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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지은 뒤이을 아마 기대주 고교생 강지민

    US여자오픈대회 첫날 2언더파 70타를 쳐 세계적인 선수들을 제치고 상위권문턱까지 오른 강지민(19·시애틀킹스하이스쿨)은 사상 첫 아마추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지은의 뒤를 이을 기대주로 주목받는 미국 골프 유학생. 지난해 인터내셔널오렌지볼선수권,AJGA(미국 주니어골프협회)핑 피닉스선수권 등 5개 주니어 대회를 석권해 AJGA 랭킹 1위에 올랐다.오는 6월 고교 졸업 예정으로 지난달 18일 이번 대회 워싱턴주 예선을 거쳐 출전권을 얻었다. 서울 신동중학교 2학년이던 13살때 골프연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강주복씨(46)의 권유로 골프를 배우기 시작해 이듬해 한국 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뛰어난 재능을 엿보였다.95년 체계적인 수업을 위해 가족과 떨어져 골프명문킹스하이스쿨에 입학했고 최근 듀크대학 등으로부터 골프 장학생 제안을 받고 있다. 오는 12월 대한골프협회 초청으로 4년만에 귀국할 예정이다. 김경운기자
  • 박세리 4위 ‘회심의 샷’…US오픈, 첫날 출발 산뜻

    ‘박세리가 달라졌다’-.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US오픈 2연패를 노리는 박세리가 첫날 안정된 퍼팅 감각을 선보여 우승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박세리는 4일 미시시피 웨스트포인트의 올드웨이벌리골프장(파 72)에서 열린 대회 1라운드에서 버디 5개 보기 1개로 4언더파 68타를 기록했다.박세리는 8언더파 64타로 선두에 나선 미국의 켈리 퀴니에 불과 4타 뒤진 채 도티페퍼,셰리 스테인하우어와 함께 공동4위에 올랐다.올시즌 부진을 거듭하던박세리는 이날 예리한 아이언 샷을 바탕으로 6m짜리 버디퍼팅을 낚는 등 모처럼 특유의 집중력을 뽐냈다. 박세리는 2번홀에서 가볍게 첫 버디를 잡은 뒤 3번홀(파3)에서 6m 버디 퍼팅을 성공시켰고 6번홀에서도 버디를 보태 전반 3언더파로 순항했다. 11번홀(파4)에서 드라이버 샷이 흔들려 끝내 보기를 범했으나 14·17번홀에서 다시 버디를 추가했다.박세리는 4일 밤 10시50분 2라운드 티 오프를 했다. 박세리와 같은 조로 나서 눈길을 끈 미국 아마추어 최강 박지은도 15·16·17번홀 3연속 버디 등에 힘입어 2언더파 70타로 공동16위에 랭크돼 상위권진입의 여지를 남겼다.또 미국 주니어 상위랭커인 유학생 강지민도 박지은과 나란히 2언더파를 치며 선전,아마추어로서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이밖에 강수연은 1오버파 73타로 공동64위,펄신은 2오버파 74타로 공동83위로 다소 부진했고 장정과 조효정은 각각 4오버파,7오버파로 100위권 밖으로밀려 예선탈락 위기에 놓였다. 한편 지난주 코닝클래식에서 프로데뷔 2년만에 첫승을 따낸 퀴니는 이날 대회 한 라운드 최다 언더파와 동타를 이뤘다.시즌 3승에 도전하는 줄리 잉스터는 7언더파 65타로 모라 던을 1타차로 제치고 단독2위에 나섰고 캐리 웹(호주)은 2언더파로 공동15위에 머물렀다. 김경운기자 kkwoon@
  • 金대통령 순방외교 분야별 성과…문예·청소년 교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러시아·몽골 방문은 양국간 문화·학술·청소년교류에서도 적지않은 성과를 거뒀다. 우리측은 김대통령의 러시아 방문기간 동안 러시아인의 문화적 자긍심을 다시금 확인했다.러시아인들도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독특성을 실감했다.양국의 정치·경제 교류는 문화 교류를 통한 상호이해 토대 위에서만 차원높게승화될 것이라는 교감도 나눴다. 김대통령은 대한매일이 추진하는 올 가을 한국 최초의 ‘볼쇼이발레 전(全)단원 서울 공연’소식을 옐친 대통령에게 전했다.옐친 대통령은 한국국민들의 문화적 소양,문화협력의사를 높이 평가했다.양국의 수뇌는 정상회담에서볼쇼이 전단원 서울 공연과 관련,‘한·러 문화 교류의 괄목할 만한 발전’‘한·러 문화 교류의 일대사건’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또 양국의 청년들이 21세기 한·러관계를 짊어질 사람들이기에1,000여명 남짓한 우리 유학생들을 “잘 부탁한다”고 옐친 대통령에게 각별히 요청했다. 실제로 김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기간중 펼쳐진 10여건의 문화 이벤트는양국 국민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한·러 청소년오케스트라 모스크바 공연을 시작으로 특히 손숙(孫淑)환경부장관의 ‘어머니’ 공연은 많은 러시아 관객을 눈물바다로 이끌었다.우리 드라마 ‘모래시계’가 러시아 TV를 통해 방영됐고 춘향전과 심청전이 공연돼 러시아인들의 문화적 호기심을자극했다. 전문가들은 볼쇼이 전단원 서울 공연 등 문화 교류에 대한 한국의 관심이러시아인들의 문화협력욕구를 자극,결국 러시아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크게제고시키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유민기자
  • US오픈 내일 티오프

