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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편 어려워 접은 한국유학 꿈 실현 기뻐”

    “형편 어려워 접은 한국유학 꿈 실현 기뻐”

     21일 용산구에는 특별한 손님이 찾아온다. 베트남 호치민국립대학교에서 관광학을 전공하다 숙명여대에서 공부하게 된 팜휜 이꽌(19·여·1학년)씨가 주인공이다. 팜휜씨는 어려운 형편에 막혔던 한국 유학의 꿈을 용산구의 지원 덕택에 이루게 됐다.  용산구는 팜휜씨를 올해 ‘해외 자매결연도시 우수학생 유학지원 사업 대상자’로 선정하고 지원에 들어갔다고 20일 밝혔다. 팜휜씨는 숙명여대에서 1년간 한국어 연수 프로그램을 수료한 뒤 내년 3월 이 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경제이론과 함께 한국 경제에 대해 공부할 예정이다.  용산구는 지난해부터 대학과 연계해 해외 자매결연도시에서 추천받은 우수학생 1명의 유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 입학금 및 등록금, 기숙사 비용 전액을 지원받게 된다. 또 용산구 상공회에서 월 30만~50만원의 생활비도 지원한다. 이를 위해 구는 2010년 10월 관내에 위치한 숙명여대와 ‘외국인 우수인재 유학지원 협력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지원 혜택을 받은 유학생들은 4년 간의 학사과정 이후 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그러면 이들이 향후 고국과 한국을 잇는 우수한 지한파(知韓派) 인재로 성장·활약할 것이라는 게 용산구의 생각이다. 자매결연도시의 미래 인재 양성을 꾸준히 지원하면 도시 간 외교관계가 돈독해지고, 나아가 ‘글로벌 도시’로서의 용산구의 위상을 분명히 할 것이란 성장현 구청장의 ‘풀뿌리 외교’ 철학도 반영됐다.  나학균 교육지원과장은 “이 사업을 통해 해외 자매결연도시와 우호적 협력 관계를 발전시키고 한국을 널리 홍보할 수 있는 외국인 한국전문가를 육성하는 계기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이번에 유학을 오게 된 팜휜씨의 고향인 베트남 퀴논시는 베트남전쟁 때 맹호부대가 주둔했던 도시로 한국과 깊은 인연을 간직했다. 용산구와는 1997년 해외자매결연을 맺었다. 성 구청장은 지난 19일 유학생 지원 사업 확대 등을 논의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출국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브레인 리턴 500] (중) 두뇌 유출국은 어떻게 두뇌 유입국이 되나

    “고작 500명 데려온다고 뭐가 바뀌겠느냐. 차라리 그 돈으로 국내 이공계 실업대책이나 세워라.” 정부가 ‘브레인 리턴 500’ 계획을 밝히자 인터넷 게시판에는 비판글이 넘쳐났다. 각 대학이나 연구센터 구성원들도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의 계획은 확고하다.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우수한 인재는 반드시 영입하겠다는 것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 관계자는 “1960~70년대 조국 부흥에 앞장서 달라며 애국심에 호소해서 모았던 과학자들이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면, 이번 사업을 통해 모을 과학자들은 겉모습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과학기술 강국이 되기 위한 도약의 디딤돌”이라고 강조했다. 성장에 초점을 맞춰 지나쳐버린 기초과학의 토대를 다시 쌓기 위해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다. ●中, 4년만에 1500명 귀국 이끌어 과학계 오피니언 리더층에서는 브레인 리턴 사업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다만 더 이상 애국심만으로 호소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을 한계로 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IBS와 교육과학기술부가 재외과학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유는 ‘브레인 리턴’에서 의미하는 ‘리턴’이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경택 IBS 사무처장은 “한국의 수많은 인재가 해외로 유출되고 있지만, 그로 인한 손실은 단순히 인적 자원의 유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기초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마음가짐, 연구과제를 정하고 운영하는 노하우는 물론 그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까지 모두 유출되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인재유출국이었던 중국의 사례를 보면 인재를 영입해야 하는 당위성은 분명해진다. 귀국유학생을 뜻하는 하이구이(海龜)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중국의 원동력이다. ●中 하이구이, 벤처창업서도 두각 1960년대 문화대혁명으로 교육이 외면받았던 중국은 1980년대 중반 외국 유학을 대대적으로 허용하면서 미래를 위해 투자했다. 유학생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른바 ‘연어 프로젝트’로 알려진 백인(百人) 계획이다. 매년 100명 이상의 유학파를 중국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과학자에게는 막대한 지원금이 주어졌다. 중국 유학생들은 미국, 일본, 유럽 등지에서 오랜 노하우를 습득한 채 금의환향했고, 일부는 중국이 다국적 기업을 인수하는 데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중국의 철강, 전자, 생명공학 산업의 대부분은 하이구이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수준에 이르렀다. 백인 계획을 통해 성과를 거둔 중국정부는 2008년부터 공산당 주도 아래 좀 더 강력한 ‘천인(千人)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집과 정착금을 제공하고 본인이 연구할 곳을 대학과 연구소, 국영기업 등에서 마음대로 고를 수 있게 했다. 불과 4년 만에 이미 1500명이 넘는 하이구이들이 돌아왔다. 이들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은 물론 벤처창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중국을 이끌고 있다. 세계 최대의 인재유출국이 인재유입국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한 셈이다. ●교과부 “기초과학 대접 선순환 기대” 교육과학기술부 관계자는 “브레인 리턴 계획이 500명으로 시작하지만,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기초과학이 대접받는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선순환을 뿌리내리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면서 “귀국을 꺼리던 재외 한인과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면 한국과학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한국인 첫 옥스퍼드대 학생회장 당선

    한국인 첫 옥스퍼드대 학생회장 당선

    영국 명문 옥스퍼드대의 학생 자치기구인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승윤(22)씨가 당선됐다. 한국인이 유니언 회장에 뽑힌 것은 옥스퍼드 800년 역사상 처음이며, 동양인 회장의 당선도 1977년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전 총리에 이어 35년 만이다. 이 대학 정치철학경제학부 2학년에 재학 중인 이씨는 지난 2일(현지시간) 치러진 유니언 회장 선거에서 영국 출신 후보를 29표의 근소한 차이로 따돌렸다. 박빙의 표 차이라서 그의 당선은 선거관리위원회의 검증 작업을 거친 끝에 4일 공식 확정됐다. 유니언 회장의 임기는 9개월로, 취임 준비 기간을 거쳐 오는 6월부터 본격적으로 회장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이씨는 “동양인 유학생으로서 영국 명문 사립학교의 인맥 장벽을 극복하고 유니언 회장으로 뽑혀 기쁘다.”면서 “옥스퍼드의 소수를 차지하는 동양계 회원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당선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어 “지난해 유니언 재정담당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유니언 내부에서 지도 역량을 인정받은 것도 도움이 됐다.”면서 “공개강연 콘텐츠의 저작권 사업과 각종 토론행사 활성화를 통해 보수적인 학교에 새 바람을 불어넣겠다.”고 말했다. 옥스퍼드 유니언에는 재학생의 70%를 넘는 1만 2000여명 이상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런던 연합뉴스
  • [열린세상] ‘최초’라는 수식어/이성규 서울시립대 교수·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

    [열린세상] ‘최초’라는 수식어/이성규 서울시립대 교수·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

