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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본을 지키자] 요람에서 무덤까지 연줄문화 청산하자

    [기본을 지키자] 요람에서 무덤까지 연줄문화 청산하자

    주부 김현선(38)씨는 주말마다 7살짜리 아들을 서울 강남의 한 사설 축구교실에 보낸다. 강동지역에 사는 그는 애초 집 근처 축구교실에 아이를 등록시키려 했지만 “‘친맥’(친구 인맥)을 관리해줘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알고 보니 5~6살 된 이웃 아이들도 강남지역 문화센터의 블록(교육용 놀이)교실이나 수영장에 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씨는 “아이들이 영악해서 초등학생만 돼도 집안 배경을 따져 친구를 사귄다더라”면서 “평생 갈 인맥인데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좋은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친구를 사귀도록 해야 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인맥에 의존하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연줄 문화’는 요람에서 황혼까지 이어진다. 일부 젊은 학부모들에게 자녀 인맥관리의 시작은 초등학교, 혹은 이전부터 시작된다. 교육·경제 수준이 높은 데다 학부모 네트워크가 끈끈한 강남지역의 산후조리원이나 어린이집 등에 강북이나 분당에서 원정을 오는 경우가 많다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주부 윤모(42·서울 석촌동)씨는 “중·고교 때 조기 유학을 가거나 대학 학부를 외국에서 나오는 건 인맥을 만드는 데 도움이 안 돼 요즘 부모들은 선호하지 않는다”면서 “사립 초등학교와 중학교, 외국어고 또는 자립형 사립고 등을 나오고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한국에서 사회생활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고 말했다. 또 비슷한 사회적·경제적 배경을 가진 부모를 둔 아이들끼리 그룹과외를 해 인맥을 쌓거나 부유한 집안의 자녀가 몰리는 종교 시설에 아이를 일부러 보내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선·후천적으로 마련된 연줄은 구직과 취업 이후 힘을 발휘한다. 한 취업 전문가는 “대기업의 서류 전형 등에서는 연줄을 동원하기 어렵지만 면접 단계까지 가거나 인턴 등을 통해 구직을 시도하면 인맥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취업 이후에도 유력인사의 자녀로 알려지면 후견인을 자처하는 상사가 나타나기도 한다. 대형은행에 다니는 김모(33)씨는 “여전히 출신 학교나 출신지 등을 따져 자신의 ‘라인’을 만들고 관리하는 임원들이 있다”고 말했다. 해피아(해양수산부 관료+마피아) 논란에서 보듯 퇴직 뒤 재취업에도 패거리 문화는 힘을 발휘한다. 김재훈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행정고시로 해마다 300명가량을 뽑으니 인사 적체가 심하고, 현직에 계속 남는 후임자는 퇴직하는 전임자가 (공공기관 등) 좋은 곳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길을 봐주는 암묵적 계약 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또 공기업에서도 ‘갑’인 중앙부처 고위공무원 출신이 기관장 등으로 오면 외풍을 막아줄 수 있다고 보고 오히려 ‘낙하산’ 인사를 환영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성장과 효율에만 매몰된 탓에 ‘연줄’을 무기로 활용하는 관행이 형성됐다고 분석했다.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연고주의에 의지하는 것이 단기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굉장히 효과적일 수 있다”면서 “정해진 법규나 규칙을 뛰어넘으려다 보니 연줄을 동원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철 상명대 교수(금융경제학)는 “사회시스템이 낙후한 탓에 연줄 문화가 없어지지 않는다”면서 “기업을 비롯한 조직에서 인사평가 때 성과에 따라 점수를 매기는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다 보니 학연·지연 등 연줄에 의존하는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제주도지사] 원희룡 vs 신구범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제주도지사] 원희룡 vs 신구범

    ■ 원희룡 후보, ‘島心’ 택한 중앙통 원희룡 새누리당 제주지사 후보는 16대 총선에서 서울 양천갑에 출마해 당선된 이후 내리 3선을 했다. 2007년 대선과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번번이 당내 경선에서 고배를 들었다. 그런 그가 이번 6·4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이 아닌 고향 제주에 출마하자 대권을 향한 우회로를 택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이에 원 후보는 “중앙 정치에서 쌓은 정치적 자산을 제주를 먼저 변화시키는 데 활용한 뒤 나중에 국가 발전에 매진해 달라는 도민들의 염원에 따른 것”이라는 논리로 응수했다. 원 후보는 1964년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쌀밥 구경을 하기 힘들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그의 부모는 고무신 장사, 잡화상, 농약방, 서점 등을 운영하다 망하기를 반복하며 빚 독촉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원 후보는 어릴 적 리어카 바퀴에 오른쪽 발가락이 끼어 거의 잘릴 뻔한 사고를 당하고도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때 발가락 2개가 뒤틀리는 장애를 얻어 ‘군 면제’를 받았다는 것이다. 원 후보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길이 ‘공부’라고 믿었다. 변변찮은 책상 하나 없어 사과 상자를 책상 삼아 공부했다. 여건은 열악했지만 그의 학업 성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학창 시절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1982년 제주제일고를 졸업한 원 후보는 학력고사 전국 수석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화제가 됐다. 그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참가하면서 6개월간 유기정학을 당하는 등 잠시 학업에 소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스타일의 원 후보는 1992년 사법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도 정치권에서는 원 후보의 학창 시절 공부 실력 얘기가 나올 때마다 “시험 성적으로 대통령을 뽑는다면 원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는 우스개가 따라붙을 정도다. 원 후보는 거대한 사회악과 싸워 보겠다는 각오로 법원이 아닌 검찰행을 택했다고 한다. 1995년부터 4년간 서울지검·수원지검·부산지검 검사로, 이후 2년간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 시점에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 동시에 영입 제의가 들어왔다. 선택을 놓고 고민하던 그에게 운동권 출신으로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던 김부겸 전 의원(현 새정치민주연합 대구시장 후보)이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넘치는 민주당에 한 방울 더 보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한나라당행을 권유했고 원 후보도 “보수 정당을 개혁하는 게 한국 사회에 던지는 파장이 더 크겠다”는 판단 아래 제의에 응했다고 한다. ‘우등생 중의 우등생’ 출신이었던 원 의원은 초선 때부터 정치권의 기대를 모으면서 ‘잘나가는’ 정치인 반열에 올랐다. 이회창 당시 총재로부터 “당의 개혁을 주도해 달라”는 주문을 받기도 했다. 재선 의원이었던 2004년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시 3선 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40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최고위원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이어 당 사무총장 등의 주요 요직을 거쳤으며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는 당시 후보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2011년 6월 전당대회에서는 2012년 19대 총선 불출마라는 배수진을 쳤고 4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된다. 그러나 그해 10월 재·보선 때 일어난 디도스(DDoS)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유승민, 남경필 의원과 함께 최고위원 자리에서 물러났다. 원 후보가 고향인 제주로 ‘정치적 회귀’를 감행한 것은 ‘첫 제주도 출신 대통령’이라는 정치적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한 결단이라는 게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해석이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신구범 후보, ‘安心’ 품은 제주통 “신구범은 제주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선한 싸움꾼입니다.” 신구범 새정치민주연합 제주지사 후보는 늘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신 후보는 1942년 제주 북제주군(현 제주시) 조천읍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무작정 상경해 서울 용산역에서 손님을 끄는 호객꾼(삐끼) 노릇을 하기도 했다. 제주 오현고를 나와 육사에 진학했으나 4학년 때 결혼하기 위해 중퇴했다. 육사 생도는 재학 중에 결혼을 할 수 없다. 신 후보는 낙향해 농사를 짓다가 1967년 독학으로 행정고시에 합격해 제주도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제주도 기획관, 지역계획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중문관광단지 개발 계획, 한라산국립공원 지정 등의 지역 숙원 사업들을 해결했다. 1974년에는 6년간 제주도청 근무를 끝내고 중앙 부처인 농림부로 전근한다. 축산국장, 농업정책국장 등의 요직을 거쳐 기획관리실장에까지 올랐지만 공직 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친·인척 가운데 일본 조총련에서 활동했던 사람이 있던 탓에 공직 생활 초기에는 ‘신원 특이자’로 분류돼 승진에서 계속 누락되는 쓴맛을 봤다. 그는 이 같은 연좌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 유학을 통해 역량을 강화한 그는 이후 주이탈리아 대사관 농무관으로 발령받았다. 이탈리아에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있어 농무관 겸 FAO 한국 측 교체수석대표로 활동하는 기회를 잡는다. 이는 농림부 축산국장에 오른 배경이 됐다. 축산국장 때인 1989년 말 한·미 소고기 협상 한국 측 수석대표를 맡은 그는 ‘전국구 스타’로 떠오른다. 당시 미국은 자국산 소고기 수입을 밀어붙였지만 그는 끈질긴 협상력을 발휘해 저지시켰고 축산농가와 축산업자들의 열렬한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이 덕분에 그는 뒷날 축협중앙회장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1993년 그는 관선 제주도지사로 금의환향했다. 1995년 첫 지방선거 때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임기 3년이던 첫 민선 제주도지사에도 올랐다. 그는 관선과 민선 도지사 4년 3개월간 제주도지사로 재임하면서 제주삼다수, 관광 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 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의 업적을 남겼다. 1998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당이던 국민회의(새정치연합의 전신) 경선에서 패하자 탈당해 무소속으로 도지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2년에는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축협중앙회장 때인 1999년 농·축협 강제 통합 입법에 반대하며 국회에서 할복하기도 했다. 친환경 농축산물 매장 ㈜삼무(三無)를 설립하기도 했으나 ‘30억원 뇌물 수수’ 혐의로 그가 2년여를 감옥에서 보내는 사이 도산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 전 제주도 내에 퍼져 있는 ‘제주도지사 세대교체론’의 퇴진 대상 인물로 꼽혔다. 그러나 “도지사선거를 겨냥한 신종 공작 음모”라며 출마를 단행했다. 국민회의를 탈당했던 전력과 보수 정당인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한 이력들이 야권 후보로서의 대표성에 흠이 된다는 지적을 받는다. 신 후보는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새 정치’를 표방하고 있다. 안철수 새정치연합 공동대표 측 인사로 분류되는 그는 “낡은 정치판에 뛰어들어 원칙과 정의의 싸움을 불사하고, 밟히고 상처받으며 패배의 길을 감내한 정치적 경험을 가질 때 비로소 새 정치는 가능하다”는 논리로 호소하고 있다. 신 후보는 외교, 국방, 사법을 제외한 국가의 모든 권한을 제주지사가 중앙정부로부터 이양받는 완전 분권과 읍·면·동장은 주민자치의회를 구성해 자치의회에서 선출하는 완전 자치 시대를 열어 특별자치도를 완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춘규 선임기자 taein@seoul.co.kr
  • [뉴스 플러스] 산림교육 프로그램 ‘푸름’ 선봬

