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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때 집단총살 추정 유골 산청서 1백여구 발굴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집단총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 100여구가 발굴돼 정부차원에서 진상조사를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추진위원회’(위원장 도법스님·실상사 주지)는 “지난 14일부터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마을 뒷산 소정골짜기에서 피학살자에 대한 유골 발굴작업을 벌여 지금까지 100여구의 유골을 발굴했다”고 15일 밝혔다. 추진위는 “1951년 2월 20일부터 25일 사이에 국군이 민간인 500여명을 11대의 버스에 태워 이곳에 끌고온 뒤 기관총으로 총살했다는 언론보도 내용(1960년 5월 보도)을 근거로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위원회 관계자는 “발굴된 유골중에는 10살 정도로 추정되는 어린이의 유골도 1∼2구가 있으며 숟가락과 식기·단추 등의 유품이 발견돼 이들이 민간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위원회측은 피학살자들이 이곳 주민들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끌고온 보도연맹 관련자들이거나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던 정치범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정부차원의 집단학살 진상조사단 구성을 요구하는 한편 유족찾기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산청 이정규기자 jeong@
  • [외언내언]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티베트어로 지혜의 바다라는 뜻이다.중생을 널리 구하기 위해세상에 온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티베트 법왕’의 명칭이다. 600만 티베트 민족뿐 아니라 인권운동가,인류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고있는 달라이 라마 방한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한다.지난주 이정빈(李廷彬)외교통상부장관이 탕자쉬안(唐家璇)외교부장을 만나 불교계의 요청과 우리 정부 입장을 전하고 개인자격 입국허용 방침을 완곡하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다행히 탕자쉬안 외교부장이 달라이 라마는 종교인이 아닌 정치가라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우리 정부의 방침에 크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전언이어서 성사 전망이 밝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1935년 7월 6일 티베트의 동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3세 달라이 라마 화신으로 인정받았다.달라이 라마가 운명하면 누구에겐가 몸을 바꿔 다시 태어난다는 티베트의 신앙에 따라 여러 시험을 거쳐 공인을 받은 것이다.당시 2살이던 그는 생전 처음 보는 달라이 라마 13세의 유품들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고 찾아간 사람의 신상을 일일이 기억하는 법력을보였다고 한다. 5살 나이로 법왕에 즉위한 달라이 라마는 그러나 15살 되던 해인 1950년 중국의 침공으로 영적 지도자일 뿐 아니라 티베트 해방을 위해 몸으로 싸우는독립운동가로 나섰다. 달라이 라마는 10대 소년으로 왕궁을 떠나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협상을 위해 베이징을 넘나들었다.그러나 그의 법력도 힘의 현실세계에서는 통하지 않았던지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59년 인도로 망명했다. 망명 후 그는 비폭력 평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그의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은 젊은 세대의 반발도 샀지만 그는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비폭력 노선을 이렇게 설명했다.“한번 당신의 마음이 분노에 휩싸이면 그 마음은 광기로 변합니다.그렇게되면 당신은 올바른판단을 할 수 없으며 진실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고요함을 유지하면 모든 것을 그 자체대로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같은 말이라도 법력에서 나온 말은 힘이 있다.그의 비폭력 평화운동은 티베트 민중뿐 아니라 세계인의 가슴에 닿는다.그에게 노벨평화상(1989)이 주어진 것도 세계인의 가슴을 출렁이게 한 비폭력 평화 메시지 덕택이다.달라이라마의 방한이 성사되기를 기대한다. 金在星논설위원 jskim@
  • 용미리 현대식 납골당 완공

    고인(故人)의 납골을 직접 볼 수 있는 현대식 납골당이 오는 29일 시민들에게 개방된다. 서울시는 지난 97년 12월 착공한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 ‘제2 추모의 집’을 완공,이날 준공식을 갖기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5번째 시립 납골시설인 ‘제2 추모의 집’은 지하 1층,지상 3층,연건평 895평에 자연채광이 되도록 개방형 구조로 지어졌다. 특히 국내 처음으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납골함 840기를 시범설치해 고인의 사진이나 편지 등 유품을 함께 비치할 수 있도록 했다.부모를 함께 모시기를 원하는 유족들을 위해 건물 뒤편 옥외공간에는 부부형 벽식 납골함 3,744기도 만들었다. 또 건물 1층에는 유족들이 고인의 동영상과 육성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사이버 추모실과 휴게실도 갖춰졌다. 건물 내부 벽면에는 노재승(盧載昇) 성신여대 교수가 그린 ‘십장생도(十長生圖)’와 조각가 심정수(沈貞秀)씨의 작품 ‘천상(天上)의 평화’가 화강석에 부조로 설치돼 예술공연장이나 대학도서관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설계됐다. 제2 추모의 집은 3만6,945위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오는 2002년까지 사용이 가능하다. 한편 서울시는 용미리에 1만5,000위를 모실 수 있는 왕릉식 '제3 추모의집’도 추가 건립중이다. 문창동기자
  • 안중근의사 순국의 현장

