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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광장] 瓜田不納履

    고위공직자 부인들의 옷 로비 미수사건이 온 국민과 정계를 짜증나게 하고있다.대통령이 인용한 청와대 여론조사도,법무부장관 유임결정도 민심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 비쳐지면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수사결과는 법무부장관 부인의 잘못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이 사건의핵심적 문제인물의 남편인 법무부장관이 지휘하는 법무부 검사들의 수사는원천적으로 불신의 소이(所以)를 안고 있어 그 결과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있다.검찰청이 아니라 법원이라면 이런 인연이 개재된 관계에서는 충분히 법적인 ‘기피사유’에 해당할 것이다. 법무부장관 부인의 행동거지,수사,유임결정이 다 개운치 않다.법무부장관부인의 행태는 뇌물수수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의심받을 만한 얄궂은 정황에처해 있고 동시에 자기 양심과 숨바꼭질한 흔적도 있다. 수사 행태도 의심받을 만한 정황 속에 들어 있다.대통령 부재중에 법무부장관이 자기직책을 건다는 의미에서 조건부로 사표를 내고 비교적 무관한 지방검사들에게 수사를 맡겼어야 하지 않을까?유임결정도 인사권 방어 논리가 뒤섞인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수사발표 이후 모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75%의 응답자가 법무부장관이 퇴진해야 한다고응답한 것을 보면,대통령이 인용한 청와대 여론조사 결과도 빗나간 것 같다. 정치적 결단을 요하는 상황에서는 오류의 위험이 있는 여론조사보다 고전적 ‘분별력’이 필요한 법이다.‘오얏(자두)나무 밑에서는 관을 고치지 말고오이 밭에서는 신발끈을 매지 말라’는 뜻의 ‘이하부정관 과전불납리’(李下不整冠 瓜田不納履)라는 옛말이 있다.이 말은 의심받을 만한 정황에서는의심받을 만한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지만,더 깊은 뜻은 그런 정황을 일부러 피해 마음을 정갈히 하라는 데 있다.자두나무 밑에서 갓을 바로하거나 오이밭에서 벗겨진 신발을 줍다 보면,자두나 오이에 손대고 싶은 탐심(貪心)이생기는 법이다. 관을 고치는 척,신발을 줍는 척하면서 자기도 몰래 자두나 참외를 만지작거리다 가까스로 탐심을 억눌렀다 하더라도 그것은 점잖지 못한 ‘양심과의 숨바꼭질’인 것이다.이런 까닭에 공직자윤리강령은 부정부패만이 아니라 이것으로 의심받을 만한 행동도 금하고 있다. 아직도 정권주변에 이하(李下)와 과전(瓜田)은 널려있다.고관 부인들과 재벌부인들이 공용차를 이용해 회동한다는 적십자사 ‘수요봉사회’는 뭐고 ‘낮은 울타리’는 또 뭔가? 정경유착의 제2채널 같아 보인다.의심과 위화감을 조성하는 권위주의 시절의 유산인 이런 작당은 모두 즉각 종식돼야 할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남편이나 부인이 고관이더라도 그 배우자는 평범한 시민이다. 이 민주적 정치규범을 어겨온 세월이 길더라도 이 정부에서는 이 권위주의적 작태를 단절시켜야 한다.유행하는 ‘혈액검사론’에 따르면 사건에 연루된사람들의 남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권위주의 정권에 봉사해온 사람들이다. 이래서 구태가 반복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만든 정권이고 어떤 성격의 정권인데,구태를 반복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5년,어떤 사람은 10년,또 어떤 사람은 30년 동안 유혈(流血)의 헌신과 무보수 희생을 치러 이룩한 50년 만의 여야 정권교체로 탄생한민주정권 아닌가.민주화운동 출신인 한 여당 국회의원은 이 사건으로 인한 따가운 여론의 폭우를 맞고 있자니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그러나 그것은 억울하다기보다 민주화운동 시절 탄압의 편에 섰으나 대통령의 은덕으로 높은관직에 앉고서도 이 은덕에 보답하지 않는 고관들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하루빨리 구태에서 탈피해야 할 것이다.IMF 고통속에서 이 사건으로 크게 상심한 국민을 위무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용퇴’가 속출해야 한다.중산층과 서민의 지지로 탄생한 정권이 이들을 실망시켜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황태연/동국대교수·정치학
  • 5대재벌 개혁 더 철저히 추진

    “5대 재벌의 개혁은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듯이 철저히 해야 한다” 국무총리 국무조정실이 1일 전 부처에 ‘2기 내각의 과제’를 시달했다.지난달 25일 열린 국무회의에서의 대통령 지시사항이라고 밝혔다. 지시사항은 무엇보다 기업개혁에 초점을 맞췄다.5대 재벌은 전세계가 주시하고 있는 만큼 세계 경쟁에서 이기려면 ‘마른수건에서 물을 짜듯이’ 철저히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민주화와 개혁으로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겼기때문에 정부나 각료들은 기업에 대해 신세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없으므로 소신있는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중산층 일부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저소득층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문제점도 나열하며 이들을 위한 복지체제 구축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환경정책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올해 내각의 목표로는 세가지를 꼽았다.경제개혁을 튼튼히 해 우리 경제를반석 위에 올려 놓고 21세기 지식기반 사회에서 웅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첫번째로 내세웠다. 둘째는 한·미간 안보체제를 강화하고 한·미·일공조체제를 바탕으로 남북화해 정책을 펼치는 것이라고 했다.셋째는 우수한 인재를 개발,고부가가치를 추구하는 생산적 복지를 실천하는 것으로 삼았다. 국무조정실은 1기 내각에 대해 개혁의 큰 테두리를 마무리하고 대북 포용정책을 제시,세계적인 지지를 확보했다고 평가한 뒤 올해에는 하드웨어 측면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했다.국무위원간및 각 분야별 팀워크를 강화할 것도 당부했다. 백문일기자 mip@
  • [굄돌] 상류층 부인들의 인면수심(人面獸心)

    어느 재벌 그룹 회장의 부인이 전·현직 고관 부인들을 상대로 몇천만원씩이나 하는 고가의 옷을 뇌물로 상납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나 민심을 들끓게하고 있다.사건의 발단이 거액의 외환유출 혐의를 받고 있는 재벌 남편의 ‘구명’을 위해 그 부인이 권력 실세들의 부인을 상대로 로비를 벌이려 한 데서 불거졌다니,라스포사라는 그 의상실은 가히 ‘구명복(救命服)’ 전문업체이며 그들이 선물로 주고받은 옷은 성격상 ‘호화 구명복’이라 할만하다. 이번 ‘장관급 인사 부인 고급 옷 로비사건’(언론측 용어) 혹은 ‘장관 부인 호화의상 뇌물 및 갈취사건’(야당측 용어)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 사건이 단순히 정경유착의 부정부패 사례나 상류층 부인들의 사치풍조 사례로서만이 아니라,그 근저에는 우리 사회 상류층에 반생명적이고 반문화적인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고방식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장관급 부인 호화의상 로비사건에서의 주요 거래물품은 소위 밍크코트로 알려져 있다.밍크는 북극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족제비과의 짐승이다.족제비같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제일 싫어할 상류층 여자들이 족제비털가죽만 보면 환장하고 걸치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참 이상스럽다.더구나상류층 부인들이야 집안에서나 차안에서나 과잉난방 속에 뜨뜻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도 굳이 한대지방 짐승털을 걸치려 하니 말이다.(일각에는 정치권한파가 언제 불어닥칠지 몰라 추위를 탄다는 설도 있다). 선진국 여류명사들은 자연보호·동물보호에 앞장서서 밍크 포획을 반대하는 운동에 나선다는데,우리나라 상류층 부인들은 희귀동물 털가죽을 자랑스럽게 두르고 사회봉사다 환경보호다 실물경제활성화(?)다 하면서 짐승들처럼떼로 몰려다니며 헷갈리게 하니,정녕 그들의 마음 씀은 짐승만도 못한 것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 더 지적하고 싶은 점은 옷의 문화적 개념과 관련한 것이다.‘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만,이번 사건은 몸가림과 생명보호라는 본연의 기능을 지닌 옷이 때로는 신분상의 차이와 빈부의 실상을 드러내는 역기능을 갖기도한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사건이다.하지만 ‘추락하는것은 날개가있다’는 말처럼,분수에 맞지 않는 날개를 달고 퍼덕이다가는 언젠가는 추락하고 만다는 경고이기도 하다.의식주(衣食住) 생활의 생태적·문화적 본성을 조롱하는 인면수심의 속물근성이야말로 한 사회를 타락시키고 와해시키는원인이기 때문이다. [임진택 연극연출가·판소리꾼]
  • 제42회 전국 역사학대회 20세기 평가“20세기 한국의 역사는…”

    세기말이자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지나온 20세기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모임이 마련된다.28,29일 서강대에서 개최되는 제42회 전국역사학대회가 그것이다.역사학회(회장 김용덕)등 10개 역사관련 학회가 주최하고 한국서양사학회가 주관하는 이번 대회는 공동주제를 ‘20세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로 정하였는데 학계의 원로인 조동걸(한국사)·민두기(동양사)·차하순(서양사)·박이문(철학)교수 등 4명이 발표자로 나선다.이날 행사장에서 발표,토론될내용을 사전에 입수,간단히 요약해본다. 한국사 분야의 조동걸 교수는 20세기 한국사의 전개와 반성을 ‘인간의 길을 향한 진통’으로 표현하고 있다.조교수는 금세기 우리의 역사를 전반기는 일제식민통치와 그에 대한 독립운동,후반기는 통일운동과 민주주의를 성장시켜간 여정으로 구분하고 일제하 독립운동이나 독재정권하의 민주화운동은모두 인권을 크게 신장시켰다고 평가한다.그러나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정경유착,빈부격차 심화,환경파괴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1900년의 대한제국이 10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두동강이 난 상태라며 21세기를 맞는 한국인의 첫번째 관문은 ‘38띠’를 풀어내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민두기 교수는 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의 조급한 ‘시간과의 경쟁’을 화두로 삼았다.자본주의와 산업화에 뒤진 동아시아국가들은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중국은 열강의 세력다툼 속에서 망국의 위협을 제거해야했고,일본 역시 제국주의 국가 대열에 오르기 위해 침략의 수단을 조급하고도 무절제하게 사용한 탓으로두 나라 모두 역사전개에서 비정상을 초래했다고 분석하고 있다.민교수는 20세기 일본의 팽창정책은 힘과 문화를 토대로 한 것으로 근대적 국가·사회발전의 계기는 연합국으로부터 ‘패전 선물’로 받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20세기 서양의 역사를 ‘커다란 패러독스의 세기’라고 규정하는 차하순 교수는 지난 한 세기는 주기적으로 대립적 요인들이 나타난,이율배반의 세기였다고 보고 있다.전쟁·혁명·독재가 난무한 가운데 국제평화와 인권보장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으며,또 고도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속에서 빈곤과기아로 허덕이는 후진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철학자 박이문 교수는 천 년후의 역사가들은 20세기를 ‘기로에 선 인간중심적 문명의 세기’로 기술할 것이라며 20세기가 물질적·양적으로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본질적으로 진보한 역사인지에 대해서는 회의를 보이고 있다.박교수는 20세기는 인간중심적 문명의 파괴적 자기모순을 노출한 시기로 문명자체의 임종 혹은 역사의 종말을 재촉하는 어두운 징조가 보이고 있는데 그주범은 인간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토론문에서 20세기 한국사는 ‘변방의식과 몰주체의 역사’였다며 끊임없이 중심부로 향하려는 강박관념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지적한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는 차하순 교수의 발표내용과 관련,차교수가 20세기의 업적 가운데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적 공헌을 간과했다며 인권신장,여성지위향상,복지국가 발달 등을 들고 있다. 또 홍성욱 토론토대교수는 20세기 과학기술의 발전 가운데 유전학에 기초한 농업기술의 발전을 무시할 수 없다며 농업혁명이 20세기 세계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하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kfaily.com
  • [사설] 부패척결 중단없도록

