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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네스코 세계유산위 총회 이모저모

    ◎각국 대표들 한국문화재 극찬 만장일치 결정/“불국사도 신청해달라” 크리어 사무총장 요청 「한국문화재의 세계화시대」가 열렸다. 유네스코 산하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총회에 참석한 한국관계자들은 환호를 지르면서도 『왜 이렇게 늦게 신청했는지 모르겠다』며 만시지탄을 안타까워 했다. ○…한국문화재의 세계문화재 결정은 회원국들의 찬조연설등 지원사격을 받아가며 만장일치로 20분만에 처리됐다.유산위 산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헨리 크리어 사무총장은 제안설명에서 『불국사는 한국이 신청하지 않았으나 동양불교미술의 정수라고 판단,추가하도록 한국에 요청했다』며 『종묘는 독특한 건축물로 한국문화의 상징적 건물』이라고 세계문화재로 결정해 줄것을 요청. 이어 니제르의 수석대표는 찬조연설을 통해 『한국문화는 일본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한국문화재를 세계문화재로 결정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한국문화의 높은 수준을 극찬했으며 필리핀 수석대표도 한국문화의 독창성 등을 들어가며 지정의 당위성을 역설. 총회의장인벵크만 독일문화국 부국장은 한국문화재 3건에 대해 개별적으로 찬반을 물었으나 아무런 이의제기 없이 순식간에 통과. 김현곤 유네스코주재 한국대표부대사는 연설을 통해 『앞으로 한국문화재를 인류문화재로 관리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라고 다짐. ○…이날 총회에서는 35건의 문화재 신규가입안이 상정됐으나 4건이 결정연기 또는 기각돼 한국관계자들은 가슴을 졸였다.김진무 문화재관리국장은 『다른 나라의 문화재가 기각되는것을 보고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숨이 가빴다』며 『우리나라가 세계1백2번째로 문화재 등록국가가 된것은 너무 늦었다』고 말하고 『앞으로 경주시 유적지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 무렬왕릉 등도 추진해 나가겠다』고 기염. 이원식 경주시장은 『관광수입을 늘릴 수 있는 획기적 계기』라며 『앞으로 전체 관광객의 7∼8%밖에 되지않는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중점적으로 유치작업을 펴겠다』고 역설. 김대사는 『앞으로 유산위의 이사국으로 진출,세계문화재로 지정되는 기회를 늘리는데 노력하겠다』고 강조.
  • 석굴암·팔만대장경·종묘 세계문화유산 지정/유네스코 결정

    【베를린=박정현 특파원】 한국의 전통문화재 3건이 6일 처음으로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됐다. 유네스코 산하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날 베를린에서 열리고 있는 제19차 총회에서 석굴암(국보제24호)및 불국사(사적,명승제1호)와 팔만대장경판(국보제32호),판고(국보제52호)및 해인사(사적,명승제5호)그리고,종묘(사적제1백25호)등 한국의 문화유산 3건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국제적 차원에서 보존노력을 벌여나가기로 결정했다. 석굴암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된 것은 한국 문화재의 가치가 세계적으로 공식 인정받았다는 의미를 가지며 앞으로 유네스코측으로부터 보존을 위한 기술지원은 물론 파손우려등 긴급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는 재정지원도 받을수 있게됐다. 김진무 문화재관리국장은 회의를 마친후 『내년에는 무령왕릉·설악산등 7건의 문화·자연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가등록하도록 추진할 것』이라고 밝히고 『경주시 유적지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방안도 적극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석굴암·팔만대장경·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의미

    ◎한국문화재 3점 인류 문화유산으로/고대·중세·근세 것 1개씩 채택… 더욱 값져/세계 100국 440개 등재… 기술·재정지원 받아 한국의 문화재들이 4일부터 9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유네스코산하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게 되었다.세계유산위원회 21개 이사국은 이번 총회 기간중 지난 7월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 회의를 거쳐 권고된 각국 문화재의 세계유산등록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어서 우리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난 집행이사회에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토록 권고된 우리 문화재는 석굴암(국보 제24호)·불국사(사적,명승 제1호)와 판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및 판고(국보 제52호)·해인사(사적,명승 제5호),그리고 종묘(사적제125호)등 3건.우리나라의 전통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문화재는 고대에서 중세,근세를 망라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진 세계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록제도는 지난 72년 유네스코 제17차 총회에서 체결된 「세계문화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75년부터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했다.그러니까 세계유산위원회가 협약 가입국의 유산중 오늘의 인류들이 뚜렷하게 보존할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는 유산을 유네스코 세게유산일람표에 등재하는 제도다.세계유산으로 등록되면 세계유산기금으로부터 기술·재정적 원조를 받을 수 있고 세계유산협약국이 매 5년마다 그 보전상태를 모니터해 보고하도록 돼있다.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보전 관리가 가능한 것이다.그리고 국내외 대상 문화유산이 있는 지역에는 관광객이 증가돼 고용기회와 수입이 늘어날 수 있다.특히 유산에 대한 국가의 자부심을 고취시켜 국가적 책임감도 형성시키는 이점이 반드시 뒤따른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계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일 것이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3백26개를 비롯해 자연유산 98개,복합유산 16개등 모두 1백개국에서 4백40개가 등록돼있다.문화유산에는 미국의 독립기념관,자유의 여신상,차코 문화국립공원이 북미에 분포되었다.이밖에 유라시아의 그리이스의 아폴로신전,델피 고고유적,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데스 중세도시,이탈리아의 플로렌스 유적도시,피사의 사탑등을 망라했다.아시아만 하더라도 중국이 만리장성,진시황릉,명청대궁전,라사폰텔라궁등 14건이 등록을 마쳤다.일본의 경우 5건,인도 21건,인도네시아 4건,필리핀 2건,태국 4건,베트남 2건등이 등록돼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88년12월 세계 1백2번째로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했다.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과 인연을 맺은지 7년째지만 아직까지 단 한건의 문화·자연 유산도 등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이번 문화유산 등록은 국가적으로 매우 뜻이 깊다.따라서 이번 세계유산 등록은 우리 문화재가 유수한 세계의 문화유산과 동등하게 평가되고 비교되는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를 한껏 모으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보고/우리 문화유산 사랑 계기되길/최몽룡 서울대 박물관장 우리나라의 불국사­석굴암,해인사 대장경판­장경판고와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좀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민족의 얼과 솜씨가 밴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른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국사는 통일신라 서기 710년(경덕왕 10년)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이다.여기에는 다보탑(국보 20호),삼층석탑(국보 21호),연화칠보교(국보 22호),청운백운교(국보 23호),금동비로자나불(국보 26호),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과 사리탑(보물 61호)이 있다.또 19 66년 10월 삼층석탑(석가탑)의 해체 수리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한 동경,옥류와 은제사리함 등은 국보 126호로 일괄 지정받았다.그중 두루마리로 된 다라니경은 8세기경에 제작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라 할 수 있다. 석굴암석굴(국보 24호)은 751년(경덕왕 15년)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후원전방의 석실이다.그안에 본존불을 비롯해 십일면관음보살,십대사천왕상,금강역사상과 팔부신중상들이 조각되어 있다.종교성과 예술성을 공유한 이들 조각은 세계적 예술품이거니와 우리조상이 남긴 걸작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32호)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1233년∼1248년에 걸쳐 판각하였는데 매수가 8만여판에 이른다.이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대장경이다.장경판고(국보 52호)는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홍치원년명의 기와(1488년)가 나와 조선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이 건물은 장경판을 보존하기 위한 시설로 통풍시설 등 선조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이들 이외에도 해인사에는 고려각판(보물 206호),대장경 판본(보물 972호),목조희랑대사상(보물 999호),석조여래입상(보물 264호)과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518호)이 있어 해인사의 중요성을 한층 부각시킨다. 종묘(사적 125호)는 조선시대 역대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으로,태조의 묘인 태묘의 정전(국보 227호)과 조묘인 영녕전(보물 821호)으로 이루어진다.이 건물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좌변에 둔것으로 1394년(태조3)터를 보아 1546년(명종 1)에 완공되었다.그후 임진왜란때 불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증건되어 오늘에 이르른다.이들은 선조에게 제사지내는격식과 장엄함을 건축공간에 잘 표현한 조선조의 뛰어난 건축물이다. 이들 세곳은 국보와 보물의 창고로 여겨질 만큼 많은 중요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이와같이 우리나라에는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이 아직까지 없었다.이미 등록된 중국의 14건과 일본의 5건에 비하면 우리 역대 정부의 문화정책이 빈곤했던 것도 사실이다.이들 외에도 앞으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 제11회 향토문화 대상/대상에 김정명 춘천문화원장

