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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직혁신”… 장년국군 새 출발/건군 42돌… 오늘의 새 모습

    ◎합참본부 발족… 전투력 배가기대/국산 최신예 화기로 무장 육군/ 「대양 해군시대」로 발돋움 해군/FA18 차세대 전투기 도입 공군 1일로 건군 42주년을 맞은 군이 통제형 합동참모본부의 발족으로 크게 탈바꿈했다. 창군이래 지금까지 육ㆍ해ㆍ공군 등 3군별로 각각 독립적으로 운용돼 왔던 작전지휘 및 행정권을 현대전의 양상에 알맞게 군령(작전)과 군정(행정)으로 분리,합참본부가 3군을 통합지휘하고 각 군본부는 인사ㆍ훈련ㆍ경리 등 행정적 뒷바라지만 맡게함으로써 유사시 보다 기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건군 42주년을 맞은 국군의 달라진 모습을 합참본부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합동참모본부◁ 새로운 국군조직법의 발효와 함께 전군의 작전전투부대를 직접 총괄지휘할 통제형 합동참모본부가 1일 창설됐다. 국군의 최선임 장성인 정호근 대장이 합참의장으로 취임,이날부터 육ㆍ해ㆍ공군ㆍ해병대의 13개 사령부의 지휘봉을 잡았다. 국방부는 이날을 제2의 창군의 날로 생각하고 국군의 날 행사와 함께 5일 조촐한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 합참의 발족으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각군 참모총장이 지휘하던 작전부대가 합참의장에게 모두 집중됨으로써 작전의 적응성이나 효과ㆍ속도면 등 전술ㆍ전략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기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과거의 합참의장은 국군의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국방부장관→각군 총장에 이르는 군령계선에서 제외돼 있어 국군의 지휘ㆍ참모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징적인 위치에 불과했으나 새로운 국군조직법은 「합참의장은 전투를 주임무로 하는 각군 작전부대를 지휘ㆍ감독한다」라고 명시해 실질적인 작전권을 부여하고 있다. 전군의 모든 전투요소를 총지휘하는 합참의장은 국군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전투부대를 관장한다. 합참의장은 군령권행사로 육ㆍ해ㆍ공군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은 병력의 훈련ㆍ보충기능을 포함한 군정권만 행사함으로써 신병과 사관생도의 교육훈련과 작전부대장을 제외한 인사ㆍ예산ㆍ군사법ㆍ감사권ㆍ군기 및 사기유지에 대한 책임과 권한만을 행사하게 된다. 따라서 각군본부의 인원도 작전과 정보분야에서 약 40%가 감축되어 육군은 2∼3개의 신설사단과 해군은 잠수함전단,공군은 FA18 차세대전투기로 구성된 새로운 전투비행단 창설요원 등으로 전용할 수 있어 막대한 전투력 향상효과도 가져오게 됐다. 각군본부의 감군인원 규모는 약 5천1백여명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장교들로 앞으로 창설될 합참본부의 37개부대의 주력으로 편성되게 된다. 국방부는 합참창설과 함께 우선 직제의 65%만 인선을 마치고 나머지 35%는 오는 연말 정기인사에서 마무리짓기로 했다. 두달밖에 남지않은 상태에서 군고위 장성인사를 할 경우 군무공백을 우려해 창설인사는 현 합참근무자들에게 한정했다. 합참의장을 보좌할 1차장에는 육군의 송응섭중장(육사 16기),2차장에는 해군의 간용태중장(해사 15기),3차장에는 공군의 이양호중장(공사 8기) 등이 기용됐다. 이밖에 전략기획ㆍ작전ㆍ정보ㆍ지원본부장 등 3성장군 4명과 민사심리전ㆍ전비태세 검열ㆍ지휘통제 통신실ㆍ군사연구ㆍ비서실 등 5명,본부장직 11명 등 각군 소장급 16명과 준장 20여명등 40여명의국군최고의 엘리트집단들이 참모로 포진하고 있다. 당초 해군과 공군ㆍ해병대에서는 각군의 특성을 잘 모르는 육군출신의 합참의장이 함대와 전투비행단ㆍ상륙사단 등을 지휘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새로운 합참의장제도에 의문을 표시해 왔으나 해군의 간제독과 공군의 이중장이 각기 작전사령관을 역임,기술군의 지휘에 의장을 훌륭히 보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6ㆍ25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임관한 국군의 원로 정의장은 앞으로 중무장사단 중심의 편제를 경보병 사단화하고 기계화 여단과 연대를 창설,군살을 빼는 현대화작업을 적극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육군◁ 1백55마일 휴전선을 지키고 있는 육군장병들은 우리기술과 자본으로 만든 방위산업제품으로 무장,필승의 신념으로 뭉쳐있다. 보병의 기본무기인 M16소총으로 무장한 장병들은 세계제일의 고학력을 자랑하며 체력이나 정신력에서도 일당백의 높은 사기를 유지하고 있다. 핵투발능력을 가진 1백55㎜ 곡사포,20㎜ 대공발칸포,1백5㎜ 곡사포,60㎜ 4.2인치 박격포,3.5인치 로켓포 등은 육군이 자랑하는 최신예화기이다. 88전차는 가속능력이 탁월한 디젤엔진과 자동변속이 가능한 유압식 변속기를 갖추고 있어 산악지역에서의 기동이 자유로우며 야간사격,이동간 사격에서도 뛰어난 명중률을 갖고 있다. 북한이 보유한 T62전차보다 사격범위가 넓으며 순발력이 있어 전차전에서 유리하다. 89년 6월 육군본부를 충남 계롱대로 이전하면서 육군은 서부전선에 수도권 사수를 위한 강력한 기갑사단을 창설했으며 동부전선 산악지역에서도 기계화사단의 창설을 준비하고 있다. 현역장병의 전투력 이외에 4백여만의 예비군이 향토방위에 동원태세를 갖추고 있다. 