    최근 부정부패 관련 전현직 공직자들에 대한 일련의 사법처리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경찰 실세인 경찰청 정보국장 박희원(朴喜元)씨 구속에따른 충격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홍두표(洪斗杓)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또 구속됐다.홍사장은 5공때부터 지금까지 신문과 방송 등 중앙 언론사 사장을 두루 역임했으며 최고 경영자로서 장수 기록을 남기고 있다.그런 그도 뇌물의덫에 걸려 추락하고 말았다.그는 구속중인 대한생명 최순영(崔淳永)회장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홍사장의 구속은 새삼 김대중(金大中)정부의 서릿발 같은 부패척결 의지를 실감케 한다. 경찰청 정보국장 구속을 둘러싸고 검찰의 표적수사니 뭐니하고 뒷말이 무성했었다.하지만 예외없는 사정에 그같은항변도 궁색한 것이 되고 마는 것 같다.새 정부는 집권 2년차다.그럼에도 개혁의지나 사정활동에서 조금도 누그러짐이 없다.과거 정권의 사정활동이 집권 초반 정치적 장악력을 다지려는시도에서 반짝하다 이내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던 데 비하면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라 할수 있겠다.새 정부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개혁의지가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만 여러명의 전직 및 현직 고위 공직자들이 줄줄이 구속됐다.강정훈(姜晸薰) 조달청장, 이정보(李廷甫) 전 보험감독원장,이수휴(李秀烋) 전 은행감독원장 등이다.그뿐만이 아니다.원철희(元喆喜) 농협회장,송찬원(宋燦源)축협회장,박규석(朴奎石) 해양수산부 차관보,박동수(朴東洙) 금융감독원 검사1국장 등도 마찬가지로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여기에서 새정부의 성역(聖域)없는 사정활동과 부패척결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사정활동에 시한이나 성역이 없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부패는 망국병이다.지금처럼 일관되게 그에 대한 척결의지를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이다.부패를 뿌리뽑는 것은 선진국다운 경제성장과 국가발전을 이루기 위한 최우선의 전제조건이다.이제는 진정 개발독재시대의 정경유착과 부패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최근의 사정활동은 주로 상탁(上濁)에 대한 징치였다.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겠다는 단호함의 표현으로 보여지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그런데 이 기회에공직자 모두가 해야 할 일이 있다.한번씩은 자신들의 몸가짐과 처신을 새롭게 점검해보고 자정(自淨)의지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것이다.부패는 사정활동만으로 뿌리뽑히기 어렵다.근본적으로는 공직자의 의식이 달라져야 한다.이시기에 요청되는 것은 혁명적인 의식 전환이다.
  • [사설] 터무니없는 ‘대국민 성명’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이 17일 수유리 4·19국립묘지를 방문한 뒤 느닷없이 ‘대국민 성명’을 발표해서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그는 대통령 재임시에도 ‘깜짝 쇼’를 연발해서 국민들을 놀라게 했었던지라 이번 성명도또 하나의 깜짝쇼쯤으로 보고 지나칠 수도 있다.그러나 김씨의 성명은 대통령직 퇴임 뒤 처음 내놓는 공식 성명인데다 올해 초부터 벼르고 별러왔었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너무나 비논리적이고 자가당착(自家撞着)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영삼씨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독재의 상징 인물인 박정희(朴正熙)씨를 찬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국민들은 김대통령이 박정희씨를 무조건 ‘찬양’하는 게 아니라,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것은 그것대로 지적하면서 경제적 근대화 부분을 평가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김씨 자신도 92년 대선 당시 박 전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해서 기념관 건립을 약속하고 서명까지 했었다는 박근혜(朴槿惠)씨의 지적은 접어두기로 하자. 김씨는 김대통령을 ‘독재자’로규정하고 4·19국립묘지에서도 “지금의 정치·경제·사회상황이 4·19 때와 똑같다”고 했다.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정치지도자의 이같은 상황인식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김씨는 “부익부 빈익빈,정경유착의 왜곡된 경제구조와 오늘의 경제위기도박정권의 잘못된 경제정책에 기인한 바 크다”고 지적했다.백번 옳은 말이다.그렇다면 대통령 재직시에는 그같은 사실을 몰랐다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다는 말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국제통화기금(IMF)사태를 불러온 최고·최종 책임자인 그는 박정희씨의 원죄(原罪)를 따지기에 앞서 국민에게진심으로 사과를 했어야 옳다. 김씨는 또 “현정권의 박정권에 대한 미화는 기본적으로 지역정치를 바탕으로 하는 현정권의 사고에서 비롯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김씨가 민정·민주·공화 3당합당을 통한 ‘반호남 연합’전술로 정권을 잡았던것은 재론하지 않겠다.그러나 부산·경남지역을 누비고 다니며 지역감정을노골적으로 부추기고 내년 총선에서 그 지역 공천의 지분권을 내비치다가 국민의 비판을 받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옳은가.김씨가 느닷없이 성명을 발표한 것을 두고 김대통령에 대한 공격 뿐 아니라 영남지역을 누비고 다니는전두환(全斗煥)씨의 행보를 아울러 견제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영삼씨는 지역감정에 기대어 정치를 재개하려는 헛된 꿈을 버리기 바란다.그와 같은 일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김씨 자신의 말대로 ‘시계를 거꾸로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 [제2공화국과 張勉](23)-지지부진한 혁명과업(下)