    ◎본상 개인 5명·단체 1곳 선정/새달 1일 시상식 서울신문사가 전통문화 계승과 지역문화의 창달에 힘써온 숨은 일꾼을 찾기 위해 제정한 제11회 향토문화대상 수상자가 22일 결정됐다. 전통문화부문과 현대문화부문으로 나누어 전국의 시·군 문화공보실과 문화원·예총·향토사학자들이 추천한 단체 및 개인을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영예의 대상에는 김정명 춘천문화원장(75)이 선정됐다. 본상중 전통문화부문에는 ▲김상곤(남원애향운동 본부장·58·전북 남원) ▲대구향토문화연구소(대표 김택규·66) ▲최종덕(양양 오색국교교사·52·강원 양양)씨등 3명이,현대문화부문에는 ▲이윤수(시인·82·대구시) ▲이은구(이천문화원장·52·경기 이천) ▲심우성(극단 서낭당 대표·62·충남 공주)씨등 3명이 뽑혔다. 대상에는 상금 3백만원,본상에는 각각 2백만원씩의 상금이 주어진다. 올해 심사는 구상(시인)·차범석(극작가)·임동권(중앙대 명예교수·민속학)·정영호(한국교원대 교수·역사학)·이중한(서울신문 논설위원)씨등 5명이 맡았다. 서울신문사 주최,LG전자 협찬,문화체육부 후원으로 열리는 이번 향토문화대상 시상식은 오늘 12월 1일 하오 4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열린다. ◎대상 수상자 김정명 춘천문화원장/「소양제」 부활·예술행사 활성화/민속자료실 만들고 삼악산성 복원 앞장 『큰 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지역에 묻혀버린 향토문화의 발굴,보존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대상 수상자로 결정된 강원도 춘천문화원장 김정명씨(75)씨는 『선인들의 얼이 담긴 향토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작업이 너무 미흡해,후손으로서의 도리를 하려고 애썼을 뿐』이라고 겸손해 했다. 양구군수·강릉시장·도청 상공국장,중소기업 협동조합 도지부장 등을 거쳐 지난 87년 춘천문화원장으로 부임했다.그 때 문화원은 봉의동 도청 앞의 건물에 3평짜리 사무실를 임대해 쓰고 있었다.인원은 여직원 한명과 원장 뿐이었다. 문화재를 간수하는 유일한 기관인 문화원의 당시 역할과 위상을 말해주는 사례이다.『조상들의 발자취와 손때 묻은 유품들을 추스리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때마침 시립도서관이 새 건물을 짓자,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해 사무실을 도서관으로 옮기고 민속자료실과 영상오디오 자료실·미니 도서실 등을 만들고 지역의 예술·문화 행사를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흐지부지됐던 춘천의 향토문화 축제인 「소양제」를 77년부터 부활하고 정월 대보름 놀이와 청소년 유적답사 등도 알차게 추진했습니다』 향토문화를 지키고 가꾸려면 주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고 솔선하기 시작했다.스스로 강원도 전역을 누비며 선조들의 생활도구와 유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은 베틀,소 구유,재래식 쥐틀 등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6백여점의 유물들을 의상,음식,생활,생활방식,습관 등으로 나뉘어 민속자료실에 전시했습니다』 대부분 지금은 볼 수 없는 물건들이다.학생들과 주민들이 문화원을 향토문화의 학습장으로 활용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요즈음은 스러져가는 산성 복원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춘천 덕두원리에 10여m 정도만 남아 있는 고대 맥국의 마지막 유적인 삼악산성의 복원 작업을 서두르고 있습니다.맥국은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 왕국으로 강원도의 뿌리입니다』 춘천,나아가 강원도의 뿌리인 맥국의 보존을 위해 3년 전 조사위원회를 만들었고,오는 연말까지는 신북읍 발산1리에 맥국터비를 세우기로 했다. 이에 앞서 몽고 침략에 맞서 결사적으로 싸웠던 항몽터전으로,허물어져 자취를 잃어가는 봉의산성을 2차례에 걸쳐 복원했다. 『국립 강원박물관을 세우고,지역 인사 17분이 모여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시를 읊던 국사봉에 망배도 세워 선조들의 참된 얼을 배우고 잇는 곳으로 활용토록 하겠습니다』 정선아리랑 등 전통문화를 12분야로 나눠 책으로 펴내기 위해 서두르는 등 제 2문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원장은 『강원도에 제 2의 김유정과 이효석이 배출될 수 있는 문화의 터전을 만들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춘향제」를 전국규모의 축제로/김상곤 남원애향운동본부장 지난 85년 춘향문화선양회를 발족해 해마다 춘향제를 창의적으로 유치,전국적인 규모의 축제가 되도록 했다.91년 춘향제부터는 춘향문화대상(학술·예술·여성·언론분야)을 제정해 올해까지 상을 시상해오고 있다.92년 춘향제 때는 「춘향제 60년사」를 발간했으며 93년에는 「춘향전 관계사 학위논문선집」「춘향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발간했다. 투철한 향토애를 바탕으로 남원의 문화전통을 가꾸고 남원인의 품위향상을 위해 애쓰는 것은 물론 현재 춘향제를 세계적인 관광문화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사당 놀이」 등 문화재지정 공헌/심우성 극단 서낭당 대표 59년 사라져 가던 「남사당 놀이」의 연희를 수합해 재연한 이래 특히 전통 인형극과 탈놀이의 발굴조사를 통해 무형문화재의 지정에 공헌해 왔다. 저서로 「남사당패 연구」「무형문화재 총람」「한국의 민속극」「한국의 민속놀이」「민속문화와 민중의식」「탈」등이 있으며 「조선무속의 연구」「역과 점의 과학」「연극의 역사」등 20여권의 역저가 있다. 현재는 문화체육부 문화재 전문위원,극단 서낭당 대표,한국민속연구소 소장,공주민속극박물관 관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69년 창립… 「향토문화」 회지 발간/대구향토문화연구소 69년 6월 향토사 및 향토문화의 조사연구에 관심있는 교수와 향토사가들이 모여 창립됐다.같은해 12월 회지인 「향토문화」를 육필사본으로 간행하는등 연구회의 발전을 꾀했으며 85년 7월부터는 대우학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모임을 활성화 하고있다. 현재 회지는 제7집까지 간행됐으며 조사보고서로는 「경상감사 도임행차순력 복원」「화랑문화의 신연구」「낙동강 유역사」등을 출간할 예정이다.이밖에도 향토사 사료 윤독회,향토사적 답사 등으로 대구 경북지역의 향토문화연구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87년부터는 각 지역의 향토문화 연구단체를 결집해 우리 문화유산을 발굴·보존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76년 청파요 개설… 도예발전 헌신/이은구 이천문화원장 우리 전통도예의 맥을 이은 분청사기의 장인으로 76년 이천읍 사음리에 청파요를 개설해 도예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 왔다. 91년 1월 이천문화원장에 취임한 이래 각종 문화사업을 통해 지역문화 발전은 물론 지방문화원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공헌했다.특히 이천문화원이 해마다 10월에 개최하는 이천도자기축제를 국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문화관광축제로 적극 육성,올해 제9회 이천도자기축제의 경우 외국인 1만5천명을 포함한 25만명의 관광객 유치에 성공했으며 4억3천만원의 도자기 판매실적과 함께 도예작품전·한국의 잔 특별전·도자기 제작실연등 각종 행사를 마련해 도예문화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농악대 구성… 전통민속 보존 힘써/최종덕 양양 오색국교 교사 63년 교육계에 투신한 이래 투철한 교육관으로 전통민속예술과 우리 뿌리찾기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해왔다. 전통민속예술의 창달 및 계승발전을 위해 사라져 가는 향토민속의 발굴에 힘써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종합최우수상 3회,종합우수상 2회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체육부장관상을 3차례 수상했다. 양양군 전통민속보존회와 어린이·청년·노인 농악대를 각각 구성해 농악보급 및 보존에 힘쓰고 있으며 청소년 어울마당 지도교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여름 피서철에는 해수욕장에서 고장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전통민속을 공연함으로써 볼거리를 제공하고 향토민속을 관광자원화해 주민소득 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광복뒤 첫 월간시집 「죽순」 창간/이윤수 시인 지난 45년 「죽순시인구락부」창립 이래 현재까지 대표로 있으면서 46년 광복 최초로 월간 동인시집 「죽순」을 창간했다.48년 한국문단 최초로 「상화시비」를 대구달성공원에 건립했으며 50년에는 문총(현 예총)구국대 경북지부를 조직했다.79년 동인시집 「죽순」을 복간했으며 83년에는 「전선시첩」1·2·3 합본을 발했다. 85년 상화시인상을 제정,올해로 10회째를 맞고 있으며 90년부터는 상화시 전국백일장을 해마다 실시하고 있다.92년 2월부터 한동안 서울신문에 「향토시인 이윤수 특집」이라는 글을 게재해 필력을 과시했으며 지난해 5월에는 한·일 국교수립후 처음으로 한·일 친선합동시화전을 주일 한국총영사관 초청으로 열었다.
  • 왕궁리서 성터 발굴/부여문화재연

