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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청, 선수촌 여자숙소 증설요구 사실상 수용

    태릉선수촌 여자숙소 문제가 해결의 단초를 마련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18일 대전 서구 둔산동 정부대전청사 회의실에서 선수촌 여자숙소 문제로 항의 방문한 국가대표 선수단과 면담을 갖고 옥상의 일부 설계를 변경하는 조건으로 현재 기초체력 훈련관인 감래관을 여자숙소로 변경하는 리모델링안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문화재청은 서울 태릉이 문화재인 점을 고려, 선수촌 안의 여자숙소를 늘리기 위한 감래관 리모델링 계획에 반대해왔다. 이에 이에리사 선수촌장을 비롯,10개 종목의 대표선수 200여명은 이날 오전 9시30분부터 문화재청을 방문,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 청사 진입을 시도하는 레슬링 선수와 청원경찰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오후 1시쯤 박태호 선수촌 운영본부장을 비롯한 대표단 7명과 유홍준 청장의 면담이 성사됐고 이 자리에서 유 청장이 유연한 태도를 보여 외견상 체육계가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21일 문화재위원회 심의가 남아있어 언제든 충돌이 재연될 수 있다. 또 선수촌측의 더 큰 반발을 불러올 태릉선수촌 철거란 큰 산을 남겨두고 있다. 문화재청은 조선왕릉의 완전 복원을 위해 선수촌을 철거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유 청장의 양보가 전술적 후퇴일 수 있다는 것이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강릉’ 35년만에 열린다

    그동안 주민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태강릉의 강릉(사적 제201호)이 이르면 내년 봄 개방될 전망이다. 이노근 노원구청장은 21일 문화재청을 방문, 유홍준 문화재청장에게 공릉동 문화재보호구역 내에 있는 강릉의 개방을 건의했으며, 유 청장은 이를 수용,“내년 봄 학생들의 소풍 시즌에 맞춰 개방할 것”을 지시했다고 22일 밝혔다. 조선 제13대 명종과 그의 비인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은 1973년 중종왕비 문정왕후의 묘인 태릉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후 태릉만 일반 주민들에게 개방되고 강릉은 주민들의 관람을 허용하지 않았다. 유 청장은 태강릉 방문객들을 위해 지상 1층, 연면적 1100여㎡ 규모의 왕릉전시관 건립계획도 밝혔다. 조선 왕릉 가운데 강릉은 봉분양식과 망주석, 장명등, 문무인석, 석마 등 석물의 규모가 웅장하고 원형 그대로 보존돼 걸작으로 꼽힌다. 이 구청장은 강릉 개방 외에도 이 일대 폐쇄 등산로 개방, 클레이 사격장 토양오염 정화 등을 건의했다. 이에 대해 유 청장은 등산로는 주민들의 등산에 지장이 없도록 원만하게 해결하고, 사격장 문제는 현재 재판 중이므로 그 결과를 지켜 보자고 답변했다고 노원구는 전했다. 이 구청장은 “강릉 개방은 주민들의 오랜 바람이었다.”며 “강릉 개방과 연계해 육사박물관, 지난 10월 보물로 지정된 이윤탁한글영비(한글고비) 등 문화자원을 묶어 관광벨트화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노원구는 지난 8월 이후 두 차례에 걸쳐 강릉 개방을 문화재청에 공식 건의했었다. 현재 문화재청은 태강릉을 포함, 조선시대 왕릉 40기를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할 계획이다.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S 돋보기] 태릉사격장, 일단 문 열자

    “방 빼” vs “배 째” 한국 사격의 메카인 태릉국제종합사격장 철거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당초 1일부터 이곳 시설물에 대한 강제 철거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대한체육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연말까지 철거작업을 유보키로 했다. 김정길 대한체육회장이 유홍준 문화재청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연말까지 대안을 모색하기로 뜻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체육계와 문화재청은 기존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태도여서 2개월 뒤에도 첨예한 대립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 시설이 철거되면 당장 국가대표 선수들의 베이징 올림픽 준비에 차질을 빚게 되는 대한사격연맹은 지난달 1일부터 폐쇄한 태릉사격장을 다시 개방할 때까지 연맹 사무국 앞에 설치한 천막에서 철야농성을 벌이는 한편, 베이징올림픽 불참 등 초강경 대응책까지 검토하고 있다. 연맹 고위 관계자는 “태릉사격장은 올림픽 메달의 산실이자 사격인들의 요람”이라며 “대체 사격장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횡포”라고 흥분했다. 이어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굳이 올림픽을 앞둔 시점에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반면 문화재청은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선 태릉사격장 철거가 불가피하며, 내년 4∼5월 유네스코 실사단 방한에 앞서 왕릉 복원을 마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화재청 실무 담당자는 “올림픽도 중요하지만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국가적 대사”라며 “철거 방침이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도 아니고 몇 년에 걸쳐 사격연맹에 요구했는데 아직까지 대체 연습장조차 마련하지 않은 것은 사격연맹의 책임”이라고 반박했다. 결국 범정부 차원에서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로 떠올랐다. 양측의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올림픽 메달을 꿈꾸는 대표 선수들이 연습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돼선 안 된다.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때까지는 선수들에게 태릉사격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게 많은 이들의 바람이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2) 정선의 ‘박연폭’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2) 정선의 ‘박연폭’