    미국 여자 프로골프의 올 시즌 두번째 메이저대회인 제54회 US여자오픈이 3일 밤 미시시피주 웨스트포인트의 올드웨이벌리골프장(파72)에서 개막돼 4일동안 열전에 들어간다. 총상금 150만 달러가 걸린 이번 대회에는 지난해 우승자인 박세리와 아마추어 톱랭커 박지은,재미교포 펄신 등 역대 가장 많은 8명의 한국 선수들이 출전,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기량을 겨룬다.지역 예선을 거쳐 출전권을 얻은 선수는 국가대표 출신 강수연과 장정,골프유학생 강지민과 조효정,제니 박 5명. 모두 150명이 출전하는 이번 대회는 4라운드 72홀 스트로크 플레이로 펼쳐지며 2라운드를 마친 뒤 추려낸 상위 60명이 3∼4라운드 결선 라운드를 치른다.4라운드에서 공동 선두가 나오면 서든데스 방식의 플레이오프 대신 다음날 18홀의 연장 라운드를 펼치는 점이 특징. 이번 대회를 대비해 최근 2주일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한 박세리는 4일 새벽 3시 박지은,지난해 브리티시여자오픈 우승자 셰리 스테인하우어와 ‘챔피언조’로서 첫 라운드를 펼치게 돼 뜨거운 관심을 모은다.또절정의 기량을뽐내는 호주의 캐리 웹이 첫 메이저대회 우승을 이룰지도 주목된다. 김경운기자 kkwoon@- 박세리, 맥스플라이사와 계약 한편 박세리는 세계적인 골프용품업체인 맥스플라이사와 3년간 매년 10만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용품계약을 맺었다.박세리는 계약기간 동안 볼과 장갑을 사용한다.박세리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고 있는 IMG사는 1일 박세리가 지난해부터 맥스플라이 공을 애용한데다 맥스플라이사가 계약에 적극성을 보여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 ‘DJ 책’ 모스크바서 인기

    모스크바 유민특파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앞두고 김대통령에 대한 러시아어판 책들이 러시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하나는 김병국 교수(고려대)가 쓴 ‘한국 대통령 김대중-행정가,정치가,학자’(모스크바공화국출판사)란 책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출판사에서 낸 김 대통령 자서전인 ‘새로운 시대’란 책이다. 두 권의 책은 모스크바 대학가 학생들이 최근 들어 부쩍 많이 찾고 있다는것이 이곳 대학가 서점 관계자의 얘기.모스크바대학 구내 서점의 20대 종업원인 타치아나란씨는 “일부 학생과 교수들의 요구로 어렵게 10여권을 구해놓았으나 모두 팔렸다”면서 “절품이 돼 더 이상 진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서점 관계자들은 김 대통령이 모스크바대학을 방문,학생들과 대화를 갖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각국의 유학생들도 이 책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의 ‘한국 대통령 김대중’이란 책은 그의 영문판 서적을 예브게니바자노프 러시아 외교아카데미부원장이 번역한 것이다.‘새로운 시대’란 책은 김 대통령이 직접 써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인 1996년 미국에서 영문판으로 발행된 것을 역시 바자노프 박사가 번역한 것이다.
  • 박지은 아마 그랜드슬램…美 4대 메이저 석권

    재미 유학생 골퍼 박지은(20)이 전미대학체육협회(NCAA) 여자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최초로 아마추어 그랜드 슬램을 이룩했다. 박지은은 23일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골프장(파 71)에서 벌어진 NCAA여자골프선수권대회 4라운드가 폭풍우로 경기도중 취소됨에 따라 3라운드까지의성적으로 우승이 확정됐다.박지은은 3라운드까지 1언더파 212타로 듀크대의캔디 하이네만을 1타차로 제치고 선두를 지켰다. 이로써 박지은은 지난해 US여자아마추어선수권,우먼스트랜스내셔널아마추어선수권,우먼스웨스턴아마추어선수권을 포함,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주니어 시절부터 미국 톱랭커의 자리를 지킨 박지은은 이로써 프로 전향의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아마추어 4대 메이저 석권의 목표를 달성했다.박지은은 새달 초 열리는 US여자오픈에 전년도 아마추어선수권 우승자의 자격으로출전한 뒤 프로전향을 공식 선언할 예정이다. 이미 몇몇 스포츠 매니지먼트 업체로부터 1,000만달러 수익을 보장하는 전속계약을 제의은 박지은은 이번 대회 우승으로 프로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수 있음을 확인시키며 몸값을 최소 200만∼300만달러 높인 것으로 분석되고있다.
  • 박지은 ‘그랜드슬램’ 눈앞

    - NCAA여자골프 이틀째 선두, 우승땐 아마4대메이저 석권 재미유학생 박지은(20·애리조나주립대)이 전미대학체육협회(NCAA) 골프선수권대회에서 이틀째 선두를 유지,아마추어 ‘그랜드슬램’달성 초읽기에 들어갔다. 박지은은 21일 오클라호마주 툴사의 툴사골프장(파 71)에서 벌어진 99NCAA여자골프선수권 2라운드에서 버디 2개와 보기 4개로 2오버파 73타를 쳐 중간합계 이븐파 142타를 기록했다. 이로써 박지은은 이날 1언더파 70타를 쳐 합계 2오버파 144타가 된 텍사스대의 랜디 메도스에 2타 앞서 선두를 지켰다. 박지은이 이 대회에서 우승할 경우 아마추어 4대 메이저타이틀을 모두 차지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박지은은 지난해 US여자아마추어선수권,우먼스트랜스내셔널선수권,웨스턴아마추어선수권 등 3개 메이저대회를 석권했으나 이 대회에서만 정상을 밟지못했었다. 곽영완기자 kwyoung@
  • 美주니어골프 랭킹 1위 강지민 US여자오픈 출전

    미국 골프유학생 강지민(19·시애틀 킹스고 2년)이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US여자오픈대회 출전권을 따냈다. 강지민은 18일 워싱턴주 에버리트골프장에서 열린 US여자오픈 예선전에서 5오버파 77타로 프로 선수인 폴라 패터슨과 함께 예선을 통과했다.강지민은지난해 12월 인터내셔널오렌지볼챔피언십 우승 등으로 미국 주니어골프협회(AJGA) 랭킹 1위에 올라있는 유망주다.이로써 다음달 4일 미시시피주 웨스트포인트에서 막이 오르는 US여자오픈대회에는 강지민을 비롯,박세리 펄신 박지은 장정 강수연 조효정 등 7명의 참가가 우선 확정됐다. 김경운기자
  • 자영업자 340만명 재산-국세청서 개인별로 관리

    국세청은 자영사업자의 소득파악 수준을 현실화하기 위해 자영사업자 340만명의 재산상황을 인별관리키로 했다. 국민연금 도시지역 확대와 관련,자영사업자와 직장근로자 사이의 과세형평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한 조치이다. 또 정부부처별 과세관련 정보를 국세청에 의무적으로 통보토록 하는 내용의 특별법 제정도 추진한다. 국세청 관계자는 7일 “이달중 종합소득세 확정신고대상인 130만명의 신고내용을 전산입력,8월중 국민연금관리공단에 통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과세미달로 소득세 신고대상이 아닌 자영사업자의 경우 수입신고내역을 기초로 재산내역을 국세통합전산망(TIS)을 통해 인별관리,보험료 부과에형평을 기하도록 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자영업자에 대한 소득파악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병무청의 해외유학생자료,대한변호사회의 변호사 사건수임내역 등 부처별로 갖고 있는 과세관련정보의 국세청 통보가 시급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노주석기자 joo@[-]
  • 병역면제 비리 100명 구속