    *뤼순감옥의 안중근과 신채호. 안중근의사 순국일인 3월 26일 중국 요령성 뤼순시 향양가 139호 원호방에자리한 뤼순감옥은 90년전 동양천지를 진동한 의사(義士)의 죽음을 아는지모르는지 이날따라 많은 중국인 참관자들로 하루종일 붐볐다. 봄기운 완연한 따사한 햇살아래 사위가 붉은 벽돌 담벽으로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뤼순감옥은 일제에 저항한 수많은 중국애국자들의 수난의 장소지만지금은 역사관광지가 되고있다. 워낙 큰사건 큰인물이라 안의사가 순국한 날까지 갇혀있던 ‘특설감방’은의사가 5개월동안 머물면서 사용했던 지필묵과 몇가지 유품이 전시되고 벽에는 휘호 두점이 걸려있었다. 의사 순국 90주년을 맞아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사장 박보희)간부들이 안의사의 흔적이 깃든 감방에서 간소한 추념식을 갖고 서울에서 만들어온안내판 현판식을 거행했다. 뤼순감옥은 중국정부가 국가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하고 있다. 공식 명칭은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진열관’이다. 50여만명의 중국 항일정치범과 사상범그리고 일부 한국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옥살이를 하고 상당수는 처형되거나 옥사했다. 일제는 ‘국사범’또는 ‘회유’의 차원에서 일반 재소자의 감방이 아닌 간수사무실 바로 옆에 특별감방을 만들어 안의사를 수감했다. 이것을 근년에복원하여 요즘 ‘특별관리’하고 있다. 중국정부도 안의사의 인격과 거사를높이 평가하여 외국인 중에는 유일하게 ‘안의사감방’을 보존·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채호선생도 이곳에서 옥사 뤼순감옥은 뤼순시의 역사와 함께 제국주의 침탈의 고난의 사력(史歷)을 간직한 곳이다. 원래 러시아제국이 1902년 동북3성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양민들을 수감하고자 신식감옥을 신축한 것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확장공사를 하여 1907년에는 감방 253칸, 중벌수형자용 독감방4칸 등 2천여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감옥을 만든것이 오늘에 이른다. 우리가 뤼순감옥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안의사의 순국과 함께 신채호선생이 이곳에서 8년 옥고끝에 옥사당한 사유때문이다. 단재는 안의사가 순국한지 18년이 지난 1928년 5월 대만 기륭항에서 일본 수상서원에게 체포되어 이곳에 수감되었다. 대련(大連)법정에서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뤼순감옥으로 압송되어 복역한 것이다. 단재는 죄수번호 411번으로 붉은 수의를 입고한많은 옥살이를 이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이른바 위채(爲채)사건으로 그와함께 수감된 임병문은 26세로 재판과정에 고문으로 숨지고 이지영 ·이종원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옥살이 8년만에 단재는 건강이 심히 악화되었다. 형무소측의 병보석 출감회유에도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단호히 거절하다가 1936년 2월 18일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옥사한 것이다. 유해는 곡절끝에 충북 청원군 향리에 모셔졌다. 애국자들의 혼령 깃든 곳 뤼순감옥 수인묘지 어딘가에 묻혀있을 안의사의 유해는 순국 90주년이 지난지금까지도 찾을 길이 막막하다. 1986년 7월 북한에서 유해발굴단이 수인묘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채호선생이 8년동안 옥고를 치룬 감방은 위치가 어디쯤인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제가 쫓겨가면서 모든 자료를 불사른 때문이다. 다행이 진열관의 낡은 서류철에서 찾은 뤼순감옥에 입감할 때 찍은 퇴색한 한장의 사진이 그나마 ‘존재증명’이랄까. 옛날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인 뤼순의 언덕받이에 자리한 감방에서 남다른애국심과 역사의식이 투철했던 안의사와 단재 선생 그리고 무명지사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이역에서 몸을 불살랐을까. 안의사의 유해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현지에서 새삼 절감했다. 중국측의 태도도 아직은 미지수다. 그렇지만 더 늦기전에 남북이 협력하여 중국정부를 설득해서라도 반드시 유해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단재 선생이 옥고를 치룬 감방의 위치라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 뤼순에서. kimsu@. *인근 거주 중국인 증언.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유해는 뤼순감옥에서 동쪽방향으로 500∼600m 지점에 있습니다, 최근 일본전문가들이 발견한 지도에 나온 뤼순감옥 동남쪽 300m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200~300m 더 가야 합니다” . 중국인 탄충쿠이(潭忠魁·79)씨는 “안의사께선 순국당시여순 고등법원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800m 지점에 묻히셨다”고 증언했다. 안의사의 순국추모식이 열렸던 지난 26일.기자는 뤼순감옥 부근에 살고있는탄 노인을 만나 그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그는 일제(日帝)때부터 뤼순감옥 주변 마을인 위엔바오지에(元寶街) 56호에 살아온 이곳 토박이.그 역시안의사의 순국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감옥 관계자,당시 지역 노인,일본인관계자들로부터 안 의사의 묘지 위치를 여러차례 확인해 지금까지 기억하고있다고 밝혔다. □45년 당시 상황은. 일제가 패망하고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감옥과 일반 묘지에 대한 파괴행위는없었다.다만 일본인 납골당과 군인 묘지는 폭파시키고 떠났다.한국인과 중국인 수감자들의 유해는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안의사의 유해도 마찬가지다. □이후 훼손됐을 가능성은. 일제 패망직후 소련군이 진주해 점령했지만 훼손 행위는 없었다.1970년이후이 지역의 개발이 가속화됐지만 유해가 묻혀있는 지역은 포함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다렌(大連)의 일본학교를 졸업한뒤 지난 1942년부터 조선은행에서 일하면서 많은 조선사람들과 접촉하며 친분을 쌓으면서 안중근을 존경해 왔다.일본패망전에 일본인들로부터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묘소와 관련한 다른 정보는. 지난 85년 판우충(潘茂忠)뤼순감옥 전시관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를 표시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당시 미국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손자들이 감옥전시관에 전달해온 자료였다.판 연구원의 일본어 선생인 나는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많은 토론을 나눌 수 있었다. □안의사 유해발굴에 대한 북한의 관심은. 지난 86년 북한의 당정(黨政)대표단이 방문,안의사의 유해의 위치를 확인한적이 있다. 판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 표시도를 근거로 북측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유해발굴에 북측도 높은 관심을 밝혔었다. 뤼순 김삼웅 주필@kdaily.com. *뤼순감옥은 어떤곳. 한민족의 비통과 투쟁의 숨결이 담긴 뤼순(旅順)감옥.50여년의 풍상속에서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뤼순시 외곽 위안바오방(元寶房)지역에서 지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민족의 스승인 단재 신채호(申采浩)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의로운 삶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총 면적 22만6,000㎡.감옥주위에는 높이 4m ,둘레 725m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회색 벽돌건물은 러시아가 지은 것이고 붉은 벽돌건물은 일제가건축했다.감방수는 253칸.한 칸이 가로 5.6,폭 2.7m였다.일제말기 감독원만120명 가량됐다. 각종 고문도구와 고문실,햇볕이 통하지 않는 암실 등도 발견됐다.교수형을 집행하는 곳도 그대로 남아있다. 1939년부터 일제에 의해 ‘여순 형무소’라고 불렸다. 제정러시아가 얼지않는 항구를 찾아 남하정책에 박차를 가하던 19세기말부터의 역사를 담고 있다. 1898년 3월 차르 황제의 러시아제국이 다롄(大連)과 뤼순(旅順)을 조차한뒤 이곳에 관동주(關東州)총독부를 설치했다.그뒤 1902년 식민지배를 위한감옥을 건설한다. 러·일전쟁이후 이곳을 점령한 일제는 러시아가 지어놓은 85칸의 감옥을 257칸으로 늘리고 ‘관동도감부 감옥서’(關東都督府 監獄署)라고 불렀다.그뒤1920년에는 관동청 감옥(關東廳 監獄)으로,1926년에는 ‘關東廳 형무소’ 로,1934년 ‘관동 형무소’로 개칭한다.일제의 식민지배가 강화될수록 형무소가 커지고 수형자에 대한 탄압도 강화됐다.
  • 통영-거제,유치환生家 건립 경쟁

    우리나라 시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선생의 생가를 경남 통영시와 거제시가 경쟁적으로 건립,예산 낭비는 물론 지역이기주의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통영시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청마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98년 12월 11억원의 사업비로 시내 정량동 4,000여㎡에 건립한 청마문학관준공식을 오는 14일 갖는다고 31일 밝혔다.이날 동호동 시민문화회관에서 청마 추모음악회와 원로시인 김춘수(78)씨에 대한 청마문학상 시상식도 계획돼 있다.청마문학관은 안방 등 본채와 아래채로 된 60여㎡의 생가와 170㎡ 규모의 전시관,휴게실,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거제시도 청마의 출생지인 둔덕면 방하리 3,700여㎡에 14억원을 들여 청마 생가를 건립하기로 하고 지난 26일 기공식을 가졌다.내년말완공 예정으로 유품을 보관할 전시관과 사랑방이 있는 A동,노인정·도서실이들어서는 B동,방과 부엌을 갖춘 C동으로 건립된다. 이같이 인접한 양 시가 불과 20여㎞ 떨어진 지점에 청마 생가를 잇따라 건립하자 양측주민들은 “두 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비슷한 사업을 펼치는 것은 예산 낭비”라며 “청마의 고향에 대한 논란을 벌이기보다는 특색있는 문화사업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통영 이정규기자 jeong@
  • 6·25 전사자 유해 南北공동 발굴 추진