    진경산수는 우리 산천에 어울리는 필법으로 경관의 정취를 회화적으로 재구성했다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겸재 정선(1676∼1759)이 위대한 화가로 대접받고 있는 것은 이런 진경산수의 시조이자 완성자이기 때문이지요. 겸재의 진경산수는 실제의 현장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 보통입니다. 현장에서 사생한 초본을 토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현장을 다녀간 뒤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의 그림을 보면 진경(眞景)이라는 개념이 실경(實景)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술사학자인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풍의 화가들이 얼마나 실제의 경치와 닮게 그렸는지를 수치로 제시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는데, 겸재의 ‘현장충실도’는 30∼50% 수준에 그쳤지요. 다만 비에 젖은 바위의 강렬한 인상을 강조한 걸작 ‘인왕제색도’에 겸재의 작품으로는 예외적으로 70%를 주었습니다. 최근 개성에서 시범 관광이 이루어지면서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이자, 조선삼대명폭(朝鮮三大名瀑)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찾은 사람들은 “겸재가 그린 박연폭포와는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닮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겸재의 ‘박연폭(朴淵瀑)’은 까마득한 곳에서 쏟아지는 폭포수의 장쾌한 기운이 생동감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소리의 리얼리티를 평면에 구현해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마치 화면에서 폭포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는 찬사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바라보는 박연폭포는 그림 속의 그것만큼 높지 않습니다. 그림에서와 같은 기운을 느끼려면 폭포 바로 아래서 올려다볼 때만 가능하지요. 하지만 겸재의 그림은 폭포에서 얼마간 떨어져, 그것도 약간 높은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폭포의 전모를 보여주면서, 폭포수의 강렬한 이미지도 화폭에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엔 박연폭포에 감탄하고 있는 두 사람의 선비와, 이들을 이곳으로 안내한 듯한 동자승의 모습이 작게 보입니다. 실제로는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야 하는 언덕에 지어져 있는 범사정(泛斯亭)도 폭포가 떨어지는 고모담에 바짝 붙여놓았지요.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이를 두고 ‘현장감과 스케일을 동시에 느끼게하는 조형적 배려’라고 했는데, 실제로 이 부분이 없었다면 화면 속의 박연폭포는 그리 장쾌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의 박연폭포는 펑퍼짐한 바위 위로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이지만, 겸재는 좌우 암벽 사이를 좁혀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겸재는 진경산수에 이렇듯 특유의 변형방식을 적용했습니다. 다른 그림도 마찬가지여서, 대표작의 하나인 ‘금강전도’(1734년, 삼성미술관 소장)는 마치 새처럼 하늘을 날며 금강산 전체를 굽어본 듯한 풍경이지요.‘금강팔경도첩’(1730∼1740년, 간송미술관 소장)의 ‘정양사’는 천일대에서 내려다 본 정양사와 정양사에서 올려다 본 비로봉 일대를 합성한 시점입니다. 이렇게 실경을 재해석하여 조형적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을 거쳤으니 겸재의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만년의 걸작인 ‘박연폭’에서 보여주는 과감한 변형은 당연히 예술적 완성도에 대한 겸재의 자신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dcsuh@seoul.co.kr
  • 김중섭씨 처용무 보유자로 인정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전수교육조교 김중섭(67)씨를 처용무 보유자로 인정했다고 19일 밝혔다. 고(故) 김기수 보유자를 사사한 김씨는 1977년 처용무 이수자가 됐으며 장단에 따른 처용무의 춤사위는 물론 발동작의 변화나 창사(唱詞, 노래), 반주음악까지도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처용무는 춤과 노래로 역신을 물리쳤다는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한 무용으로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궁중무용이다.
  • [씨줄날줄] 주꾸미 공덕비/황성기 논설위원

