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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소임 다하면 신한국 절로 올것”/김 대통령­신한국인 대화요지

    ◎낙농기계화 등 농촌에 더 큰 관심을 김영삼대통령은 6일 낮 지난 대선때 민자당이 선정했던 신한국인 20명을 청와대로 초청,점심을 함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다음은 대화요지다. ▲김영삼대통령=이 시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다.너와 내가 없이 모두 자기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면 신한국은 저절로 온다. ▲최인혁씨(56·채소농사)=농촌의 근본적 문제는 과잉생산되면 농민이 울고,과소 생산되면 도시 소비자가 울게되는 유통구조에 있다.이런 악순환을 끊는 개혁이 필요하다. ▲최병규씨(33·중소기업인)=요즘 경기회복이 빨라지는 것 같다.전자제품을 만드는데 납품업체인 삼성·아남에서 수주를 많이 해온다.수출물량이 늘고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고 종업원들도 일하자는 분위기다. ▲나상덕씨(60·여·한산세모시 기능보유자)=모시타운을 건설해서 많은 부녀자들에게 모시 짜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최근 중국모시가 싼값으로 마구 들어와 한국모시가 애를 먹고 있다.중국 모시가 들어오지 않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김대통령=(홍성양계4H회원들에게)요즘 양계사업은 어떤가. ▲이환진씨(29·4H회원)=한꾸러미에 2천4∼5백원씩 받는데 사료값도 안된다.기계화 되면 값싸게 대량생산이 가능하다.축산기계화도 지원해달라. ▲김대통령=취임후에 농기계를 반값에 공급하고 있지 않나. ▲이씨=농민들은 대단히 좋아한다.그러나 경쟁이 심해 우리까지 차례가 안온다.하시는 김에 농촌에 더 관심을 기울여 달라.우리는 특히 양계협업화를 하려고 하는데 융자가 잘 안된다. ▲김대통령=(선인장 재배농에게)선인장은 어떤가. ▲이호상씨(38·선인장 재배농)=우리가 키우는 것이 세계제일이다.처음 선인장 재배를 시작할때 가족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신념을 갖고 이 일을 했다.한 분야의 최고의 장인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충렬씨(34·낙농업)=내년부터 우유품질 검사제가 바뀌는데 손으로 짜는 우유는 모두 불합격될 소지가 있다.검사제도변화에 맞춰 낙농기계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융자지원을 해주었으면 한다. ▲김재의씨(89·싸리공예 1인자)=한 우물을 파면서 열심히 일하니까 마음도 편하고 건강해진다.대통령이 주장하는 땀흘린 만큼 대접받는 사회가 참으로 마음에 든다. ▲김대통령=선거때 여러분을 신한국인이라 이름지었는데 각자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정말 신한국의 모범이다.
  • 체코에 명화 30점 소유권분쟁

    ◎공산정권 당시 수집가가 피카소작 등 기증/“강요의한 것” 딸이 국립미술관상대 반환소 민주화된 체코에서 옛 공산정권때 국가에 헌납된 예술품의 소유권을 놓고 국립미술관과 헌납자의 자손이 첨예하게 대립,법정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체코의 각 미술관과 박물관은 민주정부가 제정한 「복원및 반환법」에 따라 지난 48년 공산정권 수립과 동시에 국유화돼 그들 기관이 보유해온 수많은 개인소장 예술품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주는 일을 착착 진행해 왔다.장식예술박물관의 경우 지난 한햇동안 소장품중 7백여 작품을 개인에게 반환했다.또 프라하에 소재한 국립미술관의 루보미르 슬라비세치 관장은 『30∼40년동안 보유해온 예술품을 내놓자니 매우 서운하기는 하지만 국립미술관의 보유품목이 「몰수」에 기반을 둘 수는 없다』며 정부의 반환운동에 적극 동참할 의사를 표명했다. 그동안 국립미술관의 소장품을 대상으로한 일반시민의 반환권 제기는 1백50여건에 달하는데 대부분 원주인으로서 소유권은 인정받되 작품은 장기임대 형식을 통해 국립미술관이보유하는 선에서 원만한 타협을 보았다.그러나 빈센치 크라마르라는 예술사가겸 수집가가 일괄 헌납한 총 30점의 현대회화에 관해서만은 슬라비세치 관장을 위시,국립미술관의 자세도 「반환은 물론 소유권인정 절대불가」의 철벽을 견지,결국 법정까지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크라마르 헌납품은 한마디로 체코 국립미술관의 보물.16점의 피카소 작품과 2점의 브라크 작품을 포함한 이 일괄헌납품은 화가도 화가지만 무엇보다 1907년에 불이 붙었다가 1912년에 사그라진 「입체파」운동의 본질이 고스란히 보존된 것들이다.입체파의 활동기간은 짧았으나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며 입체파에 집중된 컬렉션 가운데 크라마르 헌납품에 비길만한 일괄수집은 찾을 수 없다. 남다른 예술안과 상당한 재력을 갖춘 청년 크라마르는 1910년부터 2년동안 파리를 드나들면서 당시 예술품애호가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던 입체파작품을 「헐값에」 사들였다.예를 들어 1911년5월에 피카소 3점,브라크 1점,앙드레 드렝 1점 등을 단 3천3백50프랑(6백40달러)에 매입했는데 크라마르 헌납품목록에 있는 피카소 작품은 현재 1점당 수백만달러를 호가한다.이 크라마르 수집품에 대한 반환청구는 크라마르의 딸이 제기한 것으로 그녀는 아버지가 죽기 직전인 지난 60년 공산정권의 강요에 못이겨 국립미술관에 자신의 입체파 컬렉션을 인도한다는 각서를 썼을 따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크라마르의 인도및 기증 각서를 손에 쥐고 있는 국립미술관측은 크라마르의 「자의에 의한 헌납」을 뒷받침하는 여러 보충자료와 정황증거를 댈 수 있다며 딸의 반환요구를 일축해버렸다.수천만달러에 이르는 값비싼 그림의 소유권은 법정에서 가려질 수 밖에 없게 됐는데 재판은 이달 중순 시작됐으나 소송 성격상 판결까지는 장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 임정유적과 중국의 장삿속/최두삼 북경특파원(오늘의 눈)