    지난달 말 시각장애인과 관련한 두 가지 소식을 접했다. 한국 최초로 백악관 차관보를 지낸 시각장애인 강영우 박사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과,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인 판사가 임명됐다는 소식이다. 강 박사는 1944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1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었다. 같은 해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 10대 시각 장애인 가장으로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갖은 고생 끝에 연세대를 졸업한 그는 1972년 국제로터리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 유학길에 올라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문교부는 장애를 해외유학의 결격 사유로 규정했지만 그의 유학으로 이 조항이 폐지됐고, 강 박사는 한국 장애인 최초의 정규 유학생이 됐다. 일리노이대 교수와 일리노이주 특수교육국장을 거쳐 2001년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 차관보로 발탁됐다. 당시 한인 백년 미국 이민사에서 최고위 공직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시각장애인 판사인 최영씨는 고 3때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고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졌지만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지금은 불빛만 희미하게 인식하는 수준인 시각장애인 1급이다. 다섯 차례 도전 끝에 2008년 제50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 동료 1030명 중 상위 40위권의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 지난달 27일 법관 임명장을 받았다. 연수원에서도 모든 교재를 컴퓨터 파일로 전환해 스크린 리더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귀로 듣는 방법으로 학업을 수행했으며 시험 시에도 답안지나 메모 등을 타인의 조력 없이 본인이 컴퓨터 자판을 암기해 문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사법연수원은 최 판사가 사시에 합격하자 1억여원을 들여 주요 출입구, 엘리베이터, 화장실 등에 음성안내 인식기 40개를 설치하고 시각장애인용 학습보조기구도 마련했다. 최 판사가 임용된 지방법원에서도 길 안내용 점자유도 블록, 글을 소리로 바꿔주는 음성변환 프로그램 등을 설치하느라 분주하다고 한다. 참으로 반갑고도 씁쓸한 소식이다. 수많은 장애인들이 출입했을 법원에 ‘최초’의 시각장애인 판사가 임용되자 이러한 편의시설들이 이제야 설치된다고 한다. 작년 말 전체 법원의 장애인 고용률은 2.21%였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의무고용률 3%에 못 미쳐 장애인 고용 저조 기관으로 분류돼 언론에 공표된 바 있다. 장애인 교사 의무고용률을 채우지 못해 곤욕을 치르는 각 시·도 교육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최근 영화 ‘도가니’, 그리고 석궁 교수 판결 얘기를 다룬 ‘부러진 화살’ 파문 등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은 사법부가 ‘최초’의 시각장애인 판사로 다시 명예를 회복할 계기를 만들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시각장애인, 아니 더 나아가 장애인의 성취에는 항상 ‘최초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강영우 박사의 행적에는 무엇을 하든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한국 최초의 장애인 대학 입학, 한국 최초의 장애인 석사, 한국 최초의 장애인 박사, 최초의 장애인 정규 유학생, 한국 최초의 백악관 차관보…. 물론 강 박사의 능력과 노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났으므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1970~80년대에 장애인의 성취와 입신에 얼마나 많은 장벽이 놓여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장애인 최초 뉴스 앵커, 청각장애인 최초 박사학위 취득, 장애인 최초 e스포츠 심판, 장애인 최초 1급 공무원 승진, 최초의 장애인 영어교사 임용…. 1970~80년대에 있었던 뉴스가 아니다. 바로 작년에 배출된 최초의 장애인 기록들이다. 우리 사회는 ‘최초 신드롬’에 열광한다. 장애인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정부기관의 인사 시즌이면 최초의 여성 팀장, 국장, 기관장 등의 기사가 언론을 장식한다. 우리 사회의 관행과 인식이 얼마나 후진적이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최초의’라는 장애인의 역사가 더욱 발전하는 것은 참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더 이상 이러한 일들이 사회를 놀라게 하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평범한 그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장애’보다는 그의 능력으로 인정받고 평가되는 보다 성숙한 사회를 꿈꾸어 본다.
  • 한류에 빠진 베트남 여학생 한국유학… 춘천 고교 입학

    한류에 빠진 베트남 여학생 한국유학… 춘천 고교 입학

    한류에 관심이 많은 베트남 여학생이 강원 춘천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해 관심을 끌고 있다. 베트남 하노이 장보중학교를 졸업한 황투짱(17·한국명 황수진)이 2일 춘천의 강원사범대 부속고등학교에 입학해 3년간의 한국 유학생활에 들어갔다. 하노이 한인회 추천으로 한국 유학을 준비해 온 황투짱은 친구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지니고 있다. 입학식에는 유학에 도움을 준 하노이 한인회 회원과 아버지 황반테(53)가 참석했다. 황투짱은 “어려서부터 한국 드라마를 봐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3~4년 전부터 드라마를 보면서 베트남과 한국이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더 깊이 연구하고 싶어 유학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또 “3년간 한국의 문화·역사·경제를 공부하고 앞으로 한국과 베트남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독도,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보세요

    3·1절을 앞두고 생생한 독도 모습을 24시간 접할 수 있는 영상 서비스가 부산에 구축됐다. 부경대는 29일 오후 2시 대연캠퍼스 동원장보고관 글로벌라운지에서 외국인 유학생을 비롯해 부산민족학교 독도학당 김희로 이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독도 실시간 영상 송출 서비스’ 개통식을 한다고 28일 밝혔다. 이 서비스는 독도 동도 해발 100m 상공에 설치된 파노라마 카메라가 촬영한 영상을 KBS가 무궁화 3호 위성을 통해 전송받아 부경대 동원장보고관에 설치된 139.7㎝(55인치) LED(발광다이오드) 화면으로 보여주게 된다. 독도에 설치된 카메라는 원격조종으로 360도 상하 회전할 수 있다. 독도의 아름다운 전경은 물론이고 독도 앞바다의 장엄한 일출, 갈매기들의 비상 같은 환상적인 풍광과 파도, 바람 소리, 새소리 등을 24시간 생생하게 중계한다. 이번 부경대의 독도 실시간 영상 송출 서비스는 대학 구성원과 방문객에게 독도의 모습을 보여줘 바다 영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특히 6·25전쟁 참전 용사들의 후세인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점을 알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정책기획] “생태계 보전된 건강한 산림… 도시숲 관리에 달렸다”

    [정책기획] “생태계 보전된 건강한 산림… 도시숲 관리에 달렸다”