    병역면제를 둘러싸고 돈을 주고 받은 부유층 사람들과 군의관 등 207명이검·경·군 합동수사부에 의해 적발됐다.병역비리사건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이다. 병무사범 합동수사부(본부장 明東星 서울지검 특수3부장·朴宣基 국방부 법무관리관)는 27일 95∼98년 사이 서울지역 병역비리 137건에 연루된 207명을 적발해 이 중 100명을 구속기소,80명을 불구속기소하고 27명을 수배했다고발표했다. 불법으로 병역을 면제받은 133명은 면제처분이 취소됨에 따라 재신검을 받고병역의무를 마쳐야 한다. 적발된 사범은 금품을 제공하며 병역면제를 청탁한 부모나 병역의무자 135명,알선자 56명,전·현직 군의관 16명 등이다. 최저 200만원에서 최고 8,000만원을 브로커 등에게 건네고 아들의 병역을 불법으로 면제받은 사람들은 고위 공직자,은행 및 기업체 임직원,의사,변호사 및 교수,유명 운동선수,연예인 등이 망라됐다. 불법으로 병역을 면제받은 사람들은 유학생 55건,대학생70건,운동선수 및 연예인 4건 등이다. 주식회사 신성 신영환(54·구속)회장은 병무청 직원들에게 4,000만원,(주)남양유업 홍원식(48·불구속)대표이사는 1,500만원을 주고 자식의 병역을 면제받았으며 김영욱(51·金勝猷 하나은행장 부인·불구속)씨는 1,000만원을건넸다. 프로야구 쌍방울 구단주대행 이용일(67·전 KBO 사무총장·구속)씨,가수이자 방송진행자인 김상희(56·본명 최순강·불구속)씨,가수 김원준(30)씨의아버지 김기영(58·서울구치소 의무서기관·불구속)씨도 아들의 병역면제를위해 돈을 건넸다가 적발됐다. 검찰과 군은 앞으로 서울지역으로 한정했던 병무비리 수사를 전국으로 확대,95년 이후의 모든 병역 면제 의혹을 조사하기로 했다. 박홍기기자 hkpark@
  • [발언대] ‘장애인석’ 경고 무시 정신장애인 많아

    어느 시인이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해마다 4월이면 왠지 마음이 무거워져 어서 빨리 한달이 지나가기를 바라게 된다.아마도 20일이 ‘장애인의 날’이기 때문이리라. 장애인 복지라는 생소한 업무를 맡은지도 벌써 3년째다.업무를 맡으면서 앞으로는 누구보다 장애인들의 입장에서 말하고 생각하리라 다짐했고 그들의조그만 소리라도 귀기울여 들으려는 자세로 일했다.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별반 한 일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럽다.아울러 그들을 만나 함께할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지고 착잡해지기만 하는 것 같아 서글프다. 언젠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한 유학생이 털어놓는 얘기를 들었다.그는 요즘 한국의 지하철과 버스에는 유독 ‘정신적 장애인’이 많은 것같다고 했다.‘장애인·노약자석’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붙어있음에도 대학생들이 노인을 앞에 세워두고 버젓이 앉아있음을 빗댄 것이다.그 유학생은이어 12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한 토막도 소개했다. 버스정류장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있는 것을 보고도 운전기사가그냥 지나치자 한 승객이 기사에게 항의했다.그러자 기사는 이미 10여분을 지나왔음에도 버스를 되돌려 장애인을 태운 뒤 운행을 계속했다.많은 시간이 지체됐지만 승객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우리나라에서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일반버스를 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서울시의 몇몇 구청에서 장애인 전용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것이 전부다. 장애인 업무를 맡으면서 새삼 느낀 바가 있다.공무원은 일반주민들에게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애인의 민원은 무엇보다 앞서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다.장애인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행정기관을 찾기란 아주 큰맘먹지 않고는 어렵기 때문에 공무원은 그들의 전부가 돼줘야 한다. 현재 장애인 복지와 관련된 시책이 40가지가 넘고 각종 편의시설도 앞다퉈설치되고 있다.하지만 장애인들이 아무 불편 없이 마음놓고 버스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까.20일은 19번째 맞는 ‘장애인의 날’이다.오늘 하루만이라도,아니 한시간만이라도 모두가 장애인의 어려움을이해하려 노력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이영미 동대문구 사회복지
  • [정직한 역사 되찾기](33)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