    백제 말기 별도가 있었던 요지로 주목받고 있는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외곽 성곽시설과 이 성의 중심 건물터들이 발굴됐다. 문화재관리국 부여문화재연구소는 모질메성으로 알려진 왕궁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왕궁리 5층석탑(보물 제44호)에서 동남편으로 1백20m 떨어진 지점에서 성벽과 부대시설을 확인하고 2기의 건물지와 배수로 1기를 함께 발굴했다고 17일 발표했다. 성벽의 폭은 3.1m 정도로 내벽과 외벽 모두 잘 다듬은 네모진 석재를 세워 쌓았고 외벽 아래 쪽에는 돌을 쌓은 바깥 쪽으로 점성이 강한 회색점토를 3∼4조의 켜를 이루도록 층층이 견고하게 다졌다.성 안쪽의 물을 바깥으로 빼기 위한 배수구도 발견됐는데 폭 60㎝,길이 1백10㎝의 이 배수시설은 성벽을 동∼서로 관통하고 있다.
  • 6개월미만 정기예금·1년미만 정기적금 20일부터 금리 자유화

    ◎3개월이상 「요구불」 포함/3단계조치 1년 앞당겨 완결/중기 어음할인 업종불문 총액한도 포함 오는 20일부터 제 1·2금융권의 6개월 미만 정기예금과 다음 주 중 선보일 것으로 보이는 1년 미만 정기적금의 금리가 자유화된다.예치기간이 3개월 이상인 자유저축예금과 기업자유예금 등 요구불성 예금의 금리도 함께 자유화된다. 또 중소제조업체로 제한된 한국은행 총액한도 대출 대상인 상업어음 할인에 대한 업종별 제한 요건이 폐지된다.따라서 건설어음 등 모든 중소기업의 진성어음(만기 90일 이내)이 총액한도 대출 대상 상업어음에 포함된다. 재정경제원은 16일 금융통화운영위원회에서 의결된 이같은 내용의 「제3단계 금리자유화 완결 및 총액한도 대출제도 개편안」을 20일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재경원 윤증현 금융총괄심의관은 『물가가 4%대의 낮은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고,통화 및 금리도 모두 하향 안정세를 보이는 등 실물 및 금융여건을 감안해 3단계 금리자유화를 당초 계획보다 1년 앞당겨 조기에 완결했다』고 밝혔다.이에 따라 수신금리는 97년 이후 추진토록 돼 있는 예치기간 1일 이상의 요구불 예금(보통예금·당좌예금·별단예금·저축예금·자유저축예금·기업자유예금)이외에는 모두 자유화된다. 이번에 자유화되는 상품은 은행의 경우 만기 6개월 미만의 정기예금과 앞으로 생길 만기 1년 미만의 정기적금·상호부금·주택부금,예치기간 3개월 이상의 자유저축예금·기업자유예금이다.상호금융과 신협 및 새마을금고 등의 제2금융권에서는 만기 6개월 미만의 정기예탁금,만기 1년 미만의 정기적금·자유적립적금,예치기간 3개월 이상의 자유적립 예탁금이다.상호신용금고는 만기 6개월 미만의 정기예금 및 만기 1년 미만의 신용부금이다. 은행의 상호부금 및 주택부금의 연 단위(1년·2년 등) 만기제한도 폐지된다.단기성 시장상품인 CD와 CP·RP,상업·무역어음의 최저 발행금액도 2천만원에서 1천만원으로,중개어음은 3천만원에서 1천만원으로,표지어음은 1천만원에서 5백만원으로 각각 낮췄다. 금리자유화 조치로 은행간의 금리전쟁도 불붙을 것으로 예상된다.한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만기 6개월 미만의 정기예금의 금리는 현재의 연 2∼5%에서 1∼2% 포인트,예치기간 3개월 이상의 기업자유예금은 연 4%에서 1∼2% 포인트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며 『예치기간 3개월 이상의 자유저축예금의 경우 현재 금리는 연 6∼9%이나 1∼2% 포인트 쯤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신한은행 등 후발은행들이 기업자유예금과 정기예금의 금리를 선발은행보다 다소 높여,외형경쟁을 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보인다.새로 선보일 은행의 1년 미만 정기적금 금리는 5∼6%선에서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상업어음의 업종별 제한요건도 폐지,건설업 등 중소기업이 할인의뢰하는 어음은 업종 구분없이 충액한도 대출대상에 포함했다.이로 인한 기존 중소제조업체의 추가적인 금융비용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금융기관 총액한도대출 운용자금의 80% 이상은 제조업에 지원토록 의무화했다.이번 조치로 전체 수신의 자유화율은 79.8%에서 83.2%로,은행은 57.7%에서 64.7%로 각각 높아진다.
  • 가야문화권 개발 타당성 용역조사