    지난 30년간 계속된 산림녹화 사업으로 우리 산림은 양적으로 눈에 띄게 풍성해졌다. 산림정책도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녹화 대상이 도시로 확산되고 웰빙 바람을 타고 산림 수요도 다양해졌다. 산림정책의 패러다임이 ‘나무를 심는 것’에서 ‘제대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다양한 산림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산림에서 행복’이라는 기치를 내건 생애주기 산림복지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 정책으로 평가되는 반면 산림훼손에 대한 우려도 공존한다. 지난해 우면산 산사태는 산림정책에 크나큰 오점을 남겼다.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산림정책, 생활 속에서 친근한 숲을 만들기 위한 정책의 재점검 및 개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 산림정책의 미래를 대비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서울신문은 지난 22일 국립산림과학원 대회의실에서 ‘기후변화 대응 및 숲이 미래 희망이 되는 나라’를 주제로 산림정책 좌담회를 개최했다. 좌담회에는 이규태 산림청 기획조정관과 윤여창(산림과학부 글로벌환경경영학과) 서울대 교수, 김영숙(삼림과학대 임산생명공학과) 국민대 교수가 참석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저탄소 녹색성장이 화두가 되면서 산림청의 역할이 커졌다. MB 정부 4년간의 산림정책과 산림청의 역할을 평가한다면. -이 기획조정관 현 정부 4년간 산림 분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산림자원 육성을 위한 경제림 6만㏊를 조성했고, 100만㏊에 대한 숲가꾸기를 실시해 우량목재 생산기반을 마련했다. 도시숲 1573곳, 학교숲 342곳, 가로수 4861㎞를 조성해 녹색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한편 연간 4만 3000여명에게 녹색일자리를 제공했다. 해외조림 25만 4000㏊ 중 44%(11만 2000㏊)가 지난 4년동안 이뤄졌다. 산림을 기후변화 대응의 수단으로 삼은 ‘탄소흡수원 유지 및 증진에 관한 법률’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제정돼 내년 시행을 앞두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윤 교수 녹색성장이라는 국가전략은 시대가 요구하는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한다. 산림청이 녹색성장에서 상징적 역할을 수행하고 산림정책에 탄력이 붙는 계기도 됐다. 녹색성장은 국가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의미한다. 지금은 산림이 건강하고 풍성한 자원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과제다. 산림청이 청 단위 기관이다 보니 국가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김 교수 산림청의 대응은 매우 민첩했다. 저탄소 녹색성장은 온실가스 감축과 동시에 탄소 흡수원 증대에 있음을 인식하고 역할을 정확히 진단해 신속·적절한 정책을 수립, 시행했다. 일부 정책에 지나친 계량적 목표 달성을 위해 단기 정책을 시행하는 등 산림경영, 관리라는 기본 업무가 간과된 것 같다. 산림정책은 지속 가능한 이용이 이뤄지도록 장기·거시적 안목을 갖고 시행해야 한다. →치유의 숲과 숲길, 도시숲 등 다양한 산림복지 정책이 추진되면서 관리 부재 및 무분별한 조성에 따른 훼손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윤 생태계서비스도 복지의 한 축이다. 산림복지정책 추진 시 국민이 어떤 서비스를 원하는지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산림생태계 서비스에 대한 지식도 부족하다. 도시숲 관리가 체계적이지 못한 것은 생태계 관리가 아닌 도시 및 국토 공간관리 차원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도시숲 제정 등 법·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훼손 문제는 이용집중에 따른 문제로 다양한 사업을 통해 분산시키는 방안이 필요하다. -김 산림복지는 국민적 호감을 살 수 있는 정책이나 산림청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지자체와 국민의 협력이 필요하다. 산림 생태계 보존 및 건강한 산림을 위해 산림이나 공원의 휴식년제 도입 및 산림관리에 국민의 자원봉사 또는 비용 부담 형태 등으로 참여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이 기존 휴양 중심인 산림문화가 교육과 치유, 산림복지 등으로 확대됐다. 치유의 숲이 생겨났고, 지리산 숲길은 국민적 수요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숲해설가도 전문직으로 정착됐다. 지자체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갖추는 노력을 강화할 계획이다.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이슈 속에서 1970년대 이후 침체됐던 목재산업이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목재산업이 연착륙하기 위한 전략은. -김 목재산업의 중요 발전 인자는 원자재 확보이다. 벌채·수집·운반의 고비용 구조도 탈피해야 한다. 산림자원의 자원 순환형 산업구조 구축이 필요하다. 조림·목재생산·산물수집·이용·폐기가 한 곳에서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목재산업은 많은 일자리 창출이 가능한 산업이다. -윤 목재산업은 부가가치가 높은 쪽에 맞춰져야 한다. 국산목을 연료에너지로 사용하는 것은 환경친화적이나 산림탄소저장 능력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또 친환경 자재 등과 원료 경쟁을 초래함으로써 가격 상승을 불러 결국 정책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 목재는 재생 가능한 자원이다. 우리 산림에 40년생 나무가 전체 40%를 차지해 적절히 활용해야 할 시기다. 목재와 부산물 활용은 분리해 추진하고 있다. 산에서의 생산과 수집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임도 확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2010년 세계산림과학자대회(IUFRO), 지난해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 총회 등 굵직한 산림 분야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졌다. 국제산림협력의 방향 및 실효성 제고 대책은. -윤 굵직한 국제행사 유치는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해외 유학생 증가는 그 변화를 체감케 한다. ‘친한파’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이나 지원이 부족해 아쉬움이 크다. 목재의 85%를 수입하는 나라에서 임무관이 151개 해외 공관 중 1곳이라는 점도 이해가 안 된다. 자원확보 등 국제협력은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임무관과 국제협력 전문가를 많이 해외로 내보내야 하고 관련 공무원 양성도 시급하다. -김 산림 분야의 국제 협력은 필요하고 더욱 확대될 것이다. 북한 산림복구를 비롯해 동아시아 지역에서 조림사업 및 산림기술 개발 연구비 투자 등을 강화해야 한다. 탄소배출권 확보 효과뿐 아니라 국제적 산림정책 결정 및 환경보존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반이다. →지난해 우면산 산사태로 인해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면서 국민 불안이 높아졌다. -김 무분별한 산지개발과 향유는 자연 재앙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도심 주변에서의 산지이용 시 전문적 판단 기준과 의사결정 시스템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윤 자연재해는 위험성을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면산 사고는 산사태의 위험과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예방과 수종 갱신 등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원인도 있다. 산림관리는 기술자가 아닌 산과 숲을 잘 아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 대 전제는 결국 숲 관리라고 생각한다. 급경사지 전용기준을 강화하고 피해지 예측과 위험 전달 시스템도 정비하고 있다. 효과가 입증됐음에도 설치가 미흡했던 사방댐과 계류시설을 확대할 계획이다. →산림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산림정책의 발전 방향 및 과제가 있다면. -윤 현행 산지관리는 품목관리 형태로 돼 있다. 숲의 건전성 유지 측면에서 야생 동식물과 미생물까지 통합관리하는 행정체계 개편이 필요하다. 국가 재정 및 인력관리 효율화와 전문성 제고를 위해 전문조직이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확립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산림 관련 지식 창출과 보전을 위해 박사급 전문인력 채용 및 학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위원회 설치를 제안한다. -김 임도가 낙후된 산림부국은 없다. 임도는 생태계 보전 및 경제림 육성 등 산림경영에서도 필수적이고 건강한 산림 조성에도 필요하다. 경제림 수종에 대한 고민과 원자재로서의 가치가 전제돼야 한다. 경제성을 갖추려면 일정 규모의 단지가 조성되고 동일 수종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때마다 수종을 교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미래 에너지에 대한 관심과 투자도 요구된다. -이 산림 관련 연구·개발을 적극 검토하겠다. 기능에 따른 숲 관리로 방향을 전환하고 도심주변 산림에 대한 재해예방에도 관심을 기울이겠다. 부처 간 협의를 통해 임업인을 위한 다양한 정책도 마련, 추진할 계획이다. 진행·정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세계 16개 도시에 ‘독도 포스터’

    세계 16개 도시에 ‘독도 포스터’

    가수 김장훈이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객원교수와 전 세계 16개 주요 도시에 독도 관련 포스터를 부착했다. 두 사람은 지난 18~20일 미국 뉴욕을 비롯해 일본 교토, 중국 상하이, 영국 런던, 호주 시드니, 멕시코 멕시코시티,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등 5대양 6대주 16개 도시 번화가에 현지 유학생 및 재외 동포들의 도움으로 지역마다 100장씩 총 1600장의 포스터를 붙였다. 서 교수는 “지난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1면에 독도 관련 한글 광고를 게재했고 그 디자인을 이용해 포스터를 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독도는 지리적으로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영토이기에 포스터에는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보다 한글과 관광 등 한국 문화를 접목해 홍보 효과를 높였다.”고 덧붙였다. 포스터 제작 비용을 후원한 김장훈도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월스트리트저널 전면 광고 효과도 좋았지만, 현지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포스터를 부착하는 것은 또 다른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번에도 후원에 동참했다.”고 덧붙였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바다 위 특급호텔 ‘클럽 하모니’ 3박 4일 부산~규슈 노선 승선기