    상해에서 13일 거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복원 준공식은 우리에겐 조상의 얼이 새겨진 유적지를 되찾은듯한 감격을 안겨주었다.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짭짤한 돈벌이 수단으로만 활용되고 있을뿐이어서 뒷맛이 씁쓸했다.꼭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는 속담이 잘 어울리는 경우였다.공연무대만 제공했을뿐 중국인들은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뭉칫돈을 만지게 됐기 때문이다. 이곳이 유적지가 될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 선조들이 흘린 많은 피와 땀 덕분이었다.1926년부터 32년까지 7년간 임정청사로 사용되는 동안 이봉창의사의 일왕행렬 폭탄투척과 윤봉길의사의 강구공원내 일왕생일기념행사장 폭탄투척과 같은 각종 의거가 모의되는등 이곳은 해외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중국측은 당초 이곳을 헐고 아파트를 새로 지을 계획이었다.그런걸 삼성그룹이 말린뒤 30만달러를 들여 이곳에 살던 7가구를 이주시키고 건물구조를 옛 모습대로 복원했는가 하면 5천5백만원을 들여 그동안 한국에서 소장해오던 임정관련 유품 1백여점을 전시해주기까지 한것이다. 이 때문에 상해시당국은 앞으로 두고두고 입장료와 성금이란 명목으로 한국인의 주머니를 믿게됐다.그러나 한국관람객들이 무슨 면죄부라도 얻을듯이 듬뿍듬뿍 집어줄게 분명한 그 많은 성금은 단지 중국인들의 배만 부르게 해줄 뿐이다.삼성측은 이곳 당국자들과의 협상과정에서 입장료와 성금수입의 절반은 별도로 적립해뒀다가 다른 한국유적지 보호에 사용할것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끝내 양보를 얻어내지 못했다고 한다. 보호해야할 다른 유적지가 있거든 한국인 너희들이 돈을 내서 또 복원해라,그러면 우리는 앉아서 돈이나 벌겠다는 식이다. 중국인들은 요즘 한국 유물·유적 장사를 시작한듯한 느낌을 갖게할 때가 많다.상해뿐아니라 40년에 사용했던 중경임정청사도 상해보다 6배나 많은 1백74만달러에 복원키로 한국정부와 최근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린다.동북3성 일대에선 해외문화재로 분류해 창고속에 쌓아둔 한국관련 유물들을 보여주면서 사진 한장 찍는데 수백달러씩 요구하기도한다. 한국인은 중국인의 봉인가.조상들이 피땀흘려「재주」도 넘어주고 그 후손들은 복구비에 관람료,성금까지 뿌려 중국인들의 호주머니를 채워주고 있으니 말이다.
  • 안전무시 폭파공사의 뒤끝/이석우 사회부기자(현장)

    ◎지반 연약… 구조작업도 애먹어 『23년간의 사고처리반 생활가운데 이처럼 처참한 사고는 처음입니다.사망자 대부분은 탈선의 충격으로 종이를 구겨놓은듯 찌그러진 열차 철판에 끼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부상자들도 피투성이로 찌그러진 철판틈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사고가 난지 21시간만인 29일 하오2시50분무렵,승객79명의 목숨을 앗아간 부산 북구 덕천2가의 사고지점. 7∼8세가량된 남자어린이의 신체일부를 찾아내고 발전차안에 끼인 50대 승무원의 사체를 철판을 뜯어낸뒤 간신히 끌어낸 것을 끝으로 인명구조작업을 마친 한국해양구조대 구본정대장(49)과 129인명구조요원들은 피범벅이 된 희생자들의 유품을 차에 실으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129응급구조대의 양충효씨(33)도 『웬만한 사고모습엔 이골이 나 눈하나 깜빡않는 사고처리·인명구조대원들도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철판에 짓이겨진채 떼죽음당한 모습에는 제대로 사고처리를 진행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숨짓는 이들 주위에선 초대형 기중기등 각종 중장비를 동원한 철도청직원들이 뚝 잘려 나간듯 30m나 붕괴돼 버린 철로 양끝에서 지난밤에 이어 또다시 차체가 절반 가량으로 찌그러든 객차와 활로 밑으로 곤두박질쳐 있는 기관차를 해체,이동시키는 작업을 한창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암반이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부분 토사로 이루어져 있는 철로의 불안정한 지반때문에 적지 않게 애를 먹고 있었다. 『갑자기 지반이 꺼지면서 열차가 전복되는 것을 목격했다』는 이 지역주민인 윤정자씨(35·여·부산시 북구 덕천2동 331의1)는 『이 부근은 상습침수지역에다가 1년이면 수차례에 걸쳐 철로보수공사를 벌일 정도로 붕괴등의 위험이 높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적절한 안전대책없이 폭파작업을 계속하며 철로의 지반을 관통하는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이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에 대한 책임소재를 꼭 가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너진 철로지반밑에 처박힌 기관차와 객차에 대한 제거작업은 이날 하오 늦게까지 진행됐고 부산시 20개병원에 분산돼 있는 사상자들을 둘러싸고 유가족과 가족들의 오열은 더 심해져만 가는것 같았다.
  • 성균관/침체유고 활성화 나섰다/올 석전대제서 처음 대국민 성어발표

    ◎문묘 매일 개방·성현 박물관설립 계획/각종기구도 대폭개편,「생활유교」 탈바꿈 시도 유교가 전통문화 전승및 보존의 본산으로 거듭태어날 전망이다.이는 「박물관유교」로 불릴만큼 침체된 유교의 위상을 되찾아 「생활유교」로 탈바꿈 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이에따라 성균관을 주축으로한 유교는 사회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도덕성회복등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이같은 변화의 한 단면은 27일 열린 금년도(공기25 44년)춘기 석전대제.먼저 김경수성균관장 명의로 석전대제에 즈음한 대국민 성어가 처음으로 발표됐다.이날 김성균관장은 성어에서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재물과 자리를 탐하면 온나라 국민이 수치를 모르게 될것』이라고 말하고 『덕성을 길러 각기 주어진 자리에서 예의와 성심을 다하면 국민들이 스스로 불의를 부끄러워 하여 나라가 바르게 될수있다』고 강조했다.그러면서 『국가기강의 벼리는 윗사람의 겸손과 청빈으로부터 바로 세워지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성균관은 또 대성전 개방을 검토,그동안 초하루 보름 두차례만 일반에 공개하던 문묘를 매일 개방키로 했다.일반인들이 언제라도 성현들을 찾아 예를 올릴수 있게 함으로써 생활유교로 정착시킨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이와함께 과거 중국성현들을 모시던 대성전 좌우측의 동무와 서무 건물을 현재 성균관에 모신 우리민족 성현 18분에 대한 박물관으로 개조키로 하고 그 유물및 유품들을 확보키 위해 후손들과 교섭을 진행중이다. 성균관은 이어 기구도 대폭 개편,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종무에 투입함으로써 생활유교와 함께 「젊은유교」로의 변화도 모색하고 있다.이를 위해 기획실·출판부·유교교육원·사업단등의 기구를 신설 또는 재편해,4월중에 열리는 전국유림총회에서 승인을 구할 예정이다.특히 출판부는 이미 업무를 개시,석전일을 기해 「청소년의 생활예절」「우리의 생활예절」등 두편의 생활예절 서적을 펴냈으며 앞으로 문서를 통한 생활유교의 전파에 힘쓸 계획이다. 이러한 일련의 유교중흥사업 일환으로 성균관은 공자의 75대직손 공건씨(36)를 이번 석전대제에 초청했다.「공자와 경영학」 「공자와 인간학」등 저술을 통해 공자사상의 현대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공건씨의 기념강연회도 열렸다.그는 「현대산업사회와 공자학」을 주제로한 강연을 통해 『공자의 도의사상을 바탕으로한 인본주의 윤리야말로 현대산업사회에서 가장 중요시 되어야할 규범』이라며 『공자사상은 죽은 사상이 아니라 오늘날 인간생활에 반드시 적용되어야할 살아있는 사상』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날 석전대제에는 전국 향교대표및 지방유림 1천여명이 올라오는등 모두 2천5백명이 참석한 사상최대 규모로 치러져 눈길을 끌었다.석전대제는 봄 가을 두차례씩 서울 성균관 대성전과 전국 2백32개 향교에서 동시에 봉안되는 유림 최대의 행사로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유일하게 그 원형이 보존돼 있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 KAL희생자 시신 구소당국 인양막아/당시 잠수부 증언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지난 83년 사할린상공에서 소련공군기에 격추된 대한항공(KAL)007기 탑승객들의 유해·유품수거작업에 참여했던 소련잠수부들은 사건 당시 소련당국으로부터 시신은 일체 인양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11일 증언했다. 이날 모스크바에서 열린 KAL기사건관련 한·미·일·캐나다 유족대표회의에 증인으로 나온 잠수부 3명은 그들이 당시 무인 간첩비행기라는 말만 듣고 인양작업에 들어갔을 때 숨진 승객의 잘라진 손목 등 수많은 시신조각을 목격했으나 블랙박스와 전자장치외에는 어떠한 것도 회수해서는 안된다는 소련당국의 명령에 따라 시신을 그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고 회의에 참석한 한국유족대표들이 전했다.
  • KAL기 가해­피해자 첫 대좌/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오늘의 눈)

