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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태우 국가장서 ‘쿠데타 옹호’ 추도사 낭독한 전직 총리

    노태우 국가장서 ‘쿠데타 옹호’ 추도사 낭독한 전직 총리

    국가장으로 치러진 고 노태우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전직 국무총리가 12·12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듯한 추도사를 낭독해 논란이 예상된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는 3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 영결식 추도사에서 “(노 전 대통령 등 정규 육군사관학교 1기생들에게) 한국 정치는 국방의식이 전혀 없는 난장판으로 인식됐다”면서 “이것이 그들(육사 1기생)로 하여금 통치 기능에 참여하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정규 육사 1기 졸업생이 바로 각하와 그 동료들이었다. 이들은 목숨을 담보로 투철한 군인정신과 국방의식을 익혔을 뿐 아니라, 국민의 문맹률이 거의 80%에 해당하던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현대 문명을 경험하고 한국에 접목시킨 엘리트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통치기능 참여)는 이 1기생 장교들의 숙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는지도 모르겠다”면서 “이 숙명을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 바로 ‘군 출신 대통령은 내가 마지막이야’라고 말씀한 배경이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노 전 총리의 추도사는 고인을 회고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나 군부의 12·12 쿠데타 및 군부독재의 정당성을 옹호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라 논란이 예상된다. 서울대와 미국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노 전 총리는 노태우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1991년 제22대 국무총리에 임명돼 4개월간 재직했다. 당시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격화하고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씨가 입학 두달 만에 경찰 폭행으로 사망하는 등 시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KBS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노 전 총리는 “시끄러우니까 물러나라는데, 앞으로도 민주화 과정에서 시끄러운 일이 많으리라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으로 여론은 더욱 들끓었고, 여당인 민주자유당 내에서도 비판이 나오면서 그는 총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한편 노 전 총리는 과거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별명으로 사용됐던 ‘물태우’도 거론, “오랫동안 권위주의에 익숙했던 이들은 각하를 ‘물태우’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지만 각하는 이를 시민사회 출현과, 그에 따른 능동적 관심이 싹트는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6·29 민주화선언’에 대해 “세간에서는 대선 승리를 위한 일대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이념,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성공, 전두환 대통령의 흑자경제의 성과로 이어진 한국의 사회 구조 변화를 확인하는 선언이었다”고 평가했다. 또 “지금 우리는 핵으로 위협받는 북한에 대해 적 개념까지 지워버린 실존적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종족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고통을 겪고 있는 중”이라며 “역사는 인간들이 만들면서 그 역사를 인간들이 제대로 이해하기는 정녕 어려운가보다”라고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노 전 총리의 발언과 관련, 고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공식 논평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당 관계자는 “당시를 우리나라 민주화의 최대 암흑기로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또다른 상처가 될 발언”이라고 비판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 [취중생] 변희수 전 하사의 1년 9개월 투쟁기…軍 제도 개선 나설까

    [취중생] 변희수 전 하사의 1년 9개월 투쟁기…軍 제도 개선 나설까

    “저 하나로 성소수자들이 국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복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해 1월 고 변희수 전 육군 하사는 처음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여군으로 군에 계속 근무하고 싶다며 경례를 외치던 그의 모습은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 9개월이 지난 지금, 변 전 하사는 세상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커다란 울림을 줬던 그의 기나긴 투쟁기를 되짚어 보겠습니다. 1년 9개월의 길었던 싸움…법원 “전역 부당” 육군 5기갑여단에서 근무하던 변 전 하사는 2019년 11월 태국에서 성전환(성확정) 수술을 받았습니다. 변 전 하사는 지난해 1월 언론에 얼굴을 공개하고 여군으로 계속 복무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군은 변 전 하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시민단체 군인권센터는 육군 전역심사위윈회의 날짜를 변 하사가 신청한 성별 정정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나온 이후로 연기해 달라는 내용의 긴급구제 신청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했습니다. 인권위도 변 하사에 대한 긴급구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전역 심사를 3개월 후로 늦출 것을 육군에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육군은 이를 거부하고 예정된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육군은 지난해 1월 22일 변 전 하사의 신체 일부가 수술로 크게 훼손됐다는 이유로 ‘심신장애 3급’ 판결을 내리고 강제로 전역 결정을 내렸습니다. 변 전 하사는 이에 불복해 지난해 2월 육군본부에 인사소청을 제기했습니다. 성전환 수술을 이유로 군이 강제 전역조치를 한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였습니다. 육군은 이에 따라 지난해 6월 외부 심사위원으로 구성된 인사소청심사위를 열고 변 전 하사의 전역 결정에 부당함이 있는지 살펴봤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당시 육군은 “현행 군인사법에 규정된 의무심사 기준 및 전역심사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이뤄진 것으로 전역처분의 위법성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군내 복직 절차를 차단당한 변 전 하사는 지난해 8월 육군을 상대로 전역 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군은 재판에서 방어적 태도로 임했습니다. 피고인 육군참모총장이 답변서 제출을 미루면서 소송 제기 반년이 지나도록 변론 기일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첫 변론기일을 한 달가량 앞둔 지난 3월 변 전 하사가 자택에서 숨진 상태로 발견돼 국민들에게 안타까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법조계 원로들을 비롯해 4212명의 시민들과 22명의 현직 여·야 국회의원은 전역처분 취소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힘을 보탰습니다. 대전지법은 지난 7일 “전역 처분은 위법하다”며 변 전 하사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변 전 하사가 성별정정을 이미 완료한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을 기준으로 심신장애를 판단한 전역 처분이 위법하다는 취지였습니다. 군은 항소를 할 듯 말 듯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렸고, 결국 상급 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항소를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법무부의 항소포기 지휘로 육군참모총장이 항소 시한까지 항소장을 제출하지 않으면서 변 전 하사의 기나긴 싸움이 마무리됐습니다.이제 군이 답할 차례…제도 개선 불가피 이제 우리 사회는 싫든 좋든 성소수자 군 복무 문제를 무작정 덮어놓기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재판부는 “남군으로 입대했다가 성전환한 여성의 현역 복무 적합 여부는 궁극적으로 군 특수성, 병력 운용, 국방 사회에 미치는 영향, 성 소수자 기본 인권, 국민 여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면서 성소수자 군인 복무 계속 여부는 국가적 차원에서 결정할 문제라고 판시했습니다. 이제 성소수자와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위한 입법적·정책적 대안 마련에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앞서 서욱 국방부 장관은 지난 3월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변 전 하사와 관련해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문제에 대한 정책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습니다. 아직까지 관련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국방부는 트렌스젠더 군 복무 여부에 대한 정책적 검토 작업에 곧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행 병역법과 군인사법 등에 따르면 성전환자의 군 입대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번 법원 판결이 성전환 군인을 전역시켜서는 안 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 성전환자 입대를 막을 근거가 취약해졌다는 게 중론입니다. 때문에 남성 성기를 상실하면 심신장애로 규정해온 기존 규정들은 개선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더불어 이들이 영내에서 잘 조화될 수 있도록 군내 인식 전환을 위한 교육이나 캠페인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미 해외 20여국도 성전환자의 군 복무를 허용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도 성소수자의 복무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고민해봐야 할 때입니다.
  • 대만 총통 “中 침공 땐 미국이 지킬 것” 미군 주둔 첫 확인

