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유이
    2026-07-29
    검색기록 지우기
  • 연설
    2026-07-29
    검색기록 지우기
  • 유치
    2026-07-29
    검색기록 지우기
  • 저녁
    2026-07-29
    검색기록 지우기
  • 수비
    2026-07-2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480
  • 유이, 파리지앵도 감탄할 ‘시크 공항패션’

    유이, 파리지앵도 감탄할 ‘시크 공항패션’

    배우 유이가 버버리와 함께하는 마리끌레르 화보 촬영을 마치고 한국으로 입국하기 전 파리 공항에서 포착된 사진이 공개됐다. 파리공항에서 유이는 파리지앵도 감탄할 만한 시크한 룩을 선보였다. 유이는 늘씬한 몸매가 돋보이는 블랙의 팬츠, 티셔츠에 체크 프린트가 돋보이는 블랭킷 판초를 두르고 나타났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아이유 단발, 긴 생머리 싹둑?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엿보니 ‘파격 마틸다 변신’

    아이유 단발, 긴 생머리 싹둑?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엿보니 ‘파격 마틸다 변신’

    아이유 단발, 긴 생머리 싹둑?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엿보니 ‘파격 마틸다 변신’ ‘아이유 단발’ ‘무한도전 가요제 2015’가 개최된 가운데 가수 아이유이 파격 단발 변신이 포착돼 화제가 되고 있다. 아이유와 박명수는 13일 오후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알펜시아 리조트 스키점프대 앞에서 열린 ‘무한도전 가요제 2015’에 ‘이유 갓지(God-G) 않은 이유’라는 팀명으로 ‘레옹’을 선보였다. 이날 아이유는 긴 생머리에서 짧은 단발로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마틸다로 완벽하게 변신해 레옹으로 분한 박명수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특히 아이유는 짧은 단발 머리까지 완벽하게 소화한 모습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날 ‘무한도전 가요제 2015’엔 이유 갓지(God-G) 않은 이유 팀 외에 황태지(황광희, 태양, 지드래곤)의 ‘맙소사’와 으뜨거따시(하하, 자이언티)의 ‘스폰서’, 상주나(정준하, 윤상, 다빈크, 스페이스 카우보이, 효린, 주민정)의 ‘마이 라이프’, 댄싱 게놈(유재석, 박진영)의 ‘아임 소 섹시’, 정형돈과 혁오 밴드의 ‘멋진 헛간’ 무대가 펼쳐졌다. ‘무한도전 가요제 2015’ 특집은 오는 22일 오후 방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네티즌들은 “아이유 단발 머리도 완벽하네”,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 머리도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 긴 머리보다 잘 어울리는 듯” 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더팩트(아이유 단발)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아이유 단발+망사스타킹 ‘파격 마틸다 변신’ 박명수는 레옹 ‘무한도전 가요제 2015’ 미리보니

    아이유 단발+망사스타킹 ‘파격 마틸다 변신’ 박명수는 레옹 ‘무한도전 가요제 2015’ 미리보니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망사스타킹 파격 마틸다 변신..박명수는 레옹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 ‘무한도전 가요제 2015’가 개최된 가운데 가수 아이유이 파격 단발 변신이 포착됐다. 아이유와 박명수는 13일 오후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알펜시아 리조트 스키점프대 앞에서 열린 ‘무한도전 가요제 2015’에 ‘이유 갓지(God-G) 않은 이유’라는 팀명으로 ‘레옹’을 선보였다. 이날 아이유는 긴 생머리에서 짧은 단발로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마틸다로 완벽하게 변신해 레옹으로 분한 박명수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청순한 아이유의 파격적인 단발 스타일은 관객의 열광을 이끌어냈다. 이날 ‘무한도전 가요제 2015’엔 이유 갓지(God-G) 않은 이유 팀 외에 황태지(황광희, 태양, 지드래곤)의 ‘맙소사’와 으뜨거따시(하하, 자이언티)의 ‘스폰서’, 상주나(정준하, 윤상, 다빈크, 스페이스 카우보이, 효린, 주민정)의 ‘마이 라이프’, 댄싱 게놈(유재석, 박진영)의 ‘아임 소 섹시’, 정형돈과 혁오 밴드의 ‘멋진 헛간’ 무대가 공개됐다. ‘무한도전 가요제 2015’ 특집은 오는 22일 오후 방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네티즌들은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 대박이다”,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완벽 마틸다네”,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 마틸다..박명수의 승리” 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더팩트(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망사스타킹 ‘아찔’ 박명수와 ‘레옹과 마틸다’ 완벽 변신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망사스타킹 ‘아찔’ 박명수와 ‘레옹과 마틸다’ 완벽 변신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머리+망사스타킹 파격 마틸다 변신..박명수는 레옹 ‘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 ‘무한도전 가요제 2015’가 개최된 가운데 가수 아이유이 파격 단발 헤어스타일 변신이 포착됐다. 아이유와 박명수는 13일 오후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알펜시아 리조트 스키점프대 앞에서 열린 ‘무한도전 가요제 2015’에 ‘이유 갓지(God-G) 않은 이유’라는 팀명으로 ‘레옹’을 선보였다. 이날 아이유는 긴 생머리에서 짧은 단발로 변신하고 마틸다로 완벽하게 분해 레옹 박명수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발라드곡을 고집하던 아이유의 파격적인 단발 스타일은 관객의 열광을 이끌어냈다. 이날 ‘무한도전 가요제 2015’엔 이유 갓지(God-G) 않은 이유 팀 외에 황태지(황광희, 태양, 지드래곤)의 ‘맙소사’와 으뜨거따시(하하, 자이언티)의 ‘스폰서’, 상주나(정준하, 윤상, 다빈크, 스페이스 카우보이, 효린, 주민정)의 ‘마이 라이프’, 댄싱 게놈(유재석, 박진영)의 ‘아임 소 섹시’, 정형돈과 혁오 밴드의 ‘멋진 헛간’ 무대가 공개됐다. ‘무한도전 가요제 2015’ 특집은 오는 22일 오후 방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더팩트(무한도전 가요제 2015, 아이유 단발)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무한도전 가요제 2015, 박명수 선글라스+아이유 단발 등장 ‘레옹과 마틸다’

    무한도전 가요제 2015, 박명수 선글라스+아이유 단발 등장 ‘레옹과 마틸다’