    【김해=김정한 기자】 경남 김해시는 15일 가락국시조인 가야문화의 발상지로 김수로왕릉 등 31개 문화유적지와 위락시설 단지가 산재한 이 지역을 문화예술 관광권역으로 개발키로 하고 1억원의 용역비를 들여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 비자금과 비책(외언내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후 증권가에 비자금의 첫 자인 「비」자를 놓고 갖가지 은유적인 풀이가 나돌고 있다.비자금의 비자는 「비밀리 할 비」인데 검찰의 조사가 진행되자 비자금 건넨 기업인들은 그 돈이 자기돈 아니라며 비자를 「아닐 비」로 바꿔 비자금으로 부르고 싶은 심정일 것이라는 것. 검찰수사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대형이권을 따내려고 뇌물성 돈을 노대통령에게 건넨 재벌기업 총수 10여명이 사법처리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면서는 「아닐 비」자가 다시 「슬플 비」로 변해 비자금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또 증권가에서는 이현우전청와대 경호실장이 밝힌 것으로 알려진 노전대통령의 재벌총수 독대리스트를 비책이라 부르고 있다.비책이란 이조시대 각종성금 등 준소세 징수대상자의 명단을 일컫는 말이다. 퇴임하여 떠나는 구관사또가 새로 부임하는 신관사또에게 비책을 인계하는 것은 하나의 관례.신관사또는 그 책의 두께를 보고 부임한 고을에 얼마나 많은 부자가 있는지를 가늠했다는 것이다.비책의 두께가 두꺼우면 그 고을은 부자고을이고 얇으면 가난한 고을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 은어는 소위 이현우리스트에 국내 굴지의 재벌총수 명단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총수들이 적지않은 돈을 각종성금 명목으로 노전대통령에게 주었다면 그 리스트는 이조때의 비책과 비슷하다는 데서 연유되고 있다. 그동안 일부 재벌들은 정경유착의 고리용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 사실이다.비자금 조성의 일반적 방법은 물건을 팔고 매출장부에 판매대금을 누락시켜 조성하거나 납품가격을 조작하는 방법이 있다.또 국제화시대를 맞아 대기업들은 해외현지 법인이나 지사를 통해 단가를 조작하여 비자금을 만들기도 한다. 이번 노 전 대통령 비자금사건을 계기로 재계가 진정으로 비자금을 슬픔을 안겨주는 비자금으로 인식,자성하고 검은 돈인 비자금은 절대로 조성하지 않았으면 한다.
  • 이집트 여행 “위험”/회교 과격파 “모든 외국인 테러” 위협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스핑크스를 둘러보려는 한국관광객은 앞으로 엄중한 테러위협을 받게 됐다. 이집트의 과격회교원리주의자들이 9일 모든 외국인관광객을 대상으로 테러활동을 벌이겠다며 외국인의 즉각 출국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경우 고대유적지등 관광명소가 많은데다 성지순례등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관광객이 최근 들어 부쩍 늘고 있어서 과격단체의 경고를 무시할 경우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큰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 ◎3년간 68명 사상 【카이로 AFP 로이터 연합】 이집트의 과격 회교근본주의 단체인 「자마 이슬라미야」는 9일 외국인관광객에 대해 테러위협을 가하며 즉시 이집트를 떠나라고 경고했다. 지난 92년초부터 시작된 「자마」와 이집트경찰의 무장충돌로 지금까지 8백70명이 희생됐으며 이 단체가 자행한 24차례의 외국인관광객에 대한 테러로 외국인 8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했다.
  • 장군총과 장수왕 후손(압록강 2천리:12)

    ◎장대석 1만개 사용… 거대한 “동양의 피라미드”/밑면 넓이 9백㎡·높이 12m… 꼭대기 돔형/광개토대왕 아들 장수왕의 무덤 추정/하얼빈 거주 고지겸씨 “내가 장수왕 후손이다”/「고씨족보」 제시… 고구려 연구 귀종한 자료 평가 집안시에는 7천8백여기에 이르는 고구려 무덤들이 있다.이들 고분을 한데 뭉뚱그린 호칭이 이른바 연구고구려고분군이다.무덤은 신분에 따라 크기나 형태가 차이를 보였다.규모가 큰 무덤으로 천추총과 태왕릉,장군총이 꼽히는 데 모두가 돌무지무덤(적석총)이다.이 가운데 장군총은 크기를 떠나 짜임새로 보아 고구려 돌무지 무덤의 백비라함이 옳을 것이다. 장군총이 누구의 무덤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대략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으로 압축해왔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장수왕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장군총 역시 집안의 다른 고구려 유적들 처럼 오랫동안 잊어버린 유적이었다.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중국 동북대륙의 주인들이 자주 바뀌고 전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집안이 봉금지로 묶인 것도그 이유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고구려 돌무덤의 백미 그런데 장군총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5백여년전이라고 한다.산동성 연대에 살던 유씨 형제가 살길을 찾아 집안땅으로 왔다가 이 무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형제의 본업이 석공인지라 돌을 다듬어 가지런히 쌓은 거대한 석조 조영물에 관심이 쏠렸을 것이다.무덤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 형제는 무덤의 주인공을 놓고 서로 욱신각신 쟁론을 벌였다. 형은 무덤이 크고 돌을 쌓은 솜씨로 보아 황제가 묻힌 황릉일 것이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이에 동생은 중국의 변방에 있는 무덤이라는 이유를 들어 변방수비를 담당했던 장군의 무덤이라고 맞섰다.동생의 추리가 더 설득력이 높았다.그래서 형제는 장군의 무덤으로 결론을 내렸다.그 뒤에 장군의 무덤이라는 말이 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해 내려와 무덤이름이 장군총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장군총은 통구평야를 서남향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축조되었다.무덤을 축조한 재료는 화강암이다.국내성에서 20㎞떨어진 오녀봉에서 채석한 돌이 분명하데,오녀봉은 선경을 방불케해서 고구려시대에 거선봉이라고 했다.전설에 따르면 오녀봉의 돌은 황금색을 띠어 옥황상제의 궁전을 짓는데도 사용했다는 것이다.그만큼 석질이 좋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고구려의 불가사의 장군총은 피라미드형이다.쌓아올린 돌은 화강암을 장방형 입방체 규격으로 만든 장대석이다.장대석의 표면은 일일이 갈아 매끄럽게 처리했다.장군총을 쌓는데 1만1천여개의 장대석이 들어갔다니 당대의 대역사임에 틀림이 없다.돌의 크기는 일정치는 않으나 제1층은 가급적 큰돌을 쌓았고 올라가면서 조금씩 작아졌다.제1층에는 4단의 장대석을,2∼7층까지는 각층을 모두 3단씩 쌓았다. 제1층의 평면은 각변의 길이 31.5m나 되는 정사각의 네모꼴로 그 넓이는 9백㎡에 이르고 있다.이 무덤은 특이하게도 네 모서리를 동·서·남·북 방향에 맞도록 배치했다.그리고 제1층에는 쌓아올린 장대석들이 밀려나오지 않게 각 면에 길다란 버팀돌(호분석)을 3개씩 기대어 세웠다.무덤 높이는 12.4m로 맨 꼭대기는 돔형에 가까운 기단석으로 마무리했다. ○매년 태왕릉 찾아 참배 고구려는 장수왕 때인 서기 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그럼에도 장수왕이 오늘날 장군총으로 불리는 돌무지무덤에 묻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장수왕이 생전 조상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한 어떤 유언에 의해 집안(국내성)에 묻히는 꿈이 사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지금 전적으로 믿을만한 사연은 못 되지만 장군총을 발견한 유씨형제가 제5층 동남쪽 장대석을 반년에 걸쳐 징으로 쪼아 묘실에 들어갔다고 한다.그 때에 묘실안 황금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고 타더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기적이 분명한 데 근년에 또 다른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장군총에 묻힌 장수왕의 후손이라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현재 흑룡강성 하얼빈에 살고 있는 고지겸(67)노인이 그 장본인이다.1948년 하얼빈 의학부를 졸업하고 1956년 대련의과대학을 거쳐 흑룡강성 의학정보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그는 어려서 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부터 고구려 왕족의 후예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1921년에 필사한 족보가 있었으나 문화혁명 때 불태워졌다. 그러나 개혁개방이 현실로 다가오자 뿌리찾기에 나섰다.요령성 해성시 대고려방진에 사는 종친을 찾아가 족보를 다시 보고 자신이 고구려 제20대왕인 장수왕 후손임을 알게되었다.이어 길림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손옥량 소장에게 족보감정을 의로한 결과 고구려왕손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는 긍정적 평가를 얻어내기도 했다.또 고씨종친들의 못자리판인 요양,대안,해성,철령 등지를 찾아다닌 끝에 「고구려 왕실후손­요양의 고씨족보」와 「명대 요양동녕위세습지휘사와 그 가족의 연구」등 설득력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요즘 「고구려사화」라는 저술의 집필을 끝냈다.생전에 조상의 뿌리를 모두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하얼빈방송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맏아들 고홍(47)을 끌어들였다.그는 1989년부터 청명절이 돌아오면 하얼빈에서 퍽이나 먼 길인데도 집안까지 와서 태왕릉과 장조묘를 배알하고있다.위대한 조상을 찾는 희열속에 살아가는 고지겸.그는 오늘 중국 동북지방에 살고 있는 대고구려인이지도 모른다. 고구려 유적들,특히장조총을 돌아보고 집안시 태왕향에 들어서고 나서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고지겸과 같은 사연을 안은 고구려인 후예라는 착각에 빠지곤했다.호태왕(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의 기상이 넘쳐 흘렀을 옛 고구려 도읍지 집안에서 새삼 느껴야 한 애달픈 심사가 있다면 국내성이 오간데 없다는 현실이다.국내성 성벽의 석축이 사람들 키 만큼 겨우 남아 여느집 담장처럼 되었다. 그 나지막한 성벽 아래로 고구려인을 닮아보이는 집안 사람들이 노점을 차렸다.그리고 궁궐이 서있었을 법한 성벽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실감케했다.
  • 예일대 흑인교수 댈턴,「인종차별 치유법」 출간(해외출판)