    대만 총통 “中 침공 땐 미국이 지킬 것” 미군 주둔 첫 확인

    대만 해역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가 참석한 국제회의 석상에서 대만 압박 기조를 고수하는 베이징 지도부를 정면 비판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얽매여 대만 문제 공론화에 주저하지 않겠다는 속내다. 이에 질세라 중국도 상륙작전용 공격헬기를 동원해 무력시위에 나서는 등 대만을 고리로 공세 수위를 한껏 끌어올렸다. 27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화상으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대만을 겨냥한 중국의 행동을 ‘강압적’이라고 규정한 뒤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이라고 비판했다. EAS는 동아시아 공동체 협력 강화를 위해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한국, 미국 등 18개국이 참가한 협의체다. 중국에서는 서열 2위인 리 총리가 참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은 대만에 ‘바위처럼 단단하게’ (방어) 약속을 했다”며 “대만해협 내 중국의 여러 행동에 깊이 우려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그는 지난 21일 타운홀 행사에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미국은 이를 막을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가 “대만 독립을 지원하려는 것 아니냐”고 강하게 반발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엿새 만에 ‘대만 방어’ 의지를 재차 강조한 것이다.같은 날 차이잉원 대만 총통(대통령)도 CNN방송 인터뷰에서 미군이 대만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하며 바이든 대통령에 맞장구를 쳤다. 차이 총통은 “대만의 안위를 위해 미국과 광범위하게 협력하고 있다”며 “미군이 대만 방어를 도울 것이라고 ‘정말’ 믿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에 있던 주둔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양안(중국과 대만) 갈등이 고조되면서 ‘주대만미군’ 존재설이 꾸준히 흘러나왔는데, 차이 총통이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은 “20여명 규모의 미 특수부대가 대만 육군을 훈련시키고 있다. 미 해병대도 대만 해군을 돕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중국은 즉각 반발했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8일 정례브리핑에서 미국 방어 기대를 피력한 차이 총통을 향해 “대만 독립은 죽음의 길”이라며 “국가 주권과 영토 보전을 수호하려는 중국 인민의 단호한 결심과 의지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고 일갈했다. 중국은 무력 공세도 펴고 있다. 이날 대만 국방부에 따르면 중국군 군용기 7대가 지난 26일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에 진입했다가 되돌아갔다. 여기에는 ‘중국판 아파치’로 불리는 WZ10 공격헬기(1대)가 포함됐다. 대만 국방부가 중국 군용기 활동을 발표하기 시작한 지난해 9월 이후 공격헬기가 동원된 건 처음이다.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대만 강습에 나설 수 있다는 경고다. 한술 더 떠 중국은 워싱턴을 겨냥해 “올해에만 미군 전함과 군용기가 2000회 넘게 본토에 근접해 정찰 활동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현 대만 위기의 근본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중국 군사과학원 차오옌중 연구원은 최근 화상으로 진행된 제10회 샹산포럼에서 이같이 주장하며 “남중국해 위기 해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미국이 근접 정찰을 즉각 중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보도했다. 샹산포럼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태평양 국방 관련 대화 채널이다.
  • 육대전 “정보사 대령에 명예훼손 피소…입막음용 의심”

    육대전 “정보사 대령에 명예훼손 피소…입막음용 의심”

    군부대 부실 급식 사태 등을 고발하며 군 부조리 고발 창구로 부상한 페이스북 ‘육군 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육대전)’ 운영자를 상대로 현직 국군정보사령부 대령이 명예훼손 고소를 제기했다. 27일 육대전과 경찰 등에 따르면 서울 강동경찰서는 정보사 소속 대령 A씨가 지난 8월 23일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육대전 운영자 김모씨를 고소한 사건을 접수하고 조사 중이다. 김씨는 지난 26일 경찰에 출석해 첫 조사를 받았다. A씨는 육대전이 지난 8월 3일 페이스북 페이지에 “정보사 예하 부대에서 출장 뷔페를 불러 신임 국정원 요원과 부대 관계자 등 200여명이 모여 회식을 했다”는 취지의 제보 내용을 올린 것을 문제 삼았다. A씨는 해당 부대의 부대장으로 알려졌다. 당시 제보 내용에는 정보사에서 교육을 받던 신임 국정원 요원들이 회식에 참석했으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국정원 신규 직원 중 부대장의 딸도 교육을 받고 있었다”고 소문을 전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방역지침을 어기고 회식을 진행한 것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 당시 정보사는 “행사 당시 해당 지역은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가 적용돼 행사·집회가 인원 제한 없이 허용되는 상황이었다”면서 “방역지침을 준수해 회식을 진행했고, 부대장의 자녀가 있어 회식을 진행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런 해명과 별개로 A씨는 육대전 측이 악의적인 내용의 게시물로 자신의 명예를 실추했다고 경찰에 주장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육대전 측은 당시 게시한 제보 내용에 A씨의 신원이 특정 가능한 부분은 없다면서 이번 고소가 육대전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한 입막음성 고소라고 본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이번 사건은 물론 향후 유사 사건에서도 제보자의 신원 보호를 최우선 순위로 두고 반드시 지킬 것”이라면서 “제보를 망설이는 장병이 있다면 이번 사건으로 위축되지 않기를 당부드린다”고 강조했다.
  • 故 변희수 하사 ‘전역 취소’ 판결 확정

    故 변희수 하사 ‘전역 취소’ 판결 확정

    ‘트랜스젠더’인 고 변희수(당시 23세) 하사의 전역처분이 위법하다는 판결이 육군참모총장의 항소 포기로 확정됐다. 27일 대전지법에 따르면 피고 육군참모총장의 항소장이 항소 시한(판결문 도달 이후 2주)인 지난 26일까지 접수되지 않았다. 이로써 변 하사가 승소한 1심 재판으로 종결이 됐다. 변 하사가 목숨을 끊기 전에 육참총장을 상대로 제기한 전역처분 취소 청구 소송과 관련, 대전지법 행정2부(부장 오영표)는 지난 7일 “수술로 성전환이 허용되는 상황에서 수술 후 변 하사의 성별은 여성으로 봐야 한다”면서 “변 하사가 수술 직후 법원에 성별 정정 신청을 하고 군에 보고했던 만큼 군인사법상 심신장애 여부 판단 시에는 당연히 여성을 기준으로 했어야 한다”고 변 하사의 손을 들어줬다. 이어 “따라서 심신장애(성기 상실 등)는 전역처분 사유에 해당이 안 된다”고 전역심사가 부당했다고 밝혔다. 육군은 1심 판결 후 ‘남성이던 변 하사가 성전환수술로 일부러 심신장애를 초래했다’는 취지로 항소할 뜻을 보였으나, 행정소송 상소자문위원회 권고 등에 따라 결국 소장을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故 변희수 하사 ‘전역 취소’ 판결 확정