    ‘무한도전 가요제 2015’가 개최된 가운데 가수 아이유이 파격 변신이 포착됐다. 아이유와 박명수는 13일 오후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알펜시아 리조트 스키점프대 앞에서 열린 ‘무한도전 가요제 2015’에 ‘이유 갓지(God-G) 않은 이유’라는 팀명으로 ‘레옹’을 선보였다. 이날 아이유는 긴 생머리에서 짧은 단발머리로 자르고 마틸다로 완벽하게 변신해 레옹으로 분한 박명수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무한도전 가요제 2015’ 특집은 오는 22일 오후 방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더팩트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열린세상] 복지제도, 허리를 두텁게 해야 한다/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고려대 경제학과 겸임교수

    [열린세상] 복지제도, 허리를 두텁게 해야 한다/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고려대 경제학과 겸임교수

    지난 총선과 대선은 복지논쟁이 다른 이슈를 집어삼킨 선거였다. 대선 직후 기초연금 도입 방식을 둘러싸고 큰 홍역을 앓았다. 기초연금 문제가 일단락된 후에는 공무원연금 개혁 문제로 1년 가까이 나라가 시끄러웠다. 그러는 사이 다음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복지논쟁 시즌2’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연금제도 도입 역사는 최소 60년이 넘는다. 제도가 오래되다 보니 노인이 가장 부유한 세대다. 고성장 시대의 관대한 연금혜택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OECD 대한민국 정책센터 사회정책본부’가 개최한 국제회의에서 발표된 OECD 최신 보고서는 빈곤 문제가 노인에서 청년으로 옮겨 가고 있음을 강조했다. 청년 빈곤 문제를 푸는 데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전 국민 대상으로 국민연금이 확대된 시점이 1999년 4월이다. 16년에 불과하다 보니 노인 빈곤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모든 노인들이 가난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빈곤한 노인이 많으나 우리 역사상 가장 부유한 노인도 적지 않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우리나라 노인들이 모두 가난한 것처럼 사실이 왜곡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날로 심화되는 소득 양극화, 가장 어려운 집단에 집중된 무상복지 혜택 탓에 중간에 낀 어정쩡한 중하위 소득계층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가 조금만 도와주면 숨통이 트일 집단에 대한 복지 혜택이 많지 않다. 복지 지출이 급증하고 있음에도 국민의 복지 체감도가 낮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복지 혜택이 돌아가도록 우리 사회의 인프라를 재구축할 때가 된 것 같다. 진짜 생활이 곤궁한 노인이 얼마나 되는지, 소득양극화는 어느 정도 심화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생산해 낼 때다. 소득불평등을 보여 주는 지니계수만 해도 정부 공식 통계와 일부 전문가가 주장하는 통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조사 대상에 포함되는 부유층과 재산의 범위 때문이다. 현실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통계 작성을 서둘러야 한다. 지난해 발간된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 기준으로는 우리나라 소득불평등이 일본보다 낮으나, 재산을 포함하면 일본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높은 노인빈곤율도 부동산 자산을 고려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문제다. 연금 등 금융자산이 대부분인 여타 OECD 회원국들과 달리 부동산 자산이 대부분인 우리 현실을 고려하지 않다 보니 실제보다 노인빈곤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통계 자료가 생산돼야 정부 정책도 탄력이 붙을 수 있다. 청년 문제를 다룬 드라마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취직이 어렵고 취직해도 계약직이 대부분이다 보니 미래 설계를 할 수 없다. 정부가 많은 대책을 내놓아도 출산율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다. 앞날이 불확실한데 어떻게 결혼해 애를 낳고 살 생각을 하겠는가. 노인 빈곤 문제를 소홀히 하자는 말이 아니다. 전체 연령층에서 누가 진짜 빈곤한 집단인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노후 소득 보장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두터운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어 봤자 제도를 지탱할 젊은 세대, 즉 허리가 부실해지면 그 사회보장제도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다가올 ‘복지논쟁 시즌2’에서는 생산적인 논쟁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복지, 특히 사회보장제도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미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 주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실패해도 국가가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지원해 준다는 기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젊은 세대가 하고 싶은 일에 두려움이 없이 도전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창의성이 발휘되고 덩달아 국가의 생산성도 높아질 것이다. 그동안 주변 여건이 많이 변했다. 저성장이 고착화되고, 베이비붐 세대들이 본격적으로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북유럽 소규모 복지국가의 전체 인구보다도 많은 숫자가 복지 수혜자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좋았던 봄날이 빨리 지나가고 있다. 더이상의 소모적인 논쟁은 국가적인 재앙일 뿐이다.
  • 유이, 무심한 듯 시크한 공항 패션의 정석 선보여

    유이, 무심한 듯 시크한 공항 패션의 정석 선보여

    최근 종영한 SBS 월화드라마 ‘상류사회’에서의 열연으로 호평을 받은 배우 유이가 버버리와 함께하는 마리끌레르 화보 촬영차 1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파리로 출국했다. 늘씬한 몸매가 돋보이는 유이는 블랙 팬츠에 화이트 티셔츠를 매치한 기본 스타일에 캐시미어 실크 머플러와 이번 시즌 가을 겨울 잇백인 ‘버킷 백’으로 포인트를 준 시크한 공항 패션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한편, 유이가 든 버킷백은 평평한 바닥, 직사각 모양의 바디와 동그랗게 말린 끈 형태의 가죽 손잡이가 특징으로, 어디서나 편안하게 들 수 있다. 사진출처: 버버리(BURBERRY)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믿어요!코리아 그랜드 세일