    장면(張勉)정부에게 부정축재자 처벌은 정치비리 사건 처리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국민감정을 만족시키려면 ‘부정축재’범위를 넓혀 주요 기업인들을 대부분 구속하고 그들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경제활동을 크게 위축시켜 가뜩이나 어려운 국민생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은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더욱이 국정지표의 으뜸으로 ‘경제제일주의’를 내건 장면정부로서는 민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갈 수도 있는 정책을 섣불리 시행하기가 어려웠다. ‘국민감정을 따른다’는 명분과 ‘경제건설의 토대를 망칠 수 없다’는 당위 사이에서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가 장면정부의 고민이었다.그고민은,장면이 총리로 등극해 처음 민의원에서 밝힌 시정방침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장면은 우선 “구정권 하에서 부정·불법 축재한 자를 처단할 것은 물론이나 사업과 경제를 마비시키지 아니하는 적절한 한도는 있어야 한다”고 전제했다.이어 과도정부가 조세범처벌법에 따라 적발한 46개사,23명을 계속 수사하는 한편 추가조사도 벌이겠다면서 “증거를 포착하기 곤란한 만큼 국민의 협조가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정치비리 관련자에 대한 것 못지않았다.이승만(李承晩)이 하야한 지 10여일만인 1960년 5월10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부정축재자의 재산을 환수하라”는 데모가 일어날 정도였다. 반면 부정축재의 범위를 정하고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하기는 정치사건에 비해 훨씬 힘들었다.게다가 허정(許政)과도정부가 부정축재자 처리를 ▲징역형보다는 재산형(財産刑)으로 ▲그것도 현금이 아니라 주식으로 헌납하도록 테두리를 정한 터여서 운신의 폭은 좁았다. 장면정부가 출범한 나흘 뒤인 8월27일 참의원(상원)은 ‘부정축재자 조사특별위원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31일에는 정부가 부정축재한 46개 업체에 벌과금 87억환,추징금 109억환을 통고했다. 장면정부는 정부대로,국회는 국회대로 추진하던 부정축재자 처벌은 정치비리 관련자 처리와 맞물려 소급입법 대상으로 넘어간다.개정헌법을 바탕으로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청조직법은 60년 말에 속속 제정되지만 부정축재 특별처리법만은 해를 넘긴다. ‘부정축재처벌법’제정이 늦어진 까닭은 장면정부의 경제진흥책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61년 봄 국토건설사업을 시작해야 했고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년)을 거의 성안(成案)한 입장에서 민간경제계를 ‘죽일지도 모르는’모험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더욱이 장면정부는 60년 12월5일부터 닷새동안 ‘종합경제회의’를 열어 경제개발을 해나가는 데 민간경제계와 보조를 맞추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부정축재처벌법’안은 61년 2월9일 민의원을 통과한다.60년 4월26일을 기준으로 그 5∼8년전까지를 조사대상 기간으로 정해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자 ▲‘3·15부정선거’에 1천만환 이상 정치자금을 제공한 자 ▲지난 5년간 연 1천만환 이상 탈세한 자를 처벌대상으로 삼았다.경쟁입찰에서 담합했거나 재산을 해외도피한 자,뇌물수수로 연 600만환 이상 이득을 취한 공무원도 부정축재자에 포함시켰다.경제계는 예상을 뛰어넘는 엄격한 기준에 큰 충격을 받았다.법안대로라면 처벌받을 사람이 5만7,0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추산됐다.61년 초 결성된 한국경제협의회(전경련의 전신)는 대한상의·무역협회·방직협회·건설협회와 뜻을 모아 법안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다. 3월4일 몇몇 일간지에 발표한 경제 5단체 성명서의 뼈대는 다음과 같다.“이 법안이 그대로 참의원을 통과하면 사회에 일대 혼란을 불러들여 기업인의손발을 묶을 것이다.기업활동을 가로막고 민족자본을 흐트러뜨리며 나아가분열을 조장하는 이 법안을 제정하지 않기를 충심으로 진언한다.”이 성명서는 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그 안에 “북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남한의 경제 번영이라면,이 법안은 북괴에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약속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는 구절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민의원이 곧바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경제협의회 대표를 출석시키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성명서 해프닝’은 경제5단체가 해명서를 신문에 싣는 것으로 결말짓지만 그 과정에서 정치권은 “중소상공인 5만여명이 피의자로 묶인다면 경제진흥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경제계 주장을 어느정도 받아들였다. 그 결과는 참의원에서의 법안 심의에 반영됐다.민의원에서 통과된 법안 내용을 참의원이 대폭 완화한 것이다.수정안은 처벌대상을 ▲3·15선거에서 자유당에 자진해서 3,000만환 이상을 제공한 자 ▲공무원 및 정당인으로서 부정하게 재산상 이득을 취한 자로 제한했다.피의자는 5만7,000여명에서 600여명으로 크게 줄었다. 참의원의 수정안은 4월12일 민의원에서 그대로 통과됐다.재석 163석 가운데찬성 138표,반대 25표였다.장면총리는 각료를 모두 대동하고 표결 현장에 참석해 재계를 지원했다. 국민감정을 만족시키느냐,아니면 경제진흥을 위해 정치에 연루된 경제인들을 용서하느냐 라는 갈림길에서 장면정부는 후자를 택했다.경제발전이야말로시대적인 사명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법에 따른 부정축재처리위원회(위원장 沈宗錫 참의원 의원)는 5월4일 가동됐다.위원회는 처벌 대상자에게 5월16일까지 자진신고하라고 공표했는데 그 마감일에 쿠데타가 터졌다. 군사정권은 61년 12월20일 기업체 30개사에 494억여환,공무원 32명에 75억환의 부정축재분을 환수한다고 최종 통보했다.이어 62년 1월23일 백인엽(白仁燁)예비역 육군중장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등 부정축재자 12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張총리“소급입법 위헌”첫 지적 장경순(張慶淳·73)씨는 민주당 신파 출신으로 5대 국회에 진출,재경분과위원회에서 활약했다.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의 추천으로 중앙정계에 데뷔한그는 장면(張勉)정부의 경제관련 정책을 가까이서,두루 지켜보았다. “부정축재자 처리를 민의원에서는 재경분과위에서 맡았습니다.민주당 신파건 구파건 구분없이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데는 뜻이 같았지요.하지만 장면총리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장 전의원은,민의원이 ‘부정축재자 처벌법’제정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어느날 밤 장총리가 신파 간부 15명을 중앙청으로 불러 회의를 열었다고 했다.한명씩 돌아가며 발언한 뒤 장총리는 “특별법을 만드는 것은 좋다.그러나 제정 후에 위헌 판정을 받으면 어쩌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소급입법은 위헌이므로 개헌을 거쳐야 가능하다’는 생각들을 못했기 때문에 장총리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그는 “장총리는 특별법 제정에 끝까지 신중을 기했지만,여론의 압력이 거센데다 윤보선(尹潽善)대통령마저 10월10일 특별담화를 발표해 독촉하는 바람에 소급법을추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장 전의원은 부정축재자 처벌과 관련해 민주당이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말들이 나돌았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명했다.만약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챙겼다면 5·16쿠데타 후에 무사했겠느냐는 설명이다. 다만 몇몇 의원이 개인적으로 욕심을 낸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가령 민주당 이(李)모 의원이 나서 기업인들을 위협하는 발언을 하면 주위에서 “또낙전지변(落錢之辯=돈 달라는 말)이군”하며 혀를 차곤 했다고 기억했다. 장 전의원은 “장면정부가 몇년만 계속했어도 우리 경제가 훨씬 빨리,그리고 정경유착·빈부격차와 같은 부작용 없이 발전했을 것”이라며여러가지 근거를 들었다. 먼저 장총리를 비롯해 경제각료들이 모두 열의에 차 있었음을 꼽았다.“김영선장관 집으로 전화할 때는 새벽 5시 전에 해야 했다.그 시각이 지나면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참 부지런하고 청빈한 분들이었다”고 아쉬워했다. 국회 분위기도 마찬가지여서,의원 대부분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각오 아래 소장층은 건설복을 입고다니며 새생활운동을 실천했다고 회고했다.또 국정감사를 앞두고는 의원들이 “일체의 향응에 응하지 않겠다”는 결의도 했다는 것. “서민생활 안정에 주력해 세법도 많이 개정했다”고 밝힌 장 전의원은 자신이 발의해 근로소득세 면세점을 1만6,500환에서 3만환으로 높였다고 공개했다.“하루벌이가 1달러(당시 달러당 1,300환)도 안되는 근로자에게서 소득세를 받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주장해 통과시켰다고 한다. 그는 5·16쿠데타후 민주당 재건에 참여,6대 국회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이후에도 “당복(黨福)이 없어(당을 잘못 선택했다는 뜻)” 낙선을 거듭하다“가족을 먹여살리려고” 정치를 포기하고 사업가로 돌아섰다.지금은 여권전직의원들의 모임인 ‘일오회(一五會)’회장으로 있다. “장면정부를 무능·부패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악선전일 뿐”이라고 잘라말한 장 전의원은 “장면정부때 데모하다가 죽거나 다친 사람 있느냐”“그때경제비리가 무엇이 있었냐”고 거듭 반문하면서 “데모가 전투처럼 변한 거나 대형 경제사건이 터진 것도 모두 박정희(朴正熙)정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용원 기자
  • 동아시아 문화포럼 반년간 학술지 창간

    60년대 이후 동아시아지역 국가들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자 구미의 선진국들은 그 동인(動因)을 ‘유교적 자본주의’에서 찾았다.그러나 최근 이 지역 국가들이 통화위기를 맞자 세계의 언론은 ‘아시아적 가치의 패배’라고규정하였다.동아시아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칭송되던 아시아적 가치가 졸지에 크로니즘(패거리주의),정경유착,뇌물,정실인사,혈연주의 등 추악한 덕목들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아시아의 경제위기는 정체성의 위기로 이어지면서 지성인 사회에 전통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작년 9월 결성된 ‘동아시아 문화포럼’이 그런 모임의 하나다. 이 모임은 창립기념으로 ‘동아시아론,그 실상과 허상’에 관한 포럼을 개최한데 이어 반년간지로 ‘동아시아 문화와 사상’(편집인 송하경·성균관대 교수)을 창간했다.지난 4월에 출간된 제2호에서는 ‘유교적 자본주의와 21세기’‘동양 경제사상의 재조명’등의 특집을 통해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을 시작하고 있다.오는 9월 발간될 제3호에서는 ‘동양미학과 예술정신’등을 특집으로 다룰 예정이다.열화당 1만원 정운현기자 jwh59@
  • 값비싼 의료장비 일괄 구매입찰…병원부조리 줄듯

    앞으로 고가의료장비 구매를 둘러싼 병원 부조리가 줄어들고 구매가격도 대폭 하락할 전망이다. 조달청은 27일 자기공명영상촬영기(MRI),단층촬영기(CT) 등 고가 의료장비도입 비리를 뿌리뽑기 위해 공정성이 보장되고 저가구매가 가능한 일괄입찰방식을 통해 고가 의료장비를 공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일부 대형병원들은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고가의료장비를 도입하면서 해외유명 의료기기 제조회사의 국내 대리점과 유착,리베이트를 받고 턱없이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지적됐었다. 최근 조달청이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의 구매요청에 따라 처음으로 일괄입찰에 부친 MRI,CT,혈관조영촬영기,감마선촬영기 등 4개 품목(미화 500만달러상당)은 입찰자들의 치열한 경쟁끝에 미국사인 삼성GE사에 325만4,000달러에 낙찰됐다.이같은 액수는 예산 책정액의 67%,종전 의료기관들의 개별 구매가격의 61% 수준이다.
  • [오늘의 눈]IMF처방과 한국적 가치

    아시아 금융위기의 원인이 이 지역 국가들의 내부적인 문제 때문인가,아니면 외적 환경에서 초래됐는가.이런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가 최근 국제금융체제의 한국보고서를 통해 ‘네 탓도 적지 않았다’고 국제통화기금(IMF) 프로그램의 문제점과 국제금융체제의 허점을 지적한 것은 뒤늦지만 신선한 감을 준다. 97년 아시아에 줄줄이 금융위기가 닥치자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은 아시아인의 자존심을 얼마나 긁어놨던가.은밀한 금융행태와 구태의연한 기업경영방식,광범한 정실주의,정경유착의 자본주의,높은 부채비율 등 모든 아시아적 요소가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결과론적 논리가 성행했다.‘성장의 기적’을 칭찬하며 단기이익을 쫓아 아시아에 들어왔던 서구의 자본들은 엔화 약세를 맞아 빠져나가면서 180도 태도를 바꿔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현재 IMF체제 1년여 동안 각종 IMF프로그램은 시행 초기에 들어갔으나 사실 국가와 사회 시스템이 IMF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이런 프로그램이위기극복에 결정적이었다고말하기에는 위험이 따른다.오히려 국내외의 유동성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또 우리나라의 경우 위기극복에는 금모으기 운동에서 보여준 특유의 한국적인 협동정신,극히 취약한 사회 복지제의 단점을보완할 만큼 강한 가족유대와 정부의 강력한 주도 등 ‘아시아적인 또는 한국적인 가치’가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야 센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한국의 성장은 어떻든 한국적인 시스템에 힘입은 바 크다”고 말한 것은 인상적이다.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조지 메이슨대 교수가 “정경유착의 자본주의가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데도 불구하고 실제 아시아의 부패는 낮으며,이는 문화적 성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이런 점에서 IMF눈치를 보느라 할 말을 못해온 정부도 조심스럽게나마 IMF프로그램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은 잘한 일이다.이제 ‘한강의 모델’과 미국식 IMF프로그램의 장단점을 각각 세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경제정책에 유일한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이상일 경제과학팀 차장]
  • 국정원 정국 우회적 분석·공개

    국가정보원이 현 경제상황 등에 대한 우회적 진단과 처방을 내놓았다.‘중남미국가들로부터 한국이 배워야 할 교훈 8가지’라는 제목으로 25일 인터넷홈페이지에 띄웠다. 이는 정국 동향에 대한 간접적 분석자료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국정원이이런 류의 자료를 공개하기는 안기부에서 이름을 바꾼 이후 처음이다. 이 자료는 우리 사회 전분야에 걸쳐 문제점을 해부하고 있다.우선 총론에서“1년간 개혁추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부 개혁 저항세력이 상존하고 있고,최근 경제여건 호전으로 개혁에 대한 긴박한 인식이 약화되는 위험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국정원은 그 연장선 상에서 “긴장된 자세가 필요하다”는 처방을 내렸다. 특히“개혁 반대세력들이 기업주,노조,관료층 등 곳곳에 포진하고 있음을 정확하게 인식,이들이 대세를 뒤집지 못하도록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것까지 주문했다. 이같은 시각이 최근 정부의 강공드라이브에 반영됐다는 관측도 있다.즉 최근 국정원 주도의‘정부합동 보안점검’이나 KAL기 추락사건을 둘러싼단호한 대응 방식 등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수위는 높지 않았지만 정치권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즉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도 정치권의 소극적 태도로 구조조정 입법 지연 등 심각한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나아가 중남미국가의 실패 사례를 예로 들며“정치와 경제의 악순환 고리를 차단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특히 미묘한 이슈인 내각제문제도 슬쩍 건드렸다.“향후 총선과 내각제 논의를 둘러싼 정치권의 갈등이 경제회복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원론적 언급으로 아슬아슬하게 논란의 소지는 피했다. 정경유착 등 부패척결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도 제시했다.“국가생존권 차원에서‘부패방지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 [특별기고] 공직부패 방지책이 성공하려면