    11일 모스크바에서는 러시아당국의 주선으로 대한항공(KAL)007기 탑승희생자 유가족들과 007기격추사건에 관련된 옛 소련공군기 조종사,수색잠수부들과의 만남이 있었다.민간항공기의 격추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이 일어난지 꼭10년만에 「가해자」쪽과 「피해자」쪽이 처음으로 직접 만난 셈이다. 해저의 기체잔해 주변에 흩어진 희생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을 목격한 수색잠수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가족들은 북받혀오르는 슬픔을 못이겨 눈들이 벌겋게 충혈되며 흐느꼈다. 한 잠수부도 자신이 목격한 악몽이 되살아나는지 한손으로 눈을 가리고 함께 울먹였다. 하지만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탓인지 이들이 만난 외무부 영빈관 회의장 안은 적대감이나 분노와는 거리가 먼,비교적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러시아쪽 인사들은 앞머리에 유가족들에게 사과와 위로의 뜻을 밝혔고 유가족들도 이 모임을 주선해준 러시아당국에 사의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이 자리에 임하는 러시아당국과 유가족들의 입장에는 적지않은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유가족들은 유해 및 유품의 인도와 위령비의 건립등 인도적인 문제를 주로 거론했고 『뼈라도 좋으니 유해를 수습해다가 모국에 묻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들을 많이 했다.그러나 러시아쪽은 자기들이 보관하고있는 유해는 전혀없다는 입장으로 일관했다.유해와 유품을 소각,매장했다는 최근의 언론의 보도도 모두 부인했다.한 수색잠수부가 증언도중 시신을 목격한 사실과 그 가운데 일부를 유품과 함께 수거,소각·매장한 사실을 얼핏 발설하자 누군가가 옆에서 이를 제지하고 발언내용을 정정하기까지 했다. 러시아쪽으로서는 그것이 앞으로의 배상문제등과 연관돼있어 기밀유지를 필요로하는 부분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그러나 문제해결의 최선의 길은 어디까지나 진실을 밝히는데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한 유가족은 『10년이 지났다. 이제는 재한줌이라도 고국땅에 가져다 묻고 이 일을 잊고싶다.죽은이의 유해에 대해 이렇고저렇고 말만 많은것은 더이상 괴로워 못듣겠다』고 했다. 유해와 유품의 재수색 및 반환에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가져주기를러시아당국에 당부하고 싶다.
  • KAL기 격추 희생자/유해반환·배상 논의/10일 모스크바서

    KAL 007기 격추사건 관련문제들을 협의할 제2차 한·미·일·러 4개국 회의가 10·1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다. 이번 회의에서는 추모비 건립,추모제 거행,유품·유해 반환및 배상문제등 희생자 유족들을 위한 인도적 문제가 주로 토의될 예정이다.
  • 74돌 기념일에 찾아본 박태현옹

    ◎올해도 부르는 “기미년 3월1일 정오…/「3·1절 노래」의 작곡자를 아십니까/이완용암살기도 형의 의거 악상으로/독립정신 표현… 48년 작곡공모에 당선/선열의 항일정신 퇴색이 쓸쓸한 86세 노년 혹독한 민족수난사의 하나로 기록된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정기를 유감없이 보여준 3·1운동이 1일로 74주년을 맞았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우리는 3·1운동 주역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식을 거행하고 3·1절 노래를 부르며 다시금 그들의 민족정기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매년 갖는 3·1절기념식에서 불려지는 3·1절노래를 작곡한 사람이 박태현옹(86)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이날이 되면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박옹은 단지 우리 음악사에서 동요작곡가로 한두어줄로만 소개돼 있을 따름이다. 누가 일부러 그를 홀대하려고 한 것은 아닐지라도 민족의 수난과 굳굳한 정신을 애잔하면서도 강하게 표현한 이 노래를 만든 박옹은 우리 기억속에 흐려진 채 성남의 한 아파트에서 쓸쓸히 다시 맞은 3·1절에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형태은씨를 생각하며 회한에 잠긴다. 그가 노후에 거처하고 있는 곳은 성남시 하대원동의 13평짜리 주공아파트 7동 202호. 그는 최근 서울아카데미 앙상블의 총감독으로 일하고 있지만 고령으로 자주 나가지는 않으며 주말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고작이다. 부인과는 6·25때 헤어지고 2남5녀의 자식들은 모두 성장해 외국에서 살고 있어 혼자 쓸쓸히 지내는 그를 찾은 기자에게 그는 덥썩 두손을 잡으며 지나간 세월을 떠올린다. 그가 3·1절노래를 작곡하게된 계기는 48년 정부수립직후 이범석초대국무총리가 3·1정신을 기리기위해 당시 국학대학원장이었던 위당 정인보선생이 쓴 노래말에 붙일 곡을 공모하자 이에 응모,당선된 것. 그는 『훌륭한 작곡가들이 많아 응모할 생각은 없이 3·1운동의 의미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대로 작곡해 놓았다가 우연히 내놓은 것이 당선됐다』며 『이 노래가 살아 숨쉬는 독립정신을 표현할지는 자신 없었다』고 술회한다. 평양의 한 미곡상의 2남5녀 중 6째로 태어난 그는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에 진학,영문학을 공부하다 중학교선배이며 절친한 이웃 형인 안익태선생의 첼로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아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1936년 일본 도쿄음악학원에서 4년동안 첼로를 공부하고 귀국한 그는 한때 OK레코드음반회사에서 자신이 작곡한 「누가 누가 잠자나」「산바람 강바람」등 우리 귀에 익은 동요레코드도 출반했다. 이어 38년 이후 서울의 광신상고·경성고보등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지휘자로 일하던 그는 해방과 함께 서울중앙방송국에 입사,음악계장·편성계장으로 6·25때까지 근무하면서 「나팔꽃」을 비롯한 창작동요보급에 앞장섰다. 민족비극의 6·25와중에서는 애국심을 일깨우기 위해 「태극기」등 전시동요도 작곡하며 이은상·윤이상씨등과 군위문공연으로 전선을 누비기도 했다.그는 55년 김동진·이흥렬·나운영 등과 함께 한국작곡가협회를 설립,전후의 메마른 우리사회에 노래로 희망을 불어넣는등 활발한 활동을 폈지만 후세사가들로부터 이렇다할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일제에 의해 「좋지않은 노래」로 분류됐던 동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재명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던 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재명사건은 1909년 12월22일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던 민족반역자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붙잡힌 사건으로 그의 형도 이때문에 7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가 얼마후 후유증으로 병사했다. 그는 『요즘은 선열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혹독한 일제에 맞서 싸우던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며 형님의 마지막 유품이라 할 사진 한장을 들고 다시 회한에 잠긴다.
  • 문화재 밀매(외언내언)