    일제강점기 친일파는 조선내는 물론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수립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나 일본 본토도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이들은 대개 군부나 행정기관 등 일제의 권력기관에서 일제통치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를 나와 고급장교로 활동한 친일 군인들이 이에 속하며 또 일본이나 만주국의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고급엘리트 관료로 활동한 자들을 들 수 있다.한 단계 낮은 직급에서는 밀정이나 행동대원 등 앞잡이로 활동한 자들을 거론할수 있겠다. 일본 본토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파로 박춘금(朴春琴·1891∼1973)을 들수 있다.그는 조선인으로서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두 번씩이나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그의 친일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극력 친일파 가운데 일제말기 일제가 임명한 귀족원 의원을 제외하면 일제통치 전 기간을 통해 일본 국회에 진출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박춘금은 여러 형태의 친일파 가운데서상당히 드문 유형에 속한다.친일파 가운데는 지식을 팔아 일제에 아부한 집단이 있는가하면,경제적 기반을 일제통치에 제공한 대가로 기득권을 보전하고 일제와 유착관계를 형성해온 부류도 있다.그러나 박춘금은 그도저도 없는 자였다.그는 오직 몸뚱이 하나로친일대열에서 성공한 자였다.그는 수하에 폭력조직을 거느린 소위 ‘정치깡패’ 집단의 우두머리였다.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하수인으로 폭력집단이 존재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식민지시절에도 이같은 집단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주먹으로 친일배의 정상에 오른 그의인생역정을 더듬어 보자. 박춘금은 1891년 경남 밀양 태생으로 본관도 밀양이다.부 박금득(朴今得)과 모 박차연(朴且連)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자세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년시절 그는 일본인 술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판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일본으로건너간 시기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하지가 않다.다만 그가 한 연설에서 토로한 말에 따르면,일본에 도착할 당시 수중에 가진 돈은 1원 49전뿐이었으며 당시 일본에는 관비유학생 50명인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했다. 1920년경 그가 이기동(李起東)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한 사실은 확인된다.이기동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 활동한 대표적인 재일 친일파다.상구회는 1921년말 ‘상애회(相愛會)’라는 사회사업단체로 개편되는데 23년 요코하마·나고야·오사카 등에 지부를 조직,조직을 확대하였다.그럴듯한 이름의 간판을 내건 이 ‘상애회’가 바로 박춘금 일당의 일본내 친일활동의 모태가 된다. 막노동판의 주먹패 박춘금이 일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23년 9월 1일 도쿄 인근 지역을 강타한 ‘관동(關東)대지진’이었다.수 십만 명의 인명피해는 물론 재산피해도 엄청났던 이 천재(天災)를 맞아 일제는 동요한 민심을 수습하고 조선인을탄압할 목적으로 당국의 개입하에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거나 방화를 일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여기에는 미즈노(水野鍊太郞) 당시 내무상의 조선인에 대한 개인감정이 개입됐다는 지적도 있다.미즈노는 1919년 9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따라 정무총감으로 조선에 부임하기 위해 서울역에 첫 발을 디뎠다가 강우규(姜宇奎)의사의폭탄세례를 받은 인물). 이에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관헌과 함께 조선인에 대한 무자비한 체포와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최소 6,000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바로 이때 박춘금은 상애회 회원 300여명을 동원,‘노동봉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인 희생자 시체처리와 복구작업을 자청하였다.이 무렵 박춘금 일당은이미 일제당국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상호 자연스레 교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계기로 박춘금은 일제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상애회 본부 사무실을 마련하는 등 입지를 넓혀갔다.28년 박춘금은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만들고는 이사장에 총독부 경무총감 출신의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영입했다.회장에는 이기동을 앉히고 자신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실권을 행사하였다.이 무렵 상애회는 일본내 주요도시에 지방본부를 설치하였고 회원수도 2만명을 헤아렸다.이듬해 29년 상애회관을 지어 사무실도 독립하였고 마루야마 취임 1주년때는 사이토를 기념식 행사장에 초청하는 등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세력가로 부상한 그는 상애회 조직을 바탕으로 정계진출을 추진하였다.32년 2월 실시된 제18회 총선때 그는 도쿄 5구(區)에 출마,처음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놀라운 것은 조선인 유권자가 1,236명뿐인 이곳에서 6,966표를 얻었다는 점이다.그의 열렬한 친일성이 일본인 유권자들을 설득시킨 점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정계 실력자들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거직후인 2월 23일자로 그가 사이토 전 조선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불초 이번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의 영관(榮冠)을 얻게 된 것은 모름지기 귀대(貴台,손위사람의 높임말)의 두터운 정과 성원을 입은 것이라 여기며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한데서 이같은 점을 엿볼 수 있다.이후 그는 한 차례 낙선했다가 40년 제20회 총선에서 재선하였으나 그의 정치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이후 그는 활동무대를 조선으로 옮겨 친일대열의 선봉장을자처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친일활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학도병 징집이 시작되자 그는 매일신보 주최 학병격려대연설회에 참석하여 “고이소(小磯)총독이 (조선)군사령관 시절 군사령부를 방문,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도인에 대한 병역의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밝히고는 “(학도병)4천이나 5천이 죽어 2천5백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고 외쳤다(매일신보 1943.11.19). 당시 일제가 학도병을 전선으로 내몬 것은 그 이면에는 조선의 미래의 지식분자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것이었다.그가 이같은 일제의 의도를 대변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는 그런 혐의를 둘만한 사건이 하나 있다. 8·15 해방을 불과 50일 앞둔 1945년 6월 25일.그는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친일파들을 동원,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그 자신이 당수에 취임하였다.당시 전세는 이미 기울어 일본은 패퇴를거듭하였고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이 임박한 시기였다.대의당은 바로 이 때‘최후결전’의 자세로 결성된 것이다. 대의당은 ‘강령’에서 “모든 비(非)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해서는 단연이를 분쇄한다”고 밝혔는데 여기서 ‘비결전적 사상’이란 ‘반전·반일’의 총칭이다.해방후 친일파들의 죄상을 조사,폭로한 ‘민족정기의 심판’에따르면 대의당은 항일·반전 조선민중 30만명을 학살하려 했던 ‘살인단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이는 당시 총독부 경무국이 세운 ‘요시찰인에 대한조치계획’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해방후 그는 살길을 찾기 위해 수하를 시켜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돈봉투를보내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이 때문에 그는 반민특위의 체포,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특위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를 송환하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모두 3번 결혼했는데 첫째,둘째 부인은일본여자였고 66년 75세때 세번째로 결혼한 여자는 당시 60세의 한국여자(82년 사망)였다.두번째 일본인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장남 박춘남(朴春男·89년 일본에서 사망)은일본 릿교(立敎)대학 3학년 재학중 자진하여 학도병에 출진했었다. 일제당시 일본에서 박춘금과 교류한 적이 있다는 한 일본군 장교출신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은 마약중독으로 거의 폐인이돼버렸다고 한다.73년 3월 31일 박춘금은 일본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사망,현지에 묻혔다.친일 반민족자 박춘금의 일생은 그제서야 막을 내렸다.죽어서도 그는 고국보다 일본을 택한 것인가,아니면 죽어서도 고국으로 올 수가 없었던 탓일까. 정운현기자 jwh59@
  • [정직한 역사 되찾기](32)춘원 이광수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송욱(宋稶) 전 서울대 교수(80년 작고)는 생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 지식인의 역사적 현실’이란 글에서 춘원 이광수의 편린 하나를 남긴 바 있다.문학소년이던 중학생 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당대의 대문호이자 우상이었던 춘원 이광수를 만나볼 요량으로 춘원의 부인(허영숙)이 경영하던 산부인과병원으로 찾아갔다.간호사의 안내로 병원의 긴복도를 지나 온돌방에 다다르자 춘원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황송해하며 춘원에게 큰 절을 올리고 일어설 무렵 라디오에서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그러자 춘원이 “이 방송은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에서 올리는 ○○제(祭)의 실황 중계방송이죠”라며 자못 경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춘원은 일본군국주의 종교의식에 방송을 통해서 참가하고 있는 것이었다.의외의 장면을 목도하고 춘원에 대해 실망을 느낀 두 사람은 이내 그와 작별하였다.두 사람의 등 뒤에 대고 춘원은 “이제부터는 작품을 일어로도 쓸 수 있고 우리말로도 쓸 수 있어야죠”라고 권했다.이후로 그는 춘원의 글을 많이읽지 않았다고 적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창씨명 香山光郞).역사속에서 우리는 그를 어찌 볼 것인가?그의 당대에서부터 사후 반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려 왔다.문학적 업적을 강조한 ‘대문호’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민족반역자 ‘친일파’라는 평가도 있다. 지난 92년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유족·추종자들이 기념행사를 하면서작성한 한 자료에 의하면,그를 연구한 석·박사 학위논문이 40여편이나 됐다.그런데 그 논문의 주제는 전부 문학분야였다.그의 일제하 친일행적을 연구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이래놓고 그의 진면목을 탐구했다고 할 수는없다. 이처럼 그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생애 전반을 아우르기 보다는 문학분야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그에 대한 평가가 균형을 잃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춘원처럼 ‘시대의 인물’로 활동한 자는 그가 활동할 당시의 시대상황과 당시 민중들이 그를 어떤 인물로 인식했느냐 하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춘원이 문인인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2·8독립선언’의 작성자이자 샹하이 시절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만든 ‘민족지사’로서의 면모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춘원의 변절에 대해 민중들이 안타까와 하고 분노해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춘원을 문인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마치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을 군인,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을 스님으로만 평가하는 것과 다름 없다.춘원에대한 평가는 이래서 시각교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민족지사’의 거울에 비춰본 춘원은 어떤 모습인가.한마디로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진 모습이다.그의 일생을 통해 정신사를 관통하고 있는 ‘친일’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춘원은 1892년 평안남도 정주에서 과거에 실패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이종원(李種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아명은 보경(寶鏡).5세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고 8세 때 동양고전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총명한 그였지만 10세때 콜레라에 걸린 양친이 사망,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러던중 14세 때 천도교 유학생으로 일본 메이지(明治)학원에 입학하면서처음 신세계를 접하게 됐다.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한데다 별다른 학문적 기초나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제국주의라는 물결이 넘실대는 일본이라는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지게 됐다.그의 비극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주체의식을 키우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도일 초기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메이지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1909.12.15,제19호)에 일본어로 된 단편소설 ‘사랑인가’(원제 ‘愛か’)를 발표하였다.조선인 소년이 일본인 소년을 신격화하여 연모하는,일종의 동성애를 내용으로 하는 이 소설은 내용보다는 발표시점이 문제다.그가 이 소설을 탈고한 날짜(1909.11.18)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동양천지를 뒤흔드는 의거가 조선인 손에서 일어난 그 무렵 그는 하숙방에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191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무정(無情)’을 발표한 후 ‘전조선여성의 연인’ 소리를 듣던 그는 본처와 이혼한 후 허영숙(許英肅)과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으며 1919년 2월 도쿄 유학중 ‘2·8독립선언’을 작성,일약 민족지사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선언’을 자세히 뜯어보면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反)하여 오족(吾族)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오족에게 참정권,집회·결사의 자유,언론·출판의 자유를 불허하며…”라며 일제가 ‘합병’당시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문제삼고있는데 이는 강도가 한 약속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해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2년 남짓 활동하다가 애인 허영숙의권유로 ‘독립신문’ 편집을 그만두고 사랑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왔다.월탄박종화(朴鍾和)는 그의 ‘일기’에서 춘원의 귀순(歸順)은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허영숙이 설득한 결과이며 이 일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秦學文)은 홧김(?)에 일본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쓴 바 있다. 귀국(1921.3)도중 춘원은 선양(瀋陽)에서 체포돼서울로 호송됐으나 별다른 조사나 재판 없이 곧 석방되었고 두달 뒤 5월에는 허영숙과 결혼하였다.다시 9월에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면담하는 등 그는 그때부터 이미 당국의비호를 받고 있었다.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듬해 5월 그는 잡지 ‘개벽’에 일제의 반독립 논리를 민족논리로 위장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동아일보 입사는 그 이듬해 23년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월 300엔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보수를 받았다.24년 그는 동아일보에 다시 ‘민족적 경륜’이라는 대일 타협노선의 논설을 발표,어용적 민족개량·자치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위의 두 글에서 그는 조선이 쇠퇴한 이유는 민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며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약소국의 침략·지배를 정당화한 것을 배낀 것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1개월전인 37년 6월 그는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이 단체 역시 발족 당시부터 총독부와 사전협의하에 조직된 단체이고 보면 독립운동단체라고 할 것도 없다.경기도 경찰부장 지바(千葉)는 “민족본능인지하수(독립사상)가 지표(地表)로 분출했을 때는 극격히 막지말고,버려두지도 말고,자연의 유력(流力)을 이용해서 바다로 흘러가도록 ‘도랑을 설치’하라”고 하였다.친일파연구가 고 임종국(林鍾國)은 “이 ‘도랑’이 바로‘민족개조론’이요,수양동우회요,‘민족적 경륜’이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중일전쟁 이후 춘원은 전시협력을 위주로 보다 행동적인 친일대열에가담하게 된다.39년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 위문단(북지황군위문작가단)결성식의 사회를 맡은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이해 10월 결성된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에서 그는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 2월 11일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그는 그 다음날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모범적인(?) 창씨개명을 내놓으면서 일반인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그리고는 외쳤다.“…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매일신보’,1940.9.4) 심지어는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국대 김원모(金源模)교수는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친일을 했을 뿐,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변호하고 있는데 공감하기 힘들다. 해방직후 춘원은 향리에 칩거하며 ‘나의 고백’ ‘돌베개’ 등을 쓴 바 있다.그는 인조(仁祖)가 병자호란 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여인들을 홍제원(弘濟院)에서 목욕시킨 후 정조문제를 거론치 못하도록 한 예를 들어 친일파문제도 이처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수감돼 있던 그는 재산보전을 위해 허영숙과 위장이혼하는 교활함까지 드러냈다.일관된 친일과 타협으로 일제강점기를 산 춘원.그는 공사를 막론하고역사와 민족 앞에 단 한번도 진실한 적이 없다.
  • [오늘의 눈] IMF이미지 못벗은 한국