    산림청이 운영하는 국립자연휴양림에서 산림교육 프로그램 ‘푸름’을 선보인다. 휴양림별로 공간과 이용대상을 달리해 놀이·치유·신비·가족 등을 테마로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일반 휴양객뿐 아니라 학교교육과 연계한 자유학기제, 창의적 체험활동공간으로 제공한다.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는 연말까지 무료 시범 운영할 계획으로 참여 희망자를 모집한다.
  • 목판으로 만나는 유교 집단지성의 산물

    목판으로 만나는 유교 집단지성의 산물

    강원 원주시 치악산의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에는 1797년(정조 21년) 왕명으로 간행된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합판본이 존재한다. 백제 도미 부인의 열녀설화 등을 새긴 것으로, 유일하게 전하는 오륜행실도 목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온전한 형태를 갖추진 못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화로를 보호한다며 나무 싸개로 사용한 탓이다. 문집 간행을 위한 목판 제작에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아깝지 않게 써 버리던 우리 조상들이 알면 까무러칠 일이다. 예컨대 1843년 ‘퇴계선생문집’을 다시 간행하는 과정에선 책판 2500여장과 인력 2000명, 비용 4144냥이 들었다. 오늘날로 치면 6억 2000만원을 웃도는 걸로 추산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문집을 찍어 내기 위해 정성을 쏟았고, 이렇게 책판 형태로 유교 덕목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다음 달 23일까지 제1기획전시실에서 ‘목판, 지식의 숲을 거닐다’ 특별전을 연다.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유교 목판(718종 6만 4226장)의 등재를 신청한 것을 기념해 준비한 전시다. 이곳에 나오는 목판 대부분은 경북 안동시의 국학진흥원이 2001년부터 ‘유교 목판 10만장 수집운동’을 벌여 모은 6만 5000여장 가운데 가려 뽑은 것들이다. 수집운동에는 전국 305곳 문중과 서원들이 참여했다. 대동여지도 목판(보물 제1581호), 도산서원 현판을 비롯해 포은 정몽주 초상, 포은 선생 문집 등 목판 관련 유물 총 122종 268점이 전시된다. ‘종이에 쓰다’, ‘나무에 새기다’, ‘세상에 전하다’, ‘생활에 묻어나다’의 4개 영역으로 구성된 전시는 다양한 문방구와 함께 판각 과정도 보여 준다. 국학진흥원 측은 “유교 목판은 편집과 판각, 간행, 전승 등이 민간의 자발적인 힘으로 이뤄진 세계사에 유례없는 집단지성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는 유교 목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원하는 뜻도 담겨 있다. 유네스코에 한국을 대표하는 12번째 세계기록유산 후보로 오른 유교 목판의 등재 여부는 내년 5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총회에서 결정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대구시장] 권영진 vs 김부겸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대구시장] 권영진 vs 김부겸

    ■ ‘텃밭 혁신’ 非朴의 실험 권영진 새누리당 대구시장 후보는 TK(대구·경북) 출신이긴 하지만 비박근혜계로 통한다. 그런 그가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에서 쟁쟁한 친박계 후보들을 제치고 후보로 선출된 것은 그 자체로 ‘반란’이라 할 만하다. 그는 이번 경선에서 ‘변화의 리더십’을 앞세웠고, 이에 변화를 바라는 민심이 호응하면서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권 후보는 1962년 경북 안동에서도 40여리 떨어진 남선면 원림리 양지마을에서 태어났다. 50~60가구가 모인 두메산골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닌 후 안동 시내로 전학하고, 고등학교는 대구로 진학했다. 어린 시절부터 낯선 유학생활을 겪으면서 자연스레 배짱을 몸에 익혔다. 그는 “촌놈 자존심을 지키려고 친구들과 싸움도 많이 하고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오기도 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고려대 영문과에 입학한 1980년은 ‘서울의 봄’이 한창이었고 캠퍼스는 민주화 열기로 뜨거웠다. 그 역시 공부보다는 길거리 시위로 최루탄 연기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친구들이 사회·노동운동에 투신할 무렵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총학생회 초대 학생회장에 당선되면서 전국 대학원 학생회 설립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좌파성향으로 흐르는 학생운동에 염증을 느끼게 됐고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공직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쪽으로 가치관이 바뀌게 됐다. 그는 1990년 통일부 사무관 공채로 입사해 1992년 남북 총리회담의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제정 등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정치권에는 1999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 보좌역으로 입문했다. 그는 원외 신분이었지만 남경필·김영선 의원 등 초선 의원들과 함께 한나라당 소장파 그룹 ‘미래연대’를 결성해 초대 사무총장을 맡는 등 리더십을 보였다. 당시 그가 영입했던 이들 중에 원희룡, 오세훈 등 훗날 쟁쟁한 정치인으로 성장한 이들도 끼어 있었다. 이회창 대통령 후보 보좌역으로 임했던 2002년 대선에서 패배의 고배를 든 뒤 2004년 17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탄핵 역풍이 매서웠다. 그는 서울 노원을에서 선전했지만 1.9% 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그는 도약의 계기를 맞는다.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비서실장으로 선거를 승리로 이끈 이후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변신한 것이다. 사석에서 오 시장이 “정말 비싸게 모셔온 부시장”이라고 농담할 정도로 그는 부시장직을 끝까지 고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부시장직을 맡아서는 자원회수시설 광역화, 용산부지의 자연생태공원 보존 등의 실적을 남겼다. 18대 총선에서 노원을에서 당선된 뒤 초선들의 쇄신 모임인 ‘민본 21’ 간사를 지냈다. 비박계였지만 합리적 성향으로 한나라당 재창당 위기 때 박근혜 대통령과 쇄신파 간 만남을 주도하며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19대 총선 때 당시 민주당 우원식 후보와의 리턴매치에서 패배했지만 기획력을 인정받아 2012년 대선 때 여의도연구소 상근 부소장에 임명된다. 이후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기획조정단장 등을 맡으며 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지난해 암중모색 시기를 거친 그는 자신에겐 정치적 불모지나 다름없던 대구에서 시장 출마를 선언한 이후 100여일 만에 후보 자리를 꿰차는 저력을 보였다. 권 후보는 자신의 경선 당선에 대해 “변화를 바라는 대구 시민들의 열망이 분출된 결과”라면서 “대구 시민·당원들이 친박·비박을 놓고 선택한 게 아니라 30년 넘게 발전이 지체된 대구를 바꿀 능력을 누가 갖고 있는지를 따져본 결과”라고 주장한다. 비주류인 그의 정치 실험이 성공할지 이번 선거에 관심이 집중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불모지 꽃’ 두 번째 도전 김부겸 새정치민주연합 대구시장 후보는 지난 19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낙선했지만 40%가 넘는 득표율로 기염을 토했다. 야당의 불모지인 대구에서 거둔 의미 있는 성과였다. 그에게 이번 대구시장 선거는 지역주의의 벽을 깨기 위한 두 번째 ‘겁없는’ 도전인 셈이다. 김 후보는 1956년 경북 상주군 상주읍 오대리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5대 독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성화에 고교 2학년 때 결혼하고 이듬해 김 후보를 낳았다. 그는 대구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대학 시절 대부분은 유신 반대 시위, 이에 따른 두 번의 실형과 제적으로 점철됐다. 입학 이듬해인 1977년 유신 반대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제적을 당했고, 1978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아 실형을 살았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복학했으나 다시 학생운동 지도부로 활동하다가 5·17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또다시 제적됐다. 그가 ‘아크로폴리스의 사자후’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때쯤이다. 신군부와 학생 간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서울대 학내는 재학생과 복학생이 온건파와 강경파 등으로 나뉘어 치열한 노선투쟁을 벌였다. 그는 당시 복학생 대표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모인 1만여명의 학생을 향해 “민주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우리 각자가 결단해 열어나가자”는 내용의 연설을 토해냈다. 그의 연설은 학생들이 상호 불신을 털어내고 일체감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명연설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2년 그는 민주화운동 동지이자 친구인 이용재 목사의 동생 이유미씨와 결혼했고, 딸만 셋을 낳으면서 ‘딸 바보’ 아빠가 됐다. 그의 둘째 딸이 탤런트 윤세인(본명 김지수)이다. 김 후보는 1988년 ‘반(反)지역주의 개혁정당’을 표방한 한겨레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현실정치에 발을 들였다. 이후 1991년 민주당에 들어갔지만 민주당은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으로 분당되면서 ‘꼬마 민주당’으로 세가 약화됐다. 김 후보는 꼬마 민주당에 남아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함께 3김 청산, 지역주의 극복 등을 외치며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결성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참여와 한나라당 합류라는 두 개의 노선으로 갈라섰다. 김 후보는 한나라당 행을 택했고 고(故) 제정구 당시 의원의 지역구인 경기도 군포를 물려받아 16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김 후보는 이후 한나라당에서 소장 개혁파로 활동하며 국가보안법 폐지와 대북송금특검법안 반대 등을 주장, 당내 강경보수파와 갈등을 빚었다. 그는 결국 2003년 김영춘 전 의원 등과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다. ‘독수리 5형제’라 불린 이들의 합류로 전국 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은 창당의 명분을 얻었지만 그에게는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됐다. 경기 군포에서 내리 3선을 한 김 후보가 혹독한 도전을 다시 시작한 것은 19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아성인 대구에 출사표를 던지면서다. 김 후보는 당시 “세 개의 벽인 지역주의, 기득권, 과거의 벽을 뛰어넘겠다”면서 민주통합당 간판으로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과 맞붙었지만 끝내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거둔 40.4%의 득표율은 새누리당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김 후보는 지난 3월 대구시장 예비후보 등록을 마친 뒤 “대구에서는 야당 시장의 당선이야말로 대박이 될 것”이라면서 “대구 출신 대통령에 야당 대구시장이라는 하늘이 내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결기를 드러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스스로 꿈 찾기-‘예술꽃 학교’ 가다] 대전 동명초교 디지털 뮤지컬