    국방부와 국방부 산하 ‘6·25 전쟁 50주년 기념사업단’은 관계부처 및 미국과 협의를 거쳐 적절한 시기에 6·25 전사자 유해를 공동으로 발굴하는 방안을 북한에 공식 제의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30일 “6·25 50주년을 계기로 동족상잔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전사자 유해 발굴을 추진하기로 했다”면서 “남한뿐 아니라 휴전선 및 북한내 주요 전투지역에서 공동으로 유해를 발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관계부처 및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최종 입장을 확정한 뒤 적절한 시기에 북한측에 공식 제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 국방부는 조만간 육군본부에 ‘6·25 전쟁 전사자 유해발굴기획단’(가칭)을 설치한 뒤 오는 4월부터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착수할 방침이다.발굴된 유엔군 유해는 관련 국에 인도하고,북한군 유해는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측에넘기기로 내부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군 전사자 유해는 군번표와 소지품 등 유품에 의한 식별과 유전자(DNA)감식을 병행해 연고자를 찾는데 주력하고,식별된 유해는 유족의 희망에 따라 유족에게 인도하거나 국립묘지에 합동안장할 계획이다. 국방부는 오는 4월부터 2003년까지 유해를 발굴하기로 하고,전투가 치열했던 다부동·영산(경북 칠곡)·개화산(경기 김포)·안강(경북 경주)·마현리(강원 화천)·백석산·피의 능선(강원 양구) 등 7개 지역 48곳을 대상지역으로 잠정 결정했다. 노주석기자 joo@
  • 뉴 밀레니엄 새해 달라지는 것들(I)