    외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은 아직도 IMF ‘한파’에 시달리고 있다.한국의 국가신용도가 ‘투자적격’으로 올라섰다고 하지만 막상 돈을 빌리려 하면현지에선 ‘투자부적격’ 등급을 적용받고 있다고 한다. 국내 경기의 회복조짐이 이들에게는 ‘다른 나라’의 먼 얘기로만 들린다. 경기가 나아지면 현지 금융기관의 예우가 좋아져야 하는데 IMF 이후 줄곧 후진국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에 진출한 국내 종합상사의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은 동구권국가만도 못하다”고 밝혔다.IMF 이전에는 리보(LIBOR·런던은행간 금리)에다 0.6∼1%포인트 정도의 가산금리를 적용했는데 지금은 3∼4%의 가산금리를 줘도 대출이 쉽지 않다고 한다. 국내에서 요란스럽게 떠드는 경기호전이나 외국인 투자자들의 잇단 방한도또다른 ‘거품’일지 모른다고 조심스러워 한다.외국인 투자자들의 방한이잇따르지만 실제 직접투자한 규모는 적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그러나 이들이 정작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인의 ‘위축된’ 모습이다.IMF 체제 이후 현지 기업인,교포유학생 등은 주위로부터 ‘부도난 나라’의 국민이라는 시선을 받고 있다.일본이나 중국 등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들은우리 거래처에 한국을 ‘회복불능의 나라’로 말한다고 한다. 영연방 스코트랜드나 독일 폴란드 등에서 한국인 관광 가이드는 자취를 감췄다.아르바이트를 겸하던 유학생들이 환율 인상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선진국 사교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한국인이 돈이 없어 쩔쩔매던 후진국 유학생의 전철을 밟고 있다. 요즘 외국에서는 ‘코리아’하면 세가지를 떠올린다고 한다.한국전쟁과 88서울올림픽 그리고 IMF 지원국.그러나 아무래도 ‘고속질주하다 좌초한 한국’의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그럼에도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썩 좋지가 않다.재벌의 개혁의지가 후퇴할 조짐이 보인다는 외신도 타전되고 있다. 경기가 조금 나아졌다고 허리띠를 느슨하게 해서는 안팎으로 무너지기 십상이다.파리 한마리를 잡고 만족하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서도 안될 일이다.외국에 삶의 터전을 둔 교포와 기업인들은 지금 ‘코리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백문일 경제과학팀기자
  • [주한 외국대사에 듣는다] 갈바드라흐 몽골대사