    살면서 수없이 듣고 수없이 하는 게 “덕을 쌓아라.”는 말이다. 논어에 덕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정치를 덕으로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는데 뭇 별들이 그를 향해 도는 것과 같다.”는 말도 그중 하나다. 그렇지만 덕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은 ‘국어 낱말 뜻’숙제를 내고 수렴청정, 선왕 다음으로 덕이란 단어를 조사하라고 했다. 덕이란 뜻을 이해하고 숙제를 해간 아이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덕(德)은 인간이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일 것이다. 덕을 물어 왔을 때 제대로 답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전적 의미로는 첫째, 마음이 바르고 인도(人道)에 합당한 일, 둘째 도덕적 이상 또는 법칙을 좇아 확실히 의지를 결정할 수 있는 인격적 능력, 셋째 은혜이다. 덕을 베풀면 사람이건 동물이건 기렸던 것이 우리 민족이다. 불타는 집에서 주인을 구한 전북 임실군 오수마을의 충견에게도 베푼 덕을 기린다는 뜻에서 공덕비가 세워졌다.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고려 청자를 안고 침몰한 배를 찾는데 결정적 공로를 세운 주꾸미의 동상을 세운다고 한다. 주꾸미를 건져 올린 어민에 공이 있는지, 청자대접을 움켜 쥐고 있던 주꾸미에 공이 있는지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주꾸미가 소송을 건다면 법원은 주꾸미에게 상당 부분의 공을 인정할지 모른다.1994년 건립된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신안 앞바다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지어졌다. 수천점의 태안 앞바다 고려청자를 인양하는데 도움을 준 주꾸미에게 공덕비 같은 동상을 세워 주는 일은 지자체 발전을 꾀하는 태안군으로선 당연하다. 주꾸미에게 공덕비를 세우는 일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공덕비를 많은 사람의 말이 이루는 ‘만구성비(萬口成碑)’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직접 그렸다는 동상 설계안을 보면 통발 어선에 낚아 올려지기 전의 주꾸미의 모습을 생생히 그리고 있다. 고려 시대의 유물을 900년이 지난 지금 현대인들에게 선사한 주꾸미의 공도 크지만 그것을 건져올린 어민 김용철씨에게도 청자 1점을 보상하는 것 이상의 공덕을 기리는 게 예의가 아닐까 한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청자 주꾸미’ 동상 세운다

    ‘청자 주꾸미’ 동상 세운다

    수만점의 고려청자를 실은 채 충남 태안앞바다에 침몰한 운반선을 찾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주꾸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진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주꾸미 동상 건립을 이완구 충남지사에게 제안했다.”면서 “충남도나 태안군 모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11일 말했다. 유 청장은 특히 주꾸미가 청자 접시를 붙든 채 바다에서 건져올려지는 장면을 스케치한 동상 설계안을 직접 그려 충남도와 태안군에 전달했다. 태안군 관계자는 “우리 지역 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청자와 운반선을 널리 홍보할 필요가 있어 전시관과 함께 주꾸미 동상을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면서 “동상 건립 시기는 내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안 고려청자 운반선은 지난 5월 충남 태안군 근흥면 대섬의 이웃 바다에서 통발로 주꾸미를 잡던 현지 어민 김용철(58)씨가 주꾸미가 움켜쥔 청자대접 한 점을 건져 올림에 따라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오죽헌 율곡매 천연기념물로 지정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전국 우수 매화자원 발굴 일환으로 강원 강릉 오죽헌 율곡매(栗谷梅)를 비롯한 매화나무 3건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고 5일 밝혔다. 지정번호 484호인 오죽헌 율곡매는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 무렵(수령 600년 추정)에 심어졌고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가 직접 가꿨다고 전해진다. 전남 구례 화엄사 길상암 앞 급경사지 대나무 숲에 자라는 매화(485호·수령 450년 추정)와 전남 장성 백양사 고불매(古佛梅·486호·수령 350년 추정) 또한 천연기념물로 등재됐다.
  • [Local] 강진, 옛 아시아 지도 전시

    네덜란드인 하멜이 아시아와 한국을 오갔던 옛 아시아 지도가 전남 강진군에 전시된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18세기 유럽인이 그린 아시아 옛지도 2점을 건립 중인 강진군의 하멜전시관(12월3일 개관)에 기증했다. 유 청장은 ‘남도답사 1번지’라는 책을 써서 강진군을 알린 공로로 1996년 강진군 명예군민 1호가 됐다.1784년 종이에 그려진 지도는 가로 42㎝, 세로 34㎝ 1점과 가로 47㎝, 세로 32㎝ 1점이다. 지도는 시가 1000만원을 넘는 것으로 아시아의 산맥과 강, 항구 등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유 청장은 대통령의 유럽 동행순방 때 로마 고서점에 들러 지도를 샀다. 이태호 명지대 박물관장은 “이 지도는 하멜 시대의 아시아 항로를 알 수 있는 진본이고 하멜 전시관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심상정은 누구

    민주노동당 심상정(48) 의원은 학창시절부터 노동운동의 길을 걸었다. 심 의원은 지난 1978년 서울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했다. 상아탑에 머무르지 않고 입학 이듬해 구로공단에 취업하면서 노동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983년 대학을 졸업하고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1983년 대우어패럴노조 결성에 이어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다. 이때 파업 주모자로 지명수배되기도 했다. 이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거쳐 1990년 전노협 쟁의국장,2000년 금속산업연맹 사무차장,2001년 금속노조 사무처장을 잇달아 맡아 남성 중심의 노동 현장에서 앞장섰다. 남편 이승배씨도 노동운동을 함께하다 만났다. 출판사를 하던 남편은 지금은 외조에 전념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항상 과격한 별명이 따라 다녔다. 전노협 쟁의국장 때 지금은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씨가 ‘무력부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현대·대우 등 대공장 조합원들을 상대하는 금속노조 사무처장을 연임하면서 ‘철의 여인’이란 별명을 얻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뽑은 ‘비례대표 1번’으로 17대 국회에 입성한 이후 심 의원의 능력이 더욱 빛을 발했다. 초선이지만 눈부신 의정활동으로 각광을 받았다. 국정감사나 재경위원회 등에서 핵심을 찌르는 ‘송곳질문’으로 정부 관료들에게 ‘경계 1호’로 꼽힌다. 언론매체가 초선 의원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최고의 국회의원’으로 선정됐고,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에서는 2005년과 2006년 연거푸 여성 의원 중 의정활동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며 대선 후보 반열에 올랐다. 구동회기자 kugija@seoul.co.kr
  • 1300년만에 미소 드러낸 경주 남산 마애불상