    바다 위 특급호텔 ‘클럽 하모니’ 3박 4일 부산~규슈 노선 승선기

    1980년대 중반 미국 TV시리즈 ‘러브 보트’(The Love Boat)가 국내에 방송됐다. 우리나라 제목은 ‘사랑의 유람선’. 배에 커다란 수영장이 있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일광욕을 하거나 바에 앉아 음료를 마신다. 밤마다 한껏 멋을 내며 파티를 하기도 한다. 기항지 도시 관광에 나서거나 배 안에서 여유로운 휴식도 취한다. 독신 남녀의 야릇한 사랑 이야기는 양념.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환상이 샘솟는 시간이다.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려면 지중해에 가야 하나 생각했다. ‘클럽 하모니’호에서라면 그 시절의 환상이 어느 정도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Day1>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캐비아·한우 안심 정찬 부산 영도 국제크루즈터미널에서 출국 수속을 끝내고 나가니 ‘클럽 하모니’호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핀란드에서 건조한 2만 5558t급 쇄빙선을 1989년부터 1년 이상 시간을 들여 크루즈선으로 개조했다. 1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이 배는 이탈리아에서 운항하다 지난해 한국에 들어와 ‘첫 한국 국적 크루즈선’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계단을 올라 들어선 4층 로비는 4성급 호텔 수준이다. 객실 383개는 11.6~19.8㎡ 규모로 3~5·7층에 분산돼 있다. 2~9층에는 병원과 레스토랑, 클럽, 바, 뷔페, 카페, 극장, 사진관, 헬스클럽, 스파, 키즈카페 등 별별 것들이 다 들어와 있다. 가히 ‘바다를 떠다니는 호텔’ 그 자체다. 창밖이 어둑어둑해진 오후 6시 30분. 배가 항구를 천천히 벗어난다. 생수통에 담긴 물이 살짝 찰랑거린다. 바다가 보이는 곳(오션뷰 룸)이라 약간 흔들림이 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중간에 있는 방(인사이드 룸)이 낫다고 한다. 이 크루즈선이 ‘호텔 수준’임을 실감시키는 건 역시 정찬이다. 저녁 식사는 5층 크리스탈로 레스토랑과 7층 뷔페식당에서 할 수 있다. 선상신문에 나온 메뉴를 확인하고 적어도 한 번은 정찬을 먹어 볼 것을 권한다. 전복 새우 냉채-해산물 꼬치와 메로 소갈비구이 약밥(첫날), 아보카도 캐비아-거위간 라비올리-메로구이 해산물 스프-한우 안심구이(둘째 날) 등 고급스러운 구성이다. 서울 시내 호텔에서 먹었다면 10만~15만원은 훌쩍 넘길 법하다. Day2> 첫 도착지 나가사키 원조 짬뽕 맛보자 조식 역시 뷔페와 한식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이날 아침으로 준비된 한식 메뉴 육개장은 식사 시간 30분 전에 동이 나 버렸다. 그만큼 맛이 빠지지 않는다. 아침 식사를 끝냈다면 슬슬 나가사키 탐방에 나서 보자. 일본 전체로 봤을 때 서쪽 끝인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한반도와 중국은 물론 17세기에는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교류한 교통 요충지다. 유럽형 건물이 곳곳에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래도 일단 나가사키는 ‘짬뽕’이다. 원조집인 ‘시카이로’(四海?) 항구 근처에 있다. 113년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당시 중국 유학생들이 양이 적은 일본식 식사가 불만이라고 하자 남은 재료를 몽땅 넣어 풍성하게 만든 것이 시초가 됐다. 우리나라 짬뽕과 많이 다르다. 국물이 멀겋고 칼칼하지도 않다. 시카이로 근처 구라바엔(Glover園)은 19세기 중·후반에 형성된 외국인 마을로, 나가사키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비밀의 정원’이라 불릴 만큼 큰 정원 사이에 아기자기한 서양 건축물이 조화롭게 들어서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로 유명한 ‘나비부인’의 배경이 된 이유를 알 만하다. 조금 진지한 분위기로 전환한다면 원폭자료관을 꼭 가보길 권한다.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전 나가사키의 역사와 모습, 폭발 시간인 오전 11시 2분을 가리키며 멈춘 괘종시계, 찌그러진 소방용 망루, 남쪽 벽만 남은 우라카미 성당, 파편·고열·방사선 등으로 상처 입은 민간인의 사진과 옷가지 등 피해 현장을 그대로 담아냈다. 일본 초중고 의무교육 과정으로 이곳을 방문한 학생들은 한결같이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이 왜 당했나.”라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 처지에서는 일본 역사 교육의 현재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Day3> 세련된 후쿠오카서 즐기는 여유로운 쇼핑 일본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로 꼽힌다는 후쿠오카는 서울과 비슷한 모양새다. 서북에서 남동으로 가로지르는 나카가와(那珂川)를 중심으로 서쪽(옛 후쿠오카)은 사무라이가 살던 부촌, 동쪽(하카타)은 상인 도시였다. 서쪽 끝에는 후쿠오카 타워(234m)와 호주에서 공수한 모래로 만든 모모치 해변이 있다. 힐튼호텔과 번쩍거리는 후쿠오카 야후 재팬 돔, 젊은이들이 결혼식장으로 선호한다는 마리존 등 부유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풍긴다. 동쪽으로 옮겨 갈수록 시내는 번화해진다. 나카가와와 하카타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캐널시티는 복합 쇼핑몰로, 정통 규슈라멘을 맛볼 수 있는 라멘스타디움(5층)을 비롯해 상점, 극장, 호텔, 식당 등이 즐비하다. 최근 새롭게 부상하는 쇼핑 메카는 하카타역을 중심으로 한큐백화점, 아무 플라자가 있는 하카타 시티다. 후쿠오카 토산품인 명란젓부터 온갖 캐릭터 상품, 명품 브랜드 등이 가득하다. 이 번화가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학문의 신, 스기와라 미치자네를 모셨다는 ‘다자이후텐만구’(太宰府天?宮)가 있다. 매주 주말, 특히 대입시험 기간에 일본 각지에서 수험생과 부모가 찾아와 인산인해를 이룬다. 궁으로 가는 길목에는 스기와라의 시신을 옮겼다는 소 동상이 있다. 신화를 좋아하는 일본은 이 소에도 영험한 힘을 주었다. 소머리를 만진 손을 자신의 머리에 비비면 머리가 좋아진다나. 그래서 소머리가 반들반들해졌다. Day 4> 영화처럼 화려한 드레스 입고 볼룸댄스 운영선사인 하모니크루즈의 신재희 사장은 이 크루즈 여행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행복한 놀라움과 친숙한 새로움이 키워드입니다. 즐거움과 재충전의 시간을 동시에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역시나 그렇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다 소화하기에 3박 4일은 다소 짧아 보인다. 매일 밤 바에서는 뉴올리언스 재즈를 들려주는 ‘빅 밴드’ 공연이 열린다. 극장에서는 여성 그룹 ‘메리 지’가 아이돌 그룹의 춤과 노래를 선사하고, 클럽에서는 ‘케이걸스’가 신나는 분위기를 이끈다. 남성은 정장, 여성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볼룸댄스를 배우기도 한다. 8층에서는 운동을, 9층에서는 스파를 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면세점에서 담배와 주류만 살 수 있는데 3월 중순에는 모든 제품 입점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제 날이 따뜻해지면 갑판에 있는 수영장과 자쿠지에 몸을 담글 수 있게 될 것이다. 시내 관광을 하지 않는 승객들을 위해 오후 프로그램을 대폭 추가한다니 시간을 더 쪼개야 할 듯하다. 효도 관광도 좋고 가족 여행도 좋다. 친구들끼리 추억을 남기기에도 충분한 크루즈 여행이 눈앞에 확실히 열렸다. 글 사진 후쿠오카·나가사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알고 타면 더 재미있는 크루즈 ▲부산역에서 출항지인 부산 영도 국제크루즈터미널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3시 사이에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소요 시간은 30분. (051)405-6154. ▲먼저 수하물 검사소에서 짐을 부친 뒤 터미널에서 입국 수속을 한다. 수속은 오후 12시부터. ▲선상카드와 선상신문은 꼭 챙기는 것이 좋다. 선상에선 카드가 결제 수단이다. 하루 일정을 담은 4쪽짜리 선상신문도 매일 확인하자. 오전에 방마다 배달해준다. 4층 로비 데스크에도 비치돼 있다. ▲‘하모니 크루즈’의 강점이라면 시내 관광 일정이 비교적 다양하고 여유롭다는 것이다. 나가사키의 관광의 경우 시내 관광과 온천, 17세기 네덜란드 거리를 재현한 하우스텐보스 등 3개 코스가 준비돼 있다. 관광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10만~15만 6000원이 추가된다. ▲나가사키에서는 짬뽕만큼 유명한 것이 카스텔라다. 달달하며 간혹 설탕 알갱이도 씹힌다. ‘후쿠사야’(福砂屋)는 무려 4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녔다. ‘나가사키도’(長崎堂)와 ‘분메이도’(文明堂)도 상당히 유명하다. ▲후쿠오카 시내 관광은 온천 포함 여부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뉘며 비용은 10만~12만원이다. 항구에서 시내까지 다소 거리가 있어 자유여행보다는 옵션투어가 나을 수 있다. ▲하모니크루즈는 첫 출항 완판을 기념해 2월 말까지 진행하던 운항 요금 이벤트를 4월까지 이어가기로 했다. ‘3박 4일’과 ‘4박 5일’ 상품 가격을 인사이드룸의 경우 44만 9000원, 오션뷰는 49만 9000원, 발코니 뷰는 117만 9000원으로 통일했다. 이 요금제는 3월 중순에 추가로 취항하는 인천-제주-규슈(나가사키·후쿠오카)-부산 구간도 동일하다. 1600-1073.
  • 국경도, 30년의 긴 세월도 그들 사랑 막을 수 없었다