    [스스로 꿈 찾기-‘예술꽃 학교’ 가다] 대전 동명초교 디지털 뮤지컬

    “이 노래는 당당하게, 다 같이 불러볼까?” “네, 선생님! 저희 노래 다 외워 왔어요.” 대전 추동에 있는 동명초등학교가 학생들의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지난 15일 찾은 동명초에서는 목요일마다 예술강사들이 총출동해 전교생과 함께하는 ‘디지털 뮤지컬’ 연습이 한창이었다. 대전역에서 차로 40여분 떨어진 동명초는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81명에 불과한 작고 외딴 농촌학교이지만, 즉석에서 무대 동선을 짜며 개선점을 찾아내는 학생들 표정에서는 ‘프로 배우’로서의 면모가 드러났다. 2011년 문화체육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지정하는 ‘예술꽃 씨앗학교’(씨앗학교)로 지정된 뒤 길게는 4년째 공연 중인 학생들이다. 씨앗학교란 예술강사들이 찾아가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는 문화예술 소외지역의 작은 학교를 말한다. 2008년 10곳, 2011년 16곳, 2012년 10곳, 지난해 4곳, 올해 13곳 등이 4년 동안씩 지정됐다. 지금은 전국에 43개 씨앗학교가 있다. 올해 동명초에서는 이민호 KAIST 문화기술대학원 연구원을 비롯해 10명의 문학, 영상음악, 성악, 디자인 전공자들이 예술강사로 학생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예술강사 대부분은 직접 무대에 서고, 대학에도 출강한다. 모두 바쁘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공연 연습을 즐기는 동명초 학생들의 밝은 표정에 붙잡혀 씨앗학교에 헌신 중이다. 동명초에서 만드는 ‘디지털 뮤지컬’은 학생들이 공연할 때 무대배경으로 영상물을 투영시키는 일종의 융합 뮤지컬이다. 뮤지컬 자체가 문학, 무용, 음악, 연극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인데 여기에 더해 영화와 정보기술(IT) 요소까지 통합된 형태다. 더욱이 뮤지컬 극본을 쓰고, 배경이 되는 영상물을 촬영하는 일 모두 동명초 학생들이 담당한다. 1년에 몇 차례 공연할 때 조명과 영상을 통제하거나 공연용 분장을 하는 일까지 학생들이 직접 해낸다. 6학년 담임교사이자 씨앗학교 업무를 담당하는 송연호(여) 교사는 “극본을 쓸 때에는 문학 전공 강사가, 뮤지컬 곡을 만들 때에는 성악 전공 강사가, 안무를 짤 때에는 무용 전공 강사가 도와주지만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서로 협의하며 공연을 발전시킨다”면서 “뮤지컬 장르이다 보니 노래와 춤이 주가 되겠지만 학생 선호에 따라 공연 스태프, 영상물 제작, 분장 등 다양한 역할을 맡게 된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예술강사가 이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형태로 한 편의 뮤지컬이 완성되어 간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무대 배경이 될 영상물을 제작하는 학생이 “정지된 영상과 움직이는 영상을 덧대어 마치 세월이 잔잔하게 흐르는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예술강사가 기술적인 측면과 효과를 내기 좋은 시각 자료를 설명해주는 식이다. 이어 적합한 시각 자료를 찾아내 영상물을 진일보시키는 일은 학생들의 임무인데, 작업을 거듭하며 학생들 스스로 성장해왔다. 동명초는 매년 1~3학년 팀과 4~6학년 팀으로 나눠 두 편씩 공연을 했다. 올해 작품은 ‘소나기의 유래’(1~3학년)라는 콩트식 뮤지컬과 ‘대청호의 비밀과 미래’(대청호·4~6학년)라는 사회적인 주제의 뮤지컬이다. 특히 ‘대청호’는 원래 1918년 대청호 수몰 지역에 개교했다가 댐이 생기면서 1980년 지금의 장소로 옮긴 동명초의 역사와 맞닿아있는 작품이다. 전병두 동명초 교장은 “기존에 있던 ‘강아지 똥’과 같은 작품을 극화해 무대에 올리기도 했지만, 이왕 학생들과 밀접한 이야기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획한 뮤지컬”이라고 설명했다. ‘대청호’의 주제는 제법 무겁다.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개발이 최고’라는 개발론자, ‘지구 반대편에 대청호의 물을 수출해 부자가 되자’는 수출론자,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자’는 환경론자가 한바탕 논쟁을 벌이다 홍수와 지진이라는 자연의 보복을 당한 뒤 다 같이 합심해 환경을 살려내는 이야기다. 대청호 수몰 전 마을의 이슈를 풀어낼 수 있는 상상력, 개발론자와 수출론자의 차이를 짚어내는 통찰력, 철학적인 주제를 영상과 공연으로 편안하게 풀어내는 기획력은 4년 동안의 내공이 쌓인 결과다. 오페라를 전공한 고석우 예술강사는 “예술 교육 덕분인지 동명초 학생들은 표현력이 좋고, 창의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동명초 학생들은 이태리에서 공부한 고 강사 등 해외 유학을 하거나 해외체류 경험이 많은 예술강사로부터 일주일에 하루는 교과 공부 대신 예술 교육만을 받는다. 고씨는 “학생뿐 아니라 어른이 된 뒤에도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1000명 앞에서 말하며 공감을 받기는 어렵지만, 같은 인원 앞에서 노래와 무용을 통해 갈채를 받는 일은 한층 수월하다”면서 “예술을 무기 삼아 대중의 박수갈채를 받은 경험을 지닌 학생들이니 표현력과 창의력이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음악은 혼자 하기 어렵고, 화합과 배려를 통해 하모니를 이뤄내야 하는 작업”이라면서 “성장하는 학생들이 함께 극을 만드는 경험을 하면서 사회적 배려심과 올바른 정서에 눈뜨는 모습이 보기 좋다”라고 덧붙였다. 오는 7월 경기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는 ‘2014 대한민국 행복학교 박람회’에서 펼칠 공연을 앞두고 연습 중이던 학생들이 연습에 지친 표정을 짓기보다 들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6학년 박민지양에게 ‘하루 꼬박 연습하기 어렵지 않으냐’고 묻자 “매일 새로운 방법을 배우니 즐겁다”고 했다. 5학년 박가은양에게 ‘동작을 외우기 어렵지 않느냐’고 묻자 “지금은 헷갈려도 공연에서는 더 잘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5학년 송성민군에게 ‘큰 무대에 서는 게 떨리지 않느냐’고 묻자 “무대체질”이라며 웃었다. 유독 동작이 시원스럽고 열심인 송군에게 ‘뮤지컬 배우를 꿈꾸느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자 “아니다. 다른 꿈이 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공연의 전부를 기획해 무대에 함께 서 박수 갈채를 받았는데, 무슨 꿈을 꾸든 쉽게 포기할 리 없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신주아 결혼, 7월 태국인 기업가와 화촉 ‘예비신랑 경영인 2세+훈남’

    신주아 결혼, 7월 태국인 기업가와 화촉 ‘예비신랑 경영인 2세+훈남’

    배우 신주아(30)가 오는 7월 태국에서 중국계 태국인 기업가와 결혼식을 올린다. 신주아는 7월 방콕의 센타라 그랜드 호텔에서 태국의 중견 페인트 회사 JBP의 경영인 2세 사라웃 라차나쿤(32)과 1년 연애 끝에 결혼한다. 예비 신랑은 신주아의 초등학교 친구 남편의 지인으로, 신주아가 친구 가족과 방콕으로 여행을 갔다가 자연스럽게 만나면서 두 사람의 교제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주아와 사라웃 라차나쿤은 서로 한국어와 태국어를 배우며 사랑을 키웠고, 유학파 출신의 ‘훈남’으로 알려진 신주아의 예비 신랑은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은 경영인 2세로 현지 매체에 소개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주아는 최근 방콕으로 건너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으며 그 곳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당분간 결혼 생활에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양가 부모님이 상견례를 마쳤으며, 정확한 결혼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지난 2004년 광고 모델로 데뷔한 신주아는 같은 해 SBS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통해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드라마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히어로’, ‘키스 앤 더 시티’, ‘오로라 공주’ 등과 SBS 예능 프로그램 ‘헤이헤이헤이 2’를 비롯해 영화 ‘몽정기 2’,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녀녀녀’ 등에 출연했다. 19일 신주아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행복하게 잘 살겠다.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하고 먼저 가서 햄 볶을테니 뒤따라 잘들 오시길”이라는 글을 남겼다. 또 “이제 편하게 한 남자의 여자로 살아가는구나…찬락쿤”이라며 예비 신랑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사진 = 신주아 트위터 (신주아 결혼)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시진핑·푸틴 ‘동중국해 밀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미디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일 동중국해에서 시작하는 양국 합동 군사훈련 개막식에 동시 참석한다. 유리 우샤코프 푸틴 대통령 외교담당 보좌관은 “푸틴 대통령이 시 주석과 함께 20일 상하이에서 열리는 ‘해상협동-2014’ 연합훈련 개막식에 참석한다”고 말했다고 18일 관영 신화통신이 러시아 매체를 인용해 보도했다. 훈련은 27일까지 진행되며, 중국과 일본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멀지 않은 동중국해 북부 해역 등에서 진행된다. 양국 정상이 합동훈련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센카쿠열도 영유권 분쟁에서 러시아가 중국 편이라는 점을 과시함으로써 동중국해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다. 러시아의 경우 크림 사태로 촉발된 미국과 유럽의 러시아 경제 제재를 중국과의 협력으로 뚫을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계산이 깔려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소리(VOA) 중문망은 푸틴 대통령이 이번 방중 때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을 만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장 전 주석은 러시아 유학파로 재임 기간 동안 양국의 변경 갈등을 해결하고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포하는 등 중·러 관계 발전에 공로가 크다는 점에서 푸틴의 장 전 주석 예방은 중·러 밀월의 깊은 역사적 연원을 보여 주려는 의도로 분석된다고 VOA는 전했다. 한편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신사 참배로 중·일 관계가 악화된 이후 양국 간 첫 장관급 회동이 이뤄졌다. 가오후청(高虎城) 중국 상무부장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경제산업상이 지난 17일 중국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경제무역장관회의에서 회담을 가졌다고 홍콩 명보가 보도했다. 이 자리에서 중국 측은 “중·일 관계 악화 책임이 일본에 있다”고 지적했으며, 일본 측은 “정치 분쟁을 배제하고 경제 협력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강원지사] 최흥집 vs 최문순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강원지사] 최흥집 vs 최문순