육군은 또 수재와 폭설,모내기,수확기에 적극적인 대민지원을 함으로써 국민의 군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육군은 다가오는 2천년대의 전략환경에 자주적이고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한국적인 군인상을 적립하고 동적인 군을 건설한다는 목표아래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 ▷해군◁ 9백마일의 해안선을 경비하고 있는 해군은 93년도 참수함 도입을 앞두고 연안 해군시대를 마감하고대양해군을 향해 매진하고 있다. 84년 4월 전투구축함 「서울함」이 취역한 이후 한국형 구축함이 해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다. 순수한 우리기술과 방위성금 등 우리자본으로 건조된 서울함은 대함 미사일공격 능력과 적의 미사일 공격을 교란시키는 방어능력과 수개월동안 해상에서 작전을 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한국형 구축함은 90년 4월 환태평양 기동훈련에 참가함으로써 미국과 일본 등 우방국 해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주요 해안선과 항로에는 하픈미사일과 대형유도탄 고속정(PGM)과 중형유도탄 고속정(PKM)이 24시간 경계를 펴고 있다. 이들 고속정들은 시속 40노트 이상의 고속운항이 가능해 적의 간첩선을 잡는 명수이며 40㎜ 로켓을 장착하고 있다. 동해안과 서해안에 위치한 2개의 해병사단은 국군의 유일한 전략작전부대로 제몫을 다하고 있다. 충무공의 구국정신을 이어받은 해군은 태평양시대를 맞아 국력에 걸맞는 대양해군 건설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공군◁ 「4천2백만의 불침번」인 공군은 현대전의 승패는제공권 확보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휴전이후 계속되어온 항공세력 우위를 견지하고 있다. 68년 미그잡는 도깨비 팬텀을 도입,영공방위를 폈던 공군은 팬텀이 성능은 우수하나 노후해서 차세대전투기사업(KFP)을 추진,FA18기를 차기 공군의 주력기로 선정했다. FA18은 93년도까지 완제품 12대가 도입되고 36대는 조립생산,72대는 한국에서의 면허생산으로 98년말까지 총 1백20대가 도입되게 된다. FA18은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미그29ㆍSU25보다 성능이 우수해서 앞으로 20∼30년동안 한반도 상공에서 주력기로 활동하게 된다. 공군은 82년 9월 국산전투기 제공호를 조립생산,항공기술을 익혔으며 86년 6월에는 현재 주력기인 F16전투기를 도입,운용하고 있다. 공군은 또 공중훈련 비행장비(ACMI),최신레이다,공대공 미사일 등을 보유함으로써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기를 제압할 수 있는 자신감과 전투기량을 보유하고 있다. 이같은 완벽한 영공방위태세는 그동안 수차례 중국ㆍ북한의 미그기 귀환과 민항기의 불시착 때 적기 조기포착 및 식별,그리고 비상출격및 유도작전에서 입증된 바 있다. 2000년대를 맞는 공군은 「필승의 정예공군」 육성을 목표로 조국영공방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 재미작가 김은국씨의 「민족사적 6ㆍ25론」

    ◎한민족,자의건 타의건 「자유로운 삶의 길」로/“살상ㆍ폐허ㆍ굶주림” 고정관념 벗어날때/개개인의 체험 역사적 맥락서 조망해야/반억압 선택은 바로 「인간해방의 길」/이제야 변혁하는 동구를 보니 큰 대가 치렀지만 값진 경험/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6ㆍ25니 8ㆍ15니 그러한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어마어마한 뜻을 갖고 있는 역사적인 날이 찾아올 때마다 느끼는 것들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는 참으로 쓸데없이 거창하고 모호한 말을 즐겨쓰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문을 토대로 한 우리의 언어의 덕분인지 아니면 우리 민족에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세상의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특이한 태도가 있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겉잡을 수 없는 허황한 상투용어로 한마디하고 넘어가 버리는 버릇이 있다. 8ㆍ15가 오면 언제나 「과거 36년간 혹독한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로 시작하고 끝나고 6ㆍ25가 오면 으레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시작하여 「조국분단의 쓰라림」 등으로 끝난다. 상투용어란 것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써먹어 오다보니 누구나가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처럼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지만 따져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그러니까 한번쯤은 다른 사람들이 쓰는 상투용어를 빌려 쓰지 말고 자기의 말로써 인생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애써 볼 만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요사이 한국에서 흔히 듣는 말이지만 「6ㆍ25를 모르는 세대」라는 표현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개는 「6ㆍ25를 모르는 세대」가 이렇고 저렇고 할때 풍기는 뜻은­그런 표현을 쓰고 사람들에게서 오는­그 세대가 좀 한심하다는 것이다. 