    사가가 망하거나 가난에 쪼들리게되면 집안의 값나가는 가보나 귀중품부터 도둑맞거나 팔려가게 되는것을 보게된다.고대이집트나 그리스 인도 중국 남미등의 경우를 들필요도 없을것이다.구한말 가난하던 시절 그리고 망국의 일제시대를 통해 우리스스로 얼마나 뼈저리게 경험한 일인가. 비슷한 조짐의 말기현상이 북한에서 일고 있는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떨칠수가없다.굶주림에 지친 주민들의 문화재도굴이 성행하고 있으며 중국밀매인들이 사들이며 부추기고 있을 뿐아니라 중국으로 밀반출해 비싼값으로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이다.그정도도 큰일인 것을 단속하고 막아야할 지도자가 방조내지는 앞장서고 있다니 어이가 없다. 사실이 아니기를 비는 마음이지만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의 직접지휘로 외화벌이차원서 북한유물들이 중국으로 밀반출되어 외국인 특히 일인수집가들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밀반출은 중국왕래 당정간부나 상인들이 맡고 판매는 북경의 북한식당 김강원이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지금도 금강원엔 국보급등 고대자기·서화등 5백여점이 보관돼 있으며 60만달러의 가격으로 일인수집가와 상담이 진행중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급하면 조상의 얼이 담긴 문화재까지 팔겠다고 나섰을까 동정도 간다.하지만 북한문화재는 북한것인 동시에 우리것이기도 하다.우리도 지켜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같은 조상의 유품인 것이다.그것을 외국인 그것도 하필이면 일인에게 팔려한다니 어이가 없다. 문화재매출은 있어서 안될 일이지만 북한의 경우 어쩔수 없는 일이라면 적어도 외국인 특히 일인손으로 넘어가게 두어선 안될 것이다.문화재는 보호관리능력이 있는자가 맡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가난하던시절 떠났던 문화재가 지금은 돌아오는 역류현상도 드물지 않다.파산의 북한이 어쩔수 없다면 그문화재의 일본행을 막는일은 우리의 책임아닌가.
  • 「제주 민속문학 변용」 특집마련