    국경도, 30년의 긴 세월도 그들 사랑 막을 수 없었다

    북한 여성과 베트남 남성의 국경과 세월을 초월한 사랑이 세계인의 가슴을 적셨다. 영국 BBC방송은 14일(현지시간) 밸런타인데이 특집으로 북한 여성 리영희(65)씨와 베트남 남성 팜 녹 칸(64) 부부의 러브스토리를 전했다. 칸이 리씨를 처음 만난 건 23살 청춘이던 1971년 북한 함흥에서다. 유학생으로 화학을 전공하던 칸은 리씨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 뒤로 칸은 1년 반 동안 리씨와 사랑에 빠졌지만 1973년 홀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국제결혼을 법적으로 금지했고 리씨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서로를 잊지 못한 채 한글로 쓴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외부 세계 접촉을 막는 북한은 두 사람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았다. 칸이 베트남 주재 북한대사관에 편지 왕래를 허가해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는 일이 20년 동안 이어졌다. 북한 당국은 수차례 베트남 스포츠팀 통역관으로 북한에 입국한 칸에게 “리씨가 다른 남성과 결혼했다.”거나 “이미 숨졌다.”고 거짓말도 했다. 칸은 믿지 않았다. 어느덧 마흔다섯의 중년이 된 리씨가 1992년 칸에게 “우리가 늙어가도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젊다.”고 보낸 편지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 칸의 애타는 사랑은 9년 후 기적처럼 성사된다. 칸은 2001년 평양을 방문하게 된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에게 자신의 사연을 절절히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북한 당국은 베트남 국가 주석의 요청을 받아들여 칸과 리씨의 결혼을 허가했다. 둘은 이듬해인 2002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지 꼭 31년 만이다. 리씨는 55세, 칸은 54세로 초로(初老)였다. 리씨는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조선에서 그 사람과 그렇게 헤어져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랑이란 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며 “남편은 30년이 넘도록 장가도 안 가고 나에게 편지만 쓰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말했다. 칸은 “아내를 향한 내 마음은 지금껏 단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BBC방송은 홈페이지에서 이들 부부의 사연을 9장의 사진을 통해 세계에 전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사설] 재외국민 투표제 전면 재검토 필요하다

    4·11 총선에서 도입되는 재외 국민 투표제의 실효성이 도마에 올랐다. 재외 선거권자 등록 마감일까지 투표하겠다고 신청한 유권자가 전체의 5%대에 그쳤기 때문이다. 선거 관리의 어려움 등 각종 부작용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한 가운데 재외 국민에 대한 참정권 확대라는 취지마저 퇴색하고 있는 꼴이다. 우리는 이번 선거를 시금석 삼아 재외 선거인의 범위를 조정하는 등 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그제 중앙선관위 집계에 따르면 전체 재외 선거인 223만 3000여명 중 투표 의사를 밝힌 이는 겨우 11만 4000여명이었다. 실제 투표자는 이를 밑돌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처럼 거주지가 투표장인 공관에서 먼 교민들 다수가 포기할 공산이 큰 탓이다. 213억원의 선거 관리 예산이 아까울 정도다. 물론 재외 선거인이 비례대표에만 투표할 수 있는 총선과 달리 대선에선 투표율이 다소 높아질 순 있다. 하지만 선거 관리의 어려움이나 부정선거 개연성 등에 대한 우려는 그대로다. 5대양 6대주에 퍼져 있는 교민들에게 선거권을 줘야 한다는 명분을 따르느라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 할 판이다. 재외 국민 투표는 국외 체류·거주 국민의 참정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2007년 결정에 따라 이뤄지게 됐다. 평등권이란 관점에서는 당연한 조치다. 6·7대 대선과 7·8대 총선에선 재외 공관원, 베트남 파병 군인, 해외지사 직원, 독일 광원과 간호사 등에 대해 참정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번엔 해외 영주권자에게까지 투표권을 허용하면서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납세·병역 등 국민의 의무가 면제된 이들에게 참정권을 주는 게 헌법 정신에 부합하느냐는 지적이다. 미국도 해외의 국적자는 세무 신고를 해야 투표권을 부여받는다. 이왕 재외 국민 투표제를 도입하기로 했다면 실효성을 담보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차제에 주재원·유학생 등 국외 부재자에게는 우편투표나 순회투표소 설치로 참정권 행사를 확실히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해외 영주권자들은 대부분 거주국의 시민권자가 되려고 대한민국 국적을 이탈하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거주국의 주류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고국의 정치권 풍향에만 안테나를 세우게 하는 일이 온당한지는 중장기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 [저자와 차 한 잔] ‘명대(明代)의 운하길을 걷다’ 펴낸 서인범 교수

    [저자와 차 한 잔] ‘명대(明代)의 운하길을 걷다’ 펴낸 서인범 교수

    ●‘표해록’ 저자… 해로·기후·민속 등 담아 조선시대의 최부(崔溥)를 아시나요. ‘표해록’의 저자이다. 최부는 1487년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나라에서 시키는 노동이나 병역을 거부하고 도망간 사람을 찾아내 잡아오는 관리)으로 임명돼 제주에 갔다. 하지만 다음 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14일동안 표류한 끝에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에 도착했다. 그러는 동안 도적을 만나고 왜구로 오인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고초를 겪었고 관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 북경으로 호송됐다. 이후 귀국길에 올라 압록강을 거쳐 한양 청파역에 도착한 뒤 성종 임금의 명을 받아 ‘금남표해록’(3권)을 기록했다. 금남은 자신의 호이며 ‘표해록’에는 중국 연안의 해로와 기후, 산천, 도로, 관부, 풍속, 민요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하여 최부를 가리켜 ‘조선의 마르코폴로’라고 한다. 동국대 사학과 서인범(52) 교수는 2009년 연구년을 맞아 최부의 ‘표해록’을 고스란히 답사했다. 중국 유학생 곽로씨와 함께 항주에서 최부가 표착했던 태주 삼문만 쪽으로 내려가, 다시 항주로 거슬러 올라오는 당시의 루트를 그대로 따랐다. ●꼬박 한 달간 700만원으로 답사 서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최근 ‘명대(明代)의 운하길을 걷다’라는 제목으로 한길사에서 책을 펴냈다. 부제 ‘항주에서 북경 2500㎞ 최부의 표해록 답사기’에서 보듯 항주에서 명대의 조운로(漕運路)를 따라 북경의 적수담(積水潭)까지 총 30박 31일의 일정으로 도보, 인력거, 고철덩어리 버스, 택시, 기차 등을 이용해 총 경비 700만원으로 답사했다. 최부와 조운로에 집중시켜 서술하고 있지만 역사성과 여러 유적지의 문화, 인물, 음식, 현대 중국인의 일상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최부가 호송당한 경로는 사람과 곡물을 운반하며 내륙을 종(縱)으로 관통하던 이른바 조운로였습니다. 최부는 폭풍우를 만나 중국 남쪽 절강성 태주부에 표착하게 됐고 조선인이라는 신분이 밝혀져 명나라 장교의 보호를 받으며 조운로를 따라 북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뒤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게 됩니다. 이번에 낸 책은 북경까지의 루트를 직접 답사한 것이지요.” 그가 최부와 만난 것은 1999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은사 조영록 선생이 한 권의 책을 건네주었고 대학원생들과 3년반에 걸친 역주 작업을 거쳐 ‘표해록’을 펴내면서였다. ●내년 2차 ‘최부의 길’ 떠나 “명대를 전공하는 저에게 ‘표해록’은 보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중국 어느 사료보다도 당대의 시대 상황과 조운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가 없기 때문이죠. 어느 순간 이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욕망이 솟구쳐 올랐지요.” 520여 년 전의 최부로 변신한 그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를 직접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최부의 숨결이 배어 있는 조운로나 그가 견문한 곳을 온전히 더듬어 이번에 또 다른 기록의 결실을 맺었다. 내년에는 북경에서 압록강으로 이어지는 2차 ‘최부의 길’을 떠날 예정이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서초구민 “보건소 맞춤 강좌 좋아요”