    새해부터 주택 재당첨 제한기간이 폐지되고 실업급여 지급 기간이 90∼240일로 확대된다.직장인들이 유급 또는 무급 휴가를 받아 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습휴가제가 실시된다.세율 인상으로 소주값이 오르고 개인사업자의 신용카드 매출에 대한 세액공제가 확대된다.새해부터 달라지는 것들을 분야별로 알아본다. ■세금[국세불복 절차] 간소화 국세에 이의가 있으면 심사청구,심판청구 중 하나만 거쳐도 행정소송이 가능하다. [전자신고제 도입] 과세표준·세액 신고를 정보처리장치에 의해 전자신고할수 있다. [상속·증여세 평생과세] 50억원 이상 세금을 포탈하면 세무당국이 이를 안날로부터 1년 이내에만 과세하면 세금을 내야한다. [본사·공장 지방이전 촉진] 수도권 과밀억제 권역내의 공장이나 본사를 수도권 생활지역 밖으로 옮기면 법인세를 5년간 면제하고 이후 5년간 50% 감면한다. [원천징수세율 인하] 이자소득,증권투자신탁수익에 대한 원천징수세율이 22%에서 20%로 내린다. [성과배분상여금제 도입] 노사합의에 따라 경영성과의 일부를 성과급으로 지급하면 이를 손비로 인정한다. [대주주 주식양도 과세강화] 주식 양도차액 과세 대상 대주주가 5% 이상에서3% 이상 또는 시가총액 100억원 이상으로 확대되고 1주만 양도해도 과세대상이 된다. [고급주택 양도신고 의무화] 시지역 전용면적 50평 이상 아파트,읍·면지역6억원 이상,50평 이상 아파트 등은 양도시 세무서에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한다. [효도주택 세제지원] 부모봉양,결혼으로 2주택이 된 경우 2년 내에 양도하고양도주택만 3년 보유하면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특례과세제도 개편] 7월 1일부터 연매출 4,800만원 이상 사업자는 모두 일반과세자로 바뀌고 현재 과세특례자인 4,800만원 미만의 사업자는 간이과세자로 바뀐다. [신용카드매출 세액공제 확대] 개인사업자의 신용카드 세액공제가 500만원한도에서 매출금액의 2%(현행 300만원 한도,1%)로 인상된다. [신용카드 복권제도] 실시 매출전표를 추첨해 보상금을 주는 복권제도가 도입된다. [대중예술행사 부가세 면제] 순수 예술행사뿐 아니라 비영리 목적의 대중예술행사에 대해서도 부가세를 면제한다. [주세율 조정] 소주,위스키 등 증류주의 세율이 72%로 단일화되고 맥주는 115%로 낮아진다. ■국유재산[기납부재산 전대 허용] 국가에 기부채납한 재산을 기부자가 사용·수익의허가를 받으면 국가 승인을 얻어 다른 사람에게 전대할 수 있다. ■금융[유사수신행위 금지] 법령에 의한 인허가 없이 불특정 다수인으로부터 출자금·예금 명목으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며 유사수신행위를 위한 광고 및 금융기관으로 오해할 수 있는 상호사용이 금지된다. [금융기관 소수주주권 강화] 은행, 종금사와 일정규모(자산·수탁고 2조원)이상의 증권,투신,보험사 등에 사외이사,감사위원회제도가 도입되며 소수주주권 행사요건이 일반 상장기업의 2분의 1 수준으로 완화된다. [은행 신용공여 한도제] 동일인에 대한 신용공여 한도가 자기자본의 20%, 동일차주(동일인 및 신용위험을 같이하는 자) 에 대한 신용공여한도가 자기자본의 25%로 규제된다. [코스닥시장 관리종목 신설] 코스닥시장에 관리종목이 생기고 퇴출기준에 해당되는 기업은 즉시 등록이 취소되는 등 코스닥시장 관련 제도가 바뀐다.2월부터는 비상장·비등록 업체의 주식이 거래되는 주식장외시장(제3시장)이 개설된다. [공모 주간사 시장조성제도 부활] 내년부터 신규 상장·등록업체의 시장가격이 공모가밑으로 떨어지면 주간 증권사가 공모가로 사들여 주가를 떠받치는시장조성제도가 부활된다. [보험가격(부가보험료)자유화] 4월부터 각 보험사들의 부가보험료가 자유화된다.보험요율 산출기관은 순보험요율만을 제시하고 부가보험료는 보험사별로 자율적으로 산출해 적용함으로써 보험사간의 가격차별화와 경쟁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공인회계사 제 1차 시험 실시지역 확대] 기존의 서울외에 부산 대구 광주대전 등 금융감독원의 지원(支院)이 있는 주요 도시에서도 실시된다. ■기업[분기보고서 제출] 상장법인 등 증권거래법상 사업보고서 제출대상 법인은사업보고서와 반기보고서 외에 분기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결합재무제표 제출] 기업집단 결합재무제표 작성대상 법인은 이를 사업연도종료후 6개월 이내에 금감위에 제출해야 한다. [전자공시제도 실시 확대] 내년 3월부터는 상장법인뿐만 아니라 코스닥시장등록법인이나 외부감사법 적용법인들도 모든 공시서류를 전자문서로 제출해야 한다.2001년 2월말까지는 서면제출을 병행하고 그 이후부터는 전자문서로만 제출해야 한다. [무역업 신고제 폐지] 무역업 신고제가 폐지되고 수출실적 확인 등 통계관리목적을 위한 무역업 고유번호제가 도입된다. [원산지 표시제도 개선] 전에는 제조단계에서 표시가능한 모든 방법이 허용됐으나 새해부터 프린팅,각인 등 영구적인 방법만 허용되고 유통과정에서 훼손의 우려가 있는 라벨링,스티커 등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한정해 허용된다. [남북거래 제도 개선] 대북한 반출실적을 수출실적으로 인정,대북 반출실적이 있는 업체가 이 실적을 토대로 무역금융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수출보험제도 개선] 종전까지 9개 보험종목이 운영됐으나 새해부터 기존 9개종목 이외에 이자율변동보험,환변동보험,수출원자재수입신용보증 등이 새로 도입된다. [기업구조조정 조합 등록] 종전까지는 산자부가 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와 기업구조조정조합 등록을 받았으나 새해부터 기업구조조정조합과 관련한 등록,감독 및 취소권한이 금융감독위원회에 이관된다. [전기용품형식 승인제도의 안전인증제 전환] 형식승인을 받은 전기용품에 대해 종전에는 형식승인마크를 부착,팔도록 했으나 새해부터는 안전인증마크를부착해야 한다. [석유품질검사체제 개선] 종전까지는 한국석유품질검사소에서만 검사를 시행했으나 새해부터 복수 품질검사지정기관이 검사를 시행하고 정유사 자체검사도 가능하다. ■건설·주택[댐건설조정위원회 설치] 댐건설 입지조정을 둘러싼 정부 부처별 논란과 중복투자 방지를 위해 부처 실무진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댐건설 조정위원회가 신설,가동된다. [댐주변지역 지원확대] 댐 주변지역 지원사업 대상지역이 현행 만수위선으로부터 상류 2㎞에서 상류 5㎞ 주변까지 확대된다. [댐건설 예정지 행위허가권자 변경] 댐건설 예정지의 행위허가권자가 종전의건설교통부 장관에서 관할구역 시장·군수로 바뀐다. [이주정착 지원금 상향조정] 이주정착지원금이 종전 가구당 800만원에서 1,200만원으로 상향조정된다. [하천편입토지 보상기한 연장] 국가하천 및 지방1급 하천으로 편입됐지만 시기를 놓쳐 보상을 받지 못하는 주민들에 대해 2000년 1월부터 오는 2002년까지 보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주택청약제도 개선] 내년 2월부터 주택 재당첨 제한기간이 폐지되고 주택은행에 독점권이 인정되는 청약예금 취급권한이 다른 시중은행에도 주어진다. [개발부담금 재부과] 부동산 경기활성화 차원에서 유보됐던 개발부담금이 다시 부과된다. ■교육[제7차 교육과정 시행] 초등학교 1,2학년을 시작으로 연차적으로 시행돼 오는 2004년 3월 고교 3학년에 적용되는 것을 끝으로 완료된다.특징은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초1∼고1) 편성,학생선택 중심 교육과정 도입,수준별 교육과정 도입,재량활동의 신설 확대 등이다. [평생교육법 시행] 직장인들이 유급 또는 무급 휴가를 받아 재교육을 받을수 있도록 학습휴가제가 실시되며 사내(社內)대학·원격대학이 설치되고 도자기,창(唱)등 인간문화재에게 사사해도 상응하는 학위를 주는 문하생학력인정제도 실시된다. [사립학교 학교운영위원회 의무화] 사립학교에도 학교운영위원회 설치가 의무화되며 심의기구인 국·공립과는 달리 자문기구로 운영된다. [외국인 유학생 입국 간소화] 외국인이나 외국국적 재외동포가 국내 대학(원)에서 수학(연구)하려 할 경우 신원보증서를 내지 않아도 되고 대학이 법무부를 대신해 실질적인 입국심사를 맡게 된다.입국심사 서류도 최종학력증명서,재정입증관계서류 등 4종에서 대학의 총·학장이 발행하는 표준입학허가서 1종으로 줄였다. [학위등록제 폐지] 그동안 대학에서 학위를 수여한 뒤 교육부에 등록을 해야했던 제도를 폐지하고 대학 자체에서 학위를 주고 관리토록 했다. ■노동[실업급여 지원 확대] 실업급여 지급 기간이 현재의 60∼210일에서 90∼240일로 확대되고 최저지급액도 최저임금의 70%에서 최저임금의 90%로 상향조정된다.이에 따라 오는 2002년까지 현재 13% 수준인 실업자대비 실업급여 수혜율이 20% 수준으로 높아진다. [산재보험 적용확대] 현재 근로자 5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되는 산재보험이내년 7월1일부터 1인 이상 전사업장에 확대 적용된다.특히 산재보험에 ‘후유증상 진료제도’를 도입,치료를 받은 후 후유증상이 있는 경우 재요양요건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장애인 고용 확대] 내년 7월 1일부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애인고용이권장사항에서 의무사항으로 바뀌며 장애인 공무원수가 1만명에 이를 때까지공채비율이 현행 3%에서 5%로 높아진다. ■법무[회사정리절차 개선] 내년 3월부터 개정 회사정리·파산·화의법 시행으로회사정리절차 신청후 개시여부 결정까지 기간이 ‘수개월’에서 ‘1개월내’로 빨라진다.예전엔 회사 재무상태를 미리 조사했으나 개정법은 일단 개시결정후 채권조사와 병행해 조사토록 했다. [특허법원 대전 이전] 내년 3월1일부터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에 있는 특허법원이 대전으로 이전한다. [외국인 전담재판부 설치] 외국인 소송사건 증가로 서울지법 등에 전담부가신설되고 법정통역제도가 대폭 개선된다. [재판안내 팩스서비스] 전국법원 재판기일및 업무안내 시스템(지역번호없이1588-9100)을 통해 재판기일,절차 등 법원업무에 관한 안내를 팩스로 받을수 있다. [중국동포 출입국 간소화] 동포 1세들의 자유로운 출입국이 허용된다.친척방문 목적 입국이 허용되는 대상은 55세 이상에서 50세 이상으로 확대되고 친인척의 범위도 6촌 이내에서 8촌 이내의 혈족 등으로 넓어진다. [법률구조대상 확대] 재판에 넘겨진 형사사건에 한해 법률구조가 실시됐으나새해부터는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구속 피의자들도 법률구조 혜택을 받을 수있다.
