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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자에게/ 6·29 서해교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한매일 8월6일자 ‘고속정 본격인양 지연’기사는 지난 6·29 서해교전이 아직도 마무리되 지 않았음을 일깨워주는 기사였다. 교전이 발발한 지 벌써 40일이 지나고 있는데 해군 고속정은 아직도 치열했던 전장의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고 한상국 중사는 여전히 실종상태에 있다.기상악화에 따라 본격인양이 지연되었다고 하지만 40여일내내 날씨가 나빴던 것은 아닐 터인데 왜 이렇게 지연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최근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박우식 소령의 유해가 35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마침내 조국의 품에 안겼다.고 박 소령은 대전국립묘지에 위패가있는 베트남전 MIA(Missing In Action·작전 중 실종자) 두 사람 중 한명이다.지난달 31일 봉영식에는 이준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많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고 한다.미국은 참전용사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 유해발굴센터에 학자 19명,전문가 169명을 두어 1구 발굴에 40만달러의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고 한다.이번에 돌아온 박 소령의 유해도 미군의 베트남전 유해발굴사업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견된 것이다. 서해교전 영결식 때 우리는 의전과 관례를 들어 총리는 물론,국방장관과 합참의장 등 군 수뇌부가 불참했던 것을 기억한다.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사자 유해를 독일에서 발굴해 미국으로 봉송할 때 대통령과 국민이 모두 애도와 존경을 표시한 것과 너무나 상반되는 현실이다.군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명예다.명예를 지켜주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다. 불과 한달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이 벌써 먼 추억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조금 더 지나면 고속정이 인양되더라도 그냥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지나칠까봐 두렵다. 권오용/ KTB네트워크 상무·명예논설위원
  • 월남전 참전군인 유해 35년만에 고국품으로

    월남전 참전군인 실종자 2명중 한사람인 박우식 소령(추서·갑종 147기)의 유해가 최근 미군측에 발견돼 오는 31일 35년만에 고국의 품에 안긴다. 박 소령은 지난 67년 12월 2일 육군 9사단 29연대 1대대 3중대장으로서 투이호아 지역에서 매복 작전인 ‘물소작전’에 투입돼 미군 병사 4명과 함께 UH-1D 헬기를 타고 소속 부대로 귀환하다 기상악화로 바다에 추락,실종됐다.부대원들이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해 유패만 대전 국립묘지에 봉안돼 있었다.유해는 미군측의 참전자 발굴작업 도중 우연히 발견돼 미 육군 유해확인센터(CILHI)를 통해 35년만에 신원이 밝혀졌다. 국방부는 유해 인수를 위해 영현 봉송병 2명과 미망인 최재금(65)씨,아들 박철기(40)씨 등 유가족 3명을 CILHI가 있는 하와이에 보내 유해를 31일 오후 4시40분 대한항공 편으로 들여올 계획이다. 김경운기자 kkwoon@
  • 만주 애국선열 3인 유해 대전국립묘지 안장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남세극(南世極),김기전(金基甸),조병일(曺秉一) 선생 등 독립운동 선열의 유해 3위(位)가 2일 오전 김포공항을 통해 국내로 봉환됐다. 이날 유해는 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김종성(金鍾成) 국가보훈처차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국장을 지나 귀빈주차장으로 봉영됐다. 당초 봉환될 예정이었던 마하도(馬河圖)선생 유해는 현지 유족의 사정으로 봉환되지 못했다. 광복 55년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유해는 이날 대전국립묘지로봉송,애국지사 제2묘역에 안장됐다. 노주석기자 joo@