    ■‘7급 신화’ 꿈꾸는 강원맨 출생·사회생활 모두 강원서…”지역 꿰고 있어 도지사 적임” 최흥집 새누리당 강원도지사 후보는 뼛속까지 ‘강원도맨’임을 최대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강원도에서 태어나 강원도에서 자랐고 강원도에서 공부했으며 강원도에서 공직생활을 모두 보낸 강원도 그 자체다. 그가 ‘강원도 아리랑’을 애창곡으로 꼽을 정도로 강원 사랑이 유별난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는 “강원 토박이로서 지역 구석구석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강원지사 적임자”라면서 “강원도산(産) 7급 공무원의 신화를 이뤄 내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최 후보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8월 강릉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감자 한 톨을 온전히 먹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다. 어린 나이에 매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 산 저 산으로 먹거리를 찾아 헤맸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고 농사일도 도왔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중노동을 하는 바람에 삐쩍 몸이 마른 그에게 친구들은 ‘뼈다귀’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공부를 잘했던 최 후보는 명문 강릉고에 입학했다.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유학 갈 형편이 못 된 그는 강릉에 있는 관동대에 입학해 경영학을 배웠고, 춘천에 있는 강원대에서 행정학 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최 후보는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며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일터는 강원도청이었다. 그는 대형 국제 행사인 강원국제관광박람회조직위 총괄기획부장으로서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공직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 도 기획관, 환경관광문화국장, 산업경제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2008년 12월 정무부지사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최 후보가 공무원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탁월한 기획력과 강력한 업무 추진력이 뒷받침된 결과”라는 게 주변의 평이다. 강산이 세 번도 더 바뀐 36년간 강원도에서 공직생활을 하면서 그는 강원도의 문제점과 가능성을 누구보다 더 잘 알게 됐다고 자부한다. “도지사로서 해야 할 일, 강원도가 가야 할 길이 너무나 확연히 보였기에 도지사가 되는 것은 하늘이 준 소명이라고 생각했다”는 게 그의 변이다. 최 후보는 마침내 2011년 4월 27일 치러진 강원지사 재선거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선전했지만 인지도를 앞세운 MBC 사장 출신의 엄기영 후보에게 패했다. 하지만 일 잘하는 그를 세상이 내버려둘 리 없었다. 그는 2011년 7월 강원랜드 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야심찬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사행성 도박장 이미지의 강원랜드를 ‘에버랜드’와 같은 휴양지로 탈바꿈시키려는 포부였다. 최 사장은 모든 것을 ‘가족’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국내 최대 규모의 스키장인 강원랜드의 하이원리조트를 가족 여행객을 위한 명품 복합 레저타운으로 바꿔 놓는 데 집중했다. 그가 도입한 각종 문화공연, 불꽃놀이쇼, ‘하늘길’ 산책로 조성,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개최 등을 통해 강원랜드의 이미지는 속속 변모했다. 결국 최 후보는 3년간 강원랜드 사장으로 일하는 동안 2013 대한민국 창조경제 CEO 대상 수상 등을 통해 경영 능력을 공인받는다. 최 후보는 늘 자신의 장점을 ‘경청’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도민들의 목소리를 각별히 경청하면서 도정을 이끌어 가겠다”며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힘 있는 여당 도지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재선 도전장 낸 ‘소탈맨’ 해직기자 출신으로 노조위원장 거쳐 방송사 최고 자리에 최문순 새정치민주연합 강원지사 후보는 전국언론노조 초대 위원장 출신으로 최연소 MBC 사장에 오른 경력을 갖고 있다. 당시 나이 48세. 갓 쉰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해직 기자 출신이 노조위원장을 거쳐 방송국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최문순 쓰나미’라 불렀다. 최 후보는 6·25 전쟁 직후인 1956년에 태어나 강원 춘천군 신동면 정족 2리 산골마을에서 자랐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최 후보는 어려서부터 성실성이 몸에 뱄다고 한다.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랐지만 최문순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춘천고에 다니던 1972년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단행하자 친구와 함께 반대운동에 나섰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학생운동을 계속했다. 1984년 최 후보는 MBC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남부럽지 않은 직업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이 관리·통제하는 언론 환경은 그를 힘들게 했다. 시위 현장에 취재차 나가면 대학생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최 후보가 언론 민주화에 뛰어든 건 1995년 MBC 노동조합의 탄생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노조위원장을 지내던 최 후보는 1년여 만인 96년 회사로부터 1년간 해직을 통보받는다. 같은 해 3월부터 40일간 ‘공정방송’을 부르짖으며 파업에 돌입한 게 해직 이유였다. 그는 복직 후에도 노조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고 2000년 전국언론노조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돼 언론 민주화에 앞장서게 된다. 최 후보의 ‘관운’은 계속됐다. 2005년 부장대우의 직급에서 일약 MBC 방송국 사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은 노조위원장 출신의 경영능력에 의심을 보냈다. 하지만 최대한 현장에 창의력과 자율을 부여한 최 후보의 경영방식은 ‘무한도전’, ‘대장금’, ‘주몽’, ‘이산’ 등 히트작을 탄생시켰다. 노조위원장과 방송사 사장을 두루 경험한 최 후보의 특이한 이력은 정치권에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은 최 후보를 ‘이명박 정부의 언론 장악’에 맞설 인물로 꼽았고 전문가 영입 케이스로 비례대표 10번 자리를 줬다. 최 후보가 ‘정치인 최문순’으로 국민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건 2011년 4·27 강원지사 보궐선거 때다. 최 후보는 비례대표직을 내려놓고 ‘MBC 선후배 대결’로 불린 강원지사 보궐선거에 나서 한나라당 엄기영 후보를 4.52% 포인트(5971표) 차이로 물리치고 승리를 거뒀다. 최 후보는 “30여년간 선후배로 지내온 엄 후보와의 맞대결을 꺼렸지만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새벽 2시에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해 승낙했다”고 밝혔다. 최 후보는 자신의 강점을 ‘소탈함과 친근함’으로 꼽는다. 그는 선거운동을 할 때 90도를 넘어 10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할 정도로 겸손하게 보이려 애쓴다. 투박한 외모로 ‘감자’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최 지사는 2011년 도지사에 당선된 후 강원도 특산물인 감자와 도루묵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소개하며 판촉에 나서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 공약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는 지난 15일 ‘오직 강원’이라는 슬로건 아래 “지난 3년을 평가해 주시고 앞으로 4년을 더 맡겨도 괜찮을지 판단해 달라”고 도민들에게 호소하며 재선을 위한 잰걸음에 나섰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필리핀서 또 한인 1명 총격 피살

    지난 12일(현지시간) 한국인 두 명이 필리핀 수도 마닐라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됐다가 이 중 한 명이 피살됐다. 현지 경찰 조사에서 한국인들이 운영하던 온라인 도박 사이트의 수익금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빚어지면서 청부 납치·살인이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15일 외교부에 따르면 12일 새벽 1시 30분쯤 양모(31)씨와 정모(30)씨 등 한국인 두 명이 필리핀 파라냐케 시내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됐다가 4시간 만인 새벽 5시 30분쯤 양씨가 총격으로 숨지고 정씨는 달아나다 부상을 입었다. 필리핀 경찰은 이튿날인 13일 한국인 신모(40)씨와 현지인 4명을 용의자로 긴급 체포했다. 필리핀 당국과 우리 대사관 등에 따르면 신씨는 마닐라에서 온라인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양씨 등을 고용했다가 수익금 분배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업주인 신씨가 현지인들에게 양씨 등을 살해하라고 청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부 관계자는 “한국인이 주범으로 필리핀인을 동원해 범행을 저지른 전형적인 청부살인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포함해 2009년 이후 필리핀 현지에서 피살된 한국인은 40명으로, 지난해 12명에 이어 올해 들어 벌써 5명째다. 지난 3월에는 필리핀에서 유학 중인 한국인 여대생이 마닐라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된 지 한 달여 만인 지난달 9일 피살된 채 발견된 바 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국보 온전히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

    “국보 온전히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작했는데 특별한 일이 돼 버렸네요. 내 나라 것을 온전히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습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6·25전쟁 당시 미국으로 불법 반출된 대한제국(1897~1910년) 국새를 반환했다. 하지만 이는 한 청년의 우연한 발견에서 시작됐다. 그 주인공은 현재 육군 20사단 청룡대대에서 복무 중인 석기찬(29) 일병. 2010년 3월 미국 메릴랜드주립대 경영학과에 유학 중이던 석 일병은 아버지 석한남(55)씨와 친분이 있던 혜문 스님의 부탁으로 혜문 스님이 대표를 맡은 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석 일병은 당시 명성황후 양탄자 등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메릴랜드 국가기록보존소(NARA)에서 1950년대 미국으로 불법 반입된 문화재들을 기록한 자료 ‘아델리아 홀 레코드’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자료를 넘겨보다 우연히 ‘국새’(KOREA SEAL)라는 글자와 도장 모양의 사진을 발견한 것. 석 일병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뭔가 중요한 것 같다는 느낌이 와 참고자료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자료는 외부로 유출할 수 없었지만 당시 관리자에게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고 복사만 하게 해 달라고 사정해 겨우 허락을 받아 냈다”고 회상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열린세상] 귀족에게 애국심은 없다/김정현 소설가