    국무총리실에서는 6월까지 공직부패 방지를 위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할예정이라고 한다.그 기초작업으로 10개의 전문 연구기관들에게 연구용역을맡겨 부패원인을 분석하고 방지대책의 시안을 작성하게 하였다.지난 12∼13일 한국행정학회가 주최해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연구의 중간발표가 있었는데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보인 바 있다. 과거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정축재 환수,서정쇄신,숙정,사회정화,공직자 사정 등의 캐치프레이즈하에 부정부패 혐의가 있는 공무원들을 대규모로해직시키면서 부패 척결에 강한 의지를 표명하곤 했다.특히 군사정권처럼 정통성이 약한 정부일수록 사회정의의 구현과 부패 척결을 강도 높게 표방했다.거기에는 대규모 사정을 통해 통치권을 과시하고 공직자들의 새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확보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는 저의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집권 초에 서슬이 시퍼렇게 추진되던 공직부패 청산작업은 시간이지나면서 용두사미로 끝난 경우가 많았다.그 실패요인은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무엇보다도 새로 집권한 정치지도자 및 고위공직자들과 경제계를비롯한 이권관계자들 사이에 새로운 유착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집권층이 오히려 대규모 부정과 비리에 연루됨으로써 초기의 사정 의지가 실종되고 부패 척결이라는 구호는 일반공직자나 국민으로부터 불신과 냉소를 받는 상태에 이르곤 하였다. 다음으로 대부분의 사정활동이 외부에 노출된 부패행위에 대한 단속과 처벌 위주로 전개되어 한계가 있었다.종합적인 진단에 의한 제도개선과 사전 예방적 차원의 활동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그리고 정부기관의 일방적이고 하향적인 수사나 감사활동에만 의존했고 시민들의 참여나 감시를 유도하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이번에 국무총리실에서 공직부패 방지방안을 수립하는 방식은 높이 평가할만한 측면이 있다.우선 부패가 심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식품위생,환경,건설,주택건축,경찰,세무 등 분야별로 부패요인과 방지대책에 대하여 관련 분야의 민간 전문연구기관으로 하여금 시안을 제시하게 했다는 점이다.교육계,법조계,언론계 등이 빠져 있긴 하지만 종래의 총론적이고 적발 위주였던 대책보다는 효과적 방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된다. 그리고 사후 처벌보다는 사전 예방에 중점을 두고 문제가 있는 법령이나 행정관행 등 제도개선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점,시민단체 역할을 강화하고 의식개혁을 위한 교육·홍보활동을 확대하겠다는 방향 등도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통치자를 비롯한 집권층의 강력한 의지와 솔선수범이다.국민의 정부는 정통성이 확보된 정권으로서 부패 척결을 정략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없고 이제 경제위기도 탈출한 상태이므로 부패방지에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때라고 본다.제2건국운동이 총망라적이고 초점이 불분명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부패방지에 총력을 기울인다면 정치적 저의를 의심받지 않고 국민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을 것이다. 제도적 측면에서는 행정규제를 대폭 완화하여 공무원들의 재량권을 줄이고공직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를 강화하여 축재형 부패를 철저히 예방해야한다.그리고 부패방지법을 제정하여 공직사회의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고 시민들의 감시활동을 제도화해야 하며,공직자 복무강령을 구체화하여 부정·비리의 개념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부패한 공직자는 일벌백계로 다스리는 한편 대부분의 정직한 공직자들이 부정의 유혹을 외면할 수 있도록 처우를 개선하여 생계를 보장하고 예산에서지급하는 활동경비를 현실화하는 등의 여건조성이 중요하다. 아무쪼록 이번 공직부패 방지 노력이 또 한번의 구호에 그치지 않고 총체적인 노력을 통해 반드시 성공을 거두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金 信 福 서울대 행정대학원장·한국행정학회장
  • [金三雄 칼럼] 민주와 개혁은 양립되는가

    우리는 실패한 개혁의 역사를 안고 있다.대표적으로는 고려시대의 묘청과신돈,조선 건국기의 정도전,중기의 조광조·율곡·정조,후기의 전봉준·대원군·고종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한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그러나 불행하게도 개혁은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이들 중에는 국왕을 비롯한 권력자도 있고 학자와 개혁사상가도 포함된다. 개혁의 추진에 있어서 가장 무난한 방법은 권력자가 스스로 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다.이 경우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가능하다.두번째는 개혁사상가들의 뜻을 받아 권력자가 추진하는 옆으로부터의 개혁이다.상당한 불안과 정쟁의 요인이 따르는 방법이다.마지막은 개혁운동이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혁명적 방법이다.자칫하면 내란 또는 정변으로 이어지고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①은 정조와 대원군,고종의 개혁정치를 들 수 있고 ②는 신돈,정도전,조광조,율곡 ③은 묘청과 전봉준의 경우를 든다. 묘청은 서경천도·칭제건원 등 획기적인 자주국가 건설을 주창하다가,신돈은 무신란과 원(元) 간섭기를거치면서 득세한 권문세족에 맞서 개혁작업을시도하다가,정도전은 신권론(臣權論)으로 집약되는 국정쇄신을,조광조는 훈구세력의 특권과 비리를 혁파하고 합리적이고 기능 위주의 관료체제 확립과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율곡은 10만 양병설 등 국방강화와 왕도정치를,‘탕평 군주’ 정조는 정치개혁을 총론으로 사회개혁과 경제개혁을 각론으로 하는 국정개혁을,전봉준은 척왜척양과 12개 폐정개혁,대원군은 서원철폐와 부패척결 등 갑오경장,고종은 황제권과 자위군대의 강화에 역점을 둔 광무개혁을 각각 추진했으나 대부분이 실패하거나 좌절되었다. 토인비는 문명이 발생-성장-쇠퇴-해체의 과정을 밟는다고 주장했다.왕조나국가의 흥망성쇠도 마찬가지다.쇠퇴기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개혁이나 경장을 서둘러야 해체의 비극을 겪지 않게 된다. 고려가 신돈의 개혁정치를,조선조가 조광조와 율곡의,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봉준의 개혁요구만이라도 수용했다면 ‘해체’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30여년의 군사통치유산과 김영삼 정부가 남긴 국가부도위기 그리고 남북대결과 지역갈등구조 등 그야말로 쇠퇴 또는 해체기의 국정을 맡아 ‘제2의 건국’의 개혁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사 대부분의 개혁작업이 기득권 보수세력의 도전에 의해 좌절되었듯이DJ개혁도 이들에 의해 크게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현재의 기득세력은 친일세력으로부터 시작하여 역대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했거나 정경,정언유착을 통해 수혜를 받은 계층이다.이들은 국가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더 연연한다.때문에 개혁에 도전적이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 보수 기득세력은 또 그렇다 치자.입만 열면 개혁과 통일,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언론인·지식인,노동계는 어떤가.국난극복과 개혁의 당위보다는 지역,파벌,계층,집단이기주의를 우선한다.권력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쉽고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비판은 도덕성과 정당성에서 비롯된다.독재·부패정권에 협력하거나 기생해온 지식인·언론인들의 오늘의 비판자세는 어떠한가.최근 칼럼 미게재에 항의하면서 신문사를 떠난 한 언론인은 “포악한 정권에겐 비굴하고 온건한 정권 아래선 교활하다”고 토로하면서 “과거 정권 아래선 능동적으로 나쁜 짓 하던 언론이 이제는 매사를 트집잡고 비판해.집권세력을 보는잣대는 두 가지가 분명해야 해.하고 있는 것의 ‘동기’,집권자의 ‘능력’을 정확히 판단해야지”라고 말했다.이런 언론인이 ‘국민의 정부’ 아래서도 설 땅이 없는 것이 우리 언론풍토이고 지성계이며 개혁의 딜레마이다. 민주주의와 개혁이 공존하기는 쉽지 않다.4·19후 장면 정권과 독일 바이마르 공화정이 이를 말해준다.DJ정부의 개혁작업이 주춤거리는 것도 반개혁 세력의 도전과 자율에 대한 악용에서 비롯된다. ‘자율’을 존중하되 악용·남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개혁이 요구된다.남한 180만 실업자,북한 300만 아사자를 둔 민족적 재앙과 문명사적 쇠퇴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의 네트워크가 시급하다.우리에겐 실패한개혁의 역사를 되풀이할 여지가 없다. 김삼웅 주필
  • [정직한 역사 되찾기](33)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