    故 변희수 하사 ‘전역 취소’ 판결 확정

    ‘트랜스젠더’인 고 변희수(당시 23세) 하사의 전역처분이 위법하다는 판결이 육군참모총장의 항소 포기로 확정됐다. 27일 대전지법에 따르면 피고 육군참모총장의 항소장이 항소 시한(판결문 도달 이후 2주)인 지난 26일까지 접수되지 않았다. 이로써 변 하사가 승소한 1심 재판으로 종결이 됐다. 변 하사가 목숨을 끊기 전에 육참총장을 상대로 제기한 전역처분 취소 청구 소송과 관련, 대전지법 행정2부(부장 오영표)는 지난 7일 “수술로 성전환이 허용되는 상황에서 수술 후 변 하사의 성별은 여성으로 봐야 한다”면서 “변 하사가 수술 직후 법원에 성별 정정 신청을 하고 군에 보고했던 만큼 군인사법상 심신장애 여부 판단 시에는 당연히 여성을 기준으로 했어야 한다”고 변 하사의 손을 들어줬다. 이어 “따라서 심신장애(성기 상실 등)는 전역처분 사유에 해당이 안 된다”고 전역심사가 부당했다고 밝혔다. 육군은 1심 판결 후 ‘남성이던 변 하사가 성전환수술로 일부러 심신장애를 초래했다’는 취지로 항소할 뜻을 보였으나, 행정소송 상소자문위원회 권고 등에 따라 결국 소장을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洪 저격수’ 하태경, 윤석열 품으로… 컷오프 주자들 합종연횡

    ‘洪 저격수’ 하태경, 윤석열 품으로… 컷오프 주자들 합종연횡

    국민의힘 최종 후보 선출을 아흐레 앞둔 27일 대선 주자였던 하태경 의원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 캠프에 합류했다. 1·2차 컷오프(예비경선)에서 탈락한 주자들 대부분이 ‘2강’ 후보를 중심으로 결집한 것이다. 정치권에선 4강 후보 간 단일화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지만 해당 캠프들은 일축했다. 캠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하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정권 교체와 정치 혁신, 이 두 가지 과제를 모두 다 잘 해낼 후보는 윤석열뿐”이라며 지지를 선언했다. 하 의원은 그간 ‘유승민계’로 분류돼 왔으나 결국 윤 전 총장을 택했다. 1·2차 컷오프에서 탈락한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중에는 박진 의원과 장성민 전 의원이 하 의원에 앞서 윤 전 총장 캠프에 합류했다. 홍준표 의원은 2차 컷오프된 최재형 전 감사원장과 안상수 전 인천시장, 후보직을 중도 사퇴한 박찬주 전 육군대장 등과 손을 잡았다. 2차 컷오프 이후 황교안 전 대표를 제외한 전원이 2강 후보를 돕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홍 의원과 유승민 전 의원이 단일화를 논의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양측 모두 선을 긋고 있다. 홍준표 캠프 관계자는 “캠프 내부 또는 양 캠프 사이 어떤 논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유승민 캠프는 “누가 어떤 목적으로 작성해 유포했든 이런 악의적인 마타도어는 심각한 범죄 행위”라며 “단일화는 없다”고 밝혔다. 이날 국민의힘 대선 본경선 8차 TV토론에서도 윤 전 총장과 홍 의원이 상대의 인사 영입을 두고 설전을 벌였다. 윤 전 총장은 “홍 의원이 저희 캠프에 들어오는 분들을 향해 줄세우기, 공천 장사라고 한다”며 “그런데 왜 홍 후보는 상대적으로 (합류 인사가) 적은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조차 홍 후보를 등지는 사람이 많다”고 공격했다. 이에 홍 의원은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분이 사람을 우르르 끌어모아 구태 정치를 하는 게 안타깝다”고 맞받아쳤다. 고발사주 의혹과 관련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손준성 검사의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에 대해 윤 전 총장은 “직권남용”이라며 홍 의원의 호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 의원은 “본인이 수사할 때는 정당 수사고 본인이 수사를 당할 때는 정치 공작이라고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 ‘2강’으로 뭉친 野주자들…洪·劉 단일화 가능성은?

    ‘2강’으로 뭉친 野주자들…洪·劉 단일화 가능성은?

    국민의힘 최종 후보 선출을 아흐레 앞둔 27일 대선주자였던 하태경 의원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 캠프에 합류했다. 1·2차 컷오프(예비경선)에서 탈락한 주자들 대부분이 ‘2강’ 후보를 중심으로 결집한 것이다. 정치권에선 4강 후보 사이 단일화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지만 각 캠프는 이를 일축하고 있다. ‘유승민계’ 하태경도 尹캠프로 캠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하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권교체와 정치 혁신, 이 두 가지 과제를 모두 다 잘 해낼 후보는 윤석열뿐”이라며 지지를 선언했다. 하 의원은 그간 ‘유승민계’로 분류돼 왔으나 결국 윤 전 총장을 택했다. 이에 대해선 “솔직히 쉽지 않은 시간이었고, 고민을 아주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하 의원은 ‘홍준표 저격수’ 및 ‘2030 대변자’로서 윤 전 총장의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1·2차 컷오프에서 탈락했던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중에는 박진 의원과 장성민 전 의원이 하 의원에 앞서 윤 전 총장 캠프에 합류했다. 홍준표 의원은 2차 컷오프된 최재형 전 감사원장과 안상수 전 인천시장, 후보직을 중도 사퇴한 박찬주 전 육군대장 등과 손을 잡았다. 2차 컷오프 이후 ‘부정 경선’을 주장하며 독자 노선을 걷고 있는 황교안 전 대표를 제외한 전원이 2강 후보를 돕고 있는 것이다.이런 가운데 정치권에서는 홍 의원과 유승민 전 의원 간 단일화 가능성도 공공연히 언급되고 있다. 국민의힘 최고위원에 출마했던 조대원 전 당협위원장은 지난 24일 “흠결 많은 윤 전 총장은 정권교체가 힘들기 때문에 두 후보가 현실적으로 힘들다면 자신을 불쏘시개로 던지는 희생의 결단을 해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단일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일부 당원 및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두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두 후보 간 단일화 주장은 윤 전 총장의 ‘전두환 옹호·개 사과 논란’ 등으로 정권교체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며 수면 위로 올라오는 형국이다. 하지만 양측 모두 단일화 논의에는 선을 긋고 있다. 홍 의원 캠프 관계자는 “캠프 내부 또는 양 캠프 사이의 단일화에 대해선 어떤 논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유 전 의원도 언론인터뷰를 통해 “단일화 생각이 전혀 없다. 그건 분명하다”고 밝혔다. 洪 여론조사 강세, 劉도 20%대 진입 양측 캠프 모두 현재로서는 단일화에 대한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다. 최근 여론조사 추세를 보면 홍 의원은 보수 후보 적합도 조사는 물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의 가상 양자대결에서도 강세를 보이고 있다. 뉴스토마토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미디어토마토에 의뢰해 지난 23~24일 전국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홍 의원은 이 후보와 대결에서 51.7% 대 34.7%로 이 후보를 17.0% 포인트 차이로 앞섰다. 윤 전 총장도 이 후보를 앞섰지만 격차는 8.5% 포인트였다. 유 전 의원 측도 “분위기가 바뀔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갤럽이 머니투데이 의뢰로 지난 25~26일 전국 성인 남녀 1008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이날 발표한 조사 결과, ‘국민의힘 대선 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유 전 의원은 20.6%를 얻었다. 홍 의원은 30.7%, 윤 전 총장은 25.1%였다. 윤 전 총장과는 오차범위 내에 있다. 위 인용한 두 조사 모두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조.
  • 프랑스 약탈 베냉 문화재 돌려주기 전 마지막 전시, 우리 ‘직지’는요?