  • [의열 독립투쟁](17)박재혁 의사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민족지도자들은 중국 상해와 남·북만주,노령(露領)의 연해주,미주 등 해외로 이주 혹은 망명하여 조국광복을 위한독립투쟁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이들은 자신들이 근거한 지역의 특성과 평소 신조에 따라 외교·의열투쟁·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 방략을모색,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의열투쟁은 일제의 침략기관이나 총독부의 일본인 고관,혹은 친일파에 대해 폭탄·총기 등으로 파괴와 암살을 통해 응징한 것으로 의열투쟁은 그 규모나 성패 여부를 떠나 독립운동 선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이는 의열투쟁을 통해 잔혹한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전체 한민족의 항일의지의 표출임과 동시에 일제 관리 및 친일 주구배 등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엄청난 효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11월 결성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결성 직후 일제의 침략기관 파괴와 일본인 요인·친일주구배 처단을 위한 거사에 착수하였다.1920년 4월중순부터 진행된 제1차 암살파괴계획이 그것이다.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직전에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돼 거사를 며칠 앞둔 6월 하순 관련자 20여명이검거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이로부터 3개월 뒤에 발생한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파의거’는 의열단에서 추진한 거사 가운데 최초로 성공한 거사였다. 박재혁(朴載赫·1895∼1921) 의사는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났다.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부산가스전기회사의 전차 종업원을 거쳐 한때 경상북도 왜관 소재 무역상점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1917년 6월에는 무역상 주인에게 부탁하여 700여원을 얻어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무역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큰 돈을 벌지 못한 채 1918년 6월 귀국한 박 의사는 3·1의거 직후다시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박 의사는 남양무역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지사들과 교류를 시작하였다.1920년 3월 일시 귀국한 박 의사는 7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다.그러나 당시 박 의사는 가정형편과 외아들인 자신만을 바라보고 노년을지내고 있던 노모 때문에 고민하다가 끝내 김원봉의 권유를 거절하였다.그러나 8월 김원봉으로부터 재차 입단권유를 받자 박 의사는 결국 입단을 수락하였다. 1920년 8월 상해로 건너간 박 의사는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를 파괴하라는 밀명과 함께 거사자금 300원,폭탄 1개를 전달받았다.박 의사는 폭탄과거사자금을 중국 고서적으로 위장한채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9월 6일 부산으로 밀반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나가사키를 떠나기 직전 박 의사가 상해의 동지들에게 보낸 엽서(1920년 9월 4일자)에는 상황(商況),상로(商路),수익 등의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암호였다.그리고 ‘다른 길이 있는데,이익이 전에 비해 좋다’는 글은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부산으로 가려고 했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가겠다는 내용을 알린 것이다.그러나 이 엽서에서 ‘많은 이익을 볼 수있으나 다시는 동지들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구절은 박 의사가부산경찰서 폭파의거를결행하면서 이미 죽음을 각오했음을 보여준 대목이라고 하겠다. 한편 부산에 도착한 박 의사는 먼저 부산상업학교 동창인 최천택(崔天澤)과 김영주(金永柱·부산진상업학교,25세),오재영(吳載泳·부산상업학교 중퇴,25세)등을 만나 자신의 임무에 대해 의논을 나누고 이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최천택 등의 도움을 받아 박 의사는 곧 거사를 준비하였다.마침내 9월 14일 오후 2시경 중국인 고서적상인으로 변장한 박 의사는 고서적 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짊어지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찾아갔다. 서장실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시모토에게 고서적을 구경시켜 주고 있던 박 의사는 고서적에 정신이 팔려 있던 하시모토에게 의열단의 전단,즉 하시모토를 처단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적은 전단을 내보임과 동시에고서적 보따리에 감춘 폭탄을 터뜨렸다.순간 굉음과 함께 하시모토와 그의옆에 서있던 일경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 졌다.하시모토는 중상을 입고병원으로 긴급히 호송되었으나 이송중 절명하였다.인명피해는 물론 경찰서건물 역시 대파되었다. 박 의사는 폭탄을 터뜨린 직후 혼란을 틈타 탈출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부상을 입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박 의사는 응급치료만 받은 채 구금돼 온갖고문과 심문에 시달리며 재판을 받았다.부산지방법원은 폭발물단속벌칙위반및 살인미수 등의 죄목을 들어 박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대구복심법원에서는 1921년 2월 박 의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그러나 경성고등법원에서 최종 사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채 일제의 계속된 잔악한 고문에 시달리던 박 의사는의거 당시의 부상이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폐결핵까지 겹치게 되자,‘왜놈들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수모를 당하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결심하고는 단식을 계속하였다.일제의 집요한 회유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단식을 계속하던 박 의사는 결국 1921년 5월 11일옥중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그때 박 의사의 나이 27세였다. 1962년 정부는 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 [조범래 독립기념관 연구원] ** 박재혁 의사, 유족 근황과 기념사업 27세로 순국한 박재혁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는데 두 자녀 역시 모두 작고했다.장남 기동(基東·76년 작고)씨는 부산 부평동에서 상업을 하다가 30여년전 상경,말년에는 서울서 거주하였는데 생활은 그리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기동씨의 장남 정평(正平·52)씨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현재 서울 미아3동 소재 신일중학교 경비원으로 21년째 근무하고 있다.정평씨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무석(務石·32)씨는 상업을 하고 있다. 박 의사의 기념사업은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박 의사 장녀의 후손들이 중심이 돼 의거현장인 부산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박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해 롯데그룹과 3·1운동동지회측의 지원을 받아 부산 연지동 소재 성지곡수원지 내에 동상을 건립한 바 있다.박 의사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78번)에 있다. 장손 정평씨에 따르면 박 의사의 유품은 별로 전해오는 것은 없고 사진 한두장이 전부라고 한다.이는 박 의사가 독립투쟁에 참여한지 얼마 안돼 일경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시작했고 또 옥중에서 순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운현기자 jwh59@
  • 서대문구,애국지사 발자취 역사관에 보존