    일제강점기 친일파는 조선내는 물론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수립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나 일본 본토도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이들은 대개 군부나 행정기관 등 일제의 권력기관에서 일제통치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를 나와 고급장교로 활동한 친일 군인들이 이에 속하며 또 일본이나 만주국의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고급엘리트 관료로 활동한 자들을 들 수 있다.한 단계 낮은 직급에서는 밀정이나 행동대원 등 앞잡이로 활동한 자들을 거론할수 있겠다. 일본 본토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파로 박춘금(朴春琴·1891∼1973)을 들수 있다.그는 조선인으로서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두 번씩이나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그의 친일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극력 친일파 가운데 일제말기 일제가 임명한 귀족원 의원을 제외하면 일제통치 전 기간을 통해 일본 국회에 진출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박춘금은 여러 형태의 친일파 가운데서상당히 드문 유형에 속한다.친일파 가운데는 지식을 팔아 일제에 아부한 집단이 있는가하면,경제적 기반을 일제통치에 제공한 대가로 기득권을 보전하고 일제와 유착관계를 형성해온 부류도 있다.그러나 박춘금은 그도저도 없는 자였다.그는 오직 몸뚱이 하나로친일대열에서 성공한 자였다.그는 수하에 폭력조직을 거느린 소위 ‘정치깡패’ 집단의 우두머리였다.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하수인으로 폭력집단이 존재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식민지시절에도 이같은 집단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주먹으로 친일배의 정상에 오른 그의인생역정을 더듬어 보자. 박춘금은 1891년 경남 밀양 태생으로 본관도 밀양이다.부 박금득(朴今得)과 모 박차연(朴且連)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자세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년시절 그는 일본인 술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판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일본으로건너간 시기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하지가 않다.다만 그가 한 연설에서 토로한 말에 따르면,일본에 도착할 당시 수중에 가진 돈은 1원 49전뿐이었으며 당시 일본에는 관비유학생 50명인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했다. 1920년경 그가 이기동(李起東)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한 사실은 확인된다.이기동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 활동한 대표적인 재일 친일파다.상구회는 1921년말 ‘상애회(相愛會)’라는 사회사업단체로 개편되는데 23년 요코하마·나고야·오사카 등에 지부를 조직,조직을 확대하였다.그럴듯한 이름의 간판을 내건 이 ‘상애회’가 바로 박춘금 일당의 일본내 친일활동의 모태가 된다. 막노동판의 주먹패 박춘금이 일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23년 9월 1일 도쿄 인근 지역을 강타한 ‘관동(關東)대지진’이었다.수 십만 명의 인명피해는 물론 재산피해도 엄청났던 이 천재(天災)를 맞아 일제는 동요한 민심을 수습하고 조선인을탄압할 목적으로 당국의 개입하에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거나 방화를 일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여기에는 미즈노(水野鍊太郞) 당시 내무상의 조선인에 대한 개인감정이 개입됐다는 지적도 있다.미즈노는 1919년 9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따라 정무총감으로 조선에 부임하기 위해 서울역에 첫 발을 디뎠다가 강우규(姜宇奎)의사의폭탄세례를 받은 인물). 이에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관헌과 함께 조선인에 대한 무자비한 체포와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최소 6,000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바로 이때 박춘금은 상애회 회원 300여명을 동원,‘노동봉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인 희생자 시체처리와 복구작업을 자청하였다.이 무렵 박춘금 일당은이미 일제당국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상호 자연스레 교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계기로 박춘금은 일제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상애회 본부 사무실을 마련하는 등 입지를 넓혀갔다.28년 박춘금은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만들고는 이사장에 총독부 경무총감 출신의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영입했다.회장에는 이기동을 앉히고 자신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실권을 행사하였다.이 무렵 상애회는 일본내 주요도시에 지방본부를 설치하였고 회원수도 2만명을 헤아렸다.이듬해 29년 상애회관을 지어 사무실도 독립하였고 마루야마 취임 1주년때는 사이토를 기념식 행사장에 초청하는 등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세력가로 부상한 그는 상애회 조직을 바탕으로 정계진출을 추진하였다.32년 2월 실시된 제18회 총선때 그는 도쿄 5구(區)에 출마,처음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놀라운 것은 조선인 유권자가 1,236명뿐인 이곳에서 6,966표를 얻었다는 점이다.그의 열렬한 친일성이 일본인 유권자들을 설득시킨 점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정계 실력자들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거직후인 2월 23일자로 그가 사이토 전 조선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불초 이번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의 영관(榮冠)을 얻게 된 것은 모름지기 귀대(貴台,손위사람의 높임말)의 두터운 정과 성원을 입은 것이라 여기며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한데서 이같은 점을 엿볼 수 있다.이후 그는 한 차례 낙선했다가 40년 제20회 총선에서 재선하였으나 그의 정치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이후 그는 활동무대를 조선으로 옮겨 친일대열의 선봉장을자처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친일활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학도병 징집이 시작되자 그는 매일신보 주최 학병격려대연설회에 참석하여 “고이소(小磯)총독이 (조선)군사령관 시절 군사령부를 방문,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도인에 대한 병역의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밝히고는 “(학도병)4천이나 5천이 죽어 2천5백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고 외쳤다(매일신보 1943.11.19). 당시 일제가 학도병을 전선으로 내몬 것은 그 이면에는 조선의 미래의 지식분자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것이었다.그가 이같은 일제의 의도를 대변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는 그런 혐의를 둘만한 사건이 하나 있다. 8·15 해방을 불과 50일 앞둔 1945년 6월 25일.그는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친일파들을 동원,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그 자신이 당수에 취임하였다.당시 전세는 이미 기울어 일본은 패퇴를거듭하였고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이 임박한 시기였다.대의당은 바로 이 때‘최후결전’의 자세로 결성된 것이다. 대의당은 ‘강령’에서 “모든 비(非)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해서는 단연이를 분쇄한다”고 밝혔는데 여기서 ‘비결전적 사상’이란 ‘반전·반일’의 총칭이다.해방후 친일파들의 죄상을 조사,폭로한 ‘민족정기의 심판’에따르면 대의당은 항일·반전 조선민중 30만명을 학살하려 했던 ‘살인단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이는 당시 총독부 경무국이 세운 ‘요시찰인에 대한조치계획’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해방후 그는 살길을 찾기 위해 수하를 시켜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돈봉투를보내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이 때문에 그는 반민특위의 체포,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특위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를 송환하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모두 3번 결혼했는데 첫째,둘째 부인은일본여자였고 66년 75세때 세번째로 결혼한 여자는 당시 60세의 한국여자(82년 사망)였다.두번째 일본인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장남 박춘남(朴春男·89년 일본에서 사망)은일본 릿교(立敎)대학 3학년 재학중 자진하여 학도병에 출진했었다. 일제당시 일본에서 박춘금과 교류한 적이 있다는 한 일본군 장교출신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은 마약중독으로 거의 폐인이돼버렸다고 한다.73년 3월 31일 박춘금은 일본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사망,현지에 묻혔다.친일 반민족자 박춘금의 일생은 그제서야 막을 내렸다.죽어서도 그는 고국보다 일본을 택한 것인가,아니면 죽어서도 고국으로 올 수가 없었던 탓일까. 정운현기자 jwh59@
  • 한국사회발전시민실천協 정치개혁 심포지엄

    지역감정 및 당내 민주주의 결여 등 한국정치의 고질적 병폐는 모두 ‘정치시장의 독과점’때문이며 이의 해소를 통해 진정한 정치개혁이 가능하다는주장이 제기됐다.이같은 분석의 틀은 한국사회발전시민실천협의회(대표 邊衡尹)가 16일 오후 개최한 ‘정치개혁,이대로 좋은가?’란 제목의 창립 1주년심포지엄에서 등장했다. 심포지엄에서 발표자들은 이런 틀에서 지역감정을 ‘특정지역에 기반한 소수 정치인에 의한 독과점 현상’이라고 규정했다.김일영(金一榮)성균관대 한국정치과 교수와 이성복(李成福)건국대 정외과 교수는 지역감정 해소책으로국민회의 당론인 소선거구제와 정당명부제의 결합을 원칙적으로 찬성했다.그러나 몇가지 전제조건을 걸었다. 김교수는 비례대표 의석 비율이 높을수록 지역주의 완화효과가 크므로 국민회의가 내건 지역 및 비례대표 의석비율 1 대 1을 고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정당명부가 독점정치가의 측근들로 채워지는 것을 막고 ‘젊은 일꾼’의수혈통로로 기능하도록 후보의 일정지분을 시민단체와 전문가집단에게 할애하고 구체적 인물선정도 해당단체에 일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김교수는 또정당명부제 실시로 지역구가 광역화되는 데 따른 지구당 사무실 증설을 막기 위해 지구당 사무실 폐지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곁들였다. ●내각제는 지역주의 이용 우려 [金一榮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내각제가 지역주의와 정경유착을 통한 정치적 독점구조를 심화시켜 국가사회 발전의 해독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대통령제를 보완해서 써야 한다는목소리도 나왔다.내각제가 정당간 연합의 방식으로 지역주의를 완화시킬 것이란 일각의 주장과는 다른 내용이다.두 교수는 우선,특정지역에 기반을 둔정당들이 지역감정을 자신의 정치적 자원으로 계속 이용하기 위해 그것을 온존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또 여타지역들도 지역감정을 이용한 정치적 조직화를 통해 연립정부 내 일정지분 확보를 위해 덤빌 수 있어 한마디로 ‘3김없는 3김정치’가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이와 함께 정권장악을 위해 연립 파트너를 수시로 바꿈으로써 정치권이 불안정해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현행대통령제 보완대책으로 김교수는 허울뿐인 총리직을 없애고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부통령제를 두자고 강조했다.부통령제를 통해 지역연합을 꾀하면 임기가 보장돼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불안정을 피할 수 있고 차기주자가조기에 가시화돼 예측가능한 정치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허울뿐인 총리보다 부통령제로 [李成福 건국대 교수·정치학] 이교수는 중·대선거구가 지역감정을 줄일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했다.중·대선거구는 또 미디어 선거를 가능케 해 선거비용 등 정치비용을 줄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고 봤다. 심포지엄에서는 또 정치개혁의 제1단계는 당내 민주화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국민회의가 추진하는 정당명부제와 젊은 일꾼 수혈론이 결실을 거두려면 무엇보다 당의 중요정책이 당수와 몇몇 측근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김교수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자신의독점권을 포기하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당내 독점정치가들이 자신의 독점권을 버리려 하지 않을 때는 시민사회단체가 압력을 가해적어도 지역구후보만큼은 반드시 경선을 통해 뽑도록 해야한다고 덧붙였다. 나병식(羅炳植)민주개혁국민연합 상임집행위원장 등은 시민사회단체의 추천을 받은 전문가를 특위에 일정비율 참여시켜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추승호기자 chu@
  • 서울시 공무원, 부패척결 세미나서 “우리도 할말있다”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맡은 업소를 한번씩만 점검해도 23개월이 걸립니다.현실은 도저히 규정을 지킬 수 없는데 감사부서에서는 이를 지켰는지만확인하고 문책하려 듭니다” 14일 서울시가 공직자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우리 이제 새롭게 태어납시다’라는 주제로 시정개발연구원에서 가진 세미나에서는 사례발표자로나선 3명의 일선 민원행정 공무원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이경재(李敬載)강남구 보건위생과장과 박종범(朴鍾範) 서초구 세무2과 주민세담당팀장,김승호(金承鎬) 종로구 건축과 건축관리팀장.이들은 현장경험을토대로 단속행정의 실상과 담당공무원들의 애환을 소개했다.민원행정을 비리와 동일시하는 세간의 인식에 대해 나름대로 이유있는 ‘항변’도 제기했다. 특히 강남구 이과장은 비리와 관련될 수밖에 없는 위생공무원들의 실상을 상세히 고백,눈길을 끌었다. 그는 우선 공직자비리의 원천을 ‘법을 지키면 손해본다’는 일반의 만연된준법의식 결여에서 찾았다. “허가요건에 맞지 않는데도 무리하게 신청한뒤 허가가 안나면 시설투자비를 뽑기 위해 무허가영업을 강행합니다.그렇게 되면 무허가영업을 무마하기위해 담당공무원을 회유하거나 압력을 가하는 일이 당연히 뒤따르게 되지요. 사실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이어 단속현장의 문제점으로 터무니없는 단속인원을 들었다. “강남구에는 식품 및 공중위생업소가 1만8,000개나 있고 여기에 적용되는규제 역시 108개에 이릅니다.법규에 따라 일반업소는 연 1회,행정처분업소는 6개월에 1회,무허가업소는 3개월에 1회이상,영업정지 행정처분업소는 2주에 1회 이상 단속해야 하는데 여기에 투입되는 직원은 고작 11명뿐으로 1명당1,300곳 이상씩 관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2인1조로 나눠 한번씩만 점검하려 해도 최소 23개월은 걸립니다” 그는 실상이 이렇다보니 효과적인 단속보다는 감사부서를 의식한 틀에 박힌 단속과 점검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이는 민원야기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올 3월 영업시간 제한이 해제됐지만 오히려 적발건수가 15%나 는 것을 예로들며 이는 결국 행정심판과 소송으로 연결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과장은 세번째 비리요인으로 과도한 규제를 꼽았다. “식품위생법에만 일반조항 46개,시설기준 40개,영업자준수사항 22개 등 108개의 규제조항이 있고 건축법,소방법 등 관련법규의 규제도 수없이 많아 규정대로 단속하면 안걸리는 업소가 없습니다” 따라서 업주는 적발되지 않기 위해 담당 공무원과의 유착에 매달릴 수밖에없고 적발되면 금품제공,압력,회유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고 소개했다.특히 현장단속에서는 때로 종업원들이 단속원을 에워싸고 위협을 하는가 하면집이나 사무실로 전화를 해 협박하기도 하지만 속수무책이라고 털어놨다. 15년동안 건축직에 몸담아왔다는 종로구 김팀장은 “건축부조리가 언론에집중보도되면서 민원인들이 건축공무원을 의심하기 때문에 소신껏 일하기 힘들고 때론 협박에 시달리기도 한다”면서 “건축주와 민원인의 중간자 입장에서 해결하려 해도 서로 공무원을 의심하고 뜻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공무원탓으로 돌린다”고 하소연했다. “국세와 지방세 가릴것 없이 세금비리가 터지면 일선 지방세무공무원이 부조리의대명사로 취급받는다”고 억울함을 토로하며 발표를 시작한 서초구박팀장은 자신이 모법인으로부터 50억원의 종토세를 추징한 사례를 들어가며세무공무원들의 사정과 자정노력에 대한 이해를 당부했다. 조덕현기자 hyoun@
  • 법무사자격제도 대수술 시급