    [열린세상] 귀족에게 애국심은 없다/김정현 소설가

    대통령님, 여전히 관료와 군인을 믿으시나요? 예, 그 신뢰의 바탕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관료는 믿을 수 있었습니다. 가난으로 점철된 그 시절,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도 능력을 펼칠 무대는 한정됐습니다. 해외 진출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기업도 고만고만했으니, 개천의 용들이 승천을 꿈 꿀 무대로는 관료세계가 제격이었습니다. 또 그때는 해방과 전쟁을 겪은 뒤라서 저마다 애국심을 가슴에 품고 있기도 했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리라는 생각은 사실상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승천을 위해서는 대통령의 뜻을 읽고 최선을 다해야 했지요. 군인은 어떻습니까. 역시 해방과 전쟁에 따른 애국심이 깊었습니다. 더하여 유학의 특혜를 누린 군인들은 행정 등 국가운영에 관한 여러 선진제도를 가장 먼저 배워 왔습니다. 지금은 구태가 돼 버린 ‘브리핑 차트’조차 군에서 제일 먼저 실행하지 않았던가요. 그러니 선진제도를 정부와 사회에 전파하고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여러 곳에 중용돼야 했지요. 중용→충성→신뢰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이 형성된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어떤가요? 관료도, 군인도, 이제는 선진은커녕 세상 흐름을 뒤좇기에도 벅찹니다. 더구나 창조라니, 엄두조차 낼 수 없을 겁니다. 공연히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 온 조직의 한계 때문입니다. 60년 넘는 역사 속에 그들의 조직은 엄격한 위계체제로 고착됐습니다. 그 위계와 연공서열 속에서, 법의 이름으로 보호되는 인사체계에서, 그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윗사람입니다. 속된 말로 튀면 눈엣가시가 되는 것이지요. 더구나 이제 대통령은 5년 뒤면 물러나는 세상입니다. 개중에는 감옥에 가기도 하고 비난받는 것도 일상이 돼버렸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인사권을 행사하는 사람도 5년 뒤를 생각하면 감히 조직을 거스를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구조인 것이지요.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그래도 연잇는 여러 사고가 증명을 더해 이른바 ‘관피아’를 비롯한 그들 구조의 실상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관피아’는 바꾸어 말하면 ‘귀족’입니다. 젊은 한 시절 몇몇 시험과목에만 집중해 과거의 문을 통과하면, 그로써 귀족의 세상으로 편입돼 그들만의 리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간혹 바른 정신의 사람이 있어 편입을 거부하면 ‘왕따’의 밑바닥을 걸어 타의 본보기가 되고요. 우리 역사에서 귀족의 행태가 어떠했는지는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신라와 고려의 귀족, 사대부라는 이름의 조선 귀족. 긍정의 부분도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나라를 버릴지언정 자신들의 기득권은 끝내 놓지 않았습니다. 그 악습의 고리를 끊지 않고는 창조도, 개혁도 공염불에 그칠 것입니다. 현대 귀족의 불씨는 ‘고시’(考試)제도입니다. 그것은 과거(科擧)의 연장선이기도 하지만 일제에 의해 도입된 제도입니다.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일생에서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평생을 누리기에는 이미 다른 세상입니다. 쉼 없이 새로운 세상을 공부해도 기껏 한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기도 어려운 세상이 아닙니까. 또한 관료를 꿈꾸지 않아서 그렇지 더 뛰어난 인재들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 열린 생각, 선진 여러 나라에서 공부하고 체험한 인재가 정부의 중추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정부의 기본은 7급 정도의 직에서 출발해도 충분합니다. 승진제도만 제대로 실행된다면 줄타기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이 그야말로 ‘창조’의 결실을 낼 것입니다. 실제 우리 정부부처 중에는 7급을 기본으로 하는 조직이 있고, 최소한 그들의 애국심만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바 아닙니까. ‘고시’라는 제도로 형성되는 기수의 연줄에, 학연과 지연까지 더해지며 편이 갈라지는 폐해는 뿌리를 끊지 않고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연줄의 선후배가 끌어주고 밀어주는 사회가 아니라 능력의 검증으로 장관과 대통령이 발탁하는 구조여야 애국심의 충성이 가능합니다. 고위직의 경력은 귀족의 자격이 아니라 보람 있는 애국의 추억으로 영원한 훈장이 돼야 합니다. 여북했으면 관료보다 순수 정치인이 낫다는 생각까지 들까요. 스스로도 괴이쩍었습니다.
  • ‘강덕수 금품 로비’ 무역보험공사 前사장 소환

    ‘강덕수 금품 로비’ 무역보험공사 前사장 소환

    검찰이 STX그룹으로부터 금품 로비를 받은 혐의로 유창무(64) 전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을 13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해 조사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임관혁)에 따르면 유씨는 강덕수(64) 전 STX그룹 회장에게서 자녀 학자금 명목으로 1억여원의 금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씨의 아들은 유씨가 공사 사장에서 퇴임한 직후인 2011년 ‘STX 장학생’으로 미국에서 유학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무역보험공사가 STX그룹 계열사들에 대출과 보증을 서는 과정에서 유씨가 특혜를 제공하고 돈을 받은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검찰은 STX가 로비를 벌이는 과정에서 유씨와 같은 산업자원부 관료 출신인 이희범(65) 전 STX중공업·건설 회장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살펴보고 있다. 검찰은 이날 유씨를 밤늦게까지 조사했으며 유씨에 대해 사전구속영장 청구를 검토할 방침이다. 검찰은 유씨가 STX 측으로부터 거액을 건네받은 단서를 포착하고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무역보험공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보증보험 등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 검찰은 무역보험공사가 STX그룹 계열사들에 각종 보증과 대출을 해주는 과정에서 특혜를 준 것으로 보고 압수물 분석과 참고인 진술 등을 토대로 대가성을 확인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검찰 조사 결과 STX조선해양은 유씨 재직 기간인 2009년 6월 영업이익을 부풀린 허위 재무제표를 제시하고 무역보험공사로부터 4000억원을 대출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경기도지사] 남경필 vs 김진표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경기도지사] 남경필 vs 김진표