    1300년만에 미소 드러낸 경주 남산 마애불상

    지난 5월 경주 남산 열암곡에서 발견된 마애불은 조각솜씨가 뛰어난 데다 보존상태 또한 완벽한 것으로 확인되어 단숨에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조각면이 지표면쪽으로 넘어져 있는 마애불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고자 그동안 불상 아래쪽의 흙을 파내는 작업을 벌인 뒤 현장을 10일 공개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날 “콧날까지 완벽하게 남아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뛰어난 통일신라 석조입상은 발견된 사례가 극히 드물다.”며 뛰어난 보존상태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이 마애불은 조성된 뒤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넘어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각면에 땅쪽으로 향하고 있어 비바람에 따른 훼손도 그만큼 적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애불은 100㎝의 연꽃봉오리 모양 대좌(받침)를 포함한 전체 높이가 560㎝이다. 넓은 어깨에 가슴을 편 당당한 모습에 오뚝한 코와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 도톰한 입술을 가진 타원형 얼굴은 원만하면서도 이지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다. 특히 이 마애불이 대략 4등신(等身)으로 몸에 비해 머리가 크게 표현되어 있는 것은, 대형불상인 만큼 예불하는 사람이 우러러볼 때 불상의 적정한 비례를 고려한 결과라고 경주문화재연구소측은 설명했다. 불상의 조성 시기를 놓고 정은우 동아대 교수는 “처음 공개됐을 당시에는 옷주름과 발 모양만을 근거로 9세기 불상으로 추정했으나, 이번에 다시 보니 얼굴 측면의 양감이 매우 뛰어나 8세기까지 제작연대를 올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 역시 “얼굴 측면의 양감은 매우 훌륭해 8세기 통일 신라 불상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옷주름이나 발의 새김이 단순하고 형식화된 감이 있다.”면서 “현재로서는 8∼9세기 정도로 제작연대를 폭넓게 잡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마애불의 복원과 관련해서 유홍준 청장은 “불상을 새긴 돌의 무게가 70t이나 나가 본래의 모습대로 일으켜 세우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마애불을 90도 정도 돌려놓아 와불(臥佛·누워있는 불상) 형태로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4)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4)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를 두고, 옛 그림 연구에 업적을 남긴 동주 이용희는 “일견 퍽 싱거운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소나무가 있고, 엉성하게 보이는 집이 한 채 있을 뿐 아마추어가 보면 왜 좋은 그림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추사의 일생을 다룬 최초의 본격적인 비평서인 ‘완당평전’을 내놓은 유홍준도 “실경산수로 치자면 0점짜리”라고 거들었지요. 그럼에도 ‘세한도’를 추사 예술의 극치로 꼽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습을 옮긴 것이 아니라 사의(寫意), 즉 뜻을 그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도와 묘사력이 뛰어나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과 글씨, 글의 내용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좋다는 설명이지요.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를 맞은 1844년 제자인 우선 이상적(1804∼1865)에게 그려준 것입니다. 중인 출신 역관인 이상적은 추사가 낙마하여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된 상황에서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아 스승을 감격케 했습니다. ‘세한도’를 보면, 그림과 발문(跋文)이 각각 담긴 두 장의 종이를 이어붙이고 경계 부분의 아래쪽에는 ‘阮堂(완당)’이라고 새겨진 도장을 찍었습니다. 두 장으로 되어 있지만 하나의 그림으로 보아달라는 뜻이겠지요. 실제로 세상의 시비에 여간해서는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엄정한 필치의 발문이 없다면 ‘세한도’는 다소 심심한 그림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이 108.3㎝짜리 ‘세한도’를 제대로 전시하기 위해서는 10m가 훨씬 넘는 쇼케이스가 필요합니다.‘세한도’ 두루마리에는 이 그림을 감상한 인물 20명이 직접 쓴 감회가 줄줄이 붙어 있기 때문이지요. 지난해 추사 서거 1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에서도 두루마리를 모두 펼쳐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전해받은 해 동지사 이정응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습니다. 그는 이듬해 정월 중국인 친구 오찬(吳贊)이 베푼 재회축하연에서 청나라 명사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16명으로부터 제문(題文)과 발문을 받았지요. 이상적은 장목(張穆)의 제문을 표지삼아 그림과 제발을 한 축의 두루마리로 표구한 뒤 가져왔고 다시 제주도로 보내 추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이 두루마리는 제자였던 매은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 소매 김준학이 물려받아 끄트머리에 감상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후 ‘세한도’는 민영휘의 집안이 소유했다가 일본인 추사연구가 후지쓰카 지카시오(藤塚隣)에게 팔아넘겼지요. 이것을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1944년 거금을 싸들고 현해탄을 건너가 3개월 동안 아침저녁으로 병석에 누운 후지쓰카를 문안한 끝에 받아들고 돌아왔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손재형은 194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과 대한민국 초대부통령 이시영,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글을 받아 두루마리에 이어붙였습니다. 그런데 훗날 국회의원에 출마한 손재형은 ‘세한도’를 저당잡히고 선거자금을 끌어다 썼지요. 하지만 낙선하여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그림은 미술품수집가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지금도 그의 집안에서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한도’는 1447년 그려진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이어 두번째 많은 제문과 발문이 붙은 조선시대 그림이 되었습니다.‘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발문을 비롯하여 22명의 글 23편이 두루마리 두 축에 표구되어 있지요. 손재형은 오세창 등의 발문을 이어붙인 뒤에도 ‘세한도’ 두루마리에 90㎝ 정도의 공백을 남겼다고 합니다. 누군가 그림을 품평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을 만나면 발문을 받겠다는 생각이었겠지요. 하지만 발문을 이어붙이는 전통은 끊어지고 지금까지도 당시의 상태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림에 감상문을 붙여 후세에 물려주는 풍습은 서양의 캔버스 미술문화에서는 불가능한 두루마리 그림문화만의 특징입니다.‘세한도’처럼 그림 자체의 품격도 품격이지만 발문을 쓴 사람이 누구이고, 그 문장의 수준이 어떠한가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그림이 갖고 있는 묘미의 하나일 것입니다. dcsuh@seoul.co.kr
  • 경북 안동 병산서원 가는 길