    ◎제주문학 22집 출간… 김지원의 시 등 담아 남도 제주도 문인들의 정성이 담긴 「제주문학」제22집이 나왔다.「제주민속문학의 현대문학적 변용」이라는 특집을 마련해 제주설화·무가·민요·동요등이 현대문학에 어떤 형태로 변용되었는가를 다뤘다. 소설가 오성찬씨의 「제주시인 1호 김지원」은 19 20년대 중반 「조선문단」을 통해 중앙문단에 데뷔한 김지원의 생애와 작품들에 관한 글들을 발굴,게재했다.그밖에 오경훈 정순희씨의 단편소설과 강용준의 희곡이 실렸다.지난 연말 「그 짝글레기의 유품」으로 제9회 요산문학상을 수상한 오성찬씨의 수상소감과 제2회 제주신인문학상 입상자들의 입상소감등 기성·신인 문인들의 작품이 골고루 실려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제주문학」은 지난해부터 매년 2차례씩 발간되고 있다.
  • 공주 중호마을 반촌 탐방(한국정신의 원류를 찾는다:3)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캠페인/“기개가 첫 덕목” 3백년 이어온 선비정신/효종때 거유 이유태선생 후손 모여살아/“학문·덕 갖춘뒤도 때아니면 불출사” 일관/12대 종손 등 일제때도 한학공부… “학교교육보다 도리·예절이 중요” ○노인들은 상투 틀고 계룡산 산자락이 북으로 금강에 치달아 곰나루를 향해 넉넉하면서도 온화하게 팔을 벌린곳에 자리잡은 충남 공주시 상왕동 중호마을의 용문서원.등용의 옛마을로 계룡의 서기를 이어받은 우리의 선비정신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조선 중기 당대의 거유로 명성을 높였던 초려 이유태(1607∼1684년)의 후손들이 오순도순 마을을 이룬지 3백년.반촌의 긍지를 이어온 경주 이씨 집성촌으로 20여가구가 모여 산다.공주시내가 지척이지만 아직도 노인들은 대부분 상투를 틀고 있으며 철저하게 예의범절을 지키면서 선비의 기개를 가정교육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초려정신의 핵심은 선비로서 불출사의 기개를 강조하는데 있다.선비는 우선 학문과 덕식을 갖추고 그 다음일단 나가면 때를 좌지우지 할수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고향에 돌아와 은거해야 한다는 정신이다.이를테면 진퇴를 분명히 할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는 이를 몸소 실천,인효현소종 4대왕에 걸쳐 능참봉부터 사조참판·대사헌까지 모두 39가지의 벼슬이 주어졌지만 실제로 관직생활을 한것은 28세때 5개월과 30세때 6개월이 고작이었다. 그같이 짧은 관직생활에도 불구,그는 학문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당시 정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경세가로서 당대 호서산림 오현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다.그는 금산 노동 태생으로 18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장년이 된후에는 사계의 아들 집과 교류하며 그들 부자로부터 예학의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치국경세에 있어서는 율곡이이를 숭상했다.그에 학문세계를 율사연원으로 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초려는 병자호란후에는 덕유산중에 은거,모든 벼슬을 사양하였다.그후 효종이 북벌의 큰뜻을 품고 산림학자들을 불러모으자 결연히 상경하였다.그러나 조정은 시배들의 반목과 질시속에 온갖 주의주장만분분할뿐이었고 또한 청나라 사신의 위세는 극에 달해 있었다.그같은 분위기에서 친청파의 척결을 알리는 그의 논소는 조정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고 마침내 그는 다시 낙향했다. ○대사헌벼슬 물리쳐 그후 효종이 말년에 다시 밀지로 초려를 부르니 그는 북벌을 위한 구체적 국정개혁안으로 2만여언의 장문상소인 「만언봉사를 거의 완성해 가고 있을 때였다.그러나 그해(1960년) 효종은 승하하고 뒤이어 즉위한 현종은 왕명으로 만언공사를 제출케 했다.그 내용은 위민정치를 근간으로한 군사및 내정개혁사상을 삼고있다.그후에도 현종은 초려의 경륜을 사기 위해 벼슬을 높여 불렀으며 숙종때는 대사헌에 제수됐지만 불출사의 뜻은 완강했다.『나의 뜻이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벼슬길 보다는 땅을 일구며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이 그의 공직관이었던 것이다. 초려의 강직한 정신은 오늘날 후손들에까지 그대로 전수돼왔다.노인들은 상투등 과거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가운데 후손들에게는 현대식 학교교육도 애써 가르치고 있다.단지 일제때 일본식교육은시키지 않는다는 고집으로 종손인 12대손 정우씨(52)와 그 또래의 집안 사람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그는 『우리 형제 다섯중 위로 셋은 학교를 가지 못했고 비슷한 나이의 사촌이나 육촌형제 가운데도 학교를 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회상했다.대신 그는 15세때 대학을 떼는등 한학을 공부했으며 초려의 책을 비롯,집에 보관중인 3천여권의 서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있다. 자식들에게는 초려가 남긴 유일한 친필족자글씨인 「징분항선 복례」(분한 생각을 경계하고,나쁜것은 고쳐 착하게 하고,예를 따라 좇으라)를 가훈으로 가르치며 학교공부를 시켰다.학교공부중에도 사서는 반드시 익히도록 했는데 이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큰아들 상익씨(30)는 철학교수로,둘째아들 상욱씨(28)는 한문교사로 후학을 가르치는 교단에서게 됐다. 공주향교의 전교를 지낸 정우씨의 당숙 종언씨(70)도 이웃에 산다.그가 해석하는 오늘날 선비정신의 의미는 이러했다. 『선비가 박력이 약하고 경제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완고하고 고집불통으로 비쳐지는 것은 잘못입니다.현대식 교육을 받기는 받되 인간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 하고 잘살아야 하되 나혼자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그것은 이웃과 국가가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행동철학을 먼저 배우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도 있습니다.부모나 국가지도자는 이신교자지종(몸으로 행해 가르치는 사람을 따른다)으로 자식과 백성을 가르쳐야 하고 숭조사상의 강조도 교육의 한 방편입니다.선비는 부자가 돼도 부자티를 안내고 빈궁해도 빈궁한 티를 안내야 하는 것이지요』 용문서원은 이같은 초려의 선비정신을 구현하는 도장으로 오늘날 활용되고 있다.제사가 올려지는 사우인 명덕사를 제외하고는 일반에게 공개돼있다.강당인 중화당(17평)과 재실인 존성재(〃)는 초려학연구를 위해 강의실과 침실로 제공된다.연구활동을 돕기위해 현대식 입식 부엌도 설치돼 있고 이동식 화장실,난방도 완비됐다. ○내사책 등 유품 전시 또 유물전시관인 징원당(16평)에는 초려의 저서와 함께 임금이 내린 내사책,이씨 가문의 재산분금록,9대손 성암철영의 항일옥중일기등과 초려의 상아호패와 제사날을 기록해 놓는 기일첩,과거문제 요약집인 강경첨통등 많은 유품들도 전시,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용문서원 건립및 유지 보수를 맡고 있는 사단법인 이초로 기념사업회의 이종철회장(73·전공주교대회장)은 올해의 역점사업으로 장서각 건립을 꼽고 있다.현재 3천건에 달하는 책들이 그대로 창고에 쌓여있기 때문에 이의 분류,정리가 시급하기 때문이다.이를 위한 1억원의 충남도예산중 4천만원의 삭감으로 나머지 재원마련이 가장 큰 현안이기도 하다.국역작업등 서둘러야할 과제는 많지만 현재 1백66명의 회원들이 연회비 5천원씩 내는것으로 충당하는 기념사업회의 예산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회장은 『많은 학자들이 초려사상에 대해 자발적인 관심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그러면서 『지난 연말 부산대에서 다섯명의 교수·학생들이 와서 나흘동안 목록작업을 하고 갔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어려운 형편에 있으면서도 기념사업회측은 연구를 위해 오는 학생들에게 시설을 무료료 사용케하고 있다.3년째 겨울이면4,5일씩 초려학 연구를 위해 이 서원을 찾고 있는 20여명의 한남대 대학원생들이 이달 중순 올 것이라는 전갈을 받고 중화당과 존성재는 벌써 깨끗이 치워 놓았다.형편이 넉넉하다면 그들이 여유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식사까지 제공했으면 좋겠지만 형편상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장손 정우씨의 마음을 늘 안타깝게 하고 있다. ◎「만언대사」 상소한 당대경세가/후손들이 서원열어 초려정신 대이어/박성수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조선시대 최대의 국란,병자호란을 만난 것이 1636년(인조14년) 초려 이유태가 29세 되던 해였다.임진왜적이 물러나 대위국교가 재개된지 겨우 30년,또 다시 북쪽의 외적이 몰려와서 나라 안이 쑥밭이 되고 국왕이 삼전도에 나아가 수모를 당하는 그런 역사를 만나게 되었다.국론은 크게 양분되고 당쟁의 고질병이 온 몸을 덮치는 그러한 시대이기도 하였다.치국경세가 그 어느때보다도 시급한 때에 초려는 평소 품었던 뜻을 만언소라는 글로서 국왕에게 구민·구국책을 건의하였다. 그는 이 상소문에서먼저 농촌경제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농촌을 떠난 농민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황폐화된 토지를 일구게 하여야 오늘의 정치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제의하고 고른 세제의 확립과 면세특권층의 일소를 역석하였다.또 농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향약을 실시하여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만들고 오가작통으로 범죄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육제도의 일대쇄신을 주장하여 양반의 자제들만 교육하는 제도를 고쳐서 모든 양인의 자제를 학문기관에 보내게 하여 그 능력에 따라 직업과 신분을 선택하도록 하자는 획기적인 제언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고루한 지도층은 자신의 권익만을 생각하고 그의 개혁안을 묵살하였다.묵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탄핵하여 유배하고 말았다.이 유태는 그 뒤 스스로 초가집(초려)이라는 자신의 호와 같이 모든 관직(이조참판·요즘의 내무차관직)을 마다하고 향리에 웅거하여 나가지 않았다.그 유명한 초려의 불출사 선비정신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가 남긴 「초려집」 26권은 이유태의 선비정신을 담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오늘에 되살려야할 국민정신문화이다.다행히 최근 충남 공주 향리에 그 후손들이 용문서원을 세워 자제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 외래문화에 질식할 것도 같은 오늘의 세대에 이보다 더 참신한 청량제는 없다 할것이다.
  • 북한,대일 수교보다 대미 관계계선 우선

    【도쿄=이창순특파원】 북한은 미국과의 국회의원교류를 공식 제안하고 외교관계도 일본보다 우선해 추진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지난해말 평양을 방문한 미국의 스미스 상원의원과 북한담당 국무부관리에게 이같은 방침을 전하고 일본 중국 러시아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표명했다고 마이니치(매일)신문이 11일 워싱턴발로 보도했다. 북한은 한국전쟁때 행방불명된 미군문제를 협의하기위해 평양을 방문한 미대표단에게 당시 포로문제는 중국군이 담당했다는 사실을 처음 밝히고 그러나 미·북한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미군문제의 해결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식,유골 유품 기록등의 발굴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이신문은 전했다. 미대표단은 강석주외교부 부부장,양형섭 최고인민회의장등 북한 고위관리들과 회담했으며 북한은 이들에게 일·북한국교정상화교섭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위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있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 콩심은데 콩나고…/이이자(여성칼럼)