    믿어요!코리아 그랜드 세일

    ‘코리아 그랜드 세일’(Korea Grand Sale)이 오는 14일부터 10월 31일까지 전국 12개 지자체에서 열린다. 원래 한국방문위원회(방문위)가 겨울철 관광 비수기에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시행하던 행사였으나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으로 위축된 국내 관광 시장과 내수 경제 활성화를 위해 ‘구원 투수’로 나섰다. 방문위는 11일 기자회견을 열고 “‘2015 코리아 그랜드 세일’이 항공사, 호텔, 백화점, 면세점, 대형마트, 쇼핑몰, 공연 기획사, 소상공인 업소 등 250여 업체, 3만여업소가 참여해 역대 최대규모로 진행된다”고 밝혔다. 대기업들의 참여가 우선 눈에 띈다. 롯데호텔은 2박 숙박 시 1박을 무료로 제공한다. 55% 할인 이벤트도 병행한다. 특급호텔로서는 전례 없는 할인률이다. 삼성전자도 참여한다. 휴대전화 등 전자제품을 일정액 이상 구매할 경우 푸짐한 선물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할 방침이다. 아시아나항공은 선착순 1500명을 대상으로 1+1 프로모션, 제주항공은 전 노선에서 선착순 80% 할인, 코레일은 일부 구간 KTX 자유석 50%할인 등 업체별로 여러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에버랜드(자유이용권 50% 할인), 올리브영과 이니스프리(최대 50% 할인), SK텔레콤(LTE 와이파이 모뎀 임대료 면제) 등 테마파크와 미용업체, 통신사 등도 할인 행사에 참여키로 했다. 한류 콘텐츠와 전통·문화예술을 소개하는 다양한 프로모션도 함께 진행한다. 서울 동대문 두타광장에 코리아 그랜드세일 이벤트센터가 설치돼 통역, 관광정보 안내, 음료 등을 제공한다. 10월 초 국경절 등 외국인 집중 방한 시기에는 ‘스페셜 테마위크’를 운영해 다양한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행사를 알리는 오프닝 이벤트는 오는 14일 인천과 김포 등 주요 국제공항에서 열린다.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 외국인 환대행사에 직접 참여할 예정이다. 코리아그랜드 세일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대규모 할인 이벤트다. 지난 2011년 매출 121억원으로 시작해 지난해 1404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외형상 10배 이상 성장했다. 한경아 방문위 사무국장은 “어느 때보다 풍성한 혜택으로 일본이나 홍콩으로 향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을 한국으로 돌리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석상’처럼 온 몸 굳는 희귀질환 여성의 희망가

    ‘석상’처럼 온 몸 굳는 희귀질환 여성의 희망가

    신체의 관절과 힘줄 등이 뼈로 변화하는 희소난치병에 걸렸지만 “언제나 긍정적으로 살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미국 여성의 이야기가 귀감이 되고 있다. 영국 일간 데일리 미러는 10일(현지시간) 100만 명 당 0.6명꼴로 발생하는 희소한 질병인 ‘진행성 골화성 섬유이형성증’(fibrodysplasia ossificans progressive, 이하 FOP)을 앓고 있는 23세 여성 휘트니 웰든의 사연을 소개했다.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는 휘트니 웰든은 스포츠를 사랑하는 활동적인 소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상 증상이 처음 발현한 것은 여덟 살때였다. 당시 휘트니는 가족들과 함께 스키 여행을 떠나기 직전, 뒷목에 가벼운 부상을 당했다.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가족은 여행을 강행했다. 그러나 스키장에 도착해 슬로프를 내려오던 휘트니는 곧 등에 심각한 통증을 느꼈다. 이에 그녀는 부모와 함께 즉시 병원을 찾았고 거기서 FOP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진단을 받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워낙에 희귀한 병이기 때문에 다른 병으로 오인될 확률이 높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녀의 인대와 힘줄에서는 뼈가 자라기 시작했다. 병은 점차 악화돼 19살에는 팔을 가슴 높이 위로 들 수 없게 됐다. 2011년에는 미국의 명문대인 조지타운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생활에 여러 어려움이 많았다. 이 시기쯤 됐을 때 그녀의 팔 움직임은 더욱 제약됐고 쉽게 걸을 수 없었다. 복지사의 도움 없이는 옷을 갈아입거나 몸을 씻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녀는 “다른 대학생들이 하는 것을 모두 누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다. 현재 웰든은 팔과 다리를 거의 움직이지 못하며 머리는 아예 고정된 상태지만 여전히 밝게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나는 지금도 친구들과 함께 놀러 다니고 술도 마신다. 다치면 환부에서 증상이 빨리 진행되기 때문에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현재로선 치료수단이 없는 이 질병의 진행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기대수명 또한 예측할 수 없다. 알려진 FOP 환자 중 가장 오래 산 미국인 해리 이스틀랙은 1973년 39세의 나이로 입술을 제외한 전신이 굳은 채 폐렴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의학 발전의 힘을 믿고 있다고 말한다. 현재 FOP에 의한 뼈 형성을 막기 위한 임상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녀 자신도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임상 치료에 동참하고 있다. 그녀는 “나는 언젠가 내가 석상처럼 굳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되도록 떠올리지 않는다”며 “그러나 의학 발전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때까지는 그저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미러 캡처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北 목함지뢰 도발, 과연 이번이 처음일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北 목함지뢰 도발, 과연 이번이 처음일까