    몽골 정부는 金大中 대통령의 몽골 방문을 공식 초청했으며 올해내 방문 실현을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로도이담바 갈바드라흐 주한 몽골 대사는 28일 대한매일과의 특별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히면서 몽골정부는 지난 2월 몽골대통령의 金대통령에 대한 공식방문 요청서를 전달했다고 밝혔다.몽골 정부는 한반도의 조속한 통일을 희망하고 있으며 金大中 정부의 포용정책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통일을 앞당기는 데 가장 현실적인 정책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대사는 강조했다. ▒한국과 몽골관계는 어떻습니까. 아시아국가와의 우호관계 강화는 몽골 외교의 중요한 축입니다.한국은 그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냉전으로 두 나라는 90년 3월에야 수교했지만 빠른 관계발전을 이뤄나가고 있습니다.양국은 중국,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다는 지정학적인 입장도 같습니다.경제 뿐아니라 정치외교적인 측면에서의 협력관계 발전 가능성도 큽니다.몽골은 한국과 모든 분야에서 관계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를 희망합니다.몽골 대통령은 지난 91년 한국을방문한 적이 있으며 올해 내에 金大中 대통령의 몽골 방문이 실현되기를바라며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 경제협력 관계의 현황과 전망은 어떻습니까. 양국의 무역관계는 90년에야 시작됐지만 이제 한국은 일본,러시아,중국에이어 미국과 함께 4번째 투자국이 됐습니다.무역액도 몽골 전체 무역액의 7% 선을 넘어선 상태입니다.투자액은 97년 11만6,000달러며 50만달러에 그쳤던 90년의 무역액도 지난해엔 5,170만달러를 기록,8년만에 100배 가량 성장했습니다. ▒몽골의 개혁·개방정책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평입니다. 최근의진전 상황은 어떻습니까. 90년부터 시작된 민주화개혁으로 몽골은 일당 독재,계획경제에서 다당제,시장경제 체제로 전환을 이룩했습니다.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급격한 개혁이 진행됐습니다.지난 96년 75년만에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한 집권 민주연합도 개혁을 가속화하는 전면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공무원 조직과 국영기업 개혁도 그중 하나입니다.옛 동구권 일부 국가들에선 정치개혁과 경제개혁 사이의 속도차이 균열이 목격되지만 몽골은 이두 개혁이 보조를 맞추며 균형있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경제방면의 개혁정책은 어떤 것이며 어떤 효과를 거두고 있읍니까. 외국기업의 투자와 편의를 위해 공업개발구를 설치하고 각종 법규와 경영제도를 국제적 규율과 관례에 맞추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자유로운과실송금 및 권리양도 등도 그 중 하나입니다.지난해 5월부터 모든 수입 관세를 없애고 몽골 전역을 무관세 지역으로 만들었습니다.중고자동차,술,담배 등 몇몇 품목만이 제외됐을 뿐입니다.몽골은 아직 개발이 불충분하지만 러시아와 중국이란 두 거대시장 사이에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습니다.한국기업의 몽골 투자 등 활발한 경제교류를 희망합니다.그러나 아직은 몇몇 중소기업의 진출단계에 불과합니다. ▒한국 기업이 어떤 부문에 투자를 하는 것이 유리하겠읍니까. 민영화 계획은 몽골 경제개혁의 중심입니다.은행과 금융기관의 외국인 투자도 권장하고 있습니다.풍부한 지하자원이 묻혀있는 광산분야의 투자는 유망한분야입니다.몽골은 한국 등 17개국과 투자보호협정을 체결한 상태입니다. ▒몽골은 러시아와 중국 등 강대국 틈에 끼어 있습니다. 어떤 외교정책을갖고 있습니까. 90년까지 몽골은 옛 소련의 위성국가였습니다.이제는 러시아와 중국이란 두 인접 강대국과의 균형관계 유지에 중점을 두고 있읍니다.최근 가까워지기시작한 미국과의 관계 긴밀화도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몽골과 한국은 문화적 유사점을 갖고 있습니다.문화교류 강화를 위한 계획은 어떠신지요. 내년 3월 두 나라 수교 10주년을 기념해 ‘몽골 문화축전의 달’로 정해 유물 및 미술품 전시와 민속박람회 등을 개최하려 합니다.내년 서울에서 몽골과 관련한 각종 문화행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현재 몽골의 일부 대학과고등학교에선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언어교육과 유학생교류가 활성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몽고의 정치 일정은 어떻습니까. 내년 6월 총선거를 실시,국회를 새로 구성합니다. 李錫遇 swlee@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30)