    프랑스 약탈 베냉 문화재 돌려주기 전 마지막 전시, 우리 ‘직지’는요?

    프랑스가 130년 전 식민지로 경영하던 서아프리카 베냉에서 군인들이 약탈한 문화재들을 베냉에 돌려주기 전에 마지막으로 국내 전시하고 있다. 26일(이하 현지시간)부터 31일까지 파리의 케 브랑리 국립박물관에서 이들 문화재 26점을 대중에 공개한다. 이들 문화재는 프랑스가 1892년 다호메(베냉의 옛 이름) 왕국에 있던 아보메 왕궁에서 약탈한 보물들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실현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연설에서 과거사를 바로잡겠다며 아프리카 문화유산이 프랑스에 있는 것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베냉 문화재 26점, 세네갈 문화재 한 점을 반환하는 법률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검 한 자루는 미리 세네갈 육군박물관으로 돌아갔고 베냉 문화재 26점이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공식 유물 인수서는 다음달 9일 파리에서 서명된다. 며칠 뒤에 베냉으로 돌아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미국 일간 워싱턴 포스트는 전했다. 베냉 퀴다 역사박물관의 칼릭스테 비아 큐레이터는 “반환 절차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베냉은 반환되는 문화재를 소장하기 위해 프랑스의 일부 지원을 받아 따로 박물관을 신축하고 있다.앞서 독일도 1897년 영국이 베닌 왕국(현 나이지리아 남부 에도주 베닌시티)에서 약탈한 청동 문화재의 반환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박물관들을 중심으로 이런 움직임을 경계하는 시선도 눈에 띄고 있다. 영국은 제국주의 시절에 약탈한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 ‘엘긴 마블’을 두고 그리스와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대표적 반대파인 영국박물관은 문화재 반환의 물꼬가 터져 서구 박물관들을 텅텅 비우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인 ‘직지심체요절’(직지)을 비롯한 한국 문화재도 2900점 정도 보관하고 있다. 직지는 해외에 있는 대다수 한국 문화재와는 달리 약탈이나 도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구한말에 프랑스인이 적법하게(?) 사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로슬린 바셸로 프랑스 외무부 장관은 베냉 문화재 반환이 법적인 선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바셸로 장관은 프랑스 법률은 반환할 문화재 27점을 의도적으로 적시해 다른 문화재들도 반환해야 한다는 요구를 피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프랑스 박물관들이 문화재를 계속 보유할 권한에 의문을 제기할 소지는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프랑스가 이번에 반환하는 문화재 27점은 프랑스 박물관들이 보유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문화재 9만여점과 비교하면 시쳇말로 ‘새 발의 피’다. 전문가들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문화재 반환이 과거 식민지 국가들과의 관계를 고려한 지정학적 고려의 일부일 뿐이라고 보기도 한다.
  • 고 변희수 하사 승소로 재판 종결…육군참모총장 항소 포기

    고 변희수 하사 승소로 재판 종결…육군참모총장 항소 포기

    ‘트랜스젠더’ 고 변희수(당시 23세) 하사의 전역처분이 위법하다는 판결이 육군참모총장의 항소 포기로 확정됐다. 27일 대전지법에 따르면 피고 육군참모총장의 항소장이 항소 시한(판결문 도달 이후 2주)인 지난 26일까지 접수되지 않았다. 이로써 변 하사가 승소한 1심 재판으로 종결이 됐다. 변 하사가 목숨을 끊기 전에 육참총장을 상대로 제기한 전역처분 취소 청구 소송과 관련 대전지법 행정2부(부장 오영표)는 지난 7일 “수술로 성전환이 허용되는 상황에서 수술 후 변 하사의 성별은 여성으로 봐야 한다”면서 “변 하사가 수술 직후 법원에 성별 정정 신청을 하고 군에 보고했던 만큼 군인사법상 심신장애 여부 판단시에는 당연히 여성을 기준으로 했어야 한다”고 변 하사의 손을 들어줬다. “따라서 심신장애(성기 상실 등)는 전역처분 사유에 해당이 안된다”고 전역심사가 부당했다고 밝혔다.육군은 1심 판결 후 ‘남성이던 변 하사가 성전환수술로 일부러 심신장애를 초래했다’는 취지로 항소할 뜻을 보였으나 행정소송 상소자문위원회 권고 등에 따라 결국 소장을 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변 하사는 경기 북부 모 육군부대에 복무하던 2019년 휴가를 받아 외국에서 성전환수술을 받고 돌아와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받고 지난해 1월 강제 전역을 당하자 같은해 8월 계룡대 관할 대전지법에 소송을 냈다. 하지만 그는 첫 변론이 열리기 전인 지난 3월 충북 청주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족이 원고 자격을 이어받아 재판을 진행했다. 이 소송은 성전환 용인 복무·전역 관련 첫 판례로 기록된다.
  • 5·18 발포 명령자 규명, 사죄 않고… 용서받을 기회도 사라졌다

    5·18 발포 명령자 규명, 사죄 않고… 용서받을 기회도 사라졌다

    전두환과 육사 11기… 친구 넘어 군신 관계12·12 쿠데타 때 군권 장악 결정적인 역할회고록 통해 “광주사태 진범은 유언비어”‘비자금 사건’은 정경 유착 표본으로 평가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피로 물든 한국 현대사의 ‘진실’까지 무덤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철권통치를 유지했던 제5공화국의 2인자였으면서도 임종 순간까지도 ‘양심 고백’을 하지 않았다. ●육사에서 전두환과의 운명적 만남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경북 달성군(현재 대구)에서 부친 노병수와 모친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구공업중(대구공고) 항공과에 입학한 뒤 경북중 4학년(학제 개편 이후 경북고 1학년)으로 편입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지원해 군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한 그는 대구공고 1년 선배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둘은 생도 시절 방을 같이 쓰면서 단순한 동기를 넘어서는 관계를 맺었다. 육사 졸업 4년 뒤 육사 동기인 김복동의 동생 김옥숙 여사와 결혼했다. 이후 참모총장 수석보좌관,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 보안사령관 등의 보직을 넘겨받는 등 전 전 대통령의 뒤를 이었고 둘의 인연은 ‘10·26사태’와 ‘12·12쿠데타’로 이어진다. ●12·12 군사반란이 돌발사고? 전두환·노태우 등 육사 11기가 중심이 된 사조직 ‘하나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위 세력으로 성장했다. 하나회는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12·12사태 당시 노 전 대통령은 9사단 병력을 출동시켜 군권 장악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전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친구’에서 ‘군신’(君臣)으로 바뀌게 된다. 12·12군사반란은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등을 ‘김재규 내란 방조죄’라는 죄목으로 체포·연행·구속한 사건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8월 회고록에서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가 일어난 돌발사고였다”고 주장했다.●5·18 발포 명령 누가 했나 신군부는 다음해 5월 17일 비상계엄확대조치를 단행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했다. 이로써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신군부는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뛰어들었다. 1988년 광주 청문회와 1995년 5·18 및 12·12사건 수사 당시 누가 공수부대의 발포를 명령했는지가 초미의 관심이었지만, 규명하지 못했다. 다만 검찰은 당시 계엄군이 자위권 보유를 천명한 사실을 들어 포괄적 책임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물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광주사태의 진범은 유언비어였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 무지막지한 군인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잘라 냈다. 처녀의 젖가슴을 도려냈다’는 유언비어가 사실인 양 퍼져 갔고, 그래서 광주 시민들이 치를 떨면서 무기고를 탈취하고 군과 대항하게 된 것이다. 그게 5·18이다”라고 말했다. ●비자금 투옥과 그 이후 1980년 8월 27일 전 전 대통령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듬해 7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1987년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지만 ‘호헌철폐·독재타도’ 구호 아래 직선제 개헌을 앞세워 들불처럼 일었던 민주화 요구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6월항쟁을 잠재우고자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해 온건 이미지를 구축했고, 양김(김대중·김영삼)의 분열 속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36%를 얻어 1971년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1995년 12월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불거진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기소됐다. 전직 대통령 기소는 이때가 처음이다. 이듬해 12·12와 5·18에 대한 기소까지 더해져 징역 17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직 대통령의 개인 비리 차원을 넘어서 정치권력과 재벌이 합작해 정치와 경제를 밀실에서 주무른 정경유착의 표본으로 평가받는다.
  • 10·26에 떠난 노태우