    [남경필 후보] 할 말은 하는 ‘쇄신의 아이콘’ 정치 경력 17년차 5선… “북극 가도 의원 할 사람” 친화력 최대 강점 새누리당 경기지사 후보인 남경필 의원은 정치 경력 17년차의 5선 의원이지만 낮은 연배 탓에 아직도 ‘소장파’, ‘쇄신파’로 불린다. 남 의원은 1998년 3월 아버지인 남평우 의원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미국 유학 중 귀국, 같은 해 7월 아버지의 지역구인 수원 팔달구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다. 이후 네 차례의 총선에서 내리 당선되면서 황우여 대표, 김무성 의원, 정의화 의원 등 자신보다 열 살 이상 많은 당내 5선 중진의원들과 선수(選數)로는 어엿한 동기(同期)를 이뤘다.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남 의원은 어릴 적 개구쟁이로 통했다. 이웃집 어디든 들어가 밥을 얻어먹을 정도로 낯가림이 없었다. 지금도 “북극에 보내도 국회의원 할 사람”이라는 우스개가 나올 만큼 특유의 친화력을 과시하고 있다. 남 의원은 연세대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한 뒤 아버지가 사주(社主)로 있던 경인일보에 입사해 3년간 사회부,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미국 예일대로 유학을 떠나 경영학 석사과정을 이수했고 뉴욕대에서 행정학도 공부했다. 남 의원은 이때 수학한 두 가지 분야를 통해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변화시켜나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정치의 꿈을 꾸게 됐다. 그는 “예일대 시절 한인 학생회장을 맡았던 경험도 정치인생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회고했다.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치 입문 과정이 수월했다는 비판 속에서도 남 의원은 큰형님뻘 되는 다른 의원들과 당 지도부에 가감 없는 쓴소리를 던지며 ‘할 말은 하는’ 개혁적 성향의 정치인으로 인식됐다.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 모임인 ‘미래연대’와 ‘새정치수요모임’의 대표를 맡으면서 당의 개혁과 쇄신을 부르짖었다. 이 때문에 ‘비주류’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녔다. 아주 잠깐에 불과하지만 주류였던 시절도 있었다. 2001년 이회창 총재 비서실 부실장을 맡았고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대선 패배와 함께 대변인직에서 사퇴하면서 다시 비주류로 복귀했다. 남 의원은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내가 시대정신으로 믿었던 것이 국민이 원하는 시대정신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게 됐고 크게 반성했다”고 썼다. 이후 남 의원은 자신의 체급을 올리기 위한 도전에 나서곤 했지만, 쓰라린 패배는 늘 그를 따라다녔다. 2007년 7월 전당대회에서 ‘미래연대’ 측의 단일 경선 후보 경쟁에서 당시 재선 의원이었던 권영세 주중대사에게 패했고 2010년 7월 전당대회에서는 정두언 의원과의 단일화로 물러났다. 다만 18대 대선 과정에서 당내 ‘경제민주화실천모임’ 대표로서 ‘경제민주화’ 화두를 선점하며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또 대한민국 국가모델 연구모임을 주도하면서 ‘원조 소장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몇 차례의 좌절에도 주류를 향한 남 의원의 날갯짓은 계속됐다. 그는 지난해부터 당 원내대표 도전 의사를 공공연히 밝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당내에 불어닥친 6·4 지방선거 중진 차출론에 밀려 결국 경기지사직으로 방향을 틀었다. 2006년 당내 경기지사 후보 경선에서 김문수 지사에게 후보직을 양보한 지 8년 만의 재도전이다. 남 의원을 평가절하하는 쪽에서는 그가 아버지 덕으로 어려움 없이 어린 나이에 출세했다는 점을 들어 ‘오렌지족’이라고 비꼰다. 이에 대해 그는 “고생을 모르고 자란 사람을 오렌지족이라고 부른다면 부정하지 않겠으나, 세상으로부터 더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틀린 것을 바꾸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논리로 반박한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김진표 후보] ‘경제 도지사’ 꿈꾸는 정책통 경제·교육부총리 거친 정통 관료 출신… “8년간의 저성장 탈출 이끌겠다”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지사 후보인 김진표(3선) 의원은 정통 경제관료 출신으로 경제·교육 부총리 등을 지낸 대표적인 정책전문가로 통한다. 1947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김 의원은 1951년 1·4 후퇴 때 아버지를 따라 월남해 경기도 수원에서 자랐다. 김 의원은 어린 시절 공무원을 그만두고 직물제조업을 시작한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부모의 이혼으로 아픔을 겪게 된다. 어려워진 집안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김 의원은 방과 후 물지게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김 의원은 수원중학교를 거쳐 경복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입주과외를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김 의원은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거쳐 미국 위스콘신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해인 1971년에는 언론사 입사에 뜻을 뒀지만 당시 언론사들이 응시 자격을 군 복무를 마친 사람으로 한정한 탓에 언론인의 꿈을 접어야 했다. 결국 김 의원은 방향을 틀어 신탁은행에 입사했지만, 불과 1년여 만에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이미 입사가 결정돼 신입사원으로 출근하던 고등학교 3학년생들이 다른 회사로 빠져나갈까 우려해 졸업시험을 보지 못하게 한 회사의 횡포에 대항해 항의성명을 주도했다가 상사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1974년 행정고시(13회)에 합격해 대전지방국세청 소비세과장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사무관 생활을 한 지 6년 후에는 영월 세무서장으로 발령 나 가족을 모두 데리고 영월로 이주했다. 당시 그는 영세상인들의 세금 실태 조사를 실시해 합리적으로 세금을 조정했고 ‘세금 깎아 주는 세무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영월군에서 ‘명예군민증’도 받았다. 그는 1993년 금융실명제 당시 재무부 비밀작업팀의 실무책임자로 참여했다. 1999년에는 재무부 세제실장을 지내며 금융소득종합과세 도입 등 굵직한 세제 개편을 주도했다. 세제실장에 임명된 지 2년 만인 2001년 차관으로 파격 승진하는 등 이후 승승장구했다.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인 2002년에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청와대 대응팀장을 맡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곧이어 국무조정실장으로 승진했다. 2003년에는 노무현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를 맡아 ‘LG카드 사태’를 해결하는 등 경제개혁에 헌신했다. 2004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정치에 입문, 17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5년에는 교육부총리를 맡아 ‘방과 후 학교’ 제도를 도입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재선된 이후에는 무계파로서 민주당의 선출직 최고위원에 선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의원은 2010년 지방선거 경기도지사에 출마했을 때 유시민 국민참여당 후보와의 야권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0.96% 포인트 차로 석패해 한 차례 경기도지사의 꿈을 접었다. 당시 야권에서 처음 도입한 공론조사에서 유 후보 측이 전화와 문자 등을 통해 지지자들을 조직적으로 선거인단에 포함시킨 결과 경기도 당원이 30만명인 민주당이 당원 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국민참여당에 지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당시 김 의원의 일부 지지자들은 “속았다”고 발끈했지만, 김 의원은 깨끗이 승복했다. 김 의원은 이번 경기지사 당내 경선에서도 자신에게 불리한 쪽으로 막판에 경선 규칙이 변경됐음에도 결국 중재안을 받아들여 경선을 지켰다. 2010년 패배의 아픔을 딛고 2014년 경기도지사에 재도전하는 김 의원은 “8년째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살리는 경기도지사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서울시장] 정몽준 vs 박원순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서울시장] 정몽준 vs 박원순

    ■7선의 ‘새 꿈’ 의정 생활 26년 대부분 비주류… “공직은 봉사하는 자리”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된 정몽준 의원은 19대 국회의원 중 최다선인 7선으로 26년 정치 인생 대부분을 비주류로 보냈다. 정 의원은 1951년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8남 1녀 중 6남으로 태어났다. 식사 시간에 늦으면 먹을 게 금방 없어질 정도로 식구가 많은 집안에서 단체 생활을 하듯 컸다고 정 의원은 회고한다. 그는 학창 시절 조용하고 튀지 않는 우등생이었다.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재벌가 아들인지도 모를 정도로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스포츠를 좋아하고 열정적 기질을 지닌 소년이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ROTC 13기로 병역을 마친 정 의원은 미국 컬럼비아대를 거쳐 매사추세츠 공과대(MIT)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80년 현대중공업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훗날 각각 국무총리, 외무부 장관이 된 이홍구·한승주 교수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존스홉킨스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를 딴 이후 국제적 안목을 키우게 된다. 2007년 한나라당에 입당하기 전까지 정 의원은 현대중공업의 본산인 울산 동구에서 기성 정치인과는 다른 무소속 비주류의 길을 걸었다. 자진해서 선택한 비주류의 길에 대해 그는 ‘정치 노무자’란 단어로 대신 설명한다. “공직이란 말 그대로 공적인 서비스로, 여러 사람에게 봉사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당구도의 한국 정치 현실에서 비주류로서의 정치인생은 녹록지 않았다. 정 의원과 축구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다. 1993년 1월 대한축구협회 제47대 회장에 취임했다.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추진하기 시작했을 때 주변 반응은 싸늘했다. “일본에 승산이 없어 보나 마나 안 된다”는 회의론이 팽배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선거에 출마해 극적으로 당선되면서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정 의원은 1년 중 3분의1 이상을 외국을 돌며 월드컵 유치 강행군을 펼친다. 1996년 5월 31일 일본에 절대 열세라는 예상을 뒤엎고 한·일 공동 월드컵 개최 결정을 따낼 때까지 정 의원이 다닌 거리는 150만km, 지구를 37바퀴 도는 거리였다고 한다.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치솟은 대중적 인기를 발판 삼아 정 의원은 2002년 대선 때 ‘국민통합21’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대선 막바지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와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뤘지만 선거 하루 전날 ‘노무현 지지 철회’를 선언한 후 한동안 정치적 침체기를 겪었다. 이후 2007년 한나라당에 입당한 뒤 그해 대선 때 한나라당 중앙선대위 상임고문으로서 10년 만의 정권 교체를 이뤄 냈다. 이어 2009년 9월 한나라당 대표에 선출돼 정치적 위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2012년 대선 경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박근혜 대세론’에 밀려 일찌감치 하차했다. 정 의원은 자신을 소개할 때 “(7선 의원이 아닌) 서울 재선 정몽준”이라며 ‘서울시민’임을 강조한다. 국회에선 주로 한·미, 남북 관계 등 외교 문제에서 목소리를 내 왔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시장의 ‘큰 꿈’ 1세대 시민운동가·인권 변호사 명성… 재선 뒤 새 도전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장 후보로 확정된 박원순 현 시장은 인권변호사를 거쳐 ‘1세대 시민운동가’로 명성을 떨친 뒤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박 시장은 이번 6·4 지방선거에선 새정치연합 소속으로 시장직 재선에 도전하며 더 큰 꿈을 그리고 있다. 박 시장은 1956년 3월 경남 창녕에서 평범한 농부의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박 시장은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3개월이나 두문불출하며 공부할 만큼 어릴 적부터 노력가형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경기고를 졸업한 뒤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진학했지만 유신 체제에 저항해 학생운동을 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4개월 복역하고 제적당한다. 이듬해인 1976년 박 시장은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고 1980년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82년 대구지검 검사로 임용된다. 하지만 검사 생활은 그의 적성과 거리가 멀었다. 결국 검사 생활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인권 변호사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다 박 시장은 일생일대의 멘토인 조영래 변호사를 만나게 된다. 박 시장은 조 변호사와 함께 인권 변호사들의 모임인 ‘정법회’를 결성했고, 이 모임은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으로 확대 개편됐다. 박 시장은 민변의 창립 멤버로도 활동했다. 박 시장은 조 변호사와 함께 ‘권인숙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구로동맹파업 사건’,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등의 변론을 맡아 시국사건을 주도하며 명성을 떨쳤다. 박 시장은 조 변호사가 1990년 별세한 뒤, “해외에서 넓은 문물을 접하라”던 조 변호사의 권유로 1991년부터 이듬해까지 영국 런던 정경대 국제법 대학원 1년 과정을 마쳤다. 런던 정경대 유학 시절과 하버드대 객원연구원 1년여 시절 동안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현재 샘솟는 아이디어의 원천이 됐다고 한다. 한국 상황에 맞는 새로운 시민사회의 모델을 고민하던 박 시장은 1994년 귀국,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하며 시민운동가로 변신한다. 박 시장은 참여연대 사무처장 시절인 2000년 16대 국회를 앞두고 ‘국회의원 낙천·낙선운동’을 주도했고,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 ‘1인 시위’ 등 다양한 시민운동을 창안했다. 2000년에는 ‘1% 나눔운동을 위한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했고, 2006년에는 아름다운 가게와 희망제작소 등을 설립했다. 2009년에는 제3세계의 가난한 농부들을 돕는 공정무역 커피회사 ‘아름다운 커피’를 연이어 설립하는 등 각종 시민운동 경험이 서울시장 준비를 위한 밑거름이 됐다. 박 시장은 2011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확정되면서 후보 출마 의사를 밝혔다. 당초 5% 내외의 미미한 지지율이었지만,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원장과의 단일화 등으로 지지율이 50%대로 뛰었고 결국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박 시장은 2년 반의 재임 동안 ‘서울의 살림살이’를 개선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재임 기간 서울시의 채무를 3조 2500억원 감축했고, 지하철 9호선을 재구조화하면서 3조 2000억원의 낭비를 막았다”고 주장한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김규환 선임기자의 차이나 로드] 中 새 파워집단 IT제왕들 억만금으로 天下를 쥘까