    ◎미 인종차별의 저변 분석/“증오 보다 무관심이 문제”/“특권 당연시하는 백인에 큰 책임” 주장/독자들 “과격논리” “거침없는 지적” 양론 『우리는 모든 시민의 피부 색깔이 베이지색인 환상의 나라 「베이지아」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미국 예일대 로스쿨의 흑인교수인 하런 댈턴은 인종문제를 다룬 그의 저서 「인종차별 치유법」에서 이같은 물음을 던져놓고는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그는 사람들이 다른 피부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우리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진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인종과 권력과의 연계를 푸느냐 하는데 있다.피부색이 희다는 이유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보다 많은 경제적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닌가』 댈턴은 특히 흑인·백인·유색인 등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경제·사회적 문제점들에 관한 인종적 내용을 피하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통박한다.그는 백인들은 인종문제가 그들의 삶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간단히 처리하는경향이 뚜렷하다고 지적한다.『왜 백인들은 그들이 인종문제를 갖고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비유적이다.백인들이 운전대를 잡고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백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여러가지 특권을 태어나면서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들은 별다른 생각없이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는 인종차별의 유지와 존속에 보다 책임있는 사람들은 인종적 증오를 가지고 행동하는 백인들보다는 악의 없이 현재 백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선량한 백인」들이라고 결론짓는다. 일부 독자들은 댈턴의 거침없는 논리 전개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고 또 다른 독자들은 그의 책에서 낙관적인 점이 많다는 의견을 밝히는등 상반된 의견을 보이고 있다. 그의 2백46쪽짜리 이 저서는 인종문제에 대해 다른 어떤 작가들보다도 자극적인 사상을 담고있다는 평을 받고있다.
  • 호태왕비(압록강 2천리:11)