    경북 안동 병산서원 가는 길

    존구자명(存久自明), 존재란 오래되면 스스로 밝아지는 법. 길이 그렇다. 오래된 길일수록 질박한 우리네 삶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자신과 주변을 밝고 아름답게 변모시켜 왔다. 요즘은 어떤가. 길을 빠르고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는가. 온통 덮어 씌우고 밀어버리는 것을 능사로 아는 시대에 아직도 흙먼지 폴폴 날리는 옛길이 남아 있다는 것이 여간 반갑고 고맙지 않다. 이젠 제법 입소문이 난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 가는 옛길. 자체로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지만, 포장도로로 만들려는 시도를 막아낸 것이 안동 시민들이었기에 더욱 뜻깊은 옛길이다. 글 사진 안동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재잘대던 유생들은 간데없고… 옛길의 정취를 호젓하게 느끼고 싶다면 무엇보다 하회마을과 갈라지는 삼거리 주차장에 차를 버려둘 일이다. 하회마을 삼거리에서 시작되는 병산서원 가는 길은 흙먼지 폴폴 나는 비포장 10리(4㎞)길. 버스는커녕 승용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만큼 좁은 산길이다. 진작 이 길의 아름다움을 간파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반드시 발품 팔아 걸어보아야 할 길’이라 상찬하기도 했다. 병산서원 가는 길엔 낙동강이 동행하며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한걸음에 상큼한 산들바람이 코를 간지럽히고, 또 한걸음엔 강바람이 폐부를 씻어낸다. 어느덧 계절의 끝자락. 가을 냄새 머금은 오후 햇살이 숲과 강과 길에 걸터앉아 있다. 들꽃들이 전하는 옛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가만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인적 드문 산길도 적적하지 않다. 높다란 포플러 나무가 우람한 체구를 자랑하는 고갯마루에 멈춰 섰다. 양반걸음으로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너머로 넉넉하고 평화로운 안동 들녘이 펼쳐졌다. 휘돌아 가는 길 너머로 자연스레 예전 풍경이 오버랩된다. 책 몇권 움켜쥔 유생들이 짐짓 점잔 빼며 팔자걸음 걷고, 여름내 물가에서 살갗을 태운 꾀죄죄한 몰골의 개구쟁이 꼬마들이 뒤를 잇는다. 불꺼진 곰방대 입에 문 촌로는 우마차를 채근하고, 밭고랑 사이에서 길게 허리 펴며 일어선 아낙네는 두손방망이질로 고단했던 무릎을 다독거린다. 아마도 산자락 나무 뒤에는 지나는 유생들을 훔쳐보며 한숨 쉬던 시골처녀도 있었을 게다. 이제 산자락 하나 돌면 병산서원. 길과 강을 가르는 밭을 지나 강변으로 내려섰다. 길다란 모래톱이 병산서원까지 이어졌다. 모래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맛이 각별하다. 사각거리며 걷는 동안 예전 사람과 동행하는 듯한 환상에도 젖어 본다. 곁을 스치는 백로의 날갯짓에 눈떠 보면 유생들의 티없이 해맑은 얼굴이 파란 하늘에 맺힌다. ●안동의 숨은 진주 병산서원 조선시대 5대 서원의 하나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의 하나로 평가받는 곳.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풍산 류씨 문중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을 서애 류성룡의 뜻에 따라 1572년 옮겨 지었다. 산비탈에 가지런하게 세워진 서원의 풍모에서 세월이 빚어낸 장엄함이 느껴진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을 지나면 만대루가 눈을 사로잡는다.200명이 앉을 수 있다는 너른 만대루에 오르면 굽이치는 낙동강과 병산 앞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덟기둥 한칸 한칸은 그대로 병풍이 되고 풍경화가 된다. 여느 누각들과 달리 흔한 장식하나 없고, 나무에 칠도 하지 않았건만 어찌 이리 아름다울까.‘조선 서원 건축의 백미’란 평이 허언이 아님을 절감케 하는 장면. 만대루 기둥에 등대고 앉아 가슴 한자락 내려놓았다. 어디가 건물이고 어디가 자연인가. 병산서원 hahoe2.andong.com,054)853-2172. 지킴이 류시석 011-540-2172.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서안동나들목→국도 34호 예천방향→916번 지방도 풍천방향→5㎞ 직진→하회마을 진입로→효부리→좌회전→하회마을 삼거리→병산서원 ●먹거리 헛제삿밥은 안동 특유의 먹거리. 안동댐 월영교 앞 ‘맛 50년 헛제사밥’이 많이 알려져 있다.6000원,1만원.054)821-2944. 안동찜닭을 제대로 맛보려면 안동 구시장을 찾아야 한다.1마리 1만 8000선.4명이 먹어도 충분하다. 안동역 건너편 한우골목에서는 값싸고 질좋은 한우고기를 맛볼 수 있다.250g에 1만 4000원선. 안동관광정보센터(tour.andong.go.kr) 856-3013, 안동시 관광안내소 851-6397. ●2007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국내외 탈춤단체들이 신명을 함께 느끼며, 문화적 교류를 꾀하는 탈춤인의 축제. 국내 중요문화재 지정 탈춤 13개가 공연되고, 세계 각국의 민속탈춤과 민속축제, 각종 부대행사 등이 열린다.28일∼10월7일. 탈춤공원, 하회마을 등 안동시내 일대. 안동민속축제도 이 기간 중 동시에 개최된다. 안동축제관광조직위원회 사무국 840-6398.
  • 러 문헌 전시 등 독도박물관 10돌 행사

