버 예비역 육군대령(69)은 베트남참전비가 10여년 전에 세워진데 비해 한국전참전비가 이제 세워진 것은 너무 늦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80년 대령으로 예편한 뒤 한국전참전기념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해온 그는 『한국전쟁은 2차대전 이후의 냉전체제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명분있는 전쟁이었다』면서 『피로 지켰던 한국이 오늘날 자유와 민주주의를 잘 지켜나가는 것을 볼 때 참전용사의 한사람으로 무한한 긍지와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전에서 몸의 반을 잃고 한평생을 살아온 내게 이 참전비는 뒤늦게 되찾은 내몸의 반쪽』이라는 개인적 의미 부여도 서슴지않는 웨버 대령은 켄터키 주둔 미 187 공수여단의 팀장인 대위로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적후방 교란 임무를 띠고 8월말 평남 순천에 투하되었다.다음해 2월 중국군과의 원주전투에서 한쪽 팔과 다리,눈을 잃고 본토로 후송될 때까지 7개월간 적진 구석구석을 낙하산을 타고 누볐다.타고난 군인이었던 그는 퇴원 후 정부에서 제의해온 많은 좋은 자리들을 거부하고 군에 남기를 희망,2차대전 때부터 37년간 미육군을 지켜왔다. 그는 또 『한국인들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피흘림에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면서 『자유와 민주를 지킨다는 일념에서 아무 조건없이 낯선 땅 한국을 찾았을 뿐인 만큼 그 관계는 「빚」으로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우정」으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새로쓰는 한국현대사」 속의 두거인 재조명

    ◎이승만·김구의 우정과 갈등/황해도출신 한살산… 상해 임정활동 공통점/해방후 우남은 「군정」·백범은 「협상」을 추구 조선왕조 끝시기로부터 오늘날 남북대립시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배출됐다.그 가운데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는 앞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우남은 18 75년에,백범은 18 76년에 태어났다.모두 황해도 출신으로 사실상 동년배지만 백범은 우남을 평생동안 형님으로 모셨다.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우남은 성장하면서 서양문물에 눈을 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하버드대학,프린스턴대학 등에서 국제정치와 국제법을 전공했다.그리고 일찍 기독교 정신문화를 받아 들였다.이와는 달리 토착적 성장의 길을 걸은 백범은 서당 글공부가 교육의 전부였다.또 토착종교 동학에 가담해 왜병과 싸우는 등 민족적 정열을 불살랐다. 두사람은 1919년 3·1운동 직후 시차를 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 연결고리를 맺는다.우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백범은 마지막 주석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일선에 나섰던 것이다.그러나우남과 백범은 임정과의 연결에서 질적 차이를 드러냈다.백범은 임정을 떠나지 않은 채 그 간판을 해방의 시점까지 지킨데 비해 우남은 미국을 무대로 외교 선전 측면의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 환국해서는 독립정부 수립운동에 앞장 섰다.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미·소·영·중 4개국 외무장관 합의 의정서」가 발표되었을 때는 손을 맞잡고 싸웠다.그러나 두 지도자 사이에는 차츰 노선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우남은 강력한 반소·반공론에 입각해 남한의 단선·단정노선을 제기하고 나섰다.이 노선에 반대한 백범은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을 앞세웠다. 1947년에 공식화된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우남이 주장해온 단선·단정론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그리하여 미국의 주도아래 국제연합은 19 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대한민국을 건국시키는 일을 서두르게 됐다.남한의 단선·단정은 분단체제의 고착은 물론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 일으키게될 것이라고 비판한 백범은 남북협상을 추진했다.백범은 김규식과 함께 1948년 평양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석한다.그러나 북한은 곧 세워질 공산정권의 합법성을 쌓는데 두 애국지도자의 충정을 이용했을 뿐이다. 5·10총선거에 따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성립됐다. 국회의장에 선출된 우남은 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5·10총선을 거부했던 백범은 자신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벌였다. 백범의 통일운동은 고귀했으나 외로웠다.결국 1949년 6월26일 육군대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을 꿈꾸던 그의 숭고한 사상은 오늘날 까지도 우리의 지표가 되고 있다. 우남은 건국 초기에 험난한 길을 걸었다.특히 1950년6월25일 북한의 전면 남침을 맞아 미국과 국제연합 지원아래 싸워서 국가를 수호했다.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는 확실히 그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사사오입개헌과 1960년 3·15부정선거는 그에게 오명을 안겨 주었다.그는 전 국민을 분노시킨 4·19혁명에 의해 하야할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 종합해 생각해 보건대 백범 두분 모두 우리 배달겨레에게 소중하게 기억된다. 우남은 건국과 국가수호라는 업적을 남겼으며 백범은 분단상황에서 민족의 통일을 잊지 않게 하는 정신적 자산을 남겼다.두분은 훌륭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우남의 「독립정신」과 「일본내막기」는 그의 뛰어난 국제정치 안목을 보여 주고 백범의 「백범일지」는 그가 민족의 자유와 자존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말해 준다.