    ◆前한성은행장 韓相龍2,3년전 평소 알고 지내는 고서점에서 일제말기에 출간된‘창남수장(暢楠壽章)’이라는 문집 한 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문집 이름에 ‘수(壽)’자가 들어간 것은 흔히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일제 당시 환갑잔치에 문집까지 낼 정도라면 고관대작이나 후학이 많은 거유(巨儒) 정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문집 역시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첫 장을 넘겨 보니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축하 휘호가 나타나더니 뒤 이어 일본인 육군대장의 글씨와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閔丙奭)의 서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다시 축하시 모음란에는 당대의 명사들이자 유명한 친일파들이 대거 운집해있었다.황족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좌옹 윤치호(尹致昊)·후작 이항구(李恒九·李完用 아들)·중추원 참의 김사연(金思演)·은행가 민규식(閔奎植)등등.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위해 시를 보낼 정도였다면 그의 수준·성향도 짐작이 간다.알고 보니 문집의 주인공은 일제당시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1880∼?)이었다. 한때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던 한상룡은 1880년 규장각 부제학 출신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17세때 관립외국어학교 입학을 계기로 신학문에 눈뜬 그는 미국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으나 외숙 이윤용(李允用)의 주선으로 대신 사립 성성(成城)학교에 입학(1899년)하면서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이듬해 그는 한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장티프스로 학업을중단하고 1901년 귀국하였다.귀국후 그는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이 해 경부철도 기공식에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의영어통역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공직(평식원 총무과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총무 취임을 계기로 금융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이 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당국에 로비를 하여 당시 조선인 합방공로자에게 지급한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흡수,자본금을 300만원으로 10배나 증자하면서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3·1의거 당시 민중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이 무렵 그는 40여년 동안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본 재계의 거두로 군림해온 시부자와(澁澤榮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서는 이토(伊藤博文),경제에서는 시부자와,건설에서는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目賀田種太郞)를 ‘조선에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3대 은인’이라고 하면서,특히 시부자와에 대해서는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공전 절후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그는 시부자와의 좌우명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까지 했다.그가 대부분의 친일파들 처럼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실업계로 진출한 것은 시부자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매국에 가담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를 토대로 발전을 도모한 한성은행은 1923년 그가 두취(頭取,현 은행장)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관동대지진의 여파에 이어 영업부진·경영악화가 계속됐다.이듬해 총독부는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28년 마침내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의 한성은행인가,한성은행의 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한성은행에서 나고,자라고 그로써 거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한성은행을 잃게 되자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식민지 예속자본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한성은행 재직시절 금융계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조선내 각종 기업·회사 설립에 중개자로 참여하였는데 실권은 전혀 가지지 못한채 명목상의 감투만 여럿 쓰고 있었다.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처럼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다고 평가했다.금융계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의 경영권 양도와 뒤이어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되면서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한편 그의 친일이 겉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선 그는 조선에 업적(?)을 남긴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하였다. 첫 사업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의 동상을 제작,1929년 10월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이 해 12월에는 이토(伊藤博文)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기도 했다.33년 2월에는 평소 자신이 숭배해온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12월 장충단에서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또 35년 5월에는 ‘조선개화의 은인이자 일한합병의 공로자’인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총독부 청사내홀 우측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이듬해 2월 소위 ‘2·26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 전조선총독이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39년 4월 그의 동상을 총독부 청사내 홀 좌측에 건립하였다.이밖에도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정무총감 출신의 시모오카(下岡忠治) 등의 동상건립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업적 찬양에 열을 올렸다. 한편 한상룡이 군국주의 일제통치하에서 40여년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한성은행에서 물러난 후 그는 군부관련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조선내 각지를 돌면서 강연·담화 등을 통해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였다. 또 33년 4월 경성국방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설립준비위원 및 감사(34.4),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34.12),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35.4)등을 맡아 활동하였다.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근무기간 37.7.1∼40.7.1)으로 임명돼 군사령부를 방문,조선실업구락부 및 자신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당시 그는 후방 전쟁지원단체인 경기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으로 있으면서 ‘애국금차회’ 창립을 주도,조선여성들에게 전쟁물자로 노리개 금붙이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일제의 인력·물자동원이 거세지자 그는 이 역시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였다. 특히 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라는 글에서 “반도에 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 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며 조선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7년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첫 임명된 이래 해방 때까지 그는 만18년 4개월동안 줄곧 중추원의 참의·고문을 지냈다.해방 1년전인 44년 4월 그는 윤치호·박중양(朴重陽·중추원 참의)·이진호(李軫鎬·총독부학무국장)·이기용(李琦鎔·황족·백작) 등과 함께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는데 마지막까지 일제에 협력한 결과이자 끝까지 일제에 끌려다닌 형상이라고도 할 수있겠다. 그는 한성은행 경영권 양도를 비롯해 일제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의도적 배제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변신과 일관된 친일노선으로 버텨냈다.한마디로 일제하 그의 생존논리는 철저한 예속과 굴종이었다.그를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해방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鄭雲鉉 jwh59@
  • [오늘의 눈] 형평 어긋난 투표권