    10·26에 떠난 노태우

    육사 동기 전두환과 12·12 쿠데타직선제 개헌 이후 첫 대통령 당선수천억 비자금 들통나 全과 구속말년엔 암·소뇌 위축증 앓고 은둔盧 “과오 용서 바란다” 유언 남겨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89세.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소뇌 위축증과 천식 등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 왔다. 최근 병세가 악화돼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김대중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이어 노 전 대통령까지 삶을 마감하면서 ‘1노(盧)3김(金)’ 시대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당하면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계기가 된 10·26 사태가 일어난 지 42년째 되는 날이다.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로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했고, 그해 12월 ‘보통 사람’을 슬로건으로 13대 대선에서 승리했다. 1932년 12월 4일 대구에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9사단장이던 1979년 12월 12일 육사 11기 동기생인 전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의 핵심으로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다. 쿠데타 성공으로 신군부 2인자로 떠오른 뒤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 정무2장관으로 정계 입문했다. 초대 체육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민정당 대표를 거치면서 군인 이미지를 벗고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5공 말기 전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부상,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직선제 개헌으로 정권교체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양김(김대중·김영삼) 분열에 따른 반사이익으로 당선됐다. 재임 기간 88서울올림픽 개최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북방외교 등의 성과를 냈다. 말로는 좋지 못했다. 퇴임 후 12·12 주도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수천억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수감됐고 법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00억여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됐지만 추징금 미납 논란에 시달리다가 2013년 9월 뒤늦게 완납했다. 노 전 대통령은 별세 전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고 유족 측은 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 여사와 딸 소영, 아들 재헌씨가 있다.
  • ‘치매’ 진단 전두환, 노태우 사망 소식 듣고 ‘눈물만…’[노태우 별세]

    ‘치매’ 진단 전두환, 노태우 사망 소식 듣고 ‘눈물만…’[노태우 별세]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고를 듣고 침묵 속에 눈물을 지었다고 측근이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이 26일 사망함으로써 60여 년에 걸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운명적인 애증 관계도 끝이 났다. 전 전 대통령 측 관계자는 이날 오후 “노 전 대통령 별세 소식을 접하고 아무 말씀을 하지 않은 채 눈물만 지으셨다고 부인 이순자 여사가 전했다”고 밝혔다. 별도의 애도 메시지를 낼 계획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를 조문할 가능성도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 전 대통령은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육사 동기 전두환과 길고도 질긴 인연…부고 듣고 침묵 속에 ‘눈물’ 두 전직 대통령은 동료로서 출발해 1979년 12·12 쿠데타로 전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최고통치자와 2인자로 자리매김 한 바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고교 때부터 출발한다. 노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의 전신인 대구공업중을 거쳐 1951년 경북고를 졸업했다. 한 살 많은 전 전 대통령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대구에 정착해 같은 해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이후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1952년 육사 제11기(정규 육사 1기) 동기로 입학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위 시절인 1959년 김옥숙 여사와의 결혼 당시 전 전 대통령이 사회를 봐줄 정도로 두 사람은 돈독했다. 노 전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을 시작으로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 전 전 대통령이 거쳐 간 자리를 이어받았다.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에는 자신이 맡고 있던 9사단 병력을 중앙청으로 출동시켜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주도하는 신군부의 권력장악 과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최고통치자와 2인자로 자리매김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에 이어 1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시작해 전 대통령과 내가 국정 최고책임자로 나설 때까지 우리의 관계는 돈독했다.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는데 공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특수한 관계였다”고 적었다.그러나 취임 이후 ‘5공 청산’이라는 거센 바람이 불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요구가 빗발치자 노 전 대통령은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한 곳에 가 있으라고 권고했고, 전 전 대통령 측은 백담사를 택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비자금 사건 등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인 1995년 11월 16일과 같은 해 12월 3일 나란히 구속돼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전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을, 노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의 중형을 각각 선고받은 뒤 같은 해 12월 당시 임기 말이던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은 먼저 검찰 소환에 응해 구속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노태우가 일을 그르쳤어. 그렇게 쉽게 검찰에 가는 것이 아닌데 끝까지 버텼어야지”라면서 강한 불만을 터트린 것으로 전해졌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그들(5공 측 인사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면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라는 것이 나의 철학이었다. 그런 인식 차이로 인해 전임자는 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서 서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어디 가냐고 5분마다 묻더라”…전두환 측 ‘치매’ 주장 한편 지난 8월 광주지법 형사1부(재판장 김재근)는 법정에서 전 전 대통령 항소심을 진행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급격히 노화된 모습이었다. 앞서 전 전 대통령 측은 알츠하이머(치매) 진단을 받았다며 법정 출석을 거부해왔었다. 하지만 골프를 치는 정정한 모습이 목격되면서 논란이 됐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헬기의 광주 도심 사격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 전 전 대통령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 ‘육사 동기’ 노태우·전두환…60년 걸친 애증 관계 [노태우 별세]

    ‘육사 동기’ 노태우·전두환…60년 걸친 애증 관계 [노태우 별세]