    60을 바라보는 지금 3명의 손자 손녀를 둔 할머니가 되고보니 나의 할머니·어머니가 유독 생각나는 것은 나이 탓인가? 올 새해에도 내가 지어준 한복을 입고 한껏 멋내는 손자 손녀의 모습에서 아득한 세월을 거슬러서 나의 어린시절을 기억해낸다. 4남1녀의 형제중 맏며느리이셨던 어머님은 5대봉사를 하는 종가집 종부로서 위로는 시종조부,증조모,시조모,시조부,시부모님과 아래로는 시동생들과 동서들이 함께 생활하는 대가족의 살림을 맡아하셨다.하루 일과가 끝난후 작은 어머님들과 설빔이나 추석빔을 만드시느라 늦은밤까지 바느질하셨던 기억이 난다.옷만드는 일이 평생의 직업이 되려고 그랬는지 어린 나이에도 내옷이 완성되는 것을 기다리느라고 졸음 가득찬 눈을 비볐던 것과,예쁘게 염색된 명주 두루마기에 아양까지 써서 동네 제일의 멋쟁이였던 일들이 떠오른다. 언제나 명절이 되면 나를 자랑스럽고 으쓱하게 해주었던 한복이 사실은 할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가져오셨다는 혼수가 내게 대물려졌던 것임을 철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더욱 그립게 해주었던 유품이 되었다.한복 만드는 일에 전념하느라고 주부로서의 역할이 미흡했던 때에 어머니께서는 여름철마다 모시옷을 손질하셔서 사위에게 주셨고 그 옷을 애용했던 남편도 이제는 고인이 되신 장모님의 옷 손질을 그리워하곤 한다. 콩심은데 콩이 난다고 하던가? 한복을 아끼고 가까이 하는 마음이 어릴적 가족과의 추억속에서 생겨나고 내 아이들에게 옷을 만들어주며 즐거웠던 기쁨이 이제는 손자 손녀들에게 옮겨가면서 옷짓는 일이 직업이 되도록 길러주신 분들이 생각되는 새해 아침이다.이미 출가하여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딸아이가 한복을 전공하는 교수가 되어 의논의 상대가 되어주고 며느리 또한 곁에서 일하는 우리 가족이다.먼 훗날 내가 그랬듯이 내아이들과 손자 손녀들이 할머니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한복을 사랑하고 보존시키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아이들의 맑은 눈빛속에 담아본다.
  • 고 오지호화백 추모사업 활발/10주기 맞아 생가에 기념관건립 추진

    ◎국어학자로서의 업적 기린 책도 출간/광주시 「오지호미술상」 운영… 각계서 적극 참여 남농 허건과 함께우리나라 남도화단에서 한국화와 서양화의 양대산맥을 이룬 고 오지호화백(1905∼1982)의 10주기를 맞아 기념미술관건립등 그를 추모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그가 타계한 24일을 일주일 앞둔 지난16일 광주 무등온천장호텔에서 「10주기 추모및 출판기념회」가열렸다.유족과 화단의 동료·후배,제자및 국문학관계자,지역유지등 4백여명이참석,한국 서양화단에 우뚝선 고인의 업적과 국어학자로서의 한글사랑에 대한그의 정열을 기린 모임. 1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이번에 출간된 책은 「미와 회화의 과학」「지산동초가와 화실」등 2편이다. 「미와 회화의…」는 단지 화가로 머물지 않고 미의궁극적인 본질을 구명한고인의 미학이론을 한데 모은 저술.고인의 손자이자 원광대교수인 병욱씨(35·미학과)가 정리했다.「지산동초가…」는 유정기 김기창 유경채 천경자 이구열 고건 남광우 홍남순 문순태등 고인과 생전에 인연을 맺었던 각계각층의인사 85명이 쓴 회고문집이다.순수의빛을 찾아서,우리시대의 사표,국한자혼용교육의 부활,우리것 보존에 앞장서니,지산동의 춘풍화기등 전5부로 구성됐다. 오지호선생은 전남 화순군 동복면 탁상리에서 태어나 전주고보와 휘문고보를거쳐 일본의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한뒤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교수와 국전초대작가,국전심사위원,예술원회원,국전운영위원등을 지낸 한국서양화단의 개척자.그는 또 한자폐지운동에 앞장서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창립했으며 국한자혼용 국교1,2학년 교과서를 자비로 출간하는등 국어학자로도 이름높았다. 이에따라 선생의 뜻을 기릴 미술관등을 세우자는 계획이 4∼5년전부터 발의돼 지난7월 개관된 광주시립미술관내에 50평규모의 「오지호기념관」을 설치,유작등 10점이 전시되고 있다.또광주시주관으로 「오지호미술상」을 제정,운영중이다.이와함께 지난해부터는 고인의 생가가 있는 동복면에 기념관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이 사업은 고인의 뜻을 이어 형제화가로 활약하고 있는 고인의 두아들 승우화백(63)과 승윤화백(52)주도로 이뤄졌다. 유족측에서는 기념관부지와 경비 1억원을 내놓았으며 전라남도에서 2억원,문예진흥원이 1억,전남 화순군이 5천만원등 모두 4억5천만원을 들여 건평60평규모의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이 그것.기념관에는 평소 선생이 사용하던 화구등 고인의 손때가 묻은 유물과 장롱,문갑,서적등 유품,그림등이 전시될 예정이다.그러나 당초 내년봄에착공해 연말안에 개관한다는 목표가 전남도측의 예산지원이 늦어짐에 따라 벽에 부딪쳐 지역주민들과 이 지역 예술인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 “KAL기 잔해·유품 화물차 7대분 수거”/러지 간부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지난83년 KAL기 격추당시 소련당국은 사건 해역에서 기체잔해,희생자 소지품등 화물차 7대분의 유품을 수거,목록을 작성했으나 지금까지 이같은 사실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KAL기 사건의 한 전문가가 8일 주장했다. 2년전 KAL기 사건의 내막을 최초로 공개했던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야지의 편집부국장 안드레이 일레슈에 따르면 소련군당국은 잠수부를 대거 동원,화물차 7대분에 해당하는 각종 유품을 인양했는데 이중 절반이상은 기체잔해들이고 희생자들의 트렁크,개인용품,편지 등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소련당국은 수거된 유품을 분류,10페이지 가량의 목록표를 작성한후 모두 모스크바로 옮겼다는 것이다. 일레슈는 구소련이나 러시아당국이 유품의 존재여부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이들 유품이 보관돼 있다면 인도적 차원에서 유가족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ICAO,이르면 연내 조사 착수/KAL기피격 규명 어떻게 되나