    [김규환 선임기자의 차이나 로드] 中 새 파워집단 IT제왕들 억만금으로 天下를 쥘까

    중국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그룹의 창업자인 마윈(馬雲) 이사장과 차이충신(蔡崇信) 부회장이 무려 30억 달러(약 3조 675억원) 규모의 공익 기금을 쾌척했다. 지난해 미국 최고 기부왕에 오른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의 기부액(9억 9220억 달러)보다 3배 이상 많은 거액이다. 마 이사장과 차이 부회장은 지난달 25일 중국 환경오염 퇴치와 보건의료, 교육문화 부문을 개선하는 데 쓰도록 알리바바 주식의 2%에 해당하는 스톡옵션을 내놓았다고 관영 통신사인 중국신문사가 보도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알리바바의 기업 가치가 최소한 1500억 달러(약 153조원)로 추정되는 만큼 기금 규모는 30억 달러 정도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마 이사장은 2012년에도 공익기금회를 설립, 5000만 위안(약 82억원)을 직접 출연하는 등 환경보호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알리바바는 지난 6일 뉴욕 증시에 상장하기 위해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 중국의 정보기술(IT) 기업가들이 새로운 권력 집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이 IT산업 ‘하청국’에서 ‘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이들은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국내 정치에 영향력을 미칠 뿐 아니라 세계 무대를 향해 무한 질주를 하고 있다는 게 영국 가디언 등 서방 언론들의 분석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인터넷 및 게임 서비스업체 텅쉰(騰訊·Tencent)지주의 마화텅(馬化騰) 회장과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의 리옌훙(李彦宏) 회장, 마윈 이사장, 포털 왕이(網易·Netease) 공사의 딩레이(丁磊) 최고경영자(CEO), 스마트폰업체 샤오미(小米)의 레이쥔(雷軍) 회장, 포털 시나닷컴의 차오궈웨이(曹國偉) 회장 등이다. ●알리바바 마윈 30억 달러 공익 기금 쾌척 마화텅 회장은 미 포천이 최근 선정한 ‘중국 산업계의 영향력 있는 기업인 50명’ 중 1위에 올랐다. 포천은 텅쉰이 지난해 시가총액 1000억 달러를 돌파해 구글과 아마존에 이어 세계 3위 인터넷기업으로 부상한 점을 선정 이유로 꼽았다. 중국판 카카오톡인 웨이신(微信·Wechat)의 세계화와 춘제(春節·설) 연휴 기간 웨이신 ‘훙바오’(紅包·세뱃돈) 상품 대성공 등도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1998년 광둥(廣東)성 선전(深?)대 컴퓨터학과 동문인 장즈둥(張志東)과 함께 텅쉰을 창업한 그는 중국 네티즌의 97%가 사용한다는 PC 채팅 서비스 ‘QQ메신저’ 덕분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미 포브스는 마 회장의 재산이 134억 달러(13조 7015억원)로 중국 본토 부자 2위에 올랐다고 지난 3월 보도했다. ‘하이구이(海歸·해외 귀국)파’인 리옌훙 바이두 회장은 1991년 미 유학길에 올라 뉴욕주립대에서 컴퓨터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졸업 후 WSJ의 금융정보시스템을 설계하고 인터넷기업인 인포시크에서 일하는 등 일찌감치 검색엔진 분야에서 우수한 엔지니어로 두각을 나타냈다. 1999년 말 바이두를 창업해 세계적인 IT기업으로 일궈 냈다. 바이두는 2005년 미 나스닥에 상장했으며 중국 검색 사이트 점유율 80%를 넘어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英 가디언 “재력 바탕 세계 무대 질주” 모든 것을 파는 곳을 뜻하는 ‘에브리싱 스토어’는 미 아마존닷컴의 제프 베저스 CEO가 구상했지만 알리바바의 마윈 이사장이 먼저 구축했다. 알리바바의 판매자는 중국인이 대부분이지만 온라인 교역량이 많아지면서 전 세계 수출업자들의 이용이 늘어나고 있다. 알리바바그룹 측은 중국의 전자상거래가 2016년 미국과 유럽연합(EU)을 합친 것보다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지난해 알리바바의 영업이익은 31억 달러로 같은 기간 아마존 영업이익(6400만 달러)의 5배 가까이나 된다. 이 때문에 지난해 차등 의결권 문제로 알리바바의 홍콩 증시 상장 협상이 결렬되자 미 뉴욕 증시와 나스닥, 영국 런던 증시 등 세계 주요 증시들이 알리바바를 상장시키기 위해 ‘007작전’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한 유치전을 펼쳤다. 딩레이 CEO는 철밥통 공무원에 안주하지 못하고 두 번의 이직 끝에 1997년 왕이닷컴을 창업했다. 회사는 무료 이메일로 단번에 성공을 거뒀다. 곧이어 중국의 첫 포털사이트를 개설하면서 일약 IT업계의 황제 반열에 뛰어오른다. 2000년 미 나스닥에 상장하며 승승장구했지만 IT업계의 불황으로 넷이즈(Netease)의 주가는 한때 1달러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등 최악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흑자로 반전돼 주가 역시 회복세로 돌아서며 나스닥 최고의 우량주로 부상했다. 왕이닷컴은 이후 게임사업, 모바일 등 인터넷의 변화와 더불어 변신을 거듭하며 사업을 키워 왔다. ●알리바바 환경문제 등 사회 현안 개입 ‘좁쌀’이라는 뜻을 가진 샤오미의 레이쥔 회장은 2010년 갤럭시와 아이폰이 장악하고 있는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 도전장을 던지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샤오미의 성장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지난해 스마트폰 1870만대를 팔았다. 2012년보다 무려 160% 증가한 수치다. 지난해 3분기에는 중국에서 510만대를 팔아 380만대에 그친 애플을 2개 분기 연속 앞섰다. 레이 회장은 연초 “올해 스마트폰 판매량을 4000만대로 두배 늘릴 계획”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설립된 지 4년 된 샤오미의 기업 가치가 100억 달러(약 10조 2120억원)로 평가되는 이유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알리바바 등과 같이 5억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고객이나 회원을 거느린 인터넷업체가 환경문제 등 사회적 현안에 개입함으로써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처럼 IT 주요 기업가들이 새로운 권력 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관측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에릭 슈밋 구글 회장이 “(시나웨이보의 영향력은) 중국의 점진적 민주화에 주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데서도 읽힌다. khkim@seoul.co.kr
  • [김규환 선임기자의 차이나 로드] 中 새 파워집단 IT제왕들, 억만금으로 天下를 쥘까

    [김규환 선임기자의 차이나 로드] 中 새 파워집단 IT제왕들, 억만금으로 天下를 쥘까

    중국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그룹의 창업자인 마윈(馬雲) 이사장과 차이충신(蔡崇信) 부회장이 무려 30억 달러(약 3조 675억원) 규모의 공익 기금을 쾌척했다. 지난해 미국 최고 기부왕에 오른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의 기부액(9억 9220억 달러)보다 3배 이상 많은 거액이다. 마 이사장과 차이 부회장은 지난달 25일 중국 환경오염 퇴치와 보건의료, 교육문화 부문을 개선하는 데 쓰도록 알리바바 주식의 2%에 해당하는 스톡옵션을 내놓았다고 관영 통신사인 중국신문사가 보도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알리바바의 기업 가치가 최소한 1500억 달러(약 153조원)로 추정되는 만큼 기금 규모는 30억 달러 정도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마 이사장은 2012년에도 공익기금회를 설립, 5000만 위안(약 82억원)을 직접 출연하는 등 환경보호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알리바바는 지난 6일 뉴욕 증시에 상장하기 위해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 중국의 정보기술(IT) 기업가들이 새로운 권력 집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이 IT산업 ‘하청국’에서 ‘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이들은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국내 정치에 영향력을 미칠 뿐 아니라 세계 무대를 향해 무한 질주를 하고 있다는 게 영국 가디언 등 서방 언론들의 분석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인터넷 및 게임 서비스업체 텅쉰(騰訊·Tencent)지주의 마화텅(馬化騰) 회장과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의 리옌훙(李彦宏) 회장, 마윈 이사장, 포털 왕이(網易·Netease) 공사의 딩레이(丁磊) 최고경영자(CEO), 스마트폰업체 샤오미(小米)의 레이쥔(雷軍) 회장, 포털 시나닷컴의 차오궈웨이(曹國偉) 회장 등이다. ●알리바바 마윈 30억 달러 공익 기금 쾌척 마화텅 회장은 미 포천이 최근 선정한 ‘중국 산업계의 영향력 있는 기업인 50명’ 중 1위에 올랐다. 포천은 텅쉰이 지난해 시가총액 1000억 달러를 돌파해 구글과 아마존에 이어 세계 3위 인터넷기업으로 부상한 점을 선정 이유로 꼽았다. 중국판 카카오톡인 웨이신(微信·Wechat)의 세계화와 춘제(春節·설) 연휴 기간 웨이신 ‘훙바오’(紅包·세뱃돈) 상품 대성공 등도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1998년 광둥(廣東)성 선전대 컴퓨터학과 동문인 장즈둥(張志東)과 함께 텅쉰을 창업한 그는 중국 네티즌의 97%가 사용한다는 PC 채팅 서비스 ‘QQ메신저’ 덕분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미 포브스는 마 회장의 재산이 134억 달러(13조 7015억원)로 중국 본토 부자 2위에 올랐다고 지난 3월 보도했다. ‘하이구이(海歸·해외 귀국)파’인 리옌훙 바이두 회장은 1991년 미 유학길에 올라 뉴욕주립대에서 컴퓨터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졸업 후 WSJ의 금융정보시스템을 설계하고 인터넷기업인 인포시크에서 일하는 등 일찌감치 검색엔진 분야에서 우수한 엔지니어로 두각을 나타냈다. 1999년 말 바이두를 창업해 세계적인 IT기업으로 일궈 냈다. 바이두는 2005년 미 나스닥에 상장했으며 중국 검색 사이트 점유율 80%를 넘어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英 가디언 “재력 바탕 세계 무대 질주” 모든 것을 파는 곳을 뜻하는 ‘에브리싱 스토어’는 미 아마존닷컴의 제프 베저스 CEO가 구상했지만 알리바바의 마윈 이사장이 먼저 구축했다. 알리바바의 판매자는 중국인이 대부분이지만 온라인 교역량이 많아지면서 전 세계 수출업자들의 이용이 늘어나고 있다. 알리바바그룹 측은 중국의 전자상거래가 2016년 미국과 유럽연합(EU)을 합친 것보다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지난해 알리바바의 영업이익은 31억 달러로 같은 기간 아마존 영업이익(6400만 달러)의 5배 가까이나 된다. 이 때문에 지난해 차등 의결권 문제로 알리바바의 홍콩 증시 상장 협상이 결렬되자 미 뉴욕 증시와 나스닥, 영국 런던 증시 등 세계 주요 증시들이 알리바바를 상장시키기 위해 ‘007작전’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한 유치전을 펼쳤다. 딩레이 CEO는 철밥통 공무원에 안주하지 못하고 두 번의 이직 끝에 1997년 왕이닷컴을 창업했다. 회사는 무료 이메일로 단번에 성공을 거뒀다. 곧이어 중국의 첫 포털사이트를 개설하면서 일약 IT업계의 황제 반열에 뛰어오른다. 2000년 미 나스닥에 상장하며 승승장구했지만 IT업계의 불황으로 넷이즈(Netease)의 주가는 한때 1달러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등 최악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흑자로 반전돼 주가 역시 회복세로 돌아서며 나스닥 최고의 우량주로 부상했다. 왕이닷컴은 이후 게임사업, 모바일 등 인터넷의 변화와 더불어 변신을 거듭하며 사업을 키워 왔다. ●알리바바 환경문제 등 사회 현안 개입 ‘좁쌀’이라는 뜻을 가진 샤오미의 레이쥔 회장은 2010년 갤럭시와 아이폰이 장악하고 있는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 도전장을 던지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샤오미의 성장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지난해 스마트폰 1870만대를 팔았다. 2012년보다 무려 160% 증가한 수치다. 지난해 3분기에는 중국에서 510만대를 팔아 380만대에 그친 애플을 2개 분기 연속 앞섰다. 레이 회장은 연초 “올해 스마트폰 판매량을 4000만대로 두배 늘릴 계획”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설립된 지 4년 된 샤오미의 기업 가치가 100억 달러(약 10조 2120억원)로 평가되는 이유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알리바바 등과 같이 5억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고객이나 회원을 거느린 인터넷업체가 환경문제 등 사회적 현안에 개입함으로써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처럼 IT 주요 기업가들이 새로운 권력 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관측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에릭 슈밋 구글 회장이 “(시나웨이보의 영향력은) 중국의 점진적 민주화에 주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데서도 읽힌다. khkim@seoul.co.kr
  • 차별…괴물 키웠다