    지역사회 건강을 책임진 보건소가 진료·치료를 넘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주민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8일 서초구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보건소 이용자 41만 1785명 가운데 36%인 14만 8451명이 각종 교육·상담 프로그램을 이용할 목적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진행한 교육·상담 프로그램은 2719회에 이른다. 특히 부부 대상 ‘아빠와 함께하는 토요출산준비교실’, ‘야간 출산준비교실’, ‘행복한 임신준비 교실’ 등 임신·육아 관련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또 보건소는 주5일제 수업 전면 시행에 따라 초등학교 돌봄교실과 연계한 ‘학교중심 토요 건강데이’ 등을 운영하며 아이 돌보미 역할도 한다. 응급처치 교육을 영어로 진행하는 ‘Check, Call, Care 영어로 배우는 신나는 응급처치 교육’과 먹을거리를 만들며 식품 안전에 대해 배우는 ‘놀토, 엄마와 함께하는 건강 Cook’ 등 건강 교육도 꾸준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평일 낮 시간 이용이 힘든 의료취약계층을 위한 조기진료(오전 8시) 및 야간진료(오후 7~10시), 토요진료와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외국인 유학생·근로자를 위한 외국인 특화진료도 눈길을 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독자의 소리] 오늘의 유학생과 ‘2·8선언’/국가보훈처 행정사무관 장정옥

    1919년 2월 8일에 일본 도쿄에서 한국유학생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2·8 독립선언은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날이다. 당시 민족자결주의의 발표로 약소국 독립의 기운이 생겨나고 있음을 간파하고 적의 심장부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하였다. 당시 해외 유학생들은 지사 또는 선각자로서 활동했다. 자료를 보면, 해외로 나가는 학생이 꾸준히 늘어 한국인 유학생이 25만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취업에 대비한 어학연수를 떠났거나 외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고자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유학 환경은 역사 변천사만큼이나 크게 달라졌다. 해외 유학생을 둔 가정의 가장은 기러기 아빠가 되고 환율의 변동 폭에 따라 생활여건이 어려워졌다. 자랑스러운 유학생의 기개와 정신을 되새기고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역경을 극복하여 역량 있는 인재가 되어 안정되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국가보훈처 행정사무관 장정옥
  • “생면부지 친구지만… 혈액암 고통 함께 나눠요”

    “생면부지 친구지만… 혈액암 고통 함께 나눠요”

    미국 대학생들이 혈액암을 앓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을 살리기 위해 앞장서 ´제2 성덕 바우만’ 감동 스토리가 재연되고 있다. 미국 미시간주 이스트랜싱 도시에 위치한 미시간주립대학(MSU)은 지난 금요일(현지시간 2월 3일) 오후 ‘골수이식 가능성 검사’ 행사를 열고 200여명의 학생들로부터 골수이식 동의서를 받았다. 대부분 미국인 학생들이지만 중국·일본·동남아시아 등 동양인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한 한국 유학생이 혈액암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골수기증을 희망한다는 서명서에 사인한 후 골수이식 가능성 검사를 받았다. ●미시간大 학생 200여명 골수이식 동의 검사는 면봉 4~5개를 이용해 타액 등을 조사하는 것으로 1인당 15~20분간 진행됐다. 간단한 검사지만 생면부지의 생명에도 자신을 희생하는 진한 인류애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정작 혈액암을 앓고 있는 학생의 가족들은 사연과 신분 노출을 극도로 꺼려 누구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골수 이식이 필요할 정도로 악화되면서 학교 관계자들이 직접 나서 행사를 마련했지만 학교 측도 신상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고 있다. 학교 관계자는 “이 한국 학생은 2010년 봄 혈액암 진단을 받은 후, 미시간을 비롯한 미국의 병원에서 줄곧 치료를 받아 왔다.”면서 “골수기증을 받을 가능성이 미국이 수월할 것으로 생각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관계자는 “미국과 한국에서 골수이식이나 암에 대한 사회·문화적 인식이 서로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골수이식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페이스북(Facebook)에도 사연을 올려 동참을 호소했다.”고 덧붙였다. ●“한·미 간 골수이식에 대한 인식 달라” 미국의 경우 골수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변인이나 사회조직이 앞장서 알리고 기증 가능자를 찾는 게 일반적이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날 골수기증 가능성 검사 행사에 참여한 한 한국 유학생은 “1996년 성덕 바우만의 사례처럼 이 학생도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 공군사관학교 생도였던 성덕 바우만은 한국에서 골수 기증을 받고 건강을 회복, 현재 텍사스주에서 가정을 꾸려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 사진 미시간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다이쇼 데모크라시 허상이 아니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마쓰오 다카요시 지음, 오석철 옮김, 소명출판 펴냄)라는 제목은 1905년부터 1925년까지 20여년간 지속된 일본의 민주주의 시기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군국주의로만 치달아 가던 당시 일본에도 한때 민주주의가 도래한 시기가 있었다는 뜻에서 쓰는 표현이다. 그러나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그래 봤자 어차피 실패했고 결국엔 군국주의로 넘어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극소수 도시 지식인들이 서양을 흉내낸 소산에 지나지 않고 국민 생활과는 무관하다.”는 평이 나온다. 저자는 실패했을지는 몰라도 그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결과는 실패였을지 모르나 “도시뿐 아니라 농촌, 피차별 부락에까지 광범위한 노동 대중의 자각에 뿌리내린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한계이자 문제점으로 늘 지적되는 것은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원칙이 나중에 가서는 ‘안으로는 국민주권주의, 밖으로는 비제국주의’ 노선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비록 이 발전된 노선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광범위하게 호응을 얻지는 못했으나 전후 헌법에서 군비를 포기하고 민주적 산업국가로 살아가려는 구상이 반영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단순히 “선거나 정당정치라는 정치의 형식적인 측면의 정비만을 지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당정치보다도 인권 확립이라는 원칙이 저류에 있었다.”는 평가다. 이런 발전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조선에 대한 입장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핵심 인물로 요시노 사쿠조 도쿄대 교수의 입장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민주주의에 관심 있었던 사람들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단 통치를 비판했다. 그러나 요시노 교수의 비판에는 차별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지만 말고 선정(善政)을 베풀라는 수준에 그친 반면, 요시노 교수는 “선정만 하면 일본 통치에 만족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독립 민족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저자는 요시노의 입에서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까닭으로 조선인 유학생과의 꾸준한 접촉을 들었다.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조선의 사정과 독립을 향한 조선인의 열망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들 지금 당장 조선이 독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오히려 “다른 조선 포기론은 경제적 득실이라는 관점에서 논한 것인데 요시노는 조선의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을 존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 관헌의 입장에서는 귀에 익지 않은 조선 포기론보다 조선인의 애국심을 시인하라는 통치 개혁론이 더 귀에 거슬렸다.”고 지적한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신기루가 아니었다. 2만 2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경북 ‘새마을운동 총지휘’ 재단 만든다