    서대문구(구청장 李政奎)는 일제때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던 애국지사 가운데 생존해있는 이규창(李圭昌·86),이병희(李丙禧·85)옹의 항일운동 과정과 옥중체험담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영구보존하기 위해 18일 인터뷰를 실시했다. 이규창옹은 33년 중국 상해에서 남화한인연맹의 행동단체인 흑색공포단을조직,군자금 모금에 앞장섰으며 35년 친일파 이용노를 처단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5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병희옹은 36년 공장노동운동을 하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4개월의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의열단의 연락원으로 활동했으며 이육사와 함께 중국에서 수감생활을 한 뒤 이육사가 옥사하자 시신과 유품을 유족에게전달하기도 했다. 서대문구는 이들 애국지사의 인터뷰 내용을 영상자료로 담아 보관할 계획이다. 김재순기자
  • [민속마을을 찾아서] 아산 외암리

    외암리 민속마을은 한 폭의 동양화 같다.설화산을 배경으로 나무숲에 평화롭게 잠겨 있는 고유한 전통의 기와집과 초가집.그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시냇물과 어우러진 목가적 풍광은 낯익은 동양화처럼 친근하고 정겹다. 옛 정취가 그윽하게 묻어나는 외암리 민속마을.세월의 무게를 견뎌 온 전통문화와 역사가 그런대로 잘 보존돼 있다.잃어버린 옛 모습이 그리울 때 찾아가면 그 공허한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의 고향. 외암리 민속마을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다.조선시대 중엽 명종(1534∼1567) 때 장사랑 벼슬을 지낸 이정 일가가 낙향하여 정착한 마을.예안이씨인 이정의 6대손 이간의 ‘외암’이라는 호를 따서 외암마을이라 부르기시작했다.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정부는 지난 1988년 외암리 마을 6만2,000여평을 전통건조물보존지구 제2호로 지정했다.민속마을에는 66호의 집이 있다.이참판·영암군수·송화군수·종가집을 비롯 9채의 전통적인 기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일반 기와집들이 아름다운 조화를이루고 있다.전통가옥들은 대부분 말끔히 단장돼 있다. 민속마을을 찾는 손님을 가장 먼저 맞는 것은 마을 입구의 장승이다.장승을지나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돌아가다 멈춘 물레방아와 정자가 있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르는 길을 따라가면 양쪽으로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정교한 돌담으로 둘러쌓여 있다. 맨드라미가 피어 있는 길을 따라 마을 중간쯤 올라가면 ‘영암군수댁’이라는 팻말을 만난다.고종 때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이 살았던 집이다.1,800여평의 넓은 대지에 지은 70간의 기와집은 조선시대 군수의 ‘권세’를 증언하는 듯하다.문간채·사랑채·안채·곳간채 등으로 구성된 이 집에는 정원이말끔하게 가꾸어져 있다.이끼 낀 연못과 고송·대나무·향나무 등이 멋진 조화를 연출하는 정원은 조선시대 사대부집 정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집은 마을 동쪽 끝자락에 있는 이참판댁.조선말기 참판벼슬을 한 퇴호 이정렬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집으로 중요 민속자료195호로 지정됐다.130년전에 지은 이 집은 비원에 있는 낙선재의 축소판.대지 900평에 대문채·사랑채·안채·곳간채로 구성돼 있다.삶의 편리함을 고려한 집의 구성은 틀에 갇힌 답답함이 아니라 개방성과 여유를 느끼게 한다. 외암리 마을에는 많은 도랑이 만들어져 있다.도랑이 집안을 지나던가 집과가까이 돌아서 빠져나가게 돼 있다.“설화산의 기가 너무 세서 물로 다스리고 방화수와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도랑을 만들었다”고 마을 주민 이득선씨는 설명한다.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조상들의삶의 철학과 지혜를 읽을 수 있다.그러한 삶의 철학은 환경파괴적인 현대문명의 하나의 대안일지 모른다.현대문명은 외암리 민속마을에도 편리함을 몰고 왔다.대부분의 집에는 자동차가 있다.현대문명과 과거가 공존하는 외암리민속마을은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탯줄이다. ■ 주변 관광지 온양 민속박물관,현충사,충무공 묘소,충무 유원지,맹사성 고택,봉곡사,온양온천,도고 온천,아산 온천,송악 저수지,도곡 저수지,설화산,광덕산./아산 이창순기자 cslee@*先代부터 전통가옥 '이참판댁' 지키는 이득선씨 외암리 민속마을의 대표적 전통가옥 ‘이참판댁’을 지키고 있는 이득선씨(58).그는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시청 등에서 근무하기도 한 엘리트로 20여년전 부친이 별세하자 대를 잇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는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전통가옥을 보존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있다”고 말한다.집은 지난 해부터 시작된 보수공사로 말끔해졌다.기와는 모두 교체하고 기둥과 서까래는 부분적으로 바꾸었다.보수공사는 국고 지원 90%와 본인 부담 10%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집 옆에 건축한 ‘퇴호유물관’은 낡고 물이 새 폐쇄된 상태.이씨는그동안 이곳에 보관·전시해 왔던 베개·목침·가마·물레·인두·다리미등 유품들을 집안으로 옮겨 놓고 보수 계획을 세워놓고 있으나 아산시는 철거를주장하고 있어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이다. 이씨는 논 20마지기를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경제적 어려움이 적지 않다고말한다.그러나 가장 심각한 고민은 대를이을 큰 아들(이준종)의 결혼문제다. 외암리 농협에 다니는 아들은 31세로 결혼할 나이다.그러나 집에 와 본 여자들이 하나같이 이 큰 집을 관리할 자신이 없다며 돌아선다는 것이다. 전통의 맥을 이어오는 이 집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는 연엽주(蓮葉酒)를 만들고 있다.연꽃·연뿌리·솔잎을 넣어 발효시킨 전통 술로 무형문화재 11호로지정돼 있다. 여기서만 맛볼수 있는 이술은 옛날에는 임금에게 진상했다고한다. *외암리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아산버스터미널(또는 온양온천역 앞)에서 외암리 강당골행 시내버스.오전 8시부터 오후 4시10분까지 하루 7회 운행.소요시간 40분.서울에서 아산(온양)까지는 고속버스와 기차로 1시간30분.대전 동부터미널에서 아산까지 1시간30분.청주에서 아산까지 1시간20분. ?자가운전 경부고속도로 천안 IC∼국도21호(20km)∼아산∼국도39호(6km)∼송악외곽도로진입로∼외암리 민속마을. 서해안고속도로 포승IC∼국도39호(28km)∼송악외곽도로진입로∼외암리 민속마을.
  • 中慶 臨政기관지 ‘독립신문’ 첫 공개

    중경(重慶) 임시정부(1940∼1945)의 활동상과 북만주지역 및 인도 등지에서 활동한 광복군의 사진 등이 실려있는 중경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이 최초로 공개됐다. 국가보훈처는 6일 임시정부 시절 당·정·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양우조(楊宇朝) 선생의 부인 최선화(崔善嬅) 여사가 소장하고 있던 유품을 정리하던중 독립신문의 실물이 발견됐다고 밝혔다.독립신문은 중경 임시정부가 중문(中文)판으로 창간호(43년 6월1일자)부터 7호(45년 7월20일자)까지 발행됐으며,이번에 4호를 제외한 나머지 6개 호가 공개됐다. 4면으로 발행된 창간호는 창간사를 1면 톱으로 게재하고 있으며,미국 중의원인 오백릉(烏伯陵)씨가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내용을소개하고 있다.44년 8월15일자로 발행된 2호는 인도 전선에서의 광복군 활약상을 소개하면서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한시준(韓詩俊) 단국대 교수(역사학과)는 “지금까지 말로만 전해오던 중경임시정부의 활동상이 인쇄물 형태로 입증됐다는 점에서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면서 독립운동사 연구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우득정기자 djwootk@
  • 어제 경술국치 89주년 되새기는 2제

    지난 29일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로 국권을 침탈당한 ‘경술국치’ 89주년 되는 날이다.‘경술국치’에 항의해 단식,순국한 장태수 지사의 유품공개와 ‘을사오적’ 박제순의 후손 박승유씨가 일제말기 광복군에서 활동한 사실 발굴을 계기로 ‘경술국치’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본다. *을사오적 후손의‘속죄 항일운동’ 을사오적의 후손 가운데 선대의 친일행각을 속죄하는 뜻에서 항일운동에 나선 후손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화제의 주인공은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박제순(朴齊純·1858∼1916)의 친손자 박승유(朴勝裕·90년 작고·)씨로 박씨의 부인 김춘선(金春仙·68·강원도 춘천시 퇴계동)씨는 최근 남편 박씨의 항일투쟁기 ‘노래부르며 청산(靑山) 가리’를 출간했다. 1924년생인 박씨는 당시로선 출세가 보장된 경성법전(京城法專)을 우수한성적으로 졸업하고도 고등고시 시험을 거부하였다.1944년 일본군에 입대한박씨는 그 해 10월 중국 절강성(浙江省) 의오현(義烏縣)에 주둔중인 일본군횡정(橫井)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개월뒤인 11월 부대를 탈출,광복군 제2지대(지대장 이범석)에 합류하였다.이후 박씨는 무석(無錫)·무호(無湖)·남경(南京)등지에서 초모(招募)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씨는 해방 후 조선오페라협회 간사로 활동하다가 6·25때 자진입대,국방부 정훈국 합창단원으로 야전부대 위문공연도 하였다.휴전후에는 원광대 강사 등을 거쳐 75년부터 강원대 음악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정운현기자 jwh59@*순국 張泰秀지사 유품 ‘지각 공개' ‘경술국치’에 항의하여 24일간 단식 끝에 순국한 장태수(張泰秀·1841∼1920·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지사의 유품이 후손들에 의해 독립기념관에 전달돼 공개를 앞두고 있다. 장 지사의 4대 손부(孫婦) 조정자(曺貞子·61·서울 거주)씨는 장 지사의유품 가운데 관복·패도 등을 비롯해 장 지사가 받은 교지(敎旨)등 총 60여점을 국치(國恥) 89주년(29일)을 앞둔 지난 24일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것. 장 지사는 1861년 문과에 급제,양산군수·병조참의·동부승지 등을 거쳐 1905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오르면서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에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고 이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장지사는 단식,순국할 뜻을 굳혔다.일본 헌병이 찾아와 일왕의 ‘합방은사금’을 받으라며 온갖 위협을 가하였으나 끝내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다가 그해 11월 3일 단식을 시작,24일만인 27일 순국하였다. 한편 독립기념관측은 장 지사의 유품정리가 끝나는대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정운현기자
  • 신채호 기념관 부실시공 의혹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선생의 묘역정비사업과 관련 청주지역 21개 시민단체들이 부실공사 의혹을 주장하며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청주 시민회 등 청주지역 21개 시민단체들은 지난 19일 성명서를 발표하고“청원군이 단재 선생의 민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단재기념관 공사가 졸속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즉각 공사중단을 촉구했다. 시민단체들은 또 “졸속공사로 인해 선생의 유적지가 오히려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군은 즉흥적 공사보다는 단재 선생의 묘역정비사업에 대한 장기 마스터플랜과 유적지보존을 위한 계획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이날 성명서 발표에 참여한 ‘단재를 기리는 모임’(회장 金正基 서원대 교수)은 시민단체들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청원군을 예산낭비 혐의로 사법당국에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군은 지난 96년 ‘단재 선생 유적지 정비사업 4개년 계획'을 수립한이후 6억9,000여만원을 들여 ▲기념관 건립▲사당,주차장 정비▲진입로 확포장 공사를 벌이고 있으나 최근 외장공사가 끝난 기념관의 경우 바닥에 습기가 차고 방수처리하자가 발생하는 등 졸속시공 흔적이 나타나자 선생의 유족이 유품 기증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청주 김동진기자 kdj@
  • 안성시“포도 들어온지 100년 됐어요”