그 세대가 한심한건 말건 그것은 둘째로 치고 우선 그러면 그 표현이 내포하는 즉 「6ㆍ25를 아는 세대」는 과연 6ㆍ25를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인생과 역사의 결합 누가 시작한 진담­농담인지는 몰라도 어린애들(물론 6ㆍ25를 모르는)에게 6ㆍ25때 얼마다 먹을 것도 없고 고생했었던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애들이 「그럼 왜 라면이라도끓여먹지 않았냐」하더라고… 원 그런 어처구니 없는 한심한 것들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6ㆍ25를 아는 세대」가 6ㆍ25때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피란만 다녔다는 식으로 「고생」했다고 말을 시작하면 어린애들은 역시 그런 식으로 반문을 할 것이 뻔하다. 고생했다,굶었다,헐벗었었다,많이 죽었다,도시는 폐허가 됐었다,가족이 흐트러졌다­물론 6ㆍ25의 경험속에는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간다. 6ㆍ25라는 것이 빚어낸 현상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6ㆍ25를 참으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다. 경험이란 것은 왜 그 경험이 있게 되고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를 알지 못하면 그 경험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러니 한편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공동체가 쓰는 상투용어로,또 한편으로는 「고생했다」는 개인이 쓰는 역시 상투용어로만은 6ㆍ25와 같은 어마어마한 민족공동체적 개인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6ㆍ25를 체험한 세대에게나 6ㆍ25를 모르는 세대에게나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역사관,그 역사관과 개인을 연결시켜주는 개인의 인생관­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하는­가치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나에게는 6ㆍ25는 「선택」의 경험이라고 여겨진다. 그 「선택」에는 두가지의 선택이 있었다고 본다. 하나는 개인적인 한가지 한가지의 「작은 선택」들이고 또하나는 커다란 역사적인,나아가서는 철학적인 「커다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커다란 역사적인 철학적인 「선택」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온 것이다. 우선 「작은」 선택들이 모이고 쌓이고 하다 좀더 철이 들고 배우고 사색하게 되면서 그 개인과 역사를 연결시켜 주는­인생관과 역사관의 결합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고향이 이북이어서 8ㆍ15를 이북땅에서 맞았다. 그 덕분에 남한으로 넘어오기 전 3년여를 북한식 공산주의체제 밑의 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경험에 바탕을 둔 「작은 선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내게 중요한몇개만을 들어보겠다. 첫째로 생각되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의 특이한 「작은 역사」를 무시하고 말살시키려는 주의와 사상을 거부하고 그것에 반항하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공산당 권력체제가 주장하고 실행한 소위 계급투쟁으로 「소지주 계급」의 낙인이 찍힌 우리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때의 우리의 재산이란 한때 가난했던 조부모님이 일하고 저축하여 쌓았던 것이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고­본인들과 후손의­노력해온 그들의 구체적인 「작은 역사」는 「계급투쟁」이라는 추상적인 커다란 주의ㆍ사상으로부터 아무런 이해와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그 경험은 개개인의 작은 역사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그것을 말살시키려는 주의ㆍ사상ㆍ정치체제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정치관을 갖게 했다. 또한 그러한 소위 「계급투쟁」의 발단,심리적 원시점은 인간의 가장 천한 본능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의 것을 탐내고 남을 시기하는 원시적인 본능을 부추겨서 『잘산다』 『못산다』의 개념과 정의를 오로지 물질적인 차원에만 두는 가엾은 인생의 가치관을 보았고 나는 그러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다. 나아가서는 그러한 추한 인간의 본능을 『그럴듯한』 정치이념과 주의로 장식하여 인간의 증오심을 정의감으로 가장시켜 그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어떠한 사상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선택」을 했다. 