    국내 유일의 영토박물관인 독도박물관이 8일 개관 1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갖는다. 6일 경북도에 따르면 이날 울릉군민회관에서 김관용 경북도지사 등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도를 지킨 민간외교관 안용복 선생을 주제로 한 포럼을 열었다. 또 7일에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을 초청해 특강을 갖는다.8일에는 독도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행사와 ‘무릉도원을 찾아 동해의 섬으로’ 특별전 개막식을 개최하고 독도 현지에서 백정진 시인 등 60여명의 국내 문인이 참여하는 시낭송과 백정희 현대무용공연 등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8일부터 10월6일까지 ‘무릉도원을 찾아 동해의 섬으로’란 주제로 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전시회가 열린다. 울릉도·독도가 자세히 표기된 고지도 60여점과 한·일·러시아의 독도 자료와 문헌 등이 전시된다. 독도박물관은 광복 50주년인 1995년 울릉군이 부지를 제공하고 삼성문화재단이 건축한 건물에 이종학 초대관장이 35년간 수집한 독도 자료 600여점을 기증해 1997년 8월8일 개관했다.1950년대 독도를 일본세력으로부터 지킨 독도의용수비대 고 홍순칠 대장의 유품과 의용수비대동지회 및 푸른독도 가꾸기모임 등에서 제공한 자료들이 전시 품목에 추가됐다. 개관 이래 모두 89만여명이 방문했다. 이승진 독도박물관장은 “독도박물관이 지금까지 일본 우익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논박하는 사료 정리와 이론적 토대를 확고히 하는 데 힘써왔다.”면서 “이번 10주년 행사는 국민의 영토의식과 민족의식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말했다.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
  • “저서 구입에 예산사용 죄송” 유홍준 문화재청장 사과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3일 문화재청이 정부 예산으로 자신의 저서를 구입해 홍보물로 활용한 것과 관련,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유 청장은 ‘문화재청 홍보용 기념도서 구입관련 대국민 사과문’에서 “문화재청 홍보용 도서로 저의 저서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을 활용함으로써 국가의 예산을 사용하였다는 지적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밝혔다. 유 청장은 이어 “이로 인해 발생한 인세 등 제반 수입은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에 의거, 문화유산을 보전ㆍ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문화유산국민신탁법인에 기부하고 앞으로는 이러한 사례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유 청장 취임 이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비롯한 청장의 저서 5종 등의 도서를 홍보물로 활용한다며 2000만원 상당의 정부예산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사설] 혈세로 자기 책 사서 돌린 유홍준 청장