    지난 4일 비무장지대(DMZ)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 사건이 사실상 북한의 의도적인 도발로 밝혀지면서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저도 과거 군 복무 당시 이번 사건이 벌어진 지역 인근에서 수색, 매복작전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저절로 주먹이 쥐어질 정도로 큰 아픔과 분노를 느꼈는데요. 의도적인 도발이라면 과연 북한이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또 우리가 이번 사건을 통해 분명히 짚어봐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우선 2010년으로 시간을 되돌려보겠습니다. 2010년 7월 31일. 인천 강화군 주문도에서 낚시를 하던 주민이 나무로 만든 ‘목함지뢰’ 1발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목함지뢰는 무게 420g, 길이 22cm, 높이 4.5cm, 폭 9cm로 상자 안에는 TNT 220g의 폭약과 기폭장치가 들어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금속탐지기로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경찰과 군이 인근 지역을 수색해보니 볼음도, 아차도 해안에서도 목함지뢰가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무려 11발이었는데요. 6개는 실제로 폭발물이 들어있어 인위적으로 폭발시켜 해체했습니다. 목함지뢰는 북한이 주로 사용하는 지뢰였지만 우리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진 것은 당시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실제 폭발 사고까지 일어났습니다. ●100발이 넘는 목함지뢰가 떠내려온 까닭은 이날 오후 11시 20분 경기 연천군 백학면 전동리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안에서 목함지뢰 1발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요. 주민 한모(48)씨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김모(24)씨는 얼굴에 화상을 입고 팔에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들은 민통선 안 임진강으로 가서 낚시를 즐기다 갈대밭에서 목함지뢰를 발견했습니다. 한씨가 폭발물을 들고 나왔고, 김씨는 5~6m 뒤따라 갔는데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지뢰가 폭발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북한이 매설한 목함지뢰가 여름철 호우 때문에 남쪽으로 떠밀려 내려온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북한의 의도적인 공격이라는 분석은 없었습니다. 군경은 좀 더 세밀하게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8월 1일 강화도 인근에서 2발, 경기 연천군 민통선 안 임진강 유역에서 17발이 추가로 발견됐습니다. 1일까지 36발, 2일에는 66발로 지뢰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은 북측에 전화통지문을 통해 재발방지를 촉구했습니다. 1~2개가 발견된 사례는 있었지만 수십개의 지뢰가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습니다. 합동참모본부는 “북한이 의도적으로 지뢰를 방출했을 가능성은 낮다”며 국민들을 거듭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상당수 지뢰는 안전장치가 없었고, 굴러다니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어 국민들의 불안감은 여전했습니다. 한편에선 피서 절정기에 서해에서 불안감을 조성해서는 안된다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북한의 고의냐, 수해 때문이냐 갈팡질팡하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군 복무 경험이 있는 일부 탈북자들이 먼저 북한이 의도적으로 목함지뢰를 흘려보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놨습니다. 그 해 3월 26일 천안함 피격사건, 5월 24일 남북교역을 전면 금지한 우리 정부의 대북제재 조치로 남북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탈북자들은 특히 5~7년이면 외관이 썩어 부식되는 목함지뢰 가운데 상당수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 안전장치가 없는 지뢰가 많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북한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1990년대 이후 북한이 목함지뢰를 대량으로 매설한 사례가 드물다고 주장했죠. ●목함지뢰 발견 뒤 3개월 만에 연평도 포격 사건 뿐만 아니라 탄약고 붕괴로 인한 유실로 본다고 하더라도 다른 탄약이나 장비는 발견되지 않고 엄청난 양의 목함지뢰만 목격돼 의문이 증폭됐습니다.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10일 동안 발견된 지뢰는 110발을 넘어섰습니다. 그 와중에 북한은 해안포 110여발을 서해상에 발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대응 태세를 떠보려는 의도가 분명했지만 우리 군은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11일이 돼서야 정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 의도적 유출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정부 당국자는 언론에 “북한의 수해가 한두 번 일어난 것도 아닌데 유독 올해만 목함지뢰가 떠내려온 것에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군과 정보당국은 목함지뢰가 북한의 도발 징후라는 명확한 물증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고, 목함지뢰는 8월 말까지 176발이 발견됐습니다. 10월에는 강원도에서도 목함지뢰가 나왔습니다. 발견되지 않은 지뢰까지 합하면 300발 이상이 남쪽으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군은 북한의 의도나 도발 여부를 끝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해병대원 2명과 주민 2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26명이나 됐습니다. 포격에 많은 가옥이 불타고 파괴됐으며, 주민 대부분이 섬을 떠나 육지로 대피했습니다. 저도 사건 직후 연평도에서 현장 취재를 했고, 수많은 정보를 접했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목함지뢰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뚜렷한 도발 징후로 봐야했지만 목함지뢰는 곧 잊혀진 사건이 됐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난 뒤 드러난 이상한 점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전방지역에서는 꾸준히 목함지뢰가 발견됐습니다. 그렇지만 해마다 발견된 양은 20여발에 불과했죠. 2010년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매년 물난리를 겪었지만, 더 이상 목함지뢰가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사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의도적 도발이 아니라고, 우연이라고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누구도 사건의 상관관계를 면밀하게 분석하지 못했고, 의도적 도발 여부를 규명하기도 전에 연평도 포격사건이 터져 묻혀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도적 도발이라는 점이 거의 분명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강한 송진 냄새를 풍기는 새 지뢰가 우리 측 DMZ 전방 철책 출입구 바로 아래에 묻혀있었다는 겁니다. 2010년과 마찬가지로 북한군이 지뢰를 매설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포착하진 못했습니다. 묘하게 시점도 닮아있습니다. ●도발 강도 높이는 北…대비태세 점검이 시급하다 북한은 강도를 조절했을 뿐 매번 의도적으로 도발해왔습니다. 정치적인 계산이 분명했고, 대북제재 등의 경제적 타격을 무릅쓰고 거듭 도발을 강행했습니다. 2010년 이미 노쇠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들 김정은에게 정권을 물려주기 위해 치밀한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서른도 되지 않은 어린 아들에게 세습 기반을 닦아줘야 하는데, 그는 민가와 우리 군 진지 포격이라는 극악의 수를 썼습니다. 그리곤 아들이 내부적으로 군부에 휘둘리지 않도록 ‘포격술의 대가’라는 명성을 덧씌웠죠. 그 대가로 생길 민간인 희생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김정은은 그런 방식의 세습교육을 받은 이입니다. 이는 이번 목함지뢰 사건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이희호 여사의 면담은 불발됐습니다. 아니, 북한은 애초에 면담을 진행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정부의 대북 메시지도 무시했습니다. 대신 우리 병사가 드나드는 철책문 바로 아래에 목함지뢰를 놓아두는 도발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의 도발 징후는 2010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뚜렷했습니다. DMZ에서 지뢰를 추가로 매설하는 모습이 포착됐지만 군은 그다지 주의깊게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북한군의 탈북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합참의 한 고위 관계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장에서 지뢰나 부비트랩, 매복조 등에 대비해 필요한 조치를 더 했어야 했다. 현장 지휘관의 전술조치에 과오가 있었다.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군은 11년 만에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는 확성기를 이용한 ‘대북 심리전 방송’ 재개를 결정했습니다. 지뢰 매설 모습을 실제로 포착한 것은 아니어서 도발 원점이 명확하지 않고, 마땅히 응징할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을 보고 “대북방송이 무슨 타격이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강력한 응징이냐, 아니냐로 논쟁하는 것보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들여다봐야 할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2010년의 사건들을 교훈삼아 서둘러 보완해야 할 부분은 우리 군의 대북 감시태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군의 특이동향을 미리 포착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뼈저리게 여겨야 합니다. 2010년에도 국정원과 군 정보당국은 이미 8월에 감청을 통해 서해 5도에 대한 공격계획을 확인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공격이 아닌 평상적인 훈련이나 위협 정도로만 판단했습니다. 북한은 10월 노동당 창건일을 앞두고 군사적 긴장감을 크게 높이려 하고 있습니다. 목함지뢰 매설로 이달 실시하는 한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을 앞두고 분명한 도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김정은은 경제 위기와 외교적 고립을 해소할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숙청을 통한 공포정치는 한계가 있겠죠. 지난달 극심한 가뭄으로 쌀 배급량이 40%나 줄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북한의 올해 쌀 생산량은 230만t으로 지난해보다 12% 감소할 것”으로 예측하는 등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일본과 접촉하는 동시에 우리와는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습니다.과거에도 그랬듯이 북한은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긴장 수위를 높이는 전형적인 방식을 택했습니다. 도발 강도를 높일 가능성에 대비해야 합니다. 따라서 군은 DMZ 등 전방지역의 대비태세를 면밀하게 점검하고 북한의 도발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 훈련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지 다시 한번 따져봐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을 기회로 삼아 반드시 개선해야 할 허점은 없는 지 세심하게 되짚어보길 바랍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노동개혁은 일자리다] 노사정위 핵심 쟁점 해법은