    육사 11시 동기생으로 만나쿠데타 뒤 정치적 2인자로‘5공 청산’으로 전두환 불만 노태우 “국민 요구 무시하면 독재”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별세하면서 60여년에 걸친 ‘육사 동기’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운명적인 애증 관계도 끝이 났다. 노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의 전신인 대구공업중을 거쳐 1951년 경북고를 졸업했다. 한 살 많은 전 전 대통령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대구에 정착해 같은 해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두 사람은 이듬해인 1952년 육사 제11기(정규 육사 1기) 동기생으로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은 생도 시절 럭비부에서, 전 전 대통령은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위 시절인 1959년 김옥숙 여사와의 결혼 당시 전 전 대통령이 사회를 봐줄 정도로 두 사람은 돈독했다. ●쿠데타 당시 9사단 병력 동원해 권력장악 도와 노 전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을 시작으로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 전 전 대통령이 거쳐 간 자리를 이어받았다. 12·12 쿠데타 당시에는 자신이 맡고 있던 9사단 병력을 중앙청으로 출동시켜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주도하는 신군부의 권력장악 과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 전 대통령의 권고로 군문을 떠나 정두환 정권에 합류했다. 전 전 대통령의 튼튼한 신임을 바탕으로 정무장관에서 시작해 초대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 위원장, 대한체육회장, 민정당 대표위원, 제12대 국회의원(전국구) 등을 거치며 2인자로서의 터를 닦았다.1987년에는 전 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으며, 직선제 개헌 약속 등을 핵심으로 하는 전격적인 6·29 선언과 ‘보통 사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이른바 ‘3김’을 따돌리고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시작해 전 대통령과 내가 국정 최고책임자로 나설 때까지 우리의 관계는 돈독했다.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는데 공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특수한 관계였다”고 적었다. ●대통령 취임 후 ‘5공 청산’ 거센 바람…관계 삐걱 그러나 취임 이후 ‘5공 청산’이라는 거센 바람이 불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요구가 빗발치자 노 전 대통령은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한 곳에 가 있으라고 권고했고, 전 전 대통령 측은 백담사를 택했다. 전 전 대통령은 백담사로 떠나기 전날인 1988년 11월 22일 밤 노 전 대통령에게 전화로 백담사 은둔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전임자의 신변을 안전하게 해주지 못해 부끄럽다. 잠시 고생스럽더라도 참고 견디면 조속한 시일 내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상으로 회복하겠다”고 달랬다.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비자금 사건 등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인 1995년 11월 16일과 같은 해 12월 3일 나란히 구속돼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전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을, 노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의 중형을 각각 선고받은 뒤 같은 해 12월 당시 임기 말이던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검찰 수사 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은 먼저 검찰 소환에 응해 구속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노태우가 일을 그르쳤어. 그렇게 쉽게 검찰에 가는 것이 아닌데 끝까지 버텼어야지”라면서 강한 불만을 터트린 것으로 알려졌다. 전 전 대통령은 또 “나는 땜쟁이(대구공고) 출신이고 노씨는 명문고(경북고) 출신인데도 나보다 뒤처졌던 현실에 대해 불만이 있었을 수도 있다”면서 “노씨 및 부인 김옥숙씨가 대통령과 영부인이 된 뒤 사람이 확 달라져 버린 것을 보고 친구나 동기에게 후임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그들(5공 측 인사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면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라는 것이 나의 철학이었다. 그런 인식 차이로 인해 전임자는 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서 서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 [노태우 별세] 노태우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

    [노태우 별세] 노태우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

     ●육사에서 전두환과 운명적 조우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 4일 경북 달성군(현재 대구)에서 부친 노병수씨와 모친 김태향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가 결혼한지 8년 만에 태어나 귀여움을 한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부친이 일제시대 면서기로 일한 덕에 여유있는 생활을 누렸지만, 노 전 대통령이 7살 되던 해 부친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았다.  대구공업중학교(대구공고) 항공과에 입학한 그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말라리아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투병 생활을 거치며 의사의 꿈을 갖게 되고, 경북중학교 4학년(학제 개편 이후 경북고 1학년)으로 편입한다. 편입한 해에는 중간 정도의 성적을 받았지만 5학년부터는 상위권을 유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6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지원해 군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헌병학교 9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헌병으로 근무한 1년 동안 2등 중사(현재의 상병)까지 진급한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한다. 이곳에서 그는 대구공고 1년 선배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은 생도 시절 방을 같이 쓰면서 단순한 육사 동기를 넘어서는 관계를 맺게 된다. 육사 졸업 4년 뒤 육사 동기인 김복동의 동생 김옥숙과 결혼한다. 월남 파병을 다녀오고 제9공수여단장, 제9보병사단장 등 요직을 거쳤다. 참모총장 수석보좌관,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 보직을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넘겨받는 등 그의 뒤를 따랐다. 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12·12 쿠데타’로 이어진다.   ●12·12 쿠데타와 5·18  노 전 대통령이 속한 육사 11기가 중심이 된 육군의 사조직 ‘하나회’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 세력으로 성장했다. 국가보안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등 수도권 지역에서 세력을 성장하던 하나회는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때 전 전 대통령과 함께 핵심 세력으로 꼽히는 사람이 바로 노 전 대통령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9사단에서 29연대, 30연대를 강제로 출동시키는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1979년 12월 12일,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김재규 내란 방조죄’라는 죄목으로 체포해 청와대를 포위하고 국방부부터 차례대로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9사단장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군부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전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사실상 ‘친구’에서 ‘군신’으로 바뀌게 된다.  두 전직 대통령은 다음해 5월 17일 비상계엄확대조치를 단행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로써 권력을 완전히 장악, 본격적인 정치 무대에 뛰어든다.  ‘12·12 쿠데타’는 노태우 정권까지 정당화 됐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 과거 청산 움직임과 함께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된다. 이후 5·18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법정에 서게 됐다. 1997년 재판부는 “12·12는 명백한 군사반란이며 5·17과 5·18은 내란 또는 내란목적 살인행위였다”고 판결했다.   ●5공화국의 2인자  노 전 대통령은 늘 두번째였다. 정치군인의 길을 걸었던 전 전 대통령에 대한 육사 동기들의 반감을 다스리는 것을 비롯해 전 전 대통령 주변에서 도움을 줬다. 5공화국에서 주요 요직을 맡았지만 전 전 대통령의 2인자일 뿐이었다.  1980년 8월 27일 전 전 대통령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국군 보안사령관직을 1년간 맡다가 이듬해 7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군에서 예편한 직후 외교안보 담당 정무 제2장관에 임명됐고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1982년에는 남북 고위회담 수석대표를 맡았고 이어 초대 체육부장관과 제41대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5공화국의 가장 큰 역점 사업이었던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  1985년에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육사 동기인 권익현의 뒤를 이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을 거쳐 총재를 지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전 전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를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주장하는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1인자가 될 기회를 잡는다.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등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인 ‘6·29선언’을 발표한다. 이에 강성 군부세력과 구별되는 온건 군부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하게 됐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36%의 득표율로 1971년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직선제로 선출된다.   ●6공화국과 북방정책  1988년 2월 출범한 노태우 정부의 앞길은 말 그대로 가시밭길이었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민족자존, 민주화합, 균형발전, 통일번영을 4대 국정기조로 내걸었지만 정권의 탄생 배경과 인적구성으로 볼 때 이러한 정책들을 실천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따랐다. ‘6공화국’이 아닌 ‘5.5공화국’이란 평가도 나왔다.  1988년 4월, 민주화 이후 첫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됐다. 노태우 정부의 순탄찮은 운명을 암시하는 전주곡이었다. 재야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해금을 단행하지만, 평민·민주·공화 야3당이 청문회를 통해 5공화국의 비리를 파헤치면서 핵심인사들에 대한 처벌이 이어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해 11월 과오를 사과하고 백담사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노태우 정부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된 것은 1989년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과 현대중공업 파업 등을 통해 형성된 공안정국을 통해서다. 1990년에는 대통령 선언 형식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동시에 ‘1노 3김’의 분할체제를 청산하는 정계개편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민정·민주·공화 3당은 1990년 1월 22일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합당을 선언한다. 1992년 14대 총선으로 민자·민주·국민의 3당구조가 출현하기까지 의회는 214석의 거대여당이 주도하는 사실상의 일방적 독주체제가 2년 남짓 이어진다.  노태우 정부는 근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절차적 측면의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신장된 시기였다. 5공에 비해 입법·사법부의 자율성이 강화됐고 30년만에 지방자치제가 부활됐다. 노동·시민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국민들의 요구가 활성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3저호황’이란 우호적 대외환경 덕분에 상당한 수준의 경제성장을 달성하기도 했다.  남북관계도 진전이 있었다. 그 시작은 1988년 발표된 7·7선언이었다. 6공화국 대외정책의 핵심인 ‘북방정책’의 기본지침이었던 선언을 바탕으로 중국·소련 등 사회주의권과 관개개선이 이뤄진다. 경제력과 군사·외교적인 측면에서 북한에 대한 우위를 확보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사회주의권 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북한과도 대화창구도 복원,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12월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비자금 투옥과 그 이후  1992년 대선을 통해 김영삼 정부에 성공적으로 정권을 승계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5년 10월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의 폭로로 불거진 비자금 사건으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는다. 10월 27일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한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를 통해 4500억여원의 비자금 조성해 13·14대 총선자금, 부동산 위장 매입, 민정·민자당 지원 등에 사용하고 잔금 1940억원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구속기소된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직 대통령의 개인비리 차원을 넘어서 정치권력과 재벌이 합작해 정치와 경제를 밀실에서 주무른 정경유착의 표본으로 평가받는다. 30대 재벌총수 대부분이 관련돼 재판을 받았고, 노 전 대통령은 ‘포괄적 뇌물죄’가 적용돼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고 1997년말 국민의 정부 출범을 앞두고 사면·복권된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전임자였던 전두환 대통령과 달리 외부활동을 삼간채 자택에 칩거하며 사실상의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10년 넘게 권부의 1·2인자 자리를 지켰던 그로선 치욕적이고 불우한 말년이었다.
  • “보통 사람” 노태우 별세…‘1노 3김’ 시대 저물다