    우리나라에 포도가 들어온지 100년째임을 기념하는 ‘안성포도 100년 축제’가 프랑스 독일 헝가리 등 각국이 참여하는 세계적인 행사로 치러진다. 경기도 안성시는 안성 천주교회 초대 신부인 안토니오 콤베르씨가 1901년모국인 프랑스에서 가져온 20여종의 포도묘목을 성당 앞 뜰과 인근 신도회장 집 등에서 재배한지 100년째 되는 내년 8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갖기로 했다고 29일 밝혔다. 시는 이날 축제 기본계획을 확정,개최시기를 포도가 본격 출하되는 내년 8월 18∼27일로 하고 해외 사절단을 파견해 프랑스 독일 헝가리 등 포도재배및 와인 생산국가의 참여를 요청하는 등 세계적 행사로 치르기로 했다. 행사는 해외 인형극단 및 무용단 초청공연,와인 시음대회,요리경연대회,포도를 주제로 한 뮤지컬 공연,연극 임꺽정,남사당 풍물놀이,시낭송 및 회화전 등으로 다채롭게 진행된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포도먹기대회,포도씨 멀리 뱉기,포도주 생산을위한 포도밟기,포도주 시음회,최초의 포도나무 식재자인 안토니오 신부 유품 전시 등도 전개될예정이다. 안성시는 행사장과 포도농장,안성마춤마을,용설리 문화·예술마을 등 유명관광지를 순회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할 방침이다. 시는 포도축제를 차질없이 진행하기 위해 대학교수와 지역 예술·문화단체장,포도재배 농민,관련 공무원 등 13명으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국내에서 포도가 첫 재배된 안성지역에서는 현재 725㏊에서 전국 생산량의3%인 연간 1만6,000여t의 포도를 생산하고 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
  • 씨랜드 화재 분향소·현장 이모저모

    서울 강동교육청 합동분향소에서 ‘씨랜드’ 수련원 화재 희생자 유족들은2일 사고 현장을 방문,사고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이 조속히 이뤄지지않고 있다며 관계자들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오전 8시쯤 합동분향소에서 혜지(6·부천 이월드 유치원)양의 아버지 김청훈(40)씨는 딸의 영정을 끌어안고 “혜지야,어디갔니….아빠가 왔다”고 외치며 바닥에 주저앉아 40여분간 통곡했다.부천 이월드 유치원 소속 75명의원생 중 유일하게 목숨을 잃은 혜지양의 유가족들은 “223호실에서 선생님·친구들과 함께 잘 자고 있었다는 혜지가 왜 혼자 숨진 채 발견됐는지 납득되지 않는다”며 원인 규명을 요구했다. 유족들은 이날 낮 경기도 화성군 씨랜드 화재 현장을 둘러보고 사고 당시괴로워했을 아이들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유족들은 18명이 희생당했던 301호에서는 재를 쓸어담으며 아이들의 유품을 챙겼다.재속에는 녹아내린 슬리퍼,그을린 물병,타다남은 청바지 등이 있었으며 반지와 조금 그을린 머리카락도 나왔다.유족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현장의 유품을 모두 수거해갔다더니 이렇게 멀쩡한 머리카락이 남아있을 수 있느냐”며 흥분했다. 수련원 숙소 주변에 널려있는 소주병은 유족들을 더욱 격분시켰다.유족들은 “애들이 죽어갈 때 술을 먹고 있었어”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원태(李垣兌·46)법의학부장은 “신체적 특징이 발견되는 시신이 많아 빨리 신원확인 작업을 끝낼 것 같다”면서 “이르면 3일,늦어도 1주일 안에 신원확인 작업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씨랜드 화재 당시 오산소방서 마도소방파견소 소속 홍세화(44)소방사는 불속에 갇힌 아들의 구조도 포기한채 진화작업에 몰두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홍소방사는 지난 30일 새벽 1시50분쯤 혼자 야간근무를 하다 “씨랜드에서화재가 났다”는 연락에 마침 여름캠프에 참가중이던 아들 창희(13·마도초등교 6년)군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그러나 홍소방사는 빨리도착,더 많은 인명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 소방펌프차를 몰고 10여분만에 20㎞의 도로를 달려 화재현장에 도착,진화작업에 나섰다. 특별취재반
  • 얼음바람이 씽씽 더위야, 물렀거라/갈볼만한 얼음골·냉천계곡 소개

    한여름 깊은 계곡에서 더위를 잊는 것도 훌륭한 피서법이다.지형상의 특성때문에 삼복더위에 얼음이 어는 곳이 있는가 하면 찬바람이 쏟아져 나와 접근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오싹한 풍혈(風穴)지대도 있다.풍혈과 얼음골,물이찬 냉천(冷川)으로 이름난 계곡들을 소개한다. ■밀양 얼음골 경남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천황산 북쪽의 해발 600∼700m 골짜기 일대. 삼복더위에 얼음이 얼다 처서가 시작되면 녹기 시작하는 이상기온 지대다.산중턱 비탈진 계곡에 검은빛 돌덩이들이 쌓여있는데 그 바위아래 곳곳에 얼음이 얼어있다.돌무더기 앞에 서면 냉동실에 들어간 것처럼 냉기가 온몸을 감싼다. 의성 유이태선생이 스스로 할복,제자인 허준에게 시술용으로 제공해 해부의학의 효시를 이룬 곳으로도 유명하다.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맑은 물에 손을 담그면 손이 시릴 정도.인근에 사명대사의 유품을 간직한 표충사가 있고호박소,가지산 도립공원도 둘러볼 만한 곳이다. ■금수산 능강계곡 금수산은 퇴계 이황이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다고해서 이름붙인 산.충북단양군 적성면과 제천시 수산면의 경계를 이룬다.금수산이 품은 계곡 가운데 피서에 가장 알맞은 8㎞에 달하는 긴 골짜기가 능강계곡이다. 1시간30분쯤 계곡을 오르다 보면 나타나는 얼음골이 백미.삼복더위에 얼음덩어리를 캐낼 수 있다.금수산 서쪽 기슭에 이어지는 암벽과 기암괴석,맑은 계곡물도 일품이다.비교적 알려지지 않아 깨끗한 편이다.충주댐을 건설할 때수몰지역인 청풍 일원의 문화재를 모아놓은 청풍문화재단지에 들러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간일 것이다. ■영동 물한계곡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 소재.말 그대로 물이 찬 계곡이다.조용하고 안정된 곳을 찾는 이들에게 인기가 높다.입구 근처까지 도로 포장이 돼있어 들어가기가 수월하다. 물한계곡 위쪽으로 계속 오르다 보면 민주지산,삼도봉,각호산 정상을 만날수 있어 등산코스로도 제격이다.삼도봉을 오르다 보면 차례로 나타나는 옥소폭포 의용골폭포를 비롯해 크고 작은 소(沼)와 숲이 연출하는 경치가 빼어나다. ■전북 진안 풍혈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양화마을 앞에서 노령산 계곡에이르는 10만여평에는 수백군데의 풍혈과 냉천이 있다.바위사이에서 찬바람이나오는 풍혈과 삼복더위에도 발을 담그고 견디기가 힘든 찬 개울물이다.50년대까지도 한여름에 고드름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계곡물이 매우 맑은데다 주변에 마이산과 죽도폭포,백운동계곡 등 기암절벽이 많아 찾는 이가 점차 늘고 있다.인근에 성수온천과 송산,죽림온천이 있다. ■운치리 얼음골 강원 고성군 신동읍에 있다.기암절벽과 맑은 물로 잘 알려진 동강을 끼고 있는 작은 계곡이다.예부터 위장병에 특효인 얼음을 생산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축성한 원형산성인 고성성터 등지에 가볼 만하다. 고성성터에서 내려다보는 동강 물굽이가 일품이다. 정선군에 산재한 볼거리들을둘러보고 편안한 마음으로 쉴 만하다. 이밖에 경북 의성군 춘산면에 있는 얼음골짜기 빙계계곡 빙혈에서도 한여름얼음 어는 것을 볼 수 있다. 경기 연천군 연천읍 동막리 오봉산의 바람부는 동굴(풍혈)은 어른 두 명이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긴 하지만 냉기가 오싹하다.바위틈틈이 좁쌀만한 얼음방울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삼복이 되면 고드름이 열린다. 충남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 성주산 기슭의, 폐광을 이용한 냉풍욕장도 특이하다. 200여m 길이로 조성된 폐 갱도를 걷다 보면 지하 5㎞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잊게한다. 김성호기자kimus@
  • 이승만·이기붕·김일성 별장 복원후 안보전시관으로