  • 해외 선열유해 4위 봉환/어제/송종익·천세헌·이관석·김일곤 선생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순국한 미주지역 독립운동가 송종익·천세헌 선생과 중국지역 독립운동가 이관석·김일곤 선생 등 선열 유해 4위가 22일 국내로 봉환됐다. 국가보훈처는 이날 하오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에서 순국선열 유해 4위에 대한 유해봉영식을 갖고 동작동 현충원 영현봉안소에 임시 안치했다.보훈처는 이들의 유해를 23일 상오 대전 국립묘지로 봉송,애국지사 제2묘역에서 안장식을 거행한다. 송종익 선생(1887∼1956)은 도산 안창호 선생에 이어 2대 흥사단장을 역임했으며,천세헌선생(1881∼1945)은 미주지역 흥사단,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중국 길림성에서 봉환된 이관석 선생(1870∼1942)은 중국지역에서 독립군을 양성,무장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김일곤 선생(1912∼1943)은 독립운동을 하던중 1943년 4월 교전하던 일본군 10명과 자폭,전사했다.〈황성기 기자〉
  •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대규모 신앙대회

    ◎명동성당 등 221곳서 72일간 순회기도회 서울대교구 김대건 신부 순교 1백50주년 기념대회 행사위원회(위원장 김옥균 주교)는 지난 5일부터 서울 명동성당 등 4개 본당에서 성 김대건유해 순회기도에 들어갔다. 오는 9월15일 김신부 순교기념 신앙대회 하루전까지 72일간 계속될 이번 순회기도회는 서울지역의 본당과 수도회등 2백21곳에서 열린다. 순회기도회는 ▲봉영예절 ▲밤샘기도 ▲봉송예절 등 3단계로 진행되며 유해행열순서는 향→초상화→꽃가마→사제→복사→성가대→평신도순으로 이루어진다. 1846년 9월16일 효수형으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미리내에 안장되었다가 1901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성당으로 이장,60년 혜화동 가톨릭대학으로 다시 이장되는 과정에서 국내외 성당 2백여곳에 예배의 대상인 성해로 분배돼 봉안됐다.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사무국 관계자는 『90년이후 한국 천주교가 침체국면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 있어 이번 행사를 통해 우리겨레의 첫번째 사제인 김대건성인의 순교정신을 계승,신앙의 쇄신과 활성화를 위해대회를 준비하게됐다』고 말했다.
  • 도민체전 성화 독도에 첫 봉송/오늘 새벽

    【포항=이동구 기자】 독도에 처음으로 성화가 봉송됐다. 5일 상오 10시 경주 토함산 정상에서 이원식 경주시장에 의해 태양열로 점화된 제34회 경북도민체전의 성화가 12명의 봉송주자에 의해 이날 하오 50㎞ 떨어진 포항 여객선터미널에 도착,미리 대기중이던 해군군함 봉송선으로 옮겨졌다. 성화를 실은 봉송선은 2백26㎞ 떨어진 독도로 출발,6일 새벽 0시 20분쯤 독도에 도착했다.이어 독도 경비대앞에 설치된 점화대에서 점화식을 갖고 다시 울릉도를 유해 포항에 도착,오는 7일 체전 개최지인 상주로 봉송된다.
  • 무명용사 유해 2구 45년만에 발굴(조약돌)

    ◎북한산 주변서… 대전국립묘지 안장 ○…6·25전쟁 당시 북한군을 맞아 싸우다 숨진 무명용사 유해 2구가 45년만에 발굴됐다. 육군은 22일 50년 6월27일 북한산 기슭에서 남침한 북한군전차와 싸우다 숨진 육군 16연대 11중대 소대장과 전령 조모상병의 유해 2구를 발굴,경기도 벽제 시립화장장에서 화장한뒤 대전국립묘지로 유해를 봉송했다. 육군은 이들 무명용사 유해를 일단 대전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 안치한 뒤 조만간 무명용사 묘역에 정식 안장키로 했다. 이 유해들은 숨진 이후 인근 우이동 백운산장 주인 이영구씨(64)에 의해 발견돼 그자리에서 매장됐었으며 지난 59년 등산객 강의식씨(70·예비역 소령) 등이 매장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위령비를 세워 놓았었다.