    “보통 사람” 노태우 별세…‘1노 3김’ 시대 저물다

    “나 이 사람 보통 사람 믿어주세요.”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로 26일 별세했다. 이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일이기도 하다.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온 노 전 대통령을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의료진의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별세로 김대중 전 대통령(2009년), 김영삼 전 대통령(2015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2018년)와 함께 1980년 한국 정치를 상징하던 ‘1노 3김’ 시대도 저물게 됐다. 고인은 제4공화국 당시 전두환과 함께 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였고, 전두환 집권 뒤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전국 득표율 36%로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김종필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제6공화국 출범 이래 직선제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었고, 취임 당시 만 55세로 최연소 대통령이었다.노 전 대통령은 선거 유세에서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세웠고, 이후에도 취임식이나 각종 연설이 있을 때마다 ‘보통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사용했다. 대통령 퇴임 후 내란 혐의로 1995년 전두환과 함께 구속 기소됐고,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의 반란수괴 등에 관한 판결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으면서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사면됐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악화로 인해 연희동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칩거생활을 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 참석을 마지막으로 20년 가까이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전두환과 달리 5.18 민주화운동의 가해 책임자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성과 사죄를 표현했다. 2020년 5월 18일 아들 노재헌씨가 노태우 전 대통령을 대신해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40년만에 조화를 헌화했다. 노재헌씨는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이제 됐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말했고, 3년째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故 노태우 전 대통령(1932~2021) 연보 1932년 8월 17일(음력 7월 16일). 대구 출생 1951년 7월. 경북고 졸업 1955년 9월. 육군사관학교 졸업(11기), 육군 소위 임관 1968년 6월. 육군대학 정규과정 졸업(중령) 1971년 11월. 보병 제21연대장(대령) 1974년 10월. 제9공수특전여단장(준장) 1979년 1월. 보병 제9사단장(소장) 1979년 12월. 수도경비사령관(소장) 1980년 8월. 국군보안사령관(중장) 1981년 7월. 전역(육군대장), 정무 제2장관 1982년 3월∼1986년 5월.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장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 1987년 8월 민주정의당 총재 취임 1988년 2월. 제 13대 대통령 취임 1988년 9월. 서울올림픽 개회선언 1988년 10월. 미국 방문,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 1989년 2월. 조지 H.W. 부시 미국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 1990년 5월. 민주자유당 총재 취임 1990년 12월. 소련 방문,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한소 정상회담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3년 2월. 대통령 퇴임 1995년 11월. 특정범죄가중처벌법(뇌물수수) 위반 혐의 구속수감 1997년 4월. 대법원 징역 17년 확정 판결 1997년 12월. 특별사면·출감 2006년 3월. 을지무공훈장 등 11개 서훈 취소 2021년 10월26일 별세
  • 故 노태우 전 대통령(1932~2021) 연보

    故 노태우 전 대통령(1932~2021) 연보

    1932년 8월 17일(음력 7월 16일). 대구 출생 1951년 7월. 경북고 졸업 1955년 9월. 육군사관학교 졸업(11기), 육군 소위 임관 1968년 6월. 육군대학 정규과정 졸업(중령) 1971년 11월. 보병 제21연대장(대령) 1974년 10월. 제9공수특전여단장(준장) 1979년 1월. 보병 제9사단장(소장) 1979년 12월. 수도경비사령관(소장) 1980년 8월. 국군보안사령관(중장) 1981년 7월. 전역(육군대장), 정무 제2장관 1982년 3월∼1986년 5월.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장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 1987년 8월 민주정의당 총재 취임 1988년 2월. 제 13대 대통령 취임 1988년 9월. 서울올림픽 개회선언 1988년 10월. 미국 방문,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 1989년 2월. 조지 H.W. 부시 미국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 1990년 5월. 민주자유당 총재 취임 1990년 12월. 소련 방문,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한소 정상회담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3년 2월. 대통령 퇴임 1995년 11월. 특정범죄가중처벌법(뇌물수수) 위반 혐의 구속수감 1997년 4월. 대법원 징역 17년 확정 판결 1997년 12월. 특별사면·출감 2006년 3월. 을지무공훈장 등 11개 서훈 취소 2021년 10월26일 별세
  • 사병도 간부처럼 머리카락 기른다