    [노동개혁은 일자리다] 노사정위 핵심 쟁점 해법은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의 목표는 청년 고용 절벽 해소다. 임금피크제 도입을 바탕으로 한 임금체계 개편과 해고 요건 완화 등 노동시장 유연성을 강화해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줄이고 청년 일자리를 확대하겠다는 복안이다. 하지만 임금피크제와 이를 위한 취업규칙 변경, 해고 요건 완화는 지난 4월 노사정 대타협이 결렬된 이유이기도 하다. 노사정 논의 초안에 따르면 노사정은 통상임금, 실업급여 확대 등의 사회안전망 강화, 중소기업 일자리 개선, 비정규직 차별 시정, 고소득 임직원 임금 인상 자제 등 많은 방안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았다. 하지만 협상이 결렬되면서 초안은 무용지물이 됐다. 지난 4월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은 사안을 제외하면 결국 해고 요건 완화와 취업규칙 변경이 여전히 최대 쟁점으로 남아 있다. 취업규칙 변경은 임금피크제 도입과 직결돼 있다. 현행법에 따르면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해서는 취업규칙을 변경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해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인정될 경우’라는 전제를 달고 노조 동의 없이 취업규칙을 변경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노동계는 임금피크제 도입은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고, 이를 위한 취업규칙 변경에 반대하고 있다. 취업규칙 변경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청년 고용 창출과 무관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또 사용자에 의해 취업규칙이 변경되면 근로조건상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노사정 대타협 당시 공익위원들은 “경영 환경이 변화하는 경우에도 근로조건 변경이 어렵지만 사용자 권한만을 내세운 일방적인 취업규칙 변경으로 근로조건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며 “실질적인 효과는 노사 단체협약이 없는 중소기업에 집중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취업규칙 변경 가이드라인 제정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해도 청년 고용이 해결될 수 있을지를 놓고도 의견이 엇갈린다. 정부는 정년 연장으로 기업이 앞으로 5년간 115조원의 인건비를 추가로 부담하게 돼 청년 채용을 늘리기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기업의 고용 규모 결정은 전체 인건비보다는 경기에 더 큰 영향을 받는 데다 정부의 노동 개혁 방안에는 임금피크제로 아낀 재원을 신규 채용에 쓰도록 강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다. 노사정 대타협 당시 공익위원들은 “임금피크제와 취업규칙 변경을 강제적으로 도입하면 노사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노사 간 자율 조정과 협약을 통해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해고 요건 완화는 노동계가 ‘사용자에 의한 쉬운 해고를 조장한다’며 절대 수용 불가 입장을 밝히고 있는 사안이다. 정부·경영계는 대기업 정규직 과보호론을 기반으로 “좋은 일자리에 취업하면 일을 잘하든 못하든 고용이 보장되는 노동시장 경직성으로 인해 기업이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노사정 대타협 당시 공익위원들은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을 확대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쉬운 해고 방지 우려를 불식시킬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노사의 의견 차이가 큰 데다 파급효과 등을 고려해 오남용 방지를 위한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입법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롯데월드, ‘툼 오브 호러’ 업그레이드

    롯데월드, ‘툼 오브 호러’ 업그레이드

    롯데월드 어드벤처가 여름방학을 맞아 공포체험시설 ‘툼 오브 호러’를 업그레이드했다. 전체 7개 코스 중 ‘강심장 코스’와 ‘약심장 코스’으로 나뉜 ‘죽음의 갈림길’이 신설됐다. ‘강심장 코스’의 경우 거꾸로 매달린 시체들이 득실거리는 기나긴 복도를 지나야 한다. 체험 초반 공포를 느끼는 순간을 사진으로 촬영해 현장에서 바로 인화하거나 핸드폰으로 전송해 추억으로 간직할 수도 있다. 자유이용권으로 입장했어도 별도 입장료 3000원을 내야 한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포착된 슈퍼태풍 ‘사우델로르’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포착된 슈퍼태풍 ‘사우델로르’

    올해 생긴 태풍 중 가장 강력한 제13호 태풍 ‘사우델로르’의 모습이 우주인의 눈에도 포착됐다. 현재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체류 중인 일본인 우주비행사 유이 기미야는 지난 4일 트위터에 "강력한 태풍이 대만 쪽으로 이동 중으로 만반의 준비를 바란다" 며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을 보면 우주 위에서의 태풍은 한마디로 아름답고 경이롭다. 그러나 그 아래 태풍의 영향권 지역은 그야말로 지옥같은 비바람이 몰아치며 큰 재난을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 동그랗게 뻥 뚫린듯 보이는 구멍이 바로 태풍의 눈. 현재 서태평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태풍 사우델로르는 7일 대만을 거쳐 8일 중국 대륙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돼 한반도로 올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관측된다. 또한 미국 해양대기청(NOAA) 역시 지난 3일과 4일 위성이 촬영한 사우델로르의 모습을 공개했다. 순간 최대풍속이 시속 354㎞에 달하는 사우델로르는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JTWC)의 태풍 최고 등급인 5등급에 해당하는 ‘슈퍼태풍’으로 올해들어 가장 강력했던 사이클론 ‘팸’보다 위력이 더 센 것으로 평가된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14일부터 쇼핑관광축제 ‘코리아그랜드세일’

    14일부터 쇼핑관광축제 ‘코리아그랜드세일’