목사이셨던 외조부께서 일본통치하에서도 억압을 당하시고 북한공산체제 밑에서도 억압을 당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나의 외조부님을 억압하는 자들」에게의 반항의 「선택」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이면서도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정치이념ㆍ주의사상은 반대해야 한다는 「선택」을 하였다. ○한국은 운좋은 나라 그렇게 하여 내가 6ㆍ25가 일어나기 얼마전 남한으로 넘어 왔을 때는 이미 수많은 작은 「선택」들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6ㆍ25가 왔을 때 그 전쟁은 나에게는 혹독하게 말한다면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나」를 없애버리려는 권력에는 방항ㆍ대항해야 하는 선택밖에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대한민국이 더 좋아서 더 귀중해서 대한민국을 사수하기 위해서 참전한 것 같지는 않다. 또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어쩌니 하는 감상을 품고 전쟁을 겪은 것 같지도 않다. 우선 「나」라는 하나의 인간의 「자신」이 살아 남아야겠다는 것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개성,특이한 작은 역사,개인의 존엄성­이러한 것들이 보존되고 살아 남아야겠다는 신념과 행동의 선택에서 이윽고 자유에의 「선택」이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인생관 가치관이 그 당시에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었으면서도 이념적으로는 뚜렷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훗날에 「나」라는 하나의 개인과 그 개인의 경험을 역사와 연결시켜주는 역사관을 찾았을 때 6ㆍ25를 비롯한 지난날의 경험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인간의 역사를 이렇게 생각한다. 즉 인간의 역사는 「해방」으로의 과정이라고 본다. 자연의 공포와 횡포로부터의해방,질병으로부터의 해방,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무식으로부터의 해방,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무자비한 잔인으로부터의 해방­끝없이 많은 인간해방이 필요하고 하나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유」로의 행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혹한 인간역사의 사실이 증명하듯 그것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한 해방의 과정은 조금씩이나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여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해야 한다. 개개의 구체적인 경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여러 작은 「선택」을 해온 나로서는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지극히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6ㆍ25란 나에게는 하나하나의 개인이 나름대로의 해방을 찾고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인생관과 역사관을 얻게 해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흔히 진담­농담으로 말하듯이 대한민국은 참으로 운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할수 있는 나도 운이 좋은 사람이 되겠지만). 6ㆍ25는 대한민국에도 역시 하나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싫건 좋건 이끌린 삶 강대국간의 냉전이니,국제정세의 배경이니,국토의 분단이니­「동족상잔의 비극」이니­그런 것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6ㆍ25라는 역사적 사건과 경험은 한국으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 「선택」으로 한국은 공산주의 체제가 아닌 자유주주의체제 쪽으로,공산주의의 국가통제경제가 아닌 자유시장경제체제 쪽으로,그 당시에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이끌려 간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간에 개개인의 역사가 존중되고 개개인의 나름대로의 자유가 존중될 수 있는,앞서 말한 인간해방의 역사관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가 의식적으로 또한 고의적으로 그러한 역사의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는 말은 아니다.한국이 운이 좋은 나라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된다. 6ㆍ25를 전후한 국제정세와 6ㆍ25라는 처참한 경험을 겪고 살아남은 한국은 어쩌다 싫건 좋건 그러한 길을 선택하게 됐고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한 선택을 한 이상 한국은 어쩔 수 없이라도 한걸음 한걸음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 끼여 따라가게 돼있다. 지난 몇년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와 발전을 생각해 보면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 커다란 인간역사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은 물론 국가사회라는 공동체도 예측할 수 없는 현상과 결과를 빚어내는 버릇이 있다. 6ㆍ25라는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회가 자진해서 이룬 것이 아닌 하나의 선택을 한국사회에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선택이 나 자신의 선택과 어울리는 것이기에 지극히 흡족하게 느낀다. 