    구설을 몰고 다니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이번에는 정부 예산으로 자신의 저서를 구입한 것이 드러났다. 유 청장은 2004년 9월 취임 이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 자신의 저서 1300만원어치를 문화재청 예산으로 구입해 방문객들에게 기념품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자신이 감수를 맡은 ‘답사여행의 길잡이’도 700만원어치를 구입했다니 2000만원이 넘는 정부 예산을 유용한 셈이다. 유 청장이 올해 신고한 재산 30억 5000만원 가운데 현금 16억 8795만원은 저서 인세수입이라고 한다. 문화재청이 구입한 책의 인세는 그가 거두어 들인 어마어마한 인세수입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하지만 액수가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혈세를 사적(私的)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기본상식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유 청장이 본분을 망각한 행동으로 구설에 오른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 2005년 평양 ‘6·15 통일대축전’에 참가해서는 북한 영화 주제가를 불렀고, 양양 낙산사 동종을 복원하고 제 이름을 새겨 넣으려다 눈총을 샀다. 지난 5월에는 지역 유지 30여명을 초청해 영릉 재실(齋室) 앞에서 숯불과 LP가스통을 갖다놓고 음식물을 해 먹었다. 문화재청 훈령을 위반하고도 여론의 비난이 쏟아지자 “몇 백년 된 관행”이라며 큰소리를 쳤다. 이번에도 자신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는 것이 억울하다는 심정을 토로했다니 기가 막히다. 유 청장은 여론의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고, 적절치 못한 행동에 대해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하길 바란다.
  • 유홍준청장 저서 수천만원어치 문화재청 예산으로 구입 배포

    문화재청이 정부예산으로 유홍준 청장의 저서를 대량으로 구입해 방문객들에게 선물로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화재청은 유 청장이 저서를 홍보하고 인세 수입도 올린다는 비판이 일자 1일 기념품 선정 대상에서 유 청장의 저서를 제외하겠다고 밝혔다.문화재청이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손봉숙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유 청장이 부임한 2004년 9월 이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 김정희’를 비롯한 그의 저서 5종 1300만원어치를 구입했다. 또 유 청장이 해설하고 감수한 ‘답사여행의 길잡이’ 700만원어치 등 문화재청 예산으로 모두 2000만원어치의 연관 도서를 사들였다. 일부 시민단체는 “국민의 세금으로 기관장이 쓴 책을 구입해 나눠준 것은 기관홍보가 아니라 개인홍보를 한 셈”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문화재청은 “대다의 행정기관은 홍보 차원의 기념품으로 넥타이나 시계 등을 제공하고 있으나 우리는 문화유산 관련도서를 홍보용으로 활용해왔다.”고 해명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9) 고려 태조 왕건상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9) 고려 태조 왕건상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전의 뉴스메이커는 단연 ‘고려 태조 왕건상’이었습니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왕의 ‘초상조각’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한데다, 옷을 입지 않은 나상(裸像)이어서 더욱 화제를 모았지요. 왕건상은 남쪽의 특별전이 끝난 뒤 현재는 평양의 조선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93년 고려 태조 무덤인 현릉(顯陵)에서 발굴된 이후에는 줄곧 개성 고려박물관에 있었지요. 고려박물관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개성의 성균관 건물을 그대로 전시시설로 활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쪽에서 각광받는 왕건상이 북쪽에서는 한동안 그리 주목받지 못한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1996년 평양에서 발간된 ‘고려태조 왕건’의 말미에는 현릉 발굴 결과가 실렸는데, 왕건상을 ‘금동불상’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같은 해 사이토 타다시(齋藤忠) 일본 다이쇼대학 명예교수가 펴낸 ‘북조선고고학의 신발견’에도 사진이 실렸지요. 경주 황남동 109호분을 발굴하기도 한 사이토 교수는 북한학자들의 해석을 존중해 ‘불교의례의 일단을 알 수 있는 자료’라고 적었습니다. 이듬해 기쿠다케 준이치(菊竹淳一) 일본 규슈산업대학 교수가 고려박물관에서 이 금동조각을 발견하여 북한 관계자들에게 왕건상일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고 합니다. 당시 왕건상은 ‘보살상’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채 적조사 철조석가여래좌상 등 다른 불상과 나란히 전시되고 있었다고 하지요. 기쿠다케 교수는 ‘고려 태조 왕건상 시론(試論)’에서 학술 논문으로는 이례적으로 ‘부기(附記)’를 달아 왕건상을 만난 과정을 간단하지만 지극히 감상적으로 술회했습니다. 그는 고려박물관을 방문하기 전날 밤 만월대에 올랐다고 합니다.‘하늘에 가득한 별 아래서 술을 마시며 감격해서 왕궁전터의 땅바닥에 누웠을 때, 태조 왕건이 나에게 개성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찾으라고 계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후 왕건상에 얽힌 갖가지 의문을 어느 정도 풀어준 사람은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입니다.951년쯤 조성되어 봉은사 태조진전(太祖眞殿)에 모셔져 있던 왕건상은 고려가 망함에 따라 지금의 숭의전이 있는 경기도 마전현의 작은 사찰로 옮겨졌고, 주자학적 제례법을 따르려는 세종의 의도에 따라 초상조각이 목주(木主·나무로 깎은 위패)로 대체되면서 세종 11년에 현릉에 묻혔다는 것이지요. 왕건상은 나체조각만 남았지만, 고려시대에는 옷을 입혔습니다. 발굴 당시 왕건상의 몸을 비롯한 여러 곳에 얇은 비단천과 금도금을 한 청동조각이 붙어 있었다고 하지요. 노 교수는 조상제례에 옷을 입히는 조각상을 사용하는 것은 한국 고대 이래의 문화전통이라고 설명합니다. 왕건상은 ‘동명왕 어머니 유화의 소상(塑像)이 3일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시조신상(始祖神像)의 특징을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기쿠다케 교수는 ‘얇은 비단천’에서신체를 훤히 비치게 표현한 ‘수월관음도’ 같은 고려불화를 떠올렸습니다. 미술사학자인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속살이 투명하게 비치는 보살의 시스루(see-through) 패션’이라며 고려불화의 표현법에 감탄한 적이 있지요. 그리스 조각이 육체의 아름다움을 직접 드러냈다면 ‘수월관음도’나 왕건상은 얇은 천 너머로 육체가 비쳐 보이게 하여 살아 있는 듯 느껴지게 표현하는 고려시대 특유의 미의식을 보여 준다고 기쿠다케 교수는 해석했습니다. dcsuh@seoul.co.kr
  • 고려청자 수천점 900년만에 ‘햇빛’