  • 보훈가족 출신 「유일한 별」 유보선 준장

    ◎휴전선 무너지는 날 빨리 왔으면…/「6·25 산화」 부친 뜻 새삼기려/어머니 모시고 금강·백두산 구경 가는게 꿈 『6·25때 전사한 부친의 뜻을 잇기위해 군인이 됐지만 아직도 통일의 날은 알 길 없어 안타깝습니다』 40여만명에 이르는 6·25 보훈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장군⊃이 된 유보선 육군준장(육사24기·49). 유장군은 광복 50주년이자 6·25 발발 45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합동참모본부 자신의 사무실에서 각별한 감회에 젖어들었다. 『남북통일의 선봉으로 탱크를 몰고 휴전선을 돌파할 날이 언제쯤일까』 『45년 반평생을 홀로 살아온 어머니(김봉희·71)의 「한」은 언제쯤이나 풀어드릴 수 있을까』 어느덧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둘 늘어난 유장군은 귀밑이 새파랗던 시절,육사에 지원할 당시가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가 64년 육사에 지원한 것은 오로지 부친의 유지를 이어 남북통일에 몸을 바치기 위해서였기 때문. 부친 유상재씨는 48년 7기로 육사에 입교해 대위로 근무중 6·25를 맞아 전사했다.그러나 유해를 찾지 못해 유장군등 유가족들은 해마다 현충일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위패에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하고 있다. 사후 소령으로 추서된 유상재씨는 전쟁발발 5일전 육군헌병학교에 입교했다가 전쟁이 터지자 학교에서 나와 전선투입을 자원했었다.그는 50년 8월26일 얼굴과 목등 3군데에 총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돼 치료를 받던중 미처 완쾌되기도 전에 다시 전쟁터로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같은해 12월18일 2사단중대장으로 전투를 치르다 다음해 1월초 가평전투에서 전사했다. 유장군은 그동안 부친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지난해 비로소 부친의 실종처리서를 찾아내는데 성공,부친의 사망경위를 파악했다. 유장군은 『5살때 부친의 철모와 권총을 갖고 장난을 치다 넘어져 다친 기억이 있다』면서 『이런 기억 때문에 서울고를 졸업한뒤 곧바로 육사를 지원했고 군에서도 통일의 선봉장이 되기 위해 기갑병과를 택했다』고 말했다. 유장군이 당시 생도들에게 인기가 낮은 병과를 택한 것은 서독육사 재학중의 경험때문.우리나라는 65년 처음으로 육사생도 가운데 1∼2명을 뽑아 서독육사에서 수학시켰으며 이 때 유장군이 선발돼 서독육사 졸업 1호를 기록했다. 그는 68년 소위로 임관,소대장과 전차중대장·전차대대장·기갑여단장을 거쳤으며 91년7월 준장진급했다. 그는 『앞으로 남은 꿈은 금강산·백두산 구경하는 것』이라면서 『북한에게는 결코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된다는게 지금까지의 경험』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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