    메르스로 인해 위축된 방한 관광수요를 조기에 회복하고 관광업계를 비롯한 내수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코리아그랜드세일’(Korea Grand Sale)이 14일부터 10월 31일까지 펼쳐진다. 특히 전체업체가 참여하는 21일 본 행사에 앞서 14일부터 일주일간 프리 코리아그랜드세일(Pre-Korea Grand Sale) 형태로 항공, 숙박, 쇼핑 등 주요 참여 업체의 파격적인 혜택을 미리 선보일 예정이다. (재)한국방문위원회(위원장 박삼구)는 겨울철 방한 비수기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개최해오던 코리아그랜드세일을 침체된 관광산업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시기를 앞당겨 개최한다.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해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보건복지부, 관세청 등 관련부처와 한국관광공사, 한국공항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의 유관기관 및 단체, 그리고 관광업계의 적극적인 참여로 민관협력을 통한 시너지 효과가 기대되고 있다. 백화점, 면세점, 항공, 호텔, 공연, 교통 및 테마파크 등 다양한 업종에서 222개 업체, 2만 519개 업소가 참여해 짧은 높은 참여율을 보이고 있다. 제주항공이 전 노선 일부 좌석에 70% 할인을, 에버랜드가 자유이용권을 50% 할인하고 롯데면세점은 브랜드별로 최대 80%까지 할인한다. 이비스 앰배서더 명동의 경우 주니어스위트룸을 판매가 기준으로 1박 시 추가 1박을 무료로 선착순 제공하며, 올리브영은 외국인 인기품목에 최대 50% 할인을 실시한다. 외국인관광객이 선호하는 방문지인 N서울타워도 코리아그랜드세일 쿠폰을 제시하면 현장에서 40%의 할인을 제공한다. ‘오리지널 드로잉쇼’를 비롯한 넌버벌 인기 공연도 50% 할인된 가격을 제공, 외국인들이 쇼핑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경험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특히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마다 할인된 이용료로 고궁, 박물관 등 다양한 문화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문화가 있는 날’을 적극 알려 보다 많은 외국인이 한국 방문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전통시장의 인기 메뉴와 찾아가는 법 등을 소개해 한국인과의 소통 및 추억을 통해 다시 찾고 싶은 대한민국을 만들어갈 예정이다.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웰컴이벤트는 14일 광화문광장과 인천공항, 김포공항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국제공항에서 일제히 개최된다. 아울러 ‘마법같은 쇼핑관광축제’의 콘셉트에 맞춰 매직박스 등 다양한 경품 이벤트를 선보인다. 한국방문위원회의 한경아 사무국장은 “이번 코리아그랜드세일은 위기를 벗어나 관광업계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도전”이라며 “행사기간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쇼핑은 물론 관광, 한류 등을 골고루 체험하고 축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포토] 유이, 생동감 넘치는 스포티룩 선보여

    [포토] 유이, 생동감 넘치는 스포티룩 선보여

    격주간 패션 매거진 <그라치아>가 유이 화보를 공개했다. 스포츠 브랜드 푸마와 함께한 이번 촬영에서 유이는 애슬래저 룩을 쿨하게 표현했다. 생동감 넘치는 유이의 스포티 룩 화보는 8월 5일 발행되는 <그라치아> 8월 2호 (통권 제 60호)에서 만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대통령의 스캔들 정책 결정에 영향 끼쳤다

    대통령의 스캔들 정책 결정에 영향 끼쳤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대통령/래리 플린트·데이비드 아이젠바흐 지음/안병억 옮김/메디치/432쪽/1만 8500원 역사가들은 사적인 스캔들 들추기를 꺼려 한다. 정사(正史)의 사료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흔히 영웅담과 신화는 ‘허구’라 불린다. 그러나 역사 속 인물들은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켰고 그 파장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기 일쑤였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대통령’은 그 신화와 진실의 간극을 파고들어 흥미롭다. 저자는 성인잡지 ‘허슬러’의 설립자이자 발행인인 래리 플린트와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정치사를 강의하는 데이비드 아이젠바흐 교수다. 그들이 미국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의 사생활을 들춰냈다. 건국 초기부터 빌 클린턴까지 훑어 미국사의 민낯을 보여 준다. 책의 특징은 숨은 스캔들 공개에 그치지 않는 데 있다. 두 저자가 강조하는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된다. “방탕함은 자유이다. 말릴 수도 없다. 하지만 그 행각이 현실의 중요한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을 제어할 수는 있다.” 책의 큰 흐름은 미국사를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정치인들의 사생활이 정책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 주는 식이다. 신문 기사며 각종 사료를 동원해 풀어낸 상관관계가 생생하다. 대표적인 사례는 빌 클린턴 대통령-르윈스키 스캔들과 9·11 테러의 연관성이다. 클린턴은 1998년 12월 알카에다가 항공기를 납치해 테러를 벌일 계획을 갖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 스캔들에 휘말려 있을 때였다. 그해 8월 알카에다는 아프리카의 미 대사관 두 곳에 폭탄을 던지면서 테러 강도를 높이고 있었다. 클린턴은 정보 당국에 오사마 빈라덴 사살과 테러기지 공격을 주문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당시 참모들은 대통령이 스캔들에 쏠린 관심을 분산하기 위해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며 군 통수권자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 부인에 얽힌 이야기도 충격적이다.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여러 비서와의 성관계와 밀애로 숱한 염문을 뿌렸다. 이에 충격받은 대통령 부인은 동성애자들과 어울리며 정체성을 찾았고 여성·인권운동의 기수로 변신했다. 대통령 부인은 루스벨트가 백악관에 입성한 뒤 남편의 뉴딜 정책을 비롯한 정책의 대변과 홍보에 나서 결국 대공황과 2차대전의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위엄 있고 점잖았다’고 여겨지는 건국 초기의 위인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마흔둘의 나이에 여러 언론사를 거느린 미국 최초의 언론재벌이 된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유분방한 카사노바로 명성을 떨쳤다. 독립전쟁 초기에 영국군과 미국 반란군의 규모는 두 배나 차이가 났다. 프랑스의 지원이 필요했던 대륙회의(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논의한 식민지 대표자 모임)는 감수성, 특히 성 규범에 개방적인 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프랑스 주재 미국대사로 프랭클린을 선발했다. 프랭클린은 특유의 카사노바 기질을 발휘해 미국 지지 바람을 일으켰고 루이 16세는 워싱턴 장군의 오합지졸을 지원하려 육해군을 파병했다. 루이 16세가 미국 독립전쟁 지원에 지출한 13억 리브르 때문에 프랑스 재정은 파산했다. 책에서는 이것 말고도 다양한 가설이 역사적 사실과 자료들에 얹혀 풀어진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정부(情夫)가 베르사유조약과 국제연맹·제2차 세계대전에 미친 영향,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동성 비밀 연애와 노예제도 존속의 관련성, 매카시즘으로 잘 알려진 조지프 매카시의 몰락과 동성애 사건, 최장수 FBI 국장을 지낸 후버의 애정 행각과 직무 유기…. 책에서 주목할 대목은 스캔들을 이용하는 세력들이다. 저자들은 정치인의 합리적 정책 결정을 막는 건 그 사생활이 아니라 흠집 내고 학대재생산해 유권자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또 다른 정치인과 언론이라고 지적한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과 사르코지 대통령,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 등 지도자의 섹스 스캔들을 대하는 유럽인의 경우와 미국을 비교한다. 성 스캔들에 관심을 덜 가지면 정치 전반을 좀 더 성숙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책을 읽는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뉠 것 같다. 한쪽은 스캔들을 따라잡는 재미의 탐닉이다. 번역자가 말했듯이 책은 침실과 성관계까지 까발려 외설적으로 비칠 수 있다. 다른 쪽은 그 스캔들을 어떻게 사회의 긍정적인 면에서 해석할지를 생각하는 부류다. 결국 무엇을 얻을지는 독자의 몫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아스널의 영입 타깃 ‘월드클래스 공격수5’는 누구?