    나이지리아의 테러조직 보코하람이 전 세계 공공의 적으로 떠올랐다. 하룻밤 새 여학생 276명을 납치하는가 하면 올해에만 민간인 1500여명을 학살했다.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서구식 교육에 반발하며 2002년에 설립된 대학생 운동단체는 어떻게 ‘괴물’이 됐을까? 뉴욕타임스(NYT)와 CNN은 8일(현지시간) 보코하람의 성장 과정을 분석했다. ‘서구식 교육은 죄악’이라는 뜻의 보코하람이 태동하게 된 배경에는 나이지리아 정부의 차별이 자리 잡고 있다. 석유 부국 나이지리아의 집권층은 영국에서 유학한 소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다국적 석유기업과 결탁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도 북동부를 노골적으로 억압했다. 보코하람은 북동부 보르누에서 이런 모순에 대항하기 위해 생겨났고, 비폭력 운동으로 주민들에게 지지를 받는 정치세력으로 자랐다. 아프리카 연구단체 ‘로열 아프리카 소사이어티’의 리처드 다우든은 CNN에 기고한 글에서 “굿럭 조너선 대통령의 북동부 차별·포기 정책이 화를 키웠다”고 밝혔다. 그는 “서방이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려하지 않고 군사 개입에만 나선다면 보코하람은 미국 등을 겨냥한 테러에 나설 것”이라고 우려했다. 보코하람이 광적인 살인 집단으로 바뀐 것은 2009년이다. 당시 나이지리아 경찰은 보코하람 창립자 무함마드 유수프를 공개처형했고, 지지자 700여명을 살해했다. 알카에다는 “형제적 동정심을 느낀다”며 보코하람을 받아들였다. 보코하람 잔존 세력은 알카에다의 지원으로 소말리아와 알제리 등에서 훈련을 받았고, 새 리더 아부바카르 셰카우를 따라 귀국했다. 셰카우는 조직을 일종의 광신도 단체로 변질시켰다. 전통적인 테러가 주목을 끌지 못하자 여학생 납치 및 인신매매라는 새로운 방식을 택했다. 보코하람 연구자인 캘리포니아대학의 파울 루벡 교수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보코하람은 알카에다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잔인하다”면서 “오사마 빈라덴 사망 이후 구심점을 잃은 알카에다의 영향력이 더 이상 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알카에다의 도전세력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알카에다의 약화가 역설적으로 더 잔인한 테러 집단을 키운 셈이다. 알카에다는 그동안 이념을 같이하는 조직들에 지역·거점별로 독자적 운영권을 주는 ‘프랜차이즈식 관리’를 해왔다. 그러나 빈라덴의 정통성을 이어온 ‘본가’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보코하람과 같은 돌출 조직이 득세하고 있다.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는 알카에다와 결별을 선언한 채 시리아에서 ‘반군 속의 반군’으로 커가고 있다. 우간다의 ‘신의 저항군(LRA)’도 보코하람처럼 맹목적인 테러 조직으로 변하고 있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해외 홍보·마케팅 외국인들이 뛴다

    외국인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대학 홍보대사는 물론 통상모니터에도 외국인을 위촉하고 있다. 대구대는 중국인 유학생인 우스스(20·여)를 학교 홍보대사로 선임했다고 8일 밝혔다. 대구대가 1998년부터 홍보대사를 선발하면서 외국인 학생을 뽑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우스스는 중국 장쑤(江蘇)성 출신으로 2011년 유학을 와 무역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고교 입시설명회, 블로그 및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홍보, 국제 학생 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대구대를 국내외에 알린다. 대구시도 지역 중소기업의 해외 마케팅을 지원하기 위해 외국인 유학생 16명을 통상모니터로 위촉했다. 국가별로는 중국이 5명으로 가장 많고 몽골 2명, 베트남 2명, 일본·영국·러시아·파키스탄·캄보디아·콩고·가봉 1명씩이다. 이들은 지역 중소기업의 해외 마케팅 활동에 통·번역과 바이어 업무를 지원한다. 특히 방학 중에는 중소기업에 직접 나가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활동하게 된다. 시 관계자는 “유학생들을 통상모니터로 위촉함에 따라 해외 마케팅 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서울 외국인주민 40만 시대 ‘코리안드림’ 돕는다

    서울 외국인주민 40만 시대 ‘코리안드림’ 돕는다

    서울시가 외국인 주민 40만명 시대를 맞아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인권 보호를 위해 지난 2월 외국인주민인권팀을 신설한 데 이어 오는 20일 세계인의 날을 앞두고 외국인 주민 정책 5개년 기본계획인 ‘다(多)가치 서울 마스터플랜’을 8일 발표했다. 시는 인권 등 사각지대를 발굴할 수 있는 지원망을 구축하고 자립 역량 강화정책을 통해 코리안드림을 실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마스터플랜은 ▲인권 가치 확산 ▲문화 다양성 ▲성장의 공유 ▲역량 강화의 4대 목표 아래 14대 정책과제와 하위 100개 단위사업을 마련했다. 5년간 민간에서 200억여원 유치를 전제로 모두 770억원을 투입한다. 지난해 현재 서울 거주 외국인 주민은 모두 39만 5640명. 이는 서울 거주 인구 1019만 5318명의 3.9%로 25명 중 1명은 외국인 주민인 셈이다. 앞서 시는 여성가족정책실에 외국인주민인권팀을 만들어 외국인 공무원 2명을 배치했다. 실직·가정불화로 당장 머물 곳이 없는 외국인 주민을 위한 쉼터를 동남·동북·서남·서북권 등 4개 권역별로 1곳씩 운영하고 중장기적으로 시립외국인주민쉼터를 만들기로 했다. 공공기관과 병원에서 의사소통을 도울 서울통신원과 법 지식을 알려 줄 사법통번역사도 양성한다. 외국인이 정책입안 및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하도록 외국인 주민 대표자회의도 신설한다. 근로자·유학생·결혼 이민자·중국 동포 등 대상별로 자립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도 시행한다. 9월에 외국인 주민 취업박람회를 열어 일자리를 제공한다. 직장과 창업 점포를 찾아가 한국어 교육과 현장 컨설팅을 해 주고 외국인 창업대전을 열어 입상팀에 사무실 입주 기회도 준다. 내년부터는 직장 내 차별 대우와 임금 체납에 대한 소송을 전담 지원할 외국인 근로자 법률 지원관 제도를 운영한다. 외국인 유학생 종합상담지원센터도 설치한다. 외국인 주민의 57%에 달하는 중국 동포는 한중 교류 전문가로 양성하고 밀집 지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대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2018년에는 경제 사정이 어려운 비(非)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자국 문화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통합국제문화원’을 세울 계획이다. 외국인 종합지원시설인 서울글로벌센터도 현재 1곳에서 2곳으로 늘린다. 새 센터는 오는 7월 영등포구 대림동에 문을 연다. 조현옥 여성가족정책실장은 “아메리칸드림을 위해 맨주먹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부모 세대의 입장으로 외국인을 돕기 위한 마스터플랜을 마련했다”며 “더불어 잘사는 선진 다문화 도시 서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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