  • 고향서 봉영식…애국혼추모행렬/서재필박사·전명운의사 유해봉송 스케치

    ◎기념관서 2천여명 헌화/서 박사/광주시가 행진… 선영 들러/전 의사 애국지사 서재필박사 유해 봉영식이 6일 상오 10시30분 생가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서박사 기념관에서 구용상 전남지사와 주민등 각계인사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0여분동안 엄숙히 거행됐다. 이날 봉영식은 구지사의 봉영사와 외종손 이정섭씨(58)의 약력보고,이채환 서박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의 경과보고,유족대표인 이의순세방그룹회장의 인사말과 주민들의 헌화·봉헌순으로 진행됐다. 구지사는 봉영사에서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멀리 미국땅에 묻혀있다 43년만에 그토록 그리던 고향에 돌아온 선생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통일의 정신으로 이어가자』고 말해 참석자들을 숙연케했다. 서박사의 유해는 이날 하룻동안 일반인들의 분향을 받은뒤 기념공원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7일 상오 10시 서울로 환송돼 8일 전명운의사와 함께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다. 한편 애국지사 전명운의사의 유해는 이날 광주와 시조 선영이 있는 전남 담양에 들른뒤 서울로 환송됐다. 전의사의 유해는 낮 12시 광주에 도착,시가행진을 가진뒤 하오 1시10분부터 전남 도청앞 광장에서 강영기광주시장등 각급기관장과 종친회원등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약력보고·전의사기념사업회장인사말·추도묵념순으로 10여분 동안 출영행사를 가졌다. 유족으로 구성된 전의사의 유해봉송단이 시가지를 통과하는 동안 수많은 시민들이 연도에 나와 묵념으로 고인의 애국혼을 기렸다. 유해봉송단은 이어 하오 2시 10분부터 담양군 담양읍 향교리 담양전씨 시조묘에서 종친회 주최로 열린 참배행사와 노제를 마친뒤 하오 2시30분쯤 서울 국립묘지로 향했다.
  • 서박사·전의사 유해 고향도착/선열추모 행렬 줄이어

    【광주·보성=최치봉·남기창기자】 독립운동가 서재필박사의 유해가 5일 하오 6시 10분쯤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 서박사의 생가에 도착,안치됐다. 서선생의 유해봉송단은 이에 앞서 이날 하오 4시 서광주 톨게이트에 도착,중외공원∼광주역∼유동3거리∼금남로에 이르는 20㎞의 구간에서 1시간여동안 시가행진을 벌인뒤 전남도청앞 광장에서 구용상전남지사와 강영기광주시장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과 광복회 회원등 1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출영행사를 가졌다. 한편 전명운의사의 유해는 6일 낮 12시부터 광주에서 시가행진을 갖고 하오 1시 담양군 담양읍 향교리 시조선산을 들른뒤 이날 국립묘지로 돌아와 안치된다.
  • 서재필박사·전명운의사 유해 환국

    ◎어제 국립묘지 영현봉안관 안치… 8일 안장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박사(1864∼1951)와 친일 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의사(1884∼1947)의 유해가 4일 미국에서 40여년만에 환국했다. 이들 애국지사 두분의 유해는 이날 김포공항에 도착,인공폭포∼양평로터리∼영등포로터리∼대방동∼노량진을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 안치됐다. 서박사의 유해는 5일 서울과 광주에서 각각 환국 행사를 가진뒤 고향인 전남 보성 문덕 용암리 생가로 모셔지며 6일 분향과 헌화의식을 갖고 8일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다. 전의사의 유해는 6일 전남 담양 향교리 선산을 방문하고 국립묘지로 돌아와 8일 서박사와 함께 안치된다. 두분의 유해는 6일부터 7일까지 국립묘지 현충관(분향소)에서 일반인들의참배도 받는다. 이로써 국내에 봉환된 해외안장 독립유공자는 지난해 8월5일 환국한 박은식선생등 선열 5위를 비롯해 모두 32위로 늘어났다. 보훈처는 현재 유해를 봉환한 32위를 포함,1백24위의 해외선열을 확인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봉환되지 않은 선열 92위 가운데 묘소위치가 확인된 선열은 30위,미확인된 선열이 62위이다. 보훈처는 앞으로 묘소위치가 확인된 선열의 경우 유족들의 뜻에 따라 고국으로 봉환할 예정이다. 지난달 30일,31일 출국한 「서재필선생 유해봉환단」(단장 김시복보훈처차장)과 「전명운의사 유해봉환단」(단장 신동하 보훈처기념사업국장)은 지난 2일 각각 필라델피아와 로스앤젤레스 현지에서 유해 봉송식을 가졌다. 서박사의 유해는 미 필라델피아 발라킨위드 웨스트 라우렐힐 공동묘지 납골당에 화장된 상태로 유골함에 봉안,관리돼 왔으며 전의사의 유해는 미 로스앤젤레스 갈보리 천주교공동묘지에 안장돼 있었다.