    아스널의 영입 타깃 ‘월드클래스 공격수5’는 누구?

    최근 페컴 해리스아스널 비상임이사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아스널은 이번 이적 시장에서 어떤 선수도 영입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해 크게 화제가 되고 있다. 과연 이번 여름 이적 시장에서 해리스 이사의 말처럼 아르센 벵거 감독이 새로운 구단 최고 이적료(메수트 외질, 이적료 4,250만 파운드)를 갱신하며 월드 클래스의 공격수를 데려올 수 있을까? 벵거 감독의 잠재적인 영입 타깃이 될 수 있는 5명의 공격수를 살펴보도록 하자 카림 벤제마(27, 레알 마드리드) 최근 벤제마의 에이전트는 스카이 스포츠와 인터뷰를 통해 “벤제마는 1,000% 레알 마드리드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스널과의 이적설은 이적 시장이 종료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2013년 여름 외질의 극적인 아스널 이적을 지켜보면 때론 이적 상황이 얼마나 급격하게 변하는지 설명해준다. 이적설을 제외하고 우선 벤제마는 아스널에 매우 필요한 공격수다. 그는 5시즌 연속으로 20골 이상을 기록하는 이미 검증된 선수로 연계 플레이에도 능해 프랑스 국가대표 동료인 올리비에 지루와도 호흡을 맞추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벤제마의 영입이 가능하다면 오랫동안 아스널의 공격진을 책임질 뛰어난 자원이 될 것이다. 에딘손 카바니(28, PSG) 우루과이 출신의 공격수 에딘손 카바니는 2013년 나폴리에서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한 이래 아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지 못하고 있지만, 지난 5시즌 동안 리그에서만 무려 112골을 기록했다. 물론 벵거 감독도 그의 플레이 스타일을 사랑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도 있다. 카바니는 지난 6월 인터뷰에서 "축구는 내 열정이다. 미래에 내가 어디서 뛰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모른다" 며 “어디에서 축구를 하든지 나는 뛸 준비가 돼 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과연 이번에는 벵거 감독의 카바니를 향한 애정이 아스널에서 실현될지 지켜보자. 곤살로 이과인(27, 나폴리)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격수 곤살로 이과인을 아스널이 영입하기 위해선 커다란 걸림돌을 처리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6,680만 파운드(1,213억 원) 이상의 이적료를 내야만 하는 것이다. 나폴리 구단주 아우렐리오 데 라우렌티스는 이과인의 바이아웃조항에 대해 “이런 미친 금액을 제시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검토해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과인은 나폴리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과인은 유럽 리그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뽑힌다. 2013년 세리에 A 나폴리로 떠난 이과인은 2시즌 간 총 102경기 출전 53골을 기록했다. 그는 지난 시즌 팀 전체 득점의 25%를 책임졌고 부진에 허덕이는 팀을 거의 혼자 이끌며 리그 5위에 올려놨다. 물론 바이아웃조항이 상당히 큰 변수로 작용하나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볼 좋은 옵션이다. 알렉상드르 라카제트(24, 리옹) 또 다른 프랑스 출신의 공격수 라카제트. 그는 지난 시즌 38경기에 출전해 총 31골을 넣었다. 그의 폭발적인 득점력은 유럽 빅클럽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아직 24살의 젊은 라카제트는 뛰어난 골 마무리 능력, 빠른 스피드와 능숙한 발놀림을 보게 되면 챔피언스리그같이 큰 무대 경험이 없음에도 빅클럽의 구매력을 쉽게 자극한다. 최근 장미셸 올라스 리옹 회장은 그를 잡아두기 위해 구단 최고의 대우와 연봉을 제시했다. 리옹은 라카제트가 남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현재 아스널과 강하게 링크가 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도 그의 미래는 알 수 없다. 2013-14시즌부터 폭발한 그의 잠재력(92경기 출전 53득점)을 고려하면 분명 그의 영입은 아스널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26, 바이에른 뮌헨) 유럽 변방 폴란드 출신의 레반도프스키 역시 이미 검증된 월드 클래스의 유럽 공격수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으며 라이벌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레반도프스키는 지난 시즌 49경기 출전 총 25골을 넣었다. 리버풀과 바이에른 뮌헨에서 오랫동안 활약한 디트마르 하만은 지난 2월 스카이 스포츠에 출연해 “아스널에 레반도프스키는 안성맞춤”이라고 하며 “지난해 그는 자유이적으로 바이언에 입성했지만, 그를 다시 데려올 수 있다면 나는 어떠한 돈도 내겠다. 나는 그가 세계 최고의 9번 공격수라 생각한다”라는 말을 했다. 하만의 말처럼 레반도프스키는 세계 최고의 9번 공격수다. 그는 넓은 활동량과 구장 전체를 누비는 활발한 움직임, 뛰어난 포스트 플레이, 2선 선수들과 패스를 통한 연계 플레이와 뛰어난 골 결정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볼 트래핑이 뛰어나기 때문에 아스널같이 패스 플레이가 많은 팀에겐 레반도프스키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hotmail.com
  • 이단이란 이름의 증오… 관용이란 시대의 부름… 너의 신을 許하노라