    최소한 8000점 이상의 청자를 싣고 전남 강진의 가마에서 개경(지금의 개성)으로 가다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화물선이 충남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고려왕실과 사원에서 쓰던 최고 수준의 청자를 적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1976년의 신안유물선 이후 최대의 수중 발굴로 기록될 전망이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지난 5월18일 주꾸미를 잡던 어민이 고려청자를 수습한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대섬 앞바다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배를 확인했다고 24일 발표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번에 발견된 청자는 고려 인종·의종 연간의 전성기 것으로 실생활에 쓰여진 것으로는 최고급품”이라면서 “육안으로 2000여점을 확인했으며, 묶음으로 쌓여 있고 주변에도 흩어져 있어 최소한 8000점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도자기 전문가인 윤용이(문화재위원) 명지대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뚜껑이 달린 통형청자는 1146년 경기 장단에 있는 고려 인종의 장릉에서 나온 것과 그대로 닮아 있다.”면서 “이 배의 침몰시점을 12세기 중후반으로 잡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수중 탐사 결과 청자 운반선은 동서 방향으로 가로누워 있었다. 선체 잔해는 동서 7.7m, 남북 7.3m에 걸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옛선박 전문가인 최항순 서울대 조선공학과 교수는 “고려시대 선박은 길이가 폭의 3.3배에서 3.5배 정도”라면서 “이 배는 최장 25m의 길이에 총톤수 200t에 근접하는 크기”라고 추정했다. 그는 특히 “이런 정도의 크기라면 도자기를 7단으로 적재할 수 있는 만큼 한 단에 2000점을 쌓았다면 1만 4000점 정도가 실렸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침몰선이 발견된 대섬 앞바다를 사적으로 가지정하는 한편 8월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해 12월까지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태안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전통음식 글로벌 전략 “멋있게”

    “맛있는 전통음식에서 멋있는 전통음식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조리법을 표준화하여 산업화가 가능하도록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최로 4일 서울 필동 한국의 집에서 열린 ‘한국음식 세계화를 위한 심포지엄’에서 내려진 결론이다. 미각과 시각을 동시에 자극해 외국인들에게 인기높은 비빔밥은 어떤 전통음식도 반드시 벤치마킹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됐다. 이날 심포지엄은 전통음식이 음식 자체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식단과 음식량 등 서비스 문화가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전통음식은 재료나 요리방법에서 세계 어느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데도, 고객의 기호에 맞는 문화상품으로서 식단구성에 대한 고민은 소홀했다.”고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도 무조건 많은 음식을 내놓는 보릿고개 시절의 음식문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제발표에 나선 김수진 푸드앤컬처코리아 원장은 “음식의 완성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가 100%라면 입으로 느끼는 비중은 30%에 불과하고 시각적 즐거움과 식당 분위기 등이 70%를 차지한다.”면서 맛이 아닌 눈으로 먹는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통음식을 세계화하는 데는 국가대표 조리사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되, 보는 것만으로도 오감을 자극할 수 있도록 하는 푸드스타일링이 실과 바늘처럼 함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재춘 한국음식업중앙회 사무총장은 “일본이 1960년대부터 정부주도로 일본음식의 세계화를 추진했고, 태국도 총리 주도로 2001년부터 음식 세계화 프로젝트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우리는 국가 차원이 아니라 몇몇 부처가 산발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라고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는 민관 공동으로 ‘한식 세계화 전문가 위원회’를 구성하여 한식의 개념을 정립하고 집중 육성할 한식의 품목을 선정하여 체계적인 지원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홍렬 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은 “전통음식에 담긴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유지하면서 국·내외 다양한 입맛을 가진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식단을 개발하기 위해 심포지엄을 마련했다.”면서 “전통음식을 현대적으로 개선하여 기내식 비빔밥처럼 단품식단으로 브랜드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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