    새마을운동 발상지인 경북도가 새마을운동의 성공 경험을 국제 사회와 공유하기 위한 재단 설립에 나선다. 도는 새마을운동의 효율적인 세계화를 위해 가칭 새마을세계화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고 2일 밝혔다. 이를 위해 도는 최근까지 재단 설립과 관련한 용역과 타당성 조사를 마쳤으며, 다음 달쯤 도의회로부터 관련 조례를 승인받아 설립을 본격화할 방침이다. 내년까지 도의 출연금과 도내 시·군의 출연금 등 총 100억원의 기금을 모아 재단을 구성할 예정이다. 새마을세계화재단은 장기적 전략을 수립하고 이론을 정립하며 외국인 지도자 연수, 새마을봉사단 파견, 글로벌 새마을포럼을 운영하는 일을 맡는다는 것. 도가 재단 설립에 적극 나선 것은 현재 도가 주도하는 형태의 새마을운동은 세계화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관련 재원 확보나 이론 체계화 등에 있어 선거법 등의 제한을 받는 데다 새마을 세계화 사업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확산을 위해 민간단체 등의 참여 확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도 관계자는 “관 주도의 새마을운동 세계화에 어려움이 많아 재단을 설립하게 됐다.”면서 “재단을 통한 새마을운동 세계화가 활성화될 경우 인류 공동 번영에 기여함은 물론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고 양질의 청년 일자리도 창출하는 등 다목적 효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경북도는 새마을운동의 세계화를 위해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가에 대학생 해외 새마을봉사단과 새마을리더 해외 봉사단을 파견하고 있으며, 탄자니아와 우간다 등 4개 마을에 한국형 밀레니엄 빌리지 조성 사업(KMVP)을 추진하고 있다. 또 글로벌 새마을 리더 양성을 위해 외국인 지도자, 공무원을 비롯한 국내 유학 중인 저개발국가 유학생을 대상으로 새마을연수를 실시하고 있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학생회장에 말해 대학 입학 시켜주마”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3대는 31일 국내에 머무는 중국인 어학연수생 등을 상대로 대학 입학 알선과 비자연장을 해 주겠다며 5000만원을 가로챈 조선족 이모(25)씨를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씨는 지난해 11월 채팅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중국인 송모(19)양에게 접근, “잘 아는 총학생회장에게 말해 정식으로 대학에 입학시켜 주겠다.”고 속여 입학금 명목으로 2000만원을 받아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조사 결과 피해자들은 비자 변경을 한 뒤 대학생이 될 날만 꿈꾸다 불법체류자로 전락해 농촌에 숨어 지낸 것으로 밝혀졌다. 이씨는 2009년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했지만, 국내 카지노를 전전하다 수억원을 잃고 결국 지난해 등록금 미납으로 제적됐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42)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 루쉰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42)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 루쉰