    ◎새해 1월말 진행 1차점검/유가족대표 참석 가능할듯 한국과 러시아·미국·일본등 관련 당사국들의 합의에 따라 대한항공(KAL)007기사건의 진상조사는 사고발생 9년남짓만에 다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손에 넘어가게 됐다.ICAO는 지난 83년 사고발생 직후 1차조사를 실시했었으나 관련자료등의 부족으로 최종결론을 못내려오다 이번에야 완전한 재조사를 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관련 4개국이 연명으로 「빠른 시일내(연내)」ICAO에 특별조사위원회의 설치를 요청하게 되면 ICAO이사회에서 위원회의 설치여부를 결정케 된다.조사위가 구성되면 러시아·미국을 비롯,관련국들이 확보하고 있는 관련자료 일체를 이 조사위에 제출하고 전문가들이 조사에 착수한다. 이와함께 새해 1월말 4개국 대표가 다시 모스크바에 모여 ICAO측의 조사진행상황을 1차 점검한다.이 자리에는 유가족 대표들이 동석,보상문제등 「인도적인 문제」의 처리를 협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때 기념비의 건립과 희생자 추모예배,유품처리문제 등도 논의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러시아측은 조사위에 옐친대통령 방한때 누락문제로 말썽이 됐던 항로기록테이프(FDR)와 음성기록테이프(CVR)원본을 비롯,모든 보유자료를 제출하기로 이미 약속했다.미국도 8일 상오 미공개 자료일부를 포함한 추가자료를 러시아측에 제공했고 이것들도 자동적으로 ICAO에 전달될 예정이다.미국측이 제출한 미공개 자료의 내용을 싸고 한때 「진상규명의 새로운 열쇠」라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의 공개는 일단 ICAO조사위로 넘어간 셈이다. 한편 8,9일 이틀동안의 다자간회의는 당초 ICAO주도아래 4개국이 참가하는 5자회담이 될 것으로 발표됐었으나 실제로는 ICAO가 옵서버자격으로 참가하고 러시아가 주도하는 4자회담으로 진행됐다. ICAO 특별조사위구성에 대해서는 한국등 당사국과 러시아 사이에 입장차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일 대표는 조사를 ICAO에 일임할 것을 주장한 반면 러시아는 ICAO를 배제한 4개국 국제조사위원회의 구성을 제의했다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해야한다』는 명분에 밀려 이를 철회했다는 후문. 법적문제가 걸려있는 보상부문에 대해서는 인도적 차원에서 거론한다는 원칙에 합의했으나 이것이 보상액수등에 대해 협의하겠다는 뜻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9일 공동성명 발표뒤 각국 대표단은 이번 합의의 도출이 『KAL기 사건이 냉전체제하에 발생했던 사건이고 이제 새 러시아가 출범한 이상 진상규명과 함께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담긴 것임』을 강조했다.아울러 이번 조사위의 구성을 통해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홍순영주러대사는 『이번 회담을 통해 유리 페트로프 러시아대표가 KAL기 사건에 대해 몇차례나 유감과 위로의 뜻을 표명하고 블랙박스의 자료전달과정에서 빚어진 양국간 마찰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했다』고 밝혔다.홍대사는 또 『한국대표단은 한국이 최대 피해국인 점을 감안,테이프 원본등 관련자료를 우선 인도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ICAO가 완전한 책임아래 객관적 조사를 해줄 것으로 믿고 ICAO에 일임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 강릉향토사료관 개관/영동지역 역사유물 연구·보존 활로텄다

    ◎유·무형문화재 1천여점 체계적 전시/대학박물관 중심 탈피… 시민에 친근감/개관되자마자 “만원”… 교육·관광 새 명소로 강릉향토사료관의 개관으로 박물관이 없는 영동지방의 역사유물 및 민속자료에 대한 보존·연구가 활기를 띠게 됐다.사료관은 또 지난 15일 개관되자마자 하루 1천명이상의 관람객이 찾아드는 등 지역민에 대한 사회교육의 장은 물론 강릉지역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강릉향토사료관은 강릉시가 지난 89년부터 모두 28억원을 들여 죽헌동177의4 오죽헌경내 5천2백22평의 대지위에 세웠다.건물은 지상1층 지하1층에 2백50평 규모.외관은 전통미를 살린 한옥이며 내부는 현대식으로 지어졌다. 사료관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유물 및 자료는 모두 1천여점이며 이가운데 4백70여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강릉시는 당초 사료관의 개관작업을 하며 어떤 성격을 택하느냐를 놓고 고민에 빠졌었다고 한다.민속박물관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강릉지역에 독특한 민속이 다양하게 전래되고 있어 관객의 흥미를 끌수 있는 전시가 가능하다는것이었다.또 민속박물관이라는 명칭이 일반인들에게 친근한 느낌을 주며 어느정도 권위도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였다.그러나 대세는 향토사료관을 주장하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이들은 최근 영동지방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청동기·원삼국·삼국시대에 이르는 유적이 체계적으로 발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동은 물론 강원도 전체에 박물관하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때문에 민속자료에 국한될 우려가 있는 민속박물관보다는 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의 기능을 함께 하면서 규모는 작은 향토사료관이 되는게 바람직하다고 주장을 폈다.우선 지역내 역사유물및 민속자료에 대한 수집 보존 연구를 하고 후에 박물관이 세워지면 해당기능을 넘겨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탄생과정을 거쳐 사료관은 선사문화실과 역사미술실 민속문화실 야외전시장으로 4개부문의 전시영역을 갖추게 됐다. 먼저 66평규모의 선사문화실에는 명주 심곡리에서 발굴된 구석기시대 찍개 긁개를 비롯,강릉 명주지역에서 출토된 선사유물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다.특히 명주 안인리의 원삼국시대유적지를 바탕으로 당시 생활상을 재현해 이지역 선사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54평 규모의 역사미술실에는 보물 제81호인 한송사터 석불좌상을 비롯,강릉12향현의 유품,관동8경도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92평 규모의 민속전시실에는 중요무형문화재인 강릉단오제와 강릉농악을 축소형으로 재현하고 민가와 생활용구등을 다양하게 전시,이지역 선인들의 생활상을 살필수 있게 했다. 야외전시장은 지역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선정비들과 신라시대의 석탑기단면석,석불입상들을 한데 모았으며 양양 포월리의 석실고분과 괸돌의 하부구조도 옮겨 전시하고 있다. 사료관은 현재 장상준관장등 14명의 직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사료관의 개관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관동대 신호웅박물관장은 『그동안 영동지역의 유물수집과 연구는 대부분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대학박물관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만큼 사료관의 개관이 반갑다』고 말했다.신관장은 『그러나 사료관이 단순한 관광자원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유물수집과 연구에 획기적인 예산을 배정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언론입국에 생애바친 선각자/서울신문 초대사장 위창 오세창선생