    “법원과 검찰 직원들에게는 지난해 300명 가까이 자격증을 주고 시험선발은 30명으로 제한하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법무사를 지망하는 수험생들의 법무사 자격제도에 대한 불만은 대단하다.공기업을 그만두고 법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진영화씨(38·가명)는 “공무원의 전관예우를 위해 국민은 일자리마저 빼앗겨야 하는가”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법무사 자격증의 문제점 수험생들의 불만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법무사의폐쇄성이 가장 심하기 때문이다.전문 자격사 가운데 공무원 출신으로 자동으로 자격을 부여받은 비율이 법무사는 94.2%이고 공인노무사 62.1%,관세사 44.2%,변리사 30.3%,세무사 24.5%이다.다른 시험은 경력 공무원에게 시험과목을 일부 면제해주고 있지만 법무사와 변리사는 시험을 모두 면제해주고 있다. 대전에 사는 이재희(李在熙)씨는 “법원 직원 출신에게 자동으로 자격증을 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형사사건을 다룬 검찰 직원에게도 자격증을 준다는 것은 더욱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법무사 시험제도뿐 아니라자격증을 따고 나서도 장벽은 곳곳에 있다.합동법인의 경우 5명 이상의 법무사 가운데 2명은 공무원 경력자이거나 10년 이상 법무사 종사자로 정해져 있어 합동법인의 자유로운 설립을 가로막고 있다. 또 공무원 출신에게 자동으로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유착관계를 조장한다고지적돼 왔다.협회 가입이 강제되고 내규로 광고행위를 규제,자유로운 영업활동을 제한하고 소비자의 불편을 초래하는 것도 문제시돼 왔다. 법조계 반응 법원행정처 송기헌(宋基憲)등기과장은 “법원·검찰 직원에게 자격증을 주는 것이 평등원칙에 어긋난다고 보지 않는다”고 반박한다.검찰 직원들은 법무사 자격증을 받기에 충분한 법률적인 소양과 자질이 있다는것이다.법조계에서는 법무사제도에 손질이 가해질 것이라는 소문에 명예퇴직을 신청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선 전망 법무사 자격은 대법원장이 인정하고,시험시행도 법원행정처 소관이다.규제개혁위원회가 법원행정처에 세무사 등의 자동 자격증부여제도 폐지방안을 전달하고 개선을 권고하는 데 그친것도 이 때문이다.법원행정처도 곧 개선안을 마련할 것으로 알려졌다.법원행정처가 직원들의 기득권을 깨트리고 얼마나 획기적인 개선안을 내놓을지 주목을 모으고 있다.
  • [제2공화국과 張勉](12)少壯派의 도전/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張勉정부의 안정을 뒤흔든 내부 요인은 민주당 신·구파의 대립만이 아니었다.당내 젊은 의원들,특히 신파쪽 소장파들의 반발과 도전은 만만치 않았다. 張勉내각 명단이 발표된 1960년 8월23일 밤 민주당 신·구파의 소장파 대표 두 사람이 만나 양 세력이 제휴해 내각을 견제한다는 데 합의한다.다음날신파 소장파의 주요 멤버인 金在淳의원은 “신·구파 소장의원들이 새로운서클을 형성해 정계를 정화해야 한다”는 ‘제3서클론’을 제기하고 “앞으로 구파의 朴浚圭·金泳三의원 등과 본격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金의원은 이어 “우선 신파 중진들의 모임인 13인위원회 멤버를 제거해야겠다”고 발언했다.이날자 신문들은 ‘민주당 소장파가 張내각 무너뜨리기(倒閣·도각)에 나섰다’는 식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8월25일 신파쪽 소장파의원들은 정치혁신을 표방하고 ‘소장동지회’(후에‘신풍회’로 개칭)를 구성했다.참여의원은 모두 36명으로 대표 격인 총무는 李哲承,대변인은 金在淳,간사는 趙淵夏가 각각 맡았다.이들은 “당내당(黨內黨)으로서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공언했다. 張勉의 첫 내각에는 소장파의원 누구도 장관으로 끼지 못했다.禹熙昌(외무)金載坤(상공)金學俊(체신)등 세 사람이,내각에서 국회쪽 일을 처리하는 정무차관으로 발탁됐을 뿐이다.따라서 정가에서는 “소장파 리더인 李哲承이 국방장관 직을 요구했으나 무산되자 이에 반발한 것”이라는 해석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그러나 소장동지회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그것은 張총리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이라기 보다 그를 둘러싸고 요직을 독점하다시피한 ‘고시파’에의불만이었다.고시파란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해 고급관리를 한 사람들을 지칭했다.張勉의 첫 내각에서는 金永善재무 曺在千법무 申鉉燉보사金善太 무임소장관 등이 이에 해당됐다.이 그룹의 지도자는 은행가 출신인吳緯泳 국무원사무처장이었으며 이들을 흔히 ‘원내자유당계’로 불렀다. 실제로 내각이 출범하자 구파의 梁一東은 “張勉내각이 아니라 吳緯泳내각”이라고 깎아내렸고,신문에서도 “혜화동 吳씨 사랑방에 속옷 바람으로 앉아 있던 분들이 전원 입각했다”고 비아냥댔다. 소장동지회는 또 李錫基의원이 원내총무 물망에 오르자 “원내자유당계가내각 요직을 독점한 데 이어 총무까지 차지하려느냐”면서 李哲承을 원내총무로 미는 등 저항을 계속했다.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가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것은 ‘7·29총선’직후부터이다.광복이후 우익학생운동을 주도해 온 李哲承은 4·19혁명에서 7·29총선에 이르는 정치적 과도기에 학생운동 동지들을 공천하고 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총선이 끝나자 李哲承은 30∼40대 초·재선 의원들을 규합해 리더로 떠올랐다. 하지만 신파 소장파가 이념적인 지향성을 공유(共有)하거나 결속력이 강했던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초선의원으로서 張勉내각에서 내무차관을 지낸 金永求(79)는 내내 소장파모임의 멤버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그는 “젊은 국회의원들이 ‘힘은 없지만 청신(淸新)한 정치를 해보자’고 만든 모임이지 당내 서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자신도 고려대교수(정치학 전공)시절 李哲承을 가르친 인연으로 이름을 올렸을 뿐이라는 것.金永求는 “李哲承의 인맥이 많아 그에게 정치적 기반이됐던 것은 사실이고 張박사도 골치아파했다”면서 가끔은 張勉총리가 자신에게 소장파를 설득하도록 지시했다고 공개했다. 어쨌든 소장파는 한때 신파 의원의 절반 가까이를 확보할만큼 세력을 키웠고 그에 따라 張勉내각에 사사건건 공격을 가했다.또 張勉정부에서는 개각이 모두 세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집요하게 물갈이를 요구했다.그렇지만 2차내각에 金在淳 외무차관·金永求 내무차관이,3차 내각에 朴珉基상공차관 등몇몇이 들어갔을 뿐 끝내 장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1961년 1월24일 소장동지회는 ‘신풍회(新風會)’로 이름을 바꾸고 정식으로 정파의 모습을 띤다.이틀뒤에는 신민당(민주당 구파)과 무소속의 소장파가 합세해 “새생활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청조회(淸潮會)’를 만든다. 신파 지도부와 신풍회사이의 갈등은 61년 2월 ‘중석사건’으로 드디어 폭발한다.26일 신풍회의 咸종빈의원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한중석이 일본 동경식품에 중석 400t을 수출키로 하면서 100만달러의 커미션을 받는 이면계약을 맺었다”고 발설한 것이다.咸의원은 아울러 그 배후에는 吳緯泳 당시 무임소장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폭로’는 정가에 태풍을 몰고왔다.신민당을 비롯한 야당과 신풍회는張勉정부 최대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라고 흥분했고 언론도 날마다 의혹을 대서특필했다.급기야 배후로 지목된 吳장관은 咸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야당 요구대로 국회에는 ‘중석사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는 지경에까지이른다. 사건이 확대되자 咸의원은 “소문을 들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고 발뺌하고 사과하지만 張勉정부의 이미지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5·16후 쿠데타군은 이 사건을 대표적인 부패사례로 꼽아 철저히 수사하지만 아무런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張勉내각이 이 사건과 관련없음을 오히려 쿠데타세력이 입증해준 꼴이 된 셈이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두달여 지나 월간 ‘사상계’가 마련한 좌담회에서 ‘당대의 독설가’로 불리던 申相楚는 張勉정부를 무너뜨린 주범으로 ‘3신(新)’을 꼽았다.‘3신’이란 이름에 신(新)자가 들어간 세가지,곧 ‘정부를무조건 두들겨팬 신문 민주당 구파가 떨어져나가 만든 신민당,그리고 신풍회였다. 張勉총리의 공보비서관을 지낸 故 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신풍회가)시시비비로 나온다고 하지만 항상 ‘비(非)’쪽이라 과연 당내 서클인가 의심케 하는 경우가 많았다.30년전 신풍회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공개정치를 표방하는 풍토였다고는 하나 지나친 것이 아닐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 新風會 리더 李哲承씨 李哲承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77)은 제2공화국 때 만40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국회의원이었다.그런데도 3선의원인 그는,소장파 의원 30여명이 속한 신풍회의 리더로서 ‘실세’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신풍회가 張勉정부를 흔들었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구체적으로 정부나 당에 해를 끼친 일이 없어요.다만 당의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고 의견이나 정책을 낸 것까지 트집잡는다면 할 말은 없소만은” 李의장은,신풍회가 당내에서세력다툼을 벌이는 ‘파벌적’인 성격을 띤 게 아니고 일종의 정책연구 모임이라고 못박았다.“신파 지도자들이 노장층이어서 정치에 새바람(新風)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를 택했지만 사실 당에서 내각에 보낼 장관이나정무차관 재목이 충분하질 않았어요.지방자치제도 시행 중이니 시·도의원들도 키워야 했고.신풍회가 사람을 키워 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구실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張勉내각이 들어선 뒤 신풍회 멤버들이 정무차관으로 많이 들어간 것도 그때문이라는 설명이다. 李의장은,張내각 출범때 국방장관 자리를 얻지 못해 곧바로 ‘도각 운운’했지 않느냐는 질문에 “뭘 도각까지야….신문들이 과장한 거지”라고 부인했다.그러나 국방장관 자리와 관련해서는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다. “남들도 다 내가 국방장관이 된다고들 믿었어요.민주당 신파에서 군 인사들이나 국방관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또 나는 그때 이미 장관이 될만한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노장의원들이 결사반대했다고 한다.李의장은 그 까닭을 “내가 소장파 40명쯤을 거느리고 있는데 군까지 쥐게 되면 총리 자리를 노릴까 걱정해서”라고 풀이했다.그러면서 “張박사가 총리를 한두차례하고 난 다음에는소장파가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李의장은 “내가 국방장관이 됐다면 쿠데타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면서 “(쿠데타 세력이)할 생각도 못했고 하려 해도 막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이나 제2공화국,그리고 張勉총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거부했다.민주당은 비록 파벌과 견해차를 갖고 있었지만 순수한 민주적 정당이었고,張勉정부도 정경유착이 없는 깨끗한 정부였다고 평가했다. “대화와 타협,그리고 법치(法治)가 민주당과 張勉정부의 기본 방침이었다”고 밝힌 李의장은 “통솔력이 부족해 질서를 잡지 못했다고들 하는데 그때는 시위를 단속하는 법이 없어 데모 자체가 불법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李의장은 5·16쿠데타를 일본 도쿄에서 맞았다.미국에서 열린 제16차 UN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미국으로 돌아가 망명생활을 하다 1964년귀국하지만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71년에야 8대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張박사는 덕망과 인격 면에서는 성직자보다도 깨끗한 분이었습니다.외유내강한 분이기도 하고.부통령 시절 저격당했을 때도 의연했고,형무소나 다름없는 순화동 부통령공관을 끝까지 지켰습니다.그렇지만 난세의 지도자로서는 약했다고 봅니다”李의장은 요즘도 張勉총리가 그립다는 말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31)문명기