그러기에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는 6ㆍ25를 겪었기 때문에,또 6ㆍ25를 계기로 하여 전세기적인 인간가치관과 인간통치관에서 탈피하여 전진적인 인간해방의 역사적 흐름에 함께 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기다랗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동독을 비롯하여 폴란드ㆍ헝가리ㆍ체코ㆍ루마니아 심지어는 불가리아 등­동구 여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화를 생각만 해보면 된다. 그들의 역사야말로 인간해방의 역사이다. 40여년간의 공산주의 독재체제 밑에서 억압당해 왔던 하나하나의 인간들을 해방하고 자유를 이루어준 역사의 흐름이 파도를 친 것이다. 불평ㆍ불만이 많고 걸핏하면 「한」이 어쩌고 하는 우리는 동구의 그들에 비하면­나아가서 소련의 일반 시민들과도 비하면­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6ㆍ25라는 참혹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 경험이 헛되지 않게 해준 그 「선택」 덕분에 우리는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서 그들보다 훨씬 앞서 있게 된 것이다. 동구의 그들 뿐인가. 소련의 사정을 살펴보며 리투아니아ㆍ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 국민들의 자유독립에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 우크라이나의,그루지야의,아르메니아의,아제르바이잔의 모든 개인들의 자유독립으로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2차대전이후의 세계역사를 소위 냉전의 역사라고 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 냉전의 역사는 실은 자유와 억압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선택하고 자유시장경제 제도를 선택한 진영은 꾸준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이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인간을 조롱하는 것들에서부터의 인간해방을 이루어왔다고 본다. 그것을 인정 안하다면 동구공산권의 붕괴와 동구 사람들의 자유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인간가치관의 대결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2차대전후부터의 이른바 냉전은 결국은 정치이념의 대결이었고 인간의 가치관의 대결이었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와 개방」을 위주로 하는 이념과 절대적인 정치권력 체제속에서의 「인간통치」에 전념하는 이념과의 대결이 아니었던가. 6ㆍ25에 참전하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하는 감상을 품고 있지 않았었다고 나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어떻게 보면 냉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6ㆍ25전쟁이 내게는 단순히 부족간의 영토싸움이라든가 조국통일이라는 미명아래에서의 권력다툼이라든가 그러한 전세기적인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었기에 그랬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쟁은 2차대전때 이미 시작되고 그 후에 냉전으로 계속된 이념의 대결이 터져나온 전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싫건 좋건 틀렸건 옳건간에 사람은 각자각자 나름대로의 작은 역사를 창조하고 자유와 개방을 이루고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도록 풀어주고 돌봐주어야 한다는 가치관과 이념과 역사관을 「선택」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6ㆍ25의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상투용어로 그 경험을 「설명」해 버리려는 것을 싫어한다. 그 전쟁이 그것뿐이었다면 그야말로 전세기적인 관념으로 그 전쟁의 경험을 소화하려는 것이 된다. 그 보다는 「나는」 「우리는」 그러한 참혹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이러한 선택」을 하였노라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김은국 □32년 함남 함흥출생.□황해도 황주,중국 만주에서 성장. □48년 평양 제2중(평양고보)재학중 월남. □50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중퇴(6ㆍ25발발로). □51∼54년 육군장교복무. □55년 도미,미들버리대(정치학 및 역사철학전공),존스 홉킨스대(영문학 전공),아이오와대 대학원,하버드대 대학원 졸업. □64년 6ㆍ25를 배경으로 한 소설 「순교자」를 하버드대 대학원 졸업논문 대신 발표,세계적 명성얻음. □이후 「심판자」 「잃어버린 이름」 「잃어버린 영혼」 등 발표.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시라쿠스대,캘리포니아 주립대교수 서울대 교환교수 역임. □현 매사추세츠 소재 「트랜스 리트 에이전시」 (국제저작권대행회사)대표.