    ◎독립운동·저술 등서 뚜렷한 발자취/23세에 첫발… 필봉으로 민족혼 고취/팔순고령에도 본지서 해방조국 정론기개 불태워 『매일신보는 이제 혁신되어 이름조차 새로운 「서울신문」으로 냅떠 나서게 되었다.…우리는 일당일파에 기울이지 않고 언론보도에 공정하고 적확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민족총력의 집결통일과 독립완성의 시급한 요청에 맞추어 단호매진하는 동시에 국내를 비롯하여 연합우방의 동업기관과 더불어 민주주의적 질서수립을 위해 상응한 노력을 기울이려 한다…』19 45년 11월22일 혁신사란 이름의 서울신문 창간사중 일부이다. 언론입국의 기치를 이같이 내걸고 새로 태동한 서울신문에 초대사장으로 추입,격랑의 그 어려운 시절을 이끌던 이는 바로 위창 오세창선생이었다. 큰 체구에 근엄한 표정,그리고 절고의 기품과 해박한 지성으로 명성 높은 원로 민족인사였다.위창은 33인(3·1운동)의 한사람이자 불굴의 독립투사로 더 이름이 높다.또 근대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탁월한 서예인이었다.그의 행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개화사상 일찍 눈떠 개화운동및 개화사상가,언론인,종교인,전각가·저술가·고서화 수집가를 덧붙여야 할 만큼 다각적인 발자취를 남긴 민족근대화의 선각자였다.특히 개화사조의 계몽과 주권의식의 고취를 민족에 불어넣기 위해 벌였던 개화및 언론활동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인식을 새롭게 할 만큼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위창은 개화사상에 일찍이 눈을 뜬 부친 오경석과 은사 유대치의 감화를 받아 일찍부터 개화및 진보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자신의 개화사상이 곧 민족의 근대화를 이루는 지름길로 여겨 개화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이 약관 23세이던 18 86년의 일이다.박문국의 주사로서 당시 관보였던 「한성주보」의 기자를 겸하면서 처음 언론을 대했다. 정치적 격변의 시대이기도 했던 그무렵 위창은 지위를 높여 영화를 누릴 기회도 많았으나 이를 마다하고 필봉의 길을 택했다.언론을 통해 민족에 개화의식을 심어 끝내는 국권회복의 길을 앞당기려는 깊은 뜻을 품었기 때문이었다.기자생활은 18 88년 7월 한성주보가 폐간될때까지 1년8개월간에 불과했다.그러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을 일깨우는데 집념을 불태운 그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그뒤 31세이던 18 94년 국군기무처의 낭청(총재비서관)자리에 관직을 얻은 그는 당시 영의정이던 김홍집의 3차내각이 무너지기까지 의정부주사·농상공부 참사관·통신국장을 지내면서 줄곧 정부시책을 통해 또다른 민족근대화 작업을 집요하게 폈다. 위창의 민족개화운동은 도쿄 망명중 동학교주 손병희를 만나 입교하면서 그 날개를 더 달았다.19 06년에는 항일구국운동을 위한 신문 「만세보」를 손병희의 재정적 후원으로 창간,사장에 취임하면서 본격화 하기 시작했다.당시 위창은 주필로 국초 이인직을 취임시켰다.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가 처음 발표된 것도 바로 「만세보」지면을 통해서였다. ○「만세보」 사장 취임 그러나 만세보는 경영난에 빠져 이듬해에 폐간되는 비운을 겪었다.위창은 권동진·장지연·김가진등과 「대한협회」를 조직,사회개혁과 항일운동을 계속했다.그러면서 이상재·김규식·안창호등과 「대한학회」발기인으로활동한 위창은 19 05년 5월 대한협회의 기관지 성격으로 「대한민보」를 창간,다시 사장으로서 항일언론을 지속하는등 민족을 위한 투쟁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대한민보는 창간 이듬해 한일합병으로 사라지고 말았으나 당시 매우 획기적이고 용기있는 신문편집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하다.창간호부터 1면에 청년화가 이도영이 붓으로 그린 비판적 시사만화를 연재한 것도 이때다.시사만화는 미련한 놈이 도끼로 나무를 찍다가 자루가 빠지는 바람에 도끼날이 제 발등에 떨어져 찍히는 내용이었다. 이 만화의 설명은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미완용(이미완용)자부상피(자부상피)」라는 설명이 그것인데 당시 「매국대신 이완용이 자부와 상피붙었다」는 소문을 풍자한 내용이다.대한민보에는 이밖에도 일제통감의 침략행위와 일인들의 악행을 풍자한 만화도 등장했다.또 우리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뒤에도 군복을 입고있는 이완용내각의 군부대신 이병무의 모습을 그려놓고 「벌거벗고 군도차기」라고 꼬집은 만평이 게재되기도 했다. 이 모든 비판적 만평은 위창의 항일언론정신에 바탕한 것은 물론이다.당시 그같은 통렬한 설명도 위창이 직접 붙인것으로 알려져 있다.매우 엄격하고 불의에 타협않는 단호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위창은 과묵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말과 행동을 늘 은인자중하여 심중을 알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기회를 얻으면 결코 방관하지 않는 기민성을 보이기도 했다. 생전에 술과 담배는 즐겼다.19 19년 3월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으로 왜경에 체포,실형을 받은뒤 술을 끊기까지 두주불사에 줄담배였다. 한국서화사연구의 혁혁한 공로자로서도 언론인 못지않게 이름이 높다.김석학의 대가이던 부친 적매 오경석의 아들답게 근대적 미술가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의 발기인이자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폭의 활동을 했다.위창이 서화사연구와 전서쓰기및 전각에 전념하기는 통한의 국망을 본 이후 천도교도사로 은거하면서였다. ○서화사연구에도 열성 그리고 고서화수집가로도 유명했다.한학과 김석학에 깊은 조예가 없이는 손대기 어려운 전서에 뛰어났다.전서로당대의 일인자였던 그는 예서를 씀에도 고격하여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했다.전서의 높은 경지와 함께 전자를 돌도장에 새기는 전각에서도 근대이후 일인자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남긴 미술사적 공적은 「근역서화징」의 편저이다.「근역서화징」은 삼국시대이후 3백92인의 화가와 5백76인의 서가,그리고 시·화를 겸했던 1백49인의 기록을 시대순으로 정리한 책자를 말한다.필생의 대업적인 「근역서화징」은 오늘에도 그 방면의 유일하고 거의 완벽한 사전으로 학계와 사회의 길잡이가 돼있다. 육당 최남선은 이 책자가 출간되었을때 『암흑한 운중의 전광』이라는 표현으로 그 업적을 극찬할 정도였다.위창은 또하나의 편저업적인 「근역인수」를 남겼다.조선시대 초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서화가 8백56인의 성명·아호·별호·자·이명의 도장 약3천8백종을 실제의 날인본으로 모은 것이다.한국전각예술의 역사적 흐름과 실제 사용의 행적을 보여주는 최대의 자료집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밖에도 1천1백16점의 글씨와 그림을 묶은 「근묵」이며삼한의 와당을 모은것등 많은 문화재를 수집 정리했다.위창이 명현석유를 비롯한 옛서화가들의 필적을 이처럼 모아 정리한것은 단순한 취미에서가 아니었다.선인들의 문화유품이야말로 민족의 정신적 생명으로 인식,이를 아끼는 마음에서 였다.그것은 위창의 애국애족정신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그의 이러한 정리작업은 광복을 맞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뒤 일제가 패망하고 국권을 찾으면서 위창은 팔순의 고령으로 서울신문 사장에 추대되었다.광복의 땅에서 우리말로 정론을 펴는 서울신문 초대사장에 취임한 그는 얼마 안되는 세월이었지만 노후의 기개를 불태웠다. 8·15 1주년을 맞아 지난날 일제에 빼앗겼던 대한제국 황제의 옥쇄를 민족을 대표하여 인수했던 위창­.그는 6·25로 가족과 함께 내려간 피란지 대구에서 1953년 4월 세상을 떠났다.그때의 나이 천수를 다한 90세였다.
  • “KAL격추 정치적 책임 질수없다”/러 외무차관

    ◎사할린 위령탑건립 적극 협조/희생자유족과 만나 러시아연방 게오르기 쿠나제 외무차관은 20일 낮12시 서울 신라호텔에서 KAL 007기 피격희생자 유족회원들과 만나 『러시아는 구소련의 KAL기 격추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질 수 없으며 배상등 법률적 문제는 아직 정확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좀더 기다려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유족들과의 질의 응답 내용이다. ­옐친대통령이 뒤늦게나마 블랙박스를 인도해줘 고맙지만 사과내용이 미흡하다. ▲귀중한 생명이 희생된 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유족들을 직접 만나니 그동안 한국정부와 언론을 접하던 것과는 또다른 감정이 든다. ­구 소련의 의무와 권리를 모두 승계한 러시아가 이 사건의 모든 책임을 져야하지 않는가. ▲러시아정부는 구 소련의 행위에 대해서는 정치적 책임을 질 수 없다. ­유해와 유품을 어떻게 처리했는가.생존자는 없는가. ▲사건당시 바다에서 나온 유품들은 일본에 전달했다.유감스럽지만 생존자는 없다. ­사할린에 희생자들의 위령탑을 세울 용의는. ▲적극 검토하겠다. 쿠나제 외무차관은 유족들이 계속 피해배상 등을 요구하자 배상문제는 정부간에 해결되어야 하며 이 자리가 정치적으로 이용돼서도 안된다고 말해 유족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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