  • 「임정 법통잇기」 문민정부 의지/서재필·전명운선생 유해봉환 의미

    ◎우리민족 자존심 회복에도 큰 도움 유해가 4일 미국에서 봉환된 서재필박사와 전명운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뒤 이역만리에 묻혔던 독립운동가들이다. 서박사는 조선말 위기에 처한 민족의 현실을 구하기 위해 우리나라 처음으로 순한글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발행한 언론인이자 정치가·독립운동가로,전의사는 친일 미국외교관의 저격을 기도한 항일투사로 민족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독립신문은 개화기에 독립운동과 자주근대화의 기폭제가 된 독립협회의 창설을 이끌었다는 점이 높이 평가돼 후세에는 독립신문이 발행된 1896년 4월7일을 기념,매년 4월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놓고 있다. 지난해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선생등 상해임시정부요인 5위의 유해가 봉환된데 이어 이번에 다시 두 독립운동가의 유해가 봉환된 것은 유족과 민족의 오랜 염원에 의한 것이다. 현정부는 상해임시정부의 문민전통을 잇고 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애국선열의 유해 국내봉환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같은 정부의의지는 김영삼대통령이 지난해 박은식선생등을 봉환할 당시 『이들 선열을 모시는 것은 새정부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힌데서도 엿보인다. 정부는 이에 따라 지난해 처음으로 중국정부에 협조를 촉구,중국이 유해봉환요청을 수락하자 지난해 6월 선열봉환국민제전 계획을 확정함으로써 선열유해봉환을 국민적 행사로 끌어올렸다. 따라서 두분 유해의 환국은 문민정부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40여년간을 이역만리에 방치해 왔던 독립유공자들의 유해를 모국에 모시게 됐다는 점에서 국민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커다란 계기가 됐다는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864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송재 서박사는 1882년 과거에 급제,김옥균·서광범·박영효등 개화파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서박사는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가담했으나 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자 미국으로 망명,컬럼비아의과대(현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한뒤 제이슨이라는 이름으로 미국국적을 취득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에 대해 무죄가 선언되자 귀국,중추원고문으로 임명된 그는 국민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그뒤 미국으로 건너간 서박사는 현지에서 광복운동을 펼쳤으며 87세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전의사는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친일언행을 일삼자 그를 암살하려한 독립운동가이다. 1884년 서울에서 태어나 16세때 하와이로 이민간 전의사는 철로공사장등지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미국내 항일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그는 당시 미국내의 반일감정을 무마키 위해 미국에 돌아온 스티븐스가 「일본의 한국지배가 한국에 유익하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자 이에 격분,1908년 3월23일 샌프란시스코 페링역에서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쏘았다. 