    사병도 간부처럼 머리카락 기른다

    이르면 연내 군 간부와 병사 간 두발 규정 차별이 사라진다. 병사의 두발 규정은 보다 완화하고, 간부의 두발 기준은 강화하는 식으로 조정될 전망이다. 25일 군 당국에 따르면 육해공군 등 각 군은 간부와 병사의 두발 기준을 통일하는 방향으로 관련 규정 개정 작업을 진행 중이다. 국방부도 최근 각 군에서 마련한 개선안을 취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점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나 연내 개정 가능성이 제기된다. 여론 등이 부정적이면 시기를 늦출 수도 있다. 현재 육해공군 모두 간부는 가르마를 탈 수 있는 ‘간부 표준형’과 ‘스포츠형’(운동형) 중 선택할 수 있고, 병사는 ‘스포츠형’만 허락되는 구조다. 스포츠형이라 해도 군마다 머리 길이 제한 등에 일부 차이는 있다. 육군은 앞머리·윗머리를 3㎝ 내외로, 옆머리·뒷머리를 1㎝ 이내로 깎아야 한다. 반면 해군과 공군은 앞머리·윗머리는 각각 5㎝, 3㎝ 이내이고 옆머리·뒷머리는 짧게 쳐올리면 된다. 두발 규정이 개정되면 병사들도 간부형 머리인 ‘표준형’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지금처럼 ‘가르마를 타고 머리를 단정히 손질한다’ 정도의 표준형이 아닌, 보다 강화된 기준이 적용될 전망이다. 간부들 입장에서는 두발 규정이 기존보다 엄격해지는 셈이다. 해병대의 경우 간부는 ‘상륙형’(앞머리 5㎝, 귀 상단 2㎝까지 올려침), 병사는 ‘상륙돌격형’(앞머리 3㎝, 귀 상단 5㎝까지 올려침)으로 구분돼 있지만 앞으로는 간부·병사 모두 차별 없이 원하는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검토 중이다.
  • 합천 시민단체 “전두환 찬양 멈춰야” 광주서 기자회견

    합천 시민단체 “전두환 찬양 멈춰야” 광주서 기자회견

    전두환 전 대통령 호를 딴 일해공원의 명칭 변경을 요구하는 경남 합천지역 시민단체가 25일 광주를 찾아 ‘전두환 흔적 지우기’를 촉구했다. 전두환적폐청산경남운동본부,생명의숲되찾기합천군민운동본부는 이날 5·18민주화운동 역사 현장인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해공원을 비롯해 모든 전두환 찬양 시설과 상징물을 철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단체는 “전두환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국립묘지에 묻히지 않도록 관련법도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전두환 옹호 발언’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서는 “국민의힘이 전두환 옹호와 찬양은 당 입장을 위배한다는 점을 소속 정치인에게 주지시키고 모든 공직선거 후보자 공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지난해 6월 일해공원 명칭 변경을 위한 합천군민추진위원회를 결성한 단체는 이달 6일 전씨의 국립묘지 안장에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제기했다. 단체는 전국에 잔존하는 ‘찬양 시설’로 합천 일해공원과 생가터,경기 포천시 축석고개 입구 호국로 기념비,서울 중소기업중앙회 친필 주춧돌 등을 지목했다. 경기 과천시 국사편찬위원회에 전씨가 심은 나무,서울 국립중앙도서관 친필 조형물,대구공업고등학교 모교 방문비와 일해정,전남 장성군 육군 상무대 범종 등도 ‘상징물’로 분류했다. 단체는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 예우조차 박탈당한 반인도적 범죄자”라며 “그의 흔적 지우기는 오욕의 역사를 정화하는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전두환적폐청산경남운동본부 등은 이날 오전에는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월영령을 위로했다. 이후 옛 망월묘역으로 이동해 ‘전두환 비석’을 발로 밟았다.
  •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국산 K2 전차’ 열사의 사막 지나 혹한의 설한 달린다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국산 K2 전차’ 열사의 사막 지나 혹한의 설한 달린다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5일간 서울공항에서는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 2021 즉 서울 아덱스 2021이 열렸다. 국내외 항공우주와 방위산업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서울 아덱스 2021에서 우리나라의 대표 지상장비업체인 현대로템은 노르웨이 수출사양의 신형 K2 전차 ‘K2-NO'(Norway)를 깜짝 공개했다. 현대로템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전시회에 처음 공개된 K2-NO는 입찰이 진행 중인 노르웨이 육군 전차 도입 사업에 제안할 맞춤형 전차로 전해진다. 현재 노르웨이 육군이 운용중인 전차는 독일이 만든 레오파르트2A4NO로 알려지고 있다. 50여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30여대만 운용중이다. 레오파르트2A4NO는 과거 네덜란드 육군이 운용했던 중고전차를 지난 2001년부터 도입한 것으로, 노르웨이 육군의 작전요구성능에 맞춰 통신장비와 전장관리체계를 업그레이드했다. 하지만 레오파르트2A4NO의 노후화 문제와 북유럽에서 러시아의 위협이 가중되면서 신형 전차 도입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다.우리 육군이 운용중인 K2 전차를 기반으로 개발된 K2-NO는 노르웨이 육군의 요구사항들이 반영되었다. 특히 서울 아덱스 2021에서 실물 공개된 K2-NO는 K2 전차에 몇 가지 장비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전차 포탑에는 대전차 미사일과 로켓을 요격 및 파괴하는 능동파괴체계가 장착되었다. K2-NO에 장착된 능동파괴체계는 이스라엘 라파엘사가 만든 트로피(Trophy)로 지난 2011년부터 실전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전차의 생존성을 대폭 향상시키는 장비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포탑 상부에는 부무장으로 노르웨이 콩스버그사의 프로텍터(Protector) 원격사격통제체계가 더해졌다. 원격사격통제체계는 기관총 또는 자동유탄발사기 등의 타격 체계와 감시 체계가 통합된 무장 장치로 전차 및 장갑차의 외부에 장착된다. 타격 체계를 사람이 직접 조작하지 않고 원격 통제 장치에 의해 조작하기 때문에 전차 및 장갑차 승무원의 피격 가능성을 최소화시킨다. 이밖에 극지방에 위치한 노르웨이 특성상 영하 20도 아래의 혹한과 설한지에서도 완전한 작전이 가능하도록 보조 히터가 새롭게 장착되며 배터리에 대한 방한기능도 추가되었다. 또한 K2-NO는 노르웨이 콩스버그사의 전장관리체계를 사용하며 정찰능력 강화를 위해 미 FLIR사의 나노드론도 운용한다.기존 K2 전차와는 차별화된 성능을 자랑하는 K2-NO는 향후 노르웨이 육군의 시험평가에 동원될 예정이다. K2-NO의 등장으로 K2는 기본형과 중동형을 포함해 세 가지 모델의 실물전차가 존재하게 되었다. 해외에서 많은 러브콜을 받는 국산 K2 전차. 하지만 2023년 말이면 K2 전차의 양산이 모두 종료될 예정이다. 향후 추가양산이 없으면 이후 생산 공백에 대응할 능력이 없어, 한국형 전차의 생산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방위산업계 전반에서 나오고 있다. K2 전차와 관련된 협력업체는 1100여 개이며 고용인원은 40000여명에 달한다. 만약 K2 전차가 2023년 말 생산이 끝나게 되면 수출에도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해외시장에서 경쟁상대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레오파드 2 및 미국의 M1A2 계열 전차와 달리 K2 전차는 유일하게 ‘양산중인 전차’라는 강점을 갖고 있다. 반면 레오파드 2 및 M1A2 계열 전차는 퇴역해 보관중인 전차를 재생해 수출시장에 내놓고 있다. 이 때문에 양산중인 K2 전차에 비해 경우에 따라 신형전차임에도 불구하고 수명이 짧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K2 전차의 양산이 종료되면 이러한 장점이 사라지게 되고 가격경쟁력도 떨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K2 전차 추가양산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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