    이단이란 이름의 증오… 관용이란 시대의 부름… 너의 신을 許하노라

    유럽은 어떻게 관용사회가 되었나/벤자민 카플란 지음/김응종 옮김/푸른역사/592면/3만 5000원 1553년 10월 27일 스위스 제네바 샹펠 광장에서 스페인 의사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이단이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사촌들 사이 논쟁에서 촉발됐다. 가톨릭 신자인 앙투안 아르네가 개신교로 개종한 사촌 기욤 트리를 설득하면서 프로테스탄티즘이 거짓이라고 주장하자 트리는 아르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지는 세르베투스를 고발한 것이다. 16세기 가장 악명 높고 많은 논란을 낳은 이 사건은 종교개혁 이후 제네바에서 처음 이뤄진 이단 처형이었으며 전 유럽에 종교적 관용이라는 주제에 대한 최초의 논쟁을 점화시켰다. ‘유럽은 어떻게 관용사회가 되었나’는 종교개혁과 프랑스 혁명 사이에 유럽에서 전개된 종교적 관용과 갈등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는 그 시대의 가장 절박한 문제였다. 네덜란드사(史) 전문가인 저자는 근대 초 유럽의 그리스도교 사회 안에서 종교적 다양성이 어떻게 조정됐는지, 유럽인들이 도시와 마을에서 종교적 차이에 직면해 어떻게 싸웠는지, 경쟁적인 종파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공존했는지 혹은 실패했는지, 그들과 함께 살던 유대인, 무슬림, 그리스정교 그리스도교인들을 어떻게 다뤘는지를 다룬다. 서양에서 근대적 의미의 관용의 역사는 종교 갈등에서 비롯돼 개인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저자에 따르면 중세에는 ‘관용’이 없었다. 가톨릭 교회는 이단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루터파, 칼뱅파 등의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은 중세의 이단과 달리 강력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로서는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62년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날 무렵 ‘관용’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그 의미는 나의 종교와 다른 종교는 옳지 않은 종교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지만 사회의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용인한다는 정도였다. 책은 관용을 사상이 아니라 그 실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통적인 관용의 역사에서는 카스틸리옹, 존 로크, 볼테르같이 관용을 주장한 대범한 지식인들이나 잉글랜드의 올리버 크롬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황제, 합스부르크의 황제 요제프 2세 같은 계몽 군주들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저자는 종교적인 혼합 공동체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의 문제로 접근한다. 우선 종교개혁 이후 시대의 그리스도 신앙의 종파적 성격이 갈등을 정당화했고, 종교와 정치가 뒤얽히면서 불관용을 부채질한 측면을 지적한다. 이어 일부 혼합 공동체들이 갈등의 위협을 어떻게 이겨 냈는지를 보여 준다. 소수의 공동체들은 관용 사상과 무관하게 나름대로의 생존을 위해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하며 종교적 통일이라는 외양을 유지했다. 공적으로는 하나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공동의 공간으로부터 다른 종교도들의 예배의식을 공동의 공간으로부터 몰아내는 ‘아우슬라우프’(걸어나가기), ‘비밀교회’ 용인 등의 방식으로 공동체들 사이의 종교적 다양성을 받아들였다. 제한적 관용의 형태인 셈이다. 저자는 상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갔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 준다. 유럽의 어떤 지역에서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상호 격리 상태를 유지하면서 평화적인 관계를 지켰고, 통혼과 개종을 금기시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는 산업지대의 변두리 섬에 게토를 만들어 유대인들이 모여 살도록 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도시에 들어와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소액 대부업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수적이었고 도시의 군사시설을 유지하는 데 그들의 세금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찾아낸 타협점이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다른 종교를 용인하는 것은 내가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유이자 권리가 된다. 유럽의 각 나라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종교의 자유가 더이상 시혜나 관용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상이한 종교집단들이 향유한 특권들은 혁명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를 맞는다. ‘관용’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존하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슬프게도 전 세계적으로 종교 갈등은 10년 전이나 20년 전보다 더 만연된 것 같다”면서 “그때 사람들은 서로 죽이지 않기 위해 서로 사랑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적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씨줄날줄] 파이낸셜타임스 매각의 뒤안길/구본영 논설고문

    일선 기자로서 국제부에서 일할 때 가장 요긴한 매체가 파이낸셜타임스(FT)였다. 국제부 데스크 시절에도 이른 아침 살구 빛깔의 이 신문부터 습관처럼 펼쳐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계 유수의 통신을 비롯한 그 어느 매체에서보다 더 풍부한 국제 뉴스를 훨씬 일목요연하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88년 런던에서 창간한 FT는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과 함께 세계 경제신문의 양대 산맥이다. 말이 경제지이지 정치·사회·문화를 망라한 국제적 이슈에 대한 심층 보도로 성가를 높여 온 신문이었다. 그런 FT를 어제 일본의 미디어그룹 닛케이(日經)가 인수하기로 했단다. 그야말로 세계 미디어 업계의 지형을 뒤흔들 빅뱅이다. 127년 전통의 영국 권위지가 경영난을 겪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일본 기업에 팔린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은 파천황(破天荒)의 사태다. 이처럼 세계 미디어업계에서 보기 드문 빅딜이 이뤄진 배경이 뭘까. 닛케이가 8억 4400만 파운드(약 1조 5300억원)란 거금을 투자한 것보다 FT 측의 매각 동기가 더 궁금하다. FT가 흑자 매체란 점에서다. FT는 종이신문 시장뿐만 아니라 디지털화 흐름에도 잘 적응해 현재 인터넷 유료 독자가 50만명으로, 전체 독자의 70%선이다. 공짜 소비가 대세가 되다시피 한 온라인뉴스 시장에서 유료화에 성공한 유이(有二)한 매체가 WSJ와 FT란 평가를 받을 정도다. 물론 세계 경제인들이 안 보고는 못 배길 정도로 풍부한 프리미엄 경제 정보를 보유하고 있기에 가능했다. 사실 종이신문이든 온라인신문이든 광고가 가장 큰 수익 모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넷시대에 접어들어 인쇄 매체 산업은 날로 시들어 가지만, 대체재인 온라인 미디어 시장은 기대만큼 활짝 꽃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FT의 모기업인 피어슨은 이제 교육과 출판사업 쪽에 집중할 태세라고 한다. 피어슨은 근년에 북미와 신흥국의 교육 서비스 시장을 지속적으로 노크해 왔다. 그렇다면 아직 활자 매체에 로열티가 강한 독자가 있는 일본의 닛케이에 비해 피어슨 쪽이 미디어 산업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본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하긴 미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보멀은 “공연예술은 (제작 시간을 압축할 수 없기에) 시간이 갈수록 재정적 위기로 나아간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른바 ‘보멀의 법칙’이다. 미디어와 같은 문화 콘텐츠 분야는 공연과 같은 순수예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업적 시스템에 많이 의존하긴 한다. 하지만 다른 산업과 달리 무한 복제나 자동화를 통한 시간 절약이 어려운 기자들의 노동에 의존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논리의 비약인지 모르지만 FT의 소유권 이전을 보면서 미디어와 예술 등 공공재적 성격을 띤 문화산업에 대해선 최소한의 공적 부조가 불가피하다는 생각도 든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kr
위로