    ◎1천6백년전 대륙 호령하던 고구려 위엄이…/청나라 관명산이 발견… 최근 비문탁본 떠 횡재/일서 통째로 반출기도… 지난 82년 새 비각세워 오늘날 집안시는 청나라 연호로 광서 28년(1902년)부터 1965년까지는 집안현이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압록강 중류의 오른쪽 대안을 통틀어 통구라고도 한고 더 옛날에는 비류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기원전 2년부터 서기 427년가지 고구려의 도읍지 국내성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국내성 시대의 굵직굵직한 고구려유적이 많지만 그 으듬은 호태왕비일 것이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서기 414년 부왕의 공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거대한 비석의 새김글씨 금석문 내용은 당시 고구려 역사이자 주변 동아시아역사다. 왕의 묘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마지막 세 글자를 따서 호태왕비로 부르는 이 거대한 사면비는 어른 세 사람의 키를 포갠 것보다 높다. ○굵직한 고구려 유적 많아 집안시에는 태왕향이라는 구역이 있다. 향 구역내에 호태왕비(광개토왕비)와 태왕릉,장군총,통구의 옛 무덤떼가 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 분명했다. 압록강 건너 북한당 만포시로 가는 국제열차가 발차의 기적을 울리는 집안역도 태왕향에 속해있다. 집안해관(세관)을 비롯,변경검사장(국경검문소),대외무역운수회사,집안판사처,집안검역소 및 동식물검역소 등의 국가 주재기관이 모두 태왕향에 밀집되었다. 그리고 집안시내를 다녀보면 「태왕식당」이나 「태왕상점」이 눈에 띄고 「태왕가라오케」까지 생겼다. 1천6백여년전 대륙을 호령하던 대왕의 이름이 시장경제시대의 간판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호태왕비로부터 얼마 멀지않은 태왕릉과 마주한 자리에 태왕조선족소학교가 있어서 한결 마음이 흐뭇했다. 조선족 어린이가 대왕의 품에 안겨 공부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자긍심마저 들었다. 청나라는 백두산을 자신들의 성조발상지로 보고 1677년에 봉금지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2백1년동안 집안은 인적이 없는 불모지에 불과했다. 1877년에 접어들어 청나라는 통화현과 회인현(환인현)을 설치했다. 그 회인현 설치위원이었던 장월이라는 사람 밑에 관월산이라는 서사가 있었다. 본디 석공출신인 관월산이 바로 무인지경에 외로이 서있는 호태왕비를 찾아낸 장본인이다. 관월산은 장월의 허락을 받아 호태왕비 인근에 초가를 짓고 어렵게 사는 초천부를 고용했다. 산동성 문등현 사람은 초천부는 어린 아들 초균덕을 데리고 살았는데 비석에 덕지덕지 긴 이끼를 벗기는 일을 맡았다. 초천부는 사다리를 놓고 매일 비석에 달라붙어 일을 했으나 이끼가 너무 두꺼워 다 벗기기가 부지하 세월이었다.그래서 쇠똥을 잔뜩 발라놓고 불을 질렀다. 그래도 시원치 않아 나중에는 기름을 부어 태워버렸다. 이때에 애석하게 비석에 금이 가고 터져 어떤 글시는 알아볼수 없게 되었다. 현재 애매모호한 글씨로 남은 1백22자가 불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어떻든 비문이 나타나자 성경(심양)등지에서 곡학자와 금석문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초천부가 명을 받아 탁본을 떴다. 현아문과 학자들에 바치고 더러는 성경과 안동(단동) 사람들에게 팔아 초천부가 돈을 챙겼다. 초천부한테 사간 탁본은 외국인들에게 되팔려 나가기도 했다. ○탁본 외국학자에 인기 1902년 집안현이 생기면서 현은 초천부에게 탁본업 허가증을 내주고 일정한 수량만 바치고 나머지는 사사로이 팔도록 했다. 30여년전 호태왕비에 매달려 살던 초천부가 세상을 뜨자 아들 초균덕이 탁본업을 이어받았다. 빨리는 하루에 1장,늦으면 사흘에 1장식을 찍어내어 민국연간돈으로 1장에 10∼12원씩 받았다. 탁본으로 이름이 나서 그를 초대비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70살에 탁분일을 놓고 청석진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946년에 세상을 떠났다. 1907년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 육군 제57연대장 소택덜평이 압록강을 건너와 호태왕비를 둘러보았다. 고구려와 왜구간의 전쟁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당시 행정책임자인 집안임지현 오광국을 만나 호태왕비를 팔라고 졸랐다. 진사출신으로 해박한 학식을 갖추었던 오광국은 고구려 역사의 진실을 담은 국보를 판다는 것은 천주에 용서받지 못할 죄악임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국보는 팔 수 없다” 거절 그 때에 오광국과 소택덕평과의 대화내용을 사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비석은 대단히 무거워 일본까지 운반할 수가 없습니다.』 『그거야 쉽지요. 우리 병선이 이 비석보다 훨씬 더 무겁지 않습니까? 병선으로 옮기려 합니다.』 『이 비석은 비록 지방에 있지만 국보입니다. 나는 지방에 있는 보잘것 없는 관리인데 내 어찌 국보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교양이 깊으신 분이니 나의 고충을 이해하시리라 믿겠습니다.』 『저는 사실 문물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값은 부르는대로 드릴테니 양도해 주시지요.』 『그처럼 흥미가 있으시면 내가 가진 탁본 몇 점을 선물로 드리지요.』 소택덕평은 그냥 돌아갔다. 만주사변 이후 동북을 강점한 일제가 어이하여 호태왕비를 그대로 두었는지가 의심스럽다. 만주지역은 물론 아시아가 저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 탓이었을까. 그런 와중에 호태왕비는 제자리에 지금 남아있다. 밑부분 너비 1.34∼1.97m,윗 부분 너비 1∼1.6m,높이 6.39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은 비각에 안치되었다. 비각은 당초 집안임지현 유천성이 1925년 모금을 해서 지었는데 너무 낡아 1982년 집안현 문물관리소가 다시 지었다. 중국사회과락원 부원장겸 고고연구소 소장 하내가 「호태왕비」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 “방치 10년” 신석기 유적/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오늘의 눈)

    부끄러운 유적보호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문화의 달 10월이 거의 가고 단풍이 절정을 이룬 지난 주말,설악산을 찾는 관광객과 수학여행 학생들을 실은 버스가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그 버스속의 사람들은 지나쳐 버린 오산리에 동해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지역 최고의 신석기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그런 잊어버린 유적에 모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양양문화원이 오산리유적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마련한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석했던 한·일 두나라 고고학자가 그들이다.바다 바람을 지킨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을 뿐 밋밋한 모래언덕에 불과했다.지난 1977년에 발견되어 85년까지 서울대박물관이 5차례의 발굴을 마친 이후 자그마치 10년 동안을 방치해두었기 때문이다. 세계 고고학계를 깜작 놀라게 한 신석기 문화층은 그 모래언덕안에 있다.이 유적에서 출토된 테라코타 인물상이 그렇듯 기원전 6천년쯤 오산리에 살던 신석기인들은 생각(사유)하는 사람들이었다.14기의 집자리에서는 화덕이 발견되어 추위를불로 이겨낼 줄도 알았다.집자리 밖에는 마을이 공동으로 쓰는 취사용 화덕을 따로 만들었다.집단 사냥이나 고기잡이에서 얻은 먹거리를 바베큐로 만드는 데 사용했을 것이다. 오산리 신석기인들은 동해로 회귀하는 연어와 같은 큰 물고기를 낚으려고 동아시에서 처음으로 결합식 낚시를 만들어 썼다.과학적 분석에 의해 백두산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한 흑요석 덩어리가 발견되어 먼 지역과 교류하는 모험도 서슴지 않았다.뾰족밑 토기와 납작밑토기 등을 시베리아와 바다 건너 일본 보다 앞서 만들어 전파시킨 사람들이 오산리 신석기인이다.돌로 톱을 만들어 나무를 자르는 지혜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적을 가꾸어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는 커녕 사적으로 지정하지도 않았다.그 무관심은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일본에서 현장을 보러온 산나이마루야마(산내환산)유적 발굴책임자의 말을 듣고는 더욱 부끄러웠다.혼슈(본주)최북단 아오모리(청삼)의 산나이마루야마 신석기유적은 19 92년부터 발굴에 들어갔으나 이미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었다는 것이다.기본골격을 갖춘 야구장건설을 현지사가 중단시키고 보호조치한 유적이라니 부러운 이야기다. 이날 위안이 있었다면 지역의 선사문화를 알리려는 작은 문화원의 힘겨운 노력을 본 것이라고나 할까.양양문화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 비 새는 해인사 경판고/반영환 논설고문(서울논단)