전의사는 대부분의 독립운동가처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47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전선생 유해 봉환하던 날/이 부총리는 3백여명 경건한 환영 ○…서재필박사와 전명운의사의 유해는 4일 하오 2시30분 대한항공 061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반세기만에 그리던 고국 품에안겼다. 선열들의 유해와 영정은 이란 승객들이 내리고 난뒤 비행기안에서부터 국방부 의장대에 의해 운구돼 일반 입국장을 거쳐 공항청사 밖에 대기중이던 6대의 운구용무개차에 영정과 훈장,유골순으로 옮겨진뒤 국립묘지로 봉송됐다. ○…선열들의 유해 봉송에는 미국 현지에서 서박사의 종증손인 서동성씨(59·미국 변호사)와 전의사의 둘째 딸 전경련씨(71),사위 표한규씨(53)등 유족과 봉환단장인 김시복국가보훈처 차장,서박사의 고향인 전남 보성의 유준상의원(민주당),오세응의원등 20여명이 동행했다. 또 유해 봉환위원장인 이영덕부총리와 이충길국가보훈처장,김승곤광복회장이 공항에 나와 유해 봉환식에 참석했으며 서박사의 종손인 서희원 전 이화여대 교수(70),전의사의 종손인 전의식씨(49·서울신문 TV가이드부 부국장)등 유족과 각계인사등 3백여명이 유해를 맞았다. ○…서박사의 유해 환국이 성사된 데는 미국 뉴저지주에서 사업을 하는 재미교포 장익태씨(58)의 숨은 공로가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서박사의 종손인 동성씨와 선후배관계인장씨는 지난 59년 미국으로 건너가 서박사의 유해가 방치되다시피 한 것을 보고 지난 68년부터 지금까지 납골당을 관리해 왔다는 것. 10년 전에도 서박사의 유해를 봉환하려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무산됐다고 밝힌 장씨는 『이제야 유해가 환국하게 돼 한편 섭섭하면서도 감사하다』면서 『84년 작고한 서박사의 둘째딸 서 뮤리얼씨가 겨울에 난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아 내가 유골을 돌보게 됐다』고 말했다. 장씨는 서박사의 유해가 처음 안치됐던 챌튼힐의 납골당이 비가 새는 등 관리가 부실해지자 지난 83년 유해를 필라델피아 웨스트로렐힐로 옮겨 관리해 왔다.
  • 109년만의 환국/김인철 북한부기자(오늘의 눈)

    사후 43년만에,그리고 도미 1백9년만에 서재필박사가 조국에서의 영면을 위해 길떠나던 2일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 로렐 힐 묘소에는 1백50여명의 한국인들이 모였다. 갑신정변참여,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박사,독립신문창간,독립문건립,독립협회 창립,미군정청수석고문및 남한과도정부 특별의정관.21세이던 1885년 첫도미후 두번에걸친 귀국과 영구이민등 파란만장의 생을 살다간 때문인가 이날 유해봉송식에는 김시복보훈처차관및 이현홍뉴욕총영사등 정부관계자,국회문공위원장인 오세응의원과 민주당최고위원인 유준상의원 이정식펜실베이니아대교수를 비롯한 현지 한인회관계자등 다양한 인사들이 참석해 서박사의 영구귀국을 엄숙히지켜봤다.이들은 추모사를 통해 서박사의 높은 뜻을 기리며 그의 애국정신을 이어가자고 강조했다. 그러나 서박사의 유해를 떠나보내는 이곳 필라델피아한인들,특히 모처럼 검정 정장을 차려입고 식장을 가득메운 백발의 현지 노인회회원들의 말없는 심회 또한 한번쯤 짚어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잘 알려져있듯 한인최초의 미국시민권자인 서박사는 현서재필기념관인 필라델피아근교 자택에서만 25년간 거주하는등 미국에서의 오랜생활로 이국땅에서 고된 삶을 일구어온 현지한인들에게는 그누구도 대신할수없는 정신적 반려요 지주였다. 『재미동포의 길잡이요 이정표였던 박사님을 떠나보내는 섭섭한 마음 그지없으나 이제는 박사님이 평생 외치던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는 조국에 돌아가 조국의 개혁과 통일을 지켜봐주십시오』나문주 필라델피아한인회장등 현지 한인회관계자들은 자신들의 허허로운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약관 20세에 김옥균등 기라성같은 개화파들과 대정변(갑신)을 도모했다가 3일만에 「멸문의 화」를 피해 먼나라,미국땅에 몸을 의탁해야했던 서박사.그의 위대함은 명문 양반가문출신으로 15세때 이미 어전과거에 장원급제했으나 값진 비단 옷입기,양반들이 행차때면 으레 사용하던 가마타기를 거부하면서 문벌폐지,남녀평등등 당시로서는 가위 혁명적이었던 개혁사상을 주창하고 이를 몸소 실천하려 했던데서도 후손의 피부에 와 닿는듯 하다. 1백여년전 어렵사리 펼쳤던 서박사의 개혁운동이 이제 본격적 궤도를 달리기 시작한 문민정부의 개혁운동에 다시한번 기폭제가 될때 필라델피아 한인들의 허허로움도 씻겨질수 있을것 같았다.