    ◆경북 영덕 최고부자 文明琦 잊을만 하면 한번씩 기자를 찾아와 친일파·현대사 인물 등에 관한 자료(정보)를 제공해주는 분이 한 분 계신다.겨우 이름 정도를 알고 있을 뿐 그 분의 신상에 대해선 자세히 알 길이 없다.다만 그 분이 건넨 자료 가운데는 대단히 우수한 것들이 많음에 번번이 놀랄 뿐이다.자료와 함께 동봉한 메모를통해 그 분의 방대한 독서량과 해박한 지식에 대해서도 혀를 내두를 뿐이다. 특히 누구는 누구의 부친이고,누구는 누구와 사돈간이고… 등등의 ‘사람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이런 이야기는 공간(公刊)된 자료나 문헌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으로 때로는 문헌자료 이상의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지난 겨울에 찾아와 건넨 그 분의메모 속에는 일제때 상하이(上海)에서 일본군에 군납(軍納)을 하면서 떼돈을 번 손창식(孫昌植)을 비롯해 여러 명의 친일파가 등장한다.그런데 그중 한명은 한 때 자신이 그의 ‘괴짜인생’을 교훈으로 삼을 뻔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70년대 초반 어느 신문에서 그 사람의 출세비화를 다룬 적이 있는데그때는 그의 친일행적을 전연 몰랐다는 것이다.이야기는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일제때 경북 영덕 읍내 영덕경찰서장집 마당에 아침마다 팔뚝만한 삼치 한마리가 떨어져 있곤 했다.이를 이상히 여긴 그 집 식모가 어느날 아침 이를서장에게 고하자 서장은 주인공을 찾아보라고 하였다.며칠 만에 식모가 삼치를 떨어뜨리는 주인공을 잡고 보니 그는 지게에 생선을 지고 다니며 파는 생선장수였다.마침내 서장이 나와 무슨 연유로 매일 아침 마당에 생선을 놓고가느냐고 묻자 그 생선장수는 “서장님께서 치안을 잘 유지시켜 주시니 덕택에 저 같은 사람도 생업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달리 보답할 길은 없고 해서제가 파는 생선이나마 드려서 아침 밥상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 탄복한 서장이 “내가 뭐 도울 것은 없소?”하고 묻자 그는 “특별한 부탁은 없습니다만…밑천이 달려 물건을 많이 받아올 수가 없어서 겨우 지게꾼 행상을 하는 것이…”하고는 말끝을 흐렸다.그러자 서장이 “그럼내가 생선도매점에 소개장을 하나 써주겠소” 하고 약속을 하였다. 당시만 해도 거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경찰서장의 소개장 덕에 그는 이 일대에서 생선장사로 큰 돈을 벌게 되었다.생선을 미끼로 출세길을 튼 이사람은 일제 당시 경북 영덕 일대 최대의 부자 문명기(文明琦·창씨명 文明琦一郞)였다.일제로부터는 ‘애국옹(愛國翁)’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민족사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보자. 문명기는 1878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문승환(文承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씨 부자가 언제,어떤 경로로 경북 영덕에 뿌리를 내리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조선총독부가 시정 25주년 기념으로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1935년 간행)에 따르면 그는 29세 때인 명치 40년(1907년)쯤 제지업을 시작한 것으로 나와있다. 생선장사로 돈을 모은 그가 제지업에 눈을 돌린 것은 이 일대가 종이원료가 풍부한 것이 계기가 된 듯하다.그는 자기 공장에서 종이를 생산하면서 다른 공장의 종이를 사서 이를 만주로 내다팔기도 하였다.사업이 번창해지자 그는 제지업계의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목하에 광제회(廣濟會)라는 재단법인을만들어 종이 생산·판매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아울러 그는 이같은 이권단체를 통해 일제 관헌과 조직적으로 유착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산업과 제지업에서 자본을 축적한 그는 당시 유행하던 금광사업에투자하였다.일제 당시 대부분의 기간산업은 일본인들이 독차지하고 있어서조선인들이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운(運)을 담보로 한 금광사업 정도였다. 따라서 이 분야는 조선인 사업가들이 일제로부터 별 간섭 없이 진출할 수 있던 분야이자 조선인 토착자본의 집중 투기대상이기도 했다.1932년 영덕군 지품면 도계에 있던 금은광산을 인수,자신의 이름을 따 ‘문명광산’으로 명명하였는데 그는 이 광산에서 ‘노다지’를 캐 향후 사업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경북지방의 모퉁이인 영덕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그가 중앙무대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35년 그가 육·해군기 각 1대씩 비용으로 10만원을 헌납하면서부터다.그는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금광을 일제 당국의 주선으로 일본유수의 미쓰코시(三越)측에 12만원을 받고 매각하고는 그 대금 가운데 10만원을 비행기 헌납금으로 내놓은 것이다.어림잡아도 현재의 10억원 규모의 거액을 비행기 헌납금으로 내놓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일제는 그를 ‘애국옹(愛國翁)’이라고 치켜세우며 대대적으로 선전에 활용하면서 그가 헌납한 돈으로 구입한 비행기를 ‘문명기호(文明琦號)’로 명명하였다.경성비행장에서 열린 명명식에는 일본의 해군대신 대리가 참석하였고 행사 후 해군기 6대가 축하비행을 하는 등 요란을 떨었다(매일신보 1935.4. 7). 이후 그는 곧바로 영덕 국방의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다시 재향군인회 특별회원,일본적십자사 특별회원 등에 선임되었다.일약 이 지역의 명사로 등장한 그는 뒤 이어 경북도회 의원,중추원 참의에 피선돼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명성과 함께 그의 친일 행위는 더욱 노골화되어 갔다. 그는 조선 전역에서 ‘1군(郡) 1대(臺) 헌납운동’을 펴자고 주창하고는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만들어 여기에 1만원을 기부하면서 대대적인 헌납운동을전개했다.이후 전국에서 군 단위나 단체별로 헌납 주체의 이름을 딴 ‘애국기헌납운동’이 꼬리를 물고 뒤따랐다.밀양 지역의 ‘밀양호 (密陽號)헌납운동’의 경우 총모금액은 10만원,모금대상은 전 밀양주민인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당시 ‘헌납병 환자’ 또는 그의 이름을 빗댄 ‘야만기(野蠻琦)’ 등으로 불린 그는 두 차례의 헌납에 이어 다시 육군과 해군에 각각 2만원,4만원을 헌납하였다.또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에는 비행기로는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이번에는 ‘헌함(獻艦)운동’을 제창하고는 솔선하여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동광(銅鑛) 3개를 기부하였다(매일신보 1943.1.24).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일제의 강요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수동적·소극적 친일을 한 반면 그의 친일은 다분히 의도적·적극적이라는 데 분명한 차이가있다.중일전쟁이 발발(1939.7.7)하자 그는 황군(皇軍·일본군) 위문차 북지(北支·북중국)로 가는 도중 평양에서 강연회를 개최,전쟁 미화를 골자로 한친일연설을 하였으며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경부선 주변 각도시를 순회하며위문결과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듬해에는 의남(義男)단원을 강제로 모집,수많은 조선청년을 북지의 전쟁터로 내몰았으며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일어판 친일지 ‘조선신문’사장,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면서 일제의 침략전쟁협조에 광분하였다. 그의 대표적 친일행각 중 하나는 그가 전시하 황도(皇道)선양을 목적으로조선 내 각 가정에 ‘가미다나(神棚)비치운동’을 전개한 사실이다.‘가미다나’란 일본의 개국신(開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영부(靈符)를 안치한 것으로,이를 집안 높은 곳에 비치해 조상신으로 모시고는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전국으로 보급하기 위해 광제회라는 보급단체를 조직,자신이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경성부윤(현 서울시장)을 명예회장에 추대,남산 조선신궁에서 가미다나 분포식을 거행하고는 1차로 서울시내 각 정회 총대(町會 總代,동장) 130여명에게 가미다나를 나눠주었다.이후로 조선 내 각 가정에서는 신사참배와 함께 일본황실의 조상을 강제로 받들어야만 했다. 평소 일본 신도(神道)의 철저한 맹신자였던 그는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한것으로도 유명하다.집안 치장이나 의복·언어는 물론 생활방식까지도 전부일본식으로 개조하여 철저한 일본인이 되고자 하였다.1943년 7월 그는 황도선양회를 만들어 자신이 회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1949.1.29)돼 심판대에 올랐던 그는,호적에 따르면 이후 행방불명돼 생사확인이 곤란하다.
  • 「정치개혁 어떻게 돼가나」여야협상 진척도-각계 제시案 점검