  • 미,스텔스기 40%선 감축

    ◎체니국방,구매계획 축소… A12 등 전술기도 함께/국방예산 97년까지 348억불 절감/육군도 5년내 25만명 줄여 【워싱턴 AP 로이터 연합】 리처드 체니 미국방장관은 26일 막대한 비용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B­2 스텔스폭격기 계획을 1백32대에서 75대로 감축하는 것을 비롯,A­12,C­14등 여러건의 첨단 전술 항공기들의 구매계획을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체니장관은 항공기계획에 대한 의회청문회를 앞두고 이날 국방부에서 배포한 성명서를 통해 이들 기종의 구매대수 감축으로 91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에서 24억1천만달러를 절감할 수 있으며 오는 97년까지 3백48억달러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체니장관은 B­2 스텔스 폭격기의 경우 우선 내년 회계연도중에 구매할 대수를 원래 계획했던 5대에서 2대로 줄일 방침이라고 밝혔다. 체니장관은 이밖에 노후화된 C­141 수송기를 대체하기 위한 C­17 장거리수송기 구매대수를 2백10대에서 1백20대로 줄이도록 제안,1백26억달러를 절감할 방침이며 해군의 A­12전천후 중거리요격기도 8백58대에서 6백20대로 줄이겠다고 말했다. 【워싱턴 AP 연합】 미육군은 향후 5∼6년에 걸쳐 병력수를 현수준에서 최고 25만명까지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이클 스톤육군장관이 예측했다. 스톤장관의 이같은 예측은 자신의 대폭적인 인원감축제안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한 것이다. 이런 감군계획이 단행될 경우 미육군은 2차대전이래 최소규모로 축소된다. 스톤장관은 리처드 체니국방장관이 최종결정을 내리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75만명의 현역병력 기본수준으로부터 약 20만∼25만명을 줄이게 될 것으로 본다』고 말하고 『그렇게 되면 미육군은 95년이나 96년까지는 오늘날보다 3분의 1가량 감군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미육군 현역병력 18만 감축/97년까지/예비병력도 12만명 줄여

    ◎워싱턴포스트 보도 【워싱턴 로이터 AP 연합특약】 미육군의 현역병력이 오는 97년까지 현재의 76만4천명에서 58만명으로 4분의 1이 감축될 것이라고 워싱턴 포스트지가 15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국방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마이클 스톤 미육군장관과 칼 부오노 육군참모총장이 국방부의 92∼97년 육군 장기예산안에 포함한 현역군인 대폭감축계획을 지난 11일 최종 승인했다고 전했다. 이와함께 주방위군과 예비군 병력도 같은 기간중 현재의 77만6천명에서 65만4천명 수준으로 감축될 예정이라고 국방부 관리들이 전했다. 이밖에도 육군당국은 당초 계획했던 군수조달 계획안중 34개 항목을 폐기 또는 감축키로 했다. 이에따라 소규모 군부대로부터 주요 무기체제에까지 광범한 분야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육군관리들은 말하고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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