  • 서재필박사·전명운의사 유해 새달 8일 국립묘지 안치

    ◎정부,봉환·집행위원회 구성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박사(1866∼1951)와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의사(1880∼1947) 유해가 다음달 4일 미국에서 40여년만에 환국,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치된다. 두분의 유해가 봉환되면 지난해 환국한 박은식선생등 선열 5위와 나창헌선생등의 유해를 합쳐 국내봉환된 해외안장 독립유공자는 모두 32위로 늘어나게 된다. 정부는 22일 이영덕 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봉환위원회」와 이충길 국가보훈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집행위원회」를 각각 구성,두분의 유해봉환을 범정부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서박사의 유해는 미국 필라델피아 발라킨위드 웨스트 라우렐힐 공동묘지 납골당에 화장된 유해상태로 유골함에 봉안,관리돼 왔으며 전의사의 유해는 로스앤젤레스 갈보리 천주교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 보훈처는 오는 30일과 31일 「서재필선생 유해봉환단」(단장 김시복보훈처차장)과 「전명운의사 유해봉환단」(단장 신동하보훈처기념사업국장)을각각 미국에 보내 다음달 2일 현지에서 봉송식을 갖고 로스앤젤레스에서 합류,유해를 4일 김포국제공항에 봉영한 후 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 안치할 예정이다. 두분의 안장식은 다음달 8일 하오 2시 국립묘지 현충문 앞 광장에서 유족및 친지를 비롯해 각계각층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뒤 애국지사묘역에 안치된다.
  • 임정요인 운구구간/오늘 부분교통통제

    서울경찰청은 유해봉송행사가 거행되는 5일 하오2시30분부터 하오3시까지 김포공항에서 국립묘지까지의 운구진행방향 전차선을 구간별로 통제한다. 구간별 통제시간은. ▲하오2시30분∼하오2시40분=김포공항∼공항로∼양화교(7㎞) ▲하오2시40분∼하오2시50분=양화교∼양화대교남단∼당산사거리∼영등포시장(6㎞) ▲하오2시50분∼하오3시=영등포시장∼대방사거리∼한강대교남단∼국립묘지(5㎞)
  • 임정­우리의 첫 문민정부(일요일 아침에)

    1919년 4월13일 중국 상해 프랑스조계 내에서 정식으로 수립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45)는 전통적인 군주제를 청산하고 민주공화제를 채택,민간인이 대통령이된 최초의 문민정부였다.그것은 3·1혁명(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난지 45일만의 일로서 민족 최대의 경사요 쾌거로 기록될 일이다.임정은 27년간 중국대륙을 누비면서 하루도 그 간판을 내리지 않고 비록 일제에 의한 단절의 역사를 강요받았으나 계속성의 민족사로 전환,5천년의 정통성을 잇는 임무를 확실히 수행하였다. 국내에서의 3·1혁명은 곧 해외및 국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의욕에 넘친 민족지사를 활동하기 편리한 교통의 요지요,국제도시로서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중국 상해로 집결케 하였다.이동령·신규식·이시영·조소앙·김구·노백린·박은식·여운형·조용구·조동우·이유필·안창호·김인전·신익희·박찬익·최창식·윤현진·김규식·남형우등 20대로부터 50대까지 40여명이 이곳에 와서 정통민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중론에 따라 마침내 역사적인 3권분립형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김신부로22호(현 서금2로)에서 수립,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전통 민간정부 표방 임시의정원의장 이동령은 국호를 「대한민국」이라했고 연호를 「민국」으로 했다.1919년을 민국1연으로 호칭해서 단기와 병기,공식문서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이들은 임시정부청사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회의때 마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며 환희의 눈물 속에서 조국을 향해 묵도를 올리곤 했다. 