    1898년, 루쉰은 난징의 강남수사학당에 들어가기 위해 고향 샤오싱을 떠났다. 집을 떠나는 장남의 손을 잡고, 루쉰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어 8원의 여비를 마련해 주시며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우셨다.” 어머니의 울음에는, 가세가 기울어져 더 이상 과거공부를 시켜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갈 곳을 찾지 못한 아들에 대한 걱정과 가여움을 담고 있었다. 사실 루쉰의 어머니가 이렇게 서럽게 운 것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 시절은 경서(經書)를 배워서 과거를 치르는 것이 정도(正道)였고, 사회통념상 소위 양학(洋學)을 배운다는 것은, 갈 곳 없는 사람이 서양 오랑캐에 영혼을 팔아넘기는 것으로 간주되어, 몇 배의 수모와 배척을 당해야만 했기”(납함, 자서) 때문이다. 1898년, 18세가 되는 해에 루쉰은 새로운 길을 찾아 그렇게 고향을 떠났다. 루쉰의 본명은 저우슈런(周樹人·1881~1936)으로, 저장성(浙江省) 샤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저우 집안은 그 지역에서 웬만큼 산다는 집안이었으나, 과거시험 부정을 꾀했다는 이유로 조부가 투옥됐고, 조부의 관직 외에는 생활수단이 없었던 독서인 집안은 이로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설상가상으로 병에 걸린 부친의 약값을 대느라 재산은 탕진되었다. 집안의 장남인 루쉰은 집안의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는 일, 그렇게 빌린 돈으로 한약방에 가서 부친의 약에 쓰일 희한한 약재들을 사는 일을 도맡아야 했다. 14살의 소년은 재산과 권세가 가시자 차갑게 돌변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세상의 인정세태를 깨달았다. 루쉰에게 고향 샤오싱은 자신을 얽매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들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샤오싱은 중국의 현재이자 미래였다. 전통적 가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고향은 흡사 고인 물처럼, 현재의 도살자들로 가득했다. 루쉰이 소설가로 발을 내딛으면서 말했던 ”철로 만든 방“은 결코 은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방은 철로 만들어져 깨부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질식사를 기다리듯 그 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 루쉰은 철방에서 홀로 잠을 깬 자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철방 속 적막을 느꼈고, 그럴 때마다 사회활동에 더 매진하거나 옛 문헌을 파고들었다. 루쉰은 바로 그런 철방과 같은 고향을 떠났다. 흡사 지금까지의 자신과 결별하듯, 스스로 탯줄을 자르듯. 자신을 짓누르던 전통의 무게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때, 루쉰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진화론’이었다. 1901년, 루쉰은 옌푸(嚴)의 ‘천연론’(天演論)을 통해서 ‘생존경쟁’과 ‘자연도태’라는 용어를 접했다. 당시 진화론은 생물학적 다위니즘을 비롯해 사회 다위니즘, 상호부조론 등이 한데 뒤섞인 채 물밀듯이 중국으로 들이닥쳤다.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위기의식에 휩싸인 중국 지식인들은 진화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중국을 근대 세계와 같은 궤도에 두고,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자 했다. 루쉰의 세대에게 진화론은 일종의 돌파구였다. 처녀작 ‘광인일기’(1918)에서 루쉰은 중국 전통의 예의와 도덕의 해악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며, “아이들을 구하라.”고 외쳤다. 자신과 같은 기성세대는 “인습의 무거운 짐을 지고 암흑의 수문을 어깨로 걸머질” 터이니, 아이들은 자신들을 밟고 넓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라고 말이다. 그렇게 루쉰은 꽃을 피우기 위한 거름이 되기를 자청했다. 1902년 루쉰은 국비로 일본에 유학을 떠난다. 의화단사건(1900)에서 승리한 서구 연합국들이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청나라의 해외유학생 파견에 전용하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일본에 간 루쉰은 망설임 없이 의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부친처럼 어리석은 처방과 치료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의학은 중국을 구해줄 과학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확신은 이른바 ‘환등기사건’으로 여지없이 깨졌다. 루쉰이 의학을 공부하던 시기는, 바야흐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수업시간 틈틈이 선생들은 환등기를 틀어주었는데, 어느 날 루쉰은 거기서 자신이 떠나온 고향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당시 그가 본 환등기 필름은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스파이 혐의를 받은 중국인을 처형하는 장면이었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옆에 일본인 병사가 칼을 치켜들고 있다. 멍한 표정의 구경꾼들은 모두 변발이었다. 동족의 처형을 구경거리인 양 멍하니 바라보는 중국인의 사진 앞에서 루쉰은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학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의대를 그만뒀다. 의학으로 구국하겠다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체격이 제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구경꾼밖에는 될 수가 없었다.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런 일은 불행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납함, 자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루쉰의 답은 “문예”였다. 어리석고 약한 국민을 치료하는 데는 신체를 고치는 의학이 아니라 정신을 고치는 의학, 즉 문예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펜으로 ‘중국인의 열근성(劣根性)’을 해부하고 치료하겠노라! 신체에 깃든 병을 분석하고 해부하고 치료하듯, 루쉰은 글을 써내려갔다. 그에게 글쓰기는 익숙함에 안주하는 중국인들을 향한 공격에 다름 아니었다. 한 치의 위로나 연민도 없었다. 새것조차 헌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중국인의 사유방식, 그것의 기초가 되는 철학, 신화, 예술, 고전 등 모든 익숙한 것에 총공격을 가했다. 전통의 해독(害毒)에서 청년들을 지키기 위해 고문은 읽지도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이 모두가, 탁자 하나를 옮기는 데도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필요로 하는 중국의 견고한 전통과 인습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었다. 루쉰은 우리에게 소설가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기실 그는 세 권의 단편소설집만을 남겼을 뿐이다. 소설 창작은 1920년대 초반에 집중되어 있고, 그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는 잡문쓰기에 치중했다. 지금의 에세이에 해당하는 잡문은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정신을 핵심으로 한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과 군벌들의 난립과 폭행, 국민당의 백색테러, 혁명을 팔아먹는 지식인, 현실의 권력에 굴복하면서도 정인군자(正人君子)인 체하는 하는 지식인. 루쉰의 붓끝은 그 모두를 향해 있었다. 잡문은 민중의 무지몽매함과 아큐식의 정신승리법을 비판하고, 혁명에 들뜬 청년들의 조급증을 논파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그의 잡문은 말 그대로 시대를 향한 비수이자 투창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루쉰의 글쓰기는 자신을 부정하고 해부하는 작업이었다. 황금시대로 아이들을 넘겨주는 중간물이자 꽃을 키우기 위한 거름으로 자신을 규정한 루쉰은 새롭게 도래할 혁명의 시기에는 멸망될 운명의 존재였다. 미래세대의 독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자신의 신체에 새겨져 있을지 모를 중국인의 열근성과 대면했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만큼, 루쉰은 시대의 암흑에 맞선 투쟁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결연한 의지는 죽음을 앞두고 유언처럼 쓴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만 열이 몹시 날 때면 유럽인들은 임종시에 흔히 남이 너그럽게 용서해줄 것을 바라며 자신도 남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의식을 지낸다는 사실이 기억날 뿐이다. 나의 적과 원수는 적지 않은데 신식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나는 생각해보고 나서 이렇게 결심했다. 그들에게 얼마든지 증오하게 하라. 나도 하나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죽음) 루쉰은 죽어가면서까지도 무력으로 중국을 농단하는 제국주의자들과 군벌들, 위선적인 지식인들, 그들을 뒷받침하는 과거의 부정적인 것들을 향해 겨누던 창을 거두지 않았다. 전근대와 근대 사이에서 두 세계의 어둠을 볼 수 있었던 루쉰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암흑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다. 켜켜이 쌓인 중국의 역사를 뒤집는 일, 중국인의 혈관을 흐르는 피를 바꾸는 일, 즉 혁명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루쉰은 죽으면서도 모든 익숙한 것들, 자신을 위로하는 것들에 속지 말라고, 투쟁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최정옥(남산강학원 연구원)
  • [열린세상] 한·중수교 20년 뒤바뀐 갑을관계/이문기 세종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열린세상] 한·중수교 20년 뒤바뀐 갑을관계/이문기 세종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올해로 한·중 수교 20년이 되었다. 연초부터 각종 언론매체의 특집보도가 이어지고, 8월 24일 수교 기념일에 맞춰 각종 학술행사와 기념행사도 넘쳐나고 있다. 양국 정부 차원에서도 올해를 ‘한·중 우호교류의 해’로 정하고, 공동주관 하에 45개의 각종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사람으로 치면 20주년은 성년식을 치러야 할 나이니까 풍성한 행사를 준비할 만도 하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는 양국 간 교류의 양을 고려하면 다양한 기념행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한·중 관계의 현주소와 향후 전망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최근 양국 관계에서 발생한 껄끄러운 현안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는 관계 역전 현상에서 비롯된 대중국 인식의 혼란 때문이다. 한·중 관계에서 갑과 을의 위치가 급격하게 뒤바뀌고 있다. 비즈니스에서 관행적으로 사용되는 갑을 개념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협상력을 보유한 쪽을 갑으로, 그렇지 못한 쪽을 을로 지칭한다. 20년 전 수교 당시 양국 관계는 명백하게 한국이 갑, 중국이 을이었다. 당시 중국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 유혈진압으로 서방세계의 거센 비난과 제재를 받고 있었고, 이를 돌파하기 위한 효과적인 통로로 한국과의 수교를 강력히 추진했다. 물론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외교 전략과 맞아떨어지면서 수교협상이 더 탄력을 받은 측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한국보다 중국이 더 절박했다. 수교 이후 10여년간은 양국 간 교류에서 한국의 비교우위가 확실한 시기였다. 비록 당시에도 군사외교 분야에서는 중국이 강한 나라였지만, 경제발전의 필요성 때문에 한국을 매우 높이 대하던 시절이었다. 외자와 기술에 목말라하던 중국은 한국 자본의 투자유치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당시 한국의 상사원들과 관련 공무원들이 중국에 출장이라도 가면 칙사 대접을 받았다. 중국에 주재하는 많은 한국인은 유사 이래 한국이 중국에서 이처럼 우대받던 시기가 있었던가라며 우쭐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양국관계의 역전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꼈던 한국기업의 투자도 이제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강한 협상력을 보유한 대기업마저 중국 정부의 고자세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삼성과 LG가 각각 쑤저우시와 광저우시에 신청한 LCD(액정디스플레이) 현지생산 계획은 1년 이상을 끌다 지난해 11월에야 승인을 받았다. 대기업이 이럴진대,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사회문화 교류에서도 더 이상 한국의 일방적 비교우위 시대는 지났다. 폭발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는 중국 관광객은 한국 백화점의 최대 고객이 된 지 오래고, 대학가에서 중국 유학생의 소비 수준도 더 이상 후진국 유학생이 아니다. 양국 학자들 간 교류에서 주최 측이 제공하는 발표나 토론 사례비 액수도 중국 측의 손이 더 크다. 요컨대 최근 양국 관계의 양상은 한국에서 중국의 중요성과 비중이 날로 커지는 반면, 중국에서 한국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의 대중국 인식의 혼란과 불편함의 근본적 원인은 이처럼 확대되는 양국 간 비대칭성을 정확히 보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한국을 대하는 중국정부의 오만함이나 대중적 민족주의 정서 확대도 문제지만, 우리 내부에서 대중국 인식의 극단적 편향을 바로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편으론 과거처럼 한국이 갑, 중국이 을이라는 식의 인식 틀에 머물러 있거나, 다른 한편으론 중국의 부상에 지레 주눅 들어 불필요한 경계심과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편향적 인식으로는 한·중 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편향된 인식은 곧 왜곡된 대중국 정책을 생산하면서 양국관계의 악순환 구조를 생산한다. 최근 몇년간의 한·중 관계 양상이 그렇다. 수교 20년을 맞아 양국 관계를 논할 때 무엇보다도 우리 내부의 대중국 인식의 편향과 혼란을 걷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특히 한·중 관계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제시하면서 사회적 계도기능을 담당해야 할 지식인과 언론 등 여론주도 세력의 성찰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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