    ‘정치개혁’에 대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정치권은 물론 시민단체까지나서 속도를 더해가고 있다.여기에 선관위도 자체 안을 마련,불을 지피고 나섰다. ■국회 거의 합의를 이끌어낸 상태다.이번 임시국회에서 국회 관련법을 통과시킨다는 방침이나 ‘인사청문회’ 대상을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맞서 진통이 예상된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청문회 대상을 현행대로 헌법상 국회의 동의를 받아임명하는 공직자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국무총리,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감사원장,대법관,헌법재판관,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등이 대상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대상자의 폭을 넓혀 국정원장,경찰청장,검찰총장,국세청장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여당을 몰아붙이고 있다.정치개혁시민연대는 나아가차관급 이상 고위공직자로 확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참여연대측도 “인사청문회 대상을 둘러싼 여야간의 대립으로 정치개혁이지지부진하다”면서 “국회의 임명동의를 필요로 하는 공직자에 대해서는 인사청문회를 실시하되,대통령이 임명권을 가지고 있는 국정원장 등에 대해서는 중립적 인사로 구성된‘고위공직자인사위원회’를 만들어 검증하면 된다”고 대안(代案)을 제시했다. 국회의장 당적 이탈,국회 상시 개원,예결위 상설화 등은 지난해 말 합의를본 상태여서 인사청문회 문제만 남은 셈이다. ■선거 각 정당,개개 의원의 정치생명과 직결된 만큼 신경전이 대단하다.여야(與野)뿐 아니라 여여(與與) 사이에도 입장 차이로 내홍(內訌)을 겪고 있다.공동여당이 ‘단일안’을 아직 도출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다 한나라당은 선거제도를 논의하기 전에 ‘대통령제냐,내각제냐’의 권력구조문제를 먼저 매듭지어야 한다고 두 여당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있다.최대한 틈새를 벌려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속내다. 여야 3당이 소선구제를 당론으로 하고 있는 가운데 일각에서 중·대선거구제의 가능성도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대안으로 거론될 공산이 크다.선관위가 중·대선거구제를 선호하고 있는 반면 시민단체들은 소선거구제 쪽으로 기운다. 국민회의측이 ‘전국정당화’를 위해 내건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한나라당이 적극 반대하고 있어 실현가능성이 불투명하다.시민단체들은 순수 독일식이라면 좋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또 국회의원 정수는 270명선으로 여야간 의견이 좁혀지고 있다.그러나 선관위와 시민단체는 250명선이 적당하다는 주장을 편다. ■정당 ‘돈 안드는 정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비용저효율’의 대명사로 불리는 정치권이 환골탈태(換骨奪胎)하기 위해 반드시 ‘메스’를 댈분야다.방만한 지구당을 정비하고 ‘검은돈’의 유혹을 받기 십상인 정치자금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자금제도에 관한 여러 안 가운데는 선관위의 안이 특히 눈길을 끈다.후원금 상한선을 개인의 경우 연간 1,000만원으로 묶으면서 기업의 정치자금기부도 금지했다.대신 기탁금제도를 개선,1억원 이상 법인세를 내는 법인은법인세의 0.5∼1%를 의무적으로 선관위에 내 국고보조금 배분비율로 각당에지급토록 하고 있다. 오풍연- 여야‘말로만 개혁’ 1999년 4월13일.선거법에 따라 여야가 국회에서 선거구획정안을 마련,국회의장에 제출해야 하는 시한이다.총선 직전 선거법을 급히 뜯어고치는 후진적전례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뜻에서 정치권이 만들어놓은 법이다. 여야 정치권은 그러나 또 이 법을 어기게 됐다.열흘 안팎 남은 기간 안에국회가 선거구획정안을 완성하기는 물리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새 정권 출범 후 지난 1년간 여야는 당쟁(黨爭)만 일삼으며 정치개혁 현안을 뒷전으로 미뤄왔다.이것이 국민의 불신을 가중시켰고 유권자들은 ‘3·30재보선’에서 30%대의 ‘최악의’ 낮은 투표행태로 반응했다. 정치권이 국민과의 약속을 휴지조각으로 여기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여야 총재는 지난해 11월10일에 이어 지난달 17일 만나 발표·합의문을 냈다. 모두 정치개혁 입법을 본격 추진키로 합의했으나 진전은 없다. 정치개혁을 하자는 것은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지역주의를 극복하자는 얘기다.정치무대인 국회의 효율성을 높여 생산적인 정치토대도 구축하자는 것이다.정치인의 지갑이 투명한 ‘유리지갑’이 되고 돈을 많이 들여 선거를치러도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저비용고효율’구조를 만들라는 압력이다. 정치개혁 필요성은 ‘3·30선거’에서도 드러났다.안양시장과 시흥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듯 국민은 개혁적이고 참신한 후보에 높은 점수를 줬다. 하지만 우리 정치는 아직 신진세력 수혈을 막는 구조다.비례대표 의석을 받으려면 최소득표율이 높아야 하고 정당 설립때는 ‘지구당의무’조항이 만만치 않다.정당구조를 들여다보면 공직선거 후보를 결정하는 대의원 선출 과정 또한 반(反)민주적이다.당직 경선이나 상향식 공천제는 찾을 수 없다.전당대회에 수십억원을 쏟아붓는가 하면 국고보조금에서 정책개발비로 나가는 돈은 쥐꼬리만 하다.이런 것들이 개혁 대상이다.돈을 많이 써야 하는 선거제도도 문제다.돈을 많이 쓰면 표도 많이 받는 게 현실이다. 현행 전국구제도가 지역주의를 심화시키는 구조라는 지적이 있다.88년 13대 선거때는 제1당이 전국구 의석의 반을 가져갔고,96년 15대때는 전국구 의석을 정당득표율에 따라 배분했으나 전국구는 15%에 그쳤다.15대때 여당인 신한국당은 34.5%의 득표를 하고도 46.5%의 의석을 가져가기도 했다.이런 불합리한 구조개선을 위해 여권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당론화했다.야당은“여당에 유리하다”며 반대하고 있다.여야를 떠나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정당에 불이익을 주는 배분 틀을 만드는 것 또한 정치개혁의 중요한 테제다. 유민- 정치개혁 걸림돌은 뭘까 국회·정당·선거법 개혁 등 정치제도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당리당략이다.정치권은 정치개혁이라는 총론에는 합의하면서도 각론에서는 모든 것이상충된다.선거제도의 당리당략은 첨예하다.선거제도만 합의하면 정치개혁의80% 이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여권 단일안을 만들기 위해 8인 정치개혁특위를 구성했으나 실질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여권 단일안이 마련되더라도 첩첩산중이다.한나라당은 구체적 안을 내놓지 않으면서 눈치를 살피고 있다.시간을 늦추면서 최대한 당리를 챙기려는 속내다.당내에 주류·비주류,그리고출신 지역에 따라 의견이 달라 쉽사리 합일점을 찾기 힘든 측면도있다.현역 의원들의 ‘밥그릇 챙기기’도 개혁의 걸림돌이다.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비례대표제,중·대선거구제 등의 장단점을 있는 그대로 검토해야 한다.그러나행여 내 선거구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현역 의원들의 몸조심은 선거판의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의원정수를 줄이기 쉽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흑색선전 방지,정경유착고리 끊기 등 이밖의 난제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강동형- 시민단체“더이상 두고 못보겠다”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 압력이 커지고 있다.급기야는 지지부진한 정치개혁작업을 보다 못해 ‘협상파트너’로 나설 것을 선언했다.정치개혁을 가로막거나 대(對)국민 약속을 어기는 의원과 출마자들에 대한 ‘낙선캠페인’도 검토중이다. 정치개혁시민연대,시민개혁포럼,행정개혁시민연대 등 39개 단체로 구성된‘정치개혁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는 최근 실무위원회를 갖고 정치개혁을 위해 시민단체의 ‘직접 참여’를 선언했다. ‘정치개혁 연대회의’ 孫鳳淑공동대표는 2일 “당리당략 등 첨예하게이해관계에 있는 당사자들로는 문제해결이 안된다”면서 “민간인이 참여해 정치개혁을 같이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정치권에 맡겼다가는 정치개혁작업이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정치개혁위원회’의 구성을 추진하고 있다.국회 정치개혁특위24명에 시민단체 대표 24명이 동수로 위원회를 구성,국회·선거·정당정치개혁 현안을 포괄 논의하는 것이다. 정개연은 오는 8일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은 제안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여야 3당 총재를 직접 방문,‘정개위’ 구성을 촉구할 계획이다.정치개혁시민연대 金石洙사무처장은 “이제 정치권은 스스로 정치개혁을 할 자정 능력의 한계를 보였다”고 말했다. ‘정치개혁 연대회의’는 오는 14일 공청회를 거쳐 ‘시민단체의 단일안’을 이끌어낸다는 방침이다.정개연은 우선 ‘시민단체도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으로 선거법을 개정할 계획이다.시민단체도 지지후보를밝히는 ‘구체적’인 형태로 정치권에 ‘압력’을 넣겠다는 취지에서다.정치개혁을 위한 각종 캠페인과서명운동 등을 통한 여론 확산도 계획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 金令培부총재는 “시민단체가 직접 정치개혁 협상에 나서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서 그러나 “시민단체의 안이 나오면 정치권에서반영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의 안이 정치권에 수용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그러나 외면하기도어렵다.정치권이 개혁과 구조조정의 ‘사각지대’로 남아서는 안된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최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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