    “23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투표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 각각 한번씩단 두번밖에 못했습니다” 외교통상부의 한 간부의 이야기다.선거가 있을 때마다 해외공관에 근무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공직선거법 38조1항은 국내 거주자만 투표에참여할 수 있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이같은 사정은 외교관 뿐 아니라 유학생과 상사원 등 해외에 체류중인 27만명 모두에게 똑같다. 이런 상황에서 헌법재판소는 지난 25일 유학생과 국책은행 해외 사무소직원이 낸 ‘공직선거법 38조1항에 대한 헌법소원’에 대해 ‘합헌’판결을 냈다.“해외거주국민에게도 부재자 투표를 실시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현행 선거기간과 비용을 고려할 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공정성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와는 정반대의 논리를 펼치며 해외거주국민에게도 부재자 투표를 실시하고 있다.“국가가 전기와 가스를 공급할 때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해서 산골에는 공급하지 않는가.공정성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돈이많이 들어가더라도 거주지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참정권을 줘야 한다”는 게 프랑스가 내세우는 논리다.프랑스는 모든 공관에서 해외거주 국민에대한 부재자투표를 실시하고 있다.선거 때면 관할 공관장과 본국에서 파견된 법관들이 해외 선거관리위원이 된다.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 여러차례 방식을 바꾸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미국도 마찬가지다.재외공관과 미군우편사무소(APO)가 있는 곳이면 해외거주국민들이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말 재외동포특례법안을 만들어 오는 7월부터 국내에 90일 이상 체류하는 재일교포와 미국영주권자에 대해 투표권을 주기로 한 상태다.또 지난 20일에는 재일교포의 일본 지방참정권 확보를 위해 국내에 거주하는정주(定住)외국인에 대해서도 참정권을 주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밝히기도했다.해외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교포와 외국인에게까지 참정권을 주려고 검토하면서 정작 공무나 학업 때문에 일시적으로 해외에 살아야 하는 진짜‘국민’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바뀐 것같다.시행착오를 거치며 해외 부재자투표를 정착시킨 나라도 있지 않은가. 추승호 정치팀 기자chu@
  • 신유고연방에 거주“현지교민 안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공습이 단행된 신유고연방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교민과 유학생 등 31명은 25일 현재 모두 안전하다고 외교통상부가 밝혔다. 외교부는 교민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주(駐)루마니아대사관에확인한 결과 유학생 등은 인근 헝가리로 피신했고 베오그라드에 남아 있는 교민들도 안전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또 사태진행에 따라 전원 철수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췄다고 덧붙였다. 秋承鎬 chu@
  • 韓-日정상회담 공동발표문

    1.98년 10월 8일 金大中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65년 국교정상화 이래 구축돼온 긴밀한 우호협력관계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발전시켜 새 세기의 파트너십을 구축한다는 공동의 결의를 ‘21세기의 새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서 발표했다. 2.한·일 공동선언 및 부속서인 ‘행동계획’의 추진현황을 점검했다. 3.한·일 공동선언이 서명된 후 약 5개월간‘양국간 대화채널의 확충’‘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협력’‘경제분야에서의 협력관계 강화’‘범세계적 문제에 관한 협력 강화’‘국민교류 및 문화교류의 증진’ 등 5개 전분야에 있어서 착실한 진전이 있었으며 미래지향적 한·일 파트너십이 확고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4.정상,각료 및 의원간 교류가 金대통령 방일 이후 빈번해지고 있는 것을환영하면서 가고시마 제1차 각료간담회에 이어 2차 회의를 올가을 한국에서개최할 것을 확인했다. 5.일본은 한국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한다는 뜻을 표명했으며 앞으로도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한·일·미 3국의 긴밀한 협력이중요함을재확인했다.금년 6월 제2차 안보정책협의회 실시 준비와 방위교류 분야에서의 진전에 만족을 표명했다. 6.한·일 고위경제협의회 개최,일본의 대한(對韓) 경제지원,한·일 투자협정 체결을 위한 협의의 가속화,노사정 교류단 방일,컴퓨터 2000년 문제에 관한 당국자간 협의 실시 등 경제 파트너십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전되고 있음을 확인했다.새 어업협정이 발효돼 양국간 200해리 시대의 새 어업질서가구축됐다.양국의 제반 규제의 존재,경제활동의 기반인 제도의 차이가 한·일간의 경제활동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일 경제협력의제 21’하에서 가능한한 제거해 나가기로 했다. 7.금년 1월 제1차 한·일·중 3국 환경장관회의가 개최된 것을 환영하면서범세계적인 환경문제에 적극 대처한다는 결의를 표명했다.마약·각성제 등국제조직범죄 문제에 관한 협력을 증진시키기로 의견일치를 봤다. 8.한국의 일본 공대 학부유학생 파견사업 추진,중·고생 교류사업의 진전,금년 4월부터 취업관광사증제도 실시를 비롯,청소년 교류분야에서큰 성과를 평가했다.폭넓은 한·일 문화교류를 구체적으로 추진한다는 관점에서 한·일 문화교류회의의 설치를 결정했다.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문화교류사업을 양국이 협력,추진키로 했다.일본은 작년 10월 한국정부의 일본대중문화 개방조치를 진정한 상호이해로 이어지는 것으로 환영했으며,한국정부는 금년내에 추가 개방조치를 취할 것임을 표명했다. 9.한·일 양국이 5개분야의 모든 항목에서 협력을 심화시켜 나가기로 의견일치를 봤다.양국은 적절한 기회에 ‘행동계획’을 재점검할 예정이다.‘공동선언’의 정신에 입각,정치·경제분야의 협력 뿐만 아니라 국민교류 및 문화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 파트너십의 구축·발전을 향한 공동작업에 참여할 것을 호소한다.
  • 박세리-월간 ‘아시안골프’ 최근호 커버스토리로

    월간 ‘아시안골프’는 최근호에서 ‘아시아의 퍼스트레이디’라는 제목의커버스토리로 박세리를 다루고 ‘박세리가 새로운 아시아의 시대를 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잡지는 기사에서 박세리가 여자선수로는 처음으로 지난해 조니워커사가 후원하는 ‘올해의 아시안골퍼’로 선정되는등 아시아권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박세리는 19∼22일 애리조나주 피닉스 문밸리골프장에서 열리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99스탠더드 레지스터 핑대회 1∼2라운드에서 베테랑 도티 페퍼와 같은 조로 경기를 한다. 17일 발표한 대회 1∼2라운드 조편성에 따르면 박세리는 페퍼,얀 스티븐슨과 함께 19일 오전 0시50분(이하 한국시간) 10번홀에서 1라운드를 시작한다. 또 주최측 초청으로 출전권을 얻은 재미유학생 아마추어 톱랭커인 박지은은 캐나다 출신으로 LPGA투어 테스트를 수석으로 통과한 신예 애너 제인 이톤,애니카 소렌스탐의 동생 샤롯타와 한조에 편성돼 오전 5시50분 역시 인코스에서 1라운드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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