    강원도 속초 화진포 일대에 있는 김일성·이승만·이기붕 별장이 안보전시관으로 탈바꿈된다.육군은 27일 6·25전쟁 발발 50주년을 앞두고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들 별장을 원형대로 복원,다음달 15일부터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한다고 밝혔다. 김일성 별장은 해방 직후 건립돼 6·25전쟁 발발 이전까지 김일성이 김정일과 함께 여러 차례 이용했던 곳으로 지하 1층,지상 2층으로 복원돼 6·25전쟁 및 김일성부자 우상화실태 등에 관한 각종 역사자료를 전시하게 된다.김일성이 사용했던 응접실 세트와 전화기,라디오,찻잔,주전자,옷걸이 등도 진열된다. 이승만 별장은 이 전 대통령의 침대와 서재,두루마기,친필 휘호,석·박사학위증 등의 유품을,이기붕 별장은 부통령에서 3·15 부정선거,4·19 혁명에이르기까지 정치 역정을 보여주는 사진을 각각 전시한다. 김인철기자 ic
  • 백범 서거 50주년 ‘구국의 발자취’조명

    오는 26일 백범 김구 서거 50주년을 앞두고 선생의 발자취와 그의 큰 뜻을돌아보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마련된다. KBS1TV ‘일요스페셜’은 20일 밤 8시 ‘백범 김구 서거 50주년’을 방송한다.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는 백범은 청년시절 구국운동에 뛰어든 이후 상해임시정부에서 27년,해방후 환국해 5년간을 오직 민족화합과 통일에 몸바친 민족의 큰 지도자였다.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했던 백범의 기개는 지금도 역사의 생생한 교훈으로 살아있다.이 프로에서는 유서 대신 쓴 ‘백범일지’의 원본을 공개하고,중국 현지 취재를 통해 상해에서 중경까지 ‘임시정부 27년’의 흔적찾기에 나선다.이와함께 윤봉길 의사로부터 받은 회중시계,말년에 늘 짚고 다니던 지팡이,구두 등 백범의 유품을 소개한다. 다큐멘터리 전문 케이블 Q채널(ch25)은 26일 밤 10시 ‘특집다큐 영상발굴백범국민장’을 방영한다.제작진은 49년 7월5일 치러진 백범 국민장 전과정을 담은 15분 길이의 필름을 방송사상 최초로 공개한다.지금까지 일반에 알려진 장례식 장면은 16㎜로 찍은 5분 분량이었으나 이번에 공개되는 화면은35㎜필름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필름은 당시 주한 미국공보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이 촬영한 것.그동안 백범이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의 동창회장 정문영씨 일가가 보관해오다 최근 백범기념사업회에 기증함에 따라 빛을 보게됐다.백범이 암살된 집무실 ‘경교장’도 처음으로 카메라에 담았다.한편 백범의 장례식 필름은 24일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백범 김구전집(대한매일신보사 펴냄)출간기념회에서 미리 소개된다. 이순녀기자 coral@
  • 영친왕 부부 유품 44점 국내 반입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英王) 이은(李垠 1897∼1970)공과 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 1901∼1989)여사의 유품 44점이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문화재관리국은 18일 “지난 달 2일 하라 슈오코(原秋櫻子·65)씨가 소장하고 있던 의류 24점과 장신구를 비롯한 영친왕 부부의 유품 44점을 국내로 들여왔다”고 말했다. 문화재관리국에 따르면 지난 3월10일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하라씨가 주일한국문화원에 “소장품을 기증하겠다”고 의사를 밝혀 와 문화재관리국 전문가들이 3월19일 현지에 가서 조사를 한 뒤 한국문화원에 보관해 오다가 이번에 반입한 것이다. 이번 민간기증으로 국내로 들여온 유품 중에는 영친왕이 지난 63년 귀국하기 전에 일본에서 병석에 있을 때 입었던 명주저고리와 바지,아들 진왕자(晉王子)의 것으로 보이는 망토및 수(繡)귀주머니,이방자 여사가 입었던 평상복 등이 포함돼 있다. 문화재관리국은 “이 유품들은 1920년대를 전후한 왕실복식에서 1980년대까지 왕가의 근세복식으로 이어지는 궁중복식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이 유품들은 기증자의 이모인 하라 노부코씨가 이방자 여사에게서 직접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라 노부코씨는 의상디자이너로서 일본 궁내청에서 이방자 여사의 양재교육을 담당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지난 97년 그가 사망하면서 조카인하라 슈오코씨가 물려받아 보관해 왔다. 문화재관리국은 “지난 91년 5월 양국 정부간 협상으로 궁중의복을 비롯한영친왕 부부의 유품 227점을 돌려 받은 바 있지만 개인 기증은 드문 경우다”면서 “앞으로 우리 문화재를 갖고 있는 외국의 개인이나 기관들의 기증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 유품들은 7월18일까지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서 ‘일본인 하라슈오코 기증 영왕·비 생활소품전’이란 이름으로 전시된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전 13일부터 새달12일까지

    광복회는 임정수립 80주년 기념사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전을 개최합니다. 이 자료전에는 임정요인의 활동상과 백범 김구선생의 겨레사랑·자주독립정신을 담은 화보 및 유물·유품이 전시됩니다.또한 임정 2대 대통령 白巖 朴殷植,독립운동가 石洲 李相龍,友堂 李會榮,趙素昻,石吾 李東寧선생의 친필휘호 자료등이 함께 공개됩니다.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람 바랍니다. 기 간 4월 13일∼ 5월 12일 1개월간 장 소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 문 의 전쟁기념관 안내 709-3139 관람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무 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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