이틀에 세끼를 때울 때가 한두번이 아닌 이들의 모습은 초췌하기 이를데 없었다.중국인이 먹다버린 배추를 다시 집어다가 씻어서 허기를 채우면서도 정통정부의 각원(장관)으로서의 품위와 질서를 유지하는등 근엄성과 애국열의를 잃지 않았다. 이들은 내정교통·외교군사·교육문화·재정사법 등에 걸친 민간정통 정부로서의 광복정책을 펴나가면서 대표성과 대본영으로서의 통제적 사명을 가슴깊이 자긍심으로 여기고 세계정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중국·프랑스·폴란드·소련의 승인을 받으면서 상해로부터 중경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자존심은 드높았고 선비로서의 지조나 기품을 의연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27년간 율사를 동원,5번의 개헌과정을 통해서 지도원리를 광복정책에 맞게 적응시키느라 의회에서 사심없는 열변의 토론과정을 거친 것이다.이들이 만든 헌법은 대개 10개조에서 많을 때는 70여조에 이를 때도 있었다.그 제1조의 내용은 오늘날 1백30여조,부칙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헌법제1조와 동일하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군주제의 양반체제로부터 결별인 동시에 문민공화정치의 입문이었다.이것 하나만으로도 대한민국의 법통성이 임정으로부터 기연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광복군은 곧 의병과 독립군을 이은 우리 군의 정통성을 더해 준다.그러나 8·15는 이들의 법통성을 외면케하여 충격을 주었다.그뒤 1988년 제9차 개헌 전문에 비로소 대한민국의 법통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시하게 됐다.8·15광복 이래(1945)정통성을 찾는데 43년(1988)이 걸린 셈이다. ○43년 걸린 법통회복 그동안 정통성의 기반이 미약했던 군사정부나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자유당정부는 임정의 법통성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기피하거나 평가하려 들지 않았다.모두 밀착되게 관련이 있으면서도 자신감이 없어서인지 회피했던 것이 사실이다.북한 당국도 오랫동안 임정의 정통성을 외면한 채 비방·폄하·성토·질책일변도로 달려왔다. 일부 운동권 시각도 임정을 성토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문민공화정부를 맞아 임정의 법통성문제가 거론될 때 30년간 임정을 연구한 보잘 것 없는 필자는 감격의 뜨거운 낙루를 금치 못하면서 오랜만의 법통성을 올바르게 찾았구나 싶어서 현대사의 정당한 인식이 확산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임정의 법통성이 공식 인정되었으면서 아직도 그에 따른 후속법제조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임정27년사가 대한민국의 제1공화정이 되어야 함은 물론 「민국」의 연호 또한 단기와 병기되어야 한다.그리고 임정의 대통령(국무령·주석등)·국무위원의 예우 역시 소급적용 되어야 문민정부로서 뒷날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민국」 연호 병용을 임정의주석이었던 이동령의 천안 생가는 비가 새고 도로도 협소한데다가 표지판마저 불분명한 채 방치되어 있는게 작금의 실정이다.8·15이후 대통령을 역임한 분의 유적이 늘 관심속에 손질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비교가 되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이번 8월5일에 돌아오는 박은식씨등 임정요인 5위의 유해 봉송과 때를 맞추어 흩어져 있는 임정요인의 묘역이 국립묘지에 다듬어지고 있는 2천평 위에 가지런히 함께 모셔지길 바란다. 상해임정청사의 복원전시에 이어 중경임정청사의 복원작업도 이미 시작되었다.속히 임정의 법통성이 원만히 지켜져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는 절차와 순서가 이어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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