    국보 52호 해인사 경판고에 누수현상이 생겨 천장의 회칠 일부가 떨어지는 사고가 최근 보도됐다.지붕기와의 교란으로 인한 누수현상으로 밝혀졌다.임시방편이지만 이를 막기위해 절에서는 비닐로 방수막을 씌우기까지 했다고 한다.경판고에는 세계 유일 최대의 불교경판인 고려시대의 8만대장경판이 소장돼 있다.한방울의 물은 물론,사소한 습기조차 배어나서는 안될 최적의 공간이라야만 한다. 경주 석굴암과 더불어 유네스코의 세계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대장경판과 경판고가 아닌가. ○남대문 녹색안전 띠를 문화재관리국은 최근 이탈리아의 세계적 보존과학자 조르주아 크로치박사를 초청,국내 중요문화재의 안전진단을 실시한 일이 있다.국보1호 남대문과 보물1호 동대문도 대상이 되었다.남대문·동대문은 70년대초 지하철1호선 공사때 「진동에 의한 훼손우려」때문에 논란이 많았던 건조물이다.크로치박사의 진단결과는 『현재로서는 보존상문제가 없으나 주변의 극심한 차량통행과 매연때문에 앞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그는 남대문에서는 차량의 근접통행을 막기위해 폭5m 정도의 녹지 안전띠를 설치하도록 건의했다.오늘의 붕괴위험이 아니라 10년·20년뒤에 올 유적의 수명단축을 우려한 지적이었다.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고 할 경주 첨성대가 기울어 경주시는 얼마전 인접 도로를 폐쇄한바 있다.현명하고 적절한 조치였다.1천3백년의 풍상을 겪어온 첨성대가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것이다. ○개발과 문화재의 충돌 유적의 도시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차량의 배기가스에 의한 유적의 훼손을 막기위해 지난 봄 모든 자동차의 도심진입을 금지시켰다.이탈리아 로마에서는 아황산가스 배출을 철저히 규제하고 있다.석조물,특히 대리석 유적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대기오염,산성비등은 문화재의 부식을 급속도로 촉진시킨다.문화재의 보존관리가 그만큼 더 어려워졌음을 뜻한다. 문화재는 민족문화의 유산이며 인류문화의 총체적 자산이다.그러나 전쟁과 개발,무지와 무관심에 의해 문화재는 파괴되고 훼손된다.지난 60∼70년대 우리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은 한심한 정도로 수준이하였다.통영 세병관입구의 돌 벅수(중요민속자료)의 얼굴에 수염과 붉은 입술을 그려 넣었고 한산도 제승당의 오래된 현판은 대통령친필 현판에 밀려났다.서울 석촌동 초기백제시대의 거대한 적석총의 돌을 캐내 서울시가 샛강 둑을 쌓을 정도였으니까. 70∼80년대에는 대대적인 문화재 보수사업이 추진된 반면,개발과의 상충으로 문화재보호에 시련을 겪었다. 국토개발과정에서 적절한 발굴조사없이 유적지가 파괴되고 교란된 사례가 허다하다. 경부고속철도 노선의 경주 도심통과를 둘러싸고 건설교통부와 학계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도 개발과 보존의 대표적 충돌이라 하겠다.이런 충돌은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문화재보존이 언제나 개발에 밀려났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해인사 경판고 누수는 당장 경판에 피해를 주지는 않을지 모른다.그러나 5년이나 10년뒤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이 될 가능성은 있다.최근 문화재보존은 오늘의 붕괴·파손위험이 아니라,내일의 위험을 예방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사실 오랜 세월의 이끼가 묻은 문화재는 허약할대로 허약한 노약자나 어린이와 다름이 없다.그냥 내버려두면 조만간 수명을 다하거나 혹은 수명이 단축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막기위한 예방적 진단과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설마 무슨일이 일어나랴」고 방심하다가 문화재에 치명적 손상을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적극적 보호의지 필요 올해 문화재관리국이 추진하고 있는 국보·보물 보수는 57건 65억원에 불과하다.그동안 보수정화사업이 많이 진행됐다 하더라도 이는 너무 빈약한 예산규모다.문화재는 훼손의 정도가 눈에 띌 정도면 이미 늦은 것이다.지속적이고 과학적인 정밀진단을 통해서 위험의 징후를 사전에 발견하고 적극적인 예방대책을 세워야 한다.
  • 여행경비의 효율(외언내언)

    1990년 세계 유수의 여행기관과 전문가들이 모여 「메가트렌드 문화」라는 주제로 여행산업의 변화양상을 토론했던 일이 있다.이 주제를 택했던 이유는 사람들의 여행패턴이 눈에 띄게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중관광에서 특화관광으로 변하고 있었다.그 대표적 양상이 「문화여행」과 「환경여행」.인위적 요소가 가미되지 않은 현장의 순수한 라이프 스타일과 문화유적들이 새로운 관광대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그래서 멕시코 미스텍·사포텍 인디언문명이 앞으로 최대 관광메카가 되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전망은 맞았다.이후 「환경여행」프로그램으로 에콰도르의 운무림,네팔의 소달구지 여행,인도양의 환초여행까지 등장했다.「모험여행」도 급부상하고 있다.모험심이 강한 극소수 「괴짜」들이나 즐겼던 모험여행이 이제는 보편적 프로그램이 됐다.야생마 타기,비상식만으로 들이나 산에서 지내기,미 유타주 캐년랜드의 뗏목여행,알래스카의 자연사여행 등은 최근 대성공한 인기상품이다. 몰려다니면서 오래 머무는 형식도 사라지고 있다.한나라에 오래 머물 필요도 없고,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둘러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 오늘날 여행객들의 취향이다.그러면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2∼3일씩 짧은 여행을 한가지 목표로만 자주자주 하자는 것이다.그리고 점점더 환경여행이 커지고 있다.세계은행조사로 케냐에서 코끼리 서식처를 개간해 농사를 하면 에이커당 수확소득은 33센트이지만 코끼리관광수입은 17달러가 된다는 계산도 나오고 있다. 한국인의 여행비 씀씀이가 세계 3위로 헤프다는 세계관광기구(WTO)94년도 집계가 나왔다.1회 평균 1천6백60달러.아직도 우리는 쇼핑관광시대에 있으니까 이정도 돈도 아껴쓴 결과인지 모른다.그러나 관광에도 추세가 있고 세계인으로 살려면 관광의 흐름도 알아야 한다.1천6백달러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효율성이 다를 수 있다. 남의 나라 거리에서 기고만장으로 고성방가나 하는 단계는 이제 정말 벗어나야 한다.
  • “고속철도 경주통과 반대”/문화재위 성명/“1천년유적 파괴우려”

    문화재위원회(위원장 임창순)는 23일 하오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집에서 긴급 회의를 열고 고속철도 경주 도심통과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문화재위원들은 이날 『1천년의 고도 경주는 왕궁·사찰·고분등 많은 문화유산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면서 『일제가 중앙선 철도와 동해남부선을 통과시켜 신라의 대표적 유적들을 파괴했듯이 우리 정부가 또다시 민족문화유산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재위원들은 『고속철도로 도시를 갈라놓고 고도의 역사적 환경을 파괴한다면 우리는 후손들로부터 지탄받게 될 것』이라면서 건설교통부에 대해 ▲도심통과안을 즉각 철회하고 ▲경주의 효율적 보존을 위해 외곽지대에 신도시 건설을 추진하고 고도보존법등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 백제 창왕 사리함 발굴/부여 능산리 유적서

    6세기 말 백제 「창왕」의 이름이 명기된 사리함이 충남 부여군 능산리 백제시대 절터 유적에서 발굴됐다. 국립부여박물관(관장 신광섭)은 22일 능산리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이곳 금당 남쪽 목탑지 중심에서 높이 60㎝,가로·세로 50㎝ 크기의 돌로 만든 사리함이 발굴됐으며 이 사리함에는 「창왕」이란 왕의 이름과 제작경위 등을 밝히는 명문이 적혀 있다고 밝혔다. 능산리 유적은 지난 93년 백제시대 공예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걸작품으로 평가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출토돼 관심을 끌었었다. 백제시대의 왕이름이 들어간 금석문이 발견된 것은 70년대초 공주 무령왕능에서 지석이 발굴된 이후 처음있는 일이다. 창왕은 서기 5백54년부터 5백98년까지 재위했던 백제말 위덕왕의 원이름이며 백제의 수도를 웅진(현 공주)에서 사비성(현 부여)으로 옮긴 성주의 아들이자 웅진시대 마지막 왕인 무령왕의 손자이다.
  • 일 학자 선사문화의 「동아시아 공통성」 제기

    ◎강원 양양문화원서 국제 학술 심포지엄/오산리 유적 BC 6000년대 조성… 역내서 최고/“결합식 낚시·원형 움집터 한반도서 전파” 인정 한반도 동해안의 선사문화가 최근 새롭게 떠 오르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한·일 선사문화 교류와 양양 오산리 신석기유적의 위치」를 중심으로 한 국제학술심포지엄이 20∼21일까지 강원도 양양문화원에서 열렸다.동해안 양지역의 선사문화와 바다건너 일본 선사문화와의 연결을 시도한 이번 국제 학술행사를 지방의 작은 문화원이 주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이 국제학술 심포지엄에서 검토대상으로 삼은 동해안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유적과 현남면 지경리 유적,그리고 동해 저편의 일본 아오모리겐(청삼현) 산나이마루야마(산내환산)유적이다.오산리유적의 중요성은 서울대 임효재 교수(고고학)가 「동아시아에서 오산리 신석기유적의 위치」를 통해 부각시켰다.오산리유적은 동해변에서 2백m 떨어진 자연호수 동북쪽 모서리 모래언덕에 있는 유적이다. 임교수는 오산리유적 맨아래층의 하한 연대가 탄소연대 측정에서 BC(기원전)6000년으로 나와 지금까지 알려진 신석기유적 가운데 가장 높다는 사실을 우선 중시했다.이는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기원지로 여겨온 시베리아 연해주지역 보다 1천∼2천년이 앞선 연대라는 것이다.그리고 지난 1981년 이후 5차에 걸친 발굴에서 14기의 원형집자리가 발견되는 한편 납작밑토기,돋을무늬토기,결합식낚시,돌톱,흙요석,인물상 테라코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소개했다. 이들 유물들 가운데 돋을무늬토기는 일본 대마도 고시다카(월고)유적에서,결합식낚시는 규슈(구주)북부에서도 출토되고 있다고 밝힌 임교수는 이를 한반도에서 전파한 선사문화의 흔적으로 보았다. 강릉대 백홍기 교수(한국사)는 「중부 동해안지역의 신석기문화」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올해 발굴한 양양군 현남면 지경리유적을 오산리유적 다음 단계의 선사문화로 보았다.특히 지경리유적 집자리에서 나온 납작밑토기 계열에 속하는 새로운 모양의 토기를 주목했다.이 납작밑토기 계열의 지경리유적 출토품은 오산리유적 맨 아래층에서 나온 납작밑토기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일본 산나이마루야마 유적 소개에 나선 아오모리 매장문화재센터 미우라(삼포규개)실장은 이 유적의 형성연대를 BC3,500∼2,000년 사이라고 밝혔다.「동아시아속의 산나이마루야마」라는 발제를 통해 이 같이 밝힌 미우라실장은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의 대표적 토기문화로 원통형토기를 꼽았다. 그러나 돌을 갈아 만든 도끼,뼈 연모,칠기 등의 유물과 돌무덤,흙구덩무덤,움집터 등의 유적에서는 동아시아 전체의 공동요소가 발견된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는 결국 교류와 교역을 기반으로 한 광역문화 현상이라는 것이 미우라실장의 해석이다. 그리고 도쿄국립박물관 선사실 마츠우라(송포유낭)실장도 「신석기시대 일본과 주변지역과의 관계」에서 한·일간의 밀접한 교류를 강조했다.이 밖에 일본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규슈대 니시다니(서곡정)교수와 부산대박물관장 정징원 교수(고고학)등 9명의 한일학자들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 개발에 매몰되는 연해주 발해유적/김학준(일요일 아침에)

    러시아의 연해주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발해 유적 가운데 특히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의 유적이 개발사업 때문에 매몰되고 있다.이 사실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러시아가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로 돌아서면서 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2∼3년 전부터 발해 유적도 희생된 것인데,이제는 그 정도가 심해져,발해를 민족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함께 어울려 오늘날의 만주와 연해주 및 북한 일부 지역일대에 걸쳐 세웠던 발해는 통일신라와 함께 우리 역사에 남북조시대를 열었다.한때는 국세가 크게 떨쳐 해동성국이란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926년에 거란족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발해의 영역이 연해주에까지 미쳤다는 역사적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67년전인 1928년이었다.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언론인이며 국사학자인 장도빈이 블라디보스토크 근교의 작은 도시 우스리스크에서 발해의 성터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그 사실이 학계의 일각에알려진 것이다. 그뒤 1950년대 후반에 소련의 역사학자들이 연해주역사 전반에 걸쳐 연구하다가 발해의 유적들을 찾아냄으로써 발해의 영역이 연해주에까지 미쳤다는 사실이 소련 학계에서도 공인되기에 이르렀다.발해역사의 연구에 있어서 남한을 훨씬 앞섰던 북한도 1990년대초부터 연해주의 발해유적들을 확인했다. 연해주의,특히 블라디보스토크일대의 발해유적은 대체로 다음 세곳에서 발견된다. 첫째가 파르치산스크구역이다.이 구역의 발해유적으로 특히 중요한 것은 니콜라예프카성터다.이 성터는 현재 화석화된 채 남아 있는데,성이 사다리꼴이었음을 알 수 있다.성 밖에 해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 둘째가 우스리스크시의 몇몇 성터다.문헌으로나 현지 유적으로나 확실한 것은 서성과 남성으로,서로 대개 1㎞정도 떨어져 있다. 셋째가 우스리스크시 근교의 크라스노야로프성터다.라즈돌나야(일명 수이푼)이라는 이름의 강을 끼고 있는 천연의 요새와 같은 성의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이 세곳을 모두 살펴보았다.이 가운데 가장 심각하게 훼손된 곳은 두번째의 경우다.서성자리는 집이 가득 들어차 있고 성벽은 거의 모두 허물어져 있으며,남성자리도 개발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발해 전공 학자들은 이곳이 발해 15부의 하나였던 솔빈부 자리였다고 단정하면서 매몰을 안타까워했다. 크라스노야로프성터는 그래도 괜찮게 보존되어 있었다.토성이 허물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그러나 앞으로 2∼3년 지나면 개발의 불도저는 이곳을 훼손하게 될 것 같다고 러시아의 역사학자들도 걱정을 했다.이것은 니콜라예프카성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장 닥치게 될 개발과 매몰의 대상지역인 남성 부근의 절터에 대한 걱정이 가장 컸다.남성 부근의 공원에 2개의 큰 주춧돌이 남아 있는데,학자들은 이 주춧돌에 미루어 이곳에 발해의 큰 절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유적만큼은 꼭 보존돼야 한다고 호소하지만 우스리스크시청 당국은 개발사업을 강행할 것으로 보인다. 잊혀졌던,아니 잃어버렸던 민족사의 일부를 되찾으려는 우리에게 연해주의 발해유적은 소중하다.그러나 개발에 눈을 뜬연해주 사람들의 눈앞에는 발해유적이 아무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 동아 최대 철기시대 집터 발견

    ◎면적 68평… 길이 28.2m­너비 8m 규모/말갖춤 등 유물 출토… 공동집회장 추정 【안양=황규호 기자】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지경리 동해안 모래언덕에서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초기철기시대 집자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약 2천년전의 유적을 포함한 2기의 집자리가 19일 공개되었다. 강릉대 박물관이 지난 7월 10일 발굴에 들어가 이날 학계에 처음 공개한 초대형 집자리 유적은 남북 길이 28.2m,동서너비 8m로 넓이는 2백25㎡(68평)에 이르고 있다.단단한 민무늬토기,숫돌,갈돌,청동으로 만든 고리모양의 말갖춤 등의 유골이 출토된 이 집자리 유적은 규모로 보아 보통 살림집이 아닌 여러 마을이 함께 사용한 공동집회장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신석기시대 집자리도 9기나 발굴되었는데 뾰족밑빗살문토기,납작밑토기,그물추,돌칼과 돌도끼,불에 탄 도토리 등의 유물이 나왔다. 강릉대박물관 백홍기 관장은 『이번에 발굴한 초대형집자리는 초기철기시대 동해안의 마을형태는 물론 당시 부족연